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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지내십니까] 송종의 전 법제처장

    [어떻게 지내십니까] 송종의 전 법제처장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서울을 떠났다. 피할까 싶어 연락도 넣지 않았다. 숱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10년간 피해온 그다. 세 시간을 달려 당도한 곳이 논산시 양촌리다. 있을까, 있더라도 만나줄까, 이런 저런 근심이 머릿속에 쌓여가는 사이 어느덧 양촌영농조합법인이란 큼지막한 글씨의 공장과 창고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동남쪽에 틀어 앉은 ‘天古齋(천고재)’란 옥호의 2층짜리 빨간 벽돌집이 객을 맞는다. 정원 잔디에 서있는 주인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성성한 백발이다. 장맛비가 걷힌 후텁지근한 오후, 흙 묻은 바지를 입고 선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오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자 “먼 길 오신 손님이니 차나 한잔 하고 가시라.”며 조합 사무실로 안내한다. 1998년 문민정부의 마지막 법제처장을 끝으로 세상에서 얼굴을 감춘 송종의씨. 참여정부에서도 법무장관, 부패방지위원장 등 요직에 천거됐으나 끝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총리를 빼고는 다 거론됐다.”고 손사래를 친다.“노무현 대통령과는 악연이 있어요. 부산지검 시절 그렇게 구속시키려고 했는데, 그때 구속시켰어야 했는데….”라고 껄껄 웃는다.87년 2월 부산에서 열린 박종철 추모집회 현장에 있다가 붙들려온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를 결재했던 이가 바로 당시 송 부산지검 차장검사였다. 그러나 이런 악연 때문에 벼슬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어서였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악연이…” 법제처장 퇴임사 말미에 그는 열여섯자 자작 한시를 남긴다.‘귀거래혜(歸去來兮) 영고무상(榮枯無常) 산수자한(山水自閑) 좌간부운(座看浮雲)’. 풀이하면 “돌아가네, 영화와 쇠락이 무상하니 자연에서 한가로이 뜬구름 바라보리.”라는 뜻일 게다.“이렇게 떠나왔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거지.”어릴 때부터 한학을 했던 그는 한시와 시조에 능하다. 검사 시절 송도사, 한학도사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첫 낙향은 95년이었다. 대검 차장이던 당시 검찰총장 자리를 놓고 1기 후배인 김기수(사시 2회) 당시 서울고검장과 경합했다. 그러나 김영삼(YS)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경남고 후배인 김 고검장에게 고배를 마시고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정으로 자유인으로 돌아간다.”며 훌훌 밤농장이 있는 이곳으로 내려왔다.YS는 1년 뒤 법제처장으로 그를 불러들인다.“검찰총장 건으로 빚을 졌다고 생각한 게야.YS가 조각을 해놓고는 통보한다고 나를 찾았던 모양인데, 휴대전화도 잘 안 되던 시절이라 집에 와보니 집사람이 ‘청와대에서 급하게 찾는다는데 무슨 큰일난 거냐.’고 하는 거야. 전화를 넣었더니 YS가 ‘니는 와 그리 연락이 안 되노, 내일부터 법제처장이니까 그리 알아라이.’라면서 응대할 틈도 안 주고 전화를 끊더라고.” ●서재에는 불경과 고서·역사서로 가득 1년여의 법제처장을 마치고는 다시 양촌으로 돌아왔다. 양촌과 연을 맺게 된 것은 71년 강경지청 검사를 하면서이다. 이곳의 국유지를 불하받아 밤나무를 심었다.10∼20년생이 가장 튼실한 열매를 맺는 나무인지라 30년쯤 된 ‘1세대’를 2000년대초 베어내고 새로 심은 ‘2세대’가 이제 탐스러운 과실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가 나무를 심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육군 법무관 시절인 67년 베트남에서 귀국할 때였다. 여수 상공에서 내려다 본 조국의 강산은 온통 황토색 민둥산이었다.“비행기에서 지은 시조 2수가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들었어.” ‘전략…눈비벼 다시 보아 민둥산을 알았네/이렇게 헐벗었더냐 꿈에 그린 내조국’,‘옷을 입히리라 초록으로 덮으리라…중략…이 결심 헛되이 마라 천지신명 다 안다’ 나무를 심어놓은 양촌으로 오면서 그는 법전을 비롯한 법률 서적을 모조리 고물상에 줬다. 법전을 불태웠다거나 창고에 넣어뒀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조합 사무실의 ‘천목헌(天目軒)’이란 서재와 집 어딜 둘러봐도 불경과 고서, 역사서뿐이다.“이렇게 사는데 시비를 둘로 갈라야 하는 법이란 게 왜 필요한가?”그런 법을 배우려고 법대에 갔지만 원래 그는 공대 체질이었다. 손수 조립한 4구 라디오로 클래식을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형이 서울대 법대를 다녔는데 전쟁통에 졸업도 못 하고 고시도 안 됐어. 그래서 집에서 인정받으려고 법대도 가고 고시도 봤어.” 사시1회의 선두주자 검사 송종의의 인생 갈림길은 그렇게 여러 차례 있었다.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애지중지하던 스무살된 아들을 교통사고로 96년 잃은 것이다. 그때의 충격으로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부인을 부산의 어느 절에서 발견했다. 묵었던 절방이 ‘천목단(天目壇)’이었다.“스님이 던져준 화두를 풀면서 열사흘을 있었는데 하룻밤도 못 잤어. 뭔가 옆구리를 쿡쿡 쑤시는 귀신 같은 게 있다는 그 방에서 이틀 이상을 버틴 스님이 없었다는데 말이야. 결국 열사흘을 보내고 그 절에서 내려왔지.”이때 부부가 법명을 받았는데, 그는 천목, 부인은 고불법(古佛法)이다. 앞 글자를 한자씩 따 양촌 집의 옥호로 삼았다. “이제는 (슬픔을)다 털어버렸다.”고 한다. 쌍둥이 외손녀(13)를 위해 ‘외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음악여행’을 쓰고 있다. 인터넷을 뒤져 A4용지로 180장 남짓 썼다. 재경부 사무관을 거쳐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사위와 딸 사이에 낳은 손녀들이다.‘딸에게 주는 편지’는 이미 340장을 탈고했다. 사시에도 합격했던 이 사위에게는 법조인의 길을 안 걷는다는 조건으로 딸을 줬다. ●농촌기업 성장시킨 성공한 귀농 사업가 가끔 찾아오는 선후배들을 위해 그는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었다. 왜 낙향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쏟아지는 질문에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어 ‘천목거사의 생활’을 비롯한 그의 인생을 53개의 파일,370분 분량으로 손수 제작했다.“파워 포인트를 1년간 배워 하는 장난”이라는 이 영상물은 귀한 손님에게만 보여준다. 사무실 거실에 아예 스크린을 걸어놓았다. 첫 관객이 법제처장 시절 모신 이수성 전 총리였다. 낙향이라곤 하지만 사실 그는 성공한 귀농 사업가라고 하는 편이 옳다.96년 세운 양촌영농조합은 “전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밤농장에서 나는 밤 40t을 비롯해 일본에 수출하는 물량까지 합치면 한해 1500t가량의 밤을 가공하고 있다. 딸기가공에도 손을 대 전국 딸기생산의 7%를 차지하는 논산 딸기를 포함해 한해 1800t을 처리한다. 뿐만 아니라 사과, 포도, 유자, 자두, 복분자, 매실 가공도 하고 있다.11년 만에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모범적인 농촌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예까지 왔으니 저녁을 먹고 가란다. 성화에 못 이긴 척 이웃한 전북 운주의 음식점으로 옮겨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서울을 오가며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골프도 치며 세상일을 전해들었을 법하다. 대통령선거와 특수부 시절 데리고 있던 김성호 법무장관의 거취가 자못 궁금한 모양이다. 결국 자리는 폭탄주로 이어졌다.66세의 나이에도 술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예닐곱잔의 폭탄주에도 꼿꼿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새 정권이 들어서도 관직에 나갈 생각이 없으시냐고 하자 그의 꼬장꼬장한 목소리는 단호하다.“꽃은 피고 지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양촌(논산)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충남의 알프스 청양 칠갑산 장곡사

    충남의 알프스 청양 칠갑산 장곡사

    ●해발 561m 7곳 명소 만든 칠갑산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대중가요로 많이 알려진 청양의 진산 칠갑산은 해발 561m의 나지막한 산. 하지만 산세는 제법 험해 ‘충남의 알프스’라 불린다. 지천(芝川)과 잉화달천(仍火達川) 등이 칠갑산을 돌아나가며 7곳의 명당을 만들어 놓아 칠갑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청(靑)자가 들어간 고장치고 두메산골 아닌 곳이 없다던가.‘칠갑산’과 ‘고추’는 알아도, 청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양은 백제의 도읍지 공주의 서쪽, 그리고 부여 북쪽과 맞닿아 있는 충남 한복판의 내륙지대다. 전국을 씨줄날줄로 엮고 있는 그 흔한 고속도로 하나 이곳을 지나지 않는다. 찾아가는 길이 얼기설기 얽혀 복잡하기는 해도 그만큼 도회지의 번잡함은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천장호 옛길 드라이브 청양관광은 곧 칠갑산 관광이라 할 만큼 대부분의 관광명소가 칠갑산 주변에 몰려 있다. 특히 청양의 속살 칠갑산을 에둘러 돌아가는 옛길 드라이브 코스는 봄철 청양여행의 백미다. 공주 방향에서 36번 국도를 잇는 대치터널 조금 못미쳐 칠갑산 샬레호텔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칠갑산 옛길 입구인 한치마을과 만난다. 조급한 경사를 오르면 마주 달리자는 듯 숲의 터널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여인의 허리를 휘감은 벨트처럼 산자락을 돌아나가는 도로를 달리면 길 양쪽으로 소나무, 참나무 등 울창하게 뻗어 오른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다. 팝콘처럼 부풀어 오른 벚꽃은 바야흐로 절정의 요염함을 뽐내고 있다. 차창을 내리자 물기 머금은 초록바람이 머리카락 위에 켜켜이 쌓인 세속의 홍진을 말끔히 씻어냈다. 포장도로에 닿는 자동차 바퀴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기 그지없는 옛길. 낭랑한 산새들의 지저귐과 싱그러운 바람소리에 온몸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간다. 칠갑산 휴게소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오른쪽으로 난 사잇길을 따라 내려갔다. 날로 푸르름을 더해가는 나무들 너머로 하늘빛을 닮은 푸른 호수가 두눈 가득 들어왔다. 천장호(天庄湖)다. 눈비 오면 오는 대로, 맑으면 또 맑은 대로, 언제든 찾는 이를 고요함과 넉넉함으로 끌어안는 곳. 산과 호수, 이방인의 발걸음, 그리고 시간마저 멈춰선 듯하다. ●대웅전이 두 곳인 장곡사 천장호를 지나 칠갑산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드니 천년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장곡사(長谷寺)가 산자락과 일여(一如)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장곡사 앞자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아흔아홉 굽이를 휘휘 돌아내린다 해서 아흔아홉계곡이라 불린다. 이렇게 긴 골짜기는 곧 지명이 되고 절집 이름이 됐다. 장곡사는 우리나라에서 대웅전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절이다. 그리고 절마다 한두 개쯤은 솟아 있는 탑이 전혀 없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두 개의 대웅전이 동남향과 서남향으로 좌향만을 달리한 채 비탈길 위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위쪽은 ‘상대웅전’, 아래쪽은 ‘하대웅전’이라 불린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언제, 어떤 이유로 두 개의 대웅전이 들어서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약사여래도량답게 기도의 효험이 유별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게 되었고, 그들을 수용할 공간확보를 위해 대웅전 하나를 더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문화재가 많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상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보물 162호로 지정돼 있고, 내부의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연화대좌는 국보 58호, 철조비로자나좌상 부석조대좌는 보물 174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장곡사의 현재 규모는 우리나라 대다수 절들이 그렇듯 역사에 비해 턱없이 작다. 예전에 스님들이 밥을 지을 때 사용했다는, 운학루 뒤편의 커다란 ‘구유’만이 장곡사의 옛 규모를 짐작케 한다. 청양군청 문화관광과 (041)430-2350. ■ 가볼 만한 곳 ▶청양 가파(嘉坡)마을 ‘아름다운 언덕’이란 이름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 청양에서도 외지기로 손꼽힌다. 버려졌던 폐교가 농촌문화체험학교로 변모되면서 체험을 통해 농촌을 이해할 수 있는 농촌전통테마마을로 탈바꿈했다. 방학 때는 물론 주말에도 방문하는 가족들이 늘고 있다.gapa.go2vil.org,(010)3073-4414. ▶고운식물원 청양읍 군량리에 자리잡은 중부권 최대의 식물원.12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올해 초 완공됐다. 약 11만평의 산지위에 6500여종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숙박시설도 마련돼 있다. 성인 8000원, 중·고생 4000원, 어린이 4000원.www.kohwun.or.kr,(041)943-6245. ●특산품 및 숙박 청양의 특산물인 구기자를 넣어 만든 구기자한과(041-943-9400)와 충남무형문화재 제30호인 구기자주(041-942-8138), 청양농협(041-943-02422)의 청양고추장이 많이 알려져 있다. 칠갑산 옛길 입구의 샬레호텔은 2인1실 주중 5만원, 주말 7만원.(041)942-2000. ●가는 길 당진:서해안 고속도로 송악 나들목→38번 국도 대산방향→석문방조제→615번 지방도→5㎞정도 직진→장고항. 당진군청 문화관광과 (041)350-3121∼3. 청양:서해안고속도로 홍성 나들목→ 29번 국도 청양방향→36번 국도→칠갑산 경부고속도로→천안분기점→천안∼논산간고속도로→정안 나들목→23번 국도 공주방향→36번 국도 청양방향→칠갑산
  • [서울광장] 손학규는 길을 찾았을까/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손학규는 길을 찾았을까/진경호 논설위원

    그의 심경이었을까. 손학규를 찾아 넘던 한계령은 먹구름에 푹 잠겨 있었다.10m 앞이 보이질 않았고, 눈이 몰아쳤다. 지난 여름 수마가 할퀸 산자락은 여기저기 벌건 속살을 드러냈고, 계곡엔 무너져 내린 바윗돌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여의도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린 지난 주말 손학규가 숨어 들어간 양양 낙산사와 설악산 봉정암엔 이렇게 눈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었다. 손학규는 아귀 힘이 센 정치인이다. 악수할 때 손을 꽉 쥐고 흔든다. 당당함과 자신감을 눌러 담아 상대 손에 건넨다. 민주화 운동도 여권 사람들 못지않게 했고,‘100일 민심 대장정’으로 땀도 흘려봤다.3선 의원에 경기지사도 했다. 언론은 ‘저평가 우량주’라 부르고, 여권은 ‘제3지대’에서 보자며 손짓한다. 그런데 정작 한나라당은 자신을 모른 체한다.127명의 소속의원 가운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고작 세 명이다. 이념 때문일까. 그가 비교적 진보라서? 아니다. 한나라당 누구도 그가 빨갱이라 안 된다는 사람은 없다. 그럼 뭘까. 그저 지지율 3위,‘넘버3’였기 때문이다. 대통령, 아니 대통령 후보도 안 될 텐데 줄 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지구당위원장 말에 이런 세태가 담겨 있다.“A가 후보가 되면 당연히 좋고,B가 돼도 A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공천은 걱정 없다.” 유력후보 A쪽에 서서 꼼짝 않는 이유다. 내가 있어야 당이 있고, 나라는 그 다음이라는 식이다. 이러니 누가 넘버3를 거들떠보겠는가. 손학규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경기지사 시절, 의원들을 한명씩 한명씩 공관에서 만나며 꾸준히 ‘대사’를 도모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그들이 온데간데없더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젊다는 ‘새정치 수요모임’ 소장파 의원들의 외면에 낙심했다고 한다. 냉정히 따져보면 그도 할 말은 없다.10년 넘게 몸 담고도 이런 당 사정을 몰랐다면 판단 부족이고, 알고도 지금껏 별무소득이라면 능력(?) 부족이다. 지사 시절 의원들을 따로 불러 줄세우기 흉내라도 낸 걸 보면 후자에 가까울 듯하다. 손학규 탈당 파동에서, 높은 지지율에 가려졌던 그와 한나라당 사람들을 새삼 보게 된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줄이 아니면 서지 않는다. 참 변하지 않았다. 서청원 전 대표가 지난 두 차례 대선 때 후보만 있고 당은 없었다고 통탄했던, 그 모습 그대로다. 손 전 지사가 눈 내리는 봉정암에서 길을 찾던 시간 한나라당에선 개나리 꽃망울 운운하는 논평이 하나 나왔다. 예를 갖췄으나 손학규는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어서 돌아와 한나라당의 꽃망울을 피우는 데 동참하라는 것이다. 여의도 봄볕에 벌써 나른해진 그들에게 낙산사의 칼바람은 그저 한가한 먼 나라 얘기였을 뿐이다. 손학규는 “깊은 산중에서 밤을 지새워 보니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고, 동쪽 하늘이 환하게 열렸다. 버리지 않으면 새 길을 만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불가의 가르침에 견주면, 모든 것이 막혀 생각마저 끊기는 은산철벽(銀山鐵壁)에 선 끝에 비로소 화두를 잡았다는 말이다. 그럴까. 정말 그는 새 길을 찾은 걸까. 만약 자기 주장대로 한나라당이 선거인단을 50만명으로 했어도 그 길로 나섰을까. 여든 야든, 남는 자든 떠나는 자든 모두가 새 정치를 외치는데, 몽매한 국민 눈엔 왜 그 길이 그 길인가.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서울 아침기온 주말까지 영하권

    5일 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발과 함께 찾아온 꽃샘 추위가 서울 등 전국에 주말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기상청 관계자는 “이번 꽃샘 추위가 비교적 장기간 기승을 부려 이번 주말까지 서울의 아침기온이 영하권을 나타낼 것”이라면서 “강풍 특보는 6일 낮 이후에나 해제될 것으로 보여 건강관리와 안전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해줄 것”을 당부했다.기상청은 6일 아침 전국의 최저기온이 영하 10도∼영하 1도, 낮 최고기온은 영하 3도∼영상 6도가 되겠으며 바다의 물결은 전해상에서 2∼6m로 높게 일다가 서해상부터 점차 낮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앞서 부산 경남 제주 호남 등 전국 대부분 지역에 눈비를 동반한 강풍이 불어 피해가 속출했다. 전북 임실군 등 일부 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경남 해안지역에는 최고 초속 28.4m로 태풍에 견줄 만큼 강풍이 불어 항·포구에 있던 소형어선과 바지선 7척이 사라져 해경이 수색에 나섰다.전국종합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BMW 첫 하드톱 ‘뉴3 시리즈 컨버터블’ 체험기

    BMW 첫 하드톱 ‘뉴3 시리즈 컨버터블’ 체험기

    |스콧데일(미국 애리조나) 안미현특파원|날씨가 건조해 은퇴한 부자 노인들이 많이 산다는 미국 애리조나주 스콧데일시. 그러나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춥고 비가 왔다. 사람 키의 세배는 됨직한 선인장들이 없었다면 사막지대임을 잊을 정도였다. 때마침 첫눈까지 내려 조용하던 도시가 온통 술렁댔다. 그 시각,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기자들은 다른 이유로 술렁댔다. 독일 BMW가 이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하드톱(천이 아닌 강판 지붕)을 얹은 ‘뉴 3시리즈 컨버터블’을 공개하는 순간이었다.3시리즈란 배기량 2000∼3000㏄의 소형 차량을, 컨버터블은 지붕이 열리는 차를 말한다. 열쇠와 일체형인 리모컨을 누르자 출시 전부터 입소문이 퍼졌던 ‘로봇 동작’이 펼쳐졌다. 도통 접힐 것 같지 않던 차량 지붕과 트렁크 뚜껑이 3단으로 착착 포개지며 제자리를 찾아 감쪽같이 숨어들었다. 변신에 걸린 시간은 22초. 지붕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리모컨을 계속 누르고 있어야 하는 게 다소 불편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감내해야 했다. 리모컨에서 손을 떼면 곧바로 ‘동작 그만’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3시리즈 ‘쿠페’(문이 두개이고 지붕이 낮은 스포츠형 세단)와는 뭐가 다른 것일까. 독일 본사에서 날아온 미셀 브라포겔씨는 “쿠페와 컨버터블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차”라고 받아쳤다. 쿠페가 질주하는 본능을 자극하는 ‘드라이빙 머신’(Driving machine)이라면 컨버터블은 오픈 드라이빙(Open driving)의 묘미를 만끽하는 차라는 설명이다. 공기냄새, 바람소리를 오감으로 느끼며 운전하는 차라는 얘기다. 여기에 뉴3시리즈 컨버터블의 또 하나의 비교우위가 있다. 디자인을 뜯어보면 낮은 어깨선(숄더라인)이 특징적이다. 게다가 거의 일자형 수평이다.“뒷좌석의 시야가 30%나 넓어져 운전자뿐 아니라 4명의 동승자 모두가 오픈 드라이빙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브라포겔씨의 설명이다. 차문을 열었을 때 물벼락(지붕의 물이 쏟아지는 현상)을 맞지 않도록 물받이를 댄 것이나, 골프백을 넣을 수 있게 확대한 트렁크 공간, 적외선 반사 시트 등도 기존의 컨버터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세심한 장치들이다. 도로로 나가보았다.‘불사조의 도시’ 피닉스를 지나 캐니언 호수쪽으로 차를 몰았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미국의 고속도로 덕분에 속도를 마음껏 올릴 수 있었다. 계기판이 시속 200㎞를 가리켰다. 그런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도로에 착 붙어 낮고 힘있게 뻗어나갔다. 바깥에서 매섭게 파고드는 바람소리만 아니었다면 속도를 줄이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드는 이 차가 추구하는 첫번째 즐거움이 아니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최고급 모델인 335i(i=가솔린)는 최대출력이 306마력이나 된다. 오후 들어 눈비가 잦아들었다. 바로 지붕을 열었다. 전혀 춥지 않았다. 몸은 따뜻하고 머리는 상쾌했다. 열선 시트와 히터를 틀었다고는 하지만 신기했다.BMW가 입만 열면 자랑하는 “역학 설계”가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튀지 않으면서 변신이 가능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지붕을 닫으면 여느 고급 세단이다. 지붕을 열면 절제된 스포츠카가 된다. 다소 보수적인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더 적합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BMW코리아 김영은 마케팅 담당 상무는 “30∼40대 전문직을 겨냥하고 있다.”면서 “처음 내놓는 하드톱인데다 변화가 잦은 우리나라 날씨에 (하드톱이)훨씬 효율적이어서 상당히 좋은 반응이 기대된다.”고 내다봤다.3월쯤 국내에 출시할 계획이다.328i(유럽에서는 330i)와 335i 두 모델만 들여온다. 가격은 정해지지 않았다.8000만원 안팎으로 예상된다. hyun@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경북 경주 남산

    [산이 좋아 산으로] 경북 경주 남산

    삼천리 방방곡곡 아름답지 않은 곳 어디 있을까마는 경주는 단연 돋보인다. 언제 찾더라도 식상하지 않은 여유와 부드러움,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신라인의 체취와 함께 남산(南山)이 있다. 그리 높지도 험악해 보이지 않는 남산엔 수많은 불적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신라 법흥왕 14년(527년) 불교가 공인된 뒤로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받들어져 수많은 절과 탑, 불상이 조성되었다.‘절들은 별처럼 벌여있고, 탑들은 기러기 날아가듯(寺寺星張 塔塔雁行)’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세월은 아득히 흘렀지만 골골에선 여전히 그 흔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포석정을 뒤로 하고 부흥골을 오른다. 구불텅하게 높이 뻗어있는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향수병에서 향기가 번져나듯 솔향기가 짙게 배어난다. 부흥사 이르기 전 만나게 되는 부엉골 마애여래좌상. 넓은 연꽃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모습이 평안하다. 부흥사 남쪽 늠비봉 넉넉한 봉우리 위엔 늠비봉 5층석탑이 태양빛을 받으며 서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시 웅장했을 남산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늠비봉 위쪽 금오정에 오르면 외동평야부터 경주 시가지까지 옛 화려했던 서라벌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주능선을 따라 금오봉을 향한다. 임도로 이어진 능선길 덕에 남산의 심원한 맛이 퇴색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 삭막한 능선길이 사라진 신라의 허망함처럼 가슴을 두드린다. 오른편 멀리 보이는 상선암 마애대좌불. 거대한 자연 암반에 조각된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란다. 불상을 만나려면 냉골로 내려서야 하는데, 지금까지 오른 것이 아깝다고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상선암과 금오봉 사잇길은 조망하기에 좋다. 이쯤에서 바라보는 마애대좌불 바위절벽도 좋고, 너른 배리들판의 모습도 시원하다. 그 너머 망산이 있고 벽도산·단석산 그리고 주변 봉우리의 어울린 모습이 마치 다도해의 섬을 연상시킨다. 금오봉(468m)에 섰다. 높이로 치자면 남산 최고봉은 고위봉(494m)이지만, 주봉은 이곳 금오봉이다. 때문에 이곳 금오봉을 목표로 남산을 오르는 경우가 더 많다.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오른쪽 용장골로 내려서는 길. 벼랑 끄트머리엔 산 전체를 기단 삼아 세워진 용장사지 3층석탑이 세상을 내려보며 서있다. 그리고 아래쪽 등성이에는 황남빵을 쌓아놓은 듯 삼륜대석불좌상이 있고, 옆쪽 바위벽엔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모습의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한 신라인의 지혜로움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이처럼 남산의 여러 유적들은 자연과 가깝다. 눈비를 맞게 하지 않기 위해 바위 처마 아래 불상을 조각했고, 놓여진 바위를 하층기단 삼아 그 웅장함을 표현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들은 박물관에 있으면 미완성이지만 이 봉우리 위에서는 완성품’이라 했던가. 용장사지에 섰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7년간 기거하며 (금오신화)를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용장사는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대가람으로, 천년 긴 세월 동안 향연이 그치지 않던 곳이었다지만, 지금은 텅 빈 한쪽에 자리한 표지판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줄 뿐이다. 부흥골을 거쳐 늠비봉∼금오정∼금오봉을 거쳐 용장골로 하산할 경우 산행시간은 6시간 정도 소요된다. 글 사진 김도훈(월간 MOUNTAIN 기자) www.emountain.co.kr
  • [05일 TV 하이라이트]

    ●튀는 지식-팝콘(EBS 오후 8시5분) 탱탱한 피부를 위해 콜라겐 화장품을 바르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한다. 콜라겐 분자가 피부를 통과하기에는 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먹는 콜라겐은 어떨까? 콜라겐 보충식품 또한 섭취한다고 해서 모두 몸 속에서 피부 속 콜라겐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다. 화장품에 관한 진실과 거짓을 알아본다.   ●솔로몬의 선택(SBS 오후 8시55분)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죽자 아이까지 팽개치고 재혼한 여자에게 아이 할머니는 양육비를 받아낼 수 있을까, 없을까? 또 딸의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고 남자 친구와의 여행을 허락했다가 딸이 덜컥 임신을 한 경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지도 알아본다.   ●사이언스+(YTN 오후 1시25분) 우리나라 국토면적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산림은 그 자체만으로 살아 숨 쉬는 커다란 생명체다. 우리 생활 곳곳에 쓰이고 있는 목재와 식재료, 에너지 등 산림은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할 수 있게 만들어 온 숨은 공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림이 주는 혜택과 한국 산림과학의 미래를 살펴 본다.   ●안녕, 프란체스카(MBC 오후 11시5분)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기가 충만한 보름달이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에 이사벨은 카사노바를 살려두기로 한다. 그러나 애증의 카사노바, 그의 “미안하다.”,“사랑한다.”는 말과 애틋한 손길 한 번에 그간의 복수심이 무너지는 이사벨은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카사노바를 믿고, 결혼하기로 하는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KBS1 오전 10시) 김장철에 담가 눈비를 맞으며 오랜 기간 숙성시켰다가 꺼내먹는 묵은지. 깊은 맛은 물론이요,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묵은 김치가 그야말로 대중적인 입맛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장과는 속재료 배합부터 다르다는 묵은지 담는 법과 묵은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별미요리 등을 알아본다.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70년 초반. 통기타 가수 1세대로, 또 사회성 짙은 노래를 불러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서유석과 함께한다.26년간 교통방송 DJ로 활약한 흥미진진한 방송 뒷이야기도 들어본다. 또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다시 나눔의 전령사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아름다운 재단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본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1)대관령·진부령의 황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1)대관령·진부령의 황태

    산에서 물고기를 구한다? 그럴 수도 있다. 일명 ‘더덕북어’로 불리는 황태는 백두대간의 심산유곡에 가야만 구할 수 있다.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영동’에 명태가 있다면,‘영서’인 산간에는 황태가 있다. 눈이 펄펄 내려서 ‘교통두절’ 운운하는 방송이 나올 무렵이면 황태의 황금빛 치장이 짙어 간다. 해마다 2월의 끝,3월이 시작될 무렵이면 봄을 시샘하는 폭설이 내리곤 해 대관령 인근 ‘하늘 아래 첫동네’인 평창군 횡계마을은 눈에 갇혀 봄을 맞는다. 황태의 본고장인 횡계 마을은 생각보다 덜 알려졌다.6·25가 끝난 1954년, 일단의 ‘함경도 아바이’들이 횡계마을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소나무 말짱을 엮어서 덕장을 세웠고, 인근 송천 개울가에는 속초와 주문진에서 할복한 명태들이 터덜거리는 낡은 트럭에 실려와 부려졌다. 이 명태를 하루쯤 얼음물에 담가 수도승처럼 ‘정화의식’을 거친 후 3단 높이의 높다란 덕장에 내걸었다.2마리씩 코가 꿰인 동태들은 이렇게 변신을 준비했다. 황태란 말은 본디 없었으나 해방 이후 단단한 북어와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황태와 북어는 출신 배경이 똑같은 생태이나 훨씬 극심하게 고난의 통과의례를 거치는 황태라서 그 결과는 판이하다. 황태는 모진 풍설을 맞으며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 전혀 다른 먹을거리로의 변신에 성공하는 것이다. ‘거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앞을 가로지른다 해서 ‘엇개’로 불리던 횡계는 산간에 둘러싸인 너른 저지대다. 옛 장터인 ‘장선말’에 덕장이 들어서서 ‘덕장모퉁이’란 지명도 얻었다. 그러나 덕장 사정은 예전과 다르다.‘원주민’이던 아바이 1세대들이 거의 세상을 떠났고, 이제는 주문진의 ‘업자’들이 땅을 임대해 겨울 한철 덕장을 꾸려 나간다.12월부터 3월까지 약 4개월동안 덕장 구경을 할 수 있다.4월부터는 말목을 뜯어내 보관한 다음 그 땅에서 밭농사가 시작된다. 다시 겨울이 오면 경작지에 말목을 세웠다가 봄이면 뜯어내고. 이렇게 횡계의 4계는 덕장과 경작지 사이를 돌고 돈다. ●바닷바람에 그냥 말린 북어와는 다르다 횡계에서 제일 오래된 ‘삼신덕장’을 운영하는 평안도 출신의 유성준(83)옹과 유영선(40)씨 부자는 소문난 ‘황태지킴이’. 원주민으로는 유일하게 지금껏 횡계덕장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원주민이라고는 하지만 월남하여 흘러 들어온지 40여년에 불과하다. 날품팔이로 전전하다 어찌어찌 함경도 아바이들이 진을 친 이곳 산골까지 발길이 닿았다. 그들은 손에 돈이 쥐어지면 모두 땅을 샀다. 평당 30원에 사들인 땅이 지금은 거금의 땅으로 변했다. 그러나 유옹 부자는 모텔과 콘도가 올라가는 금싸라기 땅에서 곁눈질 하지 않고 오로지 황태만 키워낼 뿐이다. 같은 황태라도 명칭도 제각각이다. 너무 추워서 하얗게 질려버린 백태. 이 백태는 겉이 허옇게 변해 상품 가치는 떨어지지만 창고에 넣어두면 스스로 발효하여 가까스로 상품 구실을 한다. 문제는 일명 먹태, 찐태로 불리는 흑태. 일기가 너무 따뜻해 얼지 않은 채로 마르면 딱딱한 북어가 되고 만다. 횡계 사람들은 황태와 북어를 엄정히 구분한다. 바닷가 세찬 해풍에 그대로 말린 놈을 바닥태, 즉 북어라 하며, 영서의 냇물에 씻어 차가운 서북풍에 말린 놈은 황태라고 부른다. 방망이로 두들겨 패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으니 “북어와 여자는 두드려야 맛이 난다.”는 이해 못할 속담이 예서 나왔음직 하다. 황태야 자신의 몸을 잔혹스러울 정도로 내돌려 이미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저 손으로 쩍쩍 찢어 입에 넣기만하면 될 일이다. 바람을 못이겨 덕에서 떨어지면 낙태요, 몸통에 흠집이 있거나 일부가 잘려나가면 파태요, 애초부터 머리를 잘라내고 몸통만 말린 뒤 갈갈이 찢어 안주나 반찬거리로 내는 ‘황태채’는 무두태이다. 크기에 따라서도 이름이 다르다. 큰 놈부터 왕태, 대태, 중태, 소태로 서열화되며, 앵태는 그중 작은 놈(20㎝ 정도)으로 우리가 아는 노가리급이다. 당연히 몸집에 따라 가격도 다르다. ●요즘 황태덕장엔 베링해 ‘원양태’만 가득 유옹이 입촌할 당시만 해도 이 마을에는 20여 가구만 살았으며, 냇가를 따라 10여 채의 덕장이 있을 뿐이었다. 횡계는 본디 강릉도호부 소속으로 영서에 속하면서도 동해가 지척이다. 함경도 아바이들이 덕장의 최적지를 찾다가 ‘황태명당’으로 이곳을 점찍은 것이리라. 이제 더 이상 동해 명태를 황태덕장에 내거는 일은 없다.‘지방태’는 사라지고 베링해의 ‘원양태’가 시장을 지배한다. 유옹은 “원양태가 횡계에 등장한지도 벌써 38년이나 되었다.”고 귀띔한다. 그동안 우리가 모르는 사이 명태 자원이 격감했다는 말이다. 덕장 1칸에 평균 2500마리가 걸리니,20마리를 1급(한 축)으로 치면 1칸에서 120급 정도가 건조된다. 이런 황태지만 최근에는 중국산 때문에 몸살이다.‘개도 돈을 물고다녔다.’는 얘기는 전설이 된지 오래다.“그러나 이제 맛으로 승부해야죠.” 눈길을 무릅쓰고 기꺼이 현장까지 동행해 준 이영신(평창문화원 사무국장) 시인의 훈수다.‘구름도 쉬어간다.’는 대관령 700고지의 냉랭한 기온과 극심한 일교차, 여름에도 손이 아린 송천, 영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부터 동해로 가는 통로였던 천혜의 입지 등이 황금빛 황태신화를 창조해 낸 주역들이다. 눈비 몰고 오는 동해의 ‘샛바람’을 피할 수 있는 영서에 자리잡아 춥고 마른 북서풍을 껴안으며 오늘도 황태는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다. 횡계는 더 이상 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의 산간 오지가 아니다. 도암면사무소가 옮겨오면서 인구도 3800명에 이르고 있으며, 산간에 그럴듯 한 저자거리도 생겼다. 용평스키장이 번성하면서 겨울이면 스키족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횡계의 황태음식점에서 내는 황태구이, 찜, 탕 등의 맛갈스러운 별미가 빈한한 재정자립도의 촌동네 살림살이를 또 얼마나 윤택하게 하는지. ●대관령엔 횡계덕장·진부령엔 용대리 덕장 대관령이 횡계마을에 덕장을 선사했다면, 진부령은 용대리마을에 또 다른 덕장을 선사했다. 말하자면 대관령과 진부령이라는,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대표적인 고갯길이 남한 덕장의 최적지로 부각된 것이다.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다. 사람과 물산이 오가고, 문화가 오가던 전통시대의 동맥이었다. 강릉에서 지척인 횡계가 영동고속도로 권역으로 주문진 등의 명태를 소화한 곳이라면, 인제군 용대리는 대체로 속초나 고성같은 강원 북부해안의 명태를 담당했다. 군인이었던 30여년쯤 전의 일이다. 휴가 때 거진에서 서울 마장동 터미널까지 오자면 반드시 용대리를 거쳤다. 반대로 인제에서는 원통을 거쳐 용대리를 통과해야만 진부령을 넘을 수 있었고, 이내 간성에 이르던 기억이 새롭다. 동해 주둔 군인들의 휴가 통로가 바로 명태들의 덕장행 루트이다. 이곳 토박이인 방효정(81) 인제문화원장의 기억으로는 일제시대에도 진부령 관통도로가 존재했다. 좁은 비포장도로가 인제와 간성, 즉 영동·영서를 이었다. 당시만 해도 목탄차가 힘들여 넘어가는 고갯목이었다. 속초와 인제를 연결하는 지금의 미시령은 1970년대에 군 작전도로로 뚫렸다. 도부꾼들이 내설악쪽의 소로를 이용하여 동해의 건어물과 소금을 지고 넘어와 곡식으로 바꿔갔다. 해산물과 농산물의 물물교환이 소박하게 이뤄졌다. 진부령과 미시령 코앞 길목에 자리잡은 용대리가 오늘날과 같이 황태덕장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의 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인근 백담사로 귀양(?)오면서 갑자기 뜨기 시작했다는 주민들의 전언이다. 그러더니 땅투기가 빚어질 즈음에는 덩달아 황태덕장도 뜨기 시작했다. 함경도 아바이들이 주축이 된 대관령덕장과 달리 뒤늦게 1980년대에 5∼6가구가 시작한 진부령덕장은 간성과 인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고, 지금은 모두 인제 사람들이 운영한다. ●99년부터 황태축제 시작… 연간 7억 소득 지금은 옹벽타기 훈련장으로 더 잘 알려진 용머리가 있어 용대리로 불린 이곳은 바람이 워낙 드세어 ‘바람부리’로 악명높다. 밤과 낮을 번갈아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함은 대관령과 다를 바 없다. 폭설이 내린지 10여일이 지났건만 덕장에는 눈이 고스란히 쌓여있다. 엄청난 바람이 ‘영너머’에서 고개를 타고 내려온다. 현지인들은 ‘영너머’란 말을 자주 쓴다. 바람은 물론이고 물산과 사람과 문화교류를 모두 “영너머로 오간다.”고 표현한다. 무려 40여일간 영너머 바람을 견디다 보면 황태 속살이 부풀어 솜처럼 부드러워진다. 1990년 무렵부터 덕장이 불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30여개 덕장에서 연간 100만 마리 이상이 생산된다. 아예 지난 99년부터는 황태축제가 시작돼 연간 7억5000만원 상당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축제 기간에만 10만∼15만 인파가 전국에서 몰려든다. 영동에 명태축제가 있다면 영서에는 황태축제가 있는 셈이다. 올해도 2월26일부터 3월1일까지 황태축제가 벌어졌다. 전국 황태의 7할이 용대리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양평쪽에서 홍천을 거쳐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넘고자 하는 이들은 용대리 길가의 무수한 황태식당과 덕장을 거쳐야 한다. 황태의 본적지는 두말 할 것 없이 평창의 횡계리다. 반면에 황태를 새롭게 알린 곳은 인제의 용대리다. 하나는 대관령, 다른 하나는 진부령에 위치해 ‘영너머’로 오가는 바람을 이용하면서 바다동네와 산동네의 인정과 물산까지도 맞교환하는 중이다. 황태의 요긴한 쓰임새를 길게 설명해 무엇하리. 짝짝 찢어서 술안주로, 혹은 도시락반찬이나 찜과 탕, 구이로, 무엇보다 조상님 제상에 듬직하니 올려 ‘절받는 물고기’가 되기도 한다. 또 술꾼들에게는 아침 해장 감으로 황태에 비할 것이 없나니, 황태에 인체의 독을 빼는 성분이 들어있다는, 동의보감을 위시한 각종 처방문은 필경 얼고 녹는 환난의 아픔을 겪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베풂의 징표’가 아닐런지.
  • [녹색공간] 아,겨울나무여!/조연환 산림청장

    언제부터였을까? 겨울나무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하나뿐인 아들이 입대하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바람도 많았다. 보초를 서고 있을 아들 생각에 새벽잠을 깨어 뒤척이고 있을 때면 창밖 느티나무는 나보다 먼저 깨어 울고 있었다. 저도 내 맘을 아는 듯 나도 홀로 밤새우는 저를 아는 듯 그렇게 그해 겨울 새벽 바람에 아픔을 같이한 후로 겨울나무가 좋아졌다. 신부 화장을 막 끝낸 봄 숲도, 성숙한 여인의 여름 숲도, 떠나 보낼 자식 위해 고운 옷 입혀 놓은 가을 숲도 아름답지만 겨울 숲의 그 단아함이 더욱 좋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덮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오늘도 겨울바람 타고 이원수님의 ‘겨울나무’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 겨울을 벌거벗은 몸으로 바람과 눈비 맞으며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노라면 불쌍하다는 느낌보다는 그 의연함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겨울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나무를 가장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잎과 꽃에 가려 나무 그 자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나무보다는 꽃과 잎을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잎 떨구고 바람 앞에 서 있는 겨울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여리디 여린 가지를 수없이 매달고 하늘 향해 기도하고 서 있는 느티나무, 아까시나무. 굵고 힘찬 가지를 뻗어 지나가는 바람을 잡으려는 물푸레나무, 감나무. 나뭇가지보다 큰 꽃눈을 꼭대기에 매단 채 바람아 불어라 눈아 오거라 그래도 봄은 오리니 내 먼저 오는 봄을 맞으리라며 꿈에 젖어 있는 목련나무. 겨울나무가 아름답다. 소나무·잣나무처럼 늘 푸른 나무보다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홀로 서 있는 나무들이 더 아름답다. 내가 화가라면 맑은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는 한 그루 겨울나무를 화폭에 담고 싶다. 겨울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 다 벗어 주고도 당당한 그 모습 때문이리라. 겨울나무에겐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런저런 흉허물에 남들이 알까 봐 불안해하거나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지는 속마음을 생각하면 겨울나무를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진다. 그러기에 이 겨울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누렇게 변색한 잎새를 달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노라면 아둥바둥 손아귀에 감싸 쥐고 놓지 못하는 미련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측은하다. 겨울나무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꿈이 있다는 것이다. 겨울나무는 새 봄에 피워 올린 잎과 꽃들을 겨울눈(芽)속에 간직한 채 한겨울을 지낸다. 겨울눈 중에는 꽃으로 피어날 꽃눈이 있고 잎으로 피어날 잎눈도 있다. 꽃눈과 잎눈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있다.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이미 겨울눈 속에서 꽃으로 피어날 준비를 다 하고 있다. 준비한 자만이 오는 봄을 먼저 맞을 수 있음을 나무는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무가 세찬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봄에 피워 올릴 꿈과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는 자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 법이다. 한 해가 시작되었다. 경제가 어렵다고 걱정들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지진과 해일 등 자연재해도 남의 일만이 아니다. 힘겨워도 겨울나무처럼 꿈과 희망을 품고 이 한 해를 시작하자. 한해를 시작하며 불러본다. 아, 겨울나무여, 본받아야 할 나의 표상이여! 나의 꿈이여! 조연환 산림청장
  • [재래시장] 서울 성수동 뚝도시장 새단장

    “장 보는 맛은 역시 재래시장입니다.” 5년차 주부 이성숙(34·성동구 성수동)씨는 요즘 대형할인점보다 인근에 위치한 재래시장인 ‘뚝도시장’을 자주 찾는다.얼마 전까지는 보통 주부들처럼 할인점을 애용했다.종류별로 한꺼번에 많은 상품을 쌓아둬 고르기 편한 데다 깔끔한 시설에 아이 쇼핑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알뜰소비… 물건값 깎는 재미도 쏠쏠 하지만 이달초 동네에 위치한 ‘뚝도시장’이 새단장하면서 발길을 돌렸다.종전과 달리 쇼핑하는 데 그다지 불편한 점이 없고 값을 흥정하며 생활비를 아끼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특히 대형할인점을 이용하면서 자신도 몰래 불어난 씀씀이를 줄이기에는 안성맞춤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대형할인점을 다니다 보면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기가 일쑤였다.재래시장은 왠지 싸게 구입할 수 있고 값을 깎을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그런 낭비벽을 줄여줄 것 같다고 믿는다. 8일 이씨가 시장을 두바퀴나 돌면서 구입한 물품은 양파 1묶음(1500원),참굴비 20마리(7000원),토마토 1㎏(1600원),큰아이 슬리퍼 1세트(6000원) 등이다. 전체적으로 10∼20% 정도 싸게 구입했다는 생각이 든다.공산품을 제외한 채소류나 식·음료품은 할인점보다 재래시장이 싼 게 통설이다.양파와 토마토를 구입할때는 1개씩 덤으로 받았고 슬리퍼는 1000원이나 값을 깎는 흥정의 맛도 즐길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게다가 2살배기 둘째를 데리고 장 보기에도 불편함이 없었다.종전과 달리 유모차를 끌고 시장 곳곳을 누비며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모두가 최근 끝낸 재래시장 환경개선사업 덕택이다. ●눈비 와도 안심…통로 투스콘 포장 뚝도시장은 지난 2일 환경개선사업을 마치고 재개장했다.6개월 남짓 21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시장통로를 정비한 데 이어 전천후 아케이드 설치,간판정비,빗물받이 설치,주차장 확보 등 대대적인 손질을 했다.그 결과 시장은 깔끔한 새 상가로 변모했다. 시장 동쪽 입구 쪽에서 20여년째 건어물가계를 운영하는 박득자씨는 “시장이 깨끗해져 손님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 20∼30%의 매출신장이 예상된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뚝도시장은 1962년에 개장한 것으로 한때 400여점포가 넘는 서울의 3대 재래시장 중의 하나로 꼽혔다.하지만 지난 2001년 이곳에 대형할인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환경개선사업 전에는 하루 이용객이 100여명에 불과해 점포당 하루 매출액은 평균 4만∼5만원으로 떨어졌다. 결국 상인들은 서울시와 성동구가 지원하는 ‘재래시장환경개선사업’에 시장의 운명을 걸었다. 이제 뚝도시장은 가로·세로로 무려 14개나 되는 쇼핑라인을 확보했다.골목골목 품목을 달리하며 176개의 점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짜임새 있는 시장으로 변모한 것이다.너비 2∼3m에 달하는 시장통로 바닥은 빨간색의 투스콘이 깔려 있다.또 바닥에는 노란색 줄을 그어 진열상품이 무질서하게 나오지 않도록 해 쇼핑객이 불편을 느끼지 못하도록 충분한 쇼핑공간을 확보했다.상인들은 스스로 더욱 친절하고 질높은 상품을 판매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시장 서쪽에 위치한 먹자골목에서 17년째 닭튀김 가게를 운영하는 이기성(53)씨는 “시장이 몰라보게 깨끗해져 젊은 아주머니들이 다시 찾고 있다.”고 매출신장을 확신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가 말하는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민중의 恨·魂 다시 보듬을 것”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은 한국인의 삶을 뒤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앞만 보고 달리는 삶을 두고 우리는 뭔가에 쫓기듯 사는 삶,뒤돌아볼 겨를이 없는 삶,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곰곰 되씹어 볼 생각을 하고 있는 삶을 산다고들 한다.정신 없이 바쁘게 산다는 말로 압축시켜 볼 수 있겠다.바쁘다는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웬만한 잘못쯤은 면책시켜주거나 아예 문제삼지 않으려는 집단면죄부와 같은 능력을 지닌 것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쁘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려니와 냉혹하게 말하자면 죄악에 속할 것이다.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한국인은 뭐든 잘 잊어버린다고 한다.망각증이라고도 하는 이 심리는 분명 한국인 특유의 자기중심주의 사고 방식이 낳고 기른 질병이다. ●허탈·부끄러움의 역사 참회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유리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특이한 질병이다.지배계급일수록,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일수록,권력이 있고 이른바 한국을 망해먹는 3연(緣) 즉 지연,혈연,학연이 치밀하게얽힐수록 망각증이 심하다.이 따위 엉터리 삶을 부끄럽지만 뒤돌아보고 참회하려는 것이다. 한국인의 삶 모두가 역사 안으로 들어와서 역사를 기록하는 닥나무로 만든 책갈피에 안겨 있는 것은 아니다.역사를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로 나누어 말할 때 앞의 것은 대개 지배자 중심이다.후자에 속하는 많은 것들은 역사의 책갈피가 아닌 강물이나 바람소리,풀잎이나 나무,물과 불,흙과 바위의 체온 속에 숨거나 기대어 한국인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그들의 삶을 불러내어 역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한 시도가 ‘달빛의 역사’다. 그들의 삶 어떤 것은 귀신이나 도깨비가 되고,어떤 것은 전설이나 노래가 되어 한사코 한국인의 삶과 죽음 언저리를 기웃거리기도 한다.이것들은 절대적으로 신화가 될 수 없다.신화라는 이양물(異洋物)로 덮어 싸서 헐값으로 치워버리려는 서구적 태도는 그 저의가 아무래도 수상쩍어 보인다.알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둔갑시키려 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한국인은 잘못이 없는가? 중국 역사에 함몰된 중화사대주의자나 서구우월주의자 모두 ‘달빛의 역사’로 볼 때는 지배계급들이며 정사의 편에서 살다 죽고 싶은 이들이다.죽어서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역사 바깥에서 서성거리거나 웅크리고 있다가 잊혀져버리기도 하는 것이 달빛의 역사다.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달빛의 역사는 햇빛의 역사와 관계 있다.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관제사학이다.한국 관제사학의 근원에는 중화사대주의와 친일사관이 숨어 있다.한국역사이면서도 한국사에서 추방당해야 하거나 폄하되고 무시되어온 것이 달빛의 역사다. 달빛의 역사는 이 땅에 발 딛고 하늘 이고 살아온 사람들의,다만 자연에 순응하고 노래해온 인간과 자연의 생생한 허밍 코러스다.그래서 아직 따뜻한 체온과 숨결이 남아 있다.눈물의 고뇌와 웃음의 향기가 살아 있다. 일년 동안 만나게 될 주제는 모두 90여 개이다.그중 몇 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맨 먼저 풀고 싶은 과제는 이른바 천불천탑의 성지로 불리는 운주사 석탑에 새겨져 있는 낯선 문양들의 의미다.어쩌면 이 문양들의 비밀이 풀려짐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지녀온 여러 생각들이 허탈과 부끄러움으로 결론지워지게 될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편견·박해의 희생물 대원군의 편견과 오만이 빚은 천주교도의 대학살,영원을 꿈꾸는 자의 시간이 시작되는 미륵의 세계,보기 드문 인문적 감동의 명소이면서도 숨겨져 있는 역사와 문화의 남평문씨 마을,새뮤얼 무어 목사가 심어준 한국 천민들의 인권해방을 향한 기도,전쟁과 증오의 폐허에서 꽃 피운 화엄사상의 전설,한국 찻그릇의 미학을 빚은 젊은 사기장들,차별 없는 삶을 꿈꾼 스승들,조선의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며 떠나간 논개와 그 후예들,김시습이 일본 차문화에 끼친 불멸의 정신사,목 없는 불상들이 전하는 조선 유학생들의 이념과 시위문화,임술년 진주농민항쟁과 오늘의 한국농민들,편견과 증오의 상처를 통해서 읽는 파괴와 자기 부정의 역사인 양주 회암사지의 교훈,외로움과 절약으로 산 여성운동사의 한 증거,이도차완의 비밀과 미륵사상,초의가 침묵으로 외친 조선은 중국보다 못하지 않다는 교훈,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파도소리로 다시 읽은 구운몽,남한산성에 숨겨진 종교 박해사,한국은 일본 차 문화와 중국 차 문화의 식민지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왔으면서도 지배계층의 이념이나 편견에 매몰된 채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애절하고 그리운 옛일이면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참회하게 하는 부끄러움들을 만나보고 싶다. 대부분 한국인 역사의식의 수면 아래서 잠행하고 있는 이 대단한 비밀 아닌 편견과 박해의 희생물들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잠들지 못하고 있다.더는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전쟁과 이별,기구한 삶과 죽음의 기록 혹은 그림들은 숨길 수 없는 한국인의 자화상이면서 그리운 것들로 쌓여온 역사의 원천이자 문화의 양식이다. 살아서 먼 길을 걸어 죽음 너머의 시간에 닿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면,그 노래 듣기를 원한다면,먼저 차별의식을 극복해야 한다.성,신분,지역,소유에서 차별의식이 남아 있는 한 그대는 영원히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무어 목사의절규 앞에서 과연 우리는 떳떳한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본 이는 그 자리에서 천국을 볼 것이라는 그의 말이 오늘날 한국인에게 어떤 교훈으로 다가올 것인가.햇빛으로서의 지배자가 아닌 달빛에 물들 뿐인 피지배자의 낮은 삶과 고요한 죽음이 때로는 우리를 지나온 길로 뒤돌아보게 한다. ●지나온 길 되돌아 가는것도 여행 지금 한국인은 너무 바쁘다.바쁘기만 한 삶에서는 그윽한 향기를 만들기 어렵다.향기 없는 삶은 거칠고 단조롭다.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역겨울 수 있고 귀찮은 존재이기 쉽다.그것은 인생을 다만 분주하게 살 뿐이다.시끄럽고 무의미하다.그래서 새로움을 느끼게 하고 나를 그 위에 싣고서 더욱 새로워져 모두에게 새로움을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그것의 절반은 내가 스쳐 지나온 길 위에 놓여 있다.잠깐만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자.지나온 길로 돌아가는 것도 여행이고 나그네 길이다.잘만 돌아가면 그것만큼 진보하기도 어렵다.그리고 새벽을 기다리자.깨어 있어야 새벽을 본다.집이 아닌 들길이나 산길에서 밤을 맞으면 달빛은 더 아름답다.집이어야만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오래도록 눈비 맞고 자란 슬픔을 만나려면 눈비 내리는 들길에 서야 옳다.슬픔을 지나야 문화가 보인다. 슬픔은 인간의 조건이니까.달빛을 쪼이고 슬픔을 캐는 여행이 될 것 같다.
  • [나의 건강보감] 황경식 강명자 부부

    이들 부부의 운동을 굳이 이름붙이자면 ‘금실(琴瑟) 운동’쯤 되지 않을까.황경식(56) 서울대 철학과 교수 겸 명경의료재단 이사장과 이 재단 산하 꽃마을한방병원의 강명자(55) 원장 부부는 벌써 14년째 탁구를 함께 하고 있는 ‘핑퐁 부부’다. ●매일 아침 1시간씩 함께 탁구 즐겨 “탁구를 선택한 기준은 간단합니다.부부가 같이 할 수 있어야 하고,건강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종목을 골랐는데,탁구가 딱 맞는 운동이더라구요.”이렇게 해서 이들 부부는 탁구를 시작했다.초등학생도 심심파적으로 치곤 하는 운동이라 딱히 시작이랄 것도 없지만,부부가 함께 라켓을 든 것은 지난 90년.“그 전에는 지금 법조단지가 들어선 서초동 일대 야산에서 조깅도 하고 짬짬이 배드민턴도 하곤 했지요.5년쯤 그렇게 했는데,그때 ‘운동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전만 해도 강 원장은 몸이 부실한 편이었다.대학때 시작된 위염이 중증이었고,병원 일에 애들 셋을 뒷바라지하느라 체력까지 고갈돼 체중이 고작 47㎏에 그쳤다.그런몸이 5년간의 조깅으로 눈에 띄게 좋아졌다.“그런데 문제가 있더라구요.조깅은 눈비 오면 못해요.또 남편과 체력차가 있어 운동 강도를 맞추기가 쉽지도 않구요.같이 달릴 경우 난 힘든데 남편은 싱겁다고 여기곤 했으니까요.”그래서 시작한 운동이 탁구다. “누구한테 따로 지도받고 그런 거 없었어요.매일 아침 6시에 인근 스포렉스에 나가 무작정 쳐댔죠.보통 50∼70분을 할애했어요.그 정도면 아침 시간에 다섯 세트쯤 시합을 할 수 있는데,좋더라구요.적당히 땀이 배면서 몸이 풀리는게 일과를 시작하는 운동으로는 아주 그만이에요.”강 원장이 워낙 운동소질이 없는 ‘운동치’라 처음엔 공 줍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똑딱 탁구’였다.그러나 굼벵이라고 제 몸 하나 건사 못할까.10년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탁구를 쳐대니 ‘운동치’니 ‘몸치’니 하던 강 원장도 실력이 늘어 이제는 남편에게 뒤지지 않을 실력을 갖췄다. 이들의 탁구는 스핀을 넣어 공이 픽픽 돌아가는 이른바 ‘깎고 비트는 탁구’가 아니다.야구로 치면 직구 위주의 단순한 탁구다.그러나 힘이 실려 무척 빠르다.꽃마을한방병원에서 열린 탁구 시합의 남자 우승자가 강 원장에게 나가 떨어졌는가 하면 “탁구라면 내가…”라며 제법 폼을 잡던 사람들도 이들 부부의 실력에 이내 기가 죽었다.치료차 병원을 찾았던 ‘탁구 여왕’ 이에리사와 양영자가 두 사람의 탁구 열기에 감탄해 라켓과 공을 선물한 것도 기분 좋은 추억이라고. 부부는 의료재단 이사장과 산하 병원장으로 있지만 하는 일은 다르다.황 이사장은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걷고 있고 강 원장은 국내 여성 한의학박사 1호로,불임과 부인병을 치료,연구하고 있다.이처럼 다른 일을 하는 부부에게 정서의 공유는 무엇보다 중요하다.“이런 점에서 부부가 같이 할 수 있는 탁구는 골프나 에어로빅 등과 달리 두 사람이 언제든 정서를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언짢은 마음을 탁구로 푼 사례는 셀 수도 없고,간혹 티격태격 하다가도 탁구 한판 치고 나면 다 풀려요.이런 운동이 흔하지 않죠.”강 원장도 “가끔은 다퉜다가 탁구를 치며 화해한 적도 있다.”고 거들었다.이러니 금실 운동이랄 밖에. ●“14년째 치니 ‘몸치'도 실력 늘대요” 부부가 탁구만 한건 아니다.골프도 쳤고,테니스도 했다.그러나 그런 종목과는 궁합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예전에는 아내와 골프도 쳤지만 운동량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소비되고,테니스는 라켓을 들어보니 꼭 예전의 M-1소총처럼 우리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어요.일상적인 운동은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봐요.첫째는 고행성으로,적당히 땀을 흘릴만한 강도라야 운동 효과가 있고 둘째는 오락성인데,세상없는 운동도 재미없으면 오래 못한다는 거죠.탁구는 이 두가지를 충족시키는 운동입니다.” 여기에 덧붙인 강 원장의 건강론은 흥미 이상의 깨우침이다.“인체는 우주의 순환과 어긋남이 없이 맞물려 돌아가야 건강을 지킬 수 있어요.이를테면 잠잘때 양성(陽性)인 머리는 음성(陰性)인 서·북향을 피해 동·남향에 둬야 기가 빠져나가지 않고,머리 부분에 안경테나 귀걸이 등 금붙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도 인체의 극성(極性)을 지키는 지혜입니다.”그는 시계도 오른손에 차고 있었다.물론 휴대전화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전자파가 몸의 자기(磁氣)질서를 훼손하기 때문이다.그는 “과다한 컴퓨터 사용 때문에 불임에 이르는 여성이 많으며,남자들도 더러 밤과 낮을 바꿔 생활하다 치명적인 질환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모두 우주의 질서에 역행한 결과”라고 충고했다. ●운동효과에 재미까지 더할나위 없어 섭생도 이들의 건강에 중요한 전제가 된다.강 원장은 불로 익혀 조리한 음식을 “기가 소멸되고 효소가 파괴돼 죽은 음식”이라며 하루 세끼중 한끼는 생식,나머지 두끼는 잡곡과 채소 위주의 담백한 식단으로 해결한다. “예전에 남편과 이런 약속을 했어요.지천명(50세)의 나이때면 번 돈을 모두 사회에 돌려주자구요.지난 96년 공익의료재단인 명경의료재단을 만들면서 그 약속을 지켰는데,문득 살면서 그런 생각이 들곤 해요.나와 내 가족이 건강하고,또 미력이나마 다른 사람의 건강을 살피는 일을 하고 사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하구요.”그의 술회가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그는 지금도 해마다 많게는 100회씩 복지관 등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무료진료를 하며 ‘되돌려 주는 삶’을 실천하는,흔치 않은 건강한 의료인이다. 글 심재억기자 jeshim@ 사진 이언탁기자 utl@ ■탁구 예찬 키 167㎝에 몸무게 66㎏의 황 이사장이나 164㎝에 60㎏인 강 원장은 ‘폼나는 틀’은 아니다.그러나 군살없는 몸피에 걸음도 가볍다.꾸준히 탁구와 헬스 등으로 건강을 다진 덕이다.특히 이들에게 탁구는 건강을 담보해준 ‘정말 좋은 운동’이다. 지금이야 강 원장이 “탁구에 관한 한 맞상대”라고 호기도 부려보지만,따로 운동을 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와 대등한 운동능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황 이사장이야 짬짬이 쳐온 실력이라 기본부터 시작해야 했던 강원장과 격이 다른 건 당연했다.“처음 몇달은 공 주우러 다니느라 정신 못차렸다.”는 말이 엄살로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그런 격차가 재능의 차이는 아니어서 이내 실력은 엇비슷해지고,그럴수록 운동하는 재미는 쏠쏠했다.“한번은 마라토너 황영조씨가 우리 탁구치는 모습을 유심히 보더라구요.‘족보없는 탁구’라 우스워서 그랬는진 모르겠는데,나중에 ‘잘 친다.’고 한마디 하더라구요.” 이처럼 ‘미미한 시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는 구력으로 건강을 얻은 이들의 운동론은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과학적이다.“아침 6시쯤 운동을 시작하는데,그 시간이면 온몸의 세포가 잠에서 덜 깬 상태거든요.이런 몸으로 격한 운동을 했다가는 상하기 십상이지 않겠어요?그런데 탁구는 오히려 몸을 유연하게 해줘요.순발력,민첩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력도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구요.” 몸무게가 각각 60,66㎏인 두 사람이 1시간동안 탁구를 치면서 소모하는 열량은 270,280㎉로 운동량이 결코 많지는 않다.그래서 강 원장은 헬스클럽에 나가 따로 근력운동을 하기도 한다.그러나 그런 특성 때문에 이런저런 부상없이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길거리 탁구’를 운영하는 핑퐁코리아 최진구 대표는 “탁구는 일반적인 운동효과 말고도 간단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또 리듬 운동으로 정신적 측면에서도 뇌의 활동력을 증가시켜 치매를 예방하는 등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권장할만 한 좋은 운동”이라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 주말 여기 어때요 / 송파 서울놀이마당

    “잔물결 햇살받아 반짝이는 석촌호수로 오세요.” 봄비가 메마른 땅을 촉촉히 적신 11일 오전 9시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공원.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플루트 연주곡 속에 하얀 ‘벚꽃 비’가 쏟아졌다.그 속에서 시민 20여명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걷고 있었다.더러는 봄비를 맞으면서…. 석촌호수는 운동뿐 아니라 갖가지 공연으로 ‘문화예술의 바다’를 이룬다.연인이나 가족들이 손에 손잡고 나들이하기엔 그저 그만이다. ●신명 넘치는 우리 예술 동호(東湖) 쪽 서울놀이마당에서는 어깨춤을 저절로 덩실 추게 하는 전통예술공연무대가 매주 토·일요일 손님을 기다린다.공연은 눈비가 웬만큼 쏟아져도 열린다.야외공연장은 부지 2500평에 놀이마당 250평으로 2500명이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다. 공연은 오후 3시와 4시,하루 두 차례.12일에는 ‘벽사춤 아카데미’의 태평무,장고춤에 이어 ‘풍장21’의 사물놀이가 무대에 올려져 우리네 전통문화의 참맛을 선사한다.13일에도 예원예술단의 장고·부채춤과,경남 삼천포농악단 공연이 봄볕 속 관람객들의 분위기를 한층 달구게 된다. 12일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들이에 나선 이들은 서호(西湖) 쪽 노인광장으로 건너가 오후 4시 실버악단이 펼치는 음악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호수 주변 걸으며 봄의 여유를 경관을 감상해가며 옛 나루터를 연상케 하는 송파 돛배가 떠 있는 호수 주변을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충 1시간30분.진한 벚꽃 향기를 맡으면서 상록패랭이,구절초,옥잠화 등 흐드러진 수목과 뭍으로 나와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오리떼를 구경하는 것은 여유롭기만 하다. 호수 동·서쪽에 각각 설치된 ‘지압보도’를 맨발로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초보·중급·숙련자 등 각자에 알맞은 코스가 마련돼 있다.친절한 안내판도 있어 주의사항을 읽어본 뒤 한번쯤 뛰어들어 보는 것도 괜찮다.요즘 웬만한 시민들은 한번쯤 도전장을 던지는 걷기대회도 13일 오전 7시부터 석촌호수 주변 2.5㎞ 코스에서 열려 건강을 다질 기회가 된다.동호 한가운데 있는 ‘호수 속의 섬’ 매직아일랜드를 찾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이 동화의 세계로 떠나보는 경험도 겪어 볼만하다. 송파구는 지난해 32억원을 들여 조깅로 등 운동·편의시설을 조성했다.올해도 최신식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 ‘아름다운 공원 만들기’에 모두 23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송한수기자 onekor@
  • [씨줄날줄] 건달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건달만큼 입맛 당기는 소재는 없는 모양이다.최근시작한 한 드라마는 일제시대의 건달세계를 그린다.김두한 등 종로통 건달의 활약을 극화한 것이다.이 스토리는 지난 1990년 국민감독 임권택이 ‘장군의 아들’로 한번 다룬 적이 있다.같은 내용이 10여년만에 드라마로 안방을 찾는 것이다. 한국영화사에 남은 주연급 남자배우들 대부분은 건달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반항적인 건달인 신성일,음흉한 건달인 허장강,귀여운 건달인 박노식 등.건달 얘기는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이야깃거리인 것이다. 사전을 보면 건달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대는 쓸모없는 사람’인데 왜드라마에서는 이토록 인기일까.장군의 아들 등을 보면 김두한 등은 자신들을 폭력배,양아치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우리는 건달이야!” 이는 건달에는 풍운아,협객 등 고전적 정취가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건달은 노는 것과 관련이 깊다.인도 범어의 간다르바(gandharva)가 한자로 건달파(乾達婆)로 음역되면서 비롯됐다.간다르바는 부처님을수호하는 사천왕의 직속부하인 팔부신장의 하나다.수미산 남쪽 금강굴에 살며 제석천의 음악을 맡은 천신이다.구름 위에서 부처님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는 신인 것이다.이런 건달파는 조선 불교탄압기에 놀고 먹는 부랑인(浮浪人)의 뜻으로 변질됐다.조선 때 정선아리랑 중 한구절은 “동산 중허리 도는 안개는 눈비가 오려구 돌았지,저 문전에 도는 건달은 누구를 보려고 도나.”하면서 건달은 쓸데없이 오락가락하는 자임을 알려준다. 북한은 지난달부터 쌀배급제를 폐지하고 월급을 대폭 올리는 등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다.이런 변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내린 경제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그 지침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사회주의 노동생활 기풍을 확립해 건달부리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아무리 북한이라도 사람사는 사회인 만큼 건달끼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한국의 건달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추억으로나 남아있지 실제로는 흉악한 조폭이나 뒷골목 양아치만이 설치고 있다는 게경찰의 말이다.북한의 건달들이 경제개혁이 진행되면 어떻게 변해나갈지 궁금하다. 박재범 논설위원 jaebum@
  • 노인·재소자 돕는 공무원 ‘천사부부’

    산골지역의 한 공무원 부부가 십여년째 새벽 우유 배달로 번 돈 전액에 박봉을 쪼갠 돈까지 합쳐 홀로 사는 노인과 재소자 등 불우이웃을 위해 사용해 온 것으로 알려져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경북 청송군 진보면사무소에서 일하는 김영철(金永鐵·38·지방기계원 8급)·고재연(高再蓮·36)씨 부부. 이들 부부는 김씨가 공무원이 된 지난 88년 10월부터 15년째 눈비 가리지않고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우유 배달에 나서 오전 7시까지 3시간동안 200여집을 돈다.우유 배달로 버는 월평균 40만∼50만원 만큼을 매일 우유로 바꿔 면내 홀로 사는 노인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복지시설인 ‘축복의 집’에 전달한다. 98년 봄부터는 박봉을 쪼개 청송 1·2감호소와 1·2교도소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재소자 80여명에게 우유와 빵·학용품 등을 사주고 있다.주민과 청송교도소 관계자들은 “김씨 부부는 주위에서 ‘천사’로 통한다.”면서 “이들 부부의 봉사활동에는 대단한 노력과 정성이 담겨 있다.”고 칭찬했다. 김씨는 이런봉사활동으로 지난 99년 경북도에 의해 청백리 봉사상 후보로 추천됐지만 “나는 한 일이 없다.”며 포기서를 제출하기도 했다.그는 80년중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진학을 포기,진보면사무소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대학까지 마쳤다.김씨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에게 감사한다.”면서 “주위에 어려운 이웃이 없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청송 김상화기자 shkim@
  • [이색 당선자] 백상승 경북 경주시장

    백상승(白相承·67)경북 경주시장은 ‘행정의 달인’이라는 주위의 찬사에도 불구,세번 도전 끝에 한나라당 후보로 기초자치단체 사령탑에 오른 늦깎이다. 국회의원 선거 낙선까지 합치면 3전4기다. 백 시장은 지난 93년까지 32년 동안 서울시에 근무하면서 강남·성북구청장과 산업경제·교통·내무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부시장까지 지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고향을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낙향을 선택한 백 시장의 앞길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95년과 98년 지방선거에 잇따라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으나 모두 패배했다.상대 후보들에 비해 거물급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오랫동안 고향을 비운 것이 패인이 됐다. 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지역의 강한 여당 정서를 업고 출마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 돼 버렸다.그러나 강인함을 지닌 그는 거듭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주민 곁으로 더욱 다가섰다. 눈비를 가리지 않고 새벽마다 주민들과 함께 경주 남산을 올랐고,각종 모임과 길·흉사도 성심껏 챙겼다.이리하여 비로소 주민들도 백 시장을 반겼다. “역시 거목(巨木)이다.다음에는 시장에 꼭 당선돼 봉사하길 바란다.’라는 등의 격려가 쏟아졌다. 이런 노력과 성원,‘한나라당 바람’까지 보태져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영광을 안았다. 백 시장은 “경주발전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준 시민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며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과감한 민자유치를 통해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하겠다.”고 밝혔다.또 감포 제2관광단지 개발과 경마장 유치에도 전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경주가 ‘신라의 고도(古都)’여서 개발 등 주민들의 재산권 침해가 심각한 데 대해서는 “‘역사’가 파괴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발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역발전에 심장부 구실을 하는 공무원들이 일류 의식과 프로정신을 갖고 주민들을 위해 뛰도록 이끌겠다.”고 역설한 백 시장은 “경주를 전국 최고의 부자 도시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다. 고려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부인 성부조(64)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경주 김상화기자
  • [데스크 시각] ‘下山길 징크스’어떻게 깰까

    전문 등반가는 아니더라도 산을 즐겨 찾는 사람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악천후 상황에서는 등산보다 하산이 몇 곱절 위험하다.하산길에 눈비라도 만나면 실족의 위험이 그만큼 커지는까닭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말 곤경을 곱씹어 보면 인간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16일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의 셋째 아들 홍걸씨가 검찰에 출두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굳이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말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바로 전임자였던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도 5년 전 이맘때 구속된 차남 현철씨 문제로 임기말에 몇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하는 수모를 겪지않았던가. 5년 주기로 징크스처럼 되풀이되는 최근 대통령들의 ‘위험한 하산’을 지켜보기란 여간 씁쓸한 일이 아니다.하물며 당사자들의 참담한 심경을 제3자가 가늠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아들 문제가 불거진 이후 이희호(李姬鎬) 여사가 성경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는보도에서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절박한 심정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오죽했으면 자존심 강하기로는 DJ 못지 않을 YS도 퇴임후 “영광의 시간은 짧고 고뇌의 기간은 길었다.”고 토로했을까 싶다. 사실 국민의 정부 주역들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한다면 국가부도 사태에 이른 나라를 혼신의 힘을 다해 일으켜 세웠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해 야속한 느낌도 없지 않을 것 같다.게다가 대통령이 탈당하는데도 여당에서마저 말리는 시늉조차 않았으니 염량세태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종선여등(從善如登),종악여붕(從惡如崩)’이라는옛말이 있다.덕을 쌓는 일은 산에 오르기만큼 지난하지만,나쁜 일을 좇다가 그르치기란 눈사태로 무너지는 것처럼 순식간이라는 뜻이니,이보다 더 좋은 비유도 없다. 물론 국민의 정부가 공은 공대로,과는 과대로 재평가될 날은 언제가는 올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몫이다.이 시점에서 청와대가 할 일은 안전한 하산을 준비하는 것이다. 까닭에 환란극복 등 공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여론이 몰아세우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거나 ‘검찰이 너무 몰아붙인다.’는 식으로 사태의 본질을 잘못 읽어서는 안된다는생각이다.역대 어느 정권인들 처음부터 비리로 욕먹을 일을자초하려 했겠는가. 따라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범여권 내부의 경보장치가 일찌감치 고장났기 때문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그것은 결국 인사관리의 편협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이 정부가 각종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근본적 원인도 공조직보다는 “형님,아우”하는 측근과 비선라인에 의존하는 일이 잦아진 데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쓴소리보다는 ‘입안의 혀’처럼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인사들이 많아서야 ‘견제와 균형’인들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사정이 이럴진대 국민의 정부가 임기말의 위기를 탈출하려면 각종 정보가 비선라인에 몰렸던 악습을 털어내고 정부 각 부처와 공조직에 힘을 실어주며 정도(正道)를 다시 걷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잘못을 고치기로만 한다면야 너무 늦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것이야말로 대권을 꿈꾸는이회창(李會昌)·노무현(盧武鉉) 두 후보도 미리 가슴 깊이새겨둬야 할 대목인 듯싶다. ▲구본영 정치팀차장 kby7@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황사와 자연의 섭리

    비는 비대로 눈은 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각각 낭만과애환이 있지만 여러 기상현상 중 주로 봄철에 나타나는 황사는 낭만보다는 생활에 불편함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서기 174년 신라 아달라왕 때 ‘우토(雨土)’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고,고구려 보장왕 때인 서기 644년 10월“평양에 내린 눈이 붉은 색이었다.”,고려 명종 16년 “눈비가 속리산에 내려 녹아서 물이 되었는데 그 색이 핏빛과 같았다.”,조선 명종 5년 3월22일 “서울에 흙비가 내렸다.”는 기록을 보면 황사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관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사는 입자의 크기가 약 1∼10㎛로 미세한 누런 흙먼지다.중국에서 날아오면서 큰 입자는 지면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까지 날아오는 황사는 주로 알갱이가 작은 것들로 황사의 발원지에서 1∼5일 걸려 이동해 온 것이다.발원지에서 불려 올라간 먼지량을 100%라 할 때 보통 30%가 발원지에 다시 가라앉고,20%는 주변지역으로 수송되며,50%가 한국,일본,태평양,미국까지 날려간다. 황사가 주로 봄에 나타나는 것은 겨울철 얼어있던 황사발원지의 건조한 토양이 부서지면서 흙먼지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한반도주변의 기온,강수,풍향 등의 조건 때문에 여름,가을,겨울철보다는 봄에 더 자주 발생한다. 황사는 폭우나 태풍과는 달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까지는 기상재해로 취급되지 않았다.그러나 최근 발생 횟수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올 봄 들어 숨쉬기가 거북하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농도가 짙은 황사가발생해 초등학교가 휴교하는 등 큰 불편을 가져와 사회적인 관심대상으로 떠올랐다. 따라서 기상청은 올 4월부터 황사를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기상현상으로 인식하고 강한 황사가 올 것으로 예상되면 호우,폭설,태풍처럼 기상특보를 발표하게 되었다.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황사의 이동 경로와 정량적인 예측을 위해 장단기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황사 관측망을 늘릴 뿐만 아니라 중국의 관측자가 지상에서 육안으로 관측해 보내오는 자료나 위성으로 추정한 영상자료 이외에 우리나라가 직접 황사 발원지인중국에 관측망을 깔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이 불려 올라갔는지를 알고,이러한 정량적인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수치모델 개발을 서둘러서 황사 예측의 정확도를 더욱 높일 계획이다. 황사 먼지로 인해 호흡기 질환,안질환 등 보건위생학적인 피해와 함께 태양빛을 차단시켜 시정이 악화되고,항공기엔진,반도체와 같은 정밀기계 손상과 가축의 질병 발생 등 황사가 주는 피해는 다양하다.하지만 토양의 산성화를 막고,해양 생태계에 영양을 공급해주고,토양 속에 숨겨있는다양한 성분을 날라다 주는 등 긍정적인 도움도 준다. 며칠 전에 황사가 올 것을 예측한다고 한들 우리 인간이이를 피할 수는 없는 일.올 봄 황사를 겪으면서 흙먼지를멀리까지 옮겨주는 자연의 섭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황사 발원지인 그 곳,척박한 흙먼지 속에서도 웃음짓고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기상청 탐사단의 보고다. 안명환 기상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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