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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0년전 정신세계(백제를 다시본다:5)

    ◎상징동물은 바로 백제인의 소우주/향로엔 짐승 39마리·수중생물 26마리/사슴은 영생·재생·원숭이는 장수의미/처음 나타난 기마무인상… 천리를 달리는 진취적기상 돋보여 백제의 동물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진 것이 없다.선사시대 암각화나 고구려 고분벽화,신라 토우에는 많이 나타났지만 백제쪽으로 오면 동물이 상대적으로 희귀하였다.그런데 웬 일인가….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향로에서 백제의 동물들이 한꺼번에 달려나왔다.1300여년전 백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하는 이들 동물은 고고민속학적 해석을 바닥낼 정도가 되었다. 향로에는 봉황을 비롯하여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고 있다.또 연꽃사이에는 두 신선과 수중생물인 듯한 26마리의 동물이 보인다.특히 이 향로의 기마인물상들은 백제미술품에서는 처음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곰은 모신적존재 전체적인 구성원리는 음양의 체계를 이루어 아래로 수중동물의 대표격인 용을 등장시키고,그 위로 연꽃과 수중의 생물,지상계에는 산악과 짐승 및 신선,천상계의 정상부는 원앙과 봉황을 배치하였는데,봉황은 양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동물이다. 백제금동향로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 가운데 특히 백제와 관련이 많은 곰,남방계 동물인 원숭이와 코끼리,백제미술품에서 처음 나타나는 기마상,신령스런 영매로서 영생과 재생의 상징인 사슴등이 민속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곰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한민주의 모신적 존재로서 한국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곰은 단군신화와 민간설화에서 여성으로 등장한다.환웅과 혼인한 융녀의 몸에서 단군이 태어난 건국신화,삼국유사에 신라 김대성이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고 곰의 징벌이 두려워 그 자리에 곰을 위해 장수사를 지었고,고구려의 해모수는 유화를 웅신산 기슭 압록으로 유인했다는 역사문헌기록,여인으로 변한 곰이 나무꾼을 유혹해 동거한 금강(곰강)의 전설 등 곰은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곰 웅자」 붙은 지명이 웅천,웅촌,웅진,웅강,웅산 등으로 많다.특히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금강이 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명으로 흥미를 끈다.이 곰이 백제향로 정면에서 왼쪽에 꼬리를 치켜세우고 걸어가다 도인을 향에 되돌아 보고 있다. 선계의 산에 나타난 원숭이·코끼리·연꽃 등은 불교 문화를 수용한 세계관의 한 표현이다.입에 앞발을 대고 있는 원숭이가 뭐라고 귓속말을 전하는 듯하다.예로부터 「동국무원」이라 하여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았던 것으로 원숭이와 얽힌 내용은 그리 흔치 않다.원숭이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왔는지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신라 토우의 원숭이는 부적으로 휴대하거나,부장품 혹은 각종 용기의 장식으로 사용되었고,십이지신상의 원숭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당당한 시간신이며 방위신으로 나타난다.청자,백자로 만든 원숭이는 도장,작은 항아리,연적,걸상에서 자연에서의 모습과 모자뉴대의 형상을 띠고 있다.옛 그림 속에서는 원숭이가 십장생과 함께 장수의 상징으로,자손 번창의 상징으로 스님을 보좌하는 역할로 묘사되고 있다. 기마인물상은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백제무인이 두발을 곧추세운 사나운 기세의 말을 타고 힘차게 도약하고 있다.수평적으로 내닫고 있는 정적인 신라의 마각문토기·마형토기·기마인물토기·천마도등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말을 타고가는 기사도,말을 타고 활을 쏘는 수엽도,죽은 사람의 영혼이 타고 가는 개마도등과는 다르다.45도 각도로 위로 치고 나가는 금동향로의 백제 기마무인상에서는 천리를 달리는 진취적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말에 대한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헌·유물·설화·신앙·놀이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말에 대해서 느끼는 관념은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 같다.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신성한 동물」「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수렴되었다.그래서 하늘의 사자,중요한 인물의 탄생을 알리고 얘기할 줄 아는 동물,예언자적 구실,영혼과 마을 수호신이 타는 승용동물,장수·신랑·선구자 등이 타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사슴과 새 그리고 맹호가 평화롭게 뚜껑의 맨 아랫부분에 부조되어 있다.사슴이 유유자적하며 선계의 산으로 오른다.사슴아래 나뭇가지에는 새가 앉아 노래하고 나무아래로 맹호가 포효하고 있다.백제인의 여유와 취미와 예술,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오늘날의 민속이나 무속에서는 사슴이 중요한 신앙소로 등장하지는 않는다.그러나 상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이 다르다.우리 민족은 사슴을 상상의 동물인 기린에 준하는 거룩한 동물로 숭상하였다. ○영원의 세계표현 사슴뿔은 남권의 상징이자 가부장및 공동체 수장의 상징일 수 있다.사슴뿔은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고 봄에 돋아나 자라면서 딱딱한 각질로 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떨어진다.그리고 다시 뿔이 난다.이러한 순환기능과 나무를 머리에 돋게 하고 키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슴뿐이다.따라서 사슴은 대지의 원이를 갖춘 동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사슴의 출현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로 보았다.청학이 신선의 벗이자 짝이듯이 사슴도 신선의 벗이자 시종이었다.사슴은 호랑이와 더불어 신선의 탈것으로 생각되었다.사슴은 상상의 동물인 기린과 닮아 작은 기린으로 여겼으며 신선으로 도인의 품성을 갖춘 것으로 인식했다. 금동향로의 1백개 부조상은 영원불멸의 하늘 세계의 상징으로서 봉황과 북방 설원에서 설매 끄는 사슴,상상의 동물인 공작,하늘을 나는 천마의 신성함,사람과 가장 가까운 영물로서 원숭이 등등 고대 백제인의 이상과 꿈,영원의 세계를 표현한 소우주라 할수있다. ◎백제인의 신앙생활/한국인 심성속에 자리잡은 동물/거북·학·기린 등 신령으로 모셔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삶을 지키기 위한 원초적 본능으로 신앙미술을 창조했다.선사암 각화등이 그 초보적인 신앙미술이다.신앙미술은 곧 여러가지 의미가 부여된 동물상징으로 발전함으로써 생활문화와 사상,관념,종교등을 표현하기에 이른다.그리고 동물은 원시시대이래 인간에게 때로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가하면 먹거리이기도 했다.그 힘은 노동력으로도 이용되어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한반도에서도 바위그림이나 동물벽화를 비롯해 토우,토기,고분벽화 등에 수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등장한다.이 동물들에도 제각기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와 제각기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와 상징이 숨겨져있는 것은 물론이다.청동기시대의 반구대암각화에는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모습과 사냥장면,개,사슴,호랑이,곰,물고기,거북,고래등이 묘사되어 있다.이 바위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생산활동인 고기잡이와 사냥,그리고 그 대상이된 동물들을 표현했다. 동물그림이 선사시대 바위그림에 못지않게 자주 나타난다.대상이 된 새는 학 꿩 공작 갈매기 부엉이 봉황 주작 닭등으로 현실의 새도 있고 상상속의 새도 등장한다.동물로는 범과 사슴 멧돼지 토끼 여우 곰등 산짐승과 소 말 개등 집짐승들이 그려져 있다. 신라의 동물상징은 주로 토우라 불리는 흙인형에서 나타난다.얼핏 살펴보아도 개 말 소 물소 돼지 양 사슴 원숭이 토끼 호랑이 거북 용 닭 물고기 게 뱀 개구리등이 눈에 뛴다.그런가하면 십장생 가운데 거북 학 사슴과 상상의 동물인 용봉황 기린등은 현재도 신령스런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인이 지녔던 정신세계의 일단이기도 한 동물의 세계가 이번에는 금동향로에 한꺼번에 나타나 백제인의 내면적 사상과 의식을 새롭게 조명할수 있게 되었다.
  • 재미있는 영화가 UR파고 넘는다/황규호부국장급(객석에서)

    영화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재미로 말하면 미국영화를 으뜸으로 꼽는다.기발한 기상천외성과 스케일이 큰 화면에 빨려들어가는 재미가 있다.그래서 더러는 오래도록 가슴을 적시어주는 어떤 알맹이가 없다고 비판한다.할리우드 스타일의 오락물이라고…. 그러나 미국영화는 여전히 세계시장을 잡고있다.문화대국이라는 프랑스마저도 영상물을 통한 양키문화의 시장점유를 경계하는 모양이다.경계라기보다는 노골적으로 열을 올려 펄쩍펄쩍 뛴다.뛰어도 대세는 어찌 할 수 없다.보는 사람들,관객의 기호는 미국영화를 보지 않고 못배겨날 정도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문화에 대한 대중적 재미」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영원한 제국」을 쓴 신인작가 이인화씨가 어느 계간지 봄호 대담에서 「대중적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UR시대 문화」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UR시대의 문화산업에는 재미라는 상업주의가 반드시 내포되어야 한다는 논리다.오늘의 우리 영화산업이 한번쯤 반추해 볼 대목이 아닌가 한다. 영화는 본래 흥행의 속성을 지닌다.그러니까 상업주의와는 결코 무관한 관계가 아니다.흔히 방화로 불리는 우리영화 상업성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44회 베를린영화제에서 극영화 「화엄경」이 특별상 부문인 바우어상을 탔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래서 이 기회를 빌어 우리영화를 다시 생각해 본다.그 흥미진진한 미국영화가 직배형식을 빌어 한국시장을 잠식한지가 이미 오래되었지 않는가.그리고 UR파고를 타고 다른 외국의 영화들이 역시 시장을 넘보고 있다.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특별상 수상 하나를 놓고 마냥 들떠있을수 만은 없는 것이다.
  • 산골학교 마지막 졸업식/소양강변 물로분교 30년만에 문닫아

    ◎단 1명뿐인 졸업생 조기열군 “눈시울” 「원천강 맑은 물결 거울을 삼아 샘밭벌 푸른 물결…」 17일 상오11시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상천국민학교 강당에서는 올해 졸업식이 조촐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33명의 졸업생들은 저마다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기대와 함께 6년동안 정든 교정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젖어 있어지만 졸업식노래가 강당에 울려퍼지는 순간 맨앞줄에 앞아 있던 조기연군(12)은 왈칵 울음 터뜨렸다. 낯설기만한 32명의 다른 친구들과 졸업식장에 서 있다는 게 쑥스럽기도 했겠지만 6년동안 꿈을 키워온 상천국교의 물로분교가 이 졸업식을 끝으로 영영 폐교된다는 감회를 12살 소년은 끝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형이나 언니들이 하나둘 화전촌을 떠날 때마다 산모퉁에서 무던히도 울었다는 기연이.그동안 산골학교를 독차지하며 봄부터 가을까지 약초랑 산채를 찾아 산길을 오르던 어머니와 아버지곁을 떠나 춘천의 춘성중학교에 진학해 유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서글펐는지도 모른다. 기연이를 끝으로 폐교되고 마는 물로학교는 지난 68년 소양강댐이 생기기 전만해도 30여년의 전통을 가진 순박한 화전민들 후예 1백여명이 북적거리는 제법 시끌벅적한 배움터였다. 소양댐 담수가 거의 완료된 70년 중반쯤에는 마을이 거의다 물에 잠겨버려 화전을 포기한 주민들이 도회지로 떠나가고 약초를 캐거나 벌통을 치며 생활하는 산사람들만이 남게 돼버렸다.그러다보니 학생들도 날로 줄어 지난해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마침내 올해에는 기연이를 마지막으로 학교의 문이 영영 닫히게 된 것이다. 이제 후배들도 없이 영영 사라지고 없을 마음의 교정을 떠나 기연이는 『2살배기 누렁이와 동구밖에서 겨울을 나느라 웅웅거리는 토종벌들이 자꾸 눈에 밟히고 빨리 물노리고향으로 돌아가 빙어낚시를 걷어올리고 싶을 뿐』이라면서도 『푸른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되어 고향을 꼭 다시 찾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 개혁의 씨 싹틔우자/백남치 국회의원·민자당(굄돌)

    입춘도 지났고 며칠 있으면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이다.아직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들 마음은 어느덧 봄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항상 봄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맞지만,다가올 봄의 의미는 특별하다. 지난 봄 30여년간의 군사통치를 끝내고 들어선 문민정부의 탄생은 우리 사회에 소중한 씨앗들을 심었다.수십년간 척박해져 온 우리 밭에 공직자 재산공개,금융실명제,정치관계법 개정작업,각종 개혁입법 등 아끼고 가꾸어 나갈 만한 좋은 씨를 뿌렸다. 올봄은 아직 어린 이 씨앗들이 싹을 틔우도록 정성을 다해야 할 때이다.아무리 귀한 열매를 맺는 씨를 뿌려도 가꾸는 이의 정성어린 손길이 없고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씨는 흙속에서 그대로 썩고 만다. 우리가 가꾸어 나갈 이 씨앗의 앞길에는 국제화·개방화와 같은 악천후도 있고 무관심·무사안일등과 같은 병균들도 있다.봄에 준비하지 않으면 가을의 풍성한 수확은 기대할 수 없듯이 개혁 2년째인 올해 기초를 튼튼히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개혁은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농부가 척박한 토양에서 가을의 큰 수확을 거두기 바란다면 봄부터 잠을 아껴 물을 대고,영양을 공급하고,해충을 없애 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올봄은 가꾸어 나가려는 우리의 의지와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며 그와 같은 씨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더 뿌려져야 하는 시기이다.이번 시기를 놓치면 씨를 뿌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밭은 그냥 가꾸어지는 것이 아니다.이를 일구는 우리의 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이러한 자각이 우리에게 없다면 미래에 개혁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아늑하고 풍성한 나무 아래에서 땀을 식힐 수 있는 행복과 풍성한 가을의 수확은 기대할 수 없다. 다가올 봄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가을을 기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영롱한 우리 자연/손춘익 아동문학가(굄돌)

    천혜라기보다는 인간의 힘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을 지키고 가꾸고 다듬고,그리하여 그것을 세계적 관광상품으로 성공시킨 대표적인 나라라고 하면,아마 스위스를 일컫는데 아무도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한 알프스의 거봉들,우거진 삼림,끝없이 이어지는 초지,그리고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갖가지 들꽃들,또 숱한 호수들을 가득 채우고 강마다 유유히 흐르는 맑고 풍부한 수량,더구나 그런 자연과 더할 나위없이 조화된 마을과 목장의 집들.얼핏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듯한 나라가 바로 스위스인지도 모른다.그 모든 것이 인간의 인내와 성실로 이룩된 것에 더욱 경건한 찬사를 보내며 말이다. 섬나라 뉴질랜드도 그것은 비슷했다.비록 산들은 구릉처럼 나직한 편이지만,울창한 숲과 초지와 들꽃과 맑은 물,깨끗한 공기… 그 모든 자연환경은 스위스와 전혀 다르지 않은 듯했다.아니 쾌적한 환경으로는 오히려 그곳이 스위스보다 한결 앞서는지도 모른다.스위스가 악천후와 석회수란 고질적 자연현상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뉴질랜드는 아열대풍의 따뜻한 기후와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양질의 물이 솟아나는 땅이니 말이다.더구나 곳곳에 지하에서 온천수가 유황냄새를 물씬 풍기며 세찬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온천지대도 다시 한번 뉴질랜드가 축복의 땅임을 일깨워 준다. 엊그제 우리나라 동해안 강원도 지역 산간에는 함박눈이 내렸다고 한다.백설에 싸인 아아한 연봉들.그리고 이제 멀지않아 봄이 오리라.산들은 다시 눈부신 신록과 아름다운 꽃들로 수놓이고,이어서 한 여름의 무성한 녹음,또 이어서 서늘한 가을의 찬란한 단풍.이보다 더한 신의 축복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 뿐인가.비록 장엄한 웅자를 드러내는 거봉들은 아닐지라도,우리 산들은 반드시 아기자기한 계곡을 감추고 있고,또 시원스레 목을 축여주는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아름답다기보다는 영롱한 자연,그것이 워낙 이땅의 본색이었다.우리는 너무 오래 그것을 잊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 베트남의 가능성 주목해야(사설)

    미국이 마침내 베트남금수를 해제했다.75년 월남패망후 19년만이다.적대관계의 극적인 해소를 보여주는 것이다.탈냉전후도 남아있던 냉전장벽의 또하나 붕괴요 제거다.경제적 실용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늦긴하지만 아시아의 봄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총칼을 맞댄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던 미국과 베트남의 이같은 극적인 적대관계 청산을 보면서 우리는 우선 그것을 가능하게한 베트남의 변화를 생각한다.75년의 적화통일에도 불구하고 경제파탄을 벗어나지 못하던 베트남은 공산권붕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나라의 하나다.도이모이(쇄신)란 이름의 중국식 사회주의시장경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그것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가능케한 베트남의 변화다.그리고 이번 금수해제는 베트남의 개혁과 발전의 변화를 다시 촉진 시킬것이 틀림없다.북한도 미국과 싸운바있다.한쪽은 변화를 통해 수교직전까지 가고있는데 또한쪽은 핵고집으로 기회를 봉쇄하면서 보다 강력한 경제제재를 자초하려 하고있는 형국아닌가.안타까운 일이 아닐수없다.북한도 중국이나 베트남식 개방과 개혁의 교훈을 배우고 따른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의 베트남금수해제를 주목하는것은 그러한 북한의 변화거부에 대한 안타까움에서만은 물론 아니다.보다 중요한것은 그것이 갖는 우리와의 무시할수 없는 경제적 함수관계 때문이다.미국처럼 적대관계에 있던 우리도 이미 92년 12월 수교를 했으며 경제관계를 급속히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중이다.93년 10월현재 수출 6억달러에 수입7천4백만달러의 교역규모지만 연1백%의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투자는 4억달러로 대만 홍콩에 이어 3위다.공식 비공식 진출 상사도 1백을 헤아린다. 지금은 1인당 GNP 2백30달러의 빈곤 농업국이지만 인구 7천만의 우수하고 부지런한 노동력에 풍부한 자원의 성장잠재력이 대단히 큰 나라다.지정학적으로도 인도차이나뿐 아니라 동남아의 중심에 위치하고있다.미국의 금수해제와 수교등 관계개선은 세계의 베트남러시에 박차를 가하게 될것이다.그것은 다시 베트남의 발전을 급가속 시키는 결과를 가져올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베트남의 경제적 잠재력과 미국의 금수해제가 제기하는 기회를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것이다.악연이었지만 월남참전의 우리는 베트남을 비교적 잘아는 나라의 하나다.쌀밥을 먹는 식문화등 생활양식도 비슷하고 참전의 상처지만 혼혈의 한인2세도 1만5천여명이나 되는것으로 알려져있다.이같은 유리한 조건들을 잘 활용해 경제적 기회를 확대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할것이다.
  • 불황여파… 불 패션 “실용화 바람”

    ◎화려한 고급의상보다 값싼 대중성 중시 『패션은 보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혀지기 위해 존재한다』 유수한 프랑스의 패션업체 「발맹」의 대변인인 샹탈 비지오스가 최근 표방한 말이다.이 말은 프랑스의 패션업계가 장차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올봄 파리에서 선보이고 있는 각종 패션쇼들은 이미 이같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94년 봄·여름의 거리를 장식할 의상을 선보이는 요즘 파리의 고급브랜드 패션쇼에서는 자연섬유를 재료로 한 보다 싸고 실용적인 의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관련,「기라로시」의 회장 리샤르 앙크윅은 『앞으로는 화려한 무도회나 대축제가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이는 고급 의상의 수요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말과 다름 없다. 파리 패션계의 분위기를 이처럼 변화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은 세계적인 경기침체다.경기침체가 패션시장의 큰손이었던 영화스타·부유한 상속녀 등에게까지도 의상예산을 줄이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 패션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따라서이들도 이제는 옷을 한철 입고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작년까지만 해도 철이 바뀔때 한번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는것을 이단시했던 것이 프랑스 상류사회의 분위기였던데 비하면 이는 엄청난 변화다. 이런 상황에서 패션업계가 언제까지나 고급의상만을 취급할 수 없는것은 당연한 일.파리에서 유명 브랜드를 취급하는 패션업체들은 지난해에도 한차례 된서리를 맞았다. 대표적 예로 「기라로시」는 불황의 여파로 작년 한해에만 1억2천프랑(2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그 결과 「기라로시」는 자사 브랜드의 옷값을 낮추고 새로운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등 자구노력에 나섰다. 앙크윅 회장은 『우리는 더 이상 고가판매를 고집할 수 없게 됐다』며 『기라로시 브랜드를 더 많은 사람들이 입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옷값을 낮췄다』고 말한다. 「발맹」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발맹」도 소비자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지난해말 도미니카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를 영입했다.그가 옷을 디자인할때 외양보다는 실용적인 면에 치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영입이유다.이는 실용성을 우선 따지는 미국인 소비자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발맹」의 미국시장 진출을 더욱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발상이다. 그러나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불황이 미국인들을 보호주의자로 만들고 있다며 여전히 미국시장 침투가 쉽지는 않을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 한가지 올초 파리패션계의 두드러진 현상은 아랍풍 의상의 등장이다.따라서 요즘 파리에서는 통이 헐렁하고 발목을 조인 하렘 바지에 터번을 쓴 모델이 나오는 패션쇼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도 역시 부유한 아랍 산유국들의 소비자를 의식한 패션업계의 자구노력으로 해석되고 있다. 프랑스 패션협회의 자크 무클리에 회장은 『이제까지는 고객이 우리를 찾았으나 이제는 우리가 고객을 찾아나서야 할때』라며 변화를 통한 자구노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60년대 우상/비틀스 다시 모인다

    ◎24년만에… 생존멤버 3명이 새음반 취입 비틀스가 다시 모인다. 60년대 전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영국의 록그룹 비틀스가 지난 70년 그룹 해체,80년 존 레넌 사망이후 처음으로 3명의 생존멤버­폴 매카트니,조지 해리슨,링고 스타가 모여 새로운 노래가 담긴 음반을 취입한다. 또 비틀스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엮은 콤팩트 디스크가 발매되며 그들의 음악과 삶등 일대기를 그린 영국 BBC TV의 다큐멘터리「비틀스 명곡선」도 제작될 계획이어서 또한번 그들의 열풍이 일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문화주간지인 뉴요커지는 매카트니,해리슨,스타가 다음달쯤 새로운 음악의 녹음에 들어가며 새 음반은 명곡선 계획과 맞추어 발표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회합장소와 음반내용 등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어 50대에 접어든 노장 비틀스의 새노래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옛노래 녹음도 큰 관심거리.콤팩트 디스크 4∼6개에 담길 노래들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스터데이」「렛 잇 비」등의 히트곡뿐 아니라 발표되지 않은 노래들이 상당수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공개 옛노래들을 모두 녹음하는데는 아마 4백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62년 그룹이 창설된 때부터 70년 해체때까지 8년동안 이들은 13개의 앨범과 22개의 싱글등 2백여곡의 노래를 발표했지만 이는 당시 녹음분량의 40분의1 정도라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래를 만들고 불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난 62년 영국 리버풀에서 「러브 미 두」로 데뷔했던 더벅머리 네청년은 파격적인 음악으로 젊은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팀이 해체되고 난뒤 존 레넌은 일본의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결혼해 반전운동을 벌이다 정신이상자의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폴 매카트니는 꾸준히 음악활동을 벌여왔다.조지 해리슨은 자서전집필,영화제작등에 몰두했으며 링고 스타는 한때 마약에 빠지는등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식을 줄 모르는 비틀스팬들의 사랑이 3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다시 모여 신곡을 부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비틀스 콤팩트 디스크를 발매할 레코드회사 EMI는 『비틀스에 관해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노래들이 이 디스크에 담길 것이다』면서 『기록 보관소에서 입수한 이미 발표된 노래들,라이브 무대 공연,BBC방송 공연녹화 그리고 비틀스의 개인적인 소장품의 노래들까지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그동안 비틀스가 해체된 뒤로도 그들의 노래들은 끊임없이 테이프,레코드,CD등으로 발매돼왔다.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불법적으로 제작된 해적판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새로 선보일 비틀스의 CD들은 해적판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희귀한 노래들이 수록돼있다 하니 비틀스 팬들은 큰 기대를 걸어봄직하다.
  • 도읍 공주서 부여로(백제를 다시본다:1)

    ◎부여 금동용봉향로가 말하는 사비시대/풍요로운 곡창서 「사비문화」 무르익다 백제는 곧잘 잃어버린 왕국으로 간주되어왔다.그 까닭은 정사성격의 사료부족과 또 승자에 의한 문화유산파괴에서도 찾아진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연말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사 연구의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다.서울신문은 이를 계기로 전문학자들이 백제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기기획물 「백제를 다시본다」를 주1회씩 연재키로 했다.금동향로가 제시하는 자료를 근거로 백제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넓은평야 끼고 있어 “3국중 가장 자족”/도성체제 완벽… 5부 구획에 2중 방어/국방 한창 뻗어나갈때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비명에 저버려 일찍이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인 정채산은 국가의 운명이 수도의 입지조건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그런만큼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여 위압의 형세를 이루어야만 일단 위기가 닥치더라도 능히 이를 극복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이던 오늘날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김성탕지와 같은 곳이라서 건국이래 4백93년간이나 국세를 유지했으나,한번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1백85년만에 망했다고 한다.사비시대는 웅진시대 63년을 제외하면 겨우 1백22년에 지나지 않는다. ○각부는 또 5권으로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한성(서울)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다.그렇다고 백제의 지배층이 도성의 방어체제를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지난 십수년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들은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밖 남쪽에 세웠다.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옛 문헌에 의하면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부는 5권으로 나누어지는등 실로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한국고대의 도성제 발달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세의 영주인 성왕 16년(서기538년)봄의 일이었다.실로 국가재흥을 목적으로 한 웅대한 경륜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백제는 이보다 앞서 서기 475년 서울로부터 공주로 천도했는데,이는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급박한 국가위기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나 부여천도는 이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그자체는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시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이 야영도시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공주시대 역대 군주들의 꿈이었다.마치 고구려가 압록강가의 산악지대인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왕때부터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이곳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검토해왔다.금강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의 진출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백제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이 기름진 곡창지대를 적극개발함으로써 보상하려고 했다.요컨대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결실못본 화평세계 이처럼 사비시대는 개막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극심한 전란기였다.영토확장을 목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삼국간의 국경선은 수시로 뒤바뀌었다.이같은 살벌한 시대풍조 속에서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자족함을 알며 인을 실현코자 노력했다.한성시대인 근소고왕때 장군 막고해가 승승장구 고구려군대를 추격하던중 수곡성(황해도 신천)북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회군을 결행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비시대 법왕은 서기 599년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이에따라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사냥도구와 그물마저 태워버리게 했다.이는 같은 시대 신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즉 신라왕의 최고고문이었던 원광법사는 바로 이때 「살생유택」의 덕목이 들어 있는 세속5계를 제정하여 비록 조건을 달았지만 살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백제의 지배층이 국가의 위기상황 아래서도 인을 구현하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사비시대 화평의 세계를 실현하려던 백제인의 웅지는 끝내 결실을 하지 못했다.무왕의 야심에 찬 팽창정책과 그 아들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은 신라를 자극했다.그래서 신라로하여금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아예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비밀외교에 열중하게 만들었다.신라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 연합군은사전계획에 따라 서기 660년 전격적으로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마침내 사비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수도의 지세를 중요시하는 정다산은 백제의 멸망원인이 사비도성의 집중성 결여에 있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방위체제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우아·격조 높은 문화 한 시대의 문화는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흔히 이야기되고 있듯이 사비시대야말로 백제문화가 그 절정에 도달한 황금기였다.얼마전에 별세한 삼불 김원용선생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기력해질 때 생기는 퇴폐나 타락의 양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소멸되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사비시대의 백제문화 역시 쇠퇴·타락의 징후는커녕 완숙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다.결국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일제가 이른바 부여신궁을 지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인 석재더미 속에서 백제말기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의 당탑 건립기념비석이 일부 파괴된 채로 발견된 일이 있다. 이로써 사비시대 백제문화의 우아하고도 격조높은 기품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백제말기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 근처의 한 건물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여기서 나온 금동제 향로를 비롯한 사비시대 후기의 유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완숙기에 접어든 백제문물의 찬란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또 덧붙여 말하거니와 신비스러운 빛깔로 떠오른 새로운 문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대하면서 백제를 뒤돌아보고 재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비시대의 문화상/출토유물 통해 「선진문화」 확인/능산리·궁남지유적발굴로 실체 드러나 사비시대 백제(AD538∼660년)의 문화상은 고분과 절터·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통해 드러난다.신라와의 각축에서 패망의 길을 걸은 백제는 외형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당했기 때문에 땅속에 묻힌 유물만이 겨우 백제의 잔영을 남기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충남 부여군전역에 분포되어 있다.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중심으로 능산리등 13개 고분군이 대표유적으로 꼽힌다.거의가 돌방무덤(석실분)인 고분유적은 껴묻거리(부장품)라는 유물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나 역사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사비시대 고분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처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능산리 고분군 발굴이후부터다.1917년까지 모두 6기가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사신도벽화가 있는 1호분이 특히 유명하다.널길(선도)이 달린 굴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는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금동투조식금구 등이 발굴되었다.그리고 일찍부터 왕릉으로 전해왔다.이번에 햇빛을 본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바로 능산리 고분군 이웃에서 출토되었고,마주보고 있는 나성의 일부도 발굴되어 사비도성 방어요새가 밝혀진바 있다. 최근에는 금동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지역 말고도 궁남지유적 3차발굴사업이 진행되어 벼농사유적인 논유구와 함께 목각의 새와 수레바퀴 등을 출토하는 수확을 거두었다.이밖에 정림사터를 비롯,부소산성 도성내의 도시계획 유구 등이 발굴되어 사비시대 백제의 선진문화상을 속속 보여주었다.특히 사비시대 백제문화권을 전북 익산지역으로까지 확대,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터를 발굴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실상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 유적으로는 세기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비롯,공산성과 임류각 발굴도 고고학 성과로 치부된다.이와 더불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발굴된 한성시대(AD18∼475년)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몽촌토성과 백제 초기의 건국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적석총)도 백제연구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 육사 이원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하 17차례 옥고치른 저항시인/의열단 가입,조선은행 폭탄투척 등 주동/32세에 첫시 발표… 민족의식 고취 앞장/첫 수감번호 64를 호로… 40세 옥사 「어데다 무릎을 꾸려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절정에서) 육사 이원록선생은 절정·광야등 저항시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시인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최초 일제에 체포됐을 당시 수감번호 64의 음을 따 아호를 지음으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채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일생을 바쳤다. 육사는 1904년4월4일 5형제중 2남으로 태어나 41세인 1944년1월16일 북경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손인 육사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에서 아버지 이가호씨와 어머니 허길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 그는 1921년 18세때 경북 영천의 안일양씨와 결혼,영천의 백학서원에서 공부하다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2년뒤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도쿄 소재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1925년 귀국했다. 선생은 이어 형 원기,동생 원유씨와 함께 항일 무장투쟁 결사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7년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장 앞으로 벌꿀을 위장한 폭탄 상자를 보내 일경 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 사건 발생 직후 형제와 함께 일경에 주동자로 지목돼 체포돼 쇠꼬챙이로 지지기,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붓기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겪은 뒤 대구지방법원에 기소됐으며 수감번호는 64였다. 2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선생은 출옥후 의열단원 윤세주씨가 운영하고 있던 중외일보 기자로 일하며 청년지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중 1929년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또 다시 예비검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1931년1월21일 동생과 대구경찰서에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는 대구에서 반제 배일 격문이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며 선생은 격문 작성자 또는 비밀결사 혐의를 받은 것이다. 선생은 3개월만에 출소하자 중국 북경으로 탈출,심양에서 김두봉의열단장을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고 귀국했다. 육사는 1932년6월 북경으로 가 중국의 대문호 노신과 교유,나중에 노신의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 들기로 하고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에 입학했다. 이 훈련반은 김두봉단장이 황포군관학교 재학 당시 장개석총통에게 부탁해 한국청년의 군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남경에 설립된 군관학교이다. 선생은 이 학교 정치조에 소속돼 6개월 동안 비밀통신·선전방법·폭동공작·폭파방법등 게릴라훈련을 받고 1933년5월15일 귀국했다. 선생은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국내 민족의식 환기,혁명사상 조성과 국내정세 파악등의 비밀 임무를 띠고 상해·안동·신의주를 거쳐 입국한 것이다. 선생은 이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던중 1934년5월22일 서울에서 경기경찰에 피체돼 한달만에 기소유예조치로 석방됐으나 이미 건강이 매우 상한 상황이었다. 선생은 그래서 당시 진로를 놓고 크게 인간적 고뇌와 갈등에 휩싸이게 됐다. 과연 의열단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대열에서 벗어나 은둔할 것인가. 선생은 결국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글과 시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같이 결정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가 문인으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이후 선생은 정치·사회분야에서 폭넓은 작품활동을 전개,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중국 청방비사 소고」등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는 시를 발표,시인으로 등장했다. 또 해조사·노정기·질투의 반군성·무희의 봄을 믿아서등 산문을 내기도 했으며 꾸준히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남한산성·청포도등 주옥같은 시를 썼으며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시나리오 문학의 특징등의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문장 냉광등 잡지에 선보였다. 1941년 선생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으나 파초·독백·자야곡등의 시를 지었으며 연인기·산사기·중국현대시의 일단면등 수필도 짬짬이 썼다. 1942년에는 사실상 유고인 광야를 발표했다. 그러던 선생은 귀국한지 두달만인 1943년7월 갑자기 서울동대문경찰서에 연행돼 북경으로 이송됐다. 그가 무슨 영문으로 체포됐는지 조차 몰랐던 가족들은 돌연 1944년1월6일 「북경감옥에서 사망했으니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고 깜짝놀라 북경으로 달려갔다. 북경주재 일제영사관은 선생의 유해를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담은 조그만 상자를 내줄 뿐이었다. 선생은 병마와 싸우며 죽는 순간까지도 많은 작품을 써내 이 민족에게 빛을 던져준 민족시인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83년 문화훈장 금관장을 추서했다.
  • 막오른 「한국방문의 해」… 어떻게 치러지나

    「94 한국방문의 해」가 밝았다.94년 1월1일0시 서울 종로의 보신각 타종식과 함께 시작된 이 행사는 한국의 관광분야는 물론 문화·예술등 모든 분야의 세계화·국제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한국방문의 해」를 주관하는 한국관광공사는 94년에 개최되는 각종 행사의 효과를 면밀히 분석,다양한 이벤트의 정례화와 국제화 작업을 통한 관광상품을 개발,오는 2000년에는 세계 10대 관광국대열에 진입시키겠다는 야심에 차있다.「한국방문의 해」각종행사의 추진상황을 살펴본다. ◎눈축제… 꽃축제… 1년내내 문화행사/민속공연 등 펼쳐 「한국의 맥」 알려/태권도·요리품평회 등 볼거리 풍성/외국관광객 4백만명 유치 목표… 관광산업 국제화 등 제도약 계기로 ▷추진배경◁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된지 6백주년을 기념하는 1994년을 한국 방문의 해로 선포합니다』 지난 90년 9월27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94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선포,각국에 행사개최를 알렸다. 정부는 이어 92년 1월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위원장으로한 관련업계와 단체의 관계자 25명으로 행사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교통부중심의 정부지원기구도 구성했다. 이에따라 정부는 94년 한햇동안 4백50만명의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50억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사업은 지난 70년대 국가전력산업으로 지정,육성된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하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수그러들기 시작한 관광산업을 되살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도 6백주년 기념 실제로 92년 방한한 외국인 관광객은 3백23만1천명,내국인 해외관광객은 2백4만3천명,관광수입 32억7천2백만달러,지출 37억9천4백만달러,관광수지는 5억2천3백만달러 적자였다.지난해 관광수지는 4억5천4백만달러가 적자다. ▷주요행사◁ 전국 곳곳에서 일년내내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에 따라 축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타종과 함께 시작되는 축제는 겨울부터 시작이다. 용평·무주·알프스스키장등에서 눈축제가 벌어지고 한강 시민공원에서는 국제 연날리기대회가 행해진다. 봄바람을 실은 꽃축제는 4월부터 시작된다.고도경주에선 4월9일 한일 마라톤대회가 있고 부산 해운대에서는 5월11일부터 4일간 윈드서핑대회가 벌어진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1일 수도 서울 상권의 중심지 명동에선 웨이터달리기대회가 벌어지고 전국의 유명식당은 맛깔스러운 갖가지 요리를 6월26일까지 선보인다.제주도 함덕해수욕장에서는 7월24일 국제 철인 3종경기대회가 개최된다. 상큼한 가을바람이 불면 한국방문의 해 기념세미나가 시작되고 단풍이 곱게 물든 설악산에선 10월9일 국제 산악마라톤대회도 열린다. ○산악마라톤대회도 다시 찾아온 겨울에는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 한마당잔치가 우렁찬 함성속에 펼쳐진다. 또 왕실문화축제등 우리나라의 전통민속공연을 다체롭게 펼쳐 외국인들이 「한국의 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지방에서는 진해 군항제,진도 영등제,남원 춘향제,강릉 단오제,백제 문화제,신라 문화제,한라 문화제,전주 풍남제,충북 예술제,광산 고싸움축제등 10대 행사가 이어지고 서울의 명동축제·이태원축제등 대도시 시민들이 가까이서 함께 할 수 있는 문화행사도 일년내내 끊이지 않아 볼거리·먹거리·할거리가 풍성한 한해가 될 것이 틀림없다. ▷시설준비◁ 항공·호텔·위락시설 등 관광관련 업종에서는 내한하는 외국관광객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먼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관광객의 관문이 될 공항에서는 출입구절차 간소화를 통해 첫 인상을 좋게 심는다.이를 위해 지난해 6월부터 7년이상 홍콩거주자에 대한 무사증입국이 허용된데 이어 올해 방문의 해 기간중 일본인의 무사증입국도 확대 실시했다. 양대 민항에서는 성수기와 비수기를 구분, 2중요금적용체제를 적용하고 친절을 바탕으로한 질 위주의 서비스를 강화했다.또한 외국인의 교통 이용 편의를 위해 공항과 호텔간의 리무진버스와 모범택시를 확대 운용하고 외국인 열차 우선예약권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내한 외국인의 주 숙박장소가 될 호텔업계에서는 외국인들이 호텔을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장소로 활용토록 서비스와 시설을 늘려 개선했다. ○세계10위권 도약대 정부에서도 이를 위해 지난해초 호텔업을 소비성 서비스업에서 제외한데 이어 특급관광호텔의 칵테일바 영업시간 제한과 호텔 사우나의 정기휴일제를 폐지하는 등 관광시설에 대한 각종 규제완화조치를 단행했다. 이와함께 각종 국제회의를 유치하고 축제를 준비하는 등 호텔 부대시설 이용의 극대화를 꾀했다. ▷기대효과◁ 88년 서울올림픽개최이후 우리나라의 위상은 물론 관광산업도 급성장,그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89년 해외여행 자유화조치로 내국인의 무절제한 해외여행과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관광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다. 「한국방문의 해」사업은 이같은 시점에서 관광산업 재도약을 위한 시의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 행사를 통해 전세계에 한국관광 붐을 조성,올해 4백50만명의 외래관광객 유치와 50억달러의 관광수입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또한 이번에 펼쳐진 다양한 이벤트를 국제수준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활성화함으로써 오는 2000년에는외래관광객 7백만명유치,1백억달러 관광수입을 올려 세계 10대 관광국대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지방의 각종 민속축제와 문화예술행사가 널리 소개돼 지역관광산업도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할 것으로 기대된다.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국정 긴장속 새로 시작/개방대응,행정규제 최대 완화”

    ◎김 대통령,새내각에 당부 김영삼대통령은 23일 『이번 개각은 총리를 비롯,경제·통일부총리등 14개 부처의 각료가 바뀌어 형식은 비록 개각이지만 내용은 조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밝히고 『이번 기회를 살려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각오로 제2의 건국을 이룩해야 한다』고 새내각의 단합과 결속을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아침 청와대에서 이회창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과 박관용비서실장을 포함한 청와대 수석비서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조찬간담회를 갖고 『국민에 봉사한다는 정신을 한시도 잊지말기 바라며 규제완화를 최대한으로 단행해서 세계화와 개방화에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요즈음 주변이 어쩐지 느슨하고 긴장이 풀어진 것을 많이 느낀다』면서 『이제 새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마음을 다시 다지고 풀린 긴장을 고쳐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부처이기주의에 대해 『개인플레이는 보기에는 그럴듯 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하고 『과거에는 각 부처간에 다툼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부처이기주의는 없어져야 하며 여기저기서 일관성 없는 정책을 발표,신뢰를 떨어뜨리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북한의 핵을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시점에 우리는 와 있다』면서 『과거정권이 봄에는 여름이 위험하다고 하고 여름에는 가을·겨울이 위험하다고 해 안보를 정권에 이용하는 바람에 국민의 안보의식이 해이해져 있으나 7천만의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조찬간담회가 끝난 뒤 이원종정무·이의근행정·주돈식공보·최양부농수산등 청와대 신임수석비서관 4명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 정 부총리 파격행보 “눈길”

    ◎취임식때 잇단 폭소훈시로 신선한 바람/기자간담서도 답변뒤 “어때 잘했지” 조크/“기획원 오랜만에 웃음꽃” 직원들 반색 『경제기획원이 기능을 안하고 있어요.이 정도의 경제가 뭐가 어렵다고 그래…』 『기획원 장관 기능은 차관 이하 간부들이 맡고,나는 죽을 쑤는 장관들을 도와주는 부총리 기능만 할 거요』 『국무회의를 가도 그렇고 도대체 숨이 막혀 죽겠어.검정색이나 감색의 어두운 색깔의 양복만 입지 말고 콤비나 핑크색 와이셔츠처럼 밝은 색깔도 좀 입어요…』 「돌아온 장고」로 불리는 정재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22일 열린 취임식에서 반말조에,전임자들과 너무도 다른 파격적 훈시를 쏟아놓아 그동안 경기침체로 어두웠던 과천 경제부처에 밝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기획원은 이제 각 부처를 끌고 가는 리더가 아니라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해결사(케어 테이커)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유신시절 기획원 차관으로 재직한 이후 14년만에 기획원 수장으로 돌아온 정부총리는 과거 개발경제 시대의 「끗발 좋던」 기획원의영광을 생각하는 듯 했다.미리 준비한 원고도 없이 취임식장에 가득 모인 직원들을 둘러 보며 『기획원도 이렇게 딱딱하게 식을 합니까』라며 서두를 꺼내고,마이크 소리가 작게 들리자 손으로 마이크를 두드린 뒤 『기획원 마이크가 어째….기획원이 기능을 안하고 있어요』라며 다소 「의도적」 면박을 주어 폭소를 자아냈다. 정부총리는 취임식 뒤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대머리인 안병우정책조정국장에게 『조정하다가 머리가 다 벗겨졌구만…』이라고 농을 건네 다시 폭소가 터졌고 취임식은 「흥겨운 하례식」으로 끝났다.김영삼대통령이 지난 봄 청와대 홍인길총무수석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자네는 너무 키가 커서…』라고 조크해 엄숙한 의전석상을 웃음바다로 만든 일화를 연상케 했다. 정부총리는 기자간담에서도 파격을 선보였다.1시간 동안의 간담에서 여느 장관들과는 달리 현안에 대해 청산류수격으로 막힘 없이 답변한 뒤 『어때,잘했지?』라며 폭소를 유발.말썽많은 경제행정 규제완화 문제에는 대학에서 경영환경론을 강의한 경력을 소개한 뒤『그것은 내 신념이며,내가 아니면 안 될 일』이라고 집념을 보였다.또 2차대전 뒤 라인강의 기적을 창조한 독일의 에르하르트 수상을 예로 들며 『그는 재임 중 사업가나 부자와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 부하와 보좌관과 싸웠다고 말했다』고 밝힘으로써 규제완화를 위해 각 부처의 이기주의에 강력히 대처할 방침임을 비쳤다. 정부총리는 물가관리에도 노하우가 있음을 자부했다.『전두환전대통령이 재임중 물가안정을 이뤘다고 자랑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79년 신현확부총리와 정재석기획원차관의 경제팀이 수치에 얽매이지 않고 경제의 흐름을 바로잡은 결과』라고 말한 뒤 『아참,그런 얘기를 내가 함부로 하니까 위험하단 말야….아따,여러분들이 좀 도와줘』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경제팀의 일사불란을 주문하는 언론의 논조에 이의를 제기했다.『군대조직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일사불란만을 강조하다 보면 각 부처의 창의나 혁신은 죽어버려.부처간의 의견차이도 있고 그런 것이지 뭘…』 과거 이경식 전부총리와 이인제 전 노동부장관의 갈등 등 경제팀의 팀웍문제가 화제로 오르자 정부총리는 『내 앞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라며 『밖에서 보니까 언론에서 자꾸 싸움을 붙이더구만』이라며 오히려 언론에 화살을 돌리는 여유를 보였다.이어 『김대통령이 나에게 ▲경제팀을 장악하라 ▲농·어업은 직접 나서라는 밀명을 주었다』고 전했으나 부총리 임명을 언제 통보받았느냐는 질문에는 『유구무언』이라고 말문을 닫았다.기자간담이 한편의 만담을 주고받는 자리 같았다. 정부총리는 기획원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벌써 아이디어를 냈다.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과장급과 사무관들을 각각 모아 30분씩 자유토론을 하겠다는 구상이다.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절대로 끼지 말도록 했다.『농담도 하고 장관 욕도 하고 해서,경제활성화를 위한 충분한 온기가 감돌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한 기획원 관계자는 『기획원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며 『정부총리가 업무에는 완벽을 기하는 스타일이지만 훈훈하게 일하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스스로 해학과 익살을 즐기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 “야 아직까지도 구태” 청와대 진노/난장판 의회를 보는 시각

    ◎당의 의정운영능력에도 실망/“정치권 개혁 필요” 목소리 높아 김영삼대통령은 새해 예산안의 처리를 둘러 싼 국회의 「추태」를 지켜보고 크게 낙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일 아침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이런 심경을 여러가지 통로로 전달하려 애썼다.당에는 『어떻게 일처리가 그 모양이냐』는 힐난이 전달됐다. 언론에는 『야당이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라고 야당의 변하지 않은 구태를 문제 삼았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이같은 반응은 김대통령이 여·야 모두에게 강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대통령의 낙심은 앞으로 국회의 관행개선과 정치풍토개선,당정개편으로 구체화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김대통령은 문민정부의 첫 「개혁예산」이 정쟁,나아가서는 야당의 구식 투쟁방식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민정부가 사심 없이 개혁을 추진하고 있고,이를 국민의 대부분이 지지하고 있다는게 김대통령의 자신감이다.그런 터에 법정기한내에 통과시켜야 할 예산안을 볼모로 삼아 문민·개혁정부에 타격을 입히려는 야당의 투쟁방식에 분노까지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대통령은 우리시대가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만큼 이제는 모든게 법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예산안 볼모투쟁은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불가피한 투쟁수단이란 생각이다.야당은 이같은 김대통령의 믿음을 정면으로 거부했고,김대통령은 자존심에까지 상처를 입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사실 청와대는 급하다. 야당의 걸고 넘어지기에 밀려 예산안을 제때에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남은 개혁일정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개혁은 관성에 의해 나아가야지 한번 주춤하게 되면 다시 잇기가 어렵다고 믿는 탓이다. 예산안이 뒤뚱거리는 동안 쌀 수입개방 악재가 겹쳐지면 정부와 여당의 공간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청와대는 특히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내년 봄 임금협상이란 또 하나의 고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말하자면 이 때를 대비해서라도 힘을 비축해 놓아야 할 처지이다. 이런 장기국정전략을 생각하면예산안은 반드시 모양좋게 제때에 통과돼야만 한다.이게 청와대의 현실인식이고,「강행통과」를 거듭해 지시했던 배경이다. 청와대는 당연히 야당의 행태를 비난하는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김대통령은 그동안 3∼4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예산안의 법정시한을 이야기하면서 『다수결 원칙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가장 존중 받는 룰』이라고 강조해 왔었다. 대통령이 앞장서 강행통과의 명분을 축적해 왔던 터인 만큼 야당에 대한 불만은 알만한 일이다. 야당의 행태에 대한 김대통령의 확신에 찬 분노는 어떤 형태로든 국회의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방향으로 여권을 움직여 갈 것으로 보인다.그방법은 국민을 상대로 직접 호소해 야당이 스스로 고치게 할 수도 있고,새로운 법률의 제정이나 기존 법령의 개정으로 추진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청와대가 민자당의 의정운영 능력에 보이는 회의도 심각하다. 관계자들은 이만섭국회의장이 2일 저녁 사회를 포기한 것에 대해 『그는 민자당 사람이 아니냐』고 말했다. 본회의장에서 강행통과에 실패한 책임의일단은 소속의원들의 방관자적 자세에서 찾고 있다. 민자당에 대한 실망은 망설이던 당정개편을 결심토록 작용하고 있다.
  • 한·미·일/극비 안보협의체 운용/북핵·중국 군비증강 정기협의

    ◎도쿄신문 【도쿄=이창순특파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일부 국가로 구성된 2개의 극비 안보협의체가 존재하고 있으며 모두 북한 핵개발문제와 중국의 군사력 증강문제 등을 정기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도쿄(동경)신문이 29일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일본 정부소식통을 인용,이중 하나는 한국·미국·일본의 외무부 국장급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지난 8월 일본의 시즈오카(정강)현 가와나(천나)에서 회담을 가졌고 다음 회담은 미정이라고 전했다. 또 하나의 협의체는 한·미·일 3개국에 캐나다·호주를 포함한 모두 5개국의 외무부 차관보급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난 8월 제주도에서 회담을 가진데 이어 내년봄에 캐나다에서 다시 회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 북핵 외교적 해결에 “무게”/미안보회의 대북관련 논의 안팎

    ◎한반도 전쟁우려,강경조치는 배제/국방·국무 이견 해소… 막후접촉 지속/통상사찰→팀훈련 중단→3단계회담 예상 15일 열린 미국 백악관안보회의는 북한핵문제와 관련하여 전반적인 상황검토와 함께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안보회의는 비록 클린턴대통령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비준안의 17일 하원표결을 앞두고 막바지 득표활동을 벌이느라 불참했지만 북한이 지난 11일 핵문제의 일괄타결제의를 한후 처음 열린 회의여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대북핵협상전략을 재정비하기 위해 이날 하오 열린 회의가 끝난뒤 디 디 마이어백악관대변인은 『아무런 결정도 이뤄진 것이 없다』고 밝혔으나 관계소식통은 『팀스피리트훈련중단­북한핵사찰수용』문제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전하고있다. 북한은 지난번 핵문제의 일괄타결을 공개적으로 제의하면서 막후로는 미국측에 대해 『미국이 한미연례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면 북한핵시설에 대한 새로운 국제사찰을 받겠다』고 제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앤서니 레이크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이 주재한 이날 백악관안보회의는 국무·국방부간의 북한핵협상에 대한 이견을 중점 조정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의하면 국무부는 북한의 「팀스피리트중단­핵사찰수용」제의를 적극 검토,수용하자는 입장인 반면 미합참과 국방부는 이에 반대하고있다. 북한의 이번 제의는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면 북한이 지난 봄이래 국제원자력기구(IAEA)핵사찰팀의 접근을 막아오던 녕변일대의 핵시설기지에 이들 사찰팀이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내용이다.다시 말하면 통상적인 사찰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합참과 국방부는 북한의 제의는 핵무기 제조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미신고 핵폐기물저장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이 포함되어 있지않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강력히 펴왔다. 이날 회의에서 북한핵문제는 외교적 방법으로 풀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원칙아래 북한측과 계속 막후접촉을 벌이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이같이 외교적 방법을 강조하는 배경의 하나는 경제제재·해안봉쇄·북한핵시설에 대한 제한적 공습등 비외교적 수단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을 초래,사실상 한반도에 전쟁이 재발된다는 군사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핵문제분규로 인해 남침을 할 경우 군병력의 손상등을 분석한 미군사계획비밀문서는 처음 90일간의 전투에서 약 30만∼50만명의 병력이 희생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1일 유엔총회에서 대북핵사찰촉구결의안이 통과된후 북한핵시설에 IAEA측이 설치한 감시카메라의 배터리교환,필름교체등을 위한 제한사찰은 받을 용의가 있다고 표명해왔으나 IAEA측은 『피사찰국이 사찰의 대상을 지정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백악관안보회의를 통해 부처간의 이견을 해소,북한핵문제에 적극 대처키로함으로써 미·북한간의 핵협상은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미·북한간의 핵협상은 막후협상(비공식 실무접촉)을 통해 「북한의 통상사찰수용,남북특사교환일정합의­팀스피리트훈련중단」이 이뤄지고 3단계 고위급회담의 개최를 통해 「미신고핵시설의 특별사찰수용­미·북한관계개선및 경제지원」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기대된다.
  • 「꽃진 자리」를 바라보며/이재식 시인(굄돌)

    덕수궁 회화나무를 부여안은 매미의 노래가 울음으로 변했다가 그것마저 끊긴지 오래이니 이제 가을은 끝머리에 와 있을게다.사무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궁의 뜰안은 여름내내 푸른색으로 꼿꼿하던 나뭇잎들이 계절의 변화를 여러 빛깔로 웅변하고 있다. 색색으로 물들여진 이파리들이 강한 개성으로 드러나고 돌담길 위에 떨어져 뒹구는 노오란 은행잎이 한 해의 마무리를 예고한다.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까까머리 시절 교과서에서 처음 읽었던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과 「때를 알아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한 이형기선생의 「낙엽」이란 시가 다시 한번 가슴을 후빈다. 점심후에 가끔 들러본 공원은 어느 계절이나 넉넉하고 여유롭지만,오늘따라 새삼스레 혼자인 듯한 느낌은 고궁과 수목들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가을의 정취 때문만은 아닌것 같다.봄에 살갗이 벗기는 아픔으로 싹을 틔운 잎들이 여름의 약속된 빛깔로 찬연히 꽃피우다가 이 가을의 길목에서 꽃진 자리의 마침표를 만들고 있다. 야무지게 한 해를 마름하는 이것들앞에서 허송한듯한 나의 시간이 아깝고 부끄럽기 때문이다.누구는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라고도 말하지만 내게 있어서 가을은 오히려 불안하고 부담스럽다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남은 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단호히 영그는 백과들이 아직도 지지부진한 나의 계획을 채근할수록 시간은 더욱 빨라지는 느낌이다.더욱이 어떤 계획은 마무리 할 것조차 없으면서도,참으로 황당하게 서울 을지로 가로 공원과 시청앞 분수대 옆에 열린 장두감이 걱정되는 때도 요즈음이다.아직 남은 맑은 햇빛을 받으며 열 다섯살 소녀의 붉어진 볼처럼 그 이쁜 것들이 이파리 사이로 숨바꼭질 하는 양태가 더 없이 시린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꽃진 자리를 마침표로 남기고 다시 맞이할 봄의 계획을 설계하고 있을 나뭇가지를 보며 덕수궁을 나서는 마음은 바빠도 아직 남은 볕의 가치처럼 시간을 아껴 올해를 갈무리해야 할때다.내 생의 값진 마침표 하나를 더 만들어 내기 위하여….
  • 화수분이다… 은행나무를 심자(박갑천 칼럼)

    노란 은행잎이 지고있다.그걸 주워서 책갈피에 끼워보지 않은 소년소녀시절 보낸사람 있다 하겠는가.이무렵이면 은행잎 밟으면서 밀어를 나누었던 추억에 젖어드는 사람 또한 적지않을 것이다. 『여기 한거물이 있다.갑오는 물론 병자 임진의 난을 모다 겪었다./만약 그팔을 편다면 온동네가 그늘지고 똑바로 선다면 구름도 아마도 스쳐가고 그저 소박 장엄 침묵 그려도 봄은 봄가을은 가을로서 천지와 함께 늙지를 아니한다./내 마냥 그앞을 지나면 절로 발을 적이고 고개도 아니숙일수 없다』.가람 이병기의 「공손수」 전문이다.공손수는 은행나무의 별칭이다. 단종이 손위했을 때 안평대군용은 즉시 죽음을 당했고 금성대군유는 순흥으로 귀양가서 군사를 일으키려다 뜻을 못이루고 역시 죽음을 당한다.그래서 순흥고을을 없애게 되었을 때 백성들 사이에 이런노래가 번져났다.­『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노산:단종임금)도 복위된다』 그후 2백30년이 넘어 순흥부 동쪽에서 은행나무가 저절로 나서 자라게 되었는데 옛날 그곳에 그나무가 있었기에 그런노래도 생겼다는 것이었다.은행나무가 새로 돋아난뒤 순흥고을이 다시 설치되고 취은 신규가 단종복위 상소를 올리자 조정의 공론도 찬성으로 기운다.순흥백성들의 노래가 들어맞은 셈이다(성호사설권6). 빙하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전세기 유물식물로 1속1과 1품종의 일가친척 없는 나무이다.꽃말이 장수이듯이 수명이긴 나무이기도 하다.그래서 신비로움을 곁들인 순흥고을 민담도 낳았다고 할 것이다.공손수란 별칭외에도 잎이 오리발같다 하여 압각수라고도 한다.은행열매를 익혀먹으면 폐를 다습게하고 기를 돋우며 천식과 기침을 다스린다고 했다(본초강목).정력에 좋다면서 구워서들 먹었으나 많으면 해롭다고 알려진다. 60년대 모택동이 은행잎을 달여마심으로써 건강을 유지한다는 말이 퍼지면서 은행잎에 대한 세계약학계의 관심은 높아졌다.그후 각종성인병 치료에 효능높은 성분들이 추출됨에따라 「은행」나무는 「김행」나무로 되어온다.더구나 한국산 은행잎은 외국것의 10∼20배정도 유효성분이 많아 외국업체들이수입하려고 열을 올리고있다.한데 그 농축액 주사를 방사선·화학요법제와 병행할 때 암치료의 효과를 높인다는 사실까지 밝혀진다. 은행나무야말로 우리의 화수분이다.은행나무를 많이 심어서 잘 가꿔야겠다.그러고 보니 노란 이파리는 황금의 상징이었구나.
  • 장지연상 한국학부문 수상/영 도이힐러교수(인터뷰)

    ◎“한국의 유교연구로 처음 상받게돼 영광” 제4회 위암 장지연상 한국학부문 수상자로 뽑혀 한국에 온 말티나 도이힐러교수(58·여·런던대)는 『한국의 유교를 연구하면서 처음 접한 책이 위암선생의 「조선유교연원」이었다』면서 이번에 상을 받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다. 그에게 상을 안겨준 저서는 지난해 미국 하버드대에서 출판한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조선의 유교화).고려시대까지 부계와 모계가 공존했던 한국의 친족구조가 조선조의 적극적인 유교정책으로 부계중심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을 파헤친 책이다. 스위스 국적인 도이힐러교수는 한국학을 하게 된 이유를 『하버드대에서 일본사를 공부했는데 스승이 한국학이 전망이 밝다고 권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67년 하버드대에서 논문 「조선의 개국」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스위스 쮜리히대를 거쳐 지난 88년부터 런던대에서 한국사및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67년 처음 한국에 와 서울대 규장각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매년 한차례 이상은 한국을 찾는다』면서『학교에서 안식년을 줘 내년 봄에 다시 와 공부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박또박 우리말로 답변하던 도이힐러교수는 가족관계를 묻자『남편은 한국인으로,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개인적인 일』임을 내세워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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