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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靑 “제도 쇄신” 黨 “인적 쇄신”

    靑 “제도 쇄신” 黨 “인적 쇄신”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여권의 정국 위기 극복 방안을 두고 엇갈린 기류를 보이고 있다. 당은 책임총리제 부활과 정책특보 신설 등을 포함한 국정 쇄신안을 제시하려 했지만 청와대와 미묘한 이견을 노출하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당은 ‘쇠고기 파동’과 관련, 일부 부처 장관들의 인적 쇄신론에 무게를 둔 반면 청와대는 시스템 쇄신론에 좀 더 방점을 두는 분위기다. 16일로 예정된 이명박 대통령과 강 대표의 정례회동 연기도 표면적으로는 카를로스 구티에레스 미국 상무부 장관의 방문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당·청의 긴밀한 조율을 위해 시간이 필요해서라는 관측이다. 당 주변에서는 책임총리제 부활과 정책특보 신설을 골자로 한 당측의 쇄신안이 청와대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강 대표가 보다 완화된 내용을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자 “당이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제 목소리도 못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강 대표측은 “미 상무부 장관 방문 때문에 일정이 조정된 것뿐”이라며 “정치적 의미 부여는 말아달라.”고 경계했다. 청와대는 인적 쇄신보다는 정부 부처 간, 그리고 청와대 내부의 의사소통 단절로 인한 국정 난맥상에 대한 시스템 쇄신에 좀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이 대통령이 연일 ‘소통’을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일각에서 제기되는 인적 쇄신에 대해 “이번에 세게 훈련했는데, 바꾸면 또 새로 (훈련)해야 하고….”라며 “내가 기업 CEO할 때도 느낀 건데 사람이 시련을 겪으면 더 강해지는 게 있다.”고 일축하기도 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국정 난맥의 이유로 수석비서관실 사이의 업무협조와 정보공유가 원활하지 못한 것을 꼽기도 한다. 민감한 사항은 모두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논의하기로 한 방침을 정했음에도 일부 수석들이 다른 수석들과의 논의없이 대통령과의 독대로 문제 해결하려는 경향도 한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또 부처 단계에서부터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협화음을 내는 경우도 있다는 지적이다. 논란이 됐던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쇠고기협상 외교부 책임’발언에 대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성이 장관 발언도 협상 과정이나 논의 진행과정을 알았더라면 그런 말은 못했을 것”이라고 소통의 부재를 인정했다. 김지훈 윤설영기자 kjh@seoul.co.kr
  • [교정 대상 수상자] 특별상

    ●면려상 남상학 서울구치소 교위 1979년 교도관으로 임용된 뒤 28년 5개월 동안 투철한 사명감으로 세입 확충과 직원 주차공간 마련 등에 힘썼다. 구치소 정화조 용량부족으로 오염 문제가 발생하자 의왕시와 여러 차례 협의를 통해 안양시 오수종말처리장에 직접 연결함으로써 시설보완에 필요한 막대한 국가예산을 절감했다. 또한 민원실에 민원인을 위한 유아놀이방을 새로 만들고 민원실 현관 입구에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경사로를 설치해 장애인 처우 개선과 민원인의 편의를 적극 도모했다. ●창의상 김흥중 성동구치소 교위 1980년 교도관에 임용된 뒤 28년 1개월 동안 원칙적인 근무로 검신을 철저히 하여 도주사고를 예방하고, 직원들의 복지향상에도 기여했다. 성동구치소 법조타운 이전과 관련, 관계기관에 교도소 쪽의 입장을 전달해 서울시에서 책정한 부지보다 4000여평을 추가로 할당 받았다. 민원인용 주차장이 부족해 민원 제기가 빈번하자 테니스장을 주차장으로 전환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으며,93년부터 상일동 소재 중증장애인 수용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공로상 정종훈 장흥교도소 교화위원 교도소 교정협의회 고문으로서 1992년에 교화위원으로 위촉돼 15년 6개월 동안 교화상담을 실시하고, 수용자 체육대회 등에 물품을 지원했다.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출소자에게 취업을 알선했으며, 교정위원 발전을 위해 기금 및 위원 대기실 비품 등을 기증했다.90년부터 지역의 불우 대학생 7명에게 6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고, 장흥지청 예방위원으로 활동하던 2004년에는 절도범의 벌금 200만원을 대납하고 교화활동을 실천했다. ●자애상 최영순 영등포교도소 종교위원 1986년 종교위원으로 위촉돼 21년 10개월 동안 활동했다. 수용자 종교집회 및 교리지도에 적극 참여했고, 다과류 및 생필품을 지원했다. 신앙생활에 대한 상담을 실시하고, 영치금을 지원했다. 또한 종교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고, 취업을 알선하는 등 출소자들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교도소내 정예직업훈련소의 책임봉사자로 일하며 천주교 신자들의 고충상담을 도맡아 ‘훈련소 어머니’로 불리는 등 교정교화에 헌신했다. ●박애상 홍재정 의정부교도소 종교위원 서울상북노회 전도목사로서 1995년 종교위원으로 위촉된 뒤 13년 7개월 동안 종교집회와 교리지도를 했다. 취업을 알선하고 벌금을 대납했으며, 수용자 정신교육과 교화강연을 했다. 교정복지선교회로부터 도서 2900여권을 지원받아 기증했다. 또한 2007년 모범 교정공무원 부부에게 격려 여행비를 지원하고 직원탁구장의 바닥공사 비용과 운동기구 구입비 등을 지원했다. 또한 서울지방교정청 교정연합회 운영위원과 한국기독교 교정복지선교회 운영이사로 활동하며 교정교화에 공헌했다. ●성실상 윤동한 대구교도소 교위 1977년 교도관에 임용된 뒤 30년 11개월 동안 수용자 교정교화에 헌신했다. 소송서류 담당시 서류 작성에 필요한 법률상식 소형책자 150여권을 자비로 만들어 수용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가족과 연락이 단절된 수용자 20여명에게 가족과 연락이 닿도록 조치해 주는 등 성실한 업무 수행으로 99년 변호사 협회장상을 받았다. 또한 2005년 수용자 정신교육 담당시 외부 전문강사들을 초빙해 수용자를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2004년부터 지체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희생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자비상 박윤자 경주교도소 종교위원 1994년부터 참여인사로 활동을 시작해 98년에 종교위원으로 위촉됐다.94년부터 여자 수용자들에게 미용봉사를 실시하고, 매월 불교행사시 음식물 등을 지원했다.97년부터 대구, 대전, 청주, 청주(여) 등 4개 교정기관에서 매월 정신교육을 했다. 또한 정보화교육 기자재 확보를 위해 기금을 마련했고,2003년부터 징벌위원, 교정시민옴부즈맨으로 활동했다.27년간 양로원, 무의탁 독거노인들에게 미용봉사, 장애인에게 미용기술을 지도해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노력했다. ●교화상 박한영 홍성교도소 교위 1977년 임용된 뒤 보안근무만 31년 4개월 동안 수행했으며 수용 벌금을 대납하거나 취업을 알선했다. 직원테니스장 신설시 적극적인 활동으로 외부인사에게 600만원을 기증받고, 종교인들에게 교화 기자재를 적극 지원받아 처우개선에 기여했다.2002년부터 지역 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내고향 지키기에 앞장서고 지역 원호가족 및 불우시설에도 성금을 지원했다. 또한 75세인 어머니는 췌장 및 비장암,52세인 부인은 간암 수술 후 간경화로 투병 중임에도 항상 밝은 모습으로 봉사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교정발전상 양강래 육군교도소 원사 1976년 육군 하사로 입대해 32년 2개월 동안 투철한 사명감과 성실한 자세로 수용자의 취미활동을 보장했다. 또한 면회시간을 연장하는 등 수용자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군교도관들에게 수형생활지침서를 작성해 제공하는 등 군교도관 자질향상에 기여했다. 2000년부터 여주교도소와 자매결연을 맺어 정보교류를 활발히 했다. 또한 육군교도소 환경개선에도 기여해 98년 국방부장관 표창을 받는 등 교정행정 발전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며 헌신했다.
  • 佛출판계 “메르시 사르코지”

    |파리 이종수특파원|프랑스 출판가가 ‘사르코지 특수’를 누리고 있다. 16일 취임 1주년을 맞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을 소재로 한 소설과 에세이 등 20여종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들 신간의 대부분은 저자가 좌파이든 우파이든, 또 장르를 막론하고 사르코지 대통령의 국정을 비난하거나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하락세의 수렁에 빠진 사르코지 대통령의 지지율을 반영한 듯하다. 최근 출간된 책 가운데 사회당 소속의 프랑수아 레오타르 전 총리가 낸 소설 ‘나쁘게 끝날 거야’(그라세 출간)는 서점가에 나온 지 한달 만에 12만여부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일간 르 피가로가 12일(현지시간) “‘사르코지-푸념’도 판매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며 “사르코지의 취임 1년에 대한 이런 조롱 일색의 출판 동향은 자크 시라크의 임기 마지막 해와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그라세 출판사의 편집장은 “엘리제궁을 소재로 한 소설만 불티나게 팔리고 다른 소설은 팔리지 않아 걱정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이들 책은 제목부터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한 사르코지 대통령의 국정 1년을 희화화하는 게 많다. 좌파 성향인 일간 리베라시옹의 로라 조프랭이 낸 책의 제목은 ‘벌거벗은 왕’(로베르 라퐁 출간)이다.또 사회당의 차기 당대표 출마 의사를 밝힌 피에르 모스코비치 의원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한 ‘68혁명 잔재 청산’ 발언을 빗대 ‘청산자’(아셰트 출간)라는 책을 냈다.이밖에 ‘곤두박질과 파산’(페이야드 출간) ‘사르코지와 돈의 왕’ 등 사르코지 대통령의 국정 1년에 대한 냉소적인 제목도 적지 않다.vielee@seoul.co.kr
  • 佛 저명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父子 인터뷰

    佛 저명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父子 인터뷰

    |파리 이종수특파원|68혁명 4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겁다. 최근 발간된 신간만 60여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부자(父子)가 대담 형식으로 정리한 ‘사르코지에게 설명한 68혁명’(드노엘 출간)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 좌파 지식인이었던 글뤽스만은 지난해 사르코지 여당 후보를 공개 지원해 논쟁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출간 직후인 지난달 초 파리 10구 포부르 푸아소니에르 62번지 글뤽스만의 자택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뷰는 1시간 30분여 진행됐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43년의 터울을 둔 부자는 68혁명을 놓고 생각이 겹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했다. ●“사르코지가 68혁명을 왜곡…” 출간 배경이 궁금했다. 말문을 연 것은 아들 라파엘. 그는 “우리 집은 68혁명 뒤 권위주의가 없어진 가정이니까 내가 먼저 말하겠다.(웃음)”고 했다. 아들 (라파엘, 이하 아들) 지난해 여당 유세 현장에 참석했는데 사르코지 후보가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몹시 거북했다. 순간 68세대인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예상과 달리 웃고 있었다. 유세장을 나온 뒤 “왜 아까 웃고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사르코지 말은 당시 대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 뒤에도 질문이 이어져 아예 책으로 만들게 됐다. 아버지(앙드레, 이하 아버지) 책 제목 그대로 사르코지에게 68혁명을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가 68혁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68혁명 이후 상대주의가 난무하고 도덕의식이 무너졌다는 그의 진단은 맞다. 하지만 핵심을 비켜갔다.68세대의 본질적 실수는 ‘교조주의적 마르크시즘’에 빠진 것이다. 사르코지 후보는 이를 알고도 정략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나중에 한 대담에서 본인도 ‘정략적 이용’이라고 시인했다. ‘정치적 책략’이었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물었다. 아버지 당시 사르코지가 지지율이 높았다. 그래서 좌파는 물론 중도·극좌파 후보들이 ‘반(反) 사르코지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자 사르코지가 그들의 ‘정신적 공통분모’인 68혁명을 건드린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 후보가 처음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30분 뒤 사르코지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말려들었다. 처음처럼 대응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자 아들이 끼어 들며 반론을 제기했다. 아들 전략적 연설이었다는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르코지의 도발은 좌·우파 양 진영에 남아 있는 보수주의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그는 ‘프랑스 병’의 핵심을 정체성 상실로 본 뒤 그런 혼돈의 책임을 묻기 위해 68혁명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이민자 출신에 이혼 경력이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8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68혁명을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인데 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프랑스 68혁명만이 공산주의 비판” 고정된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탄력적 사유를 강조한 두 사람에게 68혁명의 본질은 어떻게 비칠까? 아버지 두 가지 의미에서의 ‘단절’이다. 하나는 프랑스의 전통적 정서, 특히 농촌에 뿌리를 내렸던 평온함을 중시하는 전통과 단절한 게 68혁명이었다. 그래서 ‘68의 아이들’은 뿌리가 뽑히고, 불확실해하고 미래에 대해서 늘 걱정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200년 동안 이어온 노동자·공산주의 중심 사상과의 단절이다. 당시 좌파 가운데 최대 정당인 공산당은 노동자를 ‘대안 사회’ 혹은 혁명을 담보할 주역으로 껴안고 있었다. 소련을 추종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68세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아들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68혁명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점이 프랑스의 독창성이다. 아버지인 앙드레 글뤽스만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혁명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만의 경험이 담긴 ‘육성’을 들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 소르본 광장에 학생들이 운집, 연좌 시위를 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경찰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곳에 레지스탕스이자 공산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이 찾아 왔다. 그는 “나는 공산당과 노선을 달리한다. 여러분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콘-벤디트가 “당신이 왜 스탈린을 칭송했는지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 말에 동의하겠다.”고 말했다. 대답을 못하고 돌아가는 아라공을 향해 콘-벤디트가 “당신의 흰 머리 위에 피가 묻어 있다.”고 확성기로 말했다. 이 장면은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라파엘이 말한)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이나 일본의 68혁명과 가장 다른 프랑스만의 특징이었다. ●68혁명 이후 달라진 것들 68혁명이 이후 프랑스에 가져온 구체적 변화와 그에 대한 해석에서 두 사람은 조금 입장이 달랐다. 특히 라파엘은 68세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들 68혁명은 ‘수직의 세계’를 수평으로 바꾸었다. 문화·관습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낙태도 허용됐고 여성이 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중·고교도 남녀 공학이 됐지. 아들 그러나 프랑스 정치는 여전히 수직의 잔재가 남아 있다. 정치에서는 68혁명의 정신이 스며들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68세대를 비난한다. 프랑스는 여전히 중앙집권적이고 대통령에 집중돼 있다.. 이런 면에서 68세대라고 주장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 그래도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뒤 이민자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좌파를 등용한 것이 얼마나 열린 변화인가? 아들 아직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국은 엘리트를 중시하는 전통적 의미의 정치집단과 사르코지가 갈등하는 형국이다. 이윽고 화제가 ‘68혁명의 현대적 의미’로 넘어 왔다. 아버지 앙드레 글뤽스만은 좌·우를 떠나서 인권과 자기 성찰, 유럽공동체 정신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튼실히 하면서 68혁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들은 ‘68혁명의 재해석’을 강조했다. 아버지 68정신의 요체는 ‘감히 교수와 다르게 생각하기’다. 좌·우파를 아울러 한 진영에 종속되기보다는 항상 자신과 주위를 돌아 보면서 비판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가 58년 부다페스트 사태 때 소련을 비판했다가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한 것이나 70년대에 ‘배신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소련의 재야 인사들을 지지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아들 그러면 지금은 “우리는 티베트인”이라고 말해야겠다. 아버지 그렇다. 중국이 강국이라고 눈치를 봐선 안 된다. 아들 그런 의미에서 68혁명 지도자 가운데 한 명도 제도권 정치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이 없는 것도 흥미롭다. 다니엘이 속한 녹색당도 68년 이후에 생긴 당이어서 제도권 정당으로 보기 어렵고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무장관도 사회당원이었지만 당 내에서는 늘 변방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68정신은 늘 프랑스의 전통적 중심부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두 부자는 68혁명 리더들이 각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아들 그건 다행아닌가. 혁명의 리더들이 한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진영 구분짓기를 끝냈다는 의미다. 아버지 말대로 ‘스스로 운명 선택하기’를 실천했다는 거다. 꼭 좌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지워진 고정관념이다. 또 68세대가 깨고 싶었던 ‘벽’이 아닐까? 다시 물었다.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진 앙드레 글뤽스만이 지난해 사르코지를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냐고? 아버지 그렇다. 대선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인권을 부활하겠다고 말한 이가 사르코지였다. 좌파의 비판이 예상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vielee@seoul.co.kr
  • 남·북·중 ‘올림픽 기류’ 미묘

    오는 8월8일 개막하는 베이징올림픽을 둘러싸고 남과 북, 그리고 중국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5일 “지난 2월 초 남북이 만나 베이징올림픽에 남북 공동응원단 600명을 2차례로 나눠 보내기로 합의했지만 그 뒤로 대화가 단절돼 진전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최근 비공식 기자 간담회에서 “공동응원단 참가 문제가 그동안 진전됐더라면 대내외적으로 이미지 제고에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며 “현재 북한이 우리를 계속 비난하고 남북대화도 없어 현실적으로 추진할 방법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한·중도 냉랭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달 27일 서울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 행사에서 발생한 중국인 시위대의 폭력사태가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등 갈등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3월 열린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추진키로 한 베이징올림픽 기간 중 무비자 입국에 대해 중국측이 최근 불가 입장을 통보했다. 반면 북·중은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우호를 더욱 과시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열린 성화봉송 행사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일 내각총리 등 고위급이 대거 참석해 순조로운 행사를 홍보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박의춘 북 외무상이 최근 방중, 경제 지원을 협의하는 등 북·중 관계가 좋다.”며 “이는 남북 및 한·중 관계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오히려 중국이 북한을 통제하게 되면 올림픽을 앞두고 6자회담을 진전시키고 남북관계 악화를 위한 도발을 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공학과 경영학의 만남을 위하여

    [내 책을 말한다] 공학과 경영학의 만남을 위하여

    학문세계에서는 무엇보다 공학과 경영학 사이의 거리가 멀고 벽이 높다. 데카르트적 이원주의는 세상을 ‘자연계’와 ‘사회계’로 양분했다. 그로 인해 공학과 경영학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기준으로 생각했고,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왔다. 차이의 폭이 커지면서 단절의 골은 더 깊어졌다. 지난 세월, 나는 교육과 실무의 현장에서 두 세계의 사고체계와 표현방식이 얼마나 다른가를 실감하면서 공통의 주제를 찾고 양쪽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공용어를 만드는 작업을-흔히 테크노경영이라고 부르는-계속해 왔다. 그러나 기술의 본질을 바라보는 공학자의 시각과 경영학자의 시각이 같아지기는, 아니 적어도 비슷해지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공학자에게 기술은 비타민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고 여기저기 쓸모가 많은 기술일수록 더 가치 있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눈앞의 문제를 치료하기보다는 미래의 문제를 예방하는 게 기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영학자에게 기술은 진통제 같은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고 한 가지라도 분명한 쓸모가 있어야 가치 있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기술의 역할은 문제의 진단에 있지 않고 처방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 서로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중간자의 위치에 서서, 공학자의 생각을 경영학자에게 설명해주고 경영학자의 얘기를 공학자에게 전달하는 심부름을 해 왔다. 이 책은 그 심부름의 기록이다. 먼저 기술의 속성에서는 기술의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고, 이어서 기술과 경제에서는 기술혁신이 거시적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오는지를 말하고 있고, 그 다음 기술의 탄생에서는 무슨 기술을 어떻게 만들어낼지를 논의하고 있다. 이어지는 기술과 사업에서는 만든 기술을 어떻게 돈벌이로 연결할지를 고민하고, 기술과 지식에서는 필요한 기술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고, 마지막으로 기술의 전환에서는 기술변화의 큰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공학자가 이 기록을 읽는다면 더 넓은 외부를 조망할 수 있는 큰 눈을 가지게 되고, 경영학자가 읽는다면 더 깊은 내부를 탐색할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게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용태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 [佛 68혁명 40돌] (1) 계승과 단절

    [佛 68혁명 40돌] (1) 계승과 단절

    1968년 봄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던 68혁명이 40주년을 맞았다. 프랑스 낭테르 대학 교내시위로 첫 발을 뗀 혁명은 베트남전, 옛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물질 만능주의 등 국제적인 문제와 맞물려 독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문화적 충격을 줬다. ‘타는 목마름으로….’ 혁명은 멈추지 않는다.40년 전 세계를 뒤흔든 68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적 의미로는 당대 시계에서 멈췄다. 그러나 당시 분출된 새 사회에 대한 열망은 이후 녹색당과 적군파, 시민운동, 성(性)혁명, 페미니즘, 전위적인 예술 실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었다.40주년을 맞는 지구촌 표정과 당시 현장을 지켜본 석학들의 증언을 통해 ‘계승과 단절’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파리 이종수특파원|해마다 5월이면 프랑스 전역이 들끓는다. 세계를 뒤흔들었다고 평가받는 1968년 5월 혁명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열기 때문이다. 그만큼 프랑스인들의 정신사에 큰 자취를 남긴 대사건이었다. 특히 올해는 40돌이어서 열기가 더 뜨겁다.1400여곳에서 축제·전시회·토론회·영화제 등이 잇따른다. 최근 발행된 관련 신간만 60여종에 이를 정도다. 숫자의 의미만 아니라 올해 68혁명은 유달리 뜨거운 이슈로서 살아 숨쉬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2차 국면에서 당시 여당 대중운동연합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으로 주장하면서 뜨거운 논쟁으로 떠오른 것도 한 요인이다. 당시 사르코지 후보는 3만여명의 지지자가 모인 연설에서 “이번 선거는 68혁명의 유산이 영원히 이어갈지 청산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선거”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프랑스의 ‘정신적 터부’를 건드렸다. 68혁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구체적 정황은 지난달 시작한 고교생들의 시위에서도 확인된다. 일주일에 두 차례 진행된 고교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파리 인근 고교생의 주도로 시작한 이번 시위가 교원 노조나 대학생 단체, 교육관련 노동조합이 가세하면서 3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2주 전에는 시위 현장에서 “새로운 68혁명이 필요하다!!!”는 벽보까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오는 15일과 24일에는 교육 관련 18개 단체들이 총궐기할 태세여서 앞으로 시위가 어떻게 확산·전개될지 주목된다. 일단 학생 시위에 노동조합이 가세한 양상은 68혁명과 비슷하다. 물론 이번 시위가 제2의 68혁명으로 확대된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68혁명은 프랑스인들의 ‘지금, 여기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40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68혁명의 잔재가 이토록 깊고 오래 각인되고 있는 것일까? 출발은 단순했다. 진앙지인 파리 북서쪽 낭테르 대학.1964년 신설된 뒤 지나치게 많은 학생수, 비현실적 교육 내용, 가부장적 분위기 등에 반발한 사회학과 학생들이 67년 11월 수업을 거부하고 학장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면담이 거부되면서 대학개혁 이슈는 파리 모든 대학으로 번졌다. 전국대학생연합의 주도로 시작된 수업거부에 대학측은 공권력 진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베트남 반전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면서 학생운동은 조직적 양상을 띠었다. 다니엘 콘-벤디트가 결성한 ‘3·22운동’은 “오직 기존 체제의 파괴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투쟁 목표를 넓혔다.5월 들어 학생들은 소르본 대학 폐쇄에 맞서 10일 밤 인근 라탱지구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를 벌였다. 진압 과정에서 수백병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차츰 교원 노조, 고등학생 단체가 가세했고 13일에는 노동총동맹이 연대하면서 ‘성난 물결’은 걷잡을 수 없었다. 21일에는 전국적인 노동자 총파업으로 확산됐다. 이에 드골 정부는 경찰을 동원했고 의회를 해산한 뒤 6월 23·30일 실시한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급진적 좌파조직을 불법단체로 규정하며 시위 금지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끝났고 좌파들은 ‘새로운 68투쟁’을 찾아 나섰다. 때마침 독일·스위스·벨기에 등 인근 나라에서도 68혁명의 불꽃이 타올랐다. 독일의 경우 명분없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의 피습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이에 정부가 긴급조치법 제정으로 강경 대응하면서 6만여명의 학생과 좌파 진영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노동계의 소극적 태도 탓에 대학생 시위로 분출되는 양상이었다. 대중과 유리된 운동 방식은 70년대 적군파 출현으로 이어졌다. 68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단순한 정치 혁명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문화 전반을 바꾸려는 문화혁명이었다.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은 “삶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게 68혁명이었고, 실제로 그 이후로 모든 생활이 바뀌었다.”고 평가했다.68혁명 당시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확산된 기폭제 역할을 했던 르노 자동차 공장의 한 노동자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데에는 혁명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다. vielee@seoul.co.kr ■ 68혁명 프랑스-독일 연표 ▲1968년 1.31 프랑스 파리소재 대학 수업거부. ▲3.20 프랑스 소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폭파사건. ▲3.22 프랑스 낭테르 대학본부 점거. 학생조직 ‘3·22운동’ 탄생. ▲4.11 독일, 학생운동가 두치케 피습. ▲5.2 낭테르 대학 폐쇄. ▲5.3 프랑스 학생들, 소르본 대학 집결. 경찰 진입,527명 체포 뒤 소르본 대학 폐쇄. ▲5.6 파리 소재 대학들 폐쇄, 학생들 시위 격화,422명 체포. ▲5.11 독일, 긴급조치법 선포에 반대 시위. ▲5.13 프랑스 노동자들 총동맹 파업. 독일 경찰, 마르쿠제 강연 방해 및 강의실 진입. ▲5.21 프랑스 노동자들 전국적 총파업. ▲5.27 독일 학생들 프랑크푸르트 대학 점거. ▲5.30 드골 프랑스 대통령, 국회해산 선언. ▲6.12 프랑스 총파업 종결. 급진적 좌파조직 불법단체 규정. ▲6.13 프랑스 극좌파 계열 11개 학생조직 강제 해산. ▲9.22 독일 공산당 창당.
  • 통일부 ‘개점휴업’

    새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 경색이 지속되면서 대북정책을 담당하는 통일부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상호·실용주의를 앞세운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강경책에 밀려 통일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남북대화 단절속 인도적 지원도 `스톱´ 정부 소식통은 28일 “대북정책이 청와대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통일부가 사실상 할 일이 없는 상황”이라며 “대북 인도적 지원 등 원칙에 따라 추진할 정책조차 남북간 대화 단절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인 지난 17일(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북측에 제안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가 당일 부랴부랴 관련 자료를 내는 등 곤욕을 치렀다.●남북연락사무소 제안도 뒤늦게 알아 정부 소식통은 “청와대가 통일부와 협의 없이 방미 후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통일부가 뒤늦게 동·서독 상주대표부 사례 자료를 내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북측이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을 거부하면서 신중하지 못한 대북정책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통일부가 사실상 대북정책의 키를 잡지 못하면서 김하중 통일장관의 ‘잠행’도 한달 이상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11일 취임한 김 장관은 같은 달 19일 개성공단 입주기업 간담회 발언이 문제가 된 뒤 종교계와 학계, 자문위원 등과의 오찬 등 비공식 만남 외에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통일부 안팎에서는 ‘장관이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통일부 한 관계자는 “조직과 인원이 대폭 축소돼 맡은 일은 더 늘어났는 데도 장관이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 힘이 빠진다.”며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통일부가 대북정책 관련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쌀·비료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및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총리회담에서 합의한 경협 등도 ‘휴업’상태다. 새 정부가 경협 사업은 북핵문제 진전 및 타당성 검토 이후 추진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도적 지원은 조건 없이 하겠다는 원칙을 세운 만큼 남북대화를 재개,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통일부는 통일교육만 하는 곳 아니다” 한 남북관계 전문가는 “통일부는 새터민 관리나 통일교육만을 위한 부처는 아니다.”며 “대북 상황관리를 통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사설] 북 연락사무소 거부 유감이다

    북한이 그제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고위급 연락사무소 서울·평양 설치 제안을 거부했다. 노동신문은 연락사무소 자체를 “반통일 골동품”이라고 규정했다. 노동당 기관지의 논평은 북한당국의 공식 입장이다. 남북관계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호기를 외면하는 꼴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북측의 반응은 남북관계 경색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다. 북측은 북·시리아 핵협력설이 터져나온 와중에도 최근 핵 신고와 관련, 미국 측과 방북 협의에 응했다. 남측 당국자 방북 불허 방침과는 대조적인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자세다. 노동신문이 ‘정치 몽유병 환자’라는 둥 이 대통령을 원색 비난한 것도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 표시의 연상선상에 있는 셈이다. 북측이 연락사무소 거부 논리로 ‘분단 영구화’를 운위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서독은 1974년 상주 대표부라는 상시 대화채널을 확보한 끝에 결국 통일을 이룩했다. 남북이 고위급회담에서 1992년 설치에 합의한 판문점 연락사무소는 그동안 전화통지문 전달 등 단순 연락 기능을 하는 데 그쳤다. 그래서 “남북한 최고지도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인물을 책임자로 해 상시 대화채널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제안이 설득력을 지닌다. 이질적 체제인 남북간 갈등은 당사자간 상시·정례 대화로 해소하는 게 쌍방에 이롭고 효율적이다. 북측이 통미봉남 전술을 접어야 할 이유다. 어떤 이유로든 대화 단절이 지속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청와대는 북측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며 “대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고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정부가 한발 더 나아가 물밑 대화채널을 가동해서라도 대화 재개의 이니셔티브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북 쌀 지원도 검토할 만한 카드란 얘기다.
  • [특파원 칼럼] 사르코지를 위한 변명?/이종수 파리특파원

    [특파원 칼럼] 사르코지를 위한 변명?/이종수 파리특파원

    최근 프랑스의 핫이슈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개혁 1년’을 바라보는 냉엄한 평가다. 하나 더 있다. 사르코지의 ‘이례적 사과’다. 언론사마다 ‘엘리제궁의 주인’이 1년 동안 전방위로 휘두른 개혁의 성적표를 점검하느라 분주하다. 가장 살갗에 와닿은 잣대는 지지율이다. 취임 한 달 뒤 67%까지 치솟았던 사르코지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거듭했다. 최근에는 30%대까지 추락했다. 지난주 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 64%가 “1년 동안 프랑스 상황이 나아진 게 없다.”며 싸늘하게 반응했다. 일간 르 파리지앵이 24일(현지시간) 보도한 ‘역대 대통령 지지도’에서도 사르코지의 성적은 40%로 꼴찌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역할 모델’로 강조한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샤를 드 골은 88%로 선두였다. 당당하던 사르코지 대통령도 마침내 24일 언론인 5명과 엘리제궁에서 가진 특별 회견에서 ‘1년 동안 실수를 했다.”며 사과했다. 물론 세계 경제 상황이 악화돼 개혁이 부진했다고 항변도 했다. 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날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사과’였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고해성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지지율 하락이다. 정치가 움직이는 생물이라고들 하지만 취임 한 달 뒤부터 지지율이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백컨대 필자는 그의 개혁 드라이브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한국 언론에서 앞다퉈 그를 주목할 때도 시큰둥했다. 정치적 수사 혹은 제스처라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사르코지 대통령은 많이 뛰었다. 사회당 인사를 장관으로 끌어안고 여성 장관을 내각의 절반으로 구성하는 등 ‘신선한 충격’을 던진 뒤 숨가쁘게 뛰었다.‘개혁’과 ‘과거와의 단절’을 주창하면서 경제·사회·노동·보건복지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누적된 ‘프랑스병’을 고치려고 나섰다. 일간 르 몽드 집계에 따르면 그가 1년 동안 내놓은 개혁안이 55가지다. 그의 역동성은 외교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특히 신흥 개발국인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들을 방문, 가는 곳마다 ‘비즈니스 외교’로 실익을 거두었다. 심지어 인권 탄압의 상징인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도 초청해 굵직굵직한 계약을 맺으며 경제 외교를 실천했다. 그러나 지지율은 떨어지기만 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개혁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이혼과 재혼 등 파격적 사생활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로 “프랑수아 피용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는데 이는 개혁에 대한 지지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내놓은 ‘구매력 강화’ 방안이 실현 가능성이 낮은 데서 오는 실망감 때문이라고도 해석한다. 또 최근 급상승한 물가와 세금에 대한 반발도 큰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빌르누아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마르틴 술리에 사장은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려면 물가부터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사르코지의 지지층은 벌써 개혁의 결실을 바라는 것은 이르다고 주장한다. 파리 8대학의 한 학생은 “그는 너무 빨리 많은 것을 하려고 했다.”며 “경제 문제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기에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상식의 용기’라는 책을 낸 미셸 고등 경제분석위원회 위원은 “노동계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연금 개혁안을 밀어붙이는 등 사르코지 대통령은 우리에게 일을 덜하고 있다는 점을 깨우쳤다.”면서도 “지금까지는 스타일만의 변화라는 이미지를 주었는데 방향을 잘 잡으면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르코지 대통령도 ‘남은 4년’을 지켜봐달라고 강조했다. 이런 다짐이 또 ‘화려한 수사’에 그칠지, 현실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이종수 파리특파원 vielee@seoul.co.kr
  • [길섶에서] 섬/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시인은 고속도로 화장실서 시(詩)창작론 요약본을 만났다고 했다.‘한걸음 더 가까이’‘우리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열 권 넘게 읽은 시창작론이 딱 두 줄에 요약됐다고 했다. 시인은 시의 퇴고는 보태는 것(添·첨)이 아니라, 빼는 것(削·삭)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인이 진정 줄이고 싶은 게 단어와 문장이라는 껍질일까. 시인의 ‘삭’은 붉게 녹슨 영혼의 군더더기를 닦아내는 몸부림이다. 정제되지 않은 삶의 찌꺼기를 거르는 고통이다.“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이다. 단 두 줄이다. 단절·고독·절망의 절규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우리의 아픔 아닌가. 지난해 작고한 오규원은 인간 대신 사물을 세상 중심에 뒀다.“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껍질만 남은 육신을 꾹꾹 눌렀다. 시와 더불어 자신을 보냈다. 새털같은 영혼이 가슴 아리다. 삶이 곧 시다.‘삭’은 곧 고통이다. 우리는 얼마나 ‘삭’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한·미 정상 회담] 남북 연락사무소 성사될까

    방미 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18일(한국시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북한에 제안하겠다고 밝혀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대통령이 취임 후 북측에 실질적 대화를 하자는 메시지를 계속 던져온 만큼 갑자기 나온 제안은 아니라는 것이 청와대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돼 당국간 대화가 단절된 상황에서 북한이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대체적 시각이다. 한 전문가는 “북측과 사전 교감 없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의한 것은 오히려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며 “대화를 하자는 뜻은 전달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순항하면서 2006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장관급회담에서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의했지만 북한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지난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제안했으나 북측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북측은 공식적으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설치하는 것을 남북간에 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연락사무소 설치가 체제에 미칠 영향이나 사무소 인력, 운영, 감독 문제 등을 민감하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남북관계 전문가는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는 남북회담이 완전히 정례화되고 제도화의 수준이 높아졌을 때 회담 채널을 상설화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남북연합 초기단계에서 가능한 것으로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엇갈린 반응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은 연락사무소 설치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환영했다. 반면 통합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은 남측 새 정부와 북측간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며 “이 대통령이 대북자세와 정책노선은 소극적이면서 연락사무소 설치와 같은 적극적이고 고차원적 제안을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아웃사이더들, 학문현실에 비판의 칼

    아웃사이더들, 학문현실에 비판의 칼

    “지금의 우리는 선배 학자들과 다르고 앞으로도 달라야 한다. 우리 세대와 앞 세대의 학술운동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세대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7명의 젊은 연구자들이 최근 ‘대안지식연구회’란 이름으로 모였다. 김원(성공회대 노동사회연구소 연구원), 이명원(전 서울디지털대 교수),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 연구교수), 김윤철(전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이승원(전 국회외교통상정책 보좌관), 이영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연구원), 김정한(‘대중과 폭력’ 저자)이 그들이다.1989년 혹은 90년 대학문을 들어선 ‘포스트 386’이자, 마흔이 채 되지 않은 학계의 막내들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학계 선배들과 적극적으로 차별화한다.1970∼80년대를 헤치며 선배들이 땀 흘려 일궈온 학술운동단체에 비판의 칼날을 서슴없이 들이대고, 학계의 관료화된 지식생산 시스템에 거침없는 분노를 표시한다. 대학에 안정적 터를 마련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기에 가능한 비판이지만, 대학에서 생존기반을 닦아나가야 할 비정규직 연구자들이기에 무모한 비판이기도 하다. ●뚜렷한 세대의식 표출로 지식사회 비판 대안지식연구회는 구성원들간의 오랜 인연에 뿌리를 뒀다.2001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사망으로 촉발된 1991년 ‘5월 투쟁’의 10주년을 준비하며 서로를 알게 됐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그들은 7년이 흐르는 동안 반수 이상이 박사학위를 받았고, 각자의 전문영역도 확보했다. 김원은 노동사를 중심에 둔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 연구로 거대서사에 가려진 ‘사회적 약자들’을 복원하는 데 주력했고,2000년 당시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논문표절을 비판해 문단을 발칵 뒤집었던 이명원은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을 통해 기성 평단에 전투적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윤철은 진보정당에 몸담아 새로운 정치를 꿈꿨고, 하승우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가능성을 탐색해왔다. 자기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지난해 가을 다시 한 자리에 앉았고, 한국 지식사회를 향한 공통의 문제의식을 확인했다. 선배 학자들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신진 연구자들의 날 선 세대의식엔 학문후속세대로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실존적 고민이 투영돼 있다. 독재 시기 관제학문에 반발하며 비판적 학술운동의 전성기를 열었던 선배들의 현재를 바라보는 실망감도 반영돼 있다. 연구회 김원 대표는 “우리 세대 연구자들이 학문적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사회적 발언의 장에서 소외되고 있는 동안, 제도권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 선배들은 학문공동체의 역동성을 강화하기보다 현실인식과 실천방식에서 후속세대들과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켰다.”고 지적했다. 단적인 예가 학술진흥재단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학문지원 및 개입정책에 대한 시각차다. 선배세대 학자들이 학진의 연구 프로젝트에 적극적·소극적 참여를 통해 제도권 지식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정립해간 반면, 연구회는 학진 프로젝트를 ‘학문 부르주아’와 ‘학문 프롤레타리아트’로 양극화시키는 관료화된 지식생산 메커니즘이라고 비판한다. 영어로 쓰인 SCI(과학논문인용지수) 논문에 가중치를 주는 국내 대학들의 교수 승진·재임용 심사 정책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행태”라고 혹평한다. 김 대표는 “앞 세대 학술운동을 주도했던 선배들이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장주의적 학문정책에 너무 안이하게 대응했다.”면서 “결국 선배들과의 소통이 단절된 후배들은 대안적 학문공동체를 구성하기보다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자기 학문에만 몰입하는 현상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연구회가 향후 활동의 초점을 ‘제도권과 비제도권, 선배세대와 후배세대간 소통 모색’에 맞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계 내·외부와 위·아래 소통 매개 연구회는 지난달 31일부터 매주 1회씩 연구자들이 돌아가며 사회 현안에 대해 논평하고, 이를 이메일로 구독자들에게 발송하는 ‘정치사회비평’을 시작했다. 같은 달 29일엔 ‘대안정치 실험의 성과와 한계’란 주제로 연구회의 첫 번째 월례토론회를 열었다. 특정 텍스트를 정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텍스트비평도 매달 진행된다. 모두 학문후속세대로서의 자의식을 분명히 표출하면서도 지식사회의 내·외부와 위·아래를 소통시킨다는 목적의식 하에 고민된 기획들이다. 김 대표는 “지금 당장 이거다 하고 제시할 만한 대안은 우리도 갖고 있지 않다.”면서도 “오늘의 학문현실에 대해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소장 연구자들이 공동의 논의 테이블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외교승 겐포(玄方)를 곁에서 떠나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건부 승리’이기도 했다. 바쿠후(幕府)는 요시나리를 선택하면서 그의 역량을 시험하고, 동시에 조선을 떠보는 조건을 달았다. 조선은 쓰시마의 소오를 다독거리며 바쿠후와의 관계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했다. ●바쿠후의 의도 ‘조선과 주고받은 국서를 멋대로 고쳤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처벌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바쿠후는 점차 쇄국(鎖國)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長崎)로 집중시키고, 동남아 등지로 가는 무역선(朱印船)의 출항과 일본인의 도항(渡航)을 금지시키는 조처를 구상했다. 바쿠후는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조선과의 관계도 다시 정비하려고 했다. 무역을 유지하면서도 유럽 국가들을 통한 기독교 유입을 차단하려 했던 바쿠후에게 조선과의 관계는 중요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유일하게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였다.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과 국교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데 필수적이었고, 조선과의 교역 또한 매우 중요했다.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선택’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가까스로 재개시켜 놓은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에 대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진 데다, 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는 조선을 상대해 왔던 소오 가문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쿠후는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주면서 ‘1636년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通信使)를 초치(招致)하라.’고 명한 것은 요시나리의 조선에 대한 교섭 역량과 조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조건이었다.1635년 8월, 바쿠후는 향후 겐포를 대신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할 승려들을 직접 선택했다. 교토(京都) 동복사(東福寺)의 승려 인서당(璘西堂)과 소장로(召長老), 천룡사(天龍寺)의 승려 선장로(仙長老)가 그들이었다. 이제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 쓰시마로 들어가 머물면서 조선으로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을 맡게 되었다. 교토에서 온 외교승들이 바쿠후의 지휘 아래 쓰시마의 대조선 외교를 직접 관장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야나가와 이켄’이 종료된 뒤 인서당이 맨 먼저 쓰시마로 건너왔다. ●‘일본위협론’이 다시 제기되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나가와 이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바짝 긴장했다. 후금의 위협과 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또한 소오 요시나리를 매개로 유지되어 왔던 조일(朝日)관계에 변동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퍼지고 있었다. 특히 1635년 연말에 재이(災異)가 거듭되면서 ‘일본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창덕궁 정전(正殿)에 벼락이 내리치고, 한성부 연못의 물빛이 붉게 변하는 변고가 나타났다.11월6일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사간 민응형(閔應亨)은 “옛날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괴상한 변고가 이어지는 법”이라며 “선조의 능침(陵寢)이 무너지고, 큰바람 때문에 나무가 뽑힌 것은 장차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무렵을 예로 들었다. 신묘년(1591년)에 풍재(風災)가 극심하더니 이듬해 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재이가 거듭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는 민응형의 발언에 조정은 술렁였다. 누가 쳐들어 온다는 것인가? 민응형을 비롯한 삼사(三司) 신료들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목했다.11월7일, 인조는 비변사 당상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일본이 과연 위험하냐고 물었다. 오윤겸(吳允謙)은, 뚜렷하게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성정(性情)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만일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조선이 일본보다 후금을 우대하고 있다.’고 쇼군에게 참소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계했다. 또 시게오키가 비록 패했지만 쇼군 주변에 시게오키를 두둔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이홍주(李弘胄)와 신경진(申景 )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수군을 잘 정비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했다. 11일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차자(箚子)를 올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거론했다. 그는 조정이 오로지 서변(西邊)을 막는 데만 급급하여 남변(南邊)의 방어는 거의 팽개쳐 버렸다고 비판했다. 남쪽의 군병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무기도 엉성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 조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백성들을 유사시에 전장으로 내모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상헌은 남변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통제사영(統制使營), 경상 좌수영(左水營)과 우수영(右水營)에 감군어사(監軍御史)를 파견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위협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조정은 후금의 동향이 불온하다고 느낄 때마다 주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삼남에서 수군과 전선(戰船)을 차출해 강화도 방어에 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사(明使) 노유녕(盧維寧)을 접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 수군의 입방(立防)을 면제해 주고 대신 포(布)를 받기도 했었다. 일본의 위협을 고려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방책이었다. ●신료들과 달리 인조는 日에 대해 낙관론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일본에 대해 대체로 낙관론을 폈다. 그는 ‘관백(關伯)이 전쟁에 싫증을 내서 백성들에게 총포를 쏘지 못하게 하는 데다, 반란을 걱정하여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고 있으니 다른 나라를 넘볼 근심은 없다.’며 ‘일본위협론’을 일축했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조정은 수군을 점검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하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거의 모든 신경이 서북변 쪽으로 가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고식책(姑息策)이었던 셈이다. 이제 일본에 대한 대책은 유화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아 차렸는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왔다. 겐포를 대신하여 쓰시마에 부임한 인서당은 1635년 12월,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분은 ‘일본은 명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 연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쓰시마가 조선의 예조를 ‘합하(閤下)’라고 부르던 것도 ‘족하(足下)’로 바꾸겠다고 했다.‘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나라이고 쓰시마 역시 예조와 동등하니 합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인서당이 기초한 문서를 받지 않으려 했다. 쓰시마는 ‘합하’문제를 거론하여 조선이 자신들을 ‘족하’라 부르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변사 신료들은 일본과 사단이 생길까 우려하여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조선은 결국 이후부터 쓰시마 도주를 ‘족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도 수락하고, 바쿠후가 요청한 마상재(馬上才·말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유희)를 벌일 인원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측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 준 것이었다. 모두 소오 요시나리의 낯을 세워 주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15일 TV 하이라이트]

    ●러브 인 아시아(KBS1 오후 7시30분) 이제 한 달 후면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애교만점의 예비엄마 슬레이티어씨와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예비아빠 주민규씨. 부부는 출산을 앞두고 캄보디아로 떠날 짐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곧 태어날 아기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슬레이티어씨 부부. 예비 엄마, 아빠의 알콩달콩 결혼 이야기를 엿본다.   ●다큐 인(EBS 오후 10시40분) 요즘 준이는 자신의 생애 첫 음반 발매를 기념하는 콘서트 준비에 여념이 없다. 판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늘 감정표현과 손동작이 서툴다는 지적을 듣는 준이는 공연을 앞두고 맹연습에 돌입한다. 드디어 공연 날. 태연한 준이와 달리 선생님들과 부모님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데….   ●장애인 주간 특집 ‘행복한 동행’(YTN 오전 10시45분)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는 안내견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리고, 시각장애인들의 희망찾기에 앞장선 ‘안내견 알림이’ 유석종씨. 낮에는 삼성화재 안내견 학교의 직원으로 안내견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에 매달리고, 밤이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DJ로 변신하는 그의 삶에 향기가 스며 있다.   ●흔들리지마(MBC 오전 7시50분) 강필과의 결혼을 위해 민정과 동혁을 내보내라는 수현의 주문에 영미는 당황한다. 영미는 용대에게 민정과 동혁을 분가시켜야겠다고 말하지만 용대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함께 살아야 된다고 한다. 용대는 영미에게 재혼을 해서 가족끼리 성씨가 다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모두 함께 살자고 한다.   ●긴급출동! SOS24(SBS 오후 11시5분) 아들이 하루에도 수차례씩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는 부모의 구호 요청이 들어왔다. 돈을 주지 않았다가는 욕설과 심한 폭력을 일삼는다는데…. 폭력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기도 수차례. 이젠 같이 사는 것조차 두렵다고 했다. 불법 사행성 게임에 빠져 가족을 피눈물나게 만드는 아들. 과연 해결책이 있을까.   ●인간극장(KBS2 오후 8시20분) 외부와는 단절된 채 살아가는 부부. 호기심 많은 순문 할아버지는 늘 바깥세상이 궁금하다. 아들이 전해주는 날짜 지난 신문과 건전지로 돌아가는 라디오가 바깥세상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아무도 살지 않는 작고 외딴섬. 육십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늘 아래 단 둘이어서 더 의지하고 사랑한다.
  • 가요계 90년대로 돌아간 까닭은

    가요계 90년대로 돌아간 까닭은

    올 봄 가요계는 1990년대에 푹 빠져 있다.90년대를 풍미하던 그리운 목소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줄줄이 음반을 내고 있다. 그 열기는 공연무대 곳곳으로도 번지고 있는 중이다. 2008년 가요계가 90년대로 고개를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김광진 강산에 정재형 등 ‘6년만의 외출’ ‘마법의 성’의 김광진,‘넌 할 수 있어’의 강산에,‘베이시스’ 출신의 정재형.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90년대 히트곡을 낸 가수들로 올 3∼4월에 새 앨범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 6년 만에 가요시장으로 컴백했다. 그간 증권회사 애널리스트로 활동해온 김광진은 이달 초 새 타이틀곡 ‘아는지’를 비롯해 자신이 작곡한 기존의 히트곡 ‘편지’‘사랑의 서약’ 등을 수록한 새 앨범을 냈다. 그는 이승환의 ‘덩크슛’,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의 작사·작곡가로 90년대 발라드계의 호황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로 90년대 대중음악계에 클래식 열풍을 몰고 왔던 ‘베이시스’ 출신 정재형도 지난 3일 6년 만에 일렉트로닉 팝을 컨셉트로 한 신보를 냈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작곡 공부를 했던 그는 영화 ‘중독’‘오로라 공주’ 등에 참여하며 영화음악가로도 명성을 쌓아왔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해온 강산에 역시 지난달 말 8집 앨범 ‘물수건’을 내고 현재 홍대 상상마당에서 발매 기념 공연 중이다.‘라구요’‘와그라노’ 등 한국적인 록으로 사랑받았던 그는 이번 새 앨범을 ‘답’‘나의 기쁨’ 등 진솔하고 따뜻한 노래들로 채웠다. 이적, 김동률, 정재형 등이 소속된 뮤직팜의 강태규 이사는 “2000년대에 접어들어 대중가요는 ‘보는 음악’ 중심의 기형구조로 선회해 다양성을 잃었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가요의 부활은 단절된 시대에 대한 회귀본능이자 음악적 진정성에 대한 소구”라고 말했다. ●리메이크 음반·공연계에도 열풍 90년대 가요는 리메이크 음반 시장이나 콘서트장에서도 인기메뉴가 되고 있다. 가수 이승기는 ‘다줄꺼야’‘추억속의 그대’ 등 90년대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스페셜 앨범을 발매해 온·오프라인 앨범 시장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남성 듀오 플라이 투더 스카이 역시 전람회의 ‘취중진담’패닉의 ‘달팽이’터보의 ‘회상’등 90년대 인기가요를 리메이크한 앨범을 23일 발매한다. 90년대 바람은 공연무대에서 더 거세다. 지난달 중순 근 6년 만에 콘서트를 연 토이는 사흘동안 1만여명의 관객을 불러모았고,19일에는 부산에서 앙코르 콘서트를 연다.4년만에 컴백해 8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 김동률도 6000석 규모의 서울 공연 티켓이 순식간에 동이 나 추가공연까지 결정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작곡가 이영훈 추모음악회 ‘광화문 연가’도 성황리에 열렸다. 이에 대해 박은석 대중음악 평론가는 “2000년대 들어 대형기획사들이 만들어낸 대중가요가 새로운 트렌드나 대안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반작용”이라고 풀이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09일 TV 하이라이트]

    ●물병자리(SBS 오전 8시30분) 민호와 마주앉은 은영은 은서의 건강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한다. 은영의 얘기를 들은 조여사는 은서를 돌려 보내는 방안도 연구해 보자고 제안한다. 한편 경란과 김박사를 찾아간 은서는 김박사로부터 혼자서 해보라는 말을 듣자 불안해져서 동하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셋 엄마 하나(KBS2 오후 9시55분) 성민이 주고간 마지막 선물이라며 뱃속의 아이를 감싸안는 나영.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나영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결국 나영은 임신 중독증으로 길바닥에 쓰러지게 되고, 세 남자는 무심했던 자신들을 반성하며 얼떨결에 나영과 아기의 흑기사가 될 것을 약속한다.   ●글로벌 비전(YTN 오전 10시35분) 태국의 난민촌에서는 미얀마에서 도망쳐 나온 수천 명의 난민들이 외부와 단절된 감옥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어느 하나 보호해주는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까렌족 사람들과 그들을 돕고 있는 단체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60분-부모 2.0(EBS 오전 10시) 유난히 말이 느린 도경이. 아무리 책을 읽어줘도 좀처럼 말문이 트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그 해결 방법을 알고 싶다는 도경이 엄마.25개월 도경이의 사례를 통해 집에서 엄마가 직접 해보는 아기발달 놀이와 언어발달이 늦는 아기의 양육방법에 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래도 좋아(MBC 오전 7시50분) 명지는 석빈과의 추억에 괴로워하며 술을 마신다. 취한 명지는 석빈의 오피스텔로 찾아가고 취한 상태로 석빈에게 석빈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다고 고백한다. 술에 취해 석빈의 방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명지는 석빈에게 자기 때문에 외국으로 가는 것이라면 차라리 자기가 나가겠다고 말하는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KBS1 오전 10시) 코골이는 사실 심각한 질환의 하나이다. 성인 인구 4명 중 1명꼴로 앓고 있는 국민질환으로, 뇌졸중 및 심혈관 질환을 유발하는 ‘병’이다. 특히 코골이 환자 가운데 70%가량이 수면 무호흡증을 앓고 있다. 잠을 자다 돌연사할 위험이 그만큼 높은 것. 코골이의 원인과 치료법을 알아본다.
  • [씨줄날줄] 팔간(八姦)/황성기 논설위원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팔간(八姦)을 경계하십시오’라는 공개 편지를 한통 받는다. 편지를 쓴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는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와 당에 포진되어 있는 집권 세력 전체가 항상 자경자계(自警自戒)하기를 기원한다.”라고 당부한다. 일간지에 실린 이 편지를 당시 노 대통령이 읽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조 교수의 고언대로 팔간을 경계했다면 정권 말기 청와대에 있던 측근들의 비리를 비롯한 참여정부의 난맥상들은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팔간은 제왕학과 통치술의 명저인 ‘한비자(韓非子)’ 제9편에 나오는 말이다. 신하나 주변 인물이 자신의 간교한 계책을 이루는 8가지 방법을 일컫는 것인데 팔간에 휘말리면 군주는 자멸에 이른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잠자리를 같이하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동상(同床), 곁에 둔 측근인 재방(在傍), 친인척을 이르는 (父兄), 자신의 기호와 욕망을 채우다 재앙을 일으키는 양앙(養殃), 공적인 재물을 허투루 쓰는 민맹(民萌), 교묘한 언설로 판단을 흐리는 유행(流行), 위세를 빌려 권력을 휘두르는 위강(威强), 주변국의 세력을 빌리려 드는 사방(四方)이 그것이다. 2000년이나 훨씬 전인 중국 전국시대 한나라의 한비자와 그의 일파들이 설파한 이 팔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를 이끄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명심하고 뿌리쳐야 할 일들이다. 하지만 인간의 귀는 엷고 눈은 멀리 보지 못하는 법. 우리의 헌정사를 돌이켜보더라도 팔간에서 자유로웠던 정권은 찾아보기 어렵다. 측근 비리를 단절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참여정부조차도 크고 작은 권력형 비리에 내내 시달리지 않았던가.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청와대에는 실세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뜻에 “내부에서 파워게임을 벌이거나 이권에 개입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담겼다.”는 해설도 곁들여졌다. 이 경고는 대통령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해야 한다. 사람을 부리는 용인(用人)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어서다.‘천하의 다스림은 군자가 여럿이 모여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는 옛말을 5년 내내 새기고 새겼으면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결백’ 천명… 北에 물러설 명분 줘

    우리 군이 북한의 사과 요구에 유감 표명으로 응수한 것은 가장 유력한 ‘답안’으로 예측돼온 것이다. 현실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북측이 김태영 합참의장의 북한 핵공격 대책 발언을 ‘선제타격론’으로 규정하면서 사과를 요구했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답안은 대략 4가지 중 하나였다.(1)북측의 요구대로 사과하는 것 (2)북측을 맞비난하면서 역으로 사과를 요구하는 것 (3)아예 응답을 않고 무시하는 것 (4)북측에 정중하게 유감을 표명하는 것 등이다. 이 중 (1)은 대결을 숙명으로 하는 군의 속성상 애초부터 수용불가한 답안이었다. 더욱이 북측의 선제타격 주장은 김 합참의장의 발언을 과잉 해석했다는 게 우리 군의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2)를 취하면 파국으로 치달을 우려가 있었다. 군 내부적으로는 (3)으로 가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북의 페이스에 말려들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북측이 경의선 남북출입관리소의 군사상황실 직통전화라는 정식 경로를 통해 전통문을 전달했는데, 이를 무시한다면 대화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 군은 우리의 ‘결백’을 단호하게 천명하면서 북측을 점잖게 타이르는 논조로 답장을 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전통문 첫머리에서 “우리는 남북간 불가침 합의를 성실히 준수해 왔으며, 이런 입장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로 선제타격 의사가 없음을 표명함으로써 북측에 물러설 명분을 던진 점은 눈길을 끈다.“항상 남북간 평화와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할 준비가 돼 있음을 알린다.”고 대화 의사를 분명히 한 데서도 강온 양면전략의 단면이 읽힌다. 우리 군은 앞서 2006년 10월 북한군 판문점대표부의 리찬복 대표가 ABC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이 계속 굴복을 요구할 경우 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같은 해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에도 유감을 표명했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역사·고전 속 ‘우먼파워’

    사람이 살면서 어떤 대상에 지적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많겠지만, 기본적인 관심대상은 역시 자기의 문제일 것이다. 자기 문제에서 출발한 발언이야말로 가장 큰 공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자기 문제에서 출발하다’라는 전제는 흔히 보편성의 이름 아래 포기되기도 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 그러하다. 약자는 자기와 자기 문제에서 쉽게 소외된다. 그리하여 여자들, 특히 공부하는 여자들은 흔히 여성 문제는 주변적인 것이므로,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나도 사실 그런 구석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여성의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도 이것이 내 전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공은 어디까지나 어렵고 ‘폼 나는’ 러시아 역사 연구라고만 여겼으니까. 하지만 여성의 역사를 강의할 책임이 주어질 때 마다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마다 여성은 역사적으로 종속적인 지위에 있었고 희생자, 피억압자라는 내용의 책들을 접해 왔다. 이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왜 여자들은 심한 억압 상황 아래에서도 순종만 했는지” 질문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또, 그들과 함께 읽은 책의 한 여성저자는 통탄하며 말했다.‘역사 속 여성선배들의 정신적 노력은 축적되지 않은 채 단절되었고, 여자들은 항상 원점에서 새로 출발해야만 했다’고. 이 책은 이러한 질문, 혹은 개탄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기는 했을망정, 자신을 비인간화시키는 상황에 맹종하고 산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 속에서 주체적 삶을 살고 독자적 문화를 형성해 온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역사와 고전 속의 여자들을 불러내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었다. 레스보스 섬에서 여성동료들과 더불어 살며 시를 쓰고 여신들을 찬양했던 사포, 내가 소녀 시절부터 좋아했던 안티고네를 비롯하여 문학작품 속 여성인물들,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 통치자를 옹립하기 위해 궁정 쿠데타를 조직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러시아 제국의 여성 공인 다슈코바에 이르기까지. 숨겨졌던 보배와도 같은 이 여자들은 내게 와서 말을 건넸고, 나는 그들을 내 친구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고자 했다. 인문학 연구자로서의 내 능력이 닿는 한 이들과 함께 여성주체를 복권시키고 싶었다. 사람이 자기의 문제를 피하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차별받는 게 민족이건 성별이건, 인종이건, 계급이건,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비분강개하며 말하지만, 사실 책을 쓸 땐 비분강개하지 않았다. 명민하고 용감하고 현명한 여성선배들과의 대화는 통쾌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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