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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라운지] 삼성생명 남자탁구팀 강문수 감독

    [스포츠라운지] 삼성생명 남자탁구팀 강문수 감독

    지난 6일 중국 상하이체육관.‘탁구황제’ 유승민(삼성생명)이 64강에서 일찌감치 탈락하고 ‘마지막 희망’ 오상은(KT&G)이 세계1위 왕리친과 세계탁구선수권 단식 준결승에서 만났다. 오상은은 역부족으로 무릎을 꿇었지만, 관중석 한편에서 6년 동안 공들였던 애제자의 경기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남자탁구의 대부’ 강문수(53) 삼성생명 감독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쉬움이 너무 컸다. ●척박한 땅에 거름 뿌렸다 고교시절 대표로 한·일전에 나서는 등 가능성을 인정받은 강 감독이지만 77년 어깨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해외 진출과 여자팀 지도자, 고교 체육교사의 세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 강 감독은 80년 김충용 감독의 권유에 따라 제일합섬 남자팀 지도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세계 3강을 유지해 대우가 좋았던 여자쪽엔 유능한 지도자들이 밀집해 있었던 데다 “까짓것 한번 덤벼보자.”는 승부사 기질이 발동한 것. 그때부터 강 감독은 김완·김기택을 조련해 국내무대를 통일,‘제일합섬 전성시대’를 일궜고,86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꿈에 그리던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했다. 그의 취임일성은 “앞으로 여자선수들의 훈련상대로 혹사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 요즘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지만, 사상 첫 구기종목 세계 제패를 이룬 73년 ‘사라예보의 기적’ 이후 대표팀 운영도 가능성이 높은 여자 위주였다. 태극마크를 단 남자선수들의 역할은 여자선수들의 ‘훈련도우미(?)’에 불과했다. ‘중국과 일본선수도 사람인데 못 이길 이유가 뭐냐.’며 덤벼드는 그의 열성에 대표선수들도 뼛속 깊이 밴 패배의식을 조금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선수들에게 쉴새없이 공을 쳐주는 ‘볼박스 훈련’을 시키다 코치가 목디스크에 걸릴 정도로 ‘단내 나는’ 훈련이 13개월 동안 이어졌다. 주말에 집에 들렀다 나올 때 여섯살짜리 큰딸이 “아빠 또 놀러오세요.”라고 말해 눈시울을 적시는 일도 다반사. 땀은 정직했다.86아시안게임 단체 준결승에서 일본을 32년만에 깨뜨린 데 이어 결승에선 중국을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단체전 부진으로 독기를 품은 ‘막내’ 유남규가 단식을 제패한 것은 아시안게임의 하이라이트. 한번 꽃망울을 터뜨린 ‘강문수식 탁구’는 이후 승승장구했다.88년 단식에서 유남규의 금빛 스매싱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올림픽무대마저 정복했다. 누구도 남자탁구를 여자의 들러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올초 상무보 승진… 탁구계 전체 경사 25년 동안 남자탁구 지도자 외길을 걸어온 그는 올초 삼성생명의 상무보로 승진한 데 이어 지난 3월 말엔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아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지원이 탄탄한 삼성의 후광 아니냐는 일부의 시기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평사원 코치로 입사해 제일합섬-삼성증권-삼성생명-삼성카드-삼성생명으로 숱하게 바뀌는 동안에도 한우물만을 판 끝에 ‘회사원의 꽃’인 임원에 올랐다는 점에서 탁구계 전체의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강문수 감독이지만 아직 남은 꿈이 하나 있다. 올림픽보다 몇 배 이상 어렵다는 세계선수권 남자 금메달을 본인의 손으로 일궈내는 것. 역대 최고성적은 지난 2003년 ‘수비의 달인’ 주세혁의 준우승. 유승민이나 주세혁, 오상은 등은 이미 톱클래스이기 때문에 내년 독일 브레멘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단체 우승도 노려볼 만하다고 내다봤다. 다만 아테네올림픽에서 유승민의 불꽃투혼에 밀려 금메달을 내주고 망연자실했던 중국 지도자들이 이달 초 상하이에서 만났을 땐 ‘한국의 투지가 실종돼 이젠 무섭지 않다.’고 털어놓은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미다스의 손’ 강문수 감독이 있는 한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 내년 4월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스타워즈 에피소드3 우주보다 더 장대한 ‘SF성찬’

    시리즈를 시작한 지 무려 28년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별들의 전쟁’은 토를 달지 못하게 화려하다. 26일 개봉하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 3-시스의 복수’(Star Wars : Episode Ⅲ-Revenge of the Sith)는 SF물로서의 위용이 ‘할리우드 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큼 정교한 스펙터클을 자랑한다. 네번째 에피소드 ‘새로운 희망’(1977년)에서 출발한 시리즈는 알려진 대로 모두 6편. 개봉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던 것은, 우주전쟁을 ‘완벽한 그림’으로 다듬어 내겠다는 감독의 고집 때문이었다.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한 이야기 부분은 뒤로 미뤄왔으니, 이번이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효과의 향연장이란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스타워즈 28년만의 결정체 그동안 연대기적 순서를 밟지 않은 전작들에는 암시와 복선만으로 인물들의 관계, 탄생 배경 등을 넘겨짚게 만든 부분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3편은 그 결정적인 비밀들을 하나 둘 풀어주는 ‘해설의 장’이기도 하다. 3편이 초점을 맞춘 것은 제다이 기사 아나킨(헤이든 크리스턴슨)이 악의 화신 ‘다스 베이더’가 되는 과정이다. 검은 투구와 망토 차림에 붉은 광선검을 휘두르는 시리즈의 상징물 다스 베이더가 스승 오비완(이언 맥그리거)과 어찌해서 원수지간이 됐는지를 복기한다. 이미 시리즈의 마니아가 돼있는 관객들에겐 큼지막한 ‘보너스’라 할 만하다. 이번 이야기의 시점은 2편 ‘클론의 습격’으로부터 3년이 지난 뒤. 팰퍼타인 황제(이언 맥디아디드)와 제다이 기사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한 가운데 제다이가 되길 고대하던 청년 아나킨은 제다이 자격을 주지 않겠다는 의회의 결정에 절망한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파드메(나탈리 포트만)까지 의원자격을 박탈당할 위기에 내몰리자 아나킨은 절대권력을 주겠다는 팰퍼타인의 검은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루크와 레아 쌍둥이 남매가 파드메에게서 태어나 타투인, 얼데란 행성으로 갈라져 살게 되는 사연 등도 순차적으로 공개된다.100% 디지털 작업으로 구현된 사이보그 그리버스 장군은 3편에서 유일하게 새로 선보이는 캐릭터. ●할리우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담아 전 편의 인물 및 서사구도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어려운 극중 행성들 이름만큼이나 이야기는 복잡하게 굴러가지만, 이번 역시 감상의 핵심은 ‘보는 즐거움’이다. 완벽한 우주전쟁을 보여주겠다고 별렀던 감독의 의지는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아나킨과 오비완이 용암이 녹아내리는 화산행성 무스타파에서 결투하는 장면, 팰퍼타인과 요다의 광선검 승부 등은 ‘할리우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싶은 SF 성찬이다. 우주선과 비행정 밖으로 내내 노출되는 우주도시의 화려한 디테일에도 감독의 완벽주의 감각이 묻어 있다. 아나킨이 악의 화신이 되는 동기가 빈약한 점 등이 거슬림에도, 태깔나는 영상이 작은 허점들을 가려버렸다. ●미국의 팽창주의 이분법에 화살 영화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의도적으로 투영된 감독의 정치적 신념은 칸을 온통 ‘부시 성토장’으로 들쑤셔놓을 만도 했다. 의회에서 팰퍼타인이 의원들에게 일방적인 전쟁을 부추기자 “이제 자유는 끝”이라고 되뇌는 파드메, 스승에게 칼을 겨누며 “동지가 아니면 적일 뿐”이라는 아나킨의 대사 등이 미국의 이분법적 팽창주의에 화살을 꽂는다.SF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데려가도 된다.3편은 전체관람 등급을 얻은 덕분에 ‘가족용 영화’가 됐다. 상영시간 2시간19분.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차도르 벗는 아랍의 女權

    아랍 여성들의 차도르 속으로 여권 신장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만, 바레인, 카타르에 이어 쿠웨이트 의회가 16일(현지시간) 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총선 투표권과 입후보권을 부여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쿠웨이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44년 만이다. ●법안 통과되자 의회밖 축제분위기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순간 의회 밖에서는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기뻐했고, 불꽃놀이가 하늘을 밝혔다. 걸출한 여성 활동가인 로라 알 다스티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냈다. 오늘부터 2007년 총선을 위한 선거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 선거법은 셰이크 알 아흐마드 알 사바흐 국왕이 서명하는 즉시 발효되며 2주안에 관보를 통해 공표될 예정이다. 알 아흐마드 국왕은 지난 1999년 여성에게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의회는 여성 참정권 허용 법안을 부결시켰고 지난 3일에도 여성의 지방의회 선거 참여를 허용하는 법안도 저지했다. 이번에도 보수 이슬람계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로써 전체 쿠웨이트 국민 96만명 가운데 13만 9000명에 불과했던 유권자수는 33만 9000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아랍 여성 의회진출 세계 최저 쿠웨이트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다른 아랍 여성에 비해 진보적이고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정치적 권리에서는 뒤처졌다. 오만과 바레인은 2002년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고, 카타르도 2003년 여성이 총선에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여전히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단지 최근에서야 여성들도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아랍권에서는 비교적 일찍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던 이집트에서는 오늘 9월 대선을 앞두고 여성 무소속 후보가 출마했다. 나왈 엘 사다위란 여성 후보는 5선을 노리는 현 무라바크(76) 대통령과 자유로운 선거운동을 제한하는 정부 때문에 고향에서도 모임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음달 열리는 이란 대선에는 1010명이 입후보했는데 이 중 89명이 여성 후보이다. 하지만 이란 의회는 여성들이 대선 후보로는 적합치 않다고 결론짓는 등 차별은 여전하다. 이란의 내무장관 무사비 라리도 “여성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고위행정직은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체 아랍 여성의 절반은 문맹이며, 임산부 사망률은 라틴 아메리카의 2배, 동아시아의 4배에 이른다. 아랍 의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5%로 12.9%인 남미,21.2%인 동아시아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길섶에서] 아들의 도전/이호준 인터넷부장

    퇴근길. 어깨 위의 피곤을 애써 털어내며 집에 들어선다. 무슨 눈치를 챘는지, 인사만 하곤 제 할 일이 바쁘던 큰 아이가 유난히 수다스럽다.“사내녀석이…. 용돈이 궁하냐?” 은근히 핀잔을 하지만, 마음의 주름은 활짝 펴진다. 그런 평화도 잠시, 녀석의 제안에 정신이 번쩍 든다.“아빠, 모처럼 팔씨름 한 판 어때?” “뭐? 팔씨름?” 승패를 점치는 눈에, 부쩍 커버린 아이의 덩치가 산만해 보인다. “싫다. 이 녀석아. 새삼스럽게 팔씨름은 무슨….” 하지만 쉽게 물러설 기미가 아니다. 몇번 버티다가 결국 팔소매를 둥둥 걷고 손을 맞잡는다. 작은 아이가 “아빠, 이겨라!”를 외치지만, 나는 안다. 약자를 위한 응원일 뿐이라는 걸. 예상대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두 손을 든다. 생전 처음 아빠를 이긴 아이는 환호성이 대단하다. 짜식! 말은 안 하지만 너를 못 이기는 게 한두 가진 줄 아냐? 게임도 너만 못하고, 달리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그걸 알까? 제 힘이 세진 것보다 아빠의 힘이 빠진 게 먼저라는 걸. 흰머리와 주름이 늘어갈수록 저희들 곁에 서 있을 날이 줄어든다는 걸…. 이호준 인터넷부장 sagang@seoul.co.kr
  • [김홍신의 세상보기] 우리 역사의 아픔

    [김홍신의 세상보기] 우리 역사의 아픔

    멀쩡한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일본의 가당찮은 역사인식은 일본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들끓듯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좀더 성숙되고 냉정하게 우리의 미래를 갈고 다듬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이참에 우리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종합진단과 조화로운 대책을 강구하는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헤게모니는 언제나 이동하기 마련이다. 근래 들어 가장 두려운 존재가 중국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친디아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 할 만큼 중국과 인도의 잠재 결속력까지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중국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중국위협론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족과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거대인구 중국은 사회주의를 대신할 이념적 고리로 민족주의를 선택했다. 이런 중화민족주의의 일환으로 현재의 중국 영토 안의 과거 역사는 모두 중국역사로 편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동북공정의 잣대는 중국의 중화사상과 중국민족주의의 가늠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광활한 고구려 땅과 호쾌한 고구려 역사는 모두 중국의 변방사요,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의 주인이었고 장대한 역사를 가졌던 발해도 중국변방사로 재편해 가고 있다. 중국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로 규정해서 아예 중국사로 규정지으려 한다.1712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합의하여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국경을 삼아 정계비를 세웠다.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라는 게 드러남으로써 간도 일대가 조선영토였음이 밝혀지기도 했다.1907년 일본은 간도가 조선땅이라고 주장하다가 1909년에 청나라에 간도를 넘기고 안봉선 철도와 무순 탄광의 이권과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근래에 규장각에서 발견된 자료를 통해 한·일관계의 협약이 무효임이 밝혀졌으니 간도협약은 무효이며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현재 발해의 흔적들은 철저한 보안 속에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신당서의 기록으로 보면 사방 5000리(중국은 5㎞가 10리)의 광대한 땅, 고구려보다 무려 두 배 가까운 영토를 소유했던 발해 역사는 지금 중국역사로 재편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도읍지 상경용천부의 고궁터는 외성의 둘레가 16㎞가 넘고 10개의 성문과 잘 다듬어진 도로가 위풍당당하다. 비록 화산석 주춧돌과 고성의 위용만 남아 있지만 5경·15부·62주를 다스린 흔적은 장대하기만 하다. 연길의 계림으로부터 화룡현 도산자 동산촌까지 이어지는 100리 장성은 실제로 300리 장성이다. 당나라와 대적하며 황제 칭호를 거침없이 사용했으며 장안의 관문인 등주를 매섭게 공격하는 위용도 보였다. 바닷길을 갈라 일본과 문물을 교환하며 고구려 정신을 계승한 우리의 조상이 펼친 담대한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동모산 정상에 서서 1300여 년 전의 발해의 혼을 흡입해 본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며, 귀하디귀한 정효공주 비문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이며, 막새기와 한점 만져본 사람이 있으며, 러시아와 북한에 흩어져 있는 유물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은 얼마일까? 거란의 침공으로 처절하게 멸망한 탓에 구당서와 신당서, 일본사기 속에 아주 작은 기록밖에 자료가 없는 형편이다. 그러하기에 유적 발굴작업은 발해를 재현하는 귀하디귀한 사료이다. 정효공주 무덤에서 발굴된 묘비석 하나 때문에 얻어낸 사료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과서에서조차 발해역사를 가볍게 다루는 우를 범하고 있는 형편이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송기호 박사는 중국과 러시아를 헤짚으며 발해 역사를 낱낱이 규명해 주어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다. 송 교수의 주장(저서 ‘발해를 다시 본다’)처럼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개방적이며 독점물이 아닌 공동의 역사로 설정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해 멸망이후 줄곧 줄어든 우리 영토의 아픔을 치유하는 자세를 우리 시대의 소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되기를 소망한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훈장 변신 ‘배추머리’ 개그맨 김병조씨

    누군가 그랬다.‘어느날 눈을 떠보니 세상에 내던져졌고, 살아가는 매뉴얼은 보이지 않았다.’고 투정을 부렸다. 인생의 매뉴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무미건조? 허망? 수많은 오류와 잘못을 과연 피해나갈 수 있을까. 문득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명심보감,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다. 중국의 경전 사서 문집류 등에서 좌우명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처세훈을 추려 놓았다.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음의 수양서로 여전히 으뜸이다. 한 코미디언이 있었다.‘지구를 떠나거라∼’‘나가 놀아라∼’로 전국민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밑빠진 항아리는 막을 수 있어도 코밑의 입은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거침이 없었다. 뱉어내는 얘기마다 배꼽을 겨냥하면서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주변에서는 ‘배추머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떠나거라’를 실천하듯 코미디계를 훌쩍 떠나버렸다. 왜그랬을까. 알고 보니 어엿한 훈장이 됐다.‘명심보감’이라는 간단치 않은 등짐을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주 탐라대서 강원 한림대까지 서울 마포에 위치한 불교방송국 건물 17층에서 그를 만났다. 순간 ‘앗’하는 놀라움을 느꼈다. 왕년의 ‘배추머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말쑥한 머리모양에 전통한복 차림이 왠지 낯설어보였다. 하지만 특유의 큰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근황부터 들었다. 우선 매주 수요일이면 광주에 내려간다. 조선대학 초빙교수 자격이다. 오전에는 평생교육원(3시간)에서, 오후에는 학부(4시간)에서 강의를 한다. 학생수만 6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월·금요일에는 불교방송(BBS) 라디오 프로그램 ‘다시 듣고 싶은 노래’의 진행을 맡고 있다. 화·목요일에는 중앙부처 기업체 대학 등에서 명심보감을 강의한다. 이날도 서울 구로구청 관내 통·반장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했단다. 강연을 들은 구민들은 감동을 받아서인지 관내 고등학교에서도 강의를 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자랑했다. “제주 탐라대에서 강원도 한림대까지 정신없이 다닙니다. 코미디언으로 방송했을 때보다 더 살맛이 나요. 어려움을 통해 얻은 지혜도 있지만 옛 어른들의 밥상머리 교육을 생각해 보세요. 전통이 단절됐습니다. 이어야 하지요.” 김씨의 목소리는 높아진다.“부모가 자식에게 교육을 시키려면 부모 자신이 엄한 자세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밤 9시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밤 12시에 귀가한 아들·딸을 혼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엄격해야 집안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심보감의 참뜻은 ‘니나 잘해.’라며 껄껄 웃는다. ●한학자 선친 뒤이은게 큰보람 또 “부모는 자식을 잠자리에 재워놓고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서 이불을 덮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한다. 김씨는 결혼 후 10년 동안 아버지의 빚을 갚아드렸다고 말꼬리를 흐린다. 논 네마지기로 입에 풀칠하며 여기저기 빚을 얻어가며 자식 5남매를 키워낸 아버지, 그러면서도 자식들한테는 매우 엄하게 대했던 아버지의 진심을 돌아가신 다음에야 알았다며 창밖을 응시한다. “코미디언인 제가 명심보감을 강의한다고 하자 처음에는 ‘웃기고 있네.’하면서 놀리더군요. 그러나 강의를 듣고 나서는 ‘울리고 있네.’라고 합디다. 저는 그래요. 중간고사같은 거 안봐요. 대신 학생들에게 아버지한테 양말 사다드리라고 숙제를 줍니다. 효도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지요.” 김씨가 명심보감 전도사로 나선 것은 방송활동을 중단한 1998년부터. 그는 어릴 때부터 두가지의 꿈이 있었다. 첫번째는 세상만사 영원이란 없다는 말을 늘 떠올리면서 인기가 쇠약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특히 방송계는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라 더욱 절실했다. 그래서 한학자였던 선친의 뒤를 이어 훈장이 되고자 했다. 두번째는 고향(전남 장성)에서 방송활동을 해보는 것. 다행히 지인을 통해 지난 97년 지역방송인 광주방송(KBC)에서 ‘열창무대’라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이때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연극과 영화, 한국 코디미사 등에 대해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처용가도 코미디요 판소리도 코미디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선뜻 승낙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황금 만냥이 있다한들 자식 하나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났다. 대학측과 논의 끝에 ‘명심보감’으로 주제를 바꿨다. 김씨는 75년 MBC-TV ‘뽀뽀뽀’로 데뷔했지만 ‘일요일밤에 대행진’ 등을 맡으면서 평소 갈고 닦은 ‘명심보감’을 자주 인용했다. 유행어 ‘지구를 떠나거라∼’‘나가 놀아라∼’도 여기에서 얻은 아이디어라고 고백했다. 코미디계를 떠난 그의 강의솜씨는 어느 정도일까. 한 예가 있다. 하루는 조선대에서 강의하던 중 이공대 김모 교수가 수강을 했다는 것. 그래서 ‘교수님 왜 그러십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김 교수는 ‘(김씨의)강의평가가 최고로 나왔는데 한 수 배우려고요.’라고 대답했다. ●명심보감 1인자 되고 싶어 “마음의 부자가 진짜 행복입니다. 옛날 ‘뽀뽀뽀’를 보던 학생들이 오늘날 제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들 하더군요. 다시 부자가 됐습니다.” 그는 스스로 짠돌이라고 한다. 저축 잘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한문공부를 많이 한다는 세가지 연유로 명심보감을 강의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학자인 아버지와 행상을 하는 어머니 슬하에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히 7대장손이어서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별명은 ‘움직이는 옥편’일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덕분에 김씨는 초등학교때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접했다. 붓글씨도 함께 연마했다. 족보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기억력이 뛰어나 집안에서는 천재소리를 들으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집이 가난해 광주고에 진학하면서 육군사관학교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성균관대 유학과를 생각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웃기는 일을 워낙 잘해 담임선생 등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연극영화과를 권했다. 결국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방향을 바꿔 코미디언으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부인 얘기가 나오자 “목포교대를 나왔다.”면서 “빚도 많고 형제도 많은 장손 집안의 장남을 선뜻 택해준 아내가 늘 고맙다.”고 했다. 부인은 여러번 중매를 봤지만 김씨의 솔직한 자세에 반려자로 택했단다.1978년 70만원 월셋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200만원 지하 전셋방을 거쳐 결혼 5년 만에 세를 떠안고 2300만원짜리 집을 장만했다. 이후 부모가 진 빚을 다 갚은 뒤 84년 고향에 스물네마지기 논을 사서 부모한테 효도선물로 드렸다. 부친은 88년 작고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논두렁을 걸어다닐 정도로 무척 좋아했다. 또한 서울로 떠난 아들에게 ‘자가용을 타고 오기 전까지는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는 약속도 지켰다. 모친은 현재 82세로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함께 살고 있다. “명심보감의 1인자가 되고 싶습니다. 옛것들이 다 버려지고 있습니다. 전통의 아름다움을 누군가는 반드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김병조의 명심보감’이라는 책을 펴내기 위해 5년전부터 틈틈이 원고정리를 해왔다.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술과 담배를 전혀 안하는 그는 요즘 걷기와 등산으로 건강을 다진다. 명심보감 한 구절을 들려준다.‘글을 읽는 것은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요, 도리를 따르는 것은 집안을 보존하는 근본이다. 근검은 집안을 다스리고, 온화는 집안을 정제하는 근본이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0년 4월 전남 장성 출생 ▲67년 광주고 졸업 ▲72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72∼75년 육군복무 ▲75년 MBC‘뽀뽀뽀’ 진행 ▲76∼96년 MBC‘일요일 일요일밤의 대행진’ ‘사랑의 공개홀’‘우리가락 한마당’‘세월따라 노래따라’‘김병조의 생활한자’ 진행 ▲96년 4월 SBS 코미디 전망대 진행.11월 MBC‘우정의 무대’ 진행. ▲98년∼현재 조선대 초빙교수 ▲상훈 전국대학생화술경연대회 최우수상(70년), 우리들의 스타상(코미디부문), 국무총리표창(저축유공·84년),MBC연기대상(코미디 개그부문,85·88년) ▲주요 작품 수필집 ‘종가집 배추’ 영화 ‘자기 난 이렇게 산다우’ 등
  • [일요영화]

    [일요영화]

    ●사선에서(KBS1 밤 12시20분)볼프강 페테슨 감독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나쁘다는 연합군의 보편적인 시각을 깨고, 그들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담은 ‘다스 보트’로 반향을 일으킨 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에 입성했다. 이후 ‘에어포스 원’,‘트로이’ 등 쟁쟁한 액션영화로 자리를 잡아 갔다. 여기에 연출과 감독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노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소름끼치는 존 말코비치의 연기가 더해져 앙상블을 이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감독,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어 세월의 무게가 부담스러운 주인공을 맡아 달리기조차 힘들어 하는 늙은 경호원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63세였던 이스트우드는 건물 6층에 매달리는 스턴트까지 직접 해내기도 했다.1993년작.123분. 30년 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막지 못했던 경호원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현직 대통령 암살을 예고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프랭크는 대통령 경호를 자처하며 막무가내로 경호팀에 다시 합류하게 된다. 젊은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여성 경호원 릴리(르네 루소)와의 사이는 조금씩 발전해 나간다. 범인을 추척한 결과 그가 전직 CIA 요원인 미치(말코비치)라는 것이 밝혀지는데…. ●우리 아빠 야호(EBS 오후 1시40분) 가족 코미디의 대가 스티브 마틴의 연기가 풋풋한 영화.‘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열정적으로 연기했던 톰 헐스, 젊은 시절의 키아누 리브스와 리버 피닉스의 동생인 호아킨 피닉스의 어린 시절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1991년 ‘분노의 역류’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론 하워드 감독의 유머가 돋보이는 초창기 작품으로 1989년작.125분. 변호사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인 길 버크만(스티브 마틴)은 부인 캐런(다이안 위스트)과 함께 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아들 케빈(제이슨 피셔)의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달려간 길과 캐런은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이에 길은 케빈을 위해 리틀 야구단에서 코치를 맡는가 하면 아들 생일잔치에 카우보이 분장을 하고 나타나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등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 하지만 케빈은 점점 더 응석받이가 되어가고, 길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약속한 파트너 지위에 오르지 못하자 사표를 낸다. 캐런이 넷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넷 째를 낳아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데….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톱 셀러]유아용품에도 거센 웰빙바람

    [톱 셀러]유아용품에도 거센 웰빙바람

    ‘한가족 한자녀 시대’를 맞아 유아용품에도 웰빙 바람이 불고 있다. 은나노, 은행나무, 자일리톨로 만든 배냇저고리와 젖병이 불티나게 팔린다. 일반 제품보다 가격이 1.5배∼2배 비싼데도 그렇다. 보령메디앙스 전혜은씨는 “출산율 감소로 시장이 줄어들었는 데도 기능성 유아용품 덕에 매출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은나노가 앞장서다 기능성 유아용품의 선두주자는 은나노. 나노입자 크기의 은입자가 650여가지 세균과 바이러스를 살균한다고 알려지면서 은나노를 활용한 젖병이 2002년 처음 나왔다. 주부 김정아(29)씨는 “플라스틱 냄새가 없고, 분유를 보관해도 쉽게 상하지 않아 구입한다.”고 말했다. 은나노를 넣으면서 플라스틱 젖병(폴리프로필렌)에서 환경호르몬 추정물질인 비스페놀A가 더이상 검출되지 않고, 대장균 등 실험균주도 99.8%나 줄었다. 젖병이 인기를 끌자 은나노는 배냇저고리, 이불세트, 겉싸보, 마스크로 영역을 확장했다. 은 원액을 원단에 입혀 가공 처리한 섬유는 항균력 높아 민감한 피부에 적합한다. 롯데백화점 유아용품 직원들은 “아기가 태어나 처음 입는 옷이라 임신부들이 기능성 제품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도 유아복 소재로 각광받는다. 대두에서 빼낸 천연 단백질로 만든 콩섬유는 아토피 등 피부병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이다. 은행나무 추출물로 만든 섬유는 벌레의 유충이나 곰팡이를 없앤다.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오르가닉 코튼’도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오르가닉 섬유는 3년간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농지에서 유기농 야채 쓰레기와 해초류의 퇴비, 소똥 등 순수 자연물 퇴비로 재배, 생산한 면화로 짠다. 염색할 때도 화학물질 사용을 많이 제한한다. 자일리톨 성분으로 만든 유아복은 피부온도를 떨어뜨려 여름철에 좋다. 알코올 성분을 함유한 자일리톨이 물에 녹으면서 열을 흡수하는 것. 실제 온도를 측정해보니 일반직물보다 섭씨 2도 이상 낮았다. 유아복업체인 ㈜이에프이 이대웅 대리는 “올여름 100년 만의 무더위가 찾아오면 냉감 소재 유아용품의 판매가 급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토피 피부염을 예방하라 요즘은 신생아 10명중 절반이 아토피 피부염을 앓는다는 것이 한의사들의 추산이다. 출산한 부부들이 대부분 새 집에서 새 가구·가전제품으로 살림하는 까닭이다. 아기가 가장 먼저 ‘새집증후군’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토피를 줄이거나 예방하는 유아용 피부관리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동충하초와 비슷한 곤충병원성 곰팡이에서 추출한 천연물질로 만든 로션도, 당귀 등 한방성분을 넣은 제품도 나왔다. 미네랄이 풍부한 진주를 함유시켜 연약한 피부를 다스리기도 한다. 소 초유성분인 사이토카인은 자기면역력을 높여줘 관심을 끈다.5개월된 딸을 둔 이경미(31)씨는 “아기는 목욕을 자주해 피부가 건조해지기 쉽다.”면서 “아토피 피부염이 없어도 스킨케어 제품을 신중하게 고른다.”고 말했다. ●숯베개·삼륜유모차 등 다양 기능성 유아용품 시장은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옷이나 피부관리용품이 대부분이지만 베개·유모차도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숯베개의 경우 출산 필수품인 좁쌀베개의 단점을 보완한 제품. 땀 많은 아기가 사용한 좁쌀베개는 햇볕에 말리지 않으면 벌레가 생긴다. 그러나 숯베개는 항균·습도조절 기능이 탁월해 따로 건조시키지 않아도 된다. 바퀴가 세개 달린 유모차도 나왔다. 부모가 유모차와 함께 달리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탈 수 있도록 고안됐다. 일반 유모차보다 3배 정도 큰 30㎝ 바퀴를 사용해 높은 턱을 넘을 때도 편리하다. 우주복에 쓰이는 첨단 신소재인 컴포템프를 활용한 유모차도 있다. 체온과 주변 온도에 따라 자동으로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해 신체 온도의 균형을 유지한다. 아가방 마케팅팀 조강현 이사는 “기능성 제품을 선호하는 분위기는 강남에서 강북으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퍼지고 있다.”면서 “각 업체의 주력상품으로 자리잡아 제품 개발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정감록’이 수백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런데도 막상 언제, 누가 정감록을 썼냐고 물으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책자라 왕조 말까지 금서(禁書)였고, 그래서 저작에 관해 참조될 만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럼, 우리는 정감록의 저자와 출현 시기를 하나도 알 수 없단 말인가?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심했다.‘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정사를 샅샅이 뒤지며 여러 가지로 궁리해보았다. 이제는 정감록이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를 답할 수 있게 됐다. 이 글에선 정감록의 기원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선조22년 정여립 역모사건이 기원? 처음으로 정감록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이는 이능화다. 그는 선조 22년(1589)에 발생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정감록’의 기원으로 간주했다. 이능화의 저서 ‘조선기독교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及 外交史)’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정여립은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계룡산에 갔다가 반란할 마음을 적은 시(反詩)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장차 나무 아들(木子, 즉 이씨)이 망하고 전읍(奠邑, 즉 정씨)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지어서 퍼뜨렸으며, 스스로 그에 응하였다. 이것이 정감록에 관한 주장의 시초가 된다.”요컨대 정여립이 계룡산에서 지은 ‘반시’에서 정감록이 시작됐다는 말이 된다. 일제시기엔 정감록의 기원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애써 찾아낸 답도 근거가 불명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1923년 도쿄(東京)에서 간행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集錄)’을 보면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그 저자에 대하여도 항간의 주장은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승려인 무학(無學, 또는 舞鶴)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조선의 태조가 무학을 존경하고 숭배하였던 것은 고려의 태조가 도선(道宣 또는 道詵이라고도 함)을 대우한 것과 비슷하였다. 조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하였는데, 사실은 무학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무학의 비석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입증할 수 없다.” 정감록의 작자와 출현 시기에 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별로 진척되지 못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나 할까.1973년 안춘근은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의 이본들을 대대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정감록집성(鄭鑑錄集成)’을 간행했다. 그는 정감록의 저자를 확인하기가 곤란한 사정을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작자에 대한 확증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알 수 없게 숨겨질 것이기 때문에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일이 경과할수록 더욱 알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정감록과 같이 허황하면 그럴수록 또 작자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른바 술서(術書) 또는 그 밖의 미신과 관련 있는 저작들의 작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요, 그것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논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 말대로 정감록을 언제, 누가 썼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시대에 금서로 낙인 찍혀 있었던 책이라서 그 사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베끼는 사람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학식에 따라 변형됐을 것은 틀림없다. 내 자신의 연구결과 확인된 사실이지만 역사상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 정감록의 내용은 현재의 정감록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어떤 연구자는 정감록이 등장한 시기를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전반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정감록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이 주장 역시 뒷받침할 증거는 뚜렷하지 못하다. ●‘정감록’은 고구려 때 나왔다? 학자들의 생각은 그렇다 치고 정감록을 애독한 민중들은 그 저자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1979년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살던 강성도(조사 당시 69세) 노인은 정감록의 유래를 이렇게 말했다. “정감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상고(上古)에, 뭐라더냐. 고구려 때, 그 때쯤 되었던 모양이라. 응 그 때쯤인데 어디 사람인가 하니 평안도 사람이야. 나면서부터 이 양반은 참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중국 땅을 한번 시찰로 나갔는데. 이 정감록은 남방의 화직성(火直星, 화성임)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야. 이 재주를 당할 재주가 없어. 미래를 다 알고 앉았으니 말이야. 뭐 요새 정감록비전(鄭鑑錄秘傳)이 그런 소리가 있지? 그 정감록이 남긴 책이 그렇지.” 강성도 노인은 정감록의 저자를 고구려 사람 정감록으로 보았다. 정감록을 평안도 출신이라고 못 박은 점도 재밌다. 젊었을 때 누구 못지않게 ‘정감록비전’을 자주 읽었다고 하는 강 노인의 이런 확신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강 노인의 견해가 일반의 인식을 대표하는지도 솔직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구비 전승의 근본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노인의 주장을 완전히 억지주장이라 매도하기도 어렵다. 강 노인 역시 어디선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정감록’이 삼국시대 고구려에 살던 정감록이란 사람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는 뜻도 된다.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정감록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았다. 영조 15년(1739) 음력 8월6일(경진)이었다. 그 날짜 실록엔 정감록의 성격과 그 책에 대한 당시 조정의 입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이 실려 있다. 정감록에 관해 워낙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몇 줄만 그대로 옮겨 보겠다. “이때 서북변방(평안도와 함경도)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鄭鑑讖緯之書)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그 책을 불살라 금지시키기를 청했다. 아울러 소문의 뿌리를 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말하기를,‘그것이 어찌 진시황이 서적의 소유를 금지한 것과 다르겠는가? 바른 기운(正氣,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충실하면 나쁜 기운(邪氣)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바른 기운을 북돋우는 데 학문이 아니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어서 왕은 수백 마디 말로 훈시하였다.” 방금 읽은 실록 기사는 정감록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거론하기는 어렵겠기에 우선 한 가지 사실만 특히 강조해 둔다. 정감록은 1739년경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 유행했다는 점이다.“이 때 서북 변방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라는 구절로 보아 명백하다. 만일 그 때 ‘정감록’이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면 특히 서북지방이 심하였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강 노인의 진술에서도 예언서의 작자가 평안도 사람 정감록이라고 했다. 물론 노인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말 가운데는 정감록이 평안도를 비롯한 북부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다. ●문제의 인물 조유제는 누구? ‘정감록’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또 다른 자료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록보다 약 두 달쯤 앞선 그 해 6월15일자 기록에 정감록의 유행에 대해 새로운 단서가 포착된다. “우의정 송인명이 또 아뢰었다.‘정감록(鄭鑑錄), 역년(歷年) 등에 관한 일은 조사에 있어 철저를 기해야 하고 또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함경감사에게 명령해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런데 본사(비변사)에 있는 서류를 살펴보니 조유제(趙裕齊) 등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가지고 비밀리에 함경도로 내려보내서 수사에 도움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임금은 그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 문맥으로 보아 정감록이나 역년은 모두 예언서가 틀림없다. 이들 예언서의 전파에 직접 관여한 이는 조유제로 밝혀져 있다. 전후 관계로 보아 함경도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 가운데 언급된 사항은 아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미처 모르고 있는 정보를 비변사가 입수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 어쩌면 조유제란 이는 예언서나 괴문서를 조작한 전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함경도 측이 몰랐을지 의문이다. 내가 짐작하는 마지막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함경도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있어 비변사에 조유제를 밀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 짐작이 옳다 해도 조유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나는 조유제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실록 등을 검색해 보았으나 도무지 정보가 없다. 좀 더 추측해 보면, 서울의 비변사가 그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어떤 사건에 연좌돼 함경도로 유배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본래 함경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방에선 이름이 다소 알려진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예언서를 저술할 정도라면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록에 조유제란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인 비중은 대단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하필 서북지방에서 ‘정감록’이 출현한 이유는?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북부 지방 출신을 차별했다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었고, 개국공신(開國功臣)들 중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무인(武人)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초창기부터 이들 무인을 박대하였다. 게다가 서북 사람들은 본래 상무적(尙武的) 기질이 강해 문과를 비롯한 과거 시험에서도 성적이 부진했다. 결과적으로 서북인들은 중앙 정계로부터 더욱 소외되었다. 자연히 서북 사람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원망이 컸는데, 이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긴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서북 출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대우는 20세기 초까지도 서북 출신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박은식은 광무 10년(1906)에 창립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창간호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정도였다. “여러 백년 동안 이른바 서토(西土 평안도와 황해도)의 출신이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던가. 책 읽는 선비는 재상 집안의 심부름꾼이요, 일반 평민은 모두 관리배들의 희생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는 이가 이른바 진사(進士)니 급제(及第) 등으로 붉은 대문(재상의 집)에 찾아가서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손님(벼슬을 구하기 위한 비굴한 행동을 말함) 노릇을 하면서 서울의 여관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여 평생을 그르쳤으니, 뜻을 이루지 못한 이는 진실로 안타깝다 하려니와 설사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라 한들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은 이가 있었던가.” 또 한 가지. 정감록이 하필 서북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데는 서북지방이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16세기 말부터 시작된 당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중앙 정객들은 산간 오지가 많은 평안도나 함경도로 유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속담 중에 “내일은 삼수(三水, 함경남도) 갑산(甲山, 함경남도)을 갈지라도.” 라는 표현이 있다. 함경도의 삼수나 갑산 같은 곳으로 유배를 당할망정 지금 당장은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 속담이 웅변하듯이 서북지방의 유배지는 누구에게도 최악의 거주 장소였다. 권좌에서 축출돼 서북 변경으로 쫓겨온 정객이라면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이 컸을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가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서북지역에 다수의 불만 정객들이 원한을 품은 채 지내는 실정이었다. 서북지방은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일촉즉발의 화염병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처럼 “민심을 현혹시키는” 예언서가 서북 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필연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나는 비변사등록에서 정감록 사건의 관련자로 거론된 조유제를 유배객 또는 지방 양반으로 추정했다. 바로 그와 같이 불우한 인사들이 예언서를 조작하고 유포하였을 것이다. ●나라를 원망하는 뜻이 꺾인(怨國失志) 사람들 손에서 탄생 정감록이 실제 출현한 시기는 1739년보다 앞섰는지도 모른다. 예언서란 것이 민간에 남몰래 유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정에서 문제로 삼기 전에 이미 항간에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정감록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 1739년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 때부터 조선왕조는 정감록을 문제의 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어본 실록 기사를 되새겨 보면, 정감록은 “참위(讖緯)”라고 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왕조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예언서란 뜻인데, 왕조의 뜻에 반하는 예언서라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예언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조작하고 유포했다고 봐야 한다. 일찍이 이능화는 그 점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정감록은 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잃은 무리(怨國失志)의 손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쟁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애써 관직을 구하던 선비들이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할 때면 반드시 정감록의 예언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감’은 가공인물인가 역사적 인물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실록에선 ‘정감록’을 “정감의 참위한 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조정은 정감이란 사람을 예언자 또는 정감록의 저자로 인식하였다는 뜻이 된다. 정감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가공인물인가 또는 역사적 인물인가?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아시아 삼바축제… 日 마쓰리에 산다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아시아 삼바축제… 日 마쓰리에 산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의 한 해는 마쓰리로 시작해 마쓰리와 함께 저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계절 내내 지역별 마쓰리가 계속된다. 일본인들은 마쓰리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고 문화전수도 한다. 큰 규모만도 6만개에서 30만개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사람이 하는 마쓰리에서 수 백만명이 참여하는 마쓰리도 있다. 마쓰리 행사를 위한 물품을 취급하고 행사를 기획하는 전문직업인도 많다. 마쓰리는 생활이요, 사업이다. 일본의 마쓰리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가 시작될 때 오쇼가쓰(正月)마쓰리 등이 많이 열리고,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때는 전국적으로 오본(盆)마쓰리 등이 많이 개최된다. 이런 마쓰리 때 가장 신성한 존재는 마을이나 씨족의 신(神)이다. 신들에게 풍요, 행복을 비는 행위가 마쓰리의 기본적인 형태다. ●마쓰리로 시작돼 마쓰리로 끝나 마쓰리는 일반적으로 물과 꽃으로 신을 영접, 차린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신은 신사를 축소한 가마 형태의 ‘미코시’(神輿)나 손수레 위에 실은 ‘다시’(山車)로 옮겨져 모셔진다. 본격적으로는 이를 메거나 떠밀고 동네를 돌면서 “왓쇼이, 왓쇼이”를 외친다. 이런 것을 반복한 뒤 음식을 나눠먹는다.‘왓쇼이’가 한국어 ‘왔소’에서 왔다는 것은 통설이다. 미코시나 다시의 운반은 남성의 권리였다.2차대전 후 여성도 참여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남성우위 전통이 여전하다. 홋카이도 출신 60대 자영업자 스즈키씨. 그녀는 고향마을에서 어릴 적 “여자는 미코시를 멜 수 없어.”라고 해 뒷전에 밀려 있었다. 도쿄에서 지금까지 살며 먼발치서 구경한 적은 있지만 아직도 참가경험은 없다. 하지만 일본은 1970∼80년대 지방분권이 강해지면서 지역 문화축제가 크게 팽창하면서 여성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방으로 새로운 볼거리인 마쓰리를 찾아 원정다니는 흐름이 형성됐다. ●이틀간 7000명이 춤을 춰 마쓰리는 사회통합과 전통문화나 가치전수의 장이다. 지역 마쓰리는 한 해 마쓰리가 끝난 직후부터 다음 해의 마쓰리 준비를 위해 구성원들이 물품과 예산을 마련했다. 각종 이벤트성의 마쓰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도쿄시내의 상점가인 파루센터에서 매년 8월 열리는 마쓰리도 인근 ‘아사가야중학교’ 학생들이 마쓰리에 쓰일 장식품을 합동으로 만들며 ‘지역사회활동 참여’를 배우게 된다. 자동차·전기·전자업체 등 지역 기업·상점들과 자위대까지도 협찬 형식 등으로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1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리는 도쿄 ‘고엔지 아와오도리’는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춤 대열에 참가한다. 지난해 8월말 이틀간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7000여명이 춤을 췄는데, 이들은 수십개 팀별로 수개월전부터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익혀 열연했다. 교토의 기온 마쓰리를 구경했다는 한 외교관은 “일본 마쓰리는 단순히 축제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사회 교육의 장이다. 지역사회의 전통문화를 훌륭히 전수한다. 한국도 참고했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통 마쓰리의 소멸 위기 하지만 지금 많은 마쓰리가 존립위기를 맞고 있다. 아예 사라지는 지역 마쓰리도 적지 않다. 그 자리를 하나·춤·상가 마쓰리 등 이벤트성 마쓰리가 대체하면서 “신이 떠나버린 이벤트 마쓰리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는 마쓰리전문가의 지적도 있다. 특히 지역사회 작은 신사가 중심이 돼 주민들이 참여하는 전통적 마쓰리들이 다수 존립을 위협받고 있다. 수백명씩이 참석, 미코시를 끌고 마을을 몇차례나 돌 때면 수천명이 길거리에서 호응했었지만 요즘엔 참가자가 수십명으로 줄어, 명맥만 유지하는 곳이 많다. 지방도시는 물론 도쿄도 마찬가지다. 실제 많은 도시인들은 마쓰리를 보지만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50대 이사카씨는 간사이 고향에서 어릴 적 마쓰리에 참가했던 적은 있지만 성인이 된 뒤 이런 기억은 없다. 도쿄에서 태어난 30대 회사원 아오노씨는 지난해 처음으로 도쿄 오모테산노 마쓰리에서 미코시를 한 번 멘 적이 있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이 없다고 간청을 해 참가했는데 메고가다 골목길에서 다칠 뻔했다.”며 앞으로 다시는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일부 마쓰리가 수백만명이 관람하는 등 대성황을 보이는 이면에 전통적인 마을단위의 마쓰리들이 ‘개인주의 확산’ 등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 마쓰리란 무엇인가 일본어 마쓰리는 우리말로는 축제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는 무속신앙의 제사의례를 나타내는 말로 제단 위에 제물을 올린 모습을 본뜬 한자 제(祭)를 빌려서 표시했다. 제사를 올리거나 ‘혼령을 모시다.’는 뜻도 있다. 즉 떠받들거나 바치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왕이 영토나 국민을 다스리는 정치 행위를 ‘마쓰리고토’(政)라고 부른 것도 마쓰리에서 파생됐다. 일왕이 부족연합의 수장인 동시에 최고위 제사장이었던 제정일치 사회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말이다. 마쓰리는 이처럼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제사를 올리는 집단제의에서 비롯한 축제다. 이런 신성한 축제이기 때문에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장소에서만 행해진다. 참가자들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는 동시에 세속의 때도 씻어낸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전통적 개념의 마쓰리의 형식과 내용이 변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주도로 마쓰리가 지역특산물 판매장으로 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마쓰리 원형은 가야·백제문화” |도쿄 이춘규특파원|한국과 일본의 지역축제 연구 전문가이면서 영화감독인 마에다 겐지 ‘하늘하우스’ 대표이사는 “마쓰리의 원형은 한반도, 중국남부 등 도래인들의 문화”라면서 “그 가운데 5세기 전후 가야와 백제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분석했다. 마쓰리의 기원은. -일본은 섬나라이다. 따라서 문화는 한반도, 중국남부, 인도네시아는 물론 호주, 그리고 퉁구스 등지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을 섬기는 행사를 했다. 그게 마쓰리의 원형이다. 조상신을 섬기는 것이다. 특히 4∼6세기의 가야문화가 중심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도 마찬가지다. 마쓰리 행위의 원형은 무엇인가. -도래인들의 생활수단이 마쓰리 행위에 반영돼 전수중이다. 무당이나 광대, 남사당패 등의 문화가 대표적이다. 한자나 불교, 식생활도 반영됐다. 무엇보다 생활 범위를 확대한 도래인들의 ‘프런티어정신’이 마쓰리에서는 중요하다. 일본인들의 선조는 한반도와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게 마쓰리에서도 확인된다. 마쓰리의 의식형태 등을 보면 어느나라에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한국축제 식민지시대에 다 없어져 그런데도 한국에 지역축제는 적다. -한국에도 많았었지만 일본이 1920∼45년 식민지통치기간 한국에서의 ‘마쓰리’를 없앴다. 대신 일본계 신사를 지었다. 이 때 별신굿 등 한국의 전통 ‘마쓰리’들이 사라졌다. 마쓰리의 종류는 어느정도인가. -마쓰리는 혼자서도 한다. 보통 30만개라고 하지만 100만개 이상의 마쓰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마쓰리는 신사가 중심인데, 신사는 큰 것만 6만 9000여개다. 일년에 20회 이상 마쓰리를 하는 신사도 있다. 절이나 이벤트성 마쓰리는 여기서 파생됐다. 최근의 마쓰리 경향은. -풍류 마쓰리, 이른바 이벤트성 마쓰리가 늘고 있다. 대신 애니미즘적 마쓰리나 생활재현 마쓰리, 조상신 마쓰리 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마쓰리에 여성 차별이 존재하나. -여성이 배제된 마쓰리가 많고 그 시대가 길었다. 오르는 것이 여성에게 금지된 산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은 무당이 굿의 주역인데,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게 많았다. 물론 모심기 마쓰리 등에서는 여성이 주역이었다. 반면 신사를 중심으로 한 마쓰리는 여성의 주체적 참여를 금지하는 곳이 많다. 마쓰리의 장래를 어떻게 보나. -조상신을 모시는 마쓰리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증가될 수도 있다. 전통적인 마쓰리문화는 약화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과도기다. 자연재해극복과 마쓰리의 연관은. -지진과 관련은 적다. 하지만 자연재해의 공포를 극복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마쓰리는 많다. 일본사람 마음속엔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가 스며들어 있다. 한국인들은 밝고 재해에 대한 공포심은 적다. 외국의 침략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것이 일본과의 큰 차이다. ●강릉 단오제 일본 왕실 마쓰리 모태 한국문화가 마쓰리에 남아 있나. -너무나 많다. 유명한 아사쿠사 산샤마쓰리의 경우 가장 큰 미코시에는 조선의 신이 탄다. 강릉 단오제는 일본 왕실 마쓰리의 모태다. 줄다리기, 광대, 굿 등의 영향도 크다. 시가현 비와호 주변에선 가야금과 유사한 2000년전의 악기가 발견됐는데 그게 지금도 많은 마쓰리에서 쓰인다. 이와 같이 마쓰리를 연구하면 한반도와 연관 사실이 부각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 차원의 지원이 없는 것이다. 집단적 스트레스 해소책도 되나. -마쓰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스트레스해소에 매우 좋다. 그래서 1년간 지역사회에서 마쓰리를 위해 돈을 모아 마쓰리에 쓰면서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지역사회 화합의 요소도 많다. 마쓰리와 ‘천황제’의 관련성은. -민속학과 마쓰리를 파고들면 일본인의 생활전체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의 정신성과 생활형식 등을 연결하는 구조다. 그런 일본인의 정신과 생활구조의 최상층부에 ‘천황’이 존재한다. 마쓰리의 학문적 연구는 적은데. -마쓰리 연구에 대한 지원이 적다. 조선(한반도)을 연구하는 게 많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마쓰리를 지원하는 단체도 없다.(상업적, 이벤트성 마쓰리는 많은 기업들이 지원)마쓰리를 통해 일본 문화의 기원을 알고, 동북아시아나 해양민족의 영향과 교류 등을 알아 거울로 삼으면 좋을텐데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taein@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68)夫婦有別(부부유별)

    夫婦有別(부부유별) 儒林 (318)에는 ‘夫婦有別’(지아비 부/지어미 부/있을 유/나눌 별)이 나오는데,‘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分別(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分別은 調和(조화)를 前提(전제)한 區分(구분)이기 때문에 差別(차별)과는 의미가 다르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역할에 충실한 가정은 和睦(화목)하다. 반면 남편과 아내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愛情(애정) 전선에도 이상이 온다. 따라서 夫婦有別을 男性(남성) 優位(우위)를 강조하는 前近代的(전근대적) 遺産(유산)으로 보는 것은 短見(단견)에 불과하다. ‘夫’자의 본 뜻은 ‘성인 남자’인데,‘지아비,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 다스리다, 돕다.’의 뜻으로도 쓰였다. ‘婦’자는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婦女子(부녀자)의 모습을 나타낸 會意字(회의자)에 속한다.用例(용례)에는 ‘婦德(부덕:부녀자의 아름다운 덕행),婦人(부인:결혼한 여자),婦人之仁(부인지인:여자가 지니는 좁은 소견의 인정)’ 등이 있다. ‘有’는 ‘고기 덩이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양’을 뜻한다.‘有口無行(유구무행:입에 발린 말만 있고 실행하는 바가 없음),未曾有(미증유: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 등에 쓰인다. ‘別’자는 ‘月’(고기 육의 변형)이 없는 ‘骨’(뼈 골)과 ‘刀’(칼 도)를 합하여 ‘분해하다.’는 뜻을 나타내었고, 다시 ‘다르다, 나누다, 떠나다, 구별하다.’ 등의 뜻이 派生(파생)되었다.用例에는 ‘別故(별고:특별한 사고),別種(별종:다른 종류),判別(판별: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구별함)’ 등이 있다. 栗谷(율곡) 李珥(이이)는 學問(학문)이란 일상생활의 實踐(실천)을 통해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孝道(효도)하며, 신하는 忠誠(충성)하고, 부부는 分別(분별)이 있고, 형제는 友愛(우애)하고, 젊은이는 어른을 恭敬(공경)하고, 붕우는 信義(신의)가 있도록 하는 것’, 즉 五倫(오륜)을 體得(체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五倫(오륜)의 첫째는 父子有親(부자유친)으로 ‘아버지와 자식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간은 가장 가까우면서 사랑으로 맺어진 인륜의 출발점이다. 시작을 다지기 위해서는 慈愛(자애)와 孝誠(효성)을 돈독히 해야 한다. 둘째,君臣有義(군신유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義’란 자기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道理(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君臣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君을 國家(국가)로,臣을 國民(국민)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셋째,夫婦有別(부부유별)은 冒頭(모두)의 설명과 같다. 넷째,長幼有序(장유유서)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序란 순서와 질서를 말한다. 연장자는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젊은이는 연장자를 인생의 先輩(선배)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朋友有信(붕우유신)은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친구 사이에는 信用(신용)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친구 사이에 신용을 잃으면 그 사람은 설자리가 없다. 신용은 값으로 換算(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財産(재산)이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하프타임] 성남·에인트호벤 피스컵 개막전 맞대결

    프로축구 K리그 6회 우승의 성남과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이 오는 7월15일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시작되는 ‘2005 피스컵 코리아’ 개막전 맞상대로 결정됐다. 피스컵 조직위원회는 21일 조추첨 행사를 갖고 8개 참가팀의 대진표를 확정했다.A조에는 에인트호벤, 성남, 온세 칼다스(콜롬비아), 올림피크 리옹(프랑스)이 묶였다. 토튼햄 핫스퍼(잉글랜드), 보카 주니어스(아르헨티나), 선 다운스 FC(남아공), 레알 소시에다드(스페인)는 B조로 편성됐다.
  • [임해리의 色色남녀] 아연살색

    얼마 전 일본에서 살던 친구가 13년의 타국살이를 접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몇 년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까칠하고 지쳐 보였다.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중년남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동네 주민이 되면서 친한 지인들은 결속력을 다지는 듯 자주 모였다. 며칠 전 우리는 드디어 그에게 ‘원기부족과 아연증후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식사나 음주를 할 때마다 아연이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타령하였다. 자기와 친한 일본남자가 늘 하는 말이 피로회복에는 아연 섭취가 중요하다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아연(Zn)은 정력강화의 3대 영양소(비타민 E, 비타민 A, 아연) 중 하나로 우리 몸에서는 합성되지 않아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할 필수 미네랄이라고 한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증가시키고 세포성장과 상처치유, 피부의 유지 재생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시력유지에도 중요하고 최근에는 아토피 치료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미국, 일본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요즈음 남성들의 정력이 위협받고 피부질환자가 급증하는 이유는 아연의 부족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연환경의 악화와 환경호르몬, 고칼로리의 식사, 식품첨가물, 스트레스의 가중 등이 아연부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특히 인스턴트 식품이나 패스트푸드에 들어가는 식품첨가물은 아연흡수를 어렵게 하는 것이 많다고 한다. 내 주변에서도 라면과 과자, 빵을 좋아하는 여자 치고 피부 좋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여자는 피부만 좋아도 미인 조건에 50%는 점수를 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아연이 부족하면 피부는 건성으로 칙칙해지며 피부염의 원인이 된다고 하니 건강과 성적 매력을 위해서는 음식을 가려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일본은 토양이 화산재가 많아 아연이 적고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토양의 미네랄이 쉽게 유실되기 때문에 아연 섭취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흔히 정력에 좋다는 식품에는 아연이 많이 있다고 한다. 굴을 비롯하여 연어, 생선, 붉은 쇠고기와 콩류, 땅콩, 호두, 호박씨 등의 견과류와 새우, 게 등 갑각류가 이에 속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음식이 보약(食藥同源)이라는 이론을 신봉하는 편이다. 제철에 나는 음식을 골고루 먹고 꽁치통조림 대신 꽁치를 사다 구어 먹고 햄을 먹느니 돼지고기를 사서 김치에 지져 먹자는 주의다. 또한 비싼 화장품을 바르는 것보다 영양가 있게 잘 먹고 성질 다스리며 사는 길이 피부건강에 좋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성격 별난 여자가 피부 곱기도 쉽지 않다. 정력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남자가 성격은 있는 대로 꼬였으면서 정력에 좋다면 눈이 벌게 져서 보신탕과 비아그라 복용한다고 몸이 ‘뽀빠이’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성격이 꼬이면 오장육부가 다 편편치가 않은데 소화가 잘될 턱이 없고 기(氣)가 잘 통하지 않고 막히는데 유독 특정 부위(?)만 기운이 넘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남자들이 정력강장제에 용쓰는 대신 천연식품을 골고루 섭취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력을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웰빙 가족나들이 이천으로…

    웰빙 가족나들이 이천으로…

    가족 나들이에도 ‘웰빙’ 열풍이 거세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피로도 풀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각광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23일부터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열리는 경기 이천은 최적의 웰빙 가족 여행지. 지구촌 도자기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맛있기로 유명한 이천 쌀밥을 맛보고, 온천으로 쌓인 피로도 풀 수 있다. 여기에 친환경 농촌마을인 부래미마을과 노란색 산수유가 핀 산수유 마을도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이천 나들이의 장점은 할인행사가 풍성해 4인 가족이 6~7만원 정도의 여행 경비로 하루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 남도지방으로의 나들이가 버거운 수도권 주민들에게 이천은 알짜배기 당일 나들이 코스. 초등학생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웰빙 여행 ‘바겐 세일’중인 이천으로 부담없이 떠나도 좋다.23일 시작되는 세계도자비엔날레를 미리 다녀왔다. 이천 글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9:00 도자기 비엔날레 세계 67개국 도예가 3000명이 참가하는 도자기의 제전 ‘2005 제 3회 세계 도자비엔날레’ 행사장인 이천 세계도자센터(031-631-6507)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오전 7시 서울을 출발, 경부·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이천 IC를 빠져나와 도로변에 설치된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자 쉽게 행사장인 설봉공원에 도착했다. 정문에 들어서자 꽃으로 장식된 축제 마스코트 토야(TOYA)가 반갑게 맞이했다. 흙(地)을 ‘토(土)와 야(也)’로 풀어 쓴 것으로 ‘지상의 모든 생물은 전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깊은 뜻을 가진 마스코트다. 행사 규모에 비해 입장료가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이천 세계도자센터를 비롯해 여주세계생활도자관, 광주 조선관요박물관 등 3곳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당일권이 어른 8000원, 초등학생 4000원.22일까지 미리 예매(www.wocef.com)하면 2000원씩 할인받을 수 있다. 미리 예약하면 부모와 초등학생 자녀 2명을 포함해 1만 6000원이면 된다. 2년마다 가을에 열리던 행사를 올해부터는 봄으로 바꿔 한층 화사해진 것이 특징이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 핀 언덕길을 오르자 전시관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전시장 1층에 있는 안토니 곰리(영국)의 작품 ‘아시아의 땅’.1만 9000여개의 얼굴모양을 한 10여㎝의 작은 도자기가 50여평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중국 상하이에서 학생과 주민들이 만든 30만개의 도자기중 일부를 가져왔으며, 같은 모양의 얼굴은 하나도 없다.”는 게 세계도자기엑스포 남기명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이어 이천 국제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작품인 필립 바스(스위스)의 얼굴모양 용기 등 작품을 비롯해 도자기로 만든 자동차, 침대, 한복 등 다양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센터 옆에 있는 ‘도자만권당’(631-6649)은 국내 유일의 도자기 도서관. 중국과 일본, 영국, 미국, 독일 등 세계 각국의 주요 도자전문자료와 관련잡지, 학위논문 등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봄소풍을 나온 이천 설봉어린이집 아이들은 신기한 듯 토야를 이리저리 만지며 즐거워했다.“꽃으로 만든 토야가 너무 예쁘다.”며 수줍은 듯 말하는 양유빈(5) 어린이가 봄꽃만큼이나 귀엽다. 한편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IC 바로 옆에 있는 광주 조선관요박물관(797-0614)에서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과 함께 우리나라 국보와 중국 1급 문화재, 일본 중요문화재 등 전세계에서 모인 국보급 청자 200여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영동고속도로 여주IC로 나오면 만나는 여주세계생활도자관(884-8715)에서는 세계의 작가 20여명이 출품한 서재와 주방, 침실과 욕실, 휴게 공간 등 도자기를 실생활에 접목시킨 작품을 볼 수 있다. 모두 이천에서 3번 국도를 따라가면 각각 10∼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세계도자기 엑스포 www.wocef.com, 631-6509. 12:00 이천쌀밥 점심 오전 내내 도자기를 꼼꼼하게 감상하느라 허기진 배를 달래는데는 이천 쌀밥이 최고. 예로부터 이천 쌀은 맛있기로 유명해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던 진상미다. 쌀밥집이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은 모두 가마솥에 고슬고슬 지어낸 쌀밥에 된장 뚝배기와 간장 게장 등 30여가지 반찬을 함께 내놓는다. 3번 국도변에 쌀밥집이 많은데 옛날쌀밥집(633-3010)과 고미정(634-4811), 임금님쌀밥집(632-3646) 등 20여곳이 관광 식당으로 지정돼 있다. 가격은 9000∼1만원. 미란다호텔 앞 도가니 설렁탕 전문점 푸주옥(635-7892)의 24시간 우려낸 국물로 만든 도가니탕이 일품이다.1인분에 9000원. 광주에서는 소머리 국밥과 도공들이 붕어찜, 여주에서는 남한강에서 갓 잡아올린 민물생선 매운탕과 천서리 막국수가 유명하다. 13:00 웰빙식기 골라봐 이천 시내 곳곳에서는 웰빙 열풍을 타고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다양한 도자식기를 구입할 수 있다. 요장에 들러 구입할 수도 있지만 3번 국도변 신둔면과 사음동 일대에는 10㎞ 거리에 걸쳐 300여개의 도자기 전시·판매장이 모여 있다. 전국의 도예 명장들이 몰려 있어 가격이 비쌀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생각만큼 비싸지 않다. 수백∼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도예 명장인 세창도예(632-7711)의 김세용선생 등의 작품을 제외하면 몇천원짜리 생활 자기도 많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도자기 쌀항아리의 경우 2만∼10만원이면 2말에서 반가마까지 들어가는 것을 구입할 수 있다. 밥그릇과 접시, 컵 등은 누가 만든 것이냐에 따라 수천원에서 수십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지천도요(633-7668) 지창운 대표는 “청자와 백자, 분청 등 예술작품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쓰이는 찻잔, 머그잔, 액세서리 등 소품 등을 상설 전시·판매하고 있다.”면서 “생활자기의 경우에는 일반 백화점 가격에 비해 50% 이상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입시 주의할 점은 도자기는 낮에 구입하는 것이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 밤에는 도자기의 흠집이나 색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5:00 노란 산수유 마을 도자기를 감상하면서 피로해진 눈을 다스리는데는 노란 산수유가 제격. 설봉공원에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산수유 마을을 산책하면 좋다. 노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산수유 마을은 백사면 도립리와 경사리, 송말리 등 5만여평.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산수유 군락지다.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때 낙향한 선비들이 이 곳에 은거하면서 처음 산수유를 심었다고 전해진다.100년 이상된 고목들이 많아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마을에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를 비롯해 화가,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담한 마을 입구에 있는 도립리 ‘육괴정’은 기묘사화를 피해 낙향한 여섯 선비의 우의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산책로 곳곳에서 판매하는 산수유 차와 산수유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면 피로가 풀린다. 산수유는 자양강장과 피로회복, 식용증진, 변비, 해열 등 다양한 질병에 좋은 열매. 차 한잔에 1000원, 막걸리는 3000원. 산수유 열매를 봉지에 담아 판다. 한봉지에 3000∼5000원. 지난해까지만 해도 1만∼2만원에 팔던 것이 중국산 수입으로 가격이 크게 내렸다. 마을 인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 이천백송과 반룡송 등이 인상적이다. 반룡송(천연기념물 381호)은 하늘로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의 모습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초등학생 자녀가 있다면 농촌체험마을인 부래미마을(www.buraemi.invil.org)에 가면 좋다.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마을주위를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산과 입구의 동그란 저수지가 아늑하고 포근함을 더해주고 있다.‘부래미(富來美)’라는 마을명은 정신적으로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는 품격 높은 부자마을이라는 뜻이다. 계절별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있는데 봄에는 나물캐기, 도자기 시연, 염색, 떡메를 쳐서 인절미 만들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체험료는 식사를 포함해 1만 7000∼1만 8000원(643-0817). 18:00 마무리는 온천 온천은 나들이의 단골 코스. 도자기비엔날레 기간 중 40%의 파격적인 할인행사가 펼쳐진다. 600여년 전인 조선시대부터 뜨거운 물이 올라와 ‘온천배미’라고 불려왔던 곳에 온천시설이 들어섰다. 한 농부가 사철 솟아나는 더운 샘물에 세수를 하였더니 눈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미란다호텔 스파플러스(633-2001)가 유명한데 실내·외 온천탕과 레저탕 등 30여가지 기능성 온천탕을 갖췄다.5000여명이 동시에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초대형 온천 테마파크로 요금은 주중 성인 1만원에서 6000원, 어린이는 7000원에서 4200원이며, 주말에는 성인 1만 2000원에서 7200원, 어린이 9000원에서 5400원으로 할인됐다. 귀가는 온천에서 피로를 푼 뒤 러시아워를 피해 9시 이후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올라오는 것이 좋다.
  • 하자! 하자! 한방다이어트

    하자! 하자! 한방다이어트

    10살배기 여자아이들이 살이 쪘다며 투덜댄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면 체중조절을 이유로‘외톨이’를 자처하기도 한다. 요즘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다이어트의 기본은 ‘근육은 늘리고 체지방을 줄이는 것’. 무조건 굶은 게 아니라 하루 필요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적절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다이어트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내게 맞는 다이어트가 어떤 것인지 알아내기는 역시 어렵다. 체질에 따라 몸속과 겉을 함께 다스려 대표적인 건강 다이어트법으로 꼽히는 한방다이어트. 전문가 3인에게 제대로 된 다이어트법을 들어봤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생생한의원 서은경 원장 서은경 생생한의원 원장은 수분을 제한하면서 지방을 완전히 분해하고, 같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과 교감하면서 의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임금의 갈증을 다스리고 기력을 보강하는 궁중처방인 백비탕을 응용한 ‘백비다이어트’로 수분 공급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면서 체지방이 물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지방은 물 108분자와 에너지 130분자로 나누어집니다. 지방이 제대로 분해되면 수분을 공급하지 않아도 일정 수준의 수분은 늘 몸 속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죠.” 쉽게 얘기하면 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원리다. 동면하는 동물이 3∼4개월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체력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잔뜩 저장된 체지방이 수분과 에너지로 분해되기 때문. 백비다이어트에 들어있는 인삼이 지방 분해를 돕고, 다이어트에 돌입한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식욕은 당귀로 조절한다는 것이다. 한달 동안은 백비다이어트를 진행하면서 백비클럽(www.100btang.com)을 통해 다이어트 방법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바른 것인지 정보를 나누고 의지를 북돋운다. 서 원장은 살을 빼는 데 조급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적어도 한 달은 꾸준히 다이어트 일정에 따라 생활하고, 체중을 줄인 뒤 6개월간은 몸무게 변화를 지켜보도록 권했다.5∼10㎏이 빠져 몸이 가벼워지면 긴장감을 잃고 식사량이 늘어나 요요현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김소형한의원 김소형 원장 김소형한의원(www.n-clinic.com)의 김소형 원장은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고, 과다한 칼로리를 소비하는 것이 근본적인 다이어트라고 말한다.“식사량을 조절하면서 체질을 알고 마음을 다스리면 보다 효과적으로 살을 뺄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체비만형이 많은 소음인은 스트레스를 잘 풀고, 소화기를 잘 관리해야 한다. 규칙적인 식생활을 하고, 운동과 간은 활동적인 일을 갖는 것이 좋다. 상체발달형의 소양인은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고, 서늘한 음식을 즐기면서 상체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소화기능이 좋은 태음인은 기름진 음식과 자극적인 음식, 과식은 절대 주의한다. 활동량과 칼로리 소모가 많은 운동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태양인은 비만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지만 단전호흡이나 정신 수양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 균형 잡힌 식단은 한 끼 분량의 필수영양소가 들어있는 ‘본다이어트’로 조절할 수 있다. 보통 아침식사 이후 점심 양은 절반으로 줄이고, 저녁에 본다이어트 1포를 먹는다. 단기간에 체중조절을 하고 싶다면 아침, 저녁으로 본 다이어트를 먹는 것이 좋다. ●예가한의원 최승 원장 11년째 운동과 함께하는 한방다이어트를 전파하는 예가한의원의 최승 원장은 “다이어트는 기분 좋게 먹고, 기분 좋게 운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비만환자들은 먹고 싶은 것을 참았다가 한꺼번에 식욕을 터뜨려 적정량 이상을 먹고 그동안의 다이어트를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면서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운동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무조건 음식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영양분을 적절히 분배하는 식단을 2∼3주 정도 유지하면서 음식조절을 한다. 최 원장의 비방을 그대로 녹인 ‘다이어트락’을 하루 한두 끼 정도 식사 대신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와 함께 사상체질별로 성격과 습관, 비만에 이른 원인을 파악한 뒤 적절한 운동을 병행해 체지방과 근육의 비율을 맞추도록 권한다. 예컨대 비만이 적고, 근육형의 태양인은 요가를 통해 유연성을 키우는 식이다. 전체적으로 골고루 찌는 태음인은 열이 많아 허기를 쉽게 느끼낀다. 운동을 심하게 하면 왕성한 식욕을 발휘해 과식을 할 수 있다. 식사량을 조절하면서 꾸준히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게 좋다. 소양인은 빠르게 먹는 음식 습관을 조절해야 한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습관을 들이고, 등산, 테니스 등 하체를 보강하는 운동을 추천한다. 기력이 약하고 하체비만형이 많은 소음인은 가볍게 지속할 수 있는 산책과 댄스, 비교적 하체에 힘이 덜 들어가는 수영도 좋다. 최 원장은 다이어트에 관한 한 스스로를 ‘한의사’보다는 ‘라이프스타일 코치’라고 부른다.“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꾸준히 운동하는 생활습관을 잡아주려고 노력합니다.” 홈페이지(www.dietlak.com 또는 www.dance4diet.com)에서는 다이어트 정보와 댄스 동영상을 볼 수 있다.
  • [儒林 속 한자이야기] (67)

    曠夫(광부) 儒林 316에는 ‘曠夫’(빌 광/지아비 부)가 나오는데, 이 말은 孟子(맹자) 梁惠王(양혜왕) 下篇(하편)의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惠王(혜왕) 자신은 女色(여색)을 너무 좋아하여 탈이라는 話頭(화두)를 꺼냈다. 이에 대하여 孟子(맹자)는 “남자로서 女性(여성)을 좋아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다만 與民同樂(여민동락)해야 할 王(왕)의 신분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苦痛(고통)을 외면한 채 혼자만 여색을 탐하는 것이 잘못일 뿐이다. 따라서 善政(선정)을 베풀어 짝을 이루지 못하였거나 짝 잃은 怨女(원녀:과부를 뜻함)와 曠夫(광부: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한 남편, 혹은 홀아비)가 없도록 한다면 王道政治(왕도정치)의 구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는 趣旨(취지)의 應答(응답)을 하였다. ‘曠’자는 ‘해가 넓게 비추어 밝다’에서 派生(파생)하여 너무 넓어 ‘공허하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밖에도 曠에는 ‘헛되이 지내다, 요원하다’의 뜻이 있다.用例(용례)에는 ‘曠官(광관:벼슬아치가 직무를 게을리함),曠年(광년:오랜 세월),曠野(광야: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曠日持久(광일지구:오랜 세월을 견디어 냄)’ 등이 있다. ‘夫’자는 우뚝 선 어른의 상형인 ‘大’와 어른들의 뒤통수에 꽂은 동곳을 가리키는 ‘一’을 합한 글자로, 본래의 뜻은 ‘성인 남자’인데 ‘지아비,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 다스리다, 돕다’의 뜻으로도 쓰였다.用例로는 ‘匹夫(필부: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 사내),夫子(부자:남편이나 스승, 혹은 존경하는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大丈夫(대장부:건장하고 씩씩한 사내)’ 등이 있다. 大丈夫는 매사에 正正堂堂(정정당당)하고 떳떳하여 道理(도리)와 信義(신의)를 중시한다. 남의 失手(실수)를 春風(춘풍)처럼 따스하게 대하지만 자신의 過誤(과오)에 대해서는 秋霜(추상)과도 같이 嚴格(엄격)하다. 孟子의 定義(정의)에 따르면,大丈夫는 큰 뜻을 품고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에 時俗(시속)에 흔들리지 않는다. 뜻을 이루더라도 驕慢(교만)하지 않고, 뜻을 이루지 못해도 卑屈(비굴)하지 않다.孟子의 기준으로 볼 때,魏(위)나라 사람 公孫衍(공손연)과 張儀(장의)와 같은 사람은 말 한마디로 천하의 諸侯(제후)들을 左之右之(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大丈夫는 아니다.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천하의 가장 넓은 곳에 살면서 천하의 가장 바른 지위에 서서 천하의 가장 큰 도를 행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그 도를 행한다. 설령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묵묵히 홀로 그 도를 행한다. 그러므로 富貴(부귀)가 放蕩(방탕)하게 하지 못하고,貧賤(빈천)이 뜻을 바꾸게 하지 못하며,威勢(위세)와 暴力(폭력)이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反面(반면)에 肉體的(육체적)인 삶에 執着(집착)하는 사람은 富貴를 얻게 되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으므로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放蕩하게 되며,貧賤하게 되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이 없으므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한다. 이런 삶에 집착하는 사람을 小人(소인), 또는 拙丈夫(졸장부)라고 한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씨줄날줄] 고구려碑/이용원 논설위원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그림을 말하는데,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서를 비롯한 문헌사료는 대개가 후대에 정리된 데다(예컨대 ‘삼국사기’는 고려가 재통일한 뒤 200여년 지나 나옴) 왕조의 변동 등에 따른 사실관계의 왜곡, 편찬자·집필자의 취사선택 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금석문은 당대의 사람이 직접 새겨넣은 것이라서 정확성·진실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3국시대의 금석문 가운데 유명한 것이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비문, 백제의 무령왕릉 묘지석문,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문 등이다. 일본이 소장한 칠지도와 스다하치만(隅田八幡)동경에도 각각 명문(銘文)이 있는데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한국·일본·중국 3국의 학자들이 전체 문맥은 물론 글자 하나하나의 해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이다. 일본은 이 비문을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한국 학자들은 한반도에 침입한 왜를 고구려가 즉시 토멸한 기록이라고 본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고구려 군대가 바다를 건너 일본을 복속시킨 내용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금석문 중에서는 역시 비에 새긴 비문이 으뜸이랄 수 있는데,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비(壁碑)가 최근 발굴돼 14일 경기도 분당 한국토지공사 내 토지박물관에서 막 올린 ‘공사 설립 30주년 특별전’에 공개됐다.290여 글자가 새겨진 이 벽비에는 고구려 11대 왕인 동천왕 11년(서기 237년)이라는 연대가 들어 있어 제작연대를 가늠케 해준다. 만약 이 벽비가 진품 판정을 받으면 현존하는 고구려 비 20여기를 포함해 국내에 남아 있는 모든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리잡게 된다. 게다가 그 내용이 위(魏) 관구검의 침입과 이를 격퇴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서 당시의 고구려와,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갑자기 출현한 이 벽비를 놓고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진위 판단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조급히 판정을 내릴 이유는 없다. 지금껏 사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은 거꾸로 진품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뜻밖에도 ‘정감록’에 경도됐던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적지 않았다. 영조 때 남원의 부자 김영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평소 유복해 보였던 김씨 일가가 비결에 쏠리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남원의 벽보 사건을 좀더 밀도 있게 그려보면 그 답이 보일 것 같다. ●남원성에 나붙은 벽보 영조9년 7월 하순. 그믐날이 가까워 달빛조차 희미한 깊은 밤, 김영건의 두 아들은 괴문서를 남원성벽에 붙였다. 장남 원팔이 문서를 내거는 동안 아우 원하가 망을 보았다. 출입이 가장 빈번한 남문 근처에 한 장의 대형 벽보를 붙이는데 실제 소요된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견딜 수 없이 긴 시간이었다. 당시 남원은 호남 굴지의 대도회라서 날마다 성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수백 명이 성안을 드나들었다. 그들의 눈에 띈 벽보 내용은 삽시간에 호남 일대로, 그리고 지리산 너머 영남 지방으로도 퍼져나갈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튿날 오전 남원부중은 괴문서 이야기로 들썩였다. 그날따라 몸이 불편해 좀 늦게 출근한 최정도 이방(吏房)은 이미 사령들이 수거해온 벽보를 훑어본 다음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조정대신을 강도 높게 비난한 구절도 그랬지만 ‘자미진주(紫微眞主)’ 운운한 것이 영락없는 반역자의 소행이었다. 이방이 알기로, 자미성(紫微星)은 자미원(紫微垣)에 속한 큰 별이다. 그것은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데 천제(天帝) 또는 국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벽보에 ‘진주’라고 했으니 한양성안 구중궁궐에 엄숙하게 앉아계신 상감께선 왕도 아니고, 자미성 정기를 받은 진짜 왕이 곧 나온다는 얘기다. 벽보엔 상감이 무도하다는 둥 동궁(사도세자)이 미쳤다는 둥 흉악한 언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핀 이방은 새파랗게 질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이방은 도호부사 조호신에게 긴급사태를 보고하는 한편, 많은 정탐꾼을 풀어 성 안팎에 떠도는 온갖 소문을 즉각 수집토록 했다. 평소 성품이 침착하고 판단력이 있는 이방이었다. 그는 엄하기로 이름난 이 형방, 실무경험이 가장 풍부한 박 호장 등과 함께 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소문들을 비교 종합해 믿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계통별로 분류했다. 범인을 바로 잡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수사는 신속히 진행돼야 했다. 최 이방은 진행중인 수사에 관해 남원부의 우두머리인 조 부사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다. 그러나 서울 명문대가 출신인 부사는 실무에 워낙 어두워 한숨만 내쉴 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정보를 비교분석해 보니 성안에 거주하는 김영건과 세 아들이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이방은 사령들을 급파해 우선 그들을 잡아들이고, 김씨 집안에 소장된 모든 문서(文書)를 철저히 수색했다. 그날 해질 무렵 김씨의 문갑에서 두 장의 수상한 문서가 발견됐다. 큰아들 원팔의 필체가 분명했는데, 놀랍게도 벽보의 초안이었다. 두 장 가운데서도 큰 종이에 적힌 문건은 벽보보다 언사가 훨씬 과격했다. 반역자만이 쓸 수 있는, 대역무도한 ‘불온문서’였다. ●정 노인이 일으킨 해프닝 김영건에 대한 남원 사람들의 평판은 무척 좋았다. 그는 성품이 부드럽고 공손하고 단정한 데다 재산도 많았다. 여느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웃은 물론, 집 앞을 지나는 거지들에게까지 후했다. 최 이방은 소문으로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섣불리 김영건에게 혐의를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문수사 결과를 무시할 수 없어 망설이다가 사령들을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영건의 집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는 바람에 이방은 기가 막혔다. 김영건에게는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 다 글 잘하고 글씨도 잘 쓴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모두 아버지를 닮아 인물도 훤칠했다. 특히 큰아들 원팔은 과거시험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을 정도다. 그는 남원은 물론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를 비롯해 각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고 있었다. 최 이방은 사실 김영건 일가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론 늘 김영건의 유복함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김영건 일가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수사에 동참한 이 형방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김영건의 ‘근본’ 즉, 신분을 둘러싼 의혹이 있다고 했다. 형방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이방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정 노인 사건을 다시금 뇌리에 떠올렸다. 하루는 남원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양반 정 노인이 읍내에 시장구경을 나왔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김영건을 노비의 자손이라고 비방하는 시비가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의 정 노인은 평소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해 세인의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 뒤 정 노인은 다시 그런 ‘망령된’ 말을 꺼내지 않아 사건으로 비화되진 않았다. 기억력이 비상한 최 이방조차 이 사건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정 노인이 입을 다문 것은 김영건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런 것이었다. 영건은 노인과 다투지 않고 도리어 그를 살며시 회유했다. 그는 노인을 정중히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약주를 대접했다. 싫은 노릇이었겠지만 그 뒤에도 길가에서 노인을 마주치면 먼저 반색을 했다. 남원 사람들의 눈엔 마치 도량 있는 김영건이 철없는 주정뱅이 노인을 너그러이 용서한 것으로 보였다. 이 사건은 영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몇 년 뒤에 일어났는데, 적어도 아들인 그만은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건의 비밀 사실 김영건은 노비나 별 다름 없이 천한 사람이었다. 남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상도 함양에 노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았는데, 그 집에 막산이란 사내종이 있었다. 그 아내는 이름을 분금이라 했다. 본래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그리고 김영건으로 말하면 분금의 아들이 분명했다. 분금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영리했고 행실도 조심스러웠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의 미색이 너무 뛰어났다는 점이다. 노씨네 행랑것이었던 그녀를 주인양반은 물론 그 집에 드나든 여러 양반들이 다투어 탐을 냈다. 분금은 물론 영건도 이런 집안내력을 꽁꽁 숨기며 살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건은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야 그 내력을 알게 됐다. 종 막산은 영건이 아직 젖먹이였을 때 돌림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양반들은 아예 마음 놓고 분금에게 집적거렸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체로 취미삼아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 분금은 자신이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것이 너무 원통했다. 엄밀히 말하면, 분금은 본래 노씨 집안의 여종이 아니었으므로 종살이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공연히 노씨네 종으로 간주되는 실정이었다. 한탄으로 나날을 보내던 분금은 남편을 묻은 지 1년 만에 젖먹이 영건을 등에 업고 몰래 주인집을 빠져나와 지리산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틀 동안 산길을 헤매던 분금은 지리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운봉을 지나 대도시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뼈대 있는 양반집에서 수년 동안 종 아닌 종살이를 한 분금은 양반들의 예의범절에 거의 통달한 편이라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는 질병으로 온 가족이 몰살한 어느 한미한 시골선비의 청상과부라고 했다. 영건의 성은 김씨가 됐다. 마침 그 얼마 전 역질이 남원성을 강타했던 탓에 성안엔 주인 없이 텅 빈 집이 여럿이었다. 분금은 그 가운데서도 시장 쪽으로 얌전히 앉은 초가집 하나를 골라 거처로 삼고서 오직 삯바느질에만 매달렸다. 분금은 나이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원체 부지런해 해마다 조금씩 재산이 늘어났다. 과부 허리춤엔 은이 서 말이란 속담 그대로였다. 영건이 스무 살쯤 됐을 때 어머니 분금은 논을 네댓 마지기나 장만했다. 영건은 어려서 서당을 몇 년 다녀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일찌감치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일에 전념했다. 잘 모르는 것은 이웃의 경험 많은 노인에게 물었고, 가끔 시장에 들러 쌀, 콩, 면화, 무명 등의 가격을 조사해 비망록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만일 콩 한 되라도 팔라치면 반드시 시세가 가장 비쌀 때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살림을 하다 보니 영건은 곧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됐다. 그런 아들인데도 늙은 어머니는 영건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누구에게든지 공손해라! 가난한 이웃을 잘 보살펴 주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신 원력 덕택이다. 절간에 시주를 게을리 하지 말라!” 영건은 그 가르침을 묵묵히 따랐고, 이웃사람들이 모두 영건을 존경했다. 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날 밤,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앉혀 놓고 나직이 말했다.“지금까지 네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라 믿어온 것이 실은 함양 양반 노씨네 종 막산의 제삿날이다. 나는 그 아내 분금이다. 네 아버지는 경상도 하동 사는 김 선비인데, 이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더는 모른다. 부디 죄 많은 이 어미를 용서해라. 이제 비밀을 네게 털어놓으니 내 가슴이 후련하구나!” ●김영건과 예언서의 만남 김영건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가 없어 혼자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랬는데 정 노인 사건까지 터져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천도를 핑계 삼아 절간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뭐든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던 것인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진 것도 같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회의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과연 전생에 무슨 큰 죄가 있어 평생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가. 종 아닌 종이 되어 제 근본을 숨기고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되는 내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불쌍한가. 언젠가 이 비밀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자식들의 장래는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놈의 세상이 아주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 나같이 천한 사람도 가슴 펴고 떳떳이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와야 된다. 도무지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김영건이 제기한 질문들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 노인 사건 이후 영건은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왕성했던 식욕은 오간데 없어졌고, 일할 마음도 사실은 거의 사라졌다. 세상이 허무하다는 한 생각만이 온종일 영건의 머리에 가득했다. 영건은 그런 자기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해 더욱 고민이었다. 그나마 큰 다행은 그가 가끔은 절간에 들러 스님들과 문답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건은 태연한 척 여러 가지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영건의 깊은 고민을 눈치 채는 경우도 없지 않아 찻잔을 마주한 승방 문답이 해질 때까지 오래 이어지기도 했다. 절간을 오가는 횟수는 점점 많아졌고 영건은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인연설은 물론 장차 미륵부처가 다스릴 용화세계가 지상에 실현된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밖에 승려 태진이 소지했던 것과 같은 ‘남사고비기’라든지 ‘정감록’에 관해서도 말을 많이 들었다. 정말 그 비결의 내용처럼 세상이 뒤집어져 상놈이 양반도 되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올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당시 조정에선 일체의 ‘위험한’ 비결의 독서, 소장, 유포 및 출판을 엄금했다. 금지가 심할수록 비결은 더욱 유행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영건도 절간에서 객승이 소지한 ‘남사고’를 한두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영건은 비결을 베껴 곁에 놓고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는 점차 비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비결을 직접 소장하지 못했고, 비결대로 세상을 바꾸려는 ‘불온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이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영건의 성격이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그는 이미 늙었다. 하지만 큰아들 원팔은 달랐다. 영리한 아들은 아버지의 불안과 고민을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아들에겐 최봉희란 약빠른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미 ‘남사고’를 소장하고 있었다. 아들은 최의 책을 필사해가지고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들은 위험천만한 ‘비결’ 조직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남원 양반 이유성의 문제제기 김영건 일가에 정체성의 위기가 다시 찾아온 것은 1733년이었다. 이미 칠순에 접어든 정 노인과 다시 문제가 생긴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정 노인의 외손녀사위인 이유성과 다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술 취한 정 노인이 이유성이 듣는 데서 김영건의 비천한 출신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 노인의 친구 가운데는 젊은 시절 분금을 유독 탐낸 양반이 하나 있었다. 그 양반이 참으로 우연히 남원 읍내 길가에서 이미 노인이 다 된 분금을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다.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 노인은 김영건을 노씨네 종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김영건의 비밀을 들은 이유성은 반드시 그것을 폭로하겠다고 별렀다. 스스로 양반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혈기 방장한 양반 이유성에게는 신분이 뒤섞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을 뒤흔드는 범죄행위였다. 그는 가짜 양반 김영건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유성의 적의를 느낀 김영건 일가는 극도로 긴장했다. 양측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져 마침내 상대방을 관가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출된 양측의 문건을 검토한 이 형방은 그들의 주장에 애매한 점이 많은 데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다른 사건들이 많은 관계로 그에 대한 심리를 뒤로 미뤄놓고 있었다. 김영건의 큰아들이 남원성벽에 붙인 벽보에는 게시자가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라고 적혀 있었다. 김씨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유성 집안에 역모 죄를 뒤집어씌울 계산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그런 단순한 계산에서 김원팔 형제는 위험천만한 벽보를 붙였을까. 아니면 혹시 어떤 비밀집단이 그들의 배후에서 벽보사건을 기획했던 것일까. 도승 자명과 변산 승려 태진, 최봉희, 김원팔 등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다음 호에서 따져볼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씨줄날줄] 대방군(帶方郡)/이용원 논설위원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예상대로 한·일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새로 삽입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대방군(帶方郡)을 ‘중국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중심지는 현재 서울 근처’라고 기술한 대목이다. 한반도의 정중앙에 일찌감치 한의 군현이 자리잡아 그로부터 한국사가 시작됐다는 인상을 주려는 잔꾀를 부린 것이다. 한국 고대사에서 대방군이 갖는 위치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대방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이래 우리 역사서에서 산견된다. 이를 정리하면 대방은 우선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낙랑·현도·임둔·진번)의 하나는 아니었다. 처음엔 임둔(또는 진번)에 속한 현(縣)이었는데, 낙랑을 제외한 세 군(郡)이 바로 흐지부지되자 낙랑군으로 편입되었다. 서기 200년 전후해 대방군으로서 독립한다. 위치는 황해도 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다산 정약용은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서’ 지리지 기록을 근거로 임진강 하류 일대로 추정했고, 실제로 봉산의 양동리 3·5호 고분을 발굴한 결과 전형적인 중국계 전축분(塼築墳)으로 밝혀졌다. 삼국사기에도 남쪽의 백제·마한, 북쪽의 고구려로부터 공격 받는 기록들이 등장한다. 대방군의 위상은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 따라 자주 바뀌었지만 중국 왕조가 태수를 파견해 직접 다스린 기간은 짧았다. 지배세력은 토착화해 소 왕국 노릇을 했다. 그런데도 서기 314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존속한 까닭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구려·백제가 직접 맞붙기 전에는 황해도 일대가 힘의 공백지역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군이 수행한 무역기지 역할이다. 대방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중국 문물을 들여오는 전진기지 구실을 했다. 특히 중국-가야-왜를 잇는 중간기지로서 중요했다. 따라서 4세기 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대방군이 서울 근처에 있었다는 후소샤 교과서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최근의 풍납토성 발굴 성과에서 보듯 대방군이 존재한 기간에 서울 일대에는 이미 강력한 국가인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일본 극우세력의 어거지라면 다음 개정판에서는 풍납토성이 대방군의 치소(治所)였다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儒林(320)-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20)-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이함형에 대한 퇴계의 사신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아내의 성품이 악덕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사람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또한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옛날에는 아내를 내쫓으면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으므로 칠거지악의 이유로 아내를 내쫓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평생 한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아니한다고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처럼 또는 원수 보듯 하여 자기 아내를 허무하게 천리 밖으로 내쳐서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를 망가뜨리고 자손을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대학에 말하기를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無諸己而后非諸仁).’고 하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 내 경우를 들어 말하겠네.” 퇴계가 말하였던 ‘자기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말은 대학의 제9장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순이 천하를 다스림에 인으로 하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걸주(桀紂)가 천하를 다스림에 포악함으로 하니 백성들도 따라서 악해졌느니라.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이 그 자신의 행동과 반대되는 것이면, 백성들이 따라 하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연후에 남에게 선을 권하고 자기 자신에게 악함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라는 법이다. 자기 자신에게 남을 용납하고 남과 함께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남을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다.” 퇴계가 이함형에게 주는 편지 속에서 대학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인용하였던 것은 부부유별의 어려운 윤리를 실천하였던 자신의 처지를 감히 말함으로써 이함형도 자신을 본받아 옛 성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해 주기를 바라는 충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권씨 부인과의 결혼생활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재혼하였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각박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애써 잘 대하기를 수십년이나 했다네. 그간에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찌 내 생각대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사게 하겠는가. 옛날 후한(後漢) 때의 사람 질운()이 ‘아내와 부부의 도리를 어기어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내가 이 말을 빌려 자네에게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도록 힘쓰도록 하게.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이함형에게 준 사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권씨 부인과의 16년에 걸친 결혼생활은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던’ 불우한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퇴계 스스로가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었음일까. 그러나 퇴계는 아내 권씨를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았음이니, 일찍이 세기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악처 크산티페를 두었는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왜 그런 악처와 사느냐 물었을 때,‘훌륭한 기수일수록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타는 법이오. 왜냐하면 그런 말을 잘 달래서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다 탈 수 있기 때문이오. 내가 크산티페를 잘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악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도 잘 달랠 수 있기 때문이오.’라고 말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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