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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상과 전망21세기 미술] (13)’부재의 미학’이 던지는

    새로운 세기를 불과 한 달 여 앞두고 모두들 기대에 들떠 있다.이러한 모습의 저변에는 아마도 20세기의 어두운 사건과 참혹했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았으면 하는 기대가 깔려 있을 것이다. 20세기는 일견 눈부신 경제적 발전과 삶의 풍요로움,평안함의 극치를 이루는 각종 도구들로 인해 마치 우리가 영화나 공상소설에서 보고 읽던 파라다이스가 지구상에 도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20세기가 이렇듯 행복하고 안온한 삶만으로 이어져 온 것은아니다.20세기는 분쟁과 전쟁,테러 등으로 인해 우리 주변의 많은 삶들을 잃어야 했던 시기였다.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니다.일제의 압제는 참혹하고 비참한 삶을 강요했고,일군의 한국인은 유민이 되어 아직도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지역을 맴돌고 있다.또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기록되는 6.25전쟁은 우리에게 뼈아픈 기억과 회한을 남겨주었고,아직도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감내해야만 한다.내년이 새로운 세기로 향하는 원년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6.25전쟁 발발 50주년이라는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무게를 지닌 해 이기도 하다. 20세기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련의 갈등과 참화의 현장은 세계도처에 존재한다.체첸과 러시아간의 분쟁과 코소보 사태,세르비아의 분쟁,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 헤이드,캄보디아 내전과 킬링필드,1,2차 세계대전,베트남전쟁, 유대인에 대한 학살 등 기억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분쟁과 죽음의제단이 인간의 손에 의해 쌓아 올려졌다. 이러한 분쟁과 죽음,반목과 살육이 새로운 시대에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평화로운 삶의 환경으로서 지구촌을 위한 전시가 마련된다.2000년, 2차 세계대전의 발원지이자 최대의 희생국이기도 한 독일을 출발하여 이스라엘과 한국,일본,그리고 미국을 2003년까지 순회할 이 전시는 바로 ‘부재의 미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마련된다.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으로 인해 처절하게 피폐해 버린 인간의 심성을 담아낼 이 전시는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참혹한 전장의 현장,살육의 현장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전시의 키워드는 ‘부재의 미학’이라는 용어에 숨어 있다. 전쟁의잔혹함을 직접적으로 고발하고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학살로 이 땅에서 사라져 간 사람들의 ‘비어있음’‘사라짐’이라는 은유를 통해,‘없음’을 통해 그 흔적을 마음속 깊이 추적해 봄으로서 직접적인 묘사와는 또 다른 무게로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를 것이다.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가 버린 존엄한 사람들의 흔적들을 통해 우리는 전쟁과 살육의 야욕 앞에서 드러나는인간의 야수성과 잔혹성을 확인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미술의 또다른 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지만 지구촌 다른 곳에서는 앞날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 보고 있다는 점을 새 천년을 한 달여 남겨 놓은지금에라도 되새겨 보아야 하지않을까. [정준모 큐레이터·미술평론가]
  • 주식 클리닉센터가 권하는 투자법

    “크게 오른 종목을 사라” ‘저점매수’ 등 기존의 주식투자기법에 익숙한 투자자들에게는 엉뚱한 소리로 들린다.올 7월 문을 연 현대증권 투자클리닉센터(원장 김지민)에서 권하는 투자법이다.파격적이어서 선뜻 선택하기 어렵지만 한번쯤은 진지하게고려해 봄직한 방법론이다. ■오를때 조금 벌고 내릴때 크게 잃는 투자자들 최근 주가상승세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었다는 개인투자자들을 찾기 어려운 것은 왜 일까.조금만 오르면조급하게 팔고,떨어질 때는 본전생각에 바닥을 칠때까지 팔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클리닉센터의 진단이다.5만원짜리 주식이 6만원만 돼 도 혹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얼른 팔아치웠다가 나중에 10만원이상 올라가는것을 보고 땅을 치기 일쑤이다.반면 저점매수 차원에서 산 주식이 떨어지면‘언젠가 오르겠지’하는 생각에 큰 손실을 보기 다반사다.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문제점을 깨닫지 못한다.9번을 벌고 1번을 잃더라도 번 금액보다 잃은금액이 많으면 투자는 실패인데도 당사자는 오히려 벌었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클리닉센터가 권하는 투자법 우선 일정 기간안에 크게 오른 종목을 골라산다(저점매수와는 정반대).오르고 떨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굳이종목분석이니,주가예측이니 하는 절차는 필요없다.주가라는 것은 많은 변수들이 종합적으로 녹아든 지표여서 그 자체가 믿을만한 정보이다. 대신 일정선(10%,20% 등)까지 떨어지면 팔겠다(손절매)는 기준을 반드시 정해놓아야 한다. 주가가 오르면 손절매 기준도 같이 올라간다.1만원짜리를 살때는 9,000원을 손절매 기준으로 했다가도 2만원이 되면 기준을 1만5,000원으로 올린다.‘아무리 떨어져도 5,000원은 번다’는 생각으로 1만5,000원까지는 절대 팔지않는다.2만원에서 추가로 주가가 크게 오를 것으로 판단되면 주식을 더 산다. 이 주식은 10만원까지 갈 수도 있고,1만원으로 다시 곤두박질할 수도 있다. 그런데 10만원까지 올라가면 8만원이나 더 버는데도 5,000원을 잃을까봐 파는 게 투자자들의 심리다. 10만원에서도 물론 팔 필요는 없다.손절매 기준을 9만5,000원정도로 정해놓고 느긋하게 기다린다.설사주가가 꺼지더라도 9만5,000원에서 팔면 된다.10만원을 다 얻으려고 20만원까지 올라갈 주식을 매도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5,000원정도는 기꺼이 잃어도 좋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클리닉센터 신종근(申鍾根) 과장은 “생각보다 크게 오르고 크게 떨어지는 게 주식의 속성”이라며 “작은 손실을 감수하면서 큰 수익을 노려야 돈을 벌 수 있다”고강조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희귀새 쇠목테 갈매기 해운대서 첫 발견

    국내 조류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희귀새 쇠목테갈매기가 해운대해수욕장에서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경성대 조류관 우용태(禹龍泰)관장은 24일“최근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 등지에 서식하는 붉은부리갈매기 무리에서 목에 검은테 무늬가 뚜렷하고 주둥이가 검은 쇠목테갈매기가 함께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쇠목테갈매기는 주로 시베리아와 캐나다 등 한대지방에서 살며 한겨울에도 거의 이동을 하지 않는 종류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 관장은“쇠목테갈매기는 몸 길이 30㎝ 내외로 붉은부리갈매기(40㎝가량)보다 작으며 지난 80년 국내 조류목록에 등재된 목테갈매기와도 꼬리 모양과부리 및 발의 색이 달라 구별된다”고 설명했다. 우 관장은“이번에 발견된 쇠목테갈매기는 미조(迷鳥·길잃은 새)로 추정되며 내년 봄 번식을 위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대한광장] 하찮은 볏짚들이 들려주는 속삭임

    11월이 깊어가고 있다.해가 지는 강화를 찾아나선다.석양에 서고 싶은 반조(返照)의 마음 때문이다.반조는 저무는 해가 자신이 걸어온 동쪽을 마지막으로 비춰본다는 뜻이다. 지난 봄 비가 내리던 48번 국도 주변의 들판에는 이미 알곡을 세상에 바친까칠한 빛깔의 볏짚들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마음이 반가웠다.착근을 하느라 바람에 여린 잎을 떨며 찰랑이는 물바닥에 쓰러질 듯 애처롭던 어린 모들이 저들이다.6월에 벼포기가 굵어지고 향기로운 이삭을 피우던 그들은 햇살을 받고 물을 빨아올리며 쉼없이 알을 키워왔다.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보시를 준 생명을 찾아보자면,인간의 노동을 돕고 자신의 고기를 바치던 소(牛)와 들에서 자신들의 업을 치르고 우리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는 저 벼들일 것이다.그러나 도시인들은 경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기에 그들의 아름다운 생애와 노고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색이 검어져가는 볏짚의 빛깔에는 위안이 있다.몸은 위안을 받을 뿐 아니라 즐거운 마음이 샘솟는다.이것은 금세기의 마지막 가을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다.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헌신한다지만 어떤 위인보다 저 볏짚들의 보시가 눈물겹다.거룩하다 할 저들의 생애를 생각하면 인간의 끔찍한 역사와 욕망을 잠시 잊을 수가 있다.잔인한 인간의 역사보다 마치 벼의 거룩한생애를 그리려는 작가처럼. “나는 엄살꾼이다.볏단들을 보게나.저들은 얼마나 힘들었겠나.홍수와 불볕을 이겨내고 알곡을 사람들에게 바치고 흙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무엇인가를 저 벼들에게서 배우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그것들은 모두 말씀이기에 소유할 수가 없다.누가 저 들녘을 가져갈 수가 있겠는가.진정한 배움은 알곡에도 있지만 누워 있는 볏짚들의 모습에도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그 무엇들이 질서있게 찾아오고말없이 돌아가는 들에서 ‘빈자일등’의 안타까움이 느껴지지만,그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그야말로 빈손이다.성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도와줄 때 말씀으로 행하였다.진리의 법 이외의 어떤 재화를 나누어 주었다면 그렇게 서로가 사랑하고 아프게 오래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농부의 마음이 느껴진다.25세기 전의 일화가 있다.자로가 삼태기를 메고 가는 노인을 만나,“영감께선 공자 선생님을 보셨습니까”하고 묻자,노인이 “손발을 움직여 일하지 않고,오곡의 구별도 할 줄 모르니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하겠는가”라고 대답한다.자로가 노인의 아들에게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로운 일이 될수 없다고 가르치지만 되레 은둔한 노인이 흥미로워진다. 나는 1999년 11월,농업을 끝낸 서울 교외의 강화에서 중얼인다. “침묵으로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생명이 저 벼들이다.그러니 벼들이야말로 사람들의 어머니다. 저들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새 천년에 대한 기대와 의문보다 나는 저 겨울 건너편 봄비 속에서 착근할내년의 어린 모들이 기다려진다.찬 논물에서 힘차게 울어댈 풀빛 개구리들의 겨울잠도 궁금하다.눈얼음 속에서 볏짚들은 자신들의 씨앗을 기다릴 것이다.짐짓 일을 꾸미지 않는 산사의 스님과 한 곳에서 평생을 바치는 상수리나무를 생각하면,참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은다시 생각해봐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무릇 저 짚풀들의 무언의 속삭임을 새겨들을 뿐이다. “서두르지 말게.제발 천천히 걸어감세.무엇이 그리 바쁜가.바쁘게 걸으면자네도 어렵고 옆 사람도 다칠 것이네.너나없이 일과 사람에 치여 살아가는것 같네그려.좀 느끼며 천천히 사세” 금세기와 송별하는 사람들은 산의 눈구름 같은 감회에 젖어 있을 것이다.우리는 곧 20세기의 과거인이 된다.오늘 누산과 통진을 지나 강화로 가면서,40여일도 채 남지않은 세기의 일몰 속에서 작은 음성을 들은 셈이다.그것은 놀랍게도 별 것이 아닌 일개 볏짚들의 속삭임이었다.깊이 생각할수록 천천히걸어야 한다는 말은 나에게는 적어도 속깊은 당부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고형렬 시인]
  • [21세기 내고장 역점사업] (45) 진해시

    국내 최대의 군항도시인 경남 진해시가 21세기에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한다.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진해는 기온이 온화하고,리아스식 해안선과 어우러진 자연경관이 아름답다.수산자원과 문화유적도 풍부하다.이처럼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관광자원을 군항도시라는 기존의 이미지에 접목시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관광도시로 거듭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진해시는 올해부터 오는 2002년까지 1,243억원의 사업비로 군함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웅천읍성과 도요지,안골왜성 등 문화유적 복원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군함박물관건립사업] 군항도시에 걸맞는 밀레니엄기념사업으로 오는 2001년까지 웅천동 명동마을 해안에 퇴역 구축함을 개조한 군함박물관을 만들고,주변의 수려한 해안경관을 살려 38만㎡ 규모로 해양공원을 조성한다. 박물관으로 활용되는 구축함은 길이 118m 너비 13m 높이 28m의 2,500t급으로 지난 45년 건조돼 50여년간 취역하다 최근 퇴역했다.이 구축함은 내년 9월쯤 해군으로 부터 무상으로 넘겨받는다. 해양공원 조성사업은 군함박물관이 완공된 후 2차사업으로 추진한다.오는 2010년까지 야외공연장과 해상레스토랑을 건립하고,해안산책로와 야영장도 조성해 관광객에게 볼거리와 쉼터를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군함박물관 건립과 해양공원 조성에 소요되는 사업비는 500억원이다.이중 140억원은 국비를 지원받고,도·시비가 60억원이며,나머지 300억원은 민자를유치해 충당한다. [문화유적 복원사업] 오는 2010년까지 사업비 374억원으로 웅천과 웅동지역에 산재한 유적지를 복원,남해안 국제관광벨트와 연계시킬 계획이다. 한국 전래의 대표적인 성인 ‘웅천읍성’을 복원해 민속학술자료로 보존하고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때 분청사기를 구웠던 것으로 전해지는 두동 일대 1만여평에 웅천도요지를 복원한다.2003년까지 83억원을 들여 전통 가마와 공방을 복원해 독특하고 창조적인 조형미를 지닌 도자예술의 전통과 우수성을 재현한다.당시 도공들이 생활했던 민가도 다시 지어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할 계획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축조한 웅천왜성과 안골왜성도 복원정비해 역사와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일본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숙박시설 증설계획] 연간 300만명의 관광객이 진해를 찾지만 숙박시설이 열악하고 위락시설이 없어 대부분 스쳐가고 있다.이같은 문제점을 개선,관광객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광호텔 건립을 적극 유도하고 있다.시내제황산동에 객실 150실과 회의장,카지노 등을 갖춘 특급호텔 건립이 추진되고 있고,두동 안골포에도 50실 규모의 중형 관광호텔이 건립된다.용원동과태백동에 각각 건립중인 관광호텔은 마무리공사만 남겨둔 상태다. 진해 이정규기자 jeong@■진해의 벚꽃 진해는 벚꽃의 도시다.매년 봄이면 시내에 심어진 20만그루의 벚나무가 꽃을 활짝 피워 온 시가지는 ‘벚꽃터널’을 이룬다.진해만에 훈풍이 불어오는3월말쯤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벚꽃은 4월초에 절정을 이룬다. 벚꽃의화사한 빛깔이 절정에 달할즈음 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마치 눈이 내리는 듯한 광경을 연출,아름다움을 한층더해준다. 이와 때를 같이해 군항제가 열리고,전국에서 몰려든 100만명의 상춘객들은 화려한 벚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진해에 벚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지난 1907년.을사보호조약(1905년)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가 진해만을 일본해군의 중심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강점하면서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집안에 한두그루씩 심었고,1910년 6월부터 군항으로 도시계획을 하면서 시가지에 2만그루의 벚나무를 심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광복이후 일제에 대한 감정때문에 상당수가 베어졌으나 ‘왕벚나무’가우리나라 자생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심기 시작했다.지난 62년 진해시와 해군이 공동으로 왕벚나무 2,000여그루를 해군작전사령부 영내와 제황산공원,시가지 등에 심었다.이를 계기로 지금은 시내 도로변에 5∼6m 간격으로 1그루씩 심어져 있다. ■김병로 진해시장 인터뷰 “뉴 밀레니엄시대가 되면 진해는 군항도시·소비도시의 이미지에서 한 차원 뛰어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해양관광도시로 성장할 것입니다” 김병로(金炳魯) 진해시장은 “21세기 진해는 사람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그린(Green)도시’로 가꿔진다”며 “시민들도 이에 걸맞는 시민의식과 친절의식의 함양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21세기 진해의 발전 방향은.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이 찾고 싶고,머물고 싶고,쉬어가고 싶은 해양관광도시,수준높은 교육·문화·예술도시로 키워나가겠다.이를 위해 군함박물관을 건립하고 웅천동 일대의 문화유적지 복원사업을 펼치는 것이다. -21세기에 걸맞는 도시계획은. 2016년을 목표년도로 도시기본계획을 이미수립했다.도시의 주 기능을 항만 및 휴양도시로 개발할 계획이다.낙후된 동부지역의 해안을 매립,공업기능을 확대하고,도시공간구조를 다핵화하는 등미래지향적인 도시골격을 구축해 나갈 방침이다.특히 동부지역에 대단위 주거단지를 조성하고,종합대학을 유치하는 한편 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시설을대폭 확충,동북아의 중심도시로 가꿔갈 생각이다. -군항제 행사의 발전적인 개편 방안은. 군항제는 37년의 전통을 가진 전국규모 페스티발로 자리매김됐지만 보완하고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사실이다.따라서 민·관·군이 폭넓게 참여하는 ‘군항제 제도개선위원회’를 구성,논란이 되는 행사기간과 프로그램,교통·관광·환경문제,손님맞이 대책등을 백지상태에서 재검토할 계획이다.특히 군부대와 긴밀히 협조,군항도시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축제로 개편해 나가겠다. -새 천년을 맞는 시민들의 바람직한 자세는. 21세기 진해는 인구 30만명을수용하는 자치자족적인 중견도시로 사람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그린도시로부상돼야 한다.따라서 시민들은 공중질서를 지키고,환경을 생각하는 선진 시민의식과 체질화된 친절의식을 가져야 한다.아울러 시정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는 주인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진해 이정규기자
  • [대한광장] 낙엽을 밟으며

    처음 산사로 출가해 봄을 맞게 되었을 때였습니다.이름 모를 새도 지저귀고,소쩍새울음도 들리기 시작하는데 앙상한 나뭇가지는 움틀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이상하다? 다른 곳에서는 벌써 잎이 파릇파릇한데 이 산 속의 나무들은 왜 이렇게 싹이 나지않지?나무들이 모두 죽었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성철스님께서 마당에 나오셔서 산책을 하고 계셨습니다.가까이 다가가,“스님! 나무들이 아직도 새싹이 나지않으니 다 죽었나봅니다”하고 말씀드리니,스님께서 한참 저를 빤히 쳐다보다가,“세상에 너같이 똑똑한 놈 처음 본다”하시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니 나뭇잎들의 움트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아하! 스님 말씀처럼 내가 똑똑하기는 참 똑똑한 모양이다” 중얼대며 무안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그렇게 산사의 봄은 늦게 오는 것이었습니다.처음에는 잘 몰랐는데,초록은 한가지 색이지만 나무마다 돋아나는 새싹들은 제각각 색깔을 띱니다.봄마다 다투는 초록색의 잔치는 단풍 못지않은 장관임을 알게 된 것도 10여년 산 속에 살면서였습니다.푸른 나뭇잎이 여름의녹음을 지나 가을단풍이 드는 모습도 우리가 느끼듯 제각각이어서 산사의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단풍 가운데서 제일 먼저 빨갛게 물이 드는 나무는 잎이 넓은 옻나무입니다.산에서는 ‘물구리’라고 해서 가느다란 잡목을 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그 가운데 옻나무가 있어 옻이 올라 고생했던 행자시절이 있는데,옻나무가그리 곱게 물드는 줄 알고 참 신기해 했습니다. 가을마다 단풍이 곱게 물들지만 똑같은 단풍이 아닙니다.어느해는 정말 곱게 물들어 그 해는 스님들이 ‘금색단풍’이라 이름붙이고,어느 해는 칙칙하게 물들어 영 시원치 않은 해도 있는데 그 해는 ‘똥색단풍’이라고 이름붙입니다.도시사람들은 단풍드는 산을 찾아와 좋아하지만 단풍이 금색인지 똥색인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그렇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풍이 잘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알아채기도 합니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처음 가을을 맞이했습니다.아무런 가을정취도 없을 것같은 서울생활 속에서도 뜻밖에 가을정취를 느낄 수 있어 감격스러웠습니다.경복궁을 거쳐 청와대 주변을 거닐며 금빛으로 물든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학생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서로 고운 잎들을 주으려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정겨워졌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이 가을이 마냥 아름다운 가을일 수만은 없습니다.‘다시 산중으로 돌아가며’라는 귀거래사를 남기시고 고산 전 총무원장 스님께서 산사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당신과는 관계없는 법적 하자로 총무원장선거를 다시 하게 되었는데,스님은 불교 자주권과 법통수호를 위해선 경선이 아닌추대형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셨습니다.대다수 종도들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선거가 공고되자 스님을 단독후보로 모시자는 소리는어디론가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자존심도 지키지 못하는 종단에 남아 내가 무슨 일을 하겠나!”하는 심정으로 돌아가신 듯 싶습니다.모셨던 사람으로서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습니다. 저는 해인사 산중에서만 살아서 선거가 무엇인지도잘 몰랐습니다.어른스님들이 결정하면 저희들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서울에 살면서 3번째 선거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종단의 지도자를 모시는 방법이 꼭 이래야만 될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선거판이 벌어지고 반가웠던 스님들끼리 서먹한 사이가 돼 또 어떻게 정다워지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이제 종단도 좋은 지도자를 모셨으니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비가 잦아 가야산 단풍도 시원치 않다고 합니다.전국의 단풍도 예년같지는 않다고 합니다.내년에는 날씨가 순조로워 좋은 단풍이 들 것을 기대해 봅니다. [圓澤 조계종 총무부장]
  • [대한광장] 스산한 늦가을에

    늦가을이다.지난밤 바람이 스친다 싶더니 마당에 감나무 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다.바람이 없어도 매일 아침 낙엽의 숫자가 늘고 있어 당연한 자연의통과과정으로 무심했는데 스치는 바람 정도에 저렇듯 무리져 삶을 마감하는가 싶으니 새삼 심상(心傷)해진다. 주황색 잎사귀가 떨어지자 감은 알몸을 드러내며 조금은 수줍은 듯 움츠리는 것 같다.그러나 지난 여름 폭우며 광풍에도 살아남은 자신의 의지를 뽐내듯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싱그러운 윤기를 더한다.마치 자기 삶의 절정을 만끽하듯 우주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고 환호성을 터뜨리는 듯도 하다. 문득 인간 삶의 절정은 어느 시기쯤인가 떠올려본다.자기만족의 순간을 절정(絶頂)으로 꼽는다면 개개인마다 그 시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하나의 목적을 두고 꾸준히 탑을 쌓아올린 삶이라면 탑의 꼭지점이 얹혀지는 바로 그 순간이 정점일 수 있겠고,사업이 번창할 때와 가정의 화목과 건강이 유지되면서 사회적 지위와 명예·부(富)가 최고조로 상승할 때를 자기 인생의 절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나름대로 가진 욕망에 따라 절정의 경험은 타인의 보편적인인식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성취욕이 남달리 강하여 미진한 채로 넘어간 지난 세월의 그 어느 때가 바로 자기 인생의 절정이었음을 고희 줄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는 선배와,하루가 온통 절정의 순간이라며 매일매일 살아 있음의 환희를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동료와,주어진 인생 이럭저럭 아프지 않고 살다 가면 되지 무슨 그런 유별한 순간을 탐욕하고 즐기려 드느냐는 낙천적인친구가 있듯이 절정의 경험 형태와 그것의 가치(존재)판단 등은 각각일 수있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인생의 절정기를 분류해 본다면 광풍에 후두둑 떨어져 살아 남지 못한 감꽃이며 풋감들이지 않고 제 힘으로 우뚝 서 기어이 선홍색 결실로 빛나는 저 감들의 모습처럼 인생의 절정기도 결국 주어진 제 연륜을 낙오하지 않고 살아낸 노년의 시기가 아닌가 헤아려졌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된 아들부부가 감잎투성이의 뜰로 나서고 있었다.아들이 기다란 바지랑대로 홍시가 된 감을 골라 따서 제 신부에게 건네주었다.신부가 감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너무 아름답다고 탄성을 발하더니 한입 가득 깨물었다. 서재의 창에서 몸을 비껴섰다.그들이 혹여 뜰을 내다보고 서 있는 필자를발견하면 무안해질까 싶어서였다.장대가 다시 감나무 속으로 솟구친다 싶더니 아들이 감 한 개를 누런 감잎에 얹어들고 들어왔다.“연시예요! 드세요. ” 아들이 그것을 책상 위에 놓아주고 돌아섰다.“고맙다….네 색시도 좀 따주렴.” 아들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예”하곤 방을 나갔다. 사나흘 전인가는 아들이 퇴근길에 따끈한 군밤을 사왔던 모양이었다.무심코 그들 방 앞을 지나면서 들었다.“맛있지? 어서 먹어.어머니도 군밤을 참 좋아하시거든.이거 갖다드리고 올게.” 필자는 놀라서 아들이 방문을 열기 전에 서둘러 몸을 피했다. 당연한 대자연의 섭리로 주체(主體)의 자리(순위)바뀜이 참으로 자연스럽게 미동됨을 감지했다.초조감 비슷한 감정의 회오리가 일면서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은 부정적 심리반응에 스스로 당황했다.머리로만 준비하던 ‘물러섬’의 여유가 어찌할 수 없는현실에 닿으면서 본성적으로 머뭇거려졌던 것이다. 아들은 다시 바지랑대를 높여 홍시를 고르기 시작하고 장대의 자극에 감잎들이 우수수 내리면서 부딪는 소리들을 냈다.정원수보다 유실수가 좋아서 좁은 마당가로 버찌·앵두·살구·모과·석류·대추·감나무를 심어놓고 이른봄 움이 터서 꽃을 피우고 결실에 이르는,생성에서 마감까지의 과정을 거의철마다 경험하면서도 이즈음만큼 실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늦가을,자연의 섭리대로 어김없이 굴러가는 뜰을 마주하고 서서 어설픈 웃음을 띤 채 주춤대며 서성거린다. 그냥 가슴이 시려서다.기진할 만큼 저릿하고 흡족한 자기만족의 가사(假死)상태,그런 최고의 인생 포만상태는 흔치 않을 것이라 자위하면서도 또한 정점의 순간은 바로 결실을 맺어 주체의 자리가 양도되는 이때려니 긍정하면서도,가슴을 심상케 하는 스산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한다. 金 芝 娟 작가
  • 철원평야 일대 안보관광·탐조여행

    철새의 귀족 두루미.아침 햇살에 더욱 빛나는 고고한 자태의 두루미들이 철원평야 위를 유유히 난다.토교 저수지에서는 20여만 마리의 기러기떼가 굉음을 내며 비상한다.가을 걷이가 끝나 황량하던 철원 들녘이 철새들의 멋진 군무를 위한 거대한 야외 무대로 바뀐다.비행편대를 이루며 철원평야를 돌던철새들이 비무장지대(DMZ)로 날아간다.분단 반세기동안 문명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그 곳은 철새들의 낙원.철새들은 자유롭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든다. 그러나 그 자유는 그들만의 자유다.DMZ는 분단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강원도 철원에 가면 분단의 비극을 체험할 수 있는 ‘안보관광’도하고 겨울 철새들도 만날 수 있다.철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안보관광을 떠나보자.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철원평야의 아침은 철새들의 합창으로 열린다.철원은 겨울 철새들의 낙원.두루미·청둥오리·기러기·독수리 등 겨울 철새들이 가을이 깊어지면 철원으로 날아든다.겨울에도 얼지 않는 천연 샘물이 솟아나는 샘통지역(0.5ha)은 철새들의 도래지로서 73년천연기념물 245호로 지정됐다.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과 늪,토교·동송 저수지 등 담수호,철원평야에떨어진 벼이삭,사람들의 출입 제한 등 철새들의 서식지로 천혜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토교 저수지와 강산리에 있는 동송 저수지 등에는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모여든다.그들이 한꺼번에 날아 오르는 모습은 어느 예술작품 못지 않은 감동적인 장관이다.그들의 힘찬 비상의 굉음은 철원평야의정적을 깬다.세계적으로 희귀한 두루미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우아한 모습의 재두루미와 흰두루미떼들이 날아다니거나,숲이나 논에 있는 것을 쉽게볼 수 있다.철원군은 탐조여행을 위해 하갈리에 있는 아이스크림 고지에 철새 전망대를 만들 계획이다.내년에 착공 2001년 완공 예정.늦가을부터 봄까지 철새를 만날 수 있다. ■제2땅굴 1975년 3월19일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지하 땅굴.북한의 서방산에서 시작된 땅굴은 3.5km.땅굴 입구에서 108m를 내려가면 북한이 화강암을 뚫고 만든 땅굴을 만난다.500m까지만 공개.땅굴속에는 먹고 자고 쉬던 ‘광장’이 있다.그 광장에 서서 북한쪽을 바라보면 땅굴을 팔 때 동원됐던 북한인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땅굴 저편에서 아직도 들려오는듯 하다. ■철의 삼각 전망대와 월정리역 남방 한계선에 인접한 전망대에 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고라니 한쌍이었다.고라니 한쌍이 철책선주위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6·25 때 격렬한 전투로 ‘죽음의 땅’이었던 비무장지대는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으로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속에서 산새와 짐승들은 그들의 낙원을 이루고 있다.숲도 잔인한 비극의 역사를 모른 채 평화스럽다.그러나 그것은 긴장된 평화다.전망대에 오르면 김일성 고지와 피의 능선 등 북녘땅도한눈에 들어온다.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남쪽 마지막 역.6·25때 폭격으로 부서진 열차의 잔해가 앙상한 골격만 남긴 채 누워 있어 분단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관 한국전쟁의 전설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백마고지 전투.12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뀐치열했던 전투의 상흔들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너덜너덜한 철모가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중공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패한 백마고지는 비무장지내 안에 있다.전적비와 기념관은 지난 90년 철책선 근처 철원군 대마리에 만들어졌다. ■노동당사 해방후 북한이 공산독재의 정권강화와 국민통제를 위해 소련식공법으로 완성한 무철근 건축물.6·25전까지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쓰이며 반공인사들을 탄압하던 현장.지붕이 없어지고 일부 벽도 무너져 내렸다.벽에 남아 있는 수많은 탄흔은 치열했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듯하다.참담한 모습의 노동당사는 분단의 슬픈 역사의 유산으로 이념의장벽처럼 서 있다. 철원(강원도) 이창순기자 cslee@ ■여행안내 탐조여행과 안보관광은 철원에 있는 고석정 국민관광단지에서 부터 시작.고석정에 있는 철의 삼각지 전적관 관리사무소 2층 접수실에서 신청서를 작성한후 접수시킨다.신분증 필요.외국인은 여권 또는 ID카드. 출입은 9시30분,10시30분,11시30분,13시,14시(3월∼10월은 마지막 출입시간이 14시30분) 등 하루에 5회.화요일 휴무.자동차나 관광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전적관에 있는 안내인의 가이드에 따라 고석정을 출발,6검문소를 통해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렌즈가 100mm 이상인 사진기는 검문소에 맡겨야 한다). 103초소를 지나 제2땅굴에 도착.제2땅굴을 본후 다시 103초소를 거쳐 철의삼각 전망대와 월정리역 도착.그 이후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백마고지전적비를 거쳐 노동당사를 방문하는 것이 편리.오후 5시까지 여행을 마쳐야한다.식당이 없어 점심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어른 1,500원(단체 1,400원),청소년 1,200원(800원),어린이 800원(500원).주차료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관리사무소 (0353)455-3129,3577,450-5558,5559. ■가는길 43번국도를 타고 의정부-포천-운천-신철원-문혜리(좌회전)-승일교-고석정.
  • [21세기 내고장 역점사업] (40) 태백시

    강원도 태백시가 고원 휴양·관광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풍부한 자연자원과 기후조건 등을 앞세워,쇠락해가는 회색빛 석탄산업도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민들의 절박한 욕구와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도심의 위치가 국내 최고인 평균 해발 600m에 위치한 특성을 살려 한여름체육인들의 휴양을 겸한 전지훈련장과 수자원 등을 이용한 관광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고원 전지훈련장 육성 태백시는 7·8월 한여름 평균 기온이 섭씨 18도를넘지 않는다.운동선수들의 전지 훈련장으로 제격이다.여름 한철 전지훈련을위해 이곳을 찾은 체육인들이 지난 97년 7,000여명에 그쳤으나 지난해 1만2,000여명,올여름에는 3만5,000여명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이같은 추세는 지난해 5월 함백산(해발 1,300m) 정상에 만들어진 함백산 고지대훈련장이 국가대표급선수들의 여름철 훈련장으로 각광받으면서 활기를더하고 있다.맑은 공기와 수려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산 꼭대기에 조성된 400m 트랙과 웨이트트레이닝장,의료시설,깔끔한 숙박시설들이 훈련 효과를극대화시킨다. 실업팀과 중·고·대학 체육인들을 위한 문곡·소도동 일대(해발700m) 태백시종합경기장도 또다른 전지훈련장으로 인기다.주변에는 레슬링,핸드볼,베드민턴 등 구기종목을 연습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까지 갖춰져 있다.지난 96년 여름부터는 해마다 전국실업육상경기대회를 열어 한여름 체육훈련장으로서 태백시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내년에는 해발 1,200∼1,300m에 이르는 가덕산 정상 일대에 1.5㎞짜리 육상전용 트랙을 만들어 현재보다 연간 2만명 이상을 더 수용할 계획이다.폭 3.5m로 이어지는 트랙은 1.7m씩 양쪽으로 나눠 아스콘과 마사토 다짐으로 각각만들어 육상 훈련에 최상의 여건을 제시하게 된다.지금까지 9억2,000만원을들여 코스기초작업을 마쳤다.내년 여름 훈련철에 앞서 모두 완공할 계획이다. 구문소동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모터스포츠 종합타운이 만들어져 또다른관광스포츠고장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자연관광자원 개발 태백시는 천혜의 자연관광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를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는 전략이다. 우선 4계절 자연을 이용한 축제가 눈길을 끈다.봄이면 태백산의 철쭉을 이용한 ‘철쭉제’,여름철 서늘한 기후를 이용한 ‘쿨 시네마축제’,가을이면‘태백제’,겨울에는 눈을 상품화한 ‘눈축제’가 이어진다.특히 한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수 있는 ‘쿨 시네마축제’는 지난 96년 시작한이래 해마다 2만명이상의 유료 관광객을 맞으며 성황을 이룬다.해발 800m의 고원지대이면서 산골짜기에 위치한 당골광장에서 시원한 여름밤에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야외에 마련된 스크린을 보며 영화를 즐기는 색다른 행사여서 인기를 얻고있다. 내년부터는 보다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해 활성화할 계획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황지연못을 테마공원으로 조성해 관광상품화하고 구문소동의 화석군락지와 자연동굴,황지천 등을 둘러보는 자연학습 탐방코스도개발해 학생들의 견학장소로 이용할 방침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철암지역에도 오는 2002년까지 42억7,000만원을 들여 태백고원휴양림을 조성,주민 소득원으로 가꿀 계획이다. 김신일(金信一) 태백시 기획예산실장은 “올해 목표인 관광객 200만명,관광수입 20억원 달성이 무난할 것으로 본다”며 “고원지대를 이용한 휴양·관광도시의 새로운 모습으로 지역경제를 살려나가겠다”고 말했다. 태백 조한종기자 hancho@ * 모터스포츠타운 첩첩산중 태백시에 첨단시설을 갖춘 모터스포츠종합타운이 들어선다. 고원 휴양·관광도시 건설에 발맞춰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을 이용한 모터스포츠 전용경기장을 만들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겠다는 속셈이다. 국내 최대 규모로 조성될 모터스포츠타운은 구문소동 일대 47만여평에 2,0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경기장과 각종 부대시설로 꾸며진다. 민자유치사업인만큼 운영은 한국모터스포츠연맹(KMF)이,투자는 한길그룹이맡기로 올초 이미 확정됐다. 모터스포츠가 펼쳐질 경기장은 구문소동 일대를 구불구불 휘돌아 4㎞에 이르는 트랙을 갖춘다. 주변에는 의료센터와 전망탑,미니골프장,교통안전교육장,놀이시설,콘도시설등이 어울어져 관광객들을 맞는다. 모든 시설은 세계모터스포츠연맹(FIM)의 공인을 받아 국제경기도 수용할 방침이다. 당장 내년 8월 아시아권 모터스포츠경기대회를 열고,2002년에는 세계모터스포츠선수권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강원개발연구원으로부터 용역결과가 이달안에 나오는대로 내년초 트랙공사에 들어가면 내년중반부터 경기가 가능하다는 진단이다. 모든 부대시설의 완비는 오는 2003년까지 가능할 전망이다. *홍순일시장 인터뷰 ‘한여름 휴양과 관광,스포츠 전지훈련을 원하시면 태백시를 찾으십시오’ 홍순일(洪淳佾) 태백시장은 고원 휴양·관광도시로 도시 이미지를 탈바꿈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다. 현재 6만명으로 줄어든 인구를 오는 2016년까지 다시 15만명 이상으로 늘려살기 좋은 희망의 도시로 가꾸겠다는 포부다.석탄산업 합리화이후 쇠락의 길을 걸어온 도시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각오다. 다행히 수려한 자연자원과 고원지대만이 간직할 수 있는 기후조건 등이 새로운 자원으로 떠오르면서 가능성을 높여준다. 홍시장은 “국내 최대의 고원지대인만큼 한여름이면 모기 한마리 얼씬거리지 못할만큼 서늘한 기후조건이 태백시의 효자상품”이라고 자랑이다.한여름 더위 때문에 훈련에 지장받는 체육인들의 전지훈련장으로 각광받아 장래가더욱 밝다. 해발 1,200∼1,300m에 이르는 함백산과 가덕산 일대에는 이미 육상선수들의 훈련장이 곳곳에 조성되고 있어 지난 96년이후 체육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기후조건도 좋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의 자연풍광과 각종 유혹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다는 심리적인 효과까지 얻을 수 있어 체육인들에게는 태백시가 1석3조의 전지훈련장으로 꼽힌다”는 것이 홍시장은 설명이다.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도 태백시가 뽐낼만한 관광자원이다.황지연못과삼수령 검룡소등의 물자원을 이용한 발원지 문화탐방과 석탄박물관∼폐광갱도∼최초석탄 발견지 탑 등을 둘러보는 석탄역사 탐방 등 자연자원을 이용한 테마관광코스가 곧 개발된다.인접한 영월과 정선 등 함백산을 중심으로 한414호 지방도로를 이용한 20㎞에 이르는 환상의 드라이브코스가 새롭게 정비되면 4계절 자연을 만끽하는 장소로도 뜰 전망이다. 정선군이 추진하는카지노산업이 본격화되면 태백시가 배후 관광도시로 부각될 것으로 기대된다. 홍시장은 “휴양·관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도심권 정비도 서둘러 2016년까지 모든 기반시설을 완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백 조한종기자
  • 정무委, 증인 불러내기‘대작전’

    일부 증인의 국정감사 불출석을 놓고 골머리를 앓고있는 국회 상임위들은정무위를 주목해볼 만하다. 5일 금융감독원에 대한 정무위 국감에는 당초 불출석 의사를 밝혔던 삼부파이낸스 정해석(丁海石)사장과 유명규(柳明奎)부산파이낸스협회 사무총장이출석했다. 이들이 갑자기 출석하게 된 데는 ‘험악하게’ 돌아가는 정무위의 분위기를간파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특히 부산에 머물고 있는 삼부파이낸스 정사장 등에게 입법조사관을 파견,출석을 종용했다.국회 직원이 직접 찾아와 증인출석을 위한 동행을 요청하는것을 거절할 ‘배짱’은 없었던 듯싶다. 정무위가 이같은 ‘고육책’을 내놓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현대그룹 주가조작사건과 관련된 정몽헌(鄭夢憲)회장,금호그룹 주가조작 사건 관련 박찬구(朴贊求)사장 등 핵심 증인들이 잇따라 불출석사유서를 냈다. 이렇게 되자 국민회의 이석현(李錫玄)의원이 “동행명령장을 발부해 강제출석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나섰다.한나라당 김영선(金映宣)의원은 고발조치를 요구했다.같은당 이사철(李思哲)의원은 한술 더떠 “출국금지를 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무위는 “다시 증인 출석요구서를 보낸 뒤 15일 종합감사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고발할 것”을 결의한 뒤 국정감사를 정상적으로 진행시킬 수있었다. 해외로 나간 증인들이 이같은 분위기에 겁을 먹고 귀국할지는 의문이지만국내에 있는 증인들에게는 입법조사관 파견은 검토해봄직한 방안이라는 지적이다. 이지운기자
  • [獨逸 통일 9주년] 의미·전망

    3일은 독일통일 9주년을 맞은 날.90년 10월3일 동독의회가 “동독 5개주를독일연방에 가입시킨다”는 통일안을 가결함으로써 역사적인 독일통일이 이뤄진 것이다.아울러 오는 11월9일은 독일통일과 동구권해체의 출발점이 된베를린 장벽 붕괴 10년째 되는 날이다.이들에 앞서 9월초에는 통일과업의 정점행사인 베를린 천도(遷都)도 단행됐다.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독일의 역사,나아가 세계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1989년 여름.동구권의 개혁 및 민주화 열기는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으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동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각 도시마다 민주화 및 개혁요구 시위로 달아있던 때다.장벽에 가로막힌 동독민들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통한 엑소더스(대탈출)는 늘어만 갔다. 소련 위성국 헝가리는 마침내 9월10일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국경의 철조망을 철거하는 조치를 발표했다.11월9일 구 동독 공산당(SED)당수 귄터 샤보브스키는 공산당 위원회 회의를 마친 뒤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모든 국경을개방한다’는 역사적인 장벽개방 조치를 발표했다. 삽시간에 수만명의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모여들였고 국경수비대들은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드디어 40년만에 문이 열렸고 다시는 닫히지 않았다. 61년 동독에 의해 설치되면서 동서독 분단 및 동·서 유럽 분단의 상징으로 존재하던 164㎞의 장벽이 없어진 것이다.이후 콜 총리의 10개 조항 통일안발표,이듬해인 90년초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이 참가한 ‘2+4회담’등을 거쳐 10월 3일 동독의회가 ‘동독지역 5개주를 독일연방에 가입키로 한다’는 통일안을 가결했다. 전후 40년만에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자랑하게된 인구 8,200만의 대국 독일이 국제사회에 다시 우뚝 일어선 순간이다.독일 통일은 단순히 독일 민족의통일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유럽통합의 기폭제이자,냉전시대 미·소를 중심으로한 양극 체제가 종식되고 다극화 질서가 새롭게 구축된다는 세계사적인의의를 지닌 사건이다.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을 향한 독일통일 과업의 정점은 바로 수도 이전.지난 9월부터 베를린의 제국의회(라이히스탁)에서 의회가 활동을 시작했고 게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베를린 집무를 시작했다.‘은둔과 반성’의 도시 ‘본’시대를 마감하고 베를린 공화국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동서독 내부 통합에 10년 노력을 기울여온 독일은 이제 유럽의 중심부인 베를린 시대를 발판으로 국력에 걸맞는 국제사회 제자리 찾기에 적극 나서고있다. ‘동유럽 안정이 독일의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동구 끌어안기에 나서고 있다.최근 슈뢰더 총리는 잇따라 헝가리 폴란드 체코를 찾아 2차대전의 전범자로서 화해의 악수를 청했고 이들의 유럽연합 가입에 애쓰겠다고 밝혔다.지난 봄 나토의 회원국으로 코소보 사태에 적극 개입했다.300억 달러에 이르는발칸 재건 프로젝트에도 열심이다.나토,유럽경제협력공동체(OSCE)등 모든 분야서 중심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이러한 행보를 바라보는 주변국의 눈초리는 경계 심으로 가득차 있지만 정작 독일은 “우리는 ‘크고 겸손한 베를린 시대’를 이끌어간다.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드라마 가운데하나인 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 통일.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 세기 새로운 세계사 판짜기의 전주곡이었다는 점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세계경제硏등 보고서 “10년간 쏟아부었지만 동독과 서독의 경제통합은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정책 수정이 불가피하다”.독일의 유력 정책연구소인 베를린 경제문제연구소(GIER),세계 경제연구소(IWE)등이 최근 독일 통일 9주년에 맞춰 내놓은 보고서.국제무대에서 제 위상을 찾아 강대국의 역할을 해온 통일 독일,그러나 그내부 통합의 성적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수준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다. 동서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와 감정적 골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답보상태.독일 정부가 그동안 동독 재건을 위해 쏟아부은 돈은 9,000억달러.동독 지역인구는 1,700만명.1명에 5만3,000달러를 들인 셈이다.그러나 지난해 동독지역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서독의 56% 수준에 머물렀다.독일 정부가 청년 실업 구제 기금의 40%나 동독지역으로 돌렸는데도 지난해 실업률은 17.4%나 됐다.서독지역의 9.3%보다 2배나되는 수치이다. 경제사정이 이렇다보니 자연히 동서독주민의 정서적 괴리도 통일 직후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여전히 서로를 ‘배은망덕한’ 오씨(Ossies·동쪽사람),‘오만한’ 베씨(Wessies·서쪽사람)로 비아냥댄다.서독인들로서는 막대한통일 비용으로 자신들의 몫이 줄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이러한 감정이 비롯됐다는 분석. 최근 실시된 브란덴부르크 및 작센주 등의 구 동독지역 주의회 선거에서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SPD)이 대패하고 공산당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이 제2당으로 약진한 것은 이같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다.89년 라이프찌히 시위를주도한 롤란드 퀘스터씨(라이프찌히 시의원)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내년 정도엔 다시 공산당 돌풍이 불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르너 뮐러 경제부 장관은 최근 “통일 당시 정치인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실제 동독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통한 통합작업은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이제 ‘비상체제’에서 ‘평상체제’로 전환해 민간투자를 유도하는 식의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1인당 생산성은 서독 지역의 59.5%에 머무르면서도 임금수준은 75%에 육박한다.새로운 대안 역시 별반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김수정기자
  • [음반 리뷰] 한국의 대표 명반 탄생을 기다리며

    체코의 ‘수프라폰’레이블로 나온 체코 국민주의 작곡가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명음레코드)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부럽다는것이었다. 이 음반에는 라파엘 쿠벨릭(1914∼96)과 바츨라프 노이만(1920∼95)이 각각체코 필하모닉을 지휘한 ‘나의 조국’이 들어 있다.쿠벨릭 음반은 지난 90년 ‘프라하의 봄’축제의 실황녹음이고,노이만 것은 75년 프라하의 드보르작홀에서 녹음한 것이다.둘다 각종 음반가이드가 최상위권으로 꼽고 있는 명반들이다. 새로 나온 음반은 그러나 수프라폰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다.국내에서 발매하면서 두개의 음반을 한 케이스에 담은 이른바 ‘투 포 원(2 for 1)’이다.그럼에도 ‘체코 음악은 체코 사람이 가장 잘 연주한다’는 자부심이강렬하게 느껴진다. 이 음반을 즐기기보다 부러워해야 했던 것은 한국은 이런 음반을 언제쯤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이다.우리 작곡가의 작품을 우리 지휘자가,우리 교향악단을 지휘해 음반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이 음반처럼 해외 각국에서라이선스로 발매할만큼 보편성이 있을 것인가.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자는 누구인가도 다시 생각해 본다.안익태인가,윤이상인가.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는 또 누구인가.정명훈인가.그렇다면 정명훈은 안익태나 윤이상의 권위자인가.한국에는 정명훈만한 지휘자가 또 있는가.게다가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은 존재하느냐 따위의 의문들이다.불행하게도 이 모든 질문에의 대답은 아직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체코는 도도하게 흐르는 서양음악이라는 큰 강물에 속해 있는 나라다. 서양음악 역사가 일천한 한국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체코도 흐름의 본류라기 보다는 지류다.국민주의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변방에서 살아갈 길을 궁리한 결과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그런 점에서 이 음반은 한국음악계가 가야할 방향 만큼은 어느 정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서동철기자 dcsuh@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9)동해를 건넌 발해인

    *동해를 건넌 모험가-발해인 1998년은 발해가 건국한지 1300주년이 되는 해였다.고구려가 멸망하자 만주는 무주공산이 됐다.그러나 대조영을 중심으로 다시 뭉친 고구려인들은 옛땅을 되찾고 발해를 세웠다.발해는 문화가 뛰어났으며,주변의 나라들과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영토가 한창 때에는 남은 대동강부터 원산,서로는 요동반도(한규철 설),북은 연해주와 하바로브스크일대까지 뻗쳤다.‘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발해의 국력을 국제적으로도 인정한 것이었다. 발해가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어받은 고구려정신과 지정학적으로 만주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남북경쟁이라는 현실,뛰어난 해양력을 잘 활용했기때문이다.732년 발해는 육군으로 요서지방,수군으로 산동반도 등주와 래주를 공격했다.당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질서에 위협을 느낀 발해는 북방의 흑수말갈을 토벌하였다.이어 돌궐 거란 등과 연합해 당을 공격하기로 하였다.장문휴(張文休)는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성을 습격하여 자사(刺史)인 위준(韋俊)을 죽이고 점령하였다.등주는 중국의 수군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할때 사용하였던 묘도군도 끝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 공격은 발해가 수군을 이용해 당의 후방을 공격할수 있다는 경고성 행위였다.그후 당과 화친,황해북부 연근해항로를 이용해 교섭과 교역을 활발하게 했다.특히 산동지방의 고구려계 이정기세력과는 해로로 말 교역 등을 하였으며,심지어 발해 배들이 황해를 종단해 절강지역까지 내려갔다. 발해는 신라와는 적대적이었지만 일본과는 관계가 돈독했다.727년 첫 사신을 파견한 이후 926년 멸망할 때까지 200여년 동안 공식사절만 34번을 파견하였다.무왕(武王)은 국서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선언하였다.이는고구려의 국제적인 위상과 명분,실리를 계승하겠다는 대외적인 의지표방이었다.반면 일본은 13차로 발해보다는 소극적이었으나,정치적으로는 신라를 견제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위치를 상승시켰다. 두 나라는 동맹을 맺어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였으며,8세기중반에는 신라에 공격을 시도해 국제전의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그러나9세기 들어 두나라 간의 교섭은 문화,경제적인 형태로 변화되었다.특히 중요한 것은 무역이었으며,발해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발해인들은 담비가죽,호랑이가죽,곰가죽,말가죽,꿀,인삼을 수출했고,일본에서는 면 비단 수은 석유 등을 수입하였다.한번에 몇 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이 동해를 건너와 곳곳에 세워진 객관이나 객원에 머무르면서 장사를 하였다.일본화폐를 수십만전씩 갖고 귀국하는 경우도 생겼다.그러나 심각한 무역역조 현상이 나타나자 일본 조정은 일본인들의 사무역을 금했으며,발해의 배가 들어오는 오는 횟수와 장소를 제한하고,어길 경우 추방까지 하였다. 발해 사신선에는 수령과 상인들이 타고 와서 중계무역도 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그리고 상인들을 태운 민간배들도 독자적으로 왔으며(746년에는 1,100여명이 일본으로 온 것으로 돼 있다) 기록되지 않은 민간 상인들간의비공식적 교역은 일본의 동해안 곳곳에서 수없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내륙국가로 알려진 발해인들은 언제 어떻게 동해를 건너왔으며,어떤 배를 이용,항해를하였을까? 1998년 1월 24일 새벽,4명의 젊은이들을 태운 뗏목 ‘발해 1300호’가 일본 오키제도의 도고섬 앞에서 전복되면서 전원 희생됐다.사람들은 그들이 무모하게 왜 한 겨울에 그토록 험난한 동해를 건넜느냐고 비판했다.그들의 선배였던 필자는 그들 대신에 항변을 하면서 발해의 해양활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발해배가 일본열도에 닿으려면 한 겨울 북서풍을 받아야 한다.때문에 11월부터 2월 사이에 떠난다.돌아올 때는 반대로 봄철에 일본을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겨울 동해바다는 수온이 매우 낮고,늘 바람이 거세며,파고는 보통 2∼3m다.폭풍이 몰아칠 때는 풍속이 20m/sec 이상 된다.악조건속에서 동해를건너던 발해선들은 무수히 표류하거나 침몰해 숱한 사람이 수중고혼이 됐다(776년에는 120여명이 죽었다).그러나 ‘발해 1300호’처럼 오키제도에 도착한 사절선도 3번이나 있었다. 발해인은 항해술과 조선술이 매우 뛰어났다.동해는 망망대해지만,신라 때문에 안전한 연근해 항로를 포기하고 동해북부 사단항로를 이용해야만 했다.때문에 발해배들은 원양항해를 해야 했으며,지문항법 뿐 아니라 천문항법에 능숙해야 한다.그래서 천문생(天文生)이라는 항법사가 타고 있었다. 한겨울 거친 파도와,강한 바람을 견뎌내려면 조선술이 발달해야 한다.평온한 계절에 내해에서 연근해 항해를 하는 신라나 당,일본배와는 구조나 강도에서 차이가 있다.발해배는 크기는 약간 적고,돛은 사각에 가까웠으며,평저선에 첨저선의 구조를 일부 보완한 형태였을 것이다.발해배들은 러시아의 크라스키노,두만강 하구,청진,북평 등에서 출발해 일본열도의 동북인 아키다(秋田) 니이가타(新潟) 노토(能登)반도,쓰루가(敦賀),이즈모(出雲) 타자이후(太宰府)등 여러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항해조건과 연해주를 차지한 발해의 영토 등을 고려할 때 발해인들은 봄 여름에 남서 계절풍을 이용하여 짧은 거리인 동해북부와 타타르해협을 건너 홋카이도나 사할린에도 진출했을 것이다.일본열도로 항해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항해다.최근에 홋카이도 남부지역인 오타루(小樽),오가와(大川)유적에서 7세기대 고구려계 유물과 발해말혹은 여진초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됐다.이것은 고구려나 발해인들이 연해주 항로를 이용,북방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높혀주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처럼 대륙뿐 아니라 동해와 황해북부를 장악하여 동아지중해에서 중핵 조정역할을 잘 수행하였고 해동성국이 되었다.결국 8∼9세기는 발해와 신라가 동아지중해를 나누어 운영하면서 분단의 한계를 해양으로 일부나마 극복한 시대였다.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8)해상왕 장보고

    ‘生年未祇奉 久承高風 伏增欽仰(생년미기봉 구승고풍 복증흠앙: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 갑니다)’. 840년 2월 17일.당에서 천신만고 끝에 신라배로 귀국한 일본의 승려인 옌닌(圓仁)이 장보고에게 보낸 글의 일부이다.존경과 감동의 마음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그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덕분에 그나마 신라의 해양사,장보고의 활동,그리고 그의 동아시아적 위상을 알 수 있게 됐다. 장보고는 단순한 군인이나 상인,더욱이 야심찬 정치가는 아니었다.그는 변화된 동아지중해의 본질을 꿰뚫고 신질서의 핵심으로 뛰어든 인물이었다.장보고 선단의 활동범위는 매우 넓었고,바다와 육지에 걸쳐있었다.신라와 당,일본은 물론 간접적으로 발해와 동남아국가들,아라비아에까지 이어져 있었다.대운하의 주변에 포진한 신라방들과 연계하면서 산동반도의 여러 지역들,청도만입구의 연운,그리고 절강성 영파와 주산군도 등 황해의 서안,한반도의서해안,남해안,제주도,일본 규슈의 하카다,우사(宇佐)지역(金文經설)를 거점으로 황해와 동해북부를 제외한 동아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 광범위한 활동의 중심지는 남부해안에 828년 설치한 청해진(완도)이었다.청해진은 한중일을 연결하는 항로가 경유하는 중요한 항구도시였다.동아시아의 해적을 퇴치하는 해군력을 키우고,선단이 대기하는 군사도시이었다.때문에 완도나 장도(將島)외에 주변 섬들에 소규모의 군항을 만들고,방어체제를 구축해 공수를 유기적으로 엮은 나폴리같은 대규모 해양요새였다.또 국제교역을 국내산업과 연결시키는 수륙교통의 요지로써 배후에 생산과 소비,운송을 담당한 강진 해남 등이 있는 해양폴리스였다. 장보고는 이 도시에서 사무역과 공무역과 산업을 관장하는 한편 해적의 퇴치,신라내정의 참여 등 사업을 벌였으며,곳곳에 황해 연안 포진한 신라방들을 관리하며 연결시켰다.때문에 라이샤워는 장보고를 해외조계지(colony)를지배한 총독(commissioner)으로 평가했다. 그로 하여금 경이적인 활동과 역사적인 역할을 하게한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해양활동 능력이었다.신라인들은 항해술이 매우 뛰어났다.옌닌의 책에 따르면 신라배들은 산동반도에서 신라땅까지 바람이 좋을 때는 2∼3일이면 닿을 수 있다고 하였다.847년 옌닌이 귀국할 때 탄 배는 음력 9월 2일 정오 적산포의 모야도를 출발해 황해를 건너 다음날 아침 육지를보았다.직횡단거리가 200㎞ 정도가 된다. 신라인인 절강의 대항해가 장우신(張友信:조영록 설)은 명주를 출발해 3일만에 일본의 서부까지 항해하였다.동중국해의 북부를 사단으로 항해하는 고난도의 원양 항해이다.신라배에는 ‘암해자’,즉 뱃길을 숙지한 항해사와 풍부한 경험의 선원들이 다양한 항해도구를 사용했다.9세기초 일본열도에는 신라인이 자주 오고,신라배가 해안에 출몰하여 불안을 조성하였다.장보고의 사후에는 신라인들이 일본해안에서 들끓었다.이런 사실은 신라인의 항해술이뛰어났음을 알려준다. 장보고의 선단은 다양한 항로로 바다를 누볐다.황해중부 횡단항로는 산동반도의 적산 등주와 밀주 등 여러 지역에서 출발해 횡단하다가 백령도 등 황해도 연안의 섬들을바라보면서 서해근해를 남하해 청해진에 도착한 뒤 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출항한다.가장 안전하고 많이 사용하던 항로이다. 두번째는 동중국해 사단항로이다.절강성의 명주(영파)나 그 아래를 출발하여 동중국해를 근해항해로 북상한 다음에 상해만 부근에서 황해남부를 사선으로 항해,제주도 해역에 진입한다.한라산은 원양항해시 선박의 위치를 확인하는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이어 청해진으로 들어가거나 남해(사천:서영교설)나 동해(울산)부근으로 항해한다.또는 일본 서부의 고토(五島)열도로 항해한다. 세번째로는 절강에서 일본열도로 항해하는 또하나의 항로는 동중국해 사단항로이다.당시 이 항로들은 계절풍을 이용했는데,특히 동중국해 사단항로는당나라를 출발할 때는 봄에서 초여름까지는 남풍을 활용하고,다시 당으로 돌아갈 때는 북풍계열을 활용해야 한다. 신라인의 조선술은 매우 뛰어났다.신라는 752년에 일본의 나라 동대사에서대불의 개안식을 하였는데,이때 축하겸 사절 700명을 7척의 배에 태워보냈다.1척에 약 100명이 탄 것이다.839년 일본조정은 장보고가 교역하던 태재부에 우수한 신라배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이 무렵 태재부에는 6척의 신라배가 있었다.일본은 가야 백제 신라 등으로부터 조선술을 배워 왔으며,당과 교류할 때는 사신,승려,상인들이 신라배를 타거나 신라선원을 고용하였다. 양주의 신라상인 왕청(王淸)은 일본무역으로 부자가 되었는데,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839년에 당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은 신라배 9척을 고용하여무사히 귀국한 일도 있었다.신라인들은 당나라 대운하주변과 항구에서 조선업을 하였다.847년에는 옌닌이 타고온 신라배가 현재 비파호 근처 히에이산의 명덕원(明德院)에 그림으로 남아있다.쌍돛대에 활대가 9개인 사각돛은 물레를 이용하여 움직이고,닻이 8개 이상이었고,누각이 있다.그런데 당나라에가는 일본사신선들은 길이 20여m,폭은 7m 전후로,백 수십톤 정도로 추정된다. 이런 대선들이 수십척씩 그물같이 뻗은 항로를 이용해 황금의 바다에서 사람과 각종의 진귀한 물건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장보고는 해양을 매개로 ‘동아지중해 환류(環流)시스템’을 완성시킨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그러나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이 시스템은 붕괴되어버렸고,바다는 배반의 공간이 되었으며,신라의 해양시대는 종언을 고하였다.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일부가 해상호족으로 기사회생하여 후삼국시대와 고려라는 새질서의 주인이 되고자 꿈틀거리고 있었다. 21세기 신질서속에서 분단한국은 중국와 일본에 비해 열세이다.우리가 생존할 길은 장보고를 모델로 신 해양질서의 본질을 인식하고,해양력을 강화시켜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역할을 추진하는 것이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외언내언] 현대농구팀의 평양경기

    북한 남녀농구팀이 내년 봄 서울을 방문해 현대농구단과 친선경기를 갖는다고 얼마전 현대측이 밝혔다.현대농구팀이 오는 28,29일 평양 실내체육관 착공식을 기념해 친선경기를 치름에 따라 당초 약속한 교환경기를 서울에서 갖게 된 것이다.현대측은 내년 봄 서울에서 농구 교환경기를 치른 후 주변여건이 허락되면 교류횟수와 경기종목을 점차 늘려가는 데도 북측과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이번 현대농구팀의 평양경기는 지난해 금강산 관광사업을 확정지으면서 평양에 건설하기로 합의했던 1만2,000명 수용규모의 실내체육관 착공식을 기념해 열리는 것이다. 북한 스포츠가 남한을 방문한 것은 해방 이후 90년 통일축구와 91년 청소년축구 단일팀의 단 두번밖에 없었으며 북한 농구팀의 서울 친선경기는 세 번째가 된다.북한 농구팀의 서울 친선경기에는 미국 프로농구 진출을 시도했던 세계 최장신 이명훈(235㎝)이 출전하기로 돼 있어 경기수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번 현대농구팀의 평양 친선경기와 내년 봄 북한 농구팀의 서울 친선경기는 분단 이후 첫 교환경기라는 의미와 함께 남북 체육교류 활성화를위한 기폭제 역할이 된다는 점에서 개최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현대와 북한 농구경기의 위성중계로 서울에서도 안방 TV시청이 가능할 전망이어서 이번 평양경기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로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찾아오는 길목에서 열리는 첫 남북 농구경기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닌 경기가 될 것 같다. 남북 농구 교환경기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다른 종목의 경기 개최도 가능할 것으로 보여 남북 체육교류가 크게 활성화할 것으로 예상된다.지난 8월평양에서 개최된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내년에 서울에서 다시 열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남북스포츠의 본격적인 교류의 기틀이 마련될 수도 있다.특히 현대농구팀의 평양경기는 시기적으로 서해교전 사태 이후 열린다는 점에서 남북간의 긴장해소와 화해분위기 조성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비정치적 체육교류를 통해 남북간 신뢰를 구축하고 민족화합을 이룩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간에 체육교류가 활성화되면 인적 왕래의 물꼬가 트이고 경기를 통한민족의 일체감을 확인,조성할 수 있다.또 앞으로 남북단일팀 구성으로까지발전될 경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세계 체육강국으로의 부상은 물론 민족의 우수성과 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북 체육교류는 통일과정의 필수적 과제라고 생각한다.금강산 관광시대 개막에 이은 남북 체육교류는정부의 대북포용정책 성과의 폭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아무쪼록현대농구단의 평양경기가 체육교류를 통한 남북화해와 협력이 더욱 넓어지는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장청수 논설위원
  • [대한광장] 민주 기지론

    ‘민주기지론(民主基地論)’이라는 것은 원래 북한에서 전개된 이론으로 북한이 통일을 위한 ‘민주주의 근거지’로서 우선 튼튼한 기반을 구축해야 된다는 것이었다.이것은 1946년 봄­여름 사이에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다.그때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이제는 남쪽에서 이 개념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아닌가 한다. 북쪽에서는 소군정의 지도하에 토지개혁을 하고 친일파들을 내몰고 이기분자(異己分子)들을 숙청하고 ‘인민정권’을 창출하여 통일에 대비한 ‘민주기지’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현 시점에서의 남쪽에서는 우선 산적한 문제가운데에서 억울한 사람들을 신원하고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민주기지’로서의 선행조건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일본을 자주 다니면서 부러웠던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국민들 사이에 상호 증오감이 적다는 점이었다.국민 사이에 서로 증오감이 적으면 적을수록,억울한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나라는 강국이다.가난한 나라가 원자탄을 가지는 것보다도 월등히 효과적이다. ‘억울한 사람들’이라는 범주는 상당히 넓지만 그중에서도 6·25 이전에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제주도의 4·3사태가 그렇고 문경 석봉리의 한 마을 학살사건이 그렇다.대만에서는 1947년의 2·28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국의 처참했던 문화대혁명 뒤처리에 있어서도 대국답게 보상할 것은 보상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하였는가?지금에야 해결책을 모색중에 있는 느낌이 있다.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근자에 있어 문화방송의 4·3사건 특집들이 진지한 노력이라 생각된다.물론,필자는 ‘억울하게 된 원인’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제공자는 소련과 그 주위라고 지목한다.북한에서의 소련군정은 알다시피 자신들의 노선에 반대되는 세력은 인정하지 않고 당초부터 남한 미군정의 교란을 적극적으로 획책했었다.이것은 ‘쉬티코프 비망록’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에 반하여,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어 다시 꺼내는 것도 쑥스럽지만 남쪽에서는 사회상의 여러 기존 모순에,북쪽에서의 공세적 교란공작,미 당국의 ‘계산’과 ‘실책’ 등으로 혼란이 가중하여 갔다고 보여진다.의젓한 시골 선비가 좌경운동에 몰두하게도 되고 대지주의 자제가 월북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월남자,우익 민족주의자와 남쪽 기득권층(친일 부역자집단을 포함하여)으로서는 남한내에서조차 몰리면 갈 곳이 없다는 위기감에 붙잡혀 필사 반격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에는 이로,피에는 피로’의 악순환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된다.얼마전 ‘대한매일’에 실린 ‘문경사건’을 생각해 보자.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은 평화스러운 산간벽지의 마을일 뿐이다.두 개의 상반되는 외세의 분단 점령이 없었던들 여태껏 평화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대는 북쪽에서 지리산쪽으로 게릴라가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했다.1949년 가을의 북쪽 신문을 보면 경북 산간지대에서는 피아의 교전뿐만아니라 생포한 경관들을 처단했다는 보도 등을 볼 수 있다.동료들이 생포당한 후 처형되는 것을 보고 발작적인 분노가 발생하기 쉬운 것이다.이러한 환경하에서 문경경찰서에서도 우호적이라고 분류된 석달마을 남녀노소가 전멸적 학살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6·25축소판의 비극을 6·25 이전의남한 사회에서 본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어른이 됐으니 나이에 걸맞게 서슴없이 명예회복과 응분의 보상을 하여야 통일을 위한 ‘민주기지’로서의 역량이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필자는 지난 8월 27일 새벽 일찍 떠나 800㎞를 주파하여 어느 시골에다녀왔다.1950년도 4월 빨치산과 좌익군인을 처형하는 천연색 동영상물(動映像物)을 보기 위해 갔던 것이다.당연하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너무도 슬픈 광경이었다. 통일,통일,부르기 전에 우선 주위부터 다지자.슬기로운 국민화합운동은 바로 통일의 첩경인 것이다. [方善柱 한림대 객원교수]
  • [인터뷰] ‘-사랑의 형식’ 주연 뮤지컬 배우 임선애씨

    내달 2일 문예회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바보각시-사랑의 형식’에서 주연을 맡은 뮤지컬 배우 임선애(29). 그녀는 요즘 해질무렵부터 새벽 3∼4시까지 혜화동 지하 극단연습실에서 날밤을 샌다.‘바보각시’등 4개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연출자 이윤택의 바쁜 스케줄 탓에 이시간에야 비로소 연습이 가능하다. “데뷔 6년만에 처음 출연하는 정극인데다 이전보다 주인공(바보각시)의 비중이 커져서 부담이 많이 돼요”‘바보각시’는 우리 전통의 살보시 설화를 모티브로,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베푸는 바보각시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세기말적 구원을 그린 작품. 이윤택의 우리극 형식 3부작중 하나로,93년 초연당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나 관객들에게는 외면받았다.이 작품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던 이윤택은 올초 부산과 서울에서 재공연을 가졌고,매회 객석을 가득 메우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번 공연은 1일 개막하는 제23회 서울연극제 공식초청작으로 다시 띄우게된 것.작곡가 원일의 음악을 보강하고,초연때 구음(口音)을 맡았던 김민정이 출연하는 등 미학적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바보각시역에 뮤지컬 배우인 그녀를 캐스팅한 것도 음악적인 측면을 고려해서다. “지난 봄 리어왕 시연회에 갔다가 바보각시 이미지에 어울린다고 하시길래선뜻 하겠다고 했어요”이윤택과는 지난해 ‘눈물의 여왕’이후 두번째 만남.연출스타일이 너무 꼼꼼해 연습할때는 힘들지만 극중 배우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연출자여서 마음이 든든하단다.하지만 무게가 만만치않은 꼭두각시 인형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들고 연기해야 하는데다 우리 고유의 음악인 정가(正歌)를 익혀야 하는 등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맑고 순수한 바보각시의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리고 이 작품을 계기로 ‘뮤지컬 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 기억되길 바랍니다”94년 ‘코러스라인’으로 데뷔한 그녀는 96년 한미합작 뮤지컬 ‘브로드웨이42번가’오디션에서 주인공으로 뽑혀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이후 ‘웨스트사이드스토리’‘하드록카페’‘바리’등에 출연했다.15일까지.(02)763-1268이순녀기자 coral@
  • 의열 독립투쟁(2)-강우규 의사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가운데서 의사(義士)라고 하면 흔히 20∼30대 열혈청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실제로 윤봉길(尹奉吉)·조명하(趙明河)의사는의거 당시 24세였고,이봉창(李奉昌)의사는 32세, 김상옥(金相玉)의사는 33세,그리고 나석주(羅錫疇)의사는 36세였다. 1924년 일황의 궁성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의거 당시 44세로 드물게 40대에 속하는 정도다. 그런데 환갑이 넘은 60대 나이로 의거를 행한 의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지.그러나 실제 우리 의열투쟁사에는 60대 노(老)투사의 의거기록이 있다. 1919년 9월2일 오후 5시경.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역(현 서울역) 주위에는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를 펼친 가운데 어느 고관의 도착을 기다리는 준비가부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이윽고 5시가 되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신임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플랫폼으로 도착하였다.사이토 총독 내외와 일행은출영나온 내외 인사·신문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귀빈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사이토가 귀빈실에서나와 입구에 마련된 쌍두마차에 오르려 하자인근 한양공원(현 남산공원)에서는 그의 부임을 축하하는 21발의 예포(禮砲)소리가 울려퍼졌다.예포가 끝나고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사이토가 탄마차 인근에 폭탄 한 발이 굉음을 울리며 작렬하였다.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병을 비롯해 신문기자 등 30여명이 일순간 현장에서 고꾸라졌다.폭탄이 떨어진 곳은 사이토가 탄 마차로부터 불과 7보(步)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3·1의거 후 격앙된 조선민족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후 받은 첫번째 선물은 ‘폭탄세례’였다.이날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자리에폭탄을 던져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드높인 의사가 바로 강우규(姜宇奎)의사다.강 의사의 그때 나이는 64세,이미 환갑이 지난 노인이었다.일제하 숱한 의·열사 가운데 강 의사는 가장 고령에 속한다. 1855년(철종 6년)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태어난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보고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이듬해 봄 가솔(家率)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만주길림성에 정착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해온 강 의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노령(露領)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에 참가,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키로 작정한 강 의사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러시아 돈 50원을주고 영국제 폭탄 한 개를 구입한 후 6월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배를타고 원산을 거쳐 8월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 머물면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과 거사 계획을 세운 강 의사는 마침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이어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남대문역에서 그를 처단키로 결심했던 것이다. 9월2일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 허리춤에 차고 그 위에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다.또 시골영감 티를 내기위해 파나마 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손에는 양산과 수건을 하나씩 들고 남대문역으로 향했다.이런 강 의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 구내 다방에서 군중 틈에 끼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강 의사는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려하자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투탄거리가 불과 6∼7m 정도에 그쳐 사이토가 탄 마차에는 미치지 못한데다 폭탄의위력이 약해 사이토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폭탄의 파편이 혁대를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고 같이 부임한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는 경미한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그러나 성과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총 37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 가운데 스에히로(末弘又二郞) 경기도 경시(警視)는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어 9일 후인 9월11일 사망하였다.또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橘)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를 뚫고 들어가 11월1일 사망하였으며야마구치(山口諫男)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고 결국 팔을 절단 하였다. 한편 사건 직후 일경·헌병들은 남대문 일대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돼 수색을 벌였다.그러나 60대 노인인 강 의사는 별다른 검문도받지 않은 채 무난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투탄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경은 의거 보름 만인 9월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강 의사를 체포했다. 강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조선인 경찰 가운데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김태석(金泰錫)이었다. 강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의연함과 당당한 기개를 잃지 않아 일본인 재판장이 ‘영감님’ ‘강선생’으로 호칭하였다고한다.고등법원의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자 강 의사는 면회온 장남중건(重健·작고)에게 “사람은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네가 나의 사형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내가 이때까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어서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 어떠한 감상과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고 하고는그 뜻을 전국 13도의 각 학교와 교회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노 투사는 최후까지 조국을 걱정하였다.1년간의 옥고를 치른 강 의사는 이듬해 11월29일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때 나이 65세였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자가 “유언이 없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斷頭臺上) 춘풍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요(豈無感想) 강 의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 은평구 신사동 소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54년 수유리로 이장됐다가 67년 다시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로 이장됐다.1962년 정부는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강 의사의 의거현장인 서울역 역사(驛舍) 앞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기념표지석이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쓸쓸히 서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긴 상태다.장남 중건씨는 연해주에서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친손녀 영재(榮才)씨도 수년 전 작고했다.영재씨의부군은 도쿄제대 출신의 농학자로 수원농사시험장장을 지낸 최병석씨.현재강 의사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는 조카 항렬의 강영복(姜榮福·72·서울 거주)씨로 강씨가 강 의사의 훈장과 훈장증을 보관하고 있다.그러나 직계 후손이 아니어서 연금수령은 못하고 있다.강 의사의 제사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매년 순국일인 11월29일 지내고 있다.변변한 일대기 한 권도 없고 그흔한 추모사업회,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것은 대가 끊겨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이다.강 의사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고적(孤寂)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후3김론’의 허구」’後3金’ 신조어 나오기까지

    ‘후3김 시대’라는 용어가 회자(膾炙)되고 있다.실체가 없는 이 용어는 야당이 정략적인 차원에서 만들어낸 조어(造語)지만 부정적 이미지가 배어 있는 ‘3김 청산론’과 오버랩되면서 여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여권관계자들은 그러나 “‘후3김 시대’‘3김 청산론’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로 가득한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3김’은 성(姓)이 같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김종필(金鍾泌)총리,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을 통칭하는 말로 그 어원은 70년대 유신체제와 싸우던‘양김’에서 출발한다. 이후 양김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3김’‘양김’‘3김정치(방식) 청산’‘3김 청산’‘후3김 시대’라는 변천을 겪게 된다.97년 대선 전까지만해도 언론 용어이던 것이 97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적인 용어로 변질된 느낌도 준다. 유신체제에서 언론은 김대통령과 김전대통령을 일컬어 ‘양김’으로 불렀다.당시 동교동과 상도동으로 대표되던 양김은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그러던 것이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한 뒤 ‘80년 봄’을맞아 ‘3김’이라는 용어가 생겨난다.성씨가 같은 세 사람이 유력한 대통령후보였기 때문이다.그러나 군부의 등장으로 역사의 뒷마당으로 사라졌다. 3김이라는 용어는 87년 대선에서 ‘1노(盧) 3김’이 경쟁하면서 다시 등장했다.이후 3당 합당으로 치러진 92년 대선에서는 ‘양김’이 경쟁,‘양김’이라는 용어가 다시 오르내렸으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97년 대통령선거에서 성이 다른 이회창(李會昌)후보가 여당 후보로나서면서 ‘3김 정치 청산’이라는 신조어가 새롭게 등장,정치색을 띠게 됐다. 그러나 이 역시 김대통령의 당선으로 설득력을 잃었다. 최근들어 ‘나라를 망친 대통령’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칠된 김전대통령이 정치재개 움직임을 보이면서 한나라당이 ‘3김 청산’과 함께 ‘후3김시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강동형기자 yunbin@
  • 표현 부적절성 여권 논리

    이른바 ‘후(後)3김시대’라는 신조어(新造語)가 정치적 의도 속에서 쟁점화하고 있다.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지난 4일 ‘반 3김선언’을 하면서부터 여론의 경계심에 편승,인구에 회자하는 빈도수가 점차 늘고있다.‘후3김시대’는 공동정권의 연내 내각제개헌 유보 이후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상상력과 분석이 밑바탕을 이룬다. 여권 관계자들은 우선 ‘3김’이라는 표현의 적정성에 문제를 제기한다.한관계자는 “3김은 군사정권때 집권자들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로 세사람을 함께 매도하는 식의 ‘3김 인식’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실제‘3김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시기는 80년 서울의 봄 때와 92년 대선 때등 짧은 기간이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나머지는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에서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다는 평가다. 특히 ‘후3김’이라는 표현은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부각시키려는 악의가 숨어있다고 분석했다.나아가 현직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청산 대상으로 매도하려는 뜻도 포함돼 있다는 지적이다.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을 물러나야 할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헌정중단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총재의 신임투표 주장에 대해 청와대측은 “헌정중단을 요구하는 것인가”라며 그 성격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꼬집었다.그들은 신임투표 반대가 60.5%,찬성이 25%로 국민이 헌정중단 사태를 경계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를 적시한다. 또 ‘3김시대’에 대한 평가는 국민이 선택할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80년 5공 군부의 등장 이후 3김청산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지난 대선때 이총재의 ‘3김 청산’도 마찬가지 결과였다.여권관계자들은 내년 총선때 세대교체와 맞물려 3김청산이 선거이슈가 될 것으로 보고 이에 대비중이다.다시 말해 국민이 투표로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끝으로 김대통령과 이총재는 현실정치에서 여야의 지도자로 엄연한 ‘정치시장 참여자’라는 것이다.김전대통령의 정치재개 문제는 야당의 분열과 갈등에 관한 문제로 야권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후3김시대’로 비약해 현직대통령을 매도하는 것은 정치도의나 윤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양승현기자 yangb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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