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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6) 기술과 기능의 양면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6) 기술과 기능의 양면성

    인류의 문명은 기술과 기능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칸트가 그의 논문 ‘추측해 본 인류사의 기원’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은 구약 창세기의 사건이 인류에게 기술과 기능적 사고를 잉태한 출발점과 같다고 찬양했다. 즉 기술과 기능은 원죄의 토대 위에서 탄생됐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불교적 입장에서 봐도 무시 이래로 홀연히 인간에게 분별심이 생김으로써 인간에게 취사선택의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마명(馬鳴)스님이 ‘대승기신론’에서 암시하고 있다. 이 분별심은 인간 무의식의 가장 깊은 아뢰야식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불각(根本不覺)으로서 부처가 되기 전에는 소멸되지 않는 근본무명과 같다. 기술과 기능적 사고를 잉태한 인간지성이 원죄나 근본불각의 소치라는 종교의 가르침은 기술과 기능을 사유하는 철학에 하나의 큰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단적으로 기술과 기능은 소유적 무의식의 소산과 같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인간 무의식의 욕망에는 본능적 욕망과 본성적 욕망이 함께 이웃하고 있다고 이미 ‘철학산책’의 시작(1·2·3회 글)에서 언급되었다. 전자는 소유론적 욕망이고, 후자는 존재론적 욕망에 해당한다. 전자는 자아중심으로 모든 것을 취득하려는 욕망이고, 후자는 자아중심이 없이 일체가 일체에 대하여 존재하도록 도와주려는 자비의 원력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본능에 의한 생물학적 소유욕이 지능에 의한 사회학적 소유욕으로 환유법적인 자리이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지적되었다.(11·12·18·31회 글) 기술과 기능은 지능에 의한 인간의 사회학적 무의식의 소유욕과 직결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관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첫째로 인간의 무의식에서 소유적인 본능과 존재론적 본성의 차이가 너무 가까이 근접되어 있어서 인류는 그 차이를 뚜렷이 구분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발적 기호(嗜好)와 같아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려는 욕망을 공통적으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20세기 프랑스의 언어학자 뱅베니스트가 그의 저서 ‘일반언어학의 제문제(I)’에서 기술했듯이, 인류는 동서를 막론하고 소유와 존재를 거의 혼동해서 사용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어에 ‘가지고 있다’로 소유와 존재가 통용되어 쓰이듯이, 이런 현상은 범 지구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의식이다.‘가지다’라는 소유동사가 타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존재동사처럼 수동형으로 쓰이지 않는 범 지구적 현상은 소유동사를 존재동사처럼 상태동사로 봤던 인류의 무의식이라고 뱅베니스트가 통찰했다. 둘째로 인간이 자연생활을 떠나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지능(지성=이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지능은 본능의 소유욕을 환유법적으로 장소 이동한 것이다. 지능이 사회적인 지도원리가 됨으로써 두 가지의 경향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지능의 꾀로써 사회생활에서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물질적 경제적 이익을 낳으려는 경제기술주의의 욕망과, 또 다른 하나는 이기적 생존추구를 불의로 미워하면서 공동체의 정의를 추구하려는 사회도덕주의적 욕망이 생겼다. 동양의 순자철학은 전자의 성향을 대변하고, 맹자철학은 후자의 것을 상징한다. 서양에서 기술적 이성이라 불리는 형이하학과 도덕적 이성이라는 형이상학이 구분된 것도 같은 지능(지성=이성)의 두 가지 철학적 표현이라 하겠다. 상기의 두 가지 관점을 우리가 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본디 무의식적으로 소유와 존재가 아주 이웃해 있는데, 지성(지능=이성)의 철학이 경제기술적이든 사회도덕적이든 사회생활의 지도원리가 됨으로써 존재를 존재로 사유하지 못하고, 존재를 다만 소유의 정신화(은유화)로써 여기게 하는 장본인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성이 이끄는 사회도덕의 형이상학도 기실 경제기술과 같은 소유의 영역임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철학자가 하이데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기술론이든 정신론(도덕론)이든 다 존재자(존재를 실체화한 것)의 철학이고, 그 존재자의 철학은 지성이 파악한 개념적 소유철학에 다름 아니라고 통찰했다. 명사적 개념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류의 철학사가 존재를 소유의 정신화(은유화)인 양 착각하게 했다. 좌우간 재래의 자본주의적 기술론은 성공했으나, 사회주의적 정신론은 실패했다. 이제 21세기 철학적 사유의 과제는 자본주의적 기술론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에 관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기술론의 본질은 인간생활을 편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 데 있다.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기능이라 부른다. 기술론은 기능적 사고로 이어진다. 기능적 사고는 효능과 생산고로 집약된다. 효능과 생산고는 계산 가능한 이익의 목록을 만들게 하는 기준이고, 그 목록에 빠져 있는 것은 가치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셀이 잘 지적했듯이, 기술적 가치만을 숭상하는 기능주의는 늙음과 병약함을 비기능적 몰가치로써 푸대접한다. 말하자면 비기능적 몰가치는 기능적 효율과 생산고의 증진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과 같다. 늙음과 병약함은 노후 기계처럼 폐품처리 대상 리스트에 올라간다. 기능사회에 접어들면, 이미 노인과 병약한 환자들은 남들의 평가이전에 스스로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절망의 쓸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노인들은 스스로 안 늙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다 치지만, 그런 행태는 노인들의 절망을 재촉할 뿐이다. 그 경우에 죽음은 낡은 기계의 멈춤과 같다. 죽음은 소유활동의 끝일 뿐이다. 죽음은 모든 소유의 무상함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해주는 신비로 이해되지 않는다. 죽음은 기계의 생명처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다른 차원의 존재방식의 시작임을 기능주의와 기술론은 전혀 이해 못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어떤 사형수들의 얼굴이 왜 성자처럼 해맑아지는지 기능주의와 기술론은 이해 못한다. 편리함과 풍요함을 주는 기술과 기능은 다른 한편으로 인생에서 존재론을 폐지시키는 절망을 부채질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 기술론의 의미를 잘 분석해 놓았다. 그의 ‘강연과 논문집’에서 하이데거는 근대기술의 본질을 ‘도발로서의 탈은폐’(disconcealment as provocation)라고 정의하였다. 기술이란 낱말인 ‘테크닉’(technique)은 고대 그리스어의 ‘테크네’(techne)에서 파생되어 나왔는데, 테크네는 ‘현성으로서의 탈은적’(disconcealment as bearing-fruit)의 의미를 뜻한다. 같은 단어인 ‘disconcealment(Entbergen)’가 근대기술에서는 도발적인 ‘탈은폐’로, 고대 테크네에서는 현성(現成=저절로 피어남)으로서의 ‘탈은적’으로 하이데거가 사용하고 있는 것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 ‘disconcealment’를 그냥 다 ‘탈은폐’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은폐와 은적의 한국어 뉘앙스가 다르다. 전자는 범인이 비밀스러운 것을 감추는 행위를 말하고, 후자는 스스로 사라지는 은자의 행위를 말한다. 이 구별은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이해하는 핵심이 되기에, 재래의 번역처럼 일률적으로 옮기면 그를 오독하는 결과를 낳는다.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는 자연이 스스로 현시하는 탈은적의 행위(꽃피기/열매맺기)를 인간이 도와주는 정도의 잔기술을 말하고, 근대의 테크닉은 자연이 스스로 자신을 현시하기 전에 인간이 강제로 자연의 속살을 드러내고 토해내도록 강요하는 거대기술을 말한다. 탈은폐는 자연이 인간의 소유와 이익에 필요한 것을 빨리 대량적으로 토해낼 것을 심문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근대기술은 자연이 은폐시켜 놓은 것을 인간이 강제적으로 탈은폐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런 근대기술의 탈은폐화 방식을 하이데거는 독특한 독일어로 ‘게슈텔(Ge-stell)’이라 불렀다. 본디 독일어로 ‘게슈텔’(Gestell)은 ‘발판 사각대’나 ‘받침대’처럼 테크네 정도에 맞는 잔일하는 소도구를 뜻하였으나, 이것이 근대 테크닉으로 이전하면서 하이데거가 그것을 ‘Ge-stell’이라고 띄어 썼다. 이 말은 피의자를 심문하고 때로는 주리를 틀면서 고문까지도 하는 심문대의 의미로 변한다. 더구나 ‘Ge-’는 ‘집단적’이란 의미의 뉘앙스를 풍기는 전철이므로 Ge-stell은 단독으로 하는 심문대가 아니라,‘집단 신문대’의 의미를 띤다. 인간이 자본의 축적과 집단적 이익과 편리를 추구하고자 자연에 대하여 주문사항들을 재빨리 토해내라고 집단 도발하는 그런 의미가 하이데거가 본 근대기술의 본질이다. 하이데거가 같은 단어를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와 근대 기술론적 의미로 이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깊은 의미를 함의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는 여러 단어들을 그렇게 사용했다. 그가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같은 단어들을 이중적 의미로 썼다는 것은 내가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능의 소유와 본성의 존재가 인간의 무의식에서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이웃하고 있다는 인류사의 무의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 같다. 근대기술의 ‘집단심문대’(Ge-stell)의 방식은 단지 자연에 관한 인간의 도발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도발적 심문의 사고방식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다 잉태시켰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집단심문적 탈은폐의 기술방식이 바로 인간 자유의 도발적 힘을 상징하는 의미로 해석했고, 사회주의는 집단심문적 탈은폐의 기술방식으로 인간사회의 평등을 이룩한다는 명분아래 인위적으로 사회성원들을 심문하고 주리를 틀었다. 하이데거는 기술자체가 위험하기보다 오히려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더 위험하다고 언급했다. 인간 마음의 위험성은 인간자아의 무한 의지와 그 소유욕의 위험성을 말한다. 마음의 무한 소유욕으로 인간이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고, 죽음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두뇌의 사이버네틱스가 철학적 사유와 시를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그는 우려했다. 지구의 사막화 이전에 인간마음이 온전히 황폐화될 것임을 그는 예견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기 전에,‘무엇을 사유해야 하는가.’하고 심각히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사상은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유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儒林(63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8)

    儒林(63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8)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8) 두향이가 입던 갑사 저고리의 깃을 잘라 내어 이를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고 다시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을 맹세함으로써 이 지상의 황촌(荒村)에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을 노래하였던 두향. 퇴계는 묵묵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으리께서 곁에 계시오면 소첩이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내서라도 드리옵고, 손가락을 단지해서라도 나으리를 살릴 것이오나 이처럼 멀리 떨어져 계시오니 대신 인편에 분매 한 그루를 보내 드리오리다. 이를 소첩 보듯 바라봐 주시옵소서. 나으리께서 떠나신 그날부터 소첩이 나으리를 생각하여 키운 매화꽃이온데,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러 옥설의 골격에 빙상(氷霜)의 넋이 활짝 피었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유난히 매화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마음 소첩은 여직 기억하고 있사오니 매화꽃을 보실 때마다 그곳에서 소첩이 피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올해 피어난 백매는 다른 해보다 빙자옥질(氷姿玉質)하여 소첩이 나으리를 상사하는 아취고절(雅趣高節)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으니 소첩이 보내는 일지춘으로 병마에서 벌떡 일어나 쾌차하시옵소서.” 일지춘(一枝春). 중국의 양자강(陽子江) 남쪽에 있는 강남에서 매화나무의 가지 하나를 멀리 있는 친구에게 보낸다는 뜻으로 원문은 ‘강남일지춘(江南一枝春)’이다. ‘형주기(荊州記)’에 나오는 일화로 오나라의 육개(陸凱)가 절친한 친구인 범엽(范曄)에게 봄이 되어 갓 피어난 매화꽃 가지 하나를 인편을 통해 선물로 보내며 우정을 나눈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 육개는 매화꽃 가지 하나를 보내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매화나무 가지를 꺾다가 역부를 만나(折梅逢驛使) 몇 가지 묶어서 멀리 계신 그대에게 보냅니다.(寄與嶺頭人) 강남에 살며 가진 것이 없어(江南無所有) 겨우 봄꽃 하나를 보내 드리오.(聊贈一枝春)” 두향의 편지는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나으리, 소첩 역시 강남에 살고 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애오라지 봄꽃 한 그루를 보내 드리오니 소첩 보듯 맞아 주시옵고 암향부동(暗香不動)의 향기를 맡으시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사오나 나으리를 향한 침개와 같은 소첩의 마음을 헤아려 주옵소서.” 침개(針芥). ‘바늘과 개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자석에 붙는 바늘과 호박에 붙은 개자를 가리킨다. 자석에 붙은 바늘이 떨어지지 않듯이, 호박 넝쿨에 기생하는 개자가 떨어지지 않고 밀착되듯이 퇴계를 향한 두향의 일편단심이 여전히 그리움에 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
  • 儒林(62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儒林(62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퇴계가 특히 이 돌우물을 사랑하고, 그 샘물의 맛을 ‘달고 맑다.’고 극찬하고,‘서로의 마음을 얻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맹자의 말처럼 자신의 학문이 아홉 길이나 팠으나 아직 수맥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남은 인생을 바로 이 돌우물이 위치한 도산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며 진리의 근원에 이를 때까지 여생을 거경 궁리할 것을 결심하는 단심가(丹心歌)였던 것이다. 분황(焚黃). 조선시대에 있었던 사후의식으로 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조정에서 추증된 관직의 사령장과 황색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주는데, 이를 받은 사람은 추증된 선조에게 고하고 황색종이 부분을 그 자리에서 태우는 의식을 분황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미 59세의 나이 때 이 분황의식을 치렀었다. 넷째형 해(瀣)가 사화에 휩쓸려 유배 도중에 장독으로 급사하게 되었으며, 훗날 조정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어 사후에 벼슬을 받게 되었으므로 퇴계는 자신이 직접 분황의 제사를 올려 주었던 것이다. 그 때 퇴계는 가장 사랑하였던 형 온계의 무덤에서 조정에서부터 내려온 황색부본을 태우며 울면서 생각하였다. 이 종잇조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죽은 후에 ‘정민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추증으로 ‘대사헌감사’란 벼슬이 내려진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퇴계가 67세 때 명종이 승하하고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여론이 분분하였음에도 끝내 이를 물리치고 서당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이미 자신에게 내려지는 벼슬이 죽은 사람에 내려지는 분황에 불가하다는 자의식 때문이며, 여생동안 진리의 원천인 수맥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한 우물을 파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있는 돌우물,‘열정’은 퇴계의 마음을 닦는 심경(心鏡)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돌우물 곁에 내려진 두레박을 천천히 들어올려 우물 속으로 집어 던졌다. 첨벙― 바위틈을 뚫고 지표로 솟아오른 샘물의 깊이는 아득하였다. 두레박 가득 물을 담은 노인은 끈을 잡아 당겼다. 이윽고 노인은 두레박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갈증이 해소된 듯 남은 두레박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서당에서부터 인기척이 있었다. 갓 쓴 유생 하나가 서당 쪽으로부터 물동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마실 물을 떠갈 요량 같았다. 우물가에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던 노인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며 물어 말하였다. “여기가 도산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퇴계 선생님이 계시오신 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소이다.” 유생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남루한 차림의 노인을 쳐다보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 [심상덕의 서울야화] (8) 단오 그네타기

    [심상덕의 서울야화] (8) 단오 그네타기

    단오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오는 31일이 음력 5월5일 단오절이거든요. 예전부터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그네를 뛰면 여름에 모기 같은 곤충에 물리지 않고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네뛰기는 인기가 있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이 그네뛰기, 여성 스포츠 치고는 최고의 스포츠잖아요. 그 예전엔 우리나라 여성들, 말 타기도 즐겼고 그네뛰기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여성들에게 차별과 편견의 굴레를 씌워놓고 있던 그 예전엔 이 단오 무렵의 그네뛰기는 일상생활의 모든 억압에서 활짝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던 겁니다. 그 그네가 하늘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네 탈 때의 멋은 펄럭 펄럭 펄럭, 그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것도 하나의 멋이지만요. 처녀들의 머리를 묶은 그 빨간 댕기 있잖아요. 허공에 한 번 높이높이 치솟았다가 내려올 때, 그 빨간 댕기머리가 출렁 출렁하면서 나부끼는 모습. 또 그네 타는 처녀들의 치마 속으로 바람이 가득하게 들어가 치마 폭이 고무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잖아요. 총각들은 처녀들의 그 그네 타는 모습을 바라보고 나면 십중팔구는 그날 밤부터 끙끙 앓기 시작하는 상사병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 서울의 경우 이 단오 무렵에, 그래요 전에는 창경궁 같은 곳에서 이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곤 했어요. 그리고 장충단공원에서도 이 그네뛰기가 해마다 열렸구요. 특히 6·25이후에 장충단 공원에서 단오 무렵에 벌어진 그네뛰기 대회에선 평양이나 개성이 고향인 실향민들이 대회를 거의 휩쓸 정도로 그네들을 그렇게 잘 탔던 겁니다. 그네를 타고 높이높이 반공중으로 날아올라 기둥에다 매달아 놓은 방울을 발로 힘껏 걷어차는 높이뛰기 대회. 그 쇠방울에서 짤랑짤랑 소리가 여러 번 들릴수록 그네뛰기 성적은 더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광복이후 한 때는 남산에서도 그네뛰기가 활발했었고요. 종로 쪽에선 전에 운현궁 별장(대원군 별장)에서 그네를 매고 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평상시엔 개방하지 않았던 운현궁 별장이었지만 뜰에 큰 나무들이 많아서 단오 무렵에 그네뛰기 하기엔 더없이 좋았었기에 이 단오무렵 만큼은 종로 구민들에게 운현궁별장이 개방되곤 했던 거죠. 또 동대문 쪽에선 4월 초파일부터 그네를 뛰기 시작해 5월 단오까지 계속 했었는데요. 특히 ‘관운장’의 화상을 모신 동묘의 그네뛰기 대회는 서울에서도 규모가 크기로 아주 유명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화여대 뒷산에서도 그네를 많이 뛰곤 했죠. 그런데 약 70년 전인 1937년. 그 ‘중일전쟁’ 이후 광복을 맞을 때 까지 우리 민속놀이의 말살정책에 따라 일본인들이 그네뛰기조차 못하게 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걸 아시는지요. 우리에겐 그네뛰기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광복된 다음해 단오절에 전국적으로 다시 그네뛰기가 부활이 됐던 거죠. 그리고 규모가 제법 큰 그네뛰기 대회에선 쌀 몇 가마씩을 내걸기도 했고, 또 돼지 한 마리, 광목 한통, 양은 냄비, 검정고무신 이런 것들을 상품으로 내건 경우도 많았어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밀 때는 선녀가 달나라로 가는 듯, 돌아올 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또 신윤복의 그림에도 보면,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의 여인네가 막 그네 줄에 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리고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을 엮어주게 된 계기, 그것도 바로 단오 무렵의 그네뛰기가 있었기 때문에 몇 백년 세월이 흐르도록 일편단심 변치 않는 그런 사랑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겠죠. 춘향이와 이도령 같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도, 단오를 전후해 처녀총각 젊은이들 사이에 그네뛰기가 또다시 성행했으면 좋겠습니다.
  • [열린세상] 동의보감과 줄기세포의 상관관계/이성낙 가천의대 총장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특히 자연과학은 수학적 논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인문사회학은 감성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학문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면 서양 사람들은 수학적 논리에 충실하고, 동양 사람들은 좀 더 감성적 논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황우석 사건을 놓고도 서양 문화권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무리 획기적인 과학적 결과물이라도 윤리성이 배제된 것이라면 결코 더이상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줄기세포 관련 ‘원천기술’만 있다면 황우석 연구팀의 비윤리적 연구 접근도 너그러이 이해하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해 놀랍기 그지없다.‘원천윤리’가 망가졌는데 ‘원천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과정보다도 결과가 중시되는 우리의 사회적 풍토가 실로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번 줄기세포 관련 사건이 불거진 후 서울대학교가 자체 조사위원회를 신속히 가동한 것은 순발력 있는 조치로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여기서 그 내용을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조사위원회가 발표한 결과는 지극히 과학적인 근거의 산물이다. 그런데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20%만이 이 결과에 동의하고,80%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많은 사람이 과학적 결과와는 상관없이 황우석 사건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처럼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결과보다 감성적 논리로 접근한 주관적인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00여년간 거세게 몰아닥친 서양화의 물결 속에서 과학교육이 미친 영향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현대화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 저변에 형성된 의식세계는 여전히 과학보다는 비과학, 수학적 논리보다는 감성적 논리, 냉정한 윤리의식보다는 주관적인 윤리의식에 지배를 받는 것 같다. ‘좋은 것이 좋다.’라면서 용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는 근래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하는 부정부패에 대한 불감증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애매모호한 온정은 넘쳐흘러도 냉철한 이성은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동의보감’은 조선시대인 1613년경에 간행된 저서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문제는 400년전 이런저런 약초들을 배합하여 만든 처방을 오늘날에도 온 국민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는 데 있다.‘동의보감’에 나온 처방이 워낙 절대적이라 이를 자연과학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동의보감’에 명기된 약초로 만든 것도 어쨌든 약이기 때문에 우리 신체에 어떠한 형태로든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약이 아닐 것이다. 즉 작용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반작용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수학적 또는 추리적 논리이다. 세종대왕 때에 창안한 측우기는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국보이지만, 오늘날 강우량을 측정할 때 그 측우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역사물은 역사물로 보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동의보감’을 냉철한 비판적 분석 없이 맹신하는 감정적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동의보감’에 대한 일편단심과 황우석 사건의 경우에서 나타난 ‘그래도 나는 믿어.’라는 사고방식에는 이러한 감정적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좀 더 투명하고 정의롭게 나가려면, 좀 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이성낙 가천의대 총장
  • 임지현교수가 본 ‘파시즘의 대중심리’

    임지현교수가 본 ‘파시즘의 대중심리’

    한 주간지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폐지하자는 특집 기사가 나온 이후, 네티즌들 사이에서 ‘맹세’의 존폐 논란이 한창이다. 이 문제에 대한 몇몇 포털사이트의 네티즌 대상 여론조사들은 한결같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흥미롭다. 하기사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문 날인 강요에는 분노하면서도, 불과 두 달 만에 2500만 국민들이 열 손가락 지문을 찍는 주민등록증 갱신사업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사회에서 그것은 별반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국기에 대한 맹세’는 국가나 민족 같은 세속적 실재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시켜 대중의 복종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전형적인 ‘정치종교’의 장치이다. 말하자면, 민족/국가주의의 ‘주기도문’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세속적 정치공동체는 합리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된다. 20세기의 독재자는 어떤 면에서 근대 국가의 주술사이다. 그의 주술에 답하지 않는 자는 ‘이교도’ 혹은 ‘배교자’로 간주되어 공동체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주술사의 힘은 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국가 부흥회를 떠받치는 것은 감정이 한껏 고양된 대중이다. 파시즘은 인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변된다는 빌헬름 라이히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의 책 ‘파시즘의 대중심리’(황선길 옮김, 그린비 펴냄)는 사회경제적 과정이나 구조를 넘어서 대중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감정이나 정서 내면적 심리를 파고들어 파시즘이 구가하는 힘의 원천을 분석한다. 말하자면 국기에 대한 맹세나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의 주민등록증을 사회적 필요라 간주하고 지지하는 대중의 집단심성이 파시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라이히의 표현을 빌리면, 파시즘은 ‘대중의 비합리적인 성격 구조’의 반영적 표현인 것이다. 민족/국가주의와 같은 ‘정치종교’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권위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 대중의 성격구조가 파시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라이히의 분석은 사회경제 구조와 그 위기에 파시즘을 환원시키는 정통 좌파의 파시즘 분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파시즘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패배라는 쓰라린 결과는 거시 구조에 집착하는 정통 좌파의 분석틀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사회민주당의 치명적인 실수는 수 천 년 동안 가부장적 권력의 지배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회주의 강령이나 교육을 통해 하루 아침에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착각한 데 있다.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성격구조가 보수적으로 남아있는 한, 사회주의는 불가능한 꿈이었을 뿐이다. 인간 해방과 성 해방의 연관성을 논리적 극단까지 밀고 나아간 라이히의 성경제학에 대한 적지 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포스트파시즘 시대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을 설명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여전히 거시분석과 거시처방에 집착해 있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신선한 지적 자극제이다. 몇 년전 내가 제기한 ‘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한 좌파 거대 구조론자들의 거센 비판과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빌헬름 라이히를 만났다. 내 자신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마르크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법과 제도의 민주화가 파시즘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황우석 교수 사태나 국기에 대한 맹세 논란에서 보듯이 일상적 삶의 재생산 과정에서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는 파시즘적 문화 및 규범의 극복이라는 문제를 고민할 때, 빌헬름 라이히는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2만 3000원. 임지현(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장)
  • 마흔 넘어 세상을 산다는 건…

    ‘나이 마흔 넘어 세상을 산다는 건/석양빛 붉은 울음을 제 뼛속마다 고이/개켜 넣은 거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악머구리 끓듯 소란스럽지 않게/저만큼 서로 한 뼘씩 거리를 둔 채/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상처의 불꽃들/밤새 안녕하였다는 눈인사를/저 스스로에게 묵묵히 건네며/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미스터L의 회상’중) ‘58년 개띠생’인 시인 이승철(48)이 세번째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솔)를 발표했다.‘총알 택시안에서의 명상’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의 주된 정서는 인용한 시구에서 드러나듯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40대 후반 중년 남성의 자화상이다. ‘스무살 적 광주, 나 역시 한때 노숙자로 떠돌던 때가 있었다. 얇은 비닐조각을 이불처럼 덮어쓰며 광주학생회관 계단 밑에서 별꽃을 헤아리다가 새벽이슬 속에 문득 잠 깨어나곤 했었다.’(‘종삼에서 운주사 와불을 보다’중) 호남대 행정학과에 다니던 평범한 ‘문청’의 인생 항로는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항쟁과 더불어 급격한 굴절을 겪는다. 대학을 중퇴하고,1983년 시 전문 무크 ‘민의’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출판계에 입문했다.나남, 인동, 산하, 황토 등의 출판사에서 5월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광주민중항쟁증언록’, 김남주 시인의 옥중시집 ‘나의 칼 나의 피’등을 기획했다. 세월의 힘에 떠밀려 어느덧 세속적 삶에 물든 자신을 탓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엄중하다.표제작 ‘당산철교 위에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2만5천 볼트의 전류를 기운차게 뿜어내며/2호선 전동차가 바람을 헤치며 돌진한다./당산철교 밑으로 푸르딩딩한 강물이 떠가고’에서 기억과 현실의 첨예한 대비에 괴로워하던 시인은, 이내 ‘나는 지금 한 마리 낙타로/인생이라는 신기루를/무사히, 잘, 건너가고, 있는가?/옛사랑이 다만 흐릿하게라도 남아있는 한/세상을 사는 존재의 형식을 되묻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추스른다. 시집에는 시인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김남주, 채광석, 고정희, 기형도 등 요절한 문인들을 기리는 추억도 실려있다. 시인은 “자기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 영혼에 메스를 가한다는 것, 그리하여 미욱한 이 세상을 향해 일갈하고 싶다는 것, 이것이 최근 나의 시작 태도”라며 “청춘의 한 시절이 허위단심 떠나갔고, 저만치서 불혹의 아침이더니 이제 나는 인생의 후반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시집 앞머리에 적었다. 시인은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시 전문지 ‘시경’편집위원, 도서출판 화남의 편집주간으로 활동 중이다.6500원.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최고의 아내는 노르웨이여성?

    최고의 아내는 노르웨이여성?

    『중국요리를 먹고 양옥에 살고 일본 여성을 아내로 갖는 것이 남자 최고의 팔자』라는 말도 앞으로는『「노르웨이」여성을 아내로』라고 고쳐져야 할지 모르겠다. 법률적으로는 완전한 남녀평등이고 젊을 때는「자유」를 즐기지만 일단 가정에 들어 앉으면 일편단심으로 남편을 위하고 가정을 지킨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어느 1류 신문에 최근 구혼광고가 나왔다. 『「노르웨이」여성과 결혼하고 싶은 미국인 남자임. 희망자는 이름과 주소에 사진을 첨부해서 연락 바람. 조건은 첫째 미인임은 물론 남편을 위하는 것을 평생의 보람으로 삼아 남편을 주인으로서 존경하는 사람이라야 함』 4백 통의 응모가 있었다. 그만큼 큰 반응이 있었다는 것은「노르웨이」여성이 남성을 헌신적으로 떠받드는 일에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의 증명이다. 이 광고를 보고 오히려 분통을 터뜨린 쪽은「스웨덴」과「덴마크」의 여성들이다. 특히「덴마크」의 잡지『히메트』는「노르웨이」여성이 정말로 이와 같은 굴욕적인 상대를 참고 견딜 수 있을까를 조사하기 위해 특파원을「노르웨이」에 급파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 특파원의 보고가『히메트』지에 실렸다. 『「노르웨이」여성의 아내로서의 위치는「섹스」의 배출구와 싸게 마구 부릴 수 있는 식모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도덕과 권리를 내세워 어둠침침한 종교적 압제를 여성에게 과하고 있는「노르웨이」의 남성들은 눈알을 번쩍이면서「여성은 집안살림을 깔끔히 하고 아기를 보살피고 있지 무슨 딴 수작이냐」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들은 아내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제한다. 한편 여성의 고분고분한 태도도 놀라울 정도이다. 남편이 집으로 손님을 모시고 오면 식사 등 모든 준비를 해놓은 뒤 고요히 다른 방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만찬회,「칵테일·파티」, 철에 따른 가정적인 행사 등은 거의 모두가 남성에게 독점되어 있다』 또 한 사람「프랑스」인인「실비안·비보」는『노르웨이』라는 저서에서 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여성들과 틀리는 특이한 새로운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젊었을 때는 최고의「자유」를 누린다. 이 자유와 여성으로서의 상식이 범벅이 되어 활발한 도시에 수줍음이 있고 얌전한 동시에 대담하며 순진한 반면에 세상사에 익숙하다는 대칭적인 두 가지 성격을 혼재시키고 있다. 그녀들은 소년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자라난다. 같은 복장을 하고 호수나「풀」에서 함께 헤엄을 치고 험한 산에 함께 오른다. 그녀들은 양친과 선생의 감시가 없는 휴일을 보내고「섹스」에 관해서도 극히 대담하다. 완전한 자유와 남녀평등이 인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이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그녀들로부터 찾아보기란 힘들다. 만약 한 여성이「노르웨이」여성을 위해 문을 열어준다든지 의자를 밀어준다든지 하는 친절을 베풀어 보라. 그 여성은 반드시 외국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리라. 왜 외국말을 하는가 하면 그러한 친절을 베푸는 남성은 외국남성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남성은 절대로 그 짓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기 자신들이 남성과 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카페」에 혼자 갈 수도 있고 보석으로 수놓인「이브닝·드레스」로 차려 여성만의 만찬회에 나가도 좋고 아무와도 잘 수 있는 자유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여성들은 한번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며 주부의 일에 전념한다. 「노르웨이」의 여성은 현모양처의 구실을 자기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KHS합동=본지특약> [ 선데이서울 69년 5/4 제2권 18호 통권 제32호 ]
  • 짝사랑 9년 감방인들 어떠리

    짝사랑 9년 감방인들 어떠리

    짝사랑 9년 - . 그 짝사랑 때문에 가정도 직장도 잃고 유치장만 12번을 드나든 사나이. 그러고도 조금도 굽힐 줄 모르는 집념이 있다. 이 한 많은 짝사랑의 주인공 권기성(35)씨가 3월 20일 하오 서울 종로경찰서 보호실에 들어서자 낯익은 담당순경은 한번 씩 웃고 나서 물어볼 필요도 없이 권씨의 조서에「추수(追隨), 불안감을 조성한 혐의」란 죄명을 달았고 권씨도 자주 있었던 절차라 이의를 붙이지 않았다. 죽도록 좋아하는 여자를 따라다니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를 괴롭힌 권씨는 이런 간단한 절차를 밟아 또 10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은 것. 권씨의 이 끈질긴 짝사랑 9년의 내력을 살펴보자. 권씨의 고향은 충남 당진군 신평면 신송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권씨가 돈벌이를 하러 결혼한 지 4개월 된 부인 손(孫)모(34)여인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이 지난 612년 초가을이다. 직장도 없이 셋방을 얻어 어려운 생활을 하던 권씨는 그 해 11월 다행히「국졸」이란 학력 덕으로 고향 선배의 소개를 받아 창신시장 경비원으로 취직이 됐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 구석구석을 살펴야 했던 권씨는 취직 한 달만인 그 해 12월 초 어느 날 시장 안 M미장원 앞을 지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M미장원에 새로 온 미용사 이(李)모(28·당시 20)양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날부터 권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장원 앞을 서성거렸고 이양이 출·퇴근할 때면 멀리서 속을 태웠다. 그 뒤 1년 동안 권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장원을 쳐다보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그러다 참다 못하면 미장원 안으로 뛰어들어 하소연도 해보고 퇴근길엔 따라가 통사정도 해보았으나 이양의 반응은 언제나 냉담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처녀, 첫눈에 반해 참을 수 없이 이러다 보니 좁은 시장 안은 매일같이 권씨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권씨가 이를 알게 된 부인과 시비가 잦았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시장조합에는 마음을 물리겠다는 각서를 세 번이나 써야 했다. 권씨가 맨 처음 유치장 신세를 진 것은 62년「크리스마스」. 권씨는 이날 담판을 질 셈으로 M미장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권씨의 이 대담한 공격에 놀란 것은 이양뿐 아니라 꽉 찬 손님들과 미장원「마담」. 권씨는 잠시 뒤 달려온 백차에 실려 동대문서 유치장으로 직행했다. 그 뒤 1주일 만에 유치장을 나온 권씨는 갈 곳이 없었다. 직장에선 해임통보가 와 있었고 그간 들어가지 않던 집엔 들어갈 체면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양의 태도가 변할 리는 만무였다. 그러나 권씨의 일편단심(?)은 조금도 흔들릴 수 없었다. 이양은 그의 모든 것이었으며 먼 발치로나마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씨는 M미장원에서 가까운 일터를 찾아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생활이 4년을 계속되는 동안 권씨는 인천에서 모 대학에 다닌다는 이양의 남동생을 찾아가기도 했고 이양의 고향인 온양에 가 이양의 부모를 만나도 보았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67년 7월 이양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알고 보니 미장원 N마담과의 친분 때문에 권씨의 시달림 속에서도 자리를 옮기지 못했던 이양이 견디다 못해 훌쩍 떠나 버렸던 것이다. 권씨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시름 속에 며칠을 보낸 권씨는 이양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 수소문 끝에 있을 법한 부산, 온양 등지를 수없이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 68년 3월 그간 항상 마음에 걸리던 부인과의 이혼수속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양을 찾는 작업을 계속했다. 권씨의 판단으로는 이양이 서울에 있을 것 같았고 있을 곳은 미장원일 터이니 화장품 외무사원을 하며 서울의 모든 미장원을 뒤져보기로 했다. 권씨의 판단은 적중했다. 화장품 등을 메고 골목골목의 미장원을 하나도 빼지 않고 찾아 다니던 권씨는 이양이 M미장원을 떠난 지 7개월, 외무사원 2개월 만인 그 해 10일 단성사 옆 N미장원에서 이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권씨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아가씨가 “미친놈” 욕해도 유치장 나가면 또 찾겠다 권씨는 그 길로 회사로 달려가 사표를 내고 이양을 달랬다. 그러나 이양의 태도는 예나 그때나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래 권씨는 실의에 빠져 자살할 생각까지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양은 권씨를 피해 직장을 자주 옮겼으나 권씨의 집념은 끈질긴 것이어서 그때마다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권씨가 구경한 유치장도 여러 곳이 됐다. 동대문서, 성동서, 종로서… 이렇게 다채로웠다. 이양은 여러 곳을 옮겨 보았으나 피할 길이 없다고 체념했던지 지금 있는 종로구 청진동 Y미장원에 와서는 그대로 머물러 버렸다. 권씨는 여전히 Y미장원을 찾아 다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미장원 잎에 서있다가 이양이 나타나면 따라 나섰다. 이양은 꼼짝할 수가 없었고 때로는 미장원 안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니 그런 때는 경찰의 힘을 빌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3월 20일에도 권씨는 아침부터 Y미장원 앞을 서성거렸다. 참다 못한 권씨는 이날 하오 3시쯤 미장원으로 뛰어올라가 담판을 내자고 소란을 피웠다. 이럴 때마다 놀란 것은 손님들. 주인「마담」은 112의「다이얼」을 돌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권씨가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것은 이양을 알고 이번까지 12번. Y미장원 관할서인 종로서엔 이번까지 8번이 된다. 이렇게 돼서 관할 청진동 파출소는 말할 것도 없고 본서 보안과 경찰관들과 권씨는 낯익은 구면이 되어 버렸다. 이 끈질긴 사나이 권씨는 경찰서 유치장 문을 12번째 들어서면서도『저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디 이럴 수가 있느냐』는 이양의 말에는 아랑곳없이『나가면 또 찾아가겠다』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임춘웅(林春雄) 기자> [ 선데이서울 69년 3/30 제2권 13호 통권 제27호 ]
  • A형 ‘포인트 적립’ O형 ‘할부’ 우선시

    ‘A형은 일편단심형,B형은 흥미추구형,O형은 기분파형,AB형은 전략가형’혈액형에 따라 좋아하는 신용카드가 조금씩 다르다는 이채로운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26일 현대카드에 따르면 사내 직원 990명과 자사 브랜드 사절단(BA) 200명을 대상으로 혈액형별로 선호하는 신용카드 서비스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A형은 포인트 적립을,B형은 레저·문화 서비스를 선호했다.O형은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우선시했고,AB형은 연회비에 민감했다. A형의 경우 31.2%가 포인트나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주는 카드에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하나만 열심히 써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 ‘일편단심형 성향’을 보였다. B형은 29.7%가 레저, 문화, 오락 등 다양한 제휴 서비스를 담은 카드를 선호했다. O형은 다른 혈액형보다 쇼핑 관련 서비스와 대출서비스를 선호해 기분파에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29.3%가 쇼핑 및 대출 관련 서비스를 선호한다고 답했다.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이런 춤바람이라면 OK

    이런 춤바람이라면 OK

    “바람이 났지 뭐예요. 춤바람요. 멋진 바람 아닌가…. 덕분에 부부끼리 붙어다니는 시간이 늘었답니다.” 부부들끼리 즐기는 춤바람은 해도해도 무죄다. 전국 방방곡곡에 부부 댄스스포츠 열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다. 실력을 떠나 ‘잉꼬 사랑’을 키울 수 있고, 전신운동이어서 건강도 챙길 수 있어서다. 열심히 일한 당신, 춤바람 여행을 떠나보시라. 건전한 취미인 동시에 운동이기도 하다. 조금씩 실력이 붙으면서 더 높은 단계에 이르자는 욕심도 붙어 성취욕도 못잖게 생긴다. 이따금 스포츠댄스가 맞지 않느냐는 물음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이름 그대로 댄스 모양을 한 스포츠이다. 요즈음 마라톤 열풍도 대단하지만 신체 특징에 따라 무리가 갈 가능성이 있는 반면, 댄스스포츠의 경우 평생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기를 누린다. 댄스스포츠는 우선 크게 모던 볼룸댄스(Modern Ballroom Dance)와 라틴 댄스(Latin Dance), 두 종류로 나눠진다. 각각 5개 소종목이 있다. 모던에는 왈츠, 비엔나 왈츠, 탱고, 폭스트롯, 퀵스텝이 있다. 라틴에는 룸바, 차차차, 자이브, 삼바, 파소도블레이가 각각 있다. ●알콩달콩, 깨가 쏟아져요 가을을 재촉하는 여우비가 흩뿌린 21일 오후 7시30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가오리길 82’ 강북구민회관 지하1층 생활체육실에서는 춤바람 난 부부들 여남은 쌍이 손에 손을 맞잡고 춤에 빠져들고 있었다. 더러 뒤늦게 찾아온 부부들은 들어서자마자 “여보, 우리도 어서 옷 갈아입어야지.”라며 활짝 웃었다. 춤바람 난 부부 동아리의 이름은 ‘위드 댄서클’(With Dance Circle). 드러내놓고 함께, 그것도 부부가 춤을 즐기자는 뜻이 담겼다. 모두 15개 팀,30명으로 이뤄진 모임에는 도봉구 전 생활복지국장과 강북구 행정관리국장 등 전·현직 공무원도 끼어 있다. 체면치레에 점잖빼기(?) 좋아하는 공무원 부부도 춤바람에서 빠지지 않는 셈이다. 아무래도 일반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많지만 교사, 장학사로 일하는 회원도 보인다. “서로 나이를 묻지 않아요. 집안을 오가며 친해지면 다르지만…. 뭐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사는가가 문제죠. 춤 추는 것에 대해 숨기곤 하던 옛날 사고방식도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오늘 모습이 중요하지….” 2002년 첫 발을 떼 이제 3년 남짓한 동아리에는 막내 30대 부부부터 60대의 황금기 부부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다음달 29일 서울시민예술축제 무대에 오르기 위해 비지땀을 쏟고 있다. 수·목요일 정례 연습에는 보통 오후 6시쯤 모여 3∼4시간씩 땀을 뺀다. 앞서 같은 달 20일에는 서울시내 부부 댄스스포츠팀을 총망라하는 연합 파티도 준비 중이다. “강북지역에서는 우리 따라올 팀이 거의 없을걸요, 아마. 호호호….” 지난 5월29일 한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강북구청장배 우승 등 성적이 빼어나단다. 아이디 ‘백합’이라는 한 중년여성은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이같이 귀띔했다. 대회만 나갔다 하면 입상 이상의 성적을 낸다고 덧붙였다. 나이를 묻지 말라는 춤바람꾼들 말대로 이곳에서는 별명으로 통한다. 부부 회원들에게 쌍쌍이 서로 걸맞은 별명을 갖고 있다. 짝끼리 이름이 딱 맞아떨어지는 별명에 놀랄 만하다. ‘햇살’과 ‘노을’ ‘로미’와 ‘줄리’ ‘나무꾼’과 ‘선녀’ ‘담쟁이’와 ‘넝쿨’ 등등….‘백합’ 또한 남편의 아이디는 ‘청솔’이다. ●“사랑은 전염 빨라요” 요즘 잘나간다는 남성 3인조 SG워너비의 ‘살다가’와 왁스의 ‘욕하지마요’ 등 가요에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 록그룹 퀸의 명곡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등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노래들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음악에 맞춰 서로 부둥켜안은 부부들은 서로 손을 들어올려 몸을 돌리고, 마룻바닥을 미끄러지듯 파트너 몸 사이로 멋지게 빠져나가고는 했다.40평 남짓한 연습실은 나비 넥타이에 검은 바지차림을 한 남성과 분홍 원피스 등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춤바람꾼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금방 물들었다. 바로 옆에서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춤바람에 덩달아 신바람이 난듯 매트를 뒹굴고 다녔다. 자이브에 심혈을 기울이던 ‘백합’은 “4분의4 박자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진다.”면서 “오늘 낮 부부싸움으로 서로 얼굴을 붉혔다가도 오늘 밤에는 흠뻑 빠져들기 때문에 숨겨진 ‘금실비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음악의 빠르기와 비트에 따라 동작이 다르고, 다른 댄스와 달리 운동반경이 넓어 살을 빼는 데에도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한 회원은 “한시간에 600∼700㎉의 열량이 소모된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성 지도강사인 ‘아프로디테’는 “이 때만큼은 부부로 생각하지 말고 파트너로 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댄스이기 때문에 서로 예의가 중요하며, 따라서 존중해줘야 한단다. 집안 일로 연장돼 “그것도 못하냐.”“당신 동작이 잘못”이라는 등의 핀잔을 주기라도 하면 전체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어서다. 처음 동호회에 나오면 짐짓 동료끼리 데면데면해지기 마련이어서 신입생 환영회와 같은 모임을 만들어 분위기를 이끈다고 뽐냈다. 대회나 발표회 때는 서로 무대용 화장을 해주고 반짝이를 붙여주는 등 오붓하기 그지없다고 회원들은 말한다. 댄스스포츠 구두를 신을 때 끈을 매주고 하면서 사랑은 절로 커진다. ‘아프로디테’의 발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초급반 격인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동호회가 연습 중이라고 했다. 동명의 영화에서 이름을 따왔다. 모두 22개 팀,44명이 회원이다. 위드댄서클과 달리 옷차림이 평상복 그대로인 게 사뭇 흥미로웠다. 남편 ‘소주’와 함께 나들이한 ‘맥주’는 “댄스스포츠를 하게 되면서 부부사랑이 쏟아진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들 역시 회원들 별명이 ‘견우’와 ‘직녀’나 ‘청실’과 ‘홍실’ ‘일편’과 ‘단심’ 등으로 짝을 맞춰 지어 부르고 있다. 각각 64세와 62세로 최고 연장자라는 회원의 별명은 공교롭게도 ‘소년’과 ‘소녀’여서 웃음을 자아낸다. ‘홍실’은 “지난 6월25일 경기도 청평에서 야유회를 가졌는데 가족 등 32명이나 모였다.”며 “길바닥에서 춤을 추니 여행객들이 박수를 보내 흐뭇해한 적 있다.”고 귀띔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해 새벽 2시까지 춤을 춰 서로 놀랐다는 말도 곁들였다. “단체로 데이트를 하니 20대 연애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셈이어서 세상 살아가는 재미가 새록새록 솟아요. 밥도 술도 안먹고 춤만 추고 왔지 뭐예요.” 최근 도봉구 생활복지국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정년퇴임한 강석태(60) 도봉문화센터 관장은 “시작한 지 1년 조금 지났는데 차차차와 자이브 2개 종목을 뗐다.”면서 “3년은 돼야 어디에 내놓을 실력이 쌓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춤도 춤이지만 이를 매개로 회원끼리 집안 대소사를 챙겨주는 등 이웃사랑도 커진다고 한다. 연습 때면 각자 집안에서 새로 담근 김치 등 먹을거리를 사들고 와 나눠 먹는다. 덕분에 언젠가는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산삼을 ‘공짜’로 먹기도 했다며 또 웃었다. 이날 역시 연습 중간중간에 추석 때의 제사음식과 식혜 등으로 간단한 파티를 열었다. 글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부부 댄스스포츠 동아리에서는 춤으로 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한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바람소리’는 아내에게 역경을 이긴 과정을 글로 남겨 화제가 되고 있다.‘바람소리’는 6년 전 안방살림을 하는 아내의 병환과 가정 경제의 어려움으로 힘든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춤’을 통해 꿋꿋이 이겨냈다고 한다. 언제든 불행을 맞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우리들 모두에게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 부부가 함께하는 생활체육의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춥던 6년 전당신에게 병이 찾아왔을 때나는 매일 운동장을 달리며 기도했다오.…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숨이 턱에 차서더 이상 뛸 수 없을 때에도끊임없이 기도 드리는 그 한마디는…아내를 불쌍히 여기소서.당신의 건강은 회복되어 갔지만우리 가정은 또 다른 한파에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습니까?세상이 다 싫어질 그 위기에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지요.우리의 눈물이 마르고한숨을 희망으로 바뀌도록우리는 함께 맴을 돌았지요.모든 어려움도춤과 함께 날아가고춤처럼 기쁘고 건강한 날이 돌아왔지요.이번 아내의 날에는우리 함께 왈츠를 춥시다.앞으로도항상 맑고 밝고 고운 가정이 되도록 비는 마음으로우리 함께 왈츠를 춥시다.그날 나는 당신에게이런 말을 전해 주리다.내 오른쪽에 있는 당신내 왼쪽에도 있는 당신당신은 나의 평화입니다.
  • 1600㎞ 오프로드 몽골일주

    1600㎞ 오프로드 몽골일주

    말을 왕처럼 떠받드는 나라, 그래서 몽골은 ‘호스 킹 컨트리’라 불린다. 또 하늘은 얼마나 청명한가.‘영원한 푸른 하늘’이란 말은 곧 몽골의 동의어다. 그러나 몽골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칭기즈칸의 나라로 남아있다. 스스로를 ‘푸른 늑대’라 부른 칭기즈칸. 그는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몽골 어디에나 존재한다. 호텔에도 클럽에도 보드카와 맥주 상표에도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최고로 통한다. 그야말로 세계가 인정한 ‘밀레니엄 퍼슨(millennium person)’인 것이다. 몽골의 초원을 달리며 칭기즈칸을 느껴보는 데는 단연 오프로딩이 최고다. 굳이 지프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4륜구동 자동차를 직접 몰고 허허벌판과 사막, 험준한 산악을 누벼보는 것은 뜻깊은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신문사와 한국4×4자동차협회가 공동 주최한 ‘2005 코리아 4×4 챌린저’대회는 그런 몽골체험의 진수를 제공한다. 올해로 3회를 맞은 이 행사는 8월29일까지 모두 10차례로 나눠 4박6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기자는 지난 18일 1차로 그 여정에 참여, 울란바토르∼엘승타사르하이∼오로홍∼쳉헤르∼카라코룸∼바얀고비∼울란바토르에 이르는 1600㎞의 몽골대장정을 마쳤다. 글 사진 몽골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18일 밤 11시30분.3시간 남짓 비행 끝에 도착한 몽골 울란바토르 보얀트 오하 국제공항은 한산했다. 간간이 45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의 굉음이 하늘을 갈랐고, 몽골 전통가옥 게르에서 새어나온 듯한 장작 때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공항에서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까지는 25㎞ 정도. 미리 준비한 4×4챌린지 차량으로 20여분 달리니 저 멀리 숙소인 콘티넨털 호텔이 보인다. 시설은 퍽이나 소박했지만 울란바토르시에 네 개밖에 없는 별 네개짜리 호텔이란다. 내일의 대장정을 위해 일행은 별다른 신고식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포장도로 아닌 포장도로 19일, 일행은 3인 1조로 각자 4×4자동차에 나눠 탔다.GPS(전지구 위치파악 시스템)는 이미 작동중. 오늘의 이동거리는 450여㎞다. 서울서 부산 거리지만 길이 좋지 않아 시간은 두서너 배쯤 더 걸린다. 본격적인 몽골 대장정의 출발은 울란바토르에서 250㎞쯤 떨어진 엘승타사르하이에서부터. 몽골어로 ‘사막이 갈라진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까지는 포장도로다. 몽골에선 유일하게 이 도로와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바이칼로 향하는 길이 포장돼 있다. 그러나 말이 포장도로지 곳곳에 파인 웅덩이가 많아 자칫 잘못하면 차가 뒤집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평균시속은 50㎞를 넘지 못한다. 몇시간쯤 달렸을까. 마침내 ‘반가운’ 오프로드가 나타났다. 목적지인 오르홍 폭포까지는 아직도 100㎞ 이상 남았다. 비포장길에서는 아무리 속도를 내도 평균시속 20㎞를 넘기지 못했다. 차는 먼지바람 때문에 적어도 500m는 거리를 두고 달려야 한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초원에는 말과 양, 소, 염소 등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통역을 맡은 몽골청년 바이사(23·몽골국립대 한국어과)는 몽골에서는 이들 동물에 낙타를 보태 ‘오성(五星) 동물’이라 부른다고 귀띔한다. 그만큼 몽골인의 생활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얘기다. 몽골사람들을 ‘파이브 애니멀 피플(five animal people)’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만했다. 푸른 하늘엔 육식을 즐기는 말똥가리가 날고 초원엔 청설모를 닮은 땅쥐가 달음박질친다. 망망대해 같은 벌판은 멀미가 날 지경이다. 내리 쬐는 햇살에 눈꺼풀이 감겨온다. 눈치 빠른 몽골인 드라이버가 몽골 최고 여가수 아리오나의 ‘더기 바이가 비즈(제법이지!)’와 ‘자로나스(청춘)’를 귀청이 터져라 틀어 놓는다. 강한 비트의 몽골 팝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덧 오르홍 지역에 다다랐다. 해발 1840m의 고지대. 그러나 허위단심으로 찾아온 오르홍 폭포는 아쉽게도 물이 말랐다. ●몽골의 여름은 백야(白夜) 어느새 10시. 하지만 아직도 해는 넘어가지 않았다. 몽골의 여름은 ‘준(準)백야’다. 밤 11시는 돼야 완전히 어두워진다. 오늘은 게르에서 묵을 참이다. 책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게르를 직접 체험하게 되니 약간의 설렘이 앞섰다. 게르는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몽골인의 전통 주거 형태다. 둥그스름한 모양의 게르는 몽골의 기후와 유목생활에 딱 들어맞게 설계돼 있다. 게르는 광활한 스텝을 휩쓰는 바람을 막기엔 안성맞춤. 손쉽게 해체할 수 있고, 다시 세우는 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게르 천장 한가운데엔 난로 기둥을 뽑을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 오늘은 땔감이 준비되지 않았나 보다. 캐시미어 침낭 속에서 번데기처럼 구부리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20일,4시면 벌써 해가 중천에 뜨는 몽골의 ‘고약한’ 풍토 탓에 오늘도 일찍 눈을 떴다. 물을 한 쪽박 떠 고양이 세수하듯 ‘몽골식’으로 얼굴만 겨우 훔쳤다. 몽골은 정말 물이 귀하다. 신성시하기까지 한다. 고인 물이나 샘에 손을 담그지 말고,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 마시라는 칭기즈칸의 가르침은 아직도 살아있는 듯했다. ●협동정신은 오프로딩의 핵심 오늘은 초원과 타이가 숲, 그리고 온천으로 유명한 쳉헤르로 가야 한다. 오르홍에서 쳉헤르까지는 120㎞,4시간은 족히 달려야 한다. 오늘이라고 초원이 뭐 달라질 게 있을까. 아니 그런데 이게 뭔가. 차의 하체가 몽땅 잘라크(웅덩이)에 빠지고 만 것이다.“머플러에 물 들어가면 끝이야. 견인 로프로 묶어 끌어.”“누가 후진기어 넣어줘요.” 차는 결국 온 대원이 밀고 끌어 가까스로 건져냈다. 오프로드 탐험의 진수인 협동심을 맘껏 발휘했으니 모두들 후회는 없다는 표정이다. 몽골 오프로드 탐험의 대장격인 최명기(43) 한국4×4자동차협회 사무처장은 “몽골 초원에선 나무가 드물어 윈치가 있어도 별 쓸모가 없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쳉헤르 지구르. 파란 날개라는 뜻의 게르 리조트다. 게르에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양을 잡으니 빨리 와서 보라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양을 잡을 때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물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양의 명치 윗부분을 잘 드는 칼로 5㎝쯤 째고 손을 집어넣어 심장동맥을 눌러 즉사하게 만든다. 오늘의 요리는 양고기를 토막내 뜨겁게 달군 검은 돌에 삶아낸 허르헉. 이 몽골식 양찜은 서양의 양고기 요리보다 오히려 노린내가 덜 나 구미가 당겼다. 우유나 마유 등을 탄 수테차와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아이락(마유주,馬乳酒) 같은 몽골 전통음식도 맛봤다. 수테차는 소금으로 간이 돼 있어 짭짤하며 젖 종류가 들어가 있어 좀 텁텁하다.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는 아이락은 꼭 우리나라의 막걸리처럼 생겼다. 약간 시큼하면서 비릿한 맛이 난다. ●엇박자로 걷는 몽골말 쳉헤르 초원에서는 말을 탈 수 있다. 한낮에는 파리떼가 달라붙기 때문에 석양 무렵 타는 게 좋다. 몽골말은 서양 말과 달리 엇박자로 걸어 한결 타기 편하다. 말등자만 깊숙이 밟지 않으면 누구나 별 어려움 없이 탈 수 있다. 요금은 1시간에 4달러. 말의 나이는 보통 7∼8세다. 말 한 살을 사람 나이 열살로 치면 70이 넘은 노마(老馬)를 타는 셈이다. 삽상한 바람에 으스름 달빛까지 받쳐주니 운치가 넘치는 건 물론.“추, 추”하고 추어주니 말은 신이 나 더욱 잘 달린다. 나는 나의 착한 갈색말에게 무려 10달러(몽골돈 1만 1000여 투그릭)의 팁을 꽂아 줬다. 쳉헤르 리조트에서는 밤하늘 은하수를 바라보며 남녀가 함께 노천욕도 즐길 수 있다. 철분과 유황이 녹아든 청정 자연수가 손님을 기다린다. 몽골에서 탕 형태의 온천은 이곳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일, 오늘은 13세기 몽골제국의 두번째 수도였던 카라코룸으로 이동해야 한다. 길가엔 도처에 ‘오보’가 조성돼 있어 이방의 객을 맞았다. 오보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으로, 몽골의 민간신앙 대상이다. 오보에는 지폐도 꽂혀 있고 술병과 음식찌꺼기 등도 어지럽게 널려 있다. 몽골인들은 손을 모은 채 오른쪽으로 세 바퀴씩 돌며 소원을 빈다. 마치 우리의 옛 서낭당 같아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몽골인은 환대의 화신 가는 길에 유목민의 게르 살림집을 들렀다. 게르 지붕 위에 널어 놓은 아롤(건조한 우유)이 따가운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다. 게르에서는 아롤과 비슷하지만 좀 작은 에즈기와 몽골 천연 요구르트인 타라크를 대접받았다. 몽골인 특유의 친절함이 묻어나는 주인장 락와수랭(43)씨는 “아침 8∼9시 양과 염소의 젖을 짜고 방목한 뒤 해가 지면 거둬들이는 게 유목민의 일상”이라며 “5∼6년 전부터 독일·프랑스 등 유럽의 관광객들이 부쩍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카라코룸. 하르호린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곳은 1586년에 세워진 몽골 최초의 불교사원인 에르덴조 사원으로 유명하다.108개의 하얀 스투파(불탑)로 둘러싸인 에르덴조 사원은 1937년 공산주의 돌격대에 의해 무참히 파괴돼 현재 18개의 건물만 남아 있다. 에르덴조는 1965년 뮤지엄으로 돼 지금은 몽골에서 가장 큰 박물관의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 ●“연말이면 낙타를 사자” 이제 몽골대장정도 막바지다.22일 바얀고비 사막체험을 하고 나면 오프로딩은 사실상 끝난다. 에르덴조에서 200㎞,3시간을 내달리니 멀리 바얀고비 투어리스트 캠프가 보인다. 바얀고비는 초원과 모래언덕이 동시에 형성돼 있는 이색 지대. 울란바토르시까지 80여㎞에 걸쳐 띠모양으로 이어져 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낙타는 만날 수 없었다. 이제 언제 다시 몽골의 초원과 산악, 사막을 밟아볼 수 있을까. 순간 어느 여가수가 부른 노랫말이 떠올랐다.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는, 그리고 사막으로 떠나자는…. 한국4×4자동차협회가 계획하고 있는 10월의 ‘몽골 늑대사냥’ 대회가 더욱 기다려진다. ●문의:한국4×4자동차협회(02-2263-0098). 접수는 K4챌린지조직위www.k4challenge.com ■ 울란바토르 통째로 구경하기 간단사(Gandan Monastery) 울란바토르시 북서쪽에 있는 몽골에서 가장 큰 라마교 사원.1911년에 처음 건립된 이 사원에는 높이 33m의 부처님 금동상이 있다.1996년 온 국민의 성금으로 조성한 이 부처님은 모든 방향으로 굽어보는 자비의 부처인 ‘믹짓 진라이식’. 간단사는 과거 공산정권하에서도 유일하게 종교활동을 보장받았던 곳이다. 수흐바타르광장 몽골 건국의 아버지인 수흐바타르의 가마상이 우뚝 서 있는 울란바토르의 중심지. 이 광장을 중심으로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 국립도서관, 극장 등이 줄지어 있다. 자이산 전승탑 러시아와 몽골이 공산혁명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든 승전 기념탑. 톨강이 유유히 흐르는 울란바토르 시내와 주변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서울의 남산과 같은 곳. 가족 혹은 연인들의 휴식처로도 인기가 높다. 쓰기(月)하우스 울란바토르 시내 서울거리에 있는 몽골 전통음악과 무용 공연장. 몽골의 ‘국민악기’인 모린 호르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끝이 말 머리 모양으로 생겨 마두금(馬頭琴)으로도 불리는 모린 호르는 줄이 두개밖에 없지만 어느 악기보다 다양하고 독특한 소리를 낼 수 있다. 목구멍으로 부르는 노래인 몽골 특유의 ‘호미(khoomii)’와 가면극 등도 감상할 수 있다. 입장료는 6달러.
  • 단오절 ‘전통 현대’ 한마당

    ‘단오절을 의미있게 보내세요.’ 단오절은 설, 추석, 한식과 함께 우리 고유의 명절이다. 남자들은 씨름을 하고, 여자들은 그네를 탄다. 11일 단오절을 맞아 서울의 남산과 한강에서 다양한 축제 한마당이 재현된다. 남산에서는 씨름과 송파산대놀이 등 ‘전통축제’가, 한강 뚝섬지구에서는 록밴드 공연과 X-게임 등 ‘신세대축제’가 각각 열린다. 풍작을 기원하며 함께 즐기던 단오절의 원래 의미를 되살리는 자리가 마련되는 셈이다. ●남산에서는 단오맞이 전통 축제 서울시는 11일부터 이틀동안 중구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2005 서울단오민속축제’를 개최한다. 이번 축제는 공연·겨루기·풍습체험·전시·축제 등 다섯 마당으로 열린다. 천우각에서 열리는 공연마당에서는 흥겨운 중요무형문화재들이 재현된다. 경기민요와 송파산대놀이, 안숙선 판소리, 남사당놀이 등이 전수자들이 공연한다. 천우각과 공동마당에서 펼쳐지는 겨루기마당은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다. 씨름대회와 그네뛰기대회, 제기차기대회, 어린이 단오왕 과거제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특히 팔씨름대회에는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다. 이밖에 ▲풍습체험마당 창포물에 머리감기와 창포비녀 만들기, 봉숭아 꽃물 들이기, 단오먹거리난전 ▲전시마당 단오부채전, 단오부적전 ▲축제마당 무료 한방 진료체험, 단심줄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한강에서는 신세대 축제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한 축제의 장은 한강변에서 열린다. 한강시민공원사업소 주최로 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에서 11일과 12일에 열리는 ‘2005 강변카페 페스티벌’이 그 현장이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열리는 이번 축제의 특징은 시민들이 직접 행사를 꾸린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벤트 회사에서 행사를 기획했던 것과는 달리 올해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동호인들이 프로그램을 손수 마련했다. 39개 동호회가 꾸려가는 이번 축제는 크게 공연과 전시무대로 나뉜다. 공연 무대에서는 대한민국 라이브밴드 연합과 직장인 밴드 ‘zeed’ 등 록음악 연주가, 밸리댄스와 자이브, 살사 등 다양한 댄스 공연 등이 펼쳐진다. 다양한 전시 무대도 이어진다.▲각종 라면을 소개, 시식하는 ‘라면천국’ ▲온라인게임 카트라이트 동호회 ‘스타카트’ ▲토기 제작 동호회 ‘토미’ ▲노래방 동호회 ‘노래방에 죽고산다 놀방파’ 등 다양한 모임들이 각각의 부스에서 장기를 뽐내면서 각종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대일본제국의 애국적 지식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호소이 하지메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한일합병(1910년)을 전후해 ‘동경아사히신문’과 ‘한일전보통신사’ 기자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갓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호소이는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많은 ‘연구’도 했다. 그런 호소이에게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무지렁이로 보였던 한국인들이 수백만 명씩이나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을 요구할 줄 그는 미처 몰랐다.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 조선총독이 그걸 짐작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한국전문가 호소이 자신도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되자 한국엔 예언서 ‘정감록’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 대한독립이 박두했다는 둥, 신천지가 열릴 거라는 둥 갖가지 소문과 예언이 한반도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특히 1921년부터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숱한 신흥종교단체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다. 겉으론 종교를 표방했지만 은연중 독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정감록 비상이 걸렸다. 1922년 겨울, 호소이는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받았다.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의 자택 서재에 틀어박혀 호소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무엇인가. 제국의 용맹스러운 장졸(將卒)들이 목숨 바쳐 강적 청나라도, 러시아도 연달아 무찌른 다음 어렵게 얻어낸 제국의 새 영토가 아닌가. 저 버러지 같은 한국 놈들은 천황폐하의 신민이 된 영광을 모른다. 놈들은 감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 훈련된 군대도 총칼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려는 무지막지한 저들의 맨주먹을 쇠뭉치로 둔갑시키는 것은 독립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이다. 거기 불 붙이는 부싯돌이 바로 정감록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감록을 처단할 것이다. 나 호소이로 말하면 천황폐하의 뜻에 언제나 기꺼이 순종하고 순수한 대일본제국 신민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위대한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아닌가.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천황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나는 이미 두 권의 저서에서 명확히 입증했다.‘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과 ‘조선 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전문적인 연구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무지하고 악랄한 한국 놈들의 순화를 위해 나의 저술은 두고두고 쓰일 만한 것이다. 탁상공론으로 걸핏하면 양심을 들먹이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놈들이 있어 훗날 나 호소이를 대일본제국의 어용학자(御用學者)라고 불러도 좋다. 제국의 영예를 위한 나의 일편단심은 그럴수록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다. ●정감록을 죽이는 묘책 호소이는 묘안을 찾기 위해 좀더 생각했다.‘도무지 정감록이란 무슨 책이냐. 조선시대 위정자들도 몹시 두려워했던 책이 아니냐. 위정자들은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퍼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범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혹독한 금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 반도의 덜떨어진 한국 놈들이 감히 독립을 바라는 것도 다 그놈의 정감록 때문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개하라. 그렇다, 금단의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감록은 신비함을 잃게 된다. 신비성을 잃어버린 정감록이라면 이미 반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또 하나. 기왕에 공개할 바엔 정감록의 정본(正本)을 만드는 거다. 바로 이 호소이가 대일본제국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할 정감록의 정본을 결정한단 말이다. 총독부에서 수집해 놓은 정감록의 이본들을 자세히 살펴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선동성이 별로 없는 텍스트를 골라 공개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텍스트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다. 아주 심하게 손을 대면 조작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악하고 의심 많은 한국 놈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주도면밀해야 한다. 나는 정감록을 순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변조나 개작이 아니다. 나는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한반도와 한국 놈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감록을 편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또 있다. 이렇게 교묘한 수단을 부려 김을 빼놓더라도 한국 놈들은 순화된 나의 정감록을 다시 개악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놈들은 워낙 피가 더럽기 때문에 제멋대로니까. 그들의 망령된 행위를 막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까. 그래, 예방주사를 놓자! 정감록은 이래서 진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식으로 계몽적인 비평을 잔뜩 써 가지고 독자 놈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정감록의 대가 호소이가 만든 정감록 정본의 맨 앞에 실린 비판을 읽게 하자. ●동경판 정감록에 대한 불만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 호소이는 이미 수집된 정감록 이본들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펼쳐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오래 전에 광개토대왕비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조했다. 정본이 따로 존재할 리도 없던 정감록을 개작하는 것쯤이야 호소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솜씨와 애국심은 참으로 대단해 불과 몇 달 만에 ‘정감록비결 집록’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인들에겐 억압의 상징인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정감록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결실을 맺은 날은 1923년 2월15일이었다. 이것이 사상 최초의 정감록 인쇄본이다. 도쿄판 정감록은 인기가 대단했다. 초판으로 몇 부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간된 지 약 보름 만에 제3판을 제작할 정도였다. 도쿄판은 아마 일본에서도 상당히 팔렸겠지만 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됐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호소이가 바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도쿄에서 만든 정감록으로 한국의 정감록 세계를 평정한다는 목표는 어쩌면 단시일 내에 달성될 듯도 하였다. 도쿄서 들어온 정감록이 잘 팔려 나가자 한국의 출판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정감록을 찍어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선 호소이의 민족성 비판에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내놓고 맞싸울 형편은 안 되었지만 정감록까지도 ‘그 잘난’ 일본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책을 봐야 되는가 하는 강력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동경판의 뚜껑을 열어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호소이는 무지한 한국 사람을 계몽한답시고 무려 50쪽이나 되는 정감록 비평을 썼다. 정감록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나아가 한국 사람의 타고난 ‘야만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한국인들은 태초부터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련한 한국 민족의 정신적 미성숙은 그들이 정감록과 같은 미신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이렇게 유치하고 야만적인 성격이 한국민족의 본성이다. 국제적으로 저열한 한국의 민족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반도의 역사 및 지리적 조건이 빚어놓은 결과다. 당시 유행하던 지리적 결정론을 빌려 호소이는 ‘미개한’ 한국인을 질타했다. 귀신을 숭배하고 점치기를 좋아하는 풍습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위대성을 맹신한 호소이의 눈에는 그런 현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야만적’인 한국인까지도 호소이는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정감록 신앙에서 한국인을 구출하여야만 된다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발달된 현대 일본사회의 참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감록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호소이의 변(辯)이었다. 그러나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간행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폭탄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경판이 제3판에 돌입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23년 3월19일 김용주가 편찬한 정감록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편찬에 나선 김용주는 호소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평도 보태지 않았다. 딱히 정감록을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호소이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굳이 김용주가 정감록을 신앙하였다거나,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정감록에 대해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은 데는 호소이의 지나친 악평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김용주에게는 정감록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의 힘없는 지식인에 불과했던 김용주로서는 대중의 그러한 열망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설사 그가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한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는 동포들의 기대심리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잠재적인 독자들의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됐다. 김용주의 편집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소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기대와 상업적 목적이 골고루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김용주는 정감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정감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한성판이라 불릴 만했다. 한성판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동경판과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두 판본이 내용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사를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민간에 퍼져 있던 허다한 비결 가운데 어느 것은 호소이만, 또 다른 것은 김용주만 수집해서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것이다. 실제 정감록은 수백 년 동안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수집본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경판과 한성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야 물론 좀 더 널리 퍼져 있던 유명한 예언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누구나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대표적인 예언서 말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경판을 편집한 호소이가 매우 국수주의적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집된 정감록을 모두 출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달리 말해 진인출현이나 대한독립의 메시지가 약한 ‘순화된’ 비결만을 선별적으로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약한’ 내용의 예언까지 인쇄에 부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용주는 달랐다. 그는 도쿄본의 상당수를 답습하면서도 도쿄본에 실리지 못한 다른 비결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김용주는 호소이가 정감록의 정본을 만들려고 한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판이 정감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진짜 정감록은 훨씬 더 위험한,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정감록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이의 뜻대로 되다 당연히 김용주의 정감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김용주의 한성본이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아 조만간 도태되어야만 될 책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식민지 한국의 정세는 한결 경색됐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가 작동돼 비상시국이었다. 엄격한 사상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정감록에 대한 통제도 한 단계 더 나갔다. 그 무렵 새로운 정감록이 나왔다.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이었다. 마침 경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테면 경성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해명돼야 할 문제가 있는 책자였다. 우선 표면상 출간연도가 미상이란 점이 문제다. 책의 간행지를 ‘경성(京城)’이라고 표기해 놓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 서울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경성본이 나온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나는 본문의 표기법을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의 구조와 맞춤법이 현대의 격식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경성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확신한다. 경성본은 내용면에서도 앞서 간행된 한성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성본은 정감록이 사실무근의 허망한 책자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편자 현병주는 정감록의 가치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보류한 김용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현병주가 단순히 일본인 국수주의자 호소이를 추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정감록의 허구성을 비판하였을 뿐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인의 저열한 민족성에서 찾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은 현병주가 비결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에 대해 일일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결의 본문에 길지(吉地)에 피난을 가더라도 피난 시기에 따라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부분이 있다. 현병주는 바로 그 구절의 끝에 괄호를 치고는 “생명을 건지는 땅 중에도 종종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비꼬는 투로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조목조목 정감록의 내용을 비판함으로써 현병주는 정감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 했다. 호소이의 정감록 말살 의도는 현병주에 이르러 더욱 공교해졌다. 나는 현병주가 친일파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감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감록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현병주는 호소이의 완벽한 후배다. 현병주는 좀더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호소이의 전통을 계승했다. 나는 지금 경성본에 실린 비결의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호소이는 35종의 선별된 비결을 공개했다. 김용주는 그보다 16종이 더 많은 51종을 간행했다. 그런데 경성본에는 25종만 실려 있다. 현병주는 호소이의 동경본과 김용주의 한성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결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는 호소이가 간행한 비결의 일부만이 정감록의 정본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다. 호소이가 공개한 35개의 비결 가운데 25종은 광복 이후 간행된 여러 정감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20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호소이의 비결을 정본으로 대접하게 됐다. 그렇게 된 줄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데스크시각] 교황 선출과 ‘미디어 쇼’/김균미 국제부 차장

    “검은 연기예요?” “흰 연기다. 새 교황이다!” 18일 새 교황 선출을 고대하는 1만여명의 가톨릭 신도들로 가득 메운 성베드로 광장이 술렁였다. 그러나 잠시 뒤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광장은 순식간에 낙담과 한숨소리로 뒤덮였다. 전세계의 이목이 또다시 로마 바티칸으로 집중됐다. 아니 정확히 115명의 추기경들이 격리돼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작은 굴뚝에 쏠려있다. 제265대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18일 오후 시작됐기 때문이다. 새 교황이 언제 선출될지 알 수 없어 전세계는 하루 2번씩 연기 색깔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전세계에 생중계하는 CNN과 BBC 등 방송들은 이같은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지난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부터 8일 장례식까지 거의 24시간 생방송하면서 톡톡히 재미를 본 CNN 등 서방 주요 방송들은 교황 선출 특별방송을 내보내고 있다.2년전 이라크전쟁 이후 최대의 호기인 것이다. 전문가들을 초청해 새 교황 선출과정과 유력 후보, 새 교황의 과제와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도하고 있다. 아랍권의 알자지라 방송과 이스라엘 언론들도 서구 언론만큼 ‘법석’은 아니지만 교황 선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덕분에 비(非)신도들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교황 선출과 관련해 상식 이상의 지식을 얻기는 식은 죽 먹기다. 이슬람 등 다른 종교 지도자가 사망했어도 언론들이 이렇게 난리일까. 비신도 입장에서도 교황의 서거와 새 교황 선출은 4반세기만에 맞는 역사적 사건이다. 전세계 11억 가톨릭 신도들의 영적 지도자에 종교와 문화·국경을 초월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업적을 고려할 때 언론의 관심은 당연할 수 있다. 더불어 유럽과 미국 등 서구에서 가톨릭의 엄청난 영향력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황이 갖는 이같은 원론적 상징성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교황과 가톨릭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비밀주의와 신비주의, 파워 게임과 난무하는 음모론 등이다.1000년간 이어온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가톨릭의 전례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구미를 당기는 극적 요소들이 총망라돼 있다. 게다가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 등으로 교황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도 한몫했다. 언론들은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새 교황의 과제 같은 무거운 주제보다 선출 과정에 얽힌 야사와 격리 생활을 하는 추기경들의 집단심리 분석, 도박사들의 얘기 등 읽을거리에 치중하는 감이 없지 않다. 교황 선출을 둘러싼 ‘미디어 쇼’의 성공 뒤에는 교황청의 적극적이고 계산된 미디어 전략도 빼놓을 수 없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교황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부터 장례, 콘클라베에 이르는 전과정을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해 일찌감치 관심을 끌었다. 교황청은 예상을 깨고 일반공개에 앞서 교황의 시신 대면식 장면을 TV로 생중계하는 것을 허용했고, 장례식은 물론 비공개로 진행된 안장 장면을 찍은 사진을 언론에 배포했다. 또 18일 콘클라베 회의장인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비밀서약을 하는 장면이 1시간가량 TV로 생중계됐다. 이어 천장의 ‘최후의 만찬’ 벽화를 비춘 뒤 서서히 성당 밖으로 나온 카메라 앞에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베일을 한꺼풀씩 벗기는 듯한 교황청의 미디어전략은 가톨릭에 대한 유례없는 관심을 촉발했다.4월 한 달간 집중된 전세계 언론의 보도는 교황이 수십 차례 사목 순례를 가는 것보다, 수많은 사제들의 목회 활동보다 단기간에 훨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재임기간중 언론을 십분 활용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선견지명일 수도 있다. 이제 새 교황을 뽑는 ‘세기의 선거’는 대단원으로 치닫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후광’은 여기까지다. 가톨릭 교회, 특히 교황청의 선택에 대한 세상의 1차 평가는 성베드로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낼 새 교황에 달려 있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교황청의 도전은 화려한 교황 선출 ‘미디어 쇼’가 끝나는 순간 시작된다. 김균미 국제부 차장 kmkim@seoul.co.kr
  • 儒林(329)-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29)-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두향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에서 생이별을 슬퍼하는 머슴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황진이가 입고 있던 속곳을 벗어 관을 덮어 주어 상여를 움직이게 하였다면 800살이 된 범종은 어떻게 하여 움직였는지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이까.” 퇴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역시 소첩이 대신하여 말씀드리겠나이다. 동종에 있는 젖꼭지 하나를 잘라내었다 하더이다.” 두향의 말은 사실이었다. 상원사 동종에는 36개의 젖꼭지가 있었다. 이를 뉴()라고 부르는데, 사방에 각각 가로세로 세 개씩 불교식으로 배열된 유두(乳頭)가 36개나 돌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종의 울림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은은하게 백리 밖으로까지 울려 퍼지게 하는 독특한 음향장치였다. 상원사의 동종이 국보 36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일 뿐 아니라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도 제일인 것은 동종 꼭대기에 있는 용통(甬筒)의 음관(音管)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36개의 젖꼭지 때문에 그 소리울림이 독특하고 청아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36개의 젖꼭지 중 하나를 잘라내었던 것이다. “젖꼭지 하나를 잘라낸 운종도감은 이를 종이 있었던 안동 도호부의 남문루 밑에 파묻고 정성껏 제를 올렸다고 하더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죽령에 돌아와서 범종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하더이다. ‘이제는 미련을 버리시고 먼 길을 떠나시지요.’” 두향은 일단 말을 끊었다. 밤이 깊자 달은 공중제비를 돌 듯 중천을 거꾸로 돌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방안으로 되쏘고 있었다. “그러자.” 두향이가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동종이 다시 움직였다 하더이다. 나으리, 이로써 동종은 죽령을 넘어 제천, 원주, 진부령을 거쳐 오대산에 안치되었다고 하더이다. 나으리.” 두향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으리께오서는 날이 밝으면 단양을 떠나시나이다. 단양을 떠나시면 상원사의 동종처럼 죽령고개를 넘으실 것이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지척지간이라 마음만 먹으면 불원간 또다시 만날 수 있다 기약하셨사오나 소첩이 보기에는 이제 한번 가오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나이다. 나으리, 죽령고개가 아무리 높다 하여도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그리움은 구름이 되어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고, 동종의 무게가 3300근이나 되어 무겁다고는 하지만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마음에 비하면 한갓 검불에 불과하나이다. 장정 500명과 말 일백 필이 끈다 하면 상원사의 동종을 움직일 수 있사오나 소첩의 마음은 절대 끌지 못할 것이나이다. 나으리, 나으리를 향한 내 단심은 그 무엇으로도 끌 수도, 당길 수도, 밀 수도 없는 요지부동이나이다. 상원사의 동종이 800년이나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으리를 향한 내 상사는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천겁의 업이오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부터 맺어온 숙연이나이다. 하오니 나으리, 이제 정히 가시겠다면 나으리께오서 소첩의 젖꼭지 하나를 칼로 베어내고 떠나시오소서.”
  •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영국 출신의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어려서부터 척추질환으로 고생했고 또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그는 일생을 여행과 저술에 바친 타고난 여행가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첫 여성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미국의 로키산맥을 등정했고, 일본 홋카이도와 서말레이시아 지역을 여행했다. 티베트와 인도의 라다크, 페르시아와 쿠르디스탄의 사막, 나아가 조선반도까지 두루 돌아다녔다. 중국 여행에 나서기 전 조선을 둘러보고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으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비숍이 중국인의 삶의 터전이자 역사의 현장인 양쯔강 유역 탐험에 나선 것은 예순 일곱살 때였다. 배를 타거나 가마에 몸을 의지하고, 노새조차 다니지 못하는 산간에서는 끝없이 다리품을 팔며 그는 상하이에서 항저우를 거쳐 쓰촨성의 성도(省都) 청두를 지나 충칭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김태성ㆍ박종숙 옮김, 효형출판)는 비숍이 이처럼 중국 내지를 허위단심으로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경험을 정리한 책이다.100년 전 유럽 열강의 다툼 속에 혼란스럽던 중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리적 특성과 자연환경을 비롯해 화폐가치와 교역량, 각종 수상 교통수단, 음식·장례문화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정치하고 세련된 맛은 없지만 생생한 인문지리서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2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325)-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25)-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고반(考槃). 이는 은둔할 곳을 마련하여 유유자적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또 한편으론 쟁반을 두드리면서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행위를 말함이다. 퇴계는 이를 ‘은둔하는 높은 선비가 강의하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단양에 군수를 하고 있을 무렵 바로 고반을 꿈꾸고 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환향하여 도산서원을 짓기 시작하였던 것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고반’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도산서원을 ‘고반’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10년에 걸쳐 60세에 도산서원을 완성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위벼랑에 꽃은 피어 봄날은 고요하고 새는 시냇가 나무 위에서 울고 물결은 잠잠하구나. 우연히 젊은 제자들과 산 뒤를 돌아서한가로이 산 밑에 이르러 고반을 찾노라.” 퇴계에 있어 성현, 특히 공자의 가르침은 인생의 교훈이었다. 따라서 퇴계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성인이 가르침을 줄 때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성인의 말씀은 저와 같고 나의 생각은 이와 같다면 이것은 곧 나의 노력이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이처럼 성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욕망을 경계하였으며, 내면의 마음을 바로잡고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퇴계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또한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고반을 꿈꾸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이상향(理想鄕)이 바로 도산서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을 도향은 눈치 채고 있었다. 두향은 퇴계가 풍기의 군수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반을 짓고 은둔생활을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향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것 역시 시경에 나오는 다른 노래였으나 이는 먼저 번의 노래보다 더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노래였다. “즐겁게 산골짜기에 숨어 지내니, 큰사람의 너그러움이라./갈대는 우거지고 흰 이슬 서리되었네. 사랑하는 우리 님은 강 건너에 산다네./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물굽이를 건너자니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넓은 여울로 건너자니,/강 가운데 멎겠구나.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이 뜻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이 뜻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考槃在澗碩人之寬 兼假蒼蒼白露爲霜 所謂伊人在水一方 碩人之寬遡廻從之 道阻且長遡遊從之 宛在水中央獨寐寤言 永矢勿暄永矢勿暄)” 노래를 부르던 두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췄다. 그 대신 가녀린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두향의 노래는 상사별곡이었다. 사랑하는 님이 지척지간인 강 건너로 떠나간다 하여도 찾아가려면 험한 길이 멀기도 하고 여울을 건넌다고 하더라도 강 가운데서 멎을 수밖에 없음을 탄식하는 이별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 한번의 별리로 영원히 끊어지게 될 것이며, 이제는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잊지 않음을 맹세하는 단심가(丹心歌)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향은 흐느낌을 애써 자제하고 있었다. 퇴계 역시 입을 열어 두향의 슬픔을 달래지 아니하였으나 퇴계에 있어서도 이별은 살을 찢는 고통이었다.
  • [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중등학교 시절, 우리 세대가 자주 외우던 시조 가운데 고려말의 충신, 포은(圃隱) 선생의 ‘단심가(丹心歌)’가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인용하자면 “이 몸이 죽어죽어 일 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내용으로 가히 섬뜩한 공포감을 자아내게 할 만큼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시조였다. 이 무렵의 우리들은 선조들의 이같은 충절의 미덕을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마치 왕이나 국부처럼 칭송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충절에 대한 이 맹목적 흠모의 교육 탓일까. 오늘의 대통령을 포은이 노래한 봉건 왕조의 왕으로 착각해서인지 몇 주전 노무현 대통령과 국민의 대표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노인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는 해프닝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다. 오늘의 가치관에서도 충절이란 물론 존중되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국민에 대한 것이지 한 특별한 개인에 대해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국의 대통령도 허물이 있거나 국가 이익에 심각하게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이다. 충절이란 존중되어야 할 덕목이긴 하지만 이렇듯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 때문일까. 유럽사람들과 달리 우리들은 충(忠)뿐만 아니라 충에 유사한 행위들도 유달리 높이 사는 관습적 사고에 젖어 살고 있는 듯하다. 그 중 하나가 ‘소신’이라 부르는 어떤 정신자세이다. 오죽하면 ‘소신에 죽고 산다.’는 말까지 생겼으랴. 물론 소신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정당하고 올바른 신념에 대한 소신은 가능한 한 실천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충절이 그러하듯 소신 또한 한사코 고수하는 일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의 시대-민주주의 시대-가 그러하다. 봉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한 개인의 통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 모두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 구성원 각자가 지닌 각기 다른 생각, 다른 신념들이 조정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성원을 구성하는 각자는 그 지적 수준, 정서적 감수성, 인격, 능력, 성별이 어떠하든 모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 판단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 참여자의 한 사람일 뿐인 어떤 자가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무작정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려 한다면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하물며 그 같은 소신을 가진 자 바로 인간이며, 하늘 아래 인간이란 그 누구든 완전치 못함에랴. 최근 우리 사회에는 이렇듯-그 주장하는 바 신념이 옳든 옳지 않든-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만의 소신을 관철하려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엊그제 아수라장이 된 민주노총 총회가 그러하고, 몇 주전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건설을 중지하라며 한 스님이 죽기 살기로 벌였던 단식투쟁이 그러하고, 몇 달전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반대, 마치 종교 의식처럼 전국토를 종단하여 포퓰리즘에 불을 지른 종교인들의 삼보일배가 그러하다. 그들의 상대가 어떤 태도로 그들을 대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들의 주장이 과연 최선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소신을 무작정 관찰하려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 누구나 귀를 활짝 열고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에 의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옛 성현도 말하지 않았던가.“귀 있는 자 들어라.” 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 儒林(297)-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7)-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두향의 무덤은 비록 쑥대밭 숲에 파묻혀 있기는 했지만 봉분의 규모가 제법 커서 그 형태가 아직도 뚜렷하였다. 나는 무덤 앞에 서서 측은한 감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살아서는 기생인 까닭에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아왔던 두향. 그러면서도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깨끗하게 지켜나가면서 난초와 매화를 사랑했던 두향. 그러기에 퇴계와 같이 청아하고 진실했던 학자만을 사모했던 두향. 퇴계를 일편단심으로 사모하면서도 메아리 없는 사랑으로 종신수절한 두향. 그 두향이 지금 이곳에 사백여년간이나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에 사무치는 비장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기생의 몸이면서 정신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 사람의 남성을 위해 한평생을 한 포기의 난초처럼 고요와 침묵으로 보내다가 깨끗하게 죽어간 두향. 그녀의 무덤은 지금도 남한강변 강선대 옆 쑥대밭 속에 누워 있다.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으니 벌초를 해 줄 사람도 있을 리가 없어서 봉분 위에까지 쑥대가 한 길이 넘도록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생전에 정성스럽게 가꿔 오던 난초와 매화는 무주공방(無主空房)에서도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듯이 그녀의 육신은 이미 썩어 진토가 되었어도 그녀의 이름만은 아직도 끊임없는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산(鷺山)도 단양을 지나면서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지 않았던가. “내 비록 풍류랑(風流郞)은 아닐지언정 두향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못 놓고 가는 것이 어떻게나 서운한지 모르겠다.” 작가 정비석이 인용하였던 노산의 기행문은 바로 ‘가고파’와 ‘성불사의 밤’으로 유명한 시조시인 이은상(李殷相)을 가리키는 것. 어쨌든 정비석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두향의 무덤은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정비석은 두향의 무덤 앞에 표석(表石)을 세워준 최초의 제주(祭主)였다. 이때의 심경을 정비석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무려나 두향의 무덤은 쑥대밭 속에 파묻혀서 머지않아 망실되어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영고성쇠는 우주운행의 섭리이고 보니 두향의 무덤인들 어찌 망실의 운명을 면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퇴계학이 날로 빛을 더해가고 있는 이때에 비록 그늘의 여인이었다고 해서 두향의 무덤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두향의 무덤을 바라보며 창연감(然感)을 금할 길이 없어 봉분 위에 표석이나마 하나 세워주도록 촌민에게 몇 푼의 돈을 주어 신신당부하고 귀가길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문득 원로작가 정비석의 따뜻한 마음에 가슴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펜이 과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글을 쓰는 내 마음속에 항상 자리잡은 화두이지만 이처럼 휴머니즘의 작가정신은 사라져 가는 역사를 복원하고 잊혀진 인물을 되살리고 있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명기 두향의 무덤이 유실되지 아니하고 이처럼 보존되고 있음은 정비석만의 공이 아니다. 한일합병 전까지는 퇴계의 제자였던 이산해(李山海)의 가문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내옴으로써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산해는 임진왜란 때의 영의정을 지낸 명신인데 그와 두향과의 인연은 이산해의 아버지였던 이지번(李之蕃)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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