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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대남정책 “큰변화 없다”/평양방송 “3원칙·10강령고수” 밝혀

    ◎정·경 분리… 남의 직접투자도 꺼릴듯 김정일체제의 성격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18일 평양방송이 김정일이 김일성의 통일노선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이날 평양방송은 김정일이 아버지의 「혁명위업」을 계승할 것이라고 공언하는 한편 통일문제는 7·4공동성명의 3대원칙과 이른바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같은 방송내용이 김정일의 의중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대남정책이 획기적으로 유연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북한이 그동안 주장해온 자주·평화·민족대단결 등 평화통일 3원칙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됐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있다.북한이 주장하는 자주의 개념은 곧 외세추방,즉 주한미군 철수를 뜻하며 민족대단결도 우리측 정부당국과 민간을 분열시키기 위한 「통일전선」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다는 「10대강령」도 미사려구로 포장하고 있긴 하나 여기에는 우리측이 수용하기 어려운 4개항의 실천적 요구가 반드시 부가된다는 데서 마찬가지 맥락이다.즉 주한미군 철수와 미국의 핵우산 탈피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김정일이 선대의 대남정책을 답습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그의 지도력과 권력기반이 근본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다.당분간 그는 자신의 권력공고화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처지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남북관계에서도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양면전략을 쓸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다수의 북한전문가들의 전망이다.다시 말해 북한은 한국이 바라는 이산가족 교류를 포함한 전면적인 인적·물적 교류는 가능한한 피하면서 자본합작을 통해 「익명의」 한국자본을 유치하는 제한된 경제교류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한국자본을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나진·선봉 경제특구라는 제한된 울타리안에,그것도 가능한한 한국의 직접투자가 아닌 중국 등과의 합작형태를 희망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 「장례식 연기」 정부·여권 분석·대응

    ◎북 의도 3∼4갈래 상정… 대책 강구/“체제결속용” 우세… 조문논쟁 자제 희망/정부/「이틀 연기」 주목… “대남선동 포석” 진단/민자 정부는 16일 북한이 김일성의 장례식을 돌연 이틀 연기하자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놓고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이홍구통일부총리는 이날 상오 한승주외무장관,청와대의 박관용비서실장·정종욱외교안보수석등과 긴급 간담회를 갖고 장례식의 연기배경과 그에 따른 정부 대책을 논의했다. 민자당도 당직자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뒤 북한의 교란전술에 말려들 우려를 막기 위해 정치권에서 벌어진 조문 논쟁이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정부◁ ○…청와대와 통일원 외무부등 관련부처들은 이날 아침 일찍부터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부산.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의 김일성 장례식 연기 배경에 대해 ▲내부 결속 강화 ▲대남 교란및 선전활동 ▲김정일 권력승계의 차질 ▲장례절차의 미확정등의 3∼4가지 가능성을 추론해보면서 대책을 검토. 청와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의 권력승계가 아직완료되지 않았거나 권력승계과정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면서 『그럴때는 한반도에서 위기가 고조될 수도 있으므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 이 당국자는 『그러나 현재로서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광을 이용,내부 단결을 강화함으로써 자기 체제를 더욱 공고히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고 밝히고 『하루이틀 지켜보면 보다 윤곽이 뚜렷해 질 것』이라고 전망. 통일원의 한 관계자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장례식을 연기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북한 내부의 급격한 변동 가능성이 우려되지만 아직은 이상조짐이 나타지않고 있다』고 말해 장례식 연기가 「북한 체제 결속용」일 확률이 크다는 견해를 뒷받침. ○…김일성 장례식의 연기와 관련,정부 당국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북한이 대남선전을 위해 장례기일을 끌고 있지 않느냐하는 부분. 북한이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장례일이 다가올수록 교란공작이 심해질 것으로 보고 다각도의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우선 이영덕국무총리가 나서 김일성 사망 조문에 대한정부의 공식견해를 밝힘으로써 일반의 논란을 잠재우고 정치권에서의 조문논란도 자제해야 한다는게 정부의 희망. ▷민자당◁ ○…민자당은 북한이 내부문제로 김일성의 장례식을 연기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주로 남한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연기했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는 경향. 이세기정책위의장은 이날 고위당직자회의에서 『북한의 장례식 연기는 ▲김일성에 대한 추모분위기를 김정일의 권력승계 구축에 이용하기 위한 북한 내부목적용 ▲우리의 국론분열파동을 부추기기 위한 남한교란용 ▲해외거주 친북세력을 최대한 평양에 유인하기 위한 대외목적용 등 3가지 각도로 분석된다』면서 『북한이 15일부터 재개한 대남 비방방송의 강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보고. 안기부장출신의 외무통일위소속 안무혁의원은 『장례식을 단 이틀만 연기한 점에 비추어 북한 내부문제때문은 아닌 것같다』면서 『그보다는 조문을 둘러싼 김정일의 세과시와 남한사회의 분열을 고려한 측면이 더 클것』이라고 진단. 한 고위당직자 역시 『북한 자체의내부문제도 있겠지만 남한에서 조문파동이 나오고 하니까 그 효과를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연기했을 것』이라고 장례식 연기를 남한교란용으로 해석. 박범진대변인은 이날 회의가 끝난뒤 『당은 북한이 이처럼 시신마저 정치목적에 이용하는 정체임을 우리 국민들이 똑똑히 알고 경각심을 다져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
  • 「모택동식 절차」 준용 전망/장례식­추도대회 어떻게

    ◎추도대회 모보다 더 큰 규모로 치를듯 북한은 당초 17일로 예정된 김일성의 장례식 계획을 번복,19일에 장례식을 거행하고 이와별도로 20일에 추도대회를 갖기로 했다. 이같이 장례식과 추도대회를 분리한 것은 장례식날에는 「눈물의 인산인해」를 이루고 추도대회는 소위 김일성의 「혁명위업」을 높이 평가하고 이의 계승이 중요하다며 김정일중심의 일심단결을 촉구하는 분위기 전환의 추대대회로 만들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추도대회의 여세를 몰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등을 개최,노동당 핵심지도자들이 비밀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추대」를 추인하려는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이 김일성의 장례식과 추도대회를 어떻게 치를지는 알려지지않고 있으나 상당부분 중국 모택동주석의 예를 따를 것 같다는게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모의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 10일 뒤인 76년 9월18일 천안문광장에서 1백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다.북한당국은 김일성 사망 이후 12일 뒤에 열릴 추도대회를이보다 더 큰 규모로 치를 것으로 보인다. 김의 장례식행사는 대략 19일 상오10시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10시부터 주석궁(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됐던 유해가 김일성광장으로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이때 김의 사망이후 허탈감에 빠진 북한주민들의 오열을 유발,「울음바다」로 추모무드를 이끌어갈 것 같다. 이어 20일 거행되는 추도대회는 「민족의 태양」이라고 떠받들던 그의 위상을 감안,12시 정각 3분간의 묵념으로 시작할 것 으로 보인다.이때 평양시와 각도 소재지에서는 조포를 쏘고 기관차와 선박들이 일제히 고동을 울리게 되며 묵념이 끝나면 고인의 업적보고와 추도사 순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추도사는 한사람이 대표로 하기 보다는 당·정·군 뿐만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대표로 1명씩 나서 『김일성주석에 이어 김정일동지의 높은 뜻을 받들어 우리식 사회주의를 완성하자』는 등의 충성다짐대회의 성격을 띠게 될 것 같다.물론 추도사를 맡는 사람은 향후 북한 권력의 중추가 될 실력자들이다. 추도대회가 끝난뒤 김일성의 시신은 일단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됐다가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한 시점에 평양교외 단군릉 근처에 조성된 김일성기념관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많다는 관측이다.
  • 신임경찰수뇌 3명 프로필

    ◎이기태경찰청차장/간부후보14기… 업무에 완벽 간부후보생 14기로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업무에 있어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실무형.조계사의 공권력투입으로 한동안 곤욕을 치렀으나 지난해 9월 서울청장에 임명된 이후 별무리 없이 청장직을 수행했다는 평. ▲충남 서산출신(57세) ▲국민대 정치학과 ▲83년 서울마포경찰서장 ▲87년 서울청 올림픽기획단장 ▲93년 경찰청 정보국장 ▲서울경찰청장 ◎박일용서울경찰청장/실무능력 탁월 「고시파」 선두 고시 10회 행정과를 합격한 경찰내 고시파 선두이며 경남고 출신.부산경찰청장으로 있던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부산초원복집회동」 때문에 서울청장으로 거론될 때마다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불운을 겪기도.배짱과 뚝심이 있으며 실무능력이 뛰어나다. ▲부산출신(54세) ▲서울대 법대 ▲서울 관악경찰서장 ▲91년 부산청장 ▲93년 중앙경찰학교장 ▲해양경찰청장 ◎정진규해양경찰청장/적 만들지 않고 소탈한 성품 인화단결을 강조하고 조직에서 적을 만들지 않는 소탈한 성품에다 보스기질이 있고 기획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간부후보 14기 출신으로 청와대치안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업무를 무리없이 처리,치안정감자리에 발탁됐다는 후문. ▲경기 가평출신(57세) ▲건국대 정치학과 ▲85년 서울강서경찰서장 ▲91년 경찰청 기획관리관 ▲93년 경남청장 ▲청와대 치안비서관
  • “김일성 유언 남겼을까” 궁금증 증폭

    ◎「사망직전 상황」으로 추정한 「가능성」/왕성한 활동하다 급성 심근경색 돌발/의식 있었어도 「단순 부탁」에 그쳤을듯 김일성은 죽기 전에 유언이나 유서를 남겼을까.남겼다면 어떤 내용이었을까.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지난 8일 새벽 김일성이 사망한 뒤 북한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와 방송,신문,외국 언론인,여행자등 어느 누구로부터도 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고 통일원은 밝히고 있다. 북한의 중앙방송은 김일성의 유언이나 유서 대신 생전에 남긴 가르침인 「유훈」을 방송하고 있다.『김정일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그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나가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행적과 상황을 더듬어 보면 유언을 남겼는지 그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김일성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지난 6일.그는 광업관련 행사에 참가,「패기와 정열에 넘쳐」 경제발전 방향등에 대해 교시를 내렸다고 내외통신은 보도했다.따라서 이때에는 유언을 준비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7일 김일성은 갑자기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주석궁 내실로 옮겨졌다.이때 김일성의 상태는 매우 악화돼 회복불능이라는 판단을 김정일등 지도부는 내린다.조총련에 김주석에게 변고가 있을 가능성을 전달한 것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그렇다면 이때 김일성의 주위에는 그의 임종을 지켜볼만한 인물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아들이며 후계자인 김정일,오랜 동지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부인 김성애,딸 김경희등이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만일 이 때 김일성이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었다면 대부분 가족이면서 북한의 통치자들이기도 한 그들에게 유언을 남겼을 가능성이 많다.물론 의식이 없었다면 유언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통일원 관계자들은 김일성이 입을 열었다 하더라도 『정일이를 잘 돌봐줘라』하는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김일성주석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한번 집권하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지켰다.이 가운데 유서를 남긴 것으로 기록된 대표적인 인물은 소련의 레닌과 중국의 모택동이다.그러나 이들이 남겼다는 유서는 발표된 뒤 안팎으로부터 끊임없이 조작의혹을 받아왔다. 레닌이 사망한뒤 스탈린은 『레닌이 「스탈린을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편지형식의 유서를 당 중앙위원들에게 남겼다』고 밝혔다.스탈린은 권력의 승계과정에서 일부에게는 그 편지를 보여준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사가들은 이 편지가 레닌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한 스탈린에 의해 조작됐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레닌은 죽기 2년전부터 『스탈린은 성질이 난폭해 권력을 잡으면 안된다』는 말을 되풀이 해온 사실이 밝혀진 때문이다. 지난 76년에 사망한 모택동도 임종을 지킨 장모여인에게 여섯글자의 시 형식을 빌려 「당신이 있어 나는 든든하다」는 글귀를 적어줬다.모가 죽자 장여인은 이 글을 화국봉에게 건네줬다.화는 모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한 유서라고 내세워 집권했다. 김정일이 어떤 형식이든 김일성으로부터 유서를 받았다면 권력기반을 다지는데 순조롭지 못한 상황이 올 때 공개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유서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을 것이다.
  • 김정일의 핵정책은(김일성 사후:6)

    ◎체제존망 걸린 문제… 불투명성 여전/3단계회담 지켜봐야 속셈 드러날듯/“경제 살리려 핵해결 불가피” 낙관도 북한주석 김일성이 죽었다고 해서 겉으로 보면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김일성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말고는 핵문제도 그대로 있고 한반도에 대한 미·중·일·러등 주변국가들의 이해관계도 여전하다.김일성의 사망후 주변 4나라의 움직임을 보면 김정일체제가 굳어져 가고 있는데 대한 대응책에 부심하고 있는 듯하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권력세습이 이처럼 별무리 없이 이루어진다면 김일성이 죽기 직전 강경노선에서 대화쪽으로 선회했던 핵정책 또한 게속성을 지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적절한 타결책이 모색되리라는 긍정적인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그러면서도 김정일이 오랫동안 실무를 지휘해왔다고는 하나 그의 일처리 방식이나 개성,사고구조가 전혀 노출되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를 궁금해 하고 있다. 김일성 사망후,바꿔말해 새로 출범하는 김정일체제하에서 북한핵문제가 굴러갈 방향을 짐작하게 해주는 유일한 실마리는 지난 10일 미국과 북한의 3단계 고위급 회담 미국측 대표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와 북한측 대표 강석주외교부 부부장사이에 이루어졌던 합의이다. 북한과 미국은 이때 미국과 북한의 고위급회담을 김일성장례식후 속개할 것에 합의했으며,특히 북한은 기존의 노선을 견지할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이러한 합의가 일정의 연기에 관한 것일뿐 그동안의 쟁점사항에 대한 합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북한핵문제의 해결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라고 할수있다. 게다가 김일성이 죽어버린 현재의 상황은 북한으로서는 분명히 위기상황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주민들을 자극,인위적인 단결을 도모해야 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또 이번 합의는 대화의 불씨를 살려두었다는 점에서 당분간 대화국면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만을 가능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이 김일성의 장례도 치르지 않은 와중에서 미국과의 3단계 고위급회담과 심지어 남북정상회담도 가질 의사를 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결과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란 지적도 나온다. 대부분의 북한핵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카드를 생존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만큼 그리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있다.이제껏처럼 밀고당기는 지루한 싸움이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김정일체제로서는 외부에 국력을 분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경제개발과 개방에 힘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체제의 한계 때문에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핵문제의 해결점을 찾아 나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특히 북한의 핵문제는 「김일성의 사망」이라는 충격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지만 이는 앞으로 김정일체제의 존망과도 직결되어 있는 중요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앞으로 있을 미국과 북한의 3단계회담이 성사되면 남북정상회담에 임할 북한의 태도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있는 중요한 가늠자 구실을 할 것으로 여겨진다.회담의 성과와는 별도로 외부에서 궁금해 하는 김정일의 사고성향,핵문제등에 있어서의 역할,체제의 안정수준,그리고 앞으로 그의 정책방향에 대해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 “자유체제로 이행” 요구하라/최평길(대북정책 새 접근)

    ◎상호사찰 강조… 불응땐 핵보유카드 써야 집권 50년­역대의 군왕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기집권이다.김일성의 죽음은 그만큼 북한은 물론 남한에도 6·25이래 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동북아시아에 준 충격도 크다. 조카 김정일의 20년 견제를 받아온 김영주는 김일성왕조를 공멸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김일성 생전의 간곡한 요청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호하듯 가족단결의 대부로 앞장서고 있다. 김일성은 50년 장기집권동안 사돈·겹사돈·사촌·재종·조카·9촌까지 연계시켜 장관급인 노동당중앙위원회의 정위원·후보위원 2백41명 가운데 물경 20%에 달하는 50명 가까이를 친인척으로 앉혔다. 그들은 헤어지면 죽는다는 가족적 공포감,남한에 의한 흡수통합,체제붕괴,핵무기개발로 인한 전쟁공포등 삼중사중의 기득권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치밀하게 조직하고 간곡히 부탁한 김정일을 8순의 게릴라출신이 볼 때는 못가에서 노는 아이처럼 보이고,60∼70대의 전쟁복구세대는 온실에서 자란 김정일화로,50대이하는 아비의 업적에 무임승차하는 그저 물려받은 창업 2세대로 볼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이 김일성 뒤를 이어 창업을 이루어갈 것인가는 그가 2백여명의 핵심간부와 2백만의 기득권세력의 이합집산을 막으면서 하루 두끼의 강냉이죽과 밀가루국수라도 배불리 먹일 것인지,장기집권한 빨치산 원로군부,젊은 장성,영관장교등 신세대군부를 조직계통으로나 덕으로 얼마나 장악하느냐에 달렸다. 지난 90년 비내리는 7월 여름날 모스크바 국방부 신청사 앞에서 모스크바군사대학에서 5년 동안 장기유학중인 3백명 대위·소좌그룹중 한명인 현준민소좌를 만났다.그는 평양을 떠나올 때 전인민군중에서 부대통솔력에서 제일이고 김일성주석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충성심으로 선발,파견된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루마니아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고 고르바초프·옐친이 직선제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북한의 노동당이 유일집권당이려면 국민투표를 해야 하고 김정일이 주석이 되려면 공개적으로 많은 후보를 내세운 직선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그 이후 3백명의 유학군인은 모조리 평양에 소환되고 말았다. 유학생,유학파군인,해외근무 경험이 있는 외교관,연합기업소관리장,노동신문·민주조선의 지성있는 언론인등도 잠재적 개혁세력이다. 이들은 현저히 약해져가는 북한통치관료조직에서 서서히 자기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 군부개혁신진세력은 명분만 생기고,허점이 보일 때 독자적으로 연합전선을 펼치려 할 것이다. 그러한 모의는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원 2백46명을 평양 만수산의사당에 집합시켜 놓고 만장일치로 총비서에 오르기 위해 물밑설득을 하는 이 순간에도 동시다발로 일어날 것이다.오히려 이들보다 먼저 김영주·강성산·연형묵·김환·김달현등 친인척 측근그룹이 김정일은 안되겠다고 정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북한의 1인집권체제의 붕괴작용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이 시기에 한국의 김영삼대통령은 확실하고도 자신있는 대북정책을 정력적으로 밀고나가야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사유재산 인정,다당제에 의한 의회민주주의를포함한 진보적 문화복지와 자유민주가 통일코리아의 기본이념이며 그 방향으로 북한도 발전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중기적으로는 임가공과 경제특구건설등 경제원조를 하고 경제협력의 물꼬를 트는 현실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할 때 과거의 핵투명성보장과 함께 핵무기개발을 중지할 것을 증명하는 남북핵상호사찰을 반드시 실천해야 된다.만약 북한이 고의로 이를 회피하고 핵개발을 계속할 경우 한국은 북한에 앞서 핵무기제조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여주어야 한다.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과 확실한 공조체제를 유지하여 현수준에서의 핵동결에 만족하지 말고 한국과 미국이 핵무기개발에 한자·한획도 떨림이 없는 공동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계속될 정변에서 새롭게 북한최고지도자가 부상할 때마다 김영삼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을 요청할 것이다.북한최고지도자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니셔티브를 김대통령이 갖게 되었으니 이제는민주주의를 가르쳐주는 한반도의 문민대통령위상을 보여줄 때다.
  • 세습체제 국제평가(김일성 사후:5)

    ◎김정일 공식지지 아직은 중국뿐/대권승계 공식발표까진 입장 유보 「초읽기에 들어간 김정일체제가 언제 공식 출범할 것인가」­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온통 여기에 쏠려 있다.그러나 김정일체제에 대한 전망이나 분석,공식 평가는 아직 내리지 않고 있다.일단 공식 출범 때까지 기다린뒤 그때 가서야 발표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만에 하나 변수라도 고려하는 것이 국가 사이의 외교 생리이다.괜스레 잘못 평가했다가 다른 체제가 들어서거나,또는 그 체제가 갑자기 무너져버리면 자국의 이익은 물론 치명적인 외교적 상처를 입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중국 말고는 어느 국가나 김정일체제를 정식으로 인정할지 좀더 두고봐야 한다.다만 지금까지 김정일체제의 출범 움직임에 대해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나라는 거의 없어 보인다. 지난 73년 김일성이 그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만 해도 국제사회,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는 「부자 세습」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었다.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소련이나 중국도 처음에는 비슷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20년 가까이 흐르면서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모두들 변해버렸다.실리를 좇아 분주히 움직이는 국제사회의 모순된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국제사회의 평가를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북한은 장례식에 외국 조문사절을 받지 않기로 했으나 조전이나 조의성명까지를 거부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12일까지 김일성의 사망에 조전을 보낸 국가는 모두 35개국으로 집계되고 있다.캐나다·인도·스위스·파키스탄·몽골·인도네시아·베트남·캄보디아등 그동안 북한과 가깝게 지내던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중국은 김정일이 장의위원장으로 발표된뒤 최고지도자 등소평 말고도 강택민주석·이붕총리·교석전인대위원장등 3인의 공동 명의로 『조선인민이 김정일동지를 중심으로 단결,계속 전진할 것을 믿는다』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중국이 최초로 김정일체제의 출범을 공식 인정한 셈이다. 클린턴 미국대통령도 김일성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미국민을 대표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조의성명을 발표했고,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의 새체제와도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김정일체제를 사실상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나섰다. 이렇게 볼때 김정일체제는 공식 출범만 하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고 대화파트너로 자리잡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생각보다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쉽게 김정일체제 인정 쪽으로 기운데는 핵문제를 지나치게 의식한 클린턴대통령의 태도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그러나 그것 또한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언젠가는 정상을 회복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되짚어 보게 된다.따라서 김정일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취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 김정일체제 정착되면 개방 “노크”/러서 본 「김일성사후 북한」

    ◎집권초기 대외교류 가능성은 거의없어/현재론 주민 욕구분출 조짐 안나타나/세습정권 장기통치 힘드나 식량위기 해소 주력할듯 러시아는 김일성 사후 북한의 장래를 ▲김정일이 권력을 순조롭게 장악해 일정기간뒤 개방정책을 추진할 가능성 ▲김정일이 초기단계부터 개방정책을 주도할 가능성 ▲김정일이 집권초기에 실각할 가능성 ▲일반주민들의 개혁욕구가 폭발하는 경우 등 모두 4가지 대안을 상정하고 있다고 러시아 외무부의 한 당국자가 11일 밝혔다.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에 근무하다 최근 모스크바로 출장중인 알렉산더 말렌코프씨(40·가명)는 이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그러나 군부를 포함,현재 북한내에서 반금정일 세력은 전무하며 적어도 초기단계에 김정일의 권력장악은 기정사실』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4가지 대안중 러시아는 김정일이 일정기간 권력을 공고히 한 뒤 집권층 내부에 개방여부를 둘러싼 내분이 표출되면서 불가피하게 개방정책을 시작하는 첫번째 대안을 가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 권력강화기간에는 김정일추종세력들이 단결해 체제강화를 위한 억압정책을 계속할 가능성이 크지만 대부분의 전체주의정권의 경우에서 보듯 일정기간이 지나면 집권층내에서 주도권 쟁탈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 이 단결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분석했다.권력강화기간을 거치면서 경제력이 바닥나고 사회적 불만이 극에 달해 변화가 불가피한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소위 김정일 일족내 반란예비세력으로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세력,군부 등이라고 이 시나리오는 상정하고 있다. 두번째 김정일이 초기단계부터 개방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은 소위 김정일 일파내에서 개방파의 목소리가 우세할 경우이다.그러나 이 경우는 그동안 김일성이 유지해온 체제의 보수성등을 감안,큰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이 시나리오는 전망하고 있다. 세번째는 최악의 대안으로 김정일이 집권초기 권좌에서 밀려나는 것인데 이 경우는 북한권력이 곧바로 내부의 대결국면으로 치닫게돼 자칫 유혈사태 등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것을 의미하고 있다. 마지막 대안은 국민들사이에 개혁욕구가 분출돼 소위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상황이 북한에서 재연될 경우다.그러나 이는 개방개혁에 대한 인식이 어느정도 심어져 있는 북한내 일부 식자층과 일반국민들의 인식차가 워낙 커 개방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지는 12일자 김일성사망과 관련한 특집기사에서 김정일은 오래 권좌에 머물지는 못할 것이며 가까운 장래에 김정일의 퇴진,북한의 대외개방,국내 자유화 등이 잇따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신문은 『김일성사후 북한에서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은 스탈린 사망직후 소련의 혁명적 변화를 예견하기 어려웠던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붕괴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으로 볼때 김정일이 오랫동안 북한을 통치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신문은 특히 김정일은 아버지와 같은 능력을 거의 갖고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라전체가 자신에게 복종할 것이라는 망상속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굳게 믿고 있다면서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오류를 깨닫게 될 것이며 앞으로 대외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외국인들에게 북한입국을 허용하고 국내적으로도 주민생활 향상을 위해 일부 제약을 철폐하는 한편 특히 식량위기 해결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김정일이 실권할 경우와 관련,이 신문은 『(만일 김정일이 물러났을 경우) 그의 퇴진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의 새 지도부가 김일성정권의 범죄행위에 대해 자주 언급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은 북한이 새로운 방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들』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이 신문은 앞으로 10년후쯤 러시아 동북국경에 인구 7천만의 산업잠재력이 높은 강력한 민주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며 통일한국의 등장을 전망하고 통일한국은 세계에서 4번째의 경제중심지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 김정일 통치방식/북,“광폭·인덕정치” 떠받들어

    ◎작년부터/“대담하고 통큰 지도자” 선전 북한은 김정일후계체제를 굳히기 위해 지난해부터 그의 정치스타일을 「광벽정치」,「은덕정치」로 치켜세우는 한편 92년부터는 「김정일주의」라고 명명하는등 그를 대정치가인양 떠받들어왔다. 광폭정치란 김정일이가 『대담하고 통이 크게』 지도한다 해서 이름붙인 통치방식을 말한다. 이 말은 지난해 1월 28일 처음으로 사용됐다.당기관지 노동신문이 이날 게재한 「인덕정치가 실현되는 사회주의 만세」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인민을 위한 정치는 그릇이 커야한다』 『노동계급의 당의 정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의 폭이 넓어야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통치방식을 광폭정치로 표현한 것이다. 주체사상탑,개선문,유경호텔,5·1경기장 등 그동안 김정일의 대표적인 치적물로 선전해 온 것들이 그의 광폭정책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또 인덕정치란 북한이 김정일의 지도자적 자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광폭정치와 함께 제시하고 있는 그의 통치방식을 지칭한다. 북한은 지난해 노동신문 논설을 통해 『김정일이 인민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지니고 우리인민을 위한 가장 훌륭한 「인덕정치」를 베풀고 있다』고 주장,그의 통치방식으로 「인덕장치」를 아울러 제시했다. 북한은 이 논설에서 그의 통치방식으로 제시한 「인덕정치」에 대해 『역사적으로 나라는 인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전해왔다』면서 『인덕정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인민을 정치의 주인으로 여기고 인민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정치를 실시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김정일주의란 78세를 일기로 지난 92년 사망한 방학세라는 사람의 부인 권영희가 그동안 김정일이 방학세와 그 가족에게 보여준 은덕에 감사하기 위해 보낸 편지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사용된 용어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권영희는 김정일의 은덕에 감읍하는 가운데 『그 어떤 풍파가 닥치고 유혹의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없이 오직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우리 혁명의 최고령수,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받들고 영원히 따르며 우리 조국을 「김정일주의」조국으로 빛내기 위한 투쟁에서 생명도 가정도 다 바쳐 싸워나갈 것』이라면서 김정일주의를 언급했다.
  • 권력교체 틈타 대북영향력 강화 모색/한반도주변 4강의 북상황 대응

    ◎중 고위급 잇단 조전… 신속지원 나서/미도 협조 제스처… 일·러선일단 관망 미국·중국·일본·러시아등 한반도주변 4개국은 북한주석 김일성이 사망한뒤 펼쳐질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인식같아 보인다.여기에는 네나라 정부와 언론의 시각이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들 4개국은 북한에 김정일체제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수긍하면서 그에 따른 자국의 이해관계를 면밀하게 계산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은 김일성사후에도 북한정국에 가장 발빠르고 깊숙한 대응을 하고 있다.중국은 김일성사망이 공식발표된 직후 최고실력자 등소평을 비롯,강택민국가주석과 이붕총리,교석전인대상무위원장등 최고지도부가 북한에 조전을 보내 『김정일이 이끄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고 국가건설과 영구평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펴나갈 것을 굳게 믿는다』고 김정일체제의 등장을 기정사실화해 버렸다. 중국으로서는 다소 불안정해 보이는 김정일체제를 하루빨리 안정기조에 올려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하자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중국은 김정일이 안정된 권력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측면지원을 계속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도 김정일체제를 인정하는데 중국못지 않게 적극적이다. 클린턴대통령은 김일성사망직후 직접 조의를 표시했다.또 주한미군의 추가경계태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보좌진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는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재개를 통해 북한핵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는 한편 정권의 교체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중국과 미국 두나라의 「협조적 제스처」에 대해서는 북한도 화답을 보내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사실을 공식발표하기에 앞서 중국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또 북한의 방송들은 10일 클린턴미국대통령과 카터전미국대통령이 김일성의 사망에 조의를 표명한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장례식에 카터를 초청할 뜻을 비추고 있다. 두나라에 비해일본과 러시아는 한걸음 떨어져 북한을 관망하고 있는 것같다. 일본은 김일성의 사망에 대해 정부대변인인 이가라시관방장관의 논평을 통해 『돌연한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한다』면서 『미·북고위급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일어난 이번 사태가 한반도평화와 안정에 나쁜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일본은 북한에서 누가 정권을 잡든간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국교정상화를 앞당기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일본이 조문단의 파견의사를 타진했으나 북한이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급진전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는 일부전문가들이 「사실상의 적대관계」라고 표현할 정도로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김일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직접 복원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다만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돼 경수로를 건설하면 기술을 제공,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같다.
  • 「주체사상의 지주」는 무너지고…/운동권 새진로 모색할까

    ◎북체제 변화따라 방향 수정할듯/한총련선 “당분간 현노선 고수할것” 김일성사망이후 한총련등 운동권 학생들의 앞으로의 행동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망소식이 발표된 이후 운동권 학생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학생들은 『사태변화를 지켜볼뿐 지금 상태에서는 말할 입장이 못된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몇몇 대학에 대자보가 등장했으나 김의 사망사실만 전하고 있을 뿐 특별한 논평등은 싣지 않고 있다. 한총련 관계자는 11일 『김주석의 사망소식에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남북상황등을 정확하게 인식,앞으로의 통일사업을 어떻게 전개하느냐를 논의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한총련 간부들은 지난 9일 사망소식이 보도된뒤 긴급 중앙상임위원회를 열어 추모방법과 김주석사후의 통일운동방향등을 논의했으나 구체적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이에 따라 10일쯤 공식 기자회견을 갖겠다던 계획도 취소했다. 김준일한총련정책위원(26)은 『현재로서는 북의 체제변화에 따라 한총련의 통일노선이 갑자기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어떠한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민족통일3대원칙이 지켜진다면 대화상대로 인정할 것이라는 원칙론을 펴고 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학생운동의 노선이 크게 수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민족해방(NL)계열이 주도하고 있는 학생운동권이 김일성이라는 사상적 지주를 잃음으로써 자연히 방향전환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더구나 북한내부체제가 급변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에따라 국제정세및 통일환경 역시 달라질 것으로 보여 운동권의 자세변화도 필연적이라는 해석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은 그들이 말하는 통일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북한의 전권을 쥐었던 김일성과의 직접대화에 전적으로 의지해 왔다. 수차례에 걸쳐 학생대표를 평양에 파견한 것이나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베를린에 있는 범청학련 사무국장 최정남씨(25)를 보내기로 했던 것도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김정일 후계체제가 확립되면 학생들은 통일운동에 있어 그전의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 법적 제약등 여러가지 현실적 한계로 인해 비밀방북을 통한 북한 최고통치자와의 담판등에 의존할수 밖에 없는 운동권으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운동권은 김정일 후계체제를 기정사실화하고 그에 따른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김정책위원은 『김정일은 수십년전부터 후계기반을 닦아왔기 때문에 권력승계에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을 것』이라면서 『그가 김주석 통일노선을 계승한다면 언제라도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학생운동권의 통일에 관한 구체적 노선변화는 북한내부변화와 맞물려 이뤄질 전망이다.
  • 울부짖는 평양… “주체 공황”/김일성사망발표 사흘째 이모저모

    ◎3일새 평양주민 80% 추모행사에/북 당정 고위간부들 “김정일에 충성” 김일성 사망이 공식발표된지 하루가 지난 10일에도 북한주민들은 여전히 김일성동상 앞에 몰려들어 애도를 표하고 있으나 하루전의 충격에 비하면 다소 평온을 되찾은 듯한 분위기며 평양시내의 시민들 왕래도 9일보다 자유롭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북한은 또 이날부터 당정간부들을 동원해 김정일에 대한 지지와 충성을 다짐하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최상의 미사여구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방송을 잇따라 내보내고 있다. ○…외신들은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동상에 몰려와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고 보도.평양에 거주하는 한 외국인은 AFP 북경지사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시내 곳곳에서 떼를 지어 모여든 수천,수만의 시민들이 헌화·애도하는 광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2∼3일 새에 80% 이상의 평양시민이 동상애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한 평양주재 외교관은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울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다.사망발표의 첫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같다』고 전언.이 외교관에 따르면 평양거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애도음악이 이어지고 있으나 교통·상점등 생활의 기본서비스는 예전과 변동없이 베풀어지고 있다. 평양시내는 평온하고 시민들의 왕래도 자유로워 보안이 강화되는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북한주민들은 10일 이른 아침부터 인근에 있는 김일성동상을 찾아가 그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중앙방송은 이날 아침방송에서 『전당 전민 전군이 끝없이 경모의 마음을 안고 김일성동지의 서거에 가장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면서 『전체 주민들이 이 시각에 김일성동지의 동상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이 방송은 특히 김일성의 대형동상이 세워져 있는 평양 만수대 언덕에는 『어버이를 잃은 평양시민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동상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고 보도. 중앙방송은 또 김일성동상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눈물은 비통한 슬픔만이 아니었다면서그들의 눈물은 『수령께서 개척하시고 이끌어오신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할 맹세의 눈물로 바뀌고 있다』고 강조. ○…북한방송들은 10일부터 북한청소년 사회단체조직인 사로청위원장 최용해와의 인터뷰를 내보낸데 이어 정무원 부총리겸 문화예술부장 장철,국가계획위원장 홍석형 등이 김정일을 중심으로 일심단결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들을 연이어 보도. 북한의 사로청 위원장 최용해는 이날 고위간부로는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우리는 오늘 이 비통한 마음과 크나큰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김정일동지의 영도를 충성으로 높이 받들어 나감으로써 김일성동지가 개척한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용해는 또 소년단을 포함해 모두 8백만명에 이르는 청소년들을 『김정일동지를 최선봉에서 결사 옹호하는 총폭탄으로 준비시키겠다』고 다짐. 북한정무원 부총리겸 문화예술부장 장철과 노동당 정치후보위원겸 국가계획위원장 홍석형은 『김정일동지가 있는한 주체의 혁명위업은 빛나게 계승,완성될것이며 승리는 확고히 담보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 당·정 고위간부들은 김정일을 『우리의 운명이고 미래의 탁월한 수령』이라고 높이 찬양하면서 김정일을 위해 일생을 충신으로 살 것임을 강조. ○…북한방송들은 김일성 사망발표 하루가 지난 10일 밤부터 사망과 무관한 일반적인 내용의 보도를 내보내는 등 비교적 빠른 속도로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 평양방송은 이날 밤 10시 종합보도를 통해 최근 광주에서 열린 한총련 2기 출범식 관련 소식을 전함으로써 김일성사망이후 최초로 사망과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을 보도. 평양방송과 중앙방송은 또 9일 정오뉴스이후 매 시간 정각에 사망 부고를 재방송 해왔으나 10일 정오뉴스부터는 일체의 부고 보도를 하지않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김일성사망소식을 처음 보도한 9일 정오뉴스이후 부고,추모음악,국내외 반응,각국 축전만을 소개하던 보도태도에서 벗어나 북한이 의외로 신속하게 김일성사망으로 인한 충격을 수습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 “북자극 자제”… 대북심리전 중지령/이국방,군에 지시

    ◎“북군 훈련중단… 단순 경계 활동” 이병대국방장관은 10일 『북한군은 김일성 사망 이후 전반적인 군사훈련을 대부분 중단한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장관은 또 『우리 군의 대비태세는 완벽해 국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불필요하게 북한군을 자극하지 않도록 대북심리전을 중단하라고 군에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장관은 이날 상오 김일성 사망과 관련,예고없이 기자회견을 갖고 전반적인 우리 군의 대비태세를 설명했다. 이장관은 『우리군은 북한군 주시수준을 평소의 배정도로 높이 유지하고 있다』면서 『9일 하오 이양호합참의장·게리 럭 한미연합사령관과 함께 유사시에 대비한 대응책을 검토,한­미양국의 연합방위태세를 확고하게 다졌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또 이날 북한동향에 관한 브리핑에서 『북한은 9일 하오부터 평양방송·중앙방송등 중앙매체와 전방의 대남 확성기방송을 통해 김일성사망사실을 계속 보도하고 있다』면서 『이들 매체는 김일성의 업적을 찬양하고 김정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경기 연천북부에 위치한 북한초소에서는 9일 낮 종전에 설치된 대형 김일성초상화를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김일성초상화를 완전 제거한 것이 목격됐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이와 함께 북한군은 특별한 경계령이 하달되지 않은채 단순히 경계활동만 강화하고 있으며 김일성 사망발표 이후 북한중앙매체의 대남비방방송이 일체 중단됐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이같은 북한군동향과 관련,9일 하오 10시 전군에 북한자극행동을 중지하되 대북한 전장감시활동을 확대하고 한­미군사협력을 강화할 것과 우발 상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할 것을 긴급지시 했다. 국방부는 각군의 경계수준에 대해 우리군은 평소와 같이 군병력이 3분의 1씩 교대근무하는 C형근무를 하고 있으며 해군은 구역경비및 초계활동을 펼치고 있고 공군만 공중초계 및 긴급출동태세를 갖춘채 하루 11차례씩 공중정찰활동을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 “먹는 문제 절실… 쌀은 곧 공산주의”/김일성 어록

    ◎“혁명가의 일생은 투쟁으로 끝나/조선분단은 전적으로 외세때문” ▲노력을 가진 사람은 노력으로,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돈있는 사람은 돈으로,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단결하여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여야 하겠습니다.(45년 10월14일 김일성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연설)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 다른 나라의 추종국가가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67년12월16일에 발표한 정부정강)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단호히 대답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 것이다.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일 것이다.(75년 4월18일 사이공함락 직전의 방중연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일도 없고 농업대학을 나오지도 못하였지만 농민들속에 들어가 그들한테서 배우고 그들의 좋은 경험을 받아들여 일반화하는 과정에 주체농법을 내놓았습니다.(82년 4월6일 정무원회의 연설) ▲사회의 물질생활분야에서 가장 절실한것은 먹는 문제이며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기본은 쌀을 많이 생산하는 것입니다.쌀은 곧 공산주의입니다.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먹을 것이 풍족해야 인민들의 의식상태도 더 좋아지고 모든 일이 다 잘되어 나갑니다.(82년4월14일 당·정·의회 합동회의 시정연설) ▲우리는 한순간도 투쟁을 멈출수 없습니다.혁명가의 일생은 투쟁으로 시작되고 투쟁으로 끝나야 하며 혁명은 대를 이어 계속되어야 합니다.중도반단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은 혁명의 요구이며 혁명가의 인생행로입니다.(82년 4월15일 70회 생일연회 연설) ▲만일 우리 대에 조국을 통일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김정일시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조국을 통일할 것입니다.(85년 6월9일 일본 「세계」편집국장 회견) ▲우리는 남침하지 않겠다는 것을 한두번만 천명하지 않았습니다….금강산발전소 건설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사회주의경제건설 전망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평화적인 건설로서 남조선당국자들이 여기에 위협을 느낄 근거란 아무것도 없습니다.(86년 12월30일 최고인민회의 8기1차회의 시정연설)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하나의 국가,두개 제도,두개 정부에 기초한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91년신년사)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있건 남에있건 유신론자이건 무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 한다.(93년 4월7일 발표된 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조선반도 분단은 민족내부의 모순 때문이 아니다.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것이다.(91년 8월1일 조평통·범민련 간부들과의 담화)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내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핵무기를 가지는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93년 4월15일 CNN북경지국장과의 회견)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북,“조국통일 낙관”

    【내외】 북한은 5일 남북정상회담을 반드시 성공시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전환적 국면을 열어 나가자면서 남북한의 화해와 단결을 강조했다. 북한은 이날 노동신문 논설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남과 북은 ▲상대방을 자극하고 불신을 조장하는 일체의 경쟁과 비방중상을 중지하고 ▲자기의 이념과 제도,당파만을 절대시하면서 남을 헐뜯지 말며 ▲대결분위기를 고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7·4성명」 막후실무 정홍진씨(인터뷰)

    ◎“평양대좌는 공존→통일의 시발점”/대결종식의 뜻 22년만에 열매맺은 셈/회담초기에 우리입장 분명히 제시를 『7·4남북공동성명이 남북의 대결상태를 평화공존의 상태로 끌고가자는 의도에서 이뤄진 것이었는데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이제서야 그 열매가 맺어지는 것 같아 뒤늦게라도 그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부터 22년전 우리측 밀사로 네차례나 휴전선을 넘나들며 남북공동성명이 탄생하기 까지 중요한 막후역할을 수행했던 정홍진씨(60·현 송원장학회이사장)는 4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요즈음 남다른 감회에 젖어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 72년 밀사로 평양을 오갔던 정씨는 그때 대한적십자사 회담사무국 회담운영실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의 명령에 따라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키는 일을 맡았었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어떻게 보는지. ▲북측은 7·4남북공동성명 발표당시부터 지금까지 「여건이 성숙되면」이라는 이유를 달아 정상끼리의 만남을 계속 미뤄왔었기 때문에 이번에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정상회담의 전망은. ▲7·4공동성명 당시와 지금을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국력이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북한의 대남기본노선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회담결과를 속단하기는 어렵고,다만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로 가는 시발점으로 인식하면 될 것입니다. ­경험자로서 정부측에 조언이 있다면. ▲그들(북)과의 시각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번에 정상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 대통령께서 김일성주석에게 우리의 통일정책을 명백하고 단호하게 밝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와관련,『7·4공동성명 발표 다음해인 73년 발표된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이 북측에서 볼 때 2개의 한국을 고착시키는 것으로 오인돼 남북대화 자체가 무산됐던 경험에 비춰볼 때 우리의 입장을 회담초기에 확고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당시 첫돌이 갓 지났던 막내가 벌써 대학원생으로 성장했다는 정씨는 『이번 정상회담의 열매는 정상이 만나 합의한 내용을 각료들간의 회담을 통해 구체화되어 나오겠지만 국민들은 너무 조급해 하지말고 회담결과를 냉정히 시켜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는 말을 잊지않았다. 정씨는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그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대표,남북조절위간사위원,중정 차장보를 거치면서 대북전문가로 활약하다 지난 80년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송원장학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꺼질듯 말듯 이어온 「통일 불씨」/민족단결 등 3원칙 「기본합의서」 연결/정상회담 성사로 오랜불신 허물 계기/「7·4」 22돌 맞은 남북대화의 역정 4일은 「7·4 남북공동성명」 22주년되는 날이었다.7·4공동성명의 3원칙은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 ▲조국통일이었다.남북사이에 어렵게 합의된 이 3원칙이 22년의 세월동안 실천이 못되고 있었던 것이다.때문에 이번 「7·25 남북정상회담」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후락전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전북한부수상이 평양과 서울을 극비리에 각각 교차방문한뒤 지난 72년7월4일 상오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을 발표했을때 모두들 놀라고 흥분했었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획기적인 물꼬로 평가되던 공동성명은 같은 해 10월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조절위 1차회의부터 사문화의 조짐을 보였다.북한측위원장인 김영주노동당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참석한 박성철은 「조국통일 3원칙」을 들먹이며 ▲반공정책의 포기와 공산주의의 허용 ▲주한미군철수 ▲국군의 전략증강 및 군사훈련 중지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남북한은 그뒤 3차례의 본회의와 10차례의 부위원장 접촉,그리고 3차례의 간사회의를 더 가졌지만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남북조절위는 75년 5월29일 북한측이 제11차 부위원장회의의 무기한 연기를 통보하면서 해체됐다. 이어 남북한 사이에는 우리의 수재물자지원 혹은 적십자사 주관의 상징적 이산가족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7·4공동성명의 근본 정신을 실현시키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공동성명은 지난 91년12월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간의 화해 교류 및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의 채택으로 역사적 의미를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양측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을 계속했고 그 결과 남북대화는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그뒤 8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과 수없이 많은 접촉과 연락이 있었지만 모두 결렬로 끝났다.지난해 3월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뒤로는 남북대화의 재개는 요원한 것처럼 여겨졌다.결국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이라 볼수 있다.
  • 통일논의 방향(남·북한 화해시대:4)

    ◎“한민족 공영” 원칙 평화통일 접점 모색/남 「3단계 3기조」·북 「10대 강령」/원칙·최종목표 등 유사점 많아 김영삼대통령과 북한 주석 김일성의 정상회담에는 따로 정해진 의제가 없다.관심사항이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달리보면 의제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 두 정상이 반드시 짚어야 되고,짚고 넘어갈 게 틀림없는 의제가 있다.그것은 양쪽의 통일방안에 관한 논의이다.관계자들도 핵문제·남북경협·이산가족 재회등 다른 예상의제와 달리 여기엔 이견이 없다. 남북정상회담에 무게가 실리고 시선이 쏠리는 것은 회담의 주 목적이 민족의 평화적 통일에 있기 때문이다.정상회담은 바로 그 통일로 가는 노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따라서 두정상이 통일론에 대해 합의하든,그렇지 않든 논의 그 자체만으로도 통일의 거보를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전문가들도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마주앉아 양쪽의 통일방안을 놓고 공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바로 통일의 시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대통령과김주석의 한판 논쟁이 불가피 해진다.가장 첨예한 문제이므로 벌써부터 두정상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물론 두정상은 서로의 통일안을 설명한 뒤 「평화통일」의 원칙을 확인하는 원론적인 차원의 대화를 나눌 것이다. 특히 김대통령은 그 특유의 설득력으로 새정부의 통일정책인 「화해·협력단계­남북연합­1민족 1통일국가」를 주요 골자로 하는 「3단계,3기조」를 설명할 것으로 예측된다.또 우리에게 흡수통일의 의사가 없음을 북측에 분명히 전달할 것이다. 김주석도 마찬가지다.연방제 통일안을 설명하면서 「10대 강령」을 다시금 확인할 게 분명하다. 남북의 통일방안은 그 원칙면에서,또 지향하는 최종목표에서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우리가 「1민족 1통일국가」라면 북한은 「자주·평화·중립적 연방제 통일국가」이다.궁극적으로 둘다 통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또 그 이념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3대 기조와 북한의 「10대 강령」도 얼핏보면 서로 통하는 대목이 많다.우리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구축된 자발적인 국민합의를 바탕으로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북쪽은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또 한민족이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서로 교류·협력하고,특정이념과 체제보다는 민족복리를 우선생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이는 김대통령이 지난해 2월 취임사에서 『어떤 이념이나 체제도 민족을 우선할 수 없다』고 천명한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북한의 10대 강령도 단결의 원칙으로서 사상·제도·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 공동의 최고이익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길 주장하고 있다.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존·공영·공리의 도모와 일체의 정쟁중지등 8개항을 요구한다.그리고 우리에게 10대 강령에 따라 외세의존정책을 포기하고 미군철수의지를 표명할 것등 4가지 요구사항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3단계·3기조」 통일정책이 현실을 인정한 실질적인 방안이라면 북한의 「연방제 통일안과 10대 강령」은 이념적이고 보다 해석이 자유로운 정치적 색채가 짙다. 북한전문가들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정부의 한 당국자도 『북한과의 통일논의는 원칙적인 합의 속에 항상 함정이 있어왔다』고 설명했다.북한은 항상 합의문안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이들은 김대통령이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의전문제 현격한 의견차/오늘 2차접촉 진전 낙관”/실무접촉 윤여준대표 문답 우리측의 윤여준대표는 1일 3시간 남짓 걸린 남북정상회담 실무대표접촉이 끝난 뒤 기자들을 만나 협상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윤대표는 『북쪽이 진지한 자세로 나왔으나 의견접근이 이뤄진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밝혔다. 윤대표는 『합의를 보지 못한 「경호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의전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북쪽의 이해가 부족했다』고 말하면서 「현격한 의견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윤대표는 『내일 10시에 만날 때는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2일의 2차 실무접촉 결과를 낙관했다.­이번에 합의가 안된 것은 북측의 정치적 의도 때문인가. ▲그렇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정상회담의 관행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본다. ­의전문제에서 국가·국기게양 등이 생략된데 대한 북한측의 반응은. ▲그런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오늘 없었다. ­선발대 파견에 대한 이견은 파견시기의 문제인가,아니면 선발대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인가. ▲북쪽도 선발대가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으나 선발대가 해야 할 역할과 필요한 시간에 대해서는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 북한전문가들이 말하는 의미와 전망(남북 정상회담)

    ◎분단·적대 50년… 「만남」 자체가 새역사/순조로운 진행땐 민족화해 향한 디딤돌/공산당 기본전략 고려 정치적이용 대비/북의 서울회담 확약않는 의미도 새겨야/대좌에만 집착땐 시간낭비 우려… 성급한 낙관은 경계해야 □좌담 참석자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용필 서울대 교수 박화진 서울신문 논설위원실장 남북한이 다음달 25일부터 3일동안 평양에서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의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함에 따라 국내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전문가인 이명영성균관대명예교수와 이용필서울대교수,박화진서울신문논설위원실장의 좌담을 통해 정상회담의 의미와 전망을 짚어본다. ▲박화진실장=분단 50년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난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특히 문민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땅을 밟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6·25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면 이번 정상회담은 가장 긍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봅니다.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한동포들의 심정이 어떨는지도 매우 궁금한 대목입니다.김영삼대통령의 첫 방북이 남북화해와 공존공영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이명영교수=회담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북한 노동당의 기본원칙과 협상전술입니다.김일성주석은 공산당의 기본전술에다가 30년대 만주에서 익힌 중국공산당의 유격전 원칙에 따라 적진아퇴,적퇴아진을 철저히 구사하고 있습니다.지금은 특히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제재태세로 밀어 붙이니까(적진) 한걸음 물러서서 대화를 추구하는(아퇴)국면으로 볼수 있습니다.카터의 방북을 통해 미국과 협상국면을 유도해 수세국면에서 탈출하고 이를 위한 보조축으로 남북간 대화무드를 조성하려는 것같습니다. ▲이용필교수=분단 반세기가 지난 적대적인 체제의 정상끼리 만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잘되면 민족화해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동시에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 아래서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가와연관시켜 봐야 할것입니다.성급한 장미빛 낙관은 금물입니다.북한이 회담에 응한것은 몇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우선 북한은 핵개발에 따른 국제적 압력과 긴장고조에 따른 내외적인 불이익을 해소하려는 것입니다.그들은 정상회담을 남북한 최고위급회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김대통령을 남한의 여러 정치,사회단체 가운데 하나의 장으로만 본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정상회담 개최논의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여러번에 걸쳐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북한이 진심으로 만나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이번에 정상회담의 일시와 장소가 합의되었다고 해서 남북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될것입니다. ▲박실장=회담에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북한측이 이번 정상회담을 비록 체제유지등 사회·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카드로 쓰고 있다해도 우리로서는 대화를 유도,통일에 유리한 국면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북한은 시간벌기와 제재완화라는 목적에서보면 이미 상당한 재미를 보고 있는 셈이죠.그러나 북한이 대화에 나선데는 카터의 역할보다 더 깊은 곳에 북한핵을 무한정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중국의 설득과 한·미의 강경한 제재태세등이 작용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대화가 제재보다 효과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세 벗기 전술일수도 ▲이명영교수=북한은 어찌보면 우리의 정책 흐름을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우리정부가 반개의 핵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수 있습니다.또 미국은 북한에 핵이 한두개 있다한들 문제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이 때문에 북한은 대화로 위기 상황을 빠져나가도 되겠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정책을 변화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용필교수=물론 용의주도한 준비와 경계로써 회담에 임한다면 냉전을 해소하고 통일로 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김대통령은 이미 지난 2월 북한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김주석을 만날 수 있다는 조건부 제안을 했습니다.그러나 북한은 평양에서의 1차회담 이후의 일정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유보하고 있습니다.우리가 만남에만 집착할때는 과거처럼 소득없는 시간낭비만 하게될 우려도 있습니다. ▲박실장=평양과 서울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획기적인 사건이 되겠지만 일부에서는 오히려 우리정부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의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또 실제로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필교수=북한당국은 김대통령이 북한에 가면 이인모노인이 송환됐을 때나 카터전미국대통령이 방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려 할 것입니다.우리측은 회담시기를 8월중순으로 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간파,7월말로 시기를 잡았습니다.그러나 일시보다는 장소가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독일 통일전에 동서독 정상이 만날 때도 장소를 양쪽 수도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서독통일때와 달라 ▲이명영교수=북한은 정상회담에서 틀림없이 통일을 강조할 것입니다.그러나 북한의 통일이란 김일성 주권 아래서의,다시말해 주체의 통일을 의미합니다.따라서 북한은 하나 하나 요구조건을 내걸다가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을 결렬시키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실장=북한이 일방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킨다면 우리에게도 북한핵에 대한 제재등 강경책을 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지 않을까요.사실 김주석이 서울에 오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손실이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소극적 견해인 것 같습니다.우리측이 서울방문에 집착하지 않은 것도 북한의 진의가 어디에 있건 북한의 핵무장을 막고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며 교류 협력을 통한 통일기반의 확대를 위해 김주석을 만나는 자체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용필교수=북한이 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을 정비한다면 이 회담을 건설적으로 끌고갈 수 있습니다.또 우리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박실장=충분한 의심이 손실을 최소화하고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수 있습니다.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북한의 한계를 단정짓고,실패를 전제로 회담에 소극적으로 임할때 북한은 더욱 소극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우리로서는 북한의 핵개발포기와 핵투명성보장등이 첫번째 관심사이며 이산가족재회,남북교류확대등도 중요 관심사이지만 북한이 이들 문제에 쉽게 호응하고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울것 같습니다.특히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앞으로의 개발계획중단만을 미국에 통보했을 뿐 과거는 불문에 부치자는 미국의 약속을 얻어내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느낌입니다.우리가 남북회담을 통해 남북상호사찰과 한반도 비핵화,남북합의서의 이행을 강력히 촉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해전제조건 촉구를 ▲이용필교수=지금 북한을 대화의 문턱으로까지 끌고 나온 것도 남한과 미국의 북한핵을 저지하겠다는 태도가 확고했기 때문입니다.우리에게는 동독을 조금씩 흡수해나간 서독의 높은 경제력도 없고 상대는 동구의 막스­레닌주의보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적 단일지도체제를 가진 북한입니다.우리의 목표를 분명히하고 저지선을 분명히 하는 것만이 북한을 한걸음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명영교수=김대통령은 중요한 사안을 영수회담을 통해 결정짓는 스타일입니다.김일성주석이 제아무리 능수능란하다 해도 직접 만나 얘기해보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김주석은 수십년에 걸쳐 혼자 북한을 통치해왔지만 정책을 추진하는데 몇가지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노동당과 정무원,최고인민회의등에서 결의한 기본노선을 변경하지는 않습니다.그 원칙이라는 것은 남한정부가 괴뢰정부라는 것,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등입니다.그러므로 북한은 앞으로 실무접촉등을 통해 이러한 사항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려 할 것입니다.그들은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받아들이자니 곤란한 조건들을 계속 내세우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우리측도 마찬가지로 그런 제안을 북한측에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우리가 양보하면 북한도 양보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그들은 오히려 또 다른 것을 양보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득촌진척,담담정정가 바로 그들의 전술입니다. ▲이용필교수=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핵문제에 대한 성의를 보이는 대가로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북한측이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남북한 공동합의서및 비핵화선언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북한의 정치공세에 핵문제의 해결을 역으로 촉구함으로써 북한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이행이 가능한 약속들을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북한은 「회담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노력」등 비록 애매한 수준에서나마 주한미군철수,팀스피리트훈련중지등을 요구할 수 있는 카드를 마련하려 할 것입니다.미국에 대해는 주장을 펴기위한 사전준비작업이라고도 볼수 있죠.심각한 북한의 경제난도 미국의 북한 목조르기만 벗어나면 극복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 겁니다. ▲박실장=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김일성주석이 서울에 올 가능성은 아직 점치기 힘듭니다.모처럼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을 결렬시킨다는 것은 북한이 바라는 미국­북한간 관계개선에도 곤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다.우리가 철저히 대비하되 줄 것은 주면서 설득에 나서고 실현가능한 대북지원계획을 제시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면 북한의 딴 생각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위해선 강경책도 ▲이용필교수=북한은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미국과의 관계,우리체제와의 역학등을 고려하면서 회담을 끌고갈 것으로 보입니다.우리는 독일과 예멘의 경우를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서독은 체제의 우월성을 앞세워 동독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북측이 남측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최근 북한이 어렵고 곧 무너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북의 체제관리능력을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습니다.그들은 정치선전에 매우 능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명영교수=28일자 예비회담 합의문도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북한에 관한한 포괄적 또는 원칙적 합의가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무것도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예비회담합의문은 그 자체가 실천의 아무런 담보도 되지 못합니다.북한의 의도에 대한 99%의 경계와 1%의 낙관만이 실제적인 회담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태도라고나 할까요. ▲이용필교수=언론등에서 북에 대한 경계론을 펴는 것이 오히려 정부에 유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정치지도자와 국민이 단결해서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파업이 계속되고 남한사회가 뒤죽박죽이 되면 북한이 오판하게 되고 상황은 더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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