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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6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는 유관(柳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문정공(文貞公) 유관은 공정하여 청렴하며,신하로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과 베옷과 짚신으로 평생 소박하였다.언젠가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져서 비가 삼줄기처럼 새어 내렸다.공은 방안에서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며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이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유관이 들고선 우산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일산으로 모든 집이 다 일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유공이 걱정하였던 것이다.유관의 집이 있던 곳은 동대문과 신설동 사이,따라서 이 동네는 ‘우산각골’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군주는 하늘이니 비가 내려 집이 새면 우산을 받쳐서 온 천하가 새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던 말은 유관의 일화를 통해 조광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오늘날의 언론(言論)에 해당하는 언로가 통해야만 온전한 우산노릇이라 할 수 있다는 갖바치의 충고는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도전의 정치사상에서 비롯된 것인데,조광조도 이미 언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이 즉위 10년째 되던 해에 왕비로 맞아들인 장경(章敬)왕후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비 신(愼)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왕비 신씨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때 제일 먼저 피살당한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혁명을 일으킨 훈구파에서는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강제로 신씨를 쫓아내어 인왕산 밑에서 살게 하였던 것이다.매일 왕을 그리워했던 신씨는 마침내 인왕산에 올라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는데,그것은 인왕산의 큰 바위 위에 자신의 치마를 벗어 놓는 일이었다.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하여 신씨가 있는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보았는데,어느 순간 그 치마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처음에 그 이유를 잘 모르다가 비로소 내막을 알게 된 중종은 매일같이 ‘치마바위’를 통해 애틋한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던 차에 장경왕후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이 공동명의로 옛 왕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청복고비신씨소(請復故妃愼氏疏)’의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이에 훈구파 공신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무엇보다 언론과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조광조는 왕 앞에 나아가 언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다. “전하,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가장 나라에 관련이 깊은 것이어서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나 막히면 분란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그래서 임금 되는 이는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는 공경(公卿)과 여러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시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언로를 열도록 해야 합니다.그러나 책임지는 언로가 없으면 스스로 뜻을 다할 수 없는 고로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이를 주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니,그 말하는 바가 좀 지나치더라도 모두 마음을 비워놓고 우대하여 용납하는 것은 언로가 혹 막힐까 우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근래에 박상과 김정 등이 구언(求言)하심을 당해 진언을 드렸는데,그 말이 만약 지나친 바가 있으면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어찌 다시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언로를 중요시하였던 갖바치와,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극간한 조광조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이 갖바치를 어떻게 해서든 관직에 추천하여 등용시키려 하였다.이렇게 뛰어난 인물을 미천한 갖바치로 머물게 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본 때문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국가의 크고 작은 관직은 모두 양반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일개 피장의 신분으로는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 儒林(6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는 유관(柳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문정공(文貞公) 유관은 공정하여 청렴하며,신하로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과 베옷과 짚신으로 평생 소박하였다.언젠가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져서 비가 삼줄기처럼 새어 내렸다.공은 방안에서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며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이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집은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유관이 들고선 우산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일산으로 모든 집이 다 일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유공이 걱정하였던 것이다.유관의 집이 있던 곳은 동대문과 신설동 사이,따라서 이 동네는 ‘우산각골’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군주는 하늘이니 비가 내려 집이 새면 우산을 받쳐서 온 천하가 새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던 말은 유관의 일화를 통해 조광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오늘날의 언론(言論)에 해당하는 언로가 통해야만 온전한 우산노릇이라 할 수 있다는 갖바치의 충고는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도전의 정치사상에서 비롯된 것인데,조광조도 이미 언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이 즉위 10년째 되던 해에 왕비로 맞아들인 장경(章敬)왕후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비 신(愼)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왕비 신씨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때 제일 먼저 피살당한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혁명을 일으킨 훈구파에서는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강제로 신씨를 쫓아내어 인왕산 밑에서 살게 하였던 것이다.매일 왕을 그리워했던 신씨는 마침내 인왕산에 올라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는데,그것은 인왕산의 큰 바위 위에 자신의 치마를 벗어 놓는 일이었다.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하여 신씨가 있는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보았는데,어느 순간 그 치마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처음에 그 이유를 잘 모르다가 비로소 내막을 알게 된 중종은 매일같이 ‘치마바위’를 통해 애틋한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던 차에 장경왕후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이 공동명의로 옛 왕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청복고비신씨소(請復故妃愼氏疏)’의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이에 훈구파 공신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무엇보다 언론과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조광조는 왕 앞에 나아가 언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다. “전하,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가장 나라에 관련이 깊은 것이어서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나 막히면 분란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그래서 임금 되는 이는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는 공경(公卿)과 여러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시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언로를 열도록 해야 합니다.그러나 책임지는 언로가 없으면 스스로 뜻을 다할 수 없는 고로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이를 주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니,그 말하는 바가 좀 지나치더라도 모두 마음을 비워놓고 우대하여 용납하는 것은 언로가 혹 막힐까 우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근래에 박상과 김정 등이 구언(求言)하심을 당해 진언을 드렸는데,그 말이 만약 지나친 바가 있으면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어찌 다시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언로를 중요시하였던 갖바치와,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극간한 조광조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는 이 갖바치를 어떻게 해서든 관직에 추천하여 등용시키려 하였다.이렇게 뛰어난 인물을 미천한 갖바치로 머물게 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본 때문이었다.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국가의 크고 작은 관직은 모두 양반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일개 피장의 신분으로는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우울증 자가진단 이렇게-자신감 감소·수면장애등 2주이상 계속될땐 위험

    “우울증은 개인차가 크며,특히 청소년의 경우 양상이 비전형적이어서 진단에 주의가 필요합니다.증상에 따라 통상 3단계로 구분하는데,이건 증상의 심각성을 따지는 것이고,진단 지침은 같습니다.” 이 교수는 우울증 진단의 주요 증상으로 우울한 기분,흥미와 즐거움의 상실,피로감 증대와 활동성 저하를 꼽고,부수 증상으로 집중력과 주의력 감소,자존감과 자신감의 감소,죄의식과 자신이 쓸모없다는 느낌,비관적인 미래,자해나 자살 충동 혹은 시도,수면장애,식욕감퇴를 들었다.“우울증 첫 단계인 경증은 주요 증상 중 두가지와 부수 증상 중 두가지가 2주 이상 겹쳐 나타나는 경우입니다.이보다 한 단계 심한 중등도는 주요 증상 두가지에 부수 증상 세가지가 겹치는 사람이 해당됩니다.”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고도 상태에 이른다.말 그대로 가장 심각한 증상이다.주요 증상 세가지에 부수 증상 네가지 이상이면 고도로 분류한다.“간혹,비슷한 증상 때문에 갑상선기능저하증을 우울증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이런 경우에는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먼저 치료하고 우울증을 다스립니다.’ 특히 우울증은 두통,요통,근육통,흉통,손발저림,호흡곤란,소화불량,변비,설사,구토 등의 증세를 동반하는데,그는 이런 증상이 반복적으로,장기간 나타나면 전문가와 상의해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약물치료의 성과가 무척 좋은데도 항간에는 이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즉,항우울제가 뇌를 상하게 한다거나 중독된다,의존성이다,증상이 개선되면 약 복용을 멈춰도 된다거나 약을 먹으면 기분이 뜬다는 건 모두 잘못 아는 것이라는 설명이다.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국민 5명중 1명이 우울증이지만,환자와 가족,그리고 의사가 합심만 하면 말끔히 치료됩니다. 심재억기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과학이 몰랐던 과학/존 플라이슈만 등 지음

    지금부터 1900여년 전,로마제국의 작은 변방도시였던 영국 런던에서 행해진 검투사 경기의 주역 중에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 증거가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런던박물관 고고학팀은 최근 런던 근교 그레이트 도버 스트리트에서 발견된 골반을 분석,검투사로 추정되는 두 명의 여성의 존재를 확인했다.발굴된 유적들은 여성 검투사들이 로마나 소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영국과 독일 같은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여성 검투사 경기는 기원후 20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됐지만 그 후에도 상당기간 지속됐다.로마 사람들은 여성 검투사들의 경기를 매우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기원후 1세기 초 로마 황제 네로는 원로원 의원의 부인들을 보석으로 치장시키고 칼을 들려 원형경기장으로 내몰았다는 기록도 전한다.‘글래디에이터 걸(Gladiator Girl)’의 진실은 무엇일까. ●20세기 과학적 진실을 뛰어넘는 획기적 발견 ‘과학이 몰랐던 과학’(존 플라이슈만 등 지음,최성범 등 옮김,들린아침 펴냄)에는 20세기의 과학적 진실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발견’들이 한데 묶였다.이 새로운 과학의 퍼레이드는 자연의 세계,인류고고학,인간과 과학기술 등 세 가지 주제로 펼쳐진다. 책은 오늘날 과학은 어디까지 그 지평을 넓혔고,과학적 사고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미다스 왕의 향연’은 좋은 예다.미다스는 디오니소스로부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힘을 얻었지만 딸마저 황금으로 바뀌게 만든 프리지아의 어리석은 왕.미다스 왕에 관한 이야기는 왕이 죽은 뒤에도 수천년에 걸쳐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 이야기처럼 영원한 신화로 여겨져왔다.그러나 이 미다스 왕의 이야기는 미국의 분자생물 고고학자 맥거번(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 의해 베일을 벗게 됐다.그는 미다스 왕의 장례식에 사용된 음식 찌꺼기 성분을 연구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으며,의식주 생활은 어떠했는가를 꼼꼼히 밝혀냈다. ●공룡은 지구환경 변화로 자연도태된 것 공룡의 멸종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무려 1억 6000만년 동안 중생대 지구를 지배한 공룡이 6500만년 전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소행성의 지구충돌 때문이라는 게 고생물학계의 통설이다.이에 반하는 대표적인 학설이 소행성 충돌 이전부터 공룡의 멸종이 서서히 진행됐다는 ‘점진적 소멸론’이다.이 책에서는 공룡 멸종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연구 성과를 소개한다.이른바 헬 크리크(Hell Creek) 프로젝트다.‘고생물학계의 금광’ 헬 크리크 지층은 미국 몬태나 주에 있는 후기 백악기 암석층으로 세계적인 공룡 화석 발굴지로 유명하다.연구팀은 공룡들이 거대 행성의 충돌에 의해 일시에 소멸된 것이 아니라 먹이사슬을 비롯한 지구환경 변화에 의해 자연 도태됐다는 데 무게를 둔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 사실일 수도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지었다는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과연 실존의 역사인가.책은 이 작품들이 오로지 상상에 의해 씌어진 픽션이라는 기존 학계의 평가를 완전히 뒤엎는다.21세기 고고학자들에게 호메로스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존재다.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과학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1970년대 중반까지 많은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호메로스를 사기꾼 또는 유사 역사학자로 매도했고,호메로스의 작품은 그릇된 정보를 담은 단순 창작물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그러나 최근 들어 호메로스의 작품들은 서서히 역사의 옷을 갈아 입고 있다.이 책은 호메로스 이야기가 실제 역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호메로스가 작품들을 통해 일깨운 세상과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밝혀진 세상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한 예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동물희생 의식은 의식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된 전투를 앞둔 병사들에게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책은 이밖에 고대 이집트의 생활상과 피라미드 건설 의문,남미의 거대한 유물 ‘나스카 라인’의 수수께끼,사라진 이스터 섬의 문명,마다가스카르 섬에만 사는 전설의 동물 포사,비비원숭이의 노년 준비,인조모기 생산 등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룬다.‘과학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는 이들에게 이 책은 과학의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1만 48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임호는 ‘왕’푼수?

    여기 ‘궁궐 생활’에 지친 ‘왕’이 있다.바로 탤런트 임호.연기생활 10년에 붙여진 ‘왕 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영광스러운(?) 꼬리표가 그에겐 주홍글씨처럼 느껴진다.사실 그가 왕 역을 맡은 것은 딱 두 번.SBS ‘장희빈’에서 숙종으로 즉위해 MBC ‘대장금’의 중종으로 왕좌를 꿋꿋이 지켰다.중종은 ‘대장금’의 이병훈 PD와의 인연으로 하게 됐지만 장희빈 이후 10년을 도망다녔던 그다.그런데도 여전히 임금 캐스팅 1순위로 꼽힌다.“아이러니죠.장희빈할 때 ‘임금 같지 않다.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만 들었는데….”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왕의 그림자는 크고 짙다.현대물에서도 언제나 임금처럼 자상하고 점잖은 역할만 돌아왔다.“배우로서 너무 빨리 늙어버렸어요.60세까지 연기한다고 할 때 (임금 역만 맡는 것을) 좋아할 수만은 없지요.” 임호가 느끼는 ‘임금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 아랫것(?)이 짐작이나 하겠냐마는 어렴풋이나마 감잡을 수 있는 에피소드 두 가지.인터뷰 중 가수 현미가 눈인사를 건네는 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면서 하는 말.“오호라∼.누군가 했더니 임금님이시구나.아휴∼.정말 너무 점잖으셔.” KBS 별관 로비에서 기다리던 기자에게 경비 아저씨가 와서 묻는다.“누구 기다려요?” “임호씨요,탤런트 임호”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저씨.“대장금에서 왕 있잖아요?” 여전히 모른다는 표정.‘KBS에서 일한다고 MBC 드라마는 안 보나보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 저기 저…(전원일기의)금동이! 금동이 맞지?” ‘나는 왕도 금동이도 아니로소이다!’ 임호는 그때 이런 말을 내뱉고 싶지 않았을까.무수히 스러져가는 연기자들도 많은데 좋든 싫든 이런 식으로라도 기억되는 것은 연기자에게 어쨌든 복 아닌가? “조인성이 조인성으로 각인되는 거랑,제가 금동이나 임금으로 각인되는 거랑 차원이 같은가요? 복이라고 얘기하면 서운하죠.” 단호한 대답에 머쓱해졌다. 임호는 요즘 ‘니가 리모컨이냐?’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오락 프로그램에 잦은 ‘행차’를 하고 있다.짐작했겠지만 그는 현재 이미지 대변신 중이다.SBS ‘결정! 맛대맛’ ‘솔로몬의 선택’ 등에 고정패널로 출연하고 있는 그는 근엄의 껍질을 벗겨내고 있다.장난기 많고 명랑,쾌활하며 때론 수다스러운 실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지금은 예열 단계나 마찬가지예요.연초에 재미로 점을 봤는데 10월까지가 새로운 도약의 시기래요.그래서 사랑도 10월 이후로 미뤘어요.하하하.” 변신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실행하고 있는 그는 일단 멋드러진 악역,망가지는 푼수,절절한 멜로 주인공 등을 해보고 싶단다.연기 변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자 피곤했던지 “미사여구 동원해봤자죠.연기로 얘기할 겁니다.” 의례적인 대답인데도 꼭 그렇게만 들리지 않았다. 박상숙기자 alex@ 사진 강성남기자 snk@˝
  • [새로 나왔어요]

    잘먹고 잘살자는 ‘웰빙’ 바람이 음반계에도 거세다.오가닉 푸드와 요가로 건강을 돌보는 당신,이 음악들이 있다면 스트레스를 떨쳐내고 마음의 균형을 찾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태국의 틱낫한 스님의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노래집 ‘자두 바구니’. 틱낫한 스님은 지난해 방한해 화를 이기고 평정을 찾는 법을 설파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냈다.이 앨범에는 그가 이끄는 프랑스 보르도의 수행공동체 ‘플럼 빌리지(자두마을)’의 수행자들이 명상을 하면서 부르는 명상곡 20곡이 담겨있다.‘진실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세요’‘바람의 노래’‘자아의 섬’ 등 제목부터 내면을 갈구하는 듯한 노래를 듣고 나면 평안은 그냥 얻어진다.BnG. 변성기를 겪지 않은 소년들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저 유명한 빈 소년합창단이나 파리나무십자가 합창단의 노래로 익히 알고 있을 터. 영국 소년 성가대의 ‘올스타합창단’격인 보이즈 에어 콰이어의 ‘블루버드’는 천사들의 목소리가 아마 이럴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앨범이다.국내에 첫 선을 보인 보이즈 에어 콰이어는 소년 성가대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9장이 넘는 앨범을 발매한 베테랑.미성의 보이소프라노가 빚어내는 천상의 화음으로 마음을 달래보자.EMI.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일상,모든 걸 놓고 그저 쉬고 싶은 당신에겐 스톰프 뮤직에서 작정하고 만든 웰빙 음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제격이다. 정상급 피아니스트 이루마,이사오 사사키,얼후 연주자 마 시아오후이,푸딩 등의 대표곡 16곡을 추렸다. 좋은 음악에 향기로운 차까지 곁들이면 그만.앨범 속을 들여다보면 국내 최대규모의 허브농장 ‘허브나라’에서 제공하는 16가지 허브 이야기와 허브를 이용한 차·음식 만들기,생활용품 제조법 등이 부록으로 달려있다.EMI. 박상숙기자 alex@4˝
  • 트인 아내, 멋진 엄마 되세요

    ‘부부 갈등을 해소해주고 자녀와 단절된 대화를 확 뚫어 드립니다.’ 서울 도봉구(구청장 최선길)가 ‘좋은 가정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들에게 행복해지는 법을 직접 지도한다. 외부에서 초빙된 유능한 강사들이 각종 노하우를 전수하며,강의는 6주 동안(매주 1회) 진행된다.▲행복한 부부 대화법 ▲충분히 좋은 어머니반 ▲마음 다스리기 심성수련반 등 3개 반으로 모집정원은 반별로 30명이다. 다음달 29일 개강하는 행복한 부부 대화법은 부부사랑 증진법,부부 대화술,함께 이루는 가정,부부의 성역할을 주제로 실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부간의 갈등을 사례별로 짚어준다.대화방식이 서로 달라 갈등을 겪는 부부에게 극복방법도 가르쳐 준다. 충분히 좋은 어머니반은 점차 가족간의 대화가 단절돼 가는 사회에서 자녀와의 올바른 대화법을 통해 자녀를 현명하게 키우는데 필요한 가이드를 제공한다.심리적인 안정과 행복을 가꿀 수 있는 프로그램인 마음 다스리기 심성수련반에서는 음악을 이용한 심리치료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참여를 원하는 주민은 4월10일까지 구청 가정복지과(02-2289-1366)로 접수하면 되고 참가비는 무료다. 최용규기자 ykchoi@˝
  • 獨 신발업체 ‘푸마’ “스포츠에 패션을 더하라”

    최근 월가를 비롯한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기업 가운데 하나가 독일의 신발 생산업체 ‘푸마’다.정확히 10년 전 푸마는 서류상으로 부도를 기록한 망해 가는 회사였다.8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면서 부채가 2억 5000만달러에 이르렀고,공장에는 10달러짜리 싸구려 운동화가 150만켤레나 쌓여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푸마는 ▲10년 연속 흑자에 ▲매출은 전년보다 40% 늘어난 16억달러 ▲수익은 전년보다 2배 늘어난 2억 2400만달러를 기록했다.푸마는 2년 뒤 매출 25억달러(약 3조원)의 그야말로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목표를 갖고 있다.그렇다면 무엇이 이같은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을까. ●서른 살의 CEO 푸마의 개혁을 이끈 주인공은 취임 당시 만 29세였던 조헨 자이츠 사장이다.6개 국어에 능통한 자이츠는 86년부터 미국의 생활용품회사인 콜게이트 팜올리브에서 근무하다가 88년 모국기업인 푸마의 마케팅팀으로 옮겼다.그리고 93년 사장에 발탁됐다. ●구조조정과 생산지 이전 자이츠가 사장이 된 뒤 처음 한 일은 독일 헤르조겐노라흐에 있던 생산공장을 폐쇄한 것이다.생산비 절감을 위해 생산시설 전체를 중국·베트남·타이완으로 옮겼다.이어 자이츠는 719명의 직원 가운데 절반 이상인 367명을 정리했다.구조조정 효과는 즉각 나타나 푸마는 94년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푸마의 장기적인 성장은 브랜드를 재창조한 데서 나왔다.자이츠는 나이키·아디다스 등 대형 스포츠업체와는 경쟁하기 어렵다고 보고 ‘다른 길’을 택했다.운동선수가 신는 스포츠화가 아니라 운동경기를 보는 사람들이 신는 ‘편하고 예쁜 신발’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말하자면 스포츠에 패션을 더한 것이다. 이도운기자 dawn@˝
  • [일요영화]

    ●굿바이 걸(EBS 오후 2시) 성격이 판이한 남녀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 코미디.재치 넘치는 대사와 빼어난 연기가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리처드 드레이퓌스,마샤 메이슨 주연. 전직 브로드웨이 댄서인 이혼녀 폴라는 ‘굿바이 걸’로 통한다.남자친구들에게 번번이 버림을 받기 때문이다.그녀 앞에 괴팍한 연극배우 엘리어트가 나타난다.옛 남자친구가 그에게 아파트를 세놓은 것.직장도 살 곳도 없는 모녀를 차마 내쫓지 못한 엘리어트는 마지못해 동거를 시작하고 사사건건 부딪친다.그러던 중 감독에게 해고된 뒤 술에 빠져 번민하는 엘리어트의 약한 모습에 폴라는 사랑을 느낀다. ●구름속의 산책(MBC 밤 12시30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알폰소 아라우 감독이 할리우드에 입성해 내놓은 전형적인 멜로 영화.네오 리얼리즘의 고전 ‘구름 위의 네 발자국’이 원작이다.순수한 이상주의자인 주인공 폴을 연기한 키아누 리브스의 매력이 돋보인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폴은 전쟁에 나가기 직전 급하게 결혼한 아내의 달라진 모습에 실망한다.아내의 성화에 초콜릿 장사에 나선 폴은 우연히 빅토리아를 만난다.큰 포도농장 주인의 딸인 그녀는 유학중 임신을 해 집으로 향하지만 완고한 아버지가 두렵다.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폴은 딱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해주기로 한다. ●플란다스의 개(SBS 오후 11시45분) ‘살인의 추억’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개를 잡아다 죽이는 남자와 그를 쫓는 여자의 평범한 이야기지만 그 속에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 있다.화장기 없는 얼굴,헐렁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파트 관리소 직원으로 나온 배두나는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고 2000년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했다. 조용한 중산층 아파트.백수나 다름없는 시간강사 윤주는 개짖는 소리에 질색한다.개짖는 소리를 멈추고 싶은 마음에 옆집 강아지를 끌고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지하실에 가둬둔다.그러나 그 개는 성대수술로 짖지 못한다.진짜 ‘범인’ 강아지를 찾아내고는 아파트 옥상에서 던져버린다.9시 뉴스 출연이 꿈인 현남은 정의감에 불타는 아파트 관리소 직원.정체 불명의 사내가 옥상에서 강아지를 던지는 것을 보고 뒤쫓기 시작한다. 박상숙기자 alex@ ˝
  • 금·석유·농산물펀드 나온다

    빠르면 올 상반기중 부동산과 금·석유·농산물 등의 실물자산에 투자하는 펀드(수익증권)상품이 출시될 것으로 보인다.기존 증권사와 은행뿐 아니라 보험사에서도 펀드상품을 판매하게 된다.이에 따라 자산운용서비스를 받으려는 투자자들의 간접투자상품 선택의 폭과 서비스가 크게 향상될 전망이다. ●간접투자 ‘업그레이드’ 지난해 8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하 자산운용업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최근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확정되면서 이르면 이달 말부터 이 법령에 따라 투신사·증권사·은행·보험사 등이 간접투자상품을 운용·판매하게 된다.자산운용업법의 가장 큰 특징은 펀드의 자산운용 대상이 대폭 확대돼 투자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펀드 실적공시 보고 등 투자자 보호가 강화된다는 점이다. 기존 투자신탁법에서는 주식·채권 등 유가증권 투자에 국한됐던 투자대상이 통화·금리·선물·옵션 등 장내외 파생상품과 부동산 개발 및 임대,금·석유·농산물 등의 실물자산,보험증권·금전채권·영화 등의 수익분배형 특정사업 등으로 대폭 확대된다.이에 따라 각각의 투자대상만 편입시킨 단품펀드는 물론,펀드간 이동이 가능한 ‘모자(母子)형’펀드,‘엄브랠러형’펀드도 활성화될 전망이다. 특히 기존 부동산투자회사(CR리츠)에 비해 자본금 제한이 없고 차입·대여가 가능한 부동산펀드 출시가 봇물을 이룰 전망이다.삼성투신운용 정성환 팀장은 “오는 6월쯤 부동산펀드를 선보일 예정이며,해외헤지펀드의 수익률을 추종하는 ‘헤지펀드 인덱스펀드’,금·니켈·원유 등 선물지수에 투자하는 ‘실물인덱스펀드’ 등도 잇따라 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부동산펀드는 CR리츠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투자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산운용업법 시행에 따라 금융권역간 업무영역도 허물어져 펀드 운용은 자산운용사와 은행,보험사가 할 수 있게 된다.판매는 기존 증권사와 은행에서 보험사가 추가돼 보험 지점이나 임직원도 다양한 펀드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자산운용협회 김철배 부장은 “기존에는 자산운용사가 계열 증권사를 통해서만 펀드를 팔았다면 앞으로는 은행·보험사 등으로 판매 채널을 넓히게 돼 ‘윈윈’전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투신업계 불꽃 경쟁 돌입 펀드 투자대상 확대로 자산운용업계의 경쟁도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은행금리 이상의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투자상품들이 출시되면 자연스럽게 투자자들이 은행에서 간접투자상품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으로 기대돼 국내외 자산운용사들이 앞다퉈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상품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현투증권을 인수한 푸르덴셜을 비롯,템플턴·PCA·슈로더·피델리티 등 외국계 자산운용사들이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양한 상품을 내놓을 채비를 하고 있다. 피델리티투자자문 관계자는 “상반기중 자산운용사를 설립,자산운용업법 시행에 맞춰 다양한 펀드판매를 시작할 것”이라면서 “한국 자산운용시장의 성장성이 큰 만큼 자산관리서비스를 원하는 투자자들을 공략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투·대투·삼성투신·미래에셋 등 기존 메이저 투신사들은 물론,마이다스·유리·세이에셋 등 중·소형사들도 증자 등을 통해 자본금을 확충,수익증권 판매에 나설 계획이다.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시장 선점을 위한 국내외 자산운용사들의 경쟁이 불가피한 만큼 운용 전문인력을 확충하고 객관적인 자산평가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측면돌파로 이란 뚫어라

    ‘자신감을 갖고 빠른 측면돌파를 감행하라.’ 5회 연속 올림픽본선 진출을 노리는 한국 올림픽축구대표팀이 17일 적지 테헤란에서 이란과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2차전을 갖는다.이란은 개인기와 체력,스피드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한국의 아테네행에 가장 큰 걸림돌임에 틀림없다.고지대 경기장도 부담이고,경기 당일 눈이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돼 더욱 어렵게 됐다.여기에다 홈 텃세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그러나 아무리 난적이라도 ‘아킬레스건’은 있기 마련.전문가들은 빠른 측면돌파를 이란 공략의 1순위로 들었다. ●조영증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위원(지난 3일 이란-말레이시아전 관전) 이란의 공격력은 가공할 만하다.특히 수비라인은 모두 180㎝가 넘는 장신으로 제공권 싸움에선 애를 먹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제공권은 뛰어나지만 반대로 순발력이 떨어진다.짧고 빠른 패스와 측면 돌파가 필요하다.이어 낮고 빠른 센터링으로 득점을 노려야 한다.수비에선 플레이메이커 모발리를 적극 봉쇄해야 한다.말레이시아전에서도 2골을 뽑는 등 골결정력도 탁월하다. 초반부터 상대의 파상공세가 예상되는 만큼 미드필드에서의 압박 수비로 저지하면서 분위기를 익힌 뒤 역습으로 허를 찌르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박항서 프로축구 포항 코치(2002부산아시안게임 감독) 2002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이란과 겨룬 적이 있다.현 이란올림픽팀에 당시 선수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경험을 되살리자면 분명히 한국보다 한수위인 부분이 있다.그러나 민첩성이 뒤진다.빠른 공격이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마인드 컨트롤이다.젊은 선수들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지대라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또 지난 아시안게임의 패배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우리가 못했거나 밀린 경기가 아니었다. 홈팬들의 압도적인 응원 속에서 경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코칭스태프 또는 선수들 스스로 심리적인 컨트롤을 잘해야 할 것이다.얼마나 정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느냐가 이번 경기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박종환 프로축구 대구FC 감독(83멕시코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감독)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숨이 턱 밑까지 차온다.해발 2000m가 넘는 고지대 경기는 선수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줬다.당시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이번 올림픽팀도 쿤밍에서 1주일 정도 적응훈련을 했다지만 실전에선 애를 먹을 것이다. 우선 강약조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지대인 만큼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한국에서 하듯이 공격 일변도는 패배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수비때는 공을 멀리 외곽으로 차내면서 시간을 버는 방법도 체력유지에 도움을 준다.이를 위해 코칭스태프의 역할이 중요하다.상대의 일방적인 응원으로 자칫 어린 선수들이 평상심을 잃기 쉽다.또 경기전 물을 많이 마셔 두는 것이 좋다.호흡이 쉽게 거칠어지고 입술이 타는 현상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것이다. 박준석 홍지민기자 pjs@˝
  • 儒林(5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를 비롯하여 8인의 죄수에게 내린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근래 너희들이 벌인 조정에서의 처사는 과격하여 과오를 범하게 되었으니 조정 일에 잘못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이번 일에 과인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또한 조정의 대신들 역시 어찌 달리 사사로운 마음이 있겠는가.너희들로 하여금 이에 이르도록 한 것은 과인이 밝지 못하여 능히 미리 대처하지 못한 탓이다.너희들의 죄는 만약 형률(刑律)로서만 다스린다면 단순히 귀양보내는 것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너희들에게도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단지 나라를 위하려고 한 나머지 과격함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니,말감으로서 죄를 확정한 것이며,만약 보통의 죄수라면 이런 교지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너희들이 오래 시종으로 있었으니 과인인들 너희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이번에 나랏일을 그르친 죄를 형률로 다스리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유배를 떠나도록 하라.” 8인의 죄수들은 무릎을 꿇고 군주의 교지를 들었다. 말감(末減).가장 가벼운 형량으로 고쳐 죄를 확정하였다는 중종의 교지를 듣는 순간 조광조의 눈에서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김정은 마지막으로 8명의 유배지를 확정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능주에,김정은 금산(錦山)에,김구는 개령(開寧)에,김식은 선산(善山)에,박세희는 상주(尙州)에,박훈은 성주(星州)에,윤자임은 온양(溫陽)에,기준은 아산(牙山)으로 각자의 유배형에 처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김식이 쓴웃음을 지으며 울고 있는 조광조를 향해 말하였다. “대감,마침내 우리들이 이매가 되고 말았소이다.” 이매(魅)는 ‘산도깨비’를 가리키는 말로 숲 속에 사는 이상한 기운으로 생기는 괴물이었다.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몸을 한 네발 가진 도깨비를 말하는데,사람을 해치는 온갖 도깨비나 귀신을 가리키는 ‘이매망량’의 준말인 것이다.예부터 중국에서는 이 산도깨비인 이매를 막기 위해서는 이들을 각각 사이(四夷)의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가능하다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을 빗대어 김식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여 자조하였던 것이다. “대감,우리가 마침내 산도깨비가 되고 말았소이다그려.” 김식이 말하였던 대로 괴수 중의 괴수인 조광조는 가장 먼 능주로 유배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그 죄상에 따라 한양에서 가까운 거리로 나뉘어져 안치되는 것이다.이렇듯 각각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조정이 안정된다고 교지를 내렸으니 이는 자신들을 사람을 홀리는 산도깨비,즉 이매로 취급하는 처사가 아닐 것인가 하고 김식이 비꼬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식의 태도와는 달리 조광조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신들이 비록 떠나갑니다만 어찌 신들이 주상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들의 처사가 너무 과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정치를 펼쳐보려고 과격할 만큼 열과 성의를 다하였던 조광조 일파의 신진세력들은 끈질기고 조직적인 훈구세력들의 반격으로 마침내 산도깨비로 몰려 변방으로 쫓겨 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기묘사화의 전말인 것이다. 이때가 중종 14년,1519년 11월 17일 아침이었다.˝
  • 儒林(5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51)-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를 비롯하여 8인의 죄수에게 내린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근래 너희들이 벌인 조정에서의 처사는 과격하여 과오를 범하게 되었으니 조정 일에 잘못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이번 일에 과인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또한 조정의 대신들 역시 어찌 달리 사사로운 마음이 있겠는가.너희들로 하여금 이에 이르도록 한 것은 과인이 밝지 못하여 능히 미리 대처하지 못한 탓이다.너희들의 죄는 만약 형률(刑律)로서만 다스린다면 단순히 귀양보내는 것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너희들에게도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단지 나라를 위하려고 한 나머지 과격함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니,말감으로서 죄를 확정한 것이며,만약 보통의 죄수라면 이런 교지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너희들이 오래 시종으로 있었으니 과인인들 너희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이번에 나랏일을 그르친 죄를 형률로 다스리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유배를 떠나도록 하라.” 8인의 죄수들은 무릎을 꿇고 군주의 교지를 들었다. 말감(末減).가장 가벼운 형량으로 고쳐 죄를 확정하였다는 중종의 교지를 듣는 순간 조광조의 눈에서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김정은 마지막으로 8명의 유배지를 확정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능주에,김정은 금산(錦山)에,김구는 개령(開寧)에,김식은 선산(善山)에,박세희는 상주(尙州)에,박훈은 성주(星州)에,윤자임은 온양(溫陽)에,기준은 아산(牙山)으로 각자의 유배형에 처한다.” 묵묵히 듣고 있던 김식이 쓴웃음을 지으며 울고 있는 조광조를 향해 말하였다. “대감,마침내 우리들이 이매가 되고 말았소이다.” 이매(魅)는 ‘산도깨비’를 가리키는 말로 숲 속에 사는 이상한 기운으로 생기는 괴물이었다.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몸을 한 네발 가진 도깨비를 말하는데,사람을 해치는 온갖 도깨비나 귀신을 가리키는 ‘이매망량’의 준말인 것이다.예부터 중국에서는 이 산도깨비인 이매를 막기 위해서는 이들을 각각 사이(四夷)의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가능하다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을 빗대어 김식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여 자조하였던 것이다. “대감,우리가 마침내 산도깨비가 되고 말았소이다그려.” 김식이 말하였던 대로 괴수 중의 괴수인 조광조는 가장 먼 능주로 유배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그 죄상에 따라 한양에서 가까운 거리로 나뉘어져 안치되는 것이다.이렇듯 각각 먼 변방으로 쫓아내야만 조정이 안정된다고 교지를 내렸으니 이는 자신들을 사람을 홀리는 산도깨비,즉 이매로 취급하는 처사가 아닐 것인가 하고 김식이 비꼬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식의 태도와는 달리 조광조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신들이 비록 떠나갑니다만 어찌 신들이 주상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들의 처사가 너무 과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정치를 펼쳐보려고 과격할 만큼 열과 성의를 다하였던 조광조 일파의 신진세력들은 끈질기고 조직적인 훈구세력들의 반격으로 마침내 산도깨비로 몰려 변방으로 쫓겨 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기묘사화의 전말인 것이다. 이때가 중종 14년,1519년 11월 17일 아침이었다.
  •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소위 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대개 천성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도 또한 없는 것이 없습니다.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작게는 제도문물(制度文物)이 모두 사람의 힘을 빌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자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당연한 도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업적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며,그 찬란한 빛이 고금을 꿰뚫고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은 나의 마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도리가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환히 비추어야만 하며 잠깐이라도 내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나서 조광조는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야 한다’는 공자사상의 핵심인 ‘근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밝게 드러난 곳에서는 삼가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가짐이 소홀하기 마련입니다.그윽하게 감추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신하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일까지 다볼 수 있습니다.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다 아는 것입니다.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가짐이 소홀하게 되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혼자 있을 때는 꼭 삼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압니다.이러한 나쁜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런 나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드러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추어둘 수가 없으며 마침내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됩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항상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혼미(昏迷)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는 오히려 더욱 근신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추호라도 거짓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는 지극히 선하고,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이 서고 법도가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조광조의 답안은 다음과 같은 끝맺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오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시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要諦)로 삼으십시오.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개월이면 충분하며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 본 뜻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제가 감히 지엄하신 임금님 앞에서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잡으려는 중종에게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즉 하늘의 천성인 명도(明度)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또 하나는 중종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근독(謹獨)의 두 사상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그리고 4년 동안 화려한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4년 만에 이러한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되었으며,마침내 조광조를 숙청 끝에 사사케 하였으니,이는 권력자가 가진 변덕 때문인가,아니면 자신이 곧 정의라는 권력의 환상성 때문인가. 어쨌든 조선 제11대 왕으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그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함으로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무능하고 일관성 없는 통치력으로 유례없는 나라의 대혼란을 초래하였으니,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조심해야할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용,즉 최고의 권력자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소위 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대개 천성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도 또한 없는 것이 없습니다.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작게는 제도문물(制度文物)이 모두 사람의 힘을 빌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자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당연한 도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업적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며,그 찬란한 빛이 고금을 꿰뚫고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은 나의 마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도리가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환히 비추어야만 하며 잠깐이라도 내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나서 조광조는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야 한다’는 공자사상의 핵심인 ‘근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밝게 드러난 곳에서는 삼가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가짐이 소홀하기 마련입니다.그윽하게 감추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신하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일까지 다볼 수 있습니다.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다 아는 것입니다.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가짐이 소홀하게 되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혼자 있을 때는 꼭 삼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압니다.이러한 나쁜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런 나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드러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추어둘 수가 없으며 마침내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됩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항상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혼미(昏迷)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는 오히려 더욱 근신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추호라도 거짓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는 지극히 선하고,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이 서고 법도가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조광조의 답안은 다음과 같은 끝맺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오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시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要諦)로 삼으십시오.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개월이면 충분하며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 본 뜻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제가 감히 지엄하신 임금님 앞에서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잡으려는 중종에게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즉 하늘의 천성인 명도(明度)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또 하나는 중종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근독(謹獨)의 두 사상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그리고 4년 동안 화려한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4년 만에 이러한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되었으며,마침내 조광조를 숙청 끝에 사사케 하였으니,이는 권력자가 가진 변덕 때문인가,아니면 자신이 곧 정의라는 권력의 환상성 때문인가. 어쨌든 조선 제11대 왕으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그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함으로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무능하고 일관성 없는 통치력으로 유례없는 나라의 대혼란을 초래하였으니,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조심해야할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용,즉 최고의 권력자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 [씨줄날줄] 권한대행/이상일 논설위원

    부기관장은 먼저 입을 다스려야 한다.부(副)를 파자(破字)하면 의미가 분명하다.칼(-)아래 입(口)이 있고 입안에 칼(口안에 十)이 있으며 칼을 옆에 두고 서 있다는 뜻이다.국무총리는 행정부 권력 2인자이지만 입단속과 처신을 잘못하면 단칼에 목이 날아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회창 당시 국무총리의 경질이유를 설명했다.“내(대통령)가 외유중인데 총리가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에게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고 장관들에게 대통령과의 독대내용도 보고토록 요구했다.…이 총리는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 꺼려했다.” 민주적 표류형(장면 대통령)이나 소극적 적응형(노태우)보다 특히 가부장형(이승만) 야수형(박정희),승부사적 대통령(김영삼)하에서 총리의 위치는 더욱 약할 수밖에 없다.실제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총리는 국정 실패의 책임을 대통령 대신 지는 ‘방탄총리’,연설문을 대신 읽는 ‘대독총리’,신선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얼굴마담 총리’에 그쳤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 등은 ‘대통령의 성공조건’에서 “우리나라 총리의 권한은 대통령이 위임한 것이지 총리 자신의 공식 권한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DJ정권 초기 김종필 총리는 예외적으로 힘을 갖고 있었다.지난 1999년 7월 청와대에 압력을 넣어, 특검제를 놓고 이견을 빚은 여당인 국민회의 김영배 총재 권한대행(權限代行)을 연임 5시간만에 전격 퇴임시켰다.김 총리의 권력은 총리 파워라기보다 당시 공동여당 지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른 데서 부여받거나 차입한 권력은 취약하기 마련인 것이다.법상 기관이나 그 구성원의 권한을 다른 기관과 사람이 대신 행사하는 ‘권한대행’의 한계가 거기에 있다.국회의 대통령 탄핵 의결이후 고건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국정이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적으로 권한대행자는 대통령의 권한을 모두 대신 행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정책이나 장관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법학계의 다수 의견이다.그렇지 않아도 권력기반이 약한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들 힘을 쓸 수 있을까.아무리 총리가 적극 나서도 대통령의 빈 자리가 깊어보이고 국정이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 황사 맞은날 명태로 씻으세요

    황사가 심할 때는 외출을 삼가는 것이 최고다.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황사가 몰아칠 때마다 집안이나 사무실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득이하게 황사 바람 맞은 날,샤워를 해 보지만 기분은 영 찝찝하다.이럴 때 몸 밖만 씻지 말고 몸 속도 깨끗이 씻어 낸다면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황사가 기승 부릴 때,독성을 ‘뽑아내는’음식 덕 한번 보자. ●몸안 독성 제거엔 명태가 으뜸 황태·북어·동태 등 여러 가지 형태와 맛으로 즐길 수 있는 명태.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저렴하면서 비싼 약재보다 효능 면에서 낫다.명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취 해소에 좋을 뿐만 아니라 몸 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독성을 제거한다.또 알레르기 체질을 개선하고 알레르기로 인한 통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다.봄철 황사와 꽃가루로 고생하는 알레르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명태는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하면서 지방이 적고 콜레스테롤이 거의 없어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명태를 이용해 각종 요리를 만들어 먹어도 좋고 국물이 진하게 우러날 때까지 명태국을 끓여 국물만 냉장고에 따로 넣어 두고 음료수처럼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황사에 좋은 식품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돼지고기다.폐에 쌓인 공해 물질을 중화시켜 주고 체내 중금속을 흡착·배설하는 효과가 크다.돼지고기의 불포화 지방산이 탄산가스를 중화해 폐에 쌓인 공해 물질을 중화시키기 때문이다.황사로 인한 미세 먼지를 많이 마시는 중국인들이 돼지고기를 즐기는 것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식습관인 셈이다. ●독소 씻어내는데 빠질 수 없는 식품,된장 된장은 장을 건강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몸속 여러 불순물과 독소를 씻어내는 식품이다.가공 식품이나 식품 첨가제,방부제 등의 화학물질을 몸에서 걸러준다.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의 독소를 분해하고 니코틴을 체외로 배출시킨다.따라서 이런 된장을 황사로 괴로운 시기에 자주 먹으면 우리 몸속에 유해 물질이 쌓이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차조기·사과·양파 등도 황사철 좋은 음식 한방에서 소엽(잎 부분)·소자(열매)라고 불리는 차조기의 대표적인 효능이 바로 해독작용이다.들깨와 모양이 비슷하면서 자줏빛을 띠는 차조기는 독성을 중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또 차조기의 식물성 섬유 등은 장을 통과할 때 여러 가지 이물질을 대변으로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차조기의 생즙을 마시거나 소엽을 생식 혹은 달여서 마시면 좋다. 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 특히 흡연자에게 필수적인 음식으로 알려진 사과 역시 황사철에 먹으면 좋다.이는 사과의 주요 성분인 펙틴 덕분이다.펙틴은 탄수화물의 한가지로 채소의 섬유질처럼 장의 운동을 자극해 장을 깨끗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성분.장에 젤리 모양의 벽을 만들어 유독성 물질의 흡수를 막는다.특히 펙틴은 알루미늄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효과가 있다. 여러모로 우리 몸에 이로운 역할을 하는 양파는 항알레르기 작용도 한다.그래서 황사철 나타나는 대표적인 질환인 기관지 천식이나 피부발진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다. 이밖에 식이섬유가 유해물질을 해독시키는 미나리,몸 속 독을 분해해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쑥,대표적인 봄나물 냉이 등도 황사철 우리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식품들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 ■ 도움말 이경섭 강남경희한방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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