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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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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식분산투자로 위험 줄인다”

    ◎올 노벨상수상 미 마코위츠박사 강연 요지/「이익극대ㆍ손실최저」종목 섞어 투자를/「포트폴리오 이론」의 발전과정을 설명 증권투자의 「포트폴리오 선택이론」을 정립한 공로로 90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해리 마코위츠박사(미 뉴욕시립 바루크대)가 내한,12일 롯데호텔에서 포트폴리오 이론에 대한 특별강연을 가졌다. 국내 주식투자자 및 증권관계자 1천여명이 참석,성황을 이룬 이번 강연회에서 마코위츠박사는 포트폴리오 이론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면서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코위츠박사의 강연 요지를 옮긴다. 본인의 「포트폴리오 선택이론」은 대학학위 논문으로서 존 윌리엄스 박사의 「투자가치이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윌리엄스의 이론에 의하면 주식 가치는 앞으로 주어질 배당금에 근거하는데 이같은 기대배당금의 현재가가 곧 해당주식의 시세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을 그대로 따른다면 주식투자에서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요인은 배당기대치 단 하나뿐이며 배당이 높을 것으로 보이는 단 하나의 주식을 찾아 여기에 집중투자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학생시절부터 학계를 풍미하던 이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본인은 금융자산 전체의 투자이든 주식 투자에 한해서이든 기대치 뿐만 아니라 위험치까지 넣어 계산한 다음에 투자종류와 개별주식들을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포트폴리오 선택이론」이 나왔으며 이는 곧 같은 기대치 아래서는 가장 적은 위험률을 기록하는,또 주어진 위험률 내에서는 가장 높은 기대치가 나오도록 주식들을 엮어 짜 모아야 가장 효율적인 주식투자라는 이론이다. 「달걀을 한바구니에 담지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실제 투자자들은 수익률 극대화 욕구와 함께 분산투자로서 위험을 분산,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문제는 여러 다른 자산과 주식을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38년전에 처음 이론화된 포트폴리오 선택론은 효율적인 분산투자의 종목구성시 기본적으로 염두에 둘 사항으로서 개별주식들의 기대수익률,이들 각각의 불확실성(분산),해당주식들간의 상관계수 등 3가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같은 기본모델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수치가 계산되어야 했다. 즉 50개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작성할 때 필요한 추정통계치가 기대수익률 50개,분산 50개,그리고 50×49÷2에 달하는 상관계수 등 무려 8백25개나 되는 것이다. 이번에 본인과 함께 노벨상을 탄 윌리엄 샤프교수의 「유일요인」론에 의해 포트폴리오 선택론은 한단계 올라서게 됐다. 샤프의 이론은 복잡한 수식으로 표현되지만 개별 주식들의 시세는 결국 주식시장 단 하나의 요인에 묶인다는 학설이다. 포트폴리오 선택이론은 이후에도 많은 이론이 추가되었으나 「어떤 펀드매니저라도 시장을 당할 수 없다」는 말로 요약된다.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짜든 시장전체의 움직임에 그 수익률이 예속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가장 유능한 펀드매니저 및 투자자들은 시장을 얼마나 가깝게 모방하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이다. 샤프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본자산의 가격결정 모형을 끌어냈는데 모든 투자자들이 평균기대치­분산의 효율성이라는포트폴리오 선택론에 따라 투자행위를 한다면 전체 경제나 자본시장이 어떻게 되느냐를 따진 이론이다. 앞서 말한 기본사항의 통계치를 모두 똑같이 공유하고서 투자를 하게될 때를 가상한 것인데 결론은 「시장,혹은 시장 포트폴리오 그 자체가 가장 효율적인 포트폴리오이다」로 압축된다. 본인의 포트폴리오 선택론은 샤프 이후에도 모든 투자자들이 평균­분산의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가정을 배제한 옵션가격결정 모형론이나 주식과 무위험자산인 현금의 보유율을 조절하는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이론 등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런 이론들은 한층 복잡하고 세밀한 수학적 공식을 뜻하지만 본인의 포트폴리오 선택론에 뿌리를 둔 것이다. 과거 투자의사 결정 당시에 이용가능했던 자료를 모아 모의투자를 통해 검증한 결과에 따르면 분산투자에 중점을 둔 나의 이론이 실제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증권투자에는 위험과 수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수익은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데 투자에 따르는 위험과 수익의 정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산투자는 투자수익을 크게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위험을 대폭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이같은 상식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본인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말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즉 좋은 주식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포트폴리오를 선택하는 좋은 기법이 중요한 것이다. 투자자들은 개별주식보다는 포트폴리오에 투자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 무장봉기까지 노리는 세력(사설)

    무장봉기를 통해 이 땅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활약해온 방대한 조직이 안기부에 의해 적발되었다. 「남한사회주의 노동자연맹」,이른바 「사노맹」이다. 민주화로 가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많은 불법,불순세력을 보아 왔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불감증적 증세를 보이게까지 되었다. 더구나 정권안보용으로 조작되었다는 혐의를 면치 못할 사례까지 없지 않았으므로 「당국의 발표」를 의심없이 바라보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아왔다. 그러는 동안 반체제 세력에는 대단히 관용스럽고 공안당국에는 가혹한 시각을 체질화시키게까지 되었다. 그런 체제로 보아도 이번의 「사노맹」사건은 규모가 방대하고 조직의 뿌리가 깊음을 알게 한다. 국가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산업체에 침투하여 「혁명의 요새화」를 위한 근거지를 확보하였고,전국의 유수한 산업체 공장들에 혁명의 둥지를 틀어놓고 노동자라는 달걀을 혁명소조원으로 부화시켜왔다. 무장봉기를 위해 폭발물 개발도 하고 무기탈취계획도 세웠으며 특히 「혁명과정 수행도중」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 자살용 독극물까지 개발하도록 했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스스로 신봉하는 이념을 가질 수 있고,이념을 가진 이상 그 이념을 확산하고 이념조직의 세력에 보다 많은 동참자를 가담시키고 싶어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신봉하는 이념에 맞는 사회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며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붕괴시키려고 획책하는 일은 범죄행위다. 이런 위험세력이 존재하며 확장되는 일은 엄격하게 방지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방치해 왔다는 일이 충격스럽다. 또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정작 큰 충격은,이 환상적 혁명놀이에 전국적으로 1천6백여명이나 되는 거대한 조직원이 가담하여 활약해 왔다는 사실이다. 체제에 흡수되기를 거부하면서 밑으로부터의 사회혁명을 갈망하는 많은 재야정치 세력이 있으므로 「사노맹」도 그중의 하나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드러난 것에 의하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무장봉기를 목표로 삼아 계획했으며 정파를 달리하는 다른 재야세력을 약화 내지 제거하기 위해 조직원을 침투시키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아무려면 그들 한줌의 세력에 의해 그렇게 무너지거나 뒤집혀지겠는가.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환상을 버리지 못한 것은 그 증세가 깊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배후에 다른 커다란 세력이 있어서 「남한」을 교란하는 역할만이라도 끊임없이 하도록 지령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갖가지 혁명획책의 수단이나 표방하는 이념,논리와 용어까지도 학습받은 듯 활용하는 행적들로 보아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이런 세력이 이렇게도 많이 침투되어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운동권들이 직ㆍ간접으로 그들을 거드는 결과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순한 둥지를 틀려고 틈을 엿보는 세력에는 사회의 건강하고 건전한 체질이 근원적인 방어력을 지닌다는 점을 거듭 명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 일,자판기 사업 호황(세계의 사회면)

    ◎5백30만대 보급… 연 매출 4백억불/여성 속옷ㆍ보석ㆍ꽃 판매기까지 등장 일본의 자판기사업이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일본 전국에는 인구 23명당 1대꼴인 5백30만대의 자판기가 보급돼 있으며 연간 총매출액도 4백억달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수치는 지난 87년보다 22%가 증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자판기 보급이 늘고 있지만 오늘날 일본에선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들이 자판기를 통해 팔리고 있다. 그 비결은 일본의 뛰어난 전자기술이다. 현재 일본의 앞서가는 전자기술은 햄버거,꽃으로부터 보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이 자판기를 통해 판매될 수 있게끔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 자판기산업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편리함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자판기 가운데 가장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1년내내 냉온음료를 파는 음료서비스로 일본내 총자판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엔 꽃재배업자들도자판기를 설치,재미를 보고 있는데 지난해 등장한 꽃자판기는 현재까지 1백여대가 팔려나갔다. 이 자판기들은 꽃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섭씨 10도와 습도 80%를 기계적으로 유지해주고 있다. 이밖에 일본에는 쇠고기ㆍ달걀ㆍ우산ㆍ보석ㆍ아이스크림ㆍ기차표ㆍ전화카드ㆍ신문 등을 파는 자판기가 글자 그대로 곳곳에 설치돼 있다. 자판기산업이 호황을 누리게 된 또 다른 요인은 프라이버시 보호가 가능하다는 이점 때문이다. 도쿄의 한 대형 백화점은 지난 2월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여성 속옷을 파는 자판기를 설치,젊은 남성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 사회악과의 전쟁/승리하지 못하면 함께 멸한다(사설)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실의 병리가 공동체의 존폐를 위협할 만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인식아래 통치권을 걸고 사회기강을 바로 잡겠다는 각오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전쟁」을 공식 선포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현실은 아주 절박하다 대통령의 선언은 그래야 할 절박함이 우리 앞에 닥쳐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통치권의 후반기를 보내고 있는 정치지도자가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통치구조의 공동화의 부담을 감내하기도 쉽지 않은 터에 과감하게 「칼을 빼는」 모험을 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범죄와 폭력과 무질서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이같은 현실인식이 과장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한 대통령의 분석 또한 타당하다. 민주화 코스트로 통칭되는 지난 2,3년의 전환기적 상황을 이제는 매듭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호소도 소구력이 있는 말이다. 사회 안에서는 이미 냉철한 성찰의 움직임이 태동되었고 국민적 합의아래 공감대도 확산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회라는 생체는 어느 정도의 자생력이 있어서 위기가 극단에 이르면 생이지지한 현명함으로 자구노력을 보이게 된다. 우리에게서도 그런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점에 공권력을 주도하는 통치의 중심부가 각성의 「칼을 빼어들고」 생사를 건 전쟁을 선언했다는 것은 우선 반갑고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당한 진단과 적절한 처방을 전술전략삼아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신뢰부터 회복해야 이 「전쟁」이 소기한 전과를 어느 정도라도 거두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통치권에 부질없는 흠을 남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의 발밑이 무너져 나가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다. 이미 그런 현상은 상당히 가시화하고 있다. 우선 급선무는 불법과 무질서의 최대의 피해자인 국민을 구출해야 한다. 법대로 사는 사람이 탈법으로 잘 사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무질서하게 날뛰는 사람들이 저지른 과태료를 질서를 지키는 시민이 갚아주는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는 온당하고 순리적인 삶은 어리석은 짓이 되어 버린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고 근검하게 사는 것은 못난짓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욱 암담하다는 것을 예측시키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관계 법령이나 제도적 장치들을 추적하기 쉬운 봉급생활자나 근검한 소시민을 감시하는데만 단호하고 굵고 힘센 계층은 법의 그물코를 능히 찢고 빠져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른바 선진사회를 구축한 나라에서는 관공서를 상대로 뇌물이 통하고 대학입학이 「부정」으로 가능하거나 교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일이 항다반사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선진한 사회이므로 그런 일이 없어진 것인지 그런 일이 없으므로 선진한 것인지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선후를 가리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런 병리를 상존시킨 채 좋은 사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업화나 산업화사회가 경제적으로 다소 잘살게 해준다 하더라도 공해로 오염되고 환경이 파괴되면 질식해 버리듯이 우리의 삶이 물질적으로 다소 기름지고 호화스러워진다 하더라도 악이 선보다 승하고 도덕이 타락해서 품위없이 산다면 행복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후손이 살아갈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되어간다면 물질적 유산이 별 소용이 없다. 타락한 자녀가 마약이나 도박으로 선대의 유산을 파탄시키듯 그런 후손은 유산을 지탱하지도 못한다. 참답게 잘 사는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에 국가적 목표를 두고 총력을 기울이는 길 밖에 없다. 그 길은 쉽게 성과를 이루기도 어렵고 노력은 한없이 들여야 한다. 그것을 포기해서는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다. 무엇보다도 신뢰를 쌓는 일이 중요하다. 눈가림으로 구호나 내걸고 시민단체가 이룬 공을 차용하여 위기나 모면하려는 속셈이라면 누구도 속지 않는다. 공직자ㆍ정치지도자들의 피나는 자정 노력을 보지 않으면 국민은 절대로 신뢰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위한 동참을 사회 내부의 부조리로부터의 도전에 과감히 대결하기를 선포하는 정부의 의지에 시민도 동참해야 한다. 모든 성과는 「국민의 변화」로 만들어낼 수 있다. 민주화의 격렬한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는 조금 잘못된 체질이 배어버렸다.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을 마치 「게임」을 관전하듯 사시적 시각으로 즐기는 태도이다. 『어디 한번 잘해 보렴!』하고 비딱하게 냉소하는 것을 멋부리기 삼아서 흉내내는 듯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 있다. 근년에 이르러 우리에게 베어진 가장 좋지 않은 속성이 이것이다. 정부가 이번 「사회악과의 전쟁」에서 진다면 그 불행은 바로 우리 국민에게 돌아온다. 시한부로 고용된 공복일 뿐인 대통령이나 그밖의 공직자ㆍ정치지도자는 실패와 더불어 물러나면 그뿐이다. 그러나 패전으로 인한 채무는 우리가 갚아가야 한다. 이기적인 방법에서 다소 재화를 모은다고 해보았자 자식들이 빗나가고 가족끼리 불화하거나 황폐하게 타락한다면 그 집안은 결코 행복한 게 아니다. 우리는 흥청망청 쓸 만큼 부자나라가 된 것도 아니지만 설사 부자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일하지 않고 적절하게 아끼며 참을성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우리 몇배로 합리적이고 근검하며 무섭게 일하고 산다. 능력을 발휘하여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아끼며 어려움을 참는 기능만 있다면 어떤 세상에서도 온당한 삶을 살 수 있다. 법을 안지키고 질서를 파괴하고 책임질줄 모르는 사람은 악인에 속한다. 그런 사람이 옳게 인정받는 사회란 없다. 팔짱을 끼고 관망만 하면서 유리한 성과만을 차지하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이기행위는 노력의 성과에 동참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대통령의 「새질서 새생활실천」의 호소에 충실히 귀기울여 옳은 것에는 동참하고 잘못가는 것은 제동하여 이 전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짙은 안개속같은 어두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추석 물가안정 특별대책 강구/노대통령,내각에 지시

    ◎비축물자도 긴급 방출/매점매석 막아 가수요 봉쇄/UR등 대응 경제운용 전면 재점검/폭리 근절 정부 합동단속반 편성/경제장관회의 노태우 대통령은 26일 하오 추석을 앞두고 일부 일용생필품들에 가수요가 발생,전체 물가에 대한 상승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내각에 추석물가 특별대책을 강구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날 하오 5시30분 강영훈 국무총리 주재로 긴급경제장관회의를 소집,추석 물가대책을 논의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추석을 맞아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달걀 등 일부 생필품들의 가격이 불안정한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같은 현상들이 전반적 물가의 상승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정부는 일부 상인들의 매점매석에 대해서는 공정거래법 등 관계 법규를 엄격히 적용해 철저히 단속하고 모자라는 품목에 대해서는 정부의 비축물자를 총동원해서라도 물가를 진정시켜 국민들이 안심하고 추석을 지낼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김종인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9월25일 현재 소비자물가는 작년말 대비 9.2%가 올라 있어 추석을 계기로 일시적 앙등추세에 있는 물가에 대해 비상대책을 강구한다면 오는 연말까지는 정부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한자리수 물가가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수석은 연내 유가인상 문제에 대해 『국내 도입원유단가가 배럴당 25달러를 넘지 않는한 유가인상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페르시아만사태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유가변동 상황을 봐가며 적절히 신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페르시아만사태,우루과이라운드 등 국제경제여건이 급변하고 있는 것과 관련,앞으로의 경기둔화ㆍ물가상승압력ㆍ국제수지악화 등의 전망에 대비하여 경제운용 방향을 전면 재점검하라고 이승윤 부총리에게 긴급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세계각국이 고유가시대를 맞아 소비 및 산업구조를 더욱 더 석유절약형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비해 우리의 대응노력은 미흡한 것이 아닌가』고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같이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급변하는 국제경제환경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경제활동의 왜곡을 방지하고 국내 경제체질을 강화해 나갈 수 있는 적절한 대응방안을 가능한 이른 시일내에 마련하라』고 아울러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또 추곡수매 문제에 대해 쌀의 구조적 수급불균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쌀 수매가격을 계속 높게 유지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하고 『쌀 수매가격의 대폭 인상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지원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조경식 농림수산부장관에게 지시했다. 이날 물가관련 긴급경제장관회의는 추석 성수품의 매점매석 및 유통과정상 폭리를 막기 위해 관련부처 합동단속반을 긴급히 편성키로 했다. 이날 회의는 특히 페르시아만사태,중부지방의 수재 등이 겹쳐 일부 공산품과 농산물가격이 폭등하고 있는데 따라 추석을 계기로 연말까지 물가상승을 강력히 억제시키기 위해 유통폭리 등에 대해서는 세금으로 흡수키로 하는 등 강력한 물가안정대책을 펴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검소한 추석보내기운동의 일환으로 각종 소비자단체가 주관하는 건전소비결의대회 및 가두캠페인 등을 전개토록 하는 한편 기업인 단체의 주관으로 과도한 선물안보내기 운동과 백화점 등 사치풍조를 조장하기 쉬운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건전소비 자율캠페인을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 콜레스테롤 적은「오메가 돼지」나온다/식품개발연,사료용 특수원료개발

    ◎사료에 10% 섞어 돼지ㆍ닭 사육/성인병 막는 계란도 생산가능 콜레스테롤의 함량이 적어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는 돼지고기와 달걀의 생산이 가능케 됐다. 24일 한국식품개발연구원 영양생리연구실(실장 이남행박사)은 콜레스테롤 함량이 적고 당온에서 응고하지 않는 불포화지방산이 많아 각종 성인병을 방지할 수 있는 돼지고기와 달걀을 연구,이를 위한 돼지ㆍ닭사료용 원료 「코팅건조지방」을 개발했다. 이 사료용 원료는 4종의 동ㆍ식물성기름을 유화제와 보조제 등에 의해 분말로 만들어 내장용피복제로 코팅한 것으로 제조기술은 우리나라를 비롯,미국ㆍ영국ㆍ일본 등에 특허출원 중이다. 영양생리연구실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이 원료가 배합된 사료로 사육한 돼지고기의 경우 콜레스테롤이 1백g에 76㎎으로 일반돼지고기(90㎎)보다 16%정도 적고 불포화지방인 오메가 3지방산의 함유비율도 7%로 일반 돼지고기보다 7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사료로 사육한 닭의 달걀도 콜레스테롤이 3백79㎎으로 일반달걀보다 21%나 적고 오메가 3지방산의비율도 12.3%로 4배나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영양생리연구실은 이같이 저콜레스테롤ㆍ고오메가 3지방산의 돼지고기와 달걀을 오메가 돼지고기와 저콜레스테롤 달걀로 부르기로 했다. 이 사료용원료의 t당 생산비는 47만원으로 일반사료 생산비(26만원)보다 비싼 셈이나 사료를 배합할 때 이 원료를 10%이내 수준에서 섞기 때문에 돼지의 경우 t당 7천4백마리 이상을 사육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됐다.
  • 제자에 짓밟힌 총장의 「권위」/성종수 사회부 기자(현장)

    ◎졸업장 받으며 돌멩이ㆍ욕설이 웬말 『90년대는 여러분의 것… 』 신국주총장서리가 대학문을 나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졸업생들에게 인생의 교훈이 될 축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축사의 첫마디가 나가기 무섭게 재학생 2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으로 달걀을 던졌다. 이어 여기저기서 『재단총장ㆍ어용보직교수 물러나라』는 구호와 함께 달걀ㆍ쓰레기ㆍ돌멩이ㆍ유인물들이 단상으로 날아들었다. 졸업식이 거행되기전부터 식장인 체육관 안팎에 삼삼오오 모여 긴장감을 돋우던 1백여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30분전에 시작돼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졸업식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학부모들은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에 질려 식장밖으로 몸을 피했다. 나중에는 일부 졸업생들까지 난동에 가세하여 졸업식이 엉망이 되자 교수와 학부모 등 2백여명이 이들을 식장밖으로 밀쳐냈다. 이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교수나 학부모를 가릴 것 없이 마구 주먹을 내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다. 졸업식은 결국 당초예정됐던 일부 식순을 생략하고 끝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은 체육관을 빠져나온 신총장서리를 둘러싸고 연거푸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욕설을 퍼부었다. 총장의 「권위」는 물론 교수ㆍ학부모들의 위신의 제자와 자식들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었다. 『재단에서 뽑은 총장이 싫다면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지 하필이면 졸업식장에서 난동을 부리는가』 구호와 난동으로 얼룩진 졸업식장을 빠져나오면서 학부모들은 물론 뜻있는 졸업생이나 재학생들 스스로도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밖에는 마침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어 그들의 허탈감을 더 실감나게 했다. 23일에 있었던 동국대의 일그러진 졸업식 광경은 오늘 우리 대학의 안타까운 한 다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외언내언

    영국에 유학했던 한 동양인 대학교수가 20년 가까이 지난 뒤에 모교를 찾은 적이 있다. 모교를 찾았다기 보다 모교가 위치한 대학촌을 찾은 것이다. 그 대학촌의 한 고서점엘 들어갔다가 대단히 실망을 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그는 수필로 썼다. 고서점 문앞에 덩치가 큰 경비원이 서있고 서점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가 시키는대로 가방같은 보따리를 거기 맡겨야 했다. ◆책들을 너무 도둑 맞아서 안 그럴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주로 석ㆍ박사 논문을 쓰는 연구생들이 드나드는 유서깊은 고서점이어서 가난뱅이 책벌레들이 온종일씩 파묻혀 책을 보곤하던 고서점이다. 그 때문에 자신이 공부하던 시절에는 노인 점원이 꼬박꼬박 졸기나 할 뿐,경비따위는 세울 생각도 안하던 서점이다. ◆이 변해버린 모습에서 지식인의 타락을 보는 것 같아 몹시 서글펐다고 수필은 쓰고 있다. 대학 졸업식에서 총장서리가 인삿말을 하는데 달걀을 던지고 쓰레기를 던진 학생과 졸업생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일까. 그들 스스로가 그들이 던진 쓰레기나 오물과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타락한 대학꼴들을 보기가 이제 진저리가 난다. ▲어떤 대학에서는 졸업장 없는 졸업식을,또 하나의 총장주재 아래 올렸다. 그러고서 「영광」스런 일이라고 축사를 했다고 한다. 영광은 커녕 부끄러운 일이다. 과격한 세력에 놀아나 「총장」 자리를 시궁창물에 적시듯 우세시키는 일은 어느 쪽이든 수치스런 일이다. 졸업식장을 수라장으로 만드는 일로 운동권의 기세를 올리는 일이 대체 무슨 뜻을 정당화시키겠는가. ◆결혼식장의 기념촬영을 잘못한 사진업자가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졸업식도 결혼식 만큼 중요하다. 그 소중한 행사를 멋대로 망치고 수라장으로 만든 세력은 폭력배나 마찬가지다. 1%도 안되는 세력에 의해 대다수의 졸업생이 이렇게 피해를 입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진 대학,대학의 이 몰골사나운 타락이 한심스럽고 우울하다.
  • 총장에 계란ㆍ돌멩이 세례/대학 졸업식장 “난장판”

    ◎동국대 축사등 못하고 3차례 중단 소동 23일 상오11시 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동국대 졸업식에서 졸업생 및 재학생 1백여명이 『재단총장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단상에 있던 신국주총장서리(65)와 보직교수 등 20여명에게 달걀ㆍ돌멩이ㆍ쓰레기 등을 마구 던져 식이 2∼3차례 중단되는 소동을 겪었다. 학생들의 소동으로 당초 예정됐던 이사장 축사ㆍ기념품증정 등 일부 식순이 생략된 가운데 낮12시10분쯤 졸업식이 끝났다. 학생들은 이날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식장 안팎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농성을 벌이다 낮12시쯤 신총장서리가 축사를 하기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일제히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단상으로 달걀 20여개와 쓰레기 등을 던졌다. 학생들의 난동이 거세지자 체육관 입구에 서있던 이 학교 체육대학생 50여명이 난동학생들을 밖으로 끌어내며 몸싸움을 벌여 졸업식장은 난장판을 이뤘다. 학생들은 졸업식이 끝난 뒤에도 「재단총장ㆍ보직교수 물러나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학교안을 돌며 30분 남짓 시위를 벌였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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