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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진보 대안교과서 논쟁 속내는…

    교과서포럼(상임공동대표 박효종)이 최근 내놓은 ‘한국 근·현대사’(기파랑 펴냄)가 역사학계를 뜨거운 논쟁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동학농민항쟁을 ‘근왕주의적 농민봉기’로, 명성황후를 ‘민왕후’로, 제주 4·3사건을 ‘좌파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한 교과서포럼의 기술방식은 보수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또 한 차례의 ‘해석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사실 교과서포럼의 주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을 통해 익히 알려진 논리로, 벌써 수차례의 논쟁을 거쳤다. 더 이상의 첨예한 논쟁으로 치닫기엔 학계에서도 이미 귀에 익숙한 주장이다. ●교과서로 적합한지가 논란의 핵심 ‘한국 근·현대사’가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만드는 이유는 대안교과서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우 대결로 몰아가는 언론의 논쟁 테이블 뒤에 가려진 논란의 진짜 핵심은 ‘한국 근·현대사’가 교과서로 적합한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벌써부터 교육현장 일선에선 학생들을 주요 독자로 하는 교과서가 가치대결의 도구로 전락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대안교과서란 용어와 형식을 대중화시킨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전국국어교사모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의 공저자인 김육훈 서울 태릉고 교사는 “각자가 지향하는 가치를 책에 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교과서란 형식을 취할 경우 최소한의 보편성은 담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안교과서 편찬 작업은 기존 교과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 보수쪽에선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이란 이유로, 진보쪽에선 국가주의적 요소가 잔존하고 강자의 논리에 치우쳤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교과서포럼의 ‘한국 근·현대사’는 전자의 입장(전국 고교의 49.5%이 채택하고 있는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를 좌파적이라고 주장)을 취한다.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이 반기업정서를 바로잡겠다며 펴낸 ‘차세대 경제교과서’(현재 4만 7000여부 배포)와 전교조가 대응 차원에서 출간 준비중인 ‘노동교과서’도 각각 전자와 후자의 문제의식을 띠고 있다. 2006년 1월엔 교과서포럼이 ‘경제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두레시대)를 펴내 보수적 시각에서 현행 중·고등학교 경제교과서를 비판했고, 같은 해 12월엔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경제교과서 살리기’(필맥)란 제목으로 교과서포럼의 논리를 재비판했다. 어느덧 교과서가 ‘가치대결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객관성과 보편성 담보돼야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시각이 반영된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가치대결을 위한 도구로 교과서가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 교사는 “논문이나 이론서가 아닌,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수용자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교과서의 틀거리를 취하는 한 특정 가치를 염두에 둔 전경련의 ‘경제교과서’든, 전교조의 ‘노동교과서’든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논리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교과서포럼의 책 역시 기존 교과서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정현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교과서란 이름을 달았다면 최우선적으로 고려됐어야 할 공교육 교육과정 체계에 대한 고민이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포럼측의 역사 이념을 주입하기 위한 정략적이고 비교육적인 책”이라고 비판했다.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만든 휴머니스트의 선완규 인문·문학 편집주간은 “검인정을 통과하지 않는 한 대안교과서는 출판시장에서 독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일 뿐”이라면서도 “향후 시민으로 자라날 학생들이 배우고 익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교과서란 점을 생각하면 대안교과서라 해도 특정 가치의 전파도구로 활용돼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여주 농부는 ‘벼’를 베고 나주 농부는 ‘나락’ 벤다

    여주 농부는 ‘벼’를 베고 나주 농부는 ‘나락’ 벤다

    경기 여주 농민은 ‘벼’를 베고, 전남 나주 농민은 ‘나락’을 벤다. 서울 아이는 ‘소꿉질’을 하고 놀지만, 경남 김해 아이는 ‘반두깨미’를, 전남 담양 아이는 ‘바꿈살이’를 하고 논다. 서로 다른 토박이말을 갖고 있는 낱말은 지역을 달리하며 무수한 형태로 가지를 친다. 한국학중앙연구원(국중연)이 최근 153개 단어의 토박이말 분포를 153개 지도로 만든 ‘한국언어지도’(이익섭 등 지음, 태학사)를 펴냈다. 지역별 토박이말 쓰임새를 낱말마다 특정 기호로 표시해 그 분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언어지도의 출간으로 각각의 낱말이 지역에 따라 고유한 토박이말로 변화해간 과정이 재구성됐다. 독일에선 19세기말, 프랑스에선 20세기 벽두에 일찌감치 언어지도가 제작됐지만, 국내에서 본격적인 언어지도가 만들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언어지도´는 1978년 당시 국중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0개년 장기 사업으로 ‘전국방언조사연구’를 시작한 지 30년 만에 완성됐다. 모두 1782개 단어를 조사했지만 최종적으로 토박이말 분포 양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153개를 선별했다. 언어지도가 첫 번째로 택한 단어는 ‘벼’다. 벼의 토박이말은 ‘베’계(‘벼’ 포함)와 ‘나락’계로 나뉜다. 언어지도에서 ‘베’계와 ‘나락’계는 남북으로 나뉘어 표시됐다.‘베’계는 경기, 강원, 충남북에 분포하고,‘나락’계는 경남북과 전남북에 분포한다. 언어지도는 토박이말의 두 계통을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표기해 한 눈에 구별되도록 했다. 가장 단순한 언어분포를 보이는 ‘벼’에 비해 ‘소꿉질’은 50개가 넘은 토박이말로 복잡하게 갈린다. 연구진은 크게 일곱 계열(‘소꿉질’계-경기 및 충남 서북부,‘통굽질’계-강원 및 충북 중북부,‘반두깨미’계-경상도,‘바꿈살이’계-전북 및 전남 일부 등)로 나누고 계열별로 지역 토박이말을 배치했다. 연구진행을 맡은 황문환 국중연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언어지도는 향후 행정구역 조정, 지역 사회·문화 특성 조사, 표준어 선정 작업 등에 큰 길잡이가 될 것”이라며 “북한 지역 토박이말 조사가 불가능해 반쪽 지도가 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중국산 불법 농약 주의

    국내에서 허가되지 않은 중국산 농약에 대한 농민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중국산 불법 농약의 유입이 크게 늘고 있다면서 특정 농작물에 사용이 허가되지 않은 중국산 농약의 유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잔류기준을 엄격하게 관리할 계획이라고 26일 밝혔다. 식약청에 따르면 채소 출하시기 조절용 성장억제제인 ‘파클로부트라졸’은 국내 허가되지 않은 잔류 농약을 함유하고 있는데도 액체비료에 섞여 무분별하게 판매되고 있다. 또 농약의 겉봉지에 정상적인 표시없이 유통되는 가루약은 절대 사용해서 안 된다. 비료제품에 농약의 효과가 표시된 제품을 사용할 때에는 농약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또 2004년 식용작물 재배에 사용이 금지된 살충제 ‘엔도설판’은 토양 잔류기간이 최대 2년에 달해 절대 사용해선 안 된다고 식약청은 당부했다. 국내 잔류농약기준은 ‘180일 이전에 농약의 절반이 토양에서 분해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이다. 식약청 관계자는 “불법 농약은 잔류농약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인체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佛 사르코지 “올림픽 개막식 거부할 수도”

    |베이징 이지운·파리 이종수특파원|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25일 중국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거부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이처럼 티베트(시짱·西藏) 수도 라싸(拉薩)에서 시작된 독립시위가 10여일이 지나도록 국내외에서 그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사르코지 대통령은 25일 프랑스 남부의 피레네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베이징올림픽 보이콧 논란과 관련,“모든 선택은 열려 있다.”면서 “중국 정부가 티베트 소요사태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라싸에는 대규모 중국군이 증파돼 시위 가담자에 대한 검거선풍 속에 일단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동조시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24일에도 중국 쓰촨(四川)성 등에서 승려와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귀국을 요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위로 승려 1명과 농민 1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다쳤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 인터넷판은 보도했다. 성화가 채화된 그리스 올림피아에서도 행사 도중 티베트의 인권을 외치며 올림픽 보이콧을 주장하는 시위대가 난입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티베트 망명 정부 등은 성화 봉송로를 따라 시위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티베트의 최근 독립시위는 젊은 승려 15명의 거리행진으로 촉발됐으며, 이들은 중국 공안에 체포돼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25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보도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이들의 즉각 석방을 촉구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25일 티베트 시위 사망자는 140명이라며,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40명의 이름과 나이·성별 등의 정보를 공개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지난 14일 시위는 중국 당국이 우유부단하게 대처하는 등 초기 통제에 실패, 사태가 확산된 것으로 분석했다.전문가들은 시위 진압에 머뭇거린 이유로 고위층의 승인 없이 시위대에 맞서는 데 대한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jj@seoul.co.kr
  • 信不者, 연금으로 빚 갚는다

    오는 8월부터 ‘신용불량자’가 본인이 낸 국민연금을 담보로 돈을 빌려 금융권 빚을 갚아 신용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시행된다.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정부 지원도 대폭 확대된다. 그러나 정부 안팎에서는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내달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는 25일 소외 계층의 새 출발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뉴스타트 2008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우선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가 국민연금으로 채무를 상환하는 방안을 시행하기로 했다. 미래에 받을 연금 지급액을 미리 받아 빚을 갚는 방식이다. 그러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만 한시적으로 도입된다. 수혜대상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6개월 이상 채무불이행 상태가 지속된 채무자들이다. 단, 국민연금에 가입해 있고 그동안 낸 국민연금액이 금융권과 협상으로 결정된 채무조정액의 두 배를 넘겨야 한다.29만명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상자들은 납부한 국민연금액의 최대 50%까지를 빌릴 수 있으며, 정기예금 금리에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나눠 갚아나가면 된다. 청와대는 “5월부터 대상자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8월부터 자금 집행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제도를 통해 최대 3885억원가량의 대부금액이 상환되며, 국민연금 수익률의 기회손실분은 5년간 최대 420억원으로 추정됐다. 정부 재정에서 지원하게 될 금액은 연간 40억원가량으로 추산됐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경제 살린 세계의 지도자] (9) 찰스 호히 아일랜드 前 총리

    [경제 살린 세계의 지도자] (9) 찰스 호히 아일랜드 前 총리

    |더블린(아일랜드) 김태균특파원| 아일랜드는 ‘경제 기적(奇蹟)’이란 게 무엇인지 현실에서 보여준 살아있는 표본이다.‘서유럽의 병자(Sick Man)에서 켈틱 타이거(Celtic Tiger·켈트의 호랑이)로’,‘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지식강국으로’ 등 다양한 변화의 수사(修辭)가 아일랜드에 따라붙는 이유다. 기적의 중심에 1987년부터 92년까지 총리(티샤흐)를 지냈던 찰스 호히(Charles Haughey)가 있다. 호히는 87년 3월 전체 의석의 과반이 안되는 ‘여소야대(與小野大)’로 3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다.‘피나 폴(공화당)’의 당수로 이미 79∼82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냈던 그는 당시 경제파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업률 17%의 ‘만신창이 경제´ 경제는 만신창이였다. 직전 해인 86년 실업률은 17%나 됐고 극심한 노사갈등으로 80년대 연 평균 국가 총 파업일수는 36만여일(개별공장 파업의 총합)이나 됐다.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30%를 넘어서 정부는 예산의 35%를 이자 갚는 데 쏟아부었다.73년 가입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들은 아일랜드를 EEC의 지진아로 여기고 있었다. 호히는 재정 건전화와 사회안정,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 외국자본 유치 등을 경제회생의 실천목표로 잡았다. “국가재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공공서비스가 약화돼도 어쩔 수 없다.” 무자비할 정도의 정부예산 삭감이 시작됐다. 교육·농업·사회복지가 초긴축 재정의 1차 타깃이었다. 공무원 수와 그들의 임금을 동결했다. 정부지출을 억제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이를 통해 저금리를 유도함으로써 기업환경과 해외자본 유입을 활성화하자는 생각이었다. 그해 10월에는 노조, 기업, 농업 등 각계 대표들을 한 자리에 불렀다. 정부가 세금을 내릴 테니 기업은 고용을 보장하고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해 경제회생에 동참하라고 설득했다. 산고 끝에 첫 번째 사회연대협약인 ‘국가재건프로그램(PNR)’에 합의가 이뤄졌다.3년간 임금인상률 2.5% 이내 제한, 법인세·소득세 감면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외자 유치로 내부 성장동력 확충 호히는 동시에 더블린의 부두가(도크랜드)에 ‘국제금융서비스센터(IFSC)’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해외 금융자본 유치를 통해 내부 성장동력을 확충하겠다는 뜻이었다. 과거 제조업체에 한해서만 10%의 낮은 법인세율을 적용하던 해외자본 유치 인센티브를 IFSC에 입주하는 외국 금융기관에도 적용했다. 막대한 자금이 유입됐다. 현재 IFSC에는 시티그룹, 코메르츠방크,ABN암로,JP모건, 메릴린치 등 전 세계 450개 금융기관이 들어와 1만명이 일하고 있다. 새로운 경쟁촉진법 제정, 외국자본에 대한 원스톱 서비스 제공, 외환규제 철폐 등을 통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도 만들어갔다. ●작년 GDP 5만8883달러… 영국 압도 이런 노력 덕에 지난 20년간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왔다.GDP 증가율은 86년 0.4%에서 88년 3.0%,90년 7.7%로 급격하게 안정을 찾았다.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외자유치 효과가 본격화하고 지식산업의 성장이 가속화하면서 95년 9.6%,97년 11.5%,99년 10.7%로 성장률이 더욱 뛰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 발표기준 아일랜드의 1인당 명목 GDP는 5만 8883달러로 800년간 식민통치를 했던 영국(4만 5301달러)을 압도했다. 유럽에서 아일랜드보다 높은 나라는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아이슬란드뿐이다. 과거 호히와 함께 근무했던 조지 쇼 총리실 경제정책국장은 “호히의 업적은 외자유치, 규제완화 등 미래를 내다본 정책에도 있지만 더욱 큰 것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람들을 경제회생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도록 인도하고 조정해 간 특유의 추진력과 카리스마”라고 말했다. windsea@seoul.co.kr ■ 국민 모두가 함께 일군 경제회생 |더블린 김태균특파원|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면 우리(야당)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지 않겠다. 또 올바른 정책이라면 우리가 다시 집권해도 이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해 3월에 집권한 찰스 호히의 ‘피나 폴(공화당)’이 경제개혁 방안을 하나 둘 내놓고 있던 1987년 9월2일,‘피나 게일(민주연합당)’의 당수 알란 듀크스는 더블린 남부 탈라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이른바 ‘탈라 선언’.1922년 ‘아일랜드 내전’(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북아일랜드 처리 문제를 놓고 아일랜드인끼리 벌인 전쟁)에서 맞붙은 이후 계속된 양측간 극심한 대립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는 호히의 선제적 유화책도 중요한 이유가 됐다. 호히는 자기가 총리가 되기 직전 집권당이었던 피나 게일의 정책들을 대부분 이어받았다. 야당시절 반대했던 정책들조차 일부 실행에 옮겼다. 해묵은 정쟁은 경제파탄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판단이었다. 호히가 경제 최우선 정책의 돛을 올렸어도 야당과 기업·노조·농민 등의 호응이라는 순풍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기적은 없었을지 모른다. 특히 야당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여당이 공공지출 삭감과 임금인상 억제 등 인기없는 정책을 펼 때 이를 정권탈환에 이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당을 도왔다. 이때 수립된 전통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됨으로써 아일랜드 경제에 대한 안팎의 신뢰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3년에 한번씩 사회연대협약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노·사·정이 보여준 양보와 합의의 미덕도 귀한 밑거름이 됐다. 임금인상·근로조건 등을 둘러싼 노·사 이견으로 사회연대 시스템 자체가 깨질 뻔한 상황이 여러번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노·사가 한발씩 양보하며 정부의 중재를 수용해 원만한 타결을 지었다. 존 던 아일랜드 상공회의소장은 “사회연대협약은 여당과 야당, 기업과 노조 등 개별주체들이 함께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windsea@seoul.co.kr ■ 찰스 호히는 누구? |더블린 김태균특파원|찰스 호히는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자국에서는 ‘지난 반세기 가장 강력한 아일랜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호히를 논할 때면 항상 ‘카리스마(charisma)’와 ‘논쟁적(controversial)’이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정계의 거목으로 선진국 진입의 길목을 열었다는 평가 못지 않게 검은 돈과 여성편력 등 부정적 이미지도 강하기 때문이다. 호히는 1925년 아일랜드 북부의 낙후된 지역 캐슬바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회계학과 법학을 공부한 그는 51년 유력 정치인 숀 레마스(59∼66년 총리 역임)의 사위가 되면서 정치와 연을 맺었다.57년 33세 나이로 더블린에서 의원이 된 뒤 92년 정계를 떠날 때까지 총리만 3차례(79∼81년,82년,87∼92년) 지냈고 법무장관(61∼64년), 농업장관(64∼66년), 재무장관(66∼70), 보건·사회복지장관(77∼79년)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능력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세번째 총리 재임 때였지만 이 기간은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날들이었다. 그동안 누적됐던 각종 스캔들이 한꺼번에 분출됐기 때문이다. 호히는 재계 인사들과 오랫동안 청탁과 뇌물의 고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출처가 모호한 돈으로 대저택에 살면서 밤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사교생활을 했다. 여러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도 잇따라 폭로됐다. 풍자만화가들은 호히를 딸기코의 알코올 중독자나 호색한으로 자주 묘사했다. 91년에는 10년 전 언론인 도청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고 정부각료들이 일제히 등을 돌리면서 호히는 92년 2월 불명예스럽게 정계를 떠났다. “나는 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지만, 그들은 모르네. 더 이상은 그만…” 호히는 마지막 의회 연설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 나오는 주인공 오셀로의 마지막 대사를 인용했다. 호히는 2006년 6월13일 80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일랜드 정부는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러주었다. windsea@seoul.co.kr
  • [사설] ‘뉴라이트 교과서’ 출간을 보는 눈

    뉴라이트 계열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교과서 포럼’이 그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 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등학교에서 정식 채택한 교과서가 아니다. 지금의 역사 교과서가 올바르지 않다며 그를 대체할 목적으로 우리 사회에 하나의 대안을 던진 것이다. 집필을 주도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의 60년사를 역사적 모순이 증폭된 과정으로 서술하는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대안이라는 것은 역사 상식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기존 역사학계에서 식민지화를 부추긴 것으로 평가하는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역들을 근대화의 선각자라고 뒤집는가 하면 동학농민혁명도 농민봉기로 격하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는 “폭력적 억압체제”라고 전제하면서도 근대문명의 학습기라고 과감히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다 보니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포럼 측의 실증주의에 입각한 역사의 재해석 시도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값지다. 그러나 시안 단계에서 4·19를 ‘학생운동’이라고 했던 시각에서 엿볼 수 있듯 그들이 비판하는 좌편향의 극단에 자리하는 우편향 소지도 있다. 나아가 “식민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됐다.”는 일본 극우 논리나 “박정희 정권 때문에 이만큼 살게 됐다.”는 식의 변질된 주장으로 연결될 우려도 있다. 학계는 대안 교과서를 무시하지 말고 포럼 측의 주장을 따지는 학문적 검증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봄 기운이 완연한 요즘,30대 직장인들의 술자리에는 ‘벚꽃 구경’과 함께 ‘백골단’이 단골 메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경찰이 불법 시위 엄단 조치의 하나로 발표한 ‘체포 전담반’이 90년대 중반까지 시위 현장에서 흰색 헬멧을 쓰고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던 ‘백골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곤 했던 대학가 시위와 ‘백골단’을 둘러싼 30대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90학번인 조모(37)씨는 봄만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린다. 실제 상처가 남아 있다기보단 그저 화인처럼 남아 있는 곤봉 폭행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이던 90년은 수업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매일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 진압에 픽픽 쓰러지고, 농민들은 시장 개방에 비쩍 말라갔다. 책을 든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시절 조씨에게 ‘백골단(白骨團)’은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991년 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학과 동료를 위해 법원 마당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 앞에 전·의경들이 서 있었고, 경찰 기동대장은 해산을 요구했다.“평화시위를 해산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한 지 10여분 뒤. 청재킷과 흰 운동화, 몽둥이를 든 백골단이 전·의경 머리 위로 날아오르듯 확 튀어나오더니 시위대를 마구 팼다.“몸집이 참 큰 사람들이었죠. 그저 공포였습니다. 철거예정지에 가면 가끔 조폭들과 연계해 나타나기도 했죠. 대학생들이 왜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냐고 말들 많지만, 배우는 학생들이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게 21세기가 원하는 협동심과 리더십을 공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죠.” 직장인 이모(36)씨도 봄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벚꽃놀이 갈 생각에 설레는 게 아니라 대학 새내기 시절인 91년 봄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학교 앞 집회에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매일 집회가 계속 됐죠.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굉음과 강의실까지 스며드는 최루가스가 절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집회가 시작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강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강씨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대생 김귀정씨도 을지로 골목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숨졌다. 이후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고, 매일 대규모 집회가 서울시청 주변에서 열렸다.“서울시청 광장을 놓고 백골단·전경과 매일 싸웠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장소도 많은데 왜 꼭 서울시청 광장만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씨는 9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바지·청재킷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명동, 시청, 종로, 을지로 거리에서 숨바꼭질을 계속했다.“백골단은 전·의경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력’을 보유했죠. 한마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경찰이 바로 백골단이었습니다. 두꺼운 진압복을 입은 전·의경은 그저 특정 장소를 지키는 일에 주력했지만, 백골단은 검거가 목적이었죠. 백골단에 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뛰었던지….” 최근 경찰이 체포 전담반을 꾸린다고 하자 이씨는 가슴이 벌렁거린다.“지금이 대체 어떤 때입니까. 진짜 과거의 백골단을 다시 만든다는 얘기는 아니겠죠?” ●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대상´ 통일운동가 황선(34·여)씨도 씁쓸한 추억담을 털어놨다.92학번인 황씨는 같이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백골단에 의해 숨지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참 많이 닦아냈다고 돌아본다.“87년 민주화 이후에 집회시위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백골단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죠. 당연히 집회 참가자들은 더욱 분개했고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운동가 안진걸(37)씨도 백골단에 대한 ‘추억’ 아닌 ‘추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안씨는 백골단이 단순히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존재’였다고 말한다.“무작정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백골단이 누가 시위대고 누가 시민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죠. 이유도 모른 채 다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96학번인 대학생 황모(31)씨는 백골단의 끝물을 맛봤다.97년 노동절 집회 때 한양대 근처에서 당한 토끼몰이식 폭행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집회는 80년대와는 달리 선배의 강압 없이, 자기 생각대로 나가든 말든 결정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경찰은 96년 있었던 한총련 집회 뒤 또다시 강경 진압을 남발했다. 집회에 갔다가 여자 후배 한 명과 함께 백골단에 쫓겼고 여자 후배를 멀리 피신시킨 뒤 자신만 집중 폭행을 당했다.“백골단은 시위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생겼던 조직입니다. 해외에도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리는 경찰들이 있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방어선을 유지하다 시위대가 흥분해 주변 시민을 위협하면 그제서야 곤봉을 듭니다. 무조건적인 체포와 폭력진압을 위주로 하는 백골단과는 성격이 다르죠.” 중학교 교사가 된 96학번 이모(31·여)씨는 같은 대학, 같은 학번 노수석씨를 기억한다.96년 초 새내기였던 이씨는 선배들의 권유로 등록금 투쟁에 나섰다. 이씨는 “당시에도 등록금은 치솟고 있었고, 신입생 때는 무엇이든 참여하고픈 생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남대문에 다다르자 ‘등록금 투쟁’ 구호는 ‘정권 타도’로 바뀌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최루탄이 터졌다. 이씨는 남자 동기의 손을 잡고 서울역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백골단이다. 남대문엔 골목이 많다. 큰길로 뛰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었다.“대부분 서울역으로 뛰었죠.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노수석씨를 비롯한 몇몇이 골목으로 뛰었다는 거예요. 골목은 목격자도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데….”결국 노씨는 백골단에 폭행당해 숨진 채 발견됐다.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유모(32)씨는 백골단하면 촌스러운 청재킷이 떠오른다.96년 여름, 신분증 검사도 떠오른단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측은했다고 말했다.“연세대에서 8월 사태가 있었죠. 그리고 교문을 들어갈 때면 신분증 검사를 해야 했어요.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서 시킨다고 폭력까지 휘둘렀던 백골단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백골단으로 불리는게 너무 싫었어요” 90년대 초반 광주에서 ‘백골단’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던 전남지방청 소속 한모(44) 경사에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누가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당시엔 초임 경찰관 가운데 덩치가 좋고 날렵한 사람들이 대거 검거전담반으로 차출됐죠. 백골단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진압복도 입지 않은 채 대학생들이 휘두르는 쇠파이를 막느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더이상 그런 아픔은 없어야 겠죠.” 회사원 이모(32)씨는 98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그가 기억하는 백골단은 시위를 진압하는 ‘최후의 수단’이다.“의경 입장에서는 하얀 헬멧과 청재킷만 봐도 힘이 났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대학생들 앞에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백골단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씨에게 대학 시절 백골단은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전·의경 복무 시절 시위 현장에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갑자기 시위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싫어졌어요. 어떤 생각도 뛰어넘은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었죠.” 사건팀 nomad@seoul.co.kr ■ 백골단을 아시나요? “백골단이요? 알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백골부대를 모르는 사람 있나요.” 백골단이 한창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벌써 어엿한 대학생과 직장인이 됐다. 그들에게 백골단은 그저 생소한 이름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회사원 김모(25·여)씨는 백골단을 백골부대의 다른 이름으로 알았다.“백골단, 유명한 부대잖아요. 여자인 저도 아는 걸요. 해골 부대 마크 있고…. 철원에 있잖아요. 백마부대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대 중 하나 아닌가요.” 백골단은 80∼90년대 활동했던 사복 시위 진압대라고 알려주자 김씨는 몹시 당황했다.“그런 진압대가 있었나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리 그 당시 유치원생이었지만 우리 근대사의 일부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부끄럽네요. 인터넷에서 좀 찾아봐야겠어요.” 새내기 대학생 정모(19)씨도 백골단을 부대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글쎄요. 왠지 군대쪽에 관련된 거 같긴 한데…. 학교 다닐 때 백골단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아직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돼 잘 모르겠네요.” 정씨는 기자로부터 백골단의 의미를 알게 되자 되레 의아해했다.“정말 그런게 있었나요. 진짜 조선시대 이야기 같습니다. 당당하게 경찰복을 입고 진압하지 왜 치사하게 사복을 입고 진압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직장인 최모(26)씨도 백골단은 금시초문이었다. 최씨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모습을 담았던 영화 ‘화려한휴가’를 본 뒤 관련 책 등을 읽어봤지만 백골단은 난생 처음 듣는 단어였다. “사복경찰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그들이 백골단이란 이름으로 움직인 조직원들인지는 몰랐습니다. 고작 20여년밖에 안 된 일인데 정부가 교묘히 국민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나네요.”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지방시대] ‘그린 투어리즘’을 농촌 발전 카드로/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지방시대] ‘그린 투어리즘’을 농촌 발전 카드로/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개발도상국의 농촌 빈곤 퇴치사업을 위해 세계의 많은 곳을 답사해 보았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농촌은 도시지역에 비해 경제적·사회적으로 그 지위가 떨어지고 있어 주민들의 사기는 영 말이 아니다. 이 분위기는 농민들이 집을 떠나게 만들어 농촌지역의 공동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는 농촌지역의 발전을 막는 주요 요인이다. 이같은 어려운 농촌 사정을 풀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린 투어리즘을 통한 농촌지역의 활성화다. 세계의 어느 농촌을 가더라도 그린 투어리즘에 관한 관심과 실천은 놀랄 정도로 보편화돼 있다. 이는 농촌지역이 더 이상 먹을거리만을 제공하는 곳으로 머무르지 않겠다는 현실적인 요청이다. 중국 내륙의 농촌지역, 필리핀 루손 북부 산악의 가파른 계단식 논, 베트남 메콩 델타의 미로 같은 수로, 험한 남미 안데스 산록의 문명자원과 광활한 평원내의 다양한 농원, 히말라야의 대자연을 활용한 산간마을, 아프리카 전통의 민속과 자연공원, 유럽과 북미 농촌의 생태 관광지 등 사람이 찾을 것 같지 않은 오지는 물론 음식 맛과 이벤트로 승부를 보려는 일본 농어촌 등 곳곳에서 배낭을 메고 온 여행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을 맞는 현지 농촌인의 친 자연적이고 따뜻한 인간적인 접대는 그린 투어리즘의 의미를 높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 이래 오늘날처럼 수천만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이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유롭게 여행을 만끽하며 지내던 시대가 있었던가. 과거에는 자연적인 장애물, 인위적인 제도, 교통 장애, 전쟁, 각종 자연 재해나 질병 등으로 국경을 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은 극히 일부의 분쟁지역을 제외하고 정확한 정보와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자기 기호에 맞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인류사에 없었던 대중에 의한 대 여행기 시대를 맞아 농촌지역 살리기를 위한 그린 투어리즘은 최대의 호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 지방정부와 농민들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떠도는 여행객을 많이 오게 만들 수 있는가에 골몰하고 있다.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일이야말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굴뚝 없는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도시화와 주 5일 근무제의 정착으로 도시자본에 의한 대규모의 리조트뿐 아니라 지자체와 농촌 주민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농촌주민의, 농촌주민에 의한, 농촌주민을 위한’ 그린 투어리즘을 성공시킨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강원 화천의 산천어 축제, 양양의 송이축제, 인제의 빙어축제, 홍천의 옥수수축제, 춘천의 막국수·닭갈비축제 등은 농촌 자원을 소재로 하는 관광화로 지역 주민의 소득에 기여함은 물론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여주는 데에도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행사가 지닌 계절성, 행사 내용의 단순성, 대상의 비국제성, 농촌민박의 불편 등을 풀기 위한 개선이 절실하다. 방문객에게 감동을 주는 정부, 지자체, 농민의 협조도 필수적이다. 중국 양쯔강의 소삼협에서 배가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춤과 함께 피리 불며 노래를 불러주는 일, 페루의 마추픽추 가는 길의 기차 안에서 승무원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며 모델로 돌변해 패션쇼를 하며 지역 특산물을 파는 일, 티베트 라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민속춤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일들처럼 감동을 불러오는 수많은 퍼포먼스 등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즐거움을 안겨준다. 앉아서 기다리는 손님맞이가 아니라 적극적인 마중맞이는 감동을 배가시킨다. 이렇게 자연과 문화와 인간의 조화로운 손님맞이를 준비할 때 그린 투어리즘은 농촌지역을 살리는 좋은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농촌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바로 지방이 사는 길이다. 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 곳곳에 우편향 역사인식… 논란 불가피

    곳곳에 우편향 역사인식… 논란 불가피

    현행 고등학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와 ‘해방 전후사의 인식’으로 대표되는 기존 역사서를 ‘좌파적 역사인식’이라고 비판하는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대안교과서’를 내놓아 논란이 일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주축으로 하는 ‘교과서포럼’은 23일 기존 역사 서술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이 곳곳에 보이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기파랑 펴냄)를 펴냈다. 이 책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에 대하여 일본에 의존한 경거망동으로 식민지화 위기만 불러일으켰다는 기존의 역사 서술과는 달리 청나라에 대한 조공과 문벌폐지 등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를 추구했던 선각자로 적극평가를 요구했다. 반면 ‘동학란’ 당시 농민군이 요구했다는 탐관오리 처벌 등의 폐정개혁안은 1940년 출간된 ‘역사소설 동학사’에 수록된 내용일 뿐으로, 실제 봉기는 유교적인 근왕주의(勤王主義)에 입각하여 서민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성격이 강했다고 언급했다. ●“동학은 혁명아니라 복고운동에 불과” 또 일제 지배체제인 1910∼1945년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로 ‘정치적 차별과 억압을 동반한 야만의 정치체제’였지만, 일제의 지배는 총칼로 한국인의 재산을 빼앗는 전근대적 폭력적 수탈이 아니라 근대적 재산제도와 시장경제의 원리에 준하는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앞서 ‘대안교과서’ 편찬은 시작단계에서부터 반발에 부딪혔다.‘교과서포럼’이 2006년 11월30일 학술심포지엄을 열었으나, 군사정권과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4·19 관련단체 회원들이 몰려들면서 폭력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당시 문제가 됐던 4·19는 민주혁명,5·16은 쿠데타로 정리했다.10월유신은 정변으로 박정희의 비타협적 귄위주의의 정점이었으며, 정통성에 치명적 오점을 남겼다고 비판했다.12·12는 하극상,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서술했다.6·25는 남침전쟁으로 규정하고, 북한은 세습왕조나 다름없는 체제이고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정치집단이라고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제주 4·3사건은 좌익무장 반란” 역사용어의 선택도 파격적이어서 ‘명성황후’는 ‘민왕후’로 격하시켰고,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은 ‘좌파세력의 무장반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이 책은 일본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후쇼사 교과서의 한국판”이라면서 “이들의 주장은 한국 근현대사를 오로지 경제시장주의와 반공주의로만 설명하려는 것으로 과거 조선총독부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이 책의 필진으로는 이영훈 교수를 비롯하여 김재호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세중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등 12명이 참여했다. 서동철 이문영기자 dcsuh@seoul.co.kr
  • 성화 들고 달린다

    1966년 런던월드컵 조별리그 이탈리아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려 북한을 8강에 올려놓았던 축구영웅 박두익(72)이 다음달 28일 평양에서 베이징올림픽 성화를 들고 달린다. 고철호 북한올림픽위원회 서기국 집행서기는 20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평양 성화 봉송에 참여하는 북한쪽 주자 56명 가운데 최고령 참가자가 박두익이라고 밝혔다. 그는 1936년 12월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 서기는 그의 나이를 70세로 소개했다. 고 서기는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500여명의 지원자로부터 신청을 받아 국가번영 및 건설에 공헌을 한 공무원, 노동자, 농민, 체육분야 종사자로 국내외 주요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와 지도자 등을 주자로 선발했다.”고 설명했다. 고 서기는 다른 주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 교도통신은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 여자마라톤에서 우승한 정성옥(34),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남자유도 동메달리스트 전철호(40) 등이 봉송에 참여한다고 전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해코지성 고발에 행정 ‘발목’

    해코지성 고발에 행정 ‘발목’

    “또 오셨어요. 지겹습니다.” 참고인과 피고발인으로 검찰과 경찰에서 마주친 신정훈(45) 전남 나주시장에게 수사관들이 먼저 건네는 말이다. 재선인 신 시장은 3년째 검찰청을 ‘제집 문턱을 넘나들 듯’ 출입하고 있다. 그는 부부농민 운동가서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는 고소·고발건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다른 지자체보다 훨씬 많은 26건이다. 사정 당국에 불려가 조사받은 날짜만 무려 70여일이다. 심문에 답변을 하려고 자료 분석을 하는 데도 적잖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고소·고발인은 시정을 잘 아는 전직 시장과 면장 주민 등이라고 했다. 신 시장은 2005년 공산면 신곡리 화훼원예단지(24억원) 불법 조성과 특혜 의혹으로 처음 고발을 당했다. 무혐의 처분을 받자 이 고발인은 2007년 11월 다시 이 화훼단지 보조금 관리 위반으로 시장을 고발했다. 지금도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불려가는 횟수는 해가 갈수록 늘었다.2006년 9번,2007년 13번이었다. 올 들어서도 고발이 4건이다. 조사는 하루에서 사흘씩 이어진다. 수사관들은 그에게 행정행위 절차 문제나 직원관리 문제 등을 묻는다고 한다. 신 시장은 “지난해 돌아가신 장모님 통장으로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투서에 검찰이 처갓집과 사돈네 팔촌의 통장계좌를 모두 뒤졌다.”고 씁쓸해 했다. 이 건은 무혐의로 끝났다. 신 시장을 상대로 한 고소·고발된 26건 중 무혐의(불기소처분)는 18건, 벌금형 1건, 재판중 1건, 수사중 6건이다. 액수가 큰 보조금 지급으로 고발당한 게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드라마 세트장, 화훼단지, 농기계 구입비, 소각열 설치 사업, 경로당 신축, 폭설 피해 복구비 등 다양하다. 신 시장은 한번 벌금형(1500만원)을 받았다. 공산면 백사리에 드라마 ‘주몽’ 세트장을 짓는 사업이다. 이 때문에 4번이나 고발됐다. 시청 관련 직원 18명이 검찰 조사를 받자 그가 책임을 졌다.“시간이 촉박해 세트장의 산림 훼손과 형질 변경 등을 내가 직접 지시했다.”고 인정했다. 세트장은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구름 관광객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나주시 직원들은 “경찰과 검찰에서 시도때도 없이 조사받으러 나오라고 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신 시장도 “지역 발전에 힘써야 할 시간에 검찰과 법원의 서류를 검토해야 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나주시에는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금천·산포면)를 포함, 영산강 고고학박물관, 농공단지, 일반 산업단지 조성, 매일유업 나주공장 등을 유치함에 따라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법·질서 갖춘 선진 노사관계 구상

    법·질서 갖춘 선진 노사관계 구상

    19일 법무부 업무보고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법치(法治)’가 윤곽을 드러냈다. 불법 불용(不容)과 경제를 살리는 법치, 그리고 검찰권 독립 보장 등 세가지 핵심내용이 삼각축을 이룬다. 이 대통령의 이날 언급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검찰권 독립을 강조한 점이다. 이 대통령은 “한가지 약속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그리곤 “과거 정치가 검찰권을 이용했던 때가 없지 않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 정권에서는 정치가 검찰권을 악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가 검찰권 악용 절대 없을 것” 청와대는 “일반론을 얘기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검찰의 BBK수사와 연관짓는 해석이 많다. 당시 검찰은 이 대통령의 주가조작 연루의혹 등은 모두 무혐의 처리했으나 도곡동땅에 대해서만은 제3자 소유로 추정된다며 여지를 남겼고, 이는 특검수사로 이어지는 빌미가 됐다. 이 대통령의 언급은 당시 검찰 수사에 대한 유감 표명이자, 경고이며, 재발 가능성에 쐐기를 박으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피해를 보는 것은 미래”라는 존 F 케네디의 연설을 인용, 검찰의 변화를 당부했다. 이 대통령의 언급은 5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검찰과의 대화’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당시 노 대통령은 검찰 개혁을 강조하며 검찰 자체의 변화를 선결과제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엄정한 공권력 집행을 통한 사회의 변화에 방점을 뒀다. 이날 업무보고에서 불법행위에 대한 엄단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조된 것도 이런 이 대통령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불법시위·노사분쟁 단호 대응” 이 대통령은 “불법폭력 시위를 그대로 두고는 선진일류국가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이념적 불법파업은 국민들의 공감대를 얻기 힘들 것이다.”고 말했다. 법치 확립의 궁극적 목표를 경제 살리기와 선진문화 구축에 두고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이 대통령은 줄곧 경제 살리기의 제1조건으로 노사화합을 꼽아 왔다. 각종 정책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불법시위나 노사분쟁에 대해서는 단호한 법적 대응으로 맞섬으로써 노사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법무부도 이날 ‘무관용 원칙’과 ‘공무집행 면책보장’을 강조, 이 대통령의 뜻에 적극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제회생엔 투자보다 법질서가 더 중요” 이에 따라 올봄 춘투(春鬪)는 이명박 정부 5년 노사문화의 향배를 가늠할 척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의 경제살리기 행보에 보폭을 맞추고 있는 한국노총과 달리 민주노총은 대립각을 접지 않고 있다. 정부와 민주노총의 맞대응 양태에 따라 시위문화와 공권력의 위상 등이 가려질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 제도 개선도 당부했다.“법질서를 제대로 지키면 GDP(국내총생산)의 1%가 올라갈 수 있다.1% 올리려면 투자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와 비교해 보면 법질서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경제살리기의 시작이 법질서 준수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기초생활물가가 너무 비싸다. 농민들은 생산비도 안되는 가격에 팔고 소비자들은 비싼 가격에 사는 구조다.”라면서 유통과정 개선을 위한 법령 정비 방안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농림부 시절 발상안돼… 農心을 가져라”

    이명박 대통령은 18일 “우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할 수 없는 세계적 조류 앞에 서있다.”면서 “농업도 경쟁력을 갖춰 해외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전북 전주시 생물산업진흥원에서 열린 농수산식품부 업무보고에 참석해 “과거 100조원 가까운 예산을 농촌에 투입했지만 농가의 빚은 늘고 젊은이는 떠나는 희망없는 땅으로 남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FTA는)반대만 하지 않고 논의해야 하는 시기”라면서 “농촌이 살고 젊은이도 모이는 농촌을 만드는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거론하면서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이 스스로 살아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부는 뒷받침하는 식으로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업무보고에서 공무원들에게 ‘농심(農心)’을 가지라는 주문도 했다. 이 대통령은 “농사짓는 사람 심정으로 가야 한다.”면서 그러나 “농림부 시절 발상으로는 안 된다.1차 사업에 국한되지 말고 스스로 2,3차 산업 마인드로 먼저 바뀌어야 농어민도 산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의 책상머리 대책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시절 가락시장을 찾았던 경험을 화제로 꺼냈다. 이 대통령은 “900원짜리 배추 한 포기가 중간유통상을 거쳐 3000원,5000원이 된다.”면서 “생산 농민은 원가도 안 되게 팔고 수요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배추를 사먹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늘 말만 유통구조 개선이다 하는데 실천에 옮겨지지 않아 농촌이 개선이 안 된다.”면서 “생각과 말로만 되는 게 아니고 그걸 실천에 옮겨 농촌의 큰 변화를 가져오도록 공직자들이 분발해주기 바란다.”고 질타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경남, 연 소득 1억 농민 2만명 육성

    경남도가 앞으로 5년 안에 연간 1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전문농업 최고경영자(CEO)’ 2만명을 육성한다.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등 수입 개방에 따른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농업을 보호형에서 공격형으로 정책을 전환하기 위해 6개 분야 21개 전략사업에 3972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경남도는 18일 이같은 내용이 주요 골자인 농업분야 장기 종합대책을 마련, 추진한다고 밝혔다. 도는 우선 1차 산업인 농업을 2·3차 산업으로 육성하기로 하고, 이를 이끌어갈 전문농업 CEO 2만명을 2012년까지 양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산·학·연·관 합동으로 신기술 개발과 인력육성 정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대학에 우수 농민의 기술향상과 전문 CEO 양성을 위한 농업전문 위탁교육을 하고, 농협과 대학, 연구기관 등과 협의체를 구성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했다. 또 경남 명품 브랜드 육성을 위해 축산브랜드는 경남 ‘한우지예’를 중심으로 적극 지원하고, 농산물은 과실, 채소, 화훼 등 원예작물을 대상으로 포장 디자인 개발과 마케팅홍보 등을 적극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 친환경농업 분야는 3개의 광역 친환경 농업 단지 1020㏊를 조성하고,24곳에 유기농 밸리도 조성한다. 아울러 14곳에 4800대의 농기계를 지원해 농업기계화 사업에도 나선다는 구상이다. 이 밖에 과수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생산시설 현대화사업을 지원하고, 지역특화품목 가운데 경쟁력이 뛰어난 딸기는 시설하우스 현대화사업(15㏊), 우량묘 전용 온실사업(100㏊)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티베트 고난의 57년사

    중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유엔과 영국 등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 중국과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중국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 민간 주재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하고 시캉성 창두 지구를 편입받았다. 그후 중국인들이 대거 티베트로 몰려들어옴에 따른 자원 부담과 양쯔강 상류의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에 대한 박해 때문에 1959년 3월10일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했다.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시위는 1만 5000여명의 희생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시위를 주도한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인도 다람살라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존재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중국은 티베트에서는 독재를 실시했다. 사유재산을 빼앗고 사회구조도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한 집단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중국의 꼭두각시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을 폐쇄했다. 그 뒤부터 중국은 티베트인의 여행자유 제한, 농업생산의 독려, 강제 노동 등 탄압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하지만 중국의 탄압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티베트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도 이에 비례해 커졌다.1961년과 1962년의 가뭄을 계기로 게릴라전이 계속됨에 따라 중국은 유화정책을 일부 도입했다.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했다. 중국의 정치적인 탄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군과 경찰을 동원해 무력으로 독립 요구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1984년과 1987년 독립시위에 이어 1989년 3월5일에도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를 벌였다. 비록 중국군의 계엄령 선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난 10일부터 티베트에서 승려가 주도된 독립시위가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의한 고난과 핍박의 57년 역사에 과연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세계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워크숍 강의 박대연 사장은 누구

    워크숍 강의 박대연 사장은 누구

    16일 새 정부 장·차관 워크숍 강단에 ‘한국의 빌 게이츠’ 티맥스소프트 박대연(52) 사장이 섰다. 일에 미친(?) 사람을 꼽으면 이명박 대통령 앞 줄에 설 법한 인물이다. 역경 속에 일궈낸 성공신화 또한 이 대통령 못지않다. 전남 담양 가난한 농민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곤 13살에 광주의 작은 운수회사에 사환으로 들어가 동생들 학비를 댔다. 주경야독 끝에 야간상고를 수석 졸업했고,18세에 원하던 은행에 입사했다. 독학으로 배운 컴퓨터 능력 덕에 런던지사로 나갔고, 무한한 도전의 기회가 펼쳐진 넓은 세상을 봤다. 그의 나이 서른 둘, 은행을 박차고 나가 늦깎이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오리건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했고, 오리건대 역사상 최초로 전과목 A를 받았다. 41세엔 한국기술원(KAIST) 교수가 됐고,1997년 벤처회사 티맥스소프트를 창업했다.‘아무 것도 없는 것이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이 세계적으로 기술장벽이 가장 높다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1%의 가능성도 없다는 TP모니터 개발에 도전, 하루 13시간씩 연구해 이듬해 성공했다. 최근엔 노키아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양분한 휴대전화 운영체제(OS)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세계적으로 미들웨어·DB관리시스템·OS 등 3대 시스템 소프트웨어 기술을 모두 가진 기업은 IBM과 MS뿐이다.2001년 72억원의 매출액은 2007년 852억원으로 뛰었다.2015년 삼성전자와 맞먹는 기업으로 키운다는 게 그의 목표다. 직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며 아이디어를 얻고, 그들의 창의를 소중히 여긴다. 이명박 판박이다. 새 정부가 갓 출범한 2008년 3월16일 오후, 대통령과 장·차관, 청와대 수석 등 국정책임자 92명이 그의 도전사를 경청했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거북선 농업’ 주창 정운천 농림장관

    ‘거북선 농업’ 주창 정운천 농림장관

    “농업의 근본 틀을 확 바꾸겠다. 산업정책 차원에서 보겠다.”지난 13일 과천 정부청사에서 만난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일성이다.2년 전 전남 해남 참다래유통사업단 사무실에서 농업 개혁안을 피력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고 다소 긴장된 모습이 비쳤다. ●농민단체들로부터 정책의견 수렴 ‘을’의 위치이던 농기업 CEO에서 농정을 책임지는 장관이라는 ‘갑’의 입장으로 바뀐 탓만은 아니다. 안팎에서 쏠리는 기대와 우려를 의식해 한마디 한마디에 함축된 의미를 담으려는 듯했다. 특히 18일 대통령 업무보고를 앞뒀기에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개혁의지는 분명히 했다. “농업 CEO 출신이 장관으로 온다니까 처음에 농민단체들이 긴장했다. 일부는 반대 성명까지 냈다. 기업논리로 정책을 펴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하지만 이같은 불안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했다. 취임 이후 첫 행사로 전국의 40개 농업단체장을 장관 사무실로 초대했다. 정책 제안을 받기 위해서다. 복도에서 실·국장들은 이름표를 달고 단체장들을 맞았다. 장관도 기다렸다. “과거에는 단체장들이 먼저 회의장에 참석했다. 장관은 5분 뒤 등장해 의례적인 말을 하고 회의를 끝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장관이 머리를 낮추자 반응이 나타났다.”그 결과 36개 단체가 정책을 제안했다. 이런 일은 농정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실국장들도 처음에는 어색해 했다.“서로 다 아는데 꼭 이럴 필요가 있느냐.”고 수군댔다. 하지만 단체장들이 의아해 하면서도 격의없는 토론을 벌이자 뒷머리가 주뼛해졌다고 털어 놓았다. “농민들이 위기를 말하지만 위기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위기는 우리 주변에 늘 있었다.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한 게 우리의 진정한 문제였다.”23년 농업 외길 인생에서 우러나온 경험담이기도 하다. 숱한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키위를 ‘참다래’ 브랜드로 키운 그의 지론은 압축하면 ‘농민 주인론’이다. “민주주의가 뭐냐.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 아니냐. 농업도 마찬가지다. 농민이 주인이다. 정부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정부만 바라본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것. 그러다가는 눈도, 코도, 입도 다 없어져 농업 전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 장관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금기시’하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생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농업을 산업 차원에서 보도록 할 것이다.”농업을 보호 대상만이 아닌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역대 농림 장관들이 당위성을 십분 인정하면서도 이같은 시각을 공론화한 적은 없었다. ●“왜 농림수산식품부인지 되새길 필요” 그가 주장해 온 ‘유통의 고속도로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생산자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가는 유통의 고속도로를 뚫는다면 시장 개방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했다. 정 장관은 그의 저서 ‘거북선 농업’에서 “쌀을 상품화하기 위해 지자체 단위로 쌀 판매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전문적인 CEO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장관은 이를 구체화할 복안도 일부 드러냈다.“앞으로 전국에 걸쳐 농업 CEO 100명 정도를 뽑을 계획이다. 이들이 농업의 산업화를 주도할 것이다.”구체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농수산식품부에 왜 ‘식품’을 넣었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는 과일과 채소 등 품목별로 농업 CEO를 육성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 장관을 발탁한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농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지난해 참다래유통사업단 경영에서 물러난 뒤 장관에 임명되기까지 한국농업CEO연합회 회장 활동에 주력해 왔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거북선 농업 일반 목선에 덮개를 덮어 적의 화살과 칼날을 막자는 아이디어 하나가 나라를 구한 것처럼 농업에 새로운 가치를 부가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정운천 장관의 지론이다. 예컨대 기존 고구마에 저장과 세척, 포장, 바이오 등 8가지 새로운 기술을 더해 고구마 유통을 성공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11) 어살과 물고기 잡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11) 어살과 물고기 잡기

    어살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한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어살에는 하고 많은 사연이 있었다. 땅이 땅을 경작하는 농민의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땅이 농민의 소유가 된 적은 유사 이래 드물었듯이, 어살이 물고기를 직접 잡는 어민의 것이었던 적 역시 드물었다. 김홍도의 그림 ‘어살’이다. 바다에 말장을 빽빽이 쳐서 길게 담을 만들어 두었다. 이렇게 말장을 빽빽이 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어살 혹은 어전(漁箭)이라 한다. 또 말장과 말장 사이에 그물을 치면 ‘말장그물’이라 한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작살, 낚시, 통발, 그물 등 여럿이다. 어살은 그 중 하나인 것이다. 지금 어살 안에는 사내 둘이 다리를 걷고 광주리와 채반 같은 것에 물고기를 담아 건네고 있다. 이 그림에는 배가 세 척이 있는데, 맨 아래쪽의 배는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살 바로 바깥에 있는 배 두 척은 하는 일이 분명하다. 그 중 위의 배는 어전 안에서 건네 주는 물고기를 막 받고 있는데, 배에 독이 둘이 실린 것으로 보아, 거기에 아마 담을 모양이다. 아래쪽 배의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내는 왼손에 큼지막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있다. 방금 어살에서 받은 것일 터이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역시 독이 둘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오른쪽이다. 배 가운데에 솥과 그릇이 있다. 솥이 얹혀 있는 곳은 흡사 부뚜막 같이 생겼는데, 도대체 어떤 용도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요즘도 고기잡이 배는 바다로 나가면 배에서 밥을 해 먹으니, 비록 작은 배지만 역시 밥을 해 먹고 있는 것인가. ●가난한 백성이 먹고 살 길 열어주려 만든 어살 생선은 강과 호수, 그리고 바다에서 생산된다. 물론 대부분은 바다에서 난 것이라, 어업이라 하면 바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한데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조선조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어업이 대세는 아니었다. 문헌을 보면 어업의 주요한 수단은 어살이었다. 어살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한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어살에는 하고 많은 사연이 있었다. 땅이 땅을 경작하는 농민의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땅이 농민의 소유가 된 적은 유사 이래 드물었듯이, 어살이 물고기를 직접 잡는 어민의 것이었던 적 역시 드물었다. 이 사정을 좀 살펴 보자.‘경국대전’의 호전 어염(魚鹽)조에 다음과 같은 법적 규정이 있다. “여러 도의 어살과 염분(鹽盆, 소금 굽는 가마)은 등급을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서 호조와 각 도, 각 고을에 보관한다. 장부에 누락시킨 자는 장(杖) 80대에 처하고 그 이득은 관에서 몰수한다.(어전을 사사로이 점유한 자도 같다) 어전은 가난한 백성에게 주되 3년이 되면 교체한다.” 어전, 그리고 소금을 굽는 염분은 각각 그 사이즈에 따라 모두 국가에 등록하고, 그 등록 문서는 호조와 각 도, 각 고을에 비치해 두며, 만약 누락한 자가 있을 경우 곤장을 친다는 것이다. 곧 어살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었고, 특히 개인적 점유를 금했던 것이다. 여기에 ‘어살은 가난한 백성에게 주되 3년이 되면 교체한다.’는 조항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 곧 재산이 없는 빈민에게 무상으로 주고 다시 3년이 지나면 교체한다는 것이었으니, 원래 어살은 가난한 백성이 먹고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던 셈이다. ●괜찮은 어살은 한번에 잡히는 생선이 무명 500필 정도 수입 어전은 꽤나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수입의 정도를 살펴 보자. 세종 22년 3월 23일 좌참찬 하연은 괜찮은 어살은 한 번에 잡히는 생선이 무명 500필 정도의 수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력자나 부자의 입장에서는 이 엄청난 수입이 가난뱅이들의 차지가 되는 것은 보기에 너무나 억울하다. 그래서 어살의 개인적 독점을 금한 법령은 무시되고 어살을 일부 소수 특권층이 다투어 차지하게 된다. 성종 1년 2월 23일 호조판서 구치관이 와서 어전의 문제를 아뢴다. “어살은 본래 관청과 백성에게 주어서 진상에 대비하게 하고, 또 먹고 사는 방도로 삼게 했는데, 지금 종친과 권세가에서 제멋대로 만들어서 관청과 백성의 이익을 빼앗고 있습니다. 원래 법을 제정한 뜻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금지하소서.” 이 건의는 수용되지만 이후 특권층이 어살을 독차지하는 문제는 영조 때까지 계속된다. 연산군 때부터 수입이 좋은 어살을 왕은 자기가 총애하는 후궁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연산군을 쫓아내고 새로 왕이 된 중종도 “왕자들이 자기 몫으로 토지를 받지 않았기에 대신 어살을 주었을 뿐”(‘중종실록’ 36년 2월 20일)이라면서 왕자들에게 어살을 하사하였고,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국가와 가난한 백성들의 소유여야 할 어살을 가장 많이 차지한 곳은 이처럼 왕자나 공주의 집안, 곧 궁방이었다. 왕들은 자기 자식이 자라서 궁 밖으로 나가 딴 살림을 차리게 되면 토지와 어살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어떤 왕이든 예외가 없었다.‘효종실록’ 6년 11월 25일 전라감사 정지화의 보고에 의하면, 전라도 부안현 소재 20곳의 어살은, 궁가 점유가 11곳, 성균관 소유가 8곳이었고, 부안현 소유는 1곳이었던 바, 그 1곳마저도 숙경공주 집에 빼앗겼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백성의 몫은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양심적 관료들이 궁방의 어살 독점을 문제 삼고, 백성들을 위해 어살을 궁방에서 되찾아 다시 국가가 관리하고 백성에게 어업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현종실록’의 사관은 어살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살펴 보건대, 우리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어 조석도 보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폐단은, 오래 전부터 쌓이고 쌓여 전례가 된 것들로서, 위사람 아랫사람이 모두 그냥 따라 할 뿐, 고칠 수가 없게 된 데서 근거를 두고 있다. 삼사의 관원들이 해를 넘기면서까지 굳게 다투고 입이 닳도록 말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은 것을, 정부에서는 늘 여기로 저기로 돌리며 긴 세월 방치해 두면서, 위로는 임금의 명을 팽개치고 아래로는 여론을 막는 것을 상책으로 여긴다. 시장(柴場), 염분(鹽盆)·어살을 혁파하는 일은 모두 임금의 윤허를 받았지만, 끝내 실효가 없다. 이른바 소결청(疏決廳)과 공안(貢案)을 고치는 일도 윤허 받은 뒤 역시 모조리 폐기하였다. 대신들이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불충하고 왕명을 어기는 데 거리낌이 없으니, 정말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현종실록’ 5년 11월 1일). 수많은 개혁책이 강구되었지만, 소수의 양심적 관료의 소리였을 뿐,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은 오불관언이었던 것이다. ●영조때 균역법으로 궁방의 어살 독점 없애 궁방의 어살 독점은 영조 때에 와서 만든 균역법으로 혁파되었다. 균역법은 양역을 해결하고자 만든 법이다. 양역은 양민에게 물리는 군포를 말한다. 이 군포의 징수가 엄청나게 가혹했다.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내라는 백골징포,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물리는 황구첨정, 동네나 친족에게 연대 책임을 지워 군포를 징수하는 동징, 족징까지 있었으니 군포야말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악정 중의 악정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양역으로 내는 군포를 1필로 줄이고, 모자라는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세원을 찾았던 바, 그 세원의 하나가 곧 어전과 염분(소금을 졸이는 가마) 등 바다에서 생산되는 물자였던 것이다. 영조는 모든 궁가의 어살을 몰수하여 균역청에 소속시키고, 백성들이 어살에서 올리는 수입의 일부를 균역청의 몫으로 삼았다. 수백 년 동안 제기되었던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하는 획기적인 조처였다. 영조 28년 1월 13일 병조판서 홍계희는 이 조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 궁가에서 떼어 받아 독차지한 어살과 소속된 배에 대해 모두 개혁책을 펼쳐 일체 세금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진실로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할 수 있다면 내(영조 자신)가 내 어찌 내 몸의 거죽과 털인들 아끼겠는가?´라고 하교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정말 천고 이래 없었던 거룩한 일인 것입니다.” 영조의 균역법을 칭송하고 있으니, 그나마 영조는 개혁의지가 있었던 왕이었던 것이다. 균역법 이후 어살을 둘러싸고 작은 소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살이 다시 궁방의 차지가 되지는 않았다. 김홍도는 정조 때 사람이다. 그림 속 어민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는 것은 영조 때 이루어졌던 개혁 때문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티베트 고난의 57년

    티베트 고난의 57년

    중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유엔과 영국 등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 중국과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중국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 민간 주재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하고 시캉성 창두 지구를 편입받았다. 그후 중국인들이 대거 티베트로 몰려들어옴에 따른 자원 부담과 양쯔강 상류의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에 대한 박해 때문에 1959년 3월10일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했다.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시위는 1만 5000여명의 희생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시위를 주도한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인도 다람살라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존재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중국은 티베트에서는 독재를 실시했다. 사유재산을 빼앗고 사회구조도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한 집단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중국의 꼭두각시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을 폐쇄했다. 그 뒤부터 중국은 티베트인의 여행자유 제한, 농업생산의 독려, 강제 노동 등 탄압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하지만 중국의 탄압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티베트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도 이에 비례해 커졌다.1961년과 1962년의 가뭄을 계기로 게릴라전이 계속됨에 따라 중국은 유화정책을 일부 도입했다.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했다. 중국의 정치적인 탄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군과 경찰을 동원해 무력으로 독립 요구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1984년과 1987년 독립시위에 이어 1989년 3월5일에도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를 벌였다. 비록 중국군의 계엄령 선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난 10일부터 티베트에서 승려가 주도된 독립시위가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의한 고난과 핍박의 57년 역사에 과연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세계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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