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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재 ‘양심적 병역거부자’ 판단 유지…내용은 달랐다

    헌재 ‘양심적 병역거부자’ 판단 유지…내용은 달랐다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이 합헌이라는 판단을 바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헌이라는 의견은 지난 재판에 비교해 늘었다. 헌재는 28일 병역법 88조 1항의 위헌 여부를 판단해 달라며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법원이 낸 헌법소원·위헌법률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4(합헌) 대 4(위헌) 대 1(각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앞서 헌재는 2004년 두 차례 결정, 2011년 결정 모두 두 명씩 위헌 의견을 냈다. 이번 재판에서는 이진성·김이수·이선애·유남석 재판관이 “과잉금지원칙을 위배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일부 위헌 의견을 내놓았다. 이들 재판관은 헌재가 병역법 제5조(이하 병역종류조항)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을 위헌 근거로 삼았다. 병역법 5조는 병역의 종류를 현역·예비역·보충역·병역준비역·전시근로역 등 다섯 가지로만 구분하고, 대체복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어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병역 자원을 확보하고 병역 부담의 형평을 기하고자 하는 목적을 처벌 조항과 같은 정도로 달성할 수 있다”며 현재 처벌 조항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하는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한정해 볼 때 형사처벌이 예방 효과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처벌 조항이 ‘국가안보’와 ‘병역의무의 공평한 부담’이라는 공익 달성에 기여하는 정도도 크다고 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형사처벌을 했을 때 뒤따르는 불이익이 커거 ‘법익의 균형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도 했다. 합헌 의견을 낸 안창호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고충을 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별도의 보충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국가공동체가 처벌 이외의 법적 제재를 완화함으로써 기본권 제한을 경감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남편 살해 사형선고’ 수단 소녀, 전세계 ‘조혼 피해’ 청원에 감형

    ‘남편 살해 사형선고’ 수단 소녀, 전세계 ‘조혼 피해’ 청원에 감형

    남편 살해 혐의로 교수형 위기에 처했던 19세 수단 소녀가 전 세계에서 40만명 이상이 제기한 청원으로 사형을 면했다.26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계획적 살인으로 사형이 선고된 누라 후세인(19)에 대해 수단 항소법원이 징역 5년으로 감형하고, 피해자 유족에게 위자료 1만 8700달러(약 2000만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후세인은 지난해 4월 자신보다 16살 많은 남편과 강제적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 결혼할 뻔했지만 그나마 학교를 졸업하는 18세까지 기다려 달라고 사정해 미뤄진 것이었다. 후세인은 결혼식 후 남편의 접근을 막으며 저항했다. 그러자 남편은 사촌들을 불러 후세인의 팔과 다리를 제압하고 성폭행했다. 이튿날 또다시 성폭행을 당한 후세인은 흉기로 남편을 찌른 후 부모의 신고로 경찰에 검거됐고 지난달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조혼(早婚) 풍습으로 악명이 높은 수단에서 결혼 최소 연령은 10살이다. 유엔 여성위원회와 유럽연합(EU), 국제앰네스티 등이 조혼 악습에 항의하며 ‘수단 정부에 전 세계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그녀의 생명을 살릴 것을 청원한다’는 후세인 구명 성명을 냈다. 배우 에마 왓슨과 미라 소르비노,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뿐 아니라 줄리아 길라드 전 호주 총리도 소셜 온라인에서 펼쳐진 ‘누라를 위한 정의’(#JusticeForNoura) 캠페인에 동참하며 사형 판결 취소를 촉구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면 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 후세인은 이제 “만약 사면을 받는다면 법을 공부해 억압받는 다른 이들을 변호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3월 발간된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1200만명의 여자 어린이(만 18세 미만)가 전 세계에서 조혼을 강요당하고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111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강아지 동상 습격 사건

    111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강아지 동상 습격 사건

    1907년 11월 20일 밤, 한 무리의 영국 의대생들은 개 한 마리의 동상을 파괴하기 위해 배터시(Battersea, 런던 남서부에 있는 자치구의 하나)로 향했다. 런던의 평균적인 기상조건을 감안하더라도 그날 밤에는 안개가 유난히 자욱했으므로, 나쁜 짓을 해도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2.5미터 남짓한 높이의 기념물은 분수대이기도 해서, 사람에게는 높지만 동물에게는 낮은 분출구가 달려 있었다. 갈색 테리어의 동상은 높은 화강암 기단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학생들의 비위를 거스른 것은 주춧돌 위에 새겨진 글씨였다. “1903년 2월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연구실에서 사망한 갈색 테리어의 명목을 빈다. 2개월여 동안 진행된 생체해부를 견뎌낸 후 한 생체해부자에게서 다른 생체해부자에게 인계되었고, 죽음이 그를 해방시킬 때까지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1902년 한 해 동안 같은 장소에서 해부된 232마리 실험견들의 명목을 빈다. 영국의 신사숙녀들이여, 언제까지나 이런 짓을 계속할 텐가!” 19세기가 막을 내리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동물권익 행동가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상징하기 위해 ‘갈색 반려견’라는 이름의 동상을 세웠다. 의대생들의 분노를 자극했던 것은, 그 동상이 – 구체적인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소속의 두 의사를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윌리엄 베일리스와 어니스트 스탈링으로, 갈색 테리어에 대한 실험을 수행한 장본인들이었다. 수백 명의 동급생들이 동상 파괴 현장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대부분이 몸을 사렸다. 겨우 일곱 명의 청년들이 런던 중부의 대학을 출발, 템즈강을 건너 노동자 계층이 거주하는 배터시를 향했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노동자들을 도와줄 수 없다면, 그곳을 피하는 게 좋다.” 학생들은 런던 남부에 도착하여 동상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할수록 사명완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며, 인근의 노동자들이나 경찰이 추격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갈색 반려견’에 도착했을 때는 벤치와 덤불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아돌프 맥길커디가 덤불 속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더니, 외부인의 감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그런 다음 쇠몽둥이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힘을 다해 높이 점프하여 갈색 테리어의 앞발을 후려쳤다. 이윽고 땅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경찰이다! 그는 공원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바로 그때 또 한 무리의 의대생 스물다섯 명이 배터시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간에 머뭇거렸던 맥길터디의 동급생들이었는데, 장소는 정확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첫 번째 그룹이 가능한 한 조용히 살금살금 움직였던 데 반해, 두 번째 그룹은 - 마치 자신들의 도착을 확성기로 알리는 것처럼 - 시끌벅적했다. 두 번째 그룹의 리더인 던컨 존스가 망치로 갈색 테리어를 한 차례 후려갈긴 후 두 번째 동작을 취하려는 순간, 정복경찰관 두 명이 달려와 그를 체포했다.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홉 명의 학생들만 존스를 따라 줄줄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벌금형을 간절히 바랐지만, 경찰은 열 명을 모두 감방에 처넣었다. UCL 측에서 보석금을 대신 지불했고, 학생들은 다음날 아침 “존경받는 UCL의 명예를 보호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전에 ‘공공 기념물을 악의적으로 손상시켰다’는 유죄를 인정했다. 그 동상에 새겨진 글씨의 의도는 분명했으니, 연구자들을 동물학대자로 묘사한 것이었다. 데이비드 그림이 자신의 저서 ‘반려견 시민’에서 말한 것처럼, “수 세기 동안 누적된 개와 고양이의 영혼에 대한 우려감이 극에 달했다.” 젊은 의학도들은 시대가 변한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노트펫(notepet.co.kr)
  • ‘하트시그널2’ 송다은 화보 “배우 송다은으로 인사 드릴 것”

    ‘하트시그널2’ 송다은 화보 “배우 송다은으로 인사 드릴 것”

    ‘하트시그널2’ 송다은의 상큼 발랄 매력이 담긴 여름 화보가 공개됐다. 송다은은 최근 아나드론 매거진(ANA DRONE)과 함께 진행한 화보 촬영에서 그동안 보여준 이미지와 달리 새침하면서도 발랄한 모습을 선보였다. ICE 바다 CREAM이라는 색다른 다섯 가지 스토리로 진행된 이번 화보는 송다은의 다양한 매력을 보일 수 있는 컨셉트로 촬영이 진행됐다. 화보 촬영 이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송다은은 “매일 감사하며 매순간 말을 해도 부족할 정도로 ‘하트시그널2’를 통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하트시그널의 송다은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배우 송다은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여러분께 새로운 인사를 드릴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송다은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아나드론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여기는 남미] 멕시코 경찰관 전원이 정치테러범?…28명 무더기 체포

    [여기는 남미] 멕시코 경찰관 전원이 정치테러범?…28명 무더기 체포

    정치테러에 연루된 의혹으로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이 전원 체포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24일(이하 현지시간) 멕시코 언론에 따르면 미초아칸주의 지방도시 오캄포의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 28명이 시장후보 앙헬레스 후아레스 살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모두 체포됐다. 오캄포의 무소속 시장후보로 나선 앙헬레스 후아레스는 지난 21일 자신의 소유인 호텔에서 나오다 괴한들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미초아칸주에서 시장후보가 살해된 건 선거운동이 시작된 후 벌써 다섯 번째다. 사건이 터지자 수사에 나선 경찰은 한 지역의 관할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현지 언론은 "경찰이 이런 판단을 내린 정황에 대해선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치테러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고위관계자는 "경찰들이 앙헬레스 후아레스의 살해사건과 관련해 체포된 건 맞다"며 "경찰들이 모처로 옮겨져 전원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전원이 직접 테러에 참여하진 않았겠지만 모두 범죄를 도운 정황이 있다"며 "일대일 조사를 통해 혐의를 확인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1일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멕시코에선 무자비한 정치테러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해된 후보와 예비후보, 정치인은 110명을 웃돈다. 미초아칸주에서만도 지난 14일과 20일 시장 후보가 2명이 살해됐다. 살해된 정치인의 장례식이 괴한들의 공격을 받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앙헬레스 후아레스 후보의 장례식장엔 군이 배치됐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멕시코에선 2만5399명이 살해됐다. 20년 만에 가장 많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멕시코의 치안은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앙헬레스 후아레스 장례식에 배치된 군이 보초를 서고 있다. (출처=라울티노코)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인간 중심 韓신남방정책 아세안 정책과 방향 같아”

    “인간 중심 韓신남방정책 아세안 정책과 방향 같아”

    “2020년 무역 규모 2000억 달러(약 223조 4400억원) 달성, 테러·재해·사이버 위협 등 지역 및 글로벌 이슈에 대한 공동 대처, 전방위적인 협력의 제도화….”아세안 10개국을 대표하는 아세안 대표부 주재 상주 대표(대사)들이 25일 서울에서 열린 한·아세안 간담회를 통해 지난해(1490억 달러·약 166조 4628억원)보다 500억 달러(약 55조 8600억원) 늘린 양측 무역 규모 등을 제시하며 한국과의 협력을 가속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날 행사는 다자 간 국제기구인 한·아세안센터가 아세안 10개국 대표들의 협의체인 아세안 상주대표위원회(CPR)를 초청해 이뤄졌다. 에카팝 판타웡 주아세안 라오스 대사는 대표 연설에서 “아세안에게 한국은 다섯 번째 교역상대국이며, 한국에게 아세안은 두 번째 교역대상국”이라면서 “내년 한·아세안 관계 수립 30주년을 앞두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서 양측이 협의 통로 및 기구를 활용해 한 단계 격상된 협력 관계를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하자”고 밝혔다. 다토 샤리파 말레이시아 주아세안 상주 대표도 “문재인 정부의 인간을 중심에 놓은 신남방정책의 추진은 아세안의 정책과 일치한다”면서 신남방정책에 기대감을 보였다.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는 “신남방정책은 인간, 번영, 평화라는 3대 분야에 축을 두고 있다”며 “이 같은 방향으로 아세안과의 실질 협력을 확대해 가겠다”고 밝혔다.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은 “아세안과의 외교 관계를 4강과의 관계 수준으로 격상시킨다는 신남방정책은 양측이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동반 상승의 추진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4일 방한한 아세안 상주 대사들은 오는 29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협력 증진 방안을 협의한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식지 않는 공과 논란… 靑게시판 잇단 훈장 반대글

    빈소 찾은 이정미 “정부 결정 유감” 조배숙 “정부 배려… 논란 끝내야” 안철수·정원식 등 잇달아 조문 日 나카소네 前총리도 친서 보내 정부가 25일 논란 끝에 이틀 전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훈장을 추서했지만 김 전 총리의 공과를 둘러싼 정치권 안팎의 논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의 김 전 총리 빈소를 찾아 유족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달했다. 상훈법에 따르면 김 전 총리가 추서받은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며 5등급으로 한다’고 규정돼 있다. 1등급은 무궁화장이며 이어 모란장, 동백장, 목련장, 석류장이 있다. 김 전 총리가 훈장을 받은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 네 차례를 포함해 총 다섯 차례다. 지난 23일 김 전 총리가 타계한 이후 진보진영과 시민사회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훈장 추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모습이다. 정의당의 이정미 대표는 이날 조문을 마치고 “한국 현대사에 큰 굴곡의 역사를 남기신 분의 가시는 길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다”면서도 정부의 훈장 추서 결정에 대해선 “유감을 표명한다”고 답했다. 이날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추서에 반대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반면 정의당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민주평화당의 조배숙 대표는 이날 빈소를 찾아 “(김 전 총리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논란이 분분한데 정부에서 (추서를) 결정한 만큼 더이상의 논란이 종식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의 측근인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우리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정부가 배려한 것”이라면서 “국민 여론은 대개 우호적이고 업적을 기리자는 쪽이다. 일부 반대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 일부는 “찬반 논란이 있을 줄 알았으면 훈장을 거부할 걸 그랬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미국을 방문했다가 지난 21일 귀국한 바른미래당 안철수 전 서울시장 후보도 이날 조문했다. 안 전 후보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대화와 타협이 부족한 한국 정치에 큰 경종을 울리셨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자신의 정계 은퇴설에 대해 “문상 와서 (언급)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며 답을 유보했다. 이 밖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변호사를 비롯해 정원식·고건·김황식·정홍원·황교안 전 총리 등도 빈소를 찾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날 조화를 보냈다. 김 전 총리가 초대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내며 일본 정계와 관계가 두터웠던 만큼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빈소를 방문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고노 요헤이 전 외무상의 친서를 전달했다. 나가미네 대사는 “김 전 총리의 업적을 생각해서 이제부터 한·일 관계를 확실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인간 중심 韓신남방정책, 아세안 정책과 방향 같아”

    “인간 중심 韓신남방정책, 아세안 정책과 방향 같아”

    “2020년 무역 규모 2000억 달러(약 223조 4400억원) 달성, 테러·재해·사이버 위협 등 지역 및 글로벌 이슈에 대한 공동 대처 및 전방위적인 협력의 제도화….”아세안 10개국을 대표하는 아세안 대표부 주재 상주 대표(대사)들이 25일 서울에서 열린 한·아세안 간담회를 통해 지난해(1490억 달러·약 166조 4628억원)보다 500억 달러(약 55조 8600억원) 늘린 양측 무역 규모 등을 제시하며 한국과의 협력을 가속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날 행사는 다자 간 국제기구인 한·아세안센터가 아세안 10개국 대표들의 협의체인 아세안 상주대표위원회(CPR)를 초청해 이뤄졌다. 에카팝 판타웡 주아세안 라오스 대사는 대표 연설에서 “아세안에게 한국은 다섯 번째 교역상대국이며, 한국에게 아세안은 두 번째 교역대상국”이라면서 “내년 한·아세안 관계 수립 30주년을 앞두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서 양측이 협의 통로 및 기구를 활용해 한 단계 격상된 협력 관계를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하자”고 밝혔다. 다토 샤리파 말레이시아 주아세안 상주 대표도 “문재인 정부의 인간을 중심에 놓은 신남방정책의 추진은 아세안의 정책과 일치한다”면서 신남방정책에 기대감을 보였다. 아세안 대사들은 한·아세안 관계가 보완적이며, 지역 문제에서도 협력적인 입장이란 점에서 발전 가능성을 기대했다.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는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인간(인간 및 가치 실현 중시 협력), 번영(경제적 협력), 평화라는 3대 분야에 축을 두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 같은 방향으로 아세안과의 실질적 협력 사업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 24일 방한한 아세안 상주 대사들은 오는 29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실질적인 협력 증진 방안을 협의한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쿠데타의 주역’, ‘풍운아’,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0여년간 영욕과 부침을 거듭했다.●박정희 정권 2인자… 처삼촌 혹독한 견제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부친의 죽음이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한 것. 1949년 6월 육사를 졸업한 JP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 박영옥(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을 알게 됐고, 결혼했다. 이로써 상사와 부하인 동시에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연을 맺었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됐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일약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5·16의 전면에는 박정희 소장이 나섰지만, 뒤에서 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이는 JP였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으나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1963년 2월 공화당 창당을 하루 앞두고 외유에 나서야 했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 등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또 외유길에 올랐다. JP 공과(功過)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1965년 한·일 협정과 산업화다. JP는 8억 달러의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지금도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는 산업화 시대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산업화를 이끌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 1645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매국노’란 비판을 들으며 받아온 8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산업화의 기반이 된 포항제철·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됐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JP는 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로 임명됐다.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포스트 박정희시대’를 이끌 대중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충청맹주로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화려하게 재기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임에도 1993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으로 강등됐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지역 정서를 자극해 제3당(55석)으로 재기했다. 1997년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다.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단일화를 이뤄 낸 것. 보수 성향이 짙은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정권의 축이 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적(政敵)으로 탄압했던 DJ와 손을 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6개월간의 총리 서리 등 국민의정부의 한 축을 이뤘던 그는 1999년 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정부를 깼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7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결국 다시 DJ와 손잡았다.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동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참패로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으로 10선 등정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해리 케인 파나마에 해트트릭, 호날두 제치고 득점 선두로

    해리 케인 파나마에 해트트릭, 호날두 제치고 득점 선두로

    종주국의 캡틴이자 손흥민의 토트넘 동료인 해리 케인이 잉글랜드 대표로 역대 세 번째 월드컵 해트트릭을 작성했다. 케인은 24일 니즈니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파나마와의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G조 2차전 전반 22분과 추가시간 1분에 페널티킥으로만 두 골을 집어넣어 두 경기 연속 두 골 이상을 기록한 데 이어 후반 17분 동료가 날린 슈팅이 자신의 발에 맞고 굴절돼 상대 그물을 출렁이는 행운이 작용해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그는 1분 뒤 라힘 스털링과 교체돼 그라운드를 빠져나왔다. 수비수 존 스톤스도 두 골 모두를 머리로 장식하며 기세를 올렸고 샛별 제시 린가드는 대회 데뷔골을 신고하며 거들어 6-1 완승을 거둔 잉글랜드는 일찌감치 16강행이 확정됐다. 패색이 짙어진 파나마는 후반 33분 프리킥 상황에서 나온 크로스를 발로이가 골문 중앙에서 넘어지며 골로 연결해 영패를 모면하는 데 만족했다. 대회 다섯 번째 골을 얻은 케인은 이로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와 로멜로 루카쿠(벨기에 이상 4골)를 제치고 득점 단독 선두로 나섰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역대 네 차례 월드컵 대회에서 한 경기 세 골을 뽑은 것이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이를 단숨에 두 골 더 늘린 것이다. 또 1986년 대회 조별리그 폴란드와의 대결에서 개리 리네커, 1966년 옛서독과의 결승에 나섰던 지오프 허스트가 작성한 데 이어 케인은 잉글랜드 대표로는 세 번째 해트트릭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브리짓 닐슨, 54세에 다섯째 득녀 “이보다 더 사랑할 순 없을 것”

    브리짓 닐슨, 54세에 다섯째 득녀 “이보다 더 사랑할 순 없을 것”

    할리우드 원조 섹시 스타 브리짓 닐슨(54)이 득녀했다. 23일(현지시간) 미국 피플닷컴은 브리짓 닐슨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산했다고 보도했다. 다섯째로 얻은 딸의 이름은 프리다. 브리짓 닐슨 부부는 피플에 “우리 부부의 삶에 아름다운 딸을 맞이하게 돼 정말 기쁘다. 긴 여정이었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거다”고 출산 소감을 밝혔다. 앞서 브리짓 닐슨은 자신의 SNS에 만삭 사진을 공개하며 “행복하다. 가족이 점점 늘어난다”고 기쁨을 전한 바 있다. 브리짓 닐슨은 영화 ‘레드 소냐’ ‘록키4’ 등에 출연하며 섹시스타로 이름을 날린 바 있다. 4번의 결혼으로 4명의 아들을 뒀으며, 5번째 남편인 15살 연하의 이탈리아인 마티아 데시와는 2006년 결혼했다. 프리다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바닥난 간암 약 ‘리피오돌’ 다음주 수입 물량 정상화

    제약사의 가격 인상 요구로 수급난을 겪던 간암 필수치료제 ‘리피오돌’ 수입이 원상 회복된다. 다만 수요가 넘쳐나 병원마다 완전 정상화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22일 “공급 물량을 확 줄인 프랑스계 다국적제약사 게르베코리아가 다음주부터 리피오돌을 본래 수입 물량으로 들여오기로 했다”고 밝혔다. 리피오돌은 암의 정확한 크기와 위치를 확인하는 데 사용되는 조영제로, 간암을 치료하는 ‘경동맥화학색전술’(TACE) 과정에서 항암제와 함께 투여하는 약이다. 국내 간암 환자의 90%가 투약하는 필수 치료제이며 대체약이 없다. 게르베코리아는 지난 3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약값 인상을 요구하며 공급량을 10분의1로 줄였다. 제약사 측은 “수요가 많은 중국의 리피오돌 개당 가격은 30만원인데 국내는 5년째 5만 2560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지금의 다섯 배인 26만 2800원으로 책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심평원은 지난 8일 리피오돌을 ‘퇴장방지 의약품’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상한가를 조정하기로 했다. 퇴장방지 의약품이란 환자에겐 꼭 필요하지만 제약사로서는 경제성이 없는 의약품으로 정부가 지정해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서울성모병원은 지난 21일 리피오돌 재고가 바닥이 났으며, 서울대병원과 연세세브란스병원도 일주일치 분량만 남아 있다. 재고를 모두 소진한 서울아산병원도 지난 20일 가까스로 물량을 긴급 공수했다. 곽명섭 복지부 보험약제과장은 “환자 불편이 없도록 주요 병원의 리피오돌 재고량을 조사하고 있다”며 “리피오돌의 안정적 공급이 이뤄지도록 가격 협상도 조속히 마무리 짓겠다”고 말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자치광장] 서울은 학교다/김영철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장

    [자치광장] 서울은 학교다/김영철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장

    ‘서울은 학교다.’이 발칙한 구호는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이 펼치고 있는 캠페인 이름이다. 서울시민 모두가 스승이자 학생이 되고, 서울의 모든 공간과 시설이 배움터가 되도록 하자는 뜻이다. 올 초 이 구호를 내걸 때 많은 이들이 걱정했다. 의지와 꿈을 앞세우는 게 캠페인 슬로건이라지만, 어느 정도 현실성은 감안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구호를 내건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평생교육진흥원이 올해부터 일찍이 볼 수 없던 색다른 학교 세 곳을 동시에 개교하면서 ‘거대한 서울을 위대한 학교’로 만드는 야무진 프로젝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울자유시민대학’과 ‘모두의학교’, ‘동네배움터’, 이름부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서울자유시민대학은 서울시민이 꼭 갖춰야 할 지성을 기르고 키우는 일종의 시민종합대학이다. 종로구에 본부 캠퍼스가 들어섰고, 다섯 개 지역에 권역별 학습장이 가동되고 있다. 인문·교양과 사회·경제, 문화·예술, 서울학과 생활환경, 미래학, 민주시민 등 7개 분야에 432개 고품격 강좌들이 명강사들을 앞세워 시민을 기다린다. 서울에 위치한 28개 대학과 연계해 대학별 특화 강좌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종합대학’으로도 손색이 없는 셈이다. 수강생들의 학습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교육과정 이수 등 일정 요건을 갖추면 총장인 서울시장 이름의 명예 석·박사 학위를 준다. 2022년까지 모두 3000여명에게 학위를 수여할 계획인데, 이렇게 배출된 ‘석·박사 시민’은 글로벌 도시 서울의 시민력을 드높이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모두의학교는 성별과 나이 등을 떠나 모든 사람이, 자신이 배우고 싶고 학습하고 싶은 내용을,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신개념의 평생학습 배움터다. 금천구에 있는 중학교 건물을 주민 의견을 100% 반영해 아주 색다른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뒤 지난해 가을 개관했다. 올해 3월부터 ‘모두의 앙상블 프로젝트’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동네배움터는 말 그대로, 동네 근처 다양한 시설과 공간을 학습장으로 꾸며 주민들이 더 편하고, 더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현재 서울 15개 자치구에 53개 동네배움터가 ‘배움플래너’의 꼼꼼하고 친절한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민센터부터 마을회관, 카페, 갤러리, 소극장, 공방 등 갖가지 공간에서 지역 밀착형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세 학교는 때론 포개지고, 때론 각자 활동하면서, 서울을 위대한 학교로 거듭나게 하자는 꿈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이들 세 학교가 문을 열고 있는 지금, 서울은 이미 학교다.
  • “한류 콘텐츠 접근성 좋아져… 국가적 지원 늘려 ‘제2의 방탄’ 키우자”

    “한류 콘텐츠 접근성 좋아져… 국가적 지원 늘려 ‘제2의 방탄’ 키우자”

    최근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케이팝의 글로벌 인기가 날로 뜨거워지는 가운데 한국 아이돌 산업의 현재를 진단하고 한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아이돌산업과 한류의 미래’를 주제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서울신문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전문가 5명이 참석해 케이팝의 글로벌 인기 현상을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논의했다. 아울러 ‘제8회 서울신문 케이팝 커버댄스 페스티벌’ 본선에 진출한 10개국 젊은이 75명 등 100여명의 참가자가 행사장을 찾아 토론을 경청했다.첫 주제 발표를 맡은 위명희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이사는 음반 제작자로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했다. 위 이사는 “2년 전 경주한류드림콘서트 커버댄스 대회에서 제가 발굴했던 김동한이 아이돌 그룹 JBJ를 거쳐 최근 솔로로 데뷔했다”며 “여러분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아 이 자리에 섰다”고 운을 뗐다. 그는 “태국인 멤버를 포함한 타이니지라는 걸그룹을 데뷔시켰지만 아무리 방송에 내보내도 반응이 오지 않아 실패했었다”며 “팬이 없는 상황에서 앨범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유튜브·넷플릭스 플랫폼 딛고 세계로” 위 이사는 김동한을 서울로 데려온 뒤 회사 근처의 홍대 거리에서 주 2회씩 버스킹 공연을 열도록 했다. 그 결과 일반인임에도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5만명까지 늘었다. 그 뒤 ‘프로듀스101 시즌2’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고 솔로 데뷔를 하면서는 일본, 태국 등 해외시장에서 팬미팅 제의가 먼저 들어왔다. 위 이사는 “예전과 달리 한류 콘텐츠의 접근성이 좋아졌고 기반시설과 제도도 좋아졌다고 느낀다”며 “덕분에 지금은 데뷔하는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조현래 문체부 콘텐츠정책국장은 한류 콘텐츠의 발전사를 짚고 정부의 각종 지원 제도를 자세히 알렸다. 조 국장은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류라는 말이 생겨났고 정부 후원도 시작됐다”며 “한류 2.0 드라마와 H.O.T., 클론 등 케이팝이 연이어 흥행했고 2010년대 들어 웹툰, 게임, 미용, 패션 등 전방위로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최근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과 5세대 통신 등장 등의 변화가 나타났고 이를 계기로 한류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며 “문체부도 이에 맞춰 창작 인프라 조성과 다양한 콘텐츠 유통 인력 양성, 제작 지원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콘텐츠 산업은 지난 5년간 연평균 5%씩 성장했고 지난해 수출액은 69억 달러(약 7조 63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주제 발표에 이어 깊이 있는 토론이 이어졌다. 사회를 진행한 박상숙 서울신문 심의위원은 “BTS가 빌보드 1위에 오르는 등 케이팝의 글로벌 감수성이 해외에서도 통하는 시대가 됐다”며 토론자들에게 한류 산업의 현주소와 방향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종임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외래교수는 “2012년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수 싸이가 한국 음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충격이었고 연구자로서 흥미로웠다”며 “싸이의 영상이 확산되면서 인기를 끈 것처럼 최근에는 공연장을 찾지 않아도 모바일로 편하게 즐거움을 공유하게 됐다. 한국적인 집단군무 콘텐츠, 음악적 완성도 등과 맞물리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잡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유승환 한국음악산업협회 실장은 케이팝의 성공 요인을 플랫폼, 디바이스, 소통, 장벽이 되지 않는 언어, 최고의 기획자 등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유 실장은 “한국은 과거 P2P, 웹하드 등에 트라우마가 있어 유튜브가 들어올 당시에는 케이팝 확산에 활용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며 “문체부, 한국저작권위원회, 음악 관련 단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등 노력 끝에 이런 플랫폼을 잘 이용하는 국가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사람들은 인터넷 인프라를 바탕으로 하루에 수십 기가바이트를 소모하면서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며 “BTS가 활동하는 과정을 담은 모든 콘텐츠도 이용자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과거에는 국내에서 대중음악 평론을 하는 사람 중에 케이팝을 심도 있게 다루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사랑받는다는 얘기가 전해지며 높은 가치 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면서 “(청중을 향해) 케이팝을 좋아하는 여러분들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간섭말고 지원만… 놀 수 있는 환경을” 케이팝과 한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국가적인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위 이사는 “가수가 쇼케이스를 한 번 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그날 입은 옷이 다 올라오고 액세서리까지 유명해지는 등 파급력이 크다”며 “음반제작사에 대한 지원책이 있긴 하지만 필요한 서류가 방대하고 비전문가가 심사하는 등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 실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문화는 지원을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었다”며 “지원을 하되 돈을 어디에 쓰는지 관심을 갖지 말고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커버댄스 추다 한국 문화에 빠져… 한국 경험할 이벤트 많아졌으면”

    “커버댄스를 추다가 한국 문화에 빠져 한국어 선생님이 됐어요.” 2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아이돌산업과 한류의 미래’ 세미나에 참석한 커버댄스 팀 ‘에일리언’의 아리아 프라타마(27·인도네시아)는 한국 방문이 벌써 다섯 번째다. 2009년 댄스학원에 등록하며 케이팝을 처음 접했다는 그는 2011년 케이팝 월드 페스티벌을 계기로 한국에 처음 온 뒤 거의 매년 한국을 찾았다. 프라타마는 “케이팝을 시작으로 한국 문화를 알게 됐고 한국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 한국어를 배웠고 지금은 한국어 강사,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팀 ‘마그넷’의 후쿠다 가호(21)는 몇 해 전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걸그룹 카라를 통해 케이팝을 알게 됐다. 가호는 “다섯 살 때부터 춤을 배웠는데 케이팝 가수들의 댄스 수준이 높은 걸 보고 굉장하다고 생각했다”며 “카라 해체 후에는 다른 그룹과 한국 문화로 관심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제가 커버댄스를 추면서 부모님도 케이팝을 좋아하게 됐다”며 “엄마는 슈퍼주니어, 저는 방탄소년단을 제일 좋아한다”면서 웃었다. 2009년 SS501 덕에 케이팝을 알게 됐다는 러시아 팀 ‘업비트’의 엘레나 유리아비나(27)는 “유튜브를 통해 케이팝을 처음 접할 당시에는 제가 사는 도시에 케이팝 팬이 한두 명 더 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인기가 너무 많아졌다”며 “커버댄스 팀도 굉장히 많아져 뿌듯하다”고 말했다. 같은 팀 멤버인 다리나 스네사레바(24)는 “예전엔 유럽산 화장품을 썼지만 케이팝을 좋아하게 된 뒤에는 한국 화장품을 많이 쓴다. 패션도 한국 아이돌스럽게 입게 됐다”며 변화를 설명했다. 멕시코 팀 ‘크로노시스’의 조나선 예레나스 쿠에바스(24)는 “전에는 소수의 마니아층만 알던 케이팝이 싸이가 뜨고 나서 인기가 많아져 지하철역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멕시코나 남미에서는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케이팝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더 열정적이 된다”며 “케이팝을 연결 고리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온 세사르 히메네스 마데라(23)는 “저희들이 한국에 온 경험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전달되기도 한다. 한국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이런 이벤트가 많아져서 멕시코에 한류가 더 퍼졌으면 좋겠다”며 조언을 건넸다. 한편 서울신문이 주최하는 케이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각국 예선전을 마치고 23일 서울시청 앞에서 결선 무대를 연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꽃보다 할배 리턴즈’ 나영석 PD “김용건, 큰 활력 불어넣을 것”

    ‘꽃보다 할배 리턴즈’ 나영석 PD “김용건, 큰 활력 불어넣을 것”

    ‘꽃보다 할배 리턴즈’ 티저가 공개돼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29일 방송되는 tvN ‘꽃보다 할배 리턴즈’(연출 나영석)의 티저 영상과 메인 포스터가 21일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티저 영상에는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으로 이어지는 할벤져스 멤버들과 새 얼굴 김용건, ‘짐꾼지니’ 이서진의 모습이 담겼다. 특히 신입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김용건의 캐릭터가 웃음을 자아내며 3년만에 돌아온 ‘꽃할배 시리즈’에 한층 기대감을 더하고 있다. 장르불문 변함없는 박학다식함을 자랑하는 이순재와 꽃할배의 영원한 ‘구요미’ 신구의 모습은 지난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며 반가움을 더한다. 여기에 여행길마다 둘도 없는 든든함으로 꽃할배들을 사로잡은 로맨티스트 박근형과, 김용건의 합류로 막내를 탈출한 백일섭의 환한 표정이 새로운 여행의 설렘마저 느끼게 해준다.이 밖에도 이날 제작진이 공개한 메인 포스터에는 다섯 할배들과 이서진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쉬어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 연출을 맡은 나영석 PD는 “특색있는 동유럽의 도시들이 주는 다양한 느낌들이 색다른 재미를 줄 것이다. 새롭게 합류한 김용건 선생님이 큰 활력을 불어넣으며 새로운 관전포인트를 만들어낼 전망”이라고 말했다. 한편, tvN ‘꽃보다 할배 리턴즈’는 오는 29일 오후 9시 50분 첫 방송된다. 사진제공=tvN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와글와글+] “우리 막 결혼했어요” 50세 신부-12세 신랑의 정체

    [와글와글+] “우리 막 결혼했어요” 50세 신부-12세 신랑의 정체

    행인들로 북적이는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 앞에 눈에 띄는 ‘커플’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올해 쉰 살인 신부와 이제 갓 열두 살 된 어린 신랑이었다.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어린 신랑은 턱시도를 갖춰 입었고, 행인들은 이들에게 “신랑과 신부의 나이가 어떻게 되냐”,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냐”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주로 나이가 많은 신부 쪽이었고, 어린 신랑은 줄곧 어둡고, 우울하며, 주눅 든 표정이었다. 반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표정은 달랐다.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우리는 막 결혼했어요"라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어린 신랑이 12살이라는 사실을 말할 때에도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질문에 “‘남편’의 부모님에게 결혼 승낙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법적인 결혼을 한 것”이라는 대답을 유독 강조했다. 한 행인은 어린 신랑에게 다가가 “어떻게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냐”면서 “혹시 그녀가 돈이 많은 사람인가”라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고, 또 다른 행인은 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어린 신랑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어린 신랑은 내내 땅만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이 커플의 실체는 ‘가짜’다. 현지에서 유튜버로 활동하는 코비 퍼슨이라는 남성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미성년자를 상대로 자행되는 조혼의 문제점과 사람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해당 영상을 기획했다. 나이 든 신부와 나이 어린 신랑도 모두 ‘배우’였으며, 퍼슨은 신부 역에게 줄곧 기쁜 내색을 할 것을, 신랑 역에게는 내내 어둡고 우울한 표정을 지을 것을 주문했다. 퍼슨은 가짜 커플의 웨딩사진을 찍어주는 포토그래퍼로 위장한 뒤, ‘50세 신부-12세 신랑’의 모습에 축하를 보내는 한 남성에게 “만약 당신에게 열 두 살 된 여동생이 있고 그 여동생이 쉰 살의 남성과 결혼한다고 하면 지금처럼 축하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 남성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퍼슨은 과거에도 성별을 바꿔 열 두 살의 어린 신부와 예순 다섯 살의 나이 든 신랑의 ‘가짜 결혼식’을 연출한 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조혼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바 있다. 한편 퍼슨이 전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한 조혼은 일부 아시아나 중동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 내 조혼을 반대하는 인권단체 ‘언체인드 앳 라스트’(Unchained at Last)에 따르면 미국 38개주에서 2000~2010년 결혼한 18세 이하 청소년과 아이는 16만 7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에서 조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세운 곳은 델라웨어 주가 유일하다. 델라웨어 주는 지난 5월 미국 전체 주 가운데 최초로 조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했으며, 이 법은 부모의 동의가 있더라도 18세 이라면 결혼을 무조건 불법으로 규정한다. CNN은 “미국 대부분 주들의 경우 결혼이 가능한 최소 나이를 18세로 정해놨지만 사실상 예외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염상진과 염상구를 만나다 -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염상진과 염상구를 만나다 -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중략)...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의지헐디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쳐웂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태백산맥 1권, 248p) 소설 태백산맥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 중의 하나다. 김범우 집안의 가복(家僕)이자 일자 무식꾼인 문서방은 공산당과 빨갱이를 ‘대놓고’ 말하고 있다. 문학과 영화에서조차도 빨갱이와 공산당을 ‘대놓고’ 말하기 힘든 시절이었던 1983년 9월, 소설 태백산맥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4년간의 자료조사와 6년간의 집필 끝에 원고지16,500매에 달하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시대와 이념의 금기(禁忌)를 정면으로 다룬다.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애써 외면하였던 우리 현대사의 한 면을 과감히 드러낸 작품, 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으로 가 보자. 소설 태백산맥의 내용은 이러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우익 군경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 와중에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심해지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많은 피해를 입는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안에 대한 소작인들의 반발은 날로 극심해진다. 이럴 즈음 1950년 6·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좌익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고, 이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을 겪는다. 전쟁이 고착화되자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은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빨치산 대장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결국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바로 이러한 소설 태백산맥의 강렬한 주제와 메시지를 다시금 곱씹을 수 있는 공간이 벌교에 위치한 태백산맥 문학관이다. 2008년 11월에 개관한 태백산맥 문학관은 자리 선정도 제대로다. 소설 첫 시작 장면인 현부잣집과 소화의 집이 있는 벌교 제석산 끝자락에 터를 잡아 개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관은 소설 태백산맥이 땅속에 묻혀있던 역사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산자락을 파내서 특이하게 설계된 건물로 세워졌다. 문학관은 총 1층과 2층으로 나뉘는 데, 연면적이 1,375.8㎡에 이르며 건축면적만으로는 979.7㎡에 달하는 넓이다. 이곳에는 작가 조정래의 육필원고 등 증여 작품을 포함하여 159건 719점이 전시되어 있다. 따라서 소설 태백산맥의 독자들에게는 작품의 깊이를 더더욱 음미하고 느낄 수 있는 체험 공간이 충분히 마련된 셈이다. 건물 내부는 총 6개의 마당으로 구역이 나뉘어지는 데, 첫째 마당에는 태백산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자료조사, 집필, 작품의 탄생을 알린다. 둘째 마당에는 16,500매에 달하는 작품의 육필 원고를 셋째 마당에는 작품을 둘러싼 이적성 시비와 논란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넷째 마당에는 작가 조정래의 문학 세계를 그리고 있다. 다섯째 마당에는 문학 사랑방이 있으며 여섯째 마당에는 작가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라면 한 번은 방문해도 좋을. 2. 누구와 함께? - 태백산맥의 배경을 이룬 역사적, 문학적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 벌교 버스터미널 지나자마자 좌회전(150M 지점) 4. 감탄하는 점은? - 태백산맥의 육필 원고와 치열한 작가의 고민의 흔적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늘 한산한 편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작가의 육필 원고. 건물이 지닌 건축학적 아름다움.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벌교는 꼬막정식이 유명하다. 원조수라상꼬막정식, 외서댁 꼬막나라, 제석꼬막회관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tbsm.boseong.go.kr/main.ph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낙안읍성, 보성 녹차밭, 순천만 정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라면 의미가 있는 장소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장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소설의 재미를 뛰어 넘어 우리 민족 역사가 건너온 질곡의 세월을 느끼게 해 준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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