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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어가는 가을에/송정숙 본사 논설위원(서울칼럼)

    10월31일 저녁 관훈토론에는 강영훈 총리가 나왔다. 군출신에,한때 준망명기를 지냈고,권력의 부근에 복귀하여 비바람 심한 자리를 무난히 견디고 있는 고희가 멀지 않은 현직 총리인 그가 아직도 우등생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모범생같은 공직자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기대이상의 일이다. 그런 총리가 이날 저녁 꼭한번 넥타이를 푼 것 같은 「맨얼굴」을보였다. 플로에서 던진 「전적으로 농담차원」의 질문에 응답했을 때였다. 많은 어려운 시기와 시련도 무난히 끝냈으니 이제 아예 정치일선으로 나와 대통령에 출마해보는게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파안이 되어 손을 홰홰 저으며 『큰일날 소리 말라』고 받아 넘긴 그는 자신의 「정치불가론」을 몇가지 꼽았다. 그중의 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나는 이북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는 못해요』 이 말은 처음에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말은,출신구역이 없으니 어디서 출마를 하겠는가,통일이나 된다면 『나도 내고향에 가서 한번 출마를 하고 고향사람들께 표좀찍어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자처하는 이북출신 사람들의 약간 자조적인 분위기까지는 안갔지만 그것은 확실히 진솔함을 띤 목소리였다. 특히 바로 이튿날 조간에서 본 「고향」에서의 김영삼 민자당대표 최고위원의 모습이 소급해서 그 정서를 확인해주었다. 거물 정치지도자라도 거기를 근거로 출마하고,답답하고 혼미할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더구나 김 최고위원에게는 그곳에 노부도 계시다. 국가의 운명을 손안에 쥐고 천하를 경영하는 큰 정치인이라도 시골에 묻힌 조그마한 부친 앞에서는 그냥 아들일 뿐인 것이 「고향의 조건」이다. 김 최고위원의 서양식으로 포옹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했다. 그보다는 좌정한 노인아버지 앞에 공손히 무릎 꿇고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의 부자는 대개가 나이들수록 덤덤하고 무뚝뚝하다. 나이들수록 부친은 아들 앞에서 먼산을 보는게 보통이고,아들은 아들대로 아버지 앞에서는 고개를 반쯤 꼰채 웃목이나바라보면서 딴청을 한다. 선산이야기,어렵게 사는 동기간 걱정따위를 아버지가 「잔소리」처럼 늘어놓으시면 묵묵히 들어 드리다가 요긴한 대목에서 우물우물 대답을 한다. 그런 아들이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든든하고 소중한만큼 어려워서,알아서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옛날 할머니 어머니들은 나이든 부자는 되도록 겸상도 차려주지 않았다. 서로 불편하여 식사를 누리기 어렵다는 배려때문에 조손이나 손자만큼 어린 아들이 아니면 겸상을 해주지 않는다. 아무튼 출세를 많이 하거나 크게 된 아들이 소박한 귀향길에 촌로로 보이는 아버지에게 공손히 절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다. 흡사 이름은 없지만 꼿꼿하고 당당한 서민앞에 겸손하게 절하며 하명을 기다리는 검박한 정치인의 모습같은 것을 발견하게 하는 모습이다. 분당 소용돌이의 안개정국이 한치 앞도 제대로 비쳐주지 않는 이런 혼미한 계절에 「고향」 타령이나 하고 절의 「정서」를 늘어놓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목소리 가다듬어 꾸짖기도 지쳤고 정국을 탐색하기도이제는 성가셔졌다. 다만 순하고 소박하고 겸허한 정서의 총체인 「고향」을 지녔다는 것이 우리의 정의적 자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향이 이렇게 각별히 느껴진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또 지금이 깊은 가을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난감하고 무력감이 드는 이 느낌이 겨울로까지 연장되지 않도록 순하고 겸허하며 현명한 가을의 감성을 발휘해 주었으면 좋겠다. 영국의 왕중에서도 가장 신사도의 덕목을 지녔던 조지 5세의 「행장전범」이 있다. 침대 머리맡에 새겨놓고 기도하듯 외웠다는 이 전범을 20세기의 현인 임어당은 추천한다. 「게임의 룰에 순종할 수 있게 하옵시고, 칭찬할 정서와 타기할 감상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시며 값싼 칭찬을 하지도 말고,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지도 말게 하소서. 만일 나에게 수난을 요구하면 그것을 묵묵히 받아서 순종하는 동물처럼 되게 하소서. 이겨야 할때는 이기는 법을,져야 할때는 멋진 패자가 되게 하소서. 달을 향하여 읍소하지 말게 하시고 쏟아진 우유에 미련을 갖게 하지 마소서」 이 전범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첫 항인 듯하다. 「게임의 룰」에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을 기도로 되뇌며 일상을 지냈다는 일이 매우 인상적이다. 군왕조차도 지키기가 쉽지 않아서 이렇게 간절하게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그 다음으로는 네째항인 「수난을 요구하면… 순종하는 동물처럼」 되게 해달라는 대목이 좋다. 수난이란 동물처럼 맹목으로 묵묵히 당하는 것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철학을 터득한 전범이기 때문이다. 「멋진 패자」란 말이 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특히 정상급 정치인에게는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것 같다. 깊어가는 가을,맑은 마음으로 여러번 반추해볼만한 이 전범을 모든 힘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 청와대 새 관저 준공

    ◎“대통령 일가 살림집”… 팔작지붕 전통미 살린 단층/내년 집무실 완공되면 일제의 잔재 씻는 셈/노 대통령,“옛 중앙청 이전,경복궁 복원해야” 전통 한옥형태에 청기와를 올린 새 대통령 관저가 청와대내에 마련됐다. 청와대는 25일 상오 노태우 대통령 내외,비서실 직원,공사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관저 준공식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금명간 새로 마련된 관저에 입주,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지금까지 1,2층 계단을 오르내리던 출퇴근에서 차량으로 출퇴근하는 맛을 느끼게 됐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건물은 1층이 집무실이고 2층이 살림집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 동쪽 약간 뒤편 계곡에 자리잡은 새 관저는 본채(2백44평),접대시설이 마련된 별채(1백50평)와 사랑채 부속건물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지면적은 1천2백60평이다. 전통 한옥형태로 4면에 추녀를 달아낸 팔작지붕(까치박공이 달린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에 청기와를 올려 전통미를 살린 단층인 이 관저는 얕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살림공간 분위기를 내고 있고 솟을 대문에는 「인수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난해 8월28일 착공,4백25일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이날 준공된 신축 관저는 총 공사비 60억원에 연인원 8만1천명과 연 2천3백대의 장비가 동원됐다. ○…노 대통령은 이날 준공테이프를 끊은 뒤 별채에서 참석자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과거 같았으면 대통령이 새 집을 짓는다면 장기집권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을지 모르나 나는 그럴 염려가 없는 사람 아니냐』고 반문한 뒤 『처음 신축 건의를 받았을 때는 임기만료 6개월 전쯤 완공하면 된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라졌다』고 피력. 노 대통령은 기자들이 『항간에 대통령 관저가 훌륭하게 건축되고 있는 점을 들어 앞으로 내각제를 하기는 어렵다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고 말하자 『말레이시아에 가보니 국왕과 수상이 있는데 수상은 국정의 온갖 일을 다하느라 위세를 부릴 시간도 없다고 하더라』고만 말해 청와대 관저 및 집무실(내년 7월 완공) 신축과 내각제문제는 연관이 없음을 시사. 노 대통령은 또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한국식으로 새로 짓고 경복궁도 옛 모습대로 복원하면 일제 침략의 역사로부터 나라의 위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일제 총독 부청사였던 옛 중앙청(현 국립박물관) 건물도 다른 곳으로 옳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은 1937년 3월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남차랑)가 일본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이곳에 총독 관저용으로 착공,2년 만에 완공했던 것. 독립한 지 40여년이 된 국가의 대통령이 식민통치하의 총독 관저를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를 신축하게 된 배경이라고 한 관계자는 설명.
  • 외언내언

    외국에서 솜씨를 키웠다는 한 코미디배우가 모델로 나오는 광고가 있다, 제품선전을 하고 난 그에게 젊은 여성이 느닷없이 『확실히 혼자 사세요』하고 묻는 장면이 들어 있는 광고다. 그렇게 묻는 여성에게 코미디배우는 느글느글한 표정으로 직접 와서 확인하라고 한다. 아마도 외국식의 「진한 농담」을 흉내낸 광고인 것 같다. ◆젊고 순진한 한국여성을 혀 짧은 발음으로 희롱하는 것 같은 이런 광고가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미국 만화영화의 주인공 스티카가 붙은 어린이 신발 광고도 억세게 나온다. 콧소리가 나는 프랑스식 발음의 어린이 옷들이 어른처럼 깜찍한 모델들에 의해 수도 없이 광고되기도 한다. 음식에서 화장품 냄새가 날 때처럼 비위가 상한다. ◆유치원생이 눈을 치떴다 내리떴다 하며 「어버이수령」에게 감사하고,통일타령을 하는 북한 어린이 모습이 TV에 비춰질 때면 분노가 치민다. 그 어린 것들을 어떻게 해서 저런 기형상태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념이라는 도깨비에게전족을 당한 듯한 북쪽 어린이도 가슴 아픈데 우리의 상업주의가 우리 어린이를 오염시키는 정도도 적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상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품에 따라 외국인 모델을 쓰거나 상표를 빌려온 것이 훨씬 많은 이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워낙 커서 판권료를 물고도 몇 배로 이익을 남겨주므로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는 것. 장사꾼에게 이문 많은 것을 단념하라는 주문은 별 효과가 없는 법이다. ◆상공장관이 TV와 인쇄매체 등에 외국인 모델 광고를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답답하니까 해보는 주문이겠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시민이 「뜻」을 지녀야만 타락한 상업주의는 막을 수 있다. 다함께 그런 노력이라도 개발했으면 좋겠다.
  • 북한축구팀 서울의 가을 만끽

    ◎임금님 거닐던 인정전 길선 양측 대표 서로 “먼저…”/“「평양방문기」 등 체제비판 용납 못해” 북 기자들 항의/김유순 대표,“올림픽 조형물에 내 국적 틀렸다” 지적 ▷호텔◁ ○…서울에서 첫밤을 보낸 통일축구 북측 선수단은 22일 상오 7시 예정대로 기상,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며 서울에서의 이틀째를 시작했다. 전날만 해도 서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등으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던 선수단은 21일 밤을 푹 자고 난 뒤 생기가 되살아난 듯 발랄한 모습들이었다. 특히 처음 서울에 온 어린 남녀 선수들은 서울에 대한 두려움으로 긴장된 모습들이었으나 21일 하루 숙소와 운동장 만찬장 등에서 서울사람들의 진면목을 본 탓인지 천진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선수단은 7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구내에서 체조와 간단한 조깅으로 몸을 푼 뒤 곧 아침식사에 들어갔고 9시 정각 서울에서의 첫 관광지인 비원을 향해 떠났다. ○드라마 방영에 거센 항의 ○…북한선수단 일행이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21일 하오 1시50분과 9시30분두 차례에 걸쳐 KBS­TV에서 김일성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이 방영돼 북한측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해방 전후사를 다룬 이 드라마는 김일성이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는 권모술수가로 묘사된 데다 여성편력까지 다루었다. 북한측은 『손님을 불러놓고 의도적으로 이런 드라마를 방영한 것이 아니냐』며 『이런 분위기에서는 축구대회도 할 필요가 없으니 철수하겠다』고 항의해와 우리측이 이를 해명하기도. ○남자대표 비원 관광 취소 ○…북한선수단은 22일 상오 9시50분 서울 종로구 비원에 도착,이우용 관리소장(51)의 안내로 1시간10분 동안 비원 경내를 둘러보았다. 남자선수들을 제외한 이들은 비원에 도착한 뒤 비원 약사와 시설을 설명듣고 이형미 씨 등 여자안내원 4명의 안내로 인정전ㆍ희정당ㆍ선정전ㆍ대조전 등 궁궐을 살펴보며 고궁을 산책했다. 국악인 26명이 궁중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이들은 민가로서는 최대규모였던 99간짜리 연경당도 둘러보고 연못 부용지 부근에서 간단한 다과를들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남자선수들은 23일의 경기에 대비,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라며 당초 예정에 있던 비원 관광을 취소하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비원 관람◁ ○…북측 선수단은 이날 상오 9시 숙소인 워커힐호텔을 출발해 9시35분 창덕궁에 도착,이우용 관리소장(51)의 영접을 받았다. 북측 선수단은 이어 창덕궁 안내원인 이형미 양(26)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보았는데 김유순 단장은 시종 무표정한 얼굴을 지어 김형진 부단장이 오완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팔짱을 끼고 웃음띤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들의 문안을 받던 인정전 앞에 이르러 안내원 이형미 양이 『한가운데는 임금이 걷던 길이고 양 옆은 신하들이 도열하던 곳』이라며 『마음내키는 길로 걸어가십시오』라고 말하자 김유순 단장과 장충식 남북체육회담 우리측 수석대표는 서로 가운데 길을 양보하며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궁중음악 은은히 울려 ○…이날 임금의 연회장이었던 부용정 옆 영화당에는 국립국악원 단원 21명이 나와 궁중음악을 연주,전통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북측 선수단은 이 음악에 옛날 궁중에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주하는 「유초신지곡」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흡족한 표정. ○…북한 여자팀 주장 임순봉(26)은 기자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림순봉입니다. 림수경과 같은 「림」이지요. 림수경이를 아세요』라고 되물어 가벼운 웃음을 사기도. 임양은 관람소감에 대해 『북에 있는 유적에 비해 텅빈 것 같다』며 『아무런 시설이 없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대답. ○…북한 중앙통신 리충국 논설위원(56)은 남측의 한 스포츠전문지에 21일 자신의 발언이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왜곡,보도됐다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 그는 대한축구협회 권오성 총무부장이 『나와 동갑인데 왜 그리 늙어 보이느냐』는 질문에 『사회주의 물을 먹어서 그런 모양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것. 리충국 위원은 아무 뜻없이 농담 삼아 한 말인데 멋대로 해석,보도했다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기도. ○…북한 여자팀 김금실 선수(19)는 한국을 7­0으로 꺾었던북경대회 남북한축구경기서 더 많은 골을 넣을 수도 있었으나 한국이 골 득실차에서라도 최하위를 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추가 골을 자제했다고 뒤늦게 실토. 김 선수는 『당시 한국의 전력이 출전팀 가운데 제일 약해보여 한 동포로서 도와주고 싶었다』면서 『더이상 추가 골을 넣지 않은 것은 역시 약팀인 홍콩과의 골 득실차에서 이겨 최하위를 면하도록 해주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 ▷오찬◁ ○…북측 선수단과 기자단 일행은 이날 상오 비원 관광을 마친 뒤 낮 12시 올림픽유스호스텔 19층 뷔페식당에서 우리측 선수단과 섞여 앉아 오찬을 들며 담소를 즐겼다. 관광을 생략한 채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북측 남자선수들은 이곳에서 본단과 합류했는데 북측 선수단은 전날 힐튼호텔 만찬장에서처럼 서로 안면이 있는 남측 선수들을 불러 자리를 같이한 뒤 양식과 한식ㆍ일식 등으로 짜여진 음식을 골고루 맛보면서 못다한 얘기꽃을 피웠다. 이들중 북측 단장인 국가체육위(NOC) 김유순 위원장과 김형진 부위원장 등 임원들은 남측의 장충식 대한올림픽위 부위원장,오완건 축구협회 부회장 등과 함께 전망좋은 좌석으로 안내돼 눈앞에 전개된 한강과 공원의 모습을 화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하오 1시께 오찬을 마친 남북 선수단은 다음 일정인 올림픽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공원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산책을 즐겼다. ○파키스탄으로 오해 ▷올림픽공원◁ ○…북측 선수단중 임원진과 보도진 18명은 22일 올림픽유스호스텔에서 점심을 마친 후 하오 1시15분부터 45분 가량 올림픽공원을 둘러보았다. 김유순 IOC위원은 공원을 시찰하다 올림픽기념 조형물중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명단을 유심히 살펴본 후 자신의 국적이 잘못 새겨진 것을 보고 시정해줄 것을 요구. 영어로 「YU SUN KIM」이라고 표기된 옆에 국적란이 파키스탄을 가리키는 「PAK」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 김 위원장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내가 파키스탄 사람인 줄 알겠구만』이라고 뼈있는 농담을 했으며 이 오기를 첫 발견한 김형진 북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은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고 북한을 지칭하는 「PRK」로 고쳐달라고 주문. ○남북 기자,가벼운 실랑이 ○…21일 하오 11시40분 호텔 앞에서 북한 노동신문 이길성 부국장과 MBC 문진호 기자(40)가 5분여 동안 몸싸움을 벌여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 이 부국장은 이날 서울 야경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뉴스제작을 위해 마이크를 들이댄 문 기자에게 『한국기자는 버릇이 없고 무례하다』고 말한 것이 발단. 문 기자가 이에 대해 『북경아시안게임 때 남북체육장관회담 직후 이 부국장이 정동성 체육부 장관에게 이야기를 하며 어깨를 친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이 부국장이 『그 말의 저의가 무엇이냐』며 문 기자를 밀치고 실랑이를 벌이다 마이크와 녹화테이프를 빼앗아 숙소로 들어갔다. 이 부국장은 22일 상오 문 기자에게 마이크를 돌려주며 『미안하다』며 화해를 요청. ○…이날 저녁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북측 기자들은 우리측 기자들을 상대로 『언론이 남북 대결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며 우리측 언론보도를 집중 성토. 북측 기자들은 각 신문사 기자들을차례로 만나 남북통일축구에 대한 보도와 최근 남북고위급회담에 참가하고 돌아온 기자들이 평양방문기를 쓰면서 체제비판을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를 하기도. 로동신문의 리길성 기자는 『우리는 유일사상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기 때문에 체제에 대한 비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서울방문 기간중에 보인 남측 언론태도는 꼭 짚고넘어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당초 우리측 기자들이 북측 기자들을 집으로 초청하려던 계획은 무산.
  • “통일축구가 통일축제 되길 바란다”/북한 축구팀 서울 오던 날

    ◎연도 시민 열렬한 환영에 손들어 답례/만찬장서 「고향이 봄」ㆍ「우리의 소원」 합창/“평양냉면 맛있었다” “남쪽은 양 적지 않나” ▷판문점 도착◁ ○…김유순 위원장은 평화의 집에 도착한 뒤 별도의 도착성명은 발표하지 않고 우리측 김용균 체육부 차관과 장충식 KOC 부위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곧바로 휴식처인 평화의 집으로 직행. 김 위원장은 『남측 땅을 밟고 보니 한 핏줄 한 조선땅임을 실감했다』고 말문을 연 뒤 『어떻게 갈라져 살겠느냐,빨리 같이 살아야겠다』면서 『통일축구가 통일축제로 되기를 바란다』고 방한 소감을 피력. ○…장충식 KOC 부위원장은 『남북축구경기 동안 북측 국민들이 보여준 열렬한 성원에 감사한다』면서 인사말을 꺼내자 김유순 북측 위원장은 『같은 식구들인데 응당 그렇게 해야죠』라며 화답. 또 김형진 부위원장은 『환영인파를 조직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나와 열렬히 환영했다』며 『통일축구가 성공적으로 끝날 것으로 확신해 통일될 날이 당겨진 것 같다』며 응수. ○“축구표 파느냐” 질문 ○…김형진 부위원장은 『북남 축구 서울경기의 축구표를 파느냐』고 질문. 이에 대해 우리측 체육회담 대표인 이학래 한양대 교수가 『3시간 만에 매진되었다』고 말하자 김형진 씨는 『표가 매진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경기장에 온 관중들의 열기가 문제 아니냐』며 되받기도. 이어 평양경기에 참가했던 이학래 대표는 『평양에서 먹은 옥류관 냉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며 『김유순 위원장과 김형진 부위원장에게 남측 냉면맛을 한번 보라』고 권유. 이에 대해 김형진 부위원장은 『우리측은 대접용이니까 양이 많겠지만 남쪽은 장사를 하다보니 양이 적지 않겠느냐』고 농담. 이를 지켜보던 오완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두 분 위원장이 맛 보시겠다면 평양 때와 마찬가지로 큰 그릇에 양을 듬뿍 넣어 주도록 하겠다』며 맞받아치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이날 북한측 기자단은 김용균 체육부 차관에게 『평양축구를 마치고 돌아간 남측 선수들을 남측 국민들이 환영해주지 않아 섭섭했다는데 왜 환영을 해주지 않았느냐』며 『우리는 평양경기를 TV로생중계했고 남측도 생중계할 줄 알았는데 왜 하지 않았느냐』며 질문공세를 펴기도. 김 차관은 이에 대해 『TV중계는 북측과 남측의 중계방송 방식이 달라 못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축구단은 평양에서 돌아온 즉시 유스호스텔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했다』며 어리둥절한 표정. ○“최순호 선수 최우수” ○…20명으로 구성된 북한 남자 축구팀은 회색 싱글차림으로 비교적 단정한 모습. 지난 1차전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던 탁영빈 선수는 2차전에 임하는 소감에 대해 『승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며 『우리는 남북 축구대결을 통해 통일에 기여하려는 것이다』라고 피력. 탁 선수는 또 『한국 선수중 누가 제일 실력이 낫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최순호 선수의 활약이 가장 좋다』고 대답. 김광민 선수는 『2차전에 대비한 특별한 훈련은 안했다』고 밝히고 『우리는 승부에 관계없이 통일을 위해 싸우겠다』고 통일을 거듭 강조. 북한 선수중 유일한 조총련계 동포로 부모가 일본에 살고 있다고 밝힌 김종성 선수는 『부모 고향은 충남 부여이고고모가 서울에 살고 있다』고 말했으나 고모이름은 모른다고 언급. 한 선수는 또 평양에서 페널티킥이 나온 데 대해 『텃세였다. 섭섭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볼을 바깥으로 차버린 남조선 골키퍼의 행동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연도◁ ○…북측 대표단 78명은 승용차 18대와 버스 7대 등에 나누어 타고 판문점을 거쳐 상오 10시55분쯤 자유의 다리를 지니 임진각으로 넘어왔다. 이날 임진각에는 경찰이 일반차량 출입을 통제한 탓에 환영객은 많지 않았으며 관광객과 구경나온 이웃 주민 등 1백50여명 만이 망배단 등에서 북측 대표단을 맞았다. 이들은 북측 임원과 남녀 선수들을 태운 차량이 지나가자 활짝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며 환영했으며 북측 대표들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북측 대표단은 통일로∼독립문∼여의도∼올림픽대로 등을 거쳐 임진각을 통과한지 1시간20분 만인 낮 12시20분쯤 숙소인 워커힐호텔에 도착,여장을 풀었다. 북측 대표단 차량행렬이 통일로를 지나 서울시내로 접어들면서부터 환영시민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불광동을 지나자 거리에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찰은 이날 학생시위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통일로 곳곳에 경찰 4백여명을 배치하는 한편 경기도 고양군 삼송리 검문소 등에서 검문ㆍ검색을 했다. ○꽃다발 세례에 “상기” ▷숙소◁ ○…북한 선수단은 예정보다 20여분 늦은 낮 12시20분쯤 숙소인 쉐라톤워커힐호텔에 도착했다. 45명의 대원여고 고적대의 주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김유순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을 선두로 대형 버스에서 내린 북한 선수단 일행은 미녀모델과 연예인들의 꽃다발 세례를 받고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이날 호텔에는 코미디언 이주일 씨를 비롯한 가수 탤런트 모델 등 연예인 80여명이 상오 11시부터 꽃다발을 들고 북한 선수들을 기다렸다. 가수 김태화 정훈희 부부와 진미령,국악인 이호연 씨 등은 『북한 선수단이 온다는 소식에 잠까지 설치고 나왔다. 웬지 가슴이 설렌다』고 소감을 피력. ○공정경기 특별주문 ○…박종환 한국 남자팀 감독은 『안방에서 손님을 맞는 주인 입장에서 모든 정성을 기울이겠다』고 말하면서 『지난 11일 평양 5ㆍ1경기장에서 열렸던 1차대회와 같은 어이없는 판정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 박 감독은 이번 서울대회 주심을 맡은 길기철 씨와 미리 만나 승부에 관계없이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해줄 것을 특별히 주문했다고. 박 감독은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팀이 실력이나 매너에서 모두 우위에 있다는 사실만 보여주겠다고 2차대회에 임하는 소감을 피력. ○…북한 선수단은 숙소인 쉐라톤워커힐 전체 6백37개의 객실중 64개를 사용. 김유순 단장은 17층 1백20평짜리 다이아몬드 룸에 묵는데 하루 숙박료가 85만원에 이르는 초호화 룸. 임원들은 16층 17개 객실에 나뉘어 묵게 되며 선수들은 15층 40개 객실에 분산투숙했다. ○“잠실 스타디움 훌륭” ▷경기장 답사◁ ○…북한 남녀 선수단 54명은 이날 하오 4시13분에 23일 경기가 펼쳐질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 도착. 남자는 메인스타디움에서,여자는 보조구장에서 각각 40여분 동안 몸을 풀었다. 선수들이 몸을 푸는 동안 장내에는 「아리랑」 「고향의 봄」 등의 음악이 울려 퍼졌으며 동쪽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는 서울올림픽 개ㆍ폐회식과 각종 경기 장면 등으로 편집된 「서울올림픽 하이라이트」가 아름답게 수를 놓았다. 명동찬 남자팀 감독은 『잠실올림픽경기장이 북한의 5ㆍ1경기장보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잔디상태가 아주 좋고 경기장이 아담해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장에는 한국 여자 대표팀 선수들이 마중나와 주경기장 2층에서부터 그라운드를 밟을 때까지 북측 선수들과 한 사람씩 짝을 지어 계단을 내려왔다. ○…이에 앞서 김유순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ㆍ김형진 부위원장 등 임원 일행은 선수단 도착에 앞서 3시25분쯤 경기장에 도착해 이병규 관리소장의 안내로 경기장ㆍ선수실 등을 둘러본 뒤 외빈실에서 30여분 동안 휴식하며 환담. 김유순 위원장은 색깔로 구분한 잠실경기장이 대단히 아름답다며 『남북이 하루빨리 통일이 돼 평양의 5ㆍ1경기장과 서울의 잠실 주경기장보다 더 큰 50만 수용의 경기장을 지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이날 경기장에는 지난 평양경기 때 부친을 상봉한 이회택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나와 북한 선수 및 임원들을 반겼다. ▷만찬◁ ○…김우중 대한축구협회장 주최로 이날 밤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환영만찬회에는 정동성 체육부 장관ㆍ김유순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 등 남북 고위인사와 남북 남녀선수,그리고 초청인사 등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차분하면서도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2시간10분 동안 진행됐다. 김우중 회장은 이날 『이번 통일축구 서울경기로 민족통일의 기반이 조성되길 바란다』며 건배를 제의하는 것으로 환영 인사말을 대신했고 김유순 위원장은 『남북통일축구경기가 통일운동사에 아로 새겨질 것으로 확신한다』며 역시 건배를 유도. 주빈석에는 정동성 장관ㆍ김유순 위원장ㆍ김우중 회장ㆍ김형진 북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과 축구원로 김화집옹 등 10명이 앉았으며 나머지 27개 테이블에도 남북 선수ㆍ초청인사들이 8∼10명씩 섞여 앉아 평양경기와 서울의 첫인상 등을 화제로 삼아 얘기꽃을 피웠다. 이날 저녁식사 메뉴로는 거위간ㆍ모듬생선회와 안심스테이크 등 8가지 코스인 양식으로 준비됐는데 북측 참석자들 대부분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호텔측은 지난번 총리회담 때 북측 인사들이 즐기던 곡주인 「문배주」를 포도주와 함께 내놓았다. 식사를 마친 북한 선수 및 임원들은 만찬장 출입구 맞은편 무대에서 펼쳐진 테너 엄정행ㆍ소프라노 백남옥 씨의 가곡공연을 관람했는데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남북 선수 섞여 앉아 공연 마지막에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합창되자 참석자 모두가 일어서 따라 부르기도. 김우중 회장은 북한 김유순 위원장에게 TV와 비디오 세트를 선물했으며 김 위원장은 미리 준비해온 인삼불로주와 대평곡주를 김 회장에게 전달했다. ○…북한 기자들중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인 리충국 중앙통신논설위원은 만찬이 끝난 뒤 『양식으로 차린 음식이 별로 입에 맞지 않았다』고 말하고 『호텔측에서는 정성을 다한 것 같으나 한식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하오 9시30분쯤 만찬장인 힐튼호텔을 출발한 북한 선수단은 10시10분 숙소인 워키힐호텔에 도착,때마침 본관 지하1층 가야금홀에서 쇼를 관람하고 나오던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북한 선수들은 시민들이 『반갑습니다』라며 박수로 맞이하자 여유있는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반갑습니다』라고 답례. 북한 선수들은 이어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 서울에서의 첫 잠자리에 들었다.
  • 잠롱시장식 청백리/송정숙 본사 논설위원(서울칼럼)

    잠롱 방콕시장이 인기배우처럼 서울을 다녀갔다. 그가 강연을 하러 갔던 대학에서는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대학생들이 「잠롱!」을 연호했고,사인공세를 펴는 바람에 진로가 막히는 지경도 이뤘다고 한다. 잠깐 기회를 얻어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인상은,여분의 살이 전혀없는 몸매와 보리빛 살갗,낡은 작업복의 모습에서 수행중인 수도사같은 것이었다. 미담을 많이많이 만들며 성자가 되는 꿈을 꾸는 다소 기인같은 인상도 품고 있었다. 범인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은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그러나 그는 현직 시장이다. 8백만 시민이 살고 있는 거대한 현대도시의 시장이다. 그는 서울에 초청되어 와서 한국공직자들의 부패상에 대해 준열한 충고도 했다고 한다. 그의 청렴정도라면 그럴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현직 시장이다. 자기도 공직자인 남의나라 시장에게서 그런 충고를 듣는 일은 서글프다. 서울에서 열린 어느 환영잔치에서 그가 「서울시장」으로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농담을 하자 청중들이우뢰같은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아마도 동감」을 나타낸 것이었으리라고 풀이한 문필가도 있었다. 문득,만약에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 민선시장을 뽑게 되었을 때 「잠롱시장」을 흉내내어 위선적 행각를 하는 「가짜 잠롱」이 출현한다면 그걸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당선되어 「잠롱식」 청백사로 인기만을 얻고 시정에는 별 기여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잠롱 방콕시장이 무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에 관해서는 「미담만을 한없이 만들고 다니는 사람」의 행적만이 알려졌으므로,그가 얼마큼 능력있게 근대도시행정을 수행해 나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잠롱시장의 소문을 처음 외신으로 접했을때,그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행적은 참으로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그런 잠롱시장을 통해서 연상되는 방콕시는 가난은 하지만 깨끗하고 절도있게 살 수 있는 평화롭고 소박한 도시같았다. 사람의 연상작용이란,때로 터무니없이 무책임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것 같다. 지난 여름,한 모임이 그곳에서 열려 처음으로 방콕에 가 보았다. 그 도시에서 1주일쯤 있는 동안,단 한번도 그곳이 잠롱을 시장으로 둔 도시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던 사실을,이번의 「잠롱시장 서울나들이」를 통해서야 상기했다. 「잠롱시장의 방콕」과 「직접 가본 방콕」은 전혀 별개의 도시처럼 무의식속에 새겨져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매연이 세계에서 몇째 안가도록 심각하고,세계의 차종이란 차종은 다 수입되어 굴러다니는 듯한 도심의 쳇증은,아무리 겸손하게 말해도 서울보다 나을 것이 없다. 무질서한 야시장에 가짜 외제상품이,우리 이태원상가는 『저만큼 가라!』고 할만큼 쌓여있다. 도심 한복판에 적나라한 그림과 실물이 호객을 하는 유흥가가 즐비한데 안에는 옛날 대만에 있던 특수구역과 방불한 연기와 무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실제의 방콕이었다. 일본의 백화점들이 진출하여 금싸라기 같은 요지에 엄청난 쇼핑센터를 지어놓고 성업중이며 온갖 국제상표들이 제휴하여 진출해 있다. 기술이전 문제같은 것으로 까다롭게 따지지 않고 싼 노임만을 팔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투자자가 아주 유리해한다고 한다. 우리처럼 부품수가 「10」외 하이테크 산업사회를 지향하여,깨인 머리로 민주화를 지향하는,만만치않고 따지기 좋아하는 시민수준도 아닌 것 같았다. 유니세프 보고에서 『15세 미만 소녀의 매춘이 가장 심각한 도시』로 지목되고 있는 이 도시가,11년째 부부생활도 하지 않고,월급의 대부분을 청소부와 가난한 사람에게 대주며 감동적인 금욕생활을 하고 있는 잠롱시장에게 해결을 고대하고 있는 현실문제는 너무도 많아 보인다. 우리도 부정부패에는 이제 넌덜머리가 나는게 사실이다. 민선이든 임명이든,우리가 원하는 서울시장이 부정하고 부패한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시장이 수도사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기왕이면 그렇게 금욕적이고 청결하게 살기를 바라기는 하지만,그것이 도저히 어려울 터인즉 봐주기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다. 공직자의 역할이 성자같다고 해서 「좋은 공직자」일 것이라는 기대는 온당하지가 않다는 뜻이다. 서울시장쯤 되는 공직자라면 국제적 교양과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직위다. 걸맞는 사택과 어울리는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시민의 자부심과도 관계가 있다. 하루 한끼만 먹으면서 근검절약하여 일부 가난한 이를 돕는 일보다는 조찬회ㆍ만찬회 등의 외교까지 충분히 하여 시의 위상도 높이고,품위에 적절한 환경에서 좋은 정책을 구상하여 많은 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해주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합당한 대우와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좋은 아버지,유능한 남편,멋있는 가장이 될 수 있어야 상식적이고 양식있는 시민생활도 파악하고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개발 때문에 생업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이 가슴아파서 도심조성 자체를 유보하는 성직자같은 시장 보다는 최선의 대안을 찾아내어 주변서민대책도 세우고 개발계획도 관철할 수 있는 유능한 공직자가,보다 많은 시민을 위할 수 있다. 더욱이나 다가올 지방자치시대에 표와 연결된 인기를 조성하기에 더 많은 공을 들이는,미담행정만 눈독들이는 공직자가 생긴다면 그건 참 곤란한 일일 것 같다. 잠롱시장은 방콕시장이다. 그를 빗대어 서릿발같이 우리 공직자를 질타하는 인사들이 활자매체에도 전파매체에도 수두룩 했었다. 「내 탓이오」 대신 남의 탓에만 서슬이 퍼런듯한 그런 힐책 때문에 건강하게 창의적으로 자기 직분에 임하고 있는 유능한 공직자들까지 참담하게 기운 빠지는 서글픔을 맛보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뜻있고 성실하며 유능한 숨은 공직자가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잠롱시장이 배우러왔다는 우리의 『…근면성과 인내심 그리고 단결력으로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로 부상한 한국』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잠롱 방콕시장은 분명히 훌륭하다. 그러나 부정부패 안하고 유능한 공직자가 우리에게는 더욱 소중한 사람들이다.
  • 김일성,집무실 문앞서 강총리 마중/우리대표단,평양 주석궁 찾던 날

    ◎우리측에 깍듯이 경어… 줄곧 밝은 표정/총리회담 호칭… 통일노력의 성과 바라/이례적 서구적 춤 공연… “남측 대표에 대한 성의” 북한방문 3일째인 18일 강영훈 국무총리 등 우리측 대표단은 상오에는 비공개회의를 가진 데 이어 하오에는 평양의 김일성 주석궁(금수산 의사당)에서 김 주석과 면담하는 등 3박4일의 일정 가운데 가장 극적인 하루를 보냈다. 우리측 대표단은 이날 저녁에는 양형섭 최고회의 의장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으며 우리 기자단은 비공개회의가 열리고 있는 동안 평야시내 노동신문을 방문,신문제작 과정을 둘러보았다. ▷김일성 주석 면담◁ ○…18일 하오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의 강영훈 국무총리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예방,20분간 요담했다. 강 총리는 이날 하오 3시 정각 평양시내 금수산 의사당 현관에 도착,주석궁측의 안내를 받아 김 주석 집무실로 향했다. 강 총리가 주석집무실 입구에서 20여m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김 주석이 강 총리를 맞았다. 김 주석과 강 총리는 반갑게 악수를교환하면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집무실 안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집무실 복판에 장방형 탁자가 마련 돼 있었고 동서로 마주보는 자리에는 강 총리와 북한 연형묵 총리가 앉았으며 김 주석은 남북 양총리의 한 가운데 좌정. 이 자리에서 강 총리가 먼저 『주석 각하,제가 서울을 떠날 때 노태우 대통령께서 김 주석에게 정중한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씀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김 주석은 『감사합니다. 노 대통령께서 건강하시는지요. 서울에 가시면 「사랑하시는」 나의 인사를 전해주시오』라고 응답. 이어 강 총리가 『제가 서울을 떠날 때 노 대통령께서 여러 가지 말씀이 계셨습니다만 김 주석께서 남북 관계개선을 위해 총리회담을 개최하게 한 데 대해 인사를 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김 주석은 『피차 마찬가지지요. 귀측의 호응으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데 대해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김 주석과 강 총리와의 단독면담은 사진촬영을 위해 약 3분간 공개됐는데 김 주석이 『강 총리 고향이 북쪽이라면서요』라고 말하자 강 총리는 『네 그렇습니다. 45년 전에 평양을 거쳐 서울로 갔습니다. 연 총리를 두번째 만나니까 친근하게 여겨집니다』라고 답변. 이어 김 주석은 『이번 회담에서 귀측이 우리측 제의에 호응해 나섰기 때문에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양에서 양측이 여러 가지 진지한 얘기를 서로 나누어 결실을 맺을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니 앞으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희망합니다』라며 밝은 표정을 짓기도. ○…강 총리를 제외한 우리측 회담대표 6명과 수행원 3명 등 9명은 이날 하오 3시10분쯤 주석궁 현관에 도착,10분간 집무실 옆 대기실에 머문 다음 3시21분쯤 집무실에서 김 주석과 면담. 김 주석은 강 총리가 우리측 대표단을 소개하자 홍성철 통일원장관,정호근 합참본부장 순으로 일일이 악수를 하며 반갑게 맞았다. 김 주석은 우리측 회담대표 및 수행원과 인사를 끝낸 다음 『자 모두를 앉읍시다』라며 직사각형 긴탁자 북쪽 중앙에 좌정했으며 같은 쪽 좌우에는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과 안병수 조평통서기국장 등 북한측 회담 대표 및 수행원이 착석. 김 주석은 양측 대표단이 모두 참석하자 『저는 이번에 총리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온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조국통일을 위해 많이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이에 대해 강 총리는 『우리 회담대표를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만나게 해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만 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지 못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응답. 김 주석은 이어 『고위급회담이 열린 자체가 우리민족의 전망을 밝게 내다보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80년대부터 10년 만에 열리게 된 이번 고위급회담은 우리 민족의 앞날에 밝은 전망을 갖게 해줘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문건 채택은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 서울에서 열리는 총리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김 주석과 우리 대표단과의 면담은 하오 3시21분부터 30분까지 10분간 진행됐는데 김 주석은 우리 대표단에게 최고의경어를 사용하면서 시종 밝은 표정으로 환대해 주목. 김 주석은 우리 대표단과의 면담을 끝낸 다음 3시30분부터 35분까지 5분간 주석궁 중앙홀에서 남북 양측 대표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으며 촬영이 끝난 다음 우리 대표단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작별 인사. 우리측 대표단과의 면담에 앞서 강 총리는 이날 하오 3시부터 김종휘 대표와 연형묵 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20분간 김 주석과 개별면담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는 공개면담 때보다 더 깊숙한 얘기가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주석은 면담중 「고위급회담」이라는 표현 대신 「총리회담」이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 ○…주석궁 현관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됐고 중앙통로에는 붉은 카펫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현관에서 중앙홀에 이르는 천장에는 대형 샹들리에가 중앙 4개 양쪽 5개씩 모두 14개가 달려있는 등 은은하면서도 호화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앙홀 정면벽에는 (기념촬영 한 곳) 백두산 삼지연의 봄 풍경을 그린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고 중앙홀 양 옆에는 오엽송 분재가 놓여있었다. ▷18일 비공개회담◁ ○…18일 상오 10시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2차 비공개회담에 앞서 강영훈 총리와 북측 연형묵 총리는 전날 있었던 평양시 인민위원장 주최옥류관 만찬에서 맛본 평양냉면ㆍ날씨ㆍ첫날회담 등을 화제로 15분 동안 환담. 양측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총리는 전날보다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눴으나 각 분야에서 통일문제를 놓고 「차근차근」 추진해 나가자는 우리측 입장과 「속도」를 강조하는 북측 입장이 엇갈려 가벼운 신경전. ▲연=어젯밤에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강=아주 참 조용하고 방온도도 꼭맞게 조절해줘서 잘 잤습니다. 평양가면 평양냉면 한번 꼭 먹어봐야지 했는데 역시 평양냉면 맛은 다릅니다. 잘 먹었습니다. ▲연=어제 학생소년궁전에서 어린애가 그림그리는 것 보셨지죠. ▲강=천재적이더군요. 4살짜리가 그리는 데 두살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젖먹을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는 말이지요. 옆의 여덟살난 여자아이도 명필이더군요. ▲연=옛날부터 한민족이 본래똑똑하지요. 어제 1차회담을 했는데 서울쪽에서 어떻게 보도하고 있습니까. ▲강=잘 진행돼 간다고 보도합니다. 한술에 배부르겠느냐는 얘기가 있듯이 갑자기 다 해결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과 시각을 확실히 알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가 뚜렷하다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부터 잘 해갑시다. ▲연=잘 합시다. 평양시에선 어떤 평이 있느냐 하면 말입니다. 북남 고위급회담이라는 것이 「고위급」이 달려서 회담수준도 높을줄 알았는데 수준이 대단히 낮다고 합니다. ▲강=교육을 어떻게 그렇게 시켰어요(웃음). 숙소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대단히 실망했다고 얘기하더군요. ▷양형섭 의장 주최 만찬◁ 남북고위급회담 우리측 대표단 일행은 이날 하오 8시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천리마거리 목란장에서 주최한 만찬에 참석. 양 의장은 만찬사에서 『구두쟁이 셋이면 제갈량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며 『민족 앞에 책임진 정치인으로 남조선의 국회의원들과 손잡고 민족재생의 길을 함께 걸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피력. 강 총리는 답사에서 『통일을 이룩한 동ㆍ서독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 축적이야말로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이 가야 할 길』이라고 지적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양보하는 대화의 숨결 속에 증오와 대결의식은 봄눈 녹듯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 강 총리 등 우리측 대표단 일행은 만찬이 끝난 뒤 경음악과 남성독창ㆍ3중창 등 공연을 관람했는데 「4계절의 춤」이라는 제목의 무용은 얇고 짧은 의상에 서구적인 춤이어서 이채. 북측의 한 참석자는 『우리는 본래 민족적인 무용을 좋아하는데 이같은 무용을 공연한 것은 남측 대표에 대한 북측의 성의』라고. 강 총리가 공연히 끝난 뒤 무대에 올라가 악단과 가수ㆍ무용수 등 출연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자 참석자 전원이 기립박수. 강 총리 일행은 만찬에 앞서 이날 하오 평양 중구역에 위치한 인민대학습당을 약 45분간 관람했으며 기자단은 비공개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신문을 방문한 데 이어 하오에는 김일성경기장에서 1시간10분 동안 학생 5만명이 연출하는 「일심단결」이란 집단체조를 관람. ◎“합의 없어도 크게 진전” 남/“「불가침」 타결 못봐 유감” 북 ▷대변인 회견◁ ○…18일 남북고위급 이틀째 비공개회담에 대한 남북간의 시각은 긍정과 부정이 다소 엇갈리는 듯한 분위기로 양측 대변인의 별도 회견을 통해 표출. 똑같은 장소(인민문화궁전 1층 회의실)에서 먼저 회견을 가진 북측의 안병수 대변인은 『우리는 불가침선언을 제기하면서 오늘 회담에서 매우 쉽게 합의될 것으로 확신했다』며 기본적으로 남북간에 큰 이견이 없는 점 등 그 근거를 예시. 안 대변인은 『남측에서는 밟아야 할 절차가 많아 국무총리라 해서 당장 합의를 해줄 수는 없다고 하길래 그러면 가조인이라도 하자고 했으나 불가피하게 합의를 보지 못했다』며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피력. 이어 우리측의 임동원 대변인은 서두에 『과거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담이 진행됐다』고 강조한 뒤 『합의선언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회담이 아니라 내용면에서 많은 접근을 보아 대단한 진전을 이룬 회담』이라고 평가. 임 대변인은 회담내용을 조목 조목 설명한 뒤 양측 안의 내용이 유사한 데도 불가침선언이라는 명칭상의 문제로 합의를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헌법에 불가침문제는 국회의 비준을 거치도록 돼 있는 제도상 절차 때문』이라고 설명. 임 대변인은 『강 총리가 회담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총리라 해도 권한 밖의 일을 하는 등 법을 안 지키면 감옥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북측 제도와는 다르니 속도전도 좋으나 절차를 밟도록 하자」고 농담을 곁들여 우리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고 소개.
  • 재계원로 이원순옹 1백회 생일

    ◎초창기 한국경제계 이끈 “영원한 경제인”/지금도 신문경제기사 빼놓지 않고 읽어 경제계 원로인 해사 이원순옹이 8일 만으로 1백회 생일을 맞았다. 조선조 고종 27년(1890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임정요인 ㆍKOC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지난 1세기동안 다채로운 경력을 겪은 원로이지만 재계에서는 그를 「영원한 경제인」으로 부른다. 경영일선에서는 비록 물러났지만 이옹은 현재에도 한국해광개발㈜의 사장 및 전경련 고문ㆍ한미경제협회 고문등을 맡고 있다.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후 대한증권을 설립하면서 경제계에 투신했던 이옹은 초창기 한국경제계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대한상의ㆍ전경련등 경제단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옹은 자신의 장수비결로 『육체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도만을 걷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사도를 걸으면 일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신건강을 해쳐 결국 장수할 수 없다』는 지론이다. 이옹은 이밖에 될 수 있는대로 걷고,서서 일하며,쓸데 없이 앉거나 눕지 않는다는 생활수칙이 육체건강을 유지하게 만든 듯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옹은 지난해까지도 전경련 회장단 간친회에 자주 참석했고 전경련에서 마련한 축수연에서 후배 경제인들의 축하를 받았다. 이옹은 자신보다 13년연하인 김용완 경방명예회장(87)이 거동에 불편해 하는 것을 보면 『젊은 사람이 기력이 부족하다』고 놀리는가 하면 70대 중반인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75)에게도 『못보던 새에 많이 컸다』는등 농담을 즐겼다는 것. 이런 그가 올해는 전경련측이 준비한 생일축하연을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그러나 이옹의 건강이 그리 악화된 것은 아니라는게 주위의 말이다. 최근에는 북경아시안게임 중계방송을 밤늦도록 시청했으며 신문도 재계기사는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고.
  • 외언내언

    통일독일을 경축하는 1백만 독일인들의 함성과 환호. 베를린시 의사당앞 광장의 감격이 화면으로,활자로 전해져 온다. 통일독일을 두고는 피해당사국들 사이에 우려의 시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민족으로서는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다. ◆『…헨델,라이프니츠,괴테,비스마르크…,그들은 독일류의 강력한 전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독일은 온갖 대립 사이를 의념없이 살아 나오고 유한 강을 터득한 가운데 신념이나 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그를 서로 접합ㆍ이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를 보전하고 있다.…』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884)에서 하고 있는 말. 오늘의 동서독일 하나됨도 니체의 이런 지적에 연유함인가. ◆지금부터 5년전쯤,헬무트 콜 수상을 실랄하게 꼬집는 「농담집」 4권이 서독을 휩쓸었다. 동서독이 대치한 상황 아래서 서독의 방첩책임자 티트게가 동독으로 망명하고 심지어 총리의 여비서 부부까지 망명하자 서독국민들은 울화가 치밀었던 것. 「농담집」은 그 분풀이를 하면서 콜 총리를 완전히 「바보 천치」로 묘사한다.그것을 읽은 콜 총리는 『너무 재미있어 나도 웃었다』는 여유. 그럴 수 있는 체제 속의 대기였기에 오늘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 아닐까. ◆통일이 되었다 해도 안팎의 시련은 지금부터라 하겠다. 중요한 것은 「거인」이 된 독일이 세계평화에의 길에 어떻게 이바지해 가느냐 하는 점. 특히 주변 피해 당사국들은 거기 주목한다. 그 점에서 독일인의 심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비판했던 독일인 하이네의 경고도 재음미해야 겠다.­『프랑스의 애국주의가 전문명국을 포용하는 데 비해 독일의 애정의 실체는 이렇다. 마음은 점점 좁아지고 냉기 속의 가죽과 같이 수축하며 외국 것을 증오하면서 세계시민도 유럽인도 아닌 편협한 독일인이기를 원할 뿐 이다』(「로망파」제1장). ◆누가 뭐라해도 오늘의 결과는 게르만족의 예지와 애국애족정신에 기인하는 것. 우리의 남과북­예지도 애국애족정신도 없다 할 것인가.
  • 오늘의 「중동 풍속도」(강석진특파원 페만현지보고:하)

    ◎“직업의식 희박”… 항공표 사는데 4시간/고객 맞고도 장시간 전화사담 일쑤/혈연 앞세워 외국인엔 몹시 배타적/일부사처제 다반사… 여성의 사회활동 길 막혀 수십만명의 한국인이 아랍에서 오랜 기간동안 일해왔지만 아랍은 아직도 우리에게 낯선 땅이다. 공관원ㆍ기업체 직원ㆍ기술자,심지어는 그곳에 체재하면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교포들조차 아랍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난 한 교포는 체류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아랍어 배울 생각이 안 든다고 실토할 정도다. 이처럼 아랍지역이 한국인에게 아직도 낯선 까닭은 아랍사회의 특수성,제3국인이 많이 들어와 웬만하면 영어가 통하고 아랍인조차 상거래에는 영어를 쓴다는 점,영주권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배타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랍지역은 사회의 개방성,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종교적 관용성 등에 있어 국가별로 꽤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이슬람공동체라고 할 수 있으며 비슷한 사회문화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과 아랍인◁ 아랍에 처음발을 디딘 한국인들은 한나절 또는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의 일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는 당황하게 된다. 제다소재 한국무역센터의 김재효관장은 약 2년전 부임시 하루에 3∼4건의 상담을 머릿속에 그렸었지만 1개월여만에 포기하고 이제는 한나절 1건으로 계획을 늦춰잡고 있다고 말했다. 아랍지역에서는 관공서ㆍ은행관계업무는 상오중에 처리해야 한다. 주한 사우디 대사관이 제공하는 자료는 관공서가 상오 7시30분부터 하오 2시30분까지,은행은 상오 8시30분부터 낮 12시까지 집무,개점한다고 안내하고 있지만 통상 상오 8시30분경부터 하오 1시 사이에만 업무처리가 가능하다. 하오에는 사업체와 상점들만이 4시경부터 8시까지 다시 문을 연다. 근무시간뿐 아니라 아랍인들의 근무태도도 한국인과는 사뭇 다르다. 고객이나,약속을 하고 찾아온 손님이 앞에 있어도 그들은 동료직원,걸려오는 전화에 농담까지 해가며 장시간 대화하기 일쑤다. 사우디 아메리칸 뱅크에서 1백달러를 사우디 리얄로 환전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고,제다에서 암만행비행기표를 구입하는데도 중간의 기도시간까지 합쳐 4시간이나 걸려야 했다. 「중국인의 손,유럽인의 두뇌,아랍인의 혀」라는 말이 있듯이 아랍인들은 말하기를 즐기며 전화는 매우 오래 쓴다. 다란의 사우디 공보처 연락사무소에선 ID카드를 신청할 때 공군장교라는 담당관이 접수도중 부인과 30분 가까이 전화로 온갖 사담을 나누고 나서야 서류를 접수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매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친절하지만 일의 추진속도는 한국에 비해서는 훨씬 느렸다. 이런 점은 적이 코앞에 들이닥쳐 있는 군기지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의 표정에서 크게 긴장된 빛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여성과 가족◁ 리야드공항에서 만난 한 아랍인은 손에 비행기표를 한 움큼 쥐고 있었다. 보딩 패스를 받는 시간이 꽤 걸려 주위를 둘러보니 4명의 부인과 아이들이 동행이었다. 요르단에서 만난 팔레스타인인 함지씨도 부인이 둘 있는데 지금 애인 1명을 사귀고 있어 곧 3명이 될 것이라고 자랑이다. 아랍에서 1부4처까지 허용되는 것을 신기하게 볼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전통이다. 사우디에서는 혼자 길을 다니는 여성을 보기조차 어렵다. 시장을 다녀오거나 이웃집에 다니는 것도 남편의 동행이 필요하다. 사우디에서 일하는 심준수씨는 『사우디는 비행기 스튜어드,은행 창구직원 등 큰일ㆍ작은일 몽땅 남자들만 하니 인력이 모자라서 군대 양성조차 힘들어 보인다(실제로 외국인 용병이 꽤 있다).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적절한 통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 인디애나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제다의 킹 압둘아지즈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와디 카블리교수는 『인력이 모자라면 돈도 주고 기술도입하듯이 돈 주고 노동력을 수입하면 되지,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는 데는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고 완강한 전통고수의 입장을 보였다. 그는 여자가 집밖으로 나가면 『베이비 시터ㆍ정원사ㆍ요리사가 추가로 필요하게 돼 비용이 더 들고 사회적 전통파괴라는 비용도 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회생활◁ 아랍사회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이중성이다. 이슬람 공동체(Umma)의 규정도 이슬람 형제에 대한 내부규율과 외부규율이 구분된다. 내부적으로는 사회를 계급갈등과 이익충돌이 일어나는 게젤샤프트로 여기지 않고 가족(One Family)관계를 유추해서 인식하는 편이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에 체류하는 한국인을 비롯,제3국인의 경우 『규칙은 모두 지키도록 만들고도 외국인 차별이 심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심지어 수단 소말리아 예멘 등 아랍형제들조차 아랍사회의 배타적 성격에 불만스런 표정을 짓곤 한다. 이들의 이중성은 개인적 생활과 대인관계에서도 곧잘 나타난다. 술과 오락을 멀리 한다지만 일부 사우디인들은 바레인등지에 나가 술을 마시거나 쿠웨이트 왕족들이 나라가 망할 당시 서유럽의 카지노에서 도박을 즐긴 것도 이중성의 편린. 아랍인들은 처음에는 친절하면서도 예의를 잘 지키지만 친하게 되면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곧잘 내비춘다 아랍인들의 평소 근무는 느슨하고 산업사회의 근로윤리는 찾아 보기 어렵지만 돈 계산은 철저하며 상거래는 매우 존중되는 분위기이다. 사우디의 국호(Kingdom ofSaudi Arabiaㆍ사우디 부족소유 왕국)와 요르단의 국호(Hashemite Kingdom of Jordanㆍ하쉼부족의 요르단국가)에서 보듯이 아직도 아랍사회는 혈연중심의 부족국가적 전통이 강한 곳이다. 이들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느 것을 흡수해야 하는지,어느 것을 배척할 것인지 정리가 안 된 듯 보였다. 이번 페만위기 이후 외국군의 대거 주둔을 계기로 이들 사회가 어떻게 문화적 변용을 이루어나갈지,그리고 그것이 중동 사회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끄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쿠웨이트 망명정부 “건재”(세계의 사회면)

    ◎사우디호텔내 국왕ㆍ각료 총집결/“빼앗긴 내나라 되찾자” 절치부심 쿠웨이트 망명정부가 자리잡고 있는 한 호텔의 정문 안쪽에는 국가원수가 지나갈때 하시라도 펼 수 있도록 준비된 붉은 양탄자가 말려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고산휴양도시 타이프 인근에 위치한 이 호텔은 지난달 2일 이라크 침공 이후 망명한 자비르 알 아메드 알사바 쿠웨이트국왕과 내각의 본부이다. 호텔방문객들은 쿠웨이트에서라면 통화조차 힘들었을 각료들을 지금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언론관계 연락관으로 일하고 있는 한 외교관은 장관인터뷰를 요청한 기자에게 『3장관을 한꺼번에 단독 인터뷰할 겁니까?』라고 묻더니 이내 보건,주택,시정담당 장관들을 15분간의 인터뷰에 응하도록 로비로 안내했다. 쿠웨이트망명정부의 활동은 대부분 국왕의 객실스위트와 같은 층에 있는 회의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회의실밖의 게시판에는 또 억류중인 어린이를 껴안고 있는 사담 후세인의 사진 복사물과 역시 비슷한 자세로 어린이를 안고 있는 히틀러의 사진을 나란히 붙여 놓고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사진설명을 달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 오래 머무르기를 희망하는 쿠웨이트인들은 아무도 없다. 알 무타와 장관이나 마찬가지로 다른 각료들도 이같은 상황이 오래 가지않기를 모두가 원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호텔 전체를 감돌고 있다. 「다음번에는 쿠웨이트에서」라는 말로 끝낸 점심때의 대화가 저녁에도 다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쿠웨이트 장관들은 이제 그들의 역경을 소재로 농담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고질적인 호텔의 객실부족 이야기를 꺼내니까 다른 각료는 『그 문제라면 주택장관에게 맡기시오』라고 대꾸했다.
  • 「추석 고향방문단 교환」 촉구에 “긍정적”

    ◎강총리 정연한 논리에 북측 당황/롯데월드 만찬 3김씨 참석“눈길”/연총리 마지막밤 미군 철수등 정치공세도 ▷국회의장 주최만찬◁ ○…북한 대표단 및 수행원ㆍ기자단은 이날 하오 7시30분 서울체류 일정중 공식행사로는 마지막으로 잠실 롯데월드호텔 3층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린 박준규 국회의장 주최 만찬에 참석. 이날 만찬에는 우리측에서 강총리를 비롯,민자당의 김영삼대표ㆍ김종필 최고위원ㆍ김대중 평민당총재ㆍ이기택 민주당총재ㆍ이승윤 부총리 등 거물급 인사가 다수 참석. 3김씨가 함께 식사하기는 지난해 12월15일 청와대회담 이래 처음인데 정치얘기보다는 주로 건강등을 화제로 잠시 환담을 교환. 연총리등 북측 일행은 이날 칵테일 장소에서 김 평민총재와 구속중인 문익환목사의 친제인 평민당의 문동환의원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시. ○북대표 일일이 소개 연총리는 칵테일장에 들어선후 김민자당 대표와는 간단한 악수와 함께 인사를 나눴으나 김대중 총재에게는 북측 대표들을 일일이 소개하는등 신경을 쓰는 모습. 연총리는 『김선생님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고생많으셨지요』라면서 『김일성주석이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으며 곧 초청을 할 것입니다』고 인사. 연총리는 문동환의원과도 인사를 나누고 그냥 지나쳤는데 박준규 국회의장이 『문의원은 문익환목사의 친동생』이라고 소개하자 다시 문의원에게 다가가 『형님이 하루빨리 나오게 되시길 바란다』고 인사. 이에 문의원은 『형님께서 자신이 나오는 것보다 남북대화가 잘되기를 더 걱정하더라』고 전언. 북한 기자들도 김 평민총재에게 집중 질문공세를 폈으며 일부 기자는 『북조선에서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으며 존경하고 있다』고 칭송하기도. 김 평민총재는 한 로동신문기자가 『북조선의 통일정책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묻자 『나는 71년 이래 평화공존ㆍ교류ㆍ통일 등 3단계 통일안을 제시해 왔으나 이는 북한측 안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 김 평민총재는 또 『남북 단일의석 유엔 동시가입안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남북간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면 정당간 회담도 이뤄질 수 있겠으나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다』면서 『앞으로 분위기가 조성되면 평양을 방문하고 싶다』고 피력. 이어 김 민자대표가 『김주석은 건강하시지요』라고 물었고 연총리는 『연세는 높지만 기력이 왕성해서 어제도 노동자들을 방문해 담화를 나누었다』고 소개. 김대표는 또 『김주석이 나를 초청해 주었는데 기회를 봐서 한번 가겠다』고 말하자 연총리는 『꼭 한번 와달라. 열렬히 환영하겠다』고 피력했고 김대표는 『모스크바에서 허담 위원장을 만났는데 안부 좀 전해달라』고 당부. 이어 연총리 등은 만찬테이블로 자리를 옮겼으며 김 평민총재가 『회담결과에 만족하느냐』고 묻자 연총리는 『만족이란 것은 상대적인데 처음 온 것이니 시간이 가봐야 알겠다』고 모호한 대답. ○…박국회의장은 이날 만찬사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이며 우리 모두는 형제』라고 전제,『그런 원칙위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좀 쉽게 풀어나가야 하겠으며 엉클어진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참을성을 갖자』고 역설. 박의장은 『지난 여름 속초까지 피서를 갔으나 덥기는 마찬가지여서 해금강을 바라보고 개마고원을 생각하면서 이 여름에 이 지구위에 제가 편안히 그리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은 그곳 뿐이란 생각도 했다』면서 『차디찬 겨울에는 북측 대표단 여러분도 제주도생각이 절로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라고 남북간 자유왕래를 희망. ○“통일장정 위해 건배” 박의장은 이어 『반딧불의 조그마한 빛이라도 우리 모두 정성껏 모아서 해와 달과 같이 통일의 대도를 환하게 비추어 보자』고 말한뒤 『통일장정에 앞장서 걸어가시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건승을 기원하는 건배를 들자』고 제의. 연총리는 이날 만찬이 서울에서의 마지막 공식행사인 점을 의식한 듯 답사를 마치 귀환성명처럼 이어나갔으며 외국군대ㆍ핵무기철수ㆍ방북인사가족을 못만나 유감이라는 등 껄끄러운 대목도 서슴없이 거론. ▷2차회담◁ ○…인터콘티넨탈 호텔 2층 그랜드 셀라돈볼룸에서 6일 상오 10시 5분부터 비공개로 2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2일째 회담에서는 전날 회담에서 우리측 강영훈 총리가 먼저 기조연설을 했던 점을 감안,연총리가 먼저 북측 주장을 밝힌뒤 이어 강총리가 우리 입장을 피력,토론을 벌이는 순서로 진행. ○조목조목 주장반박 연총리는 ▲남북한 유엔 단일의석 가입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임수경씨등 방북인사 석방등을 거듭 우리측에 촉구했으나 강총리가 8개항의 「남북 관계개선 기본합의서」를 제안한데 이어 북측의 3개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자 상당히 당황해했다고 우리측 회담배석자가 전언. 이 배석자는 『강총리가 시종 침착하게 연총리를 압도했으며 회의장 분위기를 주도,북한측 대표단중 연총리이외 다른 사람에게 발언할 분위기도 만들어주지 않았다』고 소개. 강총리는 연총리가 『유엔에 단일의석으로 가입하자』는 기존입장을 되풀이 하자 『단일의석 유엔가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밝히라』고 반박. 이에 당황한 연총리는 『그것은 실무선에서 검토할 문제』라고 둘러댔으나 이후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고 3∼4차례에 걸쳐 「강총리선생」이라고 처음으로 공식회담에서 우리측에 「총리」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 ○처음으로 “총리” 호칭 강총리는 연총리가 당황해하는 듯하자 그 여세를 몰아 『민족대교류의 일환으로 이번 추석부터라도 남북 고향방문단교환을 실현시키자』고 제의했으며 연총리는 『그것은 적십자회담에서 논의하면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듯한 입장을 피력. 이때 북측 대표단 대변인인 안병수 조평통서기국장과 배석한 임춘길 총리책임보좌관 등이 황급히 쪽지를 넣어 무엇인가를 연총리에 전달했는데 우리측 관계자는 『고향방문단 교환은 남측 주장이니 말려들지 말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고 추측. ○…2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끝난후 곧 결과발표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프레스센터에 나와있던 내외신기자 2백50여명은 발표가 예상외로 늦어지자 이의 의미를 둘러싸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들. 이날 낮 12시10분쯤 비공개회담이 끝나면서 양측은 홍성철 통일원장관과 안병수 조평통서기국장이 다시 만나 발표형식ㆍ문구ㆍ시간 등을 논의하자고 하며 헤어졌으나 북측에서 접촉연락을 해오지 않는 바람에 발표가 지연돼 일부 기자들은 점심도 거른채 계속대기. ▷북한 대표단◁ ○…남북한 고위급회담에 참석중인 북측 대표단은 서울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고 3일째를 맞는 6일에는 하루가 다르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이날 상오 열릴 비공개회담을 위한 준비에 분주한 모습들. 북측 일행은 서울에서의 첫날 밤인 지난 4일만해도 1박2일에 걸친 남행길로 여독이 풀리지 않은데다 모처럼의 서울나들이로 다소 서먹서먹한 듯 호텔방문을 굳게 닫은채 긴장을 풀지 않았으나 이튿날인 5일에 이어 6일부터는 활기찬 움직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호텔방에 투숙한 북측 일행은 첫날 자정께 대부분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튿날인 5일 밤에는 자정을 훨씬 넘어 새벽 1시까지 불을 밝힌채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 움직이는 모습이었다고. 북의 대표단 일행은 6일 상오 7시40분부터 인터콘티넨탈호텔 1층의 한식음식점 사랑방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이틀밤을 지낸 서울의 모습에 관해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북한 취재단◁ ○…입경 3일째인 6일 북한기자단 일행은 다소 피곤한 탓인지 예정시간보다 10분 늦은 상오 7시40분부터 1층 사랑방에서 개별적으로 아침식사를 시작,상오 9시가 넘어서 모두 마쳤다. 식단으로는 민물장어구이ㆍ꼬치불고기ㆍ생채ㆍ나물 등과 오과차와 과일 등의 후식이 준비. 북한기자단 가운데 한명은 식사도중 낯이 익은 남자종업원에게 『결혼을 했느냐』고 질문,『아직 총각』이라고 하자 『북한에 오면 아가씨를 중매해 신혼여행을 금강산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농담을 걸기도. 또 『남한주민 대부분이 전세방에서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전세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조르는등 우리 생활상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 한 기자는 북한에서 가지고 내려온 대형건물이 그려진 화보중 산부인과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임산부가 애낳는 공장에 오면 바퀴달린 의자에 옮겨져 한 걸음도 땅에 발을 딛지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설비를 자랑.
  • 「열사의 전선」 사우디서/강석진특파원 제2신

    ◎「페만 요충」 다란항엔 미군 북적… “전선 실감”/유전 밀집… 미군 최대의 보급기지/미군들,모래색 위장… 사막전 대비/보도진ㆍ쿠웨이트 난민으로 호텔방 동나 모래 땅 다란의 하늘에 떠 흐르는 달은 옥빛이었다. 평소같으면 페르시아만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속에 조용히 잠이 들었을 다란은 지금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북새통이다. 쿠웨이트로부터 직선거리로 3백여㎞밖에 떨어지지 않은 다란항에 기자가 도착한 것이 30일 하오 2시반. 천신만고끝에 다란 인터내셔널호텔 2층 미­사우디 합동공보실에 도착,등록을 마쳤다. 등록번호는 305. 세계각국에서 몰려든 보도진들은 이미 이곳에 들어와 있는 쿠웨이트인들과 함께 다란의 모든 호텔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합동공보실은 사방 벽에 나붙은 각종 메모와 미군의 홍보물,30일과 31일의 일정을 알리는 게시물들로 눈이 어지러웠다. 사막전에 맞게 모래색으로 물들인 위장복을 입고 팔소매를 걷어올린 흑인 여군병사가 등록용지를 내준다. 등록용지에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이름을 적는 난도 마련돼 있어 전선이 가까움을 실감케 한다. 사우디정부는 미군 옆방 사무실에서 등록을 받았다. 사우디정부의 등록용지에는 사진이 한장 필요했다. 사우디정부쪽에 등록이 돼야 ID카드가 발급되며 ID카드가 있어야 미군이 마련하는 전선시찰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끔 절차가 마련돼 있었다. 아랍말로 계급이 모가템이라는 이브라힘 셰라프 사우디 공군장교에게 ID카드용 등록용지를 내밀었다. 미남에다 웃기 좋아하는 그는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각국 기자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전화로 30분이 넘게 환담을 계속하면서도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언제 ID카드가 발급되느냐는 질문에는 『기다려 보라』는 정도의 의미로 『인샬라 자고』하고는 자리를 떠 버린다. 벽에 걸린 전선시찰 프로그램 희망자란에 보도진의 이름들이 꽉 메워져 있었다. 31일에 마련된 시찰코스는 페르시아만에 있는 미 전함 위스콘신호 시찰에 5명,미 해병 28 팍스 비아 헬로기지 시찰에 24명이 배당돼 있고 그밖에 제24보병사단 기지시찰이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다란항에 있는 기지시찰로 소요시간이 2시간 정도에 불과한 비인기코스인 까닭에 26번째로 등록할 수 있었지만 앞의 두 코스엔 신청자가 몰려 등록을 할 수 없었다. 해병기지 시찰은 등록순서를 기준으로 24명이 선정됐고 위스콘신호 방문코스는 풀기자단이 구성됐다. 이곳은 쿠웨이트 침공후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침공한다면 첫번째 공격목표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만큼 중요한 전략요충.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지가 있고 동부 유전지대와 가까우며 미군들이 공항을 이용,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고 있는 곳이어서 사태 초기에는 이라크의 공격을 우려,공항이 폐쇄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도진이 몰려들고 있고 미군당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몰려드는 보도진을 위해 합동공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는 최전방 거점도시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한국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입성」했으나 국제적으로는 3백5번째 쯤이었다. 합동공보실의 운영은 미군은 24시간 오픈체제고 사우디아라비아도 24시간 운영한다고 했지만 하오 8시가 넘으니 사우디아라비아쪽은 심부름하는 소년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다. 더 이상 취재를 기대할 것이 없어 다란시내로 나와보니 곳곳에서 미군 차량들이 눈에 띄었다. 공항에서는 미군 수송기의 이ㆍ착륙이 빈번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입국한 뒤로 처음으로 차도르를 쓰지 않은 여성들이 활보하는 것을 목격한 곳도 이곳이다. 취재진들인 이들 여기자의 스스럼 없는 행동,담배를 피우며 취재진을 상대하는 미 흑인여군을 보는 것이 신기하다. 제다에서 접촉을 시도해도 번번히 거절하던 쿠웨이트 정부관계자들도 이곳에 와서 보니 게시판에 『부디 전화를 걸어 달라』는 메모를 걸어 놓고 있었다. 기자가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 공보부에 전화를 걸면 『할말이 없으니 다란쪽에 연락하고 리야드에는 들를 필요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할 만큼 아직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접근하기에 쉽지 않은 사회임이 분명하지만 이곳 다란에서는 외국보도진들과 주둔 미군들에 묻어온 개방적 생활방식이 바야흐로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진공해 들어가는 교두보가 되고 있었다. 차도르를 쓰지 않고 담배도 피는 여성들과 접촉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인들도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거부하지는 못하고 관망하는 태도였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사태는 서방문화의 아랍 「침공」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 본사 강석진특파원,전운 드리운 사우디에 가다

    ◎“포성없는 전선… 사막이 달아오른다”/긴장ㆍ불안속 겉으론 평온… 군인들만 부산/주민들,느긋한 표정… 라디오값 2배 껑충/“다음 공격 목표 바레인” 보도에 왕족들 한때 출국소동 서울신문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페르시아만 일대의 사태진전을 취재하기 위해 국제부 강석진기자를 현지로 특파했다. 강특파원은 한국기자로는 이번 사태 이후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입국비자를 받아 바레인을 거쳐 29일 제다에 도착했다. 다음은 강특파원이 바레인과 사우디에서 보고 들은 주민들의 모습과 페르시아만 사태를 보는 시각 등을 묶어 보내온 현지표정 제1신이다.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는 요즘 폭풍이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다시 비바람이 몰아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 「중동대란」발발 4주가 지났음에도 긴장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고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미군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신속한 배치로 예민해졌던 위기감은 많이 무뎌진 듯 보였다.어렵지만 일상생활을 꾸려나갈 수 밖에 없다는 현실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해봐야 일반주민들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무력감등이 이곳 중동주민들로 하여금 긴장과 불안의 마루턱으로부터 평상시의 일상생활로 내려오게 만들고 있었다. 기자가 거쳐온 바레인과 홍해에 면한 이곳,제다가 약간 차이는 있었지만 이같은 인상은 거의 비슷하게 느껴졌다. 기자가 중동에 첫 발을 내디딘 바레인은 이라크로부터 멀지않은 곳이어서 제법 긴장감을 주리라 예상했었으나 의외로 평온했다. 모든 것이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검색하는 공항직원은 엄하다기보다는 무표정한 편이었다. 바레인 신문들이 1면부터 수개면을 페르시아만 사태와 관련된 기사로 메워 역시 최대의 관심사임을 보여 주었지만 두려움이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조보다는 사태가 이라크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뉴스들이 크게 클로스업 돼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곳곳에 하얀 전통 아랍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어슬렁거리거나 벤치위에 한 쪽 다리만 괴고 비스듬히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바레인의 해안고속도로 킹파이잘로를 자동차로 달리며 살펴본 페르시아만은 일망무제로 탁 트인 수평선과 한가롭게 떠있는 두 척의 요트가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기자를 태운 택시기사 하심 아마드씨(45)는 어떻게 해서든지 요즘에 바가지를 씌워 보려는 집요한 생활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민들 “걱정없다” 한국 대사관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굴라즈 모하메드 하산씨(여)는 『이라크 폭탄 한 방이면 바레인은 끝장이라는 생각도 들어 걱정은 되지만 요즘은 말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면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은 체념과 무력함을 동시에 읽게 해 주었다. 바레인 주재 우문기 대사는 『한 영국신문이 다음 공격목표가 바레인이라고 보도한 지난 8일이 가장 긴장이 높았던 때였다. 외국인과 왕족이 속속 빠져 나가고 달러화가 동이 났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그후 미국등 다국적군과 아랍연맹군이 사우디에 진주하면서 긴장감이 많이 줄었다. 다만 아직도 변변한 방위능력이 갖춰져 있지 못한데서 오는 불안감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교민대책을 묻는 질문에 우대사는 부녀자들의 경우 모두 대피했으나 아직도 교민 2백75명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그는 『교민가족중 교사자격증 소지자와 교민자녀로 이루어진 20여명의 한인학교(국민학교과정)가 오는 9월2일 개학예정인데 모두가 출국해버려 개학예정일이 걱정』이라고 색다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공항선 검색 엄격 휴가를 마치고 리야드 건설현장으로 들어간다는 현대건설의 심준수 차장은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며 리야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다를 통해 사우디에 입국하자 보안검색이 엄격해져 이곳 사정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공항밖의 표정은 달랐다. 수많은 차량의 물결과 느긋한 주민들의 표정은 완벽한 평상시 그대로였다. 검색이 엄한 것은 사우디가 이슬람 종주국으로서 원래 검색이 까다롭기 때문일 뿐 이번 사태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게 공항 직원들의 설명이었다.가로수가 싱싱하게 가꾸어진 널찍한 도로,깨끗한 보도 등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 제다지점의 한 관계자는 사태초기에는 단파라디오 시중가격이 2배로 뛴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사람들이 불안해 했지만 지금은 조용하다고 말했다. 이곳 김문경 총영사도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느낌이라며 교민사회도 동요가 거의 없다고 전했다. 한때 이라크가 수단에 전투기와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보도로 불안감이 조성됐으나 수단이 이를 부인하고 제다가 이라크미사일의 사정권 밖에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다시 평온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기자가 찾은 사우디 아메리칸 뱅크의 환전창구도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북적거리지 않았고 직원들도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여유있게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 TV방송도 회교사원의 예배모습을 내보내고 정규 프로그램을 진행시킬 뿐 특별히 전투의욕을 고취시키는 프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우디 정부도 국민들에게 민방위대에 지원하라는 권고를 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는 않고 있다.KOTRA의 김재효 관장은 회교권의 주말(목ㆍ금)과 서방세계의 주말(토ㆍ일)이 겹치면 뉴스량이 줄고 월ㆍ화ㆍ수요일에는 다시 뉴스량이 늘어나면서 긴장이 고조되는 「3한4온」 현상을 보여왔다고 전했다. ○“후세인 굴복” 내다봐 이곳에서 만난 사우디주민들과 제3국인(수단인ㆍ이집트인 등)들도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사태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라는 정보취득형 질문보다는 『이라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지도에도 호텔방에도 붙어있는 메카를 향한 화살표처럼 이곳 사람들은 이미 사태의 흐름을 「이라크의 패배」라는 한 방향으로 추론하고 있는 듯했다. 사우디정부가 한국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사우디에 입국하려는 기자에게 선선히 비자를 발급한 것도 어쩌면 「자신감」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 미 중동정책 “강ㆍ온 불협화음”

    ◎협상파 베이커 휴가가 불화설 반증/사태장기화땐 “파병반대” 여론 거셀 듯 페르시아만 긴장상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이 지역에 대규모병력을 파병해 놓고 있는 미국 조야 일각에서 미의 대중동정책노선을 싸고 잡음이 들리고 있다. 잡음의 일단은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의 장기휴가에서 비롯됐다. 베이커장관은 지난 16일 후세인 요르단왕과 부시대통령의 회담장에 배석한 후 곧장 와이오밍으로 가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이라크와의 군사대치 상황에서 외교정책의 최고 입안자인 국무장관이 장기간 워싱턴을 비우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간다는 지적이 정가일각에서 제기됐고 이어서 대중동정책과 관련,백악관내에 불협화음이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커장관의 부재로 최근 중동파병등 중요정책 발표시 부시대통령과 자리를 함께 한 것은 리처드 체니국방장관과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동안 대체로 중동정책에서 무력사용등 강경대응을 선호한 반면 베이커장관은 협상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었다. 이런 견해차가 베이커의 장기휴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비친 것이다. 베이커의 휴가와 관련한 불화설은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의 지난주 보도를 통해 정식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정례브리핑이 있을때 마다 베이커장관의 행방과 휴가문제를 놓고 반농담조로 여러 갈래의 질문을 해 대변인을 난처하게 만들었었다. 파문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최근 정례브리핑에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던 마거릿 터트와일러 대변인은 27일 이례적으로 회견장에 나와 정색을 하고 이같은 불화사실을 부인했다. 터트와일러 대변인은 『그는 이번 문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오늘 아침 전화를 걸었을때 적어도 하루에 6시간씩 이 문제에 시간을 쏟고 있으며 상오 7시부터 하오 1시반까지는 전화에 매달려 있다』고 베이커 국무의 근황을 상세히 소개하기까지 했다. 베이커 국무는 28일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베이커장관의 휴가를 부시대통령,댄 퀘일부통령이 휴가를 간 것과 같은 시각에서 대수롭지 않게 보는 해석도 물론 있다. 그리고 베이커장관이 막후에서 셰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 등과 사태해결을 위해 활발한 협상을 수행중이라는 반론도 있어 아직은 불화설의 진상을 파악키 힘들다. 26일 백악관 앞에서 있었던 미군파병에 대한 항의시위도 새로운 사태발전의 하나이다. 약 2백명의 미국인이 『우리는 텍사코(미 석유회사)를 위해 죽을 수 없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산발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미국이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것이었다. 8월초 AP통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86%의 미국인은 석유회사들이 이라크의 침공으로 이익을 보았으며 부당하게 휘발유값을 인상했다고 응답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 대학교수가 부시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실었는데 이 글은 『나는 오늘 사우디로 떠나는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21살 난 해병이다. 무엇 때문인가. 단지 값싼 석유를 얻기 위해서인가』라고 쓰고 있다. 물론 베트남전때 같은 대규모 반정부ㆍ반전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움직임들이다. 미 의회도 아직은 부시의 대이라크 강경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워싱턴 정가는 물론 미국내 여론의 동향도 낙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 외언내언

    일본에서는 프로스포츠에 관한 한 대미적자라는 얘기를 흔히 하고 있다. 미일간 무역마찰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본인들은 농담 곁들여 이렇게 말하며 웃는다. 이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액연봉의 미국에서 스카우트한 선수들을 두고하는 말이다. 특히 프로야구에 이런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가 않다. 미국인들은 무역ㆍ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대일적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난 6월초의 미소 정상회담 바로 전에 실시한 워싱턴포스트지와 ABC­TV의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다. 응답자의 75%가 일의 경제력이 소의 군사력보다 미의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답할 정도다. 대일압력을 가하고 있으나 적자는 여전히 연간 5백억달러나 되고 주요도시의 유명 빌딩ㆍ은행ㆍ대표적인 영화사가 일본에 차례로 매각되고 있는 현실에 미국인들의 자존심은 무척 상해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을 써 더 유명해진 이시하라(석원신태랑)의원의 얘기는 그 정도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된아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통해 「일본은 앞으로 5년 뒤면 미국이 어떤 노력을 하든 대미차관은 1조3천억달러,일본기업의 미국내 순자산은 7천억달러에 달하게 되고」 「따라서 미국의 국민총생산이 1% 늘어난다해도 이자를 내고나면 그만」 「그래서 일본은 명치이래 국가목적으로 노력해온 서양을 따라잡고 앞지르려는 비원을 달성한 셈」이라고 큰 소리치고 있다. ◆이번에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가 애리조나에서 열리는 동계훈련에 참가할 일 프로야구팀의 참가비를 종전의 한달 3천5백달러에서 무려 2천8백50%나 오른 10만달러로 인상한 진짜 이유가 재미있다. 「미국의 자존심」인 프로야구의 기술을 일본에 더이상 유출할 수가 없다는 것. 다른 분야에서처럼 몇년 뒤 야구기술을 일본서 역수입하는 꼴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이 속사정. ◆이에대한 일본의 반발이 만만치가 않아 결과가 흥미를 끈다. 애리조나리그에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맞서는가 하면 일본의 전구단이 불참하게 되면 애리조나주의 수입에 영향을 받게될 것이라고 주지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일본다운 대응이다. 우리로서도 한번쯤 눈여겨 보아둘 일이다.
  • “북방4섬 반환 고집땐 동경행 재고” 일 정가에 「고르비발언」파문

    ◎“영토분쟁 없다” 강경선회에 당황/“협상서 우위확보 위한 협박용”관측도 일본정계가 「고르바초프 충격」에 얼을 잃고 있다. 전후 45년간 일ㆍ소간 최대 현안이 되어왔으며 일본측으로서는 그 반환을 위해 갖은 공을 들여온 「북방 4개도서」문제에 대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일ㆍ소간에 영토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하루 아침에 등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내가 일본을 방문해서 (영토문제로)관계가 나빠진다면 가지 않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며 내년초로 예정되어 있는 자신의 일본방문 자체를 취소할 뜻을 비쳤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이같은 대일강경발언은 25일 하오 2시30분(한국시간 하오 7시30분) 소련을 방문중인 일본의 사쿠라우치 요시오(앵내의웅) 중의원의장과의 회담에서 터져 나와 일본정계의 충격을 더 해주고 있다. 이날 크렘린대통령 집무실에서 있었던 30여분 동안의 회담에서 사쿠라우치 의장은 북방영토반환문제에 관해 『일본국민의 소원이다』라며 소련측의 전향적인 대응을 촉구했다.그러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외교적 언사」를 기대했던 일본측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일ㆍ소양국이 협력한다면 상호간에 더 한층 이익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하고,일본측이 북방영토의 반환만을 고집할 경우 내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자신의 방일 자체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보다 앞서 사쿠라우치의장은 루키야노프 소련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고르바초프대통령을 만나면 북방영토문제에 관해 진일보한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받은 터여서 일본측의 쇼크는 더욱 컸다. 일본정계에서는 이같은 소련수뇌의 경연양면작전에 일본측이 말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사쿠라우치회담은 일본측의 요청으로 갑자기 이루어졌다. 이자리에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어디까지나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고 추궁받는다면 영토문제란 없다는 발언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을 방문해도 이문제 뿐인가』라며 방일재고가 불가피하다는 뜻을 밝혔다. 일ㆍ소간 영토분쟁은 일본 홋카이도(북해도) 동북쪽에 있는 4개의 섬,에토로후(택착) 구나시리(국후) 시코탄(색단) 하보마이(치무)를 둘러싼 분쟁이다. 일본은 전전 자국영토였던 이 섬에 대한 소련의 점령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소련은 이를 일축해 왔다. 이 때문에 일ㆍ소양국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후 정식 평화조약도 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소련내 개발사업에 대한 일본의 투자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이번 고르바초프의 영토문제에 관한 강경발언에 대해 일본정계의 해석은 구구하다. 더구나 지난 1월 아베 신타로(안배보태랑)전자민당간사장의 방소때 유연한 자세를 보였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갑작스런 태도변화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억측이 일고 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경제위기라는 국내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외교관계에서는 대미관계를 비롯,독일통일을 둘러싼 유럽안보,한국과의 관계 등 주위가 놀랄만큼 유연한 자세를 보여왔다. 그러한 그가 돌연 대일 문제에서 강경자세를 보인 것은 고르바초프 특유의 「협박」이 아닌가라고 보고 있다. 이번 그의 방일중지발언도 『농담조였다』는 사쿠라우치 의장의 말처럼 액면 그대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 4개의 섬을 경제적으로 『매수하라』는 의논도 일고 있다. 이런 상황을 외교에 능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모를리가 없다. 따라서 일본외무성측도 그에게는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며 고르바초프의 방일 재고발언에 『일희일비는 금물』이라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 진시황 병마용갱에서/송정숙 논설위원(서울칼럼)

    어떤 도용은 근엄한 표정이고 또 어떤 용은 온화하다. 미소짓고 있는 용도 있고 강건한 무인의 표정을 짓는 용도 있다. 평균신장은 1.8m에서 2m. 지금 사람보다 약간 큰 수천개의 도자기 병사들이 수천가지 표정으로 서있다. 병기를 쥐었던 손모습이며 무릅꿇고 앉은 모습,말과 마차들. 그 하나하나가 정치하게 완성된 고도한 예술품이다. 그중의 한개만으로도 실팍한 국보급 문화재가 될 법하다. 그런 것이 8천여개나 확인되었고 6천개가 이미 발굴되어 갱속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이 이른바 진시황의 병마용인 것이다. 70년대 중반,중국의 서안지방에서 이 거대한 유적지가 발견되었다는 외신이 전해졌을 때,우리는 그저 아득한 전설을 전해듣는 것 같았었다. 죽의 장막 저쪽에서 진행되는 끊임없는 어떤 음모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미심쩍은 마음까지 들었었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니까 그때 느꼈던 그 가공감은 오히려 당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누가 이런 것을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차피 진한 호기심을 발동해 보았자,우리 시대에는 확인할 기회가 실현될 수 없다는 체념감 때문에도 의심스럽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기에 있었다. 기원전 2백년 안팎의 인류가 이만한 창조의 기량을 발휘하며,현란한 삶을 영위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여겨지는,그것들은 거기 있었다. 살아서 누린 생애는 겨우 49년인데,불노장생하고 싶은 집념에 불탔던 욕심많은 전제군주 진시황. 말많고 성가신 잘난 척하는 지식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분서갱유도 서슴지 않았던 그 잔혹한 폭군은 무슨 힘으로 자신의 주검을 지킬 지하군단을 이토록 장엄하게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어느 사기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감쪽같이. 그 지하군단이 85만번의 아침과 저녁을 살다가 오늘 이시대에 솟아오른 것은 또 무슨 뜻일까. 병마용의 박물관 주변에는 중국의 관광지마다 그렇듯이 햇볕에 그을린 먼지투성이의 다섯 손가락을 쫙쫙 펼쳐가며 싸구려를 놓는 노점상,행상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다. 관광객이 지갑이라도 꺼내 들면 육탄전을 벌이듯 벌떼처럼 덤벼드는 이 인민들의집요한 삶과 병마용의 위용은,같은 조상의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는다. 수천만 민중의 삶을 미물보다 하찮게 유린하며 만들어 놓은 독재군주의 부도덕한 유산일시 분명한 이 유적이,불타는 정열로 사회주의 건설에 몰두하다가 궁핍의 바위밑에 짓눌린 인민의 삶만을 양산한 후손에게,영세한 생업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는 일은 역사의 거대한 독설이다. 당현종이 양귀비와 놀던 풍류 도도한 유적들이 즐비하고,당대의 장안성벽터에 명대때 세운 성장이,2차선 도로폭으로도 넉넉할 만한 두께로 견고하게 둘러쳐진 채 남아있는,도시전체가 거대한 야외박물관인 고도 서안을 안내하던 한방의 교포 가이드 청년은 마이크에 대고 느닫없이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는 좋은 것이지만,우리 중국은 사회주의를 너무 일찍 했어요. 그것이 문제지요.… 자본주의로 어느 정도 가다가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개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조금만 더 하다가 사회주의를 했어야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돈을 좀 번 뒤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어야 한다는 말일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순진한 어법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도시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가이드들은 이 말을 조만간 한번씩은 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면 그것은 가이드훈련의 교육내용에 들어있는 말인 것 같다. 문득 1949년 10월1일의 천안문을 생각나게 한다. 「중국은 드디어 일어섰다」 「신생중국의 새벽이 다가왔다」 확신에 차서 선창하는 모택동과 그의 혁명동지들의 열정에 차있던 미래가 『자본주의를 좀 하다가 건설했어야 할 사회주의』로 나타났다는 일이 새삼스럽게 수수께끼같은 느낌은 준다. 그렇다고 오늘의 중국이 그들 혁명동지들의 정열이 약했거나 정의롭지 못하게 타락한 데서 결과한 실패도 아니라는 것을,학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끊임없이,전력을 다해,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도자들은 근신했고,인민은 뒤따랐다고 증언되고 있다. 일찍이 중국공산당은 적어도 재정면에서는 거의가 퓨리턴적일 만큼 청렴함을 유지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모주석을 이은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등소평에 관해서만해도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원래 프랑스유학을 하며 공산주의자로 성장했다. 그 유학시절에 힘든 고학생활을 하느라고 그는 크로아상 1개와 한잔의 우유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었다. 그래서 그는 『내 키가 이렇게 못 자란 것은 그때 너무 못먹었기 때문』이라고 곧잘 농담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막강한 지도자로 성장하여 권력층의 한사람이 된 이후인 1974년 유엔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 귀국길에 주은래등 파리서 함께 유학시절을 보낸 동지들을 위해 선물로 「크로아상」을 사다가 주기로 마음 먹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웠던 고학시절을 함께 회상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중국정부가 그에게 지급한 개인출장비가 단돈 60달러뿐이었으므로 다른 선물은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근검하게 건설해온 나라지만 「너무 일렀던」 실수를 인정하고 서방측에 개방을 서두르게 되어 버렸다는 일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상해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부주석을 지낸 송경령의 기념관이 있다. 그곳을 찾았을 때 관광객을 안내하던 가이드는 침묵한 채 앞장서서 걷기만 했다. 송경령 자매들의 정치노선을 중국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서술해놓은 내용들 뿐이어서 특히 「대만」의 관광객을 자극할 것을 저어하여 일체 설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경험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었다.
  • 「소나타」를 탄 북한대표/유세진 국제부기자(오늘의 눈)

    미국은 자동차의 전시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리를 누비는 자동차의 종류가 수백종은 될만큼 갖가지 차들로 붐비는 곳이다. 우리 한국산 자동차들도 그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그중의 한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미스탠퍼드대에서 열린 남북한과 미국간 한반도 군축에 관한 3국학술회의는 철저한 비공개회의로 진행돼 기자들의 회의장 접근이 통제 됐었다. 한편 회의장소인 리틀필드 매니지먼트센터 인근의 주차장에서 항상 황토색의 한국산 소나타차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차의 주인은 이번 회의를 주최한 스탠퍼드대 국제전략 및 군축연구소 존 루이스 소장. 루이스 소장은 이번 회의기간중 북한대표들을 숙소에서 회의장으로 옮기는 일을 자신이 직접 맡아 함으로써 북한대표들은 3일동안 한국차를 타야만 했다. 이는 이번 회의를 취재하는 한국기자들 사이에 가벼운 얘기거리가 됐었다. 그런데 이번에 북한대표로 참석한 대표단은 7일 하오 10시30분부터 약 2시간에 걸쳐 한국기자들과 「담소」하는 자리를 가졌다.이 자리에서 북한대표는 시종 웃는 얼굴로 가끔 재치있는 농담도 섞어가며 분위기를 재미있게 유도했다. 그러나 자리가 거의 끝날무렵 『3일동안 한국차를 타고 다닌 기분이 어떠냐』는 한 기자의 물음에 한 북한대표는 금방 얼굴색이 변하더니 『기분 좋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바로 조금전까지만 해도 남북한이 한민족임을 내세우며 한반도에도 하루 빨리 군축이 이루어지고 평화통일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이같은 돌변은 지난 40년간 남북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두터운 앙금이 쌓여있는가를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이같은 일이 어찌 이번 소나타사건(?)뿐 이겠는가. 한국인이 해외여행도중 북한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섬뜩해진다는 말을 평소에도 여러번 들은바 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적대시 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군축안이 논의된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한국산 승용차를 탄 북한인들이 『한겨레가 만든 차를 타니 정말 유쾌하더라』고 말하고 해외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북한인을 만나면 뜨거운 동포애로 포용할 수 있을 때 군축논의도 실효가 있고 통일의 길도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남과 북 모두 마음의 문을 여는게 중요하다.〈스탠퍼드에서〉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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