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단결
    2026-06-05
    검색기록 지우기
  • 하늘
    2026-06-05
    검색기록 지우기
  • 육아
    2026-06-05
    검색기록 지우기
  • 활력
    2026-06-05
    검색기록 지우기
  • 중절
    2026-06-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47
  • 12층서 추락한 여성, 자동차 위 떨어져 구사일생

    빌딩 12층에서 그대로 추락한 여성이 자동차 지붕 위에 떨어져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여성은 이 건물 12층에 위치한 댄스홀에서 일하는 46세의 DJ. 그녀는 이날 12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다가 그만 몸에 균형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 사실상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높이에서 떨어진 그녀는 마치 영화처럼 주차장 위에 설치된 함석지붕을 뚫고 주차된 벤츠 승용차 지붕 위에 떨어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여성이 의식이 있음을 확인하고 급히 병원으로 후송했다. 경찰은 “여성이 사고 직후 의식을 되찾았으며 진단결과 몇군데 골절은 입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함석과 자동차 지붕이 충격을 흡수해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졸지에 사고로 크게 부서진 벤츠 자동차의 주인은 이 빌딩 건물주로 알려졌으며 피해에 대한 보상은 청구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뉴스팀
  • 아침조회, 극장서도 애국가 안부르는데…그라운드서만 국민의례?

    아침조회, 극장서도 애국가 안부르는데…그라운드서만 국민의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삼천리 화려 강산의/(중략)/대한사람 대한으로/길이 보전하세로/각각 자리에 앉는다/주저앉는다.’ 황지우 시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영화 상영 전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뉴스를 봤던 1980년대 군사정권의 극장 풍경을 묘사했다. 반공·국가주의가 한창이었던 시절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다. 극장의 애국가도, 애국 조회도 사라진 세상이지만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여전히 국민의례를 한다. 지난 1일 끝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도 가수 패티김, 소찬휘, 이적 등이 애국가를 불렀다. 금발의 외국인 선수도, 치킨과 맥주를 든 관중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위해 일제히 일어섰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쭉 그랬다. 문화체육관광부나 대한체육회에 관련 강제 규정은 없지만 야구는 물론 프로농구와 프로배구도 애국가로 경기를 시작한다. 체육계 일부에선 관행으로 이어져 온 ‘경기장 국민의례’에 대해 생각해 볼 시점이라고 말한다. 정윤수 스포츠 문화 평론가는 “국민의례 자체가 국민 총화단결을 목표로 한 국가주의 시대의 잔재이므로 국가 대항전이 아니라면 없어져야 한다.”면서 “오히려 팀별로 특색 있고 상징적인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 재미도, 의미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희준 동아대 생활체육학과 교수도 “3S정책(전두환 정권 시절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려는 정책)에서 시작된 한국 프로스포츠는 별 고민 없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유지해 왔다.”면서 “한국시리즈처럼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부분적으로 허용하더라도 스포츠는 스포츠 자체로만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경우 그라운드에서 국가를 부르면 극우파 취급을 받는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는 선수들이 ‘EPL 노래’에 맞춰 입장하고 팬들이 ‘블루 이즈 더 컬러’(첼시), ‘유 윌 네버 워크 얼론’(리버풀) 등 구단 응원곡을 자연스럽게 합창한다. 프로축구 K리그도 성남을 제외한 15개 구단이 애국가 대신 ‘서포터스 헌정가’나 자기 팀의 색깔을 표현하는 고유의 노래를 튼다. 우리나라는 미국 스포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민족, 다인종이 모인 데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전통적으로 스포츠를 통해 국가주의를 강조해 왔다. 프로야구(MLB), 프로풋볼(NFL), 프로농구(NBA) 등이 시작 전에 국가를 틀고 메이저리그는 9·11테러 사건 후 7회가 끝나면 ‘제2의 국가’인 ‘가드 블레스 아메리카’까지 부른다. 반대로 애국가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역 연고제가 완벽히 정착된 야구에서 ‘자기 팀’을 외치며 대립하던 팬들이 한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면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지역 갈등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김기한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스포츠의 순기능에는 사회 통합 기능도 있다.”면서 “국민 정서상 큰 거부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굳이 국민의례를 없애야 할 당위성을 못 느끼겠다.”고 말했다. 한국프로농구연맹(KBL) 관계자도 “일상에서는 국민의례를 접하기 힘든데 코트에서 한국인이라는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필요하다.”면서 “선수로선 경기에 임하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열린세상]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정의일까?/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열린세상]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정의일까?/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지난 3분기 경제성장률이 전년 대비 1.6%로 떨어졌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는 복지와 경제민주화 정책을 계속 밀고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대기업 개혁이 오히려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저성장일수록 복지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보육·교육·대학등록금·노인·골목상권 문제 등에서 화려하다. 정녕 차기 대통령이 이끌 대한민국은 아무런 경제 문제 없이 안락한 낙원이 될 것인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성장을 이루고 복지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이상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경쟁 없이 상생하고, 성장 없이 복지할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정의를 지향한 인류역사의 실천적인 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와 복지의 참된 정의는 무엇일까? 정답은 공동체 정신의 함양이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권리보다는 자발적으로 책임·공동선·헌신·미덕 등 아름다운 삶을 강조하는 정신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는 정의를 무조건적인 공정으로 보지는 않는다. 공동체사회는 결코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공동체사회에는 당연히 불평등도 있고 따라서 빈부격차가 있고 실패하는 사람이나 기업이 있지만 그래도 이웃으로 서로 돕고 살자는 좋은 삶에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 단적으로 역사적인 모범답안이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의 대공황시대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동체정신을 함양하는 정치로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했다. 젊은이들로 구성된 자연보호청년단은 국립공원 내에 캠프를 치고 도로와 다리 건설, 산불 끄기, 나무심기를 하면서 뭉치면 할 수 있다는 단결심을 다졌다. 조금만 봉사하면 끼니는 해결할 수 있는 일거리가 예술가들에게도 주어졌다. 음악가와 배우들에게는 시민들을 위해 공연을 하게 했고, 작가들에게는 지역의 특색을 발굴하여 아름다운 글로 마을 안내책자를 만들게 했다. 화가들에게는 공공건물의 벽에 색감 넘치는 벽화를 그리게 했다. 공짜는 없지만 함께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단결심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원래 불평등이 사회에 주는 진짜 위험성은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는 서로 멀리하고 심지어 증오와 투쟁의식만 커져간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 같은 강력한 행정규제나 보편복지 같은 무분별한 재분배가 아니라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를 한자리에 끌어낼 수 있는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기업에서 빼앗아 중소기업에 주는 초과이익공유제나 가진 사람 것을 빼앗아 없는 사람에게 준다는 무상복지가 아니라, 대기업들이 거출한 과학출연금·국가안보기금 등이 필요하고 가치를 가지는 이유이다. 정부는 중소기업 사장과 대기업 오너회장이 직접 만나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어 주는 것에 그칠 일이다. 대기업을 악마로 만든다고 하여 경제민주화가 앞당겨지는 것도, 그 자리를 중소기업이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복지비용은 사회학적·정치적으로는 유용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경제학적으로는 낭비되는 돈이다. 끊임없이 안락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본성에 비추어 결코 개인의 창의력과 자립심을 향상시킬 수도 없다. 복지는 경쟁에서 뒤처진 패배자들의 불만을 임시적으로 잠재울 수는 있지만 국가경제에 부담을 가져오고 개인의 창의력을 좀먹는, 정치 매표를 위한 악성담보일 뿐이다. “진정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통한 사회정의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정치권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정치특권과 반칙을 내려놓고 국회의원 자리를 무보수 명예직으로 만드는 혁신을 단행해 보라.”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선택기준은 명백하다. 대권후보들이 대한민국을 경제실험실로 만들려고 하는 이 판국에, 그나마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실험의 대상으로 덜 삼을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리라.
  • 75세 중학중퇴 할아버지가 공격투자형?

    75세 중학중퇴 할아버지가 공격투자형?

    #사례 1 75세의 남성 A씨는 최근 한 증권사를 찾았다가 1900만원의 손실을 봤다. 직원 말만 믿고 제대로 상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증권사는 “A씨가 ‘일임매매’(고객이 증권사 직원에게 매매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한 것)에 동의했다.”면서 “본인 스스로 투자성향에 ‘공격투자형’으로 기재했다.”며 책임을 돌렸다. A씨는 속만 끓이다 금융감독원을 찾았다. 금감원은 A씨와 직원 간 녹취록을 입수해 A씨가 전체 48개 거래 종목 중 5개 종목의 매매 사실만 알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 A씨가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계좌 개설 당시 투자성향 진단결과에서 금융상품 지식수준이 매우 낮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실도 찾아냈다. 특히 금감원은 ‘일임투자 운용확인서’에 찍힌 A씨의 인감이 투자 시점 이후 바뀐 새 인감으로 찍혀 있는 사실을 발견, 일임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A씨는 금감원의 조정으로 손실액의 75%인 1400만원을 돌려받았다. #사례 2 B(74)씨는 지난해 8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곡선도로 3차로에 주차 중인 트럭에 부딪혀 머리를 다쳤다. 트럭 차주의 보험사는 오전 8시쯤 사고가 난 만큼 B씨가 전방주시를 태만히 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치료비 2500만원을 지급할 수 없다고 버텼다. 금감원은 담당 경찰서의 사진자료와 보고서를 뒤졌다. 그 결과 2차로에 다른 차량들이 주행 중이었다면 B씨가 갑자기 3차로에서 2차로로 피하기 어려울 수 있었고, 음주상태도 아니었던 점으로 미뤄 치료비를 지급하도록 조정결정했다. #사례 3 외국에서 8년간 거주하다 지난해 귀국한 37세 여성 C씨는 통장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올케가 자신의 계좌에서 몰래 2억 1000만원을 빼갔기 때문이다. C씨로 가장한 올케는 주민등록증을 도용해 통장 및 현금카드를 재발급받고 비밀번호까지 바꿨다. 신용카드까지 새로 발급받아 3100만원을 썼다. 은행 측은 둘의 인상착의가 매우 흡사하고 C씨의 주민등록증 관리 소홀 잘못이 있다며 보상을 거절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거액 인출인데도 은행의 본인 확인절차가 미비한 점이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 피해 금액을 보상해 주도록 조치했다. 보험사, 은행, 카드사 등 금융회사와 소비자 간의 분쟁이 갈수록 늘고 있다. 22일 금감원에 따르면 분쟁조정 민원건수는 2009년 2만 8988건에서 2010년 2만 5888건으로 줄었다가 2011년 3만 3453으로 다시 늘었다. 올 상반기에만도 1만 838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5.4% 증가했다. 금융사기가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는 데다 경기 부진 장기화로 삶이 팍팍해진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감원이 이례적으로 분쟁조정 사례를 서울신문에 공개한 것도 억울한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서다. 금감원은 그동안 모방범죄의 우려를 들어 구체적인 조정 사례는 밝히지 않아 왔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조계·학계·소비자단체 등 전문가로 구성된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 결정은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있다.”면서 “소송을 통해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분쟁조정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당부했다. 금융회사의 얌체 같은 행동에 속앓이만 하지 말고 적극 대응하라는 주문이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도약하는 대학] “13개국 64대학과 교류… 변화는 발전의 시작 ”

    [도약하는 대학] “13개국 64대학과 교류… 변화는 발전의 시작 ”

    “2012년 대진대는 개교 20주년을 맞아 성년이 됐습니다. 스무살의 특권은 거침없는 도전과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에 있습니다.” 제7대 이근영 총장은 대학의 성장과 발전은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기회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오늘날 대진대가 글로벌리더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굳건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급변하는 교육환경과 사회적 변화속에서 구성원들이 일치단결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며, 공로를 교직원들에게 돌렸다. 또 중국 캠퍼스(DUCC) 설립을 통해 시·공간적 개념의 한계에 묶여 있던 전통적인 대학의 교육방식을 다양화하고, 세계 13개국 64개 대학과 국제교류를 갖게 된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국제감각을 지닌 글로벌인재를 양성하는 기본 토대를 갖출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 총장은 “앞으로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는 대학,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받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 연구, 교육인프라, 취업, 국제화 등의 교육역량 지표를 발전시켜 대학경쟁력을 높이는 데 최선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씨줄날줄] 북한 ‘생눈길 정신’/육철수 논설위원

    북한의 달력은 오늘이 ‘주체 101년 10월 22일’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초 신년 사설을 통해 “올해 주체 101(2012)년은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강성부흥 구상이 빛나는 결실을 맺는 해이며 김일성 조선의 새로운 100년대가 시작되는 장엄한 대진군의 해”라면서 “새로운 주체 100년대의 진군은 백두에서 시작된 혁명적 진군의 계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백두의 혁명정신’은 김일성이 북한 통치를 위해 처음으로 내세운 국시(國是)이자 북한 세습정권에 대를 이어 내려오는 시대정신이다. 북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두의 혁명정신’은 ‘백두산 위인들의 위대한 혁명사상이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을 끝까지 이어 갈 담대한 배짱이며 공격 방식’이다. 김일성 집권기의 ‘천리마 정신’과 김정일 때 ‘속도전의 혁명정신’이나 ‘고난의 행군정신’ 등은 모두 ‘백두의 혁명정신’이 바탕이다. 최근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생눈길을 헤치는 정신으로 창조하며 승리해 나가자’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생눈길’이란 말은 ‘아무도 밟지 않아 눈이 녹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길’이란 뜻이다. 북한의 신문·방송은 이 말을 ‘극복해야 할 난관’ 또는 ‘전인미답의 길’이란 의미로 가끔 사용해 왔다. 노동신문은 ‘생눈길 정신’에 대해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시대정신이며 혁명의 최후 승리를 향해 과감히 돌진해 나가는 낙관적이며 창조적인 공격정신’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이게 김정은 체제의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노동당과 군대, 주민에게 ‘일심단결하여 수령결사옹위를 위해 충성하고 자아희생의 고결한 인생관’을 가져 달라는 주문도 했다. 북한은 신년 사설에서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 따라 새로운 주체 100년대의 강성부흥을 위한 장엄한 진군길에 들어서고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제2의 고난의 행군이나 다를 바 없는 ‘생눈길 정신’으로 새 시대를 열었으니 북한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하다. 불행하게도 북한 지도자들은 어려운 식량 사정과 분수에 맞지 않는 핵개발이 자신들을 생눈길로 몰아넣고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배가 고파 국경을 넘는 주민이 하루에도 숱할 터인데, 그들에게 아무리 충즉진명(忠則盡命)을 요구한들 귀담아듣기나 할까.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싸이 성공엔 동포 활약 커… 유대인·中 같은 결속 필요”

    “싸이 성공엔 동포 활약 커… 유대인·中 같은 결속 필요”

    “세계 곳곳의 우리 동포들도 유대인이나 중국인 못지않은 네트워크를 구축해 모국과 상생해야 한다.” 세계 726만 재외동포와 대한민국 간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김경근(60)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1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외교센터 재외동포재단 사무실에서 “전 세계 금융계를 장악한 유대인들은 결속력과 네트워크가 대단해 주요 회사에 빈자리가 생기면 일치단결해 자기 동포를 그 자리에 앉힌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이사장은 “30여년의 외교관 생활 동안 외국 공관을 두루 거치면서 재외동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다. 오는 16일 세계한상대회를 앞둔 김 이사장은 “지난해 아프리카 가나에서 우리 동포들이 한인회관을 건립해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성공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가나에는 수산업과 건설업에 종사하는 우리 동포들이 1000여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그는 “적은 숫자지만 이분들이 현지에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고 한인회관에서 결혼식장이나 축구장 등을 운영해 현지인의 호응이 높다.”고 밝혔다. 그는 외교통상부 재외국민영사국장과 재외동포재단 기획이사를 지낸 재외동포 전문가다. 올해로 11년째를 맞는 세계한상대회는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무역, 외식업, 전문직 등 경제활동 종사자 3000여명이 정보를 교류하는 장이다. 김 이사장은 “2007년 뉴욕 총영사로 근무하던 시절 많은 외국인들이 제가 상관으로 모셨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물어봐 금방 친해졌다. 성 김 주한 미국대사나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을 배출해 미국 내 한국계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적인 가수 싸이의 성공에는 개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한인 명사들의 활약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30대의 차세대 한인 지도자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차세대 한인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재외동포재단이 역점을 두는 사업은 모국어 교육이다. 재단은 전 세계 1868개 재외한글학교에 지난해 68억여원을 지원한 바 있다. 김 이사장은 “젊은 세대에 우리 글과 역사를 가르쳐 우리 정체성을 심어주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열린세상] 글로벌 코리아의 힘/유재웅 을지대 홍보디자인학과 교수

    [열린세상] 글로벌 코리아의 힘/유재웅 을지대 홍보디자인학과 교수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는 사람을 빗대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 말이 무색하리만큼 한국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강남 스타일’로 선풍적인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가수 싸이를 비롯,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수영의 박태환, 프로골프의 최경주 선수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인 스타들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특히 전통적으로 서방 선진국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오던 분야에까지 우리가 세계 정상수준임을 보여주는 쾌거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선진 일류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심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이처럼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럽고 기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세계 각국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더불어 잘살기 위해서는 뛰어난 스타들의 활약과 함께 한민족 전체가 총체적 역량을 결집시켜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평소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거나 어떤 계기가 있을 때에는 그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단합을 보여주었다. 가장 가까운 사례 중 하나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경제 위기로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수많은 국민들이 앞다투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일은 위기 앞에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똘똘 뭉치는지를 국제사회에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민족의 단합하는 저력을 위기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는 16일부터 사흘간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 한상(韓商)대회’는 한국인의 단합과 단결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글로벌 코리아의 힘’을 키우는 첩경임을 보여주는 매우 뜻깊은 행사다. 국내외 한국 기업가 4000여명이 참여하며, 해외동포 기업가들도 40여개국에서 찾는 매머드급 행사다. 2000년에 1000명으로 첫 행사를 시작한 이래 10년 사이에 4배 규모로 커졌다. 재외동포재단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한마디로 말해 국내외 한국인 기업가들이 네트워크를 공고히 해서 글로벌 코리아의 힘을 세계에 보여주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성공한 동포 기업인들이 금의환향을 자축하는 행사가 아니며, 친목 도모에 머물러 있는 행사는 더더욱 아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동포 기업인들과 국내 기업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비즈니스의 노하우와 생생한 현지 정보를 공유하고 실질적인 공동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이다.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자 하는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과 협력하고자 하는 해외동포 기업, 또 해외동포 기업 상호간에 서로 윈·윈(Win-Win)하는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참여하는 기업인들도 다양해, 세계적인 규모로 사업을 일군 최고경영자(CEO)에서부터 40대의 젊은 동포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다. 참여 국가도 미국 편중에서 벗어나 중남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 각 대륙을 망라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나가 살고 있는 우리 재외 동포가 700만명에 달한다.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영토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첨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민족 자산과 국력을 키우려면 이제 시야를 넓혀 국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과 해외동포를 하나로 묶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가운데서도 핵심 중 핵심의 역할을 맡아줄 분들이 경제인들이다. 이 같은 노력은 우리 민족만이 하는 일은 아니다. 이미 중국인들은 ‘화상’이라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결속하고 있다. 또 인도인들과 유대인들도 유사한 네트워크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요즘 많은 국민들이 국가와 가계 경제를 걱정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염려한다. 그 돌파구를 국제무대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면, 한상 네트워크의 활용이 요긴할 것이다. 특히 해외 진출의 야망을 키우는 젊고 진취적인 기업인이라면 이번 세계 한상대회라는 호기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 朴 “전화위복… 모두 흔들림 없이 나가자”

    朴 “전화위복… 모두 흔들림 없이 나가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10일 수도권에서 당내 결속을 다지며 화합을 강조했다. 경기와 인천을 잇따라 방문해 선대위를 출범시키고 비박(비박근혜) 주자였던 김문수 경기지사와도 만났다. 특히 최근 불거졌던 당내 갈등이 수습 국면에 들어가면서 내부 정비와 단결에 더욱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 경기도당 선대위 발대식에서 “(당내에서) 여러 주장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조정되는 과정에서 당이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면서 “이번 논쟁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모두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또 통합과 쇄신, 경제민주화를 모두 강조하며 ‘안대희·한광옥’, ‘김종인·이한구’ 갈등에서 각자가 내세웠던 가치들을 모두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박 후보는 특히 정치를 처음 시작하게 된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 당시를 떠올리며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이 주춤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당시 선거 마지막날 여론조사까지 제가 두 자리 숫자로 지는 결과가 나왔지만 실제 결과는 정반대였다.”면서 “표현하지 않은 많은 국민이 조용히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박 후보는 김 지사와 함께 경기도청에서 만나 20여분간 환담을 나눈 뒤 경기도에서 시행하고 있는 무한돌봄센터와 안심꿈나무학교를 살펴봤다. 김 지사는 박 후보에게 “선거법상 (현역 지사는) 마음이 있어도 말을 못하게 해 요즘 도 닦는 기분”이라고 농담을 한 뒤 경기도 현안에 대해 설명했다. 박 후보가 지방발전을 위한 지원을 약속하자 김 지사는 “대통령 되기 전에는 다 하겠다고 하면서 되고 나서는 안 하더라.”고 꼬집었다. 이에 박 후보는 “제가 실천왕이지 않느냐.”며 거듭 다짐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독도연구 위해 귀화한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 호사카 유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독도연구 위해 귀화한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 호사카 유지 교수

    비에 젖은 모습은 참으로 심금을 울린다. 하여 대중가요 노랫말에도 자주 등장한다. 가수 주현미의 노래 중 ‘비에 젖은 터미널’이 있다.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젖은 터미널/인적도 없고 밤바람도 차가운데 어이해서 내 마음을 울려주는가/ 아 당신은 무정한 사람 내마음을 울리는 사람~’ 이 대목을 독도로 옮겨 보자. ‘비에 젖은 독도’라고 말이다. 한 일본인, 그러니까 한국으로 귀화한 독도 사랑인이 어느 비오는 날 독도를 갔을 때 ‘비에 젖은 독도’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큰 바위에서, 그 아래 굽이치는 물결과 빗방울의 만남을 보면서 독도의 숨결과 역사를 느꼈다. 온몸에 전율로 다가온 독도는 ‘무정한 당신’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다렸던 유정한 당신’이었다. 호사카 유지(56) 교수, 세종대에서 독도종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토종 한국인보다 더 독도를 사랑하고 연구하고 세상에 ‘독도는 한국땅임’을 알리고 있다. 그는 한국으로 귀화한 뒤 독도를 방문하던 날 그야말로 비에 젖은 독도를 봤다. 너무도 아름다워 홀딱 반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독도를 그리워했다. 왜 그랬을까. 지난 5일 오전 서울신문 인터뷰룸에서 그를 만났다. 독도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즐거웠고 어투는 일본말이 섞였지만 논리정연했다. 그러면서 결론부터 나온다. “일본의 주장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논리개발이 숙제이며 (그들의)논리가 대부분 드러나고 있다. 감정이 아닌 논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 인천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안식년으로 연구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요즘 하루 3차례씩 강연을 나간다고 했다. 주제는 당연히 ‘독도’다. 먼저 세종대의 독도종합연구소에 관한 얘기부터 나왔다. “독도 주변의 영유권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독도 연구는 1998년부터 했으니까 14년째가 된다. 정식으로 독도종합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2008년 5월이다. 연구소에는 연구원 3명, 협력교수 5명, 그리고 필요하면 아웃소싱 등을 하면서 연구를 해나가고 있다.” 그는 2003년 귀화했다. 계기가 흥미롭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4강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한국의 잠재력,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한국에 감동하고 귀화를 결심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스포츠 스타가 대부분 재일교포였다. “축구의 가마모토, 야구의 장훈, 역도산, 최배달 등 초인적인 인물들은 전부 재일교포다. 이들을 정말 많이 응원했다. 요즘도 그렇다. 이승엽 선수는 한국에 다시 왔지만 이대호 같은 선수가 한국인이다. 야구경기를 볼 때마다 이승엽과 이대호 선수를 많이 응원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스포츠로 넘어갔다. 그는 “일본 선수보다 한국 선수들이 착하다. 단결심도 있고 선배를 따르고 그런 점이 매력 있다.”며 웃는다. 일본과 한국 축구경기 때 어디를 응원하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한국이죠.”라고 대답한다. 규모면에서 한국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보다 한발 더 내디디는 능력이 있다고 표현한다. 얘기가 나온 김에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정말 훌륭하다. 싸이는 개인적으로 안다. 가수 김장훈이 독도행사에 자주 참여했는데, 그때 싸이와 여러 번 만났다. 싸이가 대단한 이유가 있다. 영어를 잘한다. 타고난 유전자가 다르다. 앞으로 한국에는 제2, 제3의 싸이가 나온다. K팝 스타들이 많으니까. 그들은 일본 가수, 중국 가수, 아시아 어느 가수들보다 영어를 잘한다. 노래실력은 물론 퍼포먼스하는 능력이 미국 가수 못지않다.” 그는 스포츠와 연예 분야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신이 났다. “중학교와 대학 때 잠시 야구선수를 했다. 포수와 3루수를 맡았는데 부상을 입어 중도에 그만두었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싸이는 이제 선두로 나섰고 그를 따라가는 가수들이 한국에 많이 나올 것”이라고 거듭 장담한다. 얘기를 다시 독도로 돌렸다. 그는 지금까지 독도를 6번 다녀왔다. 독도의 사계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갈 때마다 독도는 우리들을 늘 기다리고 있었다.”고 피력했다. 맑은 날씨, 흐린 날씨, 비오는 날씨 등에 관계없이 독도는 여전히 그를 반기고 있었다고 부연한다. “비에 젖은 독도는 정말 아름다웠다. 맑은 날씨에는 독도의 바위모습이 웅장하게 보였고 비에 젖은 (독도의)바위는 베일에 가려진 신비였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사람이 비에 젖은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맑은 날씨에는 독도가 생각보다 크게 보였다. 독도는 계절별로 아름다우며 그런 모습을 사랑한다.” 이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들려준다. “일본 측 주장은 이제 성립되지 않으며 극복할 논리개발이 이미 돼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한국은 독도문제와 관련해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일본이 독도 논리를 주장할 때 즉각적으로 받아칠 대응 논리로 맞서야 국제적으로 유리한 여론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본 사람들 가운데 일반인들은 독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일본 인구 중 10%가 지식인이라고 하면 그 가운데 5% 정도가 독도 얘기를 한다. 직접 일본에 가서 인터뷰도 했지만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독도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교사의 입장에서 혹시 틀린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일부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했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고 있다. 일본에는 양심적인 교사가 많고 잘못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지식인 중 극히 일부가 독도에 대해 큰목소리를 낸다고 말한다. “독도가 한국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주장 뒤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왜곡되고 은폐된 내용들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측은 역사자료와 논리개발만 제대로 하면 (국제적으로)상당히 유리하다. 일본 측은 지금까지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다.” 일본은 오는 연말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선진국의 이해가 일본 쪽으로 기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세계인들이 독도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한국 측이 준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독도문제는 아직 미국의 영향력이 있으며 일본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다시 강조한다.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면 손해다. 스스로 목을 조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없다. 말을 앞세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일본의 주장에 즉각 대응할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본의 주장을 완벽하게 극복할 그런 논리를 내세우는 시스템 말이다. 현재까지 연구해 본 결과 일본의 주장은 왜곡되고 은폐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올해 말 그동안 연구한 새로운 결과물을 국내에서 책으로 내고 내년 초에는 일본어판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독도가 한국땅일 수밖에 없는 자료들을 되도록 많이 축적해 놔야 모든 상황에서 유리하다는 생각에서다. 책 속에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문에 독도를 언급한 대목이 없다는 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을 예정이다. 그 내용과 관련해서 물었더니 모방송국과 같이 한 것이라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으로 귀화했으면서 왜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까. 웃으면서 대답한다. 귀화할 때 법원에 ‘호’씨 성을 갖고 갔더니 담당 직원이 “호씨는 중국 성인데 일본 출신이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그냥 ‘호사카 유지’로 쓰게 됐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 부인과 결혼해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자녀들의 성은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비밀”이라며 웃는다. 부인은 일본 문학동호회 모임에서 만났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말 배우는 데 어려움은 없었으냐고 묻자 “배우면 배울수록 심오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日 도쿄 출생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 체류 15년만에 한국으로 귀화…2005년 일본계 인사로 보신각 타종 첫 참가 일본 도쿄 출생이다. 1979년 도쿄대학을 졸업했고 1988년 한·일관계 연구를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세종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으며 2003년 6월 한국 체류 15년 만에 한국으로 귀화했다. 2005년 8월 일본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8·15 보신각 타종 행사에 참가했다. 2012년 현재 세종대 인문과학대학 교양학부 부교수 및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아울러 국립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 자문위원, 국립국회도서관 홍보대사, 동북아역사재단자문위원, 경북 상주시 홍보대사,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상임이사, 한국일본학회 이사, 단국대 일본연구소 편집위원, 동아시아 일보학회이사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저술로는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분석’(2002), ‘일본고지도에는 독도가 없다’(2005), ‘일본역사를 움직인 여인들’(2006),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2007), ‘우리 역사 독도’(2009), ‘대한민국 독도-일본 논리의 종언’(2010), ‘대한민국 독도교과서’(2012) 등이다. 번역서로는 ‘독도·다케시마 한국의 논리’(2004), ‘한국전쟁’(2006) 등이 있다. 이 밖에 한·일관계사, 독도영유권 문제, 역사교과서문제, 야스쿠니신사문제, 한류와 일본의 우익사상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서울시 고졸 500명 채용 프로그램 만들자”

    “서울시 고졸 500명 채용 프로그램 만들자”

    김명수 서울시의장이 4일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고졸 500명 스카우트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김 의장은 이날 제241회 임시회 개회식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얼마든지 취업이 가능하다는 모범사례를 서울시가 앞장서 만들어야 한다.”며 “시와 의회가 손잡고 고졸 500명 스카우트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말했다. 시 투자·출연기관과 각종 지원기관에서 고졸 취업준비생을 1명 이상만 의무 고용해도 500명 채용이 가능하다는 게 김 의장의 설명이다. 김 의장은 또 이 자리에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서울 교육수장 공백이 현실화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특히 김 의장은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 등을 놓고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육청이 대립하며 학생·학부모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며 “교육청 관계자들이 단결해 당초 계획한 정책들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박 시장에 대한 쓴소리도 남겼다. 김 의장은 “박 시장의 시정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인터넷 등 한정된 공간에서만 활성화되고 있다.”며 “자칫 서울 시정이 온라인 속에서만 운영된다는 오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꼬집었다. 이번 임시회는 오는 12일까지 진행되며 각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60여건의 안건을 심의·의결할 예정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돈만 챙기는 부실대들… 교수·학생들만 ‘죽을맛’

    이달 초 교육과학기술부가 선정한 재정지원 제한대학과 학자금대출 제한대학 재학생과 교수들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부실대’에 다닌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것도 억울한 상황에서 상당수 학교들이 구조개혁에 손을 놓고 있어서다. 전임교원이 없어 매 학기 강사가 바뀌는가 하면 휴강한 채 학생들의 구직 활동에만 매달리는 교수도 부지기수다. 지난해 재정지원 제한대학에 이어 올해 학자금대출 제한대학에까지 포함된 경북 A대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조정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A대의 재학생 충원율은 올해 65.1%에 불과하다.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지난해 일부 학과를 통폐합해 정원을 줄였지만, 올해 다시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고 정원을 늘렸다. 신설된 학과는 공연뮤지컬학과·실용음악학과·방송연예학과 등 10여개에 이른다. 하지만 재학생 충원율이 올라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난 11일 접수를 마감한 2013학년도 1차 수시모집에서 공연뮤지컬학과는 20명 정원에 지원자가 6명, 실용음악학과는 40명 정원에 19명만 지원했다. 낮은 전임교원 확보율도 문제다. 이 대학 특수체육교육학과의 경우 전임교원이 단 한 명이다. 교직 담당 전임교수는 한 명도 없어 모두 시간제 강사가 맡고 있다. A대는 지난해에도 전임교원 비율을 높이기 위해 무자격 외국인을 교원으로 부당하게 임용했다 감사원에 적발됐다. 재학생인 박모(20)씨는 “학교는 쓸데없는 공사에 돈을 쓸 게 아니라 그 돈으로 학생 수업권을 위해 교수들을 뽑아야 한다.”면서 “매 학기 바뀌는 강사들이 제대로 된 수업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올해 학자금대출 제한대학으로 선정된 경남 B대 역시 “대기발령이나 연수과정을 거치는 간호학과 학생들의 취업률을 고려하지 않아 낙인이 찍혔을 뿐”이라며 대책마련에 소극적이다. B대학의 한 학생은 “학생회 차원에서 개선안을 요구했지만 학교 측은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있다.”면서 “학교가 개선 의지가 없어 문을 닫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재정지원 제한대학인 경북의 C대학은 학교가 손을 놓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이 스스로 나서 학교홍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교수들은 졸업생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지역 산단 등을 찾아 구직활동을 하느라 휴강하는 일도 자주 있다. 교과부는 뚜렷한 개선 의지가 없는 일부 대학들은 퇴출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교과부 관계자는 “재정지원 제한대학에서 벗어난 대학들은 대부분 학교 주도 아래 교수와 학생들이 모두 일치단결한 경우”라면서 “결국 재단과 학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재정지원 제한대학들의 문제는 적립금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사립대 교비회계 누적적립금 현황’에 따르면 올해 제정지원 제한대학인 4년제 대학 23개 중 자료가 있는 19개 대학의 지난해 누적적립금은 5771억원에 달했다. 박건형·윤샘이나기자 kitsch@seoul.co.kr
  • 범야 연합연대론 띄우기…“단일화 물 흐르듯 될 것”

    범야 연합연대론 띄우기…“단일화 물 흐르듯 될 것”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새누리당의 ‘보수 대동맹’에 맞서 ‘범야권 연합연대론’을 강조하고 나섰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뿐 아니라 통합진보당 탈당파와 시민사회 등 민주 개혁 세력이 반(反) 박근혜 진영으로 뭉쳐야 한다는 요지다. 박 원내대표는 21일 전남 화순의 김대중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김대중민주평화아카데미 초청 강연에서 “역대 모든 대통령이 임기 말에 친인척과 측근 비리로 불행한 결말을 맞았기 때문에 국민들은 이제 ‘맑은 대통령’을 바라고 있고, 그래서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후보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협력적 경쟁을 해야 할 때이며 후보 단일화 방식을 말할 때가 아니다.”며 “후보 단일화는 국민의 힘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원내대표의 범야권 연합연대론은 문·안 후보의 단일화뿐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민주화 진영,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시민사회 진영 등이 합쳐지는 대통합 구도를 그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박 원내대표 측 관계자는 “민주당과 통진당 탈당파 등 범야권 진영의 정책 연대와 현 집권 세력의 연장을 반대하는 이들의 가치 연합이 결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박 원내대표는 “4·11 총선은 민주당의 선거 전략의 실패로 패배했지만 박근혜 후보 지지표는 이미 다 나왔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젊은 표는 더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민주당이 단결해 반드시 (박 후보와) 1대 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대선 3자대결구도] 뚝심의 朴, 합심의 文, 진심의 安… 心의 전쟁

    [대선 3자대결구도] 뚝심의 朴, 합심의 文, 진심의 安… 心의 전쟁

    뚝심vs합심vs진심의 ‘마음(心) 전쟁’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뚝심을,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합심을,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는 진심을 강조하고 있다. 선거운동의 주인공인 후보들이 각기 다른 마음가짐을 주문하면서 선거운동의 모습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후보는 본인이 선거운동의 비전을 밝히고 또 자신의 생각대로 특별기구를 뚝심 있게 만들었다. 합심을 강조하는 문 후보는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려고 경선과정에서 ‘각’을 세웠던 후보들에게도 손을 내밀고 있다. 진심의 정치를 내세우며 정치인으로 변신한 안 후보는 국민들에게 진심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박 후보는 뚝심을 강조한다. 그는 지난 18일 경기 성남시 가천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리더의 자질로 ‘뚝심’을 꼽았다. 박 후보는 “필요한 일을 밀고 나가는 뚝심이 필요하다.”면서 “정치인은 국민의 신뢰가 중요한데 내가 손해보고 오해받고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그 길을 한결같이 갈 때 국민이 믿어 준다.”고 설명했다. 대선 후보가 되자마자 수락연설에서 당에 국민행복추진위원회와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설치를 요구해 곧바로 만든 것도 뚝심을 보여 주는 대표적 예다. 박 후보 측 관계자는 “‘국민대통합을 통한 100% 대한민국’이라는 비전도 내부에서 이에 대한 이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면서 “하지만 박 후보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뛰어넘고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차기 대통령의 과제라고 강조해 채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후보의 선거운동 기조는 ‘합심’이다. ‘친노’(친노무현) 색깔 지우기가 바로 그 일환이다.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불거진 계파 갈등을 진화하고 당 쇄신에 성공해야 안 후보와의 단일화에서도 유리한 국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일 최고위원들과 첫 상견례를 가진 문 후보는 “최고위원회에서 저에게 전권을 위임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면서 “우리 당의 단결과 쇄신에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문 후보는 의원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 달라. 단합하자. 믿어 달라.”고 부탁했다. 문 후보는 의원들의 쇄신 요구를 받아들여 선대위 구성에서도 친노 인사를 전면 후퇴시킬 예정이다. 계파색을 없앤 ‘용광로 선대위’를 구성하고자 경선에 참여했던 손학규·김두관·정세균 후보 측에도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안 후보 캠프는 전날 출마선언식에서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한 행보를 할 예정이다. 겉핥기식 선거 운동은 피하겠다는 생각이다. 안 후보가 기존 대선 주자들의 출정식과 다르게 비교적 간소하게 출마선언식을 치른 것도 이런 의도가 반영됐다.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발간한 후 최종 출마 결심을 밝히기 전까지 대부분의 일정을 비공개한 것도 국민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안 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제가 만약 대통령직을 노리고 정말로 홍보 효과를 누리려고 했다면 모든 일정을 공개하지 않았겠느냐.”면서 “농촌, 실직자, 가장들을 만날 때 수백명의 기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대화를 했다면 그분들이 주눅들어 말씀을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민영 대변인은 “자연스럽게 진심이 우러나오는 행보를 할 것이고 이는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효섭·황비웅·송수연기자 newworld@seoul.co.kr
  • 한노총 새 위원장 문진국씨

    한노총 새 위원장 문진국씨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노총)은 20일 서울 송파구 잠실체육관에서 임시선거인대회를 열고 문진국(63) 전국택시노련 위원장을 제24대 위원장으로, 한광호 한국노총 부위원장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27개 회원조합 소속 선거인단 2748명 중 1651명이 투표한 가운데 문진국-한광호 후보 조는 1224표를 얻어 득표율 74.1%를 기록했다. 이로써 문 위원장은 이용득 전 위원장의 잔여 임기인 2014년 1월까지 위원장직을 수행한다. 이 전 위원장은 정치 참여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불거지자 지난달 23일 사퇴했다. 문-한 후보 조는 ▲조직의 화합과 단결 ▲한국노총의 위상 강화 ▲노조법 개정 ▲비정규직 차별철폐 및 조직화 ▲최저임금 현실화 및 제도개선▲60세 이상 정년 법제화 ▲실근로시간 단축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문 위원장은 “정부, 정치권과 끈기 있게 대화해 노조법 개정을 꼭 이뤄 내는 위원장이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문재인·이해찬 ‘선대위 인사’ 갈등 조짐… 文, 安 직접 만난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출 경선이 최종 주말 2연전만을 남겨둔 가운데 대구·경북 경선까지 누적 득표율 과반(50.81%)을 수성한 문재인 후보 측과 친노(친노무현) 좌장인 이해찬 대표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문 후보 측 핵심 관계자는 13일 “외부 명망가를 선대위에 영입하는 것은 대선 후보가 자신의 구상과 콘셉트에 맞춰 직접 삼고초려해야 할 사안”이라며 “당 지도부가 일방통행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이 대표의 비서실장인 김태년 의원이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에게 보낸 대선 선대위 참여 요청 문자메시지가 언론에 포착된 것과 관련한 반응이다. 또 다른 캠프 인사는 “문 후보가 이번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변화 요구를 절실하게 인식했고 계파 정치의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며 “이해찬·박지원 담합론이 당내 분란의 원인이 돼 온 상황에서 이 대표가 선대위 인선에까지 관여하는 모습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는 본선행 진출에 바짝 다가선 문 후보가 탈계파 의지를 드러내며 ‘통합형 선대위’를 모색하는 상황에서 이 대표가 너무 앞서 가고 있다는 불만이다. 비노(비노무현) 진영의 한 의원은 “긴급의총에서 쇄신과 단결을 이야기하고는 뒤에서 비서실장을 시켜 조 교수를 영입하려고 했다.”며 “문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이 대표가 상왕으로 수렴청정하려는 게 아니냐.”고 의구심을 나타냈다. 문 후보는 경선 이후의 대선 구상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와 달리 문 후보는 이날 공식 일정을 모두 비운 채 장고 중이다. 그의 측근들은 현 민주당 상황에 대한 문 후보의 위기감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비노 진영의 불신이 해소되지 않고서는 당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대선 등판 초읽기에 들어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의 원심력만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 문 후보가 외부 인사를 모시기 위해 직접 뛸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문 후보가 안 원장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문 후보가 안 원장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고 있어 여러 사람을 거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고, 실무진을 앞세워 협상하는 모습에도 부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원샷 담판론’이다. 문 캠프의 이목희 공동선대본부장은 추석 연휴 이후 단일화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문재인-안철수 회동 시점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협력적 경쟁을 하면서 정치 현안이 정리되는 추석 연휴 이후인 10월에 대화를 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문 후보 측은 당내 갈등을 수습하기 위한 전면적인 당 쇄신안과 통합형 대선 체제, 그리고 외부 인사 및 안 원장과의 협력 방안 등을 준비 중이다. 최종 후보로 선출될 경우 후보 수락 연설에서 문 후보의 정국 구상과 통합 메시지를 아우르겠다는 방침이다. 당 일각에서는 대선 후보가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선대위 구성 및 인사·재정권을 부여하도록 당헌·당규를 개정하는 방안과 당직자 일괄 사퇴론도 거론되고 있다. 당 지도부는 15일 비공개 최고위원회를 열어 자체 쇄신안을 확정하고 이를 대선 후보에게 제안할 계획이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단합론에 묻힌 쇄신론

    민주통합당 의원들이 11일 국회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대선 후보 경선 파행과 민심 이반 등에 대한 지도부 책임론과 당 쇄신 방안을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또다시 미봉에 그쳤다. 이해찬 대표 등 당권파가 대선 선거대책위원회 출범 시 계파를 망라하는 탕평 선거대책위 구성을 제시하며 비당권파의 공세를 무력화시켰다. 의총에서는 지도부의 불공정한 경선 관리와 소통 부재를 문제 삼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날 의총에서도 최고위원회의나 중진모임 때와 마찬가지로 근본 쇄신책은 내놓지 못했다. ●당권파, 탕평선대위 제시… 뒷공론 무성 공개회의에서 인혁당 사건 피해 당사자인 유인태 의원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인혁당 발언을 비판하다 울먹이자 분위기가 숙연해져 강경론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 14명의 의총 발언자 중 책임론을 제기한 사람은 소수였다. 기존의 ‘조회식 의총’이란 비판이 나왔지만 지도부와 각을 세우는 게 부담스러운 듯 강한 불만 제기는 없었다. 실제 지도부 책임론이 거론됐지만 ‘사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비공개로 진행된 의총에서 비당권파 의원들이 경선 파행과 폭력사태에 대해 지도부의 책임을 묻긴 했지만 대세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김동철 의원은 “민주당이 과격한 정권, 불안한 정권, 무책임한 정권이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며 소통 강화를 요구했다. 조경태 의원은 “경선장에서 막말 사태와 달걀·물 세례가 벌어진 모든 책임은 경선 관리 지도부에 있다. 의원을 ‘졸’(卒)로 보는 정당이 민주정당이냐.”면서 “지도부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책임론을 거론했다. 김영환 의원은 ‘안철수 현상’을 언급하며 “지도부가 사태를 절감하고 뼈아프게 생각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안철수현상 뼈아프게 생각해야” 당권파를 중심으로 의원 다수는 대선후보가 정해지면 경선 과정의 갈등을 극복하고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춰 대선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는 단합론을 폈다. 주승용 의원은 “당이 사분오열돼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며 책임론을 반박했다. 남인순 의원은 “후보가 정해지면 ‘묻지 마 단결’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 역동적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문했고, 은수미 의원은 “대선 후보에 대해 내부에서 비판하되 밖에서 흔들면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날 의총에서도 비당권파는 당 분열 책임을 뒤집어쓰는 게 부담스러운 듯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권파가 대세를 확실히 잡아가고 중도파는 당권파와의 갈등을 꺼리면서, 소수파인 비당권파의 불만이 묻혀버리는 과정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춘규 선임기자·이영준기자 taein@seoul.co.kr
  •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의 과거·현재를 말하다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의 과거·현재를 말하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353쪽) 중국 현대 소설가를 대표하는 위화(余華·52)가 에세이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펴냄)를 냈다. 2009년부터 단속적으로 써내려 간 비허구성 글을 모아 2010년 프랑스어판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해외판에 이어 2012년 가을 비로소 한국어판을 냈다. 위화는 인민, 영수(領袖),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라는 10개의 표제 언어를 제시하고 그와 관련한 자신의 50년 인생 경험을 써내려 간 것 같다. 영수란 마오쩌둥과 관련된 최고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산채는 ‘풀뿌리문화가 엘리트 문화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민간이 정부에 던지는 도전장’이란 뜻도 있지만 산채 스타, 산채 유행가, 산채 TV프로그램과 같이 중국 사회의 혼란을 드러내는 가짜, 모조품을 말한다. 홀유는 또 뭔가 싶을 텐데,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뭔가를 덮어씌우는 일로 산채와 마찬가지로 현대 중국인들의 처세법으로 이를 활용해 사회적·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현상이란다. 산채가 모조품과 해적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 주듯 홀유도 속임수와 헛소문에 합리성의 외피를 입혀주는 것이다. 위화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이 “열 개의 단어를 열 쌍의 눈으로 삼아 열 개의 방향에서 중국을 응시하는 책”이라고 했는데, 읽으면 면도날로 피부를 살짝 베이는 듯한 예리한 고통이 묻어난다. 그는 이 책의 후기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문화혁명기를 맞아 홍위병이 됐고,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977년 문화혁명의 끝을 경험한다. 29살이던 1989년 저장성의 작가였던 그는 베이징에서 톈안먼 사건을 경험한다. 중국에서 절대 검색되지 않고, 검열의 단어인 ‘6월 4일’ 아침 그는 침대 열차를 타고 베이징 역에 도착해 총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는 6월 7일 베이징을 떠났다. 그 후 위화는 6월 4일을 ‘5월 35일’로 표현하며 자유롭게 글을 써 왔다. 또한 3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정치지상주의였던 중국과 중국인들이 금권지상주의로 변해 가는 모습을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위화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통과하면서 겪어내는 고통을 한국인 독자들은 망각하고 떠나 보낸 한국의 1970년대를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회고할지도 모르겠다. 현재 중국의 과거와 현재가 20~30년의 격차를 두고 그들보다 앞서가는 한국의 과거·현재의 모습과 똑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실려 있는 ‘인민’ 편에서 위화는 “1989년 봄과 여름에 가두시위를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그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중략)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할 상황이 나타났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 가운데 1989년 톈안먼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위화의 ‘불안에 떨게 할 상황’에 맞장구를 치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인들은 어떻게 탱크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짓밟았던 톈안문 사건을 잊을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질문은 한국의 1980년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위화는 이렇게 지적했다. “30여년 동안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각종 사회갈등과 사회문제가 초고속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낙관적인 정서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국적 상황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히려 위화처럼 중국이 톈안먼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을 불안해하는 작가가 한국에는 있는지 하고 반문하게 한다. 인민 편에서 위화는 1989년 5월 하순 어느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한밤중 기온이 뚝 떨어진 베이징 시내를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다 멀리서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에 그는 몸이 와락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움직이면 군대와 탱크도 막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중략)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문화혁명기 시절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발자크 등 외국작가의 작품이 ‘독초’로 찍혔지만 그 명작들은 몰래몰래 전해져 위화에게도 돌아갔다. 다만, 앞·뒷장이 떨어져 나간 이들 명작은 위화에게 ‘밑도 끝도 없는 작품’이 되고, 덕분에 밑과 끝을 위화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이어 붙이면서 위화라는 작가가 탄생했다는 ‘독서’ 편은 낄낄거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다. 문화혁명기에 읽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읽어야 했던 지겨운 루쉰이 위화의 나이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던” 경험을 다룬 ‘루쉰’ 편은 슬프기도 하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