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단일화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모녀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인민일보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비닐봉투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밀수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529
  • [총선 4개월 앞둔 野 시계 제로] 安의 역공… 文과 맞대결 선포

    [총선 4개월 앞둔 野 시계 제로] 安의 역공… 文과 맞대결 선포

    제20대 총선을 불과 4개월여 남기고 야권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계 제로’ 상황에 놓였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을 해소하기 위해 문재인 대표가 제안했던 ‘문·안·박(문재인·안철수·박원순) 연대’ 구상을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혁신전당대회’로 맞받아치면서 주류·비주류 간 헤게모니 다툼이 본격화된 것이다. 아울러 야권 재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당이 빠른 시일 내에 안정화되지 않는다면 무소속 천정배 의원 등 신당 추진 세력의 보폭이 커지면서 새정치연합 내 탈당파들도 행동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은 ‘문·안·박 공동지도부’를 놓고 11일간 장고 끝에 ‘혁신전당대회’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문재인 대표와의 전략적 연대 대신 정면 대결을 택한 것이다. 안 의원이 29일 기자회견에서 “저는 세력도, 조직도 없다”며 “당 혁신의 밀알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 몸을 던질 각오”라고 말했다. 전대마다 고질병처럼 되풀이됐던 조직 동원, 계파 선거 등의 폐해를 혁신할 수 있다는 점을 혁신전대의 명분으로 들었다. 등을 돌린 호남 민심을 회복할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통합전대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던 무소속 천정배 의원을 합류시킬 명분이 생긴다는 게 안 의원 측의 설명이다. 그동안 지도체제 논의가 아닌 혁신이 본질이라던 안 의원이 지도부 교체를 골자로 한 혁신전대론을 꺼내 든 것은 문·안·박 연대는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애초부터 안 의원은 문·안·박 연대에 대해 “총선을 치르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부정적이었다. 이면에는 지난 대선 정국에서 ‘안철수 현상’을 일으키며 여야 통틀어 가장 높은 지지를 받기도 했던 그가 올 들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무는 상황을 돌파하려는 승부수란 분석도 나온다. 더불어 문·안·박 체제를 수용할 경우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떠안아야 한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총선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공’은 문 대표에게 돌아갈 것이란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문 대표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쌓인 뿌리 깊은 불신이 이 같은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당 안팎의 분석이다. 한편 비주류는 안 의원의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 옹호했다. 김한길계인 주승용 최고위원은 “당명도 바꾸고, 원샷 혁신전대를 해야 한다”면서 문 대표의 수용을 압박했다. 박지원 의원도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안 의원의 고언은 당에 마지막 희망과 애정을 가진 분들의 소리 없는 절규”라고 말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중국군 30년 만에 대대적 개편

    중국이 30년 만에 대대적인 군사 개편을 추진키로 했다. 광활한 영토에 산재해 있던 인민해방군의 7개 군구(軍區)를 통합해 4개 전략군구(전구·戰區)로 만들고 전구별 명령체계도 단일화하는 한편 통합사령부를 신설해 육군 위주의 군을 해군과 공군 위주로 재편할 것으로 보인다. 26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군 지휘부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주재로 지난 24일부터 3일 동안 베이징에서 중앙군사위원회 개혁공작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지휘부는 군구를 재조정하고 작전·명령체계를 새로 확립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방개혁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시 주석은 회의에서 “2020년까지 연합작전지휘체제의 통합 설계, 중앙군사위 총사령부(총부) 조정, 육군지휘기구 조직, 전구 재조정, 전구연합작전지휘기구 조직, 중앙군사위 연합작전지휘기구 개선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이 강조한 연합작전지휘기구는 미군이 운용하는 통합사령부 개념이다. 중화권 매체들은 현행 7대 군구 체계가 동서남북의 4대 전구 체계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인민해방군은 지난, 난징, 광저우, 베이징, 선양, 란저우, 청두 군구로 나뉘어 있고 각 군구에는 육군, 해군, 공군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방어 개념의 군구가 공격을 전제로 한 4개 전구로 재편되면서 각 전구별로 육·해·공군을 통합 관리하는 사령부가 생길 전망이다. 사령부의 작전 체계는 육군이 아니라 해군과 공군 위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각 군에 분산된 사이버전쟁 부대도 통합해 사이버 사령부와 우주사령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한편 현재 인민해방군은 중앙군사위 지휘 아래 작전 지휘와 정보를 맡은 총참모부, 정치 공작과 인사의 총정치부, 보급을 책임진 총후근부, 무기·장비 조달의 총장비부의 4총부 체제이나, 통합사령부 기능을 맡게 될 총참모부만 유지되고 나머지 3개 총부는 총참모부와 국방부에 흡수될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국가장] ‘가택 연금’ vs ‘구속’ 역사적 악연… 전두환 前대통령 빈소 찾아

    [김영삼 前대통령 국가장] ‘가택 연금’ vs ‘구속’ 역사적 악연… 전두환 前대통령 빈소 찾아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25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조문객 발길이 나흘째 이어졌다. 특히 김 전 대통령과는 질긴 악연이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가거나 장남을 통해 영결식을 하루 앞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정적’을 배웅했다. 전 전 대통령은 오후 4시쯤 굳은 표정으로 빈소에 들어섰다. 다소 야위었지만 몰려든 인파 속에서 혼자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정정한 모습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방명록에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눌러 적은 뒤 영정 앞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목례와 분향을 한 뒤에는 차남 현철씨를 비롯한 유족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가며 조의를 표했다. ●전 前대통령 유족들 위로 후 10분 뒤 떠나 김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의 ‘35년 악연’은 10·26 사태 직후인 1980년 전후부터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12·12 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상도동에 가택 연금을 당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23일간 단식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에 맞섰다. 취임 이후에는 하나회 척결을 통한 숙군을 단행했고, 1995년에는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 주도와 수뢰 혐의로 구속했다. 전 전 대통령은 헌화 뒤 접객실에서 현철씨와 유족들을 위로했다. 건강 상태를 묻는 현철씨에게 “나이가 있으니 왔다 갔다 하는 거다”라며 “이제 담배 안 피우고 술 안 먹고 그러니까 좀 나아졌다”고 답했다. 이어 “임의로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자다가 싹 가버리면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가족을 위해서도 그 이상 좋은 일은 없다”고 말했다. 10분간의 짧은 조문을 마치고 장례식장을 떠나던 전 전 대통령은 취재진을 향해 “수고들 하시라”라고 말했지만 ‘(조문을) YS와의 역사적 화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고 떠났다. 역시나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구속되는 악연을 가진 노 전 대통령은 장남 재헌씨를 대신 보냈다. 재헌씨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셨고 한때 아버님과 국정도 같이 운영하셨고, 이어서 대통령도 되셨다”며 “정중히 조의를 드리는 것이 도의라고 생각하고 아버님도 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현철씨는 미소를 지으며 조문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YS 막내딸 “부친의 過 부각돼 안타깝다” 재헌씨는 아버지가 특별히 전한 메시지가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지금 거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가서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라고 전하셨다”고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이 YS정부에서 겪은 ‘고초’에 대해서는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은 딱히 없었다”고 말했다. 83세인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연희동 자택에서 10년 넘게 투병하고 있다. 영결식을 하루 앞둔 빈소에는 김 전 대통령과 크고 작은 인연을 간직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1987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 운동을 할 때 찾아뵙고 (단일화를) 요청드린 적이 있었다”며 “그 이후에 (김 전 대통령이) 그걸 못 해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15대 총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른바 ‘YS키즈’ 정의화 국회의장도 독일 공식 일정을 일부 취소하고 급거 귀국해 빈소를 찾았다. 정 의장은 “외환위기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고인에게 다 가하는 측면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가 있다”며 “(김 전 대통령이) 안 계셨으면 우리는 유신독재로 다 망치는 거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막내딸인 혜숙씨도 기자들과 만나 “모든 지도자는 공과 과가 있다”며 “과가 부각된 것이 안타깝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결혼 후 미국 워싱턴 DC서 생활해 온 그는 “평소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며 “업어주시기도 하고, 막내딸이니만큼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활약한 야구선수 박찬호씨는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고 조언해 주면서, 늘 겸손한 마음을 갖고 국민에게 사랑 받는 선수로 성장하라는 뜻깊은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LA 다저스에서 빼어난 성적을 거둔 박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올해 우리나라는 빛낸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칭찬했었다. ●신동빈·권오준·삼성 사장단 등 재계도 애도 서거 첫날부터 빈소를 지켰던 ‘상도동계’ 김수한 전 국회의장,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김기수 전 대통령 수행실장은 이날도 아침 일찍부터 조문객을 맞이했다.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정병국 의원도 나흘째 빈소를 지켰다. 재계에서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최상순 한화그룹 부회장, 이관우 전 한일은행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유족들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영결식을 준비하기 위해 문상객을 맞이하는 틈틈이 회의를 했다. 유족들은 26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에서 발인 예배를 가진 뒤 영결식이 열리는 여의도 국회로 이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 집안이 3대째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있어 예배 형식으로 발인을 하는 것이다. 예배가 끝난 뒤 운구차는 서울대병원을 떠나 오후 2시쯤 국회에 도착할 예정이다. 전국에 설치된 220여개 분향소에는 지금까지 15만명이 넘는 추모객이 다녀갔다. 여의도 국회에 설치된 정부 대표 분향소에는 심상정 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의원들과 강신명 경찰청장, 박근희 삼성사회공헌위원회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주요 사장단 50여명 등이 방문하며 추모 행렬을 이어갔다. ●정상회담한 日 무라야마 전 총리도 분향소 찾아 해외에서도 조문이 이어졌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는 도쿄의 주일본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고인에 대한 예를 표했다. 김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인연이 있는 무라야마 전 총리는 지난 22일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그 시대 한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26일 영결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비롯한 중국 정부 조문단도 베이징 주중 한국대사관 1층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류 부부장은 방명록에 “침통한 심정으로 애도를 표시한다”(沈痛悼念)는 글을 남겼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 때로는 동지로, 때론 맞수로 ‘숙명적 관계’를 이어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시대를 연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사에서 양김(兩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합치면 3김(三金)이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세 사람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 가운데는 김 전 총리만 남아 3김 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다.”(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22일 타계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숙명의 맞수’이자 ‘동지’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둘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든든한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쟁자’였다. ‘양김’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 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 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국회 등원은 훨씬 빨랐던 YS가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맞붙었던 1970년 대선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지원 유세에 나섰지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극적 승리를 일궈 냈다. 양김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하지만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한 뒤 DJ는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대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훗날 DJ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이후 대립 구도는 가속화했다.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및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DJ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끝에 먼저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YS에게 권좌를 넘겨받았다. 양김은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22년간 반목을 이어 갔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YS를 비난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YS가 사경을 헤매던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DJ·1926~2009)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쌍두마차’였다. 바른길로만 가겠다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정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로 ‘정치 9단’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아호인 거산(巨山)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의 ‘거’와 정치적 고향인 부산의 ‘산’을 따 지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통영중 재학 시절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했고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 이어 경남고를 거쳐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으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손 여사는 장녀 혜영(63), 차녀 혜정(61), 장남 은철(59), 차남 현철(56), 삼녀 혜숙(54)씨 등 2남 3녀를 뒀다. 이 중 현철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활동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거제에서 출마해 최연소 의원(27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9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7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을 쏟아냈다. 그의 정치 행보는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고, 이는 야당 정치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지만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고 이듬해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자택 앞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도 당했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줬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한 것이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선 후보로 탈바꿈했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퇴임 후에도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YS 서거]한국정치 ‘양대 산맥’ 상도동·동교동계도 역사속으로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한국 현대 정치의 ‘양대 산맥’을 이뤘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YS는 1969년 상도동으로 이사온 뒤, 영욕의 세월을 상도동과 함께 겪어왔다. 집권때 까지는 군부독재에 항거해온 민주화의 성지로 상징됐지만, 집권 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무능과 파벌 정치의 본산으로 치부됐다.  동교동 역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61년 이사온 뒤, 1995년까지 35년여 동안 DJ의 정치적 요새와 마찬가지였다. DJ는 1995년 일산으로 이사했다가, 대통령 퇴임 후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과 마포구 동교동은 각각 ‘양김(金)’의 권력과 인맥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80년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던 당시 신문에서는 두 야당 거물의 이름 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문들은 DJ와 YS를 각각 ‘동교동 인사’와 ‘상도동 인사’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두 거물의 집을 드나들던 인사들도 각각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불렸다.  1984년 YS와 DJ가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중심이 돼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 축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남을 상징해온 상도동계와 호남을 상징해온 동교동계는 1987년 YS와 DJ의 후보 단일화가 무산된 뒤, 서로 치열한 경쟁 속에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DJ가 서거한 2009년 이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해묵은 갈등을 씻고 화해했다. DJ 서거 직전 YS와 DJ간의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2009년 11월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YS 주재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인사가 만찬을 갖기도 했다. 이듬해 새해 첫날에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22년 만에 ‘교차세배’를 하기도 했다. 이후 간간이 갈등이 재연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의 교류는 이어졌다.  최근들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인사들이 각자 제갈길을 택하면서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상도동계인 김덕룡 전 의원이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상도동계 인사 중심의 민주동지회 소속 회원 100여명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공식선언했다. 동교동계에서는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 김경재 전 민주당 최고위원에 이어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박 후보를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과 상도동계 김 전 의원 등 양측 인사 상당수는 최근 시민사회 원로들과 함께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 모임에 참여하는 등 새롭게 ‘결합’하는 양상이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永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에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고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지난 10일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5·6·7·8·9·10·13·14대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에서도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과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함께 갖고 있다.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 차례나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됐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상징됐던 양김의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역사를 이끌었다.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2월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한 바 있다.그러나 이후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박철언 전 의원과의 대결 끝에 대선 후보가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는 ‘군정 종식’을 선언했고 ‘문민시대’를 열었다. 특히 ‘칼국수’를 즐겨먹는 것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에 비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했고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는 등 임기 초반에 누렸던 절대적인 지지를 대부분 상실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이자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대부’로 자리하며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88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긴급 브리핑에서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쯤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하면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했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고령인 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앞서 지난 10일 검진 차 병원을 찾아 17일까지 입원한 뒤 퇴원했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 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된 이후 9선(5·6·7·8·9·10·13·14) 의원을 지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채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민정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합류했고, 박철언 전 의원과 사활을 건 대결 끝에 대선후보를 쟁취했다.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섰다. 양김의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둘은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해 87년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직선제 개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거행하고 장지는 현충원으로 하기로 유족 측과 행정자치부가 합의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 혜정(61), 혜숙(54)씨, 아들 은철(59), 현철(56) 씨 등 2남 3녀가 있다. 정부는 22일 낮 12시 30분 김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를 공식 결정할 예정이다.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장 진행, 장례위원회 구성, 장지, 영결식과 안장식 등 장례 절차 전반을 심의한다. 국가장 절차는 정부와 유족의 협의 후 행정자치부 장관이 제청하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결정한다. 5일간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면 김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화장지 길이 따라 다른 인증 하나로… 36개 폐지·77개 개선

    화장지 길이 따라 다른 인증 하나로… 36개 폐지·77개 개선

    육류 제품의 고기 함량에 따라 축산물 및 식품 허가를 중복해서 받아야 하는 인증 규제가 하나로 통합된다. 화장지 길이에 따라 달랐던 인증 규제도 중소기업계의 건의로 단일화된다. 기업 경쟁력 약화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인증제도 개선에 따라 기업의 애로와 소비자의 혼란이 줄 것으로 기대된다. 국무조정실은 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차 규제개혁 장관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인증제도 혁신방안 보고를 통해 중소기업 등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한 중복·유사 인증 36개를 폐지하고 77개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기업들은 수수료·시험검사비·인건비 등 1조 6260억원의 비용 절감과 2조 5890억원의 매출 증대 등 4조 2000억원이 넘는 경제적 효과를 볼 것으로 추산된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국가 표준 또는 법적 기준에 적합한지를 평가하는 인증은 2006년 114개에서 올해 203개로 급증했으며, 기업들이 부담하는 비용도 연평균 13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2.3배 늘었다. 이에 따라 국조실은 중소기업청 등과 함께 203개 인증을 검토해 이 가운데 113개에 대한 정리를 내년 말까지 마치기로 했다. 다만, 국조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거나 국제 협약과 관련이 있는 54개 필수 인증은 그대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국조실이 밝힌 인증제도 혁신방안에 따르면 돈가스 등 육류 제품의 고기 함량이 50% 이상이면 축산물 안전관리인증(해섭·HACCP)을, 치즈나 고구마 등이 첨가돼 고기 함량이 50% 이하면 식품 HACCP을 별도로 받아야 했지만 앞으로는 두 인증이 통합된다. 정부는 또 의료기기 품목 등급을 외국과 같은 수준인 73개로 조정하고 국내에서만 운영되는 공간정보 품질 인증을 폐지하기로 했다. 붙박이 가구에 대한 유해물질 방출량 검사를 할 때 가구를 대형 시험 기구에 통째로 넣어 검사하지 않고 앞으로는 샘플만 채취해 시험할 수 있도록 간소화했다. 또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의 총량을 표기하는 ‘탄소성적표지’를 ‘환경성적표지’로 통합하고, 유사한 인증인 ‘행정업무용 소프트웨어 선정’을 ‘소프트웨어 품질인증’으로 합쳤다. 또 현재는 화장지 길이(50m, 70m)에 따라 다른 인증을 요구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길이에 상관없이 하나의 인증만 받도록 했다. 이와 함께 수도용 밸브제품 생산업체에 인증 비용과는 별도로 품목당 200만원씩 부과한 기본수수료(마크 사용료)를 없애는 한편, 전기용품 안전인증 정기검사 주기를 1년에서 2년으로 확대하고 안전확인 유효기간을 폐지했다. 아울러 조달청은 공공 입찰에 반영되는 각종 인증평가 대상 및 가점을 축소하고 시험성적서 대체를 허용하기로 했다. 기업들이 공공 조달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신속한 판로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기존에는 다수공급자계약 2단계 경쟁에서 인증 보유 여부에 따라 최대 10점이 부여돼 인증이 없는 업체는 사실상 공급자로 선정되기 어려웠다. 이번 조치로 우수업체는 인증이 없어도 경쟁이 가능하게 됐다. 이태원 조달청 차장은 “개선안은 인증 제도가 가진 순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기업의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한편 법제처는 정부가 규제개선 대상으로 선정했으나 아직 정비되지 않은 불합리한 지방 규제를 국가법령정보센터(www.law.go.kr)의 법령·조례 원클릭 서비스와 규제정보포털(http://www.better.go.kr)을 통해 공개하기로 했다. 서울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안철수-비주류 심야회동 “이대로는 선거 못치러”

    안철수-비주류 심야회동 “이대로는 선거 못치러”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가 심야에 비주류 국회의원과 모였다.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친노(친노무현)-비노(비노무현)’ 프레임에서 탈피해 당의 혁신과 통합을 기치로 내건 비주류 모임인 ‘정치혁신을 위한 2020모임’ 멤버들이 5일 안철수 전 대표와 회동했다.  혁신을 고리로 새 비주류 결사체를 추진하는 의원들이 최근 낡은 진보청산을 외치며 문재인 대표와 각을 세우는 안 전 대표와 보조를 맞추면서 그동안 국정교과서 문제로 잠잠했던 당내 갈등이 다시 고개를 들 조짐이다.  ‘2020모임’은 10여명 안팎의 결사체로 내주 본격 출범할 예정이다.  안 전 대표는 5일 밤 여의도에서 김영환 강창일 김동철 노웅래 문병호 권은희 최원식 황주홍 등 비주류 의원 8명과 만나 당내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들은 문재인 대표 체제로는 다가오는 총선이 어렵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계파간 차이를 극복하며 당이 살 길을 찾는데 주력하자고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도 야당이 힘이 없고 분열돼서 정부가 강행할 수 있는 것이라며 반성의 목소리를 냈다.  문병호 의원은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나 “요즘 당내 상황도 어렵고 해서 총선 승리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문 의원은 “우리도 자성하고 당이 좀 단합하고 하나의 목소리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욕심을 버리고 최선을 다하자는 얘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한 참석자는 “이대로는 선거 못 치른다는 걱정하는 마음에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당의 혁신과 통합을 위해 주류 세력과의 경쟁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문 의원은 “비노는 그동안 모래알이다, 힘이 약하다 그런 지적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오늘 많은 분이 모였고 다들 개인이나 계파 이익보다 당의 승리를 위해 양보하고 기득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힘의 관계”라며 “대화하고 소통하고 양보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있지만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도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런 것”이라고 덧붙엿다.  또 “다음에는 김부겸 전 의원도 ‘번개 모임’에 초청하고 당의 중요한 분들을 모셔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며 당내 주요 인사들과 두루두로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는 회동에서 주로 다른 의원들의 얘기를 듣기만 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앞서 국회에서 개최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학생과의 간담회에서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안 전 대표는 대학생과의 간담회에서 “국민은 물갈이를 굉장히 바란다. 물은 제도나 문화, 관행이고 고기는 사람”이라며 “썩은 물에서는 좋은 고기가 금방 죽고, 썩은 물에 살 수 있는 고기만 산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소선구제가 바뀌지 않는 한 국회의원 300명 전원을 바꿔도 똑같다”며 “올해가 선거제도를 바꿀 동력이 드물게 생긴 기회인 만큼 조금이라도 낫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로의 후보단일화 결정에 대해 “대선 후보 양보가 제 평생에 가장 힘든 결단이었다”며 “대의를 위해 희생했다. 심약한 사람은 절대 못한다”고 말했다. 3년전인 지난 2012년 11월 5일은 대선 후보이던 안 전 대표가 문 후보와의 단일화를 제안한 날이다.  그는 전날 자신과 박영선 전 원내대표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 요구 공동성명에 대해 문재인 대표가 당과 함께 했으면 더 좋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개인이 아니라 두 사람이죠.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받아쳤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국민공천 vs 우선공천… 새누리 딜레마

    최근 치러진 10·28 재·보궐선거의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서 내년 총선에 대비한 다양한 ‘공천 실험’이 이뤄졌던 것으로 4일 서울신문 취재 결과 드러났다. 실험 결과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높인 국민공천제는 후보 검증이 어렵고, 우선공천제는 ‘낙하산 공천’으로 악용되는 단점이 노출됐다. 새누리당이 내년 총선 ‘공천 룰’과 관련한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어떻게 풀어낼지 주목된다. 새누리당 서울시당 공천심사위원회는 10·28 서울 영등포구 제3선거구 서울시의원 재선거 공천을 ‘100% 국민 여론조사’로 했다. A후보가 28.85%로 1위를, B후보는 0.05% 포인트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A후보의 전과를 문제 삼아 재의를 요청했고, 공천위는 두 사람이 ‘결선투표’를 할 것을 의결했다. 이번에는 방식을 바꿔 책임당원 50%, 일반국민 50% 비율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B후보가 60%대, A후보는 30%대를 기록해 결과가 뒤집어졌다. A후보는 “당원 여론조사 응답자 중 유권자가 아닌 경우가 많아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했다. 강원 홍천군 다선거구 군의원 재선거에서는 C후보가 지역 안배를 명분으로 우선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고도 공천에서 탈락한 D후보는 “지역 의원의 입김에 따른 전략공천”이라고 반발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석패했다. 이번 재·보선 공천이 내년 총선 공천의 예비실험인 동시에 ‘축소판’이 된 것이다. 새누리당은 공천 룰 딜레마에 빠져 있다. 특히 텃밭인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구의 공천 문제가 고민을 더욱 깊게 한다. 이 두 지역의 공천을 국민공천으로 하느냐, 우선공천으로 하느냐에 따른 정치적 파급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강남 3구는 여권의 전략공천지로 인식돼 왔다. ‘3선 이상 공천 금지’라는 암묵적 룰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공천을 발판으로 3선 도전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강남갑에는 이종구 전 의원, 서초갑 이혜훈 전 의원, 송파을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 등 전·현직 재선 의원들의 출마가 예상된다. 이곳 공천을 국민공천 방식으로 하면 강남권 3선 의원이 탄생할 확률이 커진다. 하지만 전략공천을 허용하고 있는 야당이 거물급 정치인을 출격시킬 가능성이 있다면 강남 3구는 우선공천 지역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러면 ‘강남 3선 불가’ 원칙은 계속 지켜지게 된다. 이는 또 ‘공천이 곧 당선’인 영남권 공천과도 맞닿아 있다. 강남 3구 공천 방식이 영남권을 기반으로 하는 새누리당의 ‘공천 룰 확정의 방향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서울 종로에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박진 전 의원, 안대희 전 대법관 등 중량감 있는 인사가 대거 몰려 있다. 오 전 시장과 박 전 의원은 전날 후보 단일화를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최종 결렬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공천제를 도입하면 세 후보는 치열한 공천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면 새누리당은 본선을 치르기 전 내상을 입게 되고, 중량감 있는 인사 2명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수도권 공천 룰의 풍향계가 될 종로구에서 우선공천하는 것 역시 공천 개혁 측면에서 당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한·중·일 전자상거래 실질 통합은 ‘산 넘어 산’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은 주말 정상회담과 경제통상장관 회담을 통해 15억명에 이르는 한·중·일 온라인 시장을 단일화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한·중·일 간 전자상거래 분야가 실질적으로 통합되기까지는 과세, 소비자 보호 규정, 통관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2일 복수의 정부 관계자는 “경제통합이 이뤄진 유럽연합(EU)은 관세나 통관 장벽이 없는데도 전자상거래 시장 단일화에 따른 콘텐츠 지식재산권 침해, 이중 과세, 소비자 반품 규정 등의 문제가 도출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자유무역협정(FTA)조차 이뤄지지 않은 한·중·일 간 온라인 시장 통합은 훨씬 많은 시간과 협상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3국 간 전자상거래 통합 방안을 기획·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 시행된 EU의 전자상거래 통합 정책을 벤치마킹하고 8월 관련 제도의 필요성과 사회여건에 대한 기초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본격적인 정책 연구용역은 내년에 추가 발주해야 하고 국내 부처 간 TF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 시행은 중장기적 과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재부 외에 산업통상자원부, 관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관련돼 있다. 정부 부처 내 한·중·일 전자상거래 통합 TF는 내년 초 출범할 예정이다. 정부 정책의 밑그림이 될 온라인 시장의 최전선에 있는 민간 유통업체 간 공동 연구도 갈 길이 멀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 일본통신판매협회, 중국전자상무협회 등 각국 민간 기관들은 주말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지만 과제가 수두룩하다. 산업부 관계자는 “각국마다 다른 결제 및 배송 시스템, 사후관리 등 소비자 보호에서 통상 문제까지 거래의 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공동 연구를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전자상거래 표준을 정하는 과정에서 3국 간 과세, 통관 등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시간은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전자상거래 구축을 위한 디지털 기술과 시스템 개선을 위한 호환성 연구도 해야 한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한·중·일 정상회의] 한·중·일 ‘아시아 패러독스’ 극복… 디지털 교역 확대 추진

    [한·중·일 정상회의] 한·중·일 ‘아시아 패러독스’ 극복… 디지털 교역 확대 추진

    1일 한·중·일 정상회의 이후 3국 정상이 발표한 ‘동북아 평화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에는 3국 협력과 연계, 양자 간 시너지 도모를 위한 다양한 협력 방안이 담겼다. 선언문은 3국 간 협력 관계가 복원됐음을 천명하는 내용을 담은 전문과 함께 ‘동북아 평화협력의 구현, 경제·사회 협력 확대, 지속가능한 개발 촉진, 3국 국민 간 신뢰·이해 증진, 지역 및 국제사회의 평화·번영 공헌 등 5대 분야 본문 56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우선 선언문 전문에서 3국 정상은 1999년 3국 협력 시작, 2011년 3국 협력 사무국 설립, ‘3국 협력 비전 2020’ 등 과거 3국 지도자 간 공동선언·성명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 최근 동북아 지역의 유동적 정세에도 불구, 3국 협력이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진전돼 온 것을 평가하며 이번 회의를 계기로 3국 협력이 완전히 복원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현 분야에서는 기존 3국 협력을 더욱 제도화하고 협력 프로세스를 발전시킬 방안 등이 주로 담겼다. 여기에는 3국 정상회의의 정례적 개최 외에, 그동안 운영해 온 20여개 장관급 협의체를 포함한 50여개 정부 간 협의체 및 각종 협력사업이 활발히 추진되도록 장려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경제·사회 협력 확대 분야에서는 인구 15억명 규모의 단일 디지털 시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3국은 전자상거래의 규제와 표준을 통합해 ‘디지털 교역’을 확대한다. 지난해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 규모(거래액)는 4262억 달러(시장점유율 35%)로 세계 1위이다. 일본(708억 달러)과 한국(331억 달러)이 각각 4위와 7위다. 지금은 3국 간 전자상거래에 대한 규제·표준 등이 달라 디지털 교역 활성화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지식재산권과 독과점법, 과세 기준, 보안·결제 등에서 미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3국은 ‘디지털 싱글 마켓’(단일 디지털 시장) 공동연구 과제로 ▲상품·서비스 전자상거래 관련 규제·표준 통합 ▲국경 간 전자상거래 통관·물류시스템 통합·간소화 ▲전자상거래 교환·반품 등 절차 통일(통합 소비자 규정) ▲국경 간 결제시스템 간편화·단일화(단일 전자화폐) 등을 제시했다. 또 3국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가속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지속가능한 개발 촉진 분야에서 3국은 유엔 개발정상회의의 ‘2030 지속가능개발의제’ 채택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또 북극 정책 공유 및 협력사업 발굴을 위한 3국 고위급 북극협력 대화를 개설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지역 및 국제사회의 평화·번영 공헌 분야에서 중·일 정상은 8·25 남북합의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지지의 뜻을 보였다. 또 올해 개최 예정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간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서울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세종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한·중·일 “3국 협력 복원”… 역사는 온도차

    한·중·일 “3국 협력 복원”… 역사는 온도차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1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갖고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한·중·일 3국의 정상은 공동선언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 및 역내 평화와 안정 유지가 공동 이익에 부합함을 재확인했다”며 “지난 8월 한반도 긴장상태가 남북한 합의를 통해 해소된 것을 환영하며, 이 합의가 남북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중·일 양국 정상은 공동선언문을 통해 우리 정부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높이 평가·환영하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3국 정상은 “3년 반 만에 개최된 금번 회의를 계기로 3국 협력이 완전히 복원됐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며 “향후 3국 협력을 흔들림 없이 발전시켜 나가고, 항구적인 지역의 평화·안정과 공동번영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정치안보상의 갈등이 병존하고 있는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3국 정상은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상호호혜적 자유무역협정(FTA)의 실현을 위한 3국 FTA 협상 가속화를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며 특히 “역내 디지털 시장 단일화가 3국 모두에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해 견해를 같이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맥락에서 3국은 우리의 창조경제와 중국의 창신경제, 일본의 혁신정책 간 협력 사항을 발굴하고 논의하는 ‘한·중·일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3국 간 정보공유 등 전자상거래와 관련한 협력을 모색해 나갈 것을 장려하고 바이오·보건의료, 소프트웨어, 문화콘텐츠 등 신산업 분야에서도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더불어 3국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신종 감염병 대응을 위한 정보공유와 기술협력을 강화하고, 3국 국민 간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해 지방정부 간 자매결연 등 협력을 장려키로 했다. 이날 회담에서 중국과 일본은 역사 문제로 신경전을 펼쳤으며 두 나라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회담이 끝난 뒤에도 공동성명 문구가 쉽게 마무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번 회의에서 3국 협력 체제를 정상화시킨 것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며 “이번 회의가 3국 간 교류와 양자 협력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며 이번 성과를 밑거름으로 흔들림 없이 3국 관계를 이어 나가도록 희망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2일 오전 10시 10분부터 1시간 30분 동안 취임 후 처음으로 아베 총리와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사설] 한·중·일 협력복원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3년 6개월 만에 한·중·일 정상회의가 어제 청와대에서 열렸다. 이번 3국 정상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가시적 성과를 도출했다. 3국 정상은 공동선언을 통해 동북아평화협력 구현과 공동번영을 위해 경제·사회 협력 확대, 지속 가능한 개발 촉진과 3국 국민 간 상호 신뢰 및 이해 증진 및 지역, 국제사회의 평화·번영에 공헌 등 5대 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3국 협력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이날 합의한 사안을 구체적으로 보면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어떤 행동에도 반대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의미 있는 6자회담이 조속히 재개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정례화하고 정부 간 신규 협의체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으며, 3국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전자상거래를 위해 디지털 시장의 단일화에도 합의했다. 2020년까지 3국 간 인적교류를 3000만명으로 늘린다는 목표도 나왔다. 갈등의 핵심인 역사문제와 관련해서 3국 정상은 “역사를 직시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관련 문제들을 적절히 처리하자”는 절충선을 택했다.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3국 정상은 회의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3년 반 만에 개최된 이번 회의를 계기로 3국 협력이 완전히 복원됐다”고 평가한 점도 눈에 띈다. 항구적인 지역의 평화·안정과 공동번영을 구축하기 위해 경제적 상호의존과 정치 안보상의 갈등이 병존하고 있는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이번 3국 정상회의는 역사와 영토 문제로 갈등과 대립으로 얽혀 있던 동북아 지역이 과거의 질곡을 딛고 화해와 협력을 위해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의미가 크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반목과 갈등으로 공존공영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3국 정상의 강력한 의지가 투영된 것이다. 3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하면 16조 달러로 전 세계 경제 총액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번에 합의한 것처럼 한·중·일 FTA를 성사시키면 ‘동북아 시장통합’이란 의미 있는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공동 번영을 위해 역사와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갈등이 3국의 경제협력을 가로막는 이른바 ‘동북아 패러독스’ 현상이 이번 회의를 계기로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3국 정상이 한두 번 만나 복잡하게 얽힌 현안을 단번에 해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3국 정상은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해 나간다는 정신으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번 합의를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행해야 한다. 말의 성찬으로 끝나지 말고 동북아 평화협력체제 구축을 위한 구체적 성과가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타래처럼 얽힌 과거사나 외교·안보 문제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풀어가면서 경제협력과 인적교류 등에서 협력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상생의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청담동 피부과·동대문 야시장, 유커 지갑 열리는 ‘핫플레이스’

    청담동 피부과·동대문 야시장, 유커 지갑 열리는 ‘핫플레이스’

    서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강남 트라이앵글형’과 ‘강북 실속형’으로 나뉘며 한밤중에는 숙소에서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가 27일 중국 최대 신용카드 회사인 유니온페이(은련카드)와 함께 중국인 관광객의 카드 소비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단체관광으로 한국을 찾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20~30대 젊은 자유여행객으로 바뀌고 있다. 현재 서울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은 60% 이상이 한국을 다시 찾은 재방문객에 여행사를 끼지 않은 자유여행객이다. 강남 트라이앵글형은 연휴 기간을 이용해 서울을 찾아 청담동 피부과에서 피부 관리를 받고 가로수길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백화점과 면세점에서 쇼핑한다. 저녁에는 강남역 근처에서 화장품과 운동화를 산 뒤 호텔에 돌아와 새벽까지 온라인쇼핑몰에서 화장품, 옷 등을 산다. 강북 실속형은 아침 일찍 외국인 관광객 전문쇼핑센터를 찾아 고려인삼을 산다. 중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명동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명동대로의 즐비한 화장품 가게에서 화장품을 산 뒤 밤늦게까지 동대문시장에서 옷을 구매한다. 숙소에 머무르는 심야 시간에도 쇼핑을 즐겼다. 중국인 관광객 카드 소비의 60~70%가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이뤄졌다. 2013년 지마켓의 중국인 관광객 전용몰과 지난해 갤러리아 중국어 온라인몰이 개장한 이후 올해 초 중국인 관광객의 국내 인터넷 쇼핑몰 소비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배 이상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는 “국내 면세점 등에서 중국인 해외역직구족을 겨냥해 중국어로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고 빠른 인터넷망과 배송 시스템으로 국내 체류 중 쇼핑 물품을 받아볼 수 있는 점이 중국인들의 인터넷 쇼핑 증가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지마켓의 중국어 쇼핑몰은 화장품, 의류, 휴대용 마사지기, 패션 보온병, 어린이용 조립장난감 등이 잘 팔리는 상품에 올라 있다. 추첨을 통해 구매객들에게 국내 인기가수의 앨범도 나눠 준다. 이날 유니온페이, 비씨카드, KT와 빅데이터 업무협약을 맺은 시는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관광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이 선호하는 새로운 관광 코스를 발굴하고 시티투어버스의 노선도 최적화할 예정이다. 박원순 시장은 “중국인 관광객들은 고궁, 명동, 남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행을 직접 계획해 원하는 곳을 찾아다닌다”며 “관광객들의 동선이 단일화되지 않고 어느 정도 흩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을 더욱 다원화할 수 있도록 서울시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 반대… 스냅사진 같아 조작 가능”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 반대… 스냅사진 같아 조작 가능”

    최근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등 총선 공천에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문제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빚어진 가운데 김행 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이 여성 월간지 ‘퀸’ 11월호 인터뷰에서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 여론조사 전문기자로서 우리나라 정치와 선거 분야에 여론조사를 통한 국민 여론의 반영을 선도했던 김 원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여론조사에는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부정적 측면도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김 원장은 “여론조사는 (조사) 당시의 스냅사진과 같은 것으로, (수시로) 변해 지속적이지 못하며 정치적 목적으로 쓰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과 철학을 갖고 특정 정책을 펼 정치인을 낼 테니 국민들이 뽑아 달라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데 여론조사가 이런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 대변인으로서 여론조사를 통해 열린우리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를 이뤘으나 선거일 직전 단일화를 파기한다는 발표를 직접 했던 김 원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여론조사가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몰랐다는 걸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로서의 여론조사는 과학으로서의 여론조사와 크게 다르고 위험하다.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면서 “정치적 목적이 옳다고 해도 잘못된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청와대 대변인으로 일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로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꼽았다. 김 총재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해 절대빈곤 퇴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보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왜 그를 세계은행 수장자리에 앉혔는지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김 총재의 열정적이고 진지하며 겸허한 설명을 듣고 나 역시 절대 빈곤의 현실에 책임 의식을 느끼게 됐고 내 인생의 좌표가 바뀌었다”면서 “리더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번 퀸 11월호에 인터뷰뿐 아니라 표지모델로도 나섰다. 그는 25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공직자가 여성지 표지모델로 나선 것은 이례적인 것 같다’는 질문에 “표지모델로 연예인만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과거의 고정관념”이라며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여성지 표지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려운 결심을 했다”고 답했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중학생도 사제폭탄 만드는 ‘毒 품은 e세상’

    중학생도 사제폭탄 만드는 ‘毒 품은 e세상’

    독극물을 이용한 고전적인 살해 수법이 인터넷을 타고 전파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청산가리, 염산 등 유해 화학물질을 배합한 독극물은 물론 부탄가스와 스프레이 등 폭발성 제품을 활용한 사제폭탄들이 쉽게 제조되고 있다. 정보 집결지인 인터넷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지적과 함께 현행 화학물질관리법의 구멍을 메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화학물질관리법 50조에 따르면 화학물질을 입고하고 판매할 때 구매자의 인적 사항을 기재해야 하지만 감독이 허술한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무차별적으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 1월 청산가리를 탄 소주로 내연남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40대 여성이나 지난달 부탄가스 폭탄으로 중학교 교실을 폭파시킨 10대 남학생 모두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접하고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이 피의자의 컴퓨터를 압수해 확인한 결과 ‘청산가리 살인법’ 등의 키워드로 검색한 기록이 나왔다. 일반인에게 생소한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습득하고 범행을 계획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추세를 보이는 것은 범죄 피의자들의 성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승재현 박사는 “여성, 노인, 청소년 등 유약한 주체들이 물리적으로 압도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은밀하게 다가가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라며 “분노를 즉흥적으로 풀어냈던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내면에 쌓인 응어리를 계획적으로 은밀하게 표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22일 환경부 산하 화학물질안전원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올 6월까지 안전원 소속 사이버감시단이 적발한 관련 유해게시물 건수는 475건이다. 실제로 유해 화학물질을 배합한 독극물, 사제폭탄 등 제조법이나 시연 영상은 인터넷에서 흔하게 검색된다. 손쉬운 구매 경로도 이런 현상에 한몫한다. 최근 A온라인 쇼핑몰은 유해 독극물인 고농도 염산(35%)을 공공연하게 판매하다 적발됐다. 고농도 염산은 인체에 노출되면 극소량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이다. 환경부가 올 4월부터 한 달간 황산, 클로로포름 등 유해 화학물질 판매 업소 134곳을 단속한 결과 25곳이 화학물질관리법령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올 5월 총포·화약류, 사제폭탄 불법 제조나 판매와 관련한 정보 126건을 적발해 삭제·접속 차단 조치했다. 전문가들은 관련 법 규제와 매뉴얼은 충분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감시, 단속이 허술하다고 지적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외국도 허가받은 판매처에서 화학물질을 취급하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관리·감독을 철저히 한다”고 설명했다. 박한호 극동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관련 법상 유통 시 구매자의 인적 사항을 기재해야 하지만 실제로 안 해도 아무런 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며 “그럴 바에는 판매처를 단일화하고 제한된 판매처를 대상으로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 “역사전쟁” vs 야 “수능부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 “역사전쟁” vs 야 “수능부담”

    역사 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가 이뤄진 이후 첫 주말 새누리당은 ‘역사 전쟁’ ‘꼭 이겨야만 하는 전쟁’ 등의 표현을 쓰며 강공을 이어 갔다. 반면 야당은 교과서 문제에 가장 민감한 학부모들과 간담회를 하고 “역사 교과서를 단일화하면 수능 부담이 훨씬 더 커진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등 맞춤형 여론전을 펼쳤다. 새누리당 이장우 대변인은 18일 “야당이 법안 처리와 국가 살림살이인 예산안 심사에 역사 교과서를 연계한다면 국민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무성 대표도 이날 ‘단일 역사 교과서’ 홍보 동영상에 등장해 “이제는 아이들이 먹는 급식뿐 아니라 아이들의 사고를 구성하는 지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전날 “이제 역사 전쟁이 시작됐으며 우리 학생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꼭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라고도 했다. 야당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외연 확대에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이날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강남·서초 엄마들과 간담회’를 갖고 “두 분(박근혜 대통령, 김무성 대표)의 선대가 친일·독재에 책임 있는 분들이다 보니 후예들이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이 이번 사태의 배경”이라고 했다. 이어 “검인정(역사 교과서)이 8가지나 되는데 단일화하면 아이들 시험이 쉬워지지 않을까, 수능 부담이 낮아지지 않을까, 그런 것 때문에 찬성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면서 “한 권으로 배우면 변별력을 위해 지엽·말단적이고 시시콜콜한 문제를 출제하게 된다”고 했다. 국정화가 수능 부담을 줄여 준다는 정부·여당 논리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문 대표가 여당 지지 기반인 강남 학부모들과의 대화에 나선 것은 결국 초·중·고교생 자녀를 둔 30~50대 학부모의 여론 향배가 ‘역사 교과서 정국’을 좌우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새누리당 이 대변인은 “매사를 편 가르고 정쟁화하려는 것인지, 휴일에 학부모들을 만나서 야당 대표가 할 소리냐”며 “문 대표는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친일·독재를 미화했다는 허위 선전·선동을 한 데 대해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국민께 사과하라”고 말했다. 한편 문 대표는 정의당 심상정 대표, 무소속 천정배 의원과 함께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3자 연석회의’ 첫 회동을 19일에 하기로 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