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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칠산바다 지키는 수성당할머니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칠산바다 지키는 수성당할머니

    ●깎아지른 절벽위 여신모신 성소가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새삼 에게해와 그리스신화가 관심을 끈다.아테네 도심의 파르테논 신전 못지않게,아티카반도 끝자락 수니온곶(串)의 포세이돈 신전도 낙조 풍경과 어울려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포세이돈 신전.에게해의 찬란한 석양이 비끼는 천애 절벽에 각인된 역사와 신화의 지문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신화시대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바다의 신 포세이돈.그의 뜻에 따라 질풍과 노도가 일어나니,바다의 모든 것이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포세이돈의 황금전차가 말발굽 요란하게 바다 위를 가로지를라치면 거센 폭풍은 간데없고 잔잔한 고요가 그를 옹위했다.원형은 파괴됐으나 15개의 도리아식 원주는 고스란히 남아 에게해의 험한 바닷길을 아우르고 있다.지금도 이 신전 앞을 지나는 그리스 어부들은 고개 숙여 예를 표한다.첨단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뱃길에 나선 사람은 누구나 포세이돈의 신화적 영력에 깊은 외경과 간절한 기원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도국가 그리스의 끝자락에 바다의 신전이 있다면,같은 반도국가인 우리의 사정은 어떠할까? 우리라고 왜 바다신을 모신 신전이 없을까만,남의 떡만 크게 보이고,내 것은 초라하게만 여기는 문화사대주의의 병폐가 여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나이아가라폭포의 웅장함에 취해 박연폭포 정도는 ‘애들 장난’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필자가 줄 수 있는 최선의 해답은 ‘우리 것부터 좀 챙겨 보라.’는 충고이다.포세이돈이 중요하다면,중국의 여자 해신 마조(祖)도 알 필요가 있으며,더불어 ‘문화 종다원성’을 위해서라도 한반도 바로 이 땅의 수성당할머니를 생각해야 한다. ●서해바다 거닐며 거친 물길 다스려 해신은 세계 어느 바다에나 있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변산반도의 끝자락 격포 수성당은 우리 해신의 위엄과 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신성(神聖)의 성소(聖所) 격이다.우선,위치가 눈길을 끈다.잘록한 자루처럼 돌출한 곶의 깎아지른 절벽을 ‘성소’로 선택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수성당 길목은 해안초소를 설치해 민간인 출입을 막는 군 작전구역이었다.그 후 전주박물관에서 이곳 일대를 발굴한 결과,고대의 제사터임이 확인되었다.민간의 구술(口述)전승이 이루어진 이곳에서 확인 발굴이 이루어졌음은 우리 문화에서 구술이 지닌 실증적 힘을 웅변한다.트로이문명이 애초에 구술과 신화에서 출발했다가,훗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된 것과 다를 게 없다. 수성당은 시누대가 창검처럼 밀집해 빼곡하게 들어찬 단애(斷崖)에 숨어 있다.바닷물이 밀물처럼 다가와 이 안에 들면 절벽에 서있다는 느낌을 잊게 된다.그러나 자칫 한발 잘못 내디디면 벼랑으로 곤두박질이다.오금이 저리도록 가파른 곶.벼랑 아래로는 여근처럼 갈라진 해식동굴이 있어 조수가 드나들며 보는 이의 현기증을 자아낸다.일명 용굴 혹은 여우골이라 불리는 이곳이 수성당할머니의 거처이다.서해 어업의 중심기지였던 위도가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관망대에 해당하는 곳으로,임진왜란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할머니가 무찔렀다는 전설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 ‘개양할미’라고도 불리는 수성당할머니는 딸만 여덟을 낳아 각도에 한명씩 시집보냈다고 전해진다.더러는 그녀가 딸 일곱을 낳았으며,그들이 수성당에서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일곱 섬 지킴이가 되었다고도 한다.수성당 할머니는 엄청나게 큰 키로 굽나무신을 신고 저벅저벅 서해바다를 걸어다녔다.위험한 곳에는 표지를 남겨 어부들이 해를 입지 않게 돌보았으며,심지어 수심까지 재어 어부들이 알도록 했다.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보여준 ‘서해 창건주’의 전설이므로 이 말이 맞느냐,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변산 격포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초에 정성껏 제물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다.세상이 바뀌어 서해 여신으로서의 지위는 볼품없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때의 마을굿 양식이 여전히 잔존해 있으며,무신도도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불타고 없다.‘1804년 상량(上樑)’이라고 적힌 상량문으로 미뤄 적어도 200여 년 전에 이 신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신당이 어찌 사람의 신탁(神託)의식과 같은 나이일 수 있겠는가.이 상량문과 무관하게 훨씬 이전에 신당이 있었고,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수성당할머니가 살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수성당은 변산반도 일대를 지켜주는 ‘지역신’으로 ‘강등’되었으나,그 해양문화적 원형은 바다를 지켜주는 거녀(巨女)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제주도의 설문대나 전국에 골고루 분포한 마고할매는 수성당할머니의 문화적 원형이다.마고나 설문대가 순 토속어인 반면 수성(水星)이라는 한문투 용어가 후대에 덧 씌워졌을 뿐이다.즉,마고식의 해양문화 원형질에서 수성이란 지역적 여신이 탄생한 것이다. ●거대한 치맛자락에 가려 어둠 내리고 사실,우리의 의식에는 가부장적 남신들만 가득 차 있었다.그러나 바다만은 달라 그곳은 늘상 여신들의 무대였다.바다는 모든 생명체가 탄생한 최초의 자궁이다.그런데도 기이하게 바닷가에서 여성은 사실상 금기의 대상이다.지금은 그런 금기의식이 많이 희석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권(神權)만큼은 여신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여신을 숭앙하는 바다’의 신권과,‘여성을 배척하는 바다’의 생활이란 두 측면은 바다문화를 둘러싼 대단한 역설을 설명해 주는 단초가 된다. 수성당에서 서쪽을 굽어보니 초여름 햇살을 받은 칠산바다가 싱싱한 비늘을 반짝이며 꿈처럼 펼쳐져 있다.그곳에 서서 신화적 상상의 날개를 펼쳐본다.수성당에 기대 칠산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의 물길을 따라 당할머니가 들어왔다.그녀는 저물어 수평선 아래로 잠겨드는 해를 안간힘으로 붙들려고 했으며,그러다가 이른 저녁의 별밭을 거닐어 내게 이른 것이다.그 덕분에 칠산바다는 여름의 붉은 황혼에 늦도록 젖어 있었다.흡사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가 첫마디를 속삭였을 때처럼 그렇게 붉게. 그녀는 깊은 바닷물에 겨우 발목만 적신 채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고 있다.아주 천천히,우리 역사의 태고적 울림은 그렇듯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서해바다가 아직 형성되지 않아 우리와 중국이 육지로 맞붙어 있던 그 옛날의 땅을 디디고 걸었음직한 그런 발걸음이다.생각해 보면 수성할머니 같은 거녀는 한반도 탄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중요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여신들은 늘 바닷가를 뚜벅뚜벅 걸어다녔다.풍랑이 일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깊었다.깊은 곳으로 발을 잘 못 내디뎌 빠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젖었다.끝모르게 큰 여신들이었지만 치맛자락이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그녀는 젖은 치마를 벗어 산 위에 펼쳐 널었다.산에서는 난리가 났다.치마를 널자 지상이 온통 컴컴해졌고 동물들은 갑자기 맞은 밤이 두려웠을 것이다. 여신은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소피도 여러번 보았다.여신의 오줌이 물길을 만들어 곳곳에 강이 생겨났다.여신의 똥은 군데군데 섬으로 남았다.저녁 무렵에 찬 이슬을 맞자 마고는 기침을 했다.그러자 폭풍이 불어 풍랑이 일었고,산과 들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다.이윽고 밤이 왔다.여신은 하늘의 별을 만지고,달을 껴안고 그렇게 외로운 밤을 지냈다.참으로 외로웠다.사람이 탄생하기 전이라 그녀를 즐겁게 할 미물 인간이 아직 없었던 탓이다. ●위도 핵폐기장엔 인간사 갈등 고스란히 얼마나 컸으면 바다를 걸으며 치맛자락만 적셨을 뿐일까.참으로 막강한 여성의 위력이다.우리 신화의 들머리를 차지하는 마고,수성당할머니 등은 지모신(Great Mother,Mother Goddess)이다.수성당을 찾아온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잃어버린 여성의 힘.거녀로서 세상을 창조하는 거대담론을 이끌어 온 문화적 원형질을 당할머니에게서 발견한다.현대인들은 그만 그 거대한 신화적 힘,자연친화적 순응을 거부하고 말았으니,수성당 코앞의 새만금간척지나 위도 핵폐기장 같은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갈등이 그것이다. 당할머니가 바다를 걷는 발자국소리를 듣노라니 상상력은 멀리 상전벽해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왜 하필이면 국가적인 큰 제사터가 수성당에 자리잡고 있었을까.우리는 그동안 ‘전북지역은 곧 백제문화권’이라는 도식적 편견에 함몰돼 있었다.전주박물관 발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유병하는 이를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마한,백제,가야,왜의 노천제사라고 주장했다.3세기 후반에는 마한,4세기는 마한과 백제,5세기 전반과 6세기 전반은 백제,가야,왜의 제사가 이루어진 듯하다. 마한,백제는 그렇다치고 멀리 가야와 왜의 유물이 나온 사실은 흥미롭다.백제 땅으로 들어서자면 반드시 변산반도를 돌아,고군산열도를 비집고 들어가,금강하구로 들어서야 했을 것이니,수성당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해양의 길목이다.위도나 고군산에서 바라볼 때,곶의 신비로운 장소에 신당을 세우고 해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올렸으리라.채석강과 적벽강이 펼쳐진 천혜의 절경에 자리잡고 있으니 신들조차도 비경을 선호했음이다. 근년까지도 풍어기(豊漁旗)가 올라가던 수성당 앞바다에서 역사시대의 제사가 올려졌고,더 앞선 시대에는 마고할머니가 걸어다녔다는 사실에서,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수성당 신앙의 해양문화적 지속성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이렇듯 바다에는 인간 이전에 여신들도 살고 있었던 것이니,‘바다에 살어리랏다‘에서 어찌 이들을 모른 채 할 수 있을 것인가.
  • 사이좋게 풀을 먹고 사는법

    두 마리의 염소가 있었다.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들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러 나갔다.그런데 각자가 맛있게 보이는 풀을 뜯어먹기 위해 힘을 쓰다 보니 풀 한포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이 빠지고 말았다.두 염소는 머리를 마주대고 생각한 끝에 머리를 같이 해서 한 마리가 맛있게 보인다고 하는 풀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다 뜯어 먹고 나서 다른 염소가 맛있게 본 풀을 뜯어 먹으니 먹을 만큼 배불리 먹고 사이도 좋아서 평화로웠다. 협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몽만화에서 본 내용인데 부처님의 나라,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자 하는 노력하는 이들도 또한 음미해 볼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어쩌면 염소들이 각자가 맛있게 생각하는 풀을 뜯어먹어도 평생 동안 먹는 양은 몇 평의 초지에 난 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 온 누리에 나 있는 풀을 다 먹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풀밭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언덕 위에 난 풀은 그대로,강 옆에 난 풀은 또 그대로 푸르고 맛이 있다.언덕 위의 풀이 강 옆의 풀보다 낫거나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염소에게 평화와 행복이 함께 할 것이다. 곳곳에 난 풀의 다름을 알고 내가 먹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잘 골라서 알맞게 먹는 슬기로움이 필요하다.그렇지 못할 때 한 곳으로 치우치게 된다.두 눈으로 바르게 보지 못할 때 편견이 생기고,편견에 의해 치우치게 행동할 때 편향적인 언행을 하게 된다.주의할 것은 그것이 풀을 먹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1세기의 최고 화두가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산업을 위해 생태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며 그 해법은 각 존재의 다름을 인정하여 종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그런 뜻에서 20세기의 가장 큰 재앙인 전 세계가 참여하는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의 종교인들이 진심으로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여러 종교간 대화와 협력의 모임을 가져서 세계 종교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일부 단체와 사람들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전체의 잘못인 것처럼 비치게 하는 ‘언사’가 있어서 문제이다.하지만 조금 주의 깊게 보면 현재의 갈등을 염소의 그것처럼 슬기롭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종교간 대화와 협력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만일 기독교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참된 하느님의 관념을 가지고 참된 하느님의 집에 가서 참되지 않은 기도를 드리고,이교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 비록 그의 눈길이 우상에 머물러 있을 지라도 전 영혼을 다 바치는 무한한 열정으로 기도 드린다면 누가 더 진실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비록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참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다른 사람은 거짓된 마음으로 참된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면 실제로 참된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인데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같이 사는 방법을 찾는 슬기로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나부터 절대로 치우치지 않고 평등하게 바른 눈으로 보고 바르게 행하는 종교인으로 살고자 한다. 부처님은 “슬기로운 이는 바름을 실행한다.다른 이가 가져갈 수 없고 훔쳐갈 수도 없는 보석을 갖는다.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보석을….”이라고 법구경에서 말씀하셨다.그렇기 때문에 “부드러움으로 분노를 다스려라.착함으로 악함을 정복하라.은혜로 비열한 자를 교화하고,진실로 거짓을 정복하라.”고 하신 뜻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다.˝
  • 儒林(132)-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렇듯 공자는 제나라에 망명하여온 후 순임금이 작곡한 음악 소에 빠져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한적한 생활을 보냈으나 소기의 목적대로 경공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행동은 낱낱이 안영에게 보고되고 있었다.안영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공 또한 공자의 소문을 듣고 있었고 만나고 싶어하였으나 이를 제지하는 안영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안영에게 불평을 하곤 하였다. “공자가 국내에 들어온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으며,대부 고소자를 통해 몇 번이나 만나자는 간청을 해왔는데도 어찌하여 그대는 공자를 못 만나게 하고 있는가.” ‘사기’에 의하면 경공은 평소에 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따라서 경공은 공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안영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영은 의외로 완강하게 이를 거절하여 말하였다.안영이 노나라에서 온 공자를 경계하였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찍이 노나라의 소공이 삼환씨와 싸우다 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해 오자 경공은 소공에게 물어 말하였다. “젊은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났는데,왜 그렇게 되었는지 반성해 보셨습니까.” 이에 결국 무능한 정치력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쳐온 소공이 대답하였다. “저는 젊은 나이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였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간하였습니다만 저는 그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때문에 저를 도와주거나 충성을 하려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들었습니다.다만 주위에는 아부하려는 사람들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소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으므로 장차 어진 군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영에게 물었다. “만약 소공이 다시 노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가 현명한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에 안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소공이 계평자와 싸움을 일으킨 것은 계평자가 후소백( 昭伯)과 닭싸움을 붙었다가 불법을 한 때문입니다.옛말에 이르기를 ‘계충득실(鷄蟲得失)’이라 하여 ‘닭이 벌레를 쪼고 사람이 닭을 잡아먹으나 득실은 다 같이 작다는 뜻’으로 소공이 닭싸움으로 감정이 상해 삼환씨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마치 ‘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겠는가(割鷄焉用牛刀).’라는 뜻과 같습니다.따라서 소공은 어리석은 사람임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나서 안영은 그 유명한 말을 내린다. “신이 생각하기에 소공은 노나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현군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이것은 사람이 물에 빠진 후에야 물에 빠진 원인을 알고자 하고,길을 잃은 다음에야 길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비유하건대 마치 위급함에 처해서 부랴부랴 무기를 주조하고,목구멍이 막히고 목이 마르고서야 비로소 우물을 파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빠르게 무기를 만들고 우물을 파더라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임갈굴정(臨渴掘井). ‘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판다.’라는 고사성어는 안영의 명 대답에서 나온 말.‘안자춘추’에 나오는 이 일화야말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금언인 것이다.안영은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단언하고,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는 배워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임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132)-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32)-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렇듯 공자는 제나라에 망명하여온 후 순임금이 작곡한 음악 소에 빠져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한적한 생활을 보냈으나 소기의 목적대로 경공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행동은 낱낱이 안영에게 보고되고 있었다.안영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공 또한 공자의 소문을 듣고 있었고 만나고 싶어하였으나 이를 제지하는 안영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안영에게 불평을 하곤 하였다. “공자가 국내에 들어온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으며,대부 고소자를 통해 몇 번이나 만나자는 간청을 해왔는데도 어찌하여 그대는 공자를 못 만나게 하고 있는가.” ‘사기’에 의하면 경공은 평소에 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따라서 경공은 공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안영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영은 의외로 완강하게 이를 거절하여 말하였다.안영이 노나라에서 온 공자를 경계하였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찍이 노나라의 소공이 삼환씨와 싸우다 패하여 제나라로 망명해 오자 경공은 소공에게 물어 말하였다. “젊은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났는데,왜 그렇게 되었는지 반성해 보셨습니까.” 이에 결국 무능한 정치력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쳐온 소공이 대답하였다. “저는 젊은 나이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였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간하였습니다만 저는 그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때문에 저를 도와주거나 충성을 하려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들었습니다.다만 주위에는 아부하려는 사람들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소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으므로 장차 어진 군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영에게 물었다. “만약 소공이 다시 노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가 현명한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에 안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소공이 계평자와 싸움을 일으킨 것은 계평자가 후소백( 昭伯)과 닭싸움을 붙었다가 불법을 한 때문입니다.옛말에 이르기를 ‘계충득실(鷄蟲得失)’이라 하여 ‘닭이 벌레를 쪼고 사람이 닭을 잡아먹으나 득실은 다 같이 작다는 뜻’으로 소공이 닭싸움으로 감정이 상해 삼환씨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마치 ‘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겠는가(割鷄焉用牛刀).’라는 뜻과 같습니다.따라서 소공은 어리석은 사람임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나서 안영은 그 유명한 말을 내린다. “신이 생각하기에 소공은 노나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현군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이것은 사람이 물에 빠진 후에야 물에 빠진 원인을 알고자 하고,길을 잃은 다음에야 길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비유하건대 마치 위급함에 처해서 부랴부랴 무기를 주조하고,목구멍이 막히고 목이 마르고서야 비로소 우물을 파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빠르게 무기를 만들고 우물을 파더라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임갈굴정(臨渴掘井). ‘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판다.’라는 고사성어는 안영의 명 대답에서 나온 말.‘안자춘추’에 나오는 이 일화야말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금언인 것이다.안영은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단언하고,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는 배워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임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131)-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주공은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사람으로 주나라 초기 예의 제도를 지정하여 공자에게 예의 사상을 싹트게 했던 성인이었다.그러므로 공자는 꿈속에서라도 주공을 만나 그를 닮고 싶어하였듯이 음악을 통해서는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을 만나 보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제나라로 망명했을 때 순임금의 음악 소를 듣고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고,‘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고 감탄하였던 것은 소를 통해 순임금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舜). 고대 중국의 전설상 제왕으로 성천자(聖天子)로 불리어지던 성인.흔히 태평성대를 ‘요순시대’라 하고,유가에서 요순시대를 이상정치가 행해졌던 처음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가 순임금이 작곡한 소라는 음악을 듣고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소는 ‘소무(昭舞)’라는 무악의 준말로 순임금이 직접 지은 음악이었다.그러나 공자는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지은 음악 무(武)를 듣고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팔일(八佾)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순임금의 음악 소는 아름다움도 다했고 또 훌륭함도 다했다.그러나 무왕의 음악 무는 아름다움은 다했으나 훌륭함은 다하지 못하고 있다.” 무왕은 문왕의 아들이자 주공의 형으로 주나라의 2대왕이었다.무왕은 아버지가 못 이룬 주왕(紂王)의 대군을 격파하여 상나라를 멸망시킨 영웅이었으나 공자는 오히려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문왕이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한 무왕보다 더 이상적인 군주임을 간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무(昭武). 중국 고악의 이름으로 소는 순임금의 음악이고,무는 무왕의 음악인데,공자는 천하를 제패한 무왕보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문왕을 더 성군으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왕의 음악은 ‘아름다움은 다했으나 훌륭함은 다하지 못하고 있다(盡美矣,未盡善也).’라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문왕은 주왕에 의해 유배생활을 했으나 고통을 참으면서도 팔괘(八卦)를 연구하여 중국 최초의 경서인 주역(周易)을 만들고,직접 칠현금(七絃琴)을 발명하여 자신의 유배된 신세를 빗대어 ‘구유조(拘幽操)’란 금곡을 창작하고 항상 이를 연주하였던 것이다.공자가 사양자에게 금을 배울 때 바로 그 음악이 문왕이 작곡한 ‘구유조’임을 꿰뚫어 보고 문왕의 생김새를 형상해낸 후 ‘마음은 천하를 지배할 형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공자가 음악을 통해 진정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노나라의 태사악(太師樂)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음악은 잘 알 수가 있다.연주를 시작할 적에는 소리가 합쳐 나오고,이어서 잘 조화되고,그러고는 각 음이 뚜렷해지고 계속 이어져 나감으로써 일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자가 악관의 우두머리에게 이러한 음악론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 위대한 사상가였던 공자가 또한 얼마나 또 뛰어난 음악인이었는가를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제나라에 망명 후 경공이 자신을 부르지 않는 소외 상태의 고독 속에서 이에 개의치 않고 순임금의 음악 소에 빠져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던 것은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장면이기도 한 것이다.˝
  • 儒林(131)-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31)-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주공은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사람으로 주나라 초기 예의 제도를 지정하여 공자에게 예의 사상을 싹트게 했던 성인이었다.그러므로 공자는 꿈속에서라도 주공을 만나 그를 닮고 싶어하였듯이 음악을 통해서는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을 만나 보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제나라로 망명했을 때 순임금의 음악 소를 듣고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고,‘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고 감탄하였던 것은 소를 통해 순임금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舜). 고대 중국의 전설상 제왕으로 성천자(聖天子)로 불리어지던 성인.흔히 태평성대를 ‘요순시대’라 하고,유가에서 요순시대를 이상정치가 행해졌던 처음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가 순임금이 작곡한 소라는 음악을 듣고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소는 ‘소무(昭舞)’라는 무악의 준말로 순임금이 직접 지은 음악이었다.그러나 공자는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지은 음악 무(武)를 듣고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팔일(八佾)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순임금의 음악 소는 아름다움도 다했고 또 훌륭함도 다했다.그러나 무왕의 음악 무는 아름다움은 다했으나 훌륭함은 다하지 못하고 있다.” 무왕은 문왕의 아들이자 주공의 형으로 주나라의 2대왕이었다.무왕은 아버지가 못 이룬 주왕(紂王)의 대군을 격파하여 상나라를 멸망시킨 영웅이었으나 공자는 오히려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문왕이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한 무왕보다 더 이상적인 군주임을 간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무(昭武). 중국 고악의 이름으로 소는 순임금의 음악이고,무는 무왕의 음악인데,공자는 천하를 제패한 무왕보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문왕을 더 성군으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왕의 음악은 ‘아름다움은 다했으나 훌륭함은 다하지 못하고 있다(盡美矣,未盡善也).’라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문왕은 주왕에 의해 유배생활을 했으나 고통을 참으면서도 팔괘(八卦)를 연구하여 중국 최초의 경서인 주역(周易)을 만들고,직접 칠현금(七絃琴)을 발명하여 자신의 유배된 신세를 빗대어 ‘구유조(拘幽操)’란 금곡을 창작하고 항상 이를 연주하였던 것이다.공자가 사양자에게 금을 배울 때 바로 그 음악이 문왕이 작곡한 ‘구유조’임을 꿰뚫어 보고 문왕의 생김새를 형상해낸 후 ‘마음은 천하를 지배할 형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공자가 음악을 통해 진정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노나라의 태사악(太師樂)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음악은 잘 알 수가 있다.연주를 시작할 적에는 소리가 합쳐 나오고,이어서 잘 조화되고,그러고는 각 음이 뚜렷해지고 계속 이어져 나감으로써 일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자가 악관의 우두머리에게 이러한 음악론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 위대한 사상가였던 공자가 또한 얼마나 또 뛰어난 음악인이었는가를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제나라에 망명 후 경공이 자신을 부르지 않는 소외 상태의 고독 속에서 이에 개의치 않고 순임금의 음악 소에 빠져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던 것은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장면이기도 한 것이다.
  • [아테네 화필기행] (2)아고라에 ‘허스토리’ 흔적 안보여 씁쓸

    하늘 아래 대리석 기둥만 덩그러니 서 있는 언덕,하얀 벽에 파란 창문이 앙증맞게 달린 집들,녹회색 올리브 나무,귀신 씨나락 까먹는 아득한 신화의 고장….그리스 땅을 밟기 전 나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그리스란 고작 이런 연상의 조합에 불과했다.그러나 지금 서울신문사의 ‘아테네 신화 화필기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그리스는 한층 풍성한 육체와 정신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의 첫 인상은 포근하고 안온했다.산들을 끼고 돌면 은빛으로 부서지는 햇살,지중해의 물기를 머금은 뜨거운 바람이 그리스를 찾은 화가를 맞아 줬다.아테네는 잿빛 도시였지만 그곳을 조금 벗어나 보이는 흰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단출한 집들과 올리브 나무들은 목가적인 느낌마저 풍겼다.그리스인들은 이렇게 고립된 섬이 아니라 하나의 이웃으로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화가의 눈에 비친 그리스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보다는 정신의 축복 속에 살아가는 민족이었다.그들의 생활은 EU의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풍족하지 않다.그러나 적당히 남루한 그들의 삶에는 여유가 넘쳤다.그것은 바로 시간에 대한 믿음을 경험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멀리 2500년전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국가를 이룩했다.그들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세계관은 내세보다는 현세에 관심을 갖고 무궁무진한 신화를 엮어내며 인간의 본성을 탐색하게 했다.보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욕구를 다스렸다.그 기나긴 민주주의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아테네 화필기행 첫 날,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올라 최초의 집회가 열렸다는 아고라를 내려다 봤다.지금은 돌기둥만 허망하게 뒹굴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엔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고 예술을 꽃피운 곳이 아니던가. 시장 한 귀퉁이에서 저마다의 사상을 육성으로 주고 받던 그 자리에서 나는 ‘민주적인’ 그리스적 사유의 원천을 발견했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그 자리에 ‘절반’은 보이지 않았다.여성이라는 하늘의 절반.순간 나의 뇌리엔 “여성을 배제한 어떠한 결정도 단지 절반만 좋을 뿐이다.”라는 인디언 잠언 한 구절이 떠올랐다.그 시절 여자들은 인디언의 지혜의 말처럼 시민이 아니었던 것이다.남성들은 전쟁과 권력의 틈바구니에서도 그들의 히스토리를 써내려갔다.하지만 여성들의 허스토리(herstory)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민의 자격이 없는,공적인 장소에서 배제된 ‘절반’이 존재하는 한 이 유구한 민주주의 광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기껏해야 신화에나 등장하는 숱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남자들의 욕망의 그림자요 이율배반의 상징일 뿐.2500년이 지난 지금 그 여자들이 돌아눕기 전에,여신들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그 절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내 기억의 한 편에 남아 있는 낮은 집의 평화로움,처녀신 아테나를 모신 파르테논 신전의 우아한 자태,점점이 박힌 올리브 나무 사이에 ‘돌아누운 여자’를 끼워 넣는다.˝
  • [아테네 화필기행] (2)아고라에 ‘허스토리’ 흔적 안보여 씁쓸

    [아테네 화필기행] (2)아고라에 ‘허스토리’ 흔적 안보여 씁쓸

    하늘 아래 대리석 기둥만 덩그러니 서 있는 언덕,하얀 벽에 파란 창문이 앙증맞게 달린 집들,녹회색 올리브 나무,귀신 씨나락 까먹는 아득한 신화의 고장….그리스 땅을 밟기 전 나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그리스란 고작 이런 연상의 조합에 불과했다.그러나 지금 서울신문사의 ‘아테네 신화 화필기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그리스는 한층 풍성한 육체와 정신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의 첫 인상은 포근하고 안온했다.산들을 끼고 돌면 은빛으로 부서지는 햇살,지중해의 물기를 머금은 뜨거운 바람이 그리스를 찾은 화가를 맞아 줬다.아테네는 잿빛 도시였지만 그곳을 조금 벗어나 보이는 흰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단출한 집들과 올리브 나무들은 목가적인 느낌마저 풍겼다.그리스인들은 이렇게 고립된 섬이 아니라 하나의 이웃으로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화가의 눈에 비친 그리스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보다는 정신의 축복 속에 살아가는 민족이었다.그들의 생활은 EU의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풍족하지 않다.그러나 적당히 남루한 그들의 삶에는 여유가 넘쳤다.그것은 바로 시간에 대한 믿음을 경험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멀리 2500년전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국가를 이룩했다.그들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세계관은 내세보다는 현세에 관심을 갖고 무궁무진한 신화를 엮어내며 인간의 본성을 탐색하게 했다.보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욕구를 다스렸다.그 기나긴 민주주의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아테네 화필기행 첫 날,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올라 최초의 집회가 열렸다는 아고라를 내려다 봤다.지금은 돌기둥만 허망하게 뒹굴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엔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고 예술을 꽃피운 곳이 아니던가. 시장 한 귀퉁이에서 저마다의 사상을 육성으로 주고 받던 그 자리에서 나는 ‘민주적인’ 그리스적 사유의 원천을 발견했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그 자리에 ‘절반’은 보이지 않았다.여성이라는 하늘의 절반.순간 나의 뇌리엔 “여성을 배제한 어떠한 결정도 단지 절반만 좋을 뿐이다.”라는 인디언 잠언 한 구절이 떠올랐다.그 시절 여자들은 인디언의 지혜의 말처럼 시민이 아니었던 것이다.남성들은 전쟁과 권력의 틈바구니에서도 그들의 히스토리를 써내려갔다.하지만 여성들의 허스토리(herstory)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민의 자격이 없는,공적인 장소에서 배제된 ‘절반’이 존재하는 한 이 유구한 민주주의 광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기껏해야 신화에나 등장하는 숱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남자들의 욕망의 그림자요 이율배반의 상징일 뿐.2500년이 지난 지금 그 여자들이 돌아눕기 전에,여신들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그 절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내 기억의 한 편에 남아 있는 낮은 집의 평화로움,처녀신 아테나를 모신 파르테논 신전의 우아한 자태,점점이 박힌 올리브 나무 사이에 ‘돌아누운 여자’를 끼워 넣는다.
  • 儒林(13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와 같이 음악을 인간 완성의 마지막 단계인 문채(文彩)로 본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와 더불어 세계 성인 중 하나인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상반되고 있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계율을 통해 자신들의 제자인 비구들에게 지켜야 할 비구계(比丘戒)를 직접 내렸는데,석가모니는 비구들이 절대로 ‘춤과 노래’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 반해 공자는 음악이야말로 천지의 조화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공자 역시 음란한 음악이나 쾌락적인 가무를 경계하고 있다.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보면 ‘공자께서는 남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남이 잘 부르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반복케 하고는 그 뒤에 그와 맞춰 함께 부르셨다.’고 표현하고 있어 공자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령공(衛靈公)편에서는 ‘정(鄭)나라의 노래는 음탕하다.’ 양화(陽貨)편에서는 ‘정나라의 노래가 아악을 어지럽힘을 미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 역시 단지 귀를 즐겁게 하는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었던가를 증명하고 있다.심지어 미자(微子)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女樂)을 보내왔다.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고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다.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시경(詩經)에 의하면 정나라의 노래에는 음란한 연애시가 많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정풍(鄭風)이란 말은 천박하고 음탕한 음악의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천박하고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던가는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떠날 정도였는데,그러므로 공자의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樂者天地之和也)’란 말은 음악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음인 것이다. 사양자에게서 금을 배울 때 공자는 그 곡조나 이치나 뜻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노래를 지은 주나라의 창시자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공자는 예로써 사람들의 겉모양과 행동을 다스리고,음악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이러한 공자의 음악관은 ‘악기(樂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고 예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음악은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고요하며,예는 밖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채를 이룬다.위대한 음악은 평이하고,위대한 예는 반드시 간결하다.음악이 주효(奏效)하면 원망이 없게 되고,예가 주효하면 다투지 않게 된다.서로 절하고 양보하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예와 악의 효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왕자는 공업을 이룩하면 음악을 작곡하고,다스림이 안정되고 예를 제정한다.(王者功成作樂治定制禮)” 그러므로 사양자는 공자에게 곡조와 뜻과 같은 테크닉을 가르치려 했지만 공자는 이를 통해 ‘그 노래를 작곡한 왕’,즉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 했던 것이다. 평소에 공자는 주나라를 창시한 문왕과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주공(周公)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주나라는 어쨌든 춘추전국시대 때의 종주국으로 문왕은 강태공을 발탁하여 주나라를 건국하였으며,그의 아들 주공은 아버지를 도와 왕국의 기초를 확립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였던가는 공자가 죽을 무렵 주공을 두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심히도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주공을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
  • 儒林(13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3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와 같이 음악을 인간 완성의 마지막 단계인 문채(文彩)로 본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와 더불어 세계 성인 중 하나인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상반되고 있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계율을 통해 자신들의 제자인 비구들에게 지켜야 할 비구계(比丘戒)를 직접 내렸는데,석가모니는 비구들이 절대로 ‘춤과 노래’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 반해 공자는 음악이야말로 천지의 조화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공자 역시 음란한 음악이나 쾌락적인 가무를 경계하고 있다.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보면 ‘공자께서는 남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남이 잘 부르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반복케 하고는 그 뒤에 그와 맞춰 함께 부르셨다.’고 표현하고 있어 공자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령공(衛靈公)편에서는 ‘정(鄭)나라의 노래는 음탕하다.’ 양화(陽貨)편에서는 ‘정나라의 노래가 아악을 어지럽힘을 미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 역시 단지 귀를 즐겁게 하는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었던가를 증명하고 있다.심지어 미자(微子)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女樂)을 보내왔다.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고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다.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시경(詩經)에 의하면 정나라의 노래에는 음란한 연애시가 많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정풍(鄭風)이란 말은 천박하고 음탕한 음악의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천박하고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던가는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떠날 정도였는데,그러므로 공자의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樂者天地之和也)’란 말은 음악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음인 것이다. 사양자에게서 금을 배울 때 공자는 그 곡조나 이치나 뜻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노래를 지은 주나라의 창시자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공자는 예로써 사람들의 겉모양과 행동을 다스리고,음악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이러한 공자의 음악관은 ‘악기(樂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고 예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음악은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고요하며,예는 밖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채를 이룬다.위대한 음악은 평이하고,위대한 예는 반드시 간결하다.음악이 주효(奏效)하면 원망이 없게 되고,예가 주효하면 다투지 않게 된다.서로 절하고 양보하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예와 악의 효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왕자는 공업을 이룩하면 음악을 작곡하고,다스림이 안정되고 예를 제정한다.(王者功成作樂治定制禮)” 그러므로 사양자는 공자에게 곡조와 뜻과 같은 테크닉을 가르치려 했지만 공자는 이를 통해 ‘그 노래를 작곡한 왕’,즉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 했던 것이다. 평소에 공자는 주나라를 창시한 문왕과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주공(周公)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주나라는 어쨌든 춘추전국시대 때의 종주국으로 문왕은 강태공을 발탁하여 주나라를 건국하였으며,그의 아들 주공은 아버지를 도와 왕국의 기초를 확립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였던가는 공자가 죽을 무렵 주공을 두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심히도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주공을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
  • [건강칼럼] 몸의 곰팡이 어루러기균

    잘 마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때의 보슬보슬하고 가실가실한 느낌은 사소한 행복 중 하나다. 장마철에 맛보는 그런 느낌은 짜증스러운 일상의 기분전환이 될 수 있다.바야흐로 장마철이다. 이 때면 제철인 듯 설치는 것이 각종 곰팡이류,이 가운데 어루러기균은 여름철 흔히 볼 수 있는 피부 진균증이다.가슴이나 등,겨드랑이,목 등에 흔히 나타나는 어루러기는 원인균이 말라세지아 효모균으로,피부의 가장 바깥 각질층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이다. 정상인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지만 특히,비만하거나 당뇨병 환자,공부하는 학생,운동 선수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난다.그런가 하면 영양불량이나 임신,부신피질호르몬제의 사용 등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간혹 있다.남성은 가슴과 목,겨드랑이에,여성은 가슴이나 겨드랑이 등 피지와 땀이 많이 차는 곳과 샅 부위에 주로 기생한다. 다른 곰팡이질환과 달리 어루러기는 자각증상이 거의 없지만 피부에 자국이 남아 흉물스럽다. 자국은 크기가 다양하고 색깔도 갈색 암적색 회백색 등 각각 다른 것이 특징이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서로 섞이면서 불규칙한 모양을 만들어 여름 짜증을 배가시키지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예방이 어렵지는 않다. 우선,통풍이 잘되는 면 소재의 속옷은 기본.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은 가능한 피부를 건조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예방법이다. 일단 발생하면 항진균제 로션이나 연고를 발라주는 정도로 대부분 다스릴 수 있지만 병변이 넓고 심할 때는 항진균제를 복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제때 치료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저색소반이 생겨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으므로 특히 여성들은 조심해야 한다. 시원한 빗줄기에 마음 속이 씻긴 듯 하다가도 이내 땀이 배어 찐득거린 느낌이 드는 게 장마철이다.습기 관리로 곰팡이도 잡고 기분까지 보송보송한 장마철을 보내자.˝
  • 우붕잡억/지센린 지음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理)!” 1966∼1976년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전역엔 이런 구호가 물결쳤다.혁명은 떳떳하고,반역은 정당하다는 뜻.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혁명’과 ‘반역’의 대상이 됐고 ‘자본주의파’와 ‘반당반사회주의자’로 성토당했다.중국을 광풍으로 몰아넣은 이 ‘10년 재앙’은 단연 중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다. 중국 베이징대학 부총장을 지낸 지센린(季羨林·93)이 문화대혁명 당시 체험한 바를 회고하며 쓴 ‘우붕잡억(牛棚雜億)(이정선·김승룡 옮김,미다스북스 펴냄)은 광기의 진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중국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받는 저자는 자신이 지식인으로서 겪은 폭력과 학대의 경험을 눈물로 고백한다.‘우붕’은 문화대혁명 때 이른바 ‘소귀신 뱀귀신’으로 전락한 지식인을 가두기 위해 만든 임시 헛간을 일컫는 말.외양간이란 원뜻에서 알 수 있듯이 지식인에 대한 학대를 상징한다.저자는 우붕을 단테의 ‘신곡’이나 인도의 경전 등에 나오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생지옥으로 묘사한다. 단지 지식인이란 이유만으로 저자가 우붕에 갇혀 보낸 생활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참절했다.낮엔 옥수수빵만 먹고 소나 말처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했으며 밤엔 전갈 등 온갖 벌레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몸을 긁으며 자야 했다.고무타이어로 감싼 자전거 체인에 머리를 쉴 새 없이 맞아 피를 흘렸는가 하면,목이 짓눌리고 팔이 비틀린 채 엎드린 자세로 온몸에 주먹 세례를 받으며 복도를 지나가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저자는 훗날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옛말이 있지만,문화대혁명은 선비를 죽일 수도 욕보일 수도 있음을 증명해 줬다.”는 한 당간부의 말을 듣고 치욕감에 피눈물을 삭인 경험도 털어놓는다. 저자는 우붕에서 해방되고 관운이 닿아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과거에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에게 앙갚음하지 않았다.“나 역시 증오하며 질투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 전혀 보복하지 않았다.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문화대혁명 당시 그 자리,그 분위기에서라면 누구라도 미혼탕(迷魂湯)을 마시고 사람이 아닌 ‘비인(非人)’으로 변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다룬 책은 그동안 국내에서도 적잖이 출간됐다.홍위병 시절을 회고한 진가개의 ‘어느 영화감독의 청춘’(푸른산),팔로군이었던 혁명간부의 아픔을 술회한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문학과지성사),지식인의 시대적 고통을 토로한 곽양옥의 ‘고깔모자를 쓴 지식인’(청화학술원)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우붕잡억’이 이 책들과 다른 점은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엄격한 춘추필법의 자세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체험이 역사가 되기 위해선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하나의 모델이 될 만하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26)

    克己復禮(극기복례) 유림 123에는 ‘禮’가 나온다. ‘說文解字(설문해자)’에 의하면 ‘禮(예도 례)’는 신 앞에 제사하여 복을 구한다 할 때 신을 뜻하는 ‘示’(보일 시)자와 제를 행하는 그릇을 의미하는 ‘ ’(제기이름 례)자의 합체이며,그 발음도 ‘ ’자에서 취한 글자임을 알 수 있다. ‘示’에 대해서는 光明崇拜(빛광,밝을 명,높일 숭,절 배),生殖器(날 생,번성할 식,그릇 기)의 상징,祭壇(제단) 등의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神(신) 또는 絶對者(절대자)를 숭배하는 뜻을 담고 있다.그리고 ‘豊’의 원형은 ‘ ’자이며,나무로 만든 제기인 ‘豆’(두) 위에 祭物(제물)을 올려놓은 글자이다.따라서 ‘禮’의 자학적(字學的)인 의미는 역시 神 앞에 제물을 올리며 복을 비는 原始宗敎的(근원 원,처음 시,마루 종,가르칠 교) 의미로 해석하는 게 妥當(온당할 타,마땅 당)할 것이다.사회가 점차 祭政分離(제사 제,다스릴 정,나눌 분,가를 리) 체제로 전환하면서 ‘禮’는 ‘인간 행위의 準則(법도 준,법칙 칙)’이라는 개인의 도덕으로 변모한다. ‘禮’가 쓰이는 단어에는 無禮(무례),禮節(예절),禮儀(예의),克己復禮(극기복례) 등이 있다.‘論語’(논어) 顔淵(안연)편을 보면,안회(공자의 애제자)가 仁(인)에 대하여 묻자,공자는 “자기를 이겨내어 예로 돌아감이 인을 실천하는 것(克己復禮·이길 극,몸 기,회복할 복,예도 례)”이라고 전제,실천덕목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며,예가 아니거든 듣지 말고,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며,예가 아니거든 움직이지 마라.”고 宣言(베풀 선,말씀 언)한다. 극기복례(克己復禮)란 ‘내 마음에 끼어드는 사사로운 욕심을 떨쳐버리고 그것을 이겨내어 타고난 착한 성품을 회복함’을 뜻한다.인간 본연의 성품을 회복하자면 자연질서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행동을 해서도 안된다.非禮(비례)란 天理(하늘 천,이치 리)에 어긋나는 것,곧 자연질서에 온당치 못한 비인간적 삶을 말한다.사사로운 욕심에 사로잡힌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야 비로소 인간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예는 인간 행위,즉 인간다움의 基準點(터 기,법도 준,점 점)이다.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기본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고,이를 바탕으로 온전한 가정을 이루며,사회 및 국가의 秩序(차례 질,순서 서)를 확립함은 물론 모든 사물까지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안정을 얻도록 한다.儒家(유가)에서는 이를 大同社會(큰 대,한가지 동,모일 사,모을 회)라 부른다.대동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정치적 方便(방편)이 바로 王道政治(왕도정치)이며,이 왕도정치도 예를 실현하는 것 이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가 具備(갖출 구,갖출 비)될 때 인간에게 尊嚴性(높을 존,엄할 엄,성질 성)과 價値性(가치성)을 賦與(구실 부,줄 여)할 수 있으나 예를 喪失(잃을 상,잃을 실)할 때 인간은 금수로 轉落(구를 전,떨어질 락)한다.예의 가치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인 만큼 예의 특성은 理性(다스릴 리,성품 성)일 수밖에 없다.따라서 옛 어른들은 예에서 벗어난 행위는 비이성적이요,반인륜적이며,비문화적인 방향으로 흐를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조차 예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노력한 것이다. 김석제 반월정보산업고 교사(철학박사)˝
  • [메트로 라운지]부천 실내스키돔 상가 분양

    국내 최초로 경기도 부천에 들어설 실내스키장의 상가시설이 분양된다. 실내스키장 건설업체인 ‘㈜정인코아’측은 스키장과 골프연습장 부대시설로 건축할 예정인 상가를 1일부터 공개 분양한다. 매각 대상 상가는 1층 단층으로 총 200여개이며,상가당 분양면적은 10∼50평으로 분양 예정가는 평당 3200만원대이다. 상가 주요 업종은 ▲골프숍이나 스키,레저용품 등 스포츠용품점 ▲나이키,아디다스,휠라 등 스포츠 의류매장 ▲엘로드,핑,올포유 등 골프의류용품 ▲패밀리레스토랑,일식,한식 등 전문음식점 ▲편의점,약국,보석 등 생활용품 등이다.또 패스트푸드점과 스낵코너 등도 들어선다. 부천 소재 레저산업 전문업체인 정인코아측은 부천 상동신도시내 체육시설부지 2만 5600여평에 국내 최초의 실내스키돔 및 길이 270m의 골프연습장,수영과 물놀이시설을 겸한 ‘워터파크’ 등 ‘부천 스포츠문화센터’를 세우는 건축허가를 지난달 4일 부천시로부터 받았다. 스포츠문화센터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 IC에서 500m 떨어져 있고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국도,경인전철 등이 인근으로 지나는 등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메트로 라운지]부천 실내스키돔 상가 분양

    국내 최초로 경기도 부천에 들어설 실내스키장의 상가시설이 분양된다. 실내스키장 건설업체인 ‘㈜정인코아’측은 스키장과 골프연습장 부대시설로 건축할 예정인 상가를 1일부터 공개 분양한다. 매각 대상 상가는 1층 단층으로 총 200여개이며,상가당 분양면적은 10∼50평으로 분양 예정가는 평당 3200만원대이다. 상가 주요 업종은 ▲골프숍이나 스키,레저용품 등 스포츠용품점 ▲나이키,아디다스,휠라 등 스포츠 의류매장 ▲엘로드,핑,올포유 등 골프의류용품 ▲패밀리레스토랑,일식,한식 등 전문음식점 ▲편의점,약국,보석 등 생활용품 등이다.또 패스트푸드점과 스낵코너 등도 들어선다. 부천 소재 레저산업 전문업체인 정인코아측은 부천 상동신도시내 체육시설부지 2만 5600여평에 국내 최초의 실내스키돔 및 길이 270m의 골프연습장,수영과 물놀이시설을 겸한 ‘워터파크’ 등 ‘부천 스포츠문화센터’를 세우는 건축허가를 지난달 4일 부천시로부터 받았다. 스포츠문화센터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 IC에서 500m 떨어져 있고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국도,경인전철 등이 인근으로 지나는 등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儒林(12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변방국의 불리한 점을 역이용하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백리해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군주께서 덕으로 백성들을 대하고 힘으로 적국을 정벌하여 변경지역을 안정시킨 후에 산천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중원의 제후국과 대치하고 있다가 중원에서 난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그 기회를 틈타 중원으로 나아가 덕과 위엄으로 다스린다면 반드시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목공은 계속해서 백리해와 사흘간을 얘기했으나 어떤 대답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이에 목공은 무릎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내가 정백(井伯,백리해)을 얻은 것은 제후(齊侯)가 관중(管仲)을 얻은 것과 같도다.” 곧이어 백리해에게 상경이란 벼슬을 주고 나라의 모든 정치를 맡겼는데,진나라 사람들은 백리해를 숫양가죽 다섯 개를 주고 데려왔다고 해서 오고대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훗날 초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백리해를 양가죽 다섯 장을 바치고 마구간에서 꺼내와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은 목공의 심미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죄수를 빼내와 재상으로 삼은 일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일인데,관중에 이어 또다시 백리해가 있었음을 들었네.진의 이름이 중원에 빛나기 시작한 것은 백리해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몸값은 불과 양가죽 다섯 장뿐이었네(脫囚拜相事眞奇 仲后重聞百里奚 從此西秦名顯赫 不虧身價五羊皮).” 공자의 대답을 듣고 경공이 크게 기뻐했던 것은 공자의 대답이 목공에게 백리해란 뛰어난 재상이 있듯이 경공에게는 안영이란 뛰어난 재상이 있으니,패업을 이룰 수 있다는 간접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자는 안영을 뛰어난 정치가로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그와 같은 안영을 등용한 경공은 목공의 탁월한 인재술과 비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논어에서 안영을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랫동안 남을 잘 공경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약과로, 안영의 어록을 기록해 놓은 ‘안자춘추’에는 공자가 안영을 소위 ‘불법(不法)의 예’란 최상의 찬사로 극찬하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안영이 노나라의 사신으로 와서 군왕을 알현했을 때 공자는 후학을 위해 제자들에게 안영의 언행을 견학토록 하였다.이를 견학하고 돌아온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예에 이르기를 ‘계단에 오르되 넘지를 말고 단상에서는 달리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안영의 행동은 이에 모두 반하고 있었으니,따라서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원래 외국 사신들은 계단을 오를 때는 한 단씩 천천히 오르고,단상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는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법도였던 것이다. 평소에 예라는 것을 인간의 행동규범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공자는 이 말을 듣자 평소 마음으로 공경해마지 않는 선배(안영은 공자보다 30세가량 위였다)가 이처럼 무례하였다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므로 안영을 찾아가 그 진의를 따지기로 결심한다.˝
  • 儒林(12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2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변방국의 불리한 점을 역이용하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백리해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군주께서 덕으로 백성들을 대하고 힘으로 적국을 정벌하여 변경지역을 안정시킨 후에 산천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중원의 제후국과 대치하고 있다가 중원에서 난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그 기회를 틈타 중원으로 나아가 덕과 위엄으로 다스린다면 반드시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목공은 계속해서 백리해와 사흘간을 얘기했으나 어떤 대답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이에 목공은 무릎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내가 정백(井伯,백리해)을 얻은 것은 제후(齊侯)가 관중(管仲)을 얻은 것과 같도다.” 곧이어 백리해에게 상경이란 벼슬을 주고 나라의 모든 정치를 맡겼는데,진나라 사람들은 백리해를 숫양가죽 다섯 개를 주고 데려왔다고 해서 오고대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훗날 초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백리해를 양가죽 다섯 장을 바치고 마구간에서 꺼내와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은 목공의 심미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죄수를 빼내와 재상으로 삼은 일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일인데,관중에 이어 또다시 백리해가 있었음을 들었네.진의 이름이 중원에 빛나기 시작한 것은 백리해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몸값은 불과 양가죽 다섯 장뿐이었네(脫囚拜相事眞奇 仲后重聞百里奚 從此西秦名顯赫 不虧身價五羊皮).” 공자의 대답을 듣고 경공이 크게 기뻐했던 것은 공자의 대답이 목공에게 백리해란 뛰어난 재상이 있듯이 경공에게는 안영이란 뛰어난 재상이 있으니,패업을 이룰 수 있다는 간접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자는 안영을 뛰어난 정치가로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그와 같은 안영을 등용한 경공은 목공의 탁월한 인재술과 비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논어에서 안영을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랫동안 남을 잘 공경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약과로, 안영의 어록을 기록해 놓은 ‘안자춘추’에는 공자가 안영을 소위 ‘불법(不法)의 예’란 최상의 찬사로 극찬하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안영이 노나라의 사신으로 와서 군왕을 알현했을 때 공자는 후학을 위해 제자들에게 안영의 언행을 견학토록 하였다.이를 견학하고 돌아온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예에 이르기를 ‘계단에 오르되 넘지를 말고 단상에서는 달리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안영의 행동은 이에 모두 반하고 있었으니,따라서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원래 외국 사신들은 계단을 오를 때는 한 단씩 천천히 오르고,단상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는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법도였던 것이다. 평소에 예라는 것을 인간의 행동규범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공자는 이 말을 듣자 평소 마음으로 공경해마지 않는 선배(안영은 공자보다 30세가량 위였다)가 이처럼 무례하였다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므로 안영을 찾아가 그 진의를 따지기로 결심한다.
  • [시네마 천국]극단 이루 ‘눈 먼 아비…‘

    극단 이루의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손기호 작·연출)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로 작정한 듯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가족에게 이렇듯 가혹한 운명을 내릴 수 있을까.어릴 때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정신지체가 있는 아버지(김학선),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신체장애 어머니(염혜란),그리고 소아암을 앓는 12살 외아들 선호(장정애).연극은 이들 가족의 남다른 가족애를 풀어놓는다. 어눌하지만 속정깊은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든 아들이 극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면,수다스럽고 주책맞지만 모정은 누구보다 강한 엄마는 객석에 웃음꽃을 피게하는 유일한 인물이다.국악인 정마리가 선호의 죽은 누나로 분해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전통 민요를 들려주는 막간 시도도 참신하다.경주 사투리는 구수한 맛을 살리는 장점이 있지만 간간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부분도 없지 않다. 마음 약한 관객들은 손수건을 꼭 챙기시길.7월4일까지 동숭무대소극장(02)762-919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시네마 천국]극단 이루 ‘눈 먼 아비…‘

    [시네마 천국]극단 이루 ‘눈 먼 아비…‘

    극단 이루의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손기호 작·연출)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로 작정한 듯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가족에게 이렇듯 가혹한 운명을 내릴 수 있을까.어릴 때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정신지체가 있는 아버지(김학선),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신체장애 어머니(염혜란),그리고 소아암을 앓는 12살 외아들 선호(장정애).연극은 이들 가족의 남다른 가족애를 풀어놓는다. 어눌하지만 속정깊은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든 아들이 극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면,수다스럽고 주책맞지만 모정은 누구보다 강한 엄마는 객석에 웃음꽃을 피게하는 유일한 인물이다.국악인 정마리가 선호의 죽은 누나로 분해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전통 민요를 들려주는 막간 시도도 참신하다.경주 사투리는 구수한 맛을 살리는 장점이 있지만 간간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부분도 없지 않다. 마음 약한 관객들은 손수건을 꼭 챙기시길.7월4일까지 동숭무대소극장(02)762-919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121)-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21)-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공자는 계씨가 팔일무를 자신의 묘정에서 춤추게 한 일과 삼환씨의 집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천자처럼 옹을 노래한 사실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예는 무엇 할 것이며,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은 무엇 할 것이냐.” 이때 공자는 젊은 시절 승전리(承田吏)라는 하찮은 벼슬에만 잠깐 몸담고 있었을 뿐,이미 그의 명망이 커짐에 따라 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여 제자들과 더불어 유가(儒家)를 이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공자는 ‘스스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30대로 접어들면서 공자의 학문과 경륜은 더욱 원숙해져서 명망은 이웃나라로 널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노나라에서는 대사건이 벌어진다.곧 노나라의 임금인 소공은 세력이 강했던 계평자가 지나치게 방자한 것을 참지 못하고 궁중쿠데타로 계씨를 제거하려 하였다.처음에는 성공할 듯도 보였지만 ‘계손씨 없이는 숙손씨도 있을 수 없다.’는 자각아래 삼환씨들이 힘을 합쳐 소공에게 일대반격을 가했던 것이다.왜냐하면 삼환씨들은 모두 16대왕인 환공의 후손들로 서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진 소공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제나라로 도망친다.제나라에서는 소공을 도와 노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갖은 방법을 강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소공은 결국 7년이란 세월을 외국에서 보낸 후 객사하게 되지만 어쨌든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고 첫 번째 출국을 단행했을 때에는 소공이 전쟁에서 패퇴한 후 제나라로 도망쳤던 바로 그 내전이 있은 직후였던 것이다. 소공을 쫓아낸 뒤에 계씨의 세도는 더 강력해졌다.공자는 임금까지도 쫓아내는 귀족들의 권력투쟁과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만을 노리며 날파리처럼 날아 다니는 관리들에 극도로 실망한 후 이미 노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출국하였던 것이다.그러므로 공자가 가는 도중에 만난 한 여인의 눈물을 통해 “잘 명심토록 하여라.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도 더 사나운 것이다.”란 말을 남긴 것은 여인의 경우를 빗대어 자신이 떠나온 가혹한 정치로 도탄에 빠져 있는 노나라를 질타하기 위한 일성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자신의 망명지로 제나라로 택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이미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소공이 노나라를 도망쳐 제나라로 망명하였던 때문이고,또 하나는 제나라에는 경공(景公)과 안영(晏)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특히 공자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정치가로 인정받고 있는 안영에게 깊은 호의를 갖고 있었다. 논어의 공야장(公冶長)편에서도 공자는 안영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안평중(안영)은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래도록 남을 잘 공경하였다.” 공자는 뛰어난 안영을 재상으로 등용할 수 있다면 경공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명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들과는 구면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5년 전,그러니깐 소공 20년 공자의 나이 30세 때 경공이 재상 안영과 함께 노나라를 방문하여 예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공자세가’에는 이때 경공과 나눈 공자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나라의 목공은 작은 나라로서 편벽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패업을 이룬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 질문에 공자는 대답한다. ‘진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목공의 뜻이 컸고,위치는 편벽하였지만 그의 행동은 발랐습니다.몸소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여 대부의 벼슬을 주었는데,죄인으로 묶여있는 중에 등용하여 사흘 동안 얘기해본 끝에 그에게 정사를 맡겼던 것입니다.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왕자가 되어도 마땅하며,그가 패업을 이루었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것입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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