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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추곡수매 폐지 이후-식량안보차원 필요량만 비축

    정부가 내년부터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대신 공공비축제도를 도입키로 한 것은 우리 농업의 체질을 강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농림부는 그동안 추곡수매제를 통해 수매가와 시장가격과의 차액을 정부 예산으로 메워왔다.가령 쌀 80㎏ 한 가마의 시장가격이 10만원이라면 정부는 이보다 1만원쯤 비싼 11만원선에서 사들였다.농촌의 열악한 현실과 농업의 중요성을 감안해서다. 그러나 추곡수매제가 폐지되고 공공비축제로 대체되면 수매 및 출하시기만 조절할 뿐,시세대로 사들인 뒤 되팔게 된다.지금처럼 시장가격에 일정 금액을 더 얹어주지 않는다는 얘기다.그만큼 농가의 부담은 가중된다. 정부수매 제도는 WTO(세계무역기구) 농업협상에서 정부보조금으로 인정하고 있어,전면 폐지를 강요받고 있다.협상 무대에서 우리 정부가 이를 고집하다간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각국이 긍정적으로 여기는 DDA(도하개발어젠다) 의장 초안에서도 정부수매는 연간 27만t씩 수매량을 줄이도록 명시했다.추곡수매 비중도 1994년에 전체 생산량의 30%에서 올해에는 17%로 줄었다. 정부는 한해 1조 6000억원(2003년 기준)의 추곡수매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하지만 실제 농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800억원 정도에 그치고 있어 농가소득 보전 방안으로 이미 실효성을 잃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내년부터 실시될 공공비축제는 현재의 추곡수매와 같은 방식으로 수확기에 지역농협 등에서 단계적으로 실시될 예정이다.구매량은 식량안보 차원을 위해 필요한 물량을 정하게 된다.현재 추곡수매량보다는 크게 줄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해 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한민수 정책실장은 “수매제 폐지는 국제협상에서 양보할 카드이고,국내 쌀시장의 가격안정 기능이 있으나 실익도 없이 섣불리 폐지했다.”고 비판했다. 전국농민단체총연맹 이영수 정책부장도 “쌀 수급과 관련,후속대책없이 수매제부터 폐지해 농민 불안이 가중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4)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하)

    혜소 스님은 금산사의 진표,화엄사의 연기 스님처럼 옛 백제 땅이 고향이다. 전주에서 최씨(崔氏)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였다.진표나 연기 스님 같이 백제 유민들의 뿌리 깊은 슬픔과 분노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중생 구원 소망은 목숨을 건 구도행위로 실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통의 바다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쳐 본 자만이 그곳을 건너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혜소 스님의 짚신삼기는 곧 그의 독특한 수행법이 되었다.저녁만 되면 염불을 외우면서 짚신을 삼았다.한밤중이 되면 앉은 채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다시 일을 계속 했다.밤을 새워 삼은 짚신을 짊어지고 길거리로 나간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삼거리나 장터 들머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살폈다. 맨발이거나 짚신이 닳아서 너덜거리는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새 짚신을 신겨주었다.뜻밖에 짚신을 얻어 신게 된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혜소 스님은 도리어 자신에게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며 절을 했다.짚신을 삼아 맨발로 다니는 사람에게 신겨주는 수행이 계속되자 이를 헐뜯는 사람도 생겼지만 격려하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함께 짚신을 삼아서 길거리로 나와 신발 보시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다른 일로 스님을 도와주는 승려도 있었다. ●“수행 깨우쳐 줘 고맙다.” 되레 행인에 인사 큰 비가 오거나 눈보라 때문에 행인이 없는 날을 빼고는 거의 쉬는 날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앉아서 짚신을 신겨주는 스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평상심의 기쁨과 힘을 보다 선명하게 깨달아 갔다.평상심이 민중의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임을 알아갔다. 기껏해야 짚신 몇 짝 삼아서 발 벗은 이에게 신겨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발 벗고 사는 민중이 출가 승려를 가르치고 일깨워주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꾸밈없는 평상심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며 민중은 평상심의 바다라는 것을 덤으로 얻었으니 수지맞은 것은 민중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믿었다.참으로 신통한 수행법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혜소 스님은 840년에 지금의 쌍계사 터에다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그만의 특유한 수행법을 다시 시작했다.그곳은 이미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이끌었던 혜능의 머리뼈를 가져다 묻은 터였다. 옥천사는 뒤에 정강왕이 쌍계사라고 바꿔 부르도록 했다.아무튼 혜소 스님의 수행처는 항상 민중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다.이는 마치 원효가 절이라는 곳에서 세속 한가운데로 수행처를 옮긴 것과도 유사했다. 소박하고 조촐한 성품이어서 언제나 대중 속에서 수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는데,이것 또한 원효가 근엄하고 조용한 절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생로병사가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세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간단한 염불을 가르쳐 함께 소리치며 노래했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혜소는 쌍계사를 처소로 삼은 뒤부터 새로운 수행법으로 민중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그가 새로 개발한 것은 범패라는 음악을 통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범패(梵唄)는 불교의 의식 음악이다.범음(梵音),어산(魚山),인도소리라고도 한다. 절에서 주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인데,가곡,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성악곡의 하나로 꼽힌다. 범패는 신라풍인 향풍(鄕風),중국의 당풍(唐風),당나라 이전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풍(古風:일본풍) 세 종류가 있는데,불교의식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설 내용을 표현하지 않는다.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아서 은은한 파도소리를 그리듯이 들린다.의젓하고 그윽한 맛이 있는가 하면 유장하고 심오한 맛도 느껴지는 소리다.사설이나 가사 내용보다는 몸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그 자체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소리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하고 특이한 맛을 내게 된다.혜소는 가사 내용이 전혀 없는 범패를 흥얼거리면서 저잣거리를 거닐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가난의 고통에 빠져 신음했다. 한 번 가난에 빠지면 평생토록 좀체 그 늪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혜소는 그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만 진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저자를 돌아다니면서 보고,듣고,느끼는 것 대부분이 민중들의 빈곤한 삶에서 찢겨나오는 고통에 짓눌린 신음소리와 세상을 향한 울분과 불평,원망과 저주가 서린 악담,신세타령,자학으로 뒤엉킨 비탄이었다. ●“욕설·원망대신 소리질러라.” 범패소리 전파 혜소는 그 신음소리가 사라지도록 발원했다.민중들의 깊고 무거운 가난과 차별의 슬픔과 병고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토지를 넉넉히 장만해 주어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해줄 수도 없었다.집을 지어 주고,약을 짓고 치료를 도와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도 없었다. 불안과 불만,원한과 저주에 찬 가슴 가슴들을 모두 씻어내기도 불가능한 일이었다.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의 문제였다. 혜소는 범패 소리를 이용하여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고,맑고 큰 우주 기운을 받아들여 정신세계를 비우는 불교 수행 방법을 세속인들에게 응용해보기로 했다.범패가 사설이나 가사 내용을 표현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데 착안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움직임과 감정을 호흡으로 내뿜고 빨아들이는 운동을 통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혜소는 민중들에게 범패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범패 형식을 빌려서 마음 속의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고,녹여내고,태워서 자신의 감정에 짓눌리고 억압되어 고통받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마음껏 큰소리를 외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민중들은 슬퍼도 큰소리로 울지 못했고,기쁜 일이 있어서 큰소리내어 웃기도 쉽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억압 구조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민중의 입에서는 곧잘 세상을 향한 저주와 신세타령이 터져 나온다.농사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면서도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했다.논이며 밭이랑에서는 물론 땔감을 장만하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이 떨어지지 않는다.길쌈하는 자리거나 빨래터 아낙들도 다르지 않았다. 혜소는 그런 민중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욕설과 원망 대신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가르쳤다.큰소리,작은 소리 가리지 말고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질러보라고 시켰다.내 소중한 육신 수고롭게 움직여서 먹이 장만하고,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왜 남을 욕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느냐고 타일렀다. 욕설과 원망과 저주는 결국 나 자신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업장이 되며,삶을 추악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며 쓸어 안고 울며 함께 소리를 질렀다.욕하는 대신 염불하고,노동의 고통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기보다는 그냥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지르면 고통이 훨씬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을 느껴보도록 이끌었다.농민들은 혜소의 말이 맞다는 것을 금방 느꼈다.실제로 욕설을 지껄이거나 신음소리로 끙끙 앓기보다는 큰소리 몇 번 내지르고 나니까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느꼈다.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제 몸뚱아리 수고롭게 움직여서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남 원망하고 저주하여 마음에 병 만들어 시달리면 나 자신만 손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농민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 대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소 기이하고 높고 낮은 소리,길고 짧은 소리들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입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한 집을 즐겁게 하고,한 집안의 소리는 이웃과 동네의 기쁨으로 커져갔다. ●쌍계사서 찻잎으로 약 만드는 법도 가르쳐 참으로 끝없는 사랑이었다.아무런 가사나 내용도 없이 앉고,일어서고,허리를 굽히고 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이한 소리,노래도 아니고 울음도 아니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움직이는 신이한 소리였다. 그런 다음 혜소는 쌍계사 주위에다 차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찻잎으로 차약(茶藥)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쳤다.병들어도 약 한 첩 먹을 수 없는 민중들에게 차나무를 심어 그 잎으로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그래서 하동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문화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이렇듯 민중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치던 혜소스님은 850년 76세로 입적했다.헌강왕이 진감(眞鑑)이라 시호를 내리고,그 뒤를 이은 진성여왕이 대공탑을 준공하였다.아,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사는 것임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혜소 진감선사여.˝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4)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하)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4)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하)

    혜소 스님은 금산사의 진표,화엄사의 연기 스님처럼 옛 백제 땅이 고향이다. 전주에서 최씨(崔氏)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였다.진표나 연기 스님 같이 백제 유민들의 뿌리 깊은 슬픔과 분노의 그림자를 밟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중생 구원 소망은 목숨을 건 구도행위로 실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통의 바다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쳐 본 자만이 그곳을 건너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혜소 스님의 짚신삼기는 곧 그의 독특한 수행법이 되었다.저녁만 되면 염불을 외우면서 짚신을 삼았다.한밤중이 되면 앉은 채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다시 일을 계속 했다.밤을 새워 삼은 짚신을 짊어지고 길거리로 나간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삼거리나 장터 들머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살폈다. 맨발이거나 짚신이 닳아서 너덜거리는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새 짚신을 신겨주었다.뜻밖에 짚신을 얻어 신게 된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혜소 스님은 도리어 자신에게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며 절을 했다.짚신을 삼아 맨발로 다니는 사람에게 신겨주는 수행이 계속되자 이를 헐뜯는 사람도 생겼지만 격려하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함께 짚신을 삼아서 길거리로 나와 신발 보시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다른 일로 스님을 도와주는 승려도 있었다. ●“수행 깨우쳐 줘 고맙다.” 되레 행인에 인사 큰 비가 오거나 눈보라 때문에 행인이 없는 날을 빼고는 거의 쉬는 날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앉아서 짚신을 신겨주는 스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평상심의 기쁨과 힘을 보다 선명하게 깨달아 갔다.평상심이 민중의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임을 알아갔다. 기껏해야 짚신 몇 짝 삼아서 발 벗은 이에게 신겨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발 벗고 사는 민중이 출가 승려를 가르치고 일깨워주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꾸밈없는 평상심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길이며 민중은 평상심의 바다라는 것을 덤으로 얻었으니 수지맞은 것은 민중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믿었다.참으로 신통한 수행법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혜소 스님은 840년에 지금의 쌍계사 터에다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그만의 특유한 수행법을 다시 시작했다.그곳은 이미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이끌었던 혜능의 머리뼈를 가져다 묻은 터였다. 옥천사는 뒤에 정강왕이 쌍계사라고 바꿔 부르도록 했다.아무튼 혜소 스님의 수행처는 항상 민중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다.이는 마치 원효가 절이라는 곳에서 세속 한가운데로 수행처를 옮긴 것과도 유사했다. 소박하고 조촐한 성품이어서 언제나 대중 속에서 수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는데,이것 또한 원효가 근엄하고 조용한 절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생로병사가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세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간단한 염불을 가르쳐 함께 소리치며 노래했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혜소는 쌍계사를 처소로 삼은 뒤부터 새로운 수행법으로 민중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그가 새로 개발한 것은 범패라는 음악을 통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범패(梵唄)는 불교의 의식 음악이다.범음(梵音),어산(魚山),인도소리라고도 한다. 절에서 주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인데,가곡,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성악곡의 하나로 꼽힌다. 범패는 신라풍인 향풍(鄕風),중국의 당풍(唐風),당나라 이전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풍(古風:일본풍) 세 종류가 있는데,불교의식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설 내용을 표현하지 않는다.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아서 은은한 파도소리를 그리듯이 들린다.의젓하고 그윽한 맛이 있는가 하면 유장하고 심오한 맛도 느껴지는 소리다.사설이나 가사 내용보다는 몸 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그 자체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소리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환경에 따라 다양하고 특이한 맛을 내게 된다.혜소는 가사 내용이 전혀 없는 범패를 흥얼거리면서 저잣거리를 거닐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가난의 고통에 빠져 신음했다. 한 번 가난에 빠지면 평생토록 좀체 그 늪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혜소는 그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만 진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저자를 돌아다니면서 보고,듣고,느끼는 것 대부분이 민중들의 빈곤한 삶에서 찢겨나오는 고통에 짓눌린 신음소리와 세상을 향한 울분과 불평,원망과 저주가 서린 악담,신세타령,자학으로 뒤엉킨 비탄이었다. ●“욕설·원망대신 소리질러라.” 범패소리 전파 혜소는 그 신음소리가 사라지도록 발원했다.민중들의 깊고 무거운 가난과 차별의 슬픔과 병고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토지를 넉넉히 장만해 주어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해줄 수도 없었다.집을 지어 주고,약을 짓고 치료를 도와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도 없었다. 불안과 불만,원한과 저주에 찬 가슴 가슴들을 모두 씻어내기도 불가능한 일이었다.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의 문제였다. 혜소는 범패 소리를 이용하여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고,맑고 큰 우주 기운을 받아들여 정신세계를 비우는 불교 수행 방법을 세속인들에게 응용해보기로 했다.범패가 사설이나 가사 내용을 표현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데 착안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움직임과 감정을 호흡으로 내뿜고 빨아들이는 운동을 통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을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혜소는 민중들에게 범패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범패 형식을 빌려서 마음 속의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고,녹여내고,태워서 자신의 감정에 짓눌리고 억압되어 고통받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마음껏 큰소리를 외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민중들은 슬퍼도 큰소리로 울지 못했고,기쁜 일이 있어서 큰소리내어 웃기도 쉽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억압 구조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민중의 입에서는 곧잘 세상을 향한 저주와 신세타령이 터져 나온다.농사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면서도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했다.논이며 밭이랑에서는 물론 땔감을 장만하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이 떨어지지 않는다.길쌈하는 자리거나 빨래터 아낙들도 다르지 않았다. 혜소는 그런 민중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욕설과 원망 대신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가르쳤다.큰소리,작은 소리 가리지 말고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질러보라고 시켰다.내 소중한 육신 수고롭게 움직여서 먹이 장만하고,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왜 남을 욕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느냐고 타일렀다. 욕설과 원망과 저주는 결국 나 자신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업장이 되며,삶을 추악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며 쓸어 안고 울며 함께 소리를 질렀다.욕하는 대신 염불하고,노동의 고통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기보다는 그냥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지르면 고통이 훨씬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을 느껴보도록 이끌었다.농민들은 혜소의 말이 맞다는 것을 금방 느꼈다.실제로 욕설을 지껄이거나 신음소리로 끙끙 앓기보다는 큰소리 몇 번 내지르고 나니까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느꼈다.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제 몸뚱아리 수고롭게 움직여서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남 원망하고 저주하여 마음에 병 만들어 시달리면 나 자신만 손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농민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원망 대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소 기이하고 높고 낮은 소리,길고 짧은 소리들이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입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한 집을 즐겁게 하고,한 집안의 소리는 이웃과 동네의 기쁨으로 커져갔다. ●쌍계사서 찻잎으로 약 만드는 법도 가르쳐 참으로 끝없는 사랑이었다.아무런 가사나 내용도 없이 앉고,일어서고,허리를 굽히고 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이한 소리,노래도 아니고 울음도 아니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움직이는 신이한 소리였다. 그런 다음 혜소는 쌍계사 주위에다 차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찻잎으로 차약(茶藥)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쳤다.병들어도 약 한 첩 먹을 수 없는 민중들에게 차나무를 심어 그 잎으로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그래서 하동 쌍계사가 우리나라 차문화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이렇듯 민중에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가르치던 혜소스님은 850년 76세로 입적했다.헌강왕이 진감(眞鑑)이라 시호를 내리고,그 뒤를 이은 진성여왕이 대공탑을 준공하였다.아,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법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사는 것임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 혜소 진감선사여.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함양군수 김종직을 아십니까?(상)

    요즘 세상을 혼란스럽다고들 한다.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어버리는 풍조,가정의 해체,학교와 학문의 붕괴,스승과 제자 관계의 변질,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이 국민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모두 걱정하며 불안한 나날을 산다.오늘은 이같은 불안과 근심을 덜고,어쩌면 혼돈의 우리 시대를 편안하게 해줄 묘책을 찾게 될지도 모를 곳으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경상남도 함양으로 간다.함양은 산 너머에 또 산이 있고,고개 너머에 또 고개가 있는 두메 산골이다.바깥에서 함양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세 길이 있는데,진주에서 가는 동쪽길과 전라북도 남원에서 가는 남쪽길,그리고 전라북도 장수에서 가는 북쪽길이다.요즘은 전라남도 구례에서 지리산 노고단을 넘어서 오는 서쪽길도 생겼으니 옛날의 그 첩첩산중이 사통팔달로 트인 곳이 되었다. 함양 가는 네 길은 모두 저다마 예사롭잖은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 ●신라·백제 국경 맞닿았던 첩첩산중 북쪽길은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를 잇는 육십령(六十嶺)고개를 넘는 길이다.육십령은 해발 734m나 되는 가파른 고갯마루인데,옛적에는 화적떼가 밤낮으로 들끓어서 육십 명이 모여야 간신히 넘을 수 있었다 하여 육십령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첫걸음 하는 이들은 자신의 운전면허증이 진짜인지를 혹독하게 시험당한다는 우스갯말이 생길 만큼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고 내린다.하지만 어머니 품같은 덕유산의 여름 철쭉과 겨울 눈꽃은 천하제일이다.그러나 무엇보다 뜻깊은 역사는 이 육십령이 백제 사람과 신라 사람이 넘나들면서 서로의 문물을 뺏고 빼앗기는 통로였다는 점이다. 남쪽길은 경남 함양군 함양읍 죽림마을과 전북 남원군 동면 성산마을이 코를 마주대고 동서로 앉아 있는데 50m쯤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면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나 완연하다.그래서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서있는 고개를 두고 남원사람들은 ‘팔량’이라 부르고 함양사람들은 ‘팔령’이라 부른다. 서쪽길은 전남 구례에서 화엄사와 천은사를 지나 지리산 노고단 산자락을 가파르게 기어올라 성삼재를 넘어야 한다.이 길도 육십령 넘는 길 못지않게 운전 솜씨를 시험받게 되는 아기자기한 산길이다.성삼재를 넘으면 곧바로 뱀사골 계곡이다. 뱀사골 끝자락에 실상사가 있고,다시 용유담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면 경상도와 전라북도 경계를 지나 함양으로 들어서게 된다.곧장 변강쇠 전설의 고장이자 눈망울이 가장 아름다운 장승이 있는 벽송사도 있다.용유담 계곡이 끝나면서 엄천강이 시작되는데 엄천강 맑은 물길을 따라 가다보면 함양군 휴천면 엄천 마을이 산자락에 보듬겨 있고,마을 앞 길가에서 자그마한 비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엄천강 기슭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펀펀한 돌 하나를 주워다 생긴 그대로 세운 비석에는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 관영차밭(官營茶園) 조성터(造成址)”라 씌어 있다. 동쪽 길은 진주에서 오는 국도 3호선과 대전 충무간을 잇는 대진고속도로가 훤하게 뚫렸다.나그네는 엄천마을 앞에 있는 그 비석의 앞면과 뒷면을 다 읽고는 잠시 함양의 옛일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최치원·정여창·박지원 등 名목민관 부임 지금의 함양군은 1914년까지만 해도 안의군(安義郡)으로 독립해 있었던 안의면(安義面)을 아우르게 되면서부터 그 역사와 문화가 더욱 깊은 유서를 지니게 된 고장이다.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이기도 했는데,사철 마르지 않는 여러 줄기의 개천과 강 좌우에 펼쳐진 넓고 비옥한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차지하기 위한 양측의 마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리산과 덕유산 자락에 에워싸여 있어서 풍부하고 좋은 목재와 땔감,약초와 산나물이 많고 밭자락 땅심도 좋아서 밭농사도 논농사 못지않았다. 이같이 좋은 생활 조건들로 인해 함양군으로 통합되기 이전 안의현(安義縣),함양현(咸陽縣) 시절의 현감이나 군수,관아의 육방관속 아전들 중에는 오히려 탐학과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백성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이들도 많았던 것 같다. 이런 폐단이 단절되지 않고 있는 중에도 함양 땅의 지도자로 왔다 간 이들 중에는 참으로 훌륭한 어른들이 적지 않았다.그분들은 비단 지난 어느 시대의 함양군수나 안의현감에 그치지 않고,시간을 뛰어 넘어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좋은 지도자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민족의 양심이자 살아 있는 정신의 사표이다. 첫 번째 어른은 891년에 함양태수를 지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다. 두 번째는 1471년에서 1474년까지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며, 세 번째는 1495년에서 1498년까지 안의현감으로 재직했던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선생이고, 네 번째가 1791년에서 1796년까지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이다. 네 분 어른 모두 우리나라 역사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뿌리깊은 정신의 샘물이며 의리와 예절,무엇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사무치게 그리운 이름으로 살아 있다. 지리산과 가야산을 낀 마을마다 신비로운 행적을 남겨 놓은 사람 최치원은 함양 태수를 지내면서 해마다 범람하는 위천을 막기 위해 고심했는데,위천 가에다 손수 심어 가꾸었다는 상림(上林)의 거대한 잡목숲의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학사루를 지어 지금도 한 목민관의 선행을 기리고 있다. 정여창은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의 길로 들어서 저 향기롭고 빛나는 영남사림의 계승자가 되기도 했던 어른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영국의 셰익스피어,독일의 괴테,중국의 소동파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 최고의 대문호였다.그런 그가 안의현감으로 재직한 6년 동안에 보여 준 성공한 목민관으로서의 생생한 증거는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제도를 표방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든 공직자와 정치인을 포함한 교육자,사회지도층 사람들에게 왜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지를 아프게 따져 묻고 있다. 함양군수 김종직은 1431년 지금의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재마을에서 태어났는데,아버지 김숙자(金叔滋)는 그에게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김숙자는 고려말 조선초 전환시대의 도학사상을 이끌었던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중심의 의리파(義理派) 학통을 계승하여 아들 김종직에게 이어준 분이다.정몽주,길재를 의리파라 부르는 것은 고려말 국내외적인 현실을 인식함에 있어서 일단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면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해나가자고 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몽주·길재의 義理派 학통 계승 이에 반하여 고려왕조는 수명이 다했으므로 새로운 왕조인 조선조를 창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도전 등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고,의리파는 학맥을 계승했다.이렇게 이어진 도학사상의 학통은 김종직에 이어 김굉필과 정여창에게 물려졌고,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사상의 절정기를 맞았었다.도학사상은 국내적으로는 불의(不義)에 대하여 항쟁하고,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는 국가를 수호하는 강력한 의리사상을 지니고 있는데,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의리파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국내적인 문제에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온몸으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싸우는 태도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함양 농민들이 빠져있던 세금제도의 모순에 따른 고통을 깨끗이 척결해 보임으로써,도학사상이 흔해빠진 논리의 유희가 아니라 세상을 깨끗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실천적 학문임을보여준 첫 사례였다.백성이 행복해야 나라가 산다는 김종직의 철학적 명제가,함양군수라는 직급이 매우 낮은 지방관직을 맡았을 때 실천된 점은 오늘날 이 나라의 공직자와 정치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에 신선한 충격이 되고 있다.
  • 천안 용정리 양계마을 르포

    조류독감이 발생한 충남 천안 풍세면 용정리 양계마을은 29일 긴급 투입된 방역요원들이 닭을 살처분하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러나 방역작업에 허술한 구석이 눈에 많이 띄었다. 조류독감에 걸린 닭이 마을에서 처음 발견된 신모씨의 산란계 농장 주변 500m 지점에는 빨간색 줄이 쳐져 있었다.양계농가 11가구와 양돈농가 2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흰 방역복을 입은 시 축산과 직원 50여명이 외부인을 통제하며 방역에 한창이었다.우체원들도 통제선 밖에서 방역요원에게 우편물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28일부터 닭 21만 4000마리 매립 방역요원들은 28일부터 마을의 닭 21만 4000여마리를 바이러스 소독 효과가 있는 생석회와 함께 마대자루에 담아 3,4m 깊이의 구덩이에 파묻고 있었다. 그러나 급하게 방역작업을 하는 탓인지,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났다.초중학교 학생들은 별다른 소독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삼삼오오 마을 바깥의 학원을 다녀왔고,일부 주민은 장을 보러 통제지역을 벗어나기도 했다. 특히 닭의 매립 장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방역당국이 침출수의 안전성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바람에 살처분이 이틀이나 미뤄졌다.또 닭을 묻기만 할 뿐 밀봉하지 않아 조류독감이 재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됐다. 게다가 통제구역 인근 2차선 도로에 대한 방역작업은 이날 오후에야 시작됐다.이는 차량을 통해 바이러스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방역요원이나 주민들 가운데 방역용 마스크 대신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는 일반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이조차 착용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뒤늦은 방역작업…재발 가능성 주민들은 인체 감염의 불안감과 유일한 수입원인 닭을 파묻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풍계면 용정2리의 한 주민은 “아직 건강에 문제는 없지만 동남아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용역직원과 함께 닭을 마대자루에 담던 양계농민은 “소중한 자식을 죽이는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고,다른 농민은 “우리는 피해자인데 마치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보는 사람도 많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박정길(59·용정 2리)씨는 “닭을 묻으면 보상이 나오긴 하겠지만 노계 한 마리에 100원을 받아서 어디에 쓰겠느냐.”면서 “아예 이번 기회에 양계를 그만두려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그는 “빚이 없어서 그만둘 수라도 있지만 빚을 진 주민들은 그만둘 수도 없고 그저 발만 구르고 있다.”고 밝혔다. 천안 김효섭기자 newworld@
  • [농촌경제 비상구가 없다](6)그래도 길은 있다-성공사례(하)

    ■전남 장성 삼서농협 설을 쇤 임학수(64·전남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씨는 27일 서둘러 관내 삼서농협을 찾았다.다음달 초에 있을 영농교육과 친환경 농자재 지원 여부를 알아보고,올해는 찰벼 발아 현미용으로 심을 논 6000여평을 추가로 계약해야 하기 때문에 정초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임씨는 1997년부터 자신의 논 5200평을 친환경 농법으로 삼서농협과 계약재배하고 있다.그는 “벼농사 짓는데 농약과 화학비료를 적게 쓰면 농협에서 전량 높은 값에 사준다.”면서 “판로 걱정이 없으니 농사짓기가 이렇게 수월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재배해 수확한 40㎏들이 벼 234가마를 가마당 6만 9000원에 팔았다.정부 수매값 6만 440원(1등)보다 가마당 8560원을 더 받은 셈이다.같은 면 삼계리 류재춘(65)씨는 “정부수매는 물량이 적어 벼를 심을 때 팔 궁리를 해야 했는데 지금은 전량 계약재배여서 그런 불안은 없다.”고 웃었다.인근 금산1구 오재국(56)씨는 “내년부터 추곡 정부수매가 없어진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우리는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올해 삼서면 19개 마을 192농가는 삼서농협과 벼를 계약재배(120㏊)하면서 판로 걱정이 싹 사라졌다.이 농협에서 가마당 8000원 이상 더주고 전량을 사들이기 때문이다.다만 자운영을 심고 참숯과 우렁이 집어넣기 등 친환경 농법으로 쌀을 생산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삼서농협은 지난해 친환경벼 500t을 사들여 ‘풀꽃나라 자운영’이란 쌀 상표로 25억원어치의 판매고를 올렸다.처음이던 96년 계약재배 면적이 67㏊였으나 지금은 두 배로 늘었다.이 면적은 삼서면 전체 논의 15%를 웃돈다.삼서면 대도리 1·2구 친환경농업쌀 작목반 김공근(48) 반장은 “도시 소비자들은 쌀밥을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건강에 유익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높더라.”고 말했다. 현대인들이 건강식에 거는 기대는 의외로 크다.삼서농협은 이를 겨냥해 2002년에 벼 발아현미를 개발했다.히트 예감 상품으로 자부하는 기능성 쌀이다.시중에서 1㎏에 9000원이니 40㎏에 36만원이다.같은 양의 친환경쌀에 비해 두 배이상 비싸지만 물량이 없어서 못 팔 정도다.지난해 200t을 가공해 18억여원의 판매고에 수익 1억여원이 떨어졌다. 올 연말엔 500t으로 가공량도 두배가량 늘어난다.농민들도 계약면적을 늘리려고 한다.발아현미는 친환경으로 재배한 벼를 골라 수분과 온도·산소를 공급해 싹을 틔운 쌀로,현미의 기능을 극대화한 것이다.비타민이 많아 영양도 그만이다.발아현미는 일반백미에 비해 비타민 종류에 따라 2∼16.7배 많다.발아현미 100g 속에 들어있는 비타민 B1은 김 50장,우유 2ℓ,쇠고기 2근,달걀 20개 이상과 맞먹는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박수영(39)씨는 “백화점에서 비싸지만 갖가지 기능성 쌀을 자주 사다 먹고 있다.”면서 “소화가 잘되고 영양가도 높아 이제 식구들이 백미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발아현미를 고안해 낸 삼서농협 이계택(44) 상무는 “발아현미는 실버산업 분야에서 성공 기대치가 높고 노약자들의 보양식이나 소화기 계통 질환자들에게 인기”라고 자랑했다.내친 김에 싹 틔운 통밀이나 싹 틔운 흑미 출시로 소비자들의저변을 파고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지난해 발아현미는 교육부 지정 학교급식 품목으로 채택됐으나 물량이 달려 아직 공급을 못하고 있다. ‘가족 건강은 식탁에서’라는 말처럼 농약과 비료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친환경 농산물은 농민과 도시 소비자를 잇는 든든한 줄이다.농산물에 대한 신뢰만 얻으면 소비자들은 값이 비싸더라도 저절로 찾기 마련.광주 신세계백화점 조남용(44) 식품팀장은 “고객 가운데 젊은 주부들이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많고 구매율도 높은 편이며,기능성 쌀과 유기농 야채를 함께 구입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친환경 농산물의 경우 서울·부산·인천 등 대도시 지역 자치단체나 아파트 부녀회,향우회 등과 자매결연을 통한 직거래 판매량이 늘고 있다.전남도 내 22개 시·군 가운데 42개 마을이 대도시 아파트단지 부녀회 등과 자매결연했다. 농민들은 도시 소비자를 초청해 작물재배 현장을 보여주고 농촌체험 장소를 제공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이렇게 해서 고정고객(5만 9000여명)으로 만들었다.생산자는 판로걱정이 없어 좋고,소비자는 속지 않고 값싸게 살 수 있어 좋다. 지난 8일 192개 농가와 업체가 참여한 전남도 농산물 전자상거래(JNMall)가 문을 열고 쇼핑몰을 운영하기 시작해 벌써 1억여원어치를 팔았다. 삼서농협은 대도시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 등 고품질 농산물을 선호하는 곳을 첫번째 공략지로 삼고 있다.친환경이나 기능성쌀의 경우 소포장으로 하고 판매량에 따라 탄력적으로 값을 내리거나 올린다.주부덕(56) 조합장은 “노약자나 병원 환자 등 주 소비자층을 집중 공략하고 대량 수요처에는 이에 걸맞은 인센티브를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남도는 올해 경기미를 능가하는 ‘전국 제1미' 가 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지난해 확보한 전남 쌀 평생고객도 서울과 부산·경남 등에서 6만 6700여명을 넘어섰다.올 목표는 10만명이다.지난해 전남도내 공무원 1만 6200여명과 유관기관 3200여명 등 2만 6200여명이 이 운동에 나서 20㎏들이 49만 3000부대 212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지난해 국내 백화점과 할인점의 구매팀장(352명)을 초청한 전남도의 청정농산물 상품 설명회에서 694억원,농·수·축산물 직판행사에서 125억원(125회),전남쌀 수도권 총 진군대회에서 28억원 등 모두 109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전남도 농산물판촉과 고대석(52) 과장은 “농민들이 고정 거래선을 갖고 있으면 맘놓고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광주 남기창기자 kcnam@ ■경북의성 총각농군 박재만씨 “저는 농사가 절대 사양산업이 아니라고 확신해요.그래서 농촌의 미래를 낙관합니다.남들과는 생각이 많이 다르죠?” 경북 의성에서 6000평의 사과농사와 1만평의 쌀농사로 연간 1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박재만(27)씨.대다수 농민들이 농촌의 암울한 현실로 위기감에 젖어 있지만,그는 거꾸로 농촌에 ‘올인’하는 총각 농군이다.늘 연구하는 자세로 농사를 지으면 고소득은 물론 높은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박씨가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봄,안동공업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상주대 농과대학 야간학부에 편입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도시와 농촌생활을놓고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강한 신체로 평생 일할 수 있는 농촌을 택했다.”고 술회했다.처음에는 농사꾼인 부모의 어깨너머로 일을 익혀 나갔다.몸 하나 믿고 겁없이 덤벼든 농사지만 녹록지 않았다.그러면서 조금씩 농부가 되어갔다.새벽에 부모를 따라 과수원과 논으로 나가 퇴비와 농약을 뿌리고,물대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었다. 해거름 때면 학생 신분으로 돌아와 공부에 열중했다.이런 2년간은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농대를 졸업한 후 박씨는 나이가 많은 부모로부터 과수원과 논 1만평을 물려받아 손수 농사를 짓는 전문 농사꾼으로 변신했다.열심히 농사를 짓다 보니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하는 행운도 누렸다. 직접 농사를 지은 첫 해의 결실은 신통치 않았다.전체 수익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사과농사에서 비료량 조절과 병충해 관리 실패로 큰 손실이 났다.부모가 농사를 짓던때 보다 수확량은 30%,수익은 4000만원이 줄었다. 별다른 농사 지식없이 의욕만 앞세웠던 게 화근이었다.과수 관련 책을 구입해 탐독하고,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군 농업센터에서 실시하는 ‘영농교육’도 빠지지 않았다.자비를 들여 과수 선진국인 일본과 타이완을 방문,신 재배기술도 익혔다. 이런 노력은 본격적인 과학영농으로 이어졌다.우선 친환경 농업으로 살균제 살포 횟수를 연간 15∼17회에서 8회까지 줄여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사과 생산에 성공했다. 철저한 토양검증과 시비 조절로 수세(樹勢)를 증대해 평범한 사과농사보다 30% 이상 증산도 가능했다. 여기다 그가 직접 개발한 독특한 사과 반사필름 피복 농법으로 착색 및 당도도 크게 증가시켰다.이런 농법이 고부가가치를 안겨줬다.그가 생산한 사과는 18㎏ 상자당 3만 5000원.일반사과보다 1만원이 더 비싸다. 판로 개척에도 남다른 노력을 쏟았다.대도시 아파트 부녀회 등을 고정 판로로 확보하고,전자상거래로도 눈을 돌렸다.천리안 등 통신망에 가입한 후 광고란에 자신의 사과를 소개했다.통신가입자가 늘면서 사과 주문도 밀려 들기 시작했다.부단한 노력으로 2002년에 농림부 장관상,지난해엔 대통령상을 받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요즘 제2의 도약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올 봄까지 8000여평에 2억원을 들여 새로운 사과밭을 조성할 작정이다. 박씨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고품질의 사과를 생산하는 게 꿈”이라며 “올핸 이런 꿈을 함께 실현할 마음씨 착한 여성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활짝 웃는 그의 모습처럼 우리 농촌의 미래도 밝았으면…. 글·사진 의성 김상화기자 shkim@
  • [농촌경제 비상구가 없다](4)일년내내 일해도 남는게 없어-어느 소득작목 농가의 눈물

    시쳇말로 ‘골병’이 든 마을이 있다.수십년씩 농사일에 매달린 농사꾼치고 신경통이 없을 리 만무지만,무릎 관절통에 허리통증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유난히 많다.집안에는 몸에 붙이는 파스가 통째로 있고,머리 아플 때 먹는 항생제는 농가의 필수품이다. ●쥔 건 없고 몸만 망가져 전남 보성군 조성면 귀산리 수당·귀산마을.하우스(온상)를 가장 먼저 시작한 하우스 ‘원조마을’이라고 소문난 곳이다.주민들은 “아이고! 쥔 건 없고 몸뗑이만 망가졌지.다 하우스병이제,뭐.”라며 스스로를 진단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30여 농가는 여전히 방울토마토가 주 소득원이다.마을에서는 1988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방울토마토를 재배했다는 자부심이 남다르다.당시 방울토마토를 이고 지고 서울이나 광주로 가서 팔 때면 “산에 맹감 가져 왔느냐,산딸기냐.”며 조롱당하기도 했다. 68년 대나무를 꽂고 볏짚으로 만든 거적을 덮던 시절부터 하우스에서 굵은 토마토를 수확했다는 김용래(63·수당마을)씨는 “낮에는 어지러워서 온상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다.옆에서 술잔을 들이키던 박영수(64)씨는 “온상에서 일하다가 중간중간에 바깥 바람을 쐬러 나와야 가슴이 안정되지라우.”라고 거들었다. 이 집에 놀러온 옆집 할머니는 “젤로 뒷머리가 땡겨 진통제를 많이 묵은디.다 아는 병인께 아파도 약국에 가서 파스나 사다가 붙이고 말지 뭐.”라며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병으로 여겼다.동네 골목에서 만난 70대 할머니에게 “하우스 하시냐.”고 하자 “아이고 온상 일에 몸서리가 쳐 오래 전에 때려치웠다.”며 뒤도 안돌아보고 갔다. ●신경통등 일년 내내 잔병치레 하우스 일이라는 게 눈뜨면 나가고 해진 뒤 보온덮개로 갈무리를 해야 끝난다.담배도 안피우는 데 가래에다 잔기침으로 고생한다는 귀산마을 이장 임영수(48)씨는 “4월만 지나면 하우스 안은 30∼40℃로 올라가고 높은 습도로 후텁지근해 그야말로 찜통”이라며 “주민들 가운데 기관지가 안좋고 감기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잖다.”고 말했다. 옆마을인 수당마을 이장 임영모(47)씨는 “어머니(68)도 하우스에만 가면 얼굴이 벌게지고 몸에두드러기 같은 게 난 적이 있다.”면서 “작물 이랑 사이에서 왼종일 쪼그리고 앉아 일하다 보니 무릎 관절이나 팔다리가 쑤시고 아픈 게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토마토 농사 ‘달인’이라고 치켜세운 오근호(57)씨는 “원래 내가 젊어서부터 밥을 많이 묵는 밥 호랭이였는디,아 요즘에는 하루에 한 공기도 못먹는당께.”라며 오히려 “그런 내가 어째서 달인이냐?”고 반문했다.마을에서 가장 젊은 정평오(38)씨는 “9년째 하우스를 하는데 빚만 1억원을 져 돌파구를 찾으려고 5년 전에 토마토에서 부지화(한라봉)로 작목을 바꿔 올해 첫 수확을 한다.”며 한 개를 따 맛보라고 권했다 특별취재팀 대구 김상화 대전 이천열 광주 남기창기자 ■연대보증 도미노 파산… 마을 쑥대밭 “그 사람이 호의호식하다 부도났으면 원망이라도 할 텐데….” 오이 작목반 동료의 보증을 섰다가 그의 빚까지 떠안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김학도(45)씨는 하루에도 수십번 이렇게 탄식한다.그는 “소금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던 사람이라 욕할 수도 없다.”며 “악하게 산 것도 없는데 웬 천벌이냐.”고 한탄했다. 김씨가 한모(53)씨에게 보증섰다가 떠안은 빚은 2000만원.한씨는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하던 2500평짜리 하우스 시설을 김씨에게 넘겼지만 4년째 놀리고 있다.자기 하우스 1500평을 운영하는 것조차 벅차기 때문이다.돈이 안되는 하우스를 물려받았을 뿐 땅은 남의 것이어서 매년 370여만원의 임대료만 물고 있다. 김씨 등이 오이 작목반을 구성한 것은 1996년.주민 8명이 작목반을 만들어 오이 재배에 나섰으나 IMF사태 후 어려움이 계속되다 2000년 한씨 등 회원 대부분이 동시다발로 무너졌다.외부인에게 보증 부탁이 어려워 서로 서준 게 탈이 났다.연대보증이 서로 얽히고 설켜 한 명이 무너지면 연쇄 붕괴되고,빚이 많다 보니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 동시에 부도가 난다.김씨는 “개인당 빚이 1억원 안팎이면 계속 농사를 지어 갚아 보려고 애쓸 텐데 대부분 그 이상을 넘어 어쩔 수 없이 무너진 것”이라고 말했다. 작목반은 ‘쑥대밭’이 됐다.유모(50)씨는 논밭을 다 팔아빚을 갚고 도시에서 야채장사를 한다.구모(44)씨는 도시로 가 막노동을 한다.어떤 회원은 저온창고 사무실에서 잠을 자면서 주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김씨는 “쌀이 떨어져 굶고 있는 동료를 보면 같은 농민이지만 눈물이 난다.”고 울먹였다.한 회원은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떴고 박모(44)씨는 다시 오이를 키우며 재기를 꿈꾸다 2002년 여름 태풍에 하우스가 날아간 뒤 고향을 등져 연락이 끊겼다.이 마을 최고 대농인 한 명은 그때 보증으로 물린 빚을 아직 갚지 못해 허덕이고 있다.명문대 농대 출신으로 젊음을 농촌에 바친 한씨는 현재 농협의 토양검정 용역을 받아 그 수입으로 농협 빚을 갚고 나머지로 사글세 집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지난 14일 이 마을을 찾았더니 하우스라는 하우스는 대부분 비닐이 갈기갈기 찢겼고,하우스 안은 마른 풀로 가득했다.김씨는 일이 터진 뒤 토마토 하우스 재배로 바꿨다.하지만 그도 한씨의 보증 빚,마을 친구와 친척에게 보증을 섰다가 물린 빚,자신이 농사를 짓다 진 빚 등이 총 2억원 이상돼 마음은 늘 불안하다. 벼농사만 짓다 답답해 오이 재배에 손을 댄 그는 “일이 터진 뒤 몇 달은 술로 지냈다.”며 “일부는 지금도 서로 얼굴 보기를 꺼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김씨가 다닐 때 한 학년에 400명이 넘던 청산초등학교는 인근 3개 학교를 통폐합해 면내 유일한 초등학교로 남아 있지만 40명이 채 안돼 이 마을의 쇠락을 대변해 주었다.김씨는 “자살하고 싶어도 처자식과 새싹이 돋는 작물이 생각나 못한다.”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정까지 일해도 빚 갚을 길이 막막해 힘이 안난다.”고 맥없이 말했다. 특별취재팀 sky@ ■결혼 11년만에 8억 빚진 부부 농사 100마지기에 하우스 1200평으로 부농(富農) 소리를 들을 만도 한데,아이들에게 변변한 옷 한 벌 못 사주는 기막힌 농촌가정이 있다.김태환(42·전남 장흥군 관산읍 남송리)·서선희(34)씨 부부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눈물로 삶을 이어간다. ●잘못된 보증·영농비 상승 빚 눈덩이 1988년부터 농사를 지어온 김씨는 대농(大農)으로 선진농업인에 뽑히는 등 남부럽지 않은 부자였다. 결혼 11년째인 이들이진 빚은 김씨가 7억 700만원이고,부인 앞으로 대출받은 1억 6000만원 등 모두 8억 6700만원이다. 비극이 싹튼 것은 IMF사태 직후인 98년.94년 이웃에게 1억 5000만원 보증을 섰다가 농협으로부터 보증빚 상환 독촉을 받았다.적금을 깨고 2000만원을 빌려 7000만원을 갚았다.그해 트랙터와 콤바인을 사느라 자신도 1억원을 빚졌다. 하지만 15∼24%에 이르는 살인적인 이자로 원금 1억 8000만원이 2000년 3억 4700만원으로 불어났다. 이자를 내느라 이곳저곳에서 대출 횟수가 늘었다.2000년에 보증선 5000만원이 또 터졌다.그러다 보니 2001년에는 5억 2300만원,2002년 6억 2900만원,2003년 5억 3700만원으로 자고 나면 빚이 눈덩이처럼 늘었다. 지난해 김씨 부부는 이자로만 4300만원을 냈다.주위에서 생활비와 농사 경영비 등으로 진 빚 4000만원도 갚았다.이 과정에서 2500만원을 또 빌렸다.100마지기 농사 매출액은 5000만원이다. ●논 담보 설정돼 있어 팔지도 못해 김씨는 “논을 팔아서라도 채무를 정리하고 싶지만 농협 등에 설정이 돼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한숨을 지었다.“기가 막힌다.”는 부인은 “아이들(2남1녀) 유치원비와 학교 다니는 아이가 급식비 6만 400원을 제때 못내 칠판에 이름 적히고 선생님한테 핀잔까지 들었다는 말을 듣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며 눈물지었다. 특별취재팀 ■영농비·농산물값 등락비교 ‘농산물 값은 종종걸음,영농비는 뜀박질’ 농산물 값은 최근 8년간 별 차이가 없다.반면 영농비는 크게 올라 영농 압박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와 농협중앙회 등에 따르면 쌀값(연평균,중품,도매기준)은 정부의 쌀 수매가격 인상 덕을 봐 1994년 ㎏당 1550원에서 2002년 2263원으로 45% 올랐다..반면 양념·채소류인 건고추(태양초,중품,㎏당)는 7183원에서 7782원으로 8.3% 인상됐다.마늘(한지형,중품,접당)은 1만 2660원에서 1만 1497원으로 1163원 하락했다. 양파(〃 ㎏당)는 784원에서 342원으로 폭락했고,과일은 사과(후지,중품,㎏당)가 1534원에서 2758원으로 1224원 인상된 반면 배(신고,상품,10개당)는 2만 2169원에서 2만 648원으로 1521원이떨어졌다.품삯(성인 남자)은 3만 1313원에서 5만 3093원으로 70% 폭등했다.농기계(이앙기) 사용료도 2만 2220원에서 3만 2564원으로 46% 올랐다.농약값(가격지수 100기준)은 76.4에서 102.7(26.3%)로,비료값은 64.7에서 100.1(35.4%)로 뛰었다.배합 사료값(25㎏,육성돈용 포대당)은 2500원대에서 8400원대로 급등했다.농가당 부채는 788만원에서 1989만원으로 1201만원이나 늘어 이자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특별취재팀
  • [농촌경제 비상구가 없다](3)노모와 이별하는 농촌가장-아기 울음 끊긴 농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13일 새벽,대구의 한 재래시장.채소가게 한 모퉁이에 짐꾼 서너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 무척 추워 보이는 4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지난해 2월 인근 농촌에서 빚 때문에 이곳으로 피신해 온 김모(49)씨였다. “참,뭐라고 말할 수가 없죠.빚 때문에 가정이 산산조각났고,정든 고향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요.돌아가신 어머니를 제 손으로 모시지도 못….” 김씨는 지난 2년여간의 처참했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의 짐꾼생활은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해 야반도주한 뒤부터 시작됐다. “하늘이 캄캄했어요.당장 먹고 잘 곳이 있어야 말이죠.막무가내로 시장을 찾았지요.” 김씨는 2∼3년전만 해도 부자는 아니었지만,어머니를 모시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인건비를 줄이려고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빌려 거액의 농기계도 구입했다.그러나 태풍으로 농사를 연거푸 망친 데다 빚보증 때문에 전 재산을 날렸다.아내와다툼이 잦아졌고,술로 날을 지샜다.그렇게 보낸 허송세월이 1년.아내와 이혼도 했다.결국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해 남몰래 고향을 등졌다.자신의 빚 5000여만원 전액을 보증서 준 고향 친구들에게 떠넘긴 채.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할머니와 함께 살던 고등학생 딸은 가출했다.아들은 구미에서 직장생활을 하지만 연락할 길이 없다.지난 여름에는 어머니가 숨졌으나,고향 사람들 뵐 면목이 없어 장례식에도 못갔다.“어느 날 한밤중에 어무이 산소를 찾아가 목놓아 울었어요.못난 자식이라 그 옆에 계신 아부지도 뵐 면목이 없었어요.”라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하루 수입 3만∼4만원으로 끼니를 때우며,쪽방에서 근근이 산다는 김씨는 “제발 고향 사람들에게 내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특별취재팀 대구 김상화 대전 이천열 광주 남기창기자 ■한마을 46명중 44명 환갑넘어 농촌에서 희망과 미래를 뜻하는 갓난 아기 울음소리가 멎은 지 오래다.대신 상여꾼들의 구슬픈 소리는 더 높아만 간다. 농촌이 출산율 급감과 노령·사망률 증가로텅 비어가고 있다.적은 수나마 농촌을 지켜왔던 젊은이들도 폐농으로 정처없이 하나 둘 떠나고 있다.농촌은 이제 풍전등화다. ●26년째 아기 없어 27세가 막둥이 2002년 말 기준 주민 평균연령이 44.8세로 전국 최고령 지자체인 경북 의성군의 구천면 청산2리는 아기울음 소리가 사라진 지 벌써 26년이 넘었다.이 마을 박종하(55) 이장은 “우리 마을에서 태어난 막둥이가 올해로 27살이 됐다.”고 말했다. 군위군 산성면 무암리도 신생아 출생이 20여년 전의 까마득한 일이 됐다.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0여명이 넘던 주민이 해마다 줄어 지금은 46명만 남았다.그것도 노인들밖에 없다.50대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60대 이상이다. 지난해 말 현재 인구 2만 9762명인 군위군의 주민 사망자 수는 연간 411명으로,출생 143명을 3배 가까이 웃돈다.이런 현상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박영언 군수는 “계속되는 농촌 인구 감소로 지자체의 존립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농촌발전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축사·사육하던 소까지 경매 인구 감소에다 빚을 감당하지 못한 농촌 일꾼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극단의 야반도주를 택한다. 의성군 점곡면 김모(50)씨는 빚으로 2개월 전 자신의 축사와 먹이던 소들이 몽땅 경매처분되자 가족과 함께 마을을 몰래 빠져 나가 지금은 도망자 신세로 살고 있다. 김씨는 한때 알부자였다.1995년 축협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축사를 짓고 소도 들여왔다.빚을 추가로 내 소를 계속 불려 나갔다.소가 새끼를 낳으면서 금세 50여마리로 늘었다.남부러울 게 없었다.그러나 98년부터 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소값이 하루가 다르게 폭락했다.결국 6억원의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다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군위군 효령면 박모(34)씨도 2년전 어느날 갑자기 도시로 사라졌다.1000여평에서 오이 시설농사를 짓던 그는 면내 지인들의 대출보증을 섰다 전재산을 날렸다.보증서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야반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자신의 빚 5000여만원에다 이들의 빚 1억여원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농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그는 정든 땅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이런 이유로 지난 한해 동안 의성·군위·고령군에서만 고향을 등진 농민회원만도 2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충남 청양군 비봉면 한모(48)씨도 쌀농사와 돼지 등을 기르며 진 빚 2억원이 부도로 이어지자 연대보증을 서 함께 망가진 장인을 남겨둔 채 사라졌다.‘농촌의 보루’라는 영농후계자들도 속속 농촌을 떠나고 있다.80년대 중반 농민후계자로 선정됐던 이모(44·군위군 군위읍)씨는 2년 전부터 농사를 포기했다.의성군 금성면 김모(50)씨도 마늘 등 복합영농을 하면서 진 빚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대구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MF때 귀농인 다시 도시로 IMF사태 이후 농촌으로 몰려 들었던 도시 실직자들도 다시 농촌을 떠나고 있다.경북도에 따르면 97년 이후 지난해 상반기까지 도시근로자 1028가구가 농촌으로 돌아왔다.그러나 영농 경험부족에다 영농비 폭등,농산물 가격 하락 등 열악한 농촌환경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재이농 행렬을 이루고 있다. 4년 전 고향인 영양군 석보면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고추,배추,벼 등 복합영농을 하던 전모(47)씨는 지난해 가을 다시 대구로 돌아갔다.기상이변과 농산물값 하락으로 2년 연속 ‘쭉정이 농사’만 지었다.경북도 및 군 관계자들은 “도시 귀농인들이 정착에 실패,지난해 하반기부터 농촌을 떠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군위군의 한 관계자는 “비록 때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는 농민들이 삶의 터전인 농촌에 머물 수 있도록 희망을 심어주고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별취재팀 ■‘나홀로 농사' 팔순의 母情 “큰 아들이 도회지로 달아나다시피했지.제발 잘 살아 줬으면 해.여기 일은 하루빨리 잊고….”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사는 박분순(83) 할머니.돈 때문에 곁을 떠난 아들식구 생각에 자나깨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그래서 언제부턴가 늘 염주를 손에 들고 다닌다.노령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의 매일 절에도 간다.아들(50)이 잘 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 박 할머니의 기도생활은 1년 전부터 시작됐다.함께 살던 큰 아들 부부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해 대구로 도망치듯 떠난 뒤부터다.애지중지하던 손자·손녀도 ‘할머니,할머니…’라고 울먹이며 따라갔다. 할머니는 농사짓는 것 밖에 모르던 아들에게 빚이 그렇게 많아진 게 못내 답답할 따름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농산물 개방이니,농가부채 탕감이니 하는 말은 잘 몰라.하지만 농사지으면 빚만 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늘 재롱을 피우던 손자·손녀들이 아른거리는지,할머니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할머니를 더 안타깝게 하는 건 연락이 뜸한 나머지 세 아들과 딸들.울산 사는 둘째 아들 내외도 지난 추석 때 잠깐 얼굴 본 게 마지막이다.구미에 사는 딸도 생활이 어려운지 좀처럼 기별이 오질 않는다.모두들 살기가 바빠 그런 줄 알지만,섭섭한 속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할머니는 아들이 넷이나 돼 국민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해 최소한의 생계비도 지원받지 못한다.살기가 고달플 땐 면사무소에 가서 기초생활수급자로지정해 달라고 떼도 써 보지만 ‘그저 알았다.’고 할 뿐 별 소식이 없다.매월 교통비로 나오는 8400원과 이웃들이 틈틈이 도와주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고 있다.손수 밥을 지어 먹는 일도 고달프기만 하다.병마와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신경통,고혈압,위장병….병이란 병은 다 달고 다닌다.그래서 요즘엔 자신이 어찌될까봐 늘 불안하다. “이웃들 보고 매일 아침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죽었는지,살았는지 봐 달라고 하지….” 할머니는 추운 날씨 때문인지 최근 들어 부쩍 자식들보다 이웃들이 소중하다고 말한다.그래도 할머니는 큰 아들 내외,손자·손녀와 다시 오순도순 사는 게 소원이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하루빨리 농사꾼들이 잘 사는 세상이 돼 큰 아들이 돌아와 같이 사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특별취재팀
  • [농촌경제 비상구가 없다](2)배보다 배꼽이 더 큰 농가부채

    예고없이 터지는 자연재해,해마다 늘어나는 영농비용,수입산으로 인한 농산물 가격 폭락 등으로 농가마다 빚더미에 쌓여 아우성이다.신용불량자가 속출하고 막다른 길로 몰리면서 삶을 포기하는 농민들도 수두룩하다.아무리 노력해도 늘어만 가는 부채는 이제 농민에게 ‘시시포스’와 같은 ‘천형’(天刑)이 됐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부채 밭 1800평에서 멜론을 재배하는 충남 청양군 비봉면 신월리 이병익(52)씨는 빚이 1억원이 넘는다.5년 전부터 벼농사를 지었는데,자녀 교육비 등을 도저히 댈 수 없어 멜론 재배에 손을 댔다.그러나 태풍과 폭설 피해를 네번이나 겪어 하우스시설을 재설치하면서 몇 백만원이던 빚이 이렇게 늘었다. 이씨는 “멜론을 재배해도 원금과 이자는 물론 어머니 병원비 등을 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빚을 얻어 수명이 6∼7년인 이앙기·트랙터·콤바인을 대당 2000만∼5000만원 들여 산 뒤,허덕이면서 갚다보면 농기계가 낡아 다시 거금을 들여 구입해야 해 농민들은 ‘빚의 악순환’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 1200평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유원균(43)씨도 빚이 8000만원에 이른다.1996년 처음 오이를 재배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1000만원이던 빚이 이렇게 불어났다. 전남 강진군 칠량면 당월리 김변중(39)씨는 빚이 1억원이다.지난해 1800평 시설하우스에서 1억 2000여만원 매출을 올렸으나 기름값 4000여만원 등 인건비와 농약대 등을 빼면 이자갚기도 빠듯하다. 벼농사만 짓는 농촌의 사정도 마찬가지다.지난 12일 찾은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는 전체 40가구 가운데 폐가가 10가구를 넘었다 농가주택 사이사이로 주인이 떠나 문짝이 떨어지고 지붕이 내려앉은 폐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마을회관에는 환갑이 넘은 노인 6∼7명이 모여앉아 얘기하고 있었다.주민 홍모(68·여)씨는 “빚을 진 이웃이 하나둘 떠나면서 이제는 초등학생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2년 기준 농가의 가구당 부채는 1989만원으로 이 가운데 농기계 구입 등 농사를 지으면서 발생한 생산성 부채는 1500만원선에 이른다.하지만 시설하우스를 하는 농민과 미래의 농촌을 짊어질 대부분의 청장년은 가구당 보통 5000만원,많게는 1억원이 넘는 빚을 지고 있다. ●신용불량자와 자살 속출 2000평의 시설하우스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 중인 전남 장흥군 관산읍 옥당1리 위성춘(43)씨는 자신을 포함해 부인과 아버지·어머니 등 가족 모두가 빚쟁이로 내몰렸다.자신이 진 것과 보증으로 떠안은 것 등 빚이 2억원이었으나 연체이자에다 외환위기 때 ‘살인금리’가 붙으면서 5억원대로 증가했다.위씨는 이미 신용불량자가 됐다.연말이면 연체이자를 갚느라 아내와 부모 명의로 추가 대출을 받다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경북 군위군 H농협의 경우 지난해 말 1400여명의 조합원 중 30%인 420여명이 신용불량자다.한해 농사를 지어도 이자 등을 갚지 못하면서 전년보다 100여명 증가했다.이들 농가의 부채 규모는 가구당 5000만원에서 1억원 수준이다.군내 다른 농협의 농민 신용불량자도 100∼300여명에 이른다.막다른 길에 몰린 농민들은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청양군비봉면에 사는 조모(52)씨는 지난해 여름 제초제를 마시고 자살했다. 쌀과 담배농사를 짓다가 빚이 해마다 늘어 1억원이 넘으면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이 길을 택했다. 이모(55·옥천군 안남면)씨도 쌀·담배농사를 짓다가 빚이 1억원을 넘어 갚을 수 없게 되자 한달 전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면사무소 관계자는 “700여 농가가 있는 안남면에서 IMF사태 이후 빚 때문에 자살한 농민이 1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비상구가 없다 옥천군 유원균씨는 “농사를 지어도 생산비조차 안 나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농산물 가격은 변동이 심해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가 없다.”고 말했다. 토마토의 경우 10㎏에 2만∼3만원을 호가하다 어떤 때는 2000∼3000원으로 떨어지는 등 10배 가까이 차이날 정도로 변동폭이 심하다. 청양군 이병익씨는 “배운 게 농사밖에 없고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당장 농사를 그만두면 앉아 굶어죽는 수밖에 없어 빚이 늘어도 농사를 포기하지 못한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특별취재팀 대구 김상화 대전 이천열 광주 남기창기자 ■장흥군 위원환씨의 대차대조표 지난 97년 고향에 정착해 1600평의 시설하우스에서 7년째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는 위원환(42·전남 장흥군 관산읍)씨는 벌기는커녕 되레 2억 2400만원의 빚이 있다. 그 해 여름,정부 보조·융자 각 40%,자부담 20%로 1억 4000만원을 들여 하우스 등 시설을 갖췄다.연리 6%에 3년 거치 7년 상환으로 융자금 5600만원이 그대로 빚이 됐다. ●기름값 인건비 상승… 방울토마토값 폭락 출발은 토마토 값이 좋아 산뜻했다.그 해 겨울 첫 수확에서 제반 비용을 떨고도 3000만원이 손에 들어왔다.5㎏짜리 7000상자(상자당 1만원)를 팔아 매출 7000만원에 난방비 1500만원,인건비 1000만원,포장상자 425만원,비료와 농약 600만원 등 4000만원이 들어갔다. 하지만 98년은 최악의 해였다.경유값이 드럼(200ℓ)당 12만원으로 치솟은 반면 토마토는 상자당 5000원 이하로 곤두박질했다.여름 수확(매출 2000만원)을 빼고 11월부터 나오는 겨울 토마토는 이듬해 5월까지 나온다.매출액이 3000만원에 그쳤다.기름값(2300만원)을 주고 나니 사실상 빈 손이었다.인건비와 종자대,농약값,경영비 등 3000만원이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왔다. 99년 흙이 아닌 물 속에서 토마토를 기르는 수경재배로 돌아섰다.8000만원을 더 들여 양액 자동화 설비를 갖췄다.보조(40%)를 빼고 융자·자부담 등 다시 4800여만원의 빚을 졌다.값마저 낮아져 매출이 3000만원으로 떨어졌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체이자(18%)를 막기 위해 추가로 1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후 비교적 순조롭게 2000년 3000만원,2001년 2300만원,2002년 3000만원의 순익을 냈다. ●최저가격 보상제 실시 농민불안 없애야 다행히 올해 ‘토마토가 인체에 좋다.’는 언론홍보 덕에 토마토가 상자당 1만 5000∼2만원으로 높아져 위안이 되고 있다.올해 순익 5000만원을 내다본다.1년이면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만 해도 4000만원이다.쌀 농사도 없고 다른 사업을 한다거나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니다.오로지 토마토에 매달린다.위씨는 “특용작물은 생산과잉이나 소비감소 등으로 폭락하기 일쑤다.돈이 된다면 우르르 심는 농민들의 태도도 문제지만 정부에서 최저가격 보장제를 제도화해 농민들의 불안을 없애는 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농경지 경매 작년 의성서만 664건 농민들에게 잇단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있다.돈가뭄으로 금융기관에서 논·밭을 담보로 얻어 쓴 빚을 갚지 못해 농경지가 경매처분돼 파산농이 속출하고 있어서다.담보로 집까지 날리게 될 농민은 가족과 함께 딱히 살 곳이 없어 한겨울에 거리로 나앉을 판이다.해마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었지만 돌아오는 건 회한과 눈물 뿐이라며 허탈감에 빠져 있다. ●대출금 연체 논·밭·집까지 경매 5000여평의 농사를 짓는 이모(55·경북 군위군 효령면)씨는 5∼6년 전만 해도 부자는 아니었지만,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그러나 해마다 농산물 값은 하락한 반면 농자재·인건비 상승이 보태져 빚은 갈수록 쌓여만 갔다.결국 지난 연말 전 재산 2억원 정도를 법원경매에 넘기고 말았다. 의성군 단촌면 박모(43)씨는 IMF사태때 회사의 부도로 농촌에 돌아와 4년째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그러나 2년 연이은 자연재해로 은행빚만 5000만원으로 늘어났다.대구지법 의성지원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의성·군위·청송지역에서 나온 전체 경매건수는 664건(농경지가 90% 이상)이나 됐다.2001년 438건,2002년 558건에 비해 해마다 큰 폭의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특히 지난해는 IMF사태로 부동산 경매가 절정을 이뤘던 1999년(752건) 수준에 육박했다.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을 관할하는 대전지법 논산지원에도 연간 100여건의 경매물건이 접수되고 있다.이중 절반 정도가 농가 주택과 농경지라는 게 논산지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영농자금 상환기간 되는 1분기 더 심각 군위 H농협의 경우,올 들어서만도 30여건이 부채상환이 안 돼 경매처분됐다.의성군 D농협도 최근 농경지 등 20여건을 경매에 부쳤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올 1·4분기다.각종 영농자금 상환기한을 앞두고 있기 때문.농협 군위군지부 4개 농협은 3월말까지 38억 4000만원을 농가로부터 상환받을 계획이다. 특별취재팀
  • [日열도에 뿌리내리는 신보수](2)퇴조하는 호헌세력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 정부가 자위대 파병을 각의에서 결정한 엿새 뒤인 지난 12월15일 국회와 의원회관 사이의 보도에서 조그만 집회가 열렸다.중의원에서 개최 중인 외교방위위원회의 자위대 파병 심의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집회였다.청년 노동자,학생들로 구성된 ‘월드 액션’ 집회의 참가자는 20명을 넘지 않았다.이들은 확성기로 호소하고,전단을 나눠주기도 했으나 지나는 시민들은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았다. 풀뿌리 신보수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도,좌파진영의 설 땅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보수화 진전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자,시민들에게 파고들지 못한 이들 진영의 전략 부재,노력 부족이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퇴조를 불렀다. 패전 후 일본 정치 ‘55년 체제’의 한 축을 이뤄온 사회당의 후신인 사민당 당사는 일본의 ‘여의도’에 해당하는 도쿄의 한복판 나가타초에 널찍히 터를 잡고 있다.자민당 당사를 뺨치는 커다란 당사이지만 국회의원은 중·참의원 합쳐 12명에 불과하다.의원 253명의 대부대를 거느렸던 사회당 시절(1959년),90년대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한 적도 있는 ‘좋은 시절’과 비교하면 이만저만한 격세지감이 아니다. 작년 총선에서 현역 12명이 낙선하는 바람에 의원을 포함,의원 1명당 3명의 비서가 한꺼번에 ‘실직’했다.정당보조금도 깎여 45명의 직원이 있는 당 본부 운영도 큰 부담이다. 지난달의 당 대회에서 제1야당 민주당과의 통합 제안도 나왔을 만큼 당의 진로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도이 다카코 당수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후쿠시마 미즈호 체제가 출범했으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후쿠시마 당수는 “유사법제에 찬성한 민주당과는 하나가 될 수 없다.사민당에는 사민당의 길이 있다.”고 통합에 극력 반대이다. 민주당(제1야당)의 간 나오토 대표는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만 통합도 생각하는 눈치다.올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다시 의석이 줄어든다면 사민당의 앞날은 그야말로 깜깜하다.공산당(중·참의원 29명)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미국계 통신사의 일본인 기자인 히토미 가오리(30·여)는 “평화헌법을 지킨다는 호헌(護憲)은 중요하지만 연금 같은 현실적 문제에 사민·공산당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없었다.”고 말했다.사민·공산당의 패인이 호헌만을 전면에 내걸었을 뿐,정작 시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주간지 중 거의 유일한 좌파 성향인 ‘슈칸긴요비(週刊金曜日)’는 지난해 8월 ‘패전으로부터 58년,되살아나는 내셔널리즘’이란 21쪽짜리 특집기사를 꾸몄다.6월의 유사법제 통과,이라크 파병의 배경에는 내셔널리즘의 부활이 있다고 본 때문이다. 일본 사회의 우편향을 걱정하는 이 주간지의 야심찬 특집에도 불구하고 반향은 적었다. 편집장 오카다 모토하루는 “3만부의 부수로는 영향을 주기 어렵다.”고 한숨을 내쉰다.1993년 창간 당시 5만부로 출발한 이 잡지의 쇠락은 중도·좌파 진영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오카다는 “90년 이후 경제번영이 끝나고 일본이 침체에 빠지면서 답답한 마음이 커졌다.그런 느낌을 해소하기 위해 강한 일본,강한 국가를 바라는 사람이 늘어났다.”면서 “이런 경향을 우파의 논객,정부가 이용하고 우파 잡지들은 그 틈새에 부수를 늘렸다.”고 풀이한다. 슈칸긴요비의 대칭축에 있는 우파성향의 ‘사피오(SAPIO)’는 지난달 슈칸긴요비의 특집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본의 애국심-어디가 나빠’라는 26쪽짜리 특집을 내놓았다. ‘김정일이 납치를 시인함으로써 일본의 애국심은 눈을 떴다’는 기고를 포함한 이 특집은 서문에서 “분출하는 ‘일본 내셔널리즘’ 비판의 와중,전후 58년간 터부시돼 온 ‘나라를 위해 싸우는 마음’이 시험받고 있다.”고 쓰고 있다.이 잡지는 최근 3만부를 늘려 15만부가 됐다.불황 속의 출판계에서 이례적인 부수 증가다. 호헌이 편집 방침인 슈칸긴요비의 퇴조,‘내셔널리즘 비판’을 비판하며 애국심을 전면에 내세운 사피오의 활기는 변화하는 일본의 축소판이다. 릿쿄대학의 이종원 교수는 “호헌,혹은 사민주의 세력은 반전 평화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시대적 역할이 끝난 것 같다.”고 풀이한다.그는 “낡은 사고,낡은 언어만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가지 못했고,새롭게 태동한 내셔널리즘,지역주의(동아시아)를 적극 평가하면서 일본의 새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4일 선거 출마자와 당 간부가 참석한 사민당 간담회.출석한 43명 중 38명이 낙선자였다.이들은 “‘호헌’이라는 말을 젊은층들은 잘 모른다.”면서 사민당의 슬로건인 ‘호헌’의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만을 놓고볼 때 사민세력의 부활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반드시 ‘종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이오 준 정책대학원대학 교수는 “사민·공산당 지지자의 고령화가 현저해 두 당이 세력을 늘리기는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사민 세력의 종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면서 “여당인 자민·공명당에도,야당인 민주당에도 사민세력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이들 사회민주주의적 사고를 살려나갈지가 관심거리”라고 말했다. marry04@ ■저널리스트 우오즈미의 진단 |도쿄 황성기특파원|저널리스트인 우오즈미 아키라(魚住昭)는 “그렇게 되면 안되겠지만 사민주의 세력이 없어질 가능성이 꽤 높다.”고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다.그는 “혼네(본심)와 다테마에(입장)가 일치하는 새로운 사민주의,즉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행복하게 먹고 살아갈 수 있는,전쟁만은 안된다는 사상을 분명히 갖춘 세력,지금의 사민당을 대체할 세력이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총선 결과는 일본 유권자가 사민주의 세력을 퇴장시키려고 한 것인가. -내셔널리즘의 만연이라고 할까,그런 현상이 최근 10년 동안 급격히 일어났다.9·17 북·일 정상회담에서 나온 납치사건 시인도 사민주의,사민당적인 것에 대한 반감을 강화했다.그런 의미에서 사민주의는 필요없다는 생각이 급속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아사히신문 조사(2003년 11월)에서 갓 당선된 중의원의 70%가 개헌에 전향적이었다. -산업의 공동화라고 할 정도로 일본 기업이 해외로 가고 있다.그만큼 일본에 있어서 해외 권익이 중요하게 되고 있다.그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군사력이다.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요구도 있지만,한편에서는 장래 해외 권익을 지키려는 일본 경제계의 속셈도 깔려 있다.헌법 9조 개정도 연동하고 있다.당연히 개헌이 일어날 것이다.우리처럼 개헌이 “위험하다.”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니까,(개헌을 막기에는)상당히 절망적 상태다. 그만큼 절망적인가. -예를 들어 동해에서 일본 어선,화물선이 북한 공격을 받아 침몰됐다고 하자.지금의 여론은 절대 북한을 용서할 수 없다.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본 여론은 들끓을 것이다.정당방위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해외 공장에서 일본 권익이 침해되거나 몇명이 살해된다든가 하면,과거의 상하이사변같은 일들이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전쟁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망언을 하는 사람이 300만표를 얻는 일은 10년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지금 일본 상황은 굉장히 위험하다.더욱이 일본인에게는 과잉 동조(同調) 성향이 있어서 학교,회사 같은 조직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동조해 간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구조개혁’과 내셔널리즘과의 관련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못사는 사람도 생활할 수 있도록,계층 대립이 나오지 않도록 한 것이 전후 일본 시스템이었다.고이즈미는 부자와 못사는 사람을 분명히 가르는 미국식 시장원리주의를 일본에 정착시키려 하고 있다.전락해가는 사람이 많다.자영업자,농민,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은 불안감을 갖게 되고 갈 곳이 없는 분노는 내셔널리즘으로 흐르게 된다. 정치건 미디어건 중도·좌파의 힘이 없다. -태만의 결과다.이들 진영의 정치가,지식인들은 목숨걸고 헌법 이념을 지켰어야 했는데,그렇게 하지 않았다.이념을 유지해 가는데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자민당도 그렇지만 민주당(제1 야당)은 더 안된다.오히려 젊은 민주당 의원들이 더 무섭고 과격하다. ●우오즈미는 1951년생.히토쓰바시 대학 법학부 졸업.교도통신 기자를 거쳐 1996년 프리랜서로 독립.저서로는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돼버린 걸까’,‘특수검찰’ 등.
  • [열린세상] 한 해를 보내면서

    참으로 시끄러운 한 해였다.신정부가 출범하면 으레 터졌던 대형사고는 이번에 대구 지하철 참사로 방문했다.한반도 바깥에는 이라크 전쟁이,안에는 북핵 위기가 내내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지난 대선에 나타난 세대정치의 분열상은 해가 지나면서도 치유되지 않았다.보수언론과 정부의 지루한 싸움은 국민들에게 식상한 느낌을 주었다.아파트 가격이 널뛰기하면서 샐러리맨들은 가슴을 쓸어 내렸고,청년실업 사태로 수많은 붉은 악마들은 사회탈락자로,부유층(浮遊層)으로 둔갑했다. 카드 빚,소득의 양극화,투자기피 현상 때문에 내수경기는 여전히 미지근하다.급기야 차떼기 소동이 밝혀지면서 정치인들은 악취를 풍기는 이상한 동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떡하랴? 우리는 한 해를 흘려보내고,새 날을 맞이해야 하는데.도란도란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백성사와 정화의 시간을 갖는다. 한때 코리안 타임은 느림,느긋함,전근대,막걸리의 시간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빠름,급변,조급증,폭탄주의 시간으로 바뀌었다.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컴퓨터 화면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뉴스를 본다.전철 속에도,회의 중에도,술자리에도 휴대전화 단말기는 쉬지 않고 터진다.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늘 부족한 일자리,불안정한 사랑과 결혼,북핵 위기,이해하기 힘든 정치,조류독감,쇠고기와 광우병,가짜 양주,만성화된 시위와 데모….정신없이 흐르는 시간,증폭된 불안감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순화시키려고 이 밤에 소주를,폭탄주를 마신다.그래도 친구들이랑 동료들이랑 한 해를 마감하는 자리는 잃어버린 축제의 시간이다.한 해의 계산을 마감하고,올해 이루지 못한 비상을 기약하는 시간이다. 연말이 축제의 시간이고 사투르누스의 달이라면,연시의 1월은 야누스(Janus)의 달이다.영어의 재뉴어리(January)는 바로 야누스에서 딴 말이다.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는 문(ianua)의 신이고 항구(port)의 신이다.새 문턱이나 항구는 바로 위기로 향한 문이다.위기(危機)는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공존함을 뜻한다.새 문턱을 넘을 때 느끼는 이상야릇한 호기심,무언가 나타날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는 들뜬다.영어의기회(opportunity)와 항구(port)가 같은 어근에서 온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는가.하지만 항구의 앞바다에는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한다. 한반도에 다가올 야누스의 달은 어떨까? 새 문턱을 넘어도 풍경은 크게 새로울 것이 없으리라.북핵 위기,이라크 파병 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농민들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기회도 없지 않다.선진한국을 향한 개방 한국의 힘찬 도약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고,그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정경유착과 고비용 정치를 한방에 날려버릴 천재일우의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정치권은 IMF 사태 이후 유일하게 구조조정의 성역으로 남아있다.지역주의,돈 선거의 악순환을 깨지 않고서는 선진 한국을 꿈꿀 수 없다.국가경쟁력을 최종심에서 결정하는 것은 깨끗한 정치이기 때문이다.검찰은 신속하고도 철저한 수사로 부패정치인들을 단죄해야 할 것이고,정치개악을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맞서 시민운동단체들은 또 한번 강력하게 정치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야할 것이다.총선에서 국민들은 깨끗한 한 표로 새로운 선량을 뽑아야 한다.부패한 한국정치를 만든 것은 결국 부패한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자원빈국이고 인구 과밀지역이다.내부에서 생산하는 것은 별로 없으니,바깥에서 먹을 것을 가져와야 한다.지금 우리의 밥줄은 쌀과 보리가 아니라 반도체,철강,자동차와 같은 제품들이다. 그런 점에서 강력한 신토불이의 심리학은 산업사회의 생존방식과 맞지 않다.도시의 일자리는 결국 개방한국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한·칠레 협정이 많은 문제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우리가 이를 개방한국의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야 할 까닭이다. 이 성 형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원
  • 대한매일 선정 2003 10대뉴스-국제

    美, 이라크 공격 후세인 생포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개발·보유 논란으로 예고됐던 이라크전이 3월20일 마침내 미군의 대규모 공습과 함께 시작됐다.초정밀 첨단무기를 앞세운 미군 주도 연합군은 순식간에 이라크 전역을 장악,5월1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했다.그러나 저항세력의 반격으로 이라크 재건작업은 벽에 부딪혔다.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지난 14일 체포됐지만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中 후진타오 체제 출범 개방 가속화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후진타오(胡錦濤)가 새 국가주석에 선출되면서 중국에서 제4세대 지도부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후 주석은 취임 직후 닥친 사스 파동을 강력한 지도력으로 극복하는 한편 개혁·개방정책을 가속화해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일궈냄으로써 내치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했다.북핵 중재를 통해 외교무대에서도 위상을 확실하게 굳혔다. 사스 창궐 812명 목숨 앗아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된 급성폐렴 증세의 괴질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30여개국을 강타,812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8400여명이 감염됐다.의료진의 감염과 호흡기를 통한 전염 등으로 전 세계가 공포에 떨었다.지난 7월 세계보건기구가 ‘종료’를 선언했지만 11월 타이완에서 올겨울 첫 감염 환자가 발생,사스 공포가 재연되고 있다. 세계경제 3년만에 회복세 세계경제가 3년만에 회복세를 보였다.올 초까지만 해도 주춤했지만 미국경제가 살아나면서 하반기부터 회복세가 가시화됐다.세계경제의 성장엔진인 미국은 3·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서 8.2%라는 20년래 최고치를 기록했고 노동시장에도 훈풍이 불고 있다.중국·인도의 활황세와 더불어 일본 역시 수출이 늘고 투자가 확대되면서 지난 10년간의 침체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칸쿤 WTO 각료회담 결렬 반세계화 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9월10∼14일 멕시코 칸쿤에서 새 무역질서 마련을 위해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담이 결렬됐다.농업 분야를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간 의견 대립이 원인으로 2004년 말까지 마치도록 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전망도 어두워졌다.한편 한국의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농업개방에 반대하며 회의장 밖에서 자살하기도 했다. 北核 6자회담 첫 개최… 앞날 불투명 북한 핵무기를 둘러싼 북·미 갈등은 4월 3자회담을 거쳐 8월 베이징에서 남북한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참석한 6자회담이 열려 다자간 조정의 무대를 마련했다.그러나 사태를 악화시킬 행동을 금지한다는 등 공감대 마련에도 불구하고 공동합의문 작성에는 실패했고 2차 회담의 내년 초 개최 전망마저 불투명해 북핵 사태는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 첫 유인우주선 발사 성공 중국은 지난 10월15일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기지에서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 발사에 성공해 세계 세번째로 유인우주선 발사국 대열에 올랐다.초고속 성장을 계속하는 중국의 질주를 보여주는 것으로 세계에서 높아지고 있는 중국의 위상을 드러냈다.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은 중국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중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지구촌 곳곳 끊임없는 테러 테러의 불안없이 지낸 날이 하루도 없다 할 정도로 전세계가 테러공포에 시달렸다.5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외국인 거주지역에서 연쇄 자살폭탄테러로 35명이 숨진 것을 비롯해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메리어트호텔 폭탄테러,10월 바그다드주재 국제적십자 사무실 폭탄테러,11월 터키 이스탄불의 유대인 교회당 및 영국 총영사관 폭탄테러 등 1년 내내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유럽 살인폭염 2만여명 사망 올여름 유럽에서는 섭씨 40도를 넘는 500년래 최악의 폭염으로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지구온난화 등 인간의 환경파괴 행위가 불러온 자연의 보복이라는 말이 나돌았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프랑스에서는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만 남겨놓은 채 바캉스를 가는 행태로 노인 사망자들이 많이 발생,사회문제화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격화 미국의 중동평화 로드맵 마련으로 한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해묵은 분쟁 해결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대한 공격 강화 등 이스라엘의 강경정책으로 양측간 분쟁은 오히려 더 격화된 양상을 보였다.압바스 자치정부 총리가 물러나고 쿠레이 총리가 뒤를 잇는 등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불안정도 평화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 오피니언 중계석/당대비평 ‘중산층의 위기’ 요약

    한국의 중산층은 1987년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많은 혜택을 누린 집단이었다.민주화에 따른 자유와 인권이 확대되고,본격적인 여가와 소비생활도 향유할 수 있었다.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미래에 대한 확신이 모두 불투명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56세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도둑이라는 ‘오륙도’,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38세가 기업에서 퇴직 연령으로 보는 마지노선이라는 ‘삼팔선’ 등이 중산층의 위기를 희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가 당대비평 겨울호에 쓴 ‘중산층의 위기,표준과 상승의 몰락’을 요약한다. 오늘날 한국 중산층의 위기는 중간층과 노동계급을 포함한 한국사회 전체의 위기다.이제 중간계급이 처한 현실은 지금까지 노동계급이 겪어 온 고용불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산층은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소득이 일정 수준에 달하여 경제생활이 안정되었고 노동자나 농민들의 수준을 훨씬 넘는 여가 및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사회집단이라 할 수 있다.중산층이 되기 위한 조건은 학력수준이 높고,직업적으로는 경영관리직,전문직,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가 일반화하면서 위기를 맞았다.대부분의 기업들이 노동조합원이 많아 저항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생산직을 정리해고하는 대신,화이트 칼라들을 먼저 정리해고했다.따라서 1998년과 1999년에 한국인들은 모두 고통의 계곡을 건너야 했지만,그 시기에 겪은 고난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닥쳐온 것은 아니었다.해고자 수는 생산직보다 전문직이나 기술직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이 질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기업이 고용과 해고를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고,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대체되었으며,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고용 불안이 가중되었다.또한 나이가 들면 일자리 이동이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인 유형이지만,나이가 많은 세대에서도 젊은 사람과 비슷한 정도로 전직과 이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그동안 한국의 중산층은 노동조합을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있지 않기때문에 노동시장에서의 고용불안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중산층의 위기는 중산층 신화의 위기이다.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이 노력만 하면 중간계급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경제활동을 해왔다.그러나 이제 누구나 노력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성공신화가 깨지고 허물어지고 있다.중산층이 누렸던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노동계급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고용 불안정이 어느 정도까지 가속화될 것인가는 정부와 기업의 고용정책에 달려 있다.세계화 시대를 명분으로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면,기업은 극단적인 고용정책을 추구하게 된다.하지만 시장 논리를 내세우면서 사회논리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고용불안은 사회의 다수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근본 요인이다.피고용자들에게 고용 불안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하는 ‘벼랑 끝’ 삶을 의미한다.젊은층에게 ‘중산층 신화’를 말 그대로 신화로 만들고 있는 또 다른 요인은 아파트 값의 폭등이다.이제 피고용자가 월급을 저축해서 아파트를 살 가능성은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동안 중산층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가 훼손될 것을 두려워하며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하지만 노동조합을 통해 집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부정했던 중산층은 노동계급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노출돼 있다.중산층의 위기는 중산층이 되기를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미래의 희망을 접게 만들고 있다. 이는 한국 중산층의 보수성이 스스로 만든 역설적인 결과다.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중간계급이 향유했던 경제적 풍요와 제한적인 민주주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이제 1997년의 외환위기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는 1987년 체제의 위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 “남 위한 좋은일은 내게 더 좋은일”/‘나눔’ 실천하는 한승헌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변호사로 활동할 때나 모금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지금이나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인권변호사로 민주화 투쟁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한승헌(69) 전 감사원장은 요즘 서울시청 앞에 세워진 대형 온도계를 보면서 마음을 졸이고 있다.강영훈 전 총리,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에 이어 국내 최대 민간모금 및 배분기구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3대 회장을 맡은 그는 ‘사랑의 체감온도’를 올리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성금 모일때마다 올라가는 ‘사랑온도' “아직 5도밖에 안돼요.빨간 온도계가 100도를 넘어 허공으로 뻗을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요.” 지난 13일 서울 미근동 공동모금회 사무실에서 만난 한 회장은 연말연시를 맞아 많은 사람들을 나눔을 실천하는 데 끌어들이느라 시간이 모자란다고 했다. “나눔이란 참 역설적이에요.남에게 많이 나누어줄수록 자신도 더 많이 가지게 되거든요.고사리 손에 들린 돼지저금통부터 대기업까지 소중한 분들이 주신 성금에 사랑을 담아 배달하다 보니 우리는 택배업이라고 표현합니다.” 마른 몸매에 강직한 인상으로 긴장된 표정을 좀처럼 풀지 못하던 그는 모금 캠페인으로 화제를 돌리자 금세 소년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다. “올해는 서울시청과 6개 광역시에 사랑의 체감온도탑을 세웠어요.전국적으로 9억 2000만원이 모아질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데 아직 5도예요.경제도 어렵고 국민의 참여가 저조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지만 4년째 사랑의 체감온도가 100도를 넘었습니다.따뜻한 마음을 믿습니다.그 기적은 시민들의 힘이에요.” 그가 말하는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는 아직 저변이 넓지 못하다.전체 기부액의 70%가 개인 기부에 이르는 미국과 비교하면 우리는 매년 모금액의 70%를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기업 기부마저도 매년 줄고 있어 걱정이다. 그는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고 배분위원회를 설립,투명한 배분 전략을 세우는 등 성금 집행의 전문성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배분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귀한 성금이 기부자의 뜻에 맞게 쓰이고 관리까지도 투명하게 이뤄지는 시스템이 가동돼야 합니다.국민의 신뢰가 밑천이기 때문이죠.” ●한국형 기부문화 확립 앞장 월급에서 일정액을 공제해 이웃을 돕는 한국형 직장모금 캠페인을 시작하고 엔젤복권 사업과 기부전문 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한국형 기부문화를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4월 가정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외국동전모으기 캠페인을 벌여 6억여원의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한 회장은 기부문화의 확산을 막는 현행 제도에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제도가 기부문화를 따라가지 못해요.모금행사를 하려면 행정자치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모금경비는 모금액의 2%를 넘을 수 없는 규제도 문제죠.” 모금에 열성을 쏟고 있으면서도 한 회장은 정작 재물과는 인연이 없다고 한다.“나는 돈을 사랑하는데 돈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변호사 시절 전세방에서 살다가 큰집에서 좀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은평구에 집을 장만해 이사가던 날 검찰에 구속됐어요.감옥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니 ‘큰집 큰집’ 노래를 했더니 살게 해준 것 같아요.” 연전에 테니스 라켓도 놓았다는 한 회장은 ‘운동은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변호사니까 석방운동하지.”라면서 “억울한 사람이 풀려나면 엔돌핀이 생긴다.”고 웃음을 지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의 고초를 겪고 인혁당 사건 등 인권재판의 변론에 앞장선 그는 자신의 삶을 “역사가 나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강요한 것”이라며 회고했다.“이름없이 신명을 바친 분들에 비하면 용기나 정의감도 부족했어요.역사의 대열 후미를 쫓아간 것이지만 지나고 보니 참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사는것은 관념이 아닌 행동” 그의 꿈은 원래 아나운서였다.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며 아직도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나처럼 개성있는 목소리가 그 시대에는 안 맞았나 봐요.” ‘국민의 정부’ 첫 감사원장으로 공직생활을 했던 그에게 요즘 정국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정권 초기라서 그런지 미숙하고 불안한 점이 있어요.뭐랄까.아마추어리즘이 갖는 순수성과 미숙함이 혼재됐다고 할까요.노무현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죠.” 그는 이어 “민주정부에서 대통령의 지위가 강하지 못한 건 나쁜 일은 아니에요.하지만 다수당에 밀려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건 위험합니다.한나라당도 절반의 책임이 있어요.공당으로서 비전을 제시해야지 트집만 잡아선 안됩니다.”라고 주문했다.그는 “‘선악(善惡)이 개오사(皆吾師)’라는 논어의 한 구절은 씹을수록 맛이 난다.”면서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뜻인데 악에서도 얻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 양반,이 뜻을 꼭 전해주오.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더 행복해요.더불어 사는 의미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에요.” ‘사랑의 온도’는 구세군 자선냄비,언론사 성금모금을 통해서도 올릴 수 있으며 자동응답전화 060-700-1212나 02-360-5995로 ‘사랑’을 더할 수 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1934년 전북 진안 출생 ▲57년 전북대 정치학과 졸업,사법시험 합격 ▲65년 변호사 개업 ▲72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창립이사 ▲75년 반공법 위반 구속 ▲79∼80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전무 ▲80∼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복역 ▲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94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98∼99년 감사원장 ▲현 법무법인 광장 고문변호사,사단법인 바른경제동인회 회장,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 납치 살해 악명 콜롬비아 우익민병대/ 자진 무장해제·해산 시작

    세계에서 가장 납치사건이 빈발하는 치안 불안국 중 하나인 콜롬비아의 우익민병대 콜롬비아연합자위군(AUC)이 25일 자진 무장해제를 시작했다.이날 콜롬비아 제2의 도시 메데인에서 카시케 누티바라 부대 병력 855명이 무기를 자진 반납,2005년 말까지 AUC 완전 해체를 위한 첫 조치를 밟았다.AUC는 지난 7월 정부와의 협상에서 민병대원들에 대한 사면 및 사회 복귀 지원 등을 조건으로 자진 해산에 합의했다.그러나 이는 상징적 조치에 불과해 콜롬비아가 40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너무 깊은 내전의 뿌리 AUC는 부유한 스페인계 후손들의 착취에 맞서기 위해 1964년 결성된 콜롬비아의 좌익반군 콜롬비아혁명군(FARC)의 폭력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창설됐다.그러나 창설 후 인권운동가들과 좌익반군에 동조하는 농민,거리의 부랑아 등을 무차별 살해,FARC와 함께 납치와 살해,인권유린과 마약 밀매 등 불법적 폭력의 대명사로 꼽혔다.AUC는 또 활동자금을 피랍자 몸값,마약 밀매에 의존하고 있는 FARC와 마약 밀매 주도권 다툼을 펴고 있다. ●멀고 먼 평화에의 길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은 이날 해산이 1만 3000명의 AUC 소속 병력 전체의 해산으로 이어지도록 평화협상을 가속화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1만 7000명에 이르는 FARC의 활동이 규제되지 않는 한 AUC의 빠른 해산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 인권단체들은 그동안 AUC가 자행한 인권유린 행위를 들어 이들에 대한 사면을 반대하고 있다.이들은 AUC의 자진 무장해제 합의가 자신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면과 불법적으로 취득한 자산을 합법화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유세진기자 yujin@
  • [열린세상] 농민을 분노케 하는 것들

    연일 계속되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회와 시위로 거리가 어지럽다.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 거리에는 화염병이 난무하고 교통은 막혀 있으며 다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잇단 노동조합 간부들의 죽음이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민노총과 농업개방이 농민들의 생존권을 앗아갈 것이라는 전국농민연대는 정부와의 대결을 선언하고 나섰다.두 주먹 불끈 쥐고 길거리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들의 마음 속에는 분노가 가득하고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 속에는 불안이 가득하다.이 분노와 불안이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이 기득권에 집착한다는 주장과 함께 농업개방이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인데 어쩌겠느냐는 주장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도 한다.사회가 혼란에 빠지면 경제 회복이 계속 늦어지고 그러면 결국 민중들의 삶만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도 한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대화를 거부한 채 폭력적으로 요구를 관철하려는 것이 시대적 흐름을 거스른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이 옳다고 하더라도 또한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과격 시위가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노동자·농민들의 분노의 표출이라는 사실이다. 90년대 말 경제위기 이후로 우리 사회는 분배구조가 급격히 악화되어 왔다.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90년대 중반 0.28에서 경제위기 이후 0.32로 갑자기 뛰어올라 최근까지도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소득불평등은 재산불평등,특히 부동산 소유의 불평등에 비할 것이 아니다. 분배의 악화로 경제적 처지가 더욱 어려워진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이러한 일들이 보다 노동자,농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들의 입장에 가깝다고 여겨져 온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에 걸쳐 일어난 것은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과 절망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있다.최근 검찰 조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정치권과 재계의 검은 커넥션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들의 월급과 재산을 서슴지 않고 가압류하는 대기업들이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정치권에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된 노동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노동문제가 단지 노사간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노정간의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바로 정치권과 재계의 깊은 유착관계였다면,오늘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동자와 농민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정부와 정치권을 성토하게 만드는 것 역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정경유착이다. 전세계적인 경기의 호전과 그에 따른 수출의 호조에 힘입어 국내 경기 전망이 낙관적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측들이 제시되지만 여전히 피부로 느껴지는 국내 경기는 차갑기만 하고 소득 2만달러를 기약하는 정부당국자의 발언은 점점 더 공허하게 들린다. 이번 기회에 정치개혁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정권에 속한 정치인들이 모처럼 야당과 국회에서 합의한 정치적 사안이 국회의원 의석 수를 늘리는,보다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밥그릇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는 데에 국민들은 또 한번 절망한다. 거리로 뛰쳐나와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것이 노동자와 농민들이 당면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한 걸음씩 물러나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수용하고 보다 현실적으로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와 협상의 상대방이 내 당면한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노동자와 농민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절망과 분노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만 진정한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정부 당국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노동자,농민과의 힘 겨루기 차원에 머문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지난 10여 년 동안 사회적 갈등 해결능력 면에서 한치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 준 연세대교수 사회학
  • ‘국적회복’나선 中동포/(상)‘강제출국’ 안타까운 사연

    국내에 체류 중인 중국동포들이 극한투쟁에 돌입했다.오는 17일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예고된 가운데 이들 중국동포는 ‘고향땅에 살 권리’를 주장하며 헌법소원에 이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중국인으로 불법체류자일 뿐’이란 법률 논리와 ‘고향에 왕래하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라는 역사성을 강조한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중국동포들의 현주소와 역사적 배경,해법 등을 살펴본다.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중국동포들이 ‘고향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접수시키고 있는 동안 재판소 밖에선 5000여명의 중국동포들이 손에 손을 잡은 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누군가가 시작한 노래가 커다란 울림이 돼 퍼지면서 이들이 한 민족임을 실감케 했다. ●“우린 조국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 할아버지 묘지도 있고,내 호적도 있고,친척들도 있는데 왜 제가 이 땅에서 쫓겨나야 합네까.” 새문안교회 단식농성장에서 만난김자연(가명·55·여)씨는 두 손을 꼬옥 말아 쥔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한국에 온지 6년이 됐지만 그동안 모은 3000만원은 얼마전 사기를 당해 다 날려버렸다.그는 “쫓겨날 상황에서 단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면서 “우리는 아픈 역사의 희생자일 뿐 조국이 싫어 떠난 사람들이 아닌 만큼 무조건 불법체류자라는 굴레로 엮지 말아달라.”며 하소연했다. 5살 때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간 이형상(64)씨는 “우린 동포 아니냐.”며 말문을 열었다.그는 “중국 땅에서 수십년간 이방인이라는 눈총을 견디며 풀뿌리처럼 살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조국마저 우리를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여기 모인 사람 중 조국 땅 싫어 떠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딱한 처지는 마찬가지겠지만 중국동포들이 이 땅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법률자문을 맞고 있는 정대화 변호사는 “재중동포의 국적문제는 단순히 헌법적인 차원을 넘어 일제 강점기의 수탈을 피해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한민족의 역사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중국동포들이 자진해서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만큼 이들이 국적을 취득할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또 “독일이 통일 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10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에게 국적회복을 해준 만큼 우리도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재중동포의 국적회복의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일제단속에 생이별의 아픔도 불법체류자라는 족쇄 때문에 일제단속이 시작되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중국동포들도 적지 않다.이충일(32·여)씨는 요즘 아들 성민(가명·3) 때문에 외출을 할 수도 없다.세살밖에 안되는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밖에 나가면 경찰아저씨가 엄마 잡아가.”라며 엄마의 다리를 잡고 떨어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이씨가 한국에 온 것은 6년 전.식당에서 일하다 한국인인 장모(38)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성민이를 갖게 됐다.하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돈도 모아 함께이씨의 고향인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살자던 부부의 약속은 이내 남편의 외도로 무참히 깨져버렸다.지난 8월 한국 여자가 생긴 남편은 이후 이씨를 폭행하고 아들 성민이마저 빼앗아갔다.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열흘 남짓만에 아들을 되찾았지만 모자(母子)가 함께 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17일부터 시작되는 단속에 적발되면 이씨는 아들을 남겨둔 채 강제출국을 당하고 호적법에 따라 성민이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혼한 어머니를 찾아 옌볜(延邊)을 떠나 한국에 온 현아(가명·14·여)는 국내법상 불법체류자다.미성년자인 불법체류자들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학교장 재량에 따라 강제출국은 피할 수 있다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현아는 지난 2000년 방학을 맞아 한국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 김선숙(35)씨를 만나러 왔다가 함께 살게 되었다.학교장의 배려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입학은 했지만 1학년 1년 동안은 시험조차 볼 수 없는 청강생 자격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서울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선희 소장은 “학교장 재량에 따른다는 애매한 조항에 따라 현아와 같은 미성년 불법체류자 역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영규 유지혜기자 whoami@ ■이은규 서울조선족교회목사 “중국동포들에게도 조국에서 살 권리를 주십시오.” 중국동포의 국적회복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서울조선족교회 이은규(사진·43) 목사는 “중국동포들은 우리 나라에서 단순히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국적회복 운동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목사는 “중국동포 대부분은 일제 시대에 독립 운동이나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 사람들의 후손”이라면서 “해방 후 북한에 들어선 김일성 정권 때문에 귀국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러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이어 “1948년 제정된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에 의해 한국 국민이 됐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한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국제 미아’가 된 중국동포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라며 이번 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 목사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주지 않은 법무부에 대해 ‘책임 방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이 목사는 “우리나라는 지난 92년 중국과 수교를 맺을 당시 국내법 효력을 갖는 ‘재중동포의 지위에 대한 협정’을 만들지 않았다.”면서 “이는 만들어야 할 법을 안 만든 ‘입법 부작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또 “법무부는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 신청을 거부함으로써 같은 동포의 국적선택권,평등권,행복추구권을 위배했다.”면서 “정부는 스스로 양산한 중국동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책임방기를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 목사는 이와 함께 “우리 국민들도 중국동포 문제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 ■190만 中동포 이주 역사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 동포는 190여만명에 달한다.대부분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기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한반도를 떠난 이주민의후손들이다. 주로 ‘동북 3성’으로 불리는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베이징,톈진,신장,상하이,광저우 등 중국 전역 대도시로 진출하고 있다. ●첫 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 직후 재중 동포 이주사는 크게 3기로 나뉜다. 1기는 19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로 대부분 가난과 탐관오리들의 폭정을 피해 압록강을 건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2기에는 항일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 주를 이뤘다. 3기는 45년 해방까지의 시기로 당시 일본은 일본인을 조선으로,조선인을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시키는 환위이민(換位移民) 정책에 따라 대규모 강제이주를 실시했다. 1기 이민은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 직후에 이뤄졌다.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청조의 발상지인 만주지방에 대한 ‘봉금정책’을 풀고 주민들을 국경지대로 이주시켰다.그러자 조선의 헐벗은 농민들도 비옥한 미개척지를 향해 강을 건넜다.이들은 이주 초기 청의 관헌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1880년대 청 조정이 간도개척을 위해 조선족 포용정책을 펼치면서 간도지방 곳곳에 조선족 마을이 생겨났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부터 한·일합병 직전까지 20여만명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한·일합병 직전까지 20만명 이주 일제의 한국침략이 노골화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1919년 3·1운동 전후까지는 주로 항일인사들의 정치적 망명이 많았다.국내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홍범도,유인석,이범윤 등이 을사조약을 전후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전후에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민’이 활발했다.이상설,이동녕,안창호,박은식,신채호 등이 이 시기 만주에 정착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지방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 개발계획을 세운다.이에 따라 황무지였던 이곳에 조선 농민의 집단이주를 추진,38년 처음으로 간도와 랴오닝지방에 조선인들이 정착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후에는 전쟁 물자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개척이민단’이란 이름으로 조선인농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세영기자 sylee@
  • 盧 “특검은 검찰사기등 고려해야”4黨총무 간담회 오간말

    노무현 대통령은 10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나라당 홍사덕·민주당 정균환 총무,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자민련 김학원 총무와 간담회를 가졌다.국가균형발전특별법과 지방분권특별법,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등 3대 특별법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등이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요청하기 위한 자리였다.오간 얘기를 간추린다. ●홍 총무 지난 2일 노 대통령이 기자간담회에서,‘내 측근 문제에 대해서는 잘 다듬어서 오면 특검을 받겠다.’고 얘기한 것이 의원들이 (오늘 대통령 측근 특검에)찬성표를 던지는 데 도움됐다. ●노 대통령 내가 득표 운동을 많이 했나 보다.특검은 검찰의 사기와 국가의 위신도 고려해야 하므로 많은 고심이 있다.오늘의 주제 밖이니까 이 정도로 하자.정치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할 일은 한다는 안도감을 국민들에게 주자.국회의 몫도 커진 만큼 중심잡고 통 크게 3대 특별법과 FTA 비준동의안,그와 관련된 농어촌 4개 법안,집단소송제 통과에 협력해줬으면 좋겠다. ●홍 총무 시끄러운 것은 특검으로 넘기고 앞으로는경제살리기로 갔으면 좋겠다.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많은 의원들이 선거용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신중하고 진지하게 접근해줬으면 좋겠다. ●김학원 총무 지역구를 수도권에서 충청권으로 옮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홍 총무와 시각이 다르다.행정수도 이전은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많은 진척이 있으니 빨리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윈윈게임이 되도록 이전이 됐으면 좋겠다. ●홍 총무 (어제)화염병이 난무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리해줬으면 좋겠다. ●노 대통령 민노총과 대화를 하겠다.민노총이 노동자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민주노총이 대화를 안 하는 것에 대해 우려스럽다.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이 돼야 하는데 노동자를 위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정 총무 대통령 공약은 민주당후보로 한 것이므로 선거공약에 대해서는 차질없이 되도록 협력하겠다.한·칠레 FTA와 관련해 정부가 농민을 설득해주기 바란다.부안 핵폐기물 처리장과 관련한 정부의 대응에 잘못이 있다. ●노 대통령 핵폐기물 처리장은 공모를 해서,공모자를 발표한 것이다.대화를 통해 마지막 법적 절차를 풀어가가는 것인데 막혀 있다. ●홍 총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데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필요하면 각당 대표,총무,국회의장을 활용해줬으면 좋겠다. ●노 대통령 선택가능한 대안들을 마련해서 정당 대표들과 상의하겠다. ●김근태 원내대표 노동자 화염병 시위는 엄중히 비판받아야 되지만 정부는 국민들이 상당히 불안해하니까,노조와 대화할 필요 있다.지나친 손배소,가압류는 국민들이 볼 때도 지나치다고 보니까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노 대통령 손배소와 가압류 문제는 대화를 통해 개선돼야 할 문제 아니겠느냐. ●김 총무 지역구도 해소를 위해 중대선거구로 변경이 되면 개헌을 통한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든가,현행 헌법 테두리 내에서 책임총리제를 하는 게 어떤가. ●노 대통령 왜곡된 정치구조가 해소되면 모든 걸 열어놓겠다.정치권과 타협하겠다. 곽태헌기자 tiger@
  • [시론] 韓·칠레 FTA비준 빨리 매듭을

    한국과 칠레는 3년여를 끌어온 협상을 마무리하고 올 2월에 자유무역협정문에 서명하였다.이제 협정문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 남은 절차는 국회의 비준을 거치는 것이다.국가간 협정에 대한 국회비준은 통상 6개월 이내에 이루어진다고 하나,우리나라의 경우 비준이 이러저런 이유로 늦어지고 있다.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비준 지연은 국제경쟁력 약화는 물론 우리나라가 추진하고 있는 FTA 정책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칠레 FTA에 대한 국회비준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농업피해에 대한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농업계와 정부가 이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한·칠레 FTA로 인한 농가피해는 10년간 4500억원(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결과)에서 5800억원(한양대 연구결과)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이러한 근거에 따라 ‘한·칠레 FTA 이행 특별법’을 제정하고 보상대책으로 국비와 지방비 등을 합쳐 7년간 1조원 규모의 투융자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부로서는 한·칠레 FTA로 인한 보상 대책이 농업계가 요구하는 수준에이르지는 못하나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라는 생각이다.그러나 농업계는 시장개방으로 포도,복숭아,과일 가공품 등 관세철폐 대상 품목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 소비의 대체효과 등 간접적인 피해를 고려하면 피해액은 정부의 투융자 규모보다 훨씬 크다는 입장이다. 양쪽이 완전한 타협을 이룰 가능성은 없다.FTA 체결에 대한 이익집단의 반응에 있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은 분산되어 있고 소극적으로 반응한다.그러나 손해를 보는 집단의 반응은 적극적이고 집중력 또한 높다.따라서 대내협상의 결과인 국회비준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손해를 보는 집단의 반응을 누그러뜨려 지나친 정치이슈화를 막고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칠레 FTA 협상타결 내용을 보면 농업부문에 미치는 피해가 당초에 우려했던 것보다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다.농심은 계속되는 시장개방과 자연재해 등으로 멍들고 농촌의 미래는 불안하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경제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간 협상은 물론 FTA를 통한 핵심 국가끼리의 짝짓기 등을 통해 빠르게 재편되어 가고 있으며,우리는 이러한 추세를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한국은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10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하고 있으며,경제의 추진력은 크게 약화되어 가고 있다.이대로 간다면 우리 경제의 앞날이 매우 불투명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비준을 마냥 미루어둘 수만은 없다.이제 우리 경제와 농촌을 다같이 생각하는 대타협이 필요한 시기이다.‘선대책 후비준’ 원칙을 지키고 농업계와 합의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농업에 대한 투자가 한·칠레 FTA로 인한 피해액보다 많다고 한들 무엇이 큰 문제인가? 산업의 근본인 농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은 국토 균형발전을 통해 도시 과밀화 등에 의한 사회적 비용을 축소하는 것은 물론 경관 및 환경보전,전통 문화의 계승 등 농업의 다원적 기능 함양을 통해 경제는 물론 사회적,정치적으로도 순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편 농업계는 한·칠레 FTA로 농촌이 붕괴되고 식량안보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다는 식의 지나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양보와 타협을 위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되는 국제 사회의 냉엄한 현실과 우리 경제가 처한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경제발전과 농업발전은 따로 갈 수 없는 공동체의 운명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농업계와 비농업계 모두 명심할 때이다. 최 세 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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