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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 1국]황진형,지역연구생 입단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 1국]황진형,지역연구생 입단

    제12보(127∼135) 황진형(1989년생) 군이 지역연구생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기사의 꿈을 이루었다. 지난달 18일부터 이달 2일까지 치러진 제9회 지역 연구생 입단대회에서 황군은 동률 재대국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용민군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현재 대전지역 연구생인 황군은 7세에 바둑에 입문했으며, 안관욱 7단의 지도를 받고 있다. 지역연구생 입단대회는 1,2차 예선을 통해 선발된 12명의 본선진출자가 2개조로 나누어 리그전을 치른 뒤, 각조 1,2위가 다시 리그전을 벌여 최종 입단자 1명을 가린다. 한국기원은 매년 봄, 가을 열리는 일반인 입단대회에서 4명, 연구생 입단대회 1명, 여류 입단대회 1명, 지역연구생 입단대회 1명, 연구생 리그전 3명 등 해마다 10명씩의 프로기사를 선발한다. 황진형군의 입단으로 한국기원 프로기사의 수는 232명이 되었다. 흑127은 다소 한가해 보이지만 (참고도1) 백1의 끝내기 수단을 방지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제법 큰 자리이다. 백128은 약간 무리성 행마. 만일 흑이 (참고도2) 흑1로 백의 단점을 찔러 들어갔더라면 백은 당장 곤란할 뻔했다. 그러나 김기용 4단은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까봐 오직 안전한 길만을 택하고 있다. 흑133은 자체로도 크지만 은근히 중앙 백대마의 사활을 노리고 있는 점. 그러나 이미 세불리를 직감한 김승재 초단은 어떻게든 변화의 여지를 만들어 보고자 끊는 단점을 방치한 채 백134로 완강히 버티고 있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18대 국회 상임위 배정] 상임위원장 프로필

    [18대 국회 상임위 배정] 상임위원장 프로필

    *한:한나라당 민:민주당 선:선진-창조모임 ●홍준표 운영위원장(한) 여권 신실세…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 여권의 ‘신 실세’로 떠오른 4선 의원.‘양보·상생의 정치’로 원 구성 협상을 마무리했다.6공화국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을 구속한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하다. 부인 이순삼(53)씨와 2남.▲경남 창녕 (54) ▲고려대 법학과 ▲청주·부산·서울·광주지검 검사 ▲한나라당 제1정조위원장·혁신위원장 ●유선호 법제사법위원장(민) 박종철·부천서 성고문 사건 맡은 인권변호사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변론한 ‘인권변호사’ 출신의 3선 의원. 사법시험 합격 후 독재 정권하에서 임용을 거부하고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부인 곽경리(48)씨와 1남 1녀.▲전남 영암(55) ▲서울대 법대 ▲사시 23회 ▲인권운동 사랑방 운영위원 ▲15·17·18대 국회의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김영선 정무위원장(한) 야당의원 ‘싸가지 발언’ 사과 받아내 변호사 출신으로 36살에 등원해 당 대표를 잠시 맡기도 한 4선 의원.15∼16대 비례대표를 거쳐 17·18대 경기 고양 일산에서 내리 당선됐다.1999년 12월 당시 야당 의원의 ‘싸가지’ 발언에 맞서 본회의장 철야농성 끝에 사과를 받아내는 강단을 내보이기도 했다.▲경남 거창(48세) ▲서울대 법대 ▲한나라당 대변인·대표최고위원 ●서병수 기획재정위원장(한) 민선구청장 역임한 친박계 핵심인사 기업인과 대학교수, 민선구청장 출신의 3선 의원.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지난 17대 하반기 재정경제위에서 활동했다. 친(親) 박근혜계의 핵심인사로 분류된다. 부인 권순진(51) 씨와 2남.▲울산(56) ▲서강대 경제학과 ▲미국 북일리노이주립대 경제학 박사 ▲민선 해운대구청장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여의도연구소장 ●박진 외교통상통일위원장(한) 美민주당 바이든 부통령후보와 친분 서울대 법대, 미국 하버드대 행정학 석사,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 등 화려한 학력의 외교통. 서울 종로에서 내리 3번 당선됐다. 미국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조지프 바이든 상원 외교위원장과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부인 조윤희씨(52)와 1남1녀. ▲서울(52) ▲서울대 법대 ▲청와대 비서관 ▲17대 대통령직인수위 전문위원 ●김학송 국방위원장(한) 당내 전략·조직 아우르는 기획통 당내 전략과 조직을 아우를 수 있는 중진 의원으로 지난해 대선 때 당 전략기획본부장과 중앙선대위 전략기획단장을 겸한 전략통이다.8년 연속 국정감사 및 의정활동 우수위원으로 선정됐다. 부인 손영희(53)씨와 2남 ▲경남 진해(56)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북핵위원장·전략기획본부장 ●조진형 행정안전위원장(한) 8년만에 재등원… 당내 두번째 재력가 기업인 출신으로 8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중진 반열에 오른 3선 의원.14대 무소속으로 인천 북을에 출마해 당선됐으며,15대 땐 당시 신한국당 후보로 인천 부평갑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정몽준 의원에 이어 두번째 재력가다. 부인 유명숙(62) 씨와 3녀 ▲충남 예산(65) ▲건국대 경영학과 ▲부평장학재단 이사장 ●김부겸 교육과학기술위원장(민) 우리당 창당 참여… 재야운동권출신 운동권 출신의 3선 의원.2000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기 군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2003년 동료의원 4명과 함께 탈당,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한 ‘독수리 5형제´ 중 한 명이다. 부인 이유미(51)씨와 3녀.▲경북 상주(50) ▲서울대 정치학과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 ●고흥길 문체관광방통위원장(한) 기자 출신 문화관광위 터줏대감 기자 출신으로 문화관광위의 터줏대감격인 3선 의원.2004년 열린우리당의 신문법 개정에 반발, 문화관광위원을 자진 사퇴하는 등 소신과 강단을 보여 줬다. 부인 임현빈(64)씨와의 1남2녀 ▲서울(64) ▲서울대 정치학과 ▲중앙일보 편집국장·논설위원 ▲한나라당 문화관광위원장·미디어대책위원장·홍보위원장·중앙위의장 ●이낙연 농림수산식품위원장(민) 새천년민주당·盧대통령 당선자 대변인 기자 출신의 3선 의원.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변인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을 맡았다. 부인 김숙희(53)씨와 1남.▲전남 영광(56) ▲서울대 법대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원내대표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정장선 지식경제위원장(민) 대통령 비서실 정무과장 근무때 정계입문 대통령 비서실 정무과장으로 근무하다 정계에 입문한 3선 의원. 경기도의원을 거쳐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여의도에 입성했다. 부인 이성숙(44)씨와 2남. ▲경기 평택(50) ▲경기도의회 의원 ▲열린우리당 민생특별위원장 ▲열린우리당 제4정책조정위원장 ▲열린우리당 정책위 수석부의장 ●변웅전 보건복지가족위원장(선) 아나운서 출신… ‘DJP’ 라는 말 만들어 아나운서 출신 3선 의원이다.1995년 김종필 전 총재의 자민련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DJP’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16대 때 낙선했지만 비례대표를 승계해 재선에 성공했고,17대 때 다시 낙선했지만 18대엔 당선됐다. 부인 최명숙(62)씨와 2남.▲충남 서산(68) ▲자민련 대변인 ▲자유선진당 최고위원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민) 개혁 성향의 ‘차세대 여성 지도자’로 꼽혀 ‘차세대 여성 지도자’로 꼽히는 개혁 성향의 3선 의원.1995년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눈에 띄어 정치에 입문했다.‘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패배한 뒤 18대 총선에서 부활했다.▲대구(50) ▲경북여고 ▲한양대 법대 ▲인천·전주지법, 광주고법 판사 ▲15·16·18대 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대책위원장 ●이병석 국토해양위원장(한) 협상조정력 뛰어난 중국 전문가 중국 전문가로 꼽히는 3선 의원.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거쳐 16대 때부터 경북 포항 북구에서 내리 세번 당선됐다.17대 때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아 협상 조정력을 인정받았다. 부인 신은희(54)씨와 2남.▲경북 포항(56) ▲고려대 중문과 ▲한나라당 독도 수호 및 일본 교과서 왜곡대책특위 위원장▲한·중의원외교협의회 간사 ●최병국 정보위원장(한) 검사 요직 두루 거쳐… 원칙 중시 소신파 대검찰청 공안부장과 중수부장거친 검사 출신 3선 의원으로 ‘원칙’을 중시하는 소신파다. 해박한 법률지식과 친화력을 겸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친이(친이명박)측 의원 모임인 ‘함께 내일로’의 공동대표다. 한명숙(62) 씨와 1남2녀 ▲경남 울산(66) ▲서울대 법대 ▲공안부장·중수부장·인천지검장 ▲국회 법사위원장 ●신낙균 여성위원장(민) DJ때 문화부장관 역임한 여성 운동가 여성운동을 하다 정계에 입문한 민주당 재선 의원.15대 때 비례대표로 첫 금배지를 달았고 국민의 정부 초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남편 김훈섭(74)씨와 1남 2녀.▲경기 남양주(67) ▲이대 기독교학과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국민회의 부총재 ▲문화관광부 장관 ▲15·18대 의원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이한구 국회 예산결산특위원장(한) 환율·부동산 청책 비판 여당내 ‘쓴소리맨’ 재무부, 대우경제연구소장을 거친 경제통 3선 의원.16대 비례대표로 입문해 17대부터 대구 수성갑에서 내리 두번 당선됐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환율·부동산 정책 등을 비판해 여당 내 ‘쓴소리’로 불린다. 부인 나임구(59)씨와 2녀.▲경북 경주(63세) ▲서울대 경영학과 ▲대우경제연구소장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심재철 윤리특별위원장(한) 1980년 서울대 총학회장 지낸 운동권 출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의 3선 의원.MBC 노조 초대 전임을 거쳐 1996년 신한국당 부대변인으로 입문,16대부터 안양 동안에서 내리 세번 당선됐다. 부인 권은정(45) 씨와 1녀.▲광주(50) ▲서울대 영어교육학과 ▲MBC 기자 ▲한나라당 전략기획위원장·원내수석부대표
  • [한국인의 질병] (49) 간염

    [한국인의 질병] (49) 간염

    에이즈와 더불어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대표적인 바이러스성 질환 ‘간염’.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만 이 병을 완치하는 것은 현대의학으로는 아직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내과 김도영(37) 교수를 만나 B·C형 간염에 대해 들어봤다. 80년대만해도 국내 B형 간염 환자는 전 국민의 8%에 달할 정도로 감염률이 높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방접종을 하면서 지금은 감염률이 4%대로 낮아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C형 간염 감염률은 현재 전국민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진단 기술이 발달하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가 계속 늘고 있다. ●B형 간염 출산전에 치료받아야 자녀 감염 예방 B형 간염이 생기는 대표적인 원인은 ‘수직감염’이다. 만약 B형 간염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산모가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고 출산하면 아기의 90%가 만성 간염 환자가 된다. 수혈로 감염되는 환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부모로부터 병을 물려받은 수직감염 환자다. C형 간염은 주로 수혈과 비위생적인 의료기기를 사용할 때 생긴다. 이런 이유로 몽골 등의 국가는 전 국민의 10% 이상이 C형 간염 환자로 알려져 있다.C형 간염은 B형 간염과 달리 성인일 때 감염되면 만성 간염으로 진행될 위험이 더 높아진다. 어릴 때 C형 간염에 감염되면 저절로 완치되는 사례가 많다. “B·C형 간염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간이 딱딱하게 굳는 ‘간경변’이 생깁니다. 바이러스가 간으로 침투해 끊임없이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간이 딱딱하게 굳는 증상이죠. 만성 B형 간염 환자 4명 중 1명이 10년 후에 간경변으로 진단된다고 합니다.” 20년 뒤에는 B형 간염 환자의 절반이 간경변을 경험한다. 간경변 환자의 4%는 간암으로 진행돼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또 간경변 환자도 뱃속에 물이 차거나 위(胃)출혈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다. ●B·C형 간염 놔두면 간경변으로 B형 간염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접종이다. 만약 산모가 감염돼 수직감염 위험이 높다면 아기가 태어날 때 곧바로 항체와 예방백신을 주입하면 된다. 예방백신은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 맞는 것이 가장 좋다. C형 간염은 감염자의 혈액과 접촉하지 않는 방법 외에는 예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신 시술이나 소독되지 않은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무허가 시술은 피해야 한다. “간염 환자는 주로 평소에 피로감을 호소합니다. 간경화가 진행되면 눈과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해요. 간경화 증상이 악화되면 뱃속에 물이 차고 위출혈이 심해져 피를 토하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제를 복용하면 간경화로 진행되는 것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인터페론’이라는 면역제제가 주로 사용됐지만 최근에는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는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한다. 인터페론은 탈모와 체중감소, 골수억제 등의 부작용이 많고 치료효과도 그리 높지 않다.90년대 초반부터 ‘제픽스’‘헵세라’ 등의 B형 간염치료제가 잇따라 개발돼 간염 환자의 시름을 덜었다. 항바이러스제는 당뇨약이나 항고혈압제처럼 장기간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임의로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임의로 약을 끊으면 내성이 생겨 다시 약을 먹어도 치료가 잘 되지 않는 환자가 많다. 또 술은 간경변은 물론 간암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끊어야 한다. 약을 먹으면 바이러스 숫자를 줄일 수 있지만 완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술과 약을 함께 먹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간염을 식품으로 치료하려는 환자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식품으로 간염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건강기능식품을 잘못 복용하면 간기능을 악화시켜 치료에 방해가 될 뿐이다. ●건강식품 복용 땐 의사와 상의해야 따라서 인진쑥, 상황버섯 등 간염에 대한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건강식품은 함부로 복용해서는 안된다. 꼭 먹어야 한다면 의사와 상의한 뒤에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다. 간염 환자는 음식을 특별하게 조절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또 과식하면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되도록 조금씩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간경변 환자는 ‘소금’을 멀리해야 한다. 소금을 먹으면 뱃속에 물이 찰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감기약 정도는 그냥 먹어도 되지만 오랜 기간 복용해야 하는 약이 있다면 의사와 상담한 뒤에 먹는다. 항바이러스제는 간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많이 복용하면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곧바로 다른 약으로 교체해야 한다. 많은 환자들이 내성을 경험해 여러가지 약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에 개발된 약들은 보험 범위가 넓지 않아 환자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 “새로 나온 약은 한달 약값이 25만원에 이릅니다. 부담이 만만치 않죠. 특히 간염 환자는 경제적으로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부가 하루빨리 보험적용 범위를 늘려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간염 극복기 - 술 반드시 끊고 약 지속 복용해야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명진(가명·27)씨는 “2년 6개월간 계속된 치료를 모두 마쳐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드물게 만성 B형 간염을 완치한 행운아였다. 3년 전만 해도 김씨는 B형 간염이라는 병명조차 모르고 살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항상 피곤하다고 느꼈지만 과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곧 불운이 닥쳤다. 어느 날 날아든 건강검진표. 간효소치(GPT/GOP)가 1000에 가깝게 나왔다. 간효소치는 정상이 40미만이다. 간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청천병력 같은 진단을 내렸다. “난치병인 만성 B형 간염에 걸렸으니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정보를 수집했지만 ‘완치’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김씨는 죽을 때 죽더라도 치료를 받아 보자고 결심했다. 의사가 처방한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고 난 뒤 6∼9개월이 지나자 간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됐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의사가 챙겨주는 대로 약을 끊지 않고 꾸준히 복용했다. 물론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어느 날 검진차 병원을 찾은 그는 “e항원이 음전(음성전환)됐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쉽게 말해 바이러스가 완전히 소멸됐다는 뜻이다. 그는 “딱 2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면서 “매일 보는 의사가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치시키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면서 간수치 검사만 받고 있다. 바이러스가 소멸됐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다. 그는 “스트레스, 술, 과로가 간염을 일으키는 3대 요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 “몸관리를 잘하는 것이 간을 보호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A형 간염 증상 - 감염 4주후 구토·설사·피로감 느껴 알파벳 순서를 놓고 보면 A형 간염이 가장 치명적인 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A형 간염은 한번 완치하면 항체가 생겨 다시 걸리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인 병은 아니다. 예방백신도 개발돼 환자수도 90년대 이후 감소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20∼30대를 중심으로 A형 간염 환자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위생환경이 개선되면서 간염 바이러스와 접촉할 기회가 줄었고, 이는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항체 생성 기회를 감소시켰기 때문이다.20∼30대 청년층 가운데 A형 간염 항체를 갖고 있는 사람은 50% 미만이다. A형 간염은 다른 간염과 마찬가지로 바이러스가 간을 침범하는 병이다. 식중독처럼 바이러스에 오염된 음식을 섭취할 때 감염된다. 감염자의 침과 대변을 통해서도 전염될 수도 있다. A형 간염은 B·C형 간염과 달리 증상이 곧바로 나타난다. 감염된 지 4주가 지나면 식욕부진, 오심, 구토, 설사 등의 소화기 증상과 피로감, 무력감, 발열, 두통 등 감기와 유사한 증상도 나타난다. 붉은색 소변이 나오거나 안구가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기기도 한다. 유·소아기에는 감염되어도 별다른 증상없이 지나가지만 청소년기로 갈수록 전형적인 증상을 보인다. 환자 1만명 중 1명은 간부전으로 사망한다. A형 간염 바이러스는 섭씨 85도 이상의 물에 1분간 끓이면 죽는다. 따라서 기온이 상승하는 봄, 여름철에는 음식, 옷 등에 대한 개인 위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까지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방접종을 통해 면역력을 얻어야 한다.A형 간염백신은 만 1세 이상에서 접종할 수 있으며, 초기 접종 후 4주가 지나면 항체가 형성돼 효과를 나타낸다. 총 2회 접종해야 하며 초회 접종 후 6개월 뒤에 1회 더 접종한다. 백신이 개발된 지 오래되지 않아 구체적인 연구결과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면역력이 2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4) 길쌈하는 여인들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4) 길쌈하는 여인들

    김홍도의 ‘길쌈’(그림 1)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고, 또 길쌈하는 그림인 줄은 누구나 다 안다. 그림 2는 유운홍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길쌈’이란 작품인데, 김홍도의 그림과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런 길쌈하는 그림은 제법 많이 전하고 있다. 다만 이제 길쌈이란 말 자체가 거의 사어(死語)가 된 형편이다. 예순이 넘은 분들만이 이 그림을 별다른 설명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하의 연배, 그리고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길쌈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분들을 위해 무명 짜는 과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봄에 목화를 심어 가을에 목화꽃을 거둔다. 목화꽃이 곧 목화솜이다. 목화솜에는 씨앗이 들어 있어서 실을 그냥 뽑을 수가 없다. 씨아를 이용하여 씨를 빼내고, 활로 솜을 탄다. 탄다는 것은, 활줄로 퉁겨서 솜을 부풋하게 부풀리는 것이다. 그 다음 넓은 판대기 위에 목화를 올리고 수수깡 같은 것을 30㎝쯤 잘라 심으로 삼아 손으로 밀면 기름한 솜덩이가 된다. 이것을 물레에 걸어 실을 뽑는다. 이 실을 막 바로 베틀에 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림 1의 위쪽을 보면, 실을 길게 메고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바르고 있다. 풀이다. 실이 엉키지 않게 풀을 먹이는 것이다. 여자의 오른손 아래쪽에 있는 것은 숯불이다. 풀을 말리는 것이다. 이렇게 풀을 먹이는 것을 베매기라 한다. ●지루하고 고된 노동 노래로 털고 씻어 베매기를 한 실이 날줄이 된다. 이 날줄을 도투마리(베틀 가장 왼쪽에 실을 묶은 부분)에 맨다. 이제 씨줄을 만들 차례다. 날줄을 둘로 나누어 엇건 뒤에 그 사이의 공간으로 씨줄을 통과시키면 천이 되는데, 이 엇건 공간으로 넣는 것이 곧 북이다. 북에 들어갈 씨줄은 따로 감아둔다. 북을 날줄 사이로 통과시키는 것은 씨줄을 넣는 것이다. 씨줄이 들어가면 바디를 내려 쳐서 천을 단단히 짠다. 조선시대의 피륙에는 비단, 삼베, 모시, 무명이 있었다. 무명은 알다시피 고려 말에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무명은 농사짓기가 쉽고 피륙을 짜기도 수월하며, 또 보온성이 뛰어나 이내 삼베나 모시, 비단을 물리치고 가장 많이 생산하는 피륙이 되었다. 여기서 무명 짜는 것을 예로 든 것도 무명이 가장 일반적인 옷감이었기 때문이다. 삼베나 모시, 비단은 실을 얻는 과정이 다를 뿐 짜는 원리는 동일하다. 그림 1과 2에 등장하는 길쌈하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조선시대의 수신교과서 ‘소학’은 아예 여성을 조리와 직조(織造)하는 존재로 규정하였고, 특별히 귀한 가문의 여성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여성은 두 노동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소학’이 아니라 해도 조리와 직조를 여성이 맡았던 역사는 아마도 인류 역사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그 기원의 흔적을 찾자면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 9년 조다. 유리왕은 나라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자신의 딸을 각 패의 우두머리로 삼게 한다. 그리고 7월16일부터 매일 아침 가장 큰 고을의 뜰에 모여 밤 10시 쯤까지 길쌈을 하게 한다.8월15일에 그 성적을 따져 진 패가 이긴 패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한다. 이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온갖 놀이를 벌인다. 이것을 ‘가배’라고 한다. 진 패의 여자는 일어나 ‘회소, 회소’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아름답고 구슬퍼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회소곡’이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가배’가 뒷날 ‘가위’ 곧 한가위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추석의 유래는 직조와 관계가 있었던 것이고, 여성 직조의 역사는 역사의 기원까지 소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 길쌈대회 ‘가배´서 한가위 유래 조선시대 옷감을 짜는 것은, 심상한 행위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은 입을 것, 먹을 것, 비바람을 피하고 잠을 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데 집이야 한 번 지어놓으면 그만이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그야말로 끊임없이 소모된다. 다시 보충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먹을 것만큼은 아니지만, 입을 것의 무게란 중세 경제에서 엄청나게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지금 값싼 옷이 지천인 세상에서의 입을 것이 갖는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옷감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가족의 옷이 되었고, 나라에 바치는 세금이 되었으며, 집에서 만들지 못하는 물건을 사들이는 화폐의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날 때면 노잣돈이 되었으니, 한 필 무명이야말로 지금의 현금카드와 같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옷감을 짜는 과정은 고되고 지루하였다. 그 노동의 고통을 여성들은 노래를 불러 잊었다. 수많은 길쌈노래, 물레노래, 베틀노래가 그 증거다. 어디 베틀노래 하나를 들어보자. 경상북도 의성 지방에 전하는 노래다. “시집 갔든 사흘만에/ 과거 빈다 소문 듣고/ 과거 보러 가신 낭군/ 밤낮으로 기다리니/ 밤도 길어 해도 길어/ 길쌈이나 시작하세” 남편은 과거 보러 떠났다. 아내는 기다리기 지루하여 길쌈을 하면서 기다리는 지루함을 잊으려 한다.“송이송이 따 모아서/ 참나무쐐기에 앗아내어/ 대나무활로 타다놓고/ 수수회기로 비벼내어/ 정데정이 치은 가락/ 버드나무 물레에 미여 넣고/ 당태실 같이 뽑아내어/ 파람파람 뽑아다가/ 앞마당에 날아다가 뒷마당에 매어다가/ 베틀이나 차려보세” 목화송이를 따서 활질을 하고 실을 뽑는 과정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그 다음은 베틀을 차리는 과정을 길게 늘어놓고, 그 다음 베를 짜는 과정을 늘어놓는다.“바디집 치는 양은/ 광한루 높은 정자/ 신선들이 모여 앉아/ 장기 바둑 뚜는 듯다/ 북이라고 노는 양은 청학이 알을 품고/ 들락날락 하는듯다/ 잉애라고 바란 양은/ 모시국이 실묵시를/ 놋전반에 받친 듯고” 이렇게 해서 짠 것을 이제 씻어 간직한다.“앞 냇물에 씻어다가/ 줄어 너니 줄 때 묻고/ 손에 드니 손때 묻어/ 고이고이 말라내어/ 은실겅에 얹어 얹고” 남편을 기다린다. “과거 선비 오실까봐/ 동창문을 열어놓고/ 날이 날로 기다려도/ 한양 선비 자취 없네” 아무리 기다려도 한양에 간 남편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나가는 선비에게 물어본다.“말 묻기 어려우나 말 한 마디 물읍시다. 한양서 오시며는 우리 선비 안 옵디까?” 어렵게 말을 꺼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엉뚱하다.“오기사 오드마는 칠성판에 얹혀 와요” 아내는 절망한다.“아이고 답답 내 일이야/ 암행어사 하실까봐/ 고대고대 바랐드니/ 칠성판이 웬일인고” 남편은 과거를 치러 가서 무슨 사건으로 인해 죽어 시체가 되어 칠성판에 얹혀서 돌아온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노동과 가혹한 운명을 이 노래를 부르면서 털고 씻고 잊었다. ●군역 대신 낸 군포… 한과 눈물의 응집물 여성들이 짜낸 무명은 그야말로 한과 눈물의 응집물이었다. 가혹한 노동의 결과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무명이 ‘군포’란 말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조선후기 사회가 앓아야 했던 거대한 모순이 되고 만다. 군포는 군역을 지는 대신 내는 무명이다. 조선은 원래 16세에서 60세까지의 장정은 모두 군역을 지게 되어 있었다.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면 남는 큰 줄거리는 이렇다. 곧 조선후기에 와서 군역의 의무는 그대로 남지만, 실제 군대는 직업군인으로 채워지기에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성들(양반은 제외)은 모두 직접 군역을 지는 대신 1인 당 2필의 군포를 납부해야만 하였다. 조선은 대가족제도다. 따라서 한 집안에 남자 장정이 6명이면 12필을 내어야 한다. 그 뿐인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 어린아이에게도 받는 황구첨정이 있다. 군포를 못내고 달아나면 그 동네 사람에게 받거나(동징), 친척들에게 받아낸다(족징). 군포의 징수가 얼마나 가혹했던지 자살하는 사람, 달아나는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고, 급기야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없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가혹하게 거둔 군포 위에 조선이란 국가와 양반체제가 서 있었던 것이니, 저 그림 속에 보이는 여성 노동은 조선 후기의 체제모순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특파원 칼럼] 일본이 독도를 넘보지 않게 하려면/박홍기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일본이 독도를 넘보지 않게 하려면/박홍기 도쿄 특파원

    일본에는 애초 독도가 없었다.‘다케시마(竹島)’만 있을 뿐이다. 지난 7월14일 중학교 사회교과의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그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명기해 발표했다. 그것으로 끝이다. 한국의 거센 항의에 대꾸조차 없다. 일본의 억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까이는 2006년 12월 교육기본법의 개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새로운 일본’을 주창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작품이다. 목표는 ‘나라와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른다.’는 데 맞춰졌다. 향토란 곧 영토다. 신학습지도요령의 해설서는 개정법에 기초해 보란 듯이 ‘다케시마’를 포함시켰다. 교육기본법과 별개로 지난해 3월 “한국과는 ‘다케시마’를 둘러싼 문제가 있으며…”라고 쓴 고교 2·3학년 정치·경제교과서가 통과됐다. 독도 영유권을 적시한 4종의 중학교 사회교과서도 이미 학교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게다가 초·중·고교의 지도책은 오래 전부터 동해는 ‘일본해’로, 독도는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따른 수순이다. 해설서의 독도 표기는 일본의 ‘음흉한’ 시나리오의 종반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교과서의 기술은 일본에서는 논란이 없을 만큼 학술적으로 검증이 마무리된 최종 단계인 까닭에서다. 사전 준비가 끝났다는 얘기다. 실제 일본은 정치적 전략이든, 학술적 판단이든 해설서에 독도를 넣기 위해 바닥을 훑는 연구를 해왔다. 엄밀히 따지면 1945년 패전 이후 계속된 의도된 작업의 결과다. 일방적인 논리지만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은 지금 어떤가. 정부는 지난 21일 우리땅 독도를 지키기 위한 장기적·전략적인 방안의 구체화에 나섰다. 일본의 ‘독도 도발’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대책을 쏟아냈다. 재탕, 삼탕도 없지 않다지만 그나마 다행스럽다. 무엇보다 한국의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 영토의 문제는 교과서 왜곡이나 위안부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분쟁의 소지를 피하기 위한 이른바 ‘조용한 외교’를 고수하기엔 일본이 너무 멀리 치고 나갔다. 믿기 싫지만 최근 일본인들의 73% 정도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여긴다는 여론조사까지 나왔다. 한국의 뜨거워졌다 식고 다시 달아오르는 즉흥적인 자세도 ‘스노 볼’ 효과를 낳았다.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이 ‘양심’에 따라 독도 문제를 해결하길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야스쿠니신사의 A급 전범에 대한 분사도 지금껏 처리하지 못한 일본이다. 지한파 정치인을 통해 관료에게 압력을 넣어달라는 식의 ‘호소 외교’도 철지난 접근법에 불과하다. 정부는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학술적 논거를 갖춰야 한다. 세계를 향해 독도 바로 알리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우리 땅인데 굳이 왜”라는 식의 미온적인 처신은 국제 사회의 힘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다. 독도 안팎의 생태계까지도 빠짐없이 조사·연구해야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문가를 찾고 양성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권의 노선에 흔들리지 않는 꾸준한 실천을 주문하고 싶다. 중국이 넘보는 이어도에 대한 대처도 같을 차원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 독도문제는 진행형이다. 일본은 머지않아 고교 사회교과서 해설서, 방위백서 등에서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통수권자로서 독도 방문도 고려해 봄 직하다.“독도문제는 문제대로 해 나가고, 일본과의 관계는 관계대로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 의미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을 의식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정리해 나가야 한다. 찜찜한 한·일 관계보다 깔끔한 신시대의 구축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이다. 박홍기 도쿄 특파원 hkpark@seoul.co.kr
  • ‘지구 살리기’ 나서다

    ‘지구 살리기’ 나서다

    지구 반대편. 어떤 이는 걷고 또 걸었다. 만신창이가 돼가는 지구환경을 구하겠노라 발길 닿는 데마다 나무를 심었다. 또 어떤 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현대사회에서 자연과 좀 더 밀착할 수 있는, 이름하여 ‘친환경’ 생활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구의 미래, 인간의 내일을 걱정하는 책 두권이 나란히 서가에 꽂혔다.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지구를 걷는 사람(earthwalker). 지구환경을 살리려 근 20년째 ‘발바닥 둘’로 고민해온 영국인 환경운동가 폴 콜먼(53)의 별명이다. 병든 지구의 심각성을 세상에 일깨우겠다는 신념에서 그는 1990년부터 세계 곳곳을 걷기로 했다.‘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마용운 옮김, 그물코 펴냄)은 지난 여정을 스스로 다큐멘처리처럼 생생히 복기한 현장기록이다. 콜먼은 2006년 방한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여행을 한 적도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숲과 자연이 너무 좋아”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상선해군에 입대해 허드렛일을 시작했던 일화부터 소개한다. 가진 게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하다 찾은 해답이 ‘걷기’. 거기에 황폐화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실질적인 비책은 나무심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0년 7월. 캐나다에서 남미까지 2년 동안 걷겠다는 계획을 처음 세웠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유엔 지구정상회의의 관심을 이끌어 내자는 계산을 했던 거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지구 탐사’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38개국 4만 3000㎞를 걸었다. 그동안 지구촌 곳곳에 그의 손으로 뿌릿발을 내리게 한 나무는 무려 100만 그루.2000년 콜먼의 의지는 다시 공고해졌다. 영국에서 중국까지 3만 3000㎞의 대장정에 올라 요소요소에 1억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10년 계획을 세웠다. 지금, 그 계획이 한창 진행형이다. 환경에 관심있고 잔잔한 여행기록에 흥미있다면, 단숨에 읽어내릴 책이다. 긴 여정에서 저자는 다양한 인간군상과 쉼없이 에피소드를 엮었다.1만 2000원. ■ 리빙 그린 생활에 밀착한 보다 즉효적인 처방은 ‘리빙 그린(Living Green)’(그레그 혼 지음, 조원범·조향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 있다. 평범한 생활인인 지은이는 어느 날 빌딩증후군을 심각하게 앓으면서 친환경주의자가 됐다. 친환경 실천의 고민을 담은 책은 거실 한 쪽에 놔두고 짬짬이 펼쳐봄직한 생활가이드북이다. 미국에서 친환경 제품 전문인 ‘에코숍’을 운영하는 저자는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소소한 친환경 지침들로 책을 메웠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널리 알려진 ‘친환경 명제’들을 강조하는 것은 기본. 농약과 제초제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유기농 식품을 더 많이 먹을 것, 탄소배출 줄이기, 일회용품을 거절하고 재활용하기, 천연 농약·세제 사용 등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는 권고들이 줄을 잇는다. 예컨대 어류를 먹되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피하라는 귀띔. 지방이 풍부한 한류성 어종은 오메가3 지방산의 보고이나, 수은 등 환경독소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끼의 양식연어 요리에는 다이옥신과 PCB(폴리염화비페닐)가 세계보건기구 1일 허용기준치의 3∼6배 들어 있다는 것. 가공식품은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 조깅을 할 때는 화학물질 덩어리인 자외선 차단제를 챙겨 바르는 장면은 ‘충격적’이라고도 꼬집는다. 저자는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옷은 당장 옷장에서 꺼내 버리라고 한다. 일반 세탁소의 드라이클리닝 과정에는 맹독성 용해제인 헥산이 사용된다. 어쩔 수 없이 드라이클리닝을 이용해야 한다면, 비닐커버를 벗겨 실외에 서너시간쯤 걸어뒀다가 집 안으로 들이라고 조언한다.1만 1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MB 脫여의도 정치 중대한 변화”

    “MB 脫여의도 정치 중대한 변화”

    이명박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한나라당 신임 당직자 180여명과 가진 만찬은 여권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장관 및 청와대 인사 파동과 ‘쇠고기 정국’, 국회 장기 파행 등의 긴 터널을 지나 원기를 충전한 듯 ‘당청 일체’에 한목소리를 냈다. 특히 이 대통령이 한나라당 당직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만찬을 주재한 것은 그동안 표방해 온 ‘탈(脫) 여의도’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탄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탈 여의도’ 정치의 한계를 실감한 만큼 정치권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 당·청 원활한 소통 당부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8·15 광복절 이후 국정 드라이브에 가속도를 내는 과정에서 당·청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인사말을 통해 “경제에 전념할 테니 한나라당도 나를 뒷받침해 달라.”며 여당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당부했다. ‘촛불정국’이 소멸하고 국정 지지도가 회복 기미를 보이면서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이 대통령은 결연하면서도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차명진 당 대변인이 전했다. 박희태 대표는 “정치 계절은 엄동설한이 지나고 상서로운 봄이 됐다.”며 “손에 손을 잡고 힘찬 출발의 계기가 되자.”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어 ‘대통령은 당헌의 정강·정책을 충실히 국정에 반영하고, 당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한다.’는 당헌 8조를 인용하며 “당청이 국민께 함께 책임져야 한다.”며 ‘당청 일체’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당은 대통령을 위하여, 대통령은 당을 위하여, 당과 대통령은 국민을 위하여”라고 외치는 것으로 ‘당청 화합’의 건배를 제의했다. ●친박 한선교 “그동안 배 고팠고 배 아팠다” 장광근 서울시당위원장은 “지난 수개월간 광풍이 몰아쳤다. 이제 맑은 하늘이 보인다.”며 “앞으로도 여러 위기가 오겠지만 ‘이명박다움’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지난 총선에서 공천 파동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복당한 친박(친박근혜) 한선교 의원은 “하마터면 이 자리에 못올 뻔했다. 당선되고 TV 보니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 자리에서 대통령을 만나 밥을 먹는 것을 보고 나는 배가 고팠고, 배가 아팠다.”고 ‘뼈 있는’ 농담을 꺼냈다. 그는 “요즘 한류가 유행인데 한류의 본질은 다이내믹 코리아다. 이명박 대통령은 다이내믹의 대명사”라면서 “이 대통령이 당당한 대한민국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이대통령 “후진타오 방한하면 反韓 오해 풀 것” 박 대표 및 최고위원,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등과 헤드테이블에 앉은 이 대통령은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특히 일부 최고위원들이 중국의 반한 감정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이 대통령은 “후진타오 주석이 곧 방한하는데 오면 그런 오해가 풀리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식이 메인 메뉴로 나온 이날 만찬은 2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청와대는 을지훈련 기간임을 감안, 술은 복분자 와인으로 건배만 하는 것으로 끝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3) 봄나물 캐는 여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3) 봄나물 캐는 여인

    작자 미상의 작품 ‘나물 캐기’(그림(1))는 봄나물을 캐는 여자 둘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의 여인은 비 촉촉히 내린 어느 봄날 시누이와 함께 산나물을 캐러 나왔다. 그림(2)는 윤두서의 ‘나물 캐기’다. 그림으로 보자면, 윤두서 쪽이 훨씬 잘 그린 것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나물은 캐는 것이 있고, 뜯는 것이 있고, 꺾는 것이 있다. 뿌리째 먹는 나물은 캠대로 캐고, 뿌리를 먹지 않고 잎을 먹는 것은 뜯고, 고사리처럼 줄기를 먹는 것은 꺾는다. 그림(2)의 왼쪽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캠대다. 도대체 무슨 나물을 캐는가? 우리가 익히 아는 쑥이며 냉이·달래·민들레·곰취·원추리 등이 아닐까? 봄이면 도시에서도 쑥을 캐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해운대 신시가지의 뒷산은 장산이다. 아파트를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곧 산으로 접어든다.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을 때에도 볕이 드는 곳은 제법 따뜻하다. 천변 양지 바른 쪽에는 쑥 캐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그림 같다. 쑥 캐는 사람이 보이면 ‘이제 봄이로구나.’ 하는 상투적 감탄사를 다시 발하게 된다. 이처럼 나물을 캐는 모습은 언제나 정겹게 느껴진다. 위의 그림에도 그런 조용한 정겨움이 있다. 나물은 매일 먹는 것이지만, 정작 나물이 무엇인가 물으면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일상적인 것, 너무나 익숙한 것을 물으면 원래 답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나물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이다. 그것은 나무일 수도 있고, 채소일 수도 있다. 뿌리, 잎사귀, 줄기 어느 것도 다 나물이 된다. 다만 생것 그 자체로는 나물이 아니다. 가공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삶거나 생것이거나 참기름과 간장, 된장 따위의 조미료를 넣어 무쳐야 나물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산과 들에서 나는 푸새와 길러서 얻는 남새를 한국 사람처럼 다양하게 가공해서 먹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서양의 샐러드는 나물에 비하면 그 종류와 가공의 다양성이 한참 모자란다. ●“고려 사람들 도축 서투르고 조리법 형편없어” 나물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기가 맛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고기는 맛도 있고 또 에너지도 높다. 하지만 고기는 귀한 것이다. 고기와 곡물의 교환비율은 6대1 정도 된다. 즉 곡물 6㎏을 가축에게 먹이면 고기 1㎏이 생산되는 것이다. 고기가 부족해서 나물을 먹게 되었던 것인가. 이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이유도 있다.1123년 고려에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짐승을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양이나 돼지를 잡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서투르고 조리법 역시 형편 없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식생활을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드물었고, 반찬의 주류가 채소, 곧 나물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다면 무슨 나물을 먹었을까. 허균은 1611년 ‘도문대작’이란 글을 쓴다.‘도문대작’이란 푸줏간을 지나면서 입을 쩍쩍 다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먹었던 맛있는 떡과 과실, 새와 짐승 고기, 수산물, 그리고 채소를 소개한다. 그는 고사리·아욱·콩잎·부추·미나리·배추·송이·참버섯·가지·외·호박·무는 어디서나 나고 맛이 좋다고 쓰고 있다. 그 외에 특별한 채소로 죽순·원추리·순채·석전·요목·표고·홍채·황각·청각·참가사리·우뭇가사리·초시(椒)·삼포(蔘脯)·여뀌·동아·산개자·다시마·올미역·김·토란·생강·겨자·파·마늘 등은 어떤 산지의 것이 특별히 맛이 있노라고 소개하고 있다. 양념류도 섞여 있지만, 대부분은 나물이다. 실로 다양하다. ●맑은 식생활과 청렴한 삶의 상징 앞에서도 말했듯 나물은 고기와 대립하는 것이다. 나물은 곧 청렴한 생활의 상징이었다. 한석봉의 시조는 이렇게 말한다.“짚 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희야 박주 산채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달빛이 뜰에 가득한 밤이다. 짚으로 짠 방석조차 필요 없다. 낙엽에 앉으면 그만이다. 관솔불도 켜지 마라, 달빛이 내려앉지 않느냐? 이때 한 잔 탁주가 없을 수 없다. 안주는 산나물이면 그만이다. 이처럼 나물은 맑은 생활의 상징이다. 나물은 유쾌한 식품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은 ‘천진암에서 놀고 난 뒤 기념으로 쓴 글’에서 나물을 먹은 모임을 회고한다.1797년 여름 다산은 형제와 일가들과 어울려 집과 가까운 소내로 가서 천렵을 한다. 그물을 쳐서 크고 작은 고기 50여 마리를 잡는다. 고기가 얼마나 실했으면,“작은 배가 고기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이 몇 치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그 고기를 일행은 배불리 먹는다. 다산은 일행에게 “옛날 진나라 장한은 벼슬을 하다가 자기 고향 강동의 농어와 순채가 생각나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습니다. 물고기는 우리가 맛을 보았고, 지금은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이니, 어찌 천진암으로 가서 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제안한다. 이 말에 형제 4명과 일가 3,4명이 천진암으로 향한다. 글을 직접 읽어보자. 산으로 들어서자 초목이 울창하였다. 산 속에는 가지가지 꽃이 만개하여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고, 온갖 새들이 목구멍을 울려 맑고 매끄러운 소리를 주고받았다. 길을 가면서 새 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몹시 즐거워하였다. 천진암에 이르자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며 하루를 보냈고, 사흘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은 시는 모두 20여 수고, 먹은 산나물은 냉이·고사리·두릅 등 모두 56종이었다. 다산 일행은 사흘을 머물고 무려 56종의 나물을 먹고 돌아온다. 아, 유쾌한지고. 화목한 가족과 일가가 모여 강과 산을 찾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산채를 먹으며 보내는 여름 한 철은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세종 때도 “나물캐는 백성 들판 뒤덮어” 이처럼 나물은 청빈한 삶의 상징이었고, 또는 다산의 경우처럼 가족과 함께 소박한 행복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나물은 굶주림과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나물을 캔다는 것은 곡식이 바닥이 나서 굶주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던 것이다. 세종 시대는 조선조 500년 동안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음에도 굶주리는 사람이 허다하였다.‘세종실록’ 26년(1444) 4월27일조를 보면, 진무(鎭撫) 김유율·박대손 등은 지방 여러 곳을 돌아본 뒤 돌아와서 “쌓아 둔 곡식은 많아야 1,2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적은 사람의 경우 1,2되 밖에 없었고, 혹 다 먹어버리고 남은 것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기근이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덧붙여 나물만 먹는 자도 있으며, 부종이 난 사람도 있었다고 보고한다. 이어 23일 병조판서 정연은 청안 지방의 일부 사람들은 나물만 캐서 먹고 있는 실정이라는 자신의 목격담을 보고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나물을 캐는 백성이 들판을 뒤덮고 있으며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물뿐’이라는 것이다. 나물에 의지하여 사는 백성들의 처참한 삶은 조선후기로 올수록 점점 더하였다. 정약용은 ‘다북쑥을 캐다’(采蒿)란 시에서 그 처참한 삶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 넘어가네/ 푸른 치마 붉은 머리/ 허리 굽혀 쑥을 캐네/ 다북쑥 캐어 무얼 하나/ 눈물만 쏟아지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엔 벼 싹 다 말랐네/ 다북쑥 캐어다가/ 둥글게 넓적하게/ 말리고 또 말려서/ 데치고 소금 절여/ 죽 쑤어 먹을밖엔/ 달리 또 무얼 하리”(송재소 역 ‘다산시선’, 창작과비평사) 조선후기 나물 캐기와 백성들의 처참한 삶의 관계를 이처럼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그림 속의 여인들이 캐는 나물은 청빈의 상징인가, 아니면 가난의 상징인가, 아니면 가족과 함께 먹을 단란한 저녁식사의 찬거리인가. 바라건대 맨 마지막의 것이었으면 한다. 지금 세상의 나물은 가난도 아니고, 청빈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채식이 인간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물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부합하는 즐거운 채식이 아니겠는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27번째 가출한 아내 이제 그만

    27번째 가출한 아내 이제 그만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아내를 찾아 나서기 26번의 주인공 장혜곤씨(49·「선데이서울」3월26일자 제 129호기사 「결혼13년에 가출 27번」참조). 이제 결국 지쳐 나자빠진 그는 이혼수속을 밟고 새 아내를 맞아 신혼생활을 누리고 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아직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신부는 벌써 임신 6개월째라는 「스위트·홈」의 현장. 『자유결혼한 셈이지요.「프로포즈」를 먼저 제가 했어요. 얼맛동안 지켜보니 어질고 순하기가 양같아서 그만 마음이 동했던 겁니다』 장씨는 다소곳하게 앉은 부인 강영미(姜英美)여인(35)을 슬쩍 곁눈질하며 껄껄거린다. 결혼식없는 결혼을 한게 지난 4월하순. 그런데 결혼의 경위가 문자 그대로「자유결혼」 이다. 『저 사람이 4월초순 제 얘기가「선데이 서울」에 나가기 직전 저희 여관안에 있던 다방의 「마담」으로 들어왔었어요. 차차 가까이 지내고 보니 마음에 쏙 들어서 결혼할 작정을 했습니다』 강여인으로 말하자면 부여(扶餘)에 오게된 것은 단순한 관광목적. 서울에서 살고있던 그녀는 논산(論山)에 있다는 오빠집에 다니러 왔다가 강경(江景)에서 친구가 다방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러가게 됐고, 한달쯤 어울리며 함께 다방도 했다는 것. 부여가 가까워서 구경삼아 혼자 부여에 왔는데, 마침 투숙했던 곳이 장씨의 관광여관. 며칠 눌러앉아 구경하다가 이왕이면 돈을 벌며 구경하자고 여관안의 다방 「마담」으로 취직청을 넣었다.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될 수가 있겠어요? 「마담」으로 있으면서 「선데이 서울」에 난 기사를 보고 무척 감동했어요. 이제는 제가 그분의 품속으로 들어가 찢기고 상처난 마음을 위로해 드릴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승낙했던 거죠. 그래서 저는 「선데이 서울」이 우리 가정을 만들어 주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강여인은 집안도 상당한 가문일뿐만 아니라 자기 앞으로 배당된 재산도 적잖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군대령인 남편이 5년전 순직한 이래 지금까지 개가하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 『제가 이사람 재산이 얼만지, 또 있는지도 전혀 몰랐고, 살다보니 우연하게 알았는데 저는 전연 그런건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이사람이 함께 살기로 하면서 장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읍니다. 만약 살다가 싫어지면 아무 때나 나가도 좋다 이겁니다』 강여인은 독실한 「가톨릭」신자. 장씨도 아내를 따라 요즘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있다. 결혼식을 올리자면 장씨도 영세(領洗)를 받아야 하는 때문. 금년 12월 말께나 영세를 받을수 있다고 하면서 내년 정월 초순쯤 조용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말한다. 『벌써 임신 6개월째』라고 아내 몰래 귀엣말을 해준 장씨는『이제 비로소 마음이 잡혀 사업을 보살필수 있게됐다』 고. 장씨는 고향이 평북 삭주(朔州). 해방되어 월남한 그는 서울에서 측량기술자로 일하다가 6·25동란으로 이곳 부여로 내려왔다. 양조장을 차려 몇 년동안 상당한 재미를 봐 지금의 부여읍 관북리에「부여호텔」을 차리게 된 것. 58년 이름봄, 문제의 가출「챔피언」인 박여인(36)을 맞아 결혼하게 됐다. 박여인은 부산 H여고를 나온 재원으로 명석한 두뇌에 뛰어난 미모로서 결혼당시 부여 S다방의 종업원. 구변이 좋은데다가 친절하기 그만이어서 「호텔」종업원으로 「스카우트」하게 됐다. 월남한뒤 장씨의 내조자로 결혼생활을 누려오던 김모여인이 박여인을 데려오면서부터 트집을 잡기 시작, 거듭된 가정불화로 끝내는 헤어지게 됐으며, 박여인은 김여인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계승했다. 장씨와 결혼한 박여인은 4개월째인 58년 7월, 불문곡직하고 집에서 무단 가출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숨바꼭질」을 개업(?)했다. 「호텔」을 여관으로 변경하여 영업하던 당시 그는 장사는커녕 자신의 몸마저 보살필 겨를도 없이 아내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 4달만에 가까운 논산에서 다방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 집으로 데려왔다. 이어서 59년 봄에 두 번째 가출. 이렇게 매년 2회씩 집을 나가기 시작하여 금년봄 무려 27회째 기록을 수립했고 장씨가 돌아다닌 곳만도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인천, 서울등 대도시에서부터 철원(鐵原), 인제(麟 蹄), 속초(束草)등 강원(江原)도 최전방 지역과 남쪽 목포(木浦), 진주(晋州), 마산(馬山)등 방방곡곡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출증이라는 병인가 싶어 몇 달동안 서울에 입원도 시켰는데, 끝내 무슨 까닭인지 모르고 제가 지쳐 나가자빠졌습니다』 그동안 박여인을 찾아 헤맨 여비·숙박비·신문광고료등과 박여인이 매년 나갈때마다 듬뿍 한움큼씩 거머쥐고 나간 돈을 합계하면 2천만원쯤. 그래서 여관도 쑥대밭이 될 지경이고 어린 자식들도 말이 아니어서 금년 4월에는 단념하고 결혼하기로 했던 것. 결혼한 후에 박여인은 중개인을 통해 다시들어 가겠다고 연락을 했었으나 새로 가정을 차렸다는 것을 알고 자진해서 이혼수속을 밟아 주었다. 『제가 그 인생이 불쌍해서 사람하나 살리는 셈치고 승부를 보려했던 겁니다. 처음엔 그런 여자를 놓치는게 아깝기도 해서 찾아 나섰는데 그러다보니 얼마나 뛰쳐 나가고 어디까지 도망치나 보자고 대결하게 됐어요. 집에 데려다 놔도 못나가게 가두거나 감시하지도 않았죠. 너 나가겠으면 나가라 이겁니다. 그래도 나는 찾아 내고야만다는 배짱이었죠』 신부 강여인도 장씨의 이러한 초인적인 집념과 결혼 생활의 내막을 샅샅이 알고 있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접근시킨 촉진제가 됐을 거라고도 얘기한다. < 부여(扶餘)에서 박안식(朴安植)·조종국(趙鍾國)기자> [선데이서울 71년 11월 7일호 제4권 44호 통권 제 161호]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1637년 1월3일, 도성으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12월 그믐과 정월 초하루, 몽골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홍타이지는 휘하 장졸들에게 군기를 확립하고 함부로 약탈을 자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시’일 뿐이었다. 더욱이 몽골병들은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고 청에 귀순했고, 또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군기를 강조하여 그들의 ‘욕구’를 언제까지고 묶어두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지켜 줄 군사도, 이끌어 줄 조정도 없는 상황에서 도성 백성들은 몽골병들의 분탕질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안쓰러웠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도성 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칭신(稱臣) 여부를 둘러싼 고민 1월3일,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조정은 당장 홍타이지의 ‘조유(詔諭)’에 회답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조유를 건네받는 자리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부하지 못한 이상, 조선은 이제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조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회답서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나라가 살아남은 뒤에야 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장차 무슨 명분을 논하겠습니까?’ 김류는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다. 청에 대해 ‘칭신(稱臣)’하는 문제를 자신이 담당하여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김류가 울자 인조도 울기 시작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망극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뒤 벌써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인 인조였다.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용상에 오를 적에만 해도, 아니 정묘호란 직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오랑캐에게 신하를 칭하며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눈물이 잦아질 만도 했다. 이홍주(李弘胄)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상 ‘대청황제(大淸皇帝)’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고 했다. 홍서봉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군부(君父)를 보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 저들의 지적대로 요금원(遼金元) 시절의 고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신속(臣屬)하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는 주장이었다. 김신국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선을 그었다. 그들에게 칭신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하더라도 인조가 직접 홍타이지를 대면하게 되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월30일, 인조가 성을 나가서 항복할 때까지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장유(張維)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일단 ‘조유’에서 홍타이지가 질책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과하되,‘칭신’ 여부는 그들의 반응을 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식(李植) 또한 ‘대청황제’라는 칭호는 그냥 사용하되 ‘칭신’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료들은 답서의 서식(書式)과 시작하는 단어, 내용에 들어가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외로운 성에 갇혀 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오랑캐’로 멸시해 온 여진족 추장에게 ‘칭신’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논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황제’임을 인정하다 고민과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답서의 맨 앞에 ‘조선국왕은 삼가 대청국관온인성황제(大淸國寬溫仁聖皇帝)께 올립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에 보내는 서신을 ‘조유’ 운운하면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홍타이지와 청의 위상을 처음으로 인정한 표현이었다. 답서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으로 채웠다.‘소방(小邦)이 대국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불렀습니다. 특사(特使)를 보내 정성을 드리려 했으나 병과(兵戈)에 막혀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궁벽한 구석까지 오셨다는 소식에 의심과 믿음,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지난해 봄의 일은 소방이 그 죄를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 소방 신민들의 식견이 얕고 좁아 대국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눈앞에 닥친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되, 자존심을 최대한 살리려는 몸짓이었다.‘조유’ 속에 넘쳐나는 홍타이지의 ‘질책’ 내용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하면서 사죄했다. 주목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소방’으로, 인조는 ‘조선국왕’이라 했다. 맨 마지막에는 의연히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조선 국왕 신(臣) 모(某)’란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칭신’은 일단 거부했다. 또 청의 연호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에 대한 충성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았다. 답서의 뒷부분은 홍타이지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生靈)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방에게 새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 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청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홍서봉(洪瑞鳳),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이 답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황제는 만나지 못했다. 답서를 접수한 마부대는 상의한 뒤에 회답을 주겠다고 했다. ●비변사의 독주에 대한 반발 상황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비변사의 몇몇 신료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화친을 추진하는 것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비변사 신료들은 과거 척화·주화 논쟁 때처럼 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적진에 보내는 문서의 초안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주고받았다.‘인조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보지 못하도록 소매에 넣어 출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상소했다.‘우리는 참월(僭越)하게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오랑캐에 맞서 명나라를 대신하여 화란을 당하는 것’이니 ‘의열(義烈)에 당당하고 해와 달에 비춰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의 국서를 태워버림으로써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화친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답서를 보낸 다음부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다시 최명길(崔鳴吉) 등 비변사 당상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에 대해, 적의 세력을 과장하고 화친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류에 대해, 하는 일 없이 겁만 많아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유백증(兪伯曾)은,‘칭신’한다고 해서 포위가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나라를 그르친 김류와 윤방(尹昉) 등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조유’에 대한 답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었다. 인조는 최명길 등을 감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보였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신료들 사이의 논란을 다시 방치할 경우, 화친의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7년 1월 초, 청과 조선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조유’와 조선의 답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의 ‘꿈’은 청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록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를 ‘조선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목상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조선국왕’으로 남아 명과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조선국왕’이란 표현 대신 ‘신(臣) 이종(李倧·인조의 이름)’을,‘숭정’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원하고 있었다. 누구의 꿈이 실현될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서울광장] 버려야 할 말 ‘4강 외교’ /이목희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버려야 할 말 ‘4강 외교’ /이목희 편집국 부국장

    이명박(MB) 정부의 외교가 죽을 쑤고 있다. 인적 쇄신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만 바꾼다고 될까. 지금 주요 외교정책 포스트는 베테랑 외교관들이 차지하고 있다. 다른 외교관이나 학자 출신으로 돌려막아 봐야 그저 그럴 것 같다. 인적 쇄신이 필요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외교의 큰 틀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MB정부는 한·미동맹 복원을 중심으로 4강외교 완성을 내걸었다. 이 대통령은 당선 직후 4강 대사부터 만났다.4강에 특사를 파견했다. 쇠고기협상 타결을 통해 미국의 환심을 사려 했고, 일본과의 미래 관계를 강조했다. 중국·러시아와도 잘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이렇듯 전방위로 애썼으니 4강과의 관계가 적어도 나빠지지는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4강 모두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은 좀 나은 듯하지만 나머지 세 나라에서는 불평·불만이 쏟아진다. 정권 출범 6개월만에 동북아의 ‘왕따’가 우려된다는 비아냥이 나온다. 왜 이렇게 됐을까. 변화하는 동북아, 나아가 세계 정세에 둔감했던 탓이다. 정권 초기부터 낡은 외교 패러다임으로 일관하니 상황이 꼬일 수밖에 없다. 외교통상부의 한 고위관리는 “4강 외교라는 용어부터 없애자.”고 대통령직 인수위 핵심들에게 건의했다고 한다.‘4강’이란 말은 한국을 스스로 낮추는 면에서 사대주의적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환영할만한 말이 아니다. 미국이 자신을 중국·러시아·일본과 동렬에 넣으면 좋아하겠는가. 중국 역시 한반도에서 미국보다 앞서가려 하고 있다.‘4강’이라고 싸잡는 것이 유쾌할 리 없다. 일본·러시아는 ‘4강’이라고 부르면서 그에 합당한 대접을 않는다고 불쾌해한다. ‘4강 외교’라는 말 자체에서 벗어나자는 건의는 이 대통령의 핵심참모들에 의해 딱지를 맞는다. 인수위 시절 이미 대통령 해외순방 일정을 비롯해 4강에 전념하는 외교플랜이 만들어졌다. 과거 패러다임에 의하면 새 대통령의 해외순방 순서는 정해져 있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 순이다.MB 정부도 그에 맞춰 외교일정을 짰다. 하지만 당장 중국측이 이의를 제기했다. 일본보다 중국에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러시아는 “그러려면 아예 가을로 미루자.”고 했다.EU국가들은 한국의 새정부에 무시당했다고 서운해한다. 5년 뒤 다시 새 대통령이 탄생하면 중국은 일본을 넘어 미국보다 자신을 먼저 찾아달라고 요구할 게 틀림없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라는 서열화된 4강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날이 갈수록 어려운 처지에 빠진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3위인 중견국가다. 새 대통령이 국제사회 기여도를 높이겠다는 등 통큰 자세를 먼저 보였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첫 방문지를 중동이나 아프리카로 하는 것을 검토해 봄 직했다. 다변화외교, 자원외교는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미·일·중·러 4개국과의 관계강화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물밑에서 조용히, 견제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하는 것이 옳다. 지구촌을 넓게 볼 때 북핵을 비롯한 동북아 현안이 오히려 쉽게 풀릴 수 있다. 정부 발표, 공문서와 연구서에서 ‘4강’이란 용어를 추방하기 바란다.‘한반도 주변국’ 혹은 ‘G4’ 등을 적절히 쓰면 된다. 그러면 언론 역시 따라갈 것이다. 용어에서 해방되면 정신이 자유로워진다. 새 외교는 그렇게 시작될 수 있다. 이목희 편집국 부국장 mhlee@seoul.co.kr
  • 복원된 시인 이상화 고택 공개

    복원된 시인 이상화 고택 공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대구 고택이 복원돼 12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7일 대구시에 따르면 이상화 시인이 말년에 머물렀던 옛집인 중구 계산2가 84 단층 목조건물 두 채(대지 205㎡, 건평 64.5㎡)에 대한 보수와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시는 12일 오후 6시 개관식을 가질 예정이다. 현판 제막과 함께 사물놀이 공연, 시낭송, 특별공연도 갖는다. 이 건물은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매입, 지난 2005년 대구시에 기부채납한 것으로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등이 설치됐다. 시는 고택과 인접한 3·1운동길과 뽕나무골목, 진골목 등을 이 시인이 살았던 시대 배경에 맞춰 근대골목으로 다시 디자인해 도심 관광 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다. 1901년 대구에서 출생한 이상화 시인은 서울 중앙학교를 수료했고 대구에서 3·1운동 거사를 모의했다.1943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이번에 복원된 대구 자택에서 숨졌다. 대구시 관계자는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상화 선생의 우국정신과 문학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데스크시각] 현대와 청와대/박대출 정치부장

    [데스크시각] 현대와 청와대/박대출 정치부장

    정주영은 그를 이군이라고 불렀다. 이군은 12년 만에 사장이 됐다. 샐러리맨 신화로 이름지어졌다. 이명박 사장의 계산법은 다르다.24년 만이라고 한다. 두배로 일했다는 논리다. 하루 18시간 넘게 뛰었다는 것이다. 현대건설에선 ‘빨리 빨리’가 최선이었다. 출근 시간을 오전 7시에서 6시로 앞당겼다. 여직원들은 화장할 시간도 없다고 항의했다. 그는 “밤에 화장하고 자라.”고 받아쳤다.‘얼리 버드’는 신조였다. 결국 해냈다. 시간이 돈이었다. 공기 단축은 성공을 보장했다. 비용을 줄였고, 이익을 늘렸다. 경부고속도로 신화도 창출했다.‘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값싸게 건설’한 기록을 남겼다. 이명박(MB) 대통령은 얼리버드를 이어갔다. 어떤 청와대 직원들은 새벽 3시반에 일어나야 했다. 하루 5시간 넘게 자지 않는 MB와 다르다. 피로가 겹쳤다. 얼굴은 누렇게 떴다.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MB는 결국 얼리 버드를 완화했다. 빨리 빨리는 불변의 최선이 아니었다. MB에겐 한·미동맹 복원이 시급했다. 쇠고기로 양보했다. 쇠고기 수입은 필연이다. 언젠가는 들여와야 한다. 하지만 국민의 믿음을 얻는 과정이 모자랐다. 조급함이 화를 불렀다.‘촛불 쓰나미’가 덮쳤다.MB는 ‘747’ 공약을 내놨다. 약속이었다. 이젠 꿈이요, 목표라고 한다. 경부운하는 없던 일로 됐다.‘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천명했다. 대기업부터 손댔다. 중소기업은 후순위가 됐다. 친재벌이란 반발이 뒤따랐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한다는 믿음을 얻는데 미흡했다. 미국이 독도란 말을 뺐다. 총력 외교 끝에 겨우 원상회복했다. 부시 미 대통령의 선물이었다. 정부는 외교전의 승리라고 자찬했다. 기뻐할 일이 아니다. 안도할 일이다. 손해볼 뻔하다가 막은 것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초기부터 꼬였다. 악수(惡手)와 악재(惡材)가 겹쳤다.‘고소영’‘강부자’에서 ‘만사형통’‘소망대망’‘시청본청’으로 악수가 이어졌다. 미국발 경제 위기에 고유가, 고물가 등 악재도 쏟아졌다. 지지율 10%대로 무너졌다. 빨리빨리 신화는 바뀌었다. 건설신화는 붕괴신화로 옮겨졌다. 좌파세력은 10년간 ‘봄’을 누렸다. 이명박 정부 초기 동면에 들어갔다. 한두달 잠만 잤다. 그런데 갑자기 훈풍이 불었다. 호재가 쏟아졌다. 다시 봄맞이에 나섰다.‘촛불 상비군’으로 집결했다. 언제든지 광화문에 모일 수 있는 전력이다. 여권 관계자는 2만∼3만여명으로 계산한다. MB는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다. 위기 돌파 모드는 강공인 것 같다. 특유의 몰아치기 조짐이 보인다. 공기업개혁,MB재산 헌납,8·15사면, 민생경제 대책 등이 쏟아질 것 같다. 한나라당쪽은 감세다. 법인세 재산세 종부세 소득세 부가세 등 ‘몽땅 세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딴소리다. 재정 악화를 들어 난색이다. 당정이 따로 놀면 설익은 민심잡기다. 내용은 나쁘지 않다. 세금 내려 준다는데, 화합하자는데, 개혁하자는데, 민생 돌보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하지만 설익은 것은 기다려야 한다. 지혜롭게 익혀 나가야 한다. 때가 중요하다. 방식도 매끄러워야 한다. 강하되 거칠면 안 된다. 공권력 회복은 필수다.‘법’과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경찰 대응이 다소 거칠다. 폭력 시위자 검거 마일리지, 성과급제만 해도 그렇다. 그나마 백지화하기로 했다니 다행이다. 거칠고 조급하면 탈난다. 반대의 빌미를 준다.‘촛불 상비군’의 저항만 키운다. 지지율 회복은 요원해진다. CEO 대통령은 이젠 잊자. 용도 폐기할 필요가 있다. 신선도가 떨어졌다. 국정 리더십은 건설리더십과 다르다.‘빠르게’보다는 ‘바르게’가 낫다. 박대출 정치부장 dcpark@seoul.co.kr
  • 벼락부자 노익장 생과부에 “맴맴”

    벼락부자 노익장 생과부에 “맴맴”

    노익장(老益壯)이라던가.토지개발「붐」을 타고 하룻밤사이에 억대의 갑부가 된 70노인이 40대의 생과부와 불장난을 하다 결국 돈잃고 망신하고 답답해서 「맴맴」-. 술내기 섰다판서 첫 대면 “어쩐지 좋아” 「호텔」로 직행 망신살이 뻗은 노인은 박택상(朴澤相·70·가명·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상도동의 야산이 주택지로 각광을 받아 벼락부자가 된 그는 슬하에 아들, 며느리, 손자등을 줄줄이 거느린 다복한 할아버지. 애인역은 임영숙(任英淑)여인(43·가명·서울 영등포구 봉천동). 남편있는 몸이나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이 첩살림을 차려 오랫동안 별거한 생과부. 남·녀가 처음 만난것은 지난해 봄, 상도동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시내 여러기관에 구내이발소를 별여놓긴했지만 아들들에게 맡겨두고 동네늙은이들과 어울려 술내기 섰다판을 벌이며 소일하는게 박노인의 유일한 일과였을때 이 섰다판에서 임여인을 만났다. 독수공방이 서러워 친구집을 찾아 다니며 외로움을 달래던 임여인이 친구의 술집에 들렀다가 노인네들의 섰다판에 끼여 든 것. 이렇게 무료를 주체할 길없던 두 남·녀는 판이 끝나 다른 노인네들이 돌아가자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다방으로 갔다. 제법 아기자기한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그날은 그대로 헤어졌다. 다음날 다시만난 둘은 다방에서 영화관, 식당을 거쳐 끝내는 여관으로 갔다. 동네에서는 지독한 구두쇠 영감으로 소문난 박노인이지만 임여인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래서 둘이 든곳도 도봉유원지의 S「호텔」의 화려한 특실. 이렇게하여 40대 생과부의 달아 오른 뜨거운 몸을 안아버린 박노인은 다음날 부터 정력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먹어대며 늘그막의 사랑을 즐겼다. 생과부 뜨꺼운 몸 안뒤엔 매일같이 보신탕집 찾아 냄새를 맡기조차 싫어하던 보신탕집을 찾아 다니는가 하면 염소탕집을 찾아 몇십리 길을 멀다않고 청계천까지 가는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둘은 그럭저럭 1년동안의 밀회를 끌어 왔다. 그러나 달구어진 쇠는 식기 마련. 올봄 둘의 사이가 흐지부지하게 끝나 버렸다. 박노인으로 볼때는 나이70이라 정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그동안 임여인에게 준 돈이랑 비용에 쓴 돈등 50여만원이 아까운 생각까지 들었으며, 임여인은 임여인대로 『영감쟁이가 너무 늙어 만족도 못주는 주제에 갈수록 돈에 인색해져 싫어졌다』는 것. 그러다가 지난8월 어느날, 헤어진지 반년도 지났는데 박노인은 임여인의 전화를 받았다. 『뵙고 싶으니 하오7시까지 E다방으로 나와달라』는 것이었다. 둘이 다시 만난지 1시간쯤 뒤, 채 어둠이 깔리기도 전에 X여관 맨구석방에서 박노인과 임여인이 벗다시피하고 한창 「무드」를 돋구어가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방문을 박차고 한 여인이 뛰어 들었다. 엉겁결에 당한 둘은 몸을 가릴 생각도 못하고 꼭 껴안은채 눈을 감고 있었다. 『흥』하는 코웃음 소리와 문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임여인의 시누이인 김경례(金慶禮)여인(가명·40)이 정사의 현장을 덮친 것이다. 남편이 전직경찰관이라서 인지 『눈치와 계산 빠르기로 알아주는 아낙네』라는 임여인의 귀뜸이고 보니 그렇지 않아도 눈앞이 캄캄해 진 박노인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누라 보다 다 큰 자식과 며느리 볼 낯이 없었다. 가족이 알까 “쉬쉬”하며 혼자 애태웠는데… 궁리끝에 박노인은 사업관계로 알게된 『눈치 빠르고 수단 좋은』황택민(黃澤珉)씨(48·가명)에게 사실을 털어 놓고 『말썽나지 않게 가운데서 수고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고의 댓가로 땅 40평을 주기로 하고. 황씨와 김여인의 담판이 사작됐다. 김여인은 『3백만원만 받아 주면 10%의 「커미션」을 주겠다』고 황씨에게 제안했다. 물론 『오빠(임여인의 남편)와도 타협이 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씨는 수단이 좋기로 이름난 사람, 흥정끝에 결국 합의된 금액은 2백만원으로 낙착됐다. 그 공으로 황씨는 40평의 땅을 얻었다. 또 김여인측에게 전해 주라는 2백만원도 받았으나 이중 40만원을 자기 몫으로 빼놓고 1백60만원만 넘겨줬다. 1백60만원을 받은 김여인은 『약속대로 10%만 「커미션」으로 떼고 나머지 20만원을 더 내 놓으라』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황씨는 『그까짓것 남의 사랑에 끼어 들어 생긴 공돈 좀 떼어 먹기로서니 무슨죄가 되느냐』며 배짱을 부렸다. 이렇게하여 김여인이 황씨를 상대로 문제의 20만원을 받게 해달라 경찰에 고소. 엉뚱한 곳에서 말썽이 생겨 참고인으로 14일 경찰에 불려온 박노인은 『당초 유부녀를 욕심낸게 잘못이긴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든게 그들이 짜고 한짓에 걸려든것 같다』면서 『여관에 든지 10분도 안돼 시누이가 나타난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라고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었는데 또 그녀에게도 돈을 줘야합니까?』어디가서 탁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는 처지인 박노인의 심정은 고추를 먹은것보다 더 쓰리고 따가운 처지. <유창하(柳昌夏)기자> [선데이서울 71년 10월 24일호 제4권 42호 통권 제 159호]
  • [취업준비생 60만 시대] (6) 한문장애인교사 꿈 이룬 이은주씨

    [취업준비생 60만 시대] (6) 한문장애인교사 꿈 이룬 이은주씨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했으면 합니다. 파이팅!” 이은주(37·여)씨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는 1급 장애인이다.1994년 봄 대학 졸업을 며칠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한 탓이다. 지방의 한 명문 사립대 한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취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무려 6년이란 시간을 홀로 방황하며 좌절했다. 그러다 서울의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 돕기에 나섰다. 궂은 일을 마다 않고 봉사활동을 했다. 하지만 2007년 1월 복지관을 그만뒀다. 중학교 때부터 한문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대학 진학에는 주저없이 한문학과에 지원했고 수석합격했다. 한문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다시 한문으로 돌아서게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한문장애인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교원임용고사에 도전하기로 했다.2006년부터 교사임용고사에 장애인을 구분, 모집하지만 시험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만큼 어려웠다. 교육청별, 과목별로 불과 1∼2명만 모집하는데다 한문의 경우 모집 계획이 없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난해 하반기 대전교육청에서 한문장애인교사 1명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 이씨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학원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의 몇몇 전문학원을 수차례 사전답사했지만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혼자 독학하기로 마음먹고 스톱워치로 공부한 시간을 체크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이 되도록 했다. 고질병 같은 꼬리뼈 욕창이 걸려 한 달간 목욕도 못하고 꼼짝없이 엎드려서만 공부하기도 했다. 이씨는 중증 장애인이 공부하기란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간은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운영하는 대전직업능력센터에서 합숙하며 공부했다. 마침내 지난 1월31일 이씨는 당당히 최종 합격했다. 오는 8월쯤 발령이 나면 꿈에 그리던 교단에 서게 된다. 이씨는 “우리 아이들이 한자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싶다.”면서 “어휘력이나 전통적인 사상 등을 떠나 그저 순수하게 한자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보게 하고 싶은데, 그럴려면 수업을 재미있게 잘 해야겠다.”며 말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심장병, 여름에도 안심 못한다

    심장병, 여름에도 안심 못한다

    일반적으로 찬공기에 노출되면 말초혈관이 수축돼 혈압이 갑자기 상승한다. 따라서 늦가을이 되면 의사들은 ‘심장을 잘 관리하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조언일 뿐 실제로는 여름에도 심장질환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요즘 같이 폭염이 계속되는 날씨에는 심장질환 발병 위험이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심장질환, 사계절 가리지 않아 심장질환 전문 의료기관인 부천 세종병원이 2003∼07년 5년간 협심증, 심근경색 등의 원인으로 입원한 심장질환자 1만 1447명을 조사한 결과, 겨울철과 여름철의 심장질환 발병률은 25%로 같았으며, 가을은 27%에 달했다. 이는 심장질환이 계절과 날씨를 가리지 않고 발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계절별 심장질환 발병 건수는 봄 644건, 여름 672건, 가을 651건, 겨울 680건 등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계속되는 열대야, 심장이 위험하다 무더운 여름, 심장질환을 유발하는 위험인자는 곳곳에 있다. 특히 여름의 열대야는 심장 부담을 크게 증가시킨다. 왜 그럴까. 체온이 높아지면 우리 몸은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땀을 흘린다. 땀을 배출하려면 피부의 혈관을 확장시켜야 한다. 이는 혈압을 낮추는 작용을 한다. 이 때 반사작용으로 넓어진 혈관에 다시 혈액이 몰리고 심장은 더 많은 혈액을 보낸다. 이런 현상은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만들고 심장의 부담을 높인다. 또 뇌로 공급되는 혈액의 양을 줄여 뇌기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열대야 현상은 특히 더위에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에게 치명적이다. 심장질환 관련 학계에 따르면 기온이 섭씨 32도 이상일 때 뇌졸중은 66%, 관상동맥질환은 2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주·찬물은 피하라 한낮의 뜨거운 태양은 몸을 지치게 하고, 한밤의 열대야는 수면을 방해한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시원한 맥주다. 무더위와 열대야를 피하기 위해 마시는 소량의 술은 혈액순환을 돕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심장질환자에게는 술이 ‘독약’과 같다. 특히 술은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늘리기 때문에 예고없이 ‘심장발작’을 유발하기도 한다. 체내에서 알코올이 분해되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물질이 발생한다. 이 물질은 심장에 부담을 주고 심장수축을 방해하는 기능을 한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과음하다가 심장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찬물 샤워도 주의해야 한다. 찬물이 피부에 닿으면 피부 혈관이 수축되고 말초 혈액량이 감소한다. 이는 곧바로 심장이 보내야 하는 혈액량을 늘리는 효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심장에 부담을 준다. 심장질환자는 수시로 시원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햇볕이 가장 뜨거운 오후 1∼3시에는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 술도 도수가 낮다고 많이 마시지 말고 1∼2잔 정도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한다. 세종병원 심장내과 황흥곤 부장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무작정 등목이나 찬물로 샤워를 하기보다 섭씨 33∼36도의 미온수를 사용해 몸을 씻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21세기 유랑민의 질곡 외면할 수 없었죠”

    “21세기 유랑민의 질곡 외면할 수 없었죠”

    지금 이 땅에 정착한 새터민이나 중국 또는 제3국을 유랑하는 탈북자들이나 모두 저마다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배고픔을 못견뎌, 또 어떤 이는 가족의 약을 구하려고, 또 다른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했고, 지금도 강가에서 탈북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탈북 이후는 또 어떤가. 중국 공안(경찰)과의 숨바꼭질, 몽골 등 제3국에서의 기약없는 유랑,‘기획입국’ 브로커들의 농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 도착해도 정착은 지난한 길이다. 그들을 온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일 따름이다. 이제는 한국의 시민이 되리라 기대했던 그들에게 주민번호 뒷자리가 125(남),225(여)로 시작되는 동일코드를 붙여 “이 사람은 탈북자입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단편 7개 연작으로 새터민의 삶을 좇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생각한다면 21세기 유랑민들인 이들에게 삶의 온전성을 되돌려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인권, 탈북자인권은 인간안보의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선 안 됩니다.‘가짜 인권놀음’을 멈춰야 합니다.” 탈북 여성의 고달픈 여정을 그린 연작소설 ‘찔레꽃’(창비 펴냄)을 출간한 소설가 정도상(48)씨는 17일 “모어(母語)공동체의 온전한 회복이 분단체제 작가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라면서 “작가는 모어공동체가 갈등, 긴장, 유랑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게 번영하는 것을 지향해야 하고, 이번 작품도 그런 의도에서 구상했다.”고 말했다. ‘겨울, 압록강’‘함흥·2001·안개’‘늪지’‘풍풍우우’‘소소, 눈사람 되다’‘얼룩말’‘찔레꽃’ 등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인신매매단에 속아 중국으로 넘어간 북한 여성 ‘충심’이 신분을 속인 채 중국 땅을 헤매다 몽골을 거쳐 한국에 정착하는 궤적을 담고 있다. 인신매매단에 속아 조선족 남성과 강제결혼하고, 지옥같은 삶에서 탈출해 안마사로 일하다 기획입국 브로커인 선교사를 만나 수백만원을 주고 몽골을 거쳐 한국 땅을 밟지만 충심은 또 다시 ‘주변’에 머물 뿐이다.2차까지 나가야 하는 노래방 도우미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먼 길을 돌고 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최종목적지는 결국 가족이 있는 집이라고 생각하니 왈칵 울음이 터져나오려 했다.”(132쪽,‘풍풍우우’ 가운데) 작가는 5년전 탈북 소년의 유랑과 죽음을 담은 ‘꽃제비’라는 제목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작품을 쓰기로 작정했다고 한다.‘얼룩말’이라는 제목은 아들이 지어줬다. ●하나의 삶에 짜깁기한 네 여성의 ‘크로싱´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이사로 남북 실무교류를 책임지고 있는 처지여서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탈북자 문제가 이슈가 됐는데도 작가들이 작품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고, 오랫동안 자신의 어깨를 짓눌러온 ‘의식의 덩어리’도 이번 기회에 내려놓고 싶었다. 작가는 “남과 북의 독자들이나 작가들이 진정성을 갖고 읽어 우리 민족의 고달픈 유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면서 “비록 남루할지언정 가족과 집은 그 자체가 삶의 온전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중국 선양에서 만난 북한출신 안마사 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2006년 봄 ‘소소, 눈사람 되다’를 발표한 이후 연작소설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인공 ‘충심’은 한 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만난 함흥, 신의주, 무산, 남양 출신 탈북여성 4명의 사연을 복합적으로 녹여 만들어냈다. 작가는 “앞으로 청소년 성장소설이나 노동자들을 계급적 존재가 아닌 욕망의 근원으로 해부한 작품을 쓰고 싶다.”면서 “민중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80년대식 리얼리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실험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20&30] 당신의 직장내 멘토는 누구입니까

    [20&30] 당신의 직장내 멘토는 누구입니까

    매일 반복되는 업무, 이번주까지 끝내야 하는 팀 프로젝트, 상사의 지겨운 잔소리….20∼30대 직장인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되다. 업무 속에 매몰되다 보면 ‘사는 게 뭔지.’라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멘토’이다. 고민을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 닮고 싶은 존재, 오아시스처럼 시원하고 산맥처럼 넉넉한 그 사람. 당신의 멘토는 누구인가? ●더 많은 걸 배우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하라 회사원 이모(32)씨는 자신의 멘토와 그들의 장점을 ‘멘토 노트’에 기록한다. 직장생활 5년차인 이씨가 지금까지 함께 근무한 팀장은 모두 5명이다. 그의 노트에 따르면 첫 팀장에게 배운 것은 일과 휴식을 명확히 구분하고, 군더더기를 배척해 핵심만 전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번째 팀장은 그래픽을 이용해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방법을, 세번째 팀장은 상관에게 주장을 명확히 제기하면서도 미움을 받지 않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쳤다. 지금 팀장에게는 작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고 큰 틀을 구축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씨는 “솔직히 각 팀장마다 단점도 있고, 혼낼 때는 미울 때도 있지만 차분하게 바라보면 모두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자신만의 비법이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조언을 얻으려는 후배들에게 ‘스펀지가 되라.’고 말해준다.“저의 멘토 노트는 팀장뿐 아니라 주위 선후배들이 보여주는 멋진 모습들도 담겨 있습니다. 최근에는 경조사를 잘 챙기는 후배의 인맥관리법이 기록됐죠. 언젠가는 이것들이 자양분이 돼 저만의 비법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중학교 영어 교사인 윤모(31·여)씨는 적당한 멘토를 찾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몇년 차이 나지 않는 여교사끼리 학교생활에는 서로 좋은 멘토가 되지만, 교장이 되기 위한 멘토는 주변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윤씨는 “인원으로 보면 여교사들이 훨씬 많은데 교장이 되는 팁은 남교사들끼리만 공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좋은 성적으로 교직에 입문했고, 방학 때마다 영어연수도 다녀오면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실력만으로는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는 정보가 오고간다는 회식자리에서도 끝까지 버티지만 결국 다음날 듣는 말은 남자들끼리 한 잔 더 했다는 것뿐이다. 윤씨는 “솔직히 여성 멘토가 없어 힘들기도 하지만 최고직은 내어주지 않으려는 남자들의 텃세 때문에 여성 멘토의 존재 자체가 힘든 것 같다.”고 귀띔했다. 윤씨는 결국 여교사 동호회를 알아보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그는 3개월 만에 같은 지역 학교에 근무하는 여교사 모임을 알게 됐다.“인근 학교에 교감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여교사 한분을 만나게 됐어요. 요즘 그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답니다.” ●어려울 때 손 내밀어준, 잊지 못할 멘토 인터넷업체에 근무하는 강모(30)씨에게는 ‘인생의 등불’로 모시는 대학 선배가 있다. 삶의 굽이굽이에 도사린 암초에 부딪칠 때면 늘 길을 제시해 주며 지혜롭게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지금의 직장도 선배가 연결해 줬다. 강씨는 첫 직장에서 영업을 담당했다. 소심하고 말주변이 없어 여러 사람을 만나는 데 부담감을 느꼈다.2년 정도 버티다 결국 그만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강씨의 장단점을 짚어주고, 닷컴기업의 청사진을 제시해 주며 선배가 다니는 회사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입사 뒤에도 자상하게 이끌어 줬다. 선후배 관계, 협력업체와의 교류 등 직장 생활의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사회생활 전반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일러 줬다. 술자리에서 보이는 실수, 대인관계의 약점 등 보완할 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줬다. 하지만 강요하진 않는다. 강요에 의한 행동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여러 방안들을 보여 줄 뿐이다. 속마음을 터놓고 도움을 청할 곳이 딱히 없는 강씨에게 선배의 존재는 각별하다.“제겐 친형 이상의 존재입니다. 학생 때 지도했던 선생님들과도 차원이 다릅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가거든요.” 금융회사에 다니는 박모(29·여)씨는 지점장을 존경하고 따른다. 박씨는 사회에 갓 나왔을 때 지점장이 들려준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첫 직장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은행창구에서 돈을 계산하는 것도 서툴렀고, 컴퓨터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입사 동기들은 각 지점에서 빛을 발하며 일취월장했다. 해당 지점을 넘어 전 회사로 “일 잘한다.”는 평판이 돌았다. 박씨는 자신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6개월이 지났을 무렵 박씨는 적성과 맞지 않다고 판단해 그만두려고 작정했다. 그 즈음 지점장이 그를 불렀다. 지점장은 “잡생각이 많으면 발이 땅에서 뜬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강점을 키워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걸출한 사람이 되라.”고 충고했다. 박씨는 “제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때 깨달았어요. 저는 제 단점만 보고 계속 자책했던 거죠.”라고 말했다. 박씨는 그날 이후 달라졌다. 발을 땅에 굳건히 붙이고 뛰어난 대인관계 등 장점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친해지면서 회사생활에도 익숙해졌다. 컴퓨터 조작도 능숙해졌고, 돈 계산에도 도를 터갔다. 지금껏 박씨는 직장생활에서 힘겨운 고비에 직면할 때마다 지점장을 찾아 조언을 구했고, 자신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지점장에게 들려줬다.“지점장님이야말로 제 인생의 멘토입니다. 힘들었을 때 그분께 들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가 되고 살이 돼 지금의 제가 있도록 해줬고,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어요.”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이모(28·여)씨에게는 고교시절 담임인 안 선생님이 늘 고맙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안 선생님은 이씨에게 그저 무서운 담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안 선생님은 이씨가 계속 교사일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2년 전 모교에 부임해 착하고 상냥한 학교 후배들을 만난다는 상상 속에 첫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첫 수업을 마친 이씨는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졸거나 딴 짓을 했다. 수업 중간에 몇몇 불량해 보이는 학생들은 뒷문으로 나가버리기도 했다. 힘들게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이씨에게 안 선생님이 다가왔다. “힘들지?”라며 음료수를 하나 건네며 이런 저런 충고를 했다. 안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잘해 주기만 하는 선생님은 결국 학생들을 망치게 된다.”면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학생들을 틀어쥐고 공부하게 만든 선생님”이라고 충고해 줬다. 덕분에 이씨는 자신만의 교수법을 찾아가며 교사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요즘도 안 선생님은 이씨의 든든한 후원자다.“저의 제자들 중에도 저처럼 우리 학교에 오게 될 친구들이 있겠죠?그럼 그때 존경하는 안 선생님처럼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친절한 나의 멘토 IT업체 게임사업기획실에 근무하는 이모(30·여)씨는 부서 실장을 멘토로 여기고 있다. 이씨가 실장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봄부터였다. 그때부터 이씨는 실장의 인격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부임할 때 실장은 “게임 분야는 내가 처음이라 전문가가 아니니까, 잘 아는 여러분들이 내 생각이 맞는 건지 아닌지 얘기를 해달라. 도와주기 바란다.”며 직원들에게 솔직하게 이해를 구했다. 그때부터 이씨는 실장을 쭉 지켜보면서 실장의 결정이라면 무조건 신뢰하게 됐다.“보통 똑똑한 사람들은 본인의 머리에 함몰돼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상처를 주기 쉬운데 실장님은 달랐어요. 똑똑하면서도 굉장히 겸손하고, 본인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히 시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분이 내리는 결정은 공정하고 정확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죠.” 윤모(29)씨는 공기업 4년차 직원이다. 윤씨는 같은 회사 기획처에 근무하면서 예산을 담당하는 과장을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있다. 과장은 일처리가 꼼꼼하고 정확하기로 소문난 인재다. 윤씨가 신입사원일 때 과장은 일처리가 미숙한 윤씨가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며 차근차근 업무를 설명했다. 윤씨는 자신의 일도 아닌데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게다가 윤씨는 과장이 회사에서 일하며 화를 내거나 짜증내는 모습을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 협력업체들도 과장의 일처리와 인품을 거론하면서 칭찬하곤 한다.“항상 과장님을 보면서 내가 과장이 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지만, 훨씬 많은 수련이 필요할 것 같아요. 과장님처럼 일도 잘하고 인격도 갖춘 인물이 되는 게 직장 내에서 제가 추구하는 목표 중 하나죠.” 직장인 홍모(32)씨에겐 특이한 멘토가 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최 과장이다. 최 과장은 홍씨에게 일을 가르쳐 주는 멘토가 아니다. 그는 월급관리와 재테크의 멘토다. 직장에 다닌 지 3년이 넘도록 적금만 부었던 홍씨. 주식투자에 성공해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관련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선뜻 나서지 못했다. 늘 증권과 펀드 주변을 기웃거리며 고민만 하던 홍씨를 깨우쳐 준 사람은 같은 사무실의 최 과장이었다. 점심식사 뒤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재테크 이야기가 나왔다. 고민하는 홍씨에게 최 과장은 의미 있는 충고를 했다. 저축과 함께 증권투자나 펀드에도 정기적으로 급여의 일부를 투자하고, 단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놓고 여유있게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늘 주저하고만 있던 홍씨에게 최 과장의 충고는 큰 도움이 됐다. 용기를 내 최 과장이 추천하는 종목에 투자한 홍씨는 만족할 만한 수익을 거뒀다. 또 얼마 전 최 과장의 조언을 듣고 주식에서 자금을 뺐다. 조금 덕을 본 차에 무리해 볼까 생각하고 있던 홍씨에게 최 과장의 조언이 없었다면 지금쯤 그는 중대한 기로에 섰을지도 모를 일이다.“주식투자뿐만 아니라 업무에서도 과장님의 충고 잘 따르겠습니다.” 황비웅 장형우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행복 가득

    [내 책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행복 가득

    2004년, 마당엔 겨울이 깊다.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고염나무의 잔가지에는 고염이 가득하다. 그 고염을 먹자고 새들이 몰려왔다 흩어지고 다시 몰려들기를 반복한다. 내 머릿속에 모아졌다 흩어지는 생각들도 그렇게 떠돈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떠난다면 난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남는다면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16년 동안 쉼 없이 해왔던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고 영국으로 떠날 것을 고민하던 즈음 난 수도 없이 반복되는 질문과 답을 내 스스로에게 던졌다. 일이라면 지칠 만큼 지쳤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어도 막상 그걸 실행에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마당을 서성이는 시간도 길어만 갔다. 그러다 겨울도 깊어질 대로 깊어져 고염나무에 다시 새싹이 돋아나려는 즈음 수많은 질문들 속에 하나의 생각이 또렷해졌다.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겨울나무는 봄이 와도 새 잎을 틔울 수 없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한 번 해보자. 누군가의 말도 떠올랐다. 할 수 없는 이유가 수 만 가지나 발목을 잡지만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산을 넘는다. 내게 영국 행은 꼭 이랬다. 아주 거창한 일을 하자고 영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가 답답해 일산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집을 지었지 마당을 만들자고 만든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하루 종일 집이 아니라 마당에서 살고 있는 날 발견했다. 그 손바닥만한 마당에서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한 나도 발견했다. 주말이 되면 무조건 집을 떠나 어디론가 나가야 했던 알 수 없는 답답증도 사라져갔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지극한 평화로움이 대체 뭘까. 그걸 알고 싶었고 그 해답 어디쯤에 앞으로 다가올 내 노년의 삶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국 생활도 어느 덧 3년을 넘기고 있다. 그 3년 중 1년 동안 난 영국의 왕립식물원 큐 가든에서 정원사로 일을 했다. 큐 가든의 정원 담장 밑에서 잡초를 뽑으며, 햇볕 속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라벤더 꽃대를 자르며, 비 내리는 날 정자에 서서 비를 피하며, 정원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깊어져 갔다.‘소박한 정원’은 낯선 영국의 정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느낀 삶의 단상과 그곳에서 만난 선량하기 그지없었던 영국 정원사들 그리고 영국 정원의 느낌을 가득 담은 글들이다. 더불어 두 아이와 함께 이겨내야 했던 가난하고 힘겨운 유학 생활에 대한 일기와도 같은 글이기도 하다. 정원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 뭐냐고 물으면 딱히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대답 대신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였던 메리 하위트의 ‘가난한 자의 정원’을 인용하고 싶다.“가난한 자의 정원에는 허브들과 꽃들보다는 친절한 생각들과 만족과 영혼의 평화와 그리고 고단한 시간들의 즐거움이 자란다.” 그녀의 말처럼 정원엔 소박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행복이 가득하다. 그걸 말해 주고 싶었다. 디자인하우스 펴냄. 오경아 영국 ‘큐 가든’인턴 정원사
  • 친조카의 칼맞은 정구파(精九派)스님

    친조카의 칼맞은 정구파(精九派)스님

    대처승이 조카 자식을 상대로 8년동안 「호모·섹스」를 강요하다 마침내 그 조카 칼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16살에 고아가 되어 삼촌인 그 대처승에게 맡겨져 밤마다 시달려 오던 끝에 칼을 휘둘렀다는 조카가 경찰에서 털어놓은 사연은-. “떠들면 쫓아내 버릴테다” 한밤중에 온 작은아버지 9월12일 하오 1시쯤 서울시내 영등포 봉천동 ○○사 법당에서 주지스님 하(河)준정씨(40·가명)가 피를 흘리며 뒹굴었다. 겨드랑이와 등허리, 손바닥등 모두 7군데에 칼을 맞고 중상을 입은 하스님은 곧 이웃 H의원으로 옮겨졌고 가해자로 조카 하모군(23)이 잡혀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됐다. 『죽이려고 그랬읍니다. 그런 놈은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군은 취조관에게 거침없이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하군은 하스님의 친조카인데다 천애고아로 하스님이 부모나 다름없이 길러온 처지. 취조관앞에서 털어놓은 하군의 범행사연은- 하군의 고향은 충북(忠北) 괴산(槐山).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6살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인 하군은 유산이라곤 땅 1마지기도 이어받지 못했다. 별수 없이 작은 아버지인 하스님이 그의 양육을 떠맡을 수밖에. 친척가운데 가장 가까운 일가이기도 했고, 주지스님이어서 비교적 살림이 윤택했던 때문. 당시 하스님은 충북 괴산에 있는 ○○사의 주지스님. 『절의 잔심부름을 해주고 얻어먹고 살게 됐어요. 절 밖에 있는 살림집에는 방이 2간이었어요. 저 혼자 사랑채에서 자곤 했지요』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깊이 잠든 하군은 야릇한 움직임에 눈을 떴다. 누군가 어둠속에서 그를 발가벗겨 놓고, 그의 「심벌」을 잔뜩 움켜 쥐고 있었다. 엉겁결에 놀라 일어나려 하자 우악스런 손이 입을 틀어 막았다. 『조용히 있어. 떠들면 쫓아버릴테야. 그러면 거지가 되고 마는 거야』-작은 아버지의 위협에 하군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의 큰손이 이윽고 하군의 손을 잡아 당겨 자기의 사타구니로 끌고갔다. 하군은 미처 자위행위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손을 놀렸다. 『처음엔 멋모르고 시키는대로 했는데 갈수록 더욱 이상해 져요. 전신을 만지게 하고 정말 죽기보다 싫었어요』 차차 하군은 작은 아버지가 징그러운 짐승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밤이되면 사형장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견딜 수 없었다. 『초저녁부터 다투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실랑이를 벌일때가 하루 건너 한번씩 있었어요. 밤새도록 저를 벗기려는 작은 아버지와 싫다고 피하는 저는 죽자하고 싸웠지요』 도망쳤다간 또 잡혀오고 7년동안을 생지옥 생활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18살 되던 1962년 봄, 산으로 나무하러 가는체하고 절을 뛰쳐나와 천안의 외가로 줄행랑. 그러나 그의 행방을 쫓던 스님에게 불과 두달만에 잡히고 말았다. 『그때 외할머니에게 저의 사정을 얘기했으면 될텐데. 저는 만약 제가 그런 소리를 하면 작은 아버지 체면도 있고 친척들이 소동을 일으킬까봐 말을 못하고 끌려 갔어요』 하스님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기가 공부시켜 주려했는데, 공부를 싫어해 집을 뛰쳐 나왔다고 둘러댔다는 것. 그러나 그해 겨울, 하군은 다시 절을 도망쳐 무작정 상경, 남대문 근처에서 구두닦이로 벌어 먹었다. 『63년 봄에 우연히 길가에서 사촌형을 만났지요. 사촌형도 제가 공부하기 싫어서 나온줄 알고 작은 아비지에게 연락을 했어요』 그때 하스님은 청주시 수동의 ○○사로 옮긴뒤였다. 연락을 받은 즉시 상경한 그는 『책임지고 공부시킨다』며 하군을 다시 데려갔다. 이번에는「호모·섹스」의 방식이 진일보, 더욱 하군을 못살게 굴었다. 그달도 채못가 견디다못한 하군은 ○○사를 탈출, 서울의 영등포구 구로동 외삼촌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처음으로 외삼촌에게 제가 당한 고역을 고백했읍니다. 외삼촌은 그럴 수 없다면서 모두 때려 부수겠다고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싸웠죠』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조카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 공부하기 싫으니 되레 뒤집어 씌운다』고 펄쩍뛰더라는 것. “고아된 몸 키워줬다지만 이젠 죽어도 더는 못참아” 『그러면 그렇지 그럴수가 있나』라고 생각한 외삼촌에게 실컷 꾸중만 들은 하군은 또다시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그후에도 공주 갑사로 도망치기도 했고, 부산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며, 청주의 매형에게도 가있었다. 그때마다 작은 아버지는 끈덕지게 수소문해서 하군의 거처를 알아내고 악착같이 그를 데려갔다. 이러는 동안 친척들이 모두 내용을 알게됐고 작은 어머니 마저도 사실을 알게됐다. 『충주 매형에게 있으면서 자동차학원에 들어가 운전기술을 배웠어요.화물차 조수로 취직해서 그런대로 생활을 했는데, 작년에 작은 아버지가 저의 숨어있는 곳을 알아내고 찾아 왔읍니다』 하스님은 매형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까지 했다. 스님의 정성스러운 태도에 넘어간 매형이 하군을 『작은 아버님이 마음을 잡았으니까 돌아가라』고 권했다. 결국 매형의 권유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여전했읍니다. 그러나 이젠 다 컸으니까 만만하게 응하지 않았지요. 1주일만에 뛰쳐 나와 다시 충주에서 취직했읍니다』 사건이 나기 1주일전, 매형집에 들렀다가 작은 아버지가 편지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선량한 매형까지 괴롭히려는 작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이때였다고. 그래서 지난 6월12일 아침 충주를 떠나 서울에 와 칼을 사들고 봉천동 ○○사에 뛰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게 짐승이지 사람입니까? 16살때부터 그렇게 악착같이 저의 뒤를 쫓아다니며 추악한 짓을 해온 작은아버지가…』 삿대질까지 하며 지긋지긋한 악몽의 7년을 연상하는 듯 그는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이러한 경우 법은 그에게 과연 어떤 형벌을 내릴것인가? <식(植)> [선데이서울 71년 9월 26일호 제4권 38호 통권 제 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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