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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PS게임 “여전사 돌격 앞으로”

    현실 사회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여풍당당(女風堂堂)’이란 조어가 일반화됐다. 가상 공간에서 이용자 자신인 캐릭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1인칭 슈팅(FPS)’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가 잇따라 탄생하고 있다.FPS는 총격전을 통해 적을 물리치고 임무를 완수하는 게임이다. 그동안에는 남성 전유물로 여겨졌던 장르이다. 이용자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캐릭터도 남성 일색이었다. 18일 게임 업계에 따르면 올해 이미 출시됐거나 시장에 내놓을 30여개의 FPS 게임에서 여전사 캐릭터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기존에 나온 FPS 게임에는 여성 캐릭터가 추가되고 있다. 최근 여성 캐릭터가 많아지는 이유는 FPS 게임을 즐기는 여성층이 두터워진 까닭이다. 또 최근 군의 마지막 금녀(禁女)조직으로 꼽히던 학생군사교육단(ROTC)에 여성이 지원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나온다. 여성 캐릭터는 군복 차림에 매서운 눈매와 육감적인 몸매, 야무지게 뒤로 묶은 머리 등이 특징이다. 여전사의 모습이다. 종전의 캐주얼 게임에서 귀엽고 깜찍한 여성상과는 다르다. 게임하이가 개발한 국내 대표적 FPS게임 ‘서든어택’의 여성 캐릭터 ‘블랙캣’(경찰특공대 출신)과 ‘폭스리콘’(수색정찰부대) 등이 대표적이다.ID ‘늑대예융’은 “새로운 여성 캐릭터로 FPS 게임을 즐기면 새 게임을 하는 느낌이 난다.”며 “게임의 집중력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또 한빛소프트가 서비스하는 ‘테이크다운’은 남성과 여성 캐릭터 비율을 똑같이 했다. 단발머리에 감각적인 여군 복장의 ‘미건 하트’와 동양적 이미지의 ‘서영란’을 내놓았다. 여성 캐릭터의 독특한 음성도 들을 수 있다. 드래곤플라이의 ‘스페셜포스’에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SRG’는 감각적인 모습으로 남자 못지않은 장신에 특수 부대원들로 설정돼 있다. 명령 하달도 고유의 전자 장비로만 이뤄진다.SRG 요원들은 매번 작전을 마칠 때마다 새로운 국적과 이름을 받는다. 또 ‘SDU’는 짧은 머리와 구릿빛 피부의 여성 캐릭터로 날카로운 눈빛과 중성미가 돋보인다. 탁월한 사격실력과 전술적 판단 능력을 자랑하는 홍콩 경찰특공대 소속이다. 강력한 전투 라인을 구축한 이들은 스페셜포스의 여전사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권영식 CJ인터넷 이사는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던 과거 여성의 모습이 FPS 게임에서 여군의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며 “캐릭터에서 성차별이 없고, 남·여성 캐릭터의 능력치는 같다.”고 말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철학박사 가수 1호 하춘화 (2)

    가수 하춘화씨는 1955년 6월28일,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철강선 제조업체 동아제강의 설립자였던 부친 하종오씨는 한때 야당 정치에 몸담았다가 5·16 이후 서울로 무대를 옮긴다. 그때서야 둘째딸 춘화양의 노래솜씨가 주위에 소문이 나 ‘신동’이었음을 알게 된 부친은 가수 고복수씨가 운영하던 동화음악예술학원에 등록, 본격적인 노래공부를 시킨다. “춘화는 유년시절부터 놀랍게도 일본 노래, 특히 미소라 히바리 노래까지 곧잘 따라 불렀어요. 동화예술학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숙소가 있던 청진동 여관에서부터 명동의 학원까지 걸어다니면서도 단 한차례 거른 적이 없었을 만큼 매우 열정적이었지요.” 첫 독집음반을 발표하던 1961년 12월, 공교롭게도 ‘아동복리법’이 공포된다. 때문에 음반발표 가수로서 한국연예협회가 발급하는 ‘가수증´을 취득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만 14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곡예를 시킬 수 없다.’는 아동복리법 조항 때문. 부친은 ‘노래활동과 곡예는 엄연히 다른 분야’라는 청원서를 내고 결국 정회원 가수증이 발급됐다. 아울러 ‘단발머리 시대’에 초·중·고 시절을 보내며 학업과 무대를 동시에 병행했던 하춘화. 헤어스타일만큼은 늘 한결같이 ‘긴 머리’였다. 이 또한 부친의 의지였다. 그런 덕분에 하춘화의 연예활동은 가속도를 내며 ‘물새 한 마리’ ‘잘했군 잘했어’에 이어 1972년 예그린의 뮤지컬 ‘우리 여기 있다’와 영화 ‘세노야 세노야’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재능을 선보였다. 이어 ‘연포 아가씨’ ‘영암 아리랑’ ‘하동포구 아가씨’ 등 지방 소재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펼쳐진 전국 순회 ‘하춘화 리사이틀쇼’는 항상 만원사례. 아울러 TBC,MBC 10대 가수상을 연속 7년과 8년동안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부친은 주변의 시각에 대해 점차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연예활동은 학업 소홀로 이어지는, 이른바 ‘10대 소녀가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이었다. 때문에 부친은 누구보다도 엄하게 부족한 학업과 인성에 대한 교육을 하춘화씨에게 강조했다. 이 덕분일까. 하춘화는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는 가수 중 한명이다. 1972년부터 취로사업장용 손수레와 새마을공장 등에 재봉틀을 기증한 것으로 시작된 그녀의 선행은 그동안 각 단체로부터 120여차례 감사패를 받았을 정도다. 현재 국내 연예인 중 최다 봉사활동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심지어 지난 2001년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에서 1억 5000만원의 수익금 전체를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돕기 성금으로 기증했다. 그해 정부로부터 옥관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데뷔 45주년 공연에서도 개런티를 포함해 수익금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던 미담을 남겼다. 이같은 하춘화의 46년간 일거수일투족 기록을 메모해온 부친은 이를 단행본으로 발간할 예정이어서 새로운 가요비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삶

    드디어 내 인생의 봄날이 왔다면서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형형색색 꽃잎 속에 퍼지는 그녀의 노래는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형광빛 벽지에 꽃무늬 프린트 투피스, 그리고 발랄한 단발머리와 캔디 컬러 헤어밴드를 한 그녀는 온몸으로 행복을 발산한다. 몸에 걸친 의상처럼 행복한 나날들, 지금껏 지지리도 복이 없던 인생의 마침표를 찍은 듯한 순간, 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괴롭힌 세상을 왕따시킨 듯 가장 위대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전경화된다. 이 순간 그녀가 세상의 주인이며 운명의 중심인 셈이다. 화려하다 못해 맛있어 보이는 색깔 속에 자리잡은 그녀, 하지만 그녀의 일생은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 베스트10”을 꼽는다면 반드시 선택될 만한 형편없는 삶이다. 이는 대략 그녀의 삶을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부족할 것 없는 중산층 집안에 교사라는 안정적 직업을 가지고 있던 마츠코. 그런데 어느 날 제자의 도난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소한 사건이 증폭돼 마츠코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문제는 이 사건이 고작 마츠코의 험란한 일생의 제1장,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마츠코는 이 일로 인해 부모와 형제로부터도 버림받고 불행한 천재임을 자청하는 불한당에게 인생을 저당잡힌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던 남자는 결국 그녀 앞에서 처참하게 자살하고 마츠코는 마사지걸로, 윤락녀로 그리고 살인자로 전락한다. 새옹지마나 권선징악 같은 사자성어의 교훈도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듯 그녀의 삶은 계속 나빠만 진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고 바닥을 치다 보면 희망이 보인다지만, 세상사의 위로가 마츠코에게만은 다 쓸모없다. 지지리 복도 없는 마츠코의 삶에는 불행의 리스트만 업데이트될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험난한 여자의 인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조형해내는 데쓰야 감독의 시선이다.‘불량 소녀 모모코’를 연출했던 이 감독은 ‘테스’나 ‘여자의 일생’을 연상할 법한 불행한 여자의 삶을 총천연색의 몽환적 코미디로 재해석해 낸다. 곤란한 상황일 때마다 일그러지는 마츠코의 얼굴처럼 그녀의 인생은 오염되고 구겨질수록 또한 흥미로워진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불행한 인생에 헌사되어 오던 동정과 눈물보다 더 강인하다. 아니 강인하다기보다 강렬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를 유언으로 남긴 채 죽어간 마츠코. 그녀의 지긋지긋한 인생이 혐오스럽지만 들여다볼 만한 것이 되는 순간은 그 삶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들이 존재할 때이다. 혐오스러운 인생일지라도 다른 시선이 존재하는 한, 추억과 기록의 다른 방법이 있는 한 삶은 달라질 수 있다. 슬프지만 재미있고 더럽지만 화려한 한 여자의 삶,‘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너무도 혐오스러워서 더 사랑스러운 영화이다.영화평론가
  • [여성&남성] 그와… 그녀와 …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왜?

    [여성&남성] 그와… 그녀와 …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왜?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수필가 피천득은 아사코라는 여성과의 오랜 ‘인연’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피천득은 태평양전쟁이 일찍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했다면 아사코와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있었을 거란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여자와 남자의 인연이란 어떤 걸까. 내 가슴을 적셔오는 상대의 마음을 알면서도, 정작 그와 약지를 걸지는 못했던 그들의 사연을 들어본다. ■ 완소남(완전 소심한 남자) ●이런 완소남(완전 소심한 남자)을 봤나 회사원 김모(27)씨는 소심한 상대 남자의 1% 성격 결함에 질려 99% 장점을 포기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알게 된 그 남자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씨를 착실하게 챙겨주는 편안함에다 진한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줄 것같은 마음을 표현해준 사람이었다. 호감을 갖고 만나기 시작했지만 그 남자는 정작 둘만 있는 자리에선 긴장 탓에 안절부절했다. 결국 그 남자는 꼭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둘만의 만남을 원하는 김씨를 살짝 실망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널 좋아해.”란 한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전화나 메신저로 ‘애매모호한 신호’만 보내왔다. “일종의 모멘텀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 남자에게 끌렸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사실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굉장히 부담스럽기 때문에 결국 1년 정도 지나 관계가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회사원 서모(26)씨는 부모의 황당한 개입 때문에 ‘완소남(완전 소중한 남자)’과의 관계가 이뤄지지 못했다. 서씨는 대학 1학년 첫 미팅에서 주선자로 나왔던 엄마 친구의 아들을 처음으로 만나 한눈에 쓰러졌다. 타이완 배우 금성무를 닮은 얼굴에 송승헌같이 짙은 ‘숯댕이’ 눈썹을 갖춘 완벽한 외모에다 밥집에 가면 쌀농사 지은 사람들 때문에 밥 한톨 남기길 꺼려하는 진중한 성격까지 갖췄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서씨와 첫눈에 반했고 둘은 호감이 99%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2개월 뒤 그가 갑자기 소식이 뜸해져 서씨는 ‘차였구나.’ 생각하며 한동안 눈물로 밤을 지샜다.“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엄마가 그쪽 부모의 이혼 경력을 이유로 그 남자의 엄마에게 저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얘기했더군요. 몇년 뒤에야 알고 너무 속이 상했어요.” 취업준비생 김모(27)씨는 남자의 결혼 압박이 맘에 걸려 ‘괜찮았던’ 그에게 결국 손사래를 쳤다. 지난해 소개팅으로 만난 여섯살 위의 그 남자는 젠틀한 매너에 준수한 외모, 신중한 성격까지 갖췄다. 한번 꼬시긴 힘들어도 정작 꼬셔두면 계속 내 남자일 것만같아 마음이 점점 동하던 찰나, 문득 물어본 “올해 목표는 뭔가요.”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올해 안에는 무조건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마음을 다 잡고 한 번 더 목표를 물었지만 그는 똑같은 답을 ‘한 번 더’ 던져 김씨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만난 지 3∼4번밖에 되지 않았는데 늘 입에서 결혼이야기를 달고 살아 결국 그게 발목을 잡더군요. 머뭇거렸더니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끊었어요.” ●그가 옆에 없음이 두려워서 그만…. 회사원 정모(29)씨는 외로움이라는 장벽이 두려워 놓쳤던 그 사람에게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2년 전 모임에서 알게된 그는 곧 연수를 떠날 계획이었다.“얘기를 하면 할수록 매력적이었고 매일 함께 있고 싶었지만, 한참 사랑해야 할 나이에 2년이나 그를 옆에 두지 못한 채 인내해야 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죠.” 이후 2년이 지나 그는 돌아왔지만 예전같이 자신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는 정씨. 그는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혼자일 게 두려워서 놓아버린 날 다시 찾을지 모르겠다.”면서 “2년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며 한숨지었다. 그는 또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으면 소중한 걸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다. 회사원 양모(25)씨는 2년전 여름 한달동안 중국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가서 만난 미국 남자와의 인연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 남자는 특별한 외모나 매력이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함께 있으면 왠지 힘이 되고 마냥 행복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도 양씨에게 계속 호감을 표시했지만 둘은 한달 뒤 각자의 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만약 한국 사람이고 같은 나라에 계속 있었다면 두말할 것없이 사귀었을 거예요.” 회사원 이모(27)씨는 ‘신분의 장벽’에 막혀 남자와 등을 돌렸다. 몇년 전 만났던 그는 함께 미술관 등을 다니며 취미를 공유할 수 있었고 속상해 울면 득달같이 달려와 밥을 사주며 다독거려줄 줄도 아는 남자였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맞지 않았고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남자는 법관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그 남자가 자신과 비슷한 레벨의 여자를 찾길 원하는 것 같았고 결국 결혼도 그런 여자와 하더라고요.”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잘난걸(Girl)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져” 남성 대부분이 오래전 사랑했던 혹은 짝사랑했던 여성을 가슴에 담아둔다. 사귀고 싶었지만 인연이 너무 짧았고 고백하고 싶었지만 고백하지 못했기에 마음 아프다. 회사원 유모(40)씨는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인 28살 때 한 여성을 사귀게 됐다. 서로 결혼할 마음까지 있었지만 유씨의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아가씨는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결혼을 하면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혼자서 병수발해야 한다는 게 엄청난 부담이었겠지요.”부담스럽기는 유씨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다음 차례는 이별이었다. 벤처기업 사장 최모(33)씨는 첫사랑을 2년 전 서울 영등포역에서 다시 만났다.“한 손엔 애를 잡고 한 손에는 애를 업고 있었죠. 다른 손엔 가방을 들고요. 단발머리만 간직하고 싶었는데 세파에 찌든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참 ‘거시기’합디다. 전화번호는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만 하고 헤어졌지요. 왜 그 때 잡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눈빛이 느낌으로 왔는데 여운이 한 달 가더라고요.” 고3때 만났다는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재수를 하게 되면서 최씨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상업고등학교에 다녔던 그 친구는 취업을 했지요.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지더라고요.” 최씨는 가끔 “그 친구가 취직했던 전주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생각해 본다.“그 친구가 데리고 있던 아기들이 내 새끼가 될 수도 있었겠지요.” 염모(30)씨도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경우다. 군대 동기가 여동생을 소개해줘 1년 넘게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1년 가까이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면서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여자친구는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다. 서로 끌렸는데도 끝내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학생 운동과 시민 운동을 거쳐 지금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는 박모(38)씨는 학내커플을 터부시하는 청교도적 분위기가 연애 전선에 딴죽을 걸어 버렸다.“1학년 때부터 공부를 같이 했던 동기 유모씨와 서로 좋아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한 채 3년이 흘러가 버렸어요. 그런데 우리 둘이 동거를 한다는 소문이 난거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화를 냈는데 그게 그 친구에게 상처가 돼 버렸어요.” 그 이후론 겉으로 친구처럼 지내던 것조차 서먹서먹해지고 말았다. 그 후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여학생은 박씨에게 “우린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때론 너무 바쁜 게 원수다. 유모(35)씨는 후배 소개로 어린이집 교사를 만났지만 어렵게 얻은 첫 직장은 일이 너무 많았다. 직장일에 의욕이 넘치던 유씨. 토요일 데이트 약속을 잡을 때마다 꼭 일이 생겼다. 그런 식으로 두 달 가량이 지나가 버리니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까먹을 지경이 돼 버렸고 흐지부지 헤어지고 말았다. 나중에야 그 후배를 통해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그 아가씨는 결혼할 마음까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데이트 때마다 기대를 했는데 번번이 바람맞고, 자존심 때문에 먼저 말하지도 못하고. 결국 지쳐 버린거죠.” 우정이냐 사랑이냐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3때 독서실에 같이 다니던 친구 셋이 한 여자를 좋아해서 고민했던 걸 생각하면 한모(34)씨는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1학기쯤 아주 예쁜 여학생이 독서실에 왔는데 세 명이 동시에 그 여학생에 반했습니다. 모두들 ‘내가 저 여자애 찍었다.’며 경쟁이 붙었지요. 처음엔 넷이서 영화도 보고 재미있게 놀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여학생이 나를 뺀 두 친구를 저울질하는 걸 눈치챘어요.” 한씨는 좌절감에 혼자 술도 먹다가 결국 “나는 원래 걔한테 관심없었다.”며 마음에 없는 소릴 했다. 이제 두 친구가 경합을 벌였다. 물론 승자는 한 명.“선택을 못받은 친구는 많이 마음 아파했죠. 선택받은 친구도 의리 때문에 많이 미안해 하고요. 그래도 그 친구는 그 여학생과 결혼까지 했어요. 선택 못받은 친구만 노총각이죠.”그들은 지금도 친한 친구다. 네명이서 함께 온라인 게임을 하고 술도 마신다. 그래도 한씨 마음 속에선 지금도 그 친구에게 미묘하게 샘을 낸다고 한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유괴, 꿈도 꾸지마 !

    ‘유괴, 꿈도 꾸지 마라….’ 1996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납치된 뒤 7시간 만에 살해된 ‘앰버 해거먼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전국 고속도로와 역, 도심 전광판, 인터넷, 방송 등에서 납치된 어린이의 인상 착의와 나이, 이름을 보여 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른바 ‘앰버 경고시스템’은 텍사스주를 시작으로 미국 49개 주에 시행 중이며 지금까지 311명의 어린이를 유괴범의 손에서 구출했다. 프랑스도 올해부터 방송에서 유괴 어린이 정보를 공개해 시민 제보를 받는데 활용하고 있다. 9일부터 우리나라에도 ‘실종유괴아동 앰버 경고시스템’이 도입된다. 경찰청은 서울시와 건설교통부의 협조를 얻어 공개수사 방침이 정해진 실종아동의 신상정보를 지하철과 고속도로, 국도, 교통방송을 통해 신속하게 전파하기로 했다고 8일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지하철(1∼8호선) 역내 전광판 3311개와 고속도로 및 국도, 서울시내 고속화도로(강변도로·올림픽대로 등)의 889개 전광판 등에 1회 20자 이내의 실종아동 정보를 굵은 황색 글씨로 띄우게 된다. 교통방송에서는 보다 상세한 내용이 실시간 방송된다. 경찰청은 ‘앰버 경고시스템’의 1호 경고발령 대상으로 지난달 16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실종된 양지승(9·여)양을 선정, 신상정보(제주 9세 여 양지승 실종, 키 135 단발머리 사각안경)를 9일부터 송출할 방침이다. 이금형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은 “유괴범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것은 물론 잠재적 범죄 예방효과도 기대한다.”면서 “앞으로 관련기관의 협조를 얻어 사진까지 내보낼 수 있도록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경찰청과 서울시, 건교부의 ‘실종아동 앰버 경고시스템’ 운영 협약식은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봄비를 기다리며 3월 소식을 전합니다-이해인

    봄비를 기다리며 3월 소식을 전합니다-이해인

    ’사랑 옆엔 사랑만이 갈 수 있다’는 말씀을 피정 동안 되풀이 하여 들었지요. 여러분이 함께 기도해 주신 덕분에 저는 연중피정을 아주 잘 하였습니다.지도해 주신 조규만 주교님께서 신학생이던 시절엔 편지도 몇 번 주고 받았는데, 그분이 14번에 걸쳐 해 주신 강론들은 새삼 우리를 행복하고 긍정적인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마력이 있는 듯...참 좋았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피정은 늘 좋은 것이지만 말입니다.다 구정 설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우리는 황철수 주교님을 모시고 신년하례식을 하였고새로 나온 돈으로 세배값도 받았답니다. 물론.... 거액은 아니지만 지극히 소박한 그 액수는 비밀(?)이고요. 다들 어찌나 좋아하는지! 상상하실 수 있나요? 예비수녀,수련수녀,서원수녀..수도원의 밥그릇 수에 따라 액수가 조금 차이가 난답니다. 이번 설 연휴기간에 저는 이것 저것 옷장 책상 서랍 정리를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고 좋아요.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분은 난간에 화분을 갖다 두고 빨래하기 좋아하는 어떤 분은 침방에도 빨래걸이를 갖다 놓는 등....사람마다 방을 꾸미는 기호가 다른데요.저는 주로 책이나 종이 종류가 남들보다 많고 이것만 있으면 늘 든든하지요. 치우면서 보니 종류가 하도 많아 욕심에 대하여 반성도 좀 하였습니다. 종이나라의 원더우먼 클라우디아.. ..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지 뭐에요.조그만 쪽지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습성으로 다 치우고나도 거기서 거기...라고 수녀님들이 저를 놀리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고 있고요. 하옇든 흐뭇한 마음으로 새봄맞이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 글방 소식은 그동안 쓴 해인의 시와 산문들 중에서 봄과 관련 된 글귀들을 찾아서 나누어 드리니 ‘봄비를 기다리며 첫 러브레터를 쓰는 달’이라고 제가 이름 지은 3월에 시인의 마음 되어 한 번 읽어 보시고 봄 편지를 써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요즘은 아침마다 새 소리에 잠을 깨면서 ‘그래 봄이 왔다 이거지?’하며 더욱 밝은 미소를 짓게 되더군요. 광안리본원에서도 더러는 떠나고 더러는 새로 오는 수녀님들이 계시어 근본적으로는 변함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새로운 분위기입니다. 이제 곧 절제와 희생과 침묵의 사순시기가 시작 되네요.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우리 마음에 푸른 봄까치꽃 같은 미소가 가득하길 기도하는 마음이어요. 여러분의 몸도 마음도 봄이라고 들뜨지 마시고(?) 내내 건강들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 이번에 샘터사에서 나온 책<대화>도 한 번 보시라고 권면하고 싶답니다. 박완서.이해인/방혜자.이인호님의 대담집인데 내용을 먼저 본 우리 수녀님들이 좋다고 하니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 밖에 지금 제 곁에 둔 책들은-- <하느님 나라>(조규만/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존 포엘.강우식 역/가톨릭 출판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안셀름 그륀.이미옥 역/의즈덤 하우스), <삼라만상을 열치다:한시해설/푸르메>, <김풍기사람에게서 구하라>(구본형/을유문화사), <손 끝에 남은 향기:한시해설>(손종섭/마음산책), <호미>(박완서/열림원), <나무처럼 사랑하라>(웬디 쿨링 엮음.김용택 글.마음숲), <10분 이야기 명상>(김테광 글.김상아그림/영림카디널),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이철수의 나뭇잎 편지/삼인), <북한강 이야기>(윤희경/신세림)등입니다.♡ 저의 모친을 위한 정성 어린 여러분의 공동의 기도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말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시어 한동안 잊고 계시던 가스불까지 켜서 전과 다름없이 김치만두를 끓여 드시기도 하신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다 전화를 하게 되면 ‘작은 수녀야? 언제 서울 와?’하시곤 금방 동생을 바꾸어주시고 전과 같이 긴 대화는 잘 이어지질 않는 상황이지만 이것만 해도 반갑고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리면서 사랑을 전합니다. 3월의 실버소녀수녀가 천리향 향기 속에 천리향 미소와 사랑을 담아드리면서 안녕히! 이 외에도 “봄에 대한 해인의 詩”는 3월 동안 수녀원 홈페이지 영상시 코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봄 햇살 속으로 -이해인 수녀- 긴 겨울이 끝나고 안으로 지쳐 있던 나봄 햇살 속으로 깊이 깊이 걸어간다내 마음에도 싹을 틔우고다시 웃음을 찾으려고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눈을 감고 들어가고 또 들어간 끝자리에는지금껏 보았지만 비로소 처음 본푸른 하늘이 집 한 채로 열려 있다 3월에 - 이해인 수녀 - 단발머리 소녀가웃으며 건네 준한 장의 꽃봉투새 봄의 봉투를 열면그애의 눈빛처럼가슴으로 쏟아져오는 소망의 씨앗들 가을에 만날 한 송이 꽃과의 약속을 위해따뜻한 두 손으로흙을 만지는 3월 나는 누군가를 흔드는새벽바람이고 싶다시들지 않는 언어를 그의 가슴에 꽃는연두색 바람이고 싶다 봄 편지 - 이해인 수녀 -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없는 풀섶에서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보이지 않게 살아 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나에게 오렴 풀물 든 가슴으로 - 이해인 수녀 - 보이는 것들리는 것모두 풀빛으로 노래로 물드는 봄 겨우내 아팠던 싹들이웃으며 웃으며올라오는 봄 봄에는 슬퍼도울지 마십시오 신발도 신지 않고뛰어내려 오는 저 푸른 산이 보이시나요? 그 설레임의 산으로어서 풀물 든 가슴으로올라가십시오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수녀- 어디선지 몰래 들어 온근심 걱정 때문에겨우내 몸살이 심했습니다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내 마음의 산기슭에도꽃 한송이 피워내려고바람은 이토록 오래 부는 것입니까 3월의 바람 속에보이지 않게 꽃을 피우는 당신이 계시기에아직은 시린 햇빛으로희망을 짜는 나의 오늘 당신을 만나는 길엔늘상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살아있기에 바람이 좋고바람이 좋아 살아있는 세상 혼자서 길을 가다 보면보이지 않게 나를 흔드는당신이 계시기에나는 먼데서도잠들수 없는 3월의 바람어둠의 벼랑 끝에서도노래로 일어서는3월의 바람입니다
  • 강수연 “복수 꿈꾸다 모성애 눈떠요”

    강수연 “복수 꿈꾸다 모성애 눈떠요”

    “파파 할머니로 늙을 때까지 연기자로 남고 싶어요. 앞으로 한 40년은 더 해야죠.” 영화배우 강수연(41). 단발머리에 붉은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 같은 그녀, 불혹을 지났다면 믿을 사람이 없을 듯싶다. MBC 새 주말드라마 ‘문희’에 출연하는 강수연은 대학생 조카가 있는 40대 초반이라는 나이를 잊을 만큼 더 밝고 활기차 보였다. SBS ‘여인천하’ 이후 6년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온 강수연이 이번 작품에서 맡은 역할은 백화점 재벌 문회장(이정길 분)의 서녀로 태어나 열여덟 나이에 사내아이를 낳아 입양시킨 후 오직 복수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비련의 여인, 문희로 시청자들을 찾아온다. 그녀는 오기와 독기를 품고 결국 성공의 정점에 이르지만 자신이 떠나 보낸 아이를 만나면서 모성애에 눈을 떠가는 여인의 삶을 그려낼 예정이다. 도도하고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가 짙은 강수연이란 배우의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그녀는 오랜만에 TV 복귀작을 ‘문희’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대본을 읽고 ‘문희’의 매력에 빠져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며 “요즘 유행하는 미니시리즈나 사극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드라마다. 불혹을 지나며 조금 성숙한 내면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선택했다.”고 한다. 또한 “정성희 작가에 대한 신뢰도 있었고 오랜 연기생활로 익힌 ‘느낌이 좋은 드라마’”라고 강조했다. 아직 앳된 소녀 같다고 하자 “좀 게으른 편이라 별로 특별히 관리를 잘하고 사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은 빼놓지 않고 한다. 그게 비결인 것 같다.”라며 웃는다. 카리스마 넘치고 당당한 이미지의 강수연은 “평소 카리스마는 전혀 없다. 기존에 영화 등에서 강한 캐릭터, 밖으로 뿜어내는 여자 연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저를 그런 캐릭터로 단정짓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30년이 넘게 우리나라 최고의 여배우란 타이틀을 안고 다닌 그녀는 아직도 40년은 넘게 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커다란 욕심만큼 멋지고 좋은 연기로 시청자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길 기대한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올 봄 헤어스타일 단발머리

    올 봄 헤어스타일 단발머리

    단발 열풍은 계속된다. 지난해에는 부드러우면서 여성스럽고, 섹시함을 강조한 단발이었다면 올봄 유행하는 단발은 길이가 더 짧아지고 선은 더 강해진 느낌이다. KBS 드라마 ‘달자의 봄’의 이혜영(사진 왼쪽)의 헤어 스타일이 대표적. 일반적인 보브형 단발보다 더 짧아졌으며 선이 날카로워졌다. 이러한 머리 모양은 작년 유행했던 김혜수(영화 ‘타짜’에서)식 보브형 단발의 변형으로 훨씬 도도하고 차가운 느낌을 준다. 계란형이나 역삼각형의 얼굴에 잘 어울리며 각이 심하거나 얼굴이 큰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최근 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김혜수(사진 가운데)의 헤어 스타일은 조금 바뀌었다. 뱅스타일의 앞머리에 레이어가 가미된 일명 ‘머쉬룸(바가지형) 단발’로 변신했다. 머쉬룸 단발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거나 역삼각형 혹은 마름모형 얼굴에 잘 어울리며 턱이 넓은 얼굴 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머쉬룸 단발에 살짝 웨이브를 가미하면 좀더 여성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다. 층을 많이 낸 바가지형 단발 웨이브는 한국 여성들에게 무난하게 어울리나 웨이브를 잘못하면 자칫 아줌마스러울 수 있으므로 스타일링과 퍼머에 신경을 써야 한다. MBC 드라마 ‘나쁜 여자 착한 여자’의 성현아(사진 오른쪽)의 커트는 앞머리와 뒷머리를 어떻게 스타일링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 연출이 가능한 헤어 스타일이다.20∼30대 여성들이 편하게 손질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로 정장이나 캐주얼 모두 무난하게 어울릴 만하다. 남성들의 경우, 메트로 섹슈얼이니 크로스 섹슈얼이니하는 말처럼 중성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장발 열풍이 불 것으로 보여진다. 드라마 ‘궁’에 출연했던 주지훈, 드라마 ‘주몽’의 송일국, 현재 군 복무 중인 소지섭 등은 모두 거의 어깨에 닿을 듯한 장발이다. 하지만 이준기 식의 여성스러운 장발이 아니라 거칠면서도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나는 장발이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도움말:유신 원장(니케인뷰티), 임영심 원장(The house of beauty), 신동금 (김선영 by 보스코).
  • [인터뷰] 하늘빛 새 영혼으로 영원을 그리는 화가 - 박항률

    [인터뷰] 하늘빛 새 영혼으로 영원을 그리는 화가 - 박항률

    박항률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어느 겨울날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어른을 위한 동화 모닥불을 읽으면서 소녀를 실어 나르는 뗏목의 슬프고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하여 흘러내린 눈물 방울 사이로 그의 그림은 아련하게 푸른빛을 띄며 내게 다가왔다. 어디선가 겨울 강가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보시면 소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이 타오르는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단발머리 소녀는 뗏목의 이 애절한 마음을 알고 있을까? 이렇게 나는 모닥불을 통해 박항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바람 때문이었을까? 지난 4월 성북동 길상사에서 우연히 화가 부부를 만났고 청담동에 있는 그의 화실로 초대를 받았다. 고은별 |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요함 속에 어떤 애수(哀愁)가 느껴져 옵니다. 그림은 작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아련한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박항률 | 1994년부터 명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가 경험한 죽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시골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촌 여동생을 만났는데 저보다 한 살 어린 박금란이라는 이름의 소녀입니다.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사촌 여동생이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객지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요. 서울로 올라올 때 동생도 같이 와서 무학여고를 다녔는데 곱사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촌 여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습니다. 고은별 | 작품 속의 주인공이 바로 그 소녀일 수도 있겠네요. 박항률 | 어떤 그림에서는 나오지요. 두 번째는 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에요. 대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제게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고은별 | 명상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시는데…. 박항률 |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데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리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도화녀와 비형랑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신라 진지왕이 길을 걸어가다 소문으로만 듣던 아름다운 도화녀을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왕이 도화녀를 유혹하지만 도화녀는 유부녀였기 때문에 왕의 청을 거절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던 진지왕은 도화녀에게 남편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를 그리워하다 왕이 먼저 죽게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 진지왕의 혼이 도화녀를 찾아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로 도화녀가 아기를 낳게 되는데 그 아기가 바로 비형랑입니다. 비형랑은 귀신을 잘 다룹니다. 고은별 | 진지왕이 도화녀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죽은 후에도 혼령이 되어 찾아왔을까요. 박항률 | 역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비형랑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생사관이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사회였다는 이야기지요. 만주에 가면 씨족수(氏族樹)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단수(神壇樹) 개념이지요.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 같은 큰 나무들이 있는데 발해에 가보니까 거기에도 있었어요. 그 마을의 나이 든 사람이 죽으면 새가 되어 씨족수 나무 위에 앉았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기의 영혼 속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은별 | 정호승 시인의 시집과 동화책 항아리에 그림이 실리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박항률 | 91년 《비공간의 삶》이라는 첫 시집(詩集)을 낼 때, 펜화를 그려 넣었는데 그 시집을 보고 정호승 시인이 찾아 왔습니다.(화가는 세 권의 시집을 책장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고은별 | 그림을 그리면서 시도 쓰시고…. 박항률 | 시라고 할 수도 없지요. 고은별 | <네잎 클로버>라는 시가 있네요. 오랜 시간 고이고이 간직해 왔던 책갈피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잊혀진 내 마음의 갈피 속에 앳된 가시내의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난 살빛 같은 살며시 입술을 대고 멈추고 싶은 네잎 클로버 박항률 | 그림 그리는 것은 자기가 갖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화가가 되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성향이나 자기가 그릴 것을 이미 내면에 갖고 있는데 이것을 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도 너의 본성을 찾아라. 개성을 찾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릴 것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것이지요. 고은별 | 전업작가였다가 교수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박항률 | 작업실에서 자유롭게 있다가 학교에 나가니까 연구실에 갇혀 있는 것 같아서 적응이 잘 안 되었지요. 이제는 좀 괜찮아졌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생겨서 나름대로 큰 보람을 느끼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대학에 오는데 저는 화가가 되는 것은 마라톤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그려야 하고 매일 그려야 합니다. 붓을 하루도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현대 미술관 관장님이셨던 임영방 선생님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인데 네덜란드 작가 반. 리에는 창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했답니다. 창작이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지와 힘이다. 지금까지도 그 뜻을 제 마음에 간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고은별 | 처음부터 이렇게 고요한 그림을 그리셨나요? 박항률 | 40대 초반에 그림을 바꾸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표현적인 그림들이 많아 원색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조용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전시회를 할 때 길가던 사람이 무심코 들어와서 제 그림을 보고 그냥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은별 | 학창 시절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셨습니까? 박항률 |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좋아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보면 슬픔이 깊숙이 깔려 있습니다. 눈 안에 슬픔이 꽉 차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카소의 그림 중에서도 청색시대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청색을 좋아하고 청색으로 그림을 그리면 편안합니다. 고은별 | 서양화인데 소재나 주제가 동양적인, 우리의 정서가 담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박항률 | 서양화다 동양화다라고 나누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물감의 재질에 따라 구분이 되어야지요. 한국사람들이 그린 그림이니까 그냥 한국화라고 할 수 있지요. 고은별 |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이 아래를 보거나 바깥쪽을 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동양적 겸손함이라고 할까 다소곳하고 공손한 태도가 느껴집니다. 박항률 | 인도에 갔을 때 어느 미술 평론가가 제 그림이 분명 어디를 보고 있는데 전부 바깥을 보고 있다고 하면서 인도 화가들의 그림은 그 인물이 그림 안쪽을 보는데 제 그림은 왜 전부 바깥쪽을 보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제가 바깥을 바라보면 그림이 더 커 보이고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대답을 했지요. 고은별 | 꽃과 새와 나무와…. 박항률 | 새를 많이 그렸고 그중에서도 머리 위의 새를 많이 그렸습니다. 저는 여행을 다니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습니다. 여행 자체를 좋아합니다. 92년에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 앞 광장에서 비둘기떼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사람 머리 위에 앉더라고요. 그 순간 저게 그림이다, 하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머리 위의 새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제 그림과 새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셈이지요. 94년에 몽골에 가서 새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만주의 에웬키족은 아기가 태어나면 작은 영혼 상자를 만들어 나무를 깎아서 만든 새를 넣어 줍니다. 이 새의 영혼이 아기에게 들어간다고 믿고 있어요. 우리 민족하고 새는 연관되는 것이 많습니다. 신라 금관에 비취가 걸려 있는데 이것을 새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모습의 왕관(王冠)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거슬러 올라가면 스키타이 민족까지 연관됩니다. 무덤에서 같은 형태의 왕관이 출토되었어요.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인면조(人面鳥)도 그렸는데 고구려 벽화에 딱 한군데 나옵니다. 불가(佛家)의 가릉빈가(迦陵頻伽 - 극락정토에 살고 있다는 새. 미녀의 얼굴 모습에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함.)는 부처님 곁에서 항상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다는 천상의 새입니다. 고은별 | 지금 행복하시지요? 박항률 | 한편으로는 행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림은 취미로 그릴 때가 제일 좋습니다. 그림을 직업으로 그리다보면 싫어도 그려야 할 때가 있어요. 사실은 아마추어 화가들이 제일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거리낌없이 “네”라고 대답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화가 박항률은 마지막까지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소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새는 지금 어디로 날아가려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파르르 날아 올라 새 생명으로 태어난 아기의 영혼 속으로 사르르 스며드는 것은 아닐까? 글 고은별 자유기고가     월간 <삶과꿈> 2006.11 구독문의:02-319-3791
  • [이주일의 어린이책] 구름골 소녀의 사계절 성장이야기

    마을 닭들이 하나둘 울어대는 새벽녘에 이불에 ‘지도’를 그리고 잠을 깬 꼬마 방실이. 어떡하면 좋을까. 멍멍이가 쌌다고 엄마께 둘러댈까? 이불을 감춰 버릴까? 아님? ‘팥죽 할멈과 호랑이’로 두꺼운 어머니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박경진 작가가 성장 그림책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미세기 펴냄)를 냈다. 대여섯살쯤 돼보이는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책은 오줌싸개라 놀림당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동심(童心)을 유쾌하고도 운율감 넘치게 그려냈다. 키낮은 담벼락들이 옹기종기 정겨운, 한여름 시골마을인 구름골이 배경이어서일까. 작가의 깔끔한 글맛이 한결 더 소담스럽다. 책은 단발머리 꼬마아이의 발끝을 쫓아 온동네를 한바퀴 빙 돈다. 친구 영아네로 도망갈 궁리를 짜낸 방실이가 부리나케 지나가는 마을 곳곳의 풍경이 따뜻하고 정답다. 무심히 아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듯하지만, 뜯어보면 어린 독자들을 위해 책은 많은 것을 배려했다. 재미있는 의성·의태어를 틈틈이 넣어 행간의 리듬감을 살린 것은 특히나 그렇다.“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뛰었고/콩닥, 콩닥 내 가슴도 뛰었지요.” “까옥, 까옥까옥, 까마귀들이 시끄러웠어요.” 한참을 읽어주다 보면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동요를 따라부르듯 동시를 읊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거릴듯 싶다. 꼬마 주인공의 조마조마한 심리를 따라가는 즐거움도 짭짤하다. 옥수수 밭의 까마귀는 ‘큭, 큭큭, 오줌싸개 대장이다!’ 비웃는 것 같고, 당산나무도 ‘싸개야, 싸개야.’ 손가락질하는 것 같다는 주인공의 독백에서 독자들이 눈을 반짝일 게 틀림없다. 차분하게 여운있는 결론부가 성장 그림책의 진가를 훌쩍 더 높인다. 영아네에서 불안에 떠는 방실이를 데리러온 엄마는 꾸중은커녕 나지막이 타이르신다.“엄마는 방실이가 오줌싸개라도 좋아. 하지만 방실이가 도망친 걸 알고 엄마는 슬펐어. 누가 방실이가 겁쟁이라고 놀리면 어쩌지?” 동구밖 개울의 징검다리를 겅중겅중 날듯 뛰어건너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이다. 여름이 배경인 책을 시작으로 가을, 겨울, 봄 이야기가 잇따라 선보일 예정이다.5세 이상.9000원.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헬렌 켈러’ 저시력인연합회장 미영순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헬렌 켈러’ 저시력인연합회장 미영순씨

    ‘빛의 천사’라고 했다. 한평생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전 세계 맹·농아를 위해 온몸으로 살았다. 헬렌 켈러(1968년 사망),3중 장애를 극복하고 하버드대학까지 졸업한 위대한 사상가로 존경받는다.50대 나이에 “만약 기적이 일어나서 사흘 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답은 이러했다. 첫째날-‘나에게 삶의 보람을 찾아준 친절함과 따뜻함, 동료애로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보리라. 그 동정어린 친절과 인내의 산 증거를 발견해내리라. 소중한 친구들을 모두 불러내어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외적 증거를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리라.’ 둘째날-‘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가슴 설레는 기적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잠든 대지를 깨우는 태양의 장엄한 광경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리라.’ 셋째날-‘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리라. 이윽고 밤이 이르러 일시 유예가 끝나고 영원한 암흑이 나에게 다시 닥칠지라도,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할 틈도 없이 나의 마음은 광휘로 가득찰 것이다.’ ●여고 2학년 때 실명… ‘고통·희망의 삶´ 한국의 헬렌 켈러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미영순(米榮順·58·정치학박사)씨. 쌀 미(米)자의 성을 쓰는 특별한 가족사를 안고 있다. 경기여고 2학년 때 갑자기 시력을 잃은 후 맹인-반맹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통신대와 국민대를 졸업한 뒤 타이완 유학까지 했다.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 전문가로 활약도 했다. 지난 99년에는 ‘전국 저시력인연합회’를 창설한 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저시력 장애인(약 50만명)들이나 맹인들을 위해 ‘빛의 천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흐린 세상으로 살아온 40년 인생, 경외스러움으로 문득 다가온다. 지난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위치한 연합회 사무실에서 미씨를 만났다. 올 1월 건양대 부속 ‘김안과병원’의 지원으로 이 병원 3층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주로 저시력 아이들과 부모들을 만나 상담을 해준다. 인사를 건넸더니 “미안해요, 잘 생긴 사람 같은데 알아보지 못해서.”라며 환하게 웃는다. 목소리가 무척 맑았다. 둥근 모자를 쓴 모습이 얼핏 헬렌 켈러를 연상케 했다. 더듬더듬 안경을 찾는다. 더 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내용에 대해 물었더니 “하얀 쌀밥은 색깔 있는 그릇에 담아주어야 해요. 안 보일수록 밥과 반찬 그릇은 내용물과 다른 색깔이어야 좋거든요.”라고 대답했다. 시력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 여자 구분이 안됩니다. 그저 어떤 형체만 어렴풋하게 아른거릴 뿐이지요.” 5월의 라일락이나 아카시아도 그저 마음에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전국 저시력인연합회 만들어 상담·봉사활동 미씨는 최근 장애인들을 위해 중요한 일을 주관했다. 전국의 시각 장애인들과 함께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란 주제로 글짓기 대회를 열고 나무 심는 행사도 가졌다. 시각장애인들은 남의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에 ‘세상과 주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취지에서였다. 가족이 있느냐고 하자 “독야청청이죠.”라는 즉답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렸다. 오색찬란하던 세상이 어느날 흐린 세상으로 다가온 것은 고2 겨울방학 때. 까닭없이 시력이 뚝 떨어졌다. 안경을 맞춰 써봤지만 일주일도 안돼 무용지물. 그렇게 반복하기를 4,5차례 거듭했다. 결국 공부밖에 몰랐던 17살 소녀에게 캄캄한 암흑이 찾아왔다. 실명상태였다. 나중에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중2 때 야맹증이 있었는데 비타민A를 복용하면 된다는 말만 믿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화근이었다. 우선 다니던 학교에 휴학원을 냈다. 당시 미씨네 집은 서울 성북구 수유리. 삼양동 소재 여맹원을 찾아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또 수유리에 있는 절 화계사를 자주 찾았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희망의 끈´ 놓지 않는 여자 이때 숭산 큰스님과 인연을 맺는다. 하루는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범종 옆에 쭈그려 앉아 있는 단발머리의 여학생 모습이 숭산 스님의 눈에 띈 것. 스님은 미씨를 방으로 불러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고 즉석에서 법문을 들려준다.“자 이 종이에 선을 그어 둘로 나눈 뒤 한쪽에 X, 다른쪽에 Y라고 해보자. 눈에 보이는 X인자는 X1,X2… 등으로 이어지고, 안 보이는 Y인자도 Y1,Y2…등으로 쭉 이어지겠지. 여기에 공통인자가 있다. 그 인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이니라.” 잠자코 듣던 미씨는 “스님, 그 공통인자는 Z겠지요. 제가 찾아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지나 미씨가 반백이 된 뒤 스님을 다시 찾아갔다. 이때 스님은 “티끌처럼 작아도 세상을 품는 넉넉한 쉼터에 연꽃이 피어났구나.”라는 말로 격려했다. 또 미씨가 2004년 수필집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자’를 펴낼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은 추천사로 각별한 마음을 전했다. 장중유리애지도(掌中有理碍之道) 장이칙구인지비(臟裏則救人之悲) -손 안에는 장애를 다스리는 길이 있고, 마음에는 남을 구하려는 사랑이 있네. “아직도 Z는 못찾았지요. 아무튼 눈이 아니라 정신을 통해 사물을 보는 법을 터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휴학한 지 6개월 후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어렴풋이나마 세상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 미씨는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구나.”하며 돌멩이 하나도, 바람에 쓸려가는 휴지 조각도 아름답게 보였다. 1년만에 다시 복학했다. 교실을 못찾아 헤맬 때도 있었고 배구공을 축구공으로 착각하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67년 우수한 성적으로 고교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이어 서울대 법대시험에 응시했다. 첫날 수학과목은 만점을 받았으나 이튿날 독일어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갑자기 캄캄해져 시험장을 빠져나와 한없이 울기만 했다. 법대를 나와 10년동안 무료변론한 뒤 국회활동을 거쳐 대통령이 되는 꿈이 무너졌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배웠다. 가야금, 장고, 단소, 시조, 한국무용, 요리, 꽃꽂이, 영어회화 등등….73년 방송통신대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5개학과에 2년제. 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강의방송을 녹음하고 낮시간에 딸에게 들려줬다. 교재를 읽어주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도움으로 방통대를 당당히 수석졸업했다. 국민대 정외과에 장학생으로 편입하면서 배움의 열정은 더했다. 집과 학교 통학은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했다. 혼자 등하교할 때에는 ‘8’자를 크게 쓴 카드를 이용해 버스를 세우곤했다. 이는 당시 8번 버스종점 기사들 사이에 오랫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80년 국민대를 졸업한 이듬해 타이완 유학시험에 장학생으로 뽑혔다. ●정치학 박사로 한·중관계 전문가 활동 유학시절에도 노트정리를 해주고 빈 종이에 큰 글씨로 써주는 룸메이트와 짝궁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강의는 망원경을 가지고 들었다. 곧 터질 듯한 높아진 안압으로 책 읽기가 너무 힘들어 한번 읽을 때마다 죄다 암기를 해야 했다.84년 중국정치대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내친김에 중국문화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밟았다.89년 귀국한 후 ‘세종연구소’와 ‘북방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했다.94년에는 흑룡강대학 객원교수를 겸했다. “마음이 흐리면 흐리게 보이고 밝으면 밝게 보입니다. 주위에서 ‘헬렌 켈러가 미국에만 있느냐.’‘지체장애인 루스벨트도 대통령을 했다.’는 말로 자신감을 많이 심어주었지요.” 미씨의 부모는 둘 다 세상을 떠나 영등포에서 외롭게 혼자 지낸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경성.6·10만세운동에 연루돼 열일곱살에 중국 하얼빈으로 피신했다. 어머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한 구소련 한국교포 2세. 옥사코프스키 여학교를 나와 하얼빈 대학에서 노어과 교수로 재직할 때 아버지를 만났다. 해방되면서 부모는 고향에 들어갔다가 6·25 직전에 월남했으며 48년 서울에서 무남독녀의 미씨를 낳았다. ●성씨를 米자로 쓰는 독특한 가족사 성을 쌀 ‘미’자로 쓰게 된 연유에 대해 “재령 이씨였던 19대 할아버지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관직에 있을 때 함경도 지방에 쌀 보급을 워낙 잘해서 성을 ‘미’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지금 국내에는 50명 정도가 이 성을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동그라미는 처음 떠난 제자리로 와야 완성이 되지요.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또박또박 처음의 자리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로 살아왔어요. 비록 빈 손일망정 그 빚을 갚고 가야지요.”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서울 출생 ▲67년 경기여고 졸업 ▲76년 방통대 수석 졸업 ▲80년 국민대 정외과 졸업 ▲84년 타이완 중국정치대학 석사 ▲89년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박사 ▲89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92년 북방연구소 연구위원 ▲94년 흑룡강대학 객원교수 ▲99년∼현재 사단법인 전국저시력인연합회 회장 ●상훈 2004년 이웃돕기 유공자포상 국민포장 수상. ●주요 저서 눈물 고인 가슴에 눈물 대신 품은 뜻(96년 고려원), 새벽 산사에 가보세요(97년 시공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자(04년 북포스).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여자학사가수 1호’ 김상희(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여자학사가수 1호’ 김상희(1)

    ‘여자 학사가수 1호’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김상희씨.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는 숱 많은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린 헤어스타일, 즉 뱅 스타일이다. 이 ‘김상희식 단발머리 헤어스타일’을 위해 30여년 동안이나 머리를 잘라주는 전속 미용사가 있을 정도다. 본명은 최순강(崔純江). 고려대 법대 61학번. 데뷔곡은 ‘삼오야 밝은 달(61년)’. 풍문여고 재학 시절, 성적 1∼2위를 다퉜던 그녀는 ‘특차시험’을 통해 대학에 합격한 뒤,‘서울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참가, 최고 득점으로 발탁된다.‘구김살 없이 밝고 발랄하면서도 동시에 현명해 보이는’ 이 가수 지망생에게 호감을 느낀 당시 KBS 가요방송 지휘를 맡고 있던 작곡가 손석우씨는 김상희 이미지를 모티브 삼아 노래를 만든다. 바로 ‘삼오야 밝은 달’. 이 노래는 이로부터 한참 뒤인 79년, 한 작곡가에 의해 32소절이 16소절로 바뀐 채 무단 도용되어 ‘십오야(노래 와일드 캐츠)’라는 제목으로 발표, 오히려 대히트하게 된다. 대학에 갓 입학한 김상희가 방송활동이나 가수활동을 집과 학교, 양쪽에 모두 숨겨야 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이때문에 ‘김상희(金相姬)’라는 예명을 쓰게 된다. 가장 흔한 김씨 성에 친구 이름을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들었다. 이 무렵 얼굴 알려질 게 두려워 공개방송 무대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고 녹음방송만으로 가수활동을 해야 했다. 이를테면 ‘얼굴 없는 가수’였던 것이다.‘반쪽 가수’ 김상희는 이 노래를 시작으로 ‘텍사스 루울라’,‘나는 능금’ 등을 연달아 발표하지만 대부분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만다.‘얼굴 없는 가수’ 김상희의 반쪽 활동 등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김상희’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어필하며 제법 인기를 얻게 되는 곡이 ‘처음 데이트(64년)’다.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김상희씨가 재학중이던 고려대학교에서는 이 가수가 본교생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철저하리만치 비밀리에 가수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학 4학년 때 ‘처음 데이트’가 히트되고 있던 어느 날, 공교롭게도 타고 있던 버스가 굴러 가벼운 부상을 당했는데, 마침 학보사 기자가 함께 타고 있다가 신문에 기사화되면서 내가 ‘가수 김상희’였음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놓는다. 명문대 여대생이 가수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6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수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치기 시작한다.70년대 말까지 매년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하며 대형가수로 자리한다. 히트곡들을 대략 꼽아보자면,▲64년-처음 데이트(손석우 곡, 이하 괄호 안은 작곡자) ▲65년-울산 큰애기(라화랑), 오늘같은 날은(손석우) ▲66년-경상도 청년(전오승), 대머리총각(정민섭) ▲67년-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김강섭), 뜨거워서 싫어요(정민섭), 진정 난 몰랐네(김희갑) ▲68년-단벌신사(정민섭), 결혼지각생(김기웅), 빗속의 연가(이철혁) ▲69년-빨간 선인장(김강섭), 당신을 알고부터(남국인), 어떻게 해(신중현) ▲70년-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전우중), 홍콩엘레지(김강섭) ▲71년-참사랑(남국인), 사랑의 가족(김학송) ▲72년-팔벼개(민인설) ▲73년-가고 싶어라(김학송), 기다려(남국인) ▲74년-어쩌나(원희명), 황소 같은 사나이(박춘석) ▲75년-나 이제 외롭지 않네(신대성), 행복할 수 있다면(장욱조) ▲76년-주룩비(신대성) ▲77년-즐거운 아리랑(김강섭)등등…. 말하자면 김상희는 당대의 ‘히트 제조기’라 할 수 있는 실력파 작곡가들과 골고루 손잡고 기복 없이 매년 히트곡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노래들은 비교적 밝다. 그럼에도 방송금지된 곡들도 있다.‘어떻게 해’는 ‘창법 저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여졌다. 또 한곡은 ‘단벌신사’. 이 노래는 당시 북측에서 “지금 남조선에는 ‘단벌옷에 넥타이 두개로 지낸다’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로 인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역선전한 것이 빌미가 돼 방송금지시켰었다. 현재 두 손자를 둔 할머니이자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안이다. 그녀만의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오늘도 TBS 교통방송에서 저녁 8시부터 두 시간 동안 ‘아름다운 서울의 저녁입니다’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다.(계속)
  • 여성(女性) 도와 천당가겠네

    여성(女性) 도와 천당가겠네

    성하(盛夏)를 맞은 한 남성이 내건「캐치·프레이즈」가『찌는 여름입니다. 피곤하시죠, 여성 여러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수퍼·페미니스트」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준다는 것일까. 궁금하다. 알고보니 7월 1일부터 시작한「허니문·센터」의 신종(新種)사업「캐치·프레이즈」. 그리고 그 남성은 대표 김현(金炫)씨. 『저는 애처가로 자처하지만 워낙 우리 집안은 공처가 3代를 지내 오고 있읍니다』 소박하게 웃는 안경 너머의 안광(眼光)이 아니었던들 둥글한 동안(童顔)은 나이를 가름하기 힘든 생김이다. 31세-작달만한 키의 젊은 사장이다. 지리한 여름 하오 탁자위에 벌여놓은 낙서지를 흘끗보니『대한민국 제일의 부자(富者)가 되어…』『돈은 벌면서도 만인에게「서비스」하게 되니 돈벌고 천당 가고…』. 7월1일부터 여성을 위한 본격적인「서비스」에 나설 완전 채비를 끝내 놓고 잠깐 한가한 틈을타 낙서를 끄적이던 참이다. 『여성을 지치게 하는 것은 남성들의 책임입니다. 그들을 늘 아름다운 채 두기 위해 그들의 힘든 일을 대행하려는거죠』 어느집 맏며느리는 시부모 회갑연(回甲宴)을 맞아 장소 물색에서 헌주(獻酒)를 하고 놀아줄 기생을 부르는 일까지 도맡아 동분서주하다가 잔치가 끝나면 며칠 앓아누울 마련까지 해가며 애를 쓴다. 잔치가 끝나면 뭐가 빠졌다느니 뭐는 결례(缺禮)였다느니 타박을 받는 것도 며느리다. 이때 며느리는 잠깐 이「센터」에 들러 상담을 하면 그뿐. 일체를 대행해 준단다. 사회자, 국창(國唱), 가수,「밴드」를 지정하는 대로 불러주는 일에서 자가용을 빌려주고 촬영을 해주고, 녹음을 해주는 잔일까지 어떤「파티」건 도맡아 그 분위기까지를 책임지고 이끌어 주는 일에 자신을 갖게 됐고『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다』는 이 기발한「서비스」업의 착상은 우연한 연줄로 모 국영기업체의 이사회를 속리산에서 개최해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닉슨」각료회의만큼은 호화롭지 않더라도 부부동반으로 명승지 찾아 벌인 이사회의「레벨」은「세단」은 전원 소유하고 있을 정도. 번저 최고의「딜럭스」한「버스」를 빌어 각자앞에 일체의 사무도구와 수건, 머리빗, 거울등을 세밀히 갖춘 간단한 사무용「백」을 놓아두었다. 「팀웍」조성을 위해 전원을 태우고「세단」은 빈차로 뒤따르는 여행에서부터 전원을「위밍·업」시켜 나갔다. 이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조명,「백·뮤직」등을 적절하게 조절해오다 끝날때는「핑크·무드」를 조성하는 일까지「성공적인 연출」이었다고 흐뭇해한다. 『사실 5년동안 TV방송국 PD로 있으면서 배운 연출 솜씨 발휘였죠』 분위기에 약한 현대인의 약점을 파고든 연출법이 성공한 셈. 침실로 돌아 가기 직전에「핑크·무드」를 조성했다는 비결을 물었다. 『어느 노신사에게「선생님이 제일 처음 여성을 느낀 나이는 몇살때였읍니까」하고 묻습니다. 앞뒷집 단발머리 소녀, 같은 국민학교 여학생의 기억을 안가진 사람은 드물죠. 금방 노신사는 몇십년을 치올라가 소년인듯 얼굴이 붉어지죠. 그때「옆에 계신 부인을 돌아봐 주십시오」라고 얘기할 뿐이죠』 남성을 위한 모임이었더라도 끝에 가서는 여성 편에 서서 여성을 위하는 모임이 되게 하도록 매사를 매듭짓는다고 했다. 어느 회사의「파티」건 주최자는 집으로가서 그 부인과 한번쯤 의논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기막힌 상혼(商魂)에 안놀랄 수가 없다. 『그렇죠, 「서비스」를 파는 장중심으로 벌이는 장사가 잘된다는 것은 뻔하죠. 누구 만큼 돈을 벌 작정입니다』 이「바캉스」철을 맞아 내건 또다른「캐치·프레이즈」가 『여름휴가는 가족과 함께』. 남자들 끼리 가는 여행에 「가이드」를 하거나 「서비스」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장담도한다. 직원은 전부가 애처가여야 한다는 남다른 경영 방침도 쓰고있다. 전 직원이 도시락을 지참할 것도 솔선 수범하고 있는 사장이다. 도시락을 먹는 한낮의 한때 멀리서 아내의 정성을 음미하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연애 1년만에 결혼한지 1년이 지났지만 김(金)사장은 맞벌이 부인(조동현(趙東賢)·27)을 서울여상 영어교사로 내보내는 것도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서가 아니라 흐트러지고 「루즈」해지기 쉬운 부인들의 행동에 미리 요(要)경계하기 위해서란다. 이 철저한「페미니스트」가 벌인 여성을 위한 사업이란 신부로서 신경을 써야 할 결혼준비 일체. 부인으로서 남편의 상담에 응할 수 있도록 직장 야유회「가이드」및 주관. 며느리나 부인이 주관할 각종「파티」대행. 그리고「패션·쇼」기획 및 진행이 그것. 여자가 준비해야할 일체를 자신이 애를쓰고 다녀도 못할 정도의 염가알선이 가능한 것은 직매처와 직접 손을 잡고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 외에 부정기적인 비상직원으로 「카메라·맨」, 녹음기술자들을 세사람씩 채용해놓았고 유명한 사회자, 일류 연예인 들과의 쉬운 「컨텍트」가 방송국 출신인 김(金)씨로서는 어렵지 않은일이라는 것. 2만원 짜리 옷한벌 보다는 20원어치 콩나물 값에 애착을 보이는 부인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계산서에는 몇십원까지 정확하게 거스름을 붙이고 또 정확하게 거스름하는 계산방법도 쓰고있다. 고대(高大) 국문과 재학시에는 현역 연극인들과 연극을 했고 졸업후에는 KBS-TV, TBC-TV에서 사회교양「프로」PD로 일해오면서 익혀온 기막힌 연출 솜씨가「파티·디렉터」라는 국내 신종 직업에 눈을 돌리게 만든 것. 『한여름 큰일을 치러야하는 여성은 (75)3135로 전화「다이얼」을 돌리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거죠』 [ 선데이서울 69년 7/6 제2권 27호 통권 제41호 ]
  • [씨줄날줄] 양희은과 심수봉/이용원 논설위원

    ‘아침 이슬’의 가수 양희은이 데뷔한 해는 1971년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강대에 갓 입학한 19세 소녀는 곧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1960년대 말 태동한 청년문화는 가요계에 ‘포크’라는 새 장르를 선보이던 참이었다. 당시 가요는 트로트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스탠더드 팝이 양분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청바지가 딱 어울리는 소녀는 ‘아침 이슬’‘작은 연못’ 등, 이전에 볼 수 없던 서정성과 사회성이 짙은 노래를 맑고 고운 목소리로 사회에 퍼뜨린다. 그러나 75년 대마초 사건이 발생해 포크 계열 가수들이 대부분 퇴출당하고, 그녀의 음악적 동반자인 김민기마저 그 전해 강제입영되자 양희은의 목소리는 차츰 잦아든다. 심수봉은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본선 무대에서 그녀는 피아노를 치며 ‘그때 그사람’을 열창한다. 하지만 대학가요제 팬들은 느닷없는 트로트의 등장에 어색해 할 뿐이었다. 이듬해 음반이 나오자 심수봉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영광은 길게 가지 않았다. 음반 출간 6개월만에 ‘박정희 암살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이어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아무 이유없이’ 그녀에게 활동정지 명령을 내린다.‘심수봉 시대’는 갑작스레 막을 내렸다. 1970∼80년대 젊음을 보낸 ‘7080 세대’에게 양희은과 심수봉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름이다. 두 사람은 데뷔 과정부터 추구한 음악과 애호층에 이르기까지 상반된 이미지를 띠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둘 다 확고한 자기세계를 지닌 당대의 아이콘이었다는 점에서 취향에 상관없이 7080 세대에게는 잊히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 양희은과 심수봉이 오는 17일 합동무대인 ‘양·심 콘서트’를 연다. 양희은이 7년째 진행을 맡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의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서다. 양희은과 심수봉은 여느 가수는 겪지 않는 정치적 외압을 경험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가수로서의 좌절 끝에 개인적인 어려움에 길게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 50줄에 들어 한 무대에 서는 모습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오래 소식 끊긴 누이를 재회하는 듯한 반가움을 준다. 아마 그것은 역사가 주는 해피엔딩의 선물일 게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내 어릴적 교과서 ‘선데이 서울’

    “잡지 ‘선데이 서울’도 국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KBS 1TV가 가을 개편을 맞아 신설한 대중문화 다큐멘터리 ‘문화지대-오래된 TV’(제작 타임프로덕션)에서 전하는 문화재청 관계자의 말이다. ‘김신조 사건’이 일어났던 해인 1968년 9월, 한 은행 여직원을 표지모델로 해 창간했던 ‘선데이 서울’. 큼지막한 여자 연예인 수영복 사진을 싣고, 연예인의 가십성 동정에서부터 당시에는 터부시되던 은밀한 성 이야기까지 시대의 시시콜콜한 풍속도를 담아 여행을 갈 때 챙기는 필수품이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 후 1991년 폐간될 때까지 23년 동안 인기를 누리며 장수했으나, 일부에서는 이를 도색잡지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런데 문화재라니? 60∼80년대 암울했던 시절에 서민들에게 위안을 줬고, 거대 담론이 아니라 미시적인 삶을 그대로 그려냈던 ‘선데이 서울’이 한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재로서 의미가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최근들어 같은 이름의 영화나 연극이 만들어질 만큼 그 때 그 시절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한편으로는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이 ‘선데이 서울’이 부활해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렇듯 첫 회 소재를 ‘선데이 서울’로 삼은 ‘오래된 TV’는 문화 엄숙주의에 반기를 들고,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던 대중문화의 시대적 존재 가치를 재발견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31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11시40분에 방송된다. 아시아, 문화 관련 프로그램 강화를 가을 개편 목표로 내세운 KBS의 신설 프로그램 8개 가운데 가장 눈에 띈다. 상류층이나 예술가 중심의 고급스럽고 난해한 문화가 아닌, 한 시기를 풍미했던 대중적 아이템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아요∼!’하고 괴성을 쏟아내던 이소룡일 수도 있고, 조용필과 단발머리일 수도 있다. 또 명동의 음악다방이거나 갤러그 오락일 수도 있다.20분 정도의 시간에 한 가지 아이템을 집중적으로 이리저리 뜯어본다. ‘그 때를 아십니까’나 ‘영상실록’ 등 과거를 돌이키는 기존 다큐와는 화법에 차이가 있다. 단순히 기록 영상을 이어붙이거나 거기에 내레이션만을 입히지 않는다. 그 시절 그 아이콘을 향유했던 현재의 인물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며, 그것들이 개개의 역사 속에서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첫 방영에는 소설가 이순원, 딴지일보 대표 김어준씨 등이 나와 ‘선데이 서울’이 세상을 배워나가는 도구였다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의 제작을 맡은 정태일 PD는 “지금은 사라진 문화들을 현재 시점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당시에는 간과되었거나 몰랐던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자신감 찬 태도’ 면접관 움직인다

    ‘자신감 찬 태도’ 면접관 움직인다

    하반기 취업 시즌이 본격화됐다. 이제는 면접에 승부수를 걸어야 할 때다. 따라서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에 대비하듯 면접도 전략이 필요하다. 면접을 코앞에 둔 예비취업자를 위한 ‘하우투(How-to)’전략을 태평양과 제일모직, 잡코리아가 제안한다. ●옷차림 사소한 듯싶지만 막상 면접을 앞두게 되면 여간 신경쓰이지 않는 부분이 옷차림이다. 면접에서는 깔끔하면서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차림이 기본이다. 특히 대기업, 공기업 등의 면접에서는 성실한 이미지 전달이 관건이다. 때문에 남성의 경우 푸른색 계통으로 통일하는 것이 차분한 인상을 줄 수 있다. 투버튼 스타일의 감색 또는 회색 계열 정장에 비슷한 색감의 넥타이를 매면 무난하다. 여성은 치마정장이 기본이지만 활동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바지정장도 좋다. 검정, 진남색, 회색 계열의 심플한 정장이 무난하다. 베이지색과 회색은 차분한 이미지를, 갈색과 남색은 세련된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외국계 기업이나 광고·홍보업계라면 개성과 감각을 드러내는 것도 방법. 남성은 화려한 색상의 넥타이 또는 푸른색이나 베이지색 셔츠 등으로 포인트를 줄 수 있다. 여성은 브로치, 스카프 등으로 개성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독이 된다. ●스타일링 헤어스타일도 중요하다. 긴 머리의 여성은 하나로 묶어 깔끔하게 연출하는 것이 좋다. 단발머리는 핀으로 잘 고정시켜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한다. 메이크업 역시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어울리도록 얼굴 선을 강조해 샤프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깔끔한 첫인상을 위한 얼굴관리는 남성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면접을 앞두고 음주는 절대 금물. 평소 면도 습관도 중요하다는 게 태평양 뷰티컨설턴트의 조언이다. 면도는 반드시 세안 후에 하고 면도 후에는 찬물로 씻어내는 것이 피부 진정효과를 위해 좋다. 면접 당일 피부가 푸석해 보인다면 에센스나 마스크팩을 활용하면 응급처방을 할 수 있다. 또 간단한 메이크업으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 눈썹이 옅은 경우 짙은 고동색 펜슬이나 섀도를 이용해 그려주면 인상이 또렷해진다. ●면접태도 취업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인사담당자가 중시하는 포인트는 ▲자신감 있는 태도 ▲확실한 의사전달과 자기표현 ▲밟고 단정한 용모 ▲적극적인 자세 ▲진실한 답변 등이다. 무엇보다 명료하고 자신감 있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오더라도 자신있게 답하고 우물거리는 말투는 피한다. 말끝을 흐리는 것도 좋지 않다. 하지만 자신감과 허세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잘 모르는 부분을 아는 척하는 것도 금물. 거짓이나 과장된 대답은 표가 난다. 답변하기 전 2∼3초간의 여유를 두고 말하면 논리적으로 답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 경우 지레 짐작하지 말고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잡코리아 김정철 HR사업본부장은 28일 “면접에서는 아무래도 감정적인 요인이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여자축구의 구세주 박은선 “만리장성 넘었으니 우승 간다”

    한국과 중국의 동아시아축구대회 여자부 1차전이 끝난 1일 저녁 어둑어둑해지는 전주 월드컵경기장. 종료 휘슬이 울리자 흥건히 땀으로 젖은 단발머리의 선수들은 환한 웃음을 띤 채 그라운드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이들이 이날 2-0으로 꺾은 상대는 바로 미국과 세계 여자축구를 양분해 왔고, 한국에 A매치 15전 전패의 수모를 안겼던 중국이었다. 첫 골을 넣은 한진숙(26)과 공수를 조율한 차연희(19), 뒷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최종 수비라인을 책임진 맏언니 유영실(30) 등이 이룬 15년 만의 중국전 승리의 기쁨은 이내 동아시아축구대회 우승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한복판에는 ‘여자 축구 천재’ 박은선(19)이 있었다. 고질적인 허리부상 탓에 전반 42분에야 교체 투입된 박은선은 중앙과 오른쪽에서 수비진을 휘저어 놓더니 후반 19분에 센터서클에서 길게 찔러준 홍경숙의 패스를 받아 골키퍼까지 제친 뒤 수비를 농락하며 절묘하게 발뒤꿈치로 밀어넣는 쐐기골을 터뜨렸다. 특히 중국이 박은선을 집중마크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자 차연희, 한송이(20)까지 덩달아 펄펄 날았다. 박은선이 집중 마크를 받으면서 넓어진 공간을 나머지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셈이다. 안종관 감독이 대회 전 “여자 축구를 지켜 보라. 목표는 우승이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는 이유였다. 특히 180㎝,72㎏의 당당한 체격으로 일찌감치 ‘여자 박주영’으로 불리며 한국 여자축구를 이끌 구세주로 평가받은 박은선은 그 중심에 있다. 지난해 6월 아시아여자청소년대회(19세이하) 개막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2-1로 중국을 꺾은 데 이어 결승에서도 중국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대회 8골로 우승과 최우수선수(MVP)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는 첫 성인 국제무대인 이번 대회에서도 스피드와 기술에서 ‘아시아급’을 넘어선 모습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스포츠 라운지] 단양군청 탁구감독 정현숙

    [스포츠 라운지] 단양군청 탁구감독 정현숙

    ‘기적’이란 단어가 남발되는 것이 요즘 세태라 젊은 세대에겐 가슴에 와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73년 구기종목 사상 첫 세계를 제패한 ‘사라예보의 기적’이 안겨준 감동은 대단했다. 전국일주 카퍼레이드에 환영행사만 두달 간 계속됐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훌쩍 흘렀다. 인구 3만 8000여명에 불과한 충북 단양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창단 3년도 채 안된 단양군청 탁구팀의 이은희(19)가 지난 11일 미국 포트로더데일에서 열린 US여자오픈 주니어(21세 이하) 단식 패권을 거머쥔 것. 곳곳엔 플래카드가 걸렸고 워낙 얘깃거리가 없는 작은 동네라 주민들이 모이기만 하면 “은희가 미국가서 우승했다며?”라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탁구영웅, 생활체육전도사로 두 차례의 기적에 한 번은 주연, 또 한 번은 연출을 맡았던 사람이 있다. 사라예보세계선수권의 3총사 가운데 맏언니였던 정현숙(53) 단양군청 감독이 바로 그.21살 처녀는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겼지만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단발머리 고운 모습은 오롯이 남아 있었다. 정현숙은 77버밍엄세계선수권 직후 라켓을 놓았다. 요즘 같으면 한창 뛸 나이가 아닌가.“그땐 스물다섯이면 할머니 선수였어요.”라며 말문을 연 그는 “사실 연이은 준우승으로 스트레스가 심했죠. 지나가다 공 튕기는 소리만 들려도 소름이 돋을 만큼 탁구가 싫었어요.”라고 털어놨다. 한동안 ‘자연인’ 정현숙으로 살던 그는 85년 방송리포터로 나타나 차분한 말솜씨를 뽐냈고,90년엔 ‘정현숙 탁구교실’을 열어 천직인 탁구 곁으로 돌아왔다.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때 중국인들이 손바닥만한 장소가 있어도 탁구대를 놓고 즐기는 것을 보고 ‘중국 탁구의 저력’을 실감해 문을 열었다는 탁구교실은 어느덧 16년째에 접어들었다.“300여명씩 몰렸던 초창기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잠실과 단양 두 곳에 150명 정도는 될 걸요.”라고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 곳을 통해 탁구의 맛을 본 이만 해도 1만명은 족히 된다고 한다. ●‘생체’전도사, 감독으로 정 감독은 2002년 9월 단양군청 창단감독으로 늦깎이 지도자 데뷔를 했다.30∼40대 지도자가 대세인 요즘으로선 이례적인 일. 물론 세세한 부문은 최정안 코치가 지도하지만 정 감독도 1주일에 2∼3일씩 단양에 머물며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세계챔피언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굴지의 실업팀들이 고교 에이스들을 훑어가는 현실에서 지자체 팀이 살아남기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단양군청은 지난해 7월 종별선수권 3위, 전국체전 3위에 이어 11월 MBC왕중왕전에선 준우승의 기염을 토했다. 소속선수들의 고교 성적을 생각한다면 꿈도 못 꿀 일로 2배 이상의 돈을 퍼붓는 다른 팀들도 단양군청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갑 속엔 5∼6종류의 명함이 있다. 여성체육인 가운데 그 정도로 명성을 구축한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감투’를 쓴 탓. 하지만 정현숙은 ‘단양군청 감독’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늦게 들어선 지도자의 길에 애착이 크기 때문이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 사회체육까지 넘나든 정 감독은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은 바늘과 실 같아요.”라면서 “클럽이 활성화되면 성인들에겐 삶의 활력소가 될 테고, 어렸을 때부터 즐기다 보면 세계를 주름잡는 국가대표도 나오지 말란 법 없죠.”라고 활짝 웃었다. 실업팀 감독과 생활체육 전도사, 거기에 체육행정가로서 분초를 다퉈 사느라 10년째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는 그에게 ‘53’이란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다. 단양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데스크시각] 조용필로 본 서울/임태순 지방자치뉴스부장

    조용필이 누구인가.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 아닌가. 그런 그가 길거리 공연을 한다니. 지난달 30일 서울시청앞 잔디광장. 저녁 7시30분쯤 시작한다고 해서 시간에 맞춰 갔다. 늦게 가는 만큼 잔디광장 끝에서만은 볼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광장은 사람들로 빽빽이 차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2002년 서울 월드컵 때 생각이 나서 인근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으로 갔다. 거기에도 눈치 빠른 사람들이 미리 창가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차에 시청광장 건너편 덕수궁쪽 인도가 한산한 것이 눈에 띄었다. 프레스센터를 빠져나와 덕수궁쪽 차도 옆 인도에 터를 잡았다. 이곳도 금세 많은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곧 막이 오르고 ‘단발머리’가 흘러나왔다. 무대와 멀리 떨어진데다 잔디광장의 인파와 차도를 지나는 차량들의 행렬로 조용필씨를 볼 수 없었지만 무대 옆에 설치된 대형 TV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야외공연인 탓인지 분위기 있는 노래보다는 템포 빠른 노래가 이어졌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차도로는 버스, 택시 등 많은 차량들이 부산하게 오갔다. 교통신호에 걸린 시내버스가 시야를 가리면 인도의 관객들이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일부 택시기사나 승용차에 탄 사람들은 차가 잠시 멈춰 서 있는 순간 창밖으로 몸을 빼내 서울광장을 바라보기도 해 조용필의 식지 않은 인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청앞 서울광장은 서울시민들의 사랑방이 된 지 오래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 잔디광장을 쉼터나 산책로로 이용하고 학생들도 분수대를 뛰어다니며 더위를 피한다. 차도에는 버스전용중앙차로 등을 골자로 하는 대중교통체계 개편의 효과도 나타났다. 간혹 처우개선을 해주지 않으면 파업에 나서겠다는 안내문을 붙인 버스가 다니긴 했지만 버스기사들도 한결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차량이 오갔지만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버스도 없었다. 친환경연료를 사용하는 버스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조용필씨의 인기도 여전했다. 길거리 관람객은 40대 이상이 많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의 모습도 보였고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도 많이 보였다. 물론 중·고교생으로 보이는 오빠부대들도 보였다. 관람분위기는 랩가수들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간혹 아줌마, 아저씨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주책을 부려보지만 열기가 달아오르지는 않았다.10대 오빠부대들도 괴성을 질렀지만 기대만큼 주위의 호응이 없자 머쓱해졌다. 청계천복원을 기념하는 신곡 ‘청계천’이 첫선을 보이고 ‘서울 서울 서울’이 울려퍼지면서 공연은 정점에 올랐다. 얼핏 이번 행사는 이명박시장이 자신의 전리품 앞에서 승전고를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막바지에 조용필씨가 이명박시장을 소개했다.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오른 이명박시장이 “여러분 반갑습니다.”라고 하자 주위의 10대는 “하나도 안 반가운데, 에이 노래나 계속하지.”하고 핀잔을 준다. 그러나 청계천, 서울광장 등 자신의 치적을 이야기하자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잠재적 대권후보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명박시장의 인사가 끝나고 조용필씨가 노래를 몇곡 더 부른 뒤 공연은 끝났다. 시청광장에서 이어지는 빛의 공연과 폭죽쇼를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인도 옆에는 벌써부터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문을 열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2시간 가까이 길가에 서서 노래를 들어서인지 목이 칼칼했다. 시장했지만 노점상 음식에도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다. 순간 청계천을 복원하고 서울광장을 만드는 등 화려하고 가시적인 큰 토목공사도 좋지만 작은 공원을 만들고 산길을 정비하는 생활토목에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서울시장이 대권을 위한 징검다리, 정당들의 세과시를 위한 자리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서울시장은 서울의, 서울에 의한, 서울을 위한 시장이 되어야 한다. 마음씨 좋은 우체국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시청에서 시민들에게 넉넉한 웃음을 던지는 시장을 기대해본다. 임태순 지방자치뉴스부장 stsli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올해는 현대산업개발 정세영(77) 명예회장과 정몽규(43) 회장이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째 되는 해다. 자동차를 운영하던 경영인이 과연 건설을 잘 이끌겠느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대산업개발은 빠르게 새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일찌감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정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에 인생의 32년을 묶어두는 바람에 뒤늦게 독립했다. 정주영가의 다른 형제들이 현대건설에서 땀 흘리며 가꾸던 회사를 발판으로 분가한 것과 달리 정 명예회장의 ‘왕회장’ 독립은 2세 경영체계 구축과 함께 갑자기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만들어야 팔린다.”면서 ‘현대자동차 신화’를 건설에 접목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교수하면 배고파”, 현대와 인연 정 명예회장이 현대와 인연을 맺은 때가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이다. 고려대 정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 명예회장은 왕회장 밑에서 잡역부 아르바이트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손을 도왔다. 이미 두 형님(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 정순영 현대시멘트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큰형의 메시지가 작용했다.57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당리당략에 빠진 현실 정치에 빠져들기 싫어 정치 지망생의 꿈을 접고 대신 대학 교수의 길을 찾았다. 욕망은 모교 강단에 서고 싶었으나 우선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채용 사실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왕회장은 “나랑 같이 일하자.”고 소매를 잡았다. 늘 그랬지만 그에게 맏형의 말은 제의나 권유가 아닌 명령이나 다름없었고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내 사업으로 생각하고 32년 동안 일궜던 현대자동차도 왕회장이 사실상의 장조카 MK(정몽구)에게 넘겨주라는 한마디에 순순히 따랐을 정도다. 첫 직책은 신입사원 채용위원장. 동시에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하는 일도 겸했다. 왕회장이 처음 맡긴 프로젝트는 시멘트 공장 건설에 필요한 국제개발국차관(AID)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둘째형(인영·85)과 함께 충북 단양의 광산을 사들이는 한편 미국과 국내에서 공장 건설을 위한 교섭을 벌여 어렵사리 성사시켰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보다 더 무서운 시련이 찾아왔다.30대 초반인데도 건강에 이상이 감지됐다. 간경변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마와 씨름하느라 회사를 나가지 못했다. 아내의 정성어린 간병과 용기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일에 뛰어들었다. 새로 부임한 곳이 단양 시멘트공장 공장장이었다. 사선을 넘나들던 건강을 되찾으면서 일에 미쳤다. 65년 대한건설협회 해외시찰단 일원으로 동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마침 태국에 세계은행 자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캐낸 그는 이 사실을 서울 큰형님에게 보고한다. 정 회장은 왕회장으로부터 “태국에 그대로 눌러앉아 공사 진행상황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방문단에서 빠져 관련 정보 입수에 본격 나선다. 이렇게 해서 현대건설 방콕지점장이 됐고 파타니∼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고속도로건설 경험도 없었던 현대였고, 국내 최초의 해외건설 공사 수주로 기록됐다. ●‘포니 정’,32년의 자동차 인생 시작 1967년 시멘트 공장 기계를 사기 위해 미국에 있던 중 본사로부터 포드자동차와 접촉하라는 전보를 받는다. 포드 자동차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 조사단이 방문했는데 서울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미국에서 포드측에 관심있다는 뜻을 전하라는 메시지였다. 즉각 움직여 자동차 산업에 대한 현대의 관심을 전달하고, 포드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둘째형의 적극적인 협상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같은 해 말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는 현대자동차 회사가 설립됐고, 초대 사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이렇게 해서 ‘포니 정’의 32년 자동차 인생이 시작됐다. 자동차 진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포드와의 조립계약을 맺은 뒤 68년 3월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자동차 공장 구경도 못하고 자동차 공장을 지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수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워갔다. 본격적인 공장 건설과 함께 인재 사냥에 나섰다. 급한 대로 현대건설에서 유능한 사람을 빼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양섭 부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 이 부장은 20년 넘게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면서 사장까지 역임했다. 윤주원씨도 현대건설에서 스카우트해 사장까지 지냈다. 신동원씨는 당시 상공부로부터 추천받은 경우다. 신입사원도 뽑기 시작했다. 이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달리는 오늘의 현대차를 있게 한 일꾼들이었다. 마침내 68년 11월 제1호 ‘코티나’가 나왔다. 공장을 짓고 자동차를 생산하기까지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해 5월부터는 중형 승용차 포드 20M도 생산했고,8월에는 자체 설계한 첫 버스를 출고하는 저력을 발휘하면서 쾌속질주를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현대차의 질주를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소리도 들렸다. 경쟁사인 신진자동차와 정치권의 압박으로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70년초 1차 석유파동에 휩싸이면서 판매도 급감했다. 할부로 판매한 자동차의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때 막내 동생 상영(KCC명예회장·69)씨가 잠시 금강슬레이트 경영을 접고 부사장으로 와서 채권회수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 한 마디에 자동차 인생 종지부 언제까지 단순 조립생산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포드와 50대50 합작회사를 만들어 엔진 공장을 짓고 기술을 이전받아 자립의 길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포드가 약속한 지분 50%에 대한 자본 납입을 미루고 협상이 결렬되면서 ‘마이웨이’를 외쳤다.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74년 국산 1호차 조랑말 ‘포니’가 탄생했고 이를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내놓는 기염을 토했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76년 2월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고 중남미를 중심으로 수출까지 이끌어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 기업으로 커갔다. 아울러 96년 MK(정몽구 현대차 회장)가 그룹 회장을 맡을 때까지 9년 동안 왕회장을 대신해 현대호를 이끌었다. 이즈음 현대가의 2세 경영체제가 이뤄지면서 자동차 회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았다. 정 회장은 용산고, 고려대 경영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8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를 몰고가는 드라이버는 몽규 회장이었다. 하지만 삼성자동차 허가, 외환위기라는 거센 풍랑과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에 노사분규 시련도 덮쳤다. 젊은 정 회장에게는 경영자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정 회장은 의연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방주, 김수중, 김판곤 등의 임원이 정 회장의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하지만 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뒤 경영 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MK가 현대차와 기아차의 새 회장으로 오면서 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내려앉는다. 장차 밀어닥칠 일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마침내 99년 3월3일 왕회장은 명예회장을 부른다. 왕회장은 “MK한테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는 말로 자동차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잘못된 것 없다.”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그렇게 해.”라는 왕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내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이끌었던 사업이었지만 거역하지 않고 “예”라는 한마디로 32년 자동차 인생을 접었다. 아울러 왕회장의 생각과 달리 아들 몽규도 함께 자동차를 떠나 현대산업개발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지어야 한다 새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 일은 몽규 회장과 전문 경영인이 맡았다. 명예회장은 경영 자문만 할 정도다. 정 회장은 아파트에 자동차 제조업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사소한 하자가 나와도 불량품이 완전히 고쳐질 때까지 모든 공정을 멈추는 것이다. 현장 중시와 품질경영 기치를 내세웠다. 체면 따위는 내팽개쳤다. 경쟁사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삼성래미안 아파트 강남 일원동 주택전시관을 찾은 적도 있다. 지난해에는 용산 시티파크 모델하우스를 찾아 경쟁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파트 이름을 ‘I-PARK’로 바꾸는 등 변신도 꾀했다. 무리하게 덩치를 키우지 않는 것도 다른 건설사와 다르다. 안정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수주·매출 목표를 줄이는 것도 그에게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 만에 부동산 박사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서울 강남 역삼동 스타타워(아이타워)사옥 매각도 그의 판단이었다. 부채를 갚아 정상적인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로는 최고의 조건으로 넘겼고, 부동산 개발회사가 특정 사옥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돈이 된다 싶으면 정든 사옥도 팔 수 있고, 부동산 회사가 개발 이익을 남기고 사옥을 옮기는 것은 결코 흉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부동산업자는 시장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낭만적인 ‘포니 정家’혼맥 ‘포니 정’과 정 회장은 결혼 과정이 비슷하다. 낭만적이다. 처음부터 명문가를 골라 배필을 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소개해준 여성과 사랑을 싹 틔우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정 명예회장은 대학 시절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한때 사무실 여직원에게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유학길에 오르는 바람에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유학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봤고 현대건설 입사 이후에는 일에 파묻혀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의 소개로 박영자(69) 여사를 만난다. 박 여사는 부산에서 올라와 이화여대 3학년에 다니던 귀여운 단발머리 학생이었다. 첫눈에 사로잡혀 매일 데이트를 할 정도였고 세 번째 만나던 날 프러포즈를 했다.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큰형님과 형수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어했다. 명문대가를 따지지 않는 현대가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으로 내려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은 뒤 만난 지 100일이 안돼 약혼하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정 명예회장은 큰딸을 결혼시키면서 노신영 전 총리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사위 경수(51)씨가 노 전 총리의 장남이다. 노씨는 서울대 교수로 국제정치 전문가다. 노 전 총리 차남은 중앙일보 고 홍진기 회장 딸 홍라영씨와 결혼했다. 이로 인해 노신영가는 국내 굴지의 그룹인 현대, 삼성가와 동시에 사돈 관계를 맺었다. 정 회장의 결혼도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순수함 그대로였다. 역시 반 중매 반 연애로 이뤄졌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김나영(39) 여사를 만났다. 결혼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 몽규 회장이지만 몇몇 절친한 친구한테는 결혼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나영씨는 연대 수학과를 나온 재원. 키도 크고 미인이었다. 첫 만남에서 정 회장은 상당한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정 회장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키도 크고 집안도 좋고 미인인 데다 마음까지 곱다.(아까운데)친구 중 누구 소개 시켜주면 안 될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들이 오히려 격려해 줬다.“너보다 키 작은 여성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 천생배필이다.”며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영씨는 당시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화재는 기울어가는 회사였다. 정략적 결혼이었다면 잘나가는 집안과 결혼했을 터이지만 현대 집안에서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정씨 일가의 결혼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계기로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시절 사돈인 대한화재를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위장계열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중점 관리 대상으로 지정돼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회사는 뒤에 대한생명으로 인수된다. 범 현대가의 경영 특징이지만 현대산업개발에도 처가쪽 사람이 없다. 정 회장 처남이 잠깐 현대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근무했으나 지금은 독립,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 딸 유경(35)씨는 김석성 전 전방회장의 1남4녀중 막내인 종엽씨와 결혼했다. 몽규 회장에 이어 재계 인맥을 형성한다. 유경씨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한 뒤 현대산업개발에서 잠시 근무했다. 종엽씨는 미국 벨뷰대학 출신으로 전방 계열의 내의류 생산업체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역시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 1년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게 됐다. ●다재다능한 전문 경영인 포진 현대산업개발 전문 경영인은 삼각편대로 구성됐다. 자동차에서 정 회장과 함께 현대차를 키웠던 전문 경영인과 현대산업개발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통이 주력부대다. 여기에 금융기관 등에서 스카우트한 전문가 그룹이 한 축을 버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 이방주 사장은 정 명예회장과 정 회장의 핵심 브레인. 전형적인 재무통. 현대자동차 재경본부장과 사장을 거쳤다. 정 회장이 현대산업개발로 옮길 때 함께 배를 갈아탔으며 현대차·현대산업개발을 키운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너의 신임이 남달리 두터워 자동차에 이어 건설회사에서도 대표이사 사장을 6년째 맡고 있다.ROTC 포병장교 출신. 연극계 대부 고 이해랑씨가 부친이며 문화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다. 건설업계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주택협회회장을 맡을 정도로 부동산과 건설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보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정 명예회장과는 고교·대학 동문인 셈이다. 김정중 사장은 77년 현대산업개발에 입사, 국내외 현장을 누빈 건설업계 산증인. 기술연구소장, 건축본부장, 영업본부장을 거쳤다. 과거 현대아파트는 물론 I’PARK까지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아파트다. 마케팅팀 및 영업기획팀을 신설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전고와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김택 현대역사 사장은 현대산업개발 에 입사해 관리본부장, 리모델링 사장을 거쳐 2003년부터 현대역사 사장을 맡고 있다. 고속철도 용산역에 8만 2000평 규모의 복합쇼핑몰 ‘스페이스9’를 운영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소탈한 성격에 정확한 판단과 추진력을 갖춘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용산고, 고려대를 나와 정 회장과 고교·대학 동문이다. 인텔리전트 빌딩, 첨단 홈네트워크 시스템 구축 업체인 아이콘트롤스는 김대철 사장이 맡고 있다. 주거 공간의 유비쿼터스 환경을 구축, 주거혁명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현대산업개발 자재담당 임원과 기획실장을 지냈다. 서라벌고와 고려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출신이다. 장동열 아이앤이 사장은 음악·시·영화 등에 관심이 깊다. 따뜻한 카리스마로 감성경영을 한다는 평을 받는다. 의사결정까지는 심사숙고하지만 일단 정해진 일은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을 지녔다.2년전 현대산업개발의 기계·전기팀에서 떨어져 나간 회사다. 광주고와 전남대 건축공학과를 나왔다. 현대엔지니어링플라스틱 이건원 사장은 현대차 부품개발분야에서 27년 동안 몸담으면서 국내 자동차 부품 및 자동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현대산업개발 유화사업부로 출발,2000년 분사한 회사. 충남 당진에 공장을 갖고 있으며 자동차 내외장재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분야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제품 사용 범위를 밥솥, 김치 냉장고 등 생활가전으로 넓혀가는 중이다. 아이앤콘스는 부산 아이파크 프로축구단장과 현대산업개발 영업기획 임원을 역임한 곽동원 사장이 이끌고 있다. 경남고, 성균대를 나왔다. 중·소규모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건물 리모델링, 개발사업 등 부동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업체다. 유일한 금융관련 회사인 아이투자신탁운용도 있다. 유가증권 투자·운용과 투자자문 업무를 하면서 신뢰받는 금융서비스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표는 글로벌에셋운용 총괄본부장을 역임한 우경정 사장이다. 프로축구단 아이파크스포츠는 이준하 사장이 책임진다. 정 회장과 용산고 동문이자 오랜 친구다. 어려서부터 양쪽 집안끼리 가까웠다. 연대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를 받았다. 현대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영업·마케팅, 홍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 모험적이고 개척정신이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 경영 목표를 ‘한국형 클럽스포츠의 성공적 사업 모델 구축’으로 정했다. 우승과 동시에 스포츠단에도 사업 마인드를 접목시키기 위해 사업다각화와 경영합리화를 꾀하고 있다. chani@seoul.co.kr ■ ‘만능 스포츠맨’ 정몽규 회장 현대산업개발 CEO들은 유난히 스포츠에 애착을 갖는다. 스포츠로 뭉친 인맥경영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정몽규 회장은 스포츠광이다.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다. 선수 수준인 종목만 5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수영은 프로급이다. 승마, 수상스키, 스키(요즘은 보드를 탄다)도 수준급이다. 수상 경력이 있는 종목도 있다. 그는 격한 운동을 좋아한다. 철인3종경기,MTB(산악 자전거타기) 마니아다. 기업인 중심으로 구성된 철인3종경기 동호인이다. 얼마전에는 스키장에서 보드로 스피드를 즐기다가 안전 펜스를 뛰어넘으면서 어깨를 다친 적도 있다. 기계 위에서 하는 운동은 별로다. 가끔 한강변이나 남산에서 뛰기도 한다. 정 회장은 “콧구멍이 시커머지더라도 밖에서 운동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한다. 골프는 할 줄은 알지만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운동할 때는 운동에 전념해야 하는데 골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도 싫다. 정 명예회장도 30년 이상 수상스키를 즐겼다. 바쁜 일정 중에도 양수리에서 물 위를 활주하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수상스키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선수 육성과 보급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이방주 사장도 스포츠를 즐기는 CEO다.1년에 3∼4회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다. 최근 10㎞를 1시간 안에 뛰었다. 시간이 나면 등산을 한다. 회사 차원에서는 프로축구 아이파크 스포츠단을 운영한다. 회사 차원의 지원도 대단하다.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10여곳의 재개발단지를 수주하는데 상당한 보탬이 됐다고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단이 그렇듯이 아이파크 축구단도 해마다 적자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적극 밀어준다. 스포츠단 이준하 사장은 재미있는 스포츠에 사업성을 가미한 경영을 한다. 올해 적자폭을 줄이고 돈을 벌 수 있는 별도 사업을 추진, 스포츠단을 모회사에 손을 내밀지 않을 정도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chani@seoul.co.kr ■ 정세영·몽규 父子 ‘막노동 경영수업’ 정세영 명예회장과 몽규 회장은 경영 수업의 첫 출발도 비슷하다. 이 때 형성된 인맥은 건설이나 자동차 회사의 초석을 다지는 주역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부친이 부산 피란시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막 벌여놓은 현대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큰형(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둘째형(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이 미군 공사를 수주해 오면 시장에 나가 현장에 투입할 인부를 모아오고 자재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이 때 만난 이춘림씨는 훗날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다. 이 전 회장은 그래도 건축도(당시 서울대 건축학과 3학년생)라서 설계를 하고 공사 감독도 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잡역부이자 막노동꾼이었다. 막노동판에서 만난 인맥은 현대건설을 떠날 때까지 끈끈하게 유지된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외아들 몽규에게 혹독하게 경영 훈련을 시켰다. 대학생이었던 정 회장은 방학 때면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고된 잡일을 해야 했다. 임직원들도 모르게 했다. 땡볕 아래서 리어카를 끌고 숙식도 독신자 기숙사에서 해결하는 생활이었다. 정 회장은 울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것을 가장 기억이 남는 과거로 떠올린다. 자식뿐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도 가혹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강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게 훈련시켰고 인맥을 관리했다. 자동차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경영인들을 잘 관리했고, 그 뒤에 현대산업개발로 모셔와(?) 중역을 맡겼다. 이방주 사장을 비롯해 김판곤 전 현대역사 사장 등이 자동차에서 날리던 선수들이다. 이들은 정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키운 베테랑 경영자들이다. 정 회장 역시 자녀 교육에 엄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학생인 큰아들 준선(13)이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영국으로 홀로 유학보냈다. 준선이는 재능을 인정받아 당당히 이튼스쿨에 자력으로 입학했다. 따로 돌봐주는 사람 없이 기숙사에서 생활토록 하고 있다. 호랑이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식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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