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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리누명에 구속된 경관/국가상대 손배소송 승소

    서울지법 민사합의21부(재판장 李弘權 부장판사)는 2일 검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구속된 전 양평경찰서 경관 金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金씨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찰 수사관이 교통사고 가해자 崔모씨를 13시간동안 밤샘 조사하면서 허위자백을 강요,‘경찰관에게 청탁해 뺑소니 사건을 단순사고로 조작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점이 인정된다”면서 “정신적 피해를 입은 金씨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金씨는 93년 평소 친분이 있던 崔씨가 낸 교통사고를 단순 사고로 처리했으나,崔씨가 수원지검 여주지청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으면서 허위 진술을 해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구속됐으며 96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소송을 냈다.
  • 정부 換市 개입 시인도 부인도 않는 속사정

    ◎“환율조작國 누명벗기”/적정선 논의 않기로… 논란불구 전통적 수법 선택 정부의 환율정책이 분명히 드러났다.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겨 결정되게 하자는 것이다.그리고 시장개입 여부나 환율의 적정선을 정부가 논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李揆成 재정경제부 장관은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시장개입여부와 시기, 적정한 환율수준 등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NCND)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밝혔다.재경부 실무자도 “현재 환율하락은 시장에서의 공급우위에 의한 것인 만큼 정부가 나설 경우 시장기능이 상실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율과 외환시장에 관한 정부의 NCND 입장 천명에는 속사정이 있다.지난 12일 달러당 1,300원대였던 환율이 이번 주들어 1,200원대로 떨어지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떠받쳐야 한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李장관은 “1,200원대 아래로 떨어져도 시장메커니즘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李장관은 원칙론을 표명한 것이지만 시장에서는 개입불가로 받아들여 환율은 급락행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이에 따라 정부는 분명한 자기입장 정리를 할 필요가 생겼으며 그게 바로 전통적인 수법인 NCND였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환율조작국이라는 누명도 벗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다.康奉均 경제수석도 브레이크를 걸었다.康수석은 15일 한 조찬강연회에서 “섣불리 개입해서는 효과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2(정직한 역사 되찾기)

    ◎잘못된 법 적용/간첩누명 복역수 가족 비탄의 나날/새법 재정 재구금… 가정 풍비박산/정권안보차원 범죄 날조 처형/김 대통령 한때 사형선고 받아/고문조작으로 10여년째 구금도/심장병·신경질환 등 후유증 심각 비가 오는 가운데 초췌한 모습의 한 남자가 푸른 수의를 입고 탑골공원 정문 앞에 앉아 있다.그는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에게 연신 무죄를 호소한다.그러나 전기스위치가 올려지고,그의 코에 물주전자의 물이 거듭 부어진다.그는 눈동자가 풀어진 채 옆의 사내가 불러주는 대로 횡설수설 따라 읊는다. “북한의 우순학이 제 처입니다”“저는 30년간 북한의 공작원이었습니다”. 탑골공원을 무대로 지난 9일(목요일) 상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건장한 사내는 고문기술자 李根安이고 초췌한 남자는 16년째 간첩죄로 복역중인 咸珠明씨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갖는다.이날 집회의 주제는 ‘고문조작 간첩사건 피해자의 석방’.이 자리에는 군사정권 아래서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복역하고있는 14명의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 등 50여명이 참가해 새정부의 조속한 석방조치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법과 동일시되는 것이 정의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악법 논란’은 지난 50년간 끊일 날이 없었다.대부분이 아는 것과 틀리게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한 적이 없다.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전하고자 한 것은 ‘법에 대한 사전 합의와 동의의 중요성’이었다. 지난 61년의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유신시절의 비상국무회의,80년의 국가보위입법회의 등은 국회가 아닌 비정통적인 대의기구들이다.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에서 이런 기구가 쏟아낸 법률들이 사전동의나 합의의 절차를 충실히 거쳤다고 하기는 어렵다.또한 본인의 자백 외에는 증거가 없는,고문에 의한 조작 논란이 많았던 사건들도 정당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71년 통일사회당 위원장 金哲씨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북괴를 북한으로 불러야한다’는 발언을 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됐다.당시 혐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이조항은 국가보안법 7조에 그대로 편입됐다.그러나 남북한 동시가입은 수년후에 이뤄졌고,지금 북한을 공식적으로 북괴라고 호칭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돼왔다는 논란 속에 숱한 인권침해와 위헌시비를 일으켰다. 이종·최남규·김중종씨 등은 50∼60년대 남파돼 체포된 뒤 10여년간 복역을 마쳤으나,75년 사회안전법 제정으로 재구금됐다가 89년 이 법의 폐지로 다시 석방된 이들이다.출소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다가 새 법이 제정돼 느닷없이 다시 갇히는 사람들의 황당함은 어떤 것일까. 정권안보차원에서의 범죄의 날조·조작은 법 자체 문제보다 더 심각했다. 李承晩 정권은 야당당수였던 曺奉岩 진보당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고,金大中 대통령도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가지 받았었다. 고문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으로 수십년째 갇혀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함주명·이장형씨 처럼 고문기술자 李根安으로부터 취조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함씨는 남파된 뒤 즉시 자수했으나 30년후 재구금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16년째 복역중이다. 이씨는 무기형을 선고받고 14년째 구금돼 있는 상태다. 함씨의 누나 함주옥씨(73)는 “너무 억울하다.지금이라도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하루빨리 재심절차가 있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떨구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74년 일본 유학때 조총련계 인사를 접촉한 것이 빌미가 돼 23년간 복역하다가 올 3월 특사때 나온 유정식씨. 南奎先 민가협 총무는 “현재 유씨는 심장병과 신경질환 등 극심한 고문후유증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또 “함께 나온 재일동포 손유형씨도 후두암 당뇨병 등으로 고생하다가 현재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고 전했다. ◎張俊河·白基玩씨 악법철폐 앞장/학생들 민주화투쟁 전위대 역할… 3·4·9차개헌 견인/80년대 후반 민가협 등 수백개 민주단체서 주도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1974년 1월에 발표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는 이렇게 시작된다.朴正熙 대통령은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자 긴급조치를 발동했다.정권유지를 위한 강경책이었다.과거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헌법과 법을 고치고 그를 정권유지에 이용했다.그러나 온갖 탄압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법과 헌법에 대한 저항과 투쟁도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긴급조치가 발표되자 張俊河·白基玩씨 등은 ‘반유신 백만인서명운동’을 벌였다.그러나 서명운동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두 사람은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당시 판결은 구형과 판결이 일치하는 이른바 ‘정찰제 판결’로,이후 많은 공안사건의 판결 기준이 됐다.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그들은 민주화운동과 악법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일부 판·검사들의 ‘정의 투쟁’도 있었다.지난 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에서 이용춘·장원찬·김병리검사는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공안사건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지난 96년 유원석 판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박충렬·허인회씨에게 잇따라 무죄판결을 내려 공안사건에서도 ‘증거재판주의’원칙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는 지난해 2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법복을 벗어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러나 누구보다 앞장서서 법의 타락에 맞서 싸운 주체는 학생들이었다.그들은 왜곡된 헌법과 법을 바로 잡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난 60년 이루어진 3·4차 개헌과 87년 민주항쟁에 의해 얻어진 9차개헌도 사실 학생들이 이룬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들은 법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제도권에 몸담은 기성세대들이 하기 어려웠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전위대’ 역할도 담당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역할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 수백여개에 달하는 민주시민단체와 비영리전문단체들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인권운동사랑방 등이 대표적 단체.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운동과 악법철폐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며,매주 목요일 주제를 정해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민변 또한 지난10여년 동안 文益煥 목사 방북사건,姜基勳씨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의 진상조사 및 변론을 맡았고,국가보안법 개정·폐지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하루소식’지를 통해 법 집행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사례를 찾아내 공론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간첩 불고지혐의 무죄판결 받은 咸雲炅씨/“명예실추·정신적 피해 상상 초월 보안법 자의적 적용 빨리 고쳐야” “무죄판결은 받았지만 실추된 명예와 정신적·금전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습니까.”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咸雲炅씨(34).“재판중에는 모든 피고인이 무죄로 추정돼야 하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 당하는 피해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咸씨는 지난 95년 ‘남파간첩 김동식 사건’과 관련해 불고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지난 12일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그러나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겪은 정신적 고통과 이미지 실추로 인한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남북분단 상황에서 일단 간첩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생활에는 족쇄가 채워집니다.그 점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지요.” 지난 96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咸씨는 “선거를 불과 몇개월 앞두고 이 간첩사건에 관련돼 조사를 받았다.그리고 그것은 선거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말했다. 咸씨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면 일부 언론사와 국방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고 피해보상도 요구할 방침이다.언론사에는 재판중인 사건임에도 자신을 완전히 범죄자로 기정사실화해 보도한 책임을,국방부에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 등을 사병들의 정신교육 자료에 사용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수년전보다는 많이 완화돼 과거의 ‘막걸리 보안법’수준은 벗어났다는 점은 인정했다.그러나 여전히 독소조항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친척까지도 신고해야하는 불고지죄는 반인륜적이라고 비판했다.유교적 윤리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친척과 친구를 신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이적단체 찬양고무죄나 이적표현물 제작 및 소지죄 등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제의 조항이라고 했다.그는 “새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자의적 해석에 의해 보안법이 적용되고 있다”면서 수사기관에 시정을 촉구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누명 벗은 이브 몽탕/무덤 파헤쳐 유전자 검사

    ◎친자확인 소송 거짓 판명 【파리 AP AFP 연합】 프랑스의 유명가수이자 배우로 91년 타계한 이브 몽탕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 결과 몽탕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한 오로르 드로사르(22)와는 친자관계가 아닌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법원 관계자들이 11일 밝혔다. 이들은 지난 3월 몽탕의 무덤을 파헤쳐 발굴한 치아와 드로사르의 치아를 비교·분석했으나 두사람의 유전자구조가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고 말했다. 프랑스 여배우 안 질베르트의 딸인 드로사르는 몽탕이 자신의 아버지라며 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었다. 몽탕은 74년 당시 19살인 안과 만나 2년동안 교제했다.생전에 안과 관계를 가진 사실은 인정했으나 드로사르와의 친자관계는 부인,혈액 검사 등 친자확인에 필요한 어떤 조사도 거부했었다. 파리법원은 그러나 4년전 몽탕과 드로사르의 생김새가 닮았다는 점과 몽탕이 두번이나 혈액검사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몽탕이 드로사르의 친아버지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 5·18을 어떻게 볼 것인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특별기고)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1980년 5·18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항쟁이 광주폭동이라는 누명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뒤 ‘5·18사태’라고 했다가 ‘5·18광주항쟁’을 거쳐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역사적 평가와 함께 용어가 정립되었고,관련인사가 범죄자에서 민주투사로 그 본연의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더우기 그들은 엄청난 ‘폭동’‘반란’‘변란’‘내란음모죄’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사면복권과 함께 그 처절함,고통,수모,학대,인고의 세례로부터 축복받는 광명 영광 환희의 광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경과하였다.이제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이의 실마리는 군사정권의 군사독재와 특정지역 때리기 및 낙후방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현역 소장 출신의 박정권이 18년만인 79년 10·26사태로 종말을 고하면서 또 현역 육군소장 전두환이 그 시해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신군부의 정치세력이 싹트게 됐다.권력의 냄새를 맡고 도취된 것이다.12·12 하극상 사건을 거쳐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동지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운동을 관망하며 혼란 소요를 키워오다가 이를 수습한다는 명분속에 느닷없이 5·17비상계엄을 선포,혼란을 수습한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때 서울의 봄을 만끽한 3김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로써 대통령을 꿈꾸었다.그러나 12·12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의 ‘은밀히 계획된 정치일정’은 자신들이 일선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그때문에 서울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결국 휴교령으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 일부와 빛고을 광주의 대학생들이 섞인 민주인사들이 그 다음날인 5월18일 무장 군인과 결전을 전개하면서 5·18은 터졌다.처절한 살육 전시회가 낭자한 피로 얼룩진 가운데 전개됐다.대치국면은 광주와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무고한 시민만 죽임을 당한 역사상 매우 잔혹한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게된 것이다. 이때 계엄군과 시민군의 결전은 곧 광주의 민주화투쟁 이었으며 이는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이었다.마치 동학혁명(1894­5)이 이곳에서 일어나 북상,반봉건 반제국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과 같다.또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도 농민,노동자의 투쟁(소작쟁의,노동쟁의)도 광주 나주 완도 하의도 등에서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제타도의 애국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5·18 역시 서울의 5·17 민주화 투쟁이 광주에서 성숙되어 전국으로 물결져 간 것이다.따라서 5·18은 광주 전남만의 민주화운동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횃불이 된 것이다.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곧 군사독재와 신군부의 민간 억압 책동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높였고 동참의식을 도출해낸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그러나 당시 광주는 폭동 소요 탈취 암흑의 광장으로 신군부와 권력지향적 철새 정객들에 의해 선동되었고 그에따라 그 지역에 대한 혐오감,증오심을 증폭케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떨어져도 매점매석하지 않았고 자체조직으로 질서를 잡았다.식량이 떨어진 이웃에 온정을 베풀었으며 부녀자들은 따뜻한 음료수와 끼니로 시위대의 사기를 돋구어 민주화 의지,신념을 달성케 하였다.의사,간호사가 구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학생들이 금융,정부기관을 지켰으며 헌혈에 온시민이 동참하였다.비록 신망의 정치인인 金大中이 ‘내란음모사건’이란 누명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어도 그것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더 불타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정인을 위하기보다 민주화는 필연적 과제였기 때문이다.이제 그 분은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되어 바웬사 사하로프 만델라와 함께 민주의 투사요 지구 인권의 파수꾼으로 손꼽히는 반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한다.불의,부정을 배격한 동학정신이 팽배한 이 지역의 5·18은 곧 우리 모두의 민주화운동이다.6·10항쟁,6·29선언(1987)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새삼 주목해야 한다. 영원히 저주받을 지역감정,지방색의 차별화 등은 망각의 저 여울속으로 보내야 한다.그래야 진정한 국민의 정부,신명나는 국민으로 거듭나서 화합의 대열로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또 복받은 대한민국이 달성되어 통일조국 대한민국 건국의 50주년을 환희와 벅찬 희망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朱鎔基 총리 뒤엔 馬洪 있었다

    ◎51년 黨 기관서 상관·부하로 인연/‘될성 부른 떡잎’ 40여년간 후원/한때 우파 몰린 朱 복권시켜 구명/개혁총리 기틀 마련한 싱크탱크 주룽지(朱鎔基)를 발굴,중국 총리직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은 누구일까.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를 꼽는데 동의할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명예주임인 마훙(馬洪)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졌다.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 최근호는 주룽지를 중국 총리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마훙이며,마훙의 발전연구센터는 주룽지 총리가 중국 경제개혁의 큰 틀을 짜도록 도와주는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산시(山西)성 딩양(定襄) 출신인 마훙 명예주임(78)은 3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뒤 공산당 중앙 동북국 정책연구실 주임,공산당 동북국위원 등의 자리를 거쳤다.문화대혁명 시절 반당(反黨)분자로 몰려 한때 고초를 겪었던 마훙은 78년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건 덩사오핑(鄧小平)에 의해 중용돼 사회과학원원장·국무원 부비서장·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고문·국무원 경제기술사회발전연구센터 총간사·국무원 발전연구센터 주임 등 경제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주룽지 총리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51년 가을.명문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23살의 주룽지가 공산당 중앙동북국 정책연구실 주임 겸 동북인민정부 부비서장을 맡고 있던 그의 소속 부서에 배치되면서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주룽지가 뛰어난 인재임을 간파한 그는 52년 신설된 국가계획위원회로 자리를 옮길때 주룽지와 함께 근무하기를 자청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이때 마훙은 국가계획위 주임을 맡으며 주룽지를 직속 하급부서인 계획 위주임 사무실 부처장으로 발탁했다. 마훙은 특히 58년 우파로 몰린 주룽지의 누명을 벗겨 공산당 당적(黨籍)을 복권시켜 줌으로써 훗날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줬다.이 때문에 주룽지 총리는 지금도 마홍을 ‘자기를 알아주는 유일한 은사’로 깍듯하게 모시고 있다고 한다.
  • “북풍 정치 악용·보복은 곤란”/문 정무수석 정례 브리핑

    ◎“안기부 북 접촉 문서 진위 확인 아직 안돼” 문희상 청와대정무수석은 18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북한 커넥션 내용을 담은 안기부 내부문서 등 북풍공작 사건이 조용히 처리되었으면 하는 청와대내의 기류를 전달했다.문수석은 이를 “북한의 장난일 수도,안기부가 북에 이용되는 것일 수도,안기부 자체의 구명활동 일 수도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문서의 진위는. ▲진실여부는 확실치 않다.내용의 100%가 자체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턱도 없는 엉터리일 수도 있다. ­사실로 드러난다면 관련자들의 사법처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대로 정치적 악용과 보복으로 비춰져서는 안될 것이다.국익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않다.차분하게 북풍조작의 사실여부를 명백히 밝히고 그 뒤 국민여론에 따르면 된다. ­북풍수사의 정치적 메시지는. ▲김대통령과 여당은 북풍의 최대 피해자이자,집단이기 때문에 역으로 안기부를 통한 위해 가능성을 앞으로 봉쇄하겠다는 의지다. ­이대성 전 안기부해외조사실장이 정대철 국민회의부총재에게 문서를 전달한 이유는.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는 것으로 안다.이씨가 문서를 전달하면서 ‘사실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고 들었다. ­청와대 기류와 달리 정부총재가 문서를 일부 언론에 공개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국회 여권쪽에서 강공인데. ▲조직적인 역할분담은 절대 아니다.그런 것을 할 수도 없다.할 말이 많으나 참겠다. ­한나라당으로부터 연락은. ▲전혀 없었다.
  • 프랑스,에밀 졸라 추모 열풍

    ◎‘드레퓌스 사건’ 민족차별 부당성 지적 100돌/‘나는 고발한다’ 진실규명 공개서한 재평가/정부,거론 금기관행 깨고 대대적 기념행사 【파리=김병헌 특파원】 작가 에밀 졸라가 용기있고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본으로 프랑스의 새로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졸라가 프랑스내 민족차별로 반역자의 누명을 쓴 유태계 프랑스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구명운동을 위해 한 신문에 투고한 대통령에게 보내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공개 항의서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거국적인 추모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졸라는 드레퓌스 대위사건이 발생한지 4년뒤인 1898년 당시 조르주 클레망소가 운영하던 일간지 「오로르(여명)」 1월13일자에 공개서한을 실어,13일로 꼭 게재 100주년을 맞았다. 졸라 추모에는 프랑스 정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지난 12일 이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졸라가 이 서한을 작성했던 파리 제9구의 저택에서 기념팻말 부착식을 가졌다.이날 행사에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엘리자베트 기구 법무장관,알랭 리샤르 국방장관 등 당시 관련부처 각료들이 참석하는 등 정부차원에서 추모에 나서고 있다.교육부와 파리대학,법무부는 관련 토론회 및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고 국립 도서관은 이 서한의 원본과 드레퓌스 사건 관련 문서의 진본들을 진열할 예정이다. 르몽드,르피가로 등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프랑스 언론들도 최근 며칠전부터 에밀 졸라에 대한 특집기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으며 공개서한 게재 1백주년인 13일자에는 당시 서한 전문을 싣는 등 3∼4면을 할애,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프랑스 육군사상 최대의 민족차별 스캔들로 치부되고 있는 이 사건의 주인공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반유태 성향의 상관들로부터 독일군에 기밀을 팔아넘겼다는 누명을 쓰고 군사재판에 회부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영화 ‘파피용’의 무대가 됐던 악명높은 남미 기아나의 ‘악마의 섬’으로 추방됐었다. 그후 페르디난드 에스테르하지라는 범인이 체포되면서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복권 운동이 추진됐으나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반유태인 분위기에 힘입은 군부가 유죄를 계속 고수함으로써 프랑스내에 격렬한 유·무죄 논란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러나 졸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개서한을 통해 프랑스내의 반유태주의 및 군부와 사법부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이로인해 졸라는 징역 1년과 3천 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았다.그후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드레퓌스 대위가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기 4년전인 1902년에 사망했다. 드레퓌스 대위 사건은 최근까지만해도 프랑스내 공식 석상에서 이를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고 70년대 중반까지 언론에서 거론하는 것 조차 금지됐었다.민감한 역사적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 주점 주인 살해 용의자/결백유서 남기고 자살

    【군산=조승진 기자】 가요주점 사장 살해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의 조사를 받은 강태범씨(53·무직·전북 진안군 진안읍)가 2일 하오 전북 군산시 옥서면 남동마을 뒤 야산에서 소나무에 목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씨의 호주머니에는 “억울하다.누명을 쓰고 있다.내가 박현수를 살해하지 않았다”라는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유서가 있었다. 강씨는 지난해 12월22일 새벽 전북 전주시 금암동 궁전가요주점 사장 박현수씨(38)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돼 다음날 전주북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뚜렷한 혐의점이 없어 귀가조치됐었다.
  • 은행들 “외국인 M&A 표적될라”

    ◎IMF 자금지원 계기 압박감 가중/‘정리대상’ 루머에 예금인출… 설득 애먹어/채권 매각·자산재평가… 경쟁력 확보 “경쟁” 국제통화기금(IMF) 자금지원을 계기로 은행통폐합 문제가 수면위로 급부상했다.정부와 IMF가 부실금융기관의 폐쇄나 인수·합병(M&A) 등 금융기관의 퇴출제도를 마련하고 외국인의 국내금융기관 M&A도 허용키로 해 은행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의 강도는 훨씬 더 커졌다. ○부실 딱지떼기 총력 그런데다 일부 은행에서는 핫 이슈인 부실은행 정리문제와 관련한 루머에 시달리면서 예금인출 현상이 빚어져 초비상이 걸렸다.9개 종금사에 대한 영업정지 조치로 고객들 사이에 불안심리가 팽배해지면서 그 파장이 은행권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는 것이다.은행들은 IMF 자금지원의 이행조건으로 부실금융기관이 M&A 등을 통해 정리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다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실은행이라는 딱지가 붙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구책 마련에 전력을 쏟고 있다.‘전쟁’이 마침내 터진 것이다. A은행장은 4일 한은 기자실에 들러 “최근 부실채권의 60% 이상을 성업공사에 매각했으며 추가로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부실화의 잣대인 자산건전성은 시중은행 평균 보다도 좋은 수준임에도 계속해서 부실은행이라는 누명을 뒤짚어 쓰고 있어 억울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그는 “내년에는 괜찮은 은행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도 고객들에게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묘책이 없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예금을 빼기 위해 창구에 찾아온 고객에게 창구 직원이 우리은행은 안전하니까 인출하지 말라고 설득해도 먹혀들지 않아 창구직원이 울음을 터뜨리는 안타까운 일마저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주가폭락… 인수에 호기 이에 앞서 B은행장도 지난 3일 한은 기자실에 들러 A은행장과 같은 맥락의 하소연을 했다.그는 “내년 초에는 자산재평가를 실시,6천5백억원 가량의 자본금을 늘릴수 있게 돼 경쟁력있는 은행으로 탈바꿈하고 있음에도 고객들이 불안한 나머지 창구를 자꾸 들락거린다”며 “우리은행은 절대로 M&A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두 은행장의 말처럼 두 은행의 최근 사정은 대기업 연쇄부도 사태로 부실채권을 많이 떠안았던 종전의 상황과 많이달라졌다. 한편 은행들은 국내은행간 M&A에 못지 않게 외국은행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연내에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현행 26%에서 50%로 대폭 높아지기 때문에 요즘처럼 주가가 폭락한 국내은행 주식을 자본력으로 무장된 외국은행들이 사들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기 때문이다.은행들은 특히정부가 IMF와 합의한 이행조건에 외국금융기관의 국내금융기관 M&A시 그 주체가 외국은행 본점인 지,그렇지 않으면 국내에 진출한 지점인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외국은행 국내지점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그런대로 대항할 수 있지만 가령 외국은행 본점 기준으로 할 경우 대처하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 경제위기 책임론(외언내언)

    대통령선거운동이 개시되자마자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소재를 둘러싸고 3당후보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김대중·이인제 후보는 “현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이회창 후보가 동반책임을 져야 한다”고 집중 공격하는 반면 이회창 후보는 “정경유착과 3김정치의 폐해가 오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번 경제위기의 원인은 선거전 차원을 넘어 우리의 자존심 복원과 생존전략을 위해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한강의 기적’만으로는 막을수 없었던 ‘천재’였는지,상황예측과 대처를 잘못해 초래된 ‘인재’였는지를 가려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동안 경제난의 ‘주범’으로 늘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 국민의 소비행태였다.이번에도 ‘1만달러 소득에 2만달러 소비하는 국민’이라는 질타가 요란하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과소비니 호화쇼핑이니 하는 것은 일부 계층의 이야기일 뿐 근검절약하며 사는 대다수 국민과는 무관한 일이다.다수 국민에게 씌워진 이 부당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도 경제위기의 원인을 정확하게 가려낼 필요가 있다. 우리 경제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지난해다.그래서 금년초부터 ‘경제살리기’가 가장 시급한 국가적 과제로 부상했던 것이다.더구나 우리 경제관료들은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의 경제위기를 지켜봤고 그 위기의 원인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책임의 가장 큰 몫은 누가 져야할지 뻔하다.정쟁으로 국가리더십을 약화시킨 정치권,방만한 경영으로 국가를 빚더미에 올려앉힌 기업의 책임은 또 얼마나 큰가. 물론 지금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따지기보다 모두가 사태수습에 진력할 때다.그러나 사태가 진정되면 바로 원인규명에 나서야 한다.우리가 대망의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인지,아니면 아르헨티나 꼴이 날지는 이번 경제위기에서 교훈을 얼마나 얻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때문에 위기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특정인에게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 씌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저 무턱대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얼버무리는 것도 적절치 않다.
  • 시장경제 자리매김 하려면/최연종 한국은행 부총재(시론)

    우리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10년 사이에 세계경제지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변모하고 말았다.미국 하버드대학의 보겔(E.F.Vogel)교수가 ‘일본이 제일이다(Japan is number one)’라고 치켜 세웠듯이 무적을 자랑하던 80년대의 일본경제는 90년대에 들어서 긴 불황의 터널을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80년대에 쌍둥이적자(재정과 무역수지적자)에다 세계최대의 채무국이라는 불명예까지 겹쳐 2류경제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던 미국경제는 90년대에 들어서부터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회복,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다.이에 질세라 영국병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던 영국경제도 어느새 탈바꿈하여 요즘같은 세계적 금융불안에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10년 사이에 이러한 나라들간의 명암을 뒤바꾸어 놓았느냐 하는 점이다.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규제완화,영국 대처총리의 민영화를 기점으로 양국 경제는 철저한 시장경제로 회귀,대전환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규제완화로 경제효율 제고 즉 미·영의 규제완화와 민영화는 외부로부터 방해(정부개입 등)를 받지 않는 시장을 보장함으로써 기업으로 하여금 생존차원에서 비용 극소화와 기술개발 등 혁신을 촉진시켜 결과적으로 사회적 경제효율을 제고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폭발(big bang),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정보통신혁명,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등과 같은 80년대로서는 아주 생소한 표제어들이 등장하였고 오늘날 미·영 경제의 변모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장경제의 중시조격인 하이에크(F.Hayek)교수의 시장경제관을 알아보면 그는 시장경제야말로 자원배분에 있어서 개인들 사이에 널리 분산 소유되고 있는 정보 내지 지식을 동원,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질서형태라는 것이다.이렇게 보기 때문에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은 법률적 장벽을 구축,정보내지 지식의 동원·활용을 차단·제약함으로써 시장의 유효경쟁을 저해하여 경제자원의 부적절한 분배를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이와같은 발상이 미국에서는 규제완화,영국에서는 민영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를 한 번 짚어보기로 하자.얼마전 K그룹사태의 해결방안을 놓고 왈가왈부할 때 여론에 반영된 우리의 시장경제관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아직은 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심지어 일부에서는 구조조정문제 등 산적한 현안을 들어 시장경제의 시기상조론을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적·물적자원 배분 관건 그러나 시장경제가 범세계적인 경제질서로 정착된 오늘날 우리만이 언제까지나 요새국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글로벌(global)시대는 제도의 글로벌 경쟁시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국제적 표준에 맞는 제도를 가진 나라에는 인적,물적 자원과 자금,기술등의 유입이 촉진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유출이 일어날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국제규제완화는 국민의 일상생활의 편의도모라는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이유야 어떻든 시장경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자원배분 분야에 관한 규제완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자원배분과 직결되는 시장진입 및 퇴출,인수 및 합병(M&A),기업분할,고용조정 등에 관한 높은 제도적 장벽은 앞에서 말한 정보 내지 지식의 흐름을 차단,사실상 시장형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또한 부실한 기업공시제도,투명하지 못한 기업회계제도,전횡적인 기업지배구조 등도 정보의 불완전성을 조장함으로써 시장경제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시급히 개선되어야할 과제라고 여겨진다. ○기업도 계획경제 탈피해야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 내부의 자원배분이 오너의 명령과 경영자의 수용이라는 권한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설령 제도개선으로 규제완화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기업 스스로 이러한 계획경제적 관행을 버리지 않는 한 시장경제는 크게 진전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공정한 게임·룰의 확립,지적재산권등 재산권의 보호,유효한 정보의 생산 및 유통 등 시장여건의 정비확충은 규제완화에 못지않은 시장성립 요건이다.시장경제가 만능도 아니고 완벽할 수도 없다.그렇다고 몇몇 사람들의 머리에 의존하는 계획경제나 혼합경제에 미련을 가질때는 아니라고 본다.
  • ‘공개처형’이 남아있는 사회(사설)

    인민 수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재판을 하고 그 자리서 총쏘아 「공개처형」을 했다고 한다.암흑가의 마피아집단도 아니고 사이비종교집단의 밀교의식도 아닌 명색이 「나라」인 북한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자유와 인권이 만개한 이 21세기의 문턱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언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진다.그것도 우리와 조상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같은 산하 한쪽에서 벌이는 일이다.끔찍하다. 더욱 충격스런 것은 처형된 대표적 「죄인」이 북한의 권력서열 26위인 노동당 농업담당비서였고 씌워진 죄목이 “미 제국주의자와 남조선의 괴뢰로 북한의 농업을 체계적으로 파괴해온 간첩”이었다는 점이다.오늘날 그들 인민이 겪고 있는 식량난의 원흉을 만들어내어 희생시킨 것이다. 지금은 역적모의한 죄인을 저자거리에서 효수하던 시대도 아니다.인민을 먹여 살리는 기본적인 생존권도 유지해주지 못하는 통치자는 그것만으로도 자격이 없다.그럼에도 난데없는 「미 제국주의자」와 「남조선」 간첩으로 누명씌워 농업담당관리를 처형하는것으로 기아선상에 있는 인민의 불만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권이 있다면 정신감정을 받아야 한다.그게 한나라를 다스리는 집단이 하는 일이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오늘의 인류가 지향하는 가장 당위적 이념은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그를 위해 모든 나라들은 노력을 하고 국제단위의 협조도 한다.그 수준에 따르지 못하면 소외되고 탈락될 수밖에 없다.언젠가 통일이 되면 함께 살아야할 우리의 소중한 동포가 이런 지경에 놓여있다는 일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있지도 않다는 ‘양심수’에 대한 관심으로 첨예한 논란을 벌일만큼 인권에 민감한 우리로서는 북쪽의 이 깊은 인권의 수렁에 더이상 무심해서는 안될 것 같다.인권투쟁으로 혁혁한 명성을 떨치는 국제기구도 많고 투사로 참여하는 쟁쟁한 인사가 우리에게도 많다.그런 인사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북한의 전근대적인 인권유린의 실정을 개선하는 노력부터 긴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압살하는 인권의 지옥에서 구하는 일은 더욱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단서라고 할 수 있다.
  • “살인·방화” 억울한 누명 6개월/대구 50대

    ◎재판중 진범붙잡혀 공소 취소 방화살인 혐의로 경찰에 의해 구속됐던 50대 피의자가 뒤늦게 다른 용의자가 나타남에 따라 6개월만에 공소 취소됐다. 대구지검 강력부는 절도혐의로 구속기소된 신용우씨(26·노동·대구시 남구 봉덕2동)로 부터 지난 4월 발생한 대구 남구 대명동 J다방 여주인 방화살인 사건에 대한 범행일체를 자백받고 1일 신씨에 대해 강도살인 및 현주건조물 방화치사 등의 혐의를 추가했다. 당시 범인으로 체포돼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임명준씨(58·아파트경비원·대구시 중구 대봉2동)는 이날 공소 취소됐다. 신씨는 지난 4월13일 하오 9시20분쯤 남구 대명2동 J다방에 침입,여주인 장모씨(53)의 손발을 묶고 머리를 둔기로 때려 실신시켜 현금 40만원과 은행 현금카드를 빼앗은 뒤 불을 지르고 달아난 혐의다.
  • 개천에서 난 ‘조선족 용’(흑룡강 7천리:10)

    ◎한때 중국 행정부·군 최고자리 올라/“30∼40년대 한족간부와 항일운동·해방전쟁 참가 정치적으로 한자리씩 감투…” 흑룡강이 가음현에 이르면 그야말로 도도한 강을 이루었다.가음하와 결렬하,오운하 등 26갈래의 지류를 품에 안아 강폭이 바다처럼 넓어지기 시작했다.강 저쪽 러시아의 바스커워가 가물가물하게 시야로 들어왔다.극동 시베리아의 대철도가 지나는 화물집산지라서 중국쪽 흑룡강 대안은 가음통상구가 되었다. 그 흑룡강에는 20만t급 화물선들이 드나들고 있다.그런데 강폭이 넓은 가음현 경내의 흑룡강은 이름 그대로 용이 살던 곳인지도 모른다.강변공원에는 ‘공룡가족’과 ‘공룡세계’ 조각품이 들어선 것을 보면 태고때 공룡이 살았던 모양이다.그래서 가음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룡화석 발굴지역이라는 것이다.1915년부터 지금까지 가음현 용골산에서는 모두 6마리몫의 완형 공룡화석이 발굴되었다.러시아 레닌그라드박물관과 흑룡강성박물관 등이 보관하고 있다. ○성 행정 최고간부도 배출 강변공원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는 ‘중화민족은 용의 자손’이라는 글귀를 담았다.중화민족은 물론 한족을 가리키는 말이다.용의 후손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족들은 뿌리깊은 용문화를 지키고 있다.음력 설날부터 보름까지는 아직도 용춤을 추고 단오날에는 용주를 타는 민족이다.그리고 용은 지고의 권력을 상징했다.임금의 옷을 용포,얼굴은 용안,앉는 의자를 용상이라 하지 않았던가.우리 민족도 용을 우러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한족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한족의 용은 어마어마한 권력의 상징물이다.그 권력은 타고난 것이거니와,세습이었다.그래서 여느 사람이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을 한다.한족사회에서 조선족의 출세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그런 조선족으로는 전 중앙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주임과 전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군부장 조남기상장을 꼽을수 있다.이들은 중국의 행정부와 군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조선족들인 것이다. 흑룡강성에서 고위직에 올랐던 조선족중에는 전 성민족사무위원회 이민주임이 있다.그녀의 남편 진뢰는 성장이었는데,부가 항일투사였다.지금은 항일과 해방전쟁 출신의 조선족 간부들은 다 퇴직하고 새로운 조선족 세대들이 들어섰다.그러나 옛날처럼 정치적인 출세라기보다는 기술직과 전문행정직이 대부분이다.흑하시에 사는 퇴직간부 한정순씨(64)는 조선족들이 기술이나 전문직에서만 출세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전의 조선족 간부들은 한족 간부들과 어울려 항일이나 해방전에 함께 참여한 동지이자 전우였디요.기래서리 정치적으로 길이 열려 한 자리씩을 했던거우다.요즘은 사정이 달라져 한족 틈새에서 간부를 하자면 실력이 뛰어나지 않고는 퍽 어렸습네다.개천에서 용이 나던 세월도 다 갔디요.” 그도 역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족들과 함께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조선족이다.평북 신의주 태생인 그는 1958년 대퇴한 이후 흑룡강성 밀산현 농업개간국에서 근무하다 1964년 흑하시 당학교로 전근했다.중학교를 졸업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던 덕분에 지식인 대접을 받았다.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아내의친척들이 남과 북에 산다는 이유로 조선간첩 누명을 썼다.당시 흑하시의 조선족 간부 13명 모두 간첩이 되었다.조선족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북한도 백안시했던 때라 기쁜 소식을 말하는 ‘해보’를 통해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어떻든 조선족은 연변과 같은 자치구역이 아닌 한족구역 공공직장에서 제1인자가 되기는 점점 어렵게 되었다.용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이무기만 되어도 다행스럽게 여길 정도로 조선족 위치가 변했다.자리가 높아진다 해도 자리를 지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치치하얼시에서 12년간 물자국장으로 일했던 성영석씨(58)의 회고담에는 그런 어려운 사연이 역역히 들어있다.소수민족이 다수민족 사이에서 홀로 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만했다. “물자국 직원은 600명이나 됐드랬디요.그런데 조선족은 내 혼자였디요.내가 총경리가 되고 나서리 밑에 있는 직원들이 상급기관에 고자질하기를 밥먹듯 합데다.그때 고자질 내용이 흑룡강신문에도 났디요.시에서 전문조사단을 통해 1년동안 검사를 해봤디만 헛물만 켠꼴이 되었댔습네다.내가 청렴하게 살았는데 걸려들 것이 있을리 만무했디요.내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부에 아첨 잘한 것도 아닙네다.오로지 실력과 청렴으로 버틴 것이우다.” ○물가국장 12년간 봉직 그는 1964년에 치치하얼 물자국에 배치되어 1982년 총경리로 올라갔다.그리고 1994년까지 꼭 12년간 국장을 지냈다. 그는 당시 북한의 유일한 공과대학이었던 김책공대 출신의 기술엘리트다.흑룡강성 용강현에서 태어나 내몽골 우란하오터에서 중학교를 나온 뒤 1960년에 하얼빈공업대학에 입학했다.그런데 3학년때 북한으로 도망을 가서 김책공대에 시험을 쳤다.북한은 조선족을 무조건 받아주고 공부도 시켜주는 때라 김책대학에 들어가 매달 20원의 생활비도 받았다.김책공대를 졸업하고 잠깐 집에 들렀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중국에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날 흑룡강유역에서 현직으로 활동하는 ‘개천의 용’은 겨우 두 손가락을 꼽을수 밖에 없다.막하현 기술감독국 박청천 국장(50)과 흑하시 우전국 서리희 국장(53)이 그들이다.그런 현실을 보면 기술전문분야를 파고들지 않고는 조선족중에서 ‘개천의 용’이 나올수 없다는 사실이 예견되었다.2백만 조선족을 대변할 정치적 ‘용’은 영영 나오지 않을 것인가.그 숙제는 조선족의 부단한 노력과 단결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 성폭행범 두번 몰린 20대 항소심서 모두 무죄판결

    ◎재판부 “물적증거 없다” 3년전 가정파괴범으로 몰려 1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뒤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던 20대 남자가 똑같은 유형의 사건에서 또다시 범인으로 지목돼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가 법정투쟁끝에 누명을 벗게됐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안성회 부장판사)는 27일 가정주부 3명을 연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씨(24·노동·서울 구로구)에 대해 징역 15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되려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만큼 엄격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며 “이 사건의 경우 범인의 지문이나 정액 검출결과 등이 전혀 제출되지 않은채 정확성이 떨어지는 피해자들의 진술만이 증거로 제시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 94년에도 똑같은 유형의 사건에서 범인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 고소남발 사라지려나(사설)

    검찰이 고소 남발을 막고 피고소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고소제도를 개선하기로 한 것은 때늦은 감이 있으나 잘한 일이다.개선내용의 골자는 지금까지 고소를 당하면 무조건 입건되던 것을 고쳐 비록 고소를 당하더라도 범죄혐의가 없으면 입건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검찰은 여기서 한발 나아가 고소취지가 불분명하거나 범죄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고소장을 아예 접수조차 하지않는 일본의 ‘고소장 선별수리제도’와 검사가 범죄의 정도가 가벼운 사람에 대해 6개월안에 손해를 배상토록 명령하고 이를 이행하면 기소하지 않는 독일의 ‘수리보류제도’도 도입할 방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소공화국’이라 불릴만큼 고소가 남발돼 그 폐해가 이만저만 심각하지 않다.95년 기준으로 피고소인 수가 47만1천702명으로 일본의 124배에 이르고 있다.이에 따라 검사 한명이 매달 맡아야하는 고소사건 처리 인원수는 일본의 2명에 비해 거의 50배에 가까운 94명이나 된다.고소사건은 또 대부분 사기·횡령 등 지능적인 재산범죄에 관한 복잡한 민사사건이어서 범죄사실을 밝혀내는 데 드는 수사력이 다른 사건에 비해 10∼20배에 이를 정도다.다시말해 그만큼 국력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이에 비해 범죄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나 기소되는 비율은 19%에 불과하다.많은 고소가 음해성이거나 민사소송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고소인의 인권침해도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고소만 당하면 범죄 혐의 여부와 상관없이 자동입건되고 컴퓨터 신원조회에도 기록이 남아 억울하게 전과자라는 누명을 쓰게됨은 물론 사건이 종료될 때까지 해외여행도 제한받게 된다.피고소인이 수사기관에 불려가 조사 받는 동안 감수해야 하는 고통은 또 이루말할수 없다.개인의 인권침해에다 수사력의 낭비는 바로 국력의 손실이다.검찰은 차제에 낭비적인 요소와 인권침해의 우려가 있는 수사관행들도 스스로 찾아내 개선하는 노력을 계속하기 바란다.
  • 모함성 고소따른 인권침해 방지/고소남발 실태와 검찰 개선안 의의

    ◎민사소송에 이용하려 제도악용 사례 많아/피고인벌 처벌 14%… 대부분 죄없이 불이익 검찰이 9일 고소 제도를 개선하기로 한 것은 고소 남발에 따른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폭증하는 수사 기관의 업무를 덜기 위한 것이다. 고소가 남발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행 제도가 고소만 되면 피고소인을 피의자로 자동 입건하고 있기 때문이다.피고소인의 범죄 혐의 여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모함성 또는 민사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괴롭히는 수단이나 민사소송에 사용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검찰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고소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고소가 남발되고 있다.일본에 비해 고소 사건이 무려 124배나 많다.95년 통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피고소인수가 47만1천702명으로 인구 10만명당 1천58명인데 비해 일본은 10만596명으로 인구 10만명당 8.5명에 불과하다. 사건 내용도 사기·횡령 등 지능적 재산 범죄에 관한 복잡한 민사사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올 1∼3월까지 검찰에 접수된고소 사건 가운데 사기·횡령·배임 사건이 63%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기소·벌금부과 등 피의자가 처벌된 사건은 14.8%에 불과했다.나머지 70% 이상은 무혐의,각하,기소중지 처리됐다.피고소인 10명 가운데 8명 정도가 엉뚱하게 검찰 등 수사기관에 불려나가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더욱이 피고소인으로 조사를 받으면 컴퓨터 신원 조회에도 기록이 남아 혐의 유무에 관계없이 전과자라는 ‘누명’을 쓰기도 한다. 피고소인들은 또 소환 사실을 숨기기위해 ‘친지가 상을 당해 급히 가봐야 한다’며 괜한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하면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해외출국을 제한받는 등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피고소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괜한 오해를 받는게 현실이다. 죄가 없는데도 고소인과의 합의를 종용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수사기관에서 ‘고소인이 무엇인가 억울한게 있어 고소하지 않았겠느냐’는 선입관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수사력의 낭비도 엄청나 수사기관 본연의 임무인 사회악 척결에도 적지 않은 지장을 주고 있다. 검사 1명이 매월 처리하는 고소 사건 처리 인원수는 우리나라가 93명인데 비해 일본은 2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일선 수사기관은 피고소인과 연락이 되지 않으면 사건 종결을 위해 소재지 파악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실정이다.
  • 삼성 기아인수 진짜 관심없나/공식 부인해도 재계선 의혹의 눈길

    ◎오해살 행동 자제속 막후 협상설도 기아에 대한 삼성의 속마음은 무엇일까.삼성은 공식적으로는 기아 인수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임경춘 삼성자동차 부회장은 “승용차를 만들겠다는 의지뿐 다른 회사를 인수할 만한 여력이나 여유가 없다”고 못박았다.올초 삼성의 쌍용자동차 인수설이 나왔을 때와 똑같은 표현이다. 그러나 재계에서 이말을 삼성의 진의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삼성의 경영진이 기아의 대주주인 미국 포드사와 접촉했으며 그룹 내부에 기아 문제에 관한 대책반을 만들었다는 설도 유력하게 나돈다.모그룹 기획실의 임원은 “삼성계열사를 통해 기아자동차 전체의 17%선인 포드와 일본 마쓰다의 주식을 매수하면 손쉽게 대주주가 될 수 있다”면서 “삼성이 포드사와 막후 협상중이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또 “삼성에게 기아의 생산시설과 마케팅 조직은 매력적이지 않을수 없으며 기아의 기술력에 삼성의 경영능력이 합쳐진다면 현대와 대우자동차에게도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동차업체는 국제적인 경쟁력을 위해 적어도 1백만대 생산체제는 갖추어야 하는데 10조원에 이르는 재원 확보와 인력 조달,판매 및 부품업체 육성이 큰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자동차산업 진출 35년이 넘는 기아는 이런 제반 요건을 갖추고 있어 삼성이 여건만 된다면 기아 인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구조조정 보고서 파문으로 기아와 불편한 관계였던 삼성은 검찰의 무혐의 판정으로 ‘누명’을 벗음에 따라 파문을 종결짓고 기아와의 관계회복에 나설 움직임이다.삼성 관계자들은 “기아를 어떻게 도와주는 것이 좋겠느냐”는 말로 운을 떼고 있다. 삼성은 “채권을 회수할 계획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삼성의 금융소그룹도 신용대출 등을 통해 2천7백20억원을 빌려준 기아의 채권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최근 기산의 주식을 매각한 것도 기아의 주식을 흔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익성이 떨어졌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해명했다.한마디로 기아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오해를 살 행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조심스런 모습이다.
  • 대영운수노조위장 박대석씨 무죄 확정/대법원 판결

    대법원은 최근 사업주에게 파업하겠다며 협박,돈을 받아낸 혐의로 구속 기소된 대영운수 노조위원장 박대석씨(44)의 공갈 및 공갈미수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씨의 혐의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시,1년6개월만에 누명을 벗었다. 박씨는 지난해 1월 서울 송파구 가락2동 대영운수(구 동현운수)노조위원장으로 일할때 파업을 미끼로 5천2백만원을 뜯어낸 혐의로 구속됐었다.박씨는 “당시 강남 경찰서 형사들이 경영주의 진술만 듣고 가혹행위를 가하면서 편파적으로 수사하는 바람에 억울한 누명을 쓰게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근로자의 날 대통령표창 후보자로 상신됐다가 이 사건으로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한 박씨는 “당시 회사측이 부지시설과 차고지를 확충하겠다고 근로자들과 약속했으나 이를 어기고 회사를 몰래 매각,근로자들이 항의하자 복지기금 명목으로 조합에 돈을 내겠다고 거짓 약속한 뒤 마치 공갈·협박당한 것처럼 경찰에 신고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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