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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모두가 거부감 없는 불교, 평화통일 마중물 희망을 봤다”

    “남북 모두가 거부감 없는 불교, 평화통일 마중물 희망을 봤다”

    출가승들은 입적 때까지 수행과 포교라는 두 바퀴의 수레를 끌며 정진한다. 하지만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은해사 회주) 대종사는 남다른 이력으로 회자된다. ‘남북 불교 교류의 물꼬를 튼 통일운동가.’ 그 유명한 ‘밥이 통일이다’라는 명제를 남긴 불교계의 대북 분야 선구자가 ‘북한불교 백서’(조계종출판사)를 출간해 화제다. 30년 이상 쌓은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북한 불교계, 특히 유일 종단인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을 심도 있게 해부해 눈길을 끈다. 북한불교의 유일한 종단이자 종무기관인 조선불교도연맹에 대한 백과사전이랄까. 스님은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그 백서를 앞에 두고 “불교는 북한에서 미약한 가운데에도 정권과 상관없이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종교”라며 “승려로서 북한불교에 대해 바른 견해를 국민과 불자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원을 세워 유언, 유서처럼 정리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법타 스님은 북한을 방문한 첫 한국 스님이다.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제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30여년간 10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 평양·개성·금강산·묘향산 등지의 지역사찰을 찾아 북한불교를 조사했다.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조직하고 북한 지역에 국수·빵 공장을 설립해 굶주린 동포를 도우면서 조불련과의 깊은 신뢰를 쌓아 왔다. 한국전쟁기 불에 탄 금강산 신계사 복원 등에 발벗고 나섰고, 북한사찰의 단청지원 불사도 이어 갔다. 덕분에 쉽게 구할 수 없는 북한불교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집대성해 한 권의 책으로 냈다. 스님은 승려로는 처음으로 동국대 대학원 북한학과에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북한 전문가다. 백서에는 그 공력을 볼 수 있는 희귀 자료들이 수두룩하다. 북한 최고 지도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문화재·불교에 대한 관심이 특히 눈길을 끈다.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등지에서 입수한 김일성 주석의 사찰 현지 지도자료를 보면 집안 내력에서 기독교와 가까왔던 김 주석이 해방 직후부터 1994년 사망 때까지 현지 지도한 2만 600개 단위 중 126곳이 역사유적 현지 지도였다. 역사유적 중 50곳이 사찰 방문이었고 그중 묘향산 보현사 방문이 17회로 가장 많았다.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 위원장이 해방 이후부터 2011년 사망 때까지 찾은 역사 유적지 72곳 중 34곳이 사찰이었다. 법타 스님은 이를 두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외쳤던 두 지도자는 종교를 인민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으나 한국의 오랜 전통이 담긴 사찰, 불교를 멀리하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미래지향적인 사회통합에 종교 통합이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불교는 남북 모두 가장 거부감을 갖지 않는 종교인 만큼 애국 종교로 봐야 해요. 서산·사명, 만해 한용운 같은 분들을 북측에서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스님은 책에서 만해 한용운의 아들이 한국전쟁 이후 월북했고, 그 후손이 평양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밝힌다. 스님은 북한에서의 불교신앙을 개인이 아닌 집단에 의해 이뤄지는 정치적 종교활동으로 평가한다. 북한 지역엔 68개 사찰이 남아 있지만 자발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채 모두 국가 주도로 통일전선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북한의 승려들은 모두 통일전선부 소속 공무원”이라고 밝힌 스님은 “상황은 암울한 편이지만 남북이 유일하게 공통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은 분야인 불교에서 희망을 봤다”고 강조했다. “불교가 남북 교류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법타 스님은 조계종 총무부장, 은해사 주지, 동국대 정각원장을 지냈다. 2017년부터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은해사 회주로 있으며 2018년 동화사에서 조계종 최고 법계인 대종사를 받았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불교, 통일 마중물 될 희망의 종교”…법타 스님이 말하는 북한불교의 모든 것

    “불교, 통일 마중물 될 희망의 종교”…법타 스님이 말하는 북한불교의 모든 것

    불교계 대북 선구자 법타 스님 ‘북한불교 백서’ 펴내출가승들은 입적 때까지 수행과 포교라는 두 바퀴의 수레를 끌며 정진한다. 하지만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은해사 회주) 대종사는 남다른 이력으로 회자된다. ‘남북 불교 교류의 물꼬를 튼 통일운동가.’ 그 유명한 ‘밥이 통일이다’라는 명제를 남긴 불교계의 대북 분야 선구자가 ‘북한불교 백서’(조계종출판사)를 출간해 화제다. 30년 이상 쌓은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북한 불교계, 특히 유일 종단인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을 심도 있게 해부해 눈길을 끈다. 북한불교의 유일한 종단이자 종무기관인 조선불교도연맹에 대한 백과사전이랄까. 스님은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그 백서를 앞에 두고 “불교는 북한에서 미약한 가운데에도 정권과 상관없이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종교”라며 “승려로서 북한불교에 대해 바른 견해를 국민과 불자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원을 세워 유언, 유서처럼 정리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법타 스님은 북한을 방문한 첫 한국 스님이다.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제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30여년간 10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 평양·개성·금강산·묘향산 등지의 지역사찰을 찾아 북한불교를 조사했다.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조직하고 북한 지역에 국수·빵 공장을 설립해 굶주린 동포를 도우면서 조불련과의 깊은 신뢰를 쌓아 왔다. 한국전쟁기 불에 탄 금강산 신계사 복원 등에 발벗고 나섰고, 북한사찰의 단청지원 불사도 이어 갔다. 덕분에 쉽게 구할 수 없는 북한불교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집대성해 한 권의 책으로 냈다. 1989년 북한 방문 후 본격 통일운동...100여 차례 방문 스님은 승려로는 처음으로 동국대 대학원 북한학과에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북한 전문가다. 백서에는 그 공력을 볼 수 있는 희귀 자료들이 수두룩하다. 북한 최고 지도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문화재·불교에 대한 관심이 특히 눈길을 끈다.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등지에서 입수한 김일성 주석의 사찰 현지 지도자료를 보면 집안 내력에서 기독교와 가까왔던 김 주석이 해방 직후부터 1994년 사망 때까지 현지 지도한 2만 600개 단위 중 126곳이 역사유적 현지 지도였다. 역사유적 중 50곳이 사찰 방문이었고 그중 묘향산 보현사 방문이 17회로 가장 많았다.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 위원장이 해방 이후부터 2011년 사망 때까지 찾은 역사 유적지 72곳 중 34곳이 사찰이었다. 법타 스님은 이를 두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외쳤던 두 지도자는 종교를 인민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으나 한국의 오랜 전통이 담긴 사찰, 불교를 멀리하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남북이 모두 수용하는 애국 종교...불교야말로 통일의 희망” “미래지향적인 사회통합에 종교 통합이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불교는 남북 모두 가장 거부감을 갖지 않는 종교인 만큼 애국 종교로 봐야 해요. 서산·사명, 만해 한용운 같은 분들을 북측에서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스님은 책에서 만해 한용운의 아들이 한국전쟁 이후 월북했고, 그 후손이 평양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밝힌다. 스님은 북한에서의 불교신앙을 개인이 아닌 집단에 의해 이뤄지는 정치적 종교활동으로 평가한다. 북한 지역엔 68개 사찰이 남아 있지만 자발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채 모두 국가 주도로 통일전선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북한의 승려들은 모두 통일전선부 소속 공무원”이라고 밝힌 스님은 “상황은 암울한 편이지만 남북이 유일하게 공통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은 분야인 불교에서 희망을 봤다”고 강조했다. “불교가 남북 교류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법타 스님은 조계종 총무부장, 은해사 주지, 동국대 정각원장을 지냈다. 2017년부터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은해사 회주로 있으며 2018년 동화사에서 조계종 최고 법계인 대종사를 받았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문화예술거리 벽화로 ‘품격 있는 도봉’

    문화예술거리 벽화로 ‘품격 있는 도봉’

    서울 도봉구가 방학천 문화예술거리에 벽화를 조성했다고 5일 밝혔다. 벽화 작업은 지난 7월부터 시작됐다. 완성된 벽화의 이름은 ‘천년 매화도’로, 방학천 옹벽 57m 구간에 단청부조기법으로 그려졌다. 부조기법은 평면적인 모양에 요철로 기복을 줘 입체감을 주는 기법이다. 작품은 초년기, 유년기, 중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치는 사람의 일대기를 매화나무가 점차 고목이 돼 가는 과정으로 표현해 인생과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다고 도봉구는 설명했다. 또 매화꽃이 조화롭게 흩날리는 모습은 구민들이 서로 어우러져 화합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도봉구는 벽화와 함께 조명을 추가 설치해 보행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야간에도 벽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벽화 제막식은 지난달 29일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한 채 진행됐다. 방학천 문화예술거리는 과거 유흥업소 밀집 지역으로 주민의 민원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하지만 도봉구가 도시재생 모델로 선정한 뒤 지속적인 노력으로 지역 주민과 청년예술가들을 위한 거리로 탈바꿈했다. 현재는 크고 작은 카페, 음식점, 공예점, 주민커뮤니티 공간인 ‘방학생활’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앞으로도 방학천 옹벽 보강 공사가 완료된 구간에 차례로 벽화를 확대 조성해 구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다양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라며 “이 벽화가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지친 구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방학천 문화예술거리 활성화와 지역 명소화의 발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창덕궁 후원 끝자락에 남은 효명의 예악정치

    창덕궁 후원 끝자락에 남은 효명의 예악정치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큰 살림집이 숨어 있으니 연경당이란 건물이다. 1828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창건했는데 당시의 모습은 현존 건물과는 전혀 다르다. ‘동궐도’에 그려진 이 집은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왕실전용 극장식 연회장이었다. 효명은 이 집을 직접 짓고, 이곳에서 종합공연인 ‘진작례’를 총지휘했고, 본인이 손수 창작한 노래와 무용들을 선보였다.●18세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조선조 23대 순조의 권력은 허약했고 인생은 외로웠다. 아버지 정조가 49세로 급서해 11세 나이로 즉위했다. 계증조모 정순왕후는 노론 일당과 함께 어린 순조를 압박했다. 조모 혜경궁의 풍산홍씨와 처가인 안동김씨 세력은 정치 혐오증을 심어 주었다. 어린 시절의 압력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순조의 유일한 희망은 총명한 아들 효명세자(본명 이영·1809~1830)였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정조의 환생’이라 불릴 정도로 지혜롭고 강력한 군왕의 기질을 보였다. 1827년 순조는 건강을 이유로 18세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위임했다. 세자는 순조를 대신해 노론과 외척세력을 약화시키고, 50여차례 과거를 실시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소외됐던 소론과 남인 인사를 중용했다. 자주 왕릉을 참배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며, 동원된 군사를 훈련시키고, 행차 시 민심을 파악했다. 정조의 화성원행을 연상케 하는 복합적인 통치술이었다. 하이라이트는 궁중 연향을 열어 예악정치를 펼친 것이다. 연향이란 왕과 왕비에게 궁중 정재에 맞춰 음식을 바치는 공연 겸 연회이다. 정재란 음악과 노래와 춤을 일체화한 종합공연이었다. 가장 큰 규모의 진풍정부터 진연과 진찬, 그리고 가장 간략한 진작 등 여러 규모의 연향이 있었다. 효명은 대리청정 기간에 11회의 진찬과 진작을 열었다. 왕에게 바치는 연향에 참석한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효명은 연향 다음날 ‘익일회작’을 열어 신하들이 바치는 술잔을 받았다. 젊은 세자가 스스로 위상을 높이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1828년 모친 순원왕후의 4순 잔치인 ‘무자진작례’와 이듬해 순조의 4순과 등극 30년을 기념한 ‘기축진찬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무자년 진작은 2월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6월에 연경당에서 두 차례 열었다. 수십 명의 신하들이 참석하도록 대비전인 자경전을 고쳐 사용했고, 연경당은 진작례를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비록 연경당 진작은 왕족과 외척 12명만 참석한 가족행사였으나 총 23개의 정재 악장을 시연한 대형 공연이었다. 한 악장마다 술잔과 안주를 올리는 23코스의 연향이다. 이 가운데 14종의 정재는 효명이 직접 작사와 안무를 한 창작물로 이름이 높다. 더 나아가 ‘경사스런 연회를 베푸는 집’이라는 연경당까지 본인 스스로 계획 시공해 건축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궁중정재의 맞춤 극장 ‘연경당’ 효명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는 헌종과 철종조를 거친 후 흥선대원군의 차남을 양자로 삼아 고종으로 즉위시켰다. 1865년 고종은 양부 효명의 흔적을 기리기 위해 연경당을 대대적으로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남겼다. 현존 연경당은 고급 민간 살림집 형식이지만 창건 연경당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창건 연경당은 동궐도에 전모가 그려졌고 의궤에 자세한 이용기록이 남았다. 몸채는 남쪽으로 터진 ㄷ자 모양의 집이고 안마당에는 박석을 깔았다. 전면 담장은 붉은색을 칠한 판장(널판담)이었다. 이처럼 개방적이고 가변적인 건물은 보안과 위용을 중시하는 궁궐에서 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이 집은 한마디로 공연장이었다. ㄷ자 몸채의 안마당에서 무희들이 춤을 추었고 남쪽 판장 안쪽에 악단이 자리잡았다. 몸채 가운데 대청은 왕과 왕비의 전용 객석이다. 연경당 동편에 넓은 마당이 있고 남북으로 두 건물이 놓였다. 이곳은 공연자들이 연습하고 대기하던 리허설장이다. 총감독 효명세자 부부는 객석과 무대 사이에 자리잡았다. 초대된 남자 손님은 효명의 외조부인 김조순을 비롯해 4명, 여자 손님은 고모 숙선옹주 등 4명이었다. 남자들은 ㄷ자 몸채의 동편 날개에서, 여자는 서편 날개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무대인 마당은 객석인 건물보다 몇 단이 낮다. 이동식 바닥인 보계를 깔아 무대를 높였고, 무대 위에 유둔차일을 설치했다. 광목에 기름을 먹인 유둔차일은 햇빛과 비를 막기도 하지만, 밤 공연 때 조명을 달고 음향을 모으는 보조 장치였다. 이처럼 완벽한 공연시설은 연경당 외에 발견되지 않는다. 효명 사후에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건물도 퇴락해 잊혀져 갔다. 고종이 중건한 연경당은 왕실의 피난처나 외국 사신들의 연회장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효명의 연경당은 조선조의 유일한 전용극장이었다.그의 롤모델인 정조는 창덕궁 후원 주합루 일대에 규장각을 설치해 개혁 정치의 대계를 구상했다. 효명은 주합루 뒤편 언덕 너머 애련지 일대를 예악정치의 근거지로 삼았다. 애련지 서쪽에 연경당을 지었고, 남쪽에 개인용 서재를 지었다. 현재 ‘기오헌’으로 남은 이 작은 건물은 원래 의두합이었고, 바로 옆에 운경거라는 더 작은 집이 있다. 의두합은 4칸, 운경거는 1.5칸으로 궐내 최소이며 단청도 없는 소박한 집이다. 겉모습이나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했던 효명의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낸 집이다.●예술 군주 효명세자의 못 이룬 꿈 효명이 정무활동을 한 공적 공간은 동궁인 중희당 일대였다. 세자의 정전인 중희당 서쪽으로 세자 전용학교인 시강원이, 동쪽으로 전용 도서관이 연결돼 있었다. 중희당 앞마당에는 측우기와 풍기대, 혼천의 등을 설치해 과학적 관심을 과시했다. 중희당은 없어져 현재 후원 입구의 큰길이 됐으나 시강원은 성정각으로, 도서관은 삼삼와와 칠분서로 일부가 남아 있다. 중희당 뒤편에 세자의 침전인 영연합이, 그 서쪽으로 수방재라는 특이한 건물이 있었다. 양쪽 벽을 벽돌로 쌓은 청나라풍의 건물이었다. 이는 북학과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던 효명이 특별히 지은 건물일 것이다. 이 모든 건물들은 ‘동궐도’에 정확하게 묘사돼 있다. 동궐도 추정 제작기간인 1826~1830년은 대리청정 기간과 거의 겹친다. 그림에 사용된 평행투시도법은 청나라를 거쳐 들어온 서양의 수학적 도법이다. 중희당 일대가 화면의 전면 중앙에 놓여 효명의 공간을 강조하고 있다. 효명세자는 추사 김정희에게 영향받았고, 개화파들의 스승인 박규수와 친분이 깊었다. 이들은 선진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동궐도 역시 효명의 기획 아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궁중정재 53수 가운데 효명의 창작품이 26수이다. 연경당 진작에서 시연한 ‘춘앵전’이 특히 유명하다. ‘봄날 꾀꼬리의 지저귐’이라는 뜻으로, 정재로는 드물게 두 평 남짓한 화문석 위에서 홀로 추는 독무이다. 노랫말도 아름답지만 복합적인 춤사위로 정재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창작 정재를 시연하기 위해 전국에서 재주 있는 기녀 85명을 뽑아 훈련을 직접 관장했다. 당시 대사헌인 박기수가 “성색의 즐거움에 방탕하기 쉽다”고 탄핵했다. 효명은 “정재의 본질도 모르는 채 비방하는 것”이라 꾸짖고 귀양을 보냈다. 춤과 연향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에 비견하기도 한다. 절대군주이며 근대 발레의 중흥자라 평가받는 루이14세는 발레 파티를 직접 기획하고 출연하기도 했다. 여섯 살에 즉위한 소년왕이 대신들의 섭정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1829년의 실록은 “40이 안 되어 원손(후일 헌종)을 얻고 대리청정으로 태평성대이니 겹경사 아닌가!”라고 순조의 기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갑자기 세자는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곧 21세에 요절했다. 순조는 “하루아침에 재앙이 내려 만사가 기왓장처럼 깨어졌구나.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슬프고 또 슬프도다”라는 애끓는 장문의 조사를 남겼다. 효명은 춤과 노래를 창작하고, 이를 공연할 집을 짓고, 공연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목표는 원대했으며, 방법은 창의적이었고, 디테일은 완벽했다. 그러나 봄날 꾀꼬리가 여름에 사라진 것같이 그의 아름다운 시절은 너무나 짧았고, 이후 조선왕조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게 됐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이재정 최고위원 예비경선 탈락…원외 염태영 본선, 양향자 당선 유력

    이재정 최고위원 예비경선 탈락…원외 염태영 본선, 양향자 당선 유력

    민주당 최고위원 예비경선 결과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예비경선에서 이재정(재선) 의원과 정광일 안중근 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대표가 24일 탈락했다. 민홍철 민주당 중앙당선관위원장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된 예비경선 투표 후 노웅래(4선) 이원욱(3선) 김종민 소병훈 신동근 한병도(이상 재선) 양향자(초선) 의원, 염태영 수원시장 등 8명이 오는 8월 29일 최고위원 경선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이 의원이 예비경선에서 탈락하면서 본선 진출자 중 유일한 여성인 양 의원의 최고위원 당선은 사실상 확정됐다. 민주당 당규에 따르면 최종 5명 선출직 중 1명은 여성 몫으로 보장된다. 원외 인사인 염태영 시장은 기초자치단체장으로는 처음으로 최고위원 예비경선을 통과했다. 한편, 시도당 위원장과 대의원을 선출하는 지역 경선은 25일 제주도부터 시작된다. 이어 강원(7월 26일), 부산·울산·경남(8월 1일), 대구·경북(2일), 광주·전남(8일), 전북(9일), 대전·충남·세종(14일), 충북(16일), 경기(21일), 서울·인천(22일)에서 열린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주말 콕! 이 전시]레고스케이프트·벤딩 라이트

    [주말 콕! 이 전시]레고스케이프트·벤딩 라이트

    레고스케이프트(Legosacped): 6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공근혜갤러리. 무료 어릴 적 레고를 유난히 좋아했다. 조각을 하나씩 맞춰 나만의 작품을 완성하는 그 질서정연한 세계에 매혹됐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매년 1월 1일 신년 의례 치르듯 레고와 마주한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는 신진작가 젠박(35) 얘기다. 그는 레고를 모티프로 도시를 재해석해 화폭에 담는다. 레고(lego), 도시경관(cityscape), 도피(escape)를 합한 ‘레고스케이프’ 시리즈를 2017년부터 발표해왔다. 삼각형 지붕, 사각형 창문으로 단순화한 도시 풍경은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감을 만나 동화같은 감성을 전달한다. 과거형 시제 어미를 붙인 레고스케이프트는 이번에 처음으로 발표하는 시리즈다. 집이나 빌딩 형태는 더욱 추상화돼 색과 면으로만 남았다. 코로나19로 집밖에 나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깨달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작업에 녹아들었다고 한다. 북촌의 단청색 기화, 뉴저지 교외의 굴뚝을 형상화한 나무 입체설치 작품은 평면회화와 같은 듯 다른 느낌을 전한다. 이번 전시는 공근혜갤러리가 기획한 ‘포스트 코로나 릴레이’전의 첫 주자다. 9월 네덜란드 작가 어윈 올라프, 내년 1월 밀레니언 영 코리안 아티스트 전, 4월 영국 작가 마이클 케나와 설치작가 김승영의 전시가 이어진다.벤딩 라이트(Bending Light): 8월 14일까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페이스갤러리. 무료 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빛과 공간’(Light and Space)운동을 이끌었던 세 명의 거장 작가, 피터 알렉산더와 제임스 터렐, 로버트 어윈의 최근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표현 양식은 다르지만 빛을 주요 매체로 삼아 공간과 지각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작품 세계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작업 초기에 레진을 활용한 기법으로 이름을 알린 피터 알렉산더는 2000년대 중반부터 우레탄으로 재료를 바꿨다. 우레탄 조각품들은 빛을 발하기보다 흡수하고, 반사시킨다. 반투명하거나 불투명한 기하학적 형태의 오브제들은 관객의 심상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품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와 올해 제작한 조각품 6점이 나왔다. 알렉산더는 전시 직전인 지난 5월 말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시장 한쪽 벽을 채운 제임스 터렐(77)의 LED 설치작품 ‘아틀란티스, 미디움 렉탱글 글래스’(Altantis, Medium Rectangle Glass)는 하늘이 가진 무한한 색채의 경이로움을 무려 2시간 30분 동안 펼쳐보인다. 가만히 들여다 볼수록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이 든다. 로버트 어윈(92)은 불이 켜지지 않는 형광등을 세로로 나란히 설치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투명한 색의 젤로 덮인 형광등은 오브제와 배경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친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을 전파한다. 전시에는 2018년 작품 2점이 나왔다. 이들 세 작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댄 플래빈의 1984년 형광등 설치작품 ‘언타이틀드’(Untitled)도 한켠에 자리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화려한 바위꽃 방탄도 반하다

    화려한 바위꽃 방탄도 반하다

    신록이 짓쳐 올라온다. 연둣빛 신록에 싸인 암벽들의 모습이 꼭 비 온 뒤의 죽순 같다. 어느 한 계절의 풍경을 두고 결코 ‘진수’라고 말할 수 없는 산들이 있는데, 대둔산도 그중 하나다. 팔색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삼색조인 것만은 분명하다. 겨울 설경과 가을 단풍, 그리고 신록이 무성한 초봄의 풍경 말이다. 전북 완주에는 이처럼 바위가 만든 풍경이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 몇 곳 있다. 그래서 나선 참이다. 화려한 바위꽃을 찾아.대둔산의 ‘둔’(芚) 자는 싹이 나온다는 뜻이다. 드센 사내의 ‘알통’을 닮은 바위 절벽을 두고 앙증맞은 새싹 운운하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봄의 대둔산은 정말 새싹을 닮았다. 아마 옛사람들이 이 산의 이름을 대둔산이라 한 것도 마천대(878m) 등의 암벽들이 봉긋봉긋 솟은 모양새가 새싹과 흡사하기 때문이지 싶다. 대둔산은 완주와 충남 금산, 논산 등에 걸쳐 있다. 오르는 코스도 여러 가지다. 일반 관광객들은 대체로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대둔산 중턱인 금강구름다리 아래까지 순식간에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 상부역사 위의 암벽 사이로 철계단이 나 있다. 암벽을 비집고 나서면 곧 금강구름다리다. 바위 절벽 사이에 50m 길이로 쭉 뻗은 구름다리에 서면 누구나 오금이 저리기 마련이다.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위로는 거대한 암봉들이 위압적인 자태로 서 있다. 관광객 대부분은 구름다리에서 인증샷을 찍고 내려가지만 가급적 시간을 내서 삼선계단까지는 다녀오기를 권한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스릴을 맛볼 수 있다. 삼선계단은 삼선봉을 오르는 36m짜리 철재 계단이다. 경사도 51도에 폭은 0.5m밖에 되지 않는다. 굳이 돈 내고 공포영화를 보지 않아도 계단을 오르는 내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극한의 공포를 맛볼 수 있다. 충남 금산과 경계를 이루는 이치(배티재)에서 보는 모습도 좋다. 대둔산 북동쪽 사면의 모습이 보인다. 배티재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육지에서 승전고를 울린 장소다. 권율 장군이 불과 1500여명의 군사로 2만여명의 왜군을 막아 냈다고 한다. 불명산(佛明山)으로 방향을 잡는다. 화암사(花巖寺)가 깃든 산이다. 먼 옛날 병마와 싸우던 연화 공주가 용이 기르는 연꽃(복수초라는 설도 있다)을 먹은 뒤 씻은 듯 나았는데, 그 꽃이 핀 바위벼랑에 지은 절이 화암사라는 설화가 전해 온다. 화암사 사하촌은 ‘싱그랭이 마을’이라 불리는 요동마을이다. 예전 남도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때 이 마을에 묵으며 해진 짚신을 갈아 신었다고 한다. ‘싱그랭이 마을’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15분 남짓 산길을 걸어 오르면 화암사다.그리 널리 알려진 절집은 아니지만 유명 인사들의 화암사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화암사를 널리 알린 이로는 안도현 시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여러 편의 시집과 수필 등을 통해 화암사를 ‘잘 늙은 절’로 각인시켰다. 건축학자이자 문화재위원장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시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절’이란 책에서 “희귀한 구조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이 절은 환상적인 입지와 드라마틱한 진입로, 그리고 잘 짜인 전체 구성만으로도 최고의 건축”이라고 썼다. 더이상 무슨 상찬이 필요할까. 화암사는 이름처럼 바위벼랑 위에 터를 잡았다. 객을 맞는 건 우화루(雨花樓·보물 제662호)다. 꽃바위(花巖)에 걸터앉은 절집에 꽃비(雨花)가 내리는 건 당연한 수미상응일 터다. 단청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곱게 늙은 나뭇결만으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본전인 극락전으로 가는 통로는 우화루와 문간채 사이로 난 쪽문이다. 허리 굽혀 문 안으로 들어도 극락전의 모습은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자칫 큰 건물에 뺏길 뻔했던 시선 속에 주변 건축물까지 담을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가람 배치 덕일 게다. 극락전은 우화루 바로 앞에 있다. 처마를 좀더 밖으로 빼기 위해 기둥과 처마 사이에 부재를 끼운 하앙식 구조로 유명한 건물이다. 이 같은 공법의 건물은 국내에서 화암사가 유일하다. 그래서 국보(316호)다. 위봉산 일대의 풍경도 옹골차다. 위봉폭포가 대표적이다. 60m 높이를 2단으로 굽이쳐 내리는 폭포다. 폭포 주변으로는 근육질 사내의 ‘알통’을 닮은 바위절벽이 둘러쳤다. 도로에서 폭포까지 목재 데크가 놓여 있다. 계단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폭포와 마주할 수 있다.이제 방탄소년단(BTS)의 ‘완주 원픽’을 말할 차례다. 지난해 여름 BTS가 ‘2019 썸머 패키지 인 코리아’ 화보집을 냈다. 촬영 장소들이 단박에 ‘인생사진’ 성지로 떠오른 건 당연지사다. 특히 완주 쪽 촬영지들이 붕 떴다. 위봉폭포 위에 있는 위봉산성도 그중 하나다. 위봉산성은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의 이성계 어진과 위패 등을 옮기기 위해 조선 숙종 때 축조된 산성이다. 예전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뜸했던 곳이지만 BTS가 방문한 뒤로 한순간에 ‘힙’한 곳으로 바뀌었다. 위봉산성에서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면 오성제다. 이 저수지 둑방에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기서도 BTS가 사진을 찍었다. 이들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 소나무는 이제 ‘방탄소나무’로 불리지 않을까 싶다. 젊은 커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오성제 위에 있는 오성한옥마을의 아원고택이다. 원래는 숙소인데, 갤러리로도 쓰인다. 입장료(1만원)도 비싼 편이고 투숙객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시간대(오전 11시~오후 5시)에만 개방이 되는 등 몇몇 제약이 있지만, 방탄소년단의 흔적을 엿보려는 이들의 발걸음은 쉼 없이 이어진다.삼례 쪽의 비비낙안 카페도 촬영지 중 하나다. 원래부터 완주의 힙스터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는데, BTS가 발걸음하면서 명성이 한껏 높아졌다. 비비낙안 카페는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조성된 곳이다. 옛 물탱크를 리모델링한 카페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미감이 아주 색다르다. 너른 만경평야와 만경강, 전주 시가지, 그리고 그 너머로 호남의 산들이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아울러 고산면 창포마을의 용암상회, 마을 앞 다리 등도 BTS가 다녀간 곳이다. 글 사진 완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드라마 ‘더 킹’의 절경 사찰은 어디? ‘구례 사성암’

    드라마 ‘더 킹’의 절경 사찰은 어디? ‘구례 사성암’

    지난 17일 방영을 시작한 SBS 금토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 나온 사찰은 어디일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더 킹’ 2회분에서 이림(이정진 역)이 단청을 칠하는 사찰이 ‘구례 사성암’으로 알려지면서 이 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암절벽 위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사성암은 경관이 뛰어나 명승 제111호로 지정돼 있다. 사성암이 위치한 오산(鰲山)은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지리산과 섬진강, 구례들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경승지다. 이 풍광을 보기 위해 매년 20만명의 관광객이 사성암을 찾는다.누리꾼들은 “컴퓨터그래픽로 만든 것 같은 풍경이다. 한국에 있는 장소면 꼭 가보고 싶다”고 사성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사성암은 드라마 ‘추노’와 ‘토지’, 영화 ‘군도’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지난 1월 10일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33’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구례군 관계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 지역의 명소들이 알려지고 있어 기쁘다”면서도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는 시점까지는 방문을 자제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구례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인간문화재 아닌 전수교육조교, 첫 명예보유자 된다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전수교육조교 최충웅(79)·이상용(78)씨 등 15개 종목 전수교육조교 21명을 첫 명예보유자로 인정 예고했다고 21일 밝혔다. 명예보유자 제도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고령 등으로 전수교육이나 전승활동을 정상적으로 펼치기 어려운 경우 그간의 공로를 기려 우대하고자 2001년 마련한 제도다. 지금까지 70명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됐고, 이가운데 54명이 별세했다. 하지만 보유자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활동해온 전수교육조교도 나이나 건강 등의 문제로 교육이나 전승활동을 하기 어려울 경우 명예보유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 지난해 관련 법령이 개정됨에 따라 이번에 처음으로 전수교육조교 명예보유자가 나오게 됐다. 명예보유자로 인정 예고된 전수교육조교 21명은 75세 이상, 조교 경력 20년 이상 대상자 가운데 지난 2월 전수교육조교 본인이 문화재청에 신청해 무형문화재위원회 검토를 거쳐 선정됐다. 명예보유자로 인정되면 매월 받는 지원금과 장례위로금이 늘어난다. 문화재청은 30일 예고기간 동안 의견 수렴과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인정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명예보유자 인정 예고 전수교육조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강정자(78)씨, 제8호 강강술래 김국자(80)·박부덕(78)씨, 제11-4호 강릉농악 차주택(80)·최동규(78)씨, 제12호 진주검무 조순애(77)씨, 제25호 영산쇠머리대기 정천국(80)씨,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 김홍남(79)씨, 제41호 가사 김호성(77)씨, 제48호 단청장 박정자(81)·이인섭(77)·김용우(76)씨, 제73호 가산오광대 방영주(83)씨, 제82-2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김금전(81)씨, 제87호 명주짜기 이규종(88)씨, 제90호 황해도평산 소놀음굿 이창호(94)·안금순(77)씨, 제97호 살풀이춤 김정녀(81)씨, 제140호 삼베짜기 양남숙(77)씨.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된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된다

    보물 제410호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水瑪瑙塔)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 경북유형문화재인 ‘안동 봉황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17일 밝혔다. 수마노탑은 석가모니 사리를 모셨다고 알려진 탑이다. 역사서 ‘삼국유사’에 따르면 정암사는 자장율사(590∼658)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진신사리를 들고 귀국해 643년 창건했다. 수마노탑이라는 명칭은 불교에서 금·은과 함께 7보석 중 하나인 마노(瑪瑙)와 관련이 있다. 자장율사가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의 도력에 감화하여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고, 물길을 따라 가져왔다 해서 물 ‘水(수)’ 자를 붙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정암사에는 수마노탑을 바라보는 자리에 적멸보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양산 통도사, 평창 오대산, 영월 법흥사, 인제 봉정암의 적멸보궁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으로 알려져 있다. 수마노탑은 거대한 돌덩어리를 올리는 일반적 석탑과 달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모전(模塼)석탑이다. 모전석탑으로는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탑이 유명하다. 돌 재질은 석회암층 중에 산출되는 고회암이며, 회록색이 감도는 돌을 길이 30∼40㎝, 두께 5∼7㎝로 깎았다. 석탑 전체 높이는 9m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운 탑 1층에 작은 불상을 모셔두는 공간인 감실(龕室)을 상징하는 문이 있다. 그 위에 벽돌 모양 석재를 층층이 올렸다. 신라시대 이래 모전석탑이 구축한 조형적 안정감과 입체감, 균형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이전에 쌓은 것으로 평가된다. 수마노탑은 1972년 해체 과정에서 탑 건립 이유와 수리 기록 등을 적은 돌인 탑지석 5매가 발견돼 조성 과정이 확인됐다. 불국사 삼층석탑, 다보탑과 함께 탑 이름이 전해지는 희귀한 사례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모전석탑으로 조성된 진신사리 봉안탑으로는 국내 유일하다는 점에서 국보로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보물로 지정 예고된 안동 봉황사 대웅전은 건립 시기가 명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여러 기록상 17세기 후반 무렵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을 봉안한 정면 5칸의 대형 불전이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3칸 맞배지붕 불전이 유행한 것을 고려하면 규모와 형식이 돋보인다. 전면 배흘림이 강한 기둥은 조선 후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이다. 근래에 채색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17∼18세기 단청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 특히 정사각형 우물반자에 그린 용, 금박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연화당초문, 연꽃을 입에 물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봉황이 인상적이다. 문화재청은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두 유물의 문화재 승격 여부를 확정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산청 동의보감촌에 부귀영화 상징 ‘청룡·황룡 기와단청’ 전시

    산청 동의보감촌에 부귀영화 상징 ‘청룡·황룡 기와단청’ 전시

    우리나라 대표적인 한방·항노화 체험 관광지인 경남 산청군 동의보감촌에 청룡·황룡 한쌍이 터를 잡고 관광객들에게 부귀영화와 무병장수의 기운을 전한다. 산청군은 단청장 전수교육조교인 일정(一井) 이욱(55)씨가 청룡과 황룡을 그린 기와단청 작품 한쌍을 산청 동의보감촌에 기증했다고 30일 밝혔다.산청 출신인 이씨는 국가무형문화제 제48호 단청장 기능보유자 홍점석(81)씨의 제자로, 2008년 단청장 전수교육조교로 선정 된 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2013년부터는 국립무형유산원 단청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단청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개인전과 기획전시, 연꽃 그리기 체험행사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청룡과 황룡이 그려진 기와단청에 대해 “청룡은 명예를 상징하고 황룡은 부를 상징하며 사찰이나 궁궐의 중요 전각에 용을 그릴 때 왼쪽에는 청룡을, 오른쪽에는 황룡을 그린다”면서 “이는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용이 그려진 고기와는 경북 의성군 대곡사에 있던 기와로, 만들어 진지 200여년 이상된 기와다”며 “고기와 중에서도 대와에 속하는 기와로 그 자체로도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산청군은 용이 그려진 단청기와 한쌍을 동의보감촌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엑스포 주제관 로비에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경래 산청군 항노화관광국장은 “청룡과 황룡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기와단청 작품은 전통문화와 한방 항노화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동의보감촌과 잘 어울린다”며 “동의보감촌 방문객들이 용 단청기와를 보며 부귀영화와 무병장수 기운을 받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네가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네가 그렇다

    서글픈 봄이 지나고 있다. 어느 계절보다 찬란해야 할 봄이지만 예년에 견줘 생기 잃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다. 아직은 차가운 들녘 여기저기에서 봄꽃들이 겨울을 털어내고 있다. 전북 부안의 내변산 일대는 나라 안에서도 내로라하는 봄꽃 명소다. 변산바람꽃, 노루귀, 복수초 등 봄의 전령들이 힘차게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다. 변산은 변산바람꽃이란 이름이 비롯된 곳. 어느 곳보다 아리따운 변산바람꽃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몽실몽실 피어난다.사람이 그렇듯, 새침한 것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관심을 바라지도 않는다. 허리 굽혀 살펴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봄꽃 중에서도 변산바람꽃이 특히 그렇다. 참 희한한 일이지,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꽃인데 한 번 눈에 띄면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듯 제 자태를 드러낸다. 그 모습이 꼭 반짝이는 별을 닮았다. 변산바람꽃은 부안에서도 내변산 지역에 특히 많다. 그 가운데 내소사 뒤 산자락은 비교적 덜 알려진 들꽃 자생지로 꼽힌다.내소사로 드는 길. 전나무 숲이 객을 맞고 있다. 수령 150년을 넘긴 전나무들이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500여m 거리에 빼곡하다. 청량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폐가 개운하게 씻기는 듯하다.곧 터질 듯, 가지 끝에 붉게 움을 틔운 벚나무 숲을 지나면 곧 내소사다. 치장을 하지 않은 다소곳한 모습이 인상적인 절집이다. 대웅보전(보물 291호) 역시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로만 매끄럽게 이음매를 맞췄다. 단청이 없는 수수한 외모 덕에 한결 더 고색창연하게 느껴진다. 한데 건물 내부는 다르다. 화려한 색감의 후불탱화 등이 장엄한 불화의 세계를 선사하고 있다. 내소사를 뒤로하고 산자락을 오른다. 머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쯤 관음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소사에 속해 있으면서도 경내를 벗어난 곳에 터를 잡은 독특한 건물이다. 관음전 앞 뜨락에 서면 내소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새의 시선으로 내소사를 굽어보는 맛이 각별하다. 관음전 옆으로는 계곡이 펼쳐져 있다. 아직 시린 바람이 골짜기를 휘감아 돌고 있다. 이 차가운 계곡에도 꽃이 피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무렵 누런 낙엽 틈에서 반짝이는 뭔가가 눈에 띄었다. 변산바람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꽃은 산의 선물처럼 다가왔다.변산바람꽃은 하얀 꽃받침에 파란 수술이 인상적인 꽃이다. 꽃받침엔 수줍은 듯 연분홍빛이 감돈다. 이 꽃을 ‘변산아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자태 때문일 것이다. 변산바람꽃은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1993년 변산에서 처음 발견돼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 요즘엔 전국적으로 꽤 많은 서식지가 알려지면서 신비감이 다소 덜해졌지만, 봄꽃을 찾는 탐화객, 이른바 ‘꽃쟁이’들에겐 여전히 첫손 꼽히는 볼거리다. 봄꽃들이 종종 그렇듯, 변산바람꽃도 독특한 구조로 이뤄졌다. 꽃잎처럼 보이는 하얀 잎 다섯장은 사실 꽃받침이고, 꽃술 주변에 있는 열 개 안팎의 깔때기 모양 기관이 퇴화한 꽃잎이라고 한다. 꽃받침이 꽃잎의 역할을 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활짝 핀 변산바람꽃은 옛 여인들이 머리를 가꿀 때 썼던 떨잠을 닮았다. 꽃대는 콩나물 줄기보다도 가늘다. 저 여린 꽃대로 어떻게 저리 단단한 땅을 뚫고 나왔을까. 변산아씨는 존재 자체로 감동이다.노란 복수초도 비탈면에 가득하다. 변산바람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다. 복수초(福壽草)는 글자 그대로 복(福) 많이 받고 오래 살라(壽)는 축복의 뜻이 담겨 있는 들꽃이다. 꽃잎에 햇빛이 비치면 어두운 숲에 노란 등불을 켜놓은 것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복수초를 달리 ‘황금잔’이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벌써 꽃잎을 활짝 연 개체도 있고, 이제 막 돌 틈을 비집고 나오는 봉오리도 있다.개체수는 적지만, 노루귀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노루귀는 잎이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노루의 귀와 닮았다 해서 이름 지어졌다. 꽃의 이름을 잎 모양에 따라 지은 셈이다. 노루귀는 흔히 여러 개체가 다발로 핀다. 워낙 가녀린 녀석들이라 꽃을 다 합쳐 봐야 어른 손톱보다 작다. 꽃대엔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다. 해를 정면에 두고 보면 솜털들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부안에서 변산바람꽃 자생지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사실 청림마을이다. 쇠뿔바위봉 등 수려한 내변산의 암봉을 품고 있어 등산객들이 종종 찾는 마을이다. 봄이면 변산바람꽃을 보기 위해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오랜 기간 들꽃 군락지로 입소문 나면서 철마다 탐화객들이 몰리는 통에 주민들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차량을 마을 입구에 두고 걸어가거나 발걸음 자체를 줄이는 게 좋을 듯하다. 봄꽃을 만나러 간다는 건 첫걸음부터 죄가 쌓이기 시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실수로 갓 피기 시작한 꽃을 밟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돌 틈에 핀 꽃은 그나마 잘 보이지만 낙엽 속에 숨은 꽃은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걸음 내려놓기 전에 정말 꼼꼼하게 주변을 살펴야 한다.변산아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내변산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직소폭포까지 다녀오는 길은 내변산 최고 절경을 만나는 트레킹 코스로 꼽힌다. 청림마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내변산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여기서 직소폭포까지 완만한 트레킹 코스가 조성돼 있다. 거리는 약 2.3㎞ 정도다. 직소폭포 일대는 ‘실상용추’(實相龍湫)라 불리는 소(沼)와 분옥담, 선녀탕 등이 이어져 경관이 빼어나다. 화산암에서 생겨난 주상절리와 침식 지형 덕에 지질학적 가치도 크다. 이 일대가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이유다. 직소보 절벽에 세워진 ‘하트 전망대’, 봉래곡 등 소소한 볼거리도 많다. 직소보는 직소폭포 등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가둔 저수지다. 관음봉 등 내변산 암봉이 병풍처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다. 하루 두번만 허락된 인생샷 여기가 인생사진 맛집… SNS서 핫한 부안의 명소들변산반도는 자체가 국립공원이다. 내소사, 직소폭포 등이 있는 변산의 안쪽 산악지대를 내변산, 새만금방조제에서 곰소항에 이르는 바닷가 일대를 외변산이라 부른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채석강, 곰소만 등 외변산의 풍경도 내변산 못지않게 빼어나다. 그 가운데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구는 곳이 있다. 채석강과 솔섬 등의 바닷가 풍경이다.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채석강 일대가 인증샷의 성지처럼 확산되고 있다. 채석강(명승 13호)은 변산반도 나들이의 하이라이트다. 중국 당나라의 시성(詩聖) 이태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이름을 따온 해안절벽이다. 책을 수만 권 쌓아 놓은 듯한 퇴적암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채석강 암벽엔 동굴이 몇 개 있다. 수만년 세월에 걸친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해식동굴들이다. 이 동굴 속에서 보는 낙조가 일품이다. 요즘 이 해식동굴이 새로 각광받고 있다. 이른바 ‘인생사진’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채석강의 모습만 둘러보고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완전히 바뀌었다. 채석강은 그저 조연에 불과할 뿐 해식동굴이 압도적 주연이다. 밖에서는 평범한 동굴이지만 안에서 보면 확연히 다르다. 동굴 형태가 한반도를 닮았다고 하는 이도 있다. 다소 억지스런 주장이긴 해도 해질녘 풍경은 확실히 아름답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잠길 때마다 동굴 밖 하늘도 붉게 물든다. 이때 암벽 위에 서서 실루엣 사진을 찍는데, 꽤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암벽 위 공간엔 한 커플 정도만 설 수 있다. 이 때문에 순서를 기다리느라 동굴 밖에선 길게 줄이 이어지기도 한다. 채석강을 직접 답사할 수 있는 바닷길은 하루 두 번 썰물 때만 열린다. 시간을 잘 맞춰 가야 한다. 해식동굴까지 가는 길도 상당히 미끄럽다. 물이 빠진 뒤에도 그렇다. 가방 등을 바닷물에 빠트리는 경우는 흔하고, 미끄러져 넘어지는 이들도 드물게 있다. 하이힐 같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가는 건 피하길 권한다. 원래 안전상 출입금지 구역이었지만, 워낙 많은 이들이 몰려들면서 유명무실해졌다.도청리 전북 학생해양수련원 앞에 있는 솔섬도 꽤 알려진 일몰 명소다. 작은 섬 위로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해질 무렵 오른쪽 끝에 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해가 걸린 모습이 꼭 용이 여의주를 문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솔섬에서 500m 정도 떨어진 바닷가엔 액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각형 액자 왼쪽에 한 신사가 멋진 자세로 서 있고, 액자 안엔 사다리를 탄 소년이 붓질을 하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뭔가 공원 등의 시설을 조성하려다 만 듯한 모습인데, 부안 초입에서 만났던 조형물처럼 이 액자 조형물 역시 작품에 대한 아무 설명이 없다. 이곳 또한 최근 SNS를 중심으로 인증샷 명소로 급부상하는 중이다. 우동리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허균과 ‘반계수록’을 쓴 유형원이 반세기 시차를 두고 살았던 곳이다. 내변산의 웅숭깊은 풍경을 갈무리한 곳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선계폭포가 이 일대의 명소로 꼽힌다. 비가 올 때만 드러나는 폭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개국하기 전 머물며 수도했다 해서 ‘성계폭포’라고도 불린다. 선계폭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세워진 정사암엔 허균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내변산 일대는 최고봉인 의상봉(509m), 쌍선봉 등 암릉들이 펼쳐내는 선 굵은 풍경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 일대를 관통하는 736번 도로는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내변산의 아름다운 숲길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놓치면 후회할 풍경들을 줄곧 차창에 매달고 달릴 수 있다.도청리의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도 둘러볼 만하다. 1966년 농민 교육을 위한 농장으로 문을 열었다가 2003년 개인 미술관으로 정식 개관했다. 조각공원엔 김오성 관장이 평생 조각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여성상이다. 목석같은 사내라도 얼굴을 붉힐 법하다. 공원 안엔 천문대도 있다. 별 관측에 관심이 많은 김 관장이 직접 천문대를 꾸미고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변산반도 남쪽의 줄포만 갯벌생태공원은 갯벌 일부를 막아 만든 공원이다. 100종이 넘는 생물종이 서식하는 등 생물종 다양성이 높아 2010년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갯벌생태공원 안쪽으로 갈대숲 10리길, 야생화단지, 바람동산, 조각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인증샷 찍으며 자박자박 걷기 딱 좋다. 글 사진 부안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봄꽃이 만개하는 3~4월이면 내소사 주변은 상춘객들로 몸살을 앓는다. 특히 벚꽃 필 무렵이면 내소사는 구경도 못하고 주차장으로 변한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탓에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만 성수기에는 가급적 일찍 서두르는 것이 좋다. -곰소만 일대에 ‘곰소쉼터’ 등 젓갈 정식을 파는 집들이 몰려 있다. 어지간한 젓갈은 죄다 맛볼 수 있다. 값도 1만원 정도로 그리 비싸지 않은 편이다. 곰소항 ‘슬지네찐빵 슬지제빵소’에선 달콤한 찐빵을 맛볼 수 있다.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고 했다. 격포항이나 궁항, 모항 등의 어촌계 직판장 회센터에서 쫄깃한 주꾸미를 맛볼 수 있다. 부안소방서 앞의 ‘계화회관’은 백합죽으로 이름난 집이다.
  • 한옥 품은 교회… 눈물의 섬에 띄운 방주

    한옥 품은 교회… 눈물의 섬에 띄운 방주

    한국의 양대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특히 건축이 그렇다. 교회는 뾰족한 종탑이 있는 서구 중세풍의 고딕 건물을, 사찰은 아무래도 기와지붕의 전통 한옥을 연상케 된다. 그러나 불교 사찰같이 생긴 교회와 성당이 있다. 나무기둥에 기와지붕을 얹은 이른바 ‘한옥교회’들이다. 이들은 선교 초기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주로 지어졌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강화읍에 있는 강화성공회성당이다.한반도 남부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1893년 조선 왕실은 강화도에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치했다. 당시 최강인 영국 해군을 따르려고 영국인들을 초청해 교육을 맡겼다. 이 기회에 영국성공회가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했고, 1900년 트롤로프(조마가) 신부가 강화성당을 준공했다. 성공회는 강화도에 11개의 교회를 더 지었는데, 현존하는 온수리성당을 비롯해 모두 한옥 교회였다. 뿐만 아니라 1950년도까지 한국성공회는 서울과 부산성당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 교회를 건축했다. 유독 이 교단이 한옥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건축은 선교의 신학이며 전략 성공회는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를 빌미로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한 영국국교회다. 대부분의 교리와 전례는 가톨릭을 따르지만,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는 등 독자적인 체제도 만들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유럽이 구교와 신교의 극심한 갈등을 겪을 때, 성공회는 양자를 포용하는 중도의 길을 천명했다. 19세기에 갱신을 위한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나 “본질적인 것은 일치, 비본질적인 것은 다양화”라는 신학을 정립했다. 특히 해외 선교에서 “토착민의 마음을 얻으라”는 현지 문화 수용 전략에 충실하게 된다. 교회 건축도 당연히 토착적인 양식 한옥에서 출발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전파한 한국 가톨릭은 프랑스 고딕을 주된 건축의 모델로 삼았다. 서울 약현성당이나 명동성당과 같은 전형적인 고딕 성당이 가톨릭을 대표하는 건축 형식이었다. 개신교는 서울의 정동교회와 같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아 양식이나 약식 고딕을 따랐다. 반면 한옥 교회를 선호한 성공회 선교사와 사제들의 태도는 달랐다. 서울주교좌성당마저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랐다. 이를 주도한 트롤로프 3대 주교는 궁궐과 한옥이 가득한 한양의 경관에 원초적인 로마네스크 교회가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토착 문화와 환경을 존중한 성공회의 건축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선교 모국의 건축과 문화를 이식했던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 기독교도들은 오히려 한옥 교회를 배척했다. 유교의 봉건적 모순에 질식했던 그들에게 전통이란 버려야 할 적폐이고, 서구의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서양식 고딕 교회를 더 이상적이고 현대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성공회와 한옥 교회는 너무나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한옥에 담은 바실리카 교회 바실리카란 원래 로마에서 공공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기독교 공인 후 바실리카를 초기 교회로 사용하면서 기독교 교회를 뜻하게 됐다. 내부에 2열의 높은 기둥을 줄지어 세워 가운데 높고 넓은 신랑(身廊)과 양옆 좁고 낮은 측랑(側廊)으로 공간을 3분한다. 신랑 끝에는 제단부를 설치하고, 신랑의 높은 벽에는 고창을 설치해 하늘의 빛을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 자연의 빛은 신의 은총과 임재를 상징하게 됐다. 중세 기독교의 성찬 전례와 이원론적 신학에 적합한 공간 구조여서 바실리카는 대표적인 기독교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초기의 한국 가톨릭이 고딕 교회를 채택한 것도 바실리카 공간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기둥식으로 이루어진 한옥으로 바실리카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2열의 높은 기둥으로 지붕을 받는 이른바 2고주 7량 구조의 한옥이면 신랑과 측랑을 구성할 수 있다. 단 한옥은 건물의 긴 면이 정면인데 비해 바실리카는 짧은 면이 정면이 돼야 한다. 이 문제는 전통 한옥을 90도 돌려 놓으면 해결할 수 있다. 강화성당은 신랑의 기둥을 더 높여서 측랑과 한 층 차이가 나도록 하여 그 높은 벽에 모두 유리로 된 고창을 설치했다. 더욱 정통적인 바실리카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강화읍을 감싸는 능선 위에 자리해 대지의 폭은 좁고 길이가 길다. 앞부분에 외삼문과 내삼문을, 중심부에 정면 4칸 측면 10칸의 긴 본당을, 뒤편에 ㄷ자 한옥인 사제관을 배열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언덕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은 모양이다. 전통 풍수에서 말하는 행주(行舟) 형국이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방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국적 의미와 기독교적 상징이 상통하는 모습이다. 강화성당은 당시 주임신부인 트롤로프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의 건축과 문화에 조예가 깊어서 한국 불교에 대한 연구 논문까지 집필할 정도였다. 그는 압록강까지 가 백두산의 홍송을 직접 구입해 목재로 사용했고, 경복궁을 중창했던 도편수에게 전체 공사를 맡겼다. 본당 외벽 아래는 붉은 벽돌로 마감했는데, 중국인 조적공들의 솜씨다. 강화도 현지 돌을 석재로 썼지만, 벽돌은 중국산이었다. 철물을 비롯한 몇몇 부품들은 영국에서 직수입했다. 특히 본당 옆면과 뒷면에 달린 아치형 판자문은 영국에 주문 제작한 것으로 전해 온다. 문 안쪽의 구조가 영국기 유니언잭 모양이고, 육중한 철물과 열쇠도 영국제다. 강화성당의 건축은 영국인 사제가 주도했지만, 온수리성당은 동네 유지였던 광산 김씨 가문이 재정과 건축을 담당했다. 화려한 단청까지 칠한 강화성당이 사찰과 비슷하다면 1906년에 건립한 온수리성당은 품격 있는 양반집과 같은 교회다. 입구는 3칸의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칸, 대문 위 다락에 종을 달아 종탑같이 사용한다.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9칸의 기와집이다. 강화성당은 중층이지만 온수리는 단층이다. 그럼에도 내부는 2열의 고주를 세워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바실리카 형식을 고수했다. 대부분의 한옥교회는 온수리성당과 같이 친근한 형식이다. 강화성당이 한옥 교회의 대표작이라면 온수리는 보편작이다. ●동양과 서양, 길과 그릇의 문제 19세기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밀려오는 서구 문명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고유한 문화를 지키려 고뇌에 찬 방법론을 제시했다. 청나라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그리고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다. 김윤식 등이 주장한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기술 안에 동양의 정신을 담자는 전통 유학자들의 내부적 경세론이었다. 반면 서양 선교사들의 시각은 달랐다. 강화도의 성공회 성당들은 한옥의 틀에 기독교의 공간과 정신을 담았다. 동양의 그릇에 서양의 정신을 담는 ‘서도동기’가 기독교 선교의 연착륙 비법이라 여겼다.강화도는 개성과 한양의 바다쪽 입구로, 서쪽에서 오는 문물의 첫 전파지요 수용처였다. 고려 말 안향이 성리학을 들여온 첫 번째 장소였고,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선호했던 우선 선교 지역이었다. 그만큼 외침도 많았다. 몽골, 청, 프랑스, 미국, 일본의 군사 침략에 맞선 저항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당연히 수탈과 피해와 박해도 엄청났다. 교회사학자 이덕주 교수는 기구한 이 섬의 역사를 정리해 강화도를 ‘눈물의 섬’으로 지칭했다. 씨를 뿌린다고 모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밭이 좋아야 한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강화도는 새로운 사상의 발생지였다. 정제두 등 실학자와 수도권의 문화인들이 모여 진보적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들의 맥은 후일 개화파와 계몽운동으로 연결된다. 강화학파의 지적 토대는 기독교도 주체적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강화성당 정면 5개의 기둥에 주련들이 걸려 있다. 창조, 구원, 삼위일체, 복음, 영생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한문으로 쓴 것들이다. 그러나 주련에 등장하는 무시무종, 주재, 인의 등은 성리학의 개념어들이다. 이미 그들은 동양의 길과 서양의 정신을 하나로 통합했다.21세기에 동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한국이 선도하는 5G 기술은 전 인류가 공유할 모두의 그릇이다. 동기든 서기든 모든 그릇은 전 지구가 공유하고 교류한다. 그러나 동도든 서도든 이 시대의 길은 있는가? 기술은 넘쳐 나지만 그 기술을 선택하고 활용하고 제어할 정신은 희박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길이다. 한 세기 전 이 땅의 선교사들과 지식인들이 한옥 교회를 창조했듯이 새로운 길을 찾아야 새로운 건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명상 속 전통문화의 체험…서울국제불교박람회 연다

    명상 속 전통문화의 체험…서울국제불교박람회 연다

    국내 유일의 전통문화산업 종합전시회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가 다음달 14~17일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열린다. 조계종이 주최하는 올해 박람회는 제7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겸한다. ‘명상-매 순간을 느끼는 습관’을 주제로 삼은 이번 박람회에는 331개 업체가 488개 부스를 설치해 불교 공예와 건축, 의복, 식품, 문화산업 등의 상품과 콘텐츠들을 선보인다. 한국 불교와 전통문화를 총망라한 박람회에 8만여명이 찾을 것으로 주최 측은 예상하고 있다. 특히 올해 행사에는 ‘명상’과 한국 전통문화 콘텐츠가 결합된 프로그램과 명상체험 코너 등이 눈길을 끈다. 명상 관련 국내외 유명 연사를 초청하는 명상 콘퍼런스와 명상 관련 전시 콘텐츠를 대폭 확대한 게 특징이다. 문화 체험을 박람회장 밖으로 넓혀 서울 봉은사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서울 명상 및 치유센터, 상담센터, 템플스테이 진행 사찰을 70곳 정도 소개해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한국전통철학으로서의 명상이 유럽 예술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피는 특별전시도 붓다아트페스티벌을 통해 마련했다. 불화장 임석환 선생의 괘불을 포함한 불화, 불상, 단청 등 불교미술 작품이 전시되며 장인의 작업실을 재현한 공방전과 청년작가 공모전을 통해 선정한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대회장 원행스님(조계종 총무원장)은 “불교박람회는 한국 전통문화 산업의 중추인 불교문화와 산업을 새롭게 조명하고 산업과 문화, 철학을 담은 한국 불교의 총화의 장”이라며 “대중들이 불교와 전통 산업과 문화의 진수를 느끼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데스크 시각] 지방정부, 남북교류협력 ‘선수’로 뛰라/김승훈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지방정부, 남북교류협력 ‘선수’로 뛰라/김승훈 사회2부 차장

    지방정부는 남북교류협력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지난 1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과 박원순 시장의 설전을 보며 든 생각이다. 김 의원이 선공했다. 서울시가 남북교류협력사업 일환으로 추진한 ‘서울·평양 간 도시계획 분야 도시 교류 기초연구’ 학술용역을 문제 삼으며, “통일이 되면 통일 대한민국 수도를 평양으로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느냐. 시민도 살기 어려운데 돈을 들여 평양 발전 계획을 세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박 시장은 1000만 서울시민의 시장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라며 사과하라고 역공했다. 국감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발단이 된 학술용역은 서울·평양 동반성장을 위한 평양광역권 장기 공간 발전 구상으로, 통일이 되면 서울의 도시계획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모색한 게 핵심 내용이다. 서울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평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다. 평양을 알아야만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장기적인 도시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서울과 평양은 인구와 주요 산업이 밀집돼 있고, 200㎞ 이내에 위치해 있어 광역경제권도 형성할 수 있다. 색깔론이나 정파적 시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서울시의 남북교류협력은 이명박 전 시장 때 실질적으로 시작됐다. 1999년 서울·평양 간 동물 교류를 했지만 이벤트 성격이 짙었다. 2004년 5월 북한 용천역 열차 폭발 사고를 계기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남북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조례가 제정되고, 2004~2005년 2년간 남북교류협력기금 200억원이 조성됐다. 이 기금으로 북한에 의약품, 생필품, 식량 등을 지원했다. 오세훈 전 시장 때도 이 기조를 유지, 대북 인도지원을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서울시는 남북교류협력의 주요 플레이어로 등판했다. 2018년 9월 박 시장이 평양을 찾았을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박 시장에게 대동강 수질 개선을 제안했다. 지방정부가 의료품·생필품 후원 차원을 넘어 한 단계 진전된 역할을 할 수 있는 판이 깔아졌다. 서울시는 한민족 대화합의 장이 될 2032년 하계 올림픽 서울·평양 공동 유치라는 대업도 이뤄야 한다. 접경지역인 강원·경기·인천을 비롯해 다른 지방정부도 지역별 특성을 반영, 꾸준히 남북교류협력을 하고 있다. 제주는 1999년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감귤보내기 사업을 추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대구는 남북공동산업단지 조성에 지역 건설업체 참여를, 대전은 남북과학기술협력센터 유치를, 울산은 나진·선봉·단청·원산 등 산업도시와의 경제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지방정부는 생활밀착형 행정으로 대변된다. 주민 실생활과 맞닿아 있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즉시에 파악, 주민 삶의 질을 높여준다. 중앙정부의 남북교류 큰 틀 내에서 수질 향상 등 주민 삶과 직결된 문제들을 협력·해결한다면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독일도 통일 전 동·서독 도시(지방정부)들이 교류를 통해 통일 토대를 마련했다. 남북관계가 경색될수록 지방정부 간 교류 끈을 끊어서는 안 되고, 지방정부의 남북교류를 이념이나 정파의 잣대로 접근해선 안 되는 이유다. 통일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언젠가 진희선 서울시 행정2부시장이 사석에서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한강에서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갈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울·평양 지방정부가 메인이 돼 뱃길 교류가 활성화될, 그날을 기대해 본다. hunnam@seoul.co.kr
  • [이정수의 원픽] 늴리리야 옹헤야… 원어스가 그린 한국 전통미

    [이정수의 원픽] 늴리리야 옹헤야… 원어스가 그린 한국 전통미

    해마다 수백 명의 아이돌이 데뷔하지만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라 대중의 주목을 받는 아이돌은 극히 소수에 그친다. 케이팝이 전 세계로 뻗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아이돌 음악을 평가절하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아이돌 음악 중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숨은 보석’을 찾아 4주마다 소개한다.전 세계에 불고 있는 케이팝 열풍은 몇몇 히트곡이나 가수의 인기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케이팝의 인기에 해외 팬들은 한국 대중가요를 넘어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갖는다. 아이돌 스타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 문화에 익숙해지고, 노랫말을 통해 한국어와 한글을 배운다. 케이팝에 대한 애정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인 보이그룹 원어스(레이븐, 서호, 이도, 건희, 환웅, 시온)가 지난달 말 발매한 3번째 미니앨범 타이틀곡 ‘가자’는 케이팝이 담을 수 있는 한국 전통의 색을 최대한 담은 곡이다. 원어스와 마마무 등 소속사 RBW 대표인 작곡가 김도훈은 최근 유행하는 트랩힙합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멜로디 라인을 비롯해 여러 요소에서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한 곡을 완성했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할 민요풍 가락에 ‘늴리리야 옹헤야 얼쑤 얼쑤’ 등 구수한 추임새가 곁들여진다. ‘가자 오늘 달이 좋구나 가자/ 풍악을 울려 피리를 불어’로 시작하는 노래는 ‘힙합 달타령’이라 할 만하다. 전우치, 강강수월래 등 외국인은 알기 힘들 전통 소재들이 가사에 빼곡하다. 케이팝에서 흔히 끼워 넣는 영어 가사를 완전히 배제한 점도 인상적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해외 팬들은 한국어 100% 노래라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환호하기도 한다. 뮤직비디오 역시 단청의 오색이 선명한 한옥풍 세트, 상모돌리기 등 전통색으로 가득하다. 방탄소년단의 ‘아이돌’(2018)과 얼마간 겹치는 이미지지만 굳이 한국적 전통과 세계적 보편성의 결합을 의도하지 않고 한국 본연의 색에 최대한 집중했다. “서구의 팝 대신 한국을 보여 주려는 원어스를 존경한다”, “한국 전통 의상과 사운드가 놀랍다. 나도 한국인이고 싶다” 등 팬들의 반응은 한국 문화가 케이팝을 통해 가장 매력적인 문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원어스의 건희는 지난달 30일 연 쇼케이스에서 “미국에 가기 전 한국적인 멋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곡을 들려드릴 수 있게 돼서 기분 좋다”며 “미국 분들이 저희 무대를 통해 한국의 멋을 알 수 있게 열심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이달 말 국내 활동을 마치는 원어스는 다음달 3일 뉴욕 공연을 시작으로 시카고, 애틀랜타, 댈러스, 미니애폴리스,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6개 도시에서 첫 번째 미국 투어를 진행한다. tintin@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조선 왕조의 얼 곳곳에… 손길마다 전통

    [흥미진진 견문기] 조선 왕조의 얼 곳곳에… 손길마다 전통

    창덕궁 돈화문 단청의 울긋불긋한 색상이 가을과 잘 어울렸다. 최서향 해설사의 단아한 개량한복 차림이 투어에 고운빛을 더하는 듯했다. 돈화문의 서쪽에 위치한 금호문은 대신들이 드나들었던 문인데 일제치하엔 독립지사 송학선의 의거가 있었던 곳이다. 송학선은 안중근 의사를 숭배하며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순국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은덕문화원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들어서기 전 ‘싸롱 마고’라는 독특한 명패가 흥미롭게 눈길을 끌었다. 예전 김지하 시인이 이곳에서 많은 교류를 가졌다 하니 나중에 꼭 따로 방문해 보고 싶었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와 계단에 흐드러지게 가득 펴 있는 안개공작이 은덕문화원의 청아한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했다. 원서동 빨래터로 이동하는 길에 궁의 담장 건너편 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빌라들이 궁과 참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담장 길을 따라 눈을 사로잡는 단아하고 고운 한옥들이 궁중음식연구원, 무형문화재 거주지, 공방 등의 이름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원서동 빨래터는 ‘한양의 3대 빨래터’로 꼽히는데 그 이유는 빨래가 아주 깨끗이 잘됐고, 아마도 궁에서 쌀겨의 세척물이 흘러나와 효과가 좋았을 거라는 해설이 궁금증을 풀어 줬다. 다음으로 중앙고등학교의 넓고 고즈넉한 교정을 지나면서 창덕궁 후원의 신선원전을 내려다봤다. 이곳은 조선 왕 12명의 어진이 봉안됐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불타고 영조의 어진만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전쟁은 어디에서든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옛 성균관을 품은 성균관대학교를 지나 창경궁에서 성균관으로 향했던 북문인 집춘문 터, 과학의 문을 지나 월근문에 다다랐다. 월근문은 매달 초하루 정조가 부모인 사도세자와 헌경왕후의 위패를 모신 경모궁으로 가기 위해 통과했던 문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이르렀다. 정조가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고 그 이행을 살폈다는 해설에 참석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듭 정조의 덕을 되새겼다. 김윤정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道 깨치는 3칸 전각… 자연 담는 7칸 누각

    道 깨치는 3칸 전각… 자연 담는 7칸 누각

    2019년 7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드디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도 영향력이 있는 한국 성리학의 문화적 증거이며, 그 변화의 역사적 과정을 보여 준다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상은 총 9곳으로 대구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영주 소수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등이다. 이 가운데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서원건축의 특징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례이다. 여기에 모신 이황과 류성룡은 사제지간으로, 두 서원은 퇴계학파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정신적인 건축이기도 하다.●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구축한 최고의 학자지만, 조선 성리학의 위대한 5인으로 꼽은 ‘동방5현’ 순위는 다르다. 유명 서원에 모셔 기념하고 있는 이들은 김굉필(도동서원), 정여창(남계서원), 조광조(용인 심곡서원), 이언적(옥산서원), 그리고 도산서원의 이황이다. 이 순위는 시대적 순서이기도 한데, 이언적까지는 성리학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건 개척자요 순교자라 할 수 있다. 반면 이황은 이들이 구축한 토대 위에서 성리학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실천적 방향을 제시한 완성자이다. 또한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거의 이황의 제자라 할 만큼 거대한 퇴계학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총 14동이나 되는 도산서원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것은 퇴계가 직접 지은 도산서당이다. 그는 잠깐 성균관대사성 등의 관직에 있었으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수양에 뜻이 있어서 20여 차례 관직 사퇴와 거절을 되풀이할 정도였다. 고향에 내려와 환갑 무렵에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지었다. 퇴계는 말년까지 이곳에 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다. 도산서당은 퇴계사상의 핵심인 깨어 있음, 한적함, 실용적 실천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집이다. 이 집은 퇴계가 직접 설계도까지 그렸다고 전한다. 그 설계도는 없지만 설계 개념과 내용을 공사담당자에게 설명한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군자의 집은 3칸이면 족하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거하는 방 한 칸, 제자를 지도하는 마루 한 칸, 그리고 불을 때는 부엌 한 칸. 이 최소한의 건축은 몸과 마음을 깨어 있게 한다. 그러나 도산서당은 실제로 3칸이 아니다. 부엌은 반 칸을 늘렸고 마루는 아예 한 칸을 더 확장했다. 결국 4.5칸이지만 퇴계는 3칸의 제도를 따랐다고 주장한다. 확장부의 지붕은 한 단 낮게 붙인 눈썹지붕이고 마루도 듬성한 줄마루를 깔았다. 정식 건물이 아니라는 강력한 차별이다. 즉 본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확장하고 변형한다는 실용적인 실천이며, 원칙에만 집착하지 않는 한적한 여유다.옆에 있는 농운정사는 몸체 양쪽으로 날개가 붙은 공(工)자형 각기 방·마루·부엌을 가진 두 기숙사가 대칭으로 붙은 꼴이다. 이 집 역시 이황의 설계 작품으로, 완전한 대칭 같지만 동쪽 방의 문은 두 짝이고 서쪽 방은 외짝으로 차별을 두었다. 같음 속에 다름을 둔 실용적 변용이 번뜩인다. 퇴계가 죽은 후, 쟁쟁한 제자들은 선생을 기념하고 퇴계학파의 근거지가 될 서원 건립을 논의한다. 논쟁과 숙고 끝에 선생의 마지막 서재인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한다. 6년 후인 1576년, 드디어 도산서원이 완공됐다. 마치 선생이 앞에 앉고 제자들이 뒤에 둘러선 모습의 건축적 집합체를 이루었다. 도산서원의 주인은 영원히 퇴계이기 때문이다. ●서애 류성룡과 병산서원 서애 류성룡(1542~1607)은 퇴계의 수제자지만, 재야 선비를 고집한 스승과 달리 평생을 관료와 정치인으로 살았다. 임진왜란 이태 전인 49세에 우의정과 이조판서를 겸직한다. 이때 이순신을 수군사령관으로, 권율을 육군사령관으로 발탁한다. 전쟁이 터지자 서애는 영의정까지 올라, 명나라를 참전시키고 승군을 일으키는 등 백방의 노력을 기울인다. 서애가 없었다면 과연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서애가 없었으면 이순신도 권율도 없고, 명나라의 원병도 의승군도 없었을 것이다. 시기 세력의 탄핵을 받아 종전 직전에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에 낙향, 은거하면서 지은 책이 그 유명한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참상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앞으로 잘못을 되풀이 않도록 경계한다”는 게 ‘징비’의 의미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종전과 동시에 하야했고,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지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서애는 조선의 처칠이었다.서애의 근본은 성리학자다. 관직 생활 틈틈이 고향의 풍악서당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하회마을에 원지정사를, 건너편 부용대에 옥연정사를 지어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서애가 죽은 후에 제자들은 풍악서당을 중건하고 위패를 모셔, 1614년에 병산서원을 창건하게 된다. 오랜 관직생활 때문에 서애의 제자는 많지 않다. 또한 도산서원에 비하면 건축적 규모도 작고 정치적 위상도 높지 않았다. 창건 후 250년이 지난 1863년에야 비로소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서원건축의 백미이며 현대 건축가들이 최고의 한국 전통건축으로 꼽는 명작이다. 넓은 백사장에 흐르는 낙동강변, 앞으로 병풍같이 펼쳐진 병산을 바라보며 서원은 자리잡았다. 밖에서 보면 7칸의 기다란 누각, 만대루가 가로막아 서원 전체 모습을 알 수 없게 방해한다. 이 누각은 서원의 여러 모임을 열었던 곳으로, 위아래층이 모두 텅 비어 있다. 서원의 전모를 보려면 안으로 들어가 강당인 입교당 대청 중앙에 앉아 밖을 내다보아야 한다. 텅 빈 만대루를 통해 낙동강의 흐름이 들어오고 누각 지붕 위로는 병산이 펼쳐진다. 누각 아래로는 입구가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알 수 있다. 만대루의 존재는 자연경관을 산·강·사람의 수직적인 천지인 경관으로 나눈다. 성리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태도이며 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는 서원의 주인인 원장이 앉는 바로 그 자리다. 주인이 보는 이 장면이 바로 서원의 정면이다. 만대루에 오르면 더욱 감탄할 경관을 대하게 된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과 앞산이 어우러진 풍경을 누각의 기둥들이 수평으로 나누고 연결시킨다. 그야말로 7폭의 자연 병풍을 만든 것이다. 자연을 선택해 인공적 환경으로 치환시키는 이러한 수법을 ‘차경’이라 한다.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차경 수법은 한국의 대표적인 조경법이었다. 건축물은 자연을 그림으로 담는 액자 역할을 한다. 액자가 크고 화려하면 그림이 죽는다. 만대루는 기둥과 지붕밖에 없는 매우 간단한 건물이며, 화려한 단청도 장식도 일절 없다. 건물은 자연을, 학문을,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며, 그 내용물이 건축의 실체다.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으로 서원을 건축했다. ●존현과 천일합일, 서원건축의 의미 퇴계는 서원운동의 개척자요 주창자였다. 한국 최초의 서원은 알려진 대로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1550년 후임 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서원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국가적 차원의 교육기관으로 승격시켰다. 임금이 서원의 간판을 하사하는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어 소수서원으로 이름도 바꾸었다. 전국적인 서원 건립이 촉발되어 전성기에는 700여개에 달하는 서원이 운영됐다. 서원의 목표는 성리학의 전사를 양성하여 이상사회를 여는 것이었다. 핵심 교육방법은 선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존현’이었다. 그래서 서원 건축은 선현 제사를 위한 사당과, 강학을 위한 강당으로 구성된다. 퇴계가 정착시킨 시스템이며 도산서원은 그 완전한 모범이다. 성리학적 진리의 시작과 끝은 결국 자연이기에, 자연과 일체가 되는 ‘천일합일’의 경지가 수양의 목표가 된다. 서애는 생전에 하회에 원지정사를 지어 병산서원의 원형을 보여 주었다. 학문을 닦는 서재 옆에 텅 빈 작은 누각을 두었다. 징비록을 저술한 옥연정사는 강과 산의 자연 속에 파묻힌 서실이다. 서애는 자연을 떠난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그 결정판을 병산서원에서 완성했다. 서원은 존현을 통해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고, 천인합일을 통해 자연과 일체화하는 수양의 장소였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104년 만에… 日 강제 철거한 돈의문 디지털 복원

    104년 만에… 日 강제 철거한 돈의문 디지털 복원

    1915년 일제가 강제 철거했던 돈의문(서대문)이 104년 만에 디지털 기술로 복원됐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제일기획, 우미건설은 20일 서울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한양도성 돈의문 IT건축 개문식’을 열고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기술로 복원한 ‘돈의문’을 공개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 강태웅 서울시 행정1부시장, 유정근 제일기획 사장, 이석준 우미건설 사장 등이 참석해 AR·VR 콘텐츠를 체험했다. 4개 기관은 지난해 12월 ‘문화재 디지털 재현 및 역사문화도시 활성화’ 협약을 맺은 뒤 디지털 복원을 추진해 왔다. 김왕직 명지대 교수, 단청 전문가 정병국 동국대 교수 등과 시각특수효과 전문기업 등이 참여해 다양한 역사자료를 토대로 전문가 자문회의 등을 거쳐 철거 이전 건축과 단청을 디지털로 복원했다. 돈의문을 여러 각도에서 감상하려면 돈의문 AR 체험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정동사거리 주변에서 실행하면 된다. 4가지 조도를 다르게 적용해 시간대별로 다양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입구 쪽 정동사거리 인도에 설치된 키오스크에서 돈의문의 역사 및 복원 과정에 대한 요약 정보와 함께 돈의문 AR 체험 앱 설치법을 안내받을 수 있다. 또 55인치 키오스크 화면으로도 AR로 재현된 돈의문을 경험할 수 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광화문 현판, 검은 바탕에 금박 글자로 교체

    광화문 현판, 검은 바탕에 금박 글자로 교체

    1893년 美자료 등 참고… 내년 마무리 균열, 색상 오류 등 ‘고증 실패’ 논란에 휩싸였던 경복궁 정문의 ‘광화문’ 현판 교체 방법이 최종 확정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 전통 안료를 쓴 테두리 단청 형태의 새 광화문 현판을 2020년까지 제작한다고 14일 밝혔다. 광화문 현판은 한국전쟁 때 파괴된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한글 현판으로 1968년 복원했다. 이를 2010년 현재의 모습인 흰 바탕에 검은색 한자 현판으로 바꿨다. 그러나 3개월 만에 현판에 균열이 가고 색상 오류 지적까지 나오며 논란에 휩싸였다. 문화재청이 복원에 참고한 1902년·1916년 사진자료보다 더 오래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1893년 사진이 결정타가 됐다. 새 현판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사진과 일본 와세다대 소장 ‘경복궁 영건일기’(1902)를 참고했다. 가구에 덧대는 금속장식을 만드는 두석장 보유자 박문열씨, 문화재수리기능자 박갑용(도금공)씨와 함께 시범 제작했다. 아교와 전통 물감을 사용해 단청을 시범 채색하는 등 지난 1년 동안 10차례 시험해 본 뒤 성능에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했다. 문화재청 측은 “올해 하반기까지 채색 작업을 마무리하고 광화문 현판의 의미를 부각시킬 날로 교체일을 선정해 추후 발표하겠다”고 덧붙였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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