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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노후를 위하여] ⑤ 창업의 날개를 펴라

    [아름다운 노후를 위하여] ⑤ 창업의 날개를 펴라

    자식들 다 떠나 보내고 직장도 없이 집에 앉아서 화투패만 갖고 하루를 보낼 것인가,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낼 것인가. 퇴직하고 일 안 해서 편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잠깐 편할지 몰라도 금세 당신은 몸을 배배꼬면서 온 방안을 뒹굴지도 모른다. 근로의 의무는 헌법으로도 정해져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일을 통해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아야 행복하다. 인생의 새로운 2막을 열어줄 노후 창업,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인건비 걱정 없는 독서실·고시원 노후 창업의 성공은 수익창출보다는 안정적이고 행복한 노후 생활에 있다. 퇴직자가 할 수 있는 창업으로 독서실·고시원 창업이 있다. 독서실·고시원 운영은 노후세대에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우선 경험이 필요하지 않아 좋다.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 없다. 인건비도 저렴하다. 독서실 책상과 고시원 방은 학생, 수험생들이 사용하는 개인 공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정리를 잘 한다. 사실 본인이 건강하면 인건비는 거의 안 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 학생들이라면 마냥 자식 같아서 좋다. 자식처럼 돌봐주고 챙겨주면서 어른으로서 도리를 다하며 가족같이 지낼 수 있어 외로움을 달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높기 때문에 독서실, 고시원에 대한 수요는 꾸준하다. 그래서 한 번에 큰 돈을 벌기는 쉽지 않지만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자금 여유 있으면 안락한 카페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싶은 여성이라면 카페가 좋다. 물론 자금 여유가 있고 그 여유를 즐기고 싶은 남성도 해볼 만하다. 카페 창업을 하려면 일단 유행에 민감해야 하고 센스가 넘쳐야 한다. 젊은층의 구미에 맞는 카페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커피에 대한 지식은 필수, ‘카라멜 마키아또’를 시켰는데 다방커피를 내놓을 순 없는 노릇이다. 또 분위기 있는 음악의 선곡력도 중요하다.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전통가요를 틀 수는 없다. 하지만 하루에 수백명이 찾는 명동 한복판의 카페가 아니라면 카페 창업을 하면서 돈 벌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카페 창업은 “돈은 적게 벌어도 좋으니 일자리를 찾고 내 노후를 즐기겠다.”는 사람이어야만 가능하다. ●펜션으로 창업·전원생활 한꺼번에 양평·강화·안면도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국적인 펜션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여행객이면 누구나 그런 펜션에서 한번쯤 살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 꿈을 현실화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 노후에 펜션을 짓고 살면 된다. 부동산 투자 측면에서 전원주택은 도시 근교에 소박하게 짓는 게 되팔기에 좋아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창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펜션은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지어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 수 있다. 도시 근교가 아니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계절별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사찰이나 명승지 근처에 전망까지 좋으면 금상첨화다. 단,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펜션 창업은 노후 자금이 많아 펜션을 짓고도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경우에만 추천한다. 그리고 펜션 창업은 귀농과 다름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컨설팅·출판 대행·번역… ‘전공’ 살려라 젊었을 때의 경험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면 노후 창업 아이템을 찾는 데 고민할 게 전혀 없다. 이른바 ‘오피스형 창업’이다. 특히 관공서 공무원이라면 컨설팅 사업으로 자신의 ‘전공’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젊었을 때 ‘건설과’에서 일했다면 ‘건설 컨설팅 사무소’를 개설해 자신이 현직에 있을 때 ‘꿰뚫고’있던 지역 건설정보와 노하우를 컨설팅하기 딱 좋다. 교사 출신이면 교사시절 인맥을 활용해 책 출판하기를 원하는 작가나 교사들을 찾아가 출판사와 연결해 주는 출판 대행업도 권장할 만하다. 젊었을 때 낚시가 취미였고 낚시 분야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면 낚시터 주변에 찌개전문점을 차리는 것도 적성을 살리는 좋은 방법이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외국어 실력이 출중하다면 통·번역 대행업도 소일거리로 그만이다. ●자영업, 건강하면 발로 뛰자 노후에 하는 유통·판매업은 건강한 자만의 특권이다. 본인이 직접 뛴다면 60대라도 40대 정도의 체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판매업은 아무나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창업 아이템 중 하나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자본금이 적게 드는 유기농 농산품 판매나, 꽃배달 등이 있다. 특히 65세 이상이면 지하철 요금이 무료인 점을 이용, 지하철이 닿는 곳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꽃이나 생일 선물을 배달하는 일도 고려해 볼 만한 창업 아이템이다. 음식점은 노후세대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하는 아이템 중 하나이다. 그만큼 식상하다는 의미. 음식점이라면 주로 일반적인 돼지갈비 전문점을 떠올리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턱대고 시작했다간 파리만 날리게 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음식점 창업으로 성공하려면 새로운 먹거리 아이템을 개발하는 데 흥미를 갖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놓는 게 중요하다. 연합창업지원센터 최재희 소장은 “노후 창업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60대까지가 한계이고 70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면서 “노후세대 창업은 50대부터 발빠르게 시작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적성에 맞아야 일도 장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노년창업 이것만은 주의하자 현금 회수 빠른 업종 선택… 동업 땐 수익금 배분 명확히 노인세대의 창업은 장·단점이 있다. 경험이 풍부하고 젊은 세대에 비해 노련하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다. 폭넓은 인간관계도 장점으로 부각된다. 반면 체력적 한계와 디지털문화에 익숙지 않은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노인세대가 창업을 할 때는 이 같은 장·단점을 고려한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전문가들은 창업을 하더라도 동년배와 동업하는 것은 가급적 피할 것을 권한다. 동업자가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사업을 포기하고 투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민진암 민간지원팀장은 “동업자와 평소 친분이 깊더라도 사소한 일 때문에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 있다.”면서 “부득이하게 동업을 하게 되면 사전에 수익금 배분 비율을 명확히 하고 책임소재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창업을 하더라도 과거 경력과 관계가 있거나 평소 관심이 많았던 분야를 선택하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단지 수익성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창업을 하기 전에는 치밀한 시장조사를 먼저 해야 하고, 꼭 관련 분야 전문가와 상담을 해야 한다. 노인세대 대부분이 노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창업하는 만큼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사업보다는 현금 회수가 빠른 업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브랜드 가치가 높은 가맹점을 창업하면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창업을 하더라도 이른바 ‘올인’하는 전략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초생활비를 최대한 확보하고 여유자금으로 창업하는 게 위험요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변화에 적응하는 연습을 하고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 노인세대들은 수십년간 한두 가지 업무만 오랫동안 수행했기 때문에, 갑자기 창업을 하면 혼란을 겪기 쉽다.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 등이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에 적응할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겉모양만 그럴듯한 창업을 했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유니폼을 입고 영업을 하면 수익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깔끔한 유니폼이 노인세대의 경륜과 조화를 이뤄, 소비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행복한 창업 사례 결혼상담사 된 교사… 동료 자녀·제자 ‘사랑 메신저’로 충북 청주시에 사는 정재훈(63)씨는 33년간의 교사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정년 퇴임을 했다. 정씨는 교사로 있으면서 퇴임후 무엇을 하고 살까 고민 끝에 ‘결혼상담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정년 퇴임 직전 결혼상담사 자격증을 딴 그는 퇴직과 동시에 결혼상담소를 차리는 데 전념했다. 정씨는 교사 생활 동안 만났던 교사들의 자녀와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을 공략했다. 그는 자신의 ‘인맥그물’에 걸리는 모든 지인들을 통해 결혼적령기 남녀의 신상정보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친분이 두터운 지인들에게는 ‘특별히’ 신경 써 준다며 ‘괜찮은 스펙’의 상대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아직 커플 성공률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정씨지만 “퇴임 후 ‘사랑의 메신저’로 지인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고 서로 인연을 맺어주며 살 수 있어 행복하다.”며 만족해했다.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에 사는 김정택(58)씨는 모 기업의 영업팀에서 근무하다 5년 전 실직했다. 김씨는 실직 후 4년 동안은 퇴직할 때 받은 돈으로 겨우 연명할 수 있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구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녀 둘을 대학에 보낸 상황이라 학비 지원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부인이 식당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보탰으나 가족을 부양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구직을 해도 번번이 퇴짜만 맞았던 김씨는 창업을 하기로 결심, 주변 지인들에게 자문하고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꽃집을 차렸다. 하지만 장사는 처음부터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전략적으로 꽃을 사러 오는 모든 손님에게 장미꽃 한송이씩을 선물하고 ‘꽃 정찰제’를 실시했다. 그때부터 김씨 가게를 찾는 손님은 두 배가 됐다. 김씨는 “꽃은 제 인생의 길을 열어줬다.”면서 “꽃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행복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맨손으로 두방이면 잡는 황소를 정보부 협박에…”

    “맨손으로 두방이면 잡는 황소를 정보부 협박에…”

    “전부 그렇게 먼저 보내고 난 후에는…프로레슬링이 지금 인기가 없으니까 큰 죄를 지은 거 같아.참 팬들에게 사랑받았는데….이렇게 모래성같이 싹~ (인기가 사라지니) 내 자신이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지.어디 누구한테 가서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왕년의 프로레슬러 천규덕(77)씨가 과거를 회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천씨는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로 혼자 남아있는 현실에 다시 한 번 회한의 감정을 내뱉었다.  그에게 한국 프로레슬링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얘기를 듣기 위해 최근 ‘프로레스링 동우회’를 찾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건물 5층에 마련된 동우회 사무실.좁은 계단을 오른 뒤 헬스클럽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넓지않은 공간에는 사무를 보는 직원도 번듯한 간판도 없었다.낡은 건물의 한 귀퉁이 옥탑방,한국 프로레슬링의 현 주소를 보는 듯 했다.  한때 전국민을 들썩이게 만들며 링 위를 호령했던 챔피언에게 현재 주어진 자리는 사각의 링이 아닌 쿠션이 푹 꺼진 낡은 소파였다.천씨는 이 곳에서 한국 프로레슬링의 영광과 좌절에 대해 얘기했다.  ●일본 방송 보고 기술 배우던 초창기  그는 부산에서 군생활을 하던 중 전파사 TV로 전설적인 레슬러 고 역도산(본명 김신락 1963년 사망) 선수의 시합을 보고선 프로레슬링에 입문(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했다.  “1949년도에 육군항공대(현재 공군)에 입대를 한 뒤 부산에 있는 부대로 발령을 받았지.근데 그때만해도 부산 해안가에서는 일본 방송이 잡혔어요.어느날 전파사 TV에 역도산씨가 나오는 거야 그 분이.스타일 보니까 손으로 막 치고 있더라구.나도 이건데(손) 한 번 해보자 해서 다음날 같은 체육관에 있던 고 장영철 선수(2006년 사망)한테 가서 말하면서 시작했어요.우연하게 시작한 거지.”  천씨가 털어놓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초창기는 주먹구구식이었다.  “시합을 하려면 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는 밑에 매트를 깔고 나무로 된 기둥을 세운 다음에 링을 만들었지.뭐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TV보고 ‘이렇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했죠.기술도 TV보고 배우고….덩치 큰 사람들이 로프 위에 탁~걸치면 기둥이 무너졌어요.그때는 다 그렇게 했어요.” ●찬란했던 전성기  부산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천씨는 장영철과 함께 1963년쯤 서울로 진출해 흥행을 거듭하게 된다.그가 회상하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는 너무도 화려했다.지금의 쇠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굉~장했어요.인기가 하늘을 찔렀지.배고프고 밤이면 할 게 없었어.놀거리도 없었지.근데 우리가 이걸 하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느냐 말야.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일본 사람들 불러다가 때려눕히니 얼마나 통쾌했겠느냐 이거야.장충체육관에 한 7000~8000명이 들어가는데 그 바깥에 사람들이 더 많았어.표를 못 구해가지고 암표가 막 3~4배씩 뛰고,그래도 표 못 구하면 다방이나 그런데로 몰려가고…TV가 나온(널리 보급된) 뒤에 레슬링하는 날이면 거리에 택시가 없었어요.다 그거 구경한다고 집으로 들어가버려서….”  1965년 중반 일본에서 활동하던 고 김일 선수(2006년 사망)가 귀국해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한층 높이게 된다.그의 박치기 한 방에 일본 선수들이 고꾸라지는 모습에 국민들은 희열을 느꼈다.김일은 전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국민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하지만 천씨 등 ‘국내파’는 김일의 등장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우리가 틀을 잡아놓고 나니까 오오키 긴타로(김일의 일본식 이름)라고 들어오니 당황스러운 거죠….일본 이름으로 활동했으니까 한국 사람인 줄도 몰랐고.기분이 안 좋을 수 밖에 없었던 거죠.그래도 내 마 딱 그 사람이 그래도 외국에서 시합 많이 해 봐서 경험은 많을 거 아니냐고 해서 같이 시합을 하게 된 거야.일주일에 하루 이틀 쉬고 계속 시합이 잡혔지.정부가 국제 경기를 한 달에 한 번씩 하라고 하고.”  김일 장영철 천규덕 등의 활약에 한국 프로레슬링은 승승장구한다.  ●‘프로레슬링은 쇼’ 사건  “그러다가 레슬링이 쇼다 그 사건이 터져서…참 인기가 그게…한 번 떨어지니까 좀처럼 되살리기 힘들대요.갈수록 사람이 줄고 (팬들로) 꽉 찼던 장충체육관이…”  1965년 11월 27에 터진 ‘장영철 파문’을 얘기하는 천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일본 오쿠마 선수가 장 선수한테 새우꺾기(허리를 꺾는 기술)를 했어.원래 로프를 잡으면 놔주는데…움직일 수 없으니까(로프까지 못 가니까) 옆에 있던 한국 선수들한테 올라오라고 (장선수가) 손짓을 해서 집단 폭행을 했다는 거지.홧김에....그것 때문에 선수들이 연행돼서 경찰서로 갔죠.거기서 기자들이 ‘이기 레슬링 짜고 하는 거 아이가.’라고 묻는데 장 선수가 대답을 못 한 거야.취조받고 그러니까 겁도 나고 해서.그러다 보니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레슬링이 쇼’라고…난 그때 전주에 시합하러 내려가 있었는데.”  당시 신문 등 관련자료들에는 이 사건에 대해 “장영철이 경찰서에서 ‘프로레슬링에선 사전에 경기 과정과 우승자를 논의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프로레슬링의 규칙 등을 검사가 잘못 이해하고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식으로 발표했다.” 등으로 기록돼있다.  천씨가 기억하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하지만 이 부분은 다른 자료들과 좀 배치되는 면이 있다.당시 신문기사 등에 따르면 1974년에도 국내에서 김일 선수가 안토니오 이노키와 대결을 벌이는 등 흥행이 잘 됐다고 알려졌다.이후 김일과 장영철 천규덕의 불화가 깊어지고 후진양성이 되지 않는 등 악재가 겹쳐 1970년대 중후반 프로레슬링이 침체된다고 전해진다.)  ●잿빛 추억 그리고 하늘색 꿈  “사람이 안 들어오더라구.100명이 줄고 그 다음날이면 100명이 더 줄고….내가 그래서 김일-장영철-나 3자 시합도 주선해보고,미국도 유학갔다 오고 그랬는데도 결국 안 되더라구.한달에 한번 시합하다가 두달에 한번,6개월에 한번….시골로 다니면서 무슨 서커스단도 아니고…이제 나도 나이도 먹고 그냥 주저앉았는데 그러다 김일씨도 혼자서 해보니 안되잖아요.그 때 세 사람이 한 몸이 돼서 화합하고 그랬어야 하는데,그래서 레슬링이 이지경이 된 거죠.”  1985년 링을 떠난 천씨는 선수시절부터 몸을 담았던 영진약품 무역부에서 1989년까지 근무한다.그후 군 동기생의 회사에서 6년간 일을 한다.1998년에는 프로레슬링에 대한 열정으로 원로 선수들과 함께 프로레슬링 동우회를 결성한다.  또 2008년에는 동국대 사회체육대학원 스포츠엔터테인먼트과에서 프로레슬링의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하지만 학생 수가 적어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강의를 그만두게 된다.현재 국내에서 열리는 프로레슬링 대회는 1년에 다섯번도 채 되지 않는다.선수층도 얇고 무엇보다 ‘젊은 스타’가 수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천씨는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까지 프로레슬링 인기 부활의 불씨를 당길 꿈을 놓지 않고 있다.다른 단체들과 손을 잡고 큰 시합을 열 계획을 구상중이라고 했다.  “옛날엔 죽이라 살리라 때리라 이랬는데 이제는 손뼉치고 웃고 즐기는 시대가 됐어.우리 프로레슬링도 그렇게 가야지.팬들은 쇼라는 걸 다 알고 있다 이거야.즐겁게만 해달라는 거지.이게 팬들의 요구사항일 거예요.”  그는 여든이 다된 지금에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아침 저녁으로 앉았다 일어나기,아령들기 등으로 5시간씩 단련하고 있다고 했다.언젠가 인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날까지 자신과 프로레슬링을 지탱하기 위해. 글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사진 동영상 인터넷서울신문 김상인vj bowwow@seoul.co.kr  
  • “맨손으로 두방이면 잡는 황소를 정보부 협박에…”

    “전부 그렇게 먼저 보내고 난 후에는…프로레슬링이 지금 인기가 없으니까 큰 죄를 지은 거 같아.참 팬들에게 사랑받았는데….이렇게 모래성같이 싹~ (인기가 사라지니) 내 자신이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지.어디 누구한테 가서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왕년의 프로레슬러 천규덕(77)씨가 과거를 회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천씨는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로 혼자 남아있는 현실에 다시 한 번 회한의 감정을 내뱉었다. 그에게 한국 프로레슬링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얘기를 듣기 위해 최근 ‘프로레스링 동우회’를 찾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건물 5층에 마련된 동우회 사무실.좁은 계단을 오른 뒤 헬스클럽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넓지않은 공간에는 사무를 보는 직원도 번듯한 간판도 없었다.낡은 건물의 한 귀퉁이 옥탑방,한국 프로레슬링의 현 주소를 보는 듯 했다. 한때 전국민을 들썩이게 만들며 링 위를 호령했던 챔피언에게 현재 주어진 자리는 사각의 링이 아닌 쿠션이 푹 꺼진 낡은 소파였다.천씨는 이 곳에서 한국 프로레슬링의 영광과 좌절에 대해 얘기했다. ●일본 방송 보고 기술 배우던 초창기 그는 부산에서 군생활을 하던 중 전파사 TV로 전설적인 레슬러 고 역도산(본명 김신락 1963년 사망) 선수의 시합을 보고선 프로레슬링에 입문(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했다. “1949년도에 육군항공대(현재 공군)에 입대를 한 뒤 부산에 있는 부대로 발령을 받았지.근데 그때만해도 부산 해안가에서는 일본 방송이 잡혔어요.어느날 전파사 TV에 역도산씨가 나오는 거야 그 분이.스타일 보니까 손으로 막 치고 있더라구.나도 이건데(손) 한 번 해보자 해서 다음날 같은 체육관에 있던 고 장영철 선수(2006년 사망)한테 가서 말하면서 시작했어요.우연하게 시작한 거지.” 천씨가 털어놓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초창기는 주먹구구식이었다. “시합을 하려면 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는 밑에 매트를 깔고 나무로 된 기둥을 세운 다음에 링을 만들었지.뭐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TV보고 ‘이렇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했죠.기술도 TV보고 배우고….덩치 큰 사람들이 로프 위에 탁~걸치면 기둥이 무너졌어요.그때는 다 그렇게 했어요.” ●찬란했던 전성기  부산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천씨는 장영철과 함께 1963년쯤 서울로 진출해 흥행을 거듭하게 된다.그가 회상하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는 너무도 화려했다.지금의 쇠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굉~장했어요.인기가 하늘을 찔렀지.배고프고 밤이면 할 게 없었어.놀거리도 없었지.근데 우리가 이걸 하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느냐 말야.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일본 사람들 불러다가 때려눕히니 얼마나 통쾌했겠느냐 이거야.장충체육관에 한 7000~8000명이 들어가는데 그 바깥에 사람들이 더 많았어.표를 못 구해가지고 암표가 막 3~4배씩 뛰고,그래도 표 못 구하면 다방이나 그런데로 몰려가고…TV가 나온(널리 보급된) 뒤에 레슬링하는 날이면 거리에 택시가 없었어요.다 그거 구경한다고 집으로 들어가버려서….” 1965년 중반 일본에서 활동하던 고 김일 선수(2006년 사망)가 귀국해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한층 높이게 된다.그의 박치기 한 방에 일본 선수들이 고꾸라지는 모습에 국민들은 희열을 느꼈다.김일은 전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국민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하지만 천씨 등 ‘국내파’는 김일의 등장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우리가 틀을 잡아놓고 나니까 오오키 긴타로(김일의 일본식 이름)라고 들어오니 당황스러운 거죠….일본 이름으로 활동했으니까 한국 사람인 줄도 몰랐고.기분이 안 좋을 수 밖에 없었던 거죠.그래도 내 마 딱 그 사람이 그래도 외국에서 시합 많이 해 봐서 경험은 많을 거 아니냐고 해서 같이 시합을 하게 된 거야.일주일에 하루 이틀 쉬고 계속 시합이 잡혔지.정부가 국제 경기를 한 달에 한 번씩 하라고 하고.” 김일 장영철 천규덕 등의 활약에 한국 프로레슬링은 승승장구한다. ●‘프로레슬링은 쇼’ 사건 “그러다가 레슬링이 쇼다 그 사건이 터져서…참 인기가 그게…한 번 떨어지니까 좀처럼 되살리기 힘들대요.갈수록 사람이 줄고 (팬들로) 꽉 찼던 장충체육관이…” 1965년 11월 27에 터진 ‘장영철 파문’을 얘기하는 천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일본 오쿠마 선수가 장 선수한테 새우꺾기(허리를 꺾는 기술)를 했어.원래 로프를 잡으면 놔주는데…움직일 수 없으니까(로프까지 못 가니까) 옆에 있던 한국 선수들한테 올라오라고 (장선수가) 손짓을 해서 집단 폭행을 했다는 거지.홧김에....그것 때문에 선수들이 연행돼서 경찰서로 갔죠.거기서 기자들이 ‘이기 레슬링 짜고 하는 거 아이가.’라고 묻는데 장 선수가 대답을 못 한 거야.취조받고 그러니까 겁도 나고 해서.그러다 보니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레슬링이 쇼’라고…난 그때 전주에 시합하러 내려가 있었는데.” 당시 신문 등 관련자료들에는 이 사건에 대해 “장영철이 경찰서에서 ‘프로레슬링에선 사전에 경기 과정과 우승자를 논의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프로레슬링의 규칙 등을 검사가 잘못 이해하고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식으로 발표했다.” 등으로 기록돼있다. 천씨가 기억하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하지만 이 부분은 다른 자료들과 좀 배치되는 면이 있다.당시 신문기사 등에 따르면 1974년에도 국내에서 김일 선수가 안토니오 이노키와 대결을 벌이는 등 흥행이 잘 됐다고 알려졌다.이후 김일과 장영철 천규덕의 불화가 깊어지고 후진양성이 되지 않는 등 악재가 겹쳐 1970년대 중후반 프로레슬링이 침체된다고 전해진다.) ●잿빛 추억 그리고 하늘색 꿈 “사람이 안 들어오더라구.100명이 줄고 그 다음날이면 100명이 더 줄고….내가 그래서 김일-장영철-나 3자 시합도 주선해보고,미국도 유학갔다 오고 그랬는데도 결국 안 되더라구.한달에 한번 시합하다가 두달에 한번,6개월에 한번….시골로 다니면서 무슨 서커스단도 아니고…이제 나도 나이도 먹고 그냥 주저앉았는데 그러다 김일씨도 혼자서 해보니 안되잖아요.그 때 세 사람이 한 몸이 돼서 화합하고 그랬어야 하는데,그래서 레슬링이 이지경이 된 거죠.” 1985년 링을 떠난 천씨는 선수시절부터 몸을 담았던 영진약품 무역부에서 1989년까지 근무한다.그후 군 동기생의 회사에서 6년간 일을 한다.1998년에는 프로레슬링에 대한 열정으로 원로 선수들과 함께 프로레슬링 동우회를 결성한다. 또 2008년에는 동국대 사회체육대학원 스포츠엔터테인먼트과에서 프로레슬링의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하지만 학생 수가 적어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강의를 그만두게 된다.현재 국내에서 열리는 프로레슬링 대회는 1년에 다섯번도 채 되지 않는다.선수층도 얇고 무엇보다 ‘젊은 스타’가 수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천씨는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까지 프로레슬링 인기 부활의 불씨를 당길 꿈을 놓지 않고 있다.다른 단체들과 손을 잡고 큰 시합을 열 계획을 구상중이라고 했다. “옛날엔 죽이라 살리라 때리라 이랬는데 이제는 손뼉치고 웃고 즐기는 시대가 됐어.우리 프로레슬링도 그렇게 가야지.팬들은 쇼라는 걸 다 알고 있다 이거야.즐겁게만 해달라는 거지.이게 팬들의 요구사항일 거예요.” 그는 여든이 넘은 지금에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아침 저녁으로 앉았다 일어나기,아령들기 등으로 5시간씩 단련하고 있다고 했다.언젠가 인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날까지 자신과 프로레슬링을 지탱하기 위해. 글 /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사진 ·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인상 좋다는 말에 녹아 3천5백원 문 아가씨

    1일 남대구(南大邱)경찰서는 김창식(24)이란 청년을 즉심에 회부. 김은 6월26일 밤 10시쯤 대구시 D다방에서 삼삼하게 예쁜 한(韓)모양(21)이 혼자 앉아 있자『인상이 굉장히 좋다』며 접근. 기분이 좋아진 한양은 김과 어울려 근처 중국집에 가서 얼씨구나 때려먹고 즐긴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김이 화장실 가는 체하고 줄행랑. 이바람에 돈이 없었던 한양은 음식값 3천5백원어치로 시계와 옷을 벗어주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 울화통이 치민 한양은 대구 시내를 돌아다니며 김을 찾다가 30일 하오2시40분께 M다방에서 우연히 김을 발견, 경찰에 넘겼다는 것. -뺨 맞고 국 쏟고…. <대구> [선데이서울 72년 7월 16호 제5권 29호 통권 제 197호]
  • 하루 2곳에 나타난 3인조 여자 네다바이

    F=지난 3일 하루 동안에 가정주부를 상대로 한「네다바이」사건이 2건 발생했는데 그 수법이 기막히더군. 첫 사건은 하오 2시 30분쯤 동대문구 면목동 여관에서 일어났어. 피해자인 박(朴)여인(22·면목동 379)이 국민은행 면목지점에 3만원을 예금하려고 가는데 은행 앞에서 30대여인 한사람이 다가와『이 근처에 기가막히게 용한 점장이가 있다는데 아느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대답하는데 또 한 사람의 30대 여인이 옆을 지나다가 자기가 잘 아는데 정말 귀신같이 용하다면서 안내를 자청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박여인도 호기심이 생겨 같이 따라간 곳이 D여관인데 역시 30대의 여인 한사람이 여관방에 앉았다가 박여인을 보고는 대뜸 『당신 남편이 사람은 그럴 수 없이 좋은데 이달에 액운이 끼었군. 불공을 드려야겠어』라고 겁을 주더라지 뭐야. 잔뜩 겁을 먹은 박여인은 갖고 있던 돈 3만원과 금반지 금목걸이 등을 상위에 올려놓고 잠깐 밖에 나가 초와 향을 사 갖고 돌아와 보니 여인 3명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더라는 거야. 하오 6시쯤 성북구 석관동에서 일어난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는 어린애를 업고 시장에 다녀오던 강(姜)여인(25·성북구 석관동)이었는데 30대의 한 여인이 다가와 약병을 보이며『XX한의원이 어디냐』고 끼어들더라는 거야. 그리고는 약병의 약이 아주 비싼 서독제약인데 XX한의원에서 주문해서 갖고 가는 중이라고 말을 주고 받고 하더니만 자칭 며느리가 금반지 목걸이 등을 풀어 주며 자기가 그 약을 사갖고 시아버지에게 갖다 주겠다고 하더라지 않아.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약값이 부족하다면서 강여인에게 돈을 빌려주면 곧 약국에 가서 비싼 이자를 붙여주겠다면서 목걸이 팔뚝시계 현금 2천원을 빌어 갖고 함께 가다 어떤 다방 앞에서 잠시 들어가 누굴 만나 보고 나오겠다고 들어가 뒷문으로 뺑소니쳐 버렸다는 거였어. <서울신문 사회부> [선데이서울 72년 7월 16호 제5권 29호 통권 제 197호]
  • 에이트, 첫 콘서트 대성황 “‘심장이 없어’ 있었기에”

    에이트, 첫 콘서트 대성황 “‘심장이 없어’ 있었기에”

    ’심장이 없어’를 히트 시킨 3인조 혼성그룹 에이트(8eight·이현, 백찬, 주희)가 데뷔 후 2년 만에 ‘첫 콘서트 개최’의 꿈을 이뤘다. 공연 직전 대기실에서 만난 멤버들은 “너무 긴장된다. ‘심장이 없어’가 있었기에 가능한 자리”라며 첫 콘서트 무대를 앞둔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25일 오후 7시 30분 에이트가 서울 청담동 클럽 ‘앤써’(Answer)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미니콘서트를 열었다. 촉촉한 날씨에도 불구, 약 1시간 전부터 청담동 일대를 휘감은 백미터 남짓의 우산 행렬은 팬들의 굳건한 음악적 믿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이트 역시 그들의 신뢰를 져버리지 않았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듀엣 및 개별 무대와 세 명의 하모니가 녹아든 다채로운 무대 구성은 클럽 안을 가득 메운 600여명의 관중들을 열광케 하기 충분했다. 팬들의 가슴 속에 ‘가장 뜨거웠던 비오는 날(Hot Rainy Day)’을 선사한 에이트의 콘서트 현장을 공개한다. # 뮤지션으로 돌아온 에이트 기타를 품에 안은 이현, 키보드를 치는 주희, 랩퍼와 보컬을 오가는 멀티플레이어 백찬까지. 에이트는 첫 곡 ‘심장이 없어’ 언플러그드 버젼으로 첫 콘서트 무대를 열었다. 인기작곡가 방시혁이 이끄는 뮤지션 다운 무대 구성이었다.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은 음악을 다방면으로 소화해 온 에이트의 노력을 확인케 했다. 경쾌한 비트의 힙합곡 ‘사랑을 잃고 난 노래하네’로 분위기를 전환한 에이트는 “오~오오오”란 후렴구가 인상적인 ‘렛미고(Let Me Go)’로 관객들과 호흡을 시작했다. # 궂은 날씨? 기우였네요! 공연장을 한바퀴 둘러 본 에이트는 떨리는 음성으로 감사의 메시지 부터 전했다. 스탠딩 공연임에도 불구, ‘매진’ 기록을 세운 공연장은 수용 가능한 최대 인원이 운집된 모습이었다. 백찬이 떨리는 음성으로 “전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첫인사를 건네자 리더 이현은 “첫 콘서트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줄 줄 몰랐습니다. 비가 내려 걱정이 컸는데 기우였네요!”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현은 “오늘 이 공간을 에이트의 열기로 꽉꽉 채워 보겠습니다.”고 힘찬 각오를 밝히며 본격적인 공연의 막을 올렸다. # 백찬-주희, 듀엣 호흡 과시 지난해 이수영과 ‘무슨 사랑이 그래요’로 에이트 중 첫 솔로 활동을 시작한 백찬은 콘서트 무대에서는 주희와의 하모니를 과시했다. 넓은 음역대에 짙은 보컬색을 갖춘 주희의 매력적인 보이스가 덧입혀진 ‘무슨 사랑이 그래요’는 전작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어 ‘달콤한 나의 도시’로 화음을 이어간 두 사람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통통 튀는 멜로디에 맞춰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 이현의 깜짝 돌발공연 ‘30분 전’ 국내 가수 중 가장 풍부한 성량을 갖춘 가수로 알려진 이현은 당초 휘성의 ‘안되나요’를 마이크 없이 불러내는 이벤트를 준비 했다. 하지만 이현은 “사실 부르고 싶은 노래가 따로 있다.”며 방시혁의 ‘이별 3부작’ 중 완결곡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30분 전’을 무반주 생라이브로 불러냈다. 흉내낼 수 없는 라이브였다. 콘서트장을 정적 속 감동으로 몰고간 이현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팬들이 한 목소리로 “울지마!”라고 외치며 그를 위로하자 이현은 “사고쳤다.”면서 쑥쓰러운 미소를 보였다. # 팬들 및 부모님께 바치는 편지 V.O.S와 스윗 소로우의 게스트 공연 후 무대에 다시 오른 에이트는 오늘의 자리를 있게 해준 소중한 이들을 위한 편지 낭독 시간을 마련했다. 이현과 백찬은 “‘심장이 없어’란 곡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가 있었다.”며 멋진 곡을 선물해준 방시혁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변함없이 응원해 준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특히 주희는 인상적인 멘트로 관중들의 가슴을 먹먹케 했다. “사실 오늘 이 무대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말문을 연 주희는 “바로 가수로 데뷔한 후 처음으로 부모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날이기 때문”이라며 2층 관중석을 바라봤다. ”부모님은 제가 평범한 직장인이 되기를 바라셨다.”고 고백한 주희는 “그런데 부모님을 모시고 이런 무대를 갖게 되니 너무 행복하다. 너무 사랑한다.”고 말해 공연장을 훈훈한 분위기로 물들였다. # 데뷔곡 부르며 전원 눈물바다 팝송 메들리로 분위기를 전환한 에이트는 첫 데뷔곡 ‘사랑할 수 있을까’을 부르며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누지 못했다. 주희와 이현이 먼저 눈물을 보이자 백찬은 “저만 안 울었네요. (우리 멤버들이)아마도 처음 데뷔할 때가 생각났나봐요.”라고 했지만 그 역시 젖은 목소리였다. 노래를 마친 이현은 “부족하지만 힘내왔다.”며 “항상 진심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겠다. 지금까지 받은 사랑이 크지만 여러분의 ‘에이트 최고’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에이트가 되겠다.”는 엔딩 멘트를 전했다. # 앵콜 또 앵콜, 첫 콘서트 대성황 이현은 엔딩곡 ‘심장이 없어’를 소개하면서 “오늘 이 무대를 있게 해준 곡”이라며 강한 애정을 내비쳤다. 공연 중 멤버들은 무대 멀리까지 손을 뻗으며 일일히 팬들과 악수를 나누는 등 순간의 감동을 간직하려 했다. 공연은 끝났지만 팬들의 환호는 줄어들지 않았다. “앵콜”이 터진 관중석, 조금의 미동도 없는 팬들. 돌아온 에이트는 팬들의 뜨거운 성원에 할 말을 잃었다. 에이트는 최근 KBS 2TV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 불러 화제가 됐던 메들리를 선보인 후 무대에서 내려갔지만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함성 소리에 이끌려 두 번째 앵콜 무대에 올랐다. 이윽고 ‘사랑을 잃고 난 노래하네’의 멜로디가 들려오자 클럽 안 관중들은 두 손을 들고 자리에서 뛰며 하나 된 모습을 연출했다. 데뷔 후 2년만에 처음 맛 본 콘서트장의 열기, 좀 더 뚜렷해진 음악을 해야만 하는 이유…. 공연을 마친 에이트는 확실히 성장해 있었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m / 사진 = 강정화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 커피문화 뿌리를 찾아서…

    ‘한국 커피 문화의 뿌리를 찾자.’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또 일터부터 휴식공간까지 우리 생활에서 향긋한 커피냄새가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 명성황후의 죽음으로 놀란 고종황제가 처음 맛을 본 이후로 한국의 커피 역사는 이미 100년이 넘었지만, 그 뿌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경기도 남양주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이 한국 커피 문화의 오랜 뿌리를 찾기 위해 나섰다. 국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커피문화의 흔적을 알리기 위해 ‘커피역사 탐험대’를 꾸리는 한편, 올바른 커피문화 전파를 위해 ‘커피 제대로 알고 마시기’ 특강도 준비했다. 커피역사 탐험대는 ‘커피 정체성’을 찾기 위해 국내에 커피 관련 사적지를 1박2일 코스로 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5월21일 첫 기수가 탐험을 시작해 9월까지 매달 1회 40명씩 답사를 간다. 고종황제 커피로 유명한 경복궁 정관헌부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라는 진해의 흑백다방, 경북 포항 기계면 다방거리 등 코스를 돌아 본다. 탐험 결과물은 오는 10월 열리는 ‘한국커피역사전-개화기에서 근현대까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대원들은 사진이나 그림·조각 등 어떤 형태로든 한국 커피 문화 전파를 위한 결과물을 남겨야 한다. 활동 우수자는 내년 남미지역으로 떠나는 커피역사 탐험대 참가 자격도 주어진다. 한편 커피특강은 커피의 역사 등 커피 이론은 물론 다양한 커피 관련 체험을 해볼 수 있게 꾸몄다. 흔한 핸드드립 제조법 말고도 아랍 등 일부 지역에서 커피를 추출할 때 쓰는 이브리크법 등 다양한 추출법을 체험해 볼 수 있고, 홈 로스팅 방법도 배운다.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직접 맛보고 박물관 전시실과 커피재배 온실도 돌아 본다. 특강은 새달부터 8월까지 매달 셋째주 금요일에 열린다. 커피박물관 임보람 학예사는 “커피로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어 한국적 커피문화를 알리자는 취지로 행사를 기획했다.”면서 “곳곳에 잠들어 있는 한국 커피의 역사를 일깨우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두 행사 모두 참가비는 무료. 특강은 남양주시민을 우선으로 매회 선착순 24명을 모집하며, 탐험대는 지역제한 없이 신청자 중 40명을 선정한다. (031)576-6051.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SMAP’ 초난강 알몸소동으로 체포

    ‘SMAP’ 초난강 알몸소동으로 체포

    일본 국민그룹 ‘SMAP’의 멤버이자 ‘초난강’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쿠사나기 츠요시가 나체로 소동을 피우다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산케이스포츠’를 비롯한 현지 언론은 “쿠사나기 츠요시가 23일 오전 공연음란죄(公然わいせつ) 혐의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공연음란죄는 공공연히 음란한 행위를 하여 성적인 도덕 감정을 해쳐 성립하는 범죄다. 일본서는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30만 엔(한화 약 4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아카사카 경찰서 측에 따르면 쿠사나기는 23일 오전 3시 경 도쿄 아카사카의 미드타운 인근 히노키쵸 공원에서 나체로 소란을 일으켰다. 쿠사나기는 인근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게 주의를 받았지만 “나체인게 뭐가 나쁘냐”며 항의해 공연음란죄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쿠사나기는 현재까지 아카사카 경찰서에 구류된 상태로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쿠사나기가 체포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 쿠사나키는 인기그룹 ‘SMAP’의 멤버로 음반활동은 물론이고 영화, 드라마, CF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얼마 전 영화 ‘발라드 - 이름 없는 사랑노래’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사진=서울신문 DB 문설주기자 spirit0104@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현대미술사를 살짝 비틀다

    현대미술사를 살짝 비틀다

    종이를 확 구겼다, 휙 집어 던졌다, 쓱 집어 들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편다. 평평하게. 그러나 한번 구겨진 종이가 쉽게 펴질 리 없다. 그래서 종이를 내팽겨치던 그 마음, 그것을 다시 주워 담는 마음을 오랫동안 보존이라도 하려는 듯 구겼다 편 종이를 액자에 집어넣었다. 그 액자는 네모 반듯한 사각의 액자가 아니다. 구겨진 종이의 울퉁불퉁한 결에 따라 같이 각이 져 구불구불하다. 액자에 끼여 있는 유리도 내용물이 구겨진 대로 오목하기도 하고 볼록하기도 하다. 이 유리에 조명이 비춰지자 부유물이 떠돌 듯 잔영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조각가 박원주(48)의 ‘펴기’ 시리즈 작업이다. 구겨진 종이를 다시 주워 액자에 모시는 이 행위는 순간 후회나 반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좀 더 창조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박 작가의 생각이다. ●새달 21일까지 펴기 시리즈 등 30여점 전시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박 작가가 5월21일까지 ‘펴기’ 시리즈 등 조각작품 30여점을 전시한다. 김종영미술관이 2004년부터 매년 2명을 선정해 개인전을 지원하는 ‘오늘의 작가’가 된 덕분이다. 이번 전시는 개인전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작업내용뿐만 아니라 작가의 주요 전시품들도 함께 전시하는 만큼 박 작가의 작품세계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고독공포를 완화하는 의자’다. A4사무용지로 만든 이 의자는 놀랍게도 미국 싱싱교도소에서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기의자를 모델로 했다. 종이로 만든 죽음, 그것은 과연 가벼운가 무거운가. 더 놀라운 상상력은 이 의자가 2인용이라는 것. 황천길을 함께하는 친구가 있다면 고독과 공포가 줄어들려나. 흔하디 흔하고, 하잖기 짝이 없는 종이로 만든 전기의자는 역설적으로 약한 것의 힘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는 장점이 있다. 조각가라고 하면 커다란 대리석이나 대형 철근, 끌·망치·정 등 묵직한 도구를 연상하지만, 박 작가가 하는 작업은 가볍기 한없는 A4사무용지나 칼, 자, 양면테이프 등 모두 현지조달이 가능한 것들이다. 덕분에 그의 작업을 두고 외국인 동료들은 ‘유비쿼터스 워킹’이라며 부러워했다. 그의 작품에 필요한 A4사무용지가 없는 미국조차도 작품이 완벽하게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레터종이를 활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2004년 대안공간인 사루비아다방에서 작업했던 작품이다. 박 작가는 “작업의 묘미는 튼튼한 전기의자가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박 작가가 제공한 모듈로 김종영미술관측이 재현한 전기의자는 아주 튼튼하고 잘 만들어져서 작가의 의도에 살짝 반(反)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작업인 ‘펴기’도 재미있다. 이 작품들을 이해하려면 현대미술의 맥락을 다소 이해해야 한다. 원래 박의 전기의자도 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의 전기의자를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펴기 작업에서는 마르셀 뒤샹이나 루시오 폰타나 등 현대작가들의 작업들을 패러디하고, 살짝 뒤틀고 있다고 김종영미술관의 김정락 학예실장은 분석했다. 뒤샹은 1920년 막막한 8개의 검은 창을 보여주면서 ‘신선한 과부(Fresh Widow)’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박 작가는 구겨진 창문과 창틀로 구성된 진홍빛 프레임의 8개의 투명한 창을 보여주곤 ‘Fresher Widow’(더 신선한 과부)라고 불렀다. 패러디의 절대 강자 뒤샹을 깜찍하게 패러디해낸 것이다. ●박원주 작가 작품 세계 한눈에 박 작가는 더 나아가 루시오 폰타나로 넘어갔다. 라틴아메리카의 작가인 루시오 폰타나는 평면에 3개의 칼자국을 내 폭력성·남성성을 현대회화로 추구한 작품 ‘칼날 삼부작’을 내놓았다. 박 작가는 이의 대구로 ‘칼날 삼부작-펴기’로 내놓았다. 구겨지고 일그러진 종이(나무)를 펴서 액자, 그것도 둥근 액자에 집어넣어 남성성, 폭력성을 거세시켜 내고 있다. 이제 결론이다. 전시제목 ‘에퀴녹스(Equinoxes)’는 뭔 의미냐. 일년에 두 번 있는 밤과 낮이 똑같은 날, 춘분과 추분을 일컫는 말이다. 똑같은 순간이 되기 위해 가는 길은 긴장이 가득하다. 컵에 물이 가득 차서 떨어지려는 순간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상상해 보라. 뭐가 이리 어렵냐고 생각하지 말고, 현대미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시길. (02)3217-6484.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열린세상]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 ‘시의 강국’ /최창일 시인

    [열린세상]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 ‘시의 강국’ /최창일 시인

    “한국은 ‘시의 강국’이다.” 한국에 체류했던 한 독일 시인이 한국의 시 문학에서 느낀 점을 말한 것이다. 꽃망울 터트리는 라일락나무 아래 배달된 조간을 펼쳐들면 신문에는 어김없이 ‘시가 있는 아침’을 열어 준다. 우리나라 신문은 매일 아침, 또는 주간으로 ‘시가 있는 아침’을 열지 않는 신문이 없다. 이런 시 문화를 체험한 독일 시인이 시의 강국이라 말한 것에 수긍이 가고 남는다. 2009년에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등록된 시인은 5000명이고 등록하지 않은 시인은 3000여명으로 추산되니 8000여명의 시인이 활동하는 셈이다. 활동이라 함은 등단하여 시집을 내거나 계간·월간·기타 간행물에 발표하는 시인을 말한다. 물론 등단하지 않고 지방이나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활동하는 시인은 공식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2008년 시집은 753종 나왔다. 정식 집계가 어려워 출판정보관리센터에서 잠정 집계한 숫자다. 아마 집계되지 않은 시집은 이보다 훨씬 많이 출간되었을 것이다. 한국문인협회와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유관단체가 공동으로 2009년을 ‘책, 함께 읽자’ 캠페인의 해로 정하고 낭독회를 열고 있다. 1회에 김남조 시인의 낭독이, 2회는 황금찬 시인의 낭송이 3월에 있었다. 3회인 4월에는 종로에서 활동하는 시인의 낭송이 23일로 예정되어 있다. 5월은 문협이 주관하는 마로니에 전국청소년 백일장이 있다. 1985년에 시작하여 24회를 맞는 백일장은 ‘시의 강국’이라는 한국 시문학에 초석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필자는 지난주에 문인협회가 주관하는 해외문학 심포지엄 참석차 캄보디아에 갔다 왔다. 핑계 삼아, 해외여행에 원로 문인들과 교제도 할 겸 가벼이 나섰다. 캄보디아의 문화유적지를 돌아본 후 밤에는 문협이 준비한 주제 발표를 한 다음 시인들의 시 낭송이 있었다. 어떤 시인은 사전에 시집을 준비하였는가 하면 현장에서 느낀 점을 즉석 시로 낭송한 시인도 있었다. 30여명의 시인들은 무려 세 시간에 걸친 여독을 아랑곳하지 않고 깐깐하게 준비했다. 한국 시인들은 캄보디아에도 있는 한국 노래방이 아닌 집회장에서 시의 열정을 노래했다.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라 말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어느 시인은 바다에서 시를 보고 어머니를 보았다. 그는 해수를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로 비유했다. 기묘하게도 과학적으로 해저에서 나오는 심층수는 어머니의 양수와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시는 양수요 우주의 언어이자 자연의 언어이고 삶의 비의가 담긴 신 같은 언어다. 이런 언어를 간직한 시인들이 주변에 많을수록 삭막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구상 시인과 절친하게 마음을 열고 살았다. 성직 생활에 난관이 있을 때마다 시인 구상을 찾아 조언을 받고 속마음도 곧잘 열었다. 워낙 젊은 나이에 추기경이 된지라 신부들과 협조가 되지 않아 생기는 마음고생도 곧잘 털어놓았다. 구상이 시인이었기에 김 추기경의 성직의 마음과 통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에서도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노랫말을 만들었고 ‘목포의 눈물’ 같은 시가 노래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도 전쟁이 채 끝나기 전 명동의 다방에서 만들어진 시가 노래되어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다. 시는 어려운 시기에 국민의 ‘위로의 밥상’이었다. 학자들은 1970~80년대를 시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황금기를 거친 시적 국민성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력이다. 시는 어떤 경우에도 마음에 평화를 주고 스스로 치유의 능력을 가진다. 70~80년대 낭만의 시대에 길러진 국민 심성은 환란 위기에 장롱 속 금을 내놓는 여유를 보였다. 지금 닥친 세계적 경제 위기도 어느 나라에 비해 빠르게 회복하리라 내다보고 있다. 우리 국민은 시로 대항도 하고 시가 건강한 힘줄이 되어 국난을 극복하기도 했다. ‘시의 강국’은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이다. 최창일 시인
  • 캘린더에 표시해 놓고 바람피운 유부녀

    C=이발사 김(金)모씨(40)는 지난 겨울부터 난데없이 집의「캘린더」에 빨간 동그라미표시가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더라는 것. 김씨는 한동안은 무심히 보아 넘겼으나 끝없이 계속되는 빨간 동그라미가 아무리 해도 이상스러워 한번은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더니『엄마가 나갈 때마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는 거였어. B=뭐야, 탐정소설을 만드는 거야. C=어쨌든 지금부터가 더「드릴」이 있어. 묻고 보니 아내의 행위가 의심스러워지더라는 거야. 그래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하루는 저녁을 먹은 뒤 이발소에 밤일을 하러 간다며 집을나와 잠복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몸치장을 깨끗이 하고는 동대문에 있는 모다방으로 쑥 들어가지 않나. 30분쯤 지났을까. 아내가 훤칠한 사나이와 함께 다방에서 나와 근처의 D여관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나. 기가차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지. 김씨는 격분을 참지 못해 여관으로 뛰어들어가 방문을 확 열어 제치고는 부둥켜 안고 있는 남녀를 붙잡고는 얼떨결에『간첩이야』하고 소리를 쳐 버렸어. 여종업원들이 딸려 오고 여관에서 신고하여 경찰이 달려오고. 이건 지난 16일 밤의 일이었어. 김씨는 경찰에서 통곡하며 남녀를 간통죄를 고소했지. 그러나 다음날 아침 고소를 취소해 버렸어. 당직형사계장이었던 Y경위의 설득이 주효했던 거였어. 김씨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둘 있는데『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지 않느냐. 하룻밤 잘 생각해 보고 내일 결정하라』고 설득한 거지. 김씨의 아내는 강(姜)모여인(29)이고 정부는 최모씨(39)인데 지난해「크리스머스」때「카바레」에 춤추러 갔다가 사귀어 정을 통해 왔다는 거였어. D=어쨌든 춤은 가장파탄의 씨앗이야. [선데이서울 72년 7월 2일호 제5권 27호 통권 제 195호]
  • 고급호텔의 여대생「고고·걸」들

    고급호텔의 여대생「고고·걸」들

    여대생들이 「비어·홀」「호스테스」로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이미 옛말. 요즘은 「고고·클럽」의 「호스테스」중에도 여대생들이 섞여 있다는 「쇼킹」한 「뉴스」다. 새벽 4시까지 밤새워 춤추고 낮이면 강의실에 나타난다는 여대생 「고고·걸」의 생태는- . 호스테스 달려 프리랜서로 학비를 벌어 유흥가를 휩쓴 불경기속에서도 타격을 가장 적게 받는 불경기의 이방지대가 있다. 바로 『새벽 4시까지 영업이 허가』된 「고고·클럽」들. 관광객들을 위해서 철야영업이 허용된 「고고·클럽」은 연일 밤새워 춤추는 젊은이들로 메워지고 있다. 여름철이면 장사가 안된다는 물장사의 「징크스」도 「고고·클럽」에만은 해당되지 않는다. 「고고·클럽」이 불경기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이유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우선 쉽게는 여느 「나이트·클럽」과는 달리 밤을 꼬박 새우며 새벽 4시까지 즐길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 관광객들이 올 봄·여름에 걸쳐 예년에 없이 많이 몰리고 있는데 이들 관광객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 서울의 「고고·클럽」들. 우리 젊은이들처럼 꼬박 밤을 새우지는 않지만 여행「스케줄」중에 하루 저녁쯤은 「고고·클럽」관광을 잡아 놓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고고·클럽」은 여느 유흥가와는 대조적으로 표면상으로는 많은 사람이 몰리고 흥청이고 있다. 이 때문에 보통 「고고·클럽」마다 갖고 있는 20~30명의 「호스테스」로는 동이 날 경우가 있다. 이것은 고급「호텔」의 「고고·클럽」일수록 더 그렇다. 수준이 낮은 「고고·클럽」에서는 마치 「아르바이트·댄스·홀」에서처럼 서로 따로따로 온 손님끼리 「파트너」가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웨이터」가 혼자 앉아 있는 손님을 찾아다니며 중매(?)를 서 주기도 한다. 그러나 고급「호텔」의 「고고·클럽」의 경우는 동반 손님이거나 「호스테스」와 춤을 추는 것이 대부분이다. 각 「클럽」의 「웨이터」말을 빌면 이런 손님이라야 술을 듬뿍 마셔 매상이 많이 오른다는 것. 이때문에 심지어 P「고고·클럽」의 경우는 동반자 없는 여자 손님만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을 정도다. 자주 드나들다 매력 느껴 서울의 「고고·클럽」은 현재 「산다」「센추럴」「로얄」 「워커힐」·천지·풍전·남산·「닐바나」「오리엔탈」「페닌슐러」(반도호텔)등. 하오 8시부터 11시 정도까지는 여느 「나이트·클럽」처럼 보통 관광객이나 점잖은 손님이 몰리다가 11시30분을 넘기면서 말하자면 단골손님들이 몰리기 시작한다. 이들 중에는 거의 매일 「고고·클럽」에 출근하다시피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고고·클럽」에 여대생 「호스테스」가 생긴 것도 이러한 「고고·클럽」특유의 생태 때문이다. 「고고·클럽」의 여대생「호스테스」는 「비어·홀」에서 일하는 여대생 「호스테스」의 경우와는 수입이며 그 생리가 다르다. D여대 의상학과 2학년생인 김(金)모양(20)은 P「고고·클럽」의 「프리·랜서」「호스테스」.「멤버」의 지시를 받아 손님 「테이블」에 불려나가기는 하지만 다른 직업적인 「호스테스」와는 달리 매일 출근하지는 않는다. 자기 편한 대로, 기분나는 대로 나가서 일하는 것. 김양이「프리·랜서」「호스테스」가 된 것은 1년 전부터. 「고고·클럽」에 자주 놀러다니다가 끝내는 「호스테스」가 되었다고. 물론 원칙적으로는 김양 마음 내키는 대로 출근하지만 간혹 「호스테스」가 동이 날 때는 「멤버」가 전화로 불러내면 나가주는 수도 있다. 김양이 얻는 수입은 한「테이블」에서 보통 3천원. 재수가 좋으면 하룻 밤새 2~3「테이블」을 도는 수도 있다. 나이가 지긋한 손님일수록 신진대사(?)가 빨라 2~3시간쯤 있다가 나간다. 이것은 「고고」춤이 워낙 힘이 드는 춤이기 때문. 그래서 돈이 급한 날이면 김양은 「멤버」에 부탁해서 나이많은 손님의 「테이블」만 배당 받는다. 신나게 춤추고 맥주도 마시니 “할만해요” S대학 3년생 박(朴)모양(21)은 「고고·클럽」에 나온지 3개월 밖에 안된 병아리 「호스테스」. 역시 「고고·클럽」에 자주 놀러 다니다가 「호스테스」가 되었다. 김양은 고향이 지방이어서 친구와 신당동에서 하숙 생활중. 고향의 부모님이 부쳐주는 돈으로는 도저히 「고고·클럽」에 놀러 다닐 수 없어 결국 「호스테스」로 둔갑했다. 3개월 동안의 「호스테스」생활 소감은 『할만 하다』. 즐겁게 춤추고 맥주도 마시며 「팁」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은 직업이냐는 식의 이야기다. 더구나 어느「비어·홀」과는 달리 만지거나 더듬는 손님이 거의 없어 거리낄 것이 없다고. 그러나 「호텔」에 같이 가자고 추근대는 손님은 적지 않단다. 눈치로 보아 그냥 한번 그래 보는 손님도 있고 정말 같이 가면 일년치 등록금 정도의 「팁」을 주겠다는 손님도 있단다. 그때마다 박양은 언제나 오늘은 곤란하나 내일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약속을 잊어 버리는 식으로 유혹을 피해 왔다고 했다. K대학 3년생 길(吉)모양(21)은 김·박양과는 달리 아직 서너차례 밖에 「테이블」에 들어가지 않았던 말하자면 「아마추어·호스테스」.「고고·클럽」에 잘 놀러 다니다가 「웨이터」와 친하게 되어 어쩌다 이「웨이터」의 소개로 「테이블」에 앉아 보았다. 신나게 춤추고 맥주 마시고 놀았는데 「팁」을 주니 처음에는 이상하기만 하더라고.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돈을 만질 수 있어 별난 직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앞으로 「호스테스」로 일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호텔방 가자할 때는 고민 우선 거의 매일 집에 못들어갈 판이니, 간혹이라면 친구 집에서 자고 왔다는 식으로 둘러 댈수도 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지금처럼 「고고·클럽」에 놀러 갔다가 「웨이터」가 소개해 주면 「테이블」에 들어가는 식으로 「아마추어·호스테스」가 되고 싶다고 했다. 밤새워 「고고」춤을 추고 난 새벽 4시, 이들은 어김없이 해장국집으로 몰려간다. 안마사 낚시꾼들과 함께 해장국을 들고 나면 「고고·클럽」에서 퇴근(?)하는 손님을 위해 문을 여는 새벽 다방으로 직행. 낯익은 친구들과 함께 한잔의 「코피」를 마시며 지난 밤의 피로를 잊고 잠깐 눈을 붙인다. 아침 8시가 되면 집에 들어가서 책을 들고 「캠퍼스」로 돌아가 다시 대학생이 되는 것. <수(秀)> [선데이서울 72년 7월 2일호 제5권 27호 통권 제 195호]
  • 다방 레지 매상 작전 피해 본 단골 10명

    부산시 D다방은 요즘 묘한 방법으로 매상을 올리고 있어 화제. D다방의 인기높은「레지」인 박모양(24)은 목에다가「파스」를 그럴싸하게 붙이고 차를 나르는데, 대개는 단골손님의 궁금증이 발동,『간밤에 무슨 일을 했길래 그런 걸 붙이고 다니느냐?』고 짓궂게 물어 온다는 것.『아무 것도 아니에요』『그거「키스·마크」아니냐로 설왕설래하다가『그럼 차내기로 판가름하자』고 색다른 제안. 손님이 좋다고 하면 냉큼 주저앉아 비싼 차를 주문해서 마신 다음「파스」를 떼고 보면 아무 상처도 없이 말짱하다는 것. 이 수법에 걸려 억울한 차값을 물어준 피해자(?)가 10여명 이상이나 된다고-. -닭 잡아먹고 오리발. <부산> [선데이서울 72년 7월 2일호 제5권 27호 통권 제 195호]
  • [깔깔깔]

    ●누구의 자식?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들 녀석이 몹시 속을 썩이자 엄마가 아들을 불러 세워 혼을 냈다. “너, 왜 이렇게 엄마 속을 썩이니? 대체 누구 자식인데 이 모양이야!” 그러자 아들이 매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이럴 수가?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고 있다니….” ●야한 여자 방송국 근처 다방에서 커피 한 잔 하고 방송국으로 온 최불암은 갑자기 여자 탤런트들만 강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여자 탤런트들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최불암이 나타나 강당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중에서 야한 여자 나와!” 여자 연예인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 후,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던 한 탤런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불암이 소리쳤다. “내 등 뒤에다 ‘야’하고 소리치고 도망간 사람이 너였어?”
  • 그 떠난 지 17년… 탈고 안된 마지막회를 완성하다

    한 방송사에서 열린 독서토론회가 끝나고 출연진들은 근처 다방에 모여 앉았다. 그날 다룬 작품은 소설가 이병주(1921~1992)의 ‘비창’. 40대 술집 여주인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었다. 남은 얘기를 하던 중 그날 사회를 봤던 문학비평가 김윤식 서울대 교수가 술김에 이병주에게 대거리를 했다. 열다섯 살 위 선배에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당신 소설이 그게 어떻게 소설이냐.”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환갑을 넘긴 소설가는 큰소리도 못 내고 “환갑 넘은 나도 어찌 살아갈지 모르겠는데, 40대 마담이 그럼 어쨌으면 좋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그 소설가는 떠났고, 그때 그 비평가는 그의 유작을 엮어 냈다. 그가 끝내 결말을 못 보고 간 소설 ‘별이 차가운 밤이면’(김윤식·김종회 엮음, 문학의 숲 펴냄)이 그가 떠난 지 17년 만에 나왔다. 문학계간지 ‘민족과 문학’ 1989년 겨울부터 1992년 봄,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연재한 걸 묶은 것이다. 기껏 묶어 놓고도 그 비평가는 좋은 소리를 안 한다. “그 사람이 한국문학에다 큰 획을 긋고 그런 건 아니야. 학병 다녀와서 글 쓴 소설가가 없으니까 관심을 두는 거지.”라고만 한다. ‘별이~’을 두고는 ‘관부연락선’, ‘지리산’에 이은 ‘학병체험 3부작’의 마지막 소설로, 학병에 자원입대해 탈출을 꿈도 꾸지 않은 이병주의 노예사상이 담긴 소설이라고도 비평했다. 전작들도 모두 학병 이야기지만, 이번에는 노비 출신의 학병 이야기다. 종의 자식인 주인공 박달세가 신분상승을 위해 도쿄대에 들어갔다가 학병에 지원, 일본군 정보부 장교 행세를 하며 상하이 정보전에 몸을 던지는 이야기다. 그렇게 민족의식 없이 방황하던 박달세가 해방을 앞두고 처신을 고민하는 곳에서 책은 끝난다. 작가는 마지막 한 회 연재를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끝이야 이제 알 방도가 없다. 하지만 떠난 작가의 흔적을 찾아 그가 학병으로 근무했던 중국 쑤저우와 상하이까지 다녀온 비평가는 박달세가 ‘어쨌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조심스럽게 결말을 제시해 본다. “박달세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지만 결국에는 계층을 뛰어넘고 임시정부 편에 설 겁니다.”라고.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좌충우돌 조선에서 살아남기

    좌충우돌 조선에서 살아남기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방대한 역사서다.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472년(1392∼1863년)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엮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적어 놓은 정치책일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에 대해 다방면에 걸쳐 적어 놓았다. 왕과 신하를 중심으로 기술한 만큼 어지간한 공직에 있거나 반역을 저지르지 않으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동물들이 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조선을 놀라게 한 요상한 동물들’(박희정 글, 이우창 그림, 신병주 감수, 푸른숲 펴냄)은 기록에 나타난 동물들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역사 동화책이자 역사 참고서이다. 딱딱하지 않은 내용에 읽는 재미가 쏠쏠한 역사책이다. 태종 11년에 일본에서 들어온 ‘코에 길다란 살덩이를 매단 괴상한 동물’ 코끼리를 시작으로 중종 4년 농부들에게 분양된 중국에서 수입된 검은 물소, 성종 8년 낮술을 한 잔 걸친 것 같이 얼굴이 발그레한 일본 원숭이, 세종 30년 조선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죽어가는 양, 숙종 21년 궁궐에 들어와 신하들을 고민스럽게 만든 낙타 등 다섯 가지 동물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런 식이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던 것이다. 명령을 내려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 5두씩을 소비하였다.(태종 11년 2월 22일)’ 그런데 일본은 조선왕에게 왜 진귀한 코끼리를 선물했을까. 공짜가 아니었다. 일본은 고려대장경을 대가로 받고 싶어했다고 한다. 주변국에서 선물받은 낯선 생명체들을 이 땅에서 적응시키기 위해 애쓰는 선조들의 모습들은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코끼리의 조선시대 이름은 ‘코길이’였다는 대목에서 웃음. 최소한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야 할 코끼리나 물소 등이 삼한사온이 뚜렷한 조선의 겨울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해 보면 이런 동물을 추운 나라에 선물하는 일은 동물학대 같기도 하다. 왕실에서 제사지낼 제물로 매번 중국에서 양을 수입했다는 것도 새삼스럽다. 물소는 세종 때부터 중국으로부터 수입을 꿈꿔왔던 동물이었다. 주몽의 자손들로 활쏘기의 명수인 조선사람들에게 각궁을 만들기 위해 물소뿔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실제로 물소의 대량 수입은 중국 정부의 통제로 불가능했다. 추위에 떠는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싶었던 성종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끝내 포기하는 것을 보면 왕이라고 모든 일을 맘대로 하지 못했던 조선의 모습도 발견한다. 애완동물 기르는 것을 저어했던 조선의 선비들도 18세기에는 앵무새, 비둘기 기르기 유행에 휩싸인다. 부록으로 ‘책 속의 책’으로 조선시대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 조선실록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붙어 있다. 이야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읽어도 좋겠다. 98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국내 첫 오페라 공연…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명동 옛 국립극장의 원형은 1934년 일제가 설립한 명치좌(明治座)다. 일본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이었는데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서 국제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초의 한국영화 ‘자유만세’(1946년)가 여기에서 상영됐다. 1947년 서울시가 이곳을 시공관으로 운영하면서 연극 등의 공연이 올려지거나 정치 집회시설로 활용됐다. 1948년 국내 최초의 오페라 ‘춘희’가 공연됐고, 이듬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이해랑 연출로 처음 소개됐다. 가수 현인과 윤복희, 코미디언 김희갑 등도 시공관 무대에서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시공관은 1957년부터 국립극장의 역할을 병행했다. 전란을 피해 대구에 내려가 있던 국립극장은 4년3개월 만에 서울로 복귀해 시공관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1962년 3월 명동국립극장으로 정식 재개관한 뒤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이곳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낭만 1번지였다.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은성, 포엠, 돌체, 카페떼아뜨르 같은 선술집과 음악다방, 소극장이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심각한 운영난을 겪기도 했다. 냉방장치가 안돼 여름엔 장기휴관을 해야만 했고, 객석에는 벼룩과 쥐가 돌아 다녔다. 1967년 장충동 국립극장 착공과 동시에 명동국립극장의 매각 계획이 결정되고, 1975년 대한투자금융이 건물을 매입하면서 극장 기능은 사라졌다. 그러다 1994년 소유주가 기존 건물을 허물고 신사옥 건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문화예술인들과 명동상가번영회가 복원 운동에 나섰고, 오랜 설득과 노력 끝에 2004년 정부가 터를 매입해 복원 공사에 착수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연기파 배우 이해영, 드라마 ‘식스먼스’ 합류

    연기파 배우 이해영, 드라마 ‘식스먼스’ 합류

    연기파 배우 이해영이 KBS 수목드라마 ‘식스먼스’(Six month)에 합류한다. 이해영은 오는 다음달 29일 첫 방송되는 KBS 새 미니시리즈 ‘식스먼스’에서 톱 여배우 한지수(김아중 분)와 평범한 말단 우체국 직원 구동백(황정민 분)의 6개월간 계약결혼의 비밀을 파헤치는 정치부 기자 백성태로 변신한다. 이 드라마 관계자는 “브라운관과 영화, 연극 등 다방면에서 연기를 펼치며 주목 받고 있는 이해영 특유의 카리스마가 기자 백성태 캐릭터와 부합된다고 판단, 캐스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해영은 “‘식스먼스’에 출연한다는 생각에 설렌다.”며 “작품의 누가 되지 않도록 초심을 잃지 않는 신인 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케이블 채널 tvN의 시즌제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5’에서 장동건 역으로 출연중인 이해영은 그동안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바르게 살자’ 등 다수의 작품에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이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아 왔다. (사진제공=예당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홍정원 기자 cine@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여운 오래 남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 패셔넬라 국내 첫선

    여운 오래 남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 패셔넬라 국내 첫선

    텔레비전 요정 덕택에 굴뚝 청소부 넬라에서 글래머 스타가 된 패셔넬라는 어떻게 진정한 꿈을 이뤘을까. 행정 착오로 군대에 간 네 살배기 꼬마 먼로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누구보다 야구공을 멀리 때릴 수 있고, 누구보다 축구공을 멀리 찰 수 있고,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으나 문서 정리를 고집하는 해롤드 스워그는 승리만을 추구하는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비꼬았을까.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지만 그 여운은 오래오래 남는 어른을 위한 만화, 줄스 파이퍼(1929~)의 ‘패셔넬라’(이숲 펴냄)가 국내에 선보였다. 퓰리처상과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파이퍼는 대표적인 1세대 미국 만화가이자 세계 최고 만화가로 꼽힌다. 만화 예술의 선구자다. 만화에서 어린이의 전유물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만화를 예술 장르로 끌어올리는 등 만화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TV 드라마 작가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2000년 출간된 유아용 그림책 ‘짖어봐 조지야’를 제외하면 그의 만화가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촌철살인의 사회 풍자와 유머, 가슴을 울리는 서정성, 휴머니즘이 넘치는 작품성 등 그의 매력은 외모지상주의를 기상천외한 반전으로 비트는 ‘패셔넬라’, 전체주의적 사고를 꼬집는 ‘꼬마 병사 먼로 이야기’, 승리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해롤드 스워그’, ‘조지의 달’, ‘외로운 기계’, ‘관계’ 등 여섯 편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미 오래전에 그려진 작품들이지만 그 내용은 오늘날 한국 사회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다. 박재동 화백은 “이 책은 한 장 한 장 쉽고 재미있게 넘어가지만 마음까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조금씩 빨려 들어가다가 종내 마음이 짠해진다. 오랫동안 가슴 깊이 치는 것도 있다. 비행기 안에서 책 읽기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땅에 내려서도 끝나지 않았다.”고 추천했다. ‘패셔넬라’는 미국판 ‘줄스 파이퍼 만화전집’의 제4권으로 구상 시인의 딸이자 중견 소설가인 구자명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1만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군위 삼국유사 마케팅 눈길

    군위 삼국유사 마케팅 눈길

    경북 군위군이 ‘삼국유사의 고장=군위’ 알리기에 적극 나섰다. 국보 제306호인 삼국유사가 700여년 전 군위(인각사)에서 보각국사 일연 스님에 의해 편찬됐다는 점을 널리 알려 지역 홍보 및 관광객 유치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에서다. 26일 군위군에 따르면 올들어 군청 새마을과 내에 ‘삼국유사 담당’ 부서를 신설하는 등 삼국유사와 군위를 연계한 다양한 홍보 및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군은 21일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 일원에 삼국유사에 의해 전해지는 각종 설화·신화 등을 소재로 한 ‘삼국유사 문화랜드’ 조성을 위한 기본 및 타당성 조사 연구 용역을 대구경북연구원에 의뢰했다.또 학술·종교·문화·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전국의 삼국유사 전문가 13명으로 ‘삼국유사 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운영에 들어갔다. 다음달엔 3억원을 들여 차량 통행이 잦은 군위읍 서부리 중앙고속도로 군위 IC 입구에 군위가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대형 조형물(가로 7m 세로 5m)을 설치하고, 중앙고속도로와 국도 5호선이 지나는 군위읍 서부리 군위체육공원에도 이런 내용을 새긴 홍보판을 세울 계획이다. 아울러 예산 1억 5000만원으로 대구·군위에서 운행 중인 시내버스 및 택시 140대 외부에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 문구를 새긴 광고판을 부착하고, 군위읍 동부리의 군위교육문화체육회관도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 시가집(향가, 찬시 등)과 삼국유사·군위 홍보 안내 책자 각 3000부를 제작, 전국 지자체 및 공공 도서관, 출향인 등에 배부할 계획이다. 4~5월엔 중앙고속도로 상·하행선 휴게소에서 상춘객 등을 대상으로 군위가 삼국유사의 산실임을 알리는 홍보 전달물을 나눠 주는 한편, 470여 군 전체 공무원들의 명함에도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는 문구를 새겨 넣도록 권유할 계획이다. 김태웅 군위 부군수는 “삼국유사가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정작 군위에서 집필됐다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삼국유사와 유서깊은 군위가 함께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도록 관련 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경북 경산에서 출생한 일연(1206∼1289)은 노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군위 인각사에 머물면서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편찬(충렬왕 7년·1281년)하고 그곳에서 입적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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