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우리문화재 「눈가리고 아웅식」반출/기증형식으로 약탈증거 인멸
◎가야·신라·낙랑고분 마구 파헤쳐/전문수집가 20여명 두고 빼내가
문화체육부의 해외유출 약탈문화재 분류는 아직 첫 단계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 숫자는 빙산의 일각 일 수도있다.특히 일본은 한반도 강점시 통치권력에 의해 많은 문화재를 반출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우리가 주권을 상실한 이후 강점기에 일본으로 빠져 나간 유물들은 약탈근거가 거의 인멸되어 약탈문화재에 대한 실태파악이 무척 어려운 것이다.
문체부가 그동안 산하기관인 문화재관리국,국제문화교류재단,한국도서관협회,개인들로부터 협조를 얻어 공식 파악한 해외유출문화재는 6만4천7백3점이다.이 가운데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우선 1차적으로 가려낸 약탈문화재는 1천5백7점에 이르고 있다.이번에 공식 분류한 약탈문화재 보유국은 일본 7백46점,프랑스 3백8점,미국 4백53점으로 밝혀냈다.일본은 주로 고분발굴 매장문화재를 토쿄국립박물관이 조장해왔다.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과 미국회도서관은 전적류,서화,지도를 가지고있다.
일본은 당시 한반도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우리문화재를 전적으로 빼돌렸다.총독부 고적조사위원장(금정전청덕)이 유적을 발굴,출토품을 총독부가 기증받아 반출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경북 경주시 노서동 고분(1933년)과 황오동16호분(1934년),평남 대동강변 정박리고분(1933년)이다.여기서는 금목걸이와 은목걸이,금은고리금귀걸이 따위의 몸치레걸이를 대량 가져갔다.
그리고 경기도 이천에서는 폐사지에 남아있는 5층공양탑 1기(1919년)를 몽땅 들어갔다.1921년에는 그 유명한 경남 양산군 양산면 북정리 부부총을 발굴했다.허리띠,금귀걸이,금반지,옥목걸이 등의 출토품을 역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을 빌려 일본으로 내보냈다.이 무렵에 경남 창년군 창녕읍 교통리 가야고분도 발굴되었다.금제및 옥제 치레걸이와 미술적으로 가치가 큰 토기 등의 출토품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대학까지도 몰려들었다.동경제대 문학부의 경우 1925년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왕우지묘를 파헤쳤다.「건무이십일년」글자가 든 칠기잔을 비롯한 낙낭시대 칠기유물이 쏟아져 나왔지만,1930년 총독부가 일본으로 보냈다.1920년대 초기 평양을 중심으로 일본인 전문수집가 20여명이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평남지역의 낙랑고분이나 고구려 고분이 이른바 대란굴 시대를 겪었다는 것이다.이로 미루어 보면 약탈문화재는 조사방법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이 밝혀질 전망을 안고 있다.
문체부가 최근 쿄토대에서 확인한 5천여장의 문화재 관련자료(서울신문 2월25일자 22면보도)도 약탈문화재와 무관치않다.일제때 일본인 총독부관리가 유출한 이 자료에서도 약탈 흔적이 엿보이는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에 가있는 약탈문화재는 비교적 그 실상이 소상히 나타나고 있다.19세기말 서양인들이 무력으로 쇄국의 문을 두들인 이른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때 소장목록이 뚜렷한 외규장각 등의 전적을 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