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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매가 최소 10억… 암스트롱 ‘먼지’ 팝니다

    경매가 최소 10억… 암스트롱 ‘먼지’ 팝니다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닐 암스트롱이 수집한 달 먼지가 경매에 나온다. 우주 테마로 열리는 이번 경매에는 최초의 우주 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파편과 닐 암스트롱, 리처드 닉슨 대통령 등이 서명한 달 지도도 출품됐다. 영국의 경매 회사 본햄스는 13일 경매를 열어 닐 암스트롱이 1969년 아폴로 11호 임무에서 채취한 최초의 달 먼지를 내놓는다. 수익금의 일부는 과학 자선 단체에 기부할 방침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암스트롱이 약 1㎏의 먼지를 퍼내는 데 3분 5초가량의 시간이 걸렸다고 기록했다. 이번 경매에 나온 달 먼지는 아폴로 11호에서 채취한 샘플 중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판매하게 된 만큼 최종 낙찰가를 예상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본햄스는 “암스트롱이 1969년 7월 21일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겼을 때, 그의 첫 임무 중 하나는 달 샘플을 수집하는 것이었다”라며 경매에 오른 제품을 소개했다.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직후 먼지를 수집했고, 달에 착륙하며 ‘이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첫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본햄스의 전문가 애덤 스택하우스는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이는 전 세계 사람들이 기뻐하며 지켜본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자 역사의 중추적인 순간이었다”며 본 경매가 가지는 의미를 상기시켰다. 최종 예상 낙찰 가격은 80만 달러(약 9억 7000만원)에서 120만 달러(약 14억 6000만원) 사이로 측정된다.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전 판매 기간 동안 약 60만 파운드(약 9억6000만원)에서 90만 파운드(14억4000만원)를 미리 지불해야 한다.암스트롱의 가방의 역사 암스트롱은 먼지를 제염 가방에 넣어 지구로 가져와 나사에 넘겼지만, 나사는 이를 빈 가방으로 여겼다. 이후 가방은 분실되었다가 1980년대 초 캔자스 코스모스피어 우주 박물관에 등장했다. 2003년 박물관 큐레이터인 맥스 아리가 이 가방을 훔친 혐의로 수감되면서, 대중은 또 다시 이 가방을 보지 못하게 됐다. 2015년 미 연방보안청은 자금 마련을 위해 이 가방을 경매에 부쳤다. 변호사 낸시 칼슨은 이를 700파운드(약 112만원)에 구입했다. 칼슨은 달 먼지 샘플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가방을 나사로 보냈고, 나사 측은 이 가방이 아폴로 11호의 먼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칼슨에게 반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칼슨은 2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승소했다. 달 먼지 표본은 5개의 알루미늄 통에 담겨 칼슨에게 돌아갔다. 그는 이후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 가방을 익명의 낙찰자에게 180만 달러(약 22억원)에 팔았다.
  • “전쟁·시위 다 잘못됐다” ‘중간 미국인’ 목소리 분출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4>]

    “전쟁·시위 다 잘못됐다” ‘중간 미국인’ 목소리 분출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4>]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임기 첫해인 1969년 한 해 동안 베트남에서 미군 1만 1780명이 사망했다. 1965~68년 베트남에서 사망한 3만 6540명에 비해 적지 않은 숫자였다. 1970년 2월, 파리 근교에서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과 북베트남 대표 레득토(1911~1990)가 비밀리에 만났으나 평화협상에 진전은 없었다. 3월 18일, 캄보디아 총리이던 론 놀(1913~1985)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2) 국가원수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론 놀은 캄보디아 영토에서 북베트남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베트콩으로 가는 군수물자 창구이던 시아누크 항구를 봉쇄했다. 닉슨은 캄보디아에 친미 정권이 들어선 것을 반겼다. ●닉슨, 캄보디아에 지상군 작전 명령 4월 20일, 닉슨은 미군 15만명을 추가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쟁이 끝나가고 있으며, 평화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디. 하지만 그 순간에도 B52 폭격기 편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영토에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4월 30일, 닉슨은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이 캄보디아로 진입해서 작전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상군을 캄보디아로 투입하는 작전에 대해 로저스 국무장관과 레어드 국방장관은 반대했지만 닉슨은 강행했다. 닉슨은 혼자 결정을 하면서 당시 개봉된 영화 ‘패튼’을 여러 번 보았다. 닉슨은 자신이 2차 대전 막바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패튼 장군처럼 기억되기를 원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각각 5만, 3만 병력을 동원해 사이공에서 80㎞와 50㎞ 떨어져 있는 캄보디아 영토 내 북베트남 기지 2개 지역을 향해 진군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공습과 지상군을 피해 캄보디아 내륙으로 후퇴했다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철수한 뒤에 접경지대로 다시 돌아왔다. 지상군을 투입한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캄보디아에 대한 지상군 투입은 1969년 가을 미국의 모라토리엄 시위 후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반전 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 대학 캠퍼스에선 시위가 불같이 일어났다.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에선 학생들이 ROTC 건물에 불을 지르고 도심 상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상황이 심각함을 느낀 시장이 주지사에게 방위군 출동을 요청했다. 5월 4일, M1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캠퍼스에 진입한 방위군은 최루탄을 투척해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다.●켄트주립대학에서 울린 총성 학생들은 최루탄을 받아서 방위군 쪽으로 다시 던지는 등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때 별안간 방위군이 실탄 사격을 했고 이로 인해 학생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했다. 사망한 남학생 한 명은 시위를 구경하면서 지나가던 중이었다. 미국에서 학생이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나 군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처음 발생한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5월 한 달 동안 일어났다. 미시시피 잭슨주립대에서 경찰이 시위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해 흑인 학생 두 명이 사망하는 등 캠퍼스는 혼돈 그 자체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워싱턴 DC로 모여들었다. 경찰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친 백악관은 고립된 진지처럼 보였다. 5월 8일 저녁, 닉슨은 기자회견을 열고 베트남에서 추가로 15만명을 철수시키는 약속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날 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닉슨은 새벽 4시에 수행원만 대동하고 워싱턴몰에 있는 링컨기념관을 방문했다. 닉슨은 마주친 학생들과 간단한 대화를 했고 뒤늦게 달려온 당직 비서와 함께 의사당을 둘러보고 시내 호텔에서 조식을 한 뒤 백악관으로 귀환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이 소식을 들은 참모들은 놀라고 걱정했다. 켄트주립대에서 사망한 학생 중 한 명이 뉴욕시 출신이었다. 그의 시신이 뉴욕의 부모 곁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게 됐는데, 이를 계기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했다. 당시 뉴욕시장은 존 린지(1921~2000)였다. 진보적 공화당원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1965년 선거에서 뉴욕시장으로 당선된 린지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었다. 린지는 5월 8일을 켄트주립대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로 선포했다. 학교를 휴업하고 시청 청사에 반기(半旗)를 게양하도록 했다. 5월 8일 아침, 대학생들이 맨해튼 증권거래소와 유서 깊은 페더럴홀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1시가 돼 갈 무렵 시위대는 1000명을 넘어서 제법 큰 집회를 형성했다. 11시 30분, 갑자기 근처의 세계무역센터(9·11테러로 무너진 쌍둥이 건물) 등 고층건물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수백 명이 안전모를 쓴 채로 대학생 시위대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USA, USA”를 외치면서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향해 거칠게 다가갔다. 이들은 “America, Love It or Leave It”(미국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떠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대학생 시위대와 충돌했고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폭행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학생들을 폭행하는 노동자들을 제어하지 않았다. 그날 뉴욕 경찰은 노동자 편이었다.●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반란 500명 이상으로 늘어난 노동자 집단은 “린지를 잡아와라”(Get Lindsay!)를 외치면서 시청 청사로 몰려가서 반기로 게양한 성조기를 완전히 올려 버렸다. 경찰관들은 이 모습을 즐기듯 보았다.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장발 학생들의 머리채를 끌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등 마구 다루었고 그로 인해 학생 100여명이 부상했다. 노동자들이 대학생 시위를 힘으로 제압한 이 사건은 ‘하드햇 폭동’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며칠 동안 시위를 벌였고 5월 20일에는 항만 노동자들이 합세해 15만~20만명이 맨해튼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존 린지 퇴진’, ‘붉은 시장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었다.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은 창문에서 색종이를 뿌려 이들에게 지지를 보냈다. 건설토목 및 항만 노동자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블루칼라인데 이탈리아, 그리스, 폴란드 등 동남부 유럽 이민 후손이 많았다. 앵글로 백인과 달리 가톨릭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다. 이들은 본인이나 가족이 2차 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경우가 많았다. 뉴욕시 경찰관들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1970년 1월 5일자 타임지는 ‘중간 미국인’(The Middle Americans)을 ‘그해의 인물’로 선정해 커버로 다루었다. 베트남전쟁은 잘못이지만 반전 시위도 잘못이며, 인종 차별은 부당하지만 범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을 타임지는 ‘중간 미국인’으로 지칭했다. 타임지는 이들이 소외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바로 이들이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닉슨은 자기가 말한 ‘조용한 다수’가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고 생각했다. 5월 26일, 닉슨은 피터 브레넌(1918~1996) 토목건설노조 대표 등 뉴욕 시위를 이끈 노조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환담을 나누었다. 브레넌은 ‘Nixon’이라고 쓰인 안전모를 닉슨에게 기증했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브레넌은 닉슨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68년 대선에선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던 강력한 노조가 4년 만에 공화당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재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브레넌을 노동장관으로 임명했다, 대기업을 대표하는 정당이던 공화당이 백인 블루칼라 계층과 손을 잡은 것이다. 복지 지출을 확대하고 경찰력을 약화시켜 뉴욕시를 재정적자와 범죄의 수렁에 빠뜨린 존 린지 뉴욕시장은 1973년 12월 임기가 끝나자 시청 건물에서 혼자 걸어 나왔다. 중앙대 명예교수
  • 세계화 후퇴로 정치가 경제 지배… 경제정책이 곧 안보정책이다

    세계화 후퇴로 정치가 경제 지배… 경제정책이 곧 안보정책이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내각 인선이 초미의 관심사다. 공무원들은 정부 조직 개편안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향후 5년 동안, 아니 공직생활 내내 중대한 영향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민감한 사안의 하나는 통상 기능의 주무 부처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주창하면서 1994년 그 기능을 산업부(통상산업부)에 두었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외교부(외교통상부)로 넘겼고, 2013년 박근혜 정부는 다시 산업부(산업통상자원부)로 옮겼다. 주소지가 이전될 때마다 해당 부처 이름도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은 성(姓) 전환 수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性) 전환 수술이기도 하다. 통상 기능의 정체성이 경제에 있느냐, 외교에 있느냐를 둘러싼 행정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제냐 외교냐… 통상 기능 논란 그 논쟁의 뿌리는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년)을 통해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그런데 그의 논리가 좀 궁색했다. “개는 뼈다귀를 교환하지 않지만, 인간은 무엇이건 교환하는 습성이 있다”는 비유를 통해 분업과 자유무역의 장점을 설명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비하자면 설명이 좀 어설프다. 그래서 오해를 불렀다. 미국의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부론’을 읽고서도 정반대 결론을 내렸다. 신생국 미국이 영국 같은 부국이 되려면 유치원 수준에 불과한 미국의 제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유치산업 보호론’이다. 그러자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토머스 제퍼슨 국무장관이 제동을 걸었다. 관세를 높이면 품질 좋은 유럽 공산품의 값이 올라 조악한 미국산 물건만 쓰게 되므로 국민들 불만이 커진다는 이유였다. 제퍼슨의 걱정은 옳았다. 미국 북부 지역의 조잡한 공장들을 보호하느라고 겪는 남부 주민들의 관세 부담은 지나쳤다. 현직 부통령 존 캘훈마저 ‘증오의 관세’를 집어치워야 한다면서 연방정부를 뛰쳐나와 고향 남부의 분리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3개 주로 출발했던 미국은 40년 만에 쪼개질 위기에 놓였다. 이쯤 되면 관세와 무역은 경제도 외교도 아닌 국내 정치 문제다. 그런 점에서 노예해방 문제와 성격이 똑같다. 오늘날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제3의 독립기구로 설치된 까닭은 바로 그런 연유다. 따지고 보면 관세와 무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선 기간 중 논란이 됐던 기축통화도 성격이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금이나 은을 돈으로 썼던 상품화폐 시대에는 기축통화라는 말조차 없었다. 각국 화폐에 함유된 금과 은의 비중에 따라 환율만 있었을 뿐이다. 기축통화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현했다. 금본위제도가 사라진 뒤 전 세계를 상대로 금과의 무제한 교환을 유일하게 약속(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했던 미 달러화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30년도 지나지 않은 1971년 8월 15일 미국이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뜨렸다. 흔히 ‘닉슨 쇼크’라고 하는 사건이다.●USTR이 독립기구로 설치된 까닭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특별인출권(SDR)이라는 것이다. 미 달러화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각국 정부가 합의해 만든 세계 최초 가상화폐다(암호화폐는 아니다). 처음에는 그 가치를 금에 맞춰서 ‘디지털 금’(1SDR=금 0.88671g)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주요국 화폐 가치를 평균해 가치를 매겼다. 거기에는 미 달러화, 영국 파운드화, 독일 마르크화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랜드화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얄화까지 포함됐다. 계산 편의를 위해 오늘날에는 SDR 가치 산정에 5개 통화만 포함된다. 그런데 2016년부터 포함된 위안화를 기축통화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지급 수단으로서 기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반면 스위스 프랑화는 SDR 가치 산정에서 제외되지만 그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다. 전쟁이 터지건, 인플레이션이 시작되건 안전 자산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SDR 편입 여부는 기축통화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기축통화는 경제를 넘어선 문제다. 그러니 지난 대선 기간 중 한국 경제 규모를 이유로 원화의 SDR 편입 가능성을 놓고 설왕설래한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기축통화는 경제가 아닌, 국제정치의 문제다. 1960년대 초 브레턴우즈 체제가 아직 유지되고 있었지만, 미 달러화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전 대통령마저 달러화에 회의감을 표시하면서 금으로 바꿔 달라고 공공연히 요구할 정도였다. 달러화 가치가 크게 흔들리자 미국 정부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외화 표시 미국 국채(루사 본드)를 발행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기축통화 편입은 국제정치 문제 당시 유일무이한 기축통화국이었던 미국의 그런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출범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미국은 1962년 궁여지책으로 유럽의 10개국과 ‘상호통화계약’을 맺었다. ‘중앙은행 간 통화 스와프’의 옛 이름이다. 처음에는 3개월짜리 계약이었다가 계속 연장되고, 1971년부터는 거래 대상에 일본, 덴마크, 멕시코가 추가됐다. 그때 기축통화 개념이 등장했다. 달러 패권을 지탱하는 화폐, 즉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와 통화 스와프를 맺은 나라의 화폐를 말한다. 그러니까 기축통화의 실질적인 기준은 미 연준과의 ‘궁합’이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뉴질랜드 등도 통화 스와프를 통해 미 연준과 궁합을 맞췄다. 원화의 기축통화 가능성은 2008년부터 열려 있는 것이다. 계약의 항구화가 관건이다. 처음에 한국은행은 통화 스와프가 한국에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세계 9위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가진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이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잘못이 아니라 국제통화 시스템의 중대한 결함 때문이요, 이는 설계자인 미국의 잘못이다. 한국이 가진 미국 국채를 시장에 내다 팔면 미국 금리가 오른다. 미국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나아가 한국은행은 1950년 미 연준 도움으로 세워진 ‘형제 중앙은행이라는 점도 상기시켰다(필자가 네이든 시트 연준 국제국장에게 누누이 강조했다). 논리와 감정이 섞인 그런 설득 속에 2008년 한미 통화 스와프가 체결됐고, 2020년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재계약됐다. 지금 세계화가 후퇴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계기로 해외에 진출했던 미국 공장들이 되돌아가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코로나19 위기 이후 공급망 차질 속에서 에너지와 주요 원자재 공급 채널을 확장하려고 몸부림친다. 세계화를 넘어 경제안보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통화 스와프는 외교수단’ 단언도 세계화의 후퇴 속에서 한국은행 출신 이코노미스트(강태수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는 중앙은행 간 통화 스와프가 경제가 아니라 외교 수단이라고 단언한다. 미국의 경제안보 차원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세우기를 바란다면 한국도 거기에 상응하는 흥정거리를 통화 스와프에서 찾으라고 주문한다. 15세기 유럽에서는 백반이 오늘날 반도체에 해당했다. 무슨 옷을 만들건 옷감에 물을 들여야 했고, 그래서 착색제인 백반이 필요했다. 백반의 독점적 공급자였던 메디치 가문은 그것을 이용해 약소국 피렌체의 안보를 교황청과 흥정했다. 교황청과 메디치 가문의 백반계약은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에 지배됐다. 그것이 세상이다. 새로운 정부의 제일 중요한 과제도 경제안보다. 강조점은 ‘안보’에 있다. 그러면 새 정부는 통상 기능을 어디에 둬야 할까. 한국은행 자문역
  • 美, 베트남 철군 시작… ‘반전·반문화의 절정’ 1969년 저물어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3>]

    美, 베트남 철군 시작… ‘반전·반문화의 절정’ 1969년 저물어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3>]

    1969년 1월 20일 리처드 닉슨은 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로저스(1913~2001)를 국무장관에, 하원의원 멜빈 레어드(1922~2016)를 국방장관에,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휘한 존 미첼(1913~1988)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닉슨은 또한 헨리 키신저(1923~)를 안보보좌관, 오랜 참모였던 밥 핼더먼(1926~1993)을 비서실장, 그리고 존 얼릭먼(1925~1999)과 찰스 콜슨(1931~2012)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측근들이 포진한 닉슨 백악관 닉슨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주된 임무는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했다. 닉슨은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국무부를 불신해서 로저스 국무장관보다 키신저가 베트남 문제 등 대외정책을 주도하게 됐다. 닉슨 백악관은 철저하게 상명하복 방식으로 운영돼 케네디 백악관 시절과는 인적 구성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인근의 휘티어대학을 졸업하고 듀크대 로스쿨을 장학금으로 다닌 닉슨은 동부 엘리트, 특히 하버드대 졸업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듀크대는 닉슨이 다닐 적에는 오늘날 같은 명문대학이 아니었고, 닉슨은 졸업 후 큰 로펌에 자리잡지 못했다. FBI에도 취직을 못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를 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 후 닉슨은 그 지역 공화당 기업인들에 의해 하원의원 후보로 추대돼 현직 민주당 의원을 꺾고 당선됐다. ●하버드 출신을 혐오한 닉슨 닉슨은 하원 비미(非美)활동위원회 위원으로 앨저 히스(1904~1996)를 거세게 추궁해 명성을 얻었다. 청문회에서 히스는 자신이 하버드대를 나왔음을 내세워서 닉슨을 격분하게 만들었는데, 히스는 위증죄를 선고받고 복역했다. 닉슨은 1950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민주당 후보 헬렌 더글러스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닉슨은 상대방을 공산주의자로 공격하는 사람으로 인식됐으나 소련이 붕괴한 후 공개된 비밀문서는 히스가 실제로 소련 간첩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초선 상원의원이던 닉슨은 아이젠하워에 의해 러닝메이트로 발탁돼서 부통령을 지냈고, 1960년 대선에서 하버드 출신인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했다. 동부 엘리트, 그리고 이들이 장악한 언론에 대한 닉슨의 적대적 감정은 그의 정치적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닉슨은 무엇보다 베트남전쟁을 명예롭게 매듭짓겠다는 공약을 지켜야 했다. 미군 수뇌부는 베트남전쟁은 승리할 수 없으며 미군이 철수하면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점령될 것으로 판단했다. 닉슨과 키신저, 그리고 레어드 국방장관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하지만 닉슨은 전쟁을 끝내더라도 미국의 위신이 손상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미국은 국가 체면을 위해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닉슨은 북베트남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됨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믿었다.●보급기지 캄보디아 폭격도 닉슨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9년 2월 말, 북베트남군이 공세를 강화해서 3주일 동안 미군은 1100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격분한 닉슨은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보급 기지를 비밀리에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해 남베트남으로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내고 있어서 미군 지휘부는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보급 루트에 대한 폭격을 주장했지만 존슨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로저스 국무장관과 레어드 국방장관이 난색을 표명했음에도 닉슨은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공습을 강행했다. 3월 18일 괌 기지에서 발진한 B52 폭격기 편대는 베트남과 접해 있는 캄보디아 영토 내에 폭탄을 퍼부었다. 조종사들은 남베트남의 베트콩 지역을 폭격하는 줄 알았으나 마지막 순간에 캄보디아 영내로 진입해서 폭격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대규모 폭격으로 2차 폭발이 일어나는 등 북베트남 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쟁이 캄보디아로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닉슨은 전쟁을 확대하면서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해야만 했다. 6월 8일 닉슨은 미드웨이에서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를 만나서 남베트남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미군은 점차 철수할 것임을 통보했다. 닉슨은 이를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化)’라고 불렀다. 그해 8월부터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반(反)문화와 반전(反戰) 운동 1960년대는 장발과 청바지, 마리화나와 록 뮤직으로 대표되는 히피 문화가 성행했다. 반전(反戰)·평화 운동과 결부된 이 같은 ‘반(反)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은 1969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 7월에 개봉된 영화 ‘이지 라이더’는 대표적인 반문화 영화로 손꼽힌다. 8월 15~18일 뉴욕 근교의 농장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에는 미국 전역에서 젊은이 40만명이 몰렸다. 나흘 동안 진행된 록 뮤직 페스티벌에는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조 코커, 존 바에즈, 제퍼슨 에어플레인 등이 출연했다. 발 디딜 곳도 없이 모여든 히피 차림의 젊은이들은 록 음악에 열광하면서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와 사랑을 요구했다. 8월 8~10일 로스앤젤레스에선 배우 샤론 테이트 등 7명이 찰스 맨슨 일당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를 꿈꾸면서 히피 집단생활을 하던 맨슨과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이 악마 의식을 치르면서 희생자를 살해해서 미국인들은 히피가 위험하기도 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 사건으로 ‘1960년대 반문화’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0월 15일 워싱턴에선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모라토리엄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25만명의 군중은 피켓을 들고 워싱턴 거리를 누비면서 전쟁 반대를 외쳤다. 뉴욕에서도 같은 시위가 열렸는데, 존 린지(1921~2000) 뉴욕시장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뉴욕 시청에 반기(半旗)를 게양했다. 런던의 미국 대사관 앞에선 옥스퍼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빌 클린턴이 소규모 반전 집회를 주도했다. 11월 3일 닉슨 대통령은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 연설을 했다. 닉슨은 미국에는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하려는 시끄러운 소수와 현실에서 일하는 위대한 조용한 다수가 있다면서, 자기가 추구하는 베트남 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11월 12일 시모어 허시 기자가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중 베트콩을 수색하러 나간 미 육군 병력이 밀라이 마을에서 베트남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했음을 폭로했다. 처참하게 살해된 여자와 아이들의 사진이 공개돼 충격을 주었지만 여론은 학살에 참여한 장병들보다는 베트남에 군대를 보낸 정책 결정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11월 15일 워싱턴에서 열린 2차 모라토리엄 시위에는 50만명이 참가했다. 피트 시거, 존 덴버, 피터 폴 앤드 메리 같은 대중 음악가들이 평화를 요구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격려했다.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에선 25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샌프란시스코 고등학생 절반이 학교에 가지 않고 시위에 참여했다. 혼돈의 196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중앙대 명예교수
  • 中 외교부장, 美 겨냥해 “대만은 중국의 일부” 맹비난

    中 외교부장, 美 겨냥해 “대만은 중국의 일부” 맹비난

    중국이 미중 수교 공동성명을 낸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 양국 관계가 오히려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맹비난 했다. 대만 중앙통신은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이 선언된 지 올해로 50주년 기념대회에서 비대면 화상 회의에 참여한 왕이 외교부장이 거듭 ‘하나의 중국’에 대한 원칙을 미국이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고 보도했다. 상하이 공동성명은 지난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양국 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할 것을 약속한 공동 선언이다. 당시 닉스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양국 간의 선언은 양국 수교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에 앞서 1979년 1월 1일 대만과의 수교를 단절하고 같은 해 중국과 정식 수교한 바 있다. 상하이 공동성명 이후 미중 양국은 총 100곳의 우호 주(州)와 466곳의 우호 도시를 지정해 운영하고 코로나19 사태 발생 이전까지 매주 300편 이상의 국제 항공편을 운항해왔다. 또, 매년 500만 명 이상의 양국 국민이 방문해 온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왕이 부장은 최근 불거진 양국 사이의 갈등과 대만을 통한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훼손했다는 주장을 통해 미국의 태세 전환에 대해 강한 비난의 메시지를 냈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화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왕이 외교부장은 “중미 양국 관계는 수교 이후 매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상태”라면서 “그 원인은 양국이 50년 전 약속했던 상하이 공동성명이 확립한 원칙(하나의 중국)과 정신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 책임을 미국에게 돌렸다. 왕이 부장은 이날 회의에서 줄곧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이에 대해 미국이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집중해 목소리를 냈다. 그는 “미국에게 중국은 오직 하나의 중국만 있어야 한다”면서 “이미 50년 전 중미 양국은 대만의 존재에 대해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미국이 인식하고 이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이 일명 ‘대만 관계법’을 제정해 양국이 공동으로 선언한 상하이 공동성명의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그는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만 문제는 매우 명확하다”면서 “중미 양국은 또 다시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에 놓였다. 평화 공존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 충돌과 대항의 시대로 돌입해야 할 것인가의 선택은 사실상 50년 전 상하이 공동성명에 모두 담겨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이 이번에 수면 위로 올린 사안은 미국이 대만의 독립에 대한 각종 지원과 내정 간섭, 대만을 이용해 중국의 성장을 제어하려는 시도 등이다. 하지만 왕이 부장은 비난의 목소리와 동시에 코로나19 사태 극복 등 양국이 힘을 모아 강대국으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전달했다. 왕이 부장은 “세계는 이미 냉전 체제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다”면서 “양국이 서로 상생하는 길을 찾아서 강대국으로의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조기 극복을 위해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물량의 백신을 공급해야 한다”고 했다.
  • 미중→미중러 구도로 만든다… ‘천하삼분’ 새판 짜는 푸틴의 야욕

    미중→미중러 구도로 만든다… ‘천하삼분’ 새판 짜는 푸틴의 야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전에 나서면서 서방세계와 러시아 간 무력 충돌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경고에 개의치 않고 침공을 단행한 속내에 관심이 모인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추가 동진(東進)을 막겠다”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정확히 50년 전인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굳어진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뒤엎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현 미중 양대 강국(G2) 구도를 미중러 3국의 ‘천하삼분’ 구도로 바꾼 뒤 중국과 러시아가 손잡고 미국을 압박하겠다는 계산이 담겼다는 것이다.24일(현지시간) 타스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새벽 5시 50분쯤 국영방송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승인한다는 긴급 연설에서 “러시아는 더이상 우크라이나의 위협을 용인할 수 없다. 나토의 추가 확장 및 우크라이나 영토 활용을 허용하지 않겠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핵무장 시사도 허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서방의 제재에도 나토가 러시아 턱밑까지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국 및 서방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푸틴은 구소련 붕괴 당시 나토가 약속한 (동진 금지 등) 안전보장 약속을 어기고 안보를 침해했다고 본다”며 “그는 나토가 독일 동부로 군사력을 확장하기 전인 1990년대 수준으로 군사력을 줄이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구소련의 붕괴를 “20세기 러시아에 벌어진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하곤 했다. 할 수만 있다면 1991년 소련의 붕괴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속내다.푸틴의 야망이 더 높은 곳에 있다는 지적도 많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미소 냉전 종식 구도를 다시 설계하겠다는 것 이다. 러시아가 중국을 설득해 미국에 전면적으로 맞서는 ‘천하삼분지계’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푸틴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이 1972년부터 미국과 손을 잡고 추구해 온 (서구세계 중심의) 세계화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푸틴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승부가) 끝난 게 아니다’라는 격언을 마음에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4일 푸틴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베이징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앞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미국과 유럽의 관리들이 ‘독재국가들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고 맹비난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중러 밀착이 백악관의 오판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라는 시각도 있다. 워싱턴의 여러 외교정책이 중러 양국을 결속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미국을 스스로 고립시켰다는 것이다. 주러 미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은 “푸틴은 다음주 러시아 증시를 걱정하지 않는다. (서구국가의 대러 제재로) 큰 피해를 볼 올리가르히(신흥재벌)도 안중에 없다”며 “그가 신경쓰는 건 ‘30∼40년 뒤 역사책에 내가 어떻게 기술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제재가 푸틴의 계산을 바꿀 것으로 본다면 순진한 생각”이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 으름장’ 정도로는 푸틴 대통령의 야욕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 [글로벌 In&Out] 대선 후보 TV토론, 미국 경험이 주는 시사점은/서정건 경희대 교수

    [글로벌 In&Out] 대선 후보 TV토론, 미국 경험이 주는 시사점은/서정건 경희대 교수

    미국 정치의 오래된 딜레마 중 하나는 과연 대통령이 소통자로 성공할 것인가, 혹은 선동가로 전락할 것인가 여부다.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했던 미국의 제헌가들은 대통령이 국민을 선동해 다수의 횡포를 초래할 가능성을 두고 근본적인 우려를 품었다. 건국 헌법에서 연방 의회를 국정 운영의 중심체로 자세하게 규정하고 대통령 권력에 관해서는 짧은 서술에 그쳤던 이유다. 그런데 20세기 초반 산업화 시대의 폐해로 인해 미국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 계급 투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새로운 우려 와중에 대통령의 설득 권력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6년 열차 운임을 규제하는 법안의 통과를 위해 전국을 돌며 국민 지지를 구하는 방식으로 의회를 압박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대통령의 적극적인 정책 리더십은 미국 정치의 관례가 된다. 하지만 트럼프의 등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선동가 대통령을 막지 못하는 미국 정치 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통령이 위대한 소통자가 될 것인지 위험한 선동가가 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을까. 유권자가 이를 직접 유추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대선 후보 TV토론이다. 1960년 아이젠하워의 퇴임으로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를 놓고 젊은 상원 의원 케네디와 부통령 닉슨이 격돌했고 최초의 TV토론이 이루어졌다. 라디오로 토론을 들었던 사람들은 닉슨이 선전했다고 평가한 반면 TV를 시청한 대다수 유권자들은 케네디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8년 후 다시 대권에 도전해 기어이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던 닉슨은 다음 TV토론을 잘했을까.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1976년에 이르러서야 대선 후보 TV토론이 다시 성사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선 TV토론회는 법률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비영리 사립기관에서 주관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TV토론에 의해 영향을 받을까. 미국 사례는 토론을 망쳐서 표를 손해 본 후보들이 훨씬 많음을 보여 준다. 동유럽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실언으로 냉전 시대 군 통수권자 이미지에 스스로 먹칠을 했던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 토론 중간에 손목시계만 바라보다가 결국 동문서답을 해 버린 1992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상대 후보가 무식한 발언을 한다며 한숨만 내쉬다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2000년 앨 고어 부통령 등이 예다. 한편 1984년 재선에 나선 당시 최고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상대 당 후보의 젊은 나이와 경험 부족을 굳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유머 발언으로 경쟁자마저 웃게 만든 명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토론 중에 나온 “딱 걸렸어”(gotcha)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해 선거에서 진 적은 없다. 대부분 후보 자신의 실언이나 태도 문제로 토론을 망치고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미국이 우리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사회자의 역할이다. 공평성에 치중한 나머지 우리나라 토론 진행자는 시간만 재고 개입은 삼간다. 미국의 경우 각 방송사의 신뢰받는 베테랑 뉴스 진행자들이 토론 사회자로 나서서 후보들에게 이슈별로 질문을 던진다. 주도권 토론이라는 허울 아래 사회자 대신 후보들이 서로 곤란한 질문을 준비해서 약점만 캐묻는 것이 한국 규칙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대통령이 되는 전제 자체를 거부하느라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지 못하는 데 있다. 미국과 중국을 다 잡을 복안은 무엇인가. 거대 야당을 설득할 자신과 전략이 있는가. 후보의 소통 능력과 정책 입장을 알아보는 TV토론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우리 실정에 맞는 개선책부터 토론해야 할 때다.
  • 李측 “이재명 게이트 지킨다는 뜻” vs 국민의힘 “국민 우롱”

    李측 “이재명 게이트 지킨다는 뜻” vs 국민의힘 “국민 우롱”

    강훈식 “전문 안 봐 쉽게 평가 어려워”국민의힘 “황당한 궤변” 일갈김웅 “코리아 게이트는 인천국제공항이냐”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2일 대장동 민간업자 대화 녹취록에 언급된 ‘이재명 게이트’를 두고 “입구에서 지킨다는 뜻의 게이트”라고 주장했다. 강 의원은 민주당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이다. 강 의원은 이날 오전 CBS 라디오 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월간조선이 이미 보도를 했었던 건데 국민들이 좀 잘 모르고 있었던 부분이다. 이재명 게이트의 의미를 무엇으로 파악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강 의원은 “제가 알기로는 저게 이재명 때문에 일이 안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로 저는 알고 있다”라며 “입구에서 지킨다라는 그런 의미의 게이트인 것 같다. 전문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녹취록 속 게이트를 정치가 관련 비리 의혹을 뜻하는 게 아니라 대장동 민간업자들이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가 입구(gate)에서 지키고 있기에 일이 잘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선대본부는 ‘쇼츠(짧은) 논평’을 통해 “초등학생 영어 수준도 안 되는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이라며 “황당한 궤변으로 국민을 우롱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박연차·이용호·신정아 게이트 등 수많은 게이트의 주인공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위인들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유상범 의원은 녹취록 관련 기자회견 후 취재진과 만나 “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씨가 ‘최순실 비리’를 막으려는 게이트였느냐”라며 “변명하려는 노력은 좋은데 국민이 듣기에 ‘말이냐 막걸리냐’ 정도의 비아냥은 안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이 대표는 SNS에서 강 본부장 발언을 공유하며 “긴 말 안 하겠다. 민주당도 이쯤 되면 공직후보자 기초자격시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라”고 했다. 김웅 의원은 SNS에서 “워터 게이트는 수문 관리인이고 코리아 게이트는 인천국제공항이더냐”라며 “이재명 게이트가 슬슬 열리니 완전 멘붕 오는듯”이라고 적었다. 김 의원이 언급한 워터 게이트는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비밀 공작단이 워터 게이트라는 빌딩에 있는 민주당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스캔들이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전날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통령 후보 4자 TV 토론에서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와 정영학 회계사의 녹취록 내용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이 후보는 녹취록 내용을 담은 패널을 들고 “‘윤석열은 원래 죄가 많은 사람이야’ 이게 녹취록이다”라고 주장했다. 윤 후보는 이에 “그 사람들은 이 후보 측근”이라며 “제가 듣기론 그 녹취록 끝에 이재명 게이트란 말을 김만배가 한다는데 그 부분까지 포함해 말씀하시는 게 어떠냐”고 응수했다. 윤 후보는 “제가 듣기론 그 녹취록 끝에 이재명 게이트란 말을 김만배가 한다는데 그 부분까지 포함해 말씀하시는 게 어떻냐”라고 했다. 이에 이 후보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주장하며 “허위 사실이면 후보에서 사퇴하겠냐”고 반박했다. 이에 월간지 월간조선은 이재명 게이트 발언 내막을 공개한다면서 지난 2020년 10월 26일 녹음된 녹취록 캡처본 화면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녹취록에는 정영학 회게사가 “일단 뭐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해보죠. 해보고”라고 말하자 김씨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고 한다. 그 후 정 회계사는 “안 되시더라도 뭐”라고 하고 김씨는 “스트레스 안 받아”는 등의 같은 맥락 대화를 이어갔다. 또한 정 회계사는 “현찰을 너무 많이 쓰지 마시고”라고 하자 김씨는 “응. 오리역이나 신경 쓰자고. 형이 오리역을 해볼게. 그러면”이라고 한다. 정 회계사가 다시 “예”라고 하자 김씨는 “했으니까 망정이지. 이재명 게이트 때문에”라고 하고 정 회계사는 다시 “예”라고 했다는 것으로 나와 있다.
  • 민주당 “‘소가죽 굿판’ 무속인, 코바나콘텐츠서 축사”…무당 연루설 ‘맹공’

    민주당 “‘소가죽 굿판’ 무속인, 코바나콘텐츠서 축사”…무당 연루설 ‘맹공’

    김의겸 “무속인 축사 관례인가…대통령은 등 보낸 적 없어”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무속인 연루설’에 대해 추가 의혹을 제시했다.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6일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가죽을 벗기는 굿판을 벌인 무속인 이종일씨가 윤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대표로 있는 코바나콘텐츠 주최 행사에 참여해 축사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공교롭게도 소가죽 굿판에서 실제로 칼춤을 췄던 이씨가 코바나콘텐츠가 주최한 행사에 르코르뷔지에전에 등장한다”면서 “코바나콘텐츠 행사는 무속인들의 축원을 받는 것이 관례였던 건가”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씨가 직접 행사 모습을 찍은 사진과 다른 사람이 이씨의 축사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을 공개했다. 앞서 김 의원은 지난달 23일 건진법사와 혜우스님이 코바나콘텐츠 주최 ‘마크 로스코’전의 VIP개막식 행사에 참석한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이종일씨가 서울에서 열린 코바나콘텐츠의 야심찬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 것도 정말 우연이고 김건희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냐”면서 “더이상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라”고 해명을 촉구했다. 김 의원은 전날 제기한 연등 행사 관련 국민의힘의 반박을 일축했다. 김 의원은 지난 2018년 9월 9일 충주시 중앙탑에서 열린 ‘2018 수륙대재’의 사진 속 윤 후보와 김씨의 이름이 적힌 연등을 보여주며 무속인 연루설을 제기했다. 이에 국민의힘 측은 대통령의 이름과 민주당 인사들의 이름이 적힌 연등도 있다고 반발하며 김 의원을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국민의힘 측에서 “대통령의 이름도 보인다”고 반박한 것에 대해서 “대통령은 결코 이 행사에 등을 보낸 사실이 없다”며 재반박했다. 김 의원은 “내가 직접 확인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에 전화해 확인해보면 똑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충북지사, 충주시장, 충주시의원의 연등에 대해서는 “이 행사는 표면상 ‘2018 충주세계소방관경기대회 성공기원’을 내세웠다”면서 “지역 행사에 지역 정치인들의 이름이 활용되는 건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서울중앙지검이 충주와 무슨 관련 있나”고 되물었다. 이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 사례를 들며 “주술도 문제지만 대통령 후보가 거짓말 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 정치 풋내기 케네디, 당당한 모습으로 노련한 닉슨 압도

    레이건, 특유의 유머로 카터 제압듀카키스, 기계적 답변으로 패배 TV토론이 대통령 선거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미국에서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격돌했다. 현직 부통령인 노련한 닉슨과 만 43세의 정치 풋내기 케네디의 대결은 결과가 뻔한 승부였다. 하지만 TV토론을 시작하면서 이변이 벌어졌다. 잘생긴 외모에다 시종일관 당당하고 활기찬 모습을 보인 케네디는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의 닉슨과 대비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대권을 거머쥔다. 대선 TV토론은 1964~1972년 열리지 않다가 1976년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토론회로 재개됐다. 포드 대통령은 토론회에서 “동유럽에 (구)소련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해 사실관계도 잘 모르며 군 통수권자로서의 자격이 의심된다는 질타를 받게 되고 선거에서 진다. 1980년 TV토론에선 영화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특유의 유머와 여유를 앞세워 카터 대통령을 압도하고 승리를 거머쥔다. 1984년 대선에서 레이건은 월터 먼데일 민주당 후보와 붙었는데 TV토론에서 만 73세인 나이에 대한 질문을 받자 “나는 상대방 후보가 대통령을 하기에 너무 젊다든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다”고 재치 있게 받아치며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재선에 성공한다. 1988년 공화당 조지 H W 부시와 맞붙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는 “만약 아내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하면 사형제를 찬성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기계적인 답변을 반복하다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을 얻고 선거에서 패배한다. 2000년 TV토론에서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와 붙은 앨 고어 부통령은 부시의 발언 때 계속 한숨을 내쉬었고 거만하고 참을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으며 지지율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패배한다. 2016년 9월 29일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의 첫 TV토론은 사상 최고치인 무려 8400만명이 시청한다. 토론 직후 CNN이 여론조사를 한 결과 힐러리가 잘했다는 의견이 57%대34%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트럼프가 이겼다.
  • 닉슨·마오처럼… 바이든은 악수로 신냉전 악수 피할까

    닉슨·마오처럼… 바이든은 악수로 신냉전 악수 피할까

    1972년 2월 21일. 중국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 미 공군 1호기 ‘에어포스원’이 착륙했다. 리처드 닉슨(1913~1994) 당시 미 대통령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트랩을 밟으며 걸어 내려왔다. 마중 나온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악수로 그를 맞이했다. 이날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마오쩌둥(1893~1976) 중국 국가주석과 1시간 동안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국전쟁(1950~1953)으로 적이 된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대변화’였다. 닉슨 전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 방문해 미중 화해의 서막을 연 지 정확히 50주년이 됐다. 미국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고, 중국은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하며 패권을 넘보고 있다. 미중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외신들은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언론들은 두 나라가 체제와 이념의 벽을 허물고 변화와 화해를 위해 손잡았던 유연함을 다시 보여 달라는 주문을 내놓고 있다. 14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닉슨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1972년 2월 21∼28일)을 두고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며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깬 두 정상의 결단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닉슨은 대표적인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려면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내 ‘천하삼분지계’를 구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과 손잡으면서 역설적으로 공산주의 도미노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해 ‘균형자’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미 우드로윌슨센터에 따르면 김일성 당시 북한 국가주석은 1975년 4월 중국을 찾아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두 번째 남침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덩샤오핑 당시 부주석은 “더이상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미국과 중국의 우호적 관계를 상징했던 판다외교는 50년 후 위기를 맞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3일(현지시간) “닉슨의 중국 방문 50주년을 맞아 미 공화당 하원의원이 중국의 판다외교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전했다. 우호국에 천연기념물인 판다를 임대하는 중국의 외교 전략은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낸시 메이스 의원은 “판다외교가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가리고 있다”며 “이를 바꿔야 한다”는 법안을 냈다. 미중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양국 모두 닉슨의 중국 방문 50주년을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0일 정례 브리핑에서 “당시 닉슨 대통령이 합의한 상하이 코뮈니케는 ‘하나의 중국’ 등 양국 관계 발전의 원칙을 확립했다”며 “중미 양측은 가까운 시기에 닉슨의 방중과 상하이 코뮈니케 발표를 기념하기 위한 활동을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베트남 평화협상, 남부 선벨트 부상… 美 정치판도 바꾼 ‘1968년 대선’

    베트남 평화협상, 남부 선벨트 부상… 美 정치판도 바꾼 ‘1968년 대선’

    험프리와 박빙 접전 벌이던 닉슨양다리 걸쳤던 키신저와 손잡고대선 전에 베트남 평화협상 막아 민주당, 텃밭 남부서 쓰라린 참패변화 원했던 젊은층에 외면받아‘보수 공화당’의 장기 집권 길 터1968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치열한 당내 경선을 치렀다. 민주당은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고 연초에 돌풍을 일으킨 유진 매카시가 동력을 상실함에 따라 뒤늦게 뛰어든 휴버트 험프리(1911~1978) 부통령이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미니애폴리스 시장과 상원의원을 역임한 험프리는 린든 존슨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됐는데, 민권법에 찬성하는 등 중도적 진보 성향이었다.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의원 자격을 두고 혼선을 빚는 등 소란스러웠다.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했던 대의원들이 조지 맥거번(1922~2012) 상원의원을 지지함에 따라 진보 성향 대의원 표가 매카시와 맥거번으로 갈려서 존슨 대통령이 지지하는 험프리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대회장 밖엔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젊은이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무장한 시카고 경찰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돼 큰 충격을 주었다. 대선 후보로 선출된 험프리는 메인주 출신인 에드먼드 머스키(1914~1996)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중서부 출신을 대통령 후보, 그리고 동북부 출신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함으로써 민주당은 남부와 남서부를 소외시켰다. 케네디, 매카시, 그리고 맥거번을 지지했던 젊은 지지자들은 대선후보 지명이 대의원 투표로 결정되는 전당대회와 기성 정치에 절망했다.●험프리·닉슨·월리스가 벌인 3파전 마이애미비치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선 리처드 닉슨(1913~1994)이 무난하게 후보로 선출됐다. 넬슨 록펠러(1908~1979) 뉴욕 주지사, 조지 롬니(1907~1995) 미시간 주지사 등이 후보 지명전에 나섰으나 닉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닉슨은 젊은 나이에 부통령이 됐으나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는데, 8년 만에 다시 도전하게 됐다. 닉슨은 동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스피로 애그뉴(1918~1996) 메릴랜드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1968년 대선은 흑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한 투표권법(The Voting Rights Act)이 제정된 후 치러진 첫 대선이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자 의회는 미뤄 두었던 공정주택법(The Fair Housing Act)을 통과시켰는데, 주택시장에서 흑인 차별을 금지하는 이 법에 대해 남부 백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앨라배마 주지사를 지낸 조지 월리스(1919~1998)가 제3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인종주의자인 월리스는 자기가 남부에서 승리하면 어느 누구도 선거인단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하며, 그렇게 되면 대통령 선출은 하원으로 넘어가고 이 경우 각 주가 1표씩 행사하기 때문에 자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베트남 평화 협상과 헨리 키신저 현직 부통령이던 험프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모호한 자세를 취했으나 나중에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9월까지만 해도 닉슨은 험프리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으나 선거일이 다가오자 그 차이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닉슨은 자기가 당선되면 임기 중 베트남전쟁을 ‘명예로운 평화’로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닉슨은 존슨 행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급진전시킬 가능성에 촉각을 세웠다. 투표일을 앞두고 존슨 대통령이 그 같은 발표를 하면 전쟁 종식을 원하는 유권자들이 험프리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닉슨은 존슨과 험프리가 평화협상을 ‘10월의 깜짝쇼’(October Surprise) 카드로 사용해서 막판에 선거 국면을 바꿀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존슨 행정부와 북베트남 정부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평화협상에 대한 은밀한 정보를 닉슨에게 전달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헨리 키신저(1923~)였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하버드 교수가 된 키신저는 넬슨 록펠러에게 외교정책을 조언했다. 정부의 대외관계에 대한 자문 역할도 해 온 키신저는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존슨 행정부의 협상팀에 참여했다. 진보적 성향의 공화당 정치인인 록펠러는 존슨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았는데, 록펠러가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존슨 행정부는 북베트남 정부와의 협상에도 키신저 교수를 참여시켰던 것이다. 1968년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그 정부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키신저는 민주당 정부와 닉슨 캠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닉슨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닉슨 쪽으로 기울었다. 키신저는 닉슨의 고위참모와 비밀리에 접촉했기 때문에 존슨과 험프리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해 9월 말 파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키신저는 닉슨의 선대본부장 존 미첼(1913~1989)에게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정부의 평화협상 참가를 허용할 것이며,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단하고 평화협상을 궤도에 올릴 것이라는 정보를 전달했다. 닉슨은 급류를 타기 시작한 베트남 평화협상이 자칫 근소한 차이로 좁혀진 자신의 우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닉슨은 곧바로 남베트남 사이공 정부의 티우 대통령에게 비밀리에 연락해 11월 2일로 예정돼 있는 평화협상 회의를 거부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집권하면 남베트남에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티우 대통령은 평화회담 참석 거부 의사를 발표했고, 선거 전에 평화회담을 진전시키려던 존슨 대통령의 노력은 실패했다. 사정을 전해들은 존슨 대통령은 닉슨이 반역죄를 범했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험프리 측은 닉슨이 선거를 위해 평화협상 회의를 사보타주했다고 발표하려고 했다. 심각한 상황임을 느낀 닉슨은 존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은 결코 평화협상을 저해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험프리는 이런 사실을 폭로하면 미국의 대외적 신인도가 추락할 것을 우려해 없던 일로 하기로 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닉슨 측은 환호하면서 축배를 들었다. 키신저는 닉슨 당선의 일동 공신이 됐고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키신저를 안보보좌관으로 지명했다.●공화당, 남부의 중요성을 인식하다 1968년 11월 선거에서 닉슨은 서부와 중서부, 버지니아·플로리다 등에서 승리해서 선거인단 301표를, 험프리는 동북부와 텍사스에서 승리해서 191표를, 그리고 월리스는 남부 5개 주(루이지애나, 앨라배마, 미시시피, 조지아, 아칸소)에서 승리해서 46표를 획득했다. 월리스가 몇 개 주에서 더 승리했으면 대통령 선출이 하원 결선투표로 넘어갈 수 있었다. 급격한 인종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남부 백인들은 민주, 공화 양당을 거부하고 인종차별주의자인 월리스를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공화당은 자신들이 동북부에서 지지 기반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남부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됐다. 남북전쟁 후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에서 험프리는 존슨의 고향인 텍사스에서만 승리했고 인종차별주의자인 월리스가 남부 5개 주에서 승리했으니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평화와 개혁을 희구했던 젊은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데 실패한 민주당은 더욱 보수적인 공화당 정권을 초래하고 말았다. 1970년대 들어 인구 유입이 크게 늘면서 선벨트(Sun Belt)로 불리게 된 남부는 이후 미국 정치를 좌우하게 됐다. 이처럼 1968년 대선은 미국의 정치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은 선거다. 이후 오랫동안 백악관은 남부를 장악한 공화당 대통령(레이건, 부시 부자)과 남부 출신 민주당 대통령(카터, 클린턴)이 차지했다. 중앙대 명예교수
  • [기고] 국채발행 재난지원은 요긴한 정책이다.- 유승경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원장

    [기고] 국채발행 재난지원은 요긴한 정책이다.- 유승경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원장

    정치권에서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위기의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자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여러 전문가들과 언론은 국가부채 증가가 경제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며 그 방안에 반대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부채는 현재 GDP 대비 40%대인지라 OECD 회원국의 코로나 이전 평균 수준인 110%대에 비해 아주 낮다. 하지만 재정확장의 반대진영은 한국의 특수한 몇 가지 요인 때문에 현재의 국가부채가 결코 양호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첫째, 한국은 소규모개방경제여서 국가부채 수준이 낮아도 위기에 취약하다고 한다. 이 견해는 한국경제의 위상을 크게 폄하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규모는 세계 10위로서 전 세계 GDP의 1.92%이다. 한국은 더 이상 작은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그 규모는 러시아, 브라질, 호주, 스페인, 멕시코보다 크고 이탈리아나 캐나다에 맞먹는다. 이 사실에 대해 재정확장의 반대진영은 한국은 다른 선진국과 달리 기축통화국이 아닌지라 단순비교는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축통화 주장은 이론적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기축통화는 없기 때문이다. 기축통화는 제2차대전 직후 성립된 브레턴우즈체제에서 금 가치와 연동된 달러를 지칭하던 시사용어일 뿐이다. 어떤 경제이론도 기축통화국과 비기축통화국을 구분하여 경제현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1971년에 달러까지 미국의 닉슨 대통령에 의해 금과의 교환이 정지되면서 본래적 의미의 기축통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모든 나라의 화폐는 가치를 그 나라의 주권과 경제력에 의존하는 불태환 법정화폐다. 일부에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외환준비통화로 간주되는 달러, 유로, 엔, 파운드, 스위스프랑 등을 기축통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통화들은 세계 각국이 외환보유고로 주로 보유하는 화폐를 지칭할 뿐이다. 그 화폐들이 한국의 원화와 다른 특별한 속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달러가 관행적으로 대외거래에 널리 사용되고, 유로는 회원국 간 대외거래에 사용되므로 두 통화가 외환준비통화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다른 파운드, 엔, 스위스프랑 등의 비중은 세계무역에서 그 나라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아닌 소규모 개방경제라서 재정운용에 제약이 있다는 주장은 이론적 근거가 없다. 사실 국가부채 수준은 정책의 목적이기보다는 경제상황을 반영하는 하나의 지표다. 그리고 재정지출을 늘리더라도 그에 힘입어 성장율이 국채이자율보다 높아지면 국채 부담은 오히려 줄어든다. 그와 반대로 재정지출을 제한하더라도 성장이 타격을 받는다면 국가부채 부담은 커진다. 게다가 정부는 궁극적으로 화폐의 발행자이므로 국가부채를 장기간으로 분산하여 관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나라들은 경제충격 시기에 국채를 늘려 위기 탈출의 디딤돌로 삼았고, 회복 이후에 성장을 통해 그 부담을 줄이는 식으로 재정을 운영했다. IMF의 통계에 따르면, 자본주의국가의 부채는 1930년대 대공황 발발과 함께 늘어나기 시작하여 제2차대전 중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46년에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인 GDP 대비 140%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전후 경제가 파국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황이 이어져서 국가부채 수준은 1970년대 중반까지 약 30%대로 줄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국가부채 수준의 증가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 극복의 디딤돌이었고 위기 이후의 성장으로 개선되었다. 따라서 코로나 위기가 경제순환을 단절시켜 경기가 위축된 현 상황에서는 정부가 재정지출의 확대로 어려움에 처한 가계와 기업을 돕고 성장을 회복하는 것이 정책의 관건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늘어난 국가부채는 회복 이후 성장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 12·12쿠데타 한 달 뒤, 최규하 대통령이 카터에게 전한 한국 상황은

    12·12쿠데타 한 달 뒤, 최규하 대통령이 카터에게 전한 한국 상황은

    1979년 전두환·노태우 등 이른바 신군부가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한 달이 지난 1980년 1월 20일 허수아비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신군부 쿠데타로 인한 혼란을 우려하는 카터 대통령의 편지(1980년 1월 4일자)에 보낸 답신이었다. 이 편지에서 최 대통령은 한국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조사와 관련해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대한 우려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후로 군 지휘체계가 완전히 복구되며 상황이 안정됐다.”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은 역대 대통령 비공개 기록물 11만 4176건을 공개 혹은 부분공개로 전환했다고 27일 밝혔다. 특히 역대 대통령이 각국 정상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가령 미국 아폴로 17호 우주선이 달착륙에 성공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 대통령에게 축하 서신을 보냈고, 이에 미국에서 1973년 5월 21일 회답 서신과 함께 아폴로 17호에 실렸던 태극기와 월석을 선물로 보내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월석은 현재 중앙과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1년을 평가하는 문서도 공개했다. 이 문서는 청와대가 맥킨지 서울사무소에 의뢰해 작성한 것으로 정부의 경제위기 극복과정 평가 결과가 담겨 있다.
  • 닉슨·마오쩌둥 악수 뒤엔 패권다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닉슨·마오쩌둥 악수 뒤엔 패권다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엄혹한 근현대사에서 미국과 중국은 적과 동지의 관계를 넘나드는 묘한 사이다. 1844년 마카오 인근에서 왕샤(望廈) 조약을 통해 첫 공식 관계를 맺은 이후 올해로 178년간 애증의 관계를 이어 왔다.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양국 모두 이이제이(以夷制夷)와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멋지게 구사했다. 멀리 떨어진 나라와 협력하고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대전략을 통해 국익 극대화를 관철시킨 나라들이다. 미중의 대립과 갈등이 커져만 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의 외교 전략을 모색해 본다. 1840년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굴욕적인 난징조약(1842년) 체결 뒤 최강국 영국 견제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였다. 중국은 영국을 격퇴하고 독립을 쟁취한 미국을 서구 열강의 방패막이로 활용했고 미국 역시 시장 확대를 위해 왕샤조약을 체결했다. 6·25 전쟁 당시엔 전쟁까지 벌여 숙적이 되기도 했던 양국은 20세기 냉전 당시 손을 잡고 소련을 무너뜨렸다. 물고 물리는 양국이 21세기 패권전쟁에 돌입한 것은 냉엄한 국제질서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 20년간 죽의 장막에 갇힌 중국을 극적으로 국제무대로 이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주의자 미국’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갈등을 빚어 온 중국은 1969년 소련과 무력 충돌 이후 새로운 국가안보 전략을 수립한다. 1971년 7월 9일 낮 12시 15분, 베이징 난위안(南苑) 비행장에 두꺼운 뿔테 안경의 미국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파키스탄의 칸 대통령과 만찬 도중 복통을 이유로 사라졌던 인물이 돌연 베이징 공항에 나타난 것이다. 바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였다.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 중국 수뇌부와의 극비 회동을 위한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철천지원수로 지냈던 미중 양국이 화해의 첫발을 뗀 순간이었다.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부터 닉슨 대통령은 공산진영의 넘버2, 중국을 끌어들이는 구상에 착수했다. 중소 국경 분쟁에 휩싸인 중국과 손을 잡고 당시 주적인 소련 견제에 나서야 한다는 키신저의 ‘세력균형론’을 수용한 것이다. 미국은 700년 전 중국 땅을 밟았던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딴 ‘폴로 프로젝트’라는 극비 계획을 가동했다. ‘키신저·저우언라이 극비 회동’을 통해 미중 수교의 큰 그림을 그렸고 이듬해인 1972년 2월 21일, 골수 반공론자 닉슨 대통령과 미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던 마오쩌둥 주석이 역사적인 회담을 가진다. 미국은 중소 분쟁의 틈을 노려 중국과 손을 잡고 일거에 힘의 균형을 역전시켰고 `1979년 국교를 수립한다. 소련 붕괴와 냉전체제의 종식은 세력균형을 통해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키신저 외교’의 결정판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라는 기본 틀을 유지했다. 미국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도우면서 ‘아름다운 동반자’로 불렸다.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자본주의 분업체제의 틀 속에서 중국은 경제개발에 나섰고, 중국은 그 대가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적·군사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다. 1979년 미중 수교를 주도했던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 전략이 나온 배경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국민당 장제스 정권과 연합해 대일 태평양전쟁(1941년)을 치른 전우의 사이였다. 큰 틀에서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단절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은 한국전쟁(6·25전쟁) 이후 20년에 불과하다.양국은 2018년 7월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갈등기로 접어들었다. 관세·무역 전쟁의 외피를 둘렀지만 갈등의 본질은 세계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기술 전쟁이란 시각도 강하다. 트럼프·바이든 정권이 3년 넘게 공세를 취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결사항전 의지를 다지면서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미국으로서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다. 미국이 중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시기는 2010년부터다. 중국은 그해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 주요 2개국(G2)으로 발돋움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소홀히 했던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권은 2011년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공식선언했다. 대중 포위전략이 본격화되면서 퇴로 없는 패권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중국 역시 세계 강대국으로 우뚝 서려는 대국굴기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12년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 국가주석이 세계 최강국의 꿈, 즉 중국몽(中國夢)을 전면에 내걸었다. 미중 모두 ‘투키디데스 함정’(패권국과 신흥 강대국 간의 대결)에 빠져드는 형국이다.
  • 나폴레옹도 중앙은행 압박… 대선 앞 한은 ‘신의 한 수’ 내놓을까

    나폴레옹도 중앙은행 압박… 대선 앞 한은 ‘신의 한 수’ 내놓을까

    지금 터키가 점입가경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2020년 말 자신이 임명했던 중앙은행 총재를 넉 달 만에 경질하고 후임자에게 끊임없이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그 바람에 전임 총재가 경질되기 전날 19.0%였던 정책금리가 네 차례의 인하를 거쳐 현재는 14.0%로 낮아졌다.터키에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30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1980년 좌파 정부 시절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케난 에브렌 참모총장이 주인공이다. 7년 단임제 개헌을 단행하고 1982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물가안정을 앞세운 우파적 경제정책들을 배워 갔다. 이 군사정부는 1989년 막을 내렸다. 이어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는 기존의 경제정책을 거의 그대로 고수했다. 신임 대통령 투르구트 외잘은 군사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10여년간 보수적 경제정책에 신물이 난 터키 국민들은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좌파 정부를 소환했다. 쿠데타 전에 총리만 다섯 번을 역임했던, ‘서민들의 대변인’으로 알려진 쉴레이만 데미렐을 대통령으로 뽑았다.●좌파도 우파도 중앙은행 압박 데미렐은 취임 직후 경제정책들을 급격히 좌경화했다. 그때 중앙은행 총재가 포퓰리즘적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자 곧바로 그를 경질했다. 임명한 지 넉 달 만이었다.(그때 경질된 불런트 굴테킨 총재는 터키를 떠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됐다. 필자의 은사다.) 후임 총재는 대통령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랐다. 지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파에 속하지만, 하고 있는 일은 27년 전 좌파정부와 똑같다. 좌파건 우파건 의욕이 강한 통치자는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나 조직을 적으로 간주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중국보다 더 큰 적은 연준”이라는 비난과 함께 자신이 임명한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게 “바보”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단행한 금리 인하의 폭이 크지 않다는 불만이었다. 중앙은행의 자율성 면에서 미국이 가장 앞선다고 알려져 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린든 B 존슨 전 대통령은 1965년 12월 연준이 자기 뜻을 거스르고 금리를 인상하자 당시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연준 의장을 자신이 휴가를 보내고 있던 텍사스의 개인목장으로 불렀다. 트럼프 전 대통령 이상으로 ‘마초’라고 알려진 존슨 전 대통령은 목장 입구에서 마틴을 차에 태운 뒤 직접 트럭을 몰았다. 울퉁불퉁한 목장 길을 얼마나 험하게 운전했는지 손님으로 초대된 마틴 의장은 거의 구토할 지경이었다. 현관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마틴의 망가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대통령의 보복’이라고 보도했다. 후임 대통령 닉슨 역시 연준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가를 걱정하며 금리 인상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공공연히 “마틴 의장은 1970년 중간선거에서 우리 공화당의 상원의석 15개쯤을 쉽게 날려 버릴, 위험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후임 의장을 임명할 때는 “1961년 대선에서 내가 케네디한테 진 이유가 연준의 금리 인상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라”며 저금리 정책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와 쿠데타를 하자마자 프랑스은행(중앙은행)부터 세웠다. 그런데 그 은행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806년 독일 예나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영국·프로이센 동맹을 와해시키는, 절체절명의 싸움이었다.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은행 총재에게 “6% 금리가 부끄럽지도 않나?”라는 한 줄짜리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총재는 당장 대출금리를 5%로 낮췄다. 나폴레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러시아군까지 격파한 뒤 프랑스은행 총재에게 다시 메모를 보냈다. “프랑스은행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나는 저금리 대출로 경제를 살리는 것이라고 믿소만.” 그 메모를 받은 총재는 황급하게 금리를 다시 4%로 낮췄다. 영국과 같은 수준이었다. 이후 프랑스은행은 금리 조절을 유난히 두려워했다. 정부가 중앙은행을 압박하는 면에서는 과거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았다.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부터 김영삼(YS) 당선인은 한국은행에게 무언의 요구를 했다. 한국은행은 대통령 취임식 바로 다음날 상업어음 재할인 금리를 연 7%에서 연 5%로 낮췄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 정부는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세우며 추가적인 대책을 압박했다. 두 달 뒤 한은은 무역어음과 중소기업대출 등 여타 여신금리도 2% 포인트씩 내렸다. 그런데 얼마 뒤 중국이 위안화를 33%나 대폭 평가 절하했다. 국내 수출업체들의 타격이 커서 한은은 김영삼 정부 내내 금리 인상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국제수지 적자로 이어졌고, 그 끝에 닥친 것이 외환위기다. ●대통령 눈치 살피는 중앙은행 중앙은행의 자율성은 경제정책 운용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은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미 연준의 자율성을 현재 수준으로 올려놓은 마틴 의장도 1961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새 정부를 상당히 의식했다. 금리 인하를 대신해서 정부를 만족시킬 만한 선물을 찾느라고 고민을 거듭했다. 아니나 다를까. 케네디 전 대통령은 취임 열흘 째 되던 날 마틴을 호출했다. 그 순간에 대비해 마틴이 준비한 것은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였다. 단기 국채를 매각하고, 장기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장단기 금리 차를 낮추려는 시도다.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당장 금리는 낮추지 못하지만, 정부의 국채 발행 확대 계획에 맞춰 장기 금리는 낮춰 보겠다는, 일종의 성의 표시였다. 첫 만남에서 그 계획을 들은 케네디는 아주 흡족했다. 마틴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잘해 보자”며 씩 웃었다. 얼마 뒤 기자들 앞에서 엠앤드엠스(M&M’s) 초콜릿을 가리키면서 “나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지만 마틴(Martin) 의장이 돈(money)을 잘 다루는 것쯤은 안다. 그 엠앤드엠 조합은 이 초콜릿처럼 달콤하잖아?”라면서 마틴을 한껏 띄워 줬다.하지만 오퍼레이션 트위스트의 이론적 근거는 없다. 중앙은행이 금리 수준과 장단기 금리 차를 동시에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경제학자는 없다.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는 미 연준이 가만히 있기가 뭐해서 찾아낸,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하지만 40여년 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벤 버냉키 의장이 그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를 부활시켰다. 지난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직후 파월 연준 의장도 같은 카드를 만지작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미 연준이 살아가는 법이다. 겉보기와는 다르다. ●YS 때 한은 유난히 어려운 일 겪어 정부를 의식해야 하는 것은 한은도 마찬가지다. 올해 5월 새 정부가 출범하는데, 한은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금리 인하는 어려우므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가 됐건, 여신 확대가 됐건 남들이 생각지 못한 ‘신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무작정 손을 놓고 있다가는 김영삼 정부 때처럼 시달리게 된다. 5년 내내 직원들 임금인상쯤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한은을 이끌던 사람은 조순 총재다. 경제학계의 태두인 총재가 “지금은 금리를 낮출 때가 아니다”라는 원론적 말을 던지자 한은 직원들은 그 말만 믿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말단 직원이었던 필자가 보기에도 무사태평이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 한은은 유난히 어려운 일들을 자주 겪었다. 한국은행자문역
  • 밥 돌 마지막 가는 길에도 농담 “천당에서도 투표 가능할까”

    밥 돌 마지막 가는 길에도 농담 “천당에서도 투표 가능할까”

    지난 5일(이하 현지시간) 폐암으로 98세 일생을 접은 밥 돌 전 미국 상원의원이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도 농담을 들려줬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딸 로빈이 10일 워싱턴 국립성당에서 진행된 장례식 도중 큰 소리로 아버지가 남긴 투표 사기 농담을 들려줘 숙연해야 할 식장에 웃음 소리가 터졌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전했다. “난 또 천당이 캔자스주를 많이 빼닮았을 것이란 내 생각이 옳은지 무진장 궁금하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나보다 앞서 가본 다른 이들처럼 여전히 시카고에서 투표가 가능할지 알아봐야겠다.” 세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나오려 했고 두 차례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던 돌은 삭막한 정치권에서 유머와 위트 넘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도 각인돼 있다. ‘대통령의 위트’란 책을 썼는데 국내에도 김병찬씨 번역으로 나와 꾸준히 팔리고 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도 농담 하나를 남기고 떠났다. 고인은 막역한 친구 중 한 명이었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스스로에게 바치는 얘기처럼 들리는 조사를 했는데 “용기있고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일생에 하루하루를 끝까지 살아냈다”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추모사를 통해 “우리는 25년을 함께 (상원의원으로) 봉직했다. 우리는 의견이 달랐지만 결코 서로 다르지 않았다. 난 밥이 원칙과 실용주의, 엄청난 고결함을 지닌 남자란 것을 안다”고 애도했다. 이날 장례식 도중 46년을 해로한 엘리자베스(85) 여사 옆에 의붓딸 로빈이 앉아 남편과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엘리자베스와는 1972년 처음 만났는데 정치를 하겠다는 갈망 등 닮은 점이 많았다. 둘은 3년 뒤 결혼했는데 돌은 두 번째 결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이건 행정부 때 교통부 장관을 거쳐 결국에는 상원의원의 꿈을 이뤘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로빈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점이 특이하다고 언론들은 전했는데 이날은 함께 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결단력과 위트로 일세 풍미한 밥 돌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결단력과 위트로 일세 풍미한 밥 돌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의 상징적 존재이자 미국 보수주의 정치인의 거물로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내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밥 돌 전 상원의원이 5일(현지시간)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부인이 이끄는 엘리자베스 돌 재단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고인이 오늘 아침 잠자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난 79년 동안 미합중국을 충직하게 섬겼다”고 밝혔다. CNN 방송 등에 따르면 고인 스스로 지난 2월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고 공개한 일이 있다. 1923년 7월 22일 캔자스주에서 태어난 돌은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캔자스주를 벗어난 것이 낚시 여행을 콜로라도주로 갔을 때 한 차례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한다. 영업사원이었던 부모 형편이 넉넉치 않아 네 형제가 한 방에서 지냈지만 성실히 사는 법과 종교적 믿음에 바탕한 헌신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가훈이 ‘조타수가 아니라 행동가가 돼라(Be a doer, not a steer)’여서 늘 집밖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2차 대전 기간이자 의사를 꿈꾸는 대학생이던 1942년 예비군에 등록했고, 이듬해 현역 군인으로 소집됐다. 1945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독일군 기관총 참호를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다친 동료 병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오른팔이 영구 불능이 됐고,왼팔은 최소한 기능만 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3년 넘게 병원 치료를 받았다. 기적처럼 목숨을 구해 결단력을 갖춘 인물로 각인됐다. 그 뒤 정치로 진로를 바꿔 1951년 캔자스 주의회의 하원의원이 됐고, 1961년부터 네 차례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또 1969년부터 1996년까지 캔자스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을 맡았다. 1985년부터 1996년까지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맡아 사회보장 개혁, 장애인법 등 굵직한 입법을 추진하며 초당적 협력을 끌어내는 협상력을 인정받았다. 삭막한 정치권에서 유머와 위트 넘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도 각인돼 있다. ‘대통령의 위트’란 책을 썼는데 국내에도 김병찬씨 번역으로 나와 꾸준히 팔리고 있다. 공화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1993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협상 전략을 비판하며 북한의 핵 미보유 확인, 핵 계획 중단 때까지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면 안 된다는 강경론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대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1976년에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로 러닝메이트가 됐지만 고배를 마셨다. 1980년과 1988년 공화당의 당내 경선 문턱을 넘지 못했고, 1996년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재선 도전에 나선 민주당 빌 클린턴에게 무릎을 꿇었다. 다섯 번째 상원의원 직을 맡고 있던 1996년 6월 대선에 집중하기 위해 의원직에서 사퇴한 뒤 참전 용사와 전몰 장병 추모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97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메달과 2018년 미국 최고 훈장 중 하나인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다. 2016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를 지낸 인사 중 유일하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지난해 대선 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부정선거 주장과 대선 불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24년 동안 상원에서 한솥밥을 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돌 전 의원의 폐암 소식이 알려지자 병문안을 하는 등 초당적 우정을 발휘하기도 했다. 막역한 친구 중 한 명이었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돌은 스스로에게 바치는 얘기 같은 조사를 했는데 “용기있고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일생에 하루하루를 끝까지 살아냈다”고 했다. 미망인이 된 엘리자베스(85) 여사와는 1972년 처음 만났는데 정치를 하겠다는 갈망 등 닮은 점이 많았다. 둘은 3년 뒤 결혼했는데 돌은 두 번째 결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이건 행정부 때 교통부 장관을 거쳐 결국에는 상원의원의 꿈을 이뤘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자녀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점도 특이하다.
  • LA 거주 중국계 72세 변호사 “나 중국식당 7812곳 요리 먹어본 사람”

    LA 거주 중국계 72세 변호사 “나 중국식당 7812곳 요리 먹어본 사람”

    40년에 걸쳐 미국과 캐나다, 아시아에 있는 중국식당 7812곳을 돌며 음식 맛을 보고 이를 꼼꼼히 기록한 중국계 미국인이 있다. 로스앤젤레스(LA)를 중심으로 세무 분야 변호사로 일한 데이비드 R 챈(72)을 영국 BBC가 화제의 인물로 24일(현지시간) 소개했다. 그는 다녀온 식당 이름을 일일이 장부에 적고 수천 곳의 식당 명함과 메뉴판 등도 수집해 소장했다. 하루에 한 식당을 들렀다고 치면 20년이 넘게 걸린다. 40년이 걸렸다니 이틀에 한 번 꼴은 중국식당에 들러 끼니를 해결한 셈이다. 최근 들어선 거의 매일 소셜미디어 계정에 요리 하나씩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중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음식 탐방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울러 중국음식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시점이나 중국문화가 미국에서 어떻게 역동적으로 바뀌는지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자신이 중국음식 평론가는 아니라면서도 그저 미식가(foodie)인 것도 아니라고 했다. 여전히 젖가락질에 서투르고 카페인을 피하려고 차를 거부하며 설탕과 콜레스테롤이 적은 메뉴를 집착한다고 털어놓았다. 중국식당에 가면 그가 뭘 먹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원래 광둥성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나 어릴적 중국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1950년대 처음 중국음식을 맛봤을 때도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면서 “그 음식은 미묘하지도 않았다. 연회에 갔는데 밥에 간장을 비벼 먹었다. 먹을게 없었다”고 했다.중국 음식은 19세기 초 골드러시를 좇아 낯선 땅을 찾아 온 이들이 가져온 것인데 기록에 남은 최초의 중국식당은 1849년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칸톤(광둥)’이었다. 초기 이주자 상당수가 중국 남부 광둥성의 시골마을인 토이산 (台山) 출신이었던 연유다. 이들은 먼바다로 나아가 어업을 하곤 했는데 유혈 종족 분쟁과 경제난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챈이 처음 중국 요리를 맛보던 당시 중국계 미국인은 인구의 0.08% 밖에 안 됐으며 거의 토이산 출신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LA 외곽에서도 160㎞ 떨어진 작은 마을에 모두 모여 살아 자급자족적이었다. 따라서 현지인들이나 다양한 인종의 미국인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아시아 이민자 쿼타 규제가 풀리면서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등지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중국 곳곳의 음식문화가 전해진 것이며 굳이 미국인의 입맛에 적응하지 않아도 중국식당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이즈음 미국 시민권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대학생인 챈은 중국계 미국인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중국식당들을 찾았다. 지방마다 너무 다른, 엄청 다양한 중국 요리들이 있음을 알고 고개를 내저었다. 세무 변호사로 일하며 미국의 다양한 주, 캐나다와 아시아로 출장을 가면서도 늘 중국식당을 가서 맛을 봤다. 미국에서 가장 다양하고 정통한 중국음식을 맛보려면 LA의 중국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샌개브리얼 밸리를 가보라고 권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딤섬 요리를 제대로 맛보려면 샌프란시스코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뜻밖에도 훌륭한 차우멘(해물쟁반짜장)을 맛본 곳으로 미시시피주 클라크스데일을 꼽았는데 중국계 이주민의 역사가 200년 전에 시작된 곳이었다. 가장 실망스러운 중국음식을 먹은 곳은 노스 다코타주 파고였는데 “볶음밥이 죽밥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 그 위에다 간장 소스를 들이붓는 것이었다”고 몸서리를 쳤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중국 본토에서 엄청난 숫자의 대학생들이 몰려오면서 중국음식이 “민주화됐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어떤 대학타운을 가도 훌륭한 중국 음식점이 있기 마련이다.중국음식을 평범한 미국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던 일이다.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함께 연회를 열었는데 닉슨 대통령이 젖가락을 들어 앞접시에 여러 요리를 골라 담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본 이들은 엄청 놀라워했다. 베이징 덕, 내장 튀김 등도 메뉴에 있었는데 시각적으로 충격적이었다. 닉슨의 ‘젖가락 외교’ 다섯 달 뒤에 일간 뉴욕 타임스(NYT)는 ‘외교적 해빙 후 중국식당들 만개’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중국계 미국인 식당협회의 추계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 전역의 중국식당은 4만 5000개가 넘어 맥도날드, 버거킹,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웬디스 매장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이렇게 새로운 점포가 늘어나니 챈으로선 노다지(bonanza)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방문하는 중국 식당 수 같은 목표는 없지만 가능한 많이 찾고 싶다고 했다. 은퇴한 뒤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곳을 찾고 블로그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팔로워 중 한 명은 이런 지적을 했다. 어차피 부인이 중국 사람인데 그녀가 요리하는 것을 먹어도 중국음식인데 뭘 그리 찾아 헤매는 것이냐는 얘기다. 또 주위 사람들이 중국 음식에 대해 물어보는지 궁금해 하며 그의 전문성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 미국 연쇄 살인마 게이시에 당한 희생자 신원 45년 만에 확인

    미국 연쇄 살인마 게이시에 당한 희생자 신원 45년 만에 확인

    미국의 연쇄 살인범 존 웨인 게이시는 요식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인 것처럼 행세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과 사진 한 번 찍은 것을 갖고 검증된 인물로 포장했다. 아동 보호시설을 광대 차림으로 찾아가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사회사업가 행세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성인 젊은 남성과 소년들을 유인해 강간하고 살해한 끔찍한 연쇄 살인마였다. 1968년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하며 미성년 남자 종업원을 간음한 사실이 발각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혼을 당하고 2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으로 풀려나 시카고로 이주해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재혼했지만 이내 파경을 맞았다.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살인 행각이 이어졌다. 부하 직원들은 물론, 거리를 전전하는 부랑아 등 9세부터 27세까지를 닥치는 대로 집으로 유인해 강간하고 살해한 뒤 집에 묻었다. 성적으로 유혹하거나 경관인 양 위협하거나 건설 현장 인부로 소개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집에서 나온 시신만 29구였다. 그가 살해했다고 주장한 숫자는 33명이었다. 그런데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실종된 프랜시스 웨인 알렉산더가 게이시에게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영국 BBC가 26일 보도했다. 게이시가 집의 배선이나 배관을 위한 공간에 몰아넣은 시신 더미가 워낙 오래 돼 부패한 데다 뒤엉켜 있어서 신원 확인이 어려웠다. 톰 다트 쿡 카운티 보안관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8구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2011년 묘를 다시 파헤쳐 유전자 검사를 실행했다. 당시 사라진 젊은이들의 유족들에게 유전자 샘플을 제출하게 한 뒤 미확인 시신과 대조했다. 몇 달 만에 윌리엄 조지 번디란 19세 건설 인부의 신원이 확인됐고, 2017년에는 제임스 바이런 학켄슨이란 미네소타주에서 실종 신고된 10대가 다른 희생자로 특정됐다. 알렉산더는 어머니와 이복 동생의 유전자 샘플을 제출 받아 어렵사리 실종 45년 만에 신원이 확인됐다. 미확인 시신 가운데 세 번째로 신원이 확인됐다. 1976년 아니면 이듬해에, 21세 아니면 22세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이 캐롤린 샌더스는 보안관실이 사건을 종결시켜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며 “45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랑하는 웨인의 운명을 알게 된 것은 여전히 힘겹다. 그는 사악하고 악마 같은 남자의 손에 죽었다. 이제야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돼 쉴 수 있게 됐고 웨인을 제대로 기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당국은 알렉산더가 어떻게 게이시와 엮이게 됐는지 알 수 없다며 알렉산더가 1975년 3개월의 짧은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듬해 1월 교통티켓을 시카고 시로부터 발급받은 뒤 경찰은 그가 생존해 있다는 징후를 찾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살았던 곳은 게이시가 자주 들락거린 곳이었고, 신원이 확인된 다른 희생자가 예전에 살았던 곳이었다. 경찰은 나머지 다른 희생자들의 신원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게이시는 1980년에 사형이 선고됐지만 여러 이유로 지연되다 1994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신의 범행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며 자랑스러워 했으며 수감 중에도 곧잘 그림을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작품에 서명을 남길 정도로 인기를 끈다는 얘기를 뒤늦게 알고 희생자 유족들이 사들여 그림 화형식을 하기도 했다. 자신을 처형한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주장하는가 하면 사형 집행자에게 마지막으로 “엿먹어”라고 욕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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