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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 중남미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11)

    ◎어! 한국속에 중남미 있었네/국내유일의 외국문화 전문관/잉카·마야 유물 등 1,500점 전시/각종 생활용품 라틴문화 한눈에/전통가면 우리탈 보는듯 친근감 가을에는 훌쩍 떠나고 싶다. 발길 가는 곳으로 가자.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면…. 라틴 아메리카로 떠날까. 마음은 그래도 너무 멀어 라틴 아메리카로 가을여행을 떠나기란 버겁다. 그래,중남미 여행대신 ‘중남미박물관’으로 문화여행 떠나자. 침략자의 눈으로는 ‘발견한’ 땅. 그러나 BC 5,000년부터 이미 감자와 고추를 재배했고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꽃피운 현란한 문명의 땅이었다. 오늘날엔 천연자원의 보고이지만 늦어진 산업화로 가난에 파묻혔던 이 곳은 현재 ‘새로운 땅’으로 불린다. 베링해를 건너간 2만5,000년 전,선조들이 아시아인이라 그런지 여러모로 우리와 닮았다. 지구 반대편의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와 닮았음은 일종의 문화충격이다. 마야와 잉카문명,아즈텍으로 대표되는 중남미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에 위치한 중남미박물관은 외국문화 전문 박물관으론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곳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중남미 전문 박물관이다. 붉은 벽돌 스페인풍의 건축물,잘 가꿔진 정원에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조각가 빅또르 구띠에레스의 여인상을 비롯 곳곳에 놓여진 조각품들이 멋스럽다. 5,000평의 대지에 총 건평 1,600평의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꾸며졌다. 우선 중남미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선 박물관 실내는 경쾌한 라틴 음악과 후엔 데쓰라 불리는 분수대,중남미의 상징인 태양신 아즈텍의 문양이 천장을 장식하고 있어 중남미 분위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박물관의 라틴 문화유산은 총 1,500여점. 아즈테카 잉카문명 등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각국의 찬란했던 문화유산과 역사 생활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잉카문명의 토기 석기 목기 등 고대유물은 이 박물관의 첫번째 자랑. 가면과 도자기,가구와 민속공예품과 그림,영상물,전문서적은 물론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중남미의 모든 것이 있다. 이 박물관은 전직 외교관 부부의 콜렉션에서 시작됐다. 전 멕시코대사를 지낸 이복형(李福衡) 박물관장은 “혼을 넣어 만든 곳”이라 자랑한다. 30년을 골동품 시장과 벼륙시장을 뒤져 모았고,전장이라도 유물만 있다면 달려갔다. 그리고 94년,퇴직금으로 박물관 건물을 지어 박물관을 개관했다. 중남미에서만 30년동안 외교관생활을 했기때문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도 있지만 ‘순수하고,따뜻하며 상대적 빈곤감도 느낄 줄 모르는 풍요로운’ 그곳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야말로 박물관 탄생의 첫번째 이유이다. 토기는 중남미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인디오 또또낙 족의 토우를 비롯 마야의 ‘고행하는 사제’,올 메까족의 ‘손가락을 빠는 토우’, 아즈텍시대의 ‘풍요의 신’도 있다. 또 8세기 엘살바도르의 요초아와 요호아상,3세기 따이노족의 토기 파편과 멕시코 꼴리마 지방의 ‘다산의 여신’도 자랑거리이다. 목기와 석기,구리로 생활소품을 많이 만든 멕시코 지방의 구리공예와 청색자기도 함께 볼거리이다. 이 박물관에서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인 곳은 가면의 방이다. 남미 전통의귀신탈과 우리의 천하대장군과 비슷한 멕시코 마추와 칸의 나무탈이 있고 나무와 종이,뿔과 돌,비취와 가죽,구슬 야자수 등 소재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두려움의 대상인 표범과 사슴 독수리 게의 탈도 있다. 죽음의 가면과 쌍가면 등,가면을 반으로 나눠 표정이 두가지 이상을 담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수탈을 당해온 민족의 한과 정복자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중남미 역사에서 식민지배를 빼놓을 수 없듯 이 박물관에서도 루이 15세가 사용하던 바로크 가구세트가 눈길을 끈다. 스페인 정복실에는 기독교와 무력,부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는데 그중에는 인디오가 그린 마리아와 스페인 종교화의 대가인 무리요의 화법을 흉내낸 멕시코 과달라하라 대성당 수사들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거칠게 만들어진 목각 예수상,18세기의 천사도 남미문화의 소박함을 엿보게 한다. 안데스 인디오의 대표적인 민속악기 삼뽀냐,케냐,땀볼과 아즈텍 시대의 목각 타악기까지 악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유물의 전시 뿐아니라 살아있는 문화의 현장.중남미의 대표적인 음식강습이 매일 열리는가 하면 중남미 의상전시회,음악회도 열린다. 지난해 개관한 미술관은 중남미 작가들에게 아시아 진출의 발판이 되고 있다. ◎한마디/李福衡 박물관장/라틴문화 ‘공유정신’도 함께 배우고 가길 기대/멕시코 등 4국서 대사/30여년 수집품 등 모두 문화원재단에 기증 중남미박물관에서는 중남미의 문화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李福衡(67) 洪甲杓(65) 전직 대사 내외의 중남미 문화에 대한 사랑과 집념,그리고 무소유의 인생관도 배울 수 있다. “이 박물관은 아내의 집념과 초인간적인 열의로 이뤄졌어요”라고 李관장은 말한다. 그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코스타리카·도미니카 등 4개국 대사를 지낸 중남미 전문가. 李관장 내외의 공식명칭은 아내 洪씨가 중남미 문화원 이사장,李씨가 부설 박물관장. 격으로 보면 부인이 한수 위다. 남편 은퇴 후를 미리 준비한 아내에 대한 지극한 애정의 표현이다. 박물관을 지은 터는 30년 전 평당 300원씩을 주고 산 땅이다. ‘은퇴후 살 곳’으로 사뒀던 곳이지만 테마박물관으로 뜻을 정한 후,소유가 아니라 ‘공유의 즐거움’을 실천하게 됐다. 8원씩 사서 심고 펌프물을 길러 키웠던 묘목들도 자식같아 이 곳에 박물관을 세웠다. 자신을 ‘유노동 무임금’성실한 정원사라 말하는 李관장의 손은 막일꾼의 손이다. 땅과 유물까지 ‘엄청난 재산’을 중남미 문화원재단에 기증했고,사후 장기기증까지 결정했다는 이들에게선 중남미의 화려한 문화 뿐아니라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도 배울 수 있다. “문화의 빈곤이 우리나라의 갖가지 위기를 갖고 왔어요. 있는 자들이 소유하려하지 않고 함께 공유하려는 생각을 해야 해요” “이 다음에 네 아들을 데리고 또 와다오. 그때 이 박물관 만든 할아버지·할머니 만났던 이야기를 아들에게도 해줘야 해” 엘살바도르 민속토기를 싸게 사기 위해 게릴라들이 점거하고 있는 지역에 밤늦게 들어가기도 했던 용감한 콜렉터 洪이사장은 관람온 한 중학생에게 당부한다. ◎이렇게 가세요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 302의 1번지 중남미 박물관은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문산방면으로 가다 필리핀 참전기념비와 벽제읍을 지나 고양동파출소에서 좌회전해서 마을로 들어간다. ‘이 곳에 박물관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아파트가 들어선 마을길을 따라가면 박물관 안내판이 길을 가르쳐준다. 고양향교와 이웃하고 있다. 개관 시간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년중무휴. 단 평일의 점심시간(12:00∼14:00)은 초등학생이하 어린이는 관람불가. 관람에 필요한 시간은 1시간 정도. 관람료는 어른이 2,500원,학생은 1,000원. 전화 (0344)962­9291·7171
  • ‘司正정국 해법’ 접점이 없다/여야 극한 대치… 표류하는 정치

    ◎여/국정개혁 차원 성역있을 수 없어/이회창씨 선 사과­즉각 등원 요구 여권의 정치권사정(司正) 화두는 개혁이다. 정경유착의 산물인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고는 경제위기 극복은 물론 총체적 국정개혁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치권사정은 국회정상화,경색정국의 상위개념으로 개혁의 시작이라는 주장이다. 국민회의 고위당직자는 이와 관련,“정치권사정은 국회정상화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정에 대한 여권의 기본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표적사정’‘야당파괴공작’이라는 한나라당 주장은 자신들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외투쟁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稅盜사건’‘개인비리사건’‘국회정상화’를 분리,대응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기류를 반영하고 있다.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지다. 국세청을 동원,대선자금을 불법모금했다는 이른바 ‘세금도둑질사건’은 있어서는 안될 악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제도적인 보완과 함께 한나라당 徐相穆 의원의 의법조치와 李會昌 총재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 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金潤煥 전 부총재,吳世應·白南治·金重緯·李富榮 의원,국민회의 鄭大哲 부총재 등이 연루된 비리사건은 부정부패사건으로 간주한다. 국민회의는 비리 관련자들이 스스로 검찰에 출두,한나라당의 부담을 덜어주고 정국의 물꼬를 터줄 것을 거듭 촉구했다. 국회에 제출된 체포동의안도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강경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 사정의 형평성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데 대해 부패한 세력이 부패척결에 저항하는 것으로 일축하면서도 적지않게 고심하는 눈치다. 여권 중진 K의원이 사정대상에 포함됐다는 설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국회정상화에는 조건이 없다는 시각이다. 한나라당에서 등원조건으로 제시한 ‘사정중단’을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주말이나 늦어도 다음주부터는 단독국회를 소집하겠다는 복안이다.◎야/경색본질은 편파수사­야당 파괴/장외투쟁으로 수세국면 전환 주력 한나라당이 잔뜩 독기(毒氣)를 품었다. ‘원외(院外)투쟁’을 앞세워 대여(對與) 전면전의 고삐를 바싹 죄고 있다. 사정정국의 돌파구를 ‘여론몰이’에서 찾으려는 의도다. 오는 25일에는 대구에서 대규모 규탄대회를 갖는다. TK(대구·경북)를 정치기반으로 삼고 있는 金潤煥 전 부총재에게 사정의 칼날이 겨눠진 데 따른 것이다. 서울역 집회는 29일로 미뤘다. 지도부는 지난 19일 부산역 집회에 이어 대구와 서울 집회에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마산 집회도 검토중이다. 특히 李會昌 총재는 22일 서울과 경기·인천지역 지구당위원장 회의를 잇따라 주재하며 집회의 성공적 개최를 독려했다. 야당파괴뿐 아니라 현정부의 실정(失政)규탄에도 초점을 맞춘다는 전략이다. 대구·경북지역 위원장들도 모임을 갖고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국면 전환을 노린 역공(逆攻)에도 안간힘을 쏟고 있다. 李총재가 작심하고 전면에 나섰다. 국세청 모금사건과 관련,한나라당의 사과를 촉구한 金大中 대통령의 언급에 정면 응수했다. 李총재는 주요당직자회의에서 “金대통령이 선후를 혼동하고 있다. 정국경색이 야당파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여권이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安商守 대변인도 “국회의원을 빼간 국민회의는 국도(國盜)”라며 ‘세도(稅盜)’ 공세에 맞불을 놨다. 그러면서 “대선 당시 국민회의쪽에도 국세청 모금 대선자금이 유입됐다는 제보가 들어 오고 있다”며 검찰조사를 요구했다. 그는 또 제2건국위 출범과 관련,“거대 신당을 창당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이 아니냐”고 공개 질의했다. 사정의 도마에 오른 당사자들도 가세했다. 단식중인 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은 “쇼 같은 사정은 집어치우라”며 이날 검찰의 2차소환에 불응했다. 金전부총재는 “비리혐의가 유포된 배경이 의심스럽다”며 음모설을 제기했다. 白南治 의원도 “동아리스트의 몸통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에 있다”며 화살을 여권에 돌렸다. 李富榮 의원은 “오늘 낮 본인의 지구당 간부회의가 열린 음식점에 강동서 소속 형사가 잠입,회의내용을 엿듣다 발각됐다”며 관련 책임자 해임을 주장했다. □정국 쟁점 여야 입장 비교 ◆세풍사건 ·여당:국세청을 동원, 86억원을 불법모금한데 대해 먼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국세청을 정치에 이용하는 것도 추방해야 하고, 불법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해 온 부패정치인도 정치권에서 추방해야 한다. ·야당:서상목 의원이 기업으로부터 받아 당에 전달한 대선헌금은 23억여원이다. 또한 받은 시점도 개정 정치자금법이 발효된 지난해 11월14일 이전이 10월 초순경이다. 국세청에 단 한마디 선거자금 지원을 부탁한 적이 없다. ◆국회불참 장외투쟁 ·여당:헌법에 정해진 정기국회를 외면하는 것은 한나라당에도 이롭지 않고, 국민이익에도 배치된다. 투쟁할 일이 있으면 국회로 돌아오라. 국민회의는 22일까지만 ‘제도 한나라당 진상 보고대회’를 갖고 앞으로는 자제한다. ·야당:대규모 서울집회를 갖기전에 국회의원이 중심이 된 소규모 민주유세단을 가동시킨다. 서울집회는 단순한 야당파괴저지 규탄대회로 끝내지 않고 김대중 정권의 총체적 실정을 꼬집는다. ◆사정논란 ·여당:정치권 사정은 국민의 여망이다. 정치개혁 없이는 나라가 올바로 갈수 없다. 검찰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누구든 비리가 있으면 처벌받는게 마땅하다. ·야당:‘야당파괴’를 목표로 야당의원들을 집중 겨냥, 편파사정·표적수사의 양상을 띠고 있다. 정부·여당이 ‘끼워넣기’식 사정으로 이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 ◆정국정상화 조건 ·여당:한나라당이 ‘세도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등원해야 영수회담 등 여야대화가 가능하다. 비리혐의 인사들의 즉각적 검찰출두와 장외투쟁중단도 필요하다. ·야당:‘야당파괴’에 대해 대통령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 편파적 사정을 중단하고 여권의 ‘야당의원 빼가기’가 중단되어야 정국이 정상화될 것이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금강산 관광요금 비싸다/현대측 ‘4박5일 130만원’계산을 보면

    ◎“용선비·북측 입산료 포함”/최저 80만­최고 200만원/濠洲 7박 139만원 대조적 금강산 관광비용이 너무 비싼 걸까. 현대그룹이 지금까지 밝힌 무궁화 4개급 호텔수준의 유람선을 이용한 금강산 관광비용은 4박5일 기준 1인당 평균 1,000달러 수준이다. 우리 돈으로는 130만원 정도다. 최상급 객실 이용자는 200만원을 웃돌고 최하 등급 이용자는 80만∼90만원에 이른다. 현대측은 이같은 비용은 우선적으로 관광객 1명이 북한측에 낼 비용과 용선비,숙박료,버스임대료,대리점 수수료,현대측 마진 등을 감안해 추산한 액수다. 金潤圭 현대건설 부사장은 북한측에 낼 비용과 관련,“금강산 입산료,비자발급 수수료 등에 대해 북한과 사실상 300달러에 합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측에 줄 돈이 전체경비중 30%를 차지한다.북한은 유람선 1척당 평균 40만달러,연간 2억달러를 벌어들이는 셈. 다음 원가 구성요소는 용선비로 전체 비용의 25% 정도. 또한 4박5일간의 선상생활에 따른 숙박비와 음식료가 30% 정도에 달한다. 비용 130만원은 11개 등급 객실가운데 5∼6등급 기준이다. 첫 배인 현대금강호의 관광비용은 85만∼200만원 이상 다양해질 전망이다. 그러나 이같은 비용의 적정성을 놓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대세는 너무 비싸다는 데 모아진다. 요즘같은 자산디플레와 소득이 감소한 경제상황에서 여행업계와 실향민들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분단의 벽을 허물고 실향민의 고향땅 방문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IMF 체제하에서 분명 적지 않은 지출이라는 지적이다. 노부모를 자녀가 부축하고 갈 경우에는 용돈을 포함해 족히 500만원을 가져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른 국제 여행상품과 비교해봐도 비싼 편이다. L관광의 뉴질랜드·호주 7박8일 여행상품이 139만원이고 캐나다·로키 7일 투어가 129만원 수준이다. 백두산·두만강·북경 6일 일정은 99만9,000원이면 되고 4일 코스는 69만6,000원 가량이다. 현대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금강산 관광이라는 ‘명분’만으로는 소비자들을 달랠 명분이 작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현대측은 9월초에 정확한 관광비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 민주열사 열전:4/金相眞 서울농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할복 자결… 反 유신의 魂으로 부활/학생운동사 목숨 던진 첫 인물/꺼져가던 투쟁의 불씨 되살려/암울한 시대 희망의 새싹 틔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합법을 가장한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75년 4월11일 상오 11시. 서울대농대 4학년 金相眞은 수원에 있는 농대 캠퍼스에서 그렇게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격정의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차분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는 비장함에 묻혀 이내 사그라졌다. 선언문 낭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이 보잘것 없는 생명,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는 말이 나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그는 품속에서 과도를 빼 치켜들었다. 그리고 하복부를 깊게 찔러 위로 그어올렸다. 그는 친구들에게 들려 택시까지 가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1·2차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중이던 12일 상오 8시55분 그는 앰뷸런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죽어가며 “애국가 불러주오”金相眞 열사는 민주화투쟁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최초의 인물이다.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죽음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했고,그 파장까지도 충분히 예측했던 것 같다. 75년 2월 朴正熙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내세워 강경으로 선회했다. 정부가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는 등 유신체제가 오히려 폭악화되자 그는 어떤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미온적인 동료·후배들의 자세도 그를 피할 수 없는 ‘결단’으로 밀어댔다. 그는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고 4월9일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8명이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사형당했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과도를 구입했다. 인혁당사건은 10년 뒤인 95년 모방송사가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법사상 ‘가장 치욕스런 판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상진기념사업회 安鍾健 회장(50·방송대 교수)은 “相眞이는 복학후 되도록 시위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74년말부터 급격히 암울해지는 시대상황에 매우 당혹스러워했고,무언가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회고했다. 安회장은 金相眞 열사와 고등학교 및 대학 같은 과 동기다. 그는 또 “相眞이가 할복 전날 밤 자신을 찾아와 칼을 보여주며 가족과 애인 걱정을 했다”고 전한다. “相眞형은 항상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어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때다’‘내가 해야할 것 같다’고 결의를 나타내기도 했구요”후배 鄭鉉敦씨(축산·74학번)의 회고다. ○시위 확산에 긴급조치 9호 선포 朴正熙 정권은 金相眞의 죽음이 반유신의 상징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숨을 거둔 지 15시간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게 했으며,서울대 농대를 사실상 폐쇄했다. 각 대학에도 휴교·휴강 조치를 내려 4월 중순까지 25개 대학이 전면 휴강에 들어갔으며,시위 주동자의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5월13일 체제에 관한 어떤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5월 22일 관악 캠퍼스에서 기어이 ‘金相眞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긴급조치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22사건’이다. 朴炯圭 목사는 95년 金相眞 20주기 행사때 “모든 사람들이 좌절할 때 꺼져가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긴 이가 金相眞 열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튼 민주화와 정의의 물길을 우리가 제대로 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반문했다. 당시 5·22사건으로 수배됐던 金槿泰 의원(국민회의)은 “金相眞형과 그 사건은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진정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폭압아래 똑같은 나이(27살)에 옥사한 尹東柱의 ‘서시’는 그의 이상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金相眞 열사는 尹東柱의 ‘서시’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승화됐고 밝은 미래의 희망으로 존재할 것이다. ◎어머니 朴載娟 여사의 통곡/“정부에 의한 명예회복 평생소원” “에미로서 자식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겪다 가게 했어요…” 金相眞 열사의 어머니 朴載娟 여사(80)가 아직도 못내 아쉬워하는 점이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데모에 끼겠느냐’며 항상 어머니를 안심시키던 아들. 그가 죽자 슬픔과 원망이 뼈에 사무쳤지만 朴여사는 차차 목숨을 던져야 했던 아들의 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相眞이는 유난히 정이 많고 심지가 깊었어요. 친구를 무던히도 좋아했지요. 친구들을 몰고와 내가 음식상을 내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95년 20주기 행사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벽제 묘소로 가져가 100여명의 아들선·후배 동료들을 먹였다. 朴여사는 아들이 죽자 병원에서 “제발 화장하지 말고 묘를 쓰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포항에 있던 맏아들을 불러올려 억지로 설득해 화장을 강행했다고. 그녀는 “화장터로 쫓아가 ‘우리가 뿌릴 터이니 유골단지를 달라’고 해 중앙청 옆 법륜사에 감췄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후에 金相眞 열사는 벽제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朴여사는 현재 서울 갈현동 자그마한 한옥에 혼자 산다. 신경통과 위경련을 앓고 있지만 심하지는 않은 듯했다. 고려컨테이너 부사장인 맏아들 상운씨와 대한투신 원주지점장으로 있는 둘째아들 상근씨 등 8남매가 모두 건실하게 살고 있어 흐뭇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들이 공식적으로 정부에 의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죽기 전에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후배 鄭赫基씨의 맺힌 恨/“긴 겨울 몰아낸 ‘민주햇살’ 빛 봐야” 김상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鄭赫基씨(42·산야농산 대표)는 “相眞이 형이 죽은 이후 학생들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재야나 지식인들이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金相眞 할복사건이 유신독재정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시대적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朴正熙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해 정권 말기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죠.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국민의 항거를 막기 힘들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 당시 축산과 새내기였던 그는 金相眞 열사가 할복하는 순간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뒤에 있던 선배들은 그가 칼을 빼드는 순간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덮쳤지요. 그러나 정작 저는 ‘단순히 각오를 다지기 위해 빼들었겠지’했어요. 그런데 막상 할복하고 쓰러지자 정신이 멍하고 아찔했습니다” 그는 “그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鄭씨는 지난 95년 기념사업회가 출간한 金相眞 열사 평전 “긴겨울 얼음뚫고’의 정리작업을 맡았었다. 3년이나 걸린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대한 빚갚음의 의미도 있지만 相眞이 형의 진실이 진정한 역사로 기록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가 후퇴하고 권력이 부패하면 언제라도 제2,제3의 金相眞이 나올수 있다”는 鄭씨. 그는 “全·盧 시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며 “지금의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金相眞 열사 연보 ▲1949년 金東壽·朴載娟씨의 3남6녀중 여섯째로 서울에서 출생 ▲1962년 혜화국민학교 졸업 ▲1965년 보성중학교 졸업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서울대농대 축산학과 입학 ▲1971년 군입대.경기 포천의 공병대에서 근무 ▲1974년 2학기 복학 ▲1975년 4월11일 서울대 수원농대 교정에서 유신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낭독하고 할복 자결 ▲1975년 4월12일 상오 8시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
  • 순명황후의 恨(秘錄 南柯夢:18)

    ◎독수공방 20년 후사 없어 坤宮 미움사/純宗 음양이치 잘몰라 빈궁 침실 발길 끊어/보다못한 嚴妃 영친왕 시켜 억지合房도 허사/종묘 주춧돌 28칸 반… 나라운수 예언한듯/33세에 쓸쓸히 승하하자 四廟에 큰불 조선왕조가 멸망한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침략 때문이었다.그러나 우연하게 왕실안에 이변이 거듭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가 조선왕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純宗,1907∼1910)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일이다.순종은 명성황후가 어렵게 나은 외아들이었는데,불행히 여자를 몰랐다. 하루는 어린 영친왕이 함녕전으로 뛰어오더니 순종의 옷소매를 잡고 빈궁(嬪宮=순명황후 민씨)한테 가시자고 졸랐다.본시 순종께서는 음양의 이치(남녀관계)를 잘 모르셔 허송세월만 하고 계신지라 엄비(영친왕의 생모)께서 걱정하시던 끝에 어린 영친왕을 시켜 순종을 억지로 빈궁의 침실로 모시게 했던 것이다. 순종은 영친왕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다가 빈궁 침실을 두어걸음 남겨두고 돌아서고 말았다.그러자 어린 영친왕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엄비가 나타나 순종에게 꼭 한번만 빈궁에게 가보시라고 권했다.순종이 난처해서 멈칫거리고 있을 때 빈궁이 직접 나와서 순종을 자기방으로 모셨다. 순종이 방에 앉자마자 미리 준비해뒀던 주안상이 들어왔다.상궁과 나인 모두가 밖으로 나가 일이 잘 되기를 기원했다.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빈궁으로서는 시집온지 20년만인 이날 처음으로 화촉을 밝히는 것이었으니 운우의 기쁨이 얼마나 그리웠겠는가.그러나 순종께서는 앉은 자리가 뜨뜻해지기도 전에 일어나시더니 함녕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원계보’에 보면 순명황후 민씨는 민태호의 딸로서 11살(임오 1882년)때 태자비로 간택되어 33살(갑진 1904년)에 승하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그사이 22년 동안을 처녀의 몸으로 지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상과부보다 못한 쓸쓸한 일생이었다. 이후에도 밤다다 11시경이면 순종이 빈궁의 침소를 찾았으나 아들을 낳을 희망은 전혀 없었다.도대체 우주만물이 모두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가령 한 마을에 아리따운 처녀가 있어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린 뒤 웃는 낯으로 남자를 바라본다면 아무리 군왕이라 하더라도 쏠리게 마련이고 여색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순종께서는 이것을 모르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순종의 이같은 행동은 국가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일이다.왜냐하면 당초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종묘의 주춧돌을 놓을 때 28칸반으로 정했는데,이로 미루어 본다면 이 나라의 운수는 가히 움직이기 어려운 일인가. 조선왕조 건국시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활약이 컸다.그래서 많은 일화가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묘다. 정도전이 종묘의 칸수를 28칸 반으로 정하고,‘창엽문(蒼葉門)’이란 액자를 단 것은 그가 미리 500년 후의 일을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남가몽·8,4월15일자 참조) 최근 장안에 다음같은 동요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어제 불고 그저께 분 바람은/러시아 군대의 대포소리요/지금 방금 떨어지는 달은 빈궁전하의 운명이로다’(昨日再昨吹去風 露國軍隊砲聲也 方今時今落來月 嬪宮殿下運命也)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순명황후께서 승하했는데 이때 장안에 위와 같은 동요가 나돌았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대한제국사의 한 단면이다.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화는 순명황후 민씨가 시어머니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사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얘기다.이것 또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본래 곤궁(坤宮=명성황후)이 살아계실 때 며느리인 빈궁과 뜻이 맞지않아 서로 원수보듯 하였다.매일아침 저녁으로 빈궁이 대전과 곤궁께 문안인사를 드릴 때 원삼에 띠를 두르고 사배(四拜)를 올리셨다. 그때 순명황후는 문지방 밖에 서서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질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했다.간혹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서 있거나 밤이 늦도록 서서 벌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은 형언할 수없는 일이었다.거기다 남편인 순종이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했으니 순명황후의 운명은 기구하기만 했다. 무릇 음식과 남녀의 이성관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독숙공방(獨宿空房)하며 낙을 모르고 지내기를 20년이나 되었으니 그 쓰라린 고초를 무엇으로 다 형용하리.차라리 왕비가 되기보다 사가의 부인이 된 것만 못하지 않았는가.이리하여 1904년(甲辰 고종 41년) 10월 보름 경운궁 강태실(康泰室)에서 승하하셨으니 향년 33세였다. 순명황후 민씨가 죽자 곧바로 계비 윤씨를 태자비로 봉했는데 윤택영(尹澤榮)의 12살난 딸이었다.그러나 동궁(순종)전하께서는 처음에 친영(親迎)을 마친 뒤로는 한번도 들르시지 않았으니 지난 날의 빈궁과 지내듯 담담하게 허송세월하게 되었다.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겠는가.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종은 고자”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정환덕은 순종이 고자가 아닌 이유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본래 국법에 따르면 동궁의 바지밑에는 소변보는 구멍이 있고 오줌눌 때는 가까이 있는 내시로 하여금 요강(溺器)을 바치게 하였다.그때 내시는 황공하옵게도 동궁의 성기를 엿보게 되고 요즘 소리로 양기가 발동하여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할수 있었다.또 털이 검고 무성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였다.그런데 어찌 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혹시 성기가 미리 발동하는 조루증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땅히 동해야 할 때 동하지 않고 동하여서는 아니될 때 동했던 것(當動而不動 不當動而動)’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어찌 되었건 그 생리를 알 수 없다.대저 신하된 도리로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일인 줄 알면서 입을 연 것은 오로지 진실이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이다.누가 감히 순종을 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순명황후가 나이 설흔세살에 한 맺힌 일생을 마칠 때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그것은 서울의 사묘(四廟)에 큰 불이 난 것이었다. 당초 명성황후 생전시 북묘를 세우고 이어 광무 6년(1902년)에 동묘를 세워 서울에는 모두 동서남북 4묘가 있었다.그런데 1904년에 큰불이 일어났고 그때 장안의 시민들이 모두 달려들어 불을 껐던 것이다.그래서 안에 모셔 놓았던 신상(神像)은 무사히 불길을 피했는데 사당은 전소하고 말았다. 지금 동대문밖 숭인동에 사묘중의 하나인 동묘가 남아있다.이것은 본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2년) 국난극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일종의 무묘(武廟)였다.성균관을 일명 ‘문묘(文廟)’라 했고,사묘는 외침을 막아주는 무신의 사당이었다.하필이면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순명황후가 돌아가신 1904년에 사묘가 불이 나고 덕수궁에도 불이 났는지,지금도 사람들은 일제가 저지른 방화로 믿고 있다.어찌 되었건 화재사건은 한많은 순명황후가 죽으면 일어난 사건이었고,그래서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이다.
  • 기획위 100대 국정과제 실천계획 확정:Ⅱ

    ▷사회◁ 54.저소득층·노인·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로=사회보장 장기발전 5개년 계획 수립(98하) 시·도립 치매요양병원 건립 지원(2000∼2002) 재활센터 건립 등 장애인 취업기반 확대(99하)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 범주 확대(계속사업) 사회복지시설 평가제도 도입(99하) 55.공공주택은 서민 중심으로=주택임대사업 규제완화 및 임대업 개방(98하) 56.보훈가족에게 명예와 자립을=상이등급제도의 합리적 개선(99하) 정부위원회의 여성위원 참여 확대(2002) 57.남녀는 같이 일하고 같이 대우받게(계속사업) 58.생활여건 개선으로 가고 싶은 농어촌을=합리적 농어가 부채대책 강구(2000∼2002) 59.의료보험은 적정부담 적정급여 체계로=지역·공무원·교원·직장의료보험 통합방안 마련(98하) 의료보험수가 수준 및 구조개편(2000∼2002) 60.국민연금 재정을 내실있게=국민연금 급여제도 개선(98하) 도시자영자에 대한 국민연금제도 시행(98하) 61.의료·고용·산재보험과 국민연금은 통합 관리돼야=4대 사회보험 통합관리방안(99하) 62.청소년 활동 밝고 건강하게=청소년육성 5개년 계획 수립(98하) 63.나와 주변부터 생활개혁을=장묘제도 개선방안 수립(99하) 국민의식 개혁운동 전개(계속사업) 64.도시교통은 대중중심으로=버스 등 대중교통 육성방안 마련(98하) 65.질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한 법 제정추진(98하) 의료기관서비스 평가제 도입(2000∼2002) 66.식품,의약품은 안전성이 먼저=식품 안전관리규정 통합 및 정비(계속사업) 의약분업 시행(99하) 단순의약품의 약국외 판매허용(99하) 67.사회 건강은 생활체육에서=복합체육시설 확충(계속사업) 68.일터 안전은 근로자복지의 기본=영세사업장 근로자 안전성 제고를 위한 근로기준법,산재보험법 개정(2000∼2002) 69.재해·재난예방과 관리에 정성을=재해·재난피해의 배상·보상대책으로서 보험제도화 추진(2000∼2002) 긴급 환자 신고 및 이송체계를 ‘119’로 통합(98하) 70.산림자원 육성으로 쾌적한 공기를(계속사업) 71.대도시 공기오염은 원인부터 차단(계속사업) 72.정수기가 필요없는 맑은 물로=4대 강 환경기초조사 및수질보전기본계획 수립(99하) 식수전용 저수지 건설(계속사업) 73.깨끗한 바다는 생명의 근원=갯벌관리대책 수립·시행(2000∼2002) 연안통합관리체제 구축(99하) 74.쓰레기는 처음부터 줄여야=음식물 쓰레기의 감량 및 자원화 추진(계속사업) 75.산업구조를 환경친화적인 형태로(계속사업) 76.개발할 때는 보전도 생각해야=개발사업의 환경영향 평가시기를 기본계획 확정 전으로 조정(98하) 77.창조적 문화예술은 21세기 경쟁력의 바탕=영화업 등록제를 신고제로 전환(98하) 문화지구 조성에 관한 특별법 제정(99상) 78.문화유산 보존·계승은 우리 세대의 의무=경복궁·창덕궁 등 조선왕궁원형 복원(계속사업) 79.우리 문화를 세계의 문화로=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계속사업) 80.보다 유익한 방송으로=방송 선진화를 위한 통합방송법 제정(98하) 지역민방 방송권역 확대(98하) ▷미래◁ 81.기초과학 진흥으로 기술력의 저변을=과학기술 전자도서관 구축(2000)해외 과학기술정보 종합가공 유통센터 지정·운영(99상) 82.과학기술 두뇌는 수입을 해서라도=과학기술 훈·포장제도 신설(99상) 83.국가 연구개발사업,더 많은 성과가 있도록=정부 연구개발사업의 효율화 방안 마련(98하) 84.바다를 제2의 국토로 개발=바다 목장화 등 4대 해양기술 실용화 사업추진(계속사업) 85.수자원관리 효율화로 물 부족 대비=물값의 단계적 현실화(계속사업) 86.정보화 물결 대비는 정보유통망 건설부터=초고속 기간정보통신망 구축(2000∼2002) 컴퓨터 2000년 표기문제 해결 지원(99하) 87.정보통신 산업을 경제의 중추신경으로=공공부문 전산관리 통합방안 마련(98하) 88.정보화 교육으로 컴퓨터를 가까운 친구로=컴퓨터 사용능력을 대입 전형자료로 활용(2000∼2002) 89.학생과 학부모를 과외에서 해방=대학 정원자율화 확대(99상) 90.초·등교육은 창의력이 배양되도록=학급당 학생수 단계적 감축(2000∼2002) 91.대학교육은 양보다 질이 우선=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학구조 개편(99하) 92.교직사회는 실력과 신뢰로=교원능력 평가시 수요자 의견 반영(99상) 93.교육행정과 재정은 학생 중심으로=소규모 지역교육청 통폐합 및 학교구조개혁(계속사업) 94.남북 기본합의서(화해,불가침,교류·협력)의 이행으로 평화의 초석을=남북 기본합의서 이행전략 수립(98하) 95.경수로 건설사업을 계획대로=경수로 재원분담 협상 추진(98하) 96.남북경협은 정경분리 원칙으로=남북교역의 직교역화 추진(계속사업) 97.남북간 만남은 사회문화 교류로=남북간 사회문화교류 확대 추진(계속사업) 98.이산가족 재회는 가능하면 빨리=이산가족 정보통합센터 설치·운영(98하) 고령 이산가족의 방북절차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98하)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간 회담 추진(계속사업) 99.북한 이탈주민의 정착을 원활하게=북한 이탈주민 정착지원 시설 건립(99상) 100.통일정책은 국민합의 바탕위에=통일교육 활성화를 위한 ‘통일교육지원법’제정(계속사업) 북한의 라디오,TV 등을 단계적으로 개방(계속사업) 대북지원 창구다원화 방안 수립(98하) □주요 국정과제 추진 일정 부문 실천과제 추진시기 경제 서울은행·제일은행의 조기 매각 98년 대형·우량금융기관의 합병방안 〃 외국인투자 일괄처리제 도입 〃 외국환관리법령 전면 개편 〃 어음제도 등 대금결제방식 개편 〃 고용보험 적용범위 확대 99년 상호보증채무 완전 해소 2000∼2002년 양곡수매를 융자수매로 전환 〃 주요 생필품의 단합 출고조절행위 단속 계속 정부 공무원 점수식 인사고과제도 도입 98년 병역비리 근절 종합대책 수립 〃 정책실명제 도입 〃 재외공관망 통·폐합 99년 자치경찰제 도입 추진 2000∼2002년 특별회계·기금 정비 계속 행정 법규상 형사처벌을 과태료로 전환 계속 사회 지역·공무원·직장의료보험 통합법 제정 98년 도시자영업자에 대한 국민연금제 실시 〃 장기기증사업 활성화 법 제정 〃 환경영향평가를 기본계획 확정 전에 시행 〃 통합방송법 제정 〃 단순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 허용 99년 4대 사회보험 통합관리방안 수립 99년 의료보험 수가수준 및 수가구조 개선 2000∼2002년 의료기관 서비스평가제 도입 2000∼2002년 미래 이산가족 정보종합센터 설치·운영 98년 고령 이산가족 방북절차를 신고제로 전환 〃 해외기술정보 종합가공유통센터 운영 99년 컴퓨터 사용능력을 대입전형 자료로 활용 2000∼2002년 남·북한 사이 작교역 추진 계속 북한의 라디오·TV등을 단계적으로 개방 계속
  • 高宗의 외도(秘綠 南柯夢:12)

    ◎중전 잠든 새 至密상궁 불러 雲雨之情/소문난 엄처 황후 사실 알고 “믿는 도끼에…”/상궁 궁밖 축출… 친정 일가붙이 요직서 내쫓아/한달 남짓 지나 낳은 사내아이가 義和君 李堈/대궐 들어온 참봉의 12살 딸에 “기다려라” 언질도 고종에게는 후사가 귀했다.열네살때 명성황후를 정비로 맞아들였으나 여러차례 유산한 끝에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이가 바로 순종이다.선원계보(璿源系譜)에 보면 명성황후는 2남인 순종만 순산하였을 뿐 1,3,4남 등 아들 셋과 1녀를 합해 넷이나 유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 셋·딸 하나 유산 아픔 사가에서도 후사가 없다는 것은 집안이 망하는 징조로 알고 있었던 당시에 왕가에 후손이 없다는 것은 온 국민의 걱정거리이어서 망국의 조짐으로까지 여겼다.그래서 그런지 고종은 명성황후 생존시 소문난 엄처시하(?)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외도(外道)하기를 서슴지 않았다.그 중의 하나가 김승현(金勝絃)의 딸이었다.이 사건은 1885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 어느 해인가 김승현(金勝絃)이 딸 하나를낳았다. 나이가 열 두살 되던 해에 나인을 따라 대궐에 들어와 마음대로 뛰어 놀고 있는데,그때 마침 상감께서 춘생전(春生殿)에 납시어 그녀를 발견했다.물으시기를 ‘너는 누구 집의 딸인가’ 하셨다.대답하기를 ‘전 참봉 김승현의 딸입니다’ 하였다.상감께서 ‘나이는 몇살인가’ 하시니 대답하기를 ‘열두 살입니다’라고 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곳에 들어왔느냐’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나인 정씨를 따라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아이의 용모와 언어와 행동하는 예의 범절이 찬찬하고 자세하며 또한 조용하니 참으로 귀인의 모습이다’하시고 드디어 불러서 앞에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그리고는 자세히 살펴보니 고운 자질을 타고나 보통 여염(閭閻) 집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자태가 아니었다.드디어 희롱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가서 잘 배우고 잘 자란 뒤에 내가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시었다” 춘생전은 경복궁에 있던 건물로서 지금은 없다.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나는 1895년까지경복궁에 기거하고 있었다. “김승현의 딸은 본래 서울에서 생장하여 조숙한 나머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똑똑한데다가 마음씨가 곱고 재주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가지를 알았다고 한다.드디어 궁궐을 나와 집에 돌아간 뒤에는 내칙(內則) 등 여러 책과 경전(經典),예설(禮說) 등을 읽어서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옛날의 여러 제도까지도 널리 배워 비록 이름난 선비라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궁과 나인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듣고 김승현의 집을 끊이지 않게 내왕하였다.이 때문에 상감께서도 이 사실을 들으시게 되어 온 궁궐안에 소문이 자자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러나 중전마마(명성황후)께서 호랑이가 넘보듯 감시하고 있었으니 상감께서 비록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고는 하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서거했을 때 김승현의 딸은 스물 두살이었다.스스로 믿기를 황상께서 자기를 불러들여 황후로 삼을 것이라 믿고 고대하였으나 이것은 이른바 늙은 처녀가 신랑감을 기다리는 격이었다.마침내궁궐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으니 김씨집에서는 다만 근심만 더하고 심란할 뿐이었다.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그녀의 나이가 꽤 들었다.그 부모가 시집을 보내려고 했으나 죽기로써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 하면서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았으니 그 부모도 딸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황후 삼으리라 믿고 고대 김승현의 딸이 그 뒤 시집을 갔는지 평생 노처녀로 고종 황제를 사모하였는지는 모르나 어찌되었건 한번 임금에게 간택되면 한 여인의 운명은 그로써 최종 부도처리(?)되는 것이었다.그러나 김승현의 경우는 딸 하나로 불행이 끝났으나 장상궁의 경우는 그 화가 일가친족에 다 미쳤으니 가히 멸문지화라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가장 아끼고 믿고 있던 장상궁(張尙宮)을 고종이 건드림으로써 일어났다.그러니 아무리 임금님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외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당했던 張씨 일가 망해 “장상궁은 중전(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금옥(金玉)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다.그래서 중전이 장상궁을 지밀(至密)에 두시고날마다 아침이면 머리를 빗게 하고 쪽도 맺게 하여 화장 분(粉)을 내려 주시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그 때문인지 장상궁의 친정 일가붙이가 모두 요직에 임명되어 부자가 된자가 부지기수였다.그런데 상감께서 장상궁에게 마음을 두신 지가 꽤 오래되었다.그러나 틈을 얻지 못하여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전께서 깊이 잠든 새를 이용하여 장상궁을 부르시어 갑자기 무산의 운우(巫山雲雨:남녀의 정사)를 나누었다.그 뒤에 장상궁이 임신하게 되어 배가 점점 불러오고 얼굴색은 점차 파리해져 갔다.중전마마가 ‘네가 무슨 병이 있기에 얼굴이 그러한가’ 물으시었으나,대답하기를 ‘음식이 맛이 없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사지가 나른하여 기운이 없을 뿐이지 다른 증세는 없습니다’하였다. 그래서 중궁은 어의(御醫)에게 진찰을 받게 하여 약을 쓰게 했는데 뱃속의 태아는 장차 어떻게 숨기고 지낼 수 있겠는가.임신 8∼9개월에 이르자 장상궁의 배는 매우 불러 뚜렷하게 표시가 나게 되었다.중궁을 가까이 모시던 나인들이 몰래 그 사실을 고해바치니 이에 곤궁(坤宮·명성황후)은 크게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것도 분수가 있지 어찌하여 이와같이 귀신도 모르게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시고는 드디어 장상궁을 궁궐 밖으로 내쫓고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그 뒤에 장상궁의 친정 일가붙이는 모두 요직에서 쫓겨나 버리니 그렇게도 당당했던 장씨의 집안이 일시에 망하고 말았다” 불쌍한 장상궁은 궁궐에서 쫓겨난 뒤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곧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공이었다. “장상궁이 한달 남짓 지나 한 사내아기를 낳았으니 이 분이 의화군이시다.몇해가 지나지 않아 장상궁이 돌아가시자 궁의 이름을 의화라고 했다.그러나 장씨 집안은 문득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 즉 남가일몽(南柯一夢:꿈같은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이 되고 말았다”
  • 스트레스병 ‘과민성대장증후군’/마음 편히 먹는게 藥

    ◎속 더부룩하고 아랫배 싸르르/적당한 운동으로 심신 안정을/자극적인 음식·술담배 피해야 ‘명치끝이 답답하면서 소화가 안되고 메스껍다’‘조금만 신경을 쓰면 아랫배가 살살 아파 화장실로 달려간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의 대표적인 증상들로 가슴 두근거림,대소변 불쾌감,주기적인 설사와 변비,월경불순 등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의 경쟁적인 사회구조,불규칙한 식생활,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이 원인으로 대장이 과민하게 반응해 기질적으로 병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화기질환의 하나.우리나라의 경우 전인구의 20%정도가 이 병을 경험했거나 앓고 있다고 할 만큼 흔한 질환이다. 20세 이상 성인들에게 주로 발생하며 이 가운데 30·40대의 발병률이 높고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그러나 최근 구조조정과 감원 여파로 스트레스가 증가하면서 이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남성 직장인들이 부쩍 많아졌다.위장이 약하면 발병 확률이 높지만 신경을 많이 쓰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꼼꼼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잘걸린다. 특히 이 질환은 여러가지 증상은 있으나 혈액·위장·대변검사 등 각종 검사에는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남자는 설사나 무른 변이 나오는 경우가 많고 여자는 변비나 복통,또는 변비와 설사가 반복되는 유형이 많은 것도 특징. 식생활의 변화도 발병의 주요원인으로 꼽힌다. 삼성서울병원 소화기내과 이풍렬 교수는 “우리 식탁이 김치나 나물 등 섬유질이 풍부한 식품으로 채워졌을 때엔 드물었으나 우유나 빵,달걀,육류 등서구식 메뉴로 바뀌면서 부쩍 증가 추세”라고 말했다. 따라서 치료 및 예방을 위해서는 우선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끼니마다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도록 한다.또 적절한 배변습관과 적당한 운동이나 심신의 휴식도 필수적이다. 음식은 유제품이나 과당이 많이 함유된 과일이나 단 음식,장내에 가스를 발생시키는 콩류는 피하고 조미료나 술 담배 커피 등도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전체의 60% 정도는 음식조절만으로도 치료할 수 있다. 증상이 심할 경우 일시적으로 장(臟)운동촉진제나 경련을 완화시키는진경제 계통의 약물을 사용하기도 한다.때에 따라선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를 투여하기도 한다.그러나 무엇보다 심리적 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병이므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이교수는 “마음의 안정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므로 취미활동을 한다든지 적당한 운동으로 예민해진 신경을 완화시켜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방에서는 양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식이요법 운동요법을 하되 자율신경을 조절해 주는 침치료와 가미곽정탕,보장건비탕,안심온담탕 복용을 병행하고 있다. 백록당한의원 김영권 원장은 “변비엔 섬유소가 많은 채소나 율무차 잡곡밥 등이 좋고 익힌 고구마나 밤,곶감,인삼차,생강차 같은 열성음식은 피하는게 좋다”면서 반대로 설사할 때는 인삼차,생강차,밤,찹쌀,감자 같은 속을 따뜻하게 해 주는 식품을 취하되 신맛나는 쥬스나 탄산음료는 금물이라고 밝혔다.
  • 반찬수 따라 음식값 차등제 도입/복지부

    ◎좋은식단 개선 토론회서 밝혀/시키지않은 만큼 가격인하… 쓰레기도 줄여 보건복지부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 반찬을 제공한 뒤 모자라는 반찬을 추가로 주는 현행 ‘좋은 식단제’를 개선,손님이 음식을 주문할 때 원하는 반찬을 미리 선택하도록 할 방침이다. 복지부 이경호 식품정책국장은 10일 서울 여의도 사학연금회관에서 열린‘좋은 식단 발전 방향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앞으로 음식점이 자율적으로 손님이 주문하는 반찬 수에 따라 음식 값을 달리 받도록 행정지도를 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국장은 “반찬을 적게 주문하는 손님에게는 음식 값을 덜 받고 많이 주문하는 손님은 추가로 돈을 내도록 함으로써 음식물쓰레기를 더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국대 식품영양학과 문현경 교수도 “부족한 반찬을 무료로 주는 ‘좋은식단제’는 손님이 안 먹는 반찬이 음식물쓰레기로 남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양식의 세트 메뉴(Set Menu)처럼 반찬을 적게 주문하면 가격을 할인해 주고,이를 초과해 주문하면돈을 추가로 받는 방안을 제안했다.
  • 거품은 빼고 과세 정성은 듬뿍/여럿이 함께 장보면 제수비용 줄어

    ◎선물은 비누·치약 등 생필픔 좋을듯/세뱃돈 대신 도서·문화 상품권으로 고양시 화정동에 사는 윤경복씨(53)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같은 아파트 주부 3명과 지난주 초 가락시장에 다녀왔다.값이 오르기전에 일찌감치 장을 봐다 냉동실에 얼려두기 위해서였다.생선,과일,나물 등 최소량씩을 넷이 함께 사서 나눴다.아직 바빠지기 전이라 여럿이서 느긋이 장터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뭣보다 흐뭇한 건 제수비용지출이 대폭 줄어든 점.“올해 설 상여금이 없겠다”고 힘없이 전화하던 장남에게 “어떻게 꾸려졌으니 부담갖지 마라”는 말을 돌려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윤씨는 한시름 놓는다. IMF 여파로 보너스없는 설을 맞게 된 가구들마다 ‘초절약’ 명절보내기전략을 부심중이다.제수거리 특수 이전에 미리 장보기,이웃과 대량구매해 단가 낮추기,음식 거품 없애기 등은 기본.비누,치약,샴푸,식용유,조미료 등 좀구접스러워 뵈던 생필품이 설 선물 수위로 뛰어올랐다. 대규모 할인점마다 앞다퉈 저가 생필품 세트를 내놓고 있다.부담없으면서도 뭔가 생활의향기를 전해주고 싶다면 둥글레차,감잎차,설록차 등 국산차를 준비해 보는것도 괜찮다. 친척들이 아이손 붙잡고 다 모이게 되면 세뱃돈 부담도 적잖다.성수동 주부 임모씨(35)는 올해 자식과 조카들에게 돈 대신 도서상품권을 주기로 남편과 합의했다.요즘 유행하는 청소년음악회나 전시회 등의 입장권 등은 1만원안쪽으로 마련할 수 있는 훌륭한 ‘문화 세뱃돈’이다. ‘초절약’설을 보낸다고 격식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놓을 것은 다 놓고나머지는 과감히 생략,차례상도 간소하게 차린다.육탕,소탕,어탕 대신 세가지를 합친 합탕 하나면 된다.산소에서 차례 지낼 때는 탕류는 생략해도 무방하다.홀수로 놓는 과일은 세개씩이면 충분하다.대신 홍동백서를 지킬 것.한번 올리는 술은 차로 대체해도 된다. 차례 지낼 때 자손들은 여자 4배,남자 2배한다.절 할 때 남자는 왼손이 위로,여자는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야 한다.
  • 대학생 과외까지 가격파괴/IMF 한파로 사회 전반 거품빼기 확산

    ◎대학생들 주 4회 월 20만원으로 ‘세일’/특급호텔 특별메뉴 1만원대에 제공/고가 의류브랜드 앞다퉈 대폭 할인 IMF 한파로 거품이 걷히면서 곳곳에서 ‘가격파괴’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과외비나 호텔 음식값 등 지금까지 소득수준에 비해 과다하게 거품이 형성됐던 품목들이 가격파괴를 선도하고 있다. 대학생 과외아르바이트의 경우 값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을 1주일에 2∼4번 지도하면 30만∼35만원 정도를 받았으나 최근에는 20만원 내외로 떨어졌다.학부모들이 줄어든 월급봉투에 맞춰 자녀들의 과외비 등 사교육비의 지출을 대폭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학생들은 ‘IMF식 과외’ ‘저렴한 과외비에 주 4회 방문’ ‘경제적 부담없이 확실히 가르쳐 드립니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학부모들의 얄팍해진 주머니 사정에 맞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호텔 식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울르네상스호텔의 양식당 노블레스와 일식당 이로도리는 코스요리와 철판구이 세트메뉴를 1만7천∼2만2천원으로 종전보다 40% 가량 낮췄다. 신라호텔의 레스토랑 파크뷰는 이달 말부터 안심스테이크 샐러드 등 5가지 코스 점심메뉴를 절반 가격인 1만9천원에 선보이기로 했다.서울 잠실 롯데월드호텔은 12일부터 3월 말까지 한식당 무궁화와 중식당 도림에서 곰탕과 사골우거지탕 정식 등을 ‘IMF 특별메뉴’로 내놓고 1만2천∼1만8천원에 팔 계획이다. 창업이래 단 한차례도 세일을 하지 않았던 고가 의류브랜드들도 앞다투어 세일대열에 나서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는 버버리와 막스마라를 뺀 모든 업체가 세일에 참가하고 있다.지금까지 단 한번도 세일을 하지 않았던 오일릴리를 비롯,발리 베르수스 이스탄테 소니아니켈 미소니 프랑체스코스말토 리포터 등도 20∼30% 가량 가격을 내려 팔고 있다.
  • 안산시 ‘20­20 운동’ 전개

    ◎음식 값 20% 내리고 쓰레기 20% 감량/음식점 등 상대 과소비·낭비 없애기 유도/단란주점 수입 양주 대신 소주팔기 권장 【안산=김병철 기자】 “다 함께 허리띠를 졸라 맵시다” 경기도 안산시가 생활주변의 과소비 풍조와 낭비요인을 없애기 위해 관내 5천여 음식 및 유흥업소들을 대상으로 ‘20­20운동’과 ‘단란소주 운동’을 벌인다. IMF 한파를 이기고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6일부터 무기한으로 벌이는 이 운동은 시민들 스스로 검소한 생활습관과 절약정신을 몸에 배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20­20운동’이란 음식값과 음식물쓰레기를 20% 이상 내리거나 줄인 업소에 각종 혜택을 주는 것.업소가 받는 인센티브는 무척이나 실속있고 다양하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업소에게는 먼저 상수도요금을 30% 줄여 준다.또 업소들의 정기 또는 불시 위생감사가 면제되며 시설을 개선하려는 업소에는 3천만원까지 저리로 융자해 준다. 특히 참여 업소의 매상을 올려주기 위해 홍보는 물론,시 또는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때 이들 업소 이용을 적극 권장한다. 시는 앞으로 관련 조례를 개정,참여 업소에 공영주차장 이용권과 쓰레기봉투를 무료로 지급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단란주점을 상대로 한 ‘단란소주 운동’도 눈길을 끈다.단란주점은 당초 서민들이 부담없이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만든 업종이었으나 업주들이 비싼 양주와 맥주만 팔고 것이 현실. 이에 따라 시는 한해 2억6천만달러어치에 달하는 수입양주 대신 우리 술인 소주를 팔도록 ‘단란소주 운동’도 함께 펼치기로 했다. 백성운 안산부시장은 “최근 물가 인상으로 가계 부담이 크게 늘고 있지만 업소들이 자율으로 값을 내리도록 시가 앞장 서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가계부 쓰기 11년 39살 주부의 ‘온고지신’

    ◎‘생활주름’ 절약으로 편다/고정수입에 물가 올라 실임금 30% 줄어/외식은 사양… 찬거리 사러 재개시장에/적금 계속 적립하려 남편용돈 절반 삭감/승용차 세워두고 대중교통이용 생활화 결혼한 지 11년이 지난 주부 박정민씨(39·서울 중랑구 묵1동신내두산아파트 518동)의 마음은 연말연시를 맞아 천금만금 무겁기만 하다. ‘IMF 한파’가 들이닥치면서 각오는 했지만 치솟는 물가로 가계부의 주름이 나날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물가상승과 임금동결 등으로 가계당 실질소득이 30% 가량 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고 보면 두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박씨 가족은 대기업 간부인 남편과(41),아들(10) 딸(1) 등 모두 4식구. 결혼 이후 11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계부를 쓰면서 알뜰살림을 꾸려왔다.주변에서 지나치다고 여길 만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를 썼다. 식단은 철저히 계절식품으로만 짰다.백화점이나 슈퍼마켓보다는 재래시장을 이용했고 옷은 백화점 세일기간에 장만했다.구두가 오래 가도록 두 켤레를 마련해 번갈아 신었다.박씨는 “시장에 가기 전에 무슨 음식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장에서 유난히 싼 반찬거리를 사 음식을 만드는 방법으로 식비를 줄여왔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요즘의 물가 오름세를 보노라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는 것이 박씨의 생각이다. 결국 남편과 상의한 끝에 용돈,부식비,군것질 비용 등 씀씀이를 절반으로 줄이기로 결정했다.승용차도 가능하면 세워두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박씨의 88년 12월 가계부에 나타난 생필품 물가는 요즘과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당시 양배추는 1통에 350원(현재 1천300원),버섯 500원(2천원),갈치 1천원(7천원),짜장면 두 그릇 2천원(5천원),쇠고기 1근 3천원(1만2천원),콩나물 200원(1천원),파와 시금치는 430원(대파 1단 1천원)이었다. 한달 신문값은 2천800원에서 8천원으로,병원의 감기 치료비는 1천500원에서 5천원으로 올랐다. 88년 12월 부식비는 4만9천430원이었지만 지금은 8배 이상 많은 41만원선에 이른다.남편의 월급은 당시 51만원에서 1백79만원으로 올랐다. 그러나 매달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녹녹치 않다.결혼 이후 지금까지 매달 8만여원을 보험료로 납부해 온데다 별도로 45만원을 적금으로 붓고 있다.남편의 1800㏄ 자동차 기름값으로 12만원 가량이 들어간다. 내년 12월에는 오랜 전세생활을 끝내고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지만 5번 남은 중도금 불입이 힘에 겹기만 하다고 털어놓았다. 박씨는 “10여년 동안 몸에 밴 절약 습관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면 위기를 넘길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새해 가계부를 쓰다듬었다. 한편 한국소비생활연구원이 서울시내 가정주부 473명을 대상으로 얼마전 실시한 ‘IMF시대의 소비실태 조사’에 따르면 84.1%인 398명이 이전에 비해 소비생활이 바뀌었다고 답변했다. 이들이 긴축하는 소비생활 품목은 외식비가 69.8%로 가장 많고 식료품비 41.5%,의복·신발비 36.7%,사교육비 26.6%,용돈 24.6%의 순이다.
  • 전곡리 구석기유적/테마여행­문화재 탐방

    ◎한탄강변 낙엽밭서 만나는 구석기인/23만평 규모 사적지옆의 바위벼랑/겸재의 실경산수가 바로 여기인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계절 11월.이 계절이 깊어가면 도시를 훌쩍 벗어나 낙엽이라도 밟고 싶은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한 해를 훌훌 털어버리고 대지로 돌아온 낙엽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겼다.그것은 사색의 밀어다.그래서 옷깃을 더 여미게 하는 추위가 닥치기 전에 낙엽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다.몇 날을 별러 번거롭게 멀리 떠나기 보다는 역사가 숨쉬는 서울 근교에서 낙엽에 흠뻑 취해보는 방법도 있다. 지금 경기도 연천 한탄강변 수풀에는 낙엽이 수북 쌓였다.지난 주말에 비가 제법 내렸던 탓에 웬만한 활엽수 이파리는 이미 질대로 다 져버렸다.그 중에서도 구석기유적을 품에 안은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언덕이 볼만한 낙엽밭을 이루었다.국가가 지정한 사적 제268호인 이 한탄강가 구릉지대는 자그마치 23만평에 이른다.그 넓은 구릉지대 활엽수 사이를 낙엽을 밟고 걸어보면 가히 환상적이다. 그 숱한 낙엽들이 나딩구는 전곡리 언덕은 태초에 형성되었다.활화산이 뿜어낸 용암지대에 물길이 지나면서 골짜기가 파이고 오늘의 한탄강이 생겨났다.그리고 골짜기 가장자리로 황토와 모래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다.수십만년의 세월을 두고 흘러내려간 물줄기는 용암지대의 골짜기를 더욱 깊게 파놓아 지금의 바위벼랑 단애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한탄강이 아름답다 하는 것은 단애가 강물과 함께 어울려서일 것이다. 그 단애의 언덕에 자리 잡았던 인류가 바로 전곡리의 구석기인들이다.고고학자들은 구석기인들이 전곡리로 들어온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20만∼30만년전으로 보고있다.서울대박물관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는 지난 1979∼96년 사이에 모두 11차례에 걸쳐 전곡리 일대를 발굴했다.그 결과 구석기인들이 사용했던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양면날찍개와 외면날찍개,긁개 따위의 돌연모 1만여점을 찾아냈다. 이들 유물을 보여주는 작은 전시관도 유적지안에 자리를 잡았다.당시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복원한 여러 그림과 함께 출토유물을 전시해 놓았다.전곡읍내에서 KBS송신소 앞을 거쳐파주쪽으로 새로 난 강변길을 따라가다 왼쪽 길가 언덕에 전시관이 있다.그 언저리에 보이는 나무숲이 모두 사적지인 전곡리유적이다.이 땅의 선주민 구석기인을 만나는 마음으로 시공을 뒷걸음질 쳐보는 타임머신의 환상여행 코스가 거기 있다. 한탄강이 펼쳐진 강변의 비경은 옛날부터 시인의 노래가 되었다.또 묵객들 화폭의 실경산수로도 등장했다.도끼로 찍어놓은듯 깎아지른 절벽그림의 산수화 필법을 부벽준이라 하지 않던가.한탄강 맑은 물에 어린 태조의 산세는 부벽준 그것인데,겸재 정선(1563∼1594년)이 그린 한탄강 강변풍경 몇 점이 전해오고 있다.한탄강물은 얼마쯤 흘러가다 임진강물과 서로 합수하는 지라 겸재는 그림을 그리고 ‘임진적벽’이라는 화제를 붙였다. 겸재의 ‘우하등강’과 ‘웅연계람’ 역시 한탄강 주변을 그린 그림이다.이들 두 그림을 그린 연유를 기록한 ‘연강임술첩’을 보면 ‘임진적벽’의 스케치 현장은 한탄강가 어디의 절경일 것이다.그런 미술사와도 인연이 깊은 한탄강가는 지금도 아름답다.낙엽이 쌓인 전곡리유적에서 강건너로 바라본 단애의 바위산도 겸재 그림 못지않은 비경이다. 전곡리유적을 포함한 연천군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거의가 북한지역에 속했다.그래서 한탄강교 바로 못 미처 국도변에는 38선 표지가 서 있다.척 휘어진 안테나를 단 군용차들이 오가는 전곡리는 전선도 그만큼 가깝다. ◎여행 포인트/1992년 동아시아 첫 주먹도끼 출토/전기구석기시대 유적발굴의 효시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전곡리 한탄강 언덕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다.1978년 동두천시에 주둔중이었던 미군 그렉 보원이 구석기시대 석기 몇점을 이 유적 지표에서 채집하여 서울대에 가져온 것이 인연이 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그 다음해 서울대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에 들어가 지난 92년까지 2만여점의 구석기 유물을 땅속에서 찾아냈다.이 가운데는 양면핵석기에 해당하는 주먹도끼(hand-ex)가 포함되어 고고학계의 주목을 끌었다.주먹에 쥐고 쓰도록 만든 주먹도끼는 몸돌의 양쪽 겉면을 깨뜨려 날카로운 날을 세운 돌연모.당시 구석기인들에게는다목적 만능공구이자 무기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 구석기인들 입장에서 보면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연모라 할 수 있다.세계의 고고학자들은 주먹도끼를 전기구석기시대에 가장 발달한 석기류로 분류하고 아슐리안문화의 특징을 지닌 정형의 석기로 보았다.그래서 영국의 고고학자 모비우스는 아프리카와 유럽에서처럼 선진 구석기문화가 존재했던 지역 이외는 주먹도끼가 없다는 극언까지 서슴치 않을 정도였다. 그런 종래의 학설을 뒤엎고 전곡리유적에서 주먹도끼를 포함한 양면핵석기가 나왔다는 사실은 당시 학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동아시아에는 찍개문화가 있을 뿐이라는 모비우스의 성급한 결론을 깬 전곡리유적은 오늘날 세계 전기구석기유적 지도에도 올라갔다.이를 계기로 한탄강과 임진강유역 여러 군데에서 전기구석기유적이 계속 발굴되었다.전곡리유적은 전기구석기유적 발굴의 효시를 이룬 셈이다. 전곡리 구석기유적관에서는 바로 이러한 점을 유의하고 유물 하나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와 더불어 전시관에 내놓은 북경원인 복원 조각품과 동아시아 다른 지역의 구석기유적 및 유물을 참고로 하면 전곡리 구석기문화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찾아가는 길 전곡리유적 여행은 철도편을 이용하면 낭만적이다.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의정부에 내리면 상오 6시20분부터 하오 10시20분까지 매시간마다 소량 편성의 열차가 다닌다.차체에다 문신마냥 온통 고운 색깔의 꽃그림을 그려넣은 귀여운 열차다. 신탄리로 가는 이 열차를 타고 전곡역에 하차한다.전곡리유적은 역에서 가깝다.유적관을 보려면 자원봉사관리인 현지주민 임종태씨에게 전화(0355-32-2396)를 미리 걸어두어야 한다.재정 형편상 유급 상근관리인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적관 언덕아래 한탄강가에는 휴식공간도 있다.한탄강 상류에서 잡은 물고기로 조리한 매운탕과 연천산 한우고기를 주메뉴로 내놓는 한탄강가든(0355-32-4448)은 음식값도 비싸지 않다.
  • 대규모 산업·관광 주택단지 개발/음식쓰레기 자원화시설 의무화

    ◎내년부터/폐기물 감시주민 3년이상 거주자로 제한/환경부 입법예고 내년부터 대규모 산업단지와 관광단지 등을 개발할 때 음식물쓰레기를 퇴비나 사료로 만드는 시설을 의무적으로 단지내에 설치해야 한다. 또 자치단체장은 해당 지역의 건설종합계획을 작성할 때 음식물쓰레기의 퇴비화 또는 사료화시설의 설치계획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환경부는 24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폐기물처리시설 설치 촉진 및 주변지역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개정안은 관계부처 등의 의견 수렴 과정과 다음 달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개정안에 따르면 조성면적 50만㎡이상인 산업단지를 비롯,15만㎡이상인 공장,1백만㎡이상인 관광단지나 택지 등을 개발·설치하거나 증설할 때 사업주체는 분리배출되는 음식물 등 유기성폐기물을 퇴비나 사료로 만들기 위한 시설을 단지내에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단 1백만㎡ 이상의 공동주택단지나 택지 개발과 관련,해당지역에 적정규모의 퇴비화나 사료화 시설을 설치하기가 곤란하다고 인정될 경우 사업주체는 적정규모의 음식물쓰레기 자원화시설을 짓는데 필요한 금액을 관할 자치단체에 납부한 뒤 다른 지역의 퇴비·사료화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한편 폐기물처리시설을 갖춘 자치단체는 시설이 없는 지역의 폐기물을 처리해줄 때 처리수수료를 20%까지 추가 징수할 수 있다. 특히 폐기물의 반입·처리과정을 감시하는 주민감시요원의 자격이 해당 주변영향지역에 3년 이상 거주한 주민으로 제한된다.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 등은 감시요원이 될 수 없다. 감시요원의 수는 1백만㎡ 이상의 매립지에는 10명 이내,1백만㎡ 미만에는 5명 이내,하루 처리용량 50t이상 소각시설에는 3명 이내로 각각 제한된다. 감시방법도 현재처럼 폐기물을 직접 감시하는게 아니라 ‘시설 설치기관이 제대로 감시·감독하는 지’를 감시하는 것으로 바뀐다. 주민대표 및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입지선정위원회의 입지선정 타당성조사를 받아야 하는 폐기물처리시설의 규모는 쓰레기매립장이 현재 30만㎡ 이상에서 15만㎡ 이상으로,소각시설은 하루 처리용량 300t 이상에서 50t 이상으로 각각 확대된다.
  • 식당서 집단급식으로 경쟁심 유발/서울 경희초등교 사례

    ◎음식쓰레기 10분의1로 줄여/꺼리는 음식도 반드시 먹게… 편식습관 고쳐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고 학생들의 편식습관도 고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서울 경희초등학교는 지난 3월 ‘어린이 식당’을 개관,3∼6학년 7백여명은 학교에서 주는 점심을 식당에서 먹도록 하고 있다.‘교육은 밥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이의영교장의 신념에 따른 조치였다.음식물쓰레기 줄이기도 중요한 교육의 하나라는 것이 평소 생각이다. 이교장이 ‘어린이 식당’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0년 6월부터 실시한 교실 배식이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전교 24개 학급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컸다. 그러나 식당배식은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점심을 먹기 때문에 학년·학급간 경쟁심을 유발,음식물쓰레기 줄이기에 효과적으로 동참시킬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하루에 50㎏ 가량 나왔던 음식물쓰레기가 ‘어린이 식당’ 개관 이후 5㎏으로 줄었다.남은 음식은 학교에서 기르는 비둘기와 토끼,공작새 등의 먹이로 활용한다. 학생들이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교육시키다 보니 편식습관도 고쳐졌다.많은 학생들이 꺼리는 시금치나 야채샐러드가 나오는 날이면 교사들이 배식구에 지켜서서 단 한쪽이라도 식판에 담아가도록 한다.
  • 미 대형 서적상 책이 안팔린다

    ◎매장 3배 늘렸어도 판매실적 제자리/고객들 “책에 눌려 찾아볼 엄두못내” 소수의 전국 체인망이 미국의 서점을 독점하면서 매장 면적은 크게 늘었으나 중요한 도서판매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거기에 이같은 서점의 대형화 추세는 출판문화에 상당한 부작용을 빚는 것으로 지적된다. 우리에게 흔한 개인이 구멍가게 식으로 꾸리는 서점 형태가 사라진지 오래인 미국에서는 얼마전까지 한 개인이 일정지역에 몇개의 서점망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형식이 흔했다.그러나 90년대들어 음식점,모텔,철물점,약국에 이어 서점이 전국 체인망 화하면서 전국 어느서나 똑같은 간판의 책방이 들어서게 됐다.전국 체인망 서점은 강한 개성의 독립서점들을 인구가 적어 장사가 별로인 한적한 곳으로 밀어내면서 치열한 상호경쟁을 통해 보더즈,반즈앤드 노블즈,크라운 등 단 서너개로 정예화되는 중이다.이같은 전국적 과점 현상과 함께 매장이 무지하게 넓은 슈퍼스토어 책방을 일반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90년대에 미국 서점의 총 매장면적은 3배 가깝게 커졌으나 도서판매 실적은 지난 3년동안 똑같은 것으로 집계된다.책을 팔고,책을 진열해 놓은 공간이 늘어났으면 도서구매 인구와 도서판매 또한 조금이라도 늘어나는게 자연적인 이치일텐데 이런 기대가 어그러진 것이다.종전의 독립 서점들이 대략 200평의 매장에 1만권 정도의 책을 진열하는데 비해 미국 책방의 전형으로 굳어가는 슈퍼서점들은 이 10배 정도의 면적에다 15만권 상당의 책들을 내놓고 있다.서점의 매장면적이 어느 선이상으로 커지면 책들은 오히려 ‘사라져 버리고’ 책 사러온 사람들은 책에 압도당해 볼만한 책들을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출판문화에 끼치는 부작용으로 이 전국 체인망 서점들은 팔리지 않은 책은 출판사에 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반품처리하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슈퍼서점에 쌓인 책들은 결국 출판사가 공짜로 제공한 것으로 이들 서점은 돈들지 않고 초대형 책방 위세를 톡톡히 부리는데 이를 책의 ‘벽지’화라고 꼬집은 사람도 있다.반품율이 40%에 달함에 따라 출판사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하나같이 ‘베스트셀러’ 만들기 경쟁에 나서게 된다.
  • 페루 마추픽추(세계 문화유산 순례:46)

    ◎고대 잉카제국 천혜의 요새도시 장관/2,400m 고산에 신전·왕궁·서민주택 한곳에/계단 농경지·상수도시설 갖춘 ‘산상 자급도시’ 페루의 마추픽추(Machu Picchu)는 한때 잃어버린 고대도시였다.고고한 안데스산맥의 푸른 기운을 한껏 뿜어내며 해발 2천400m 고지에 자리한 잉카 최후의 도시이기도 하다.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쫓긴 잉카인들이 마지막으로 은거했다는 마추픽추.잉카문명의 위용과 신비를 모조리 한데 모아놓은듯 그야말로 장대했다. 쿠스코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아침 6시가 조금 지나 협궤열차 아우토바곤에 몸을 실었다.우루밤바강을 따라 이어진 잉카의 흔적들과 수풀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만년설을 감상하는 맛에 지루함을 덜며 3시간 남짓 달렸을까.푸엔테스 루이나스라는 작은 마을에 닿았다.여기서 마추픽추까지는 다시 버스를 타고 8㎞나 되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랐다.길옆으로 내려다 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했다.침략자를 피해 숨어들기 알맞은 천혜의 요새다. ○잉카제국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 유적지는 두 개의큰 봉우리를 양쪽에 거느린 너른 분지에 자리했다.잉카말인 케초아어로 ‘늙은 봉우리’를 뜻하는 마추픽추에다 왕족과 귀족 및 서민들의 주거지를 먼저 만들었다.건너편에 더 높은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는 적의 침략을 감시하는 망루로 삼았다.그리고 분지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까마득한 절벽이 병풍을 둘렀다. 봉우리 정상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질서정연했다.잉카유적 어디서나 볼수 있듯 태양의 신전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궁전,제사장·시종·군인들의 거처가 둘러싸였다.경사면 아래쪽으로는 서민들의 주택과 농경지가 이어졌다.또 고산지대인 탓에 1∼2m폭으로 만든 계단식 밭이 구불구불 돌아갔다.샘물을 이용한 17개의 양수시설과 상수도 시설도 갖춘 이 산상도시는 농경지 면적으로 미루어 2만명 정도는 족히 먹고 살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그러니까 자급자족의 공동체였던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울린 도시이자 요새이기도 했다.산꼭대기로 피신하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도시 전체를 2∼3m 높이의 돌벽으로 둘러쌓았다.출입구는 단 하나만을 두었을 뿐이다.외침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려는 잉카인들의 노력은 대단했다.막다른 벼랑끝을 기어 올라야 했던 그들의 가여운 처지가 자꾸만 연상됐다. 봉우리 정상에는 잉카인들의 무덤이 있었다.1911년 미국인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무덤을 처음 발견했을 당시 120여구의 유골이 나왔다고 한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유골은 모두 어린이나 여자·노인들 것이었다.이에 대한 학설은 분분했다.쿠스코가 정복당한뒤 태양의 처녀들이 마지막으로 숨어살다 죽은뒤 묻히거나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두 죽고 어린이·여자·노인들만 남아 끝까지 살다 죽은 것이라는 등의 추측이 그것이다. ○주변에 깎아지른 절벽 좁은 비탈길을 내려가 도시안으로 들어섰다.미로형의 통로를 따라 늘어선 신전이나 왕궁은 쿠스코에서 보던 것 보다는 다소 거친 모습이었다.그러나 5각·7각·32각 등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벽을 쌓았던 당시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기는 마찬가지였다.특히 왕궁과 왕비궁 사이의 커다란 자연석 위에 자리한 태양의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 가운데 가장 정교했다.왕궁 옆으로는 마치 콘도르의 비상을 연상케 하는 바위가 버티어 있고,그 위로 콘도르 신전이 우뚝했다.콘도르는 지금의 페루는 물론 볼리비아·아르헨티나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호령했던 잉카 왕권의 상징이었다. ○1911년 미 고고학자 발견 잉카문명에 대한 모든 수수께끼는 마추픽추에 집합됐다.우선 잉카에는 짐을 끄는데 부릴만한 가축이 거의 없었다.그런데도 몇톤씩 나가는 돌들이 겹겹이 쌓여있다.또 돌을 가공하는데 사용한 도구도 이제까지 무엇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잉카인들은 무엇을 가지고 돌의 도시를 건설한 것일까.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여행가이드/현지에 숙박시설 없어 쿠스코서 여장 풀어야 마추픽추를 가려면 미국 LA에서 페루 수도 리마를 거쳐 국내선을 타고 쿠스코까지 가야 한다.LA에서 리마까지는 비행기로 8시간,리마∼쿠스코는 1시간 정도 걸린다.마추픽추에는 숙박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쿠스코에서 여장을 풀어야 한다.식사는 호텔 보다는 시내로 나가 페루음식을 즐기는 것도 묘미다. 마추픽추를 가려면 쿠스코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협궤열차 아우토바곤을 타는 것이 좋다.3시간 남짓 걸리는 기차여행이지만 주변경관을 살피는 즐거움도 맛볼수 있다.마추픽추를 빠져 나올때는 하오 3시에 출발하는 아우토바곤을 타면 된다.왕복 기차요금과 입장료·셔틀버스비를 합치면 1인당 140솔(미화 약 65달러)정도.
  • 중국반환 3개월/홍콩이 달라지고 있다:상

    ◎대륙의 ‘보이지않는 손’/경제자유 서서히 압박/금융기관 감독 강화·물가관리 착수/3∼5년뒤 중국형 시장체제 갖출듯 홍콩이 지난 7월 1일 중국에 반환됐다.100년이 넘도록 ‘영국식 자본주의’에 젖었던 홍콩이 공산주 체제에 제대로 융합될 수 있을까.분명한 것은 홍콩 특유의 자유방임체제와 달러화에 연동된 홍콩달러의 가치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반환 3개월이 지난 홍콩의 현주소를 조망해본다.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중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홍콩의 현 체제를 인정해주고 있다.홍콩을 번영케 한 자유방임주의 기조도 그대로다.그러나 알게 모르게 통제와 자유가 혼합된 중국의 통치방식이 홍콩에 스며들고 있다.가시적이기 보다 상징성을 띤 채 홍콩의 자유방임체제를 한쪽 귀퉁이에서 무너뜨리고 있다. ○통제·자유 혼합통치 홍콩에서는 중국의 국화인 취란(바우히니아)과 국기인 오성기를 북경에서보다 더 쉽게 볼 수 있다.나뭇잎이 5개인 취란은 호텔의 광고 전광판에서 번쩍이고 있으며 공원 담장에도빠짐없이 새겨져 있다.호텔 현관에는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을 대신해 오성기와 취란을 그린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홍콩시민들은 무심히 지나치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중국 시민임을 강요당하고 있다. 한때 홍콩에서는 중국 해방군이 주요 관공서나 공공건물에서 배치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그러나 막상 반환된 이후 홍콩에서 중국 해방군은 단 한명도 볼 수 없다.중국반환의 상징으로 홍콩에 주둔하고 있을 뿐 홍콩으로의 출입이나 외박은 일체 허용되지 않고 있다.1국 2체제의 유지를 전세계,특히 대만에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제스처이자 해방군에 만연된 부패를 홍콩에 ‘전염’시키지 않겠다는 조치로 보인다.그렇지만 이는 중국이 홍콩을 활용하고 있으며 홍콩을 통제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홍콩은 물가를 관리하지 않는다.음식비나 주택값 등을 시장에 맡긴다.독과점 업체가 발생해도 관여치 않는다.때문에 외부요인에 의한 물가 급등이 빈번하다.9월 23일부터 25일까지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연차총회가 열렸을 때 주변 식당의 음식비는 무려 30%나 올랐다. 그러나 이같은 홍콩의 자유방임체제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체계는 이미 강화되기 시작했고 공공요금의 경우 과거 일정기간 공시를 통해 인상하던 것을 지금은 토요일에 기습 발표,월요일부터 시행하는 경우가 잦아졌다.서비스 부문 등에서 독과점 업체의 가격횡포를 조정하려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특히 25평형 아파트의 월세가 3백만∼4백만원에 이르는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한 홍콩당국의 노력은 이례적이다.홍콩의 주택업체들이 이에 맞서 주택공급을 늦추려하지만 중국반환 이후 큰 흐름은 시장실패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과점 조정 움직임 미국 증권사인 J·P모건사의 홍콩지점은 자유방임주의가 홍콩으로 하여금 급변하는 시장 및 생산 조건에 적절히 적응토록 했으나 산업 전반에서 독과점을 유발,시장의 실패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특히 부동산,항만 하역료,통신·전기·가스,유통,TV방송,은행 등에서는 더욱 심해 은행의 경우 2개 은행이 전체 예금과대출의 53%,수퍼마켓의 경우 2개 업체가 70%,주택공급은 3개업체가 50%,항만 하역은 1개 업체가 48%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모건사는 그러나 중국반환 이후 홍콩의 독·과점 상태는 중국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의 경쟁 강화로 점차 엷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예컨대 중국이 홍콩을 거치지 않고 외국과 교역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외국업체들도 홍콩과 인접한 심천 등에서 중국과 직교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일부 다국적 기업은 본사를 홍콩에서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이같은 움직임은 중국정부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지기 보다 기업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기업의 이윤추구적 행동에 따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홍콩이 중국체제에 편입될 것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결국 중국 관료주의의 침투와 부패의 만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중국식 관행에 따른 상거래의 불투명성 등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홍콩의 자유방임체제와 국제 금융센터로서의 지위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다만 중국반환을 계기로 독과점 등 시장실패를 해소하려는 홍콩당국과 중국정부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며 경쟁체제를 우선으로 삼는 시장체제로 개편될 전망이다.기업은행 김영진 홍콩지점장은 “현재로선 중국 내에 홍콩을 대신할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3∼5년간은 현재의 지위를 누릴 것”이라며 “그렇지만 지금같은 독점적 지위가 아닌 싱가포르나 상하이 심천 등 중국의 남부지역과 경쟁하는 중국형 시장체제를 갖출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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