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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중년 출입금지/이상일 논설위원

    한 금융기관 지점장이 술을 한잔 마시고 이른바 ‘부킹’하는 바에 갔다. 그는 부킹장소에서 웨이터로부터 눈총을 받는 등 ‘찬밥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나이들었음을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만은 젊게 살자.’고 다짐하며 그렇게 행동해 왔지만 주위에서 그렇게 봐주지 않으며 자신이 50대 나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철없는 짓을 한 후 그는 비로소 중년에게도 출입금지 지역이 있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사실 청소년이 성년으로 가는 과정에서는 출입금지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다. 술집도 가서는 안 되고 다방과 심지어 무도장도 출입이 안 된다. 영화관도 18세 이상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다. 성인들은 아무런 금지영역이 없으며 모든 곳에 출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지긋이 들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생긴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사실 이미 대학가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음식점과 주점과 바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명확하게 ‘출입금지’는 아니더라도 들어가서 눈치를 받거나 푸대접을 받는 곳이 중년의 출입금지구역이다. 나이들었음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실감하는 것일까. 이상일 논설위원 bruce@seoul.co.kr
  • [사고] ‘4050 향수’ 빅콘서트

    서울신문은 오는 9월9일과 10일 저녁 8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향수´ 빅 콘서트를 개최합니다. 이번 음악회에는 송창식, 김도향, 유익종, 이동원, 이정선, 홍민,4월과5월, 장은아, 하남석, 임병수, 백영규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표 포크가수들이 대거 출연합니다. 30인조 ‘시월´ 체임버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공연의 수준을 더욱 높일 것 입니다. 또한 원조 DJ 이종환과 원로 음악평론가 이백천이 특별 출연하여 70,80년대 음악다방을 연상케하는 무대를 꾸며나갈 것입니다.4050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이번 음악회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입장권 R석 7만 7000원,S석 6만 6000원,A석 5만 5000원,B석 3만 3000원 ●예매처 티켓링크 전화 1588-7890 www.ticketlink.co.kr 인터파크 전화 1544-1555 www.interpark.com 교보문고, 영풍문고, 대한음악사 등 서울 및 수도권지역 주요예매처 ●문의 콘서트랜드 (02)792-7607 ●협찬 SK주식회사 ●후원 한국포크싱어연합회, (주)MXM ●주최 서울신문
  • [우리는 맞수 CEO] 임종욱 대한전선 사장 vs 구자열 LS전선 부회장

    [우리는 맞수 CEO] 임종욱 대한전선 사장 vs 구자열 LS전선 부회장

    임종욱(57) 대한전선 사장과 구자열(52) LS전선 부회장은 가깝고도 먼 사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의 선·후배 사이지만 라이벌 기업답게 가끔은 ‘고춧가루’를 뿌리기도 한다. 임 사장과 구 부회장은 전선업계의 대표적인 최고경영자(CEO)인 데다 때로는 경쟁과 동반자로서 지난 40년간 얽혀 있어 곧잘 비교 대상에 오른다. 특히 양사 CEO의 경력과 스타일, 기업 경영 등도 서로 대칭점에 서 있어 맞수 기업의 그 CEO라 할 만하다. 업계 경력은 단연 임 사장이 앞선다. 그는 1974년 대한전선에 입사해 30년 이상 전선 외줄타기를 해온 노련한 전문가다. 반면 구 부회장은 2001년 LG전선(현 LS전선) 재경부문 부사장으로 옮기면서 전선업계에 발을 담근 경력 5년차의 젊은 CEO다. ●신 성장엔진 발굴 총력 임 사장과 구 부회장의 고민은 정체된 시장의 파이다. 전선업의 성장 단계가 최고조인 만큼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신 성장엔진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가 공통된 관심사다. 영업이익률은 해마다 줄어 올 양사의 영업이익률은 3% 미만 수준이다. 고민은 같지만 해결책은 좀 다르다. 임 사장이 ‘돈 되는 것은 다한다.’는 사업 다각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구 부회장은 시너지 효과를 낳기 위한 전선업의 수직 계열화에 관심이 많다. 대한전선이 ‘좌우’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면 LS전선은 ‘상하’로 몸집을 불리겠다는 전략이다. 임 사장은 “전선업만으로 기업의 미래성장을 이뤄가기는 사실 어려워졌다.”면서 “전선시장을 넘어 기업 성장을 위해 사업 다각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대한전선의 포트폴리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창사 이래 50년간 적자가 한번도 없었던 대한전선은 최근 수년간 ‘투자사’로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2002년에는 무주리조트, 지난해는 쌍방울을 인수했다. 또 소주 1위업체인 ㈜진로의 최대 담보채권자인 데다 통신소프트웨어 ‘인네트’, 뉴미디어 콘텐츠 공급업체 ‘YTN미디어’ 등에도 투자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정부로부터 무주관광레저형 기업도시가 시범사업에 선정돼 2015년까지 76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구 부회장은 침체된 내수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인도와 러시아, 중동시장을 개척하고 있으며 최근 두바이와 모스크바에 지사를 뒀다. 그는 “전선업의 성장률이 높지는 않지만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의 전선 수요는 무궁무진하다.”면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초점을 뒀다. 또 부품소재사업 강화도 눈에 띈다.LS전선은 지난해 무선통신 부품사업업체인 코스페이스와 2차전지업체인 카보닉스를 인수했다. 최근엔 FTTH(광가입자망) 사업을 LS전선의 미래 성장엔진의 한 축으로 키울 계획이다. ●“의욕적인 경영인 VS 배울 만한 경영인” 매출 규모로는 6대4로 LS전선이 앞서지만 역사로는 10여년이 빠른 대한전선. 양사 CEO의 평가는 어떨까. 임 사장은 “LS전선은 지난 60년대부터 전선업을 해온 경쟁자이자 협력의 동반자”라고 말한다. 특히 구 부회장에 대해 “구 부회장이 여름 휴가도 없이 회사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고 들었다. 항상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또 산악스포츠와 여행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의욕적인 경영인으로 생각한다.”고. 구 부회장은 대한전선을 40년 지기(知己)라고 평했다. 공정한 경쟁속에 상호 신뢰하는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임 사장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 다각화와 성공에 대해 여러모로 배울 만한 선배 경영인”이라고 말했다. 양사 CEO의 ‘덕담’과 달리 대한전선과 LS전선은 껄끄러운 관계도 적지 않았다. 대한전선은 66년 LS전선의 사업 진출을 막기 위해 공급 과잉이라는 이유로 정부에 ‘반대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또 지난해 선박용 케이블 업체인 진로산업 인수를 둘러싸고 양사는 다시 충돌을 빚기도 했다. 임 사장은 취미가 바둑이며 하루 1시간 정도의 달리기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골프는 평균 90타 정도. 구 부회장은 한동안 등산을 즐기다가 최근 취미를 산악자전거로 바꿨다. 골프 핸디는 14 수준.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구자열 LS전선 부회장 ▲1953년 3월생 ▲1972년 서울고 졸업 ▲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90년 LG상사 동남아지역 본부장(이사) ▲1997년 LG투자증권 영업부문 총괄임원(전무) ▲1999년 12월 LG투자증권 영업총괄 부사장 ▲2001년 LS전선 재경부문 부사장 ▲2003년 LS전선 대표이사 사장 ▲2004년 LS전선 대표이사 부회장 ■ 임종욱 대한전선 사장 ▲1948년 10월생 ▲1967년 선린상고 졸업 ▲1975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74년 대한전선 입사 ▲1986년 대한전선 비서실 차장 ▲1995년 대한전선 이사(비서실장) ▲2000년 대한전선 상무 ▲2001년 대한전선 전무(경영전략실장) ▲2003년 대한전선 대표이사 부사장 ▲2004년 대한전선 대표이사 사장
  • 영하의 거리를 맨발로 다니는 철학도

    영하의 거리를 맨발로 다니는 철학도

      이 한겨울에 맨발의 청년이 출현했다. 작년 여름에 길다란「오버」를 입고 다닌 김인범(金仁凡)(19·서울문리대 철학과 2년)군. 본인은 입고 싶을 때 입고 벗고 싶을 때 벗는 것이라고 계절과 세상의 공론에 초연하지만 그「초연」의 저변은 궁금하기만 하다.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맨발로 서서 유유히 미술전을 감상 그의 그런 모습은 이미 서울 명물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68년 12월 28일, 더 정확히 말하면 하오 2시 정각. 따뜻한 날씨라지만 바람은 역시 동짓달 바람이다.「오버」는 분명히 입고 있었다. 그런데 벗은 것이 있었다. 신발과 양말. 모든 사람이 옷을 벗을 때 외투까지 입고, 남들이 애써 두텁게 입고 낄 때 맨발이 됐다. 그는 그 차림으로 신문회관화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이화여중·고교 학생들의 그림전시회(12월 26~30일)가 열리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던 여학생이며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이 수군수군 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유히 약 30분간 그림감상에 몰두했다. 옆구리에 대학「노트」한 권과 책 두 권을 끼고 있다.「칸트」의『순수이성비판』의 영어판. 그리고 또 한 권은 조가경(曺街京)교수의『실존철학』. 젊은 낭만의「데먼스트레이션」치고는 괴로운 고역같이 보는 것은 남들의 무책임한 수작이다. 이 인범군이 새해에 진갑을 맞는 아버지 김소운(金素雲·수필가)씨와 서울시내 무교동 S다방에서 우연히 부딪쳤다. 인범군은 여름에 입었던 아버지의 불하품인 그 외투에, 맨발의 천사.「父」와「子」는 오래도록 한 자리에 만나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인범군이 고개를 한번 꾸벅하더니 그 자리에 섰다. 아버지는 아들의 아래위를 한번씩 훑어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거기 앉아라』 아들이 머뭇머뭇 의자에 앉았다. 『너 이놈, 요즘은 맨발로 다닌다지.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지만』 우연히 만난 아버지는 쓴 입맛 다시는데 아들은 말없이 씩 웃고 아버지는 쓴 입맛만 다셨다. 아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부답.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씩 한번 웃었다. 아버지는 무연(撫然)한 표정으로 외면한 채 줄담배만 피웠다.「가경(佳景)」이었다. 갖은 괴벽과 기행으로 젊음을 얼룩지게 한 수필가도 아들에게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 눈치다. 이때 소운선생은 혹시 젊었을 때의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다방을 나올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인가 주의를 주면서 용돈 얼마를 건네는 눈치였다. 부자회견 후 인범군에게 감상을 물었다. - 아버지가 놀랐겠는걸요. 젊은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뭘요, 그 정도로 놀랄 아버님이 아닌 걸요』 기자는 김군과 다른 다방으로 옮겨 마주앉았다. - 미쳤다는 소리를 듣겠군요. 씩 웃는다. 『그런 말을 속삭이는 사람들이 있죠. 저는 황송스러운 말씀이라고 부득이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 왜? 『사전을 보면 두 가지 뜻이 있어요.「정신이상」과「도달」. 미치지(狂) 않고 미치기(達)는 쉽지 않은 법입니다. 어느 예술의「장르」나, 학문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대개 거기에「미치게」마련이죠. 그러한 찬사(讚辭)는 제게 과분입니다』 “뜻밖이라 아버지가 놀랐겠는데요”엔 “그 정도론 놀라지 않을 분” - 여름에 외투를 입는다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가 있겠지만 겨울에 신발을 벗으면 동상에 걸리지 않겠어요? 『오늘 정도의 날씨면 까딱 없어요. 선생님도 한번 벗어 보세요. 영하 10도쯤 돼야 동상에 걸려요.』 - 그러면 영하 10도 아래가 돼도 벗고 다니겠어요? 대답 없이 다만 웃었다. 미치기는커녕 누구보다도 똑똑한 청년이다. 키 173cm의 헌칠한 미남. 경기중학을 졸업, 서울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68년 10월에 서울문리대에서 각 학과의 학생 4명씩이 선수로 출전해서 주선(酒仙)대회가 열렸을 때 철학과 대표의 한 사람으로 나갔다. 그 때의「인사이드·스토리」로는 국문학교수 전광용(全光鏞)씨가 그를 우승자의 하나인 주선(酒仙)으로 적극 추천했다는 소문이다. 겨울에 신발을 벗고 대로를 활보하는 뜻은 자유스러워지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인범군의 이 색다른「데먼스트레이션」을 그의 아버지 김소운씨는「구린내 나는 자기 현시욕(現示慾)」이라고 타박이지만 죄는 그의「피」에 있을 듯하다. 김소운씨는『젊었을 때는「바이론」의 흉내를 내기 위해 오릿길을 일부러 절룩거리면서 걸었다』고 어떤 책에 썼다. 그뿐 아니다. 김소운씨의 자전적「에세이」『어느 하늘 끝에 살아도』라는 근저(近著)를 보면 아들 인범군 못지 않을 고집과 기행이 드러난다. 아버지 김소운씨는 일본에서 일부러 하얀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녔단다.「父와 子」의 성격의 유전을 느끼게 하니 흥미롭다. 그 책에 의하면 어려서 일본에 건너갔을 때 김소운씨는 일본에서 고의로 하얀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녔다. 소년의 객기(客氣)만이 아니었다고. 일부러 눈에 띄는 그런 옷차림으로 나다니면서『여기「조센징」이 있다. 어느 놈이고 한번 덤벼 보아라』그런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 아버지의 상식을 초월한 괴벽 기행(奇行)이 점철되어 흥미롭다. -「데이꼬꾸쯔싱」에 사표를 내고 하숙비가 밀렸던 여관에 이부자리며 행장을 맡긴 채 육로를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다. 열 나흘 걸렸다. 노자를 아껴서 도보로 천릿길을 가자는 것은 아니다. 주머니에는 그래도 부산행 차표 네 다섯 장은 살만한 돈이 있었다. 자기 자신을 어디다 부딪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이 장거리「하이킹」을 시켰단다. 이 여행으로 김소운씨의 발바닥은 물론 부르텄다. 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인범군이다. 더욱이 가정교사와 장학금으로 당당한 자립생활을 하는 청년이다. 아마도 그 고집은 청출어람(靑出於藍)격인지도 모를 일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1/12 제2권 제2호 통권16호 ]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6)초의·추사 그리고 정약용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6)초의·추사 그리고 정약용

    이맘때면 생각나는 차가 있다. 바로 ‘눈물차’다.‘눈물차’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1996년의 일이다. 별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 둥둥 떠내려오고 달빛은 풀벌레들의 합창에 일그러지던 날이었다. 초의스님이 ‘동다송´에서 말했듯이 깊은 밤 대자연의 품속에 빨려드는 풍광을 벗삼아 한잔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스님 계십니까” 밤중에 절을 찾는 나그네는 드물다. 아주 친한 도반이나 절 식구만이 늦은 밤 사찰을 찾을 수 있는 법인데 연락도 없이 찾아든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해남의 신문사, 농민회 등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활동가들이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10여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였다. ●새로운 茶문화 생산공동체 구성 자우홍련사 툇마루는 때아닌 손님들로 꽉찼다. 한잔의 차를 돌리고 대뜸 찾아온 연유부터 물었다.“스님 저희들이 차 공부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뜻은 간단했다. 향후 환경과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농촌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차문화 생산공동체를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당돌한 제안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연결된 차문화공동체 구성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제안에 망설여졌다. 생각해보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지만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후로 대여섯차례 방문하며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결국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작명을 했다. 남쪽에서 늦게 차를 시작한다는 뜻을 가진 ‘남천다회’라고 명명했다. 어떤 농사든 어떤 계획이든 서둘러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시작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달에 두 번씩 공부를 하기로 했다.‘동다송´‘다신전´, 그리고 행다와 차에 대한 것들도 공부를 했다. 젊은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다.1997년부터 놀고 있던 땅 8000평에 차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우리가 택한 농법은 철저하게 친환경농법이었다. 화학비료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만 차밭을 조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10년까지는 수확을 바라지 않을 작정으로 자연에서 나오는 부엽토만 퇴비로 사용했다. 조금 느리지만 인간과 호흡하는 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주경야독이란 말을 그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낮에는 차밭을 가꾸고 밤에는 차 공부를 늦게까지 하느라 모두들 열심이었다. 차밭은 4000평,5000평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의 차 생산지와 다창들 그리고 국내외 유명 다원들을 둘러본 그들의 안목은 점차 넓어지고 깊어졌다.7년째 되던 해인 2002년 4만여평의 차밭에서 생엽 200㎏을 채취했다. 그리고 제다한 가공량은 40㎏.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작은 양이었다. 차브랜드는 ‘손덖음 첫물차’로 했다. 기계적인 영농이 아닌 손으로 덖는 첫물차만을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첫차를 제다해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에게 제사를 지낸 후 모두 모여 차를 마시며 기뻐했다.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사연은 3000평의 차밭을 가꾼 남천다회 부부 이야기다. 차농사를 시작한 지 5년만에 젊은 부부는 고작 4통의 차를 손수 만들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차들을 이불속에 넣고 눈물을 훔치며 밤을 꼬박 샜다고 한다. 참으로 눈물나는 눈물차 이야기인 것이다. 이같은 사연이 담긴 첫물차 이름을 남천다회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눈물차’로 명명한 것이다. 그날도 바로 오늘같은 밤이었다. 그때의 기쁨은 차인으로서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역사로 남아 있다. 이렇듯 ‘인연’은 모든 것을 바꾼다.18세기 최고의 개혁적인 지식인들이었던 초의스님,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인연은 당대 조선사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시대까지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산에 유서와 시학 배워 초의스님은 24세 때인 1809년 강진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을 아암 혜장스님을 통해 먼저 만났다. 아암 혜장과 정약용은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년 동안 교류했다. 정약용이 아암 혜장에 보낸, 차를 청하는 편지인 ‘걸명소(乞茗疏)’는 지금까지도 차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걸명소´에는 “을축년(1805년)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약으로도 마십니다. 글 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 양 노동의 칠완다를 들이킨다오” ‘소’의 형식을 빌린 다산의 ‘걸명소´는 노동의 시와 육우의 다경 등에서 보여지듯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다도에도 깊은 경지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암 혜장이 세상을 떠난후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 초의스님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하게 모셨다. 초의스님은 1813년 다산의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때 마침 내린 비로 인해 장삼자락이 젖어 다산초당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산에게 가지 못한 초의는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슬프도다. 이 적은 몸 하나 나에게 선인의 경거술이라도 지었더라면 빗속으로 산넘어 날아갔을 텐데.” 초의스님이 정약용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탁옹(정약용의 별호)선생에게 드림’이란 시다.“부자는 재물로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이는 말로써 떠나보내네. 지금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저는 마땅히 드릴게 없습니다. 먼저 공경하게 누추한 마음 펼쳐 은자의 책상앞에서 말씀드리리라. 하늘이 맹자 어머니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네.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였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 하였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였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수레가 떠나갈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두렵니다.”라며 감사하고 있다. 훗날 초의가 조선의 신진사대부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은 정약용에게 받은 것이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많은 교류를 했다.1812년 가을 초의선사와 정약용은 월출산 백운동에서 월출산 외경을 그렸다. 초의스님은 백운도(白雲圖)를 그렸고, 다산은 청산도(靑山圖)를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의 말미에 시를 지어 붙였다.1823년 대둔사지 편찬에도 함께 참여했다. 초의스님은 수룡스님과 함께 편집을 담당했고, 호의와 기어스님이 교정을 보았고, 완호와 아암스님이 감정했으며 정약용이 필사를 했다. 정약용이 해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교류는 지속되었다. 초의스님은 한양을 방문할 때면 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수종사 인근 마현마을에는 그의 평생 스승 정약용과 정학연이 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관계 떠나 수행자로 다산과 그의 아들은 수종사의 샘물로 늘 차를 달여마셨다. 한양에 온 초의스님은 수종사에 머물며 다산과 교류했던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평생 초의스님의 스승 노릇을 하며 그의 안목을 더욱 깊고 넓게 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차인으로 차를 직접 제다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제다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켜나가도록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스승과 제자로서 유학을 배운 것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유·불·선에 대한 폭넓은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차에 대한 제배 및 제다 그리고 행다 등 다양한 논의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스님에 대해 다산은 스승과 제자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존귀한 수행자로 평생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초의스님이 평생의 도반(道伴)인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은 30세인 1815년이다. 초의스님은 그때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가 2년 동안 머물렀다. 정약용의 주선으로 한양으로 올라간 것으로 추측되는 초의스님은 서울 두릉(杜陵)에 사는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자하 신위, 해거 홍현주 등과 교류했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 금미 김상희와도 사귀었다.1786년 같은해에 태어난 초의와 추사는 한눈에 서로 뜻이 통했다. 당대의 석학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분을 맺고 청의 금석학 시문 전각등을 깊이 연구해온 젊고 개혁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추사는 청의 상류사회에서 중국의 고급 차문화를 배워 차에 대해서도 해박했던 것이다. 추사가 가끔씩 초의스님에게 자신이 구한 중국의 고급차를 보낼때 초의스님이 중국차에 대해서 어떤 것은 참으로 진미가 있고 어떤 것은 가짜 느낌이 난다고 했던 것은 그같은 교류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추사는 차에 대해 ‘광적’이었을 정도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승설(勝雪), 고다노인(苦茶老人), 다문(茶門), 일로향실(一爐香室) 등 차에 관한 수많은 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초의스님에게 차를 선물받고 써준 저 유명한 명선(茗禪)을 비롯, 죽로지실(竹爐之室), 다로경권실(茶爐經卷室), 다산초당(茶山艸堂) 등 차에 관한 수많은 글도 남기고 있다. 일지암을 맨처음 방문한 사람은 추사도 그의 동생들도 아닌 아버지 김노경이었다. 완도 고금도에서 4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난 김노경은 그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을 알고 싶어 일지암을 찾은 것이다.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머문 김노경은 시·서·화등 다방면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초의스님에게 첫눈에 반했다. 초의스님은 김노경에게 일지암의 유천에 대해 시로 답한다.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시방에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와 물을 떠가라. 갈때는 달빛 하나씩을 건져가라.” 초의스님의 시에 김노경은 유천의 물맛이 소락의 물맛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한다.“1840년 9월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며 초의스님을 찾아 일지암을 방문한다. 오롯한 가을의 풍광에 휩싸인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을 만나 추사는 애틋한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 동지부사의 고위직에서 하룻밤 사이에 유배를 떠나는 추사에 대해 초의스님의 위로는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초의스님은 자신의 제자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허유를 통해 제주도로 차와 서신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초의스님의 차와 서신을 받아본 추사는 그 고마움에 ‘일로향실’이란 글을 써서 허유편에 보냈다.‘일로향실’은 지금도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다. 추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초의스님은 1843년 봄 제주도로 건너간다.1년여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초의와 추사는 차에 대한 즐거움과 학문적 교류의 폭을 넓혀간다. 추사는 이때 초의스님을 통해 선불교에 대한 혜안을 넓힌다. 초의가 다녀간 다음 해에 추사는 세속의 각박한 인심을 따르지 않고 어려움속에서도 그를 따르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세상에 선보인다. 소나무와 잦나무 지조는 눈이 내린 후에야 그 절개를 알수 있다는 화제(畵題)를 지닌 ‘세한도’는 세속을 완벽하게 품어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질곡에 대해 울분을 터트려야할 추사로부터 이같은 작품이 유배지에서 나왔다는 것은 초의스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세한도 등 명작들 초의 영향 커 초의스님은 제주도에서 차의 재배를 시도한다.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를 위해 차의 재배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인연이어서일까. 지금 제주도에는 국내 굴지의 회사가 운영하는 광대한 차밭이 존재한다. 초의스님은 1851년 추사가 보내온 서간문을 모은 ‘영해타운´(瀛海朶雲)을 책으로 묶어낸다.‘영해타운´은 1840년부터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추사가 보낸 서신을 차곡 차곡 모았다가 책자로 편서한 것이다. 초의스님이 추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절절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추사는 북청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 머물며 초의스님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소동파의 생일날 과천 사람이’란 편지는 그러한 추사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큰눈이 내리고 차를 마침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 보는데 스님과 함께하지 못함이 더욱 한스러울 뿐입니다. 요즘 송나라때 만든 소룡단(小龍團)이라는 차 한 개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도모해 보십시오. 너무 추워 길게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초의스님은 추사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차를 보내달라는 추사의 청도 제때 지키지 않았다. 추사는 제때 차를 부쳐주지 않는 초의스님에게 익살섞인 ‘최후의 통첩‘도 보낸다.“지금 지체없이 보내지 않으면 덕산의 방과 임제의 할로 경책하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초의스님이 차를 보내오면 “과천의 샘물로 차를 달여 시음하니 과연 천하의 제일가는 차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추사가 초의스님과 그의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던 추사가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초의스님은 깊이 슬퍼했다. 슬픔에 못이긴 초의스님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3년후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쓴다.“오호라 그대와 나의 42년 동안의 아름답던 우정이여. 그 우정일랑 다음에 저 세상에서도 오래 오래 이어나가십시다. 나는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마치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고 그대와 만났을 때는 진정 허물이 없었습니다. 그대와 나는 손수 뇌협과 설유를 달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다 슬픈 소문이 귀에 닿으면 적삼 옷이 함께 젖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그대를 먼저 떠나보내는 나의 애끓는 심사여. 황국이 다시들고 흰눈이 내리는데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늦게 그대의 영전에 당도했을꼬. 원망일세 원망이로세. 하늘과 땅 사람이 모두 알지 못해도 오직 그대는 나의 심사를 알것입니다.”라고 애절하고 통절한 마음을 적고 있다. 추사를 보낸 초의스님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떠나버린 그를 잊지 못했다. 초의, 추사, 다산은 이렇게 거대한 변화의 담론이 진행됐던 18세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이 엮어낸 인연의 바다는 새로운 세기에 목말랐던 많은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눈물차를 만들어낸 남천다회도 마찬가지다. 200여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일지암과 초의스님의 선차(禪茶)의 인연이 오늘 이시대에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문화가 결합된 진정한 차의 세계를 열려는 움직임을 싹틔우고 있는 것이다.‘눈물차’를 만들며 차문화생산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남천다회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차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지암 암주)
  •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강준만·오두진 지음

    중동 이슬람사회의 기호품이었던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때는 16세기 초반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커피에 중독되기 전까지 커피에 대해 경멸적 태도를 취했다.1610년 터키를 여행했던 영국인 조지 샌더스는 ‘땟국물처럼 시커먼’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한말 조선에 들어온 커피는 미개국이 아닌 개명국의 상징으로 통했다.1970년대까지 한국인에게 커피는 보약처럼 여겨졌다. ‘땟국물처럼 시커먼’이 아니라 좀처럼 먹기 어려운 한방의 보약 색깔로 표현됐다. 얼마 전 한 지상파 방송 프로에 10년 동안 커피만 마시고 살아온 할머니는 커피가 보약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웃으면서 한 말이지만,‘한국 커피의 역사’는 그렇게 말할 만한 배경이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강준만·오두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는 이처럼 커피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보여준다. 부제는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 커피에 맛들인 고종과 순종이 커피에 독살될 뻔했던 일, 한방탕약과 비슷하다고 해 ‘양탕(洋湯)국’으로 불렸던 이야기, 한국전쟁 후 일부 지역에서 회충약으로 둔갑했던 사연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섞어 커피와 다방이 걸어온 역사를 담담하게 풀어냈다.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낭만·추억등 명동엔 多있다

    낭만·추억등 명동엔 多있다

    1950년대 명동은 서울 최고의 멋쟁이들이 모여드는 낭만의 거리였다. 동시대 예술가들이 모여 커피향에 취해 시를 읊은 문화의 거리이기도 했다.60·70년대 명동은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하고 DJ들이 음악을 들려주던 청춘의 거리였다. 오늘날 명동은 하루가 지나면 간판이 바뀌는 소비의 거리가 됐다. 반면 수십년이 지나도 단골이 있는 상점이나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장소도 적지 않다. 골목골목마다 깃든 ‘명동의 추억’을 찾아 떠나보자. 글 사진 이두걸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명동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반대로 외국 음식 전문점들도 군데군데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색다른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콴챈루(중국 대사관 거리)에는 중국 물품이나 잡지를 파는 서점들이 즐비하다. 여기에 일제시대부터 운영된 음식점들도 있어 서울의 ‘작은 중국’으로 불릴 만하다. 중국전통과자를 파는 도향촌(776-5671)은 해바라기씨·잣·호두가 들어간 십월전병을 개당 3000원, 대추·팥이 들어간 장원병은 개당 1500원에 판다. 원하는 재료를 말하면 직접 과자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산동교자(778-4150)는 쫄깃쫄깃한 만두피에 중국부추가 들어간 물만두(4000원)와 오향장육(1만 8000원)이 유명하다.3대째 운영하는 취천루(776-9358)는 다른 메뉴 없이 오직 만두만 팔 정도로 만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고기만두 4500원. 일품향(753-6928)의 굴짬뽕은 얼큰하면서도 진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TAJ 60년대 최고의 경양식집으로 손꼽히던 ‘코스모폴리탄’자리에 들어선 인도음식전문점. 조미료를 포함한 식재료 전반을 인도에서 직접 공수해올 뿐만 아니라 인도 출신의 조리사들이 현지 조리기구인 탄두, 멧돌을 이용해 요리한다. 식사후 입냄새를 제거해 주는 아니스와 인도산 슈거를 섞어 먹는 것도 재미있다. 치킨커리·인디언브레드가 함께 나오는 점심메뉴는 1만원. 전통카레는 각각 1만 5000∼2만원선.(776-0677) ●신정 40여년 이상 운영한 징기스칸 요리 전문점. 주인이 직접 목장을 경영하면서 고기를 공급하기 때문에 신선한 육질을 자랑하는 게 특징이다. 과거 명동이 금융 중심가였던 만큼 금융인들이 여전히 많이 찾는다. 독특한 스타일로 오리구이를 개발해 노린내를 없애고 담백한 맛을 살렸다. 가격대는 비교적 높다. 국수전골 1만 3000원, 오리구이 4만 4000원.(776-0338) ●아오자이(AODAI)베트남 전통의상을 가리키는 아오자이는 맛이 담백하면서 시원해 숙취해소에도 좋다. 주인이 직접 미국에서 베트남 요리 전문가에게 전수받았다. 베트남 쌀국수·볶음밥·닭고기 석쇠구이가 함께 제공되는 세트메뉴는 1만 2000원으로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디저트로 제공되는 베트남 커피는 일반 커피와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754-1919). ■ 짠돌이 데이트족의 천국 쇼핑의 천국으로 알려진 명동이라지만 쇼핑과 무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들도 많다. 특히 짠돌이 데이트족들에게 적합한 장소들을 추천한다. 유네스코 건물 2층에 있는 미지센터(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755-1024)는 국내·외 최신잡지·간행물, 세계 문화를 탐구하는 책이 갖춰졌다. 인터넷이나 DVD자료, 음악감상, 보드게임 등도 즐길 수 있어 복합문화공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같은 건물 옥상인 12층 작은누리(755-1105)에 들어서면 야생덤불숲, 풀꽃동산, 연못 등이 어우러진 마당이 펼쳐진다. 중국대사관에서 덕수궁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생태공원이다. 남산에서 날아온 새들도 볼 수 있다. 평일 오전 10시∼오후 4시에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이어지면서 웅진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서점 리브로(757-8100)는 혼잡하지 않아 약속장소로 알맞다. 레코드점과 문구점도 있다. 아바타 지하 1층·1층에 위치한 인테리어 전문점 코즈니(3783-5069)는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주침대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디카족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하서점에서는 최신 잡지들을 앉아서 볼 수 있다. 명동성당(774-1784) 뒤편의 작은 정원에는 벤치가 있다. 평온한 분위기에서 울창한 나무를 바라보며 자판기 커피를 뽑아먹는 것도 좋다. 성당 입구 화장실은 가게 등에 딸린 화장실과 달리 볼일이 급할 때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디 아모레 스타(709-6361)에서는 태평양의 기초·색조제품·매니큐어 등을 무료로 써볼 수 있으며 4층에서는 부정기적으로 전시회가 열린다. 대한음악사(776-0577)는 40여년째 명동을 지키고 있는 클래식 음악 전문 서점. 다섯평 남짓한 매장 벽에 악보가 빼곡이 쌓여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외국 악보는 물론 재즈,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악보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 없는 악보는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동 섬 ‘섬’이라는 술집 이름은 보통명사다. 신촌, 인사동 등에도 있지만 주인은 다 다르다. 하지만 90년대 이전 대학가의 낭만이 넘치는 카페라는 점에서는 쌍둥이다.10평도 못 되는 2층 규모라 좁은 편. 그러나 맥주를 기울이며 옛 노래들을 듣고 있노라면 낯선 이들도 어느새 술친구가 된다. 기타와 전자피아노도 갖추고 있어 주인 아저씨와 ‘선수’ 손님들의 즉흥 연주와 빼어난 노래도 운 좋으면 만날 수 있다.‘공식적’인 영업시간은 오후 7시부터 오전 2시까지.756-0582. ●데바수스 2003년에 생긴 독일전통 맥주집이다. 라거 맥주인 헬레스, 밀맥주인 바이젠, 흑맥주인 둥클레스 모두 500㏄가 6000원으로 조금 비싸지만 매장에서 직접 제조한 독일식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독일식 특선 수제 소시지와 감자, 양배추 절임 등이 곁들인 모듬소시지(2만5000원)도 일품이다. 해산물 볶음밥, 마늘안심스테이크 등 식사도 할 수 있다.3783-4568,4321. ●명동골뱅이 40년 전통의 골뱅이 전문점. 이름 그대로 대구포와 오이, 양파, 대파를 넣고 고춧가루로 양념한 쫄깃쫄깃한 골뱅이무침이 ‘대표 선수’다. 늦은 오후부터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푸짐하고 담백한 계란말이도 요기와 술안주로 제격이다. 골뱅이 1만 5000원, 계란말이 1만원. 생맥주 500㏄ 3000원이다.778-1659. ●할머니국수집 외 식당 외관은 여느 분식집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국수맛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비결은 질 좋은 멸치를 푹 끓여낸 뒤 고추장 양념을 한 국물맛에 있다.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일반 국수보다 두꺼운 면발에서 쫄깃쫄깃한 맛이 더욱 살아난다. 할머니국수 2500원, 두부국수 3000원.778-2705. 명동막국수와 할렐루야칼국수에서도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면요리를 즐길 수 있다. ●명동교자 칼국수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일본 등에도 널리 소개되면서 외국인이 내국인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담백한 면발에 걸쭉한 육수, 그리고 고소한 만두가 하나로 어우러져 진한 맛을 낸다. 시원한 맛의 바지락칼국수와는 다른 면에서 일가를 이뤘다. 마늘이 듬뿍 들어간 김치도 일품. 밥도 공짜로 준다. 만두도 웬만한 전문집보다 낫다. 가격은 모두 6000원.776-3424. ●고궁 비빔밥이 유명한 전주전통음식점. 쇠고기 사골 육수로 만든 밥에 육회, 은행, 잣, 호두, 육회, 애호박나물, 시금치, 도라지 등이 맛깔스럽게 얹혀 나온다. 모든 재료를 매일 전주에서 직접 들여와 신선하다. 놋그릇에 나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따뜻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유난히 많이 찾는 게 특징. 전주비빔밥 7000원·녹두빈대떡 1만 3000원.776-3211. ●평래옥 평안도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명동 중앙극장 맞은편 1·2층에서 영업하고 있는 냉면집이다. 이 집은 특이하게도 닭국물로 육수를 우려낸다. 주 요리도 초계탕이다. 삶은 뒤 시원하게 식힌 닭살과 메밀향 강한 국수, 그리고 계란, 오이, 배 등을 육수에 내온 보양식이다. 하나를 시켜 둘이 먹을 수 있다. 녹두빈대떡도 웬만한 집보다 낫다. 가격은 초계탕이 1만3000원. 녹두빈대떡은 6000원. 꿩냉면과 육계장 등 식사류가 5000원대로 명성에 비해 가벼운 편이다.2267-5892. ●금강섞어찌개 시원하면서도 얼큰한 찌개를 내오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70년대 찾았던 손님들이 자녀들과 함께 찾을 정도로 한결같은 맛을 내고 있다. 간판 메뉴는 섞어찌개. 오징어, 돼지고기와 함께 고추, 배추 등을 넣고 보글보글 끓는 모습만 봐도 군침이 가득 돈다. 부대찌개, 곱창전골, 해물전골 등도 인기를 끈다. 라면 등 사리도 넣을 수 있다. 찌개는 5500원, 전골은 7000원 선.778-6625. ●명동돈가스 1983년 문을 열었다. 호텔 돈가스보다 훨씬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20년이 넘게 유명 인사부터 10대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바삭바삭한 튀김 옷에 두꺼운 육질이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우리 입맛에 맞는 소스와 아삭한 야채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추천 메뉴는 돈가스 살 속에 피자치즈와 피망, 양파 등의 야채를 듬뿍 넣은 코돈부루. 가격은 6500원∼1만2000원까지 다양하다.776-5300. ●따로집 30여년 된 명동의 명물 해장국집이다.24시간 이상 푹 고아낸 사골 국물에 고추장으로 양념을 해 시원하면서도 얼큰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거기다 소고기와 선지, 콩나물 등이 푸짐하게 들어가 6000원의 가격이 아깝지 않다. 모듬전, 고추전 등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걸쳐도 그만이다.755-2455. ■ ‘돌고래 2004’ 사장 신경무씨 70년대까지만 해도 명동은 문학과 음악과 술이 넘쳐흐르는 ‘문화의 거리’였다. 그 중심에는 쉘부르 등과 함께 시대를 풍미하던 음악다방 ‘돌고래’가 있었다. 돌고래는 ‘명동백작’ 소설가 이봉구씨의 단골 ‘은성주점’ 자리에 둥지를 텄다. 청춘들은 이종환씨 등 당대 최고의 DJ가 들려주던 음악으로 시대의 아픔을 달랬다. 전축의 보급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던 돌고래는 지난해 12월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이름은 ‘돌고래 2004’. 중앙대 록그룹 블루드래곤 보컬리스트 출신인 사장 신경무(35)씨가 명동에서 유일하게 밴드의 라이브 연주가 가능한 카페로 다시 꾸몄다. 신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원이다. 일종의 ‘투잡족’인 셈이다. 업무 스트레스를 노래로 풀다가 음악인의 꿈인 라이브 카페를 아예 차렸다. 이곳의 주된 레퍼토리는 올드팝이다. 그러나 화요일은 모던록, 수요일은 퓨전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밴드가 출연한다. 신씨도 자주 직접 기타를 잡고 무대에 오른다. 웬만한 곡은 다 소화하는 ‘준프로’다. 오후에는 그날 볶은 원두커피도 3000원에 내온다.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어색해하는 30·40대 손님들을 위한 배려다. 대학 동아리 후배들이 연주는 물론 서빙까지 도맡는다. 넘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서비스가 가능한 이유다. 맥주는 4000원선. 안주는 1만 5000원∼2만원선이다. 번잡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저렴한 생맥주는 내놓지 않는다. 신씨는 “낭만이 살아 숨쉬던 명동에서 음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는 공간으로 돌고래를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777-0440.
  • 한·중·일 고3 ‘그들이 사는 법’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생활은 어떻게 다를까? 세계 100대 대학순위나 국제 학업성취도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는 한국뿐 아니라 습관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순위를 찾는다.EBS는 여름방학 특집 2부작 ‘교육이 미래다-한·중·일 교육 삼국지’를 통해 세 나라의 교육현실을 깊이있게 조명한다.EBS의 연중기획 `교육이 미래다´ 의 방학특집이다. 특히 입시제도의 최전선에 있는 고3생과, 가정교육과 연관된 유치원생의 생활을 들여다보며 비교·분석한다. 18일 방송되는 1부 ‘한·중·일, 고3으로 사는 법’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고3 학생들을 만난다. 일본 대학들은 학력뿐 아니라 다방면의 능력이나 활동을 평가해 학부·학과 적성이나 학습의욕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인재상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중국 대학들도 대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베이징(北京)대와 칭화(淸華)대가 세계 100대 대학에 들면서 학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지만 이들 대학에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나라 못지 않은 교육열을 보이는 두 나라에서 고3에게 대학은 어떤 의미이고 그들이 꾸는 희망과 꿈은 무엇일까? 이어 25일 2부에서는 세 나라의 가정교육을 살펴본다. 중국은 1979년 ‘한가정, 한자녀 정책’을 시행하면서 아이들이 ‘소황제’라 불리며 귀하게 교육받았다. 그러나 현재 20대 중·후반이 된 소황제 세대의 나약함과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지적되면서 중국의 가정교육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일본의 가정교육은 예로부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를 생활화하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자기 정리가 몸에 배어 있다. 하지만 위탁 교육기관에서 길러지는 아이들이 대부분인 요즘, 일본의 가정교육은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유치원과 가정을 찾아 민족성의 근간이 되는 가정교육의 현재를 살펴본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CEO 칼럼] 여름은 독서의 계절/안용찬 애경 사장

    [CEO 칼럼] 여름은 독서의 계절/안용찬 애경 사장

    한낮의 땡볕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군다. 도로변의 나무들이 무더위에 지쳐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산과 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아 보인다. 요즘 같은 시기에 서점은 파리 날릴 것 같지만 내가 즐겨 찾는 서점에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한여름 무더위에 무슨 책타령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독서의 계절은 여름이다. 흔히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청명한 가을날 실내에 틀어 박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보통 인내심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 나라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유혹을 뿌리치고 실내에 책을 읽을 만큼의 자제심이 나에게는 없다. 무더운 한여름이야 말로 시원한 곳을 찾아 꼼짝 않고 책을 읽기에 제격이다. 자투리 시간만 나면 회사 근처 애경백화점내 ‘북스리브로’라는 대형서점으로 책 구경을 간다. 아무래도 베스트셀러에 눈이 먼저 가는데 최근에는 ‘무심’ ‘희망의 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기도’ 등이 좋았다.‘무심’은 공감하는 바가 커 혼자 읽고 말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50여권을 더 사서 회사 간부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영어판 책 중에는 ‘Life’s Greatest Lessons’와 ‘Positive Words,Powerful Results’라는 책을 편하게 읽었다. 역시 다량 주문해 영어가 가능한 간부들에게 읽어보라 전해 주었고, 집에도 두 권을 가지고 가 아이들 방 책꽂이에 살짝 놓아 두었다. 특히 ‘Life’s Greatest Lessons’는 작가가 고교 교사 출신이어서인지 평이한 단어로 씌어져 정말 중요한 인생의 교훈들을 쉽고 와닿게 설명하고 있다. 경영관련 서적은 전에 읽었던 ‘Good to Great’를 올 여름에 다시 읽었다.‘이건희 개혁 10년’은 이번 주말에 읽을 예정이다. 지난 주에 읽은 ‘진다방 미스신이 심은하보다 예쁘다’라는 책은 제목이 재미있어 샀는데 작가가 나하고 동갑이라 그런지 내용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 책 읽는 내내 즐거웠다. 와인에 관심이 많아 와인 서적을 많이 구매하지만 실제로 책방에 서거나 앉아서 읽는 책의 수도 만만치 않다. 어떤 와인책은 한 두시간 훑고 나면 사기가 아까운 책도 많다. 내용이 워낙 겹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서점에는 좀 미안하지만 아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속독으로 두 세권을 읽어버리기도 한다. 수년 전까지 경영관련 베스트 셀러를 즐겨 읽었는데 얼마 전부터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읽고 있다. 여전히 왕성하게 책을 사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있는 책을 없애는 데에도 시간을 쏟는다. 평생 지니고 싶은 책은 30여권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회사와 집에 200∼300권의 책이 있지만 조만간 100권 내외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 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곁에 둘 것인지 남에게 불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내가 힘들 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책이었다. 괴로울 때는 책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고, 즐거울 때는 책을 통해서 더욱더 즐거워 했다. ‘처서’가 다가오는 것을 보니 이제 곧 세상은 가을 옷으로 갈아 입을 예정이다. 그쯤 되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사람들을 산으로 들로 유혹할 것이다. 그 전에 서점에 들러 몇 권의 책을 사고 보자. 당장 읽어도 좋고 나중에 읽어도 좋다. 독서에 투자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투자는 없다.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퇴근길에 서점부터 들르자. 지금 내 곁에 쌓여 있는 책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안용찬 애경 사장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4) 한국 차의 전래와 역사

    지난 초여름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지암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다 함께 차를 재배하고 제다를 하는 남천다회 식구들과 차 제다를 마친 후였다. 차를 가꾸고 차를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곡우 전부터 입하까지가 제일 바쁜 철이다. 차인들에게 차를 제다한 후의 충만함은 그 어떤 풍족함에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다. 평소 존경하는 어른스님들, 선방의 수좌들,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통씩 보내며 푸릇한 찻물이 든 뭉툭한 손을 바라보면 그저 한없는 우주를 담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과 충만함을 ‘확’깨버리는 전화였다. 전화의 주인공은 전남 지리산 화계에서 차를 재배하며 차를 만드는 젊은 차인이었다.“스님! 스님께 차를 맛있게 해서 보냅니다.”“그래 고맙다. 무슨 차를 했니?”“구증구포로 해서 만든 차입니다.” 순간 그 갸륵한 정성과 고마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스쳐갔다.“찐차를 했니, 아니면 덖음차를 했니?”“예 스님 물론 덖음차로 했습니다.”“구증구포를 했다면서 어떻게 한번도 찌지 않고 차를 제다할 수 있니?” 그 젊은 차인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자생설·전래설·해양설 등 다양 ‘구증구포’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일이다. 매달 발간되는 차(茶)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제다법은 구증구포(九烝九曝)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전통적인 제다를 복원하고 알리기 위해 섬진강변에서 제다학교를 만들어 우리 전통차 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진 곳에서 우리 차문화 보급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높이 살 일이다. 그 글대로 하자면 좋은 일이며, 일견 매우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린다.‘구증구포’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차를 직접 제다하는 차인들에게는 어제 오늘 일처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구증구포’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증구포’로 만든 차는 우리 전통차인 덖음차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찐차‘도 아닌 실체가 없는 제다(製茶)의 또 다른 ‘유령’인 것이다. 실제로 차를 제다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면 차 잎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찢어지고 발겨질 수밖에 없다. 맛과 향도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감소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구증구포’에 의한 제다법으로 만든 차는 극소수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시장’에 정식으로 출품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다법은 아닌 것이다.‘구증구포’라는 말은 주역에서 최고의 양극수인 ‘九’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는 한약재를 달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우리 차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자생설’과 ‘전래설’ 그리고 ‘해양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생태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차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화는 다양한 교류에 의해 ‘전통’과 ‘변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문화학자가 21세기 우리 문화코드의 사이클은 이제 ‘6개월’이라고 말할 정도로 짧아졌다. 광고 패션 노래 등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이며 빠르게 대중들의 기호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화적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신라 고려시대에도 문화적 ‘전이(轉移)´와 그에 따른 변종의 양상은 매우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차도 마찬가지다. 가야 신라 고려시대에도 지배엘리트들은 우리차를 당시 문화중심국이었던 중국에 보내기도 하고 역수입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없는 우리차에 대한 ‘자생설’과 ‘전래설’역시 그런 점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자생설의 핵심은 우리 고대국가인 가야국의 가야차에 대한 것이다. 우리차의 독자성과 관련이 있는 가야차의 존재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능화는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었다. 가야국의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어서 된 것이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여진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이 인도를 건너 가야국까지 오며 피곤해진 허왕후의 측근들에게 난액(蘭液:향기로운 음료, 즉 차)을 주어 쉬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난액’을 차 연구가들은 바로 ‘차’라고 하는 것이다. 가야국 ‘죽로차’의 존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신라에 차씨를 가져와 심은 김대렴의 전래설보다 적게는 400년 많게는 600년 전으로 우리 차 역사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가야차의 존재는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차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이어 고구려 백제 신라에도 중국의 차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차문화가 나름대로 위치를 점하며 존재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현재 몇몇 차인들에 의해 가야차랄 수 있는 ‘장군차’‘황차’ 등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은 차인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의 전래설에 따르면 ‘지난 12월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명차 ‘구화산차´ 신라서 가져가 우리차의 역사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명차라고 불리는 ‘구화산차’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신라왕자 출신인 김교각(704~803:지장) 스님이다. 김지장 스님은 신라를 떠날 때 신라의 차를 가져갔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끝낸 김지장 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의 구화산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곳 구화산에 신라에서 가져간 차를 심어 보급했다.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1703년)에는 “김지장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雲梗茶)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김지장 스님이 중국에 신라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차의 역사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해양설’도 많은 타당성을 가진다. 해상왕 장보고는 그 당시 가장 귀중한 물품중 하나였던 차 무역을 전개했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지만 중국의 차와 우리차에 대한 교환, 그리고 인근 대흥사 스님들과 교류를 통해 차를 적극적으로 보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것은 ‘환경과 지정학적인 요건’에서 빚어질 수 있는 자생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차나무가 생장할 수 있는 최적지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강암지대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차나무가 지구상에 생긴 이래 새나 배, 바다의 조류, 지형의 변화 등으로 ‘차씨’가 계속 옮겨져 번식했으므로 백제와 가야지방에는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역사이전부터 차나무가 이미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좀더 주목할 것은 차나무의 존재에 대한 유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차를 ‘약용’이든 ‘음료’든 직접 제다해서 마셨다는 점이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차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때 우리차의 기원과 그 관련된 논쟁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이다. 가야를 비롯한 우리고대국가에서는 차가 약용보다는 떡이나 술과 같이 귀족계급의 기호음료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야의 종묘제사에서는 해마다 세시 때가 되면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등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점에서 고대의 음다풍속은 중국과 다르게 일찍이 ‘기호음료’로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고대국가 중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보유했던 고구려에서도 차는 기호음료로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애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누구나 만들고 마실 수 있는 ‘단차(團茶)´가 유행했다. 그같은 사실은 일본의 유명한 사학자 아오키 박사가 고구려의 옛 무덤을 발굴하면서 3개의 단차를 발견해 우리차계에 많은 충격을 준 것에서 증명되고 있다.‘구다국(句茶國)´이란 차 관련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차 지명 중 가장 오래된 지명이랄 수 있는 ‘구다국’은 차가 당시 일반민중의 생활양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일상화되어 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백제도 그 문화의 섬세함과 우수성, 지형적 특성을 볼 때 음다풍속이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차를 재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땅이 바로 백제였고 자연스럽게 자생차가 그 생명의 뿌리를 깊숙이 박고 있으면서 활발한 차 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행기 스님 일본에 전래한 인물로 이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일본 ‘동대사요록´에 나오는 행기 스님의 존재다. 행기 스님이 일본에 차를 전래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지도층과 스님들이 7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구산선문을 통한 남종선과 차의 유입을 통해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시작한다.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최고의 문화로 꼽혔던 차문화를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지리산이라는 차의 최적지에 차나무를 생산 보급할 것을 명령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시대에는 왕, 승려,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백성까지 차를 마셨다는 다양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다소마을(茶所村)´, 귀족들이 차를 마시며 즐겼던 강릉의 한송정, 휴대용 다구(茶具)를 지고 차공양을 가다 경덕왕과 만난 충담 스님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당시 차 문화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원효 스님의 차방(茶房)이었던 ‘원효방’의 존재는 그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에서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2.4m크기의 ‘원효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4m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 스님의 초상화, 외실에는 병하나, 찻잔과 불경을 놓는 책상만 존재하는 매우 작은 차방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에도 다채로운 형태의 다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차의 전성기는 이어진다. 당시 차는 치국(治國)의 도구로 사용됐다.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는 신라귀족들과 승려들에게 통치자의 ‘격려금’으로 차를 하사했다. 또한 차를 준비하고 베푸는 의례를 담당하는 관청인 다방과 다원이 존재했다. 다방은 다방시랑(정3품)에서부터 다방별감까지 있었고 직급에 따라 모자, 옷, 허리띠등이 달랐다. 각 지역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아름다운 정원과 정자를 소유해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다원은 경북다방원, 경남다견원, 황해다정원, 충남·경북다정원 등이 있었다. 고려 때는 또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그에 필요한 짐을 담당했던 다군사(茶軍士)가 존재했고 차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차 상인까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명전(茗錢) 즉 투다(鬪茶:차의 맛을 겨루는 것)를 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행다(行茶)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새로운 왕조의 차 문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소박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수없이 밀려드는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차문화를 주도했던 사찰의 급격한 몰락은 조선시대 차산지의 폐쇄를 불러왔고 차문화를 소박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과중한 차세와 차 공납의 심화는 어려운 백성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稅茶 등 백성들 수탈 도구로 이용도 세차(稅茶)를 내기 위해 15세기에는 차 한홉과 쌀 한말,17세기에는 차 한말과 무명 30필을 바꾸었을 정도로 차의 폐해는 심각해졌다. 김종직은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관청용 차밭을 일구고 차 공납을 자체적으로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음다풍속이 존재했다. 궁궐이나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차를 주관하는 다방, 관청에서 제대로된 판결이나 회의를 하기 위한 다시(茶時:차 마시는 시간)가 있었다. 그중 ‘야다시’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야다시(夜茶時)는 밤중에 관리들이 다시를 갖는 것으로 파렴치한 치부나 도덕적 패륜을 저지른 관리들을 골라 그 죄상을 흰 널빤지에 써서 그 집 문위에 걸고 가시나무로 문을 봉한 뒤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야다시를 받게 된 사람은 그집에 평생 유폐되어 다시는 세상출입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 안방극장에 등장했던 ‘다모(茶母)´는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했다. 그러나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로 변질되기도 했다. 아직도 한국 차 문화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거의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차는 군자와 같아서 품성에 삿됨이 없다.”는 말이 있다. 차가 역사속에서 다양한 편린에도 불구하고 당시대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온 고고한 정신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둡고 후미진 곳에도 우리생은 늘 피어나듯 하얀 황금의 꽃술을 머금은 차꽃도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여기저기 가없이 피어난다. 수없는 역사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의 힘이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배워야 할 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일지암 암주)
  • 연기로 신화 재창조

    연기로 신화 재창조

    ‘노래여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 1998년 ‘신화’가 1집 ‘해결사’를 들고 가요계에 데뷔했을 당시 ‘또 전형적인 아이돌 그룹이 나왔군!’하는 느낌이 들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H.O.T’나 ‘젝스키스’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지만,‘신화’는 벌써 8년째 전성기를 이어가며 다방면에 걸쳐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다시 의기투합하는 과정을 이어가는 것은 서로에 대한 끈끈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지난해 말 발표한 7집 ‘브랜드 뉴’의 활동은 이미 접었지만, 올해 본격적인 개별 활동에 들어간 이후 어디서든 ‘신화’를 볼 수 있다. 광고는 물론, 영화와 각종 드라마, 쇼프로그램까지 마치 홍길동이 분신술을 부리는 것 처럼, 연예계를 점령했다.5일에는 바쁜 일정을 쪼개 여름 팬 서비스 차원에서 싱글 ‘서머 스토리’를 발표한다. 이들의 진화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다시 합체, 정식 앨범을 들고 돌아올 내년 초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런 가운데 신혜성과 이민우는 최근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 보드게임 카페를 내기도 하고, 전진이 나오고 있는 ‘해변으로 가요’ OST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멤버들간에 돈독한 우애도 과시하고 있다. 너도 나도 연기에 뛰어드니 라이벌 의식은 들지 않을까.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멤버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해변으로 가요’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는 전진은 “각자 개성을 존중하고, 잘할 것으로 믿고 응원한다.”면서 “장점·단점은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평가보다는 장난 문자를 주고 받는 게 더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반전 드라마’ 앤디 시트콤 ‘논스톱4’에서 고시생 역할로 인기몰이를 했던 앤디는 SBS ‘일요일이 좋다’의 ‘반전 드라마’에 고정 출연하며 본격 연기자 활동을 예감케 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김동완의 바통을 받아 SBS ‘생방송 인기가요’MC를 꿰차고 매끄러운 진행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 중. 메인 보컬 신혜성 메인 보컬인 신혜성은 유일하게 음악만 고집하고 있는 편. 강타, 이지훈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S’로 활동하기도 했고, 지난 5월 솔로 1집 ‘오월지련’을 내놓고 열심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멤버들의 연기 겸업 성공이 이어지며 과연 신혜성이 언제 연기에 도전하게 될지도 팬들의 관심사가 됐다. ‘슬픔이여 안녕’ 김동완 올해 에릭의 뒤를 이어 김동완이 안방극장에 돌아왔다. 멤버 가운데 연기에 있어서는 가장 선배.2002년 드라마 ‘천국의 아이들’에 이어 지난해에는 영화 ‘돌려차기’에서 주연을 맡았다. 또 올 초 ‘떨리는 가슴’으로 호평을 받았고, 지난 6월부터 세 번째 드라마인 KBS 주말연속극 ‘슬픔이여 안녕’에 돌입했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했지만,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속 깊은 청년 역할이다. 박선영과 알콩달콩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는 서글서글한 연기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신입사원’ 에릭 2003년 ‘나는 달린다’로 연기에 입문했던 에릭은 문정혁이라는 본명으로 지난해 ‘불새’에 이어 올해 ‘신입사원’을 통해 연타석 홈런을 쳤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과 인기상을 받으며 연기자로서 이미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현재 김윤진 신은경과 함께 일기에 씌어진 대로 일어나는 살인 사건 이야기를 담은 형사물 ‘6월의 일기’를 찍고 있다. 이르면 올 가을에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봄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킬러로 깜짝 출연한 바 있는 그는 강력계 형사 동욱을 맡아 정식 스크린에 데뷔하게 된다. 강렬한 이미지를 위해 머리도 짧게 자른 에릭. 시원한 액션이 기대된다. ‘논스톱5’ 이민우 2003년 11월 이후 두 번째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는 이민우는 지난달 14일부터 MBC 시트콤 ‘논스톱5’에 합류했다. 친절한 바람둥이지만 항상 중요한 순간에 여자를 놓치는 실속 없는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다. ‘해변으로 가요’ 전진 가장 최근에는 액션스타를 꿈꾸는 전진이 나섰다. 지난달 30일부터 방송되고 있는 SBS 주말 특별기획 ‘해변으로 가요’에서 이지적이고 냉철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신선하다는 시청자 반응이 올라오고 있다. 시트콤과 반전 드라마에 얼굴을 자주 비췄지만 드라마 도전은 지난해 ‘구미호외전’ 이후 두 번째.
  • 174死 2生 두 행운의 전차 일대기

    174死 2生 두 행운의 전차 일대기

      이제 서울의 어린이들은「크레용」으로 전차를 그릴 수 없게 됐다.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올 때 눈에 익던 전차는 70년 영욕(榮辱)을 실은 채 말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철로 변해버리는 176대의 전차 중 단 2대만은 살아남아 어린이들 틈에서 여생을 즐기게 되었다. 이 행복한 두 칠순 할아버지 전차의 애환어린 일대기를 들어보면. 시민들과 함께 늙어온 몸, 고치고 고쳐 옛모습 잃고 행운의 두 할아버지는 230호와 452호. 문교부의 요청에 따라 230호는 창경원에, 452호는 남산 어린이놀이터에 남겨져 찾아오는 어린이들을 반기며『너희 아버지도 내가 타워다줬지』하고 긴 수염을 내리 쓸게 됐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해머」로 두들겨 부셔지고 철(鐵)은 철대로 동(銅)은 동대로 갈기갈기 찢겨 고철로 팔려나가는 옛 동료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두 할아버지는 그러나 옛 동료들을 대표해 살아남게 된 행운을 기뻐하며 지금 몸치장에 한창이다. 창경원에 남게 될 230호는 제작된 지 올해로 만 35년. 일제 때 일본서 만들어져 다음해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운전대 오른쪽 위에 달린 자동전류차단기가 전류가「오버」되면『퍽!』하고 불꽃을 튀기며 꺼지던 모습은 전차를 타본 사람이면 한번쯤 구경했을 것이다. 이 전차는 직접 제어방식으로 되어있어 운전대 밑에 제어장치가 달려 있다. 가장 서울시민들의 눈에 익은 전차다. 당초 이 땅에 첫 선을 보였을 땐 반강제(半綱製)로서 차체는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58년에 철제(鐵製)옷으로 바꿔 입었다. 또 원래는「트롤리·폴」형으로 전차가 달리면 뒷 차장이 연방 줄을 잡아당겨 공중 전선에 맞춰 놓아야 했던 것이 62년부터 폐차 직전까지 우리 눈에 익은「뷰겔」형(거꾸로 매단 3각형형)으로 바뀌어 뒷 차장의 일손을 덜게 됐다. 트롤리·중간문 없어지고 2인용 좌석도 긴 의자로 이와 동시에 종래엔 문이 셋이던 것을 둘로 개조하고 좌석도 양쪽에 다 놓여있던 것을 한쪽으로만 몰아, 100인승으로 개조했다. 동시에 가운데 문을 맡던 차장은 폐문과 함께 퇴직해야 했고-. 어린이놀이터에 남겨질 452호는 미제(美製). 제작된 지도 40년이나 되는 장년.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수복 후인 54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한창 사용하다가 전차철거로 폐차 처분된 것을 ICA원조로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차체가 좀 넓고 또 2인승 좌석이 나란히 놓여있는「새것」이라 해서 무척 즐겨 탔던 것. 또 종래의 전차가「롱·시트」였던데 비해 이 형은 소위「로맨스·시트」로 되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게 되어 있었다.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올 땐「트롤리」가 붙어 있었으나 62년부터 일제히「뷰겔」로 바뀌었고 시민의 사랑을 받던「로맨스·시트」도「롱·시트」로 바뀌었다. 이 형은 간접제어「시스팀」으로 되어 있어 제어장치가 운전대 아닌 차체 밑에 달려 있는 것이 특색. 새것이라 해체 면한 28대 사갈 만한 임자 없어 골치 멀리「펜실베이니아」의 어느 소읍(小邑)에서 배에 실려 이 땅에 왔다가 이제 같이 온 동료들을 잃고 혼자 남아 이국 어린이들 틈에 끼게 된 벽안(碧眼)의 노옹(老翁)- 그 회포는 어떠할까? 이 두 전차 외에도 해체를 면한 전차는 모두 28대. 이들은 일본「후지」사의 제품으로 63년에 8대, 67년에 20대가 도입되었었다. 이「후지」형은 차체 내의 조명이 모두 형광등으로 되어있으며 선풍기와 자체 난방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최신형. 들여온 지 얼마 안돼 폐차 처분하기가 억울해(?) 남겨두기로 결정을 했으나 사가는 사람이 없어 처리에 골치를 앓고 있다. 외국에선 관광지에 옮겨 숙소·식당으로도 쓰지만 서울시의 계획으론 관광용으로 교외지대에 내보낼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이「트램·카」설치 계획으로 바뀌자 궤도문제로 교외운행도 불가능하게 되었다.(「트램·카」는「레일」이 하나뿐) 그래서 서울시 당국은 전차가 없는 대구시, 대전시 등에 구매를 종용했으나 두 도시선 모두 예산부족으로 난색을 보여 갈데올데 없이 동대문 차고에 처박혀 있는 따분한 신세다. 원래 이「후지」형의 도입가격은 8백만원. 서울시측이 각 시·도에 띄운 공문에 따르면 6백만원까지 값을 깎아주겠단다. 그래도 임자가 나서지 않아 주무당국인 서울시 운수사업부는 1억 6800만원짜리 이 전차 처리방안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 전차를 민간인이 사서 관광오락지에 부설, 숙소로 개조하거나 식당, 다방 등으로 바꿔 쓰고 있다.「호텔」아닌 전차속 하룻밤이 보다「로맨틱」한「무드」를 마련해 주기 때문.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 전차들을 사서「에어컨」과 난방시설을 모두 유효하게 쓰려면 한 대 6백만원의 전차값 말고도 부대시설인 전기·변압시설 등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 상업적으로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어느 약싹빠른 장사아치의 증언. 미국「샌프란시스코」시에선 전차 철거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시민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철거에 실패. 오늘날「샌프란시스코」시의 명물로 전 미국에 알려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선 오히려 땡땡소리를 풍물시(風物詩) 삼아 그래서「러시·아워」가 되면 천천히 달리는 전차에 한 손을 잡고 매달린「샐러리·맨」의 못브이 영화나 우편엽서에 등장하고, 관광차「샌프란시스코」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으레 온가족이 함께 차를 타보곤 한다. 이젠 내년부턴 우리도「샌프란시스코」의 시민들처럼 창경원과 어린이놀이터를 찾아 정들었던 전차와 함께 흐뭇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어른들은 하릴없이 서있는 두 전차를 보고『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어린이들은『신기한 폐품』속을 마음껏 뛰놀며…. [ 선데이서울 68년 12/15 제1권 제13호 ]
  • 中위협론·정상 상호방문 논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과 미국은 1일 베이징에서 양국 수교 이래 첫 정례 고위급 대화를 가졌다.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상무 부부장을 단장으로 한 중국측은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이 이끄는 미국측과 양국간 군사·에너지·테러·교역과 타이완 문제 및 국제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특히 중·미 고위급 대화에서는 오는 9월 하순으로 예정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방미와 11월에 있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방중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은 또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군사적 충돌 위험을 피하기 위해 책임있는 고위층간 대화의 틀을 구축하는 문제도 협의했다. 중국측은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국 위협론’이 외교·안보·경제·무역·금융·에너지 등 다방면에 걸쳐 양국 갈등의 주원인이라고 판단, 이번 고위급 대화를 통해 중국 위협론 해소에 주력할 것으로 전해졌다.양국은 고위급 대화를 1년에 두번 번갈아가며 개최하기로 했다.oilman@seoul.co.kr
  • 서기원 前서울신문사장 별세

    서기원 前서울신문사장 별세

    소설가이자 전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서기원(75)씨가 30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1930년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졸업은 하지 못했다.1956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서울신문 주일특파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했다.73년부터 공직에 몸을 담아 경제기획원 대변인,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 등을 맡았다. 이어 서울신문 사장을 비롯,KBS 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한국신문협회장,‘문학의 해’조직위원장,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언론계와 문화계를 이끌어왔다. 소설가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56년 ‘현대문학’에 단편 ‘암사지도’를 발표, 이듬해 소설가 황순원씨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데뷔작과 함께 ‘오늘과 내일’(60년) ‘잉태기’(60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61년) 등을 발표할 때까지는 전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가치관의 혼란, 세태와 풍속 등을 주로 그렸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근대 역사와 인물을 소재로 정치ㆍ사회의 변화상과 사회적 비리 등을 강하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혁명’(64년) ‘조선백자 마리아상’(71년), 단편 연작 ‘마록열전’(71년) ‘왕조의 제단’(82년),‘광화문’(94년) ‘징비록’(96년) 등이 있다.91년 KBS 사장으로 재직시 평소 즐기는 취미인 낚시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엮어 ‘물따라 고기따라’를 펴내기도 했다. 현대문학상(60년), 동인문학상(61년), 한국문학상(75년), 은관문화훈장(96년), 대한민국예술원상(2004년) 등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현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언론계와 문단의 후배들이 줄줄이 고인을 방문, 술자리를 나눌 정도로 포용력과 인간미를 갖춘 이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유족으로는 성기원 여사와 3남1녀.3남 동철(현 사업기획부장)씨가 서울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고인의 뒤를 잇고 있다. 장남 동준씨는 미국 연방기상청 책임연구원으로, 차남 동한씨는 도시공영 이사로, 사위 조일영씨는 교원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02)2072-2016. 발인 2일 오전 7시. 장지는 충북 옥천 선영.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소설가 이호철의 추모사 서기원 형. 서기원 인(仁)형. 지금 이 시각 저는 지난 50년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노상 스스럼없이 익숙하게 불러왔던 이 호칭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진정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섞어 당신을 향해 부릅니다. 어찌 하루 사이에 별안간 형과 나 사이가 이승과 저승 사이로 이렇게도 멀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제 이 시각을 끝으로 그렇게 늘 익숙했던 그 호칭,‘기원 형, 기원 형’ 호칭을 이제부터 그 어디에서도 이전처럼 쓸 수가 없다는 이 크나큰 상실감을 대체 무엇으로 채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몇년 전 황순원 선생과 신동문 형 등 50,60년대 그 어렵던 명동시대를 살았던 선배 동료들이 줄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만 이제 서기원 형,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나고 보니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제 몸뚱이의 어느 반쯤이 뎅겅 잘려나가는 듯 갑자기 싱숭해지지 않을 수 없고 새삼 우리 주위를 휘둘러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은 1957년 폐허 속 명동의 돌체 다방이었지요. 시인 박시진의 소개로 형과 첫 대면했을 때, 첫 악수를 나눴을 때 형의 그 따뜻하고 기품 있었던 손아귀의 감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도 선연하게 떠오르고 약여(躍如)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형은 26세로 동화통신사에 몸담고 있었으며 저는 24세였습니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저녁 술타령이었지요.4·19,5·16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별 상흔 없이 이어졌습니다. 형은 언론계에 몸담으며 서울신문 주일특파원으로 혹은 서울신문 사장으로,KBS사장으로, 관계에까지 뻗으며 활동무대가 넓어져 갔고, 저도 저대로 소위 재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경찰서 유치장으로 혹은 구치소를 드나들기도 하였습니다. 웬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50년대에 처음 만났던 그 피차의 인연만은 깊이, 끈질기게 이어올 수가 있었지요. 우리 사이는 본원적으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죠. 우리 사이에는 바로 문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원 형. 서기원 형. 바야흐로 형을 영겁의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저 1957년 명동의 널찍했던 그 지하다방에서 처음 형을 만났을 때의 그 드물게 예쁘고 균형잡혀 있던, 무척 품위있게 생겼던 그 당신의 손, 열 손가락과 그 손톱 끝까지 새삼 절절하게 떠올리고 있습니다. 아픔으로, 그리움으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손모아 빌면서….
  • 카툰문학의 거장 대표작 4편 국내첫선

    카툰문학의 거장 에드워드 고리(1925∼2000)의 대표작 4권이 국내 처음으로 황금가지에서 출간됐다. 1953년 ‘현 없는 하프’로 데뷔한 에드워드 고리는 펜으로 그린 섬세한 일러스트레이션에 간결하고 함축적인 글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수많은 예술인들과 독자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고딕풍 음울함에 풍자적 유머와 미스터리를 뒤섞은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는 헨리 제임스, 허먼 멜빌, 이오네스코 등과 같은 선상에 놓이며, 그림에선 19세기 후반 영국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를 이끈 환상 유파를 독창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데뷔 이후 100여권의 책을 집필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그는 연극,TV, 애니메이션 등 다방면의 대중문화에도 손길을 뻗쳤다. TS 엘리엇의 ‘노련한 고양이들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에 그린 삽화는 뮤지컬 ‘캐츠’의 캐릭터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고, 무대미술을 담당한 연극 ‘드라큘라’(1977)로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에 선보인 책은 ‘현없는 하프’를 비롯해 ‘펑 하고 산산조각난 꼬마들’‘수상한 손님’‘불가사의한 자전거’ 등 그의 작품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펑 하고 산산조각난 꼬마들’(1963)은 A부터 Z까지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죽는 이야기다.‘수상한 손님’(1958)은 우습게 생긴 이상한 생물체가 난데없이 나타나 17년간 가족의 일원으로 지내게 되는 황당한 사건을 담았다. 1969년작인 ‘불가사의한 자전거’는 악동 남매가 주인없는 자전거를 타고 낯선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니 173년이나 흘렀다는 내용. 처녀작 ‘현없는 하프’는 1920년대 영국 어딘가에서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하는 주인공을 통해 예술가의 고뇌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책이다. 송경아 옮김, 각권 75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논술이 술술] 게으름에 대한 찬양/글쓴이 : 버트런드 러셀

    ‘시간은 돈’임을 강조하며, 무조건적인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미덕으로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제목은 무척 도발적이다.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전면으로 맞서는 불온함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 도발과 불온함은 기존의 사회적 통념과 가치를 되짚어보면서,‘독단에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가짐과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맛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버트런드 러셀은 다양한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현대 수학의 중요한 경향 중의 하나인 논리주의의 구상을 체계화한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며,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동시에 노벨문학상(1950년)을 수상한 문학가이기도 하며, 평생 반전·평화운동을 일관되게 펼친 사회사상가이자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몇 차례의 투옥을 감수하면서 교육과 여성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참여해 왔다. 특히 1955년에 아인슈타인과 함께 발표한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은 핵전쟁의 위험을 감시하고 경고하며, 과학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모색하는 ‘퍼그워시회의’가 창립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책은 이처럼 다방면에서 활동한 러셀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쓴 철학적 수필집이다.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적 독단에 반대하는 그의 정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도 있고, 문화에 대한 비판적 단상을 서술하고 있는 글도 있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끌고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현대 서구 문명을 비판하는 글들이다. 그는 이 글들을 통해 실용적 지식과 가치만을 강조하며, 인간을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현대 문명의 본질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선한 본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힘들게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온다. 하루 네 시간 정도 필요한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할 때 문명은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 기술 문명이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지만,‘근로가 미덕’이라는 고정 관념 때문에 과잉 생산을 거듭하며, 노동자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게으름에 대해 느끼는 원초적인 가책을 용감하게 떨쳐버려야 사회와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용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사색하면서 ‘무용한’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창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무용한’ 지식이야말로 인생을 진지하게 만들고, 자신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사람은 게으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고 스스로가 선택한 창조적인 활동에 몰두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게으를 권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셀의 이러한 지적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눈부신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눈부신 생산력의 발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노동의 종말’이라고 할 만큼의 심각한 실업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고,‘과로사’라는 말이 낯설지 않도록 노동 강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러셀의 말처럼 과연 우리는 제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집단적 광기에 휩쓸려 파멸을 향해 경쟁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가치는 이처럼 우리의 현실을 진지하게 되돌아 보도록 이끌고 있다는 데 있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 독서 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중1∼고3 -관련 교과:고등 사회, 윤리와 사상, 사회문화 -함께 읽어 볼 책:모모(미카엘 엔데), 느림(밀란 쿤데라), 월든(소로),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조지 리처), 조화로운 삶(헬렌 니어링·스코트 니어링),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상소), 무소유(법정) -기출논제:연세대 2003학년도 자연계 정시 논술, 고려대 2002학년도 정시 논술, 인하대 2002학년도 수시1·2학기 논술 ■ 생각해보기-실용적 지식만을 강조하는 요즘 세태가 지니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인문학이 지니는 의의와 가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보자. -기술의 발달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써보자. -기술 발달의 혜택이 사회에 골고루 분배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 신세계·롯데 경쟁 명동 상권 ‘어깨춤’

    신세계·롯데 경쟁 명동 상권 ‘어깨춤’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새로 문을 열면 명동이 어떻게 변할까. 롯데·신세계백화점 경쟁으로 명동 상권이 부활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공사 중인 명동입구의 ‘토투앤’과 명동역의 ‘하이 해리엇’이 완성되면 명동 중심지가 다변화할 전망이다. ●구매력 높은 소비자가 몰려든다. 명동의 하루 유동인구는 150만명에 달하지만,13∼24세 젊은이가 대부분이어서 구매력은 강남권에 뒤진다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롯데가 명품관 에비뉴엘을 건설하고 신세계가 본점을 오픈하면서 구매력 높은 소비자의 발길이 잦아질 것으로 상인들은 예상하고 있다. 의류매장의 한 운영자는 “다양한 소비자가 명동을 찾으면서 ‘황금 쇼핑지구’란 명동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명동점 김행석 점주도 “롯데타운이 생겨 외식업체의 매출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면서 “백화점 영업이 끝난 8시 이후 고객이 점차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명동 상권이 다방면으로 뻗어나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전통적으로 명동의 중심은 ‘명동길’이었다.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건너편 ‘아바타’쇼핑몰에서 우리은행 명동지점, 명동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아바타는 명동입구라 불렸다. 명동 2가 우리은행 명동지점은 2003년까지 14년간 제일 비싼 땅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달라졌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밀리오레∼명동빌딩∼유투존 구간인 ‘명동 중앙길’에 사람이 더 몰리기 시작한 것. 밀리오레와 맞붙은 충무로 1가 카페 파스꾸찌(CAFFE PASCUCCI·옛 스타벅스)는 가장 비싼 땅으로 평당 1억 3900만원에 달한다. 이 거리엔 ‘로이드’‘푸마’‘게스’ 등 의류매장만 30개가 넘는다. 하이 해리엇도 건설 중이어서 전망도 밝다. 명동 밀리오레측은 “강남과 강북을 잇는 명동역이 명동 상권의 새로운 입구로 자리잡았다.”면서 “중앙길이 명동 중심지로 확고히 뿌리내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명동상권이 다방면으로 이동 쇼핑몰 아바타와 스타벅스는 생각이 다르다. 신세계·롯데 전투가 명동 상권의 다각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아바타측은 “백화점 경쟁으로 소비자들이 2호선 을지로입구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명동길이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지난 4월 생활용품 유통업체인 ‘코즈니´를 1층에 입점시켰고,3층 의류매장도 싹 바꿔 마케팅을 강화했다. 특히 아바타 맞은편에 토투앤이 들어서면 시너지 효과를 낳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랜드 패션브랜드 ‘후아유’도 중앙길에서 명동길로 자리를 옮긴다. 스타벅스는 신세계가 활성화되면서 ‘명동의류 길’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를 것이라 예측했다. 마케팅팀 이민규씨는 “회현역을 통해 신세계를 방문한 소비자들이 명동의류 길을 통해 명동으로 들어올 것”이라 말했다.2000년 현재의 파스꾸찌 자리에 둥지를 틀어 이곳을 최고의 상권으로 탈바꿈시킨 저력으로 새로운 중심지 개발에 나서겠다는 각오다. 그는 “스타벅스가 당시 밀리오레 옆에 자리를 잡을 때 누구도 명동길에서 중앙길로 상권이 이동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면서 “충분한 시장조사를 통해 명동의류 길에 투자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스타벅스는 명동의류 옆에 명동점을 오픈하고, 파스꾸찌 대각선으로 15m 떨어진 4층짜리 건물(옛 MLB빌딩)에도 국내 최대 규모인 160평 300석 매장을 짓고 있다. 전통적인 패션거리 명동길과 신흥 중심지인 중앙길에 이어 명동의류 길도 새로운 상권으로 떠오를 지 주목된다. 변화의 날갯짓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2∼3년간 명동에선 보세매장이 절반 이상 줄었다. 비싼 임대료만큼 매출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 이 자리를 각 브랜드의 플래그십(Flagship)숍이 메웠다. 플래그십숍이란 ‘깃대를 꽂는다.’는 의미로 그 브랜드를 대표할 만한 매장을 뜻한다. 제일모직 ‘빈폴’,‘패션피아’(Fashionpia),F&F의 ‘AMH’, 이랜드 ‘티니위니’·후아유·‘푸마’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젊은 여성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화장품 브랜드숍도 즐비하다. 태평양은 지난 23일 ‘디 아모레 스타’를 열었고,‘휴영’‘스킨푸드’‘도도클럽’‘바디숍’‘뷰티크리딧’ 등도 자리잡았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미샤’ 5개,‘코스메틱넷’ 1개를 명동에 입점시킨 에이블씨엔씨 마케팅본부 김보동 이사는 “유행의 첨단인 명동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한국 소비자를 만족시키면 세계 어디서든 경쟁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명동은? 서울을 상징하는 번화가이자 유행을 창조하는 패션의 거리다. 조선시대에는 주택지였지만, 일제시대 충무로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상가로 변했다.1955년 이후 종로, 광교 등에서 영업하던 양장점이 명동으로 옮기면서 패션1번지로 발돋움했다. 명동성당과 전국은행협회,YWCA, 유네스코 회관, 중국대사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상가지역이다. 롯데·신세계는 물론 금융기관, 의류·화장품매장, 음식점, 미용실 등 3600여 점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2000년 3월 관광특구 지역으로 지정, 일본 관광객이 찾는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지하철 2,4호선이 지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명동상가 ‘몸단장’ 한창 젊은감각 살리기 경쟁 서울 중구 명동상권에 리모델링 바람이 몰아쳤다.1955년부터 ‘패션1번지’로 불리던 명동이 젊은 감각으로 변신하고 있다. 완성품은 2007년에야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명동 옛 국립국장인 ‘명동예술극장’이 2007년말까지 600석 내외의 극예술국장으로 재탄생한다.1층에는 로비가,2∼4층에는 객석이 들어서고 5층엔 카페가 자리한다. 옛 건물의 뼈대만 남긴 채 전체를 새로 앉히는 격이다. 오는 10월에 착공한다. 국립극장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공연예술의 본산이자 명동의 상징이었다.1934년 일본 건축가 이시바시가 지은 바로크 양식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일제 때 영화관, 서울시 공관을 사용하다 1959년 국립극장으로 변모했다.1975년 대한종합금융(옛 대한투자금융)에 팔리면서 노랫소리가 멈췄다. 외환위기 이후 명동상권이 급속히 침체하자 문화·예술인은 물론 상인들도 ‘국립극장 되찾기’운동에 참여했다. 그 결실이 곧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국립극장 맞은 편 우리은행 명동점도 몸단장 중이다. 명동성당도 리모델링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국립극장에서 명동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옷을 갈아 입고 있는 하나은행 건물(옛 서울은행)이 나온다. 복합쇼핑리조트 ‘토투앤’으로 한창 리모델링하고 있다. 명동 토투앤은 건물연면적 1만 3000평으로 지하 3층∼지상 17층 규모.4∼5층에 이종격투기장 등 각종 이벤트홀이 자리잡고,10층 이상은 고급 호텔로 꾸며진다. 전문병원, 피트니스센터, 전문식당가, 보석 등을 지하 1층∼지상 3층,6∼8층에 입점한다. 내년에 문을 열면 맞은 편에 위치한 아바타와 함께 명동입구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4호선 명동역 입구에선 ‘하이 해리엇’이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표준지 공시지가 1억 3200만원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비싼 ‘금싸라기’땅에 11층짜리 명품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 지하 2층에는 푸드코트, 지하 1층∼지상 2층 준보석 패션잡화 액세서리점,3층∼4층 캐릭터 상품 등이 들어선다.5∼7층에는 명품브랜드 매장,8∼9층 뷰티존, 맨 위 10층∼11층은 영화, 게임존으로 꾸며진다. 맞은 편에 위치한 명동 밀리오레와 더불어 명동중앙길 상권을 강화시킬 재목이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구슬아 구슬아 TV를 보여다오

    7월에 선보이는 국내 창작 TV 애니메이션 가운데 마지막 주자인 ‘천하통일 파이어비드맨’이 27일부터 시작됐다. 매주 수요일 오후 6시10분 KBS 2TV를 통해 후덥지근한 안방에 시원한 구슬 바람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10개월 동안 남자 어린이들에게 만화, 완구, 캐릭터, 게임 등 다방면에서 ‘구슬 신드롬’을 일으켰던 ‘구슬대전 배틀비드맨’의 후속편이다.‘구슬대전…’ 52부,‘천하통일…’ 51부 등 103부로 이루어진 대작 시리즈. 공동제작사인 ㈜손오공과 일본 디라이쓰사는 팽이 돌풍을 일으켰던 ‘탑블레이드’ 시리즈를 만들었던 회사. 그동안 침체된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도 불구, 철저한 기획과 프로모션으로 수익 모델의 전형을 만들고 있다. ‘구슬대전…’에서는 구슬전사로 자라나며 악의 세력과 맞서는 시골 소년 강토의 성장기가 그려졌고,‘천하통일…’에서는 필살구 ‘스트라이크샷’을 차지하기 위한 강토, 스카이, 그레이, 염주, 산초 등 구슬전사들의 경쟁이 펼쳐진다. 비더월드 정복을 꿈꾸는 사악한 무리들과의 대결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월드이슈-선진국 논술교육현장] 佛대입논술 바칼로레아

    [월드이슈-선진국 논술교육현장] 佛대입논술 바칼로레아

    국내 대학들이 오는 2008년학년도 입시부터 통합형 논술시험을 실시하겠다고 밝히면서 통합 교과형 논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단일 주제가 주어지는 기존의 논술과 달리 통합교과형 논술은 여러 분야의 탄탄한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 입시생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논술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키고 있는 프랑스와 미국의 논술 교육 현장을 둘러본다. |파리 함혜리특파원|논술의 본고장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에서는 논술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프랑스의 논술 교육은 따로 없고 전 교과과정을 통해 연령에 맞게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모든 교육은 입시가 목적이 아니라 민주사회의 시민을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이 독서다. ●교육은 지적인 훈련의 연속 “언어는 의사소통에만 사용되는가?”,“정치행위는 역사인식에 의해 인도되는가?”,“예술작품에 대한 감성은 교육되는 것인가?” 지난 6월9일 프랑스 전역에서 35만명의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 응시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철학논술시험 문제의 일부다. 심오한 철학사를 관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역사, 언어, 문학,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확고히 다져진 지식을 갖춰야 답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이며, 난해해 보이는 문제들을 학생들이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의아스럽기까지 하지만 프랑스의 교육 시스템과 내용을 알고 나면 바칼로레아의 철학 시험문제가 학교수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불문학자 파스칼 메르시에(문학박사)는 “프랑스의 교과과정은 지적(知的) 훈련의 연속”이라고 요약한다. 그는 “바칼로레아 철학 논술이나 프랑스어 논술시험은 반복적인 글쓰기 연습과 체계적인 사고력, 독서 경험이 있어야 풀 수 있다.”며 “얼핏 보기에 어렵고 난해해 보이지만 초등학교부터 읽고 요약하고 비판하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받기 때문에 고교생이라면 무난하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수업 40%가 프랑스어 초등학교 5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제를 택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논술교육은 초등학교때의 프랑스어 수업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는 초등학교 전체 수업의 40%를 국어시간으로 배정해 외국어를 가르치듯이 기초부터 하나씩 철저하게 가르친다. 초등학교의 수업은 주당 27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돼 있는데 이 중 국어수업이 10시간이나 될 정도로 프랑스어 교육을 중시한다. 국어 시간에는 읽기, 받아쓰기, 시, 맞춤법, 어휘, 어미 변화, 말과 글을 이용한 표현능력 등을 중점적으로 배운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아폴리네르, 라퐁텐 같은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외우도록 하는데 이는 좋은 문장을 많이 외우고 있어야 격조높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교육적 신념에서다. ●체계적인 독서 지도 중학교 과정의 모든 과목은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고, 쓰기·말하기·표현하기,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 기르기를 전제로 한다. 중학교 과정의 수료자격은 마지막 학년에 실시되는 브레베(Brevet·중학교 졸업자격 국가고사)로 인정되는데 역사, 수학, 프랑스어 등 3과목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프랑스어다. 브레베의 프랑스어 시험은 어휘, 문법, 이해력을 테스트하는 것 이외에 작문 시험이 치러진다. 작문 시험은 주어진 텍스트를 보고 논리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자유롭게 서술하거나, 심사숙고해서 논하기 중 한가지를 택한다.“작가의 관점에서 이야기의 뒷 부분을 전개해 보라.” “음악의 유용성에 대해 논하라.”는 식으로 문제가 주어진다. 자유롭게 서술하기는 논리적인 상황 전개력, 사고력을 동원해야 하고 분석하기 또한 서론·본론·결론의 순서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야 하는 만큼 교사들은 작문 교육과 과정에 맞는 적절한 독서지도를 병행한다. 학교의 독서지도는 중학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교사들은 프랑스어 수업과 관련된 추천도서를 학기마다 지정해 학생들이 읽고, 독서 노트를 제출하도록 한다. 독서 노트는 작가의 특징, 작품 요약,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점,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 본인의 생각 등을 적도록 돼 있다. 중학교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읽기와 요약에 머물던 독서지도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들어가면서 문학 작품을 비교하고, 비평하기로 발전된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학생들은 다음 학기동안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 목록을 받는다. 방학동안에 놀지만 말고 책을 읽어 둬야 수업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다는 메시지다. 프랑스의 고교생들은 1학년(우리의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 학기말에 바칼로레아 프랑스어 시험을 치르는데 학생들은 학교 수업 외에 별도로 과외수업이나 지도를 받지 않고 각 학기의 추천도서를 중심으로 시험준비를 한다. 학생들은 소설, 희곡, 시, 수필, 우화, 전기, 서한문 등 다양한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견해를 논술하고, 작품을 비평하는 훈련을 반복한 뒤 프랑스어 시험을 치른다. ●논술시험을 치를 수 있는 교육적 기반 탄탄 고등학교 졸업반에 들어가면 프랑스어는 없어지고 대신 철학을 배운다. 철학은 일주일에 8시간이 배정된다. 고등학교에서의 철학교육이 이처럼 중시되는 것은 바칼로레아 시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 주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고찰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며,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주적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으로 양성하는 데 기본이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몽테뉴, 파스칼, 루소 등의 에세이를 이미 프랑스어 시간에 공부한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철학을 접하고 교사가 제시한 고전을 읽고 학습 참고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바칼로레아에 대비한다. 프랑스어 과목과 마찬가지로 주요 철학자들의 발췌문을 비판하고 주제별 질문에 따라 논술문을 작성한다. 학생들은 이미 오랫동안 프랑스어 수업을 통해 작품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훈련이 돼 있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시험준비를 한다. 한국대사관의 김일환 교육관은 “프랑스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사고력을 총체적으로 기르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프랑스어든, 철학이든 논술시험을 치르는 기반을 쌓을 수 있다.”며 “이같은 교육방식은 ‘올바르게 생각하고 비판할 줄 아는 능력 양성’이라는 프랑스의 교육이념에서 비롯되며 우리와 크게 차별화되는 점도 바로 이런 점”이라고 말했다. lotus@seoul.co.kr ■ 파리1대학 박혜진양 |파리 함혜리특파원|“프랑스의 교육과정은 단계적으로 잘 짜여져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학교 수업을 꼬박꼬박 잘 마친 학생은 누구든 무난히 바칼로레아 논술시험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프랑스에서 다니면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박혜진(20·파리1대학 역사정치학과 2학년)양은 “논술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면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요약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줄곧 상위권을 유지해 온 혜진양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치르는 프랑스어 논술 시험이나 졸업반에서 치르는 철학시험을 준비하는 데 가장 바탕이 된 것은 역시 ‘독서’라고 강조한다. 독서는 시험준비를 하는데도 필요하지만 개인의 독서습관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문학이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인문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설명이다. 혜진양은 초등학교 때 무조건 따라 외웠던 라퐁텐의 시 ‘까마귀와 여우’를 중학교에서 다시 접하면서 다른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란 걸 알았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고 한다. 그녀는 “한가지 작품을 놓고도 교과 과정별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체계를 갖추게 된다.”고 말했다. 방학 때면 한국에 가서 학원도 다녀보고, 고 1때는 한달동안 서울에 있는 여고에 다닌 경험이 있다는 혜진양에게 한국과 프랑스 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 묻자 “프랑스에서는 논리의 근거를 배운다. 비판적인 사고력을 중시하며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지도 아래 입시준비를 하는 것이 한국과 다른 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학원 선생님들이 ‘이런 문제가 나오면 이렇게 답하라.’는 식으로 방법만 가르칠 뿐 왜 그렇게 답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이 아예 베개를 꺼내놓고 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보는데도 선생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는 9월 저널리즘학교 시험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혜진양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거나, 기자가 돼서 나름대로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lotus@seoul.co.kr
  • 「타이」라곤 생후 두 번 맨 명함없는 햇병아리

    「타이」라곤 생후 두 번 맨 명함없는 햇병아리

    제1회 한국문화대상 연예부문 대상을 탄 조영남(趙英男)씨 별명이「타잔」. 납작한 얼굴에 납작한 코, 짤막한 키에 멋대로 자란 더벅머리, 아무리 귀엽게 봐주려 해도 결코 미남은 아니다. 서울신문사 제정 제1회 한국문화대상의 연예부문 대상 수상자 조영남.「데뷔」1년 6개월이 채 못 되는 그가 권위를 다짐하는, 그리고 부상 45만원의 푸짐한 상금이 달린 대상을 차지하기까지는? 별명「타잔」, 더벅머리 총각 - 본격적 활동은 겨우 여섯 달 「데뷔」한지 1년 반이라고는 하지만 조영남이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한 것은 6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작년 4월 모 방송국의「오늘도 명랑하게」라는 아침「프로」에서 어느 외국가수의「컨트리·송」을 흉내낸 게 최초의 방송무대이고 그로부터 1년 가까이는 8군 무대가 주무대였다. 그리고 지금도 서울대 음대 3년에 재학중인 성악도(聲樂徒). 독집을 십여개씩 가지고 있고「레코드」사, 방송국,「쇼」무대를「서커스」처럼 뛰어다니고 가요상이라면 단골로 차지하는 관록파 가수들에 비하면 조영남은 아직 햇병아리이다.「레코드」가 가수의 명함이라면 조영남은 아직 명함도 없다(현재 그의「레코드」는 3개가 거의 동시에 출반단계에 있지만). 시상식 무대 위에서의 그는 남달리 상기돼 있었다. 7명의 심사위원이 대상후보자 선출을 위해 이례적으로 무대 위에서 투표용지를 함 속에 집어넣을 때까지, 그는 그가 차지한「남자가수상」이란 영예만으로도 충분히 흥분상태였다. 그러나 개표결과는 6대 1이라는 압도적인 수로 그의 이름이 호명됐다. 심사위원회는 당초 3분의 2 이상 득표자가 안나올 경우 2차 투표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그럴 필요도 없이 부상 45만원의 큼직한 상금이 달린 최고의 영예인 대상이 그의 손에 굴러들어간 것이다.「인기보다는 재능을, 관록보다는 장래성」을 주장한 심사위원들이 그에게「몰표」를 던져준 셈이다. 「극장엔 낮잠자러 간다」, 맥주 30병 마신 끝에 이틀 앓아 『처음으로 가수가 됐다는 기분입니다』 시상식 뒤 조영남은 생후 두 번째 매어봤다는「보·타이」를 어루만지며 히죽 웃었다.「넥타이」를 처음 매어본 것이 지난 9월「드라마·센터」에서「조영남 리사이틀」을 가졌을 때.「안매는 게 아니라 못맨다」고 주장한다.『신사복은「리사이틀」때 이모가 사준 검정색 한 벌 뿐이고 목욕은 잘해야 1년에 몇 번, 이발소와는 담을 쌓을 정도이고 영화관엔 낮잠자러 간다』약간 엉뚱한 얘기다. 사실상 그의 차림새나 얘기에서「히피」적인 체취가 없는 것도 아니다. 술은 즐기지 않으나 마신다면 소주를 맥주「컵」으로 마시고 때론 술로 밤샘을 한단다. 『새벽 3시까지 한 30병 마시고 나서 이틀을 앓아 누웠습니다.「컨디션」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도 그는「무대화장」이란 걸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더 우스꽝스럽게 보이려는 듯(?) 그「퍼니·페이스」를 마음껏 찌푸린다. 노래는『애써 배우는게 아니고 저절로 배우게 된다』집에는 TV, 전축은 물론 가수의 필수품격인 녹음기,「라디오」하나 없단다. 다방이든 극장이든 흘러 들어오는 노래가 곧 교과서이고『한번 들으면 대개는 외게 된다』는 것. 따라서 다른 가수들처럼「레슨」이니 연습이니 하는 과정을 밟지 않았다고 자랑한다. 「연애사건」으로 H대 중퇴, 지금은 서울음대 3년 재학중 조영남의 이 천재적(?) 재능은 이미 고2(강문고)때부터 실증됐다. 한양대 주최 전국 고교「콩쿠르」에서 수석을 차지한 그는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해외유학」까지 보장되는 조건의 장학생으로 한양대 음대에 들어갔다. 2학년에서 중퇴한 그는 다음해에 현재의 서울음대에 다시 1학년으로 입학했다. 한양대를 퇴학한 이유는「연애사건」때문이란 것.『퍽 심각한 연애였다』면서 상대방 여학생이 자퇴하자 자신도『더 다닐 마음이 안생겨 중퇴해 버렸다』는 얘기다. 당시 19세였던 그가 어느 정도의「심각한 연애사건」을 벌였는지에 관해서는 애써 입을 다문다. 또 한 곳 그에게 장학금을 대준 곳은 그가 고등학생 때 성가대로 있던 D교회. 한 달에 2천원씩 학비보조를 해줬는데…. 『너무 조건을 내세우고 치사하게 굴어서』1년 만에 교회를 뛰어나왔다. 협조를 이유로 자유를 구속하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란 주장. 그의「비틀즈」에 대한 견해는『자유분방해서 좋고』「히피」쪽에 대한 견해는『개성이 있고 사회에 생명감을 넣어주는 것 같아서』할 수 있으면 자신도『「히피」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다』한다. 홀어머니 김씨(54) 슬하 7남매의 넷째, 가정형편은 퍽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게 산다. 8군 무대에 선 것은 대학 2학년 때, 장학금을 차버린 뒤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승한 재능이 이때부터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세미·클래식」에서부터「컨트리·웨스턴」「포크·송」「칸소네」유행「팝·송」등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가창과 특이한 무대「매너」는 날과 함께 그의 주가를 높였고 파격적인「개런티」상승이 뒤따랐다. 이런 현상은 그의 TV무대 진출에서도 곧 재현되었다. 그가 부른『딜라일러』는 지금 선풍처럼 가요계를 휩쓸고 TV극『목격자』의 주제가『이 생명 다하여』정훈희(鄭薰姬)의 「히트·송」인『안개』도「스타일」이 바뀐 채 못지않게「히트」하고 있다.『딜라일러』는 영국가수「톰·존스」가 금년 초에 불러 英·美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세계적인 가수로 군림케 된「컨트리·뮤직」이다. 조영남의 등장은 바로 이「딜라일러」의 한국상륙과 때를 같이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 있다. 그를 둘러싼 작곡가,「레코드」사들이 거의 동시에 세 곳에서 나타나 취입쟁탈전을 벌였고 조군은 번역곡을 3개의「디스크」에 취입, 곧 출반될 단계이다. 음대에서 기초교육을 착실히 쌓은 그가 몇 개의 대중가요에서 가능성을 보이자 가요계의 기대는 거의 절대성을 띠고 있다. 이봉조(李鳳祚), 홍현걸(洪鉉杰), 손석우(孫夕友), 서영은(徐永恩) 등 많은 작곡가들이 저마다 자작곡의 취입을 위해 집중공격을 펴고 있고 몇 개의「레코드」사들이 그를 끌어들이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에게 한국문화대상의 연예대상을 주는데 서슴지 않은 심사위원들은『종래 가수들의 창법에서 완전히 탈피한 가수』『풍부한 기초실력, 풍부한 성량, 놀라운 소화력』을 내세우며 극찬을 펴고 있다. [ 선데이서울 68년 12/1 제1권 제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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