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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협 “오늘부터 오전만 진료”

    대한의사협회 의쟁투 중앙위원회는 17일 회의를 열고 국회 보건복지위 6인소위가 확정한 약사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뜻으로 전국의 개원의들이 18일부터 22일까지 오전 진료만 하도록 결정했다. 또 의쟁투 중앙위원들과 각 지역별 시군구 의사회장 및 집행 간부들은 18일부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대한 전공의협의회 집행부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단식농성를 갖기로 했다. 이와 함께 각 시군구 의사회별로 18일 오후 비상총회를 가진 뒤 오는 23일국회의 약사법 개정에 대한 시정 촉구를 위해 전국의사 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송한수기자 onekor@
  • ‘原電 건설’맞서는 시민과학자의 삶

    장래가 촉망되던 핵과학자에서,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과학자 겸 시민운동가로 탈바꿈한 다카키 진자부로(高木仁三郞·62).‘시민과학자로 살다’(녹색평론)는 그가 털어놓은 인생철학이다.생태계 파괴 위험 등 원자력의 문제를적시하면서 “‘원자력’이라는 전차에서 내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양식에 대한 총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도쿄대에서 핵화학을 전공,잘 나가던 그가 35세 때인 73년 도쿄도립대 교수직을 내던진 것은 대학이나 기업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시민의 과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원자핵연구소 근무 당시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면서 핵실험의 산물인 ‘죽음의 재’ 성분이 어디에서나 검출되는 것을 보고 지구오염을 실감했다.이타이이타이병 등 공해사건에 대해 기업이 자료를 감추고,조사에 참가한 과학자들도 대부분 풍토병 등을 내세워 기업을 옹호한데 대해 강한 분노를 느꼈다. 나리타(成田)공항 건설에 반대,불도저에 맞서 자신의 몸을 사슬로 나무에 묶고 저항한 산리즈카(三里塚) 농민들의 모습에 감명받았다.푸른 들을 파괴하고 공항을 세우는 것보다 농민들이 대지에서 농사짓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75년 9월 원자력자료정보실을 창설,시민과학자 활동을 시작했다.미하마 원전 1호 원자로 연료봉 절손사고를 은폐된지 3년여만인 76년 제보를 통해 밝혀냈으나 시효가 지났다는 말 뿐이었다.미국 스리마일섬의 원전(79년)과 옛소련의 체르노빌 원전(86년) 대참사는 현대문명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게 했다.원자로의 안전신화를 깨뜨리는 사건들이었다.주민들이 원전 건설에반대하는 것은 보상금을 올려 받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고매한 분들의 말이신뢰성을 잃는 순간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재처리한 플루토늄 반입에 항의,93년 일본 과학기술청 앞에서 단식투쟁하며 ‘플루토늄에 미래는 없다’는 탈 플루토늄선언을 했다. 두차례나 암수술을 받고 죽음을 예감하며 쓴 이 책에서 그는 “체념은 현재의 위기를 방관할 뿐 아니라 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며 희망을 잃지말자고 말한다.다카키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도 열중이다.반핵운동가인 김원식씨 옮김.7,000원. 김주혁기자 jhkm@
  • 6월4일 中 天安門 사태 11주년/ 현주소

    6 ·4 톈안먼(天安門) 사태 11주년을 이틀 앞두고 재평가와 책임자 처벌을요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왕훙쉐 등 반체제인사들은 톈안먼사태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공개 탄원서를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 등 중국 지도층에게 보냈다.톈안먼의 어머니 ‘딩즈린(丁子霖)전 중국인민대 교수를 비롯한 6·4 유족108명이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에 대한 형사고발안 신속처리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은 보내 중국 사법당국의 대응이 주목된다. 하지만 이같은 연례적인 재평가 요구운동 이외에 올해에는 사회 곳곳에서예년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임박하면서 사회·경제·정치개혁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중국 관료 출신으로 현재 연구소를 운용하는 리판은 “WTO 가입은 개혁과 개방을 의미하며 이는 언론의 자유를 확대시킬 것이다.더 많은 자유는 민주주의의 가속화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이는 중국 지도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경제개혁은 가속화시키되 정치개혁에는 난색을 표하며 정경분리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중국 당국은 지난달 말부터 사회주의 이념을재무장하기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이미 정치·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나섰다.또 지식인층에 대한 ‘옥죄이기’에도 들어갔다. 장쩌민 주석은 지난달 말 상하이와 장쑤,저장성 등 동부지역을 순시하면서서서히 밀려오는 서구화 물결을 경계하는 연설을 했다.그는 “민간사업 부문을 위한 당 대책기구 구성은 전혀 새로운 일”이라며 서구문명의 창구 역할을 하는 민간 부문에 대한 통제를 강조했다. 중국 당국은 또 정치·사회 민주화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배포하면서 이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했다.외신에 따르면 현재 민영화와민주적 개혁을 지지하는 8명의 지식인들 명단이 돌고 있고 최근에 17명의 이름이 추가돼 출판사와 언론사에 배포돼고 있다고 전했다.이들의 책이나 글이일반인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중국 당국이 언론과 지식인층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목소리가 다소 잦아들기는 했다.그러나 국제 전문가들은 중국 당국이 정보화와 시장개방이 가속화되면 언제까지 이같은 방법으로 중국인들의 민주화 요구를 잠재울 수 있을 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6·4사태와 관련 213명이 복역중이다. 김균미기자 kmkim@. * 텐안먼(天安門) 사태 당시의 주역들 어디서 무얼하나. 89년6월4일 텐안먼(天安門) 시위를 이끌었던 반체제 주역들의 현주소는 11년이 지난 지금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아직도 반혁명분자의 꼬리표를 달고 수감중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국으로망명해 유학하거나 첨단산업에 종사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이 사태 진압 직후 수배령을 내린 21명의 학생지도자중 서방에 망명한인사는 류강(劉剛·38)을 비롯해 12명.중국에 남은 9명중 2명은 수감중이며나머지 7명은 당국의 감시 속에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거나 행방이 불확실한 상태다. ‘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 역사학과생 왕단(王丹·31)은 6년5개월간의 복역 끝에98년5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매년 6월이면 민주화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여온 그는 96,97년 연속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됐다.지난달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의 취임식 참석 여부를 놓고 중국을 긴장시켰으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수배 2호’였던 시위대 대표 우얼카이시(吾爾開希·32)는 중국을 탈출한뒤 미국의 한 중국어 방송사에서 일하다 타이완 여자와 결혼,미국과 타이완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다. 96년5월 홍콩으로 탈출한 뒤 미국에 망명,중미관계를 불편하게 했던 류강(劉剛)은 뉴욕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여학생 지도자 차이링(紫玲·33)은 미국에서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으며 보스턴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 남은 학생지도자중 왕여우차이(王有才·34) 등 2명은 현재도수감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간첩혐의 쿠바외교관 FBI에 강제출국당해

    [워싱턴 AFP AP 연합] 미국 당국으로부터 간첩혐의로 출국령을 받은 쿠바외교관 호세 임페라토리가 26일 밤(이하 현지시간) 미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 의해 연행돼 강제출국당했다. 출국명령에 불복한 채 단식투쟁을 선언했던 임페라토리는 자택에서 자신의변호사와 함게 FBI 요원들의 동행 요구에 순응,대기중이던 차량에 탑승했다. 미국 관리들은 임페라토리가 탄 차량이 버지니아 교외의 레이건 공항으로향했으며 임페라토리는 공항에서 미 정부 항공기편으로 몬트리올로 간 뒤 27일 오전 아바나행 항공기에 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팔려가는 당나귀의 교훈’

    ‘팔려가는 당나귀’라는 이솝우화는 나름대로의 주관과 원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이 이야기에서 당나귀 주인은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듣다가 결국 당나귀를 팔지도 못하고 다리 아래 물 속으로 빠뜨려 버린다.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줏대없는 당나귀 주인을 마음놓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나름대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고 그 틀을 지켜가야 하는 공직자들로서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항상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부조직과 행정행태도 많이 달라졌다.정부조직이 통폐합되고 공무원의 수도 상당수 감축됐다.규제개혁을 통해 민간부문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중앙정부의권한을 지방정부에 이양하거나 민간기관에 위탁했다. 중요한 정책결정을 할 때는 국민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노력을 하고있고 실제로 민의를 반영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이런 경향은 시민사회가성숙되면서 많은 시민단체들이 생겨나고 또 이들이 정부 정책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하면서 가속화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 제도 개선,4차 국토계획 수립,영월댐 건설 문제 등은 시민단체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국토관리·도시·주택·교통·물 문제 등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설교통부의 소관 분야는 시민단체의 참여가 매우 긴요하다.분야별로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시민단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과학적인 논리를 제시하며 주장하기도 하지만,때로는 집회·시위·단식투쟁과 같은 과격한 방법을 통해 주장하기도 한다. 정부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행정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들로부터 가급적 많은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고 그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그러나 정부가 전체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릴 때 국민은‘팔려가는 당나귀’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직자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균형감을 가지고 지켜야 할 원칙을 분명하게 지켜나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아울러 내 목소리를크게 내세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전체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이웃들이 많은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李建春 건교부장관
  • “통합방송법 이번엔 꼭”국회통과 역량 총결집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합방송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 시민 사회 언론단체들이 정치권 및 언론계의 이해다툼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통합방송법의 국회통과를 위해 마지막 결의를 다지고 있다.시민 사회단체들은 지난 10월 1일 ‘민주방송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상임대표 김중배)를 구성한 뒤 다양한 활동을 벌이며 정치권 압박 등에 힘을 쏟고 있다.특히 23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집회를 갖고,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상임위활동이 끝나는 오는 26일까지 2차 농성에 들어가기로 하는 등 전의를 다지고있다. 국본은 지난달 13∼18일 명동성당에서 1차 철야농성을 벌인데 이어 19일 여의도에서 ‘민주적 통합방송법 제정 범국민 결의대회’를 통해 단식투쟁,총파업을 선언하는 등 강도높은 2단계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달 11일부터 전국 32개 지역에서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여온 국본은 정기국회 회기가 끝나는 12월 18일까지 서명운동을 비롯,대규모 단식농성 등을 계속한다는 계획이다.따라서 국회 회기 막바지까지 통합방송법 제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방송노조들의 총파업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국본의 움직임이 이처럼 극에 달한 것은 정치권이 통합방송법 제정 의지는보이면서도 관련 정책에서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동안 논의를 거듭해왔던 방송정책권의 방송위원회 이관 및 KBS 집행위원회의위상 등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한나라당은 아직도 서로에게 유리한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국민회의 관계자는 “방송정책권 등 지난 8월 심의때 합의사항들이 각 당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다시 도마위에 오르고있다”면서 “이대로라면 정기국회내 통합방송법의 통과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본은 또 최근 벌어진 옷로비,언론문건,1만달러 수수 사건 재수사 등으로파행국회가 계속되면서 통합방송법 등 개혁입법의 처리가 매우 불투명해졌다고 지적했다.국본의 한 관계자는 “통합방송법은 인권법,교육개혁법 등 다른 개혁입법보다 제정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파행과 끊임없는 의견차이로 앞날이 어두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본은 27일 국회앞에서 10여개의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통합방송법 등 8대 개혁입법 촉구 연대집회를 갖는 등 방송법이 제정될 때까지 대규모 연대투쟁을 벌일 계획이다. [김미경기자]
  • [21세기는 여성시대] 1. 정치지도자(상) 여왕‘대통령

    ‘여성성(性)의 회복’이 21세기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전쟁과 폭력과 살상으로 점철돼온 20세기의 인간성을 지배해온 것이 ‘남성성(性)’이었다는데서 오는 자성의 소리가 높기 때문이다.“20세기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여성해방의 시작과 남성우위의 붕괴”라고 에리히 프롬도 일찌기 설파했듯이 21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새로운 성(性)패러다임의 변화임을 예측하기어렵지 않다.대한매일은 이 새로운 성패러다임의 예측을 위해 20세기 각분야에서의 전현직 세계여성지도자들의 소개와 여성운동의 현주소 등을 시리즈로기획,‘여성성’의 실체를 다양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이해심,인내심,공평성 등 대부분 모성애의 특성으로 표현되는 여성성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분야로는 정치분야가 꼽힌다.20세기 인류사회에 저질러져온 전쟁과 폭력과 살상의 대부분이 바로 정치적 결단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 200여개의 국가 가운데 여왕이나 여대통령을 국가수반으로 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7개국,2차세계대전 이후로부터 따지면 모두 44명에 달한다.한편 여성총리는 모두 22명이고 그 가운데 현직은 3명이다. 이같은 수치는 2차대전 이후 세계 정치지도자의 총 수가 1,200여명 이라는통계와 비교해볼때 0.5%의 지극히 미미한 비율이다. 수반이 아니더라도 국회의원 등 일반 정치인의 비율에 있어서도 여성 비율은 현저하게 떨어진다.1998년을 기준으로 여성의원 비율이 가장 많은 국가는 스웨덴으로 40.4%,다음은 노르웨이 39.4%로 대부분 북유럽 국가들이 높은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인도네시아 12.6%,필리핀 11.5% 등 아시아국가들은 현저하게 낮고 민주주의의 선도국인 미국도 12.6%에 불과하다.한국의경우는 더욱 떨어져 3% 정도 수준이다.따라서 유엔개발계획(UNDP)이 계량화한 여성세계화지수 순위가 한국은 정치·경제발전에 훨씬 못미치는 73위에머무르고 있다. 현직 여성 국가수반 가운데 그 상징성이나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은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73).52년 2월 부친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윈저가의 네번째 왕으로 즉위한 그녀는 15개 영연방국의 상징적 국가원수이며 세계 최장수 여성 국가원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59)는 72년 즉위 이래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부친 프레데릭 9세의 뒤를 이은 그녀는 옥스포드 고고학박사이자 화가로 다재다능함을 뽐내고 있다. 네델란드 여왕 베아트릭스(61)는 80년 4월 어머니 줄리아나 여왕에 뒤이어등극했으며 1890년에 등극한 외할머니 빌헬미나 여왕 등 3대 여왕으로 유명하다. 현직 여성대통령으로는 스리랑카의 찬드리카 쿠마라퉁가(54),아일랜드의 매리 매컬리스(48),라트비아의 바이라프라이베르카(62),파나마의 미레야 아리아스(53) 등이 있다. 쿠마라퉁가는 어머니 반다라나이케가 현직 총리로 있어 모녀정치인으로 유명하며 88년 야당당수 이던 남편 암살 이후 정계에 투신했다.매컬리스는 매리 로빈슨전대통령의 후임으로 최초로 여성끼리의 지도자교체 사례를 남겼다. 프라이베르카는 의학·심리학 박사학위와 5개 외국어를 구사하는 석학인 동구 최초의 여성대통령.지난 9월1일 취임한 아리아스 대통령은 사망한 전대통령 아르눌포 아리아스의 미망인으로 올 연말 미국으로부터 파나마 운하를 이양받는 대역사를 앞두고 있다. 라윤도 국제팀장 ranuma@ * 여성해방 운동사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권리찾기에 나선 것은 20세기가 다되어서였다. 그 이전까지 여성의 지위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남성에 예속된 신분이거나 아니면 소외된 계층,그 자체였다.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페미니스트 운동의 결정적 동기부여는 여성들의 참정권과 함께 재산권 획득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실제 서양 여성운동사에서 페미니즘의 기원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중산층 여성들이 자유주의적 신념을 자신들의 권리신장과 연결시키기시작한 1840년대를 기점으로 한다. 재산권의 평등한 향유라는 목적으로 시작된 중산층 여성들의 페미니스트 운동은 이후 공창(公娼)제도 폐지,반음주,반폭력 등 가정내 여성을 위협하는남성적 악의 척결이라는 사회정화 페미니즘 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미국에서 1839∼98년 사이 금주령을 투표로 통과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참정권 획득의 캠페인을 광범위하게 벌였던 사실은 대표적인 예이다. 참정권 문제가 지상최대의 과제였던 19세기 후반의 여성운동은 영국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단식투쟁을 벌이고 창문을 부수는 등의 폭력성을 띨 정도로 과격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영국은 20세기초인 19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미국 역시 1920년에야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서구 각국에서는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법적평등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이를 정점으로 페미니즘 운동도 서서히 침체국면에 들어가면서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대공황기때인 1930년대는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을 훔쳤다는 원망까지들으며 미국 등지에서는 반(反)페미니즘 분위기가 팽배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진보적 여성해방운동’ 또는 ‘전투적 페미니즘’ 이름으로 새로운 여성운동이 일기 시작했다.특히 래디칼 페미니즘을 주도한 미국의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은 강간,아내구타,어린이 성폭력,낙태 합법화,동성애 등을 여성해방운동의 주제로해 또다른 차원의 여성권리를 앞세웠다. 20세기말,확대된 여성해방운동의 이념은 이제 정치·경제 영역뿐 아니라 사회 각 영역의 대안적 사유방식으로 자리잡으며 서구뿐 아니라 제3세계까지도확대되고 있다. 이경옥기자 ok@ * 세계 여성해방운동 주요연표 ▲1848 세계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미국 세네카 폴즈 개최.▲1903 영,여성 사회정치연합(WSPU) 창설.▲1918 영,여성 참정권 획득.▲1923 미,전국 여성당헌법 수정안(남녀 평등권) 의회 제출.▲1936 미,산아제한 합법화.▲1949 프,시몬 드 보봐르 ‘제2의 성’ 출판.▲1950 미국의 여성취업률 30%.▲1960 미,식품의약국(FDA)산아제한용 피임약(필) 인가.▲1963 미,여성운동의 어머니베티 프리던 ‘여성의 신비’출판.▲1964 미,시민권리법안 제정-EEOC(고용평등기회위원회)설립.▲1966 미,최대의 여성조직인 ‘NOW’ 베티 프리던에 의해 조직.▲1968 미,‘뉴욕급진여성’단체 미스 아메리카대회 반대 데모.▲1973 미,대법원 임신중절권 합법화.▲1988 바버라 해리스 신부,최초의 성공회여성주교로 서품.▲1995 제4차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 [제2공화국과 張勉](14)분출하는 욕구(中)/교원노조

    4월혁명후 활발해진 각계의 움직임 가운데 노동운동은 특히 두드러졌다.이승만(李承晩)정권에서 체제유지의 첨병 노릇을 한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등 기존의 노동관련 단체들은 급속히 그 힘을 잃어갔다.반면 노동조합을 비롯한 새로운 노동조직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고 쟁의도 크게 늘어났다. 4·19직전 전국의 노동조합은 621곳,조합원은 30만7,000여명이었다.하지만다섯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60년 9월1일 현재 조합 수는 821군데로 32.2%,조합원 수는 33만3,000여명으로 8.6%가 각각 늘어났다. 노동쟁의도 1958년에 50건,59년에 109건이던 것이 60년에는 218건으로 급증했다.노동운동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활력을 보인 것이다. 그 격렬한 흐름 속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교원노조 운동이었다.교직(敎職)이 갖는 가치지향적 성격에,학생·학부모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도 컸지만 무엇보다 교원노조가 합법성을 얻고자 벌인 투쟁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이다. 교원노조 운동은 4월혁명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된다.대구에서는 4월29일 경북여고에 중고교 교사 60여명이 모여 학원 자유화와 교사의 권익옹호를 위해 ‘교원조합’을 결성키로 합의한다. 이어 ▲5월1일 동성고에서는 ‘서울시 교원노조결성 준비위원회’가 ▲5일에는 전주고에서 교원노조가 ▲12일에는 부산 동광초등학교에서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각각 출발한다.5월 말이면 학교 단위로,또는 시·군 단위로 교원노조가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지 한달만에 이처럼 교원노조가 전국적으로 자생하게된 토양은 무엇일까.그것은 ‘속죄와 책임의식’이었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독재권력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우는데 그들을가르친 교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그리고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저지를지도 모르는 권력 앞에 무방비로 있을 수는 없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사실 ‘3·15부정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정권이 교육계에 저지른 만행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교육감·교장들이 나서 교사들을 자유당 비밀당원으로 입당시킨 일은 기본이었다. 환경미화를핑계로 이승만·이기붕(李起鵬)의 사진,업적을 교실에 장식토록해 그 결과로 교사의 근무성적을 평가하거나 ▲교장·교감이 가정방문에 나서 자유당후보 지지를 직접 호소하고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켜 이승만을찬양토록 하는 일들이 예사로 벌어졌다. 교육계 지도자들도 총동원되다시피 했다.60년 1월26일자 서울신문 1면에 난자유당의 ‘정·부통령선거중앙대책위원회’공고를 보면 지도위원에 백낙준(白樂濬)김활란(金活蘭)임영신(任永信)김연준(金連俊)유석창(劉錫昶)등 사학(私學)의 거물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을 정도였다. 교원노조 운동은 60년 7월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총련)’를결성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통일된 체제를 갖춘다[별표 참조].이때 노조에 참여한 교사는 이미 1만9,883명이었다.교조총련은 위원장 자리를 당분간 공석으로 두는 대신 서울지구 부위원장인 강기철(姜基哲)을 대표로 지명했다.얼마전 타계한 재야인사 계훈제(桂勳梯)도 서울지구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정부측 대응도 곧바로나왔다.허정(許政)과도정부의 이항녕(李恒寧)문교차관은 “교원노조 결성을 권장하지도 막지도 않겠다”고 밝혔다.그러나 곧이어 이병도(李丙燾)문교장관은 5월19일 “교원노조를 불허한다”고 신문지상에 발표했다. 교원교조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이 곧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교사들은 53·57년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근거로 ‘합법’을 주장했고 대한변호사회도 이를 지지했다.‘7·29총선’을 앞둔 민주당의 장면(張勉)주요한(朱耀翰)조재천(曺在千)등 신파 지도자들도 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교원노조와 행정권의 정면충돌은 60년 8월 대구에서 발생했다.조준영(趙俊泳)경북지사가 대구·경북의 노조간부 25명을 산간벽지로 전근시킨 것이다.대구·경북 노조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8월25일 오후6시 조합원 8,000명 전원이 퇴직한다’는 마지노선을 확정한다. 조합원들은 11일부터 연좌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16일에는 경북지사의 부당한 인사조치를 중단시켜 달라는 ‘행정처분 집행정지명령 가처분신청’을 대구고법에 냈다. 이 와중인 8월23일장면내각이 정식 출범한다.교조총련의 강기철 대표를 비롯한 수뇌부는 오천석(吳天錫)문교장관,윤택중(尹宅重)문교부 정무차관과 협의를 계속한다. ‘교사 8,000명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러나 의외로 손쉽게 해결된다. 교조가 정한 시한인 8월25일 대구고법이 경북지사의 인사가 잘못됐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그 이유는 ▲교원노조 결성이 합법이며 ▲경북지사의 인사권 행사는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것으로 판정했기 때문이다. 이 사태후 장면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교직단체법 개정’을 통해 교원노조 운동의 흐름을 바꾸려고 애쓴다.그렇지만 교원노조는 9월 말 단식투쟁에 돌입해 결속을 과시한다.교원노조 운동은 1960년 당시 한국 노동운동을대표했다.이 운동은 ‘5·16쿠데타’후 사실상 사라졌다가 결국 1980년대 ‘전교조운동’으로 되살아난다. 이용원- 교사40%가 자발적 참여 교원노조 운동에서 노조를 대표한 인물은 강기철(姜基哲·74·전 평택대교수)씨.강씨는 1960년 7월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총련)’가 발족할 때 대표를맡았다.그는 ‘5·16쿠데타’로 교조총련이 용공·불법 단체로 낙인 찍힌 다음에도 지금까지 그 대표직을 유지해 왔다. 강대표는 교원노조가 설립될 당시 한양대 강사였다.그는 “‘3·15부정선거’당시 교육자는 독재권력의 하수인 내지는 시녀 노릇을 해왔다”면서 그 당시를 “정신적인 노예상태”라고 기억했다. “교원노조는 자주적인 힘으로 탄생했다”고 강조하는 그는 “당시 전국의교사가 10만명이 채 안됐는데 그 가운데 4만명 가량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강교수는 허정(許政)과도정부 당시 이항녕(李恒寧)문교차관,김학묵(金學默)보사차관 들이 처음 교원노조 결성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음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들이 입장표명을 한 지 며칠만에 현직에서 쫓겨나더라는 것. 강교수는 “장면(張勉)정부는 교원노조 운동에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고 평가하면서 “그래도 쿠데타 세력보다는 장면정부의 죄가 엷다”고 말했다. - 노조측 쟁의권 자진포기 교원노조 설립 당시 윤택중(尹宅重·86)옹은 장면내각의 문교부정무차관이었다.윤옹은 전북 학무국장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장면내각에 문교부 정무차관으로 들어갔으며 나중에 문교장관을 지냈다. 그는 교원노조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강대표 등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간부들을 만나 장면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인물이다. 윤 전장관은 “당시에도 교사들의 노동운동은 일반 노동자와는 다르다는 인식이 깊었다”고 회고했다.교사들에게 단체행동권 등을 인정하는 것은 좋으나 굳이 ‘노동조합’이란 명칭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반감이 있었다는 것. 윤 전장관은 “교원노조 대표들과 상의할 때도 일반 노동조합과는 다르다는사실에 뜻을 같이했다”고 공개하면서 “그들도 파업 등 쟁의권을 실제로 포기했다”고 밝혔다.그는 교원단체 명칭을 ‘교원노조’가 아니라 교원연구단체나 교원친목단체로 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다 ‘5·16쿠데타’를 당했다”고도 기억했다. 장면내각에 들어올 당시 신·구파 어느쪽도 아니라 중도파로 인정받은 윤 전장관은 “다만 민주당원으로서 새 정부 출범에 기여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신·구파 갈등이 혁명을 불렀다는 주장은 쿠데타세력이 조작한 명분”이라고 단정했다. 이용원기자
  • 내각제 아직은 물밑 교감만…

    22일 관심이 모아졌던 ‘DJT 삼각독대’에서는 내각제 조율은 없었다.자민련이 주장해온 ‘조기담판론’은 물건너가는 분위기다. 金大中대통령은 이날 상오 자민련 朴泰俊총재와 만났다.그 뒤 자민련 李完九대변인은 “발표할 게 없다”고 발표했다.金鍾泌총리와는 오후에 따로 만났다.당초 안건에는 내각제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金총리는 회동후 “내각제 얘기는 전혀 없었다.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朴총재와는 일본 방문 성과를 얘기했다는 게 李대변인의 설명이다. 朴총재는 언급을 피했다.金총리와는 순방외교,영호남 순회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국민회의나 자민련 모두 내각제 ‘완전한 매듭’을 미루는 인상이다.오는 25일 조기담판 시한도 자동연장될 것같다. 金대통령은 21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시간을 두고 (金총리와)원만한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혔다.이날 3각 회동도 이같은 기조위에서 “국민여론등여러가지를 감안해” 천천히 결론을 내리자는 원칙을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매듭시기와 개헌시점에서 DJP는 입장이 다른듯하다. 金대통령은 개헌 연기를 염두에 둔듯하다면 金총리측은 ‘개헌연기문제는지금 생각 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자민련은 장외에서 신경전을 폈다. 수도권 원외지구당 위원장 50여명은 이날 ‘내각제개헌실천투쟁위’를 결성했다.영·호남 일부 위원장들도 상경해 동참했다.삭발,단식투쟁 등 강경주장도 나왔다.하지만 지도부 설득에 따라 25일까지 보류했다. 이날 의원총회에서는 일부 현역의원도 가세했다.鄭一永 趙永載의원 등은 동참을 주장했다.험악한 표현도 나왔다.사실상 20일만에 출근한 金龍煥수석부총재는 “당내에 산재한 내각제 홍보문건을 하나로 통일하라”고 주문했다. 金총리의 지시임을 강조했다.
  • 안락사 ‘세기의 재판’ 2라운드

    ◎美 검찰,‘죽음의 의사’ 살인혐의 기소/“TV방영 비디오테이프가 유죄입증 확실한 증거품” 미국 미시간주 검찰은 25일 안락사 옹호론자인 잭 케보키언 박사(70)를 1급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케보키언 박사는 최근 루게릭병 말기환자를 직접 안락사 시키는 장면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아 이를 CBS TV로 반영토록해 미국 전역에 안락사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 검찰의 이번 정식 기소에는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가 결정적 ‘증거품’으로 채택됐다. ‘죽음의 의사’로 불린 케보키언은 최근 8년간 무려 120여명을 안락사시키며 수차례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됐었다. 하지만 매번 증거불충분과 함께 안락사를 금지하는 법이 없던 미시건주의 법관행에 따라 무죄 방면됐었다. 그러나 형편이 달라졌다. 예전엔 자살방조혐의였지만 이번엔 살인혐의다. 또 3주전부터는 미시건주에서도 안락사 금지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시간주 오클랜드 카운티의 데이비드 고르시카 검사는 “본인이 직접 환자에게 독극물을 투입,안락사시킨 비디오 장면은 그의 유죄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품”이라며 “이번에는 결코 살인혐의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결국 안락사 합법화를 위해 홍보용으로 찍은 자신의 홈비디오가 케보키언을 철창행으로 보내는데 가장 확실한 올가미가 될 전망이다. 앞서 케보키언은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가 방영된후 CBS TV와 가진 인터뷰에서 “만약 이일로 감옥에 가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단식투쟁을 계속할 작정”이라며 목숨을 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친바 있다. 한편 또한번 세기의 재판이 될 이번 법정 대결에서 1차 판정은 케보키언의 승리. 이날 경찰에 자진 출두한 케보키언을 오클랜드 카운티의 지방법원이 다시는 안락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75만달러(9억7,500만원)의 보석금에 석방했다. 하지만 검찰측이 강하게 반발,본격적인 법정대결은 이제부터가 될 예정이다.
  • 李基澤씨 25일만에 단식 마감

    한나라당 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61)이 13일 단식을 마감했다. ‘편파·보복사정 중단’ 등을 요구하며 지난달 19일 단식에 들어간 지 25일 만이다. 李전대행은 고대 안암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단식투쟁의 목표였던 야당파괴와 편파사정이 종결된 것은 아니지만 국회가 정상화되고 대통령이 야당과의 대화의사를 표하는 등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다.
  • 李基澤씨 무기한 단식농성/편파사정 즉각 중단 등 요구

    ◎당지도부선 악재될까 우려 한나라당 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이 19일 부산에서 열린 ‘민주헌정 수호 및 야당파괴 규탄대회’에 참석했다가 서울로 올라와 밤 11시30분부터 여의도 당사 9층에서 편파사정을 즉각 중단할 것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단식 이틀째인 20일 오전 李 전대행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무수한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처럼 야당이 일방적 매도를 당한 적은 없었다”면서 “현 정권의 ‘대중독재’를 막기 위해 역사 앞에 몸을 던지겠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지난 18일 金大中 대통령의 ‘춘천발언’과 여야 총무간 협상 재개 움직임 등으로 돌파구를 바라는 당 지도부는 李 전대행의 단식이 자칫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다. 李會昌 총재도 李 전대행에게 “상황을 봐가며 결행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단식을 말렸다는 후문이다. 李 전대행도 이를 의식한 듯 이날 “단식투쟁이 국회 정상화의 장애요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며 난국을 풀기 위해 영수회담과 여야 중진회담 등 정국 해법도 함께 제시했다. 한편 부산대회에 참석해 눈물을 글썽인 李 전대행의 부인 李慶儀씨도 지난 15일부터 엿새째 금식기도중이라고 李 전대행의 한 측근이 전했다.
  • 與·野/대치정국 전면전 치달아

    ◎여­등원 계속 거부땐 내주 법안 단독 처리/야­의원직사퇴서 당 지도부 제출… 배수진 여야의 대치정국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여권은 17일 다음주 초 경제구조조정 관련 24개 법안을 여당 단독으로 심의,처리키로 한 반면 한나라당은 金重緯 李富榮 의원에 대한 검찰소환에 당차원에서 불응키로 하고 의원직사퇴서를 써 당 지도부에 제출하는등 대여(對與)투쟁강도를 높였다. 국민회의는 이날 상오 趙世衡 총재권한대행 주재로 당3역 회의를 열어 국세청 불법모금 사건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척결되고 관련자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이 끝내 국회 참여를 거부할 경우 자민련과의 협의를 거쳐 내주부터 여당 단독으로 경제구조조정과 실업대책 관련 24개 법안심의에 들어가기로 했다. 한나라당도 이날 여의도 당사와 국회에서 李會昌 총재 주재로 주요 당직자회의와 의원총회를 차례로 열어 金重緯 李富榮 의원의 검찰출두를 당 차원에서 거부키로 했으며 의원직 총사퇴서를 지도부에 제출하는한편 ‘야당파괴 저지를 위한 1,000만명 서명작업’에 들어갔다.이날 의총에 참가,사퇴서를 지도부에 맡긴 의원은 110여명에 달했다. 한나라당은 여권의 ‘야당파괴’ 작업이 계속될 경우 의원직 총사퇴와 단식투쟁 등으로 투쟁강도를 높여 나가기로 했다.또 18일 울산시지부 사무실에서 야당파괴저지 현판식을 갖는데 이어 19일 하오 부산역 광장에서 ‘야당파괴저지 부산·울산지역 합동 규탄대회’를 열어 강경 대응키로 했다.
  • 한나라 “사정 급류 제동” 배수진/의총 의원직 총사퇴 결의

    ◎일부선 시기상조론/“투쟁의지 강조” 대세/제출 가능성은 희박 한나라당이 17일 벼랑끝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의원직 총사퇴 결의로 ‘야당 사수(死守)’를 위한 배수진을 쳤다. 소속 의원들은 국회 146호실에서 열린 의원총회를 통해 “규탄집회나 서명운동만으로는 야당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각각 의원직 사퇴서를 작성,지도부에 맡겼다.국회 제출 시기는 당 지도부에 위임했다.“야당 파괴가 멈추지 않으면 적절한 시기에 결단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睦堯相 李康斗 의원 등은 “다음주 서울규탄대회 이후로 미루자”며 시기상조론과 단계별 투쟁에 무게를 뒀다.반면 河舜鳳 金浩一 金文洙 洪準杓 權琪述 의원 등이 “갈수록 탄압이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해 대세를 탔다.安商守 대변인은 “국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야가 국정을 함께 논의하고 권력 분립 원칙에 따라 대통령을 견제,균형을 유지하는 등 본연의 임무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하오 5시 현재 사퇴서를 제출한 의원은 총 138명 가운데 110여명.외유 및 와병중이거나 지역구에 내려간 의원 등에게도 조만간 사퇴서를 제출받기로 했다. 그러나 지도부가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정식 제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퇴서의 지도부 위임 자체가 사정(司正)정국에 제동을 걸려는 정치적 제스처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安대변인도 “투쟁의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여지를 남겼다. 앞서 李會昌 총재는 인사말에서 “어중간한 타협을 위한 대화나 하나를 잃고 둘을 얻기 위한 겨룸은 없다.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생애를 명예롭게 던질 각오가 돼 있다”며 단식투쟁 의사를 내비쳤다.토론에서는 소속의원 전원의 단식투쟁 필요성도 제기됐다. 특히 睦堯相 의원은 “어제 대구지검 姜信旭 검사장에게 金重緯 李富榮 의원의 소환배경을 물었더니 ‘국민회의쪽이 왜 빨리 수사하지 않느냐고 들볶고 못살게 굴었다’고 말하더라”며 “사정 칼날이 고도의 음모에 의해 작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李富榮 야당파괴저지대책위원장은 “金大中 대통령에게 이른바 ‘20억’을 전달한 金重權 비서실장등이 권력 심부에 앉아 있다”고 지적하며 강경대응을 촉구했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민주열사 열전:1­1(정직한 역사 되찾기)

    ◎재조명의 의미/이제 ‘민족대통합의 빛’으로/60년대이후 319명 희생/진상규명·바른 평가 과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질식할 듯한 독재체제의 폭압과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그들의 희생적 투쟁이 밀알이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굴절된 현대사에서 희망의 빛이었던 민주열사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노동현장에서,학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웠다.때로는 분신과 투신으로,단식투쟁으로, 시위로 독재정권과 악덕 기업주들에 항거했다.그들의 위대함은 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이익이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던 사회풍토 속에서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점이다. 민주열사들은 비겁의 사회에서 진정한 용기를,억압의 구조에서 영원한 자유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김상진 열사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할복했다.대학생이던 그는 “숭고한 피를흩뿌려 이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말자”며 노동운동에 나섰다.그리고 거대한 구조악 앞에 번민을 거듭하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 이슬이 되기 위하여”란 말을 남기고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겼다. 많은 목숨들이 이렇게 스러져 갔다.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알 수없는 의문사와 고문사도 적지않았다.주위의 외면 속에 죽어간 ‘이름없는 민주열사’들도 많았다.그들은 비록 이름없이 죽어 갔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부활됐다. 전국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가 집계한 6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열사는 319명.분신·투신·할복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치는가 하면 고문과 사건 조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또 오랜 운동과정에서 병을 얻거나 고문 후유증,불의의 사고 등으로 숨진 열사들도 있다.노동운동 와중에 92명,학생운동 과정에 60명이 숨졌고,처형이나 옥중사망,출옥후 사망자도 103명에 이른다.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은 제외하고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여전히 미미하고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金三雄 친일문제연구회 회장(서울신문 주필)은 “민주열사들에 대한 법적·도덕적 예우와 진상규명이야말로 가장 먼저 서둘렀어야할 역사적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그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희생당한 열사와 유족들에게 정부가 그동안 무엇으로 보답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도 “민주열사 의문사에 대한 망각은 정의의 망각”이라며 반드시 진상규명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민족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도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진정한 화해란 없다”고 강조했다. ◎李富榮 의원 인터뷰/“전과기록 없애 명예회복부터”/피살자 진상조사위 구성… 특별검사 둬야/과거·현재·미래 묶어 민족정통성 확고히 여야 정치권의 개혁그룹과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이 추진되고 있다.그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李富榮 의원(한나라당)에게 특별법 추진의 의미와 전망을 들어 보았다. 李의원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대표적 재야출신 인사다.부인 孫守珦씨는 고(故) 張俊河 선생의 비서였다. ­민주열사 명예회복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적으로 폭력,독재가 횡행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들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일제시대 때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선열들을 받드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고 통일된 조국의 주체가 되려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확립,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세가지 시대적가치를 고양시켜야 된다고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민주열사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이 시대에 당연히 논의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전과기록을 우선 없애야 합니다.또 민주화에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훈포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더 중요한 것은 고문에 의했건,암살당했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진상을 밝히는 것입니다.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위를 만들고 특별검사가 임명되어야 합니다.심지어 10여년전에 의문사한 사람의 사인규명이 되지않아 가족들이 유골을 묻지 못하고 집에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가족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진 사례도 있는데 국가공권력이 외면하고 있습니다.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정부라면 당연히 진상규명에 나서야 합니다. ­특별법은 언제쯤 제정되리라 예상하십니까. ▲연내에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봅니다.올 정기국회에서는 특별법을 만들어야지요.이는 새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이런 일부터 여야의 벽을 깨야 합니다.실제로 여야 의원들 사이에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여당에도,야당에도 이런 일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대화로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자는 의견도 있는데요. ▲우리 현대사는 아직도 독립운동 흐름과 친일파 흐름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민족 정통성을 세우느냐,못세우느냐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물려줄 것이냐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민주열사 명예회복이 지금의 세계화 추진과 맞부딪치는 것도 아닙니다.자기 정체성 확립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과거와 현재,미래를 함께 묶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기고/고난·희생은 위대한 유산/張琪杓 신문명정책硏 원장 한평생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옥사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그래서 사필(史筆)이 강해야 민족이 강해진다”고 설파하셨다.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으며,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국민이라야 참된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민족정체성 확립 시급 지금 우리는 IMF사태라는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신적 빈곤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오늘의 이 시기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 등 사회의 전 부문에 걸친 총체적 위기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경제성장 위주의 서구 근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8·15해방 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민족적 수치이자 민족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우리는 해방후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일만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군사독재시절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살아 있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 또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더 없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후 전세계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한 3·1 운동을 비롯하여,4·19혁명,군사독재 반대투쟁,민주노동운동,부마항쟁,광주항쟁,6월 민주항쟁 등은 민족의 위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민족적 전통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난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전통을 더욱더 값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분신자결과 고문사가 특별히 많았다는 사실이다.1970년대 이후 분신자결한 사람이 69명이나 되며 할복자결, 투신자결,고문사 등을 합하면 무려 226명이나 된다.전세계 어떤나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없다.수십년간 1,000여명의 ‘양심수’가 계속되어온 나라도 유례를 찾을 수 없거니와,특히 이념 문제 때문에 43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나라도 없다.한없이 가슴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그동안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민족도약의 밑거름이 되게 하는가는 후세 사람의 몫이다. ○왜곡 현대사 논의 물꼬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E.H.카)라는 말이 있다.역사란 과거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다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해 내는 인간의 합목적적인 행위이다.그러기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역사서술자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역사적 소명감을 가져야 바른 역사를 쓸 수 있다.특히 민족정기가 훼손될 만큼 무시되고 왜곡되어온 한국현대사를 ‘역사의 장’에 올리는 일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책임도 클 것이다.
  • 체포영장 발부는 野 파괴공작/李信行 의원 기자회견 갖고 단식돌입

    ◎국민회의 입당 타진설엔 두루뭉술 답변 배임과 횡령 등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한나라당 李信行 의원이 22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6·4지방선거를 치른뒤 검찰에 자진출두할 것이며 오늘부터 중앙당사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가겠다”는 요지다.이번 사건이 “여권의 야당파괴공작이며 6·4지방선거전략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밝혔다. 李의원은 회견을 통해 “(주)기산 사장 재직시 S개발과 C건설 등 협력업체에게 공사발주 등을 대가로 금품을 받았다는 검찰 주장은 사실무근”이라며 “회사돈을 유용,선거에 이용한 적도 결단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李의원은 국민회의의 입당권유설과 본인의 국민회의 입당 타진설의 진위를 묻자 “저쪽(국민회의)에서도 그런 의사가 있었고 저도 지역구 형편을 고려,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가 “입당제의를 받고 검토를 했으나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초라해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고 번복했다. 회견직후 서울지역 당소속 의원들은 朴相千 법무장관을 방문,“검찰의 李의원 구속방침은선거운동 핵심책임자인 지구당위원장 발을 묶고 다른 의원들을 협박하려는 행위”라며 “이는 선거법상 ‘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행위 금지’ 조항과 ‘선거의 자유방해죄’를 위반한 관권선거 획책 의도”라고 주장했다.
  • 한나라 ‘李信行 의원 소환’ 강력 반발

    ◎“선거 앞두고 氣꺾기 위한 음모” 통박/黨3역 朴 법무 찾아 “소환 불응” 단언 한나라당이 당 소속 李信行 의원(서울 구로을)의 검찰 소환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명백한 야당 탄압이자 여당의 조직적인 관권선거 음모라는 것이다.李相兆 밀양시장 후보의 구속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21일 趙淳 총재 주재로 열린 선거대책회의에서 이 문제는 핫 이슈로 다뤄졌으며,검찰소환 불응을 결론으로 채택했다. 이 자리에는 당사자인 李의원도 참석,“내가 검찰에 출두하면 구로지역 선거는 끝”이라면서 “검찰은 확인도 않고 언론에 마구잡이로 혐의를 흘려 전형적인 표적수사를 하고 있다”고 검찰에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李의원은 “검찰에는 출두하지 않겠으며,상황을 봐가며 단식투쟁이라도 하겠다”고 강경입장을 천명했다. 徐淸源 사무총장은 한발 더 나아가 “李의원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기를 죽이려는 다목적 포석”이라고 규탄했다. 徐총장과 河舜鳳 원내총무, 李祥羲 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은 회의를 마친 뒤 곧바로 朴법무장관을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金哲 대변인도 “검찰의 李의원 소환요구,金德龍 부총재 소환설 유포는 여당측의 관권선거 음모를 명백히 드러낸 것”이라면서 “특히 선거를 며칠 앞두고 지구당 위원장인 국회의원을 소환하는 것은 선거운동을 방해하고 우리당의 대국민 이미지를 먹칠하려는 의도”라고 여권을 통박했다. 일각에서는 한때 여권의 영입 대상이었던 李의원이 이를 거절하자 ‘괘씸죄’를 적용한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는다.지도부도 이같은 개연성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 與 “野 의원 4∼5명 주내 영입”

    ◎李完九·李義翊 의원 오늘 자민련 입당/野 반발… 장외투쟁 고려 국민회의­자민련 등 여권은 금주중 한나라당 의석을 과반수이하로 낮추기 위해 한나라당 일부의원들과의 추가영입 교섭을 계속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련은 지난 2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李完九 李義翊 의원을 4일 입당시킬 예정이며,국민회의도 이번주중 4∼5명을 추가영입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3일 현재 한나라당의 의석수는 총 1백50석으로 5명이 추가 탈당하면 재적의원(292명)의 과반수(146석)가 무너져 단독의결권을 상실하게 된다.국민회의의 한 당직자는 이날 “국민회의 입당을 검토중인 한나라당 의원은 서울과 인천출신 2∼3명,경기출신 2명”이라고 전했다. 한나라당은 이에 따라 여권의 ‘인위적 정계개편’을 ‘야당파괴 공작’으로 규정,강도높은 원내외 병행투쟁에 나설 방침이다. 한나라당은 제192회 임시국회를 통해 인사실책과 실업대책 미비 등 새정부의 ‘실정’을 집중 추궁하는 한편,‘야당파괴저지 1천만 서명운동’과 단식투쟁,전국순회 ‘현정부 실정(失政)보고대회’ 등 장외투쟁도 고려하고 있다.
  • 주치의(후보 프리즘)

    대선 유세가 본격화되면서 후보의 건강을 누가 체크하고 있는지,어떤 상비약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관심거리다. ◎이회창 후보/담당의사는 따로 안두고 연대 김종한 교수가 수행 이회창 후보는 별도의 주치의가 없다.몸이 무척 건강해서란 게수행측근들의 설명이다.경선때부터 하루 3∼4시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지만 감기한번 걸린 적이 없다고 윤창중 보좌역은 자랑한다.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연세대 가정의학과 김종한 교수가 매일 이후보를 따라다닌다.하지만 김교수가 갖고 다니는 왕진가방에도 소화제와 까스명수 등 기초적인 상비약만 들어 있다고 한다. ◎김대중 후보/장석일 박사가 건강 체크/성대보호에 각별히 신경 김대중 후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표밭을 누비고 있다.그런 만큼 주기적으로 주치의인 성애병원의 장석일 박사(41)로 부터 체크를 받는 등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다.장박사는 내과전문의로 지난 90년 김총재가 단식투쟁에 들어갈 때 인연을 맺은 이후 줄곧 그의 ‘건강파수꾼’역을 맡아왔다. 김후보진영이 최근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중의 하나가 김후보의 성대보호문제다. ◎이인제 후보/대학친구 의사 조언받아/건강체질로 약은 안먹어 이인제 후보는 따로 주치의가 없다.젊은 탓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주된 이유다.서민대통령을 외치는 마당에 주치의는 ‘호사’스럽지 않느냐는 생각도 있다.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인 안양에서 대학친구인 한 개업의로 부터 틈틈이 건강검진을 받았던게 고작이라는 설명이다. 이후보는 다만 선거운동의 많은 시간을 지방유세에 투입하고 있는 만큼 타고 다니는 버스안에 상비약을 갖춰 놓고 있다.소화제와 진통제,우황청심환,그리고 몇가지 구급약이다.그나마 아직껏 사용한 적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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