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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5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를 비롯하여 8인의 죄수에게 내린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근래 너희들이 벌인 조정에서의 처사는 과격하여 과오를 범하게 되었으니 조정 일에 잘못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이번 일에 과인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또한 조정의 대신들 역시 어찌 달리 사사로운 마음이 있겠는가.너희들로 하여금 이에 이르도록 한 것은 과인이 밝지 못하여 능히 미리 대처하지 못한 탓이다.너희들의 죄는 만약 형률(刑律)로서만 다스린다면 단순히 귀양보내는 것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너희들에게도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단지 나라를 위하려고 한 나머지 과격함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니,말감으로서 죄를 확정한 것이며,만약 보통의 죄수라면 이런 교지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너희들이 오래 시종으로 있었으니 과인인들 너희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이번에 나랏일을 그르친 죄를 형률로 다스리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유배를 떠나도록 하라.” 8인의 죄수들은 무릎을 꿇고 군주의 교지를 들었다. 말감(末減).가장 가벼운 형량으로 고쳐 죄를 확정하였다는 중종의 교지를 듣는 순간 조광조의 눈에서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김정은 마지막으로 8명의 유배지를 확정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능주에,김정은 금산(錦山)에,김구는 개령(開寧)에,김식은 선산(善山)에,박세희는 상주(尙州)에,박훈은 성주(星州)에,윤자임은 온양(溫陽)에,기준은 아산(牙山)으로 각자의 유배형에 처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김식이 쓴웃음을 지으며 울고 있는 조광조를 향해 말하였다. “대감,마침내 우리들이 이매가 되고 말았소이다.” 이매(魅)는 ‘산도깨비’를 가리키는 말로 숲 속에 사는 이상한 기운으로 생기는 괴물이었다.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몸을 한 네발 가진 도깨비를 말하는데,사람을 해치는 온갖 도깨비나 귀신을 가리키는 ‘이매망량’의 준말인 것이다.예부터 중국에서는 이 산도깨비인 이매를 막기 위해서는 이들을 각각 사이(四夷)의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가능하다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을 빗대어 김식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여 자조하였던 것이다. “대감,우리가 마침내 산도깨비가 되고 말았소이다그려.” 김식이 말하였던 대로 괴수 중의 괴수인 조광조는 가장 먼 능주로 유배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그 죄상에 따라 한양에서 가까운 거리로 나뉘어져 안치되는 것이다.이렇듯 각각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조정이 안정된다고 교지를 내렸으니 이는 자신들을 사람을 홀리는 산도깨비,즉 이매로 취급하는 처사가 아닐 것인가 하고 김식이 비꼬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식의 태도와는 달리 조광조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신들이 비록 떠나갑니다만 어찌 신들이 주상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들의 처사가 너무 과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정치를 펼쳐보려고 과격할 만큼 열과 성의를 다하였던 조광조 일파의 신진세력들은 끈질기고 조직적인 훈구세력들의 반격으로 마침내 산도깨비로 몰려 변방으로 쫓겨 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기묘사화의 전말인 것이다. 이때가 중종 14년,1519년 11월 17일 아침이었다.˝
  • 儒林(5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5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를 비롯하여 8인의 죄수에게 내린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근래 너희들이 벌인 조정에서의 처사는 과격하여 과오를 범하게 되었으니 조정 일에 잘못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이번 일에 과인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또한 조정의 대신들 역시 어찌 달리 사사로운 마음이 있겠는가.너희들로 하여금 이에 이르도록 한 것은 과인이 밝지 못하여 능히 미리 대처하지 못한 탓이다.너희들의 죄는 만약 형률(刑律)로서만 다스린다면 단순히 귀양보내는 것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너희들에게도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단지 나라를 위하려고 한 나머지 과격함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니,말감으로서 죄를 확정한 것이며,만약 보통의 죄수라면 이런 교지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너희들이 오래 시종으로 있었으니 과인인들 너희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이번에 나랏일을 그르친 죄를 형률로 다스리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유배를 떠나도록 하라.” 8인의 죄수들은 무릎을 꿇고 군주의 교지를 들었다. 말감(末減).가장 가벼운 형량으로 고쳐 죄를 확정하였다는 중종의 교지를 듣는 순간 조광조의 눈에서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김정은 마지막으로 8명의 유배지를 확정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능주에,김정은 금산(錦山)에,김구는 개령(開寧)에,김식은 선산(善山)에,박세희는 상주(尙州)에,박훈은 성주(星州)에,윤자임은 온양(溫陽)에,기준은 아산(牙山)으로 각자의 유배형에 처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김식이 쓴웃음을 지으며 울고 있는 조광조를 향해 말하였다. “대감,마침내 우리들이 이매가 되고 말았소이다.” 이매(魅)는 ‘산도깨비’를 가리키는 말로 숲 속에 사는 이상한 기운으로 생기는 괴물이었다.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몸을 한 네발 가진 도깨비를 말하는데,사람을 해치는 온갖 도깨비나 귀신을 가리키는 ‘이매망량’의 준말인 것이다.예부터 중국에서는 이 산도깨비인 이매를 막기 위해서는 이들을 각각 사이(四夷)의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가능하다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을 빗대어 김식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여 자조하였던 것이다. “대감,우리가 마침내 산도깨비가 되고 말았소이다그려.” 김식이 말하였던 대로 괴수 중의 괴수인 조광조는 가장 먼 능주로 유배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그 죄상에 따라 한양에서 가까운 거리로 나뉘어져 안치되는 것이다.이렇듯 각각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조정이 안정된다고 교지를 내렸으니 이는 자신들을 사람을 홀리는 산도깨비,즉 이매로 취급하는 처사가 아닐 것인가 하고 김식이 비꼬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식의 태도와는 달리 조광조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신들이 비록 떠나갑니다만 어찌 신들이 주상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들의 처사가 너무 과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정치를 펼쳐보려고 과격할 만큼 열과 성의를 다하였던 조광조 일파의 신진세력들은 끈질기고 조직적인 훈구세력들의 반격으로 마침내 산도깨비로 몰려 변방으로 쫓겨 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기묘사화의 전말인 것이다. 이때가 중종 14년,1519년 11월 17일 아침이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소위 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대개 천성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도 또한 없는 것이 없습니다.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작게는 제도문물(制度文物)이 모두 사람의 힘을 빌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자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당연한 도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업적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며,그 찬란한 빛이 고금을 꿰뚫고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은 나의 마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도리가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환히 비추어야만 하며 잠깐이라도 내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나서 조광조는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야 한다’는 공자사상의 핵심인 ‘근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밝게 드러난 곳에서는 삼가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가짐이 소홀하기 마련입니다.그윽하게 감추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신하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일까지 다볼 수 있습니다.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다 아는 것입니다.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가짐이 소홀하게 되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혼자 있을 때는 꼭 삼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압니다.이러한 나쁜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런 나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드러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추어둘 수가 없으며 마침내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됩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항상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혼미(昏迷)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는 오히려 더욱 근신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추호라도 거짓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는 지극히 선하고,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이 서고 법도가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조광조의 답안은 다음과 같은 끝맺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오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시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要諦)로 삼으십시오.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개월이면 충분하며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 본 뜻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제가 감히 지엄하신 임금님 앞에서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잡으려는 중종에게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즉 하늘의 천성인 명도(明度)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또 하나는 중종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근독(謹獨)의 두 사상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그리고 4년 동안 화려한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4년 만에 이러한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되었으며,마침내 조광조를 숙청 끝에 사사케 하였으니,이는 권력자가 가진 변덕 때문인가,아니면 자신이 곧 정의라는 권력의 환상성 때문인가. 어쨌든 조선 제11대 왕으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그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함으로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무능하고 일관성 없는 통치력으로 유례없는 나라의 대혼란을 초래하였으니,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조심해야할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용,즉 최고의 권력자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소위 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대개 천성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도 또한 없는 것이 없습니다.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작게는 제도문물(制度文物)이 모두 사람의 힘을 빌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자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당연한 도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업적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며,그 찬란한 빛이 고금을 꿰뚫고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은 나의 마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도리가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환히 비추어야만 하며 잠깐이라도 내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나서 조광조는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야 한다’는 공자사상의 핵심인 ‘근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밝게 드러난 곳에서는 삼가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가짐이 소홀하기 마련입니다.그윽하게 감추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신하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일까지 다볼 수 있습니다.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다 아는 것입니다.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가짐이 소홀하게 되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혼자 있을 때는 꼭 삼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압니다.이러한 나쁜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런 나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드러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추어둘 수가 없으며 마침내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됩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항상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혼미(昏迷)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는 오히려 더욱 근신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추호라도 거짓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는 지극히 선하고,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이 서고 법도가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조광조의 답안은 다음과 같은 끝맺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오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시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要諦)로 삼으십시오.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개월이면 충분하며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 본 뜻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제가 감히 지엄하신 임금님 앞에서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잡으려는 중종에게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즉 하늘의 천성인 명도(明度)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또 하나는 중종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근독(謹獨)의 두 사상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그리고 4년 동안 화려한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4년 만에 이러한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되었으며,마침내 조광조를 숙청 끝에 사사케 하였으니,이는 권력자가 가진 변덕 때문인가,아니면 자신이 곧 정의라는 권력의 환상성 때문인가. 어쨌든 조선 제11대 왕으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그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함으로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무능하고 일관성 없는 통치력으로 유례없는 나라의 대혼란을 초래하였으니,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조심해야할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용,즉 최고의 권력자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 황사 맞은날 명태로 씻으세요

    황사가 심할 때는 외출을 삼가는 것이 최고다.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황사가 몰아칠 때마다 집안이나 사무실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득이하게 황사 바람 맞은 날,샤워를 해 보지만 기분은 영 찝찝하다.이럴 때 몸 밖만 씻지 말고 몸 속도 깨끗이 씻어 낸다면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황사가 기승 부릴 때,독성을 ‘뽑아내는’음식 덕 한번 보자. ●몸안 독성 제거엔 명태가 으뜸 황태·북어·동태 등 여러 가지 형태와 맛으로 즐길 수 있는 명태.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저렴하면서 비싼 약재보다 효능 면에서 낫다.명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취 해소에 좋을 뿐만 아니라 몸 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독성을 제거한다.또 알레르기 체질을 개선하고 알레르기로 인한 통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다.봄철 황사와 꽃가루로 고생하는 알레르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명태는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하면서 지방이 적고 콜레스테롤이 거의 없어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명태를 이용해 각종 요리를 만들어 먹어도 좋고 국물이 진하게 우러날 때까지 명태국을 끓여 국물만 냉장고에 따로 넣어 두고 음료수처럼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황사에 좋은 식품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돼지고기다.폐에 쌓인 공해 물질을 중화시켜 주고 체내 중금속을 흡착·배설하는 효과가 크다.돼지고기의 불포화 지방산이 탄산가스를 중화해 폐에 쌓인 공해 물질을 중화시키기 때문이다.황사로 인한 미세 먼지를 많이 마시는 중국인들이 돼지고기를 즐기는 것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식습관인 셈이다. ●독소 씻어내는데 빠질 수 없는 식품,된장 된장은 장을 건강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몸속 여러 불순물과 독소를 씻어내는 식품이다.가공 식품이나 식품 첨가제,방부제 등의 화학물질을 몸에서 걸러준다.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의 독소를 분해하고 니코틴을 체외로 배출시킨다.따라서 이런 된장을 황사로 괴로운 시기에 자주 먹으면 우리 몸속에 유해 물질이 쌓이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차조기·사과·양파 등도 황사철 좋은 음식 한방에서 소엽(잎 부분)·소자(열매)라고 불리는 차조기의 대표적인 효능이 바로 해독작용이다.들깨와 모양이 비슷하면서 자줏빛을 띠는 차조기는 독성을 중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또 차조기의 식물성 섬유 등은 장을 통과할 때 여러 가지 이물질을 대변으로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차조기의 생즙을 마시거나 소엽을 생식 혹은 달여서 마시면 좋다. 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 특히 흡연자에게 필수적인 음식으로 알려진 사과 역시 황사철에 먹으면 좋다.이는 사과의 주요 성분인 펙틴 덕분이다.펙틴은 탄수화물의 한가지로 채소의 섬유질처럼 장의 운동을 자극해 장을 깨끗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성분.장에 젤리 모양의 벽을 만들어 유독성 물질의 흡수를 막는다.특히 펙틴은 알루미늄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효과가 있다. 여러모로 우리 몸에 이로운 역할을 하는 양파는 항알레르기 작용도 한다.그래서 황사철 나타나는 대표적인 질환인 기관지 천식이나 피부발진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다. 이밖에 식이섬유가 유해물질을 해독시키는 미나리,몸 속 독을 분해해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쑥,대표적인 봄나물 냉이 등도 황사철 우리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식품들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 ■ 도움말 이경섭 강남경희한방병원 원장˝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씨줄날줄] 권한대행/이상일 논설위원

    부기관장은 먼저 입을 다스려야 한다.부(副)를 파자(破字)하면 의미가 분명하다.칼(-)아래 입(口)이 있고 입안에 칼(口안에 十)이 있으며 칼을 옆에 두고 서 있다는 뜻이다.국무총리는 행정부 권력 2인자이지만 입단속과 처신을 잘못하면 단칼에 목이 날아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회창 당시 국무총리의 경질이유를 설명했다.“내(대통령)가 외유중인데 총리가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에게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고 장관들에게 대통령과의 독대내용도 보고토록 요구했다.…이 총리는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 꺼려했다.” 민주적 표류형(장면 대통령)이나 소극적 적응형(노태우)보다 특히 가부장형(이승만) 야수형(박정희),승부사적 대통령(김영삼)하에서 총리의 위치는 더욱 약할 수밖에 없다.실제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총리는 국정 실패의 책임을 대통령 대신 지는 ‘방탄총리’,연설문을 대신 읽는 ‘대독총리’,신선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얼굴마담 총리’에 그쳤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 등은 ‘대통령의 성공조건’에서 “우리나라 총리의 권한은 대통령이 위임한 것이지 총리 자신의 공식 권한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DJ정권 초기 김종필 총리는 예외적으로 힘을 갖고 있었다.지난 1999년 7월 청와대에 압력을 넣어, 특검제를 놓고 이견을 빚은 여당인 국민회의 김영배 총재 권한대행(權限代行)을 연임 5시간만에 전격 퇴임시켰다.김 총리의 권력은 총리 파워라기보다 당시 공동여당 지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른 데서 부여받거나 차입한 권력은 취약하기 마련인 것이다.법상 기관이나 그 구성원의 권한을 다른 기관과 사람이 대신 행사하는 ‘권한대행’의 한계가 거기에 있다.국회의 대통령 탄핵 의결이후 고건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국정이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적으로 권한대행자는 대통령의 권한을 모두 대신 행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정책이나 장관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법학계의 다수 의견이다.그렇지 않아도 권력기반이 약한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들 힘을 쓸 수 있을까.아무리 총리가 적극 나서도 대통령의 빈 자리가 깊어보이고 국정이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안치 지음

    술을 좋아했다고 해 주성(酒聖)이었으며,신선 같은 시를 썼다고 해 시선(詩仙)이라 불린 사람.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속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우리가 알고 있는 이백은 이처럼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과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생몰 연대조차 불확실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10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지만,그것들 역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특성을 지닌 난해시여서 시 작품만으론 이백의 일대기를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안치 지음,신하윤·이창숙 옮김,이끌리오 펴냄)은 기이한 상상력과 이단아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던 이백의 일생을 재구성한 전기이자 성당(盛唐)시대의 정치·사회사다.저자(79)는 30여년 동안 이백 연구에 몰두해온 만주족 출신 여성학자.이 책은 이백을 나약한 지식인이나 인생의 패배자로 보는 견해를 부정한다. 이백은 관직을 구하기 위해 평생 유랑했지만,관직을 구걸하지도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다.저자가 보기에 이백은 목말라도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않고,더워도 악목(惡木) 그늘에선 쉬지 않는 한 마리 맹호다.저자는 이백으로 하여금 그토록 고된 유랑생활을 지속하게 한 동인을 ‘세상을 다스리고자’했던 기개와 포부에서 찾는다.경국제세를 향한 이상이야말로 이백의 유랑과 시작(詩作)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정형화된 이백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활인’으로서의 이백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1만 6000원. 김종면기자˝
  • 전지현 따라 봄짱 되기

    그녀가 말한다.“잘 있어,이제 와서 너무 애쓰지마.있을 때 잘 하지 그랬어∼.안녕….”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와 스커트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떠나는 그녀,전지현.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그녀를 붙잡고 싶다.최근 방영된 ‘네이버 카페’ 광고 속에서 그녀는 짧은 20초 동안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떠나는 것처럼 슬픔을 담은 표정과 멀리 홀가분한 여행을 떠나는 듯 즐겁고 설레는 표정으로 사랑스럽게 변신했다. 아름다운 그녀만큼 관심을 끄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지난해부터 패션 트렌드를 주도한 ‘로맨티시즘’이 가득 담긴 발랄하고 깔끔한 그녀의 스타일은 요즘 젊은 세대의 워너비(wannabe)다. 제일기획 이범준 대리는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가 아니라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우아하고 고상하게 이별하는 모습을 연출하려고 했다.”며 “모델의 발랄함이 촬영지 말레이시아 페낭의 부둣가 분위기에 멋들어지게 녹아들면서 가볍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붙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아하고 로맨틱하게 TV광고에서 입은 빨간색 꽃무늬 시폰 블라우스와 보라색 시폰 치마는 모두 직접 제작한 것.(치마가 하늘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라색이다.) 전지현씨 코디네이터 곽정희씨는 “산뜻하고 상큼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찰랑거리는 머리와 어울리는 하늘거리는 소재로 블라우스와 치마를 제작했다.”며 “특히 스커트는 각기 다른 길이를 겹겹이 엮은 레이어드 스타일로 발랄함을 한층 더한다.”고 말했다. 꽃무늬 블라우스는 색상이 밝을수록 더욱 화사하다.스커트는 옐로 그린 핑크 등 파스텔 계열로 선택하면 멋진 로맨틱 룩을 소화할 수 있다.시폰 블라우스+스커트 코디는 웬만한 사람들에게 모두 잘 어울리는 스타일.키가 작은 사람이라면 레이어드 스커트를 무릎이 보일락말락 하는 길이로,블라우스는 몸에 딱 맞게 입는 것이 키가 커보인다. 이번 봄 시즌에 빠질 수 없는 소품인 링클(주름) 머플러,가는 굽의 샌들,꽃무늬 토트백을 준비하면 우아함을 더욱 강조한 로맨틱 룩을 연출할 수 있다.광고속의 샌들은 ‘세르지오 로씨’ 제품으로 40만원대. ●귀엽고 사랑스럽게 지면광고 속에서 볼 수 있는 점퍼+스커트+스니커스,티셔츠+7부바지+조리 코디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로맨틱 캐주얼 룩. 코디전문업체 웹포토21(www.k123.co.kr)의 코디네이터 박소예씨는 “따뜻한 봄날에 가볍게 나들이하기 좋은 스타일은 발랄함의 대명사 플리츠 스커트(주름치마)와 가벼운 7부 바지”라며 “올 봄 가장 많이 사용되는 화이트를 기본으로 핑크 그린 아쿠아블루 등 포인트 색상을 이용해 코디하면 좋다.”고 설명했다. 프릴(주름장식)이 가득한 미니스커트에 무릎길이의 니렝스 스타킹을 함께 연출하는 것도 추천 코디.스커트에는 편한 스니커스를,7부 바지에는 조리가 어울린다.사랑스러움을 더욱 강조해줄 챙이 넓은 카플린 모자를 이용하면 효과 만점의 큐트 로맨틱 룩이 된다. 광고 속의 니트티,카디건,주름치마,무릎길이 티셔츠,조리는 현지에서 이틀동안 돌아다니면서 얻어낸 결과물이라고.7부 바지는 크리스챤 디올 카프리 팬츠(50만원대),스니커스는 아디다스(8만원대). 최여경기자 kid@˝
  • [조성완의 생생러브] ‘해결사’ 좋아하다…

    생활습관병이 늘어나면서 약에 파묻혀 사는 인구도 덩달아 늘고 있다.당뇨병,고혈압,관절염,전립선비대증 등에 좋다고 성인들이 달고 사는 치료약 말고도 건강에 좋다는 영양제,건강보조식품 등 헤아릴 수 없는 약들이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약 한 알로 모든 병이 다 나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병마다 필요한 성분이 달라 이 약,저 약 늘려가며 서글프게 사는 게 우리의 삶이다.아주 가끔은,“원시인들은 약없이도 살았잖아.” 하고 애써 약을 외면하려 해보지만,어쩌다 몸이 아파 약의 위대한 효과를 경험하게 되면 결국 ‘약 예찬론자’로 바뀌고 만다. 의대에서 ‘약리학’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약은 독이다.’라는 경구를 만난다.‘모든 약은 인체가 필요한 기능을 발휘하게 하지만,다른 기관에는 심각한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그래서 반드시 약을 쓸 때는 전문가의 조언을 철저히 따라야 하고,특히 장기 복용해야 하는 약일수록 환자 자신이 반쯤 전문가가 되어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먹는 게 좋다.그저 먹으면 아픔이 가시고,병이 낫는다는 생각만으로 자신이 약을 구하거나 용량을 마음대로 바꾸다가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발기부전도 이제는 약으로 다스리는 시대다.이런 약들은 엄격히 말해 발기 기능을 근본적으로 고쳐주는 치료제라기보다 성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해결사’ 격인데,어느새 중년 이후 남성들의 복용약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가 있다.작년 말부터는 가짓수도 늘어 어느 것이 더 강력하고 자신한테 맞는지에 대한 문의도 끊임없다. 두달 전 쯤 일이다.개인사업을 하는 50대 초반의 남성이 찾아와 발기부전에 관해 상담했다.“다른 병원에서 검사도 해보고,약도 계속 먹어 왔어요.자주 오기 어려우니 100알만 처방해 주세요.” “그 많은 양을 혼자 다 쓰시게요?” “사업하다보니 접대할 때도 좋고….” 약이 보편화되면서 생긴 현상이지만,약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으면서 “써 보니까 좋더라.”며 다른 사람에게도 생각없이 나눠주고 있다는 얘기다.그러나 심혈관계에 작용하는 이런 약들은 반드시 의사의 점검 하에 사용하지 않으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실제로 일본에서는 상당수 사망자도 나왔다고 설명하고,본인에게 필요한 만큼만 처방해 줬다. 남자들이 발기부전 치료제를 술자리에서 친구끼리 주고받거나 심지어 술집의 경영 도구로도 쓰인다는 말이 들린다.이 역시 위험한 일이다.자신에게 잘 맞고 안전한지를 반드시 의사와 상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명심하자.‘약은 잘 쓰면 신비의 묘약이 되지만,잘못 쓰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명동이윤수비뇨기과 공동원장˝
  • 儒林(48)-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가 쓴 답안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가 전하께서 내신 문제 가운데서 ‘공자께서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하여 목적을 이룰 수 있다.’하는 데서부터 ‘쉽게 논할 수는 없다.’는 곳까지를 삼가 엎드려 읽어보았습니다. 무릇 한 사람에서 천만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며,한 가지 일에서 천만가지 일에 이르기까지 그 일이 실로 복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마음(心)’이라는 것과 ‘도(道)’라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가 아닌 것이 없는 법입니다.그러므로 천만의 사람과 천만의 일들이 비록 서로 다르고 복잡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통하는)도와 마음이 하나인 것은 하늘의 근본 이치란 원래 하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천하를 함께한다는 가르침으로써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이끌고 천하를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감화시키면 천하의 마음도 내 마음의 올바름에 감화되어 감히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으며,이를 나의 도리로 인도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이 가르침의 크고 넓음에 감화되어 선한 데로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나의 도리와 마음이 성실한가,못 한가에 따라 나라가 잘 다스려질지 아닐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입니다.그러므로 천지의 도와 만물의 마음은 모두 공자의 도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천지의 마음과 음양(陰陽)의 감응(感應)도 역시 이 공자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조화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공자의 사상이야말로 ‘천지의 도’임을 역설함으로써 답안을 시작한 조광조의 긴 문장을 모두 전재할 수는 없으나 조광조의 정치관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만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법도를 정하고 기강을 세우려면 대신을 공경하고 그에게 정치를 위임해야만 합니다.그래서 반드시 대신을 임명하고 그에게 정치실무를 위임해야만 정치의 근본이 서는 것입니다.비유하자면 임금은 하늘과 같고 신하들은 사계절과 같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행한다 하나 사계절의 운영이 없다면 만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임금이 스스로 정치를 다 떠맡는다 하더라도 대신들의 보좌가 없다면 어떠한 교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아니 교화가 이루어지지 못할 뿐이 아닙니다.하늘이 스스로 행하고 임금이 스스로 정치를 다 맡는 것은 하늘이 되고 임금이 되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대신을 그 자리에 임명하셨으면서도 그들에게 단지 문구나 따지는 사소한 일만 맡기고 소인배들의 말만 믿고 대신들을 믿지 않으신다면 위로는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를 구할 수 없으며,아래로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그러면 군신의 도리는 사라질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성군들과 현명한 재상들은 반드시 정성스러운 뜻을 다하여 서로를 믿고 또 서로가 해야 할 바를 다했기 때문에 군신이 함께 노력하여 광명정대한 큰 공업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엎드려 비옵건대 전하께오서도 진실로 대신들을 공경하시고 그들에게 정치 실무를 위임하시어 기강과 법도를 세우시고 정하시어 훗날 나라를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이 되어 큰 법도가 행하여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자신의 정치사상인 치지주의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그것은 군왕 스스로 정치적 모럴에 충실한 도덕성 재확립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림으로서의 주장이었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거칠고 무식한 제가 어찌 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공자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를 밝히는 것(明道)’에 지나지 않으며 ‘학문하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는 것(謹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이 ‘명도’와 ‘근독’ 두 가지를 가지고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광조는 마침내 군왕이 갖춰야 할 군자로서의 두 가지 덕목인 ‘명도’와 ‘근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기 시작한다.˝
  • 儒林(48)-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8)-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가 쓴 답안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가 전하께서 내신 문제 가운데서 ‘공자께서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하여 목적을 이룰 수 있다.’하는 데서부터 ‘쉽게 논할 수는 없다.’는 곳까지를 삼가 엎드려 읽어보았습니다. 무릇 한 사람에서 천만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며,한 가지 일에서 천만가지 일에 이르기까지 그 일이 실로 복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마음(心)’이라는 것과 ‘도(道)’라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가 아닌 것이 없는 법입니다.그러므로 천만의 사람과 천만의 일들이 비록 서로 다르고 복잡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통하는)도와 마음이 하나인 것은 하늘의 근본 이치란 원래 하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천하를 함께한다는 가르침으로써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이끌고 천하를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감화시키면 천하의 마음도 내 마음의 올바름에 감화되어 감히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으며,이를 나의 도리로 인도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이 가르침의 크고 넓음에 감화되어 선한 데로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나의 도리와 마음이 성실한가,못 한가에 따라 나라가 잘 다스려질지 아닐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입니다.그러므로 천지의 도와 만물의 마음은 모두 공자의 도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천지의 마음과 음양(陰陽)의 감응(感應)도 역시 이 공자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조화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공자의 사상이야말로 ‘천지의 도’임을 역설함으로써 답안을 시작한 조광조의 긴 문장을 모두 전재할 수는 없으나 조광조의 정치관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만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법도를 정하고 기강을 세우려면 대신을 공경하고 그에게 정치를 위임해야만 합니다.그래서 반드시 대신을 임명하고 그에게 정치실무를 위임해야만 정치의 근본이 서는 것입니다.비유하자면 임금은 하늘과 같고 신하들은 사계절과 같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행한다 하나 사계절의 운영이 없다면 만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임금이 스스로 정치를 다 떠맡는다 하더라도 대신들의 보좌가 없다면 어떠한 교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아니 교화가 이루어지지 못할 뿐이 아닙니다.하늘이 스스로 행하고 임금이 스스로 정치를 다 맡는 것은 하늘이 되고 임금이 되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대신을 그 자리에 임명하셨으면서도 그들에게 단지 문구나 따지는 사소한 일만 맡기고 소인배들의 말만 믿고 대신들을 믿지 않으신다면 위로는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를 구할 수 없으며,아래로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그러면 군신의 도리는 사라질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성군들과 현명한 재상들은 반드시 정성스러운 뜻을 다하여 서로를 믿고 또 서로가 해야 할 바를 다했기 때문에 군신이 함께 노력하여 광명정대한 큰 공업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엎드려 비옵건대 전하께오서도 진실로 대신들을 공경하시고 그들에게 정치 실무를 위임하시어 기강과 법도를 세우시고 정하시어 훗날 나라를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이 되어 큰 법도가 행하여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자신의 정치사상인 치지주의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그것은 군왕 스스로 정치적 모럴에 충실한 도덕성 재확립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림으로서의 주장이었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거칠고 무식한 제가 어찌 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공자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를 밝히는 것(明道)’에 지나지 않으며 ‘학문하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는 것(謹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이 ‘명도’와 ‘근독’ 두 가지를 가지고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광조는 마침내 군왕이 갖춰야 할 군자로서의 두 가지 덕목인 ‘명도’와 ‘근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기 시작한다.
  • 儒林(4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권력이 가진 속성 중에서 변덕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중독과 환상이다.권력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무서운 집착을 보인다.권력이 바로 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 권력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으려 하며,이로 인해 권력자는 독재자로 변화되어 간다.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권력자가 자신의 행동이 곧 정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권력의 통치술이 가장 올바른 정도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권력자들은 정의라는 이름 하에 권력을 휘두르게 되며,이것이 바로 권력의 횡포이다.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서 기묘사화를 일으킨 중종도 이러한 권력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산군을 쫓아내는 반정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중종.그도 처음에는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훈구파들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그후 10년 동안 중종은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강력한 친위세력을 조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이러한 중종의 의지는 중종 10년 8월(1515년)에 있었던 알성시(謁聖試)에서 중종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문과시험을 주재한 데서 잘 드러난다.시험문제는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지만,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그 뜻의 규모와 정치를 베푸는 방안에 관하여 공자께서는 시행하기 전에 먼저 작정한 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주나라 말기는 나라의 기강(紀綱)과 법도(法度)가 이미 땅에 떨어졌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공자께서 3년 이내에 (바른 정치를 펴)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셨다.그렇다면 (공자께서 등용되었다면)그로부터 3년 후의 결과는 어떠하겠는가.우리는 정말 공자의 다스림에 이상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볼 수가 있었겠는가.성인이 스쳐 지나가거나 머무르는 곳에는 반드시 교화(敎化)가 이루어진다는 묘한 이치를 쉽게 논할 수는 없다.” 중종은 자신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내가 왕이 될 만한 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종(祖宗)의 기업을 잇고 정치에 임하여 좋은 성과를 소망하여 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였으며,나라의 법도도 정해지지 못하였다.그러니 어찌 정치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으리오.(이 자리에 모인)여러 성균관 학생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이므로 모두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여기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국을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중종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아 이상적인 정치를 펴고 싶은 군왕의 충정을 갖고 있었다. 이에 조광조는 그가 남긴 문장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며 논리적인,다음과 같은 답안을 통해 알성시에서 차석으로 급제한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큰 것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기셨으며,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 儒林(4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권력이 가진 속성 중에서 변덕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중독과 환상이다.권력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무서운 집착을 보인다.권력이 바로 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 권력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으려 하며,이로 인해 권력자는 독재자로 변화되어 간다.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권력자가 자신의 행동이 곧 정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권력의 통치술이 가장 올바른 정도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권력자들은 정의라는 이름 하에 권력을 휘두르게 되며,이것이 바로 권력의 횡포이다.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서 기묘사화를 일으킨 중종도 이러한 권력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산군을 쫓아내는 반정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중종.그도 처음에는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훈구파들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그후 10년 동안 중종은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강력한 친위세력을 조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이러한 중종의 의지는 중종 10년 8월(1515년)에 있었던 알성시(謁聖試)에서 중종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문과시험을 주재한 데서 잘 드러난다.시험문제는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지만,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그 뜻의 규모와 정치를 베푸는 방안에 관하여 공자께서는 시행하기 전에 먼저 작정한 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주나라 말기는 나라의 기강(紀綱)과 법도(法度)가 이미 땅에 떨어졌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공자께서 3년 이내에 (바른 정치를 펴)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셨다.그렇다면 (공자께서 등용되었다면)그로부터 3년 후의 결과는 어떠하겠는가.우리는 정말 공자의 다스림에 이상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볼 수가 있었겠는가.성인이 스쳐 지나가거나 머무르는 곳에는 반드시 교화(敎化)가 이루어진다는 묘한 이치를 쉽게 논할 수는 없다.” 중종은 자신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내가 왕이 될 만한 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종(祖宗)의 기업을 잇고 정치에 임하여 좋은 성과를 소망하여 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였으며,나라의 법도도 정해지지 못하였다.그러니 어찌 정치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으리오.(이 자리에 모인)여러 성균관 학생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이므로 모두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여기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국을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중종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아 이상적인 정치를 펴고 싶은 군왕의 충정을 갖고 있었다. 이에 조광조는 그가 남긴 문장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며 논리적인,다음과 같은 답안을 통해 알성시에서 차석으로 급제한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큰 것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기셨으며,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 儒林(4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김정의 지적은 정확하였다. 날이 새어 문초담당관이었던 대신들로부터 간밤에 술이 취해 만용을 부린 조광조의 행태를 전해들은 중종은 불과 같이 노하였다.이 분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어서 실제로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린 것과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비교적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이장곤과 홍숙이 공초를 올려 ‘저들이 모두 통곡하며 성명(聖明)만을 믿고 나랏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신들도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만약에 이들을 죄로 다스리자 하신다면 만세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변론을 하였으나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도 홀로 빈청을 지킨 채 눈물을 흘리며 거듭 탄원하였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승지들은 그저 바른 의론을 따랐을 뿐이며,조광조 일파도 추호의 사심없이 다만 옛사람의 책을 읽고 지치(至治)를 주장하여 간혹 과격한 일이 있었을지언정 그렇게 큰 영향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태평성대에 선비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이는 역사를 더럽힐 것입니다.또한 이자(李)는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려 처결토록 하소서.” 그러나 김정의 변론도 정광필의 읍소도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중종은 단호하게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이 ‘중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가 처음부터 나랏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을지언정 조정에서 이같이 처리키로 하였으니 이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중종은 최후의 교지를 내린다. “조광조·김식·김구는 각각 참형에 처하고,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장 일백대에 유(流:유배형) 삼천리로 정하도록 하라.” 마침내 조광조에게 참형이 확정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잠깐,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결정될지 모르고 마지막 순간에도 술에 취해 만용을 부렸던 조광조에게 ‘조광조가 역린을 건드리고 있다.’고 비평한 노대신 김정의 말을 잠깐 음미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용은 상상 속에 나오는 신령한 동물로,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기는 상서로운 짐승인데,예로부터 제왕에 비유되어 왔다.이렇듯 용은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좇아 그것을 쟁취하려 하는데,분명히 말해서 권력,즉 용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다만 군왕이 용과 같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처한 자리에서 비롯된다.무릇 권력이라 함은 사람이 가진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그가 처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권력을 갖게 되면 그것이 자신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 때문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권력이 인간들에게 마(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군주,뛰어난 리더는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라도 그 권력에 취하지 아니하고,그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져 버릴 신기루임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마치 날카로운 칼끝에 발라져 있는 꿀과 같은 것이어서 함부로 핥으려다가는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종도 어리석어 권력의 속성을 깨닫지 못하였고,조광조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변덕을 조심하지 않았다. 변덕은 권력이 가진 속성 중의 하나이다.용이 구름과 빗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듯 권력 또한 그것을 가진 자의 구름과 비,즉 변덕 속에서 수많은 비극을 초래한다.따라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평상심(平常心),그리고 일관성인 것이다.˝
  • [패션+α]

    ●태평양 헤라는 먹고 바르는 보디케어 상품 ‘에스라이트’를 건강식품 브랜드 ‘비비프로그램’과 동시에 선보인다.‘비비프로그램 에스라이트 슬리머(180정)’는 지방흡수를 저하시키며 영양을 보충해주고,‘헤라 에스라이트 디자이너(250㎖)’는 신체곡선과 피부를 부드럽고 탄력있게 가꿔준다.방문판매용.각각 5만원. ●금비화장품은 20대 초반을 겨냥한 향수 ‘에르메스 메르베이’를 출시했다.오렌지,참나무 추출물 등이 들어있어 상큼한 향을 낸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50㎖,8만 6000원선. ●프랑스 필기구 브랜드 워터맨은 여성을 위한 펜 ‘오다스’를 선보였다.다양한 패턴에 파랑 갈색 금색 초록 빨강 등 5가지 색상에 세련된 디자인을 그려넣어 화이트데이 선물로도 손색이 없다는 게 회사측 설명.8만원선.(02)554-0911. ●애경산업 포인트는 보성 녹차로 만든 ‘녹차 진(眞)’을 내놓았다.화장이 잘 지워지고 피부를 투명하게 가꿔주는 클렌징 화장품.크림 340㎖ 1만 1000원선,로션 300㎖,폼 175㎖,립&아이 리무버 105㎖ 4종 1만 1000원선.080-024-1357. ●유니레버코리아는 기존의 ‘폰즈 더불 화이트’에 미백뿐 아니라 자외선 차단 기능까지 첨가해 새롭게 출시했다.토너 150㎖·에멀전 130㎖ 2만 6000원선,에센스 기획세트 6만 4000원선,크림 기획세트 5만 4000원선.080-041-7200. ●LG생활건강은 ‘라끄베르’의 새로운 모델로 고소영씨를 선정,1년 전속 계약을 맺었다.첫 광고는 ‘라끄베르 피토가든 화이트’편으로 이달말부터 방영되며,‘라끄베르와 상의하세요.’라는 문구도 다시 활용할 계획.˝
  • 儒林(4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김정의 지적은 정확하였다. 날이 새어 문초담당관이었던 대신들로부터 간밤에 술이 취해 만용을 부린 조광조의 행태를 전해들은 중종은 불과 같이 노하였다.이 분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어서 실제로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린 것과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비교적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이장곤과 홍숙이 공초를 올려 ‘저들이 모두 통곡하며 성명(聖明)만을 믿고 나랏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신들도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만약에 이들을 죄로 다스리자 하신다면 만세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변론을 하였으나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도 홀로 빈청을 지킨 채 눈물을 흘리며 거듭 탄원하였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승지들은 그저 바른 의론을 따랐을 뿐이며,조광조 일파도 추호의 사심없이 다만 옛사람의 책을 읽고 지치(至治)를 주장하여 간혹 과격한 일이 있었을지언정 그렇게 큰 영향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태평성대에 선비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이는 역사를 더럽힐 것입니다.또한 이자(李)는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려 처결토록 하소서.” 그러나 김정의 변론도 정광필의 읍소도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중종은 단호하게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이 ‘중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가 처음부터 나랏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을지언정 조정에서 이같이 처리키로 하였으니 이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중종은 최후의 교지를 내린다. “조광조·김식·김구는 각각 참형에 처하고,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장 일백대에 유(流:유배형) 삼천리로 정하도록 하라.” 마침내 조광조에게 참형이 확정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잠깐,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결정될지 모르고 마지막 순간에도 술에 취해 만용을 부렸던 조광조에게 ‘조광조가 역린을 건드리고 있다.’고 비평한 노대신 김정의 말을 잠깐 음미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용은 상상 속에 나오는 신령한 동물로,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기는 상서로운 짐승인데,예로부터 제왕에 비유되어 왔다.이렇듯 용은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좇아 그것을 쟁취하려 하는데,분명히 말해서 권력,즉 용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다만 군왕이 용과 같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처한 자리에서 비롯된다.무릇 권력이라 함은 사람이 가진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그가 처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권력을 갖게 되면 그것이 자신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 때문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권력이 인간들에게 마(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군주,뛰어난 리더는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라도 그 권력에 취하지 아니하고,그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져 버릴 신기루임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마치 날카로운 칼끝에 발라져 있는 꿀과 같은 것이어서 함부로 핥으려다가는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종도 어리석어 권력의 속성을 깨닫지 못하였고,조광조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변덕을 조심하지 않았다. 변덕은 권력이 가진 속성 중의 하나이다.용이 구름과 빗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듯 권력 또한 그것을 가진 자의 구름과 비,즉 변덕 속에서 수많은 비극을 초래한다.따라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평상심(平常心),그리고 일관성인 것이다.
  • “김운용에 20년간 돈 뜯겼다”

    김운용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에 대한 검찰수사 과정에서 65억여원의 현금과 50여점의 보석류가 발견된 것과는 정반대로 김 부위원장은 평소 곤궁한 생활을 한탄하며,스포츠용품 업체에서 20여년간 수시로 돈을 받았다는 법정 진술이 나왔다. 김 부위원장에게 5억 8000여만원을 건넨 혐의(배임증재)로 불구속 기소된 아디다스코리아 김현우 명예회장은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김병운)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날 공판에서 김 피고인은 “김 부위원장은 항상 ‘돈이 없다.’며 각종 경비를 부담하도록 했고,밥값·술값도 전혀 지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김 피고인은 지난 83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으로 활동할 때 김 부위원장을 처음 만났다.고교 선배인데다 스포츠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터라 그는 김 부위원장과 가깝게 지냈다.김 부위원장은 만날 때마다 ‘나는 가난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에 김 피고인은 술값·밥값으로 100만∼200만원씩 제공했다.이에 김 부위원장이 이끌던 대한태권도협회·세계태권도연맹과 가까워져 공인·후원계약을 맺었다.해마다 회사 전체 매출의 8%인 70억원을 판매했다. 그러나 지난 95년 위기가 찾아왔다.김 부위원장의 아들 정훈씨가 아디다스 본사에서 스포츠물품을 가져간 뒤 대금 11만 달러를 지불하지 않은 탓이다.본사는 정훈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고,김 부위원장은 화가 나 “아디다스에 (계약을) 주지 마라.”고 지시했다.당시 김 부위원장은 협회장도 아니었지만 막강한 영향력 탓에 프로스펙스로 계약이 넘어갔다. 다급해진 김 피고인은 아디다스 본사를 설득,소송을 취하했다.또 김 부위원장과 관계 개선을 위해 태권도 관련 행사의 후원도 도맡았다.그 결과 97년 계약권은 다시 아디다스코리아로 넘어왔다.이후 김 부위원장은 더 많은 ‘개인후원금’을 요구했다.97년 2월∼2000년 1월 김 피고인은 5억 8900만원을 줬다. 김 피고인은 “검찰 조사에서 김 부위원장 집에서 발견된 수억원의 돈다발과 외화 사진을 보니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는 김 부위원장에게 건넨 돈은 청탁성 없는 ‘개인후원금’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은주기자 ejung@˝
  • [초등학교 ‘햄버거 회장’] 혼탁 배우는 선거 실태와 문제점, 유래-회장의 유래

    종래의 학급 ‘반장’은 1998년 이후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회장’‘실장’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게 바뀌었다.아직 ‘반장’으로 부르는 학교도 있다.자치 어린이회를 꾸리는 일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는 어린이회 ‘의장’ 역할을 하는 ‘회장’과 행정업무를 맡는 ‘반장’을 구분하기도 한다.학교에 따라 한 명의 선출직 ‘회장’ 아래에 남녀 각 한명씩의 선출직 ‘부회장’을 두기도 하고,남녀 각 한명이 선출직 복수 회장을 맡기도 한다.임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한 학기다.그러나 맡은 일은 선생님을 대신해 출석을 부르거나 점수를 매기는 등 대부분 예전의 반장과 큰 차이가 없다. 명칭과는 상관없이 학급의 대표를 뽑는 제도의 유래는 학자마다 해석이 분분하다.일제시대의 잔재라거나 조선시대 서당에서 나왔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하지만 회장 제도가 그 유래와 관계없이 일제시대를 거치며 군국주의에 기초한 권위주의에 물들어 본래의 취지와 달리 크게 왜곡됐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일제 시대의 산물” 교육학자 조화섭(46·한국임용고시학원 강사)씨는 “일제시대 학교에서 조별로 조장을 뒀던 것이 오늘날 학급 회장의 유래”라면서 “군국주의 시대,국민을 획일적으로 통솔하기 위해 ‘장’을 만들고 교사의 통제권과 권위를 일정 부분 부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반장이나 학급회장이 교육 제도의 산물이 아니라,교사가 한 학급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교사의 행정 업무를 일부 도맡는 회장의 역할도 여기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조씨는 “회장은 또래의 학생끼리 선출하기 때문에 ‘민주적’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회장이라는 자리가 또래 위에 수직적으로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도 권위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면서 “한두 명만 학급회장을 ‘독식’해 학생끼리 위화감을 조성하는 현행 제도를 폐지해 모든 학생이 돌아가며 한번씩 회장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접장이 기원” 교육학 박사 구평회(44·학원경영)씨는 “학급회장은 학생과 교사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동서양에 늘 존재해 왔다.”고 설명했다.그는 조선시대 서당의 ‘접장(接長)’에서 회장의 유래를 찾았다.한 훈장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 나이 많고 학식이 풍부한 ‘접장’이 하급자를 가르쳤듯 회장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 일제시대를 거치며 크게 왜곡됐다.”고 개탄했다.구씨는 “일제시대 학생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려면 무엇보다 효율성을 따져야 했다.”면서 “교사가 학생을 권위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권위를 내세우다 보니 중간자적인 학급회장도 권위주의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구씨는 “3월에 뽑은 회장이 한 학기나 1년 동안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프로젝트별로 대표를 뽑는 외국처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훈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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