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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트로 라운지]부천 실내스키돔 상가 분양

    국내 최초로 경기도 부천에 들어설 실내스키장의 상가시설이 분양된다. 실내스키장 건설업체인 ‘㈜정인코아’측은 스키장과 골프연습장 부대시설로 건축할 예정인 상가를 1일부터 공개 분양한다. 매각 대상 상가는 1층 단층으로 총 200여개이며,상가당 분양면적은 10∼50평으로 분양 예정가는 평당 3200만원대이다. 상가 주요 업종은 ▲골프숍이나 스키,레저용품 등 스포츠용품점 ▲나이키,아디다스,휠라 등 스포츠 의류매장 ▲엘로드,핑,올포유 등 골프의류용품 ▲패밀리레스토랑,일식,한식 등 전문음식점 ▲편의점,약국,보석 등 생활용품 등이다.또 패스트푸드점과 스낵코너 등도 들어선다. 부천 소재 레저산업 전문업체인 정인코아측은 부천 상동신도시내 체육시설부지 2만 5600여평에 국내 최초의 실내스키돔 및 길이 270m의 골프연습장,수영과 물놀이시설을 겸한 ‘워터파크’ 등 ‘부천 스포츠문화센터’를 세우는 건축허가를 지난달 4일 부천시로부터 받았다. 스포츠문화센터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 IC에서 500m 떨어져 있고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국도,경인전철 등이 인근으로 지나는 등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메트로 라운지]부천 실내스키돔 상가 분양

    국내 최초로 경기도 부천에 들어설 실내스키장의 상가시설이 분양된다. 실내스키장 건설업체인 ‘㈜정인코아’측은 스키장과 골프연습장 부대시설로 건축할 예정인 상가를 1일부터 공개 분양한다. 매각 대상 상가는 1층 단층으로 총 200여개이며,상가당 분양면적은 10∼50평으로 분양 예정가는 평당 3200만원대이다. 상가 주요 업종은 ▲골프숍이나 스키,레저용품 등 스포츠용품점 ▲나이키,아디다스,휠라 등 스포츠 의류매장 ▲엘로드,핑,올포유 등 골프의류용품 ▲패밀리레스토랑,일식,한식 등 전문음식점 ▲편의점,약국,보석 등 생활용품 등이다.또 패스트푸드점과 스낵코너 등도 들어선다. 부천 소재 레저산업 전문업체인 정인코아측은 부천 상동신도시내 체육시설부지 2만 5600여평에 국내 최초의 실내스키돔 및 길이 270m의 골프연습장,수영과 물놀이시설을 겸한 ‘워터파크’ 등 ‘부천 스포츠문화센터’를 세우는 건축허가를 지난달 4일 부천시로부터 받았다. 스포츠문화센터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중동 IC에서 500m 떨어져 있고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국도,경인전철 등이 인근으로 지나는 등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儒林(12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2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변방국의 불리한 점을 역이용하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백리해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군주께서 덕으로 백성들을 대하고 힘으로 적국을 정벌하여 변경지역을 안정시킨 후에 산천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중원의 제후국과 대치하고 있다가 중원에서 난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그 기회를 틈타 중원으로 나아가 덕과 위엄으로 다스린다면 반드시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목공은 계속해서 백리해와 사흘간을 얘기했으나 어떤 대답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이에 목공은 무릎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내가 정백(井伯,백리해)을 얻은 것은 제후(齊侯)가 관중(管仲)을 얻은 것과 같도다.” 곧이어 백리해에게 상경이란 벼슬을 주고 나라의 모든 정치를 맡겼는데,진나라 사람들은 백리해를 숫양가죽 다섯 개를 주고 데려왔다고 해서 오고대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훗날 초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백리해를 양가죽 다섯 장을 바치고 마구간에서 꺼내와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은 목공의 심미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죄수를 빼내와 재상으로 삼은 일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일인데,관중에 이어 또다시 백리해가 있었음을 들었네.진의 이름이 중원에 빛나기 시작한 것은 백리해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몸값은 불과 양가죽 다섯 장뿐이었네(脫囚拜相事眞奇 仲后重聞百里奚 從此西秦名顯赫 不虧身價五羊皮).” 공자의 대답을 듣고 경공이 크게 기뻐했던 것은 공자의 대답이 목공에게 백리해란 뛰어난 재상이 있듯이 경공에게는 안영이란 뛰어난 재상이 있으니,패업을 이룰 수 있다는 간접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자는 안영을 뛰어난 정치가로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그와 같은 안영을 등용한 경공은 목공의 탁월한 인재술과 비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논어에서 안영을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랫동안 남을 잘 공경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약과로, 안영의 어록을 기록해 놓은 ‘안자춘추’에는 공자가 안영을 소위 ‘불법(不法)의 예’란 최상의 찬사로 극찬하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안영이 노나라의 사신으로 와서 군왕을 알현했을 때 공자는 후학을 위해 제자들에게 안영의 언행을 견학토록 하였다.이를 견학하고 돌아온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예에 이르기를 ‘계단에 오르되 넘지를 말고 단상에서는 달리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안영의 행동은 이에 모두 반하고 있었으니,따라서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원래 외국 사신들은 계단을 오를 때는 한 단씩 천천히 오르고,단상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는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법도였던 것이다. 평소에 예라는 것을 인간의 행동규범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공자는 이 말을 듣자 평소 마음으로 공경해마지 않는 선배(안영은 공자보다 30세가량 위였다)가 이처럼 무례하였다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므로 안영을 찾아가 그 진의를 따지기로 결심한다.
  • 儒林(12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변방국의 불리한 점을 역이용하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백리해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군주께서 덕으로 백성들을 대하고 힘으로 적국을 정벌하여 변경지역을 안정시킨 후에 산천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중원의 제후국과 대치하고 있다가 중원에서 난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그 기회를 틈타 중원으로 나아가 덕과 위엄으로 다스린다면 반드시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목공은 계속해서 백리해와 사흘간을 얘기했으나 어떤 대답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이에 목공은 무릎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내가 정백(井伯,백리해)을 얻은 것은 제후(齊侯)가 관중(管仲)을 얻은 것과 같도다.” 곧이어 백리해에게 상경이란 벼슬을 주고 나라의 모든 정치를 맡겼는데,진나라 사람들은 백리해를 숫양가죽 다섯 개를 주고 데려왔다고 해서 오고대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훗날 초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백리해를 양가죽 다섯 장을 바치고 마구간에서 꺼내와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은 목공의 심미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죄수를 빼내와 재상으로 삼은 일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일인데,관중에 이어 또다시 백리해가 있었음을 들었네.진의 이름이 중원에 빛나기 시작한 것은 백리해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몸값은 불과 양가죽 다섯 장뿐이었네(脫囚拜相事眞奇 仲后重聞百里奚 從此西秦名顯赫 不虧身價五羊皮).” 공자의 대답을 듣고 경공이 크게 기뻐했던 것은 공자의 대답이 목공에게 백리해란 뛰어난 재상이 있듯이 경공에게는 안영이란 뛰어난 재상이 있으니,패업을 이룰 수 있다는 간접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자는 안영을 뛰어난 정치가로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그와 같은 안영을 등용한 경공은 목공의 탁월한 인재술과 비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논어에서 안영을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랫동안 남을 잘 공경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약과로, 안영의 어록을 기록해 놓은 ‘안자춘추’에는 공자가 안영을 소위 ‘불법(不法)의 예’란 최상의 찬사로 극찬하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안영이 노나라의 사신으로 와서 군왕을 알현했을 때 공자는 후학을 위해 제자들에게 안영의 언행을 견학토록 하였다.이를 견학하고 돌아온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예에 이르기를 ‘계단에 오르되 넘지를 말고 단상에서는 달리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안영의 행동은 이에 모두 반하고 있었으니,따라서 안영이 예에 정통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원래 외국 사신들은 계단을 오를 때는 한 단씩 천천히 오르고,단상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옥을 받을 때는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법도였던 것이다. 평소에 예라는 것을 인간의 행동규범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공자는 이 말을 듣자 평소 마음으로 공경해마지 않는 선배(안영은 공자보다 30세가량 위였다)가 이처럼 무례하였다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으므로 안영을 찾아가 그 진의를 따지기로 결심한다.˝
  • [시네마 천국]극단 이루 ‘눈 먼 아비…‘

    [시네마 천국]극단 이루 ‘눈 먼 아비…‘

    극단 이루의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손기호 작·연출)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로 작정한 듯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가족에게 이렇듯 가혹한 운명을 내릴 수 있을까.어릴 때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정신지체가 있는 아버지(김학선),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신체장애 어머니(염혜란),그리고 소아암을 앓는 12살 외아들 선호(장정애).연극은 이들 가족의 남다른 가족애를 풀어놓는다. 어눌하지만 속정깊은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든 아들이 극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면,수다스럽고 주책맞지만 모정은 누구보다 강한 엄마는 객석에 웃음꽃을 피게하는 유일한 인물이다.국악인 정마리가 선호의 죽은 누나로 분해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전통 민요를 들려주는 막간 시도도 참신하다.경주 사투리는 구수한 맛을 살리는 장점이 있지만 간간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부분도 없지 않다. 마음 약한 관객들은 손수건을 꼭 챙기시길.7월4일까지 동숭무대소극장(02)762-919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시네마 천국]극단 이루 ‘눈 먼 아비…‘

    극단 이루의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손기호 작·연출)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로 작정한 듯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가족에게 이렇듯 가혹한 운명을 내릴 수 있을까.어릴 때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정신지체가 있는 아버지(김학선),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신체장애 어머니(염혜란),그리고 소아암을 앓는 12살 외아들 선호(장정애).연극은 이들 가족의 남다른 가족애를 풀어놓는다. 어눌하지만 속정깊은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든 아들이 극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면,수다스럽고 주책맞지만 모정은 누구보다 강한 엄마는 객석에 웃음꽃을 피게하는 유일한 인물이다.국악인 정마리가 선호의 죽은 누나로 분해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전통 민요를 들려주는 막간 시도도 참신하다.경주 사투리는 구수한 맛을 살리는 장점이 있지만 간간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부분도 없지 않다. 마음 약한 관객들은 손수건을 꼭 챙기시길.7월4일까지 동숭무대소극장(02)762-919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121)-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공자는 계씨가 팔일무를 자신의 묘정에서 춤추게 한 일과 삼환씨의 집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천자처럼 옹을 노래한 사실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예는 무엇 할 것이며,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은 무엇 할 것이냐.” 이때 공자는 젊은 시절 승전리(承田吏)라는 하찮은 벼슬에만 잠깐 몸담고 있었을 뿐,이미 그의 명망이 커짐에 따라 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여 제자들과 더불어 유가(儒家)를 이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공자는 ‘스스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30대로 접어들면서 공자의 학문과 경륜은 더욱 원숙해져서 명망은 이웃나라로 널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노나라에서는 대사건이 벌어진다.곧 노나라의 임금인 소공은 세력이 강했던 계평자가 지나치게 방자한 것을 참지 못하고 궁중쿠데타로 계씨를 제거하려 하였다.처음에는 성공할 듯도 보였지만 ‘계손씨 없이는 숙손씨도 있을 수 없다.’는 자각아래 삼환씨들이 힘을 합쳐 소공에게 일대반격을 가했던 것이다.왜냐하면 삼환씨들은 모두 16대왕인 환공의 후손들로 서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진 소공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제나라로 도망친다.제나라에서는 소공을 도와 노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갖은 방법을 강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소공은 결국 7년이란 세월을 외국에서 보낸 후 객사하게 되지만 어쨌든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고 첫 번째 출국을 단행했을 때에는 소공이 전쟁에서 패퇴한 후 제나라로 도망쳤던 바로 그 내전이 있은 직후였던 것이다. 소공을 쫓아낸 뒤에 계씨의 세도는 더 강력해졌다.공자는 임금까지도 쫓아내는 귀족들의 권력투쟁과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만을 노리며 날파리처럼 날아 다니는 관리들에 극도로 실망한 후 이미 노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출국하였던 것이다.그러므로 공자가 가는 도중에 만난 한 여인의 눈물을 통해 “잘 명심토록 하여라.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도 더 사나운 것이다.”란 말을 남긴 것은 여인의 경우를 빗대어 자신이 떠나온 가혹한 정치로 도탄에 빠져 있는 노나라를 질타하기 위한 일성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자신의 망명지로 제나라로 택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이미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소공이 노나라를 도망쳐 제나라로 망명하였던 때문이고,또 하나는 제나라에는 경공(景公)과 안영(晏)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특히 공자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정치가로 인정받고 있는 안영에게 깊은 호의를 갖고 있었다. 논어의 공야장(公冶長)편에서도 공자는 안영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안평중(안영)은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래도록 남을 잘 공경하였다.” 공자는 뛰어난 안영을 재상으로 등용할 수 있다면 경공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명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들과는 구면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5년 전,그러니깐 소공 20년 공자의 나이 30세 때 경공이 재상 안영과 함께 노나라를 방문하여 예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공자세가’에는 이때 경공과 나눈 공자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나라의 목공은 작은 나라로서 편벽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패업을 이룬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 질문에 공자는 대답한다. ‘진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목공의 뜻이 컸고,위치는 편벽하였지만 그의 행동은 발랐습니다.몸소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여 대부의 벼슬을 주었는데,죄인으로 묶여있는 중에 등용하여 사흘 동안 얘기해본 끝에 그에게 정사를 맡겼던 것입니다.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왕자가 되어도 마땅하며,그가 패업을 이루었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것입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 儒林(121)-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21)-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공자는 계씨가 팔일무를 자신의 묘정에서 춤추게 한 일과 삼환씨의 집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천자처럼 옹을 노래한 사실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예는 무엇 할 것이며,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은 무엇 할 것이냐.” 이때 공자는 젊은 시절 승전리(承田吏)라는 하찮은 벼슬에만 잠깐 몸담고 있었을 뿐,이미 그의 명망이 커짐에 따라 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하여 제자들과 더불어 유가(儒家)를 이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공자는 ‘스스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30대로 접어들면서 공자의 학문과 경륜은 더욱 원숙해져서 명망은 이웃나라로 널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노나라에서는 대사건이 벌어진다.곧 노나라의 임금인 소공은 세력이 강했던 계평자가 지나치게 방자한 것을 참지 못하고 궁중쿠데타로 계씨를 제거하려 하였다.처음에는 성공할 듯도 보였지만 ‘계손씨 없이는 숙손씨도 있을 수 없다.’는 자각아래 삼환씨들이 힘을 합쳐 소공에게 일대반격을 가했던 것이다.왜냐하면 삼환씨들은 모두 16대왕인 환공의 후손들로 서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진 소공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제나라로 도망친다.제나라에서는 소공을 도와 노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갖은 방법을 강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소공은 결국 7년이란 세월을 외국에서 보낸 후 객사하게 되지만 어쨌든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고 첫 번째 출국을 단행했을 때에는 소공이 전쟁에서 패퇴한 후 제나라로 도망쳤던 바로 그 내전이 있은 직후였던 것이다. 소공을 쫓아낸 뒤에 계씨의 세도는 더 강력해졌다.공자는 임금까지도 쫓아내는 귀족들의 권력투쟁과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만을 노리며 날파리처럼 날아 다니는 관리들에 극도로 실망한 후 이미 노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출국하였던 것이다.그러므로 공자가 가는 도중에 만난 한 여인의 눈물을 통해 “잘 명심토록 하여라.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도 더 사나운 것이다.”란 말을 남긴 것은 여인의 경우를 빗대어 자신이 떠나온 가혹한 정치로 도탄에 빠져 있는 노나라를 질타하기 위한 일성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자신의 망명지로 제나라로 택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이미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소공이 노나라를 도망쳐 제나라로 망명하였던 때문이고,또 하나는 제나라에는 경공(景公)과 안영(晏)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특히 공자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정치가로 인정받고 있는 안영에게 깊은 호의를 갖고 있었다. 논어의 공야장(公冶長)편에서도 공자는 안영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안평중(안영)은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래도록 남을 잘 공경하였다.” 공자는 뛰어난 안영을 재상으로 등용할 수 있다면 경공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명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들과는 구면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5년 전,그러니깐 소공 20년 공자의 나이 30세 때 경공이 재상 안영과 함께 노나라를 방문하여 예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공자세가’에는 이때 경공과 나눈 공자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나라의 목공은 작은 나라로서 편벽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패업을 이룬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 질문에 공자는 대답한다. ‘진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목공의 뜻이 컸고,위치는 편벽하였지만 그의 행동은 발랐습니다.몸소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여 대부의 벼슬을 주었는데,죄인으로 묶여있는 중에 등용하여 사흘 동안 얘기해본 끝에 그에게 정사를 맡겼던 것입니다.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왕자가 되어도 마땅하며,그가 패업을 이루었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것입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 [열린세상] 말의 경제를 생각할 때/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공동대표

    사토라레는 사념파가 너무 강해서 마음 속 생각이 남들에게 여과없이 전부 들리는 비정상적인 천재들이다.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속내와 비밀을 간직할 수 없다는 데 그들의 비극이 있다.사토라레가 밤새 고통스러운 생각으로 뒤척이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다.그들의 고통을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사토라레’라는 일본영화에 등장하는 허구적인 시나리오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하생활자들이 보여주는 풍경을 실감하기 힘들 것이다.하늘 한 조각,나무 한 그루,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곳이 지하공간이다.이처럼 밀폐된 환경 속에서 30분 이상 달리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 요인이 된다.스트레스 요인은 그뿐만이 아니다.눈과 귀는 잠시도 쉴 틈이 없다.수상한 자를 보면 신고하라는 방송에서부터 지하철 대형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계도용 방송에 이르기까지,구걸하는 사람들이 틀어주는 복음송가에서부터 행상들이 토하는 열변에 이르기까지,지하철의 소음공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어디를 둘러보아도 광고와 부딪치지 않는 한 시선 둘 곳도 없다.이런 지하 환경은 사람들에게 막연한 초조와 불안을 넘어 공격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지하철에서는 변형된 형태의 사토라레들과 어디서나 마주치게 된다.휴대전화로 무장한 사토라레들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말들을 나눈다.이들 중에는 생계형도 있고 수다형도 있다.온라인상으로 일하는 e-랜서들에게는 사무실이 따로 없다.노트북을 펼칠 공간만 있으면 그곳이 곧 사무실이다.그 외에도 생계형 사토라레들은 지하철 안에서도 휴대전화로 비즈니스를 한다.그야말로 현대판 유목민들이다. 유목민 생계형이 아닌 경우는 주로 수다형에 속한다.누가 여자만 수다스럽다고 했을까? 휴대전화를 손에 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다형이다. 우리 시대의 사토라레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한다.이들이 ‘생방송’으로 뿜어내는 말들은 심각한 소음공해를 일으킨다.자기 말에 몰입한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끼치는 스트레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이 듣고 있는 외설적인 장면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만약 우리가 하는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가장 초보적 게임인 테트리스의 블록처럼 차곡차곡 대기 중에 쌓인다면 어떻게 될까? 무수히 쌓이는 말들의 블록으로 인해 허공은 더 이상 허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말의 블록으로 에워싸인 언어의 감옥에 갇혀 숨쉬기조차 힘들 것이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토라레들은 접속 중독처럼 보인다.요즘 사람들에게 휴대전화가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웬만한 집에서는 한 달 쌀값보다는 통신요금이 훨씬 더 많이 나올 것이다.휴대전화가 없다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뜻할 정도로 휴대전화 중독증세는 만연되어 있다. 중독이 보편화되면 중독은 더 이상 중독이 아니라 생필품이고 일상생활이 된다.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비존재가 되어버린다.그런데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것처럼 오히려 고독해 보인다.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모든 연락망이 두절되어 있었다.그녀는 또다시 묵언(默言) 수행에 들어간 모양이었다.그 친구는 세상과 연결된 모든 통로를 가끔씩 두절시켜 놓는다.묵언 수행의 참뜻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한다.남발한 말들이 오히려 언어를 고갈시키고 있다.무의미한 소음들이 아니라 의미있는 말들이 서로 교통하려면 말을 조금 아끼고 자기를 성찰할 시간을 좀더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공동대표˝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9) 토기의 넋을 찾아서

    지나친 편리함과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욕망이 회색도시를 만들었다.기계화,자동화로 설명되는 편리함은 삶의 틀 자체까지 변화시키고 있다.또한 이익을 키우기 위해서는 영혼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혼란,무질서,인간 상실로도 일컬어지는 회색도시는 철구조물을 뼈대로 삼고 콘크리트로 살을 입혀 만든 욕망의 그림자다.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발바닥에는 흙이 묻지 않는다.흙을 밟지 않고 산다.흙으로 이루어진 대지(大地) 위에 살면서도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갇혀버렸다.고층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기는 평생토록 흙을 밟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흙으로부터 추방된 도시인을 만든 것은 도시인 스스로의 욕망이다.어느새 도시인들은 차츰 흙을 그리워한다.한 주일 또는 한 달에 한 번쯤이라도 흙을 밟아봐야만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는 듯이 시간이 나면 아파트를 빠져나와 흙이 살아있는 산과 들녘으로 간다. 웬만한 산과 들판은 온통 등산복 차림 도시인들로 북적거린다.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은 등산복 차림으로 못가는 데가 없을 정도로 기이한 복장문화가 생겨났다.흙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갖추어 입는 예복이 아닌 전투복 같은 느낌이다.흙을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흙에 기대어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 셈이다. 전투복의 사람들은 몹시 게걸스럽다.등에 짊어진 배낭 가득 먹을 것을 쑤셔 넣고 산이며 들판에 나온다.그들은 배불리 먹고 껍질은 아무데나 버린다.배가 부르면 남이야 상관없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노래를 부르고,마구 내질러댄다.도시인들이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 더럽혀지고 썩는다는 말도 생겨났다.흙에서 내쫓긴 자들의 불안과 상실감에서 생겨난 고약한 도시병이다. 흙에 대한 향수는 본능적이다.도심 곳곳에서 성업 중인 황토찜질방,황토아파트,황토침대,황토팬티,장작가마에서 구워낸 생활그릇들,고급 아파트나 주택의 거실에서 더러 볼 수 있는 가야나 신라 토기류들,꽃과 나무를 심은 크고 작은 화분들은 흙을 그리워하는 도시인들의 갈증이 투영된 슬픔이자 상처다. 한국인은 유달리 흙과 친하게 살아왔다.물고기,야생 동물들을 잡거나 원시림의 풀잎이나 열매 혹은 뿌리를 먹이로 삼아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았던 유목시대의 정서는 한국인의 피 속에 아주 옅게 남아 있을 뿐이다.그보다는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자연에 순응하는,삶의 질서를 발견해 낸 역사가 한국인의 정서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땅은 순하고 살이 깊다.사계절 아름다운 순환이 흙의 성정을 순결하게 만들어서 한국 땅 어느 곳이든 호미로 살짝 헤집고 씨앗을 넣으면 금방 싹이 트고,꽃 피어 향그럽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고 익는다.비,바람,눈,서리,추위와 더위도 모질지 않아서 이 땅에 뿌리 내린 풀 나무는 모두 영험한 약이 되고 맛있는 음식이 된다. 그래서 금수강산이라 불렀다.산중이든 들녘이든 땅심이 깊고 기름지다.지구 위 어느 나라 땅보다 비옥하다. ●흉년들면 지장토 먹고 목숨 건지기도 흙에 들어있는 광물질 등 영양소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여 예부터 중국의 제후들은 한국 땅에서 자라는 약초와 차(茶)를 매우 선호했다.현대에도 중국산 인삼,채소류,과일,곡물류가 한국산에 비해 약효와 맛이 뒤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렇듯 한국의 흙은 그 자체가 영약이 될 때도 있다.오랜 흉년이 들어 가난한 이들이 양식 부족으로 굶주릴 때 ‘지장토(地藏土)’라 부르는 흙으로 무수한 사람 목숨을 구했는데,황토의 일종인 지장토를 먹고 목숨을 건진 사례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다. 이처럼 농사의 근본이 되는 흙은 곧 한국문화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농경 생활이 시작되면서 한국인은 그 이전 유목시대에 사용했던 도구들과는 사뭇 다른 도구를 만들어 냈다.흙을 이용하여 만든 토기(土器)였다. 수렵 채취 시대 때는 계속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토기처럼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다.이때는 주로 풀잎이나 식물의 줄기,넝쿨 같은 것을 엮어서 썼다.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곡식이나 물을 저장하고 음식을 담아 먹을 수 있는 보다 견고한 도구가 필요했다.특히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도구의 필요성이 문화가 생겨날 수 있는 배경을 이루었다.그 문화의 원형이 토기였다.항아리와 잔은 한국인이 맨 먼저 만든 그릇인데,물,곡식을 저장하기 위해 항아리가 필요했다면 잔은 물,국물,술,차를 담아서 제사하거나 마시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생활감정이나 미적감각의 변천이 한국인이 사용한 어떤 물건보다도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 토기이고,그 이후의 모든 그릇들이었다.하나의 그릇에는 한 시대 역사와 마음이 담겨있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이며 그릇은 한 민족이나 국가 문화의 모태이기도 한 까닭이다. 인류는 문자나 옷보다 그릇을 먼저 만들어 썼다.문자나 의류보다 먹는 일이 더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문자나 의류는 그릇이라는 ‘어머니문화’가 낳아서 기른 ‘자식문화’인 셈이다. ●인류역사상 최고수준의 도자기문화 완성 이렇듯 한국문화 모태로서의 토기는 세계 고대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던 토기류들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매우 우수하고 고급스러운 그릇들이다. 토기류 제작 기술에서 발견되는 과학적 사고와 사상은 그 후 청자,백자,분청사기 등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의 도자기문화를 완성시킬 수 있는 풍부하고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토기의 제작은 새로운 산업이었다.흙으로 형태를 만들고,불을 이용하여 단단해지도록 구워내며,불의 온도에 따라서 단단함과 색깔이 달라지고,흙의 종류에 따라서도 단단하기와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화학변화를 이용한 최초의 과학적 사고이자 생활화였다.또한 흙과 불을 인간의 의지대로 조절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릇을 빚어낼 수 있다는 확신은 사상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토기류에 장식을 하거나 주위 환경을 참작하여 만든 형태의 그릇들을 이용하는 여러 가지 의식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국가와 제도를 운영하는데 신의 존재와 조상에 대한 제사의식이 발달하게도 되었다. 토기는 음식을 끓이거나 졸이는 조리용,각종 행사나 의식용,지역 기후의 변화에 알맞은 그릇,빈부와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그릇으로 변화하면서 차츰 한국인들의 생활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나무,돌,종이,금속을 이용한 그릇보다 만들기가 쉽고 재료가 풍부한 탓으로 폭발적인 수요를 충당하면서 토기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었다. ●한민족 문화의 원형 ‘토기’ 무엇보다 뜨거운 음식을 담았을 때 빨리 식지 않는 토기의 성질은 따뜻한 음식을 즐겨 먹는 한국인의 정서에 매우 알맞았다.또한 차가운 음식을 담아두어도 쉽사리 미지근해지지 않게 하는 토기는 오래 잘 견디고 기다리는 심성의 문화를 만드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토기는 수분을 흡수하거나 내뿜는 이른바 숨쉬는 그릇으로서 물이 쉽게 썩지 않아 담아 둔 음식이 오래 보존된다.이처럼 숨쉬는 그릇임이 알려지면서부터 곡식이나 씨앗을 신선하게 저장하는 귀중한 도구로 발전했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콩으로 메주를 쑤고,장을 담는 문화가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숨쉬는 토기를 제작할 줄 알았던 한국인의 지혜가 낳은 인류 최고의 문화였다. 흙과 불의 조화를 다스려 자연에 순응하는 슬기를 삶의 기쁨으로 여겼던 한국인이 플라스틱,알루미늄,스테인리스 스틸,유리 등 숨 막히는 그릇에다 독기 묻은 육류와 농약 중금속에 오염된 채소류를 담아 먹으면서 끊임없이 도모하는 편리함과 이익키우기가 과연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여기쯤에서 한 번 가던 걸음을 멈추고,속도를 줄이고 서 보자.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인은 과연 어떤 그릇에 담겨 있는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9) 토기의 넋을 찾아서

    지나친 편리함과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욕망이 회색도시를 만들었다.기계화,자동화로 설명되는 편리함은 삶의 틀 자체까지 변화시키고 있다.또한 이익을 키우기 위해서는 영혼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혼란,무질서,인간 상실로도 일컬어지는 회색도시는 철구조물을 뼈대로 삼고 콘크리트로 살을 입혀 만든 욕망의 그림자다.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발바닥에는 흙이 묻지 않는다.흙을 밟지 않고 산다.흙으로 이루어진 대지(大地) 위에 살면서도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갇혀버렸다.고층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기는 평생토록 흙을 밟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흙으로부터 추방된 도시인을 만든 것은 도시인 스스로의 욕망이다.어느새 도시인들은 차츰 흙을 그리워한다.한 주일 또는 한 달에 한 번쯤이라도 흙을 밟아봐야만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는 듯이 시간이 나면 아파트를 빠져나와 흙이 살아있는 산과 들녘으로 간다. 웬만한 산과 들판은 온통 등산복 차림 도시인들로 북적거린다.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은 등산복 차림으로 못가는 데가 없을 정도로 기이한 복장문화가 생겨났다.흙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갖추어 입는 예복이 아닌 전투복 같은 느낌이다.흙을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흙에 기대어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 셈이다. 전투복의 사람들은 몹시 게걸스럽다.등에 짊어진 배낭 가득 먹을 것을 쑤셔 넣고 산이며 들판에 나온다.그들은 배불리 먹고 껍질은 아무데나 버린다.배가 부르면 남이야 상관없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노래를 부르고,마구 내질러댄다.도시인들이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 더럽혀지고 썩는다는 말도 생겨났다.흙에서 내쫓긴 자들의 불안과 상실감에서 생겨난 고약한 도시병이다. 흙에 대한 향수는 본능적이다.도심 곳곳에서 성업 중인 황토찜질방,황토아파트,황토침대,황토팬티,장작가마에서 구워낸 생활그릇들,고급 아파트나 주택의 거실에서 더러 볼 수 있는 가야나 신라 토기류들,꽃과 나무를 심은 크고 작은 화분들은 흙을 그리워하는 도시인들의 갈증이 투영된 슬픔이자 상처다. 한국인은 유달리 흙과 친하게 살아왔다.물고기,야생 동물들을 잡거나 원시림의 풀잎이나 열매 혹은 뿌리를 먹이로 삼아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았던 유목시대의 정서는 한국인의 피 속에 아주 옅게 남아 있을 뿐이다.그보다는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자연에 순응하는,삶의 질서를 발견해 낸 역사가 한국인의 정서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땅은 순하고 살이 깊다.사계절 아름다운 순환이 흙의 성정을 순결하게 만들어서 한국 땅 어느 곳이든 호미로 살짝 헤집고 씨앗을 넣으면 금방 싹이 트고,꽃 피어 향그럽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고 익는다.비,바람,눈,서리,추위와 더위도 모질지 않아서 이 땅에 뿌리 내린 풀 나무는 모두 영험한 약이 되고 맛있는 음식이 된다. 그래서 금수강산이라 불렀다.산중이든 들녘이든 땅심이 깊고 기름지다.지구 위 어느 나라 땅보다 비옥하다. ●흉년들면 지장토 먹고 목숨 건지기도 흙에 들어있는 광물질 등 영양소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여 예부터 중국의 제후들은 한국 땅에서 자라는 약초와 차(茶)를 매우 선호했다.현대에도 중국산 인삼,채소류,과일,곡물류가 한국산에 비해 약효와 맛이 뒤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렇듯 한국의 흙은 그 자체가 영약이 될 때도 있다.오랜 흉년이 들어 가난한 이들이 양식 부족으로 굶주릴 때 ‘지장토(地藏土)’라 부르는 흙으로 무수한 사람 목숨을 구했는데,황토의 일종인 지장토를 먹고 목숨을 건진 사례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다. 이처럼 농사의 근본이 되는 흙은 곧 한국문화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농경 생활이 시작되면서 한국인은 그 이전 유목시대에 사용했던 도구들과는 사뭇 다른 도구를 만들어 냈다.흙을 이용하여 만든 토기(土器)였다. 수렵 채취 시대 때는 계속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토기처럼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다.이때는 주로 풀잎이나 식물의 줄기,넝쿨 같은 것을 엮어서 썼다.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곡식이나 물을 저장하고 음식을 담아 먹을 수 있는 보다 견고한 도구가 필요했다.특히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도구의 필요성이 문화가 생겨날 수 있는 배경을 이루었다.그 문화의 원형이 토기였다.항아리와 잔은 한국인이 맨 먼저 만든 그릇인데,물,곡식을 저장하기 위해 항아리가 필요했다면 잔은 물,국물,술,차를 담아서 제사하거나 마시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생활감정이나 미적감각의 변천이 한국인이 사용한 어떤 물건보다도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 토기이고,그 이후의 모든 그릇들이었다.하나의 그릇에는 한 시대 역사와 마음이 담겨있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이며 그릇은 한 민족이나 국가 문화의 모태이기도 한 까닭이다. 인류는 문자나 옷보다 그릇을 먼저 만들어 썼다.문자나 의류보다 먹는 일이 더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문자나 의류는 그릇이라는 ‘어머니문화’가 낳아서 기른 ‘자식문화’인 셈이다. ●인류역사상 최고수준의 도자기문화 완성 이렇듯 한국문화 모태로서의 토기는 세계 고대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던 토기류들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매우 우수하고 고급스러운 그릇들이다. 토기류 제작 기술에서 발견되는 과학적 사고와 사상은 그 후 청자,백자,분청사기 등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의 도자기문화를 완성시킬 수 있는 풍부하고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토기의 제작은 새로운 산업이었다.흙으로 형태를 만들고,불을 이용하여 단단해지도록 구워내며,불의 온도에 따라서 단단함과 색깔이 달라지고,흙의 종류에 따라서도 단단하기와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화학변화를 이용한 최초의 과학적 사고이자 생활화였다.또한 흙과 불을 인간의 의지대로 조절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릇을 빚어낼 수 있다는 확신은 사상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토기류에 장식을 하거나 주위 환경을 참작하여 만든 형태의 그릇들을 이용하는 여러 가지 의식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국가와 제도를 운영하는데 신의 존재와 조상에 대한 제사의식이 발달하게도 되었다. 토기는 음식을 끓이거나 졸이는 조리용,각종 행사나 의식용,지역 기후의 변화에 알맞은 그릇,빈부와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그릇으로 변화하면서 차츰 한국인들의 생활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나무,돌,종이,금속을 이용한 그릇보다 만들기가 쉽고 재료가 풍부한 탓으로 폭발적인 수요를 충당하면서 토기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었다. ●한민족 문화의 원형 ‘토기’ 무엇보다 뜨거운 음식을 담았을 때 빨리 식지 않는 토기의 성질은 따뜻한 음식을 즐겨 먹는 한국인의 정서에 매우 알맞았다.또한 차가운 음식을 담아두어도 쉽사리 미지근해지지 않게 하는 토기는 오래 잘 견디고 기다리는 심성의 문화를 만드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토기는 수분을 흡수하거나 내뿜는 이른바 숨쉬는 그릇으로서 물이 쉽게 썩지 않아 담아 둔 음식이 오래 보존된다.이처럼 숨쉬는 그릇임이 알려지면서부터 곡식이나 씨앗을 신선하게 저장하는 귀중한 도구로 발전했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콩으로 메주를 쑤고,장을 담는 문화가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숨쉬는 토기를 제작할 줄 알았던 한국인의 지혜가 낳은 인류 최고의 문화였다. 흙과 불의 조화를 다스려 자연에 순응하는 슬기를 삶의 기쁨으로 여겼던 한국인이 플라스틱,알루미늄,스테인리스 스틸,유리 등 숨 막히는 그릇에다 독기 묻은 육류와 농약 중금속에 오염된 채소류를 담아 먹으면서 끊임없이 도모하는 편리함과 이익키우기가 과연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여기쯤에서 한 번 가던 걸음을 멈추고,속도를 줄이고 서 보자.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인은 과연 어떤 그릇에 담겨 있는가?
  • 도올, 盧대통령에 ‘훈수’

    도올 김용옥(金容沃·56)중앙대 석좌교수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애정어린 세 가지 훈수를 뒀다. 도올은 16일 오후 MBC ‘도올특강’ 마지막회 전회 방송분(21일 방영 예정)녹화 도중 노 대통령에게 “우선 말을 적게 하라.”면서 “말로써 역사를 만들 필요는 없으며 행동으로만 자신의 바른 가치관을 보일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어 열린 마음으로 다문(多問)할 것을 당부했다.도올은 “자기 생각을 갖고 (일을)처리하려 하지 말고 계속 물어라.”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지만,(전문가들이 들려주는) 브리핑만으로는 세상을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도올은 마지막으로 “작은 것에 신경쓰지 말고 큰 것만 다스릴 것”을 당부했다. 그는 “현 시기는 개벽의 패러다임을 마련해야 할 시기이므로 큰 것만 생각하고,큰 패러다임을 만들어서 역사의 큰 틀을 잡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충고했다. 한편 이날 도올은 ‘도올 특강’을 끝으로 은둔 생활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儒林(11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하였다.공자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공자는 부활하여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 그 유명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비판하고 이 전국시대를 주유하면서 왕도를 설파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조광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조광조도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난세 중의 난세로 보았을 것이며,따라서 공자가 다시 살아나 재림(再臨)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어쩌면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顯身)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조광조의 무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의 내용이 떠올랐다.비교적 조광조의 업적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그의 개혁중심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낡은 조선시대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왕도정치’란 공자가 그토록 열국을 주유하면서 구현하기를 염원하였던 정치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왕도정치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사상’을 말함인데,맹자는 ‘왕도’에 대비되는 정치사상으로 ‘패도(覇道)’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서양철학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플라톤과 같은 존재는 맹자로서,맹자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데,맹자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인을 대신하는 것이 패도이고,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며,힘이 모자라 그렇게 되는 것이며,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왕도를 유가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와는 달리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패도 역시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보았던 맹자는 그러므로 이상주의적인 공자와는 달리 현실적 정치관을 가졌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안내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던 공자의 화신(化神)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와 동일시함으로써 1515년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에서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적어도 3년 이내에 정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세를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 정치를 오늘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험 문제를 통해 공자의 왕도사상이야말로 난세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나라의 무제(기원전 140~87년 재위) 때에 오경박사가 갖추어지면서 유학으로 정립되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통해서 중국 정치의 기본원리와 사회윤리의 발판을 이루는 학문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칠 때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유학은 자연 쇠퇴하고 있었는데,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그리고 고려시대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유교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인데,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유교의 중시조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후대의 평가와는 달리 당대에는 위학(僞學)이라 하여서 크게 박해를 받았던 주자의 성리학은 송나라 멸망 후 원대에 이르러 관학으로 채택되고 과거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 儒林(11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하였다.공자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공자는 부활하여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 그 유명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비판하고 이 전국시대를 주유하면서 왕도를 설파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조광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조광조도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난세 중의 난세로 보았을 것이며,따라서 공자가 다시 살아나 재림(再臨)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어쩌면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顯身)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조광조의 무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의 내용이 떠올랐다.비교적 조광조의 업적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그의 개혁중심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낡은 조선시대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왕도정치’란 공자가 그토록 열국을 주유하면서 구현하기를 염원하였던 정치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왕도정치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사상’을 말함인데,맹자는 ‘왕도’에 대비되는 정치사상으로 ‘패도(覇道)’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서양철학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플라톤과 같은 존재는 맹자로서,맹자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데,맹자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인을 대신하는 것이 패도이고,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며,힘이 모자라 그렇게 되는 것이며,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왕도를 유가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와는 달리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패도 역시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보았던 맹자는 그러므로 이상주의적인 공자와는 달리 현실적 정치관을 가졌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안내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던 공자의 화신(化神)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와 동일시함으로써 1515년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에서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적어도 3년 이내에 정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세를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 정치를 오늘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험 문제를 통해 공자의 왕도사상이야말로 난세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나라의 무제(기원전 140~87년 재위) 때에 오경박사가 갖추어지면서 유학으로 정립되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통해서 중국 정치의 기본원리와 사회윤리의 발판을 이루는 학문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칠 때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유학은 자연 쇠퇴하고 있었는데,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그리고 고려시대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유교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인데,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유교의 중시조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후대의 평가와는 달리 당대에는 위학(僞學)이라 하여서 크게 박해를 받았던 주자의 성리학은 송나라 멸망 후 원대에 이르러 관학으로 채택되고 과거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 [儒林 속 한자이야기](23)

    유림 103에 多辯이 나온다.‘많다’는 뜻의 多는 제사지낼 때 고기(月:肉고기 육)를 몇겹 포개놓은 것에서,또는 저녁(夕)이 매일 오듯 시간이 무궁하게 온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두 說(말씀 설)이 있다.후자와 관련하여 夙(일찍 숙),夜(밤 야),夢(꿈 몽)같은 한자가 만들어졌는데,夕자가 들어간 한자는 시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辯은 두 죄인(辛辛:죄인서로송사할 변)을 말(言)로 다스린다는 뜻인데 辯論(변론),辯護(변호)처럼 眞僞(진위:진실과 거짓)를 판단,설명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辨別(변별)이라 할 때의 辨(판단 또는 분별하다 변)자와 혼동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言자가 들어간 한자는 訂(바로잡을 정),記(기록할 기),詠(읊을 영),誤(잘못 오),讓(겸손할 양)처럼 대부분 뜻은 言에 있고 음은 言자를 제외한 부분이 된다. 이상으로 볼 때 多辯은 多言과 같이 ‘말이 많다.’는 뜻으로 쓰인다. 간혹 말을 많이 하거나 靑山流水(청산유수:푸른 산에서 거침없이 흐르는 물이라는 뜻인데,말을 거침없이 잘하는 것의 비유)처럼 말하는 것을 마치 말 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老子가 ‘말을 교묘히 잘하는 것은 졸렬한 것과 같고,말을 매우 잘하는 자는 말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과,莊子(장자)가 ‘개는 매우 잘 짓는 개,즉 대상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짓는 개를 좋은 개라고 여기지 않으며,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能辯(능변:말 잘함)보다는 오히려 不言(불언)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明나라 때 呂新五(여신오)는 인물 됨됨이의 순서를 첫 번째는 침착하고 묵직하며 깊이있는 인물,두 번째는 적극적이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세 번째는 聰明(총명)하고 辯才(변재:말을 잘함)한 사람이라 해서,말 잘함을 우선으로 여기지는 않았다.多辯은 다음 일화에서처럼 실속이 없는 경우도 많다. 禦岷楯(어민순)에 보면 옛날 한 곳에 쥐들이 모였다.그 때 쥐 한 마리가 ‘庫間(곳간,庫곳집 고)을 뚫고 들어가 살면 생활이 윤택해질 텐데,다만 두려운 것은 고양이 뿐이야.’라고 했다.그러자 다른 쥐가 ‘그 고양이 목에 방울만 달면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소리가 나게 되어,방울 소리만 들으면 모두 달아나 죽음을 피할 수 있지.’라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 것을 제안했다.많은 쥐들이 좋아 펄펄 뛰며 그 말이 옳다고 환호하자 큰 쥐가 ‘대체 누가 그 방울을 고양이 목에 달아주나?’라고 反問(반문:반대로 물어봄)했다.이 말에 모든 쥐들은 啞然失色(아연실색)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방법은 좋아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의 猫項懸鈴(猫고양이 묘,項목 항,懸매달 현,鈴방울 령)이다. 명심보감에 ‘一言不中(일언부중)이면 千語無用(천어무용)이라’ 즉,한 마디 말이라도 (이치에)맞지 아니하면 천 마디 말이 쓸데 없다고 했으니 말 많은 多辯보다는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이치에 맞도록 하는 신중함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 儒林(11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이 모든 것은 양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비롯되었으니,이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우리는 정상배(政商輩)라고 부른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에 대비되는 말로 소인을 이르러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소인은 편당을 짓고 두루 어울리지 않으며,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밝으며,교만하며 태연하지 못하며,언제나 걱정근심으로 지내며,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결국 정치가 이처럼 갈림길이 많아 어지러운 것은 소인배(小人輩)들의 무리 때문이 아닐 것인가. 나는 다시 찔끔찔끔 술을 마셨다.애초에는 조광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술을 음복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으나 점심도 거른 공복에 마신 술이었기 때문이었을까,만취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지금은 태평성대인가.아니면 난세인가.당나라의 선승 조주(趙洲)는 난세야말로 호시절(好時節)이라 하였는데,그렇다면 지금은 호시절인가,아니면 비상시국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지금이야말로 난세이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인 것이다.비록 하나의 국호를 가지고 있으나 실은 수많은 갈림길로 나누어진 전국시대인 것이다. 원래는 천자가 천하의 종주로서 다스리던 나라였으나 이제는 천자가 제후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잃게 되어 약육강식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천자는 천자로서의 권능을 잃고 수많은 갈림길은 제후들과 대부들에 의해서 지배된다.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먹히거나 예속되고 있으며,쉴 새 없는 공전(攻戰)으로 땅 빼앗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곳곳에서 왕들이 생겨나고 스스로를 제후라고 칭하는 신 귀족들이 일어나고 있다.세력을 넓히려는 패권주의에 의해서 서로 힘을 합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며,어제의 변절자가 오늘의 애국자가 되어 버린다.제후는 왕을 꿈꾸며 왕은 천자를 꿈꾸고 있다.모두들 천하통일을 꿈꾸며 진시왕이 되고 싶어 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551년. 그 무렵 천하는 진(秦),초(楚),제(齊),진(晉),오(吳),월(越),노(魯),송(宋),정(鄭),위(魏)… 등의 전국시대로 갈라져 있을 때였으니,2500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전국시대와는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공자는 말년에 난세를 두려워하며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지었다.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나니,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었다.” 2500년 전의 전국시대와 지금의 시대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과 폭행이 생겨나고 부하가 상사를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공자의 전국시대와 전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지 않았던가. “공자가 춘추를 지음에 있어서는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었는데,자하(子夏)같은 제자들도 한마디도 더 보탤 여지가 없었다.제자들에게 춘추를 전해주면서 공자는 ‘후세가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나를 죄주게 되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어 단 한자도 가감할 수 없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춘추.여기에서 ‘공정한 태도로 준엄하게 역사를 비판하는 필법’인 공자의 춘추직필(春秋直筆)이란 말이 생겨났으니,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전국시대를 어떠한 필법으로 기록할 것인가.
  • 儒林(11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이 모든 것은 양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비롯되었으니,이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우리는 정상배(政商輩)라고 부른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에 대비되는 말로 소인을 이르러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소인은 편당을 짓고 두루 어울리지 않으며,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밝으며,교만하며 태연하지 못하며,언제나 걱정근심으로 지내며,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결국 정치가 이처럼 갈림길이 많아 어지러운 것은 소인배(小人輩)들의 무리 때문이 아닐 것인가. 나는 다시 찔끔찔끔 술을 마셨다.애초에는 조광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술을 음복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으나 점심도 거른 공복에 마신 술이었기 때문이었을까,만취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지금은 태평성대인가.아니면 난세인가.당나라의 선승 조주(趙洲)는 난세야말로 호시절(好時節)이라 하였는데,그렇다면 지금은 호시절인가,아니면 비상시국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지금이야말로 난세이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인 것이다.비록 하나의 국호를 가지고 있으나 실은 수많은 갈림길로 나누어진 전국시대인 것이다. 원래는 천자가 천하의 종주로서 다스리던 나라였으나 이제는 천자가 제후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잃게 되어 약육강식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천자는 천자로서의 권능을 잃고 수많은 갈림길은 제후들과 대부들에 의해서 지배된다.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먹히거나 예속되고 있으며,쉴 새 없는 공전(攻戰)으로 땅 빼앗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곳곳에서 왕들이 생겨나고 스스로를 제후라고 칭하는 신 귀족들이 일어나고 있다.세력을 넓히려는 패권주의에 의해서 서로 힘을 합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며,어제의 변절자가 오늘의 애국자가 되어 버린다.제후는 왕을 꿈꾸며 왕은 천자를 꿈꾸고 있다.모두들 천하통일을 꿈꾸며 진시왕이 되고 싶어 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551년. 그 무렵 천하는 진(秦),초(楚),제(齊),진(晉),오(吳),월(越),노(魯),송(宋),정(鄭),위(魏)… 등의 전국시대로 갈라져 있을 때였으니,2500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전국시대와는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공자는 말년에 난세를 두려워하며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지었다.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나니,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었다.” 2500년 전의 전국시대와 지금의 시대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과 폭행이 생겨나고 부하가 상사를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공자의 전국시대와 전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지 않았던가. “공자가 춘추를 지음에 있어서는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었는데,자하(子夏)같은 제자들도 한마디도 더 보탤 여지가 없었다.제자들에게 춘추를 전해주면서 공자는 ‘후세가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나를 죄주게 되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어 단 한자도 가감할 수 없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춘추.여기에서 ‘공정한 태도로 준엄하게 역사를 비판하는 필법’인 공자의 춘추직필(春秋直筆)이란 말이 생겨났으니,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전국시대를 어떠한 필법으로 기록할 것인가.˝
  • [인터넷 쇼핑] 레포츠용품 ‘대박’

    예년보다 무더위가 일찍 다가오자 레포츠 상품이 인터넷쇼핑몰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시원한 강이나 바다로 떠나고 싶은 ‘모험족’들에겐 여행 상품이 인기고,‘이열치열’로 더위에 맞서려는 ‘알뜰족’에게는 절약형 운동상품이 잘 팔린다.클릭 하나로 더위를 날려버리고 싶은 네티즌들을 위해 인터넷 쇼핑몰들이 다양한 레포츠상품 할인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걷고 뛰는 게 최고지∼ 옥션에서는 등산용품,조깅화,줄넘기 등이 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은사로 만든 등산용셔츠는 시중가의 20∼30%정도인 1만원대에 거래되고 있으며,나이키나 아디다스 조깅화도 10∼20% 할인된 가격에 팔리고 있다. 신세계닷컴은 등산의류 ‘쟈칼’ 상품을 40∼46%까지 할인해서 판매중이다.쿨맥스 반팔셔츠는 2만 7000원에서 3만 4200원,마운틴 실버팬츠는 6만 9000원,상하의와 양말을 합친 3종세트는 9만 4000원에서 10만원이다. CJ몰은 30일까지 인라인 스케이트를 할인해 판매한다.‘나이키 울트라 AIR CHASSURE’ 22만 8000원,‘휠라 FF40’ 11만 9000원.‘로체스 인라인 T100’ 17만 9000원,‘롤러블레이드 AERO’ 19만 9000원이다. ●스릴만점!더위는 가라. 인터파크는 30일까지 매일(월∼금) 오전 11시부터 선착순 20명에게 래프팅 명소로 알려진 동강,내린천,한탄강에서 무료 래프팅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또 매일 선착순 35명에게 1만 2500원으로 래프팅을 즐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바이엔조이는 다음 달까지 웨이크보드와 같은 수상레포츠와 클레이사격,카트 등과 같은 지상레포츠 상품을 할인 판매한다.보드를 수상에서 즐기는 웨이크보드 1일 체험은 장비대여,보험,강습,식사를 포함해 5만원,만 18세이상이면 참여가 가능한 인천 송도 클레이 사격은 장비대여,강습,시설사용,보험 포함해 2만 3000원이다. 삼성몰은 더위를 피해 해외로 나가려는 소비자들을 위해 14일까지 ‘삼성몰,해외여행상품 예약할인전’을 열고 최대 7% 할인된 가격에 해외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있다.유럽 5개국 10일 여행상품을 22만원 할인된 296만 7000원에,방콕 파타야 5일 여행상품을 7만원 할인된 92만 9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儒林(11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다기망양(多岐亡羊).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 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정작 양은 놓치고 말았다는 얘기다.이는 열자(列子)의 설부(說符)편에 나오는 고사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양주(楊朱)가 있었다.당시에는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兼相愛).’를 부르짖는 묵자(墨子)의 사상이 대유행을 보이고 있었다.묵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하면서 ‘겸상애’야말로 ‘돌아가면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교상리(交相利)’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이와는 달리 양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양주의 개인주의는 ‘내 몸의 터럭 한 개를 가지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묵적,혹은 묵자의 겸애설(兼愛說)과 대비를 보여 ‘양주묵적’이라고 통칭되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양주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그래서 그 집 사람은 물론 양주의 집 사람까지 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서느라고 안팎이 매우 분주하였다.이 모습을 본 양주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다면서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서느냐.” 그러자 하인이 대답하였다. “예,양이 달아난 쪽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는데,양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갈림길마다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갈림길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갑자기 우울해져서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았다.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없었다.그래서 맹손양(孟孫陽)이란 제자가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던 일을 말하고 스승인 양주가 입을 다문 이유를 물었다.이에 심도자는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네.곧 ‘큰 길에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학문이란 원래 근본이 하나인데,그 말단에 와서 이와 같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그러므로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입을 다무신 것이라네.” 여기서부터 ‘다기망양’은 학문의 길이 너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다방면에 걸쳐 지나치거나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이게 되었는데,오늘날에도 선택할 대상이 너무 여러 가지가 있어,어느 것을 택할지 곤혹스러운 경우에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찔끔찔끔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양주가 걱정하였던 대로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늘날 문밖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어 정치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양이라 표현한 것처럼 양은 백성을 의미하는 비유일 것이다.정치란 양을 편안히 하고 정치가는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목자(牧者)일 것이다.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길이 정치의 근원이므로 이 길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할 것이다.그러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쟁과 편가르기에 의해서 정치의 길은 수많은 갈림길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따라서 오히려 이 수많은 갈림길 때문에 막상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양은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성영우의 탄식대로 오늘날 문밖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여 백성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儒林(11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다기망양(多岐亡羊).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 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정작 양은 놓치고 말았다는 얘기다.이는 열자(列子)의 설부(說符)편에 나오는 고사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양주(楊朱)가 있었다.당시에는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兼相愛).’를 부르짖는 묵자(墨子)의 사상이 대유행을 보이고 있었다.묵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하면서 ‘겸상애’야말로 ‘돌아가면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교상리(交相利)’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이와는 달리 양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양주의 개인주의는 ‘내 몸의 터럭 한 개를 가지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묵적,혹은 묵자의 겸애설(兼愛說)과 대비를 보여 ‘양주묵적’이라고 통칭되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양주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그래서 그 집 사람은 물론 양주의 집 사람까지 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서느라고 안팎이 매우 분주하였다.이 모습을 본 양주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다면서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서느냐.” 그러자 하인이 대답하였다. “예,양이 달아난 쪽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는데,양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갈림길마다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갈림길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갑자기 우울해져서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았다.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없었다.그래서 맹손양(孟孫陽)이란 제자가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던 일을 말하고 스승인 양주가 입을 다문 이유를 물었다.이에 심도자는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네.곧 ‘큰 길에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학문이란 원래 근본이 하나인데,그 말단에 와서 이와 같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그러므로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입을 다무신 것이라네.” 여기서부터 ‘다기망양’은 학문의 길이 너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다방면에 걸쳐 지나치거나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이게 되었는데,오늘날에도 선택할 대상이 너무 여러 가지가 있어,어느 것을 택할지 곤혹스러운 경우에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찔끔찔끔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양주가 걱정하였던 대로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늘날 문밖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어 정치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양이라 표현한 것처럼 양은 백성을 의미하는 비유일 것이다.정치란 양을 편안히 하고 정치가는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목자(牧者)일 것이다.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길이 정치의 근원이므로 이 길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할 것이다.그러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쟁과 편가르기에 의해서 정치의 길은 수많은 갈림길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따라서 오히려 이 수많은 갈림길 때문에 막상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양은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성영우의 탄식대로 오늘날 문밖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여 백성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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