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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95)-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95)-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그러나 이런 공자의 희망은 철저하게 무산되고 만다.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계환자는 제나라의 선물인 여악을 받아들인 후 이를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그뿐 아니라 교제를 지내고 나서도 제기에 담았던 제육 역시 여러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예를 중요시 여겨 모든 인간행동의 기준을 예로 삼았던 공자는 ‘예를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서 설 근거가 없게 된다(不知禮無以立也).’라는 가르침으로 유가의 사상을 펼쳐나가는데 공자는 더 이상 이러한 무례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예를 ‘인간행동의 기준’뿐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기능’으로까지 가치관을 확산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공자가 논어에서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서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으로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라고 말하고,‘예와 사양으로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예를 무엇에 쓰겠는가(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얼마만큼 예를 중요시하였는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공자는 정공과 계환자가 군주로서의 예를 잃어버린 사실을 깨닫게 되자 미련 없이 노나라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그리하여 곡부를 떠나 남쪽인 둔(屯)으로 갔을 때 기(己)란 사람이 공자를 전송하면서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아무런 죄도 지은 것이 아닌데 어째서 노나라를 떠나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물끄러미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을 쳐다 본 후 말하였다. “내가 노래로 대답하려는데 괜찮겠소이까.” 공자가 노래로 대답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자신을 전송하는 기가 음악관인 태사(太師)의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여인들을 앞세워 나라를 망치려는 계략이라네. 나라의 기둥들이 저 꼴이라면 남은 것은 오로지 파멸일 뿐. 모름지기 군자는 멀리 도망가서 여생을 한가로이 지낼 뿐.” 공자도 군자는 마땅히 여색을 멀리해야 함을 경계하고 있었다. 부처는 여색을 구도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고 ‘너희들은 차라리 너의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넣지 말라.’고 극언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재물과 색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을 핥는 것과 같다.한번 입에 대는 것도 못할 일인데 어린아이들처럼 그것을 핥다가 혀를 상한다.모든 욕망 가운데 성욕만큼 더 한 것은 없다.성욕의 크기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다행히 그것이 하나 뿐이었기에 망정이지 둘만 되었어도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애욕을 지닌 사람은 마치 횃불을 들고 거슬러가는 것과 같아 반드시 횃불에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석가모니의 극단적인 이 말과 비교가 안 될 정도지만 공자도 여색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계하고 있다. 훗날의 일이지만 공자는 위나라의 영공(靈公)이 그의 음탕한 부인인 남자(南子)와 함께 수레를 타고 거리를 쏘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논어의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공자의 여성관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유독 여인과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가까이하면 공손치 않게 되고,멀리하면 원망하게 된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 儒林(194)-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94)-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논어의 미자(微子)편에는 이 장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을 보내왔다.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아들여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朝會)를 하지 않았다.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논어에는 공자가 5년 동안 정치가로서의 황금시대를 스스로 마감한 장면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내용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과 계환자는 의기투합하여 제나라의 예기들과 말을 받아들인 다음 이를 즐기느라 정신이 팔려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자 이를 지켜본 성미 급한 제자 자로가 분노하여 공자에게 말하였다.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생님은 마땅히 사직하셔야 하겠습니다.일찍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도 처음에는 총명하고 뛰어난 왕이었으나 달기(己)에게 빠져 포락지형이라는 형벌을 즐기다가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에게 토벌되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지금 노나라의 임금과 권신이 모두 여색에 빠져있으니 노나라의 사직도 은나라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달기.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인이면서 음란하고 잔인한 대표적인 독부의 상징. 여러 가지 꽃잎을 짜서 그 액을 얼굴에 바르는 화장법.즉 오늘날의 연지(燕脂)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던 전설속의 여인.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달기는 ‘은행알과 같은 눈에 복숭아 같은 뺨,하얀 피부를 가졌으며,도화장(桃花)이란 연지를 바르고 주왕을 미혹시켰다고 한다. “달기야말로 진짜 여자다.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달기에 비하면 목석에 불과하다.정말 하늘이 내려다준 여자다.” 오랑캐나라인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에 빠진 주왕은 그렇게 찬탄하면서 하루종일 달기를 끼고 술을 마시며 즐기기만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른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 덩어리를 걸어 숲을 이루게 한 후 많은 젊은 남녀로 하여금 벌거벗고,서로 희롱하고,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도 달기에서 비롯되었으며,구리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 놓은 후 기둥위로 죄인들로 하여금 맨발로 걸어가게 함으로써 절박한 갈림길에서 발버둥치는 죄인의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포락지형(烙之刑)도 모두 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나라에서 보내 온 여인들의 춤과 노래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하는 정공과 계환자의 모습은 머지않아 노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로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그래도 신중하였다.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성밖에서 교제(郊祭)를 지내게 되어 있다.만약 그 제사를 지내고 군주께서 제육(祭肉)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기만 한다면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먼저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끝까지 자신의 모국인 노나라에 대해서 희망을 잃지 않는 공자의 애국심을 엿보게 한다.비록 군주가 여색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군주로서의 예를 잃지 않는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교제란 하늘에 지내는 제사로 동지에는 하늘을 남교(南郊)에 모시고,하지에는 땅을 북교(北郊)에 모신다.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군주는 그 제물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이 통례인데,이는 모든 신하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하기 때문인 것이다.공자는 조바심을 갖고 초조하게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 儒林(193)-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93)-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그러나 경공의 이런 말을 들은 대부 여서는 생각이 달랐다. 이미 3대에 걸쳐 제나라를 다스리던 안영은 수년 전에 이미 죽었고,그 뒤를 이어 제나라를 다스리던 여서는 이 기회에 공자를 제거할 수 있는 묘계를 짤 것을 계획하고,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땅을 먼저 떼어주기 전에 우선 노나라를 정치적으로 흔들어 봅시다.땅의 양도는 그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여서가 생각했던 노나라의 정치를 흔들어보는 계략.그것은 미인계였다.여서는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과 계환자가 가무를 즐기고,여색을 좋아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이 기회에 미인계를 써서 공자와 정공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보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여서는 자신이 직접 아름다운 여인 80명을 골라 뽑았다.자고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함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미색’이란 뜻으로 여서는 노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미인계뿐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여서는 자신이 뽑은 80명의 미녀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후 모두 강락무(康樂舞)를 익히도록 훈련시켰다.몇 개월이 지난 후 여서는 호화롭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추는 강락무를 직접 열람하고 나서 이렇게 탄식한다. “옛 노래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북방에 한 가인이 있어 절세의 미인이로다.눈길 한 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어진다.’ 그대들의 눈길 한 번에 반드시 노나라의 성이 기울어지고,두 번 돌아보면 노나라가 기울어질 것이다.” 여서는 즉시 80명의 미인과 함께 좋은 말 120필을 골라 노나라 임금인 정공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과연 여서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한다. 이들은 먼저 입궐하기 전에 제나라에서 온 문화사절로서 도성인 곡부의 남쪽문인 고문(高門) 밖에서 말과 예기들의 춤을 공개하였다. 소문을 들은 계환자는 남의 눈도 있고 대부의 체면도 있었으므로 평복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 공연을 며칠 동안이나 구경한다. 며칠 동안의 구경 끝에 계환자는 이를 받아들일 것을 결심한다.그렇지 않아도 정치가로서 공자의 위세가 하루가 다르게 막강해지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계환자는 틀림없이 평소에 음란한 노래를 증오하고 있던 공자의 태도로 보아 단숨에 이를 물리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공자 몰래 정공을 데리고 가 구경시킨 후 이에 맛을 들이도록 하면 자연 공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노래를 좋아하여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는 천지의 질서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음란하고 퇴폐적인 노래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음란한 노래를 미워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을 정도다. “정나라의 노래는 음란하다.음란한 정나라의 노래가 아악(雅樂)을 어지럽힘을 미워한다.” 정나라의 노래는 주로 음란한 연애시였다.따라서 정풍(鄭風)이란 말은 천박하고 음란한 음악의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므로 제나라에서 온 미녀 80명이 부르는 퇴폐적인 여악(女樂)을 공자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었던 것이다. 계환자는 정공에게 이를 아뢰고 교외시찰이란 명목으로 함께 변복을 한 후 몰래 찾아가 이를 구경하였다.이들은 하루종일 춤과 노래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제나라의 대부인 여서가 획책한 미인계가 적중하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 儒林(190)-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90)-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계환자의 불평을 들은 제자 염유(有)는 공자를 찾아가 그대로 말을 전하였다.염유의 자는 자유(子有)로서 공자보다 29세나 아래였는데,특히 정치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특히 염유는 권신인 계씨편에 밀착하여 공자의 제자일 뿐 아니라 계씨의 가신까지 겸하고 있었는데,이러한 태도를 공자는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훗날 염유가 계씨의 편에 서서 가렴주구를 돕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공자는 불같이 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계씨는 주공보다도 부유했는데 염유는 그를 위하여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그의 부를 더해 주었다.이에 공자는 말씀하셨다.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너희들은 북을 울리며 그를 공격해도 괜찮다.’” 염유에 대한 공자의 애증은 논어의 다른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염유가 공자에게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모자랍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힘이 모자라는 자는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있는데,지금 자네는 스스로 움츠리고 있네.’” 이러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염유는 권신 계환자의 불만을 공자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염유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아아,윗사람은 자기 도리를 지키지 못하면서 아랫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효도는 가르치지도 않고 오직 그 죄만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구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삼군(三軍)이 크게 패했다 하더라도 군사들을 처형해서는 안 되며 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윗사람의 교화가 행하여지지 않는 것은 그 죄가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처럼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지만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높은 자와 가진 자의 죄를 묻는 데는 엄격하였다. 그것은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비롯되는데,공자는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제대로 되고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後).’라고 말함으로써 언제나 다스리는 자의 모범이야말로 백성 다스리는 척도임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 간의 다툼에는 너그러웠지만 벼슬이 높은 권신의 위법에는 추상과 같이 엄격하였다. 1년 뒤 공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인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에 있었을 때 정치를 어지럽힌다는 애매한 이유로 대부인 소정묘(少正卯)를 죽여 그 시체를 사흘 동안 저잣거리에 내건 적이 있었다. 이때 제자인 자공이 ‘소정묘는 노나라의 명사인데,지금 선생님께서 처형해 버린 것은 잘못하신 일이 아닐까요.’하고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앉거라.내가 그 까닭을 설명해 주마.천하에는 대악(大惡)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도적질은 그곳에 들지도 않는다.첫째는 마음이 반역적이고 음흉한 것이다.둘째는 행동이 편벽되면서도 고집 센 것이다.셋째는 말이 거짓되면서도 번지르르하게 꾸며대는 것이다.넷째는 아는 것이 없어 추하면서도 넓은 것이다.다섯째는 그릇된 부정한 길을 따르면서도 윤택하게 지내는 것이다.이 다섯 가지는 어떤 사람이든 한 가지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처형을 면할 수가 없는 법인데,소정묘는 이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그의 일상생활은 무리를 모아 도당(徒黨)을 이루기에 족하였고,그의 말은 사악함을 꾸미어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족하였고,그의 권세는 옳지 않은 것에 반하여 지나치게 높았다.이는 곧 간악한 간웅이니,마땅히 없애 버리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 儒林(188)-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88)-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공자가 보인 외교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공자를 더 높은 벼슬로 중용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오늘날 산둥성 제령도의 문상현(汶上縣)을 가리키는 중도의 지방 장관으로 있던 공자는 다음해에 곧장 사공(司空)이란 높은 벼슬로 영전된다.사공은 육경 중의 하나로 국토를 다스리는 일을 맡는 중요한 자리였다.비로소 중앙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셈이었는데,‘공자가어’에 의하면 공자가 사공이 된 뒤로는 노나라의 삼림과 강물,호수와 고지대와 저지대의 평야가 모두 제대로 잘 다스려져 각각 그곳에 맞는 식물과 동물들이 잘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공자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들인 계환자를 비롯한 삼환씨의 횡포를 제거하고 정권을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에게 되돌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공자는 이상주의 국가의 표본을 주나라에서 찾고 있었는데,이는 논어에서 말하였던 공자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주나라는 하(夏)와 은(殷)나라를 본떴으므로 문물제도가 빛났다.나는 마땅히 주나라를 따르겠다.” 노나라를 주나라로 만들고 싶은 것이 공자의 정치이념이었고,정치가로서 공자가 꿈꿨던 이상적인 인물은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주공이었던 것이다. 말년에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하고 한탄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는 종주국이었던 주나라를 건국한 주공을 본떠 한갓 신하에 불과한 삼환씨의 전횡을 거세하고,왕권을 정공에게 되돌려야만 천하의 도가 바로잡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공자의 정치철학은 논어의 ‘계씨’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천하의 도가 있으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오고 천하의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들로부터 나온다.그것이 제후들로부터 나오게 되면 대략 10대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이 드물고,대부들로부터 나오게 되면 5대에 망하지 않는 일이 드물고,가신들이 국권을 잡으면 3대에 망하지 않는 일이 드물게 된다.천하의 도가 있으면 정권이 대부들에게 있지 아니하고 천하의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혼란하지 않다.” 예악과 정벌이란 고대 국가에 있어서 대권(大權)을 뜻하는 것이다.공자가 정치가로서 활약한 무렵에는 대권이 제후인 정공에게 있지 아니하고 대부인 계환자에게 있었고,또 한때는 그들의 가신이었던 양호와 공산불뉴까지 권력을 휘두르는 난세중의 난세였으므로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노나라는 공자의 예언대로 3대에 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따라서 공자가 천하의 도를 바로잡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물론 공자는 서두르지 않았다.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는 정치변화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공자는 기회를 엿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자가 사공이란 높은 벼슬에 이르렀을 때 그 개혁을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그것은 계씨들에 의해서 쫓겨나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7년 만에 객사한 소공의 시신을 이장하여 노나라의 선공(先公)들의 묘소에 합장시키는 장례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때 계환자는 소공을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의 눈총도 있으니 이 기회에 소공의 장례를 치러주자고 생각하여 성대한 예식을 치르면서도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있었다.그것은 선공들의 묘소와 소공의 묘 사이에 도랑을 내어 소공의 묘를 격리시키려 했던 것이다.
  • 儒林(184)-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84)-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군자의 도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이 논어의 ‘이인(里仁)’편에 나오고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曾子)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증자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자 다른 제자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으니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결국 공자가 아침에 깨달을 수만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도는 이처럼 인,지,용,충,서와 같은 유가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올바른 도리’를 가리키고 있음인 것이다.곧 공자가 생각하는 도란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요,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법칙(當爲法則)이었던 것이다.이러한 공자의 도사상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문장이 역시 논어에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나가는데 문을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어찌하여 이 도를 따르지 않겠는가(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 결국 공자에 있어 도란 사람이면 반드시 통과하여야 할 문(門)이었던 것이다.그러나 노자에게 있어 도는 통과해야 할 문조차 없는 무문(無門)이었다.이는 마치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큰길에는 문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으로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인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 도는 공자의 도에 비해서 더욱 절대적이며 근원적이었던 것이다.공자의 도가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도리’,즉 ‘사람의 도(人之道)’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노자의 도는 인간존재 이전의 우주의 본원이며,만물의 생성과 존재의 법칙인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물건이 혼돈(渾沌)히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생성보다 먼저 있었다.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형체도 없지만 홀로 존재하여 바뀌어지지 않고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母體)라 할 만한 것이다.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라 이름 지었고,억지로 그것을 대(大)라 부르도록 하였다.” 노자의 도는 이렇듯 인간의 당위법칙을 뛰어넘어 우주의 생성보다 앞선 ‘천하의 모체’가 되는 절대적인 것이다.곧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도란 인간 지성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적인 것이어서 사람으로서는 그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고 말로서 그것을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자의 도가 초월적인 것이라면 공자의 도는 현실 참여적이었던 것이다.따라서 공자는 운명적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51세의 황금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중도재란 벼슬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 사상가이자 인류가 낳은 3대 성인이었던 공자가 지닌 한계이자 또한 위대한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하늘나라’에 목표를 두고 있고 부처도 깨달음의 궁극을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드는 ‘피안(彼岸)’에 두고 있고,노자도 도의 목표를 ‘무위’에 두어 결국 인간은 우주의 한 구성요소이며 완전해방과 절대의 자유를 이룩하는 데 두었음에 반하여 공자는 하늘나라가 아닌 지상의 나라에서,피안이 아닌 차안(此岸)에서,우주가 아닌 바로 전국시대의 난세에서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단 하나의 예외적인 선각자였던 것이다.그런 이미에서 공자는 사상가라기보다는 교육자였으며,성인이라기보다는 철인이었다.
  • 儒林(183)-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83)-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사기에서는 공자를 중도재에 임명한 사람이 정공으로 되어 있으나 이때 정권은 완전히 계환자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계환자에 의해서 공자가 중용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환자는 반역자인 양호와 공산불뉴를 몰아내고 내란을 평정한 후 그들에게 협력하기를 거절했던 공자의 바르고 곧은 인격에 감화되었던 것 같다.그보다도 계환자가 공자를 등용한 첫 번째 이유는 민심을 수습할 필요 때문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사마천은 이즈음의 공자를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시,서,예,악의 연구에 몰두하면서 제자들 가르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제자들은 점차로 불어났다.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공자의 문하에 드는 제자들도 많았다.” 계환자는 이러한 공자를 정치에 끌어들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내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맹의자(孟懿子)에게 알맞은 행상(行賞)까지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맹의자는 공자의 제자였는데,그의 이름은 논어에 단 한번 나오고 있다. “맹의자가 효(孝)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효란 (부모의 뜻을)어기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맹의자가 내란에서 전공을 세우자 계환자는 맹의자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는데,그는 자신보다 스승인 공자에게 내려줄 것을 간언하여 계환자는 일석이조의 호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어 곧바로 공자를 중도재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노자의 태도와 양극단을 이루고 있다.노자와 공자가 서로 운명적인 상봉을 하고난 후 노자는 적극적으로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 세상 밖으로 사라져 버린 것에 비해 공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중도재란 벼슬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이는 유가의 도와 도가의 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극단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의 유일한 저서인 ‘도덕경’이 그 첫머리에서부터 도에 대해서 시작하고 있다면 공자도 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심지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아침에 도에 관해서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게 된다 해도 괜찮다(朝聞道夕死可矣).” 도를 깨달을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공자.그렇다면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는 무엇이 다른가. 공자는 도에 대해서 논어의 곳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이른바 대신이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안 되면 물러가야 한다(所謂大臣 以道事君 不可則止).” “나라의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녹을 먹지만 나라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녹을 먹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邦有道穀 邦無道穀 恥也).”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게 된다(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군자의 도는 세 가지가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지혜 있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 儒林(169)-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9)-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유하계(柳下季)는 당시 노국의 현인으로 성은 전(展)씨고,이름은 획(獲).평소에 공자가 존경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버드나무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하(柳下)라고 불렸다.그런 현인에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둑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일 것이다.어쨌든 장자에 나오는 일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유하계가 말했다. ‘지금 선생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아버지가 된 사람은 그 아들을 타일러야 하고 형이 된 사람은 그 아우를 가르쳐야 한다고.그것은 어디까지나 옳은 말씀입니다.그러나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아우가 형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 적에는 아무리 선생의 웅변을 임한다 해도 이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척의 사람됨으로 말하자면 마음은 솟아나는 샘처럼 분방하고,그의 성격은 불어치는 표풍(飄風)같이 사납습니다.어떤 적이라도 막을 만한 강한 힘과 어떤 잘못이라도 호도(糊塗) 할 만한 언변을 지녔으며,그 뜻에 순종하면 기뻐하고 뜻에 거슬리면 성을 내서 남 욕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터입니다.그러니 선생께서는 부디 가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는 안회로 마차를 몰게 하고,자공을 왼자리에 앉힌 다음 도척을 찾아 나섰다. 한편 도척은 이때 부하들을 태산 남쪽에서 휴식시켜 놓고 자기는 사람 간을 회로 하여 간식을 먹고 있었다.그런 판에 찾아온 공자는 마차에서 내리자 앞으로 나아가 접수하는 사람을 보고 말하였다. “노국의 공구라는 사람이 장군의 높은 의를 사모한 나머지 달려와 삼가 어른께 인사 여쭙니다. 신하가 들어가 그 뜻을 전했더니,이를 들은 도척은 크게 노해서 눈빛은 명성(明星)과 같고,머리칼은 치솟아 관을 치밀어 올리는 듯하였다. ‘그놈은 노국의 사기꾼 공구임에 틀림없으렸다.내 말을 이렇게 전하라.너는 인의가 어떠니 예악이 어떠니 하고 말을 조작하고,문왕의 도가 이렇고 무왕의 도가 저렇다고 망령된 소리만 지껄이고 다닌다.머리에는 나뭇가지를 벗겨서 만든 어쭙잖은 관을 쓰고,허리에는 죽은 소의 옆구리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띤 꼬락서니라니. 그리고 되지도 않는 소리만 지껄이면서 농사일도 안 하고 밥을 먹고,길쌈을 안 하면서 옷을 입고 살아가지 않느냐.그리하여 입술을 놀리고 혓바닥을 움직여서 제멋대로 시비를 가려 천하의 군왕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그 뿐인가.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도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효제(孝悌) 따위를 도덕인양 착각해서 요행히 제후가 되고 부귀를 노렸으면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너의 죄는 크고 허물은 무겁다.우물대지 말고 속히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간을 도려내어 점심 상 위에 반찬으로 보태도록 하리라.이와 같은 내 말을 공구에게 전하거라.’ 신하가 도척의 말을 전하자 공구는 다시 한번 면회를 청했다. ‘나는 장군의 친형이신 유하계선생과 친근한 사이입니다.원컨대 진중에서 장군의 신이라도 바라보게 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신하가 다시 그 뜻을 전하자,‘그러면 데리고 오라.’고 도척이 만날 뜻을 보였다.공자는 추창(趨)하여 나아가 자리를 피하여 물러난 다음 도척에게 두 번 절하여 경의를 표했다.그런데 도척은 크게 노해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칼자루에 손을 대고 눈을 부릅떴는데,그 목소리는 새끼를 자주 낳은 호랑이 같았다. ‘구야,앞으로 나오라.네 말이 내 뜻에 맞으면 살려주겠거니와 내 마음에 거슬리면 너는 죽는 줄 알렷다.’”
  • [길섶에서] 존재감과 다변/이목희 논설위원

    아이들 만화책을 뒤적이다 보니 불쌍한 중년남자 얘기가 나온다.직업은 선생님이다.‘존재감’이 없는 극단적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남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재주가 없어 완전히 무시당한 채 살아간다.나름대로 튀는 행동을 해보지만 학생들은 때때로 그가 현장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모임에 갔다.연령대로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 모였다.서로 얘기를 하려 드니까 정신이 없었다.주제도 중구난방이었다.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머릿속이 산란했다.“나도 그렇고,주변 사람들이 나이를 먹나 보다.” 중년의 존재감을 ‘다변(多辯)’으로 확인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는 교회 목사님 중 한 분이 기분 좋은 말을 해줬다.“요즘 남자들 대부분이 처져 있는데,당당해 보인다.”는 것이다.사실 교회에 가면 쑥스러워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편이다.‘다변’과 ‘존재감’은 꼭 비례하지는 않는 것인가.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나 되새겨야겠다.“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儒林(167)-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7)-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이처럼 공자를 비웃는 노자의 제자들인 은둔자들이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에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장자(莊子)에는 노골적인 공자에 대한 비난이 수십 차례나 등장하고 있다. 물론 노자의 유일한 경서인 ‘도덕경’에는 공자에 대한 비난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그러나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에는 공자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내용이 전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무릇 성인들의 종교나 철학을 전파하는 데에는 탁월한 제자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만약 플라톤이 없었더라면 소크라테스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아난이 없었더라면 부처의 경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며,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바오로가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 확산되지 못하였을 것이다.마찬가지로 맹자(孟子)가 없었더라면 공자의 사상은 맥이 끊겼을지도 모르며,장자가 없었더라면 노자는 다만 수수께끼의 인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따라서 중국에서는 유가사상을 공자와 맹자의 이름을 합해서 ‘공맹사상(孔孟思想)’이라 부르고 있으며,도가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이름을 붙여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한다.’는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처럼,장자는 특히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을 배척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사마천도 장자를 ‘노자열전’편에 함께 묶어 설명하고 있는데,수수께끼의 인물이었던 장자에 대한 기록 역시 짤막하며 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자는 몽(蒙)사람이며,이름은 주(周)다.일찍이 칠원성(漆園城)의 관리가 되었다.양의 혜왕(惠王)이나 제의 선왕(宣王) 시대 사람이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학문은 나름대로 무척 박학다식하나 결국 그 요점은 노자의 학술로 귀착된다.그래서 10만여자의 그의 노작은 노자의 가르침에다 자신의 설명을 덧입힌 우화(寓話)로 일관하고 있다. ‘외루허(畏累虛)’라는 산(山) 이름,‘항상자(亢桑子)’라는 인명 등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가공적인 것이나 문장을 잘 엮어 세상 인정을 교묘히 이용해 유가나 묵가(墨家)를 절묘하게 공격했으므로 당대의 어떤 대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비판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의 언사는 너무나 방대했고,자유분방했으며,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았다.그렇기 때문에 왕공이나 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초의 위왕(威王:BC 339∼325 재위)이 장주가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사자에게 후한 선물을 들려 장주에게 보냈다. ‘주군께서 선생님을 재상으로 모시고자 합니다.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이 말을 들은 장주가 웃으며 말했다. ‘천금이라면 막대한 금액인데다가 재상 또한 존귀한 지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그러니 마다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러자 장주가 말했다. ‘자네,교제(郊祭:교외에서 지내는 천제)에서 희생되는 소를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소를 어떻게 기르던가.’ ‘몇 년 동안 잘 먹이고,수 놓은 옷을 입혀서 호화롭게 사육하지요.’ ‘아무리 그렇지만 끝내는 태묘(太廟)로 끌려 들어가 죽게 되지.’ 사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 때를 당해 죽기 싫다며 갑자기 돼지새끼가 되겠노라 아우성을 친다 해서 소가 돼지로 변하던가.어서 그냥 돌아가게.나를 더 욕되게 하지 말고.’ ‘하지만.’ 사자가 말을 덧붙이려 하자 장자가 말을 맺었다. ‘차라리 나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유유하게 놀고 싶다네.왕에게 얽매인 존재는 되기 싫으이.못 알아듣겠나.죽을 때까지 벼슬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마음대로 즐기며 살고 싶단 말일세.’”
  • 儒林(166)-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6)-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은둔자로서 어떻게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는 공자를 이처럼 냉소적으로 비웃는 최고의 장면은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보인 행동이다.이 역시 논어의 미자편에 나오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공자의 곁을 지나갔다. ‘봉새야,봉새야. 어찌하여 덕이 쇠하였던가. 지난 일을 탓해도 소용없지만 앞일은 바로잡을 수 있는 것 아서라,아서라. 지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니라.(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殆而)’”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얘기를 나누려고 하였으나 접여는 피해 달아나 버려서 같이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미치광이 접여는 실제로 미친 사람이 아니라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해 사는 거짓광인인 것이다.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정치에 뛰어든 공자’의 행동은 위태로우며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이와 같은 세 가지의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상을 피해 사는 은둔자,즉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공자의 태도는 어리석은 미친 짓으로 사마천의 기록처럼 ‘같지 않은 두 가지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공자를 비웃은 네 사람,즉 장저와 걸닉,노인과 미치광이 접여 등 모든 사람이 바로 초나라 사람이란 점이다.초나라는 바로 노자가 태어난 곳이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였던 김학주(金學主)의 탁월한 지적처럼 노자의 도가사상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초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도가사상은 유가사상과 함께 중국사상의 표리를 이루고 있으며,유가사상이 중국 북방(황하유역)의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면 도가사상은 중국의 남방(장강유역)의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그것은 공자가 중국의 북방인 노나라 출신이고,노자는 남방의 초나라,즉 지금의 하남성 출신이라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이들은 각각 중국북방과 남방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 북방과 남방의 차이는 기후와 자연에 있어서 뿐 아니라 사람의 기질이나 학술,문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성격상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북방은 날씨가 차갑고,자연조건이 거칠고 메말라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 주위의 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생물이 잘 자라고,농산물이 풍부하여 사람들은 별 걱정 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그 때문에 북방사람들은 투쟁적이며,현실적인데 반하여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로우며 낭만적이다.이러한 대조적인 지리적 특색은 그처럼 대조적인 문화와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공자도 남방의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공자의 제자 중 가장 성격이 급하고,공격적이었던 자로가 공자에게 ‘강함이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질문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중용’은 기록하고 있다. “네가 묻는 강함은 남방의 강함인가,아니면 북방의 강함인가.그렇지 않으면 네가 가진 너의 강함인가.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서 가르치고 무도함에 대해서도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인데,군자들은 그렇게 처신하는 법이다.또한 북방의 강함이란 무기와 갑옷을 깔고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인데 강자들이 그렇게 처신하는 법이다.” 공자의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남방과 북방의 기질은 또렷이 구별된다.남방은 부드럽고,너그러움을 장점으로 강조하고 있으며,북방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전쟁을 하고,비록 무기와 갑옷을 깔고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북방과 남방의 기질상의 차이는 이처럼 공자가 생존해 있는 당시에도 또렷이 구별되어지던 독특한 형질이었던 것이다.
  • 儒林(165)-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5)-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논어의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장저와 걸닉이란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공자는 그들 곁을 지나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있는 곳을 물어보게 하였다.자로가 가까이 가니,장저가 먼저 물었다. ‘저 수레에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자로가 대답하였다. ‘공구라는 분입니다.’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는 나루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소.’ 이번에 걸닉에게 물으니 걸닉이 말하였다. ‘당신은 누구시오.’ ‘중유(仲由)라는 사람입니다.’ ‘그럼 당신은 노나라 공구의 제자로군요.’ ‘그렇습니다.’ 자로가 대답하자 걸닉이 웃으며 말하였다. ‘지금 세상은 온통 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과 같은데 그 누가 강물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겠소.또한 당신도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공자)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서도 그들은 밭갈이를 멈추지 않았다.”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자신의 정치이상을 현실정치에 접목시키기 위해 많은 제후국들을 주유하였으나 결국 벽에 부딪쳐 사람들을 피해 도망쳐 다니고 있었다.그러나 장저와 걸닉은 아예 세상을 피해 밭갈이의 은둔생활을 하는 노자의 제자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세상의 물줄기를 바꾸려는 공자’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그들의 눈으로 보면 나루터도 모르는 공자가 어떻게 강물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자로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고하자 공자께서는 언짢은 듯이 말하였다. ‘새나 짐승과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없는 일이다.내 천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그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 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공자가 언짢은 표정(憮然)으로 새나 짐승과 어울려 사는 은둔생활보다 사람과 더불어 살며,사회의 제도를 개혁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처연한 변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인간미 넘치는 공자의 참모습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에 대한 불만이 또다시 계속되는데 그것에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자로가 숨어사는 노인을 만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다 뒤처져 있을 때 막대기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걸머지고 걸어가는 노인을 만났다.자로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께서 저희 선생님을 못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하였다.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그리고 노인은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 밭의 풀을 뽑았다.자로는 손을 모아잡고 공손히 서 있었다.노인은 자로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머물게 하고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고,또 자기의 두 아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다음 날 자로가 공자를 만나서 모든 사연을 이르자 공자는 ‘숨어사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노인을 찾아보도록 하였다.그러나 자로가 가보니 노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여기에서도 숨어사는 사람으로 표현된 노인은 도가사상을 따르는 은자(隱者)임이 분명하다.그의 눈으로 보면 밭갈이와 같은 노동도 하지 않고,오곡도 분별하지 못하는 공자가 무슨 스승이 될 수 있겠느냐고 신랄하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 儒林(164)-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4)-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이렇듯 노자와 공자는 중국의 사상을 양분하는 양대 산맥이었으면서도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사상이 현실적이라면,노자의 도가사상은 초현실적이다.공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를 인(仁),의(義),예(禮),지(智)와 같은 훌륭한 덕과 올바른 예의제도로써 다스려 보려고 애를 쓰는 데 비하여 노자는 어차피 사람은 그 어떤 제도로 교화되거나 변화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현실 차원을 넘어선 도(道)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자기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릇된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적인 판단 아래 행동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곧 노자의 사상은 사람의 이성적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올바르다,훌륭하다고 믿는 것은 모두 절대적으로 올바르거나 훌륭한 것이 못 된다.올바른 것은 그릇된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고,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사람들의 모든 가치,즉 높다,낮다,길다,짧다,아름답다,추하다,행복하다,불행하다는 모든 판단이 그러한 것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불행에 빠지게 되고,사회적으로는 혼란과 분쟁이 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절대적인 원리로서의 도의 추구,인간 이성의 한계성에 따른 각성에서부터 이른바 무(無)의 사상과 자연의 사상을 발전시킨다.‘무’란 도의 본원적 상태이며,그것을 다시 인간에의 성품에 있어 무위(無爲),무지(無知),무욕(無慾),무아(無我) 등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결국 노자는 사람들의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그리고 사람들이 인위적이고,의식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곧 ‘자연’인 것이다.‘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저절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모든 가치판단이나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뜻한다.그것은 자연의 한 구성 요소로서 인간 본연의 회복이며,인간이 타고난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곧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유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회 참여를 통하여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군자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자연 상태 속의 은둔생활을 통하여 신선이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유가사상은 도가사상을 ‘현실도피’라고 비난하고 있으며,도가사상은 유가사상을 ‘지나친 세속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공자는 시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를 부활시키려고 애썼으나 노자는 그 시대의 혼란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주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는 물론 모든 인위적인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유가와 도가사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한다.유학자들 역시 노자를 이런 식으로 배척한다.‘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일을 꾀할 수 없다.’” 사마천의 기록처럼 공자의 유가와 노자의 도가는 두 갈래의 ‘같지 않은 길’인 것이다.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 한다.’라는 사마천의 기록 역시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훗날 공자가 초나라의 작은 속국 중의 하나였던 섭(葉)을 방문했을 때 길가에서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을 만나는데,논어에 기록된 이 장면을 통해 당시 공자가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미뤄 짐작케 하고 있다.
  • 儒林(160)-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0)-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공자가 양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공자의 나이 17세 때의 일로 그 무렵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한 직후였다.사마천은 두 사람의 악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상복을 입고 갈대를 띠고 있을 때 노나라의 대부인 계씨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그때 공자도 초대되어 참석했는데,계씨의 가신인 양호가 그런 차림의 공자를 보고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리치며 말하였다. ‘주인님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계신다.그런데 고집스럽게도 그런 차림으로 예를 지키려는 그대는 초청될 수 없다.’ 공자는 문전박대를 당한 뒤 돌아 나오고 말았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평소에 상례를 중시하였던 공자는 어머니를 장사지낸 후 상복을 입고 잔치에 참석한 듯 보인다.그러나 이러한 옷차림을 양호는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쫓아내어 문전박대를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그러나 역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양호는 이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큰 명성을 얻고 있는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다. 논어 양화(陽貨)편의 첫머리에는 그런 얘기가 실려 있다. “양호가 공자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는 만나 주지 않으셨다.그러자 양호가 공자께 돼지를 선물로 보내왔다.공자는 양호가 집에 없을 만한 때를 기다려 사례를 하러 가다가 도중에서 그를 만났다.양호가 공자에게 말을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난 선생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호는 평소 그토록 만나려고 했으나 쉽게 만나 주지 않던 공자를 보자 반색을 하며 말을 꺼냈다. ‘나라를 잘 다스릴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라를 혼란한 채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대답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양호가 다시 물었다. ‘일을 하고자 하면서도 번번이 때를 놓치는 것을 지혜롭다 하시겠습니까(好從事而失時 可謂知乎).’ 공자는 다시 말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양호는 웃으며 말하였다. ‘세월은 흐르고 있고,시기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日月逝矣歲不我與).’ 예부터 중국에서는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만나고자 하여도 만나 주지 않는 공자를 억지로라도 만나기 위해서 양호는 먼저 공자에게 돼지를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선물을 받고서도 답례를 하지 않는 것은 평소 예를 숭상하고 있는 공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양호가 집에 없는 틈을 기다려 답례를 하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양호와 마주쳐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이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호는 어떻게든 공자를 정치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며,공자는 이를 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씨를 비롯한 삼환씨의 대부들이 벌이는 전횡조차 부도덕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공자였으므로 하물며 가신에 불가한 양호가 방자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꼬락서니는 도저히 마음속으로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공자는 집요한 양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말꼬리를 잡히지 않고 교묘하게 피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습니다.장차 나도 벼슬을 하겠습니다.’”
  • 儒林(158)-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58)-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이처럼 비정상적인 남녀관계의 불륜에 의해서 사생아로 태어난 공자는 외롭고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낸다.공자의 자가 ‘중니’인데,‘중’은 형을 뜻하는 백(伯)과 아우를 뜻하는 숙(叔)의 중간을 뜻하는 용어이므로 공자에게는 틀림없이 형이 있었을 것이다.논어에 보면 남용(南容)이란 사람의 행실이 훌륭한 것을 보고 공자가 ‘그에게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형은 숙량흘의 첩이 낳은 불구의 맹피였을 것이다.그러나 공자는 실제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 특히 아버지였던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되던 해 죽어버렸으므로 공자는 외로웠을 뿐 아니라 가난까지 겹친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낸다.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의 어머니는 숙량흘이 죽자 곡부의 동쪽에 있는 방(防) 땅에 장사를 지내놓고도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감춰두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어린 공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일깨워 주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이었지만 공자가 장성한 뒤에도 계속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난해서 제대로 장사를 지내지 못한 데다 굳이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서 태어난 수치스러운 사실을 아들에게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청년시절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는데,이때의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자 오부의 성 밑에 있는 구(衢)라는 거리에 빈소를 꾸몄다.아직 부친의 묘소를 몰랐기 때문에 훗날 합장을 기대한 근신하는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먼 훗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의 묘소가 발견되어 공자는 비로소 부모를 합장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음을 자각하게 된다.바로 장례수레를 끄는 상여꾼의 어머니가 용케도 오래 전에 장사지냈던 숙량흘이 묻혀 있던 장소를 공자에게 가르쳐 줘 비로소 공자는 방 땅에 부모를 합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사상 가장 뛰어난 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공자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불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인 것이다. 어떻든 공자가 태어났을 적에는 공자의 집안은 보잘것없어 사회에서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사(士)에 속하는 계급이었다.이 계급은 위로는 귀족 대부들이 있고,아래로는 서민과 상공계급이 있는 중간계층이었다.스스로 노력하고 운이 좋으면 좀더 위 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잘못하면 서민계층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입장이었다.사는 자기의 관직을 유지하고 잘 살아나가자면 반드시 정치를 맡고 있는 공경귀족들에게 빌붙어 자기 땅을 경작하거나 생산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벼슬살이를 하는 것이 보다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사기에는 이 무렵의 공자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孔子貧且賤)” 실제로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청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젊어서 미천했기 때문에 비천한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 또한 공자의 용모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공자는 자란 뒤 키가 9척 6촌(210㎝)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사마천은 공자를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丘)라 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儒林(157)-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57)-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공자가 이처럼 예에 대해 묻기 위해 평소에 존경하고 있는 노자를 만나러 여행을 떠났던 것은 공자의 출신 성분과도 관계가 깊다. 예(禮). 모든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예는 특히 공자 가르침의 핵심이 되고 있는데,공자는 자신의 아들인 리(鯉)에게 다음과 같이 예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근거가 없게 되며,예를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서 설 근거가 없게 된다.(不學禮 無以立 不知禮 無以立也)” 공자가 강조한 예는 개인 뿐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기능으로써도 중요한 수단이었는데,따라서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써 하고,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으로써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공자가 이처럼 예의 효용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은 공자의 출생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데,그것은 공자가 사에 속하는 유(儒)라는 특수한 신분의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태생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비극적인 운명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숙량흘은 안씨(顔氏)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본시 노나라의 시씨 집안에 장가들어 아홉 명의 딸만을 낳았을 뿐 아들이 없어 다시 첩을 얻었으나 맹피(孟皮)라는 이름의 다리불구인 아들을 낳았다.그 뒤 60세의 나이로 안씨 집안의 셋째 딸인 안징재(顔徵在)와 정을 통하여 낳은 것이 바로 공자였던 것이다. 숙량흘이 안씨 집안에 청혼을 하자 아버지는 ‘숙량흘은 비록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집안이 좋고 건장하고 힘이 세다.’고 하면서 딸들에게 출가할 의사가 있는가 물었다.첫째,둘째 딸들은 늙은 숙량흘에게 출가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셋째 딸 안징재만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숙량흘에게 시집가는 것에 동의하였다고 ‘공자가어’는 전하고 있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임신을 하자 이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하는데,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자가 중니(仲尼)라는 것도 이 산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사마천이 ‘숙량흘과 안징재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고 기록한 내용 중에 야합이란 말의 뜻은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야합(野合). 이는 문자 그대로 집이 아닌 ‘들판에서 통정을 한다.’는 뜻인데,흔히 ‘정식으로 결혼해 절차를 밟지 않은 두 남녀가 부적절하게 정을 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따라서 호사가들은 숙량흘이 안징재를 유혹하여 들판에서 정을 나눴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해석이고,어쨌든 64세가 된 노인과 20세도 되지 않은 처녀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났음은 분명한 것이다.또한 야합이란 글 뜻으로 보면 두 사람이 불륜의 결합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공자는 사생아로 기원전 551년(양공 22년)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지금의 산둥성 곡부 남쪽 22㎞ 지점에 있는 추현(鄒縣)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태어난 생년월일은 각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1952년 중화민국 교육부에서 전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검토한 결과 공자의 탄생일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기원전 551년 음력 8월27일(양력 9월28일)’
  • 儒林(156)-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56)-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공자가 찾아가고 있는 사람은 이렇듯 바로 라오시오스 즉 노자인 것이다.전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80년간이나 들어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백발로 그래서 이름도 ‘늙은 자식’이라 불렸다는 노자.이 노자를 공자는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대충 헤아려보면 공자가 노자를 만나러 갈 무렵에는 노자가 공자보다 나이가 20∼30세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무렵 노자의 나이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을 것이다. 노자는 공자와는 달리 ‘유가’를 형성하여 제자를 키우거나 학문을 가르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므로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주나라로 구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마음속으로 노자를 존경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로는 주의 노자,위(衛)의 거백옥,제의 안평중,초(楚)의 노래자(老萊子) 등이다.” 공자가 위대한 정치가인 안평중,즉 안영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기록한 바가 있다. 그러나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 중 첫 번째로 노자가 등장하고 있음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인 것이다.사기에 의하면 노자가 평생 동안 공식적인 벼슬을 했던 것은 주나라의 수장실(守藏室)의 기록관인 사(史)가 고작이었다.수장실이라 하면 왕실 서고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중앙도서관을 지키는 사서였던 것이다.아마도 노자의 그 웅대하고 심오한 사상은 수장실을 지키면서 수많은 책을 읽고 사색함으로써 완성되었겠지만 이미 그때 전국시대 최고의 대학자이자 사상가였던 공자가 수천 수만리의 먼 길을 무시하고 오직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은자(隱者)를 찾아가는 것만 보더라도 공자의 열정적인 학구열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배움에 있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공자의 태도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을 가려서 따르고 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라고 말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이 그가 배울 스승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고 말함으로써 배움에 있어서 몰두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논어의 첫 장도‘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하고 있는 공자였으므로 공자가 ‘공야장’편에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공자가 얼마나 배움에 철두철미하였던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열 집이 있는 고을이라면 반드시 충성과 신의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지만,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는 죽을 때까지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다.이는 조금 안다고 해서 자신의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착각하는 오늘날의 변설가들이 심각하게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덕목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죄악이며 무서운 범죄행위인 것이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노자를 만나러 간 공자는 노자에게 특히 예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 같다.왜냐하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으므로. “남궁 경숙과 함께 주나라로 간 공자는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물었다.”
  • 儒林(152)-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52)-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기원전 506년. 공자는 남궁경숙(南宮敬叔)과 주(周)나라로 여행을 떠난다.제나라로 망명하여 1년 남짓 외유하였던 것이 첫 번째 출국이라면 그 후 다시 9년 만에 해외로 출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출국은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망명하였던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이때 공자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들어 46세 되던 해였다. 이미 노나라의 주군이었던 소공은 7년 동안이나 제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하였으며,그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왕위에 올랐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오히려 계씨의 횡포는 더욱 심해져서 내란이 일어날 만큼 노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어쨌든 새로운 임금이 즉위한지 4년이 된 정공 4년.공자는 수레를 타고 평소에 천하의 종주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주나라를 향해 두 번째의 출국을 단행한다. 이때 공자를 도와 함께 떠난 사람은 남궁경숙이었는데,그는 공자의 초기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그러나 남궁경숙은 공자에게서 예를 배운 제자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마천이 쓴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사마천은 공자의 70인 제자들을 낱낱이 기록하여 별항을 만들어 공자의 제자열전을 기록하고,그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의 학자들이 흔히 공문(孔門)의 70인 제자들을 저울질하여 칭찬하는 가운데에는 실제 이상으로 기리는 적도 있고,역시 실제 이하로 비방하기도 한다.어느 쪽도 모두 제자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다.제자들의 명부는 공씨의 벽 가운데에서 나온 고문(古文)에 의한 것이니 거의 정확할 것이다.나는 공자 제자들의 이름과 대화를 모두 ‘논어’에 실린 제자들의 문답에서 뽑아 차례대로 엮었으며,의심나는 것은 여기에 싣지 않았다.” 사마천의 말대로 남궁경숙은 공자의 제자임에도 공자의 집에서 전해오는 고문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논어’에 나오는 70여명의 제자 중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46세 되던 해,다른 제자는 모두 제쳐놓고 주나라로 남궁경숙과 함께 두 번째의 출국을 단행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공자와 남궁경숙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특별한 인연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따로 기록하고 있는데,그 내용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무렵 노나라에는 국보적인 유물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그것은 솥(鼎)이었다.고대중국에서 세 발로 만든 청동 솥은 원래 천자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그 후로 청동 솥은 제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신성한 제물로 여겨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솥은 구정(九鼎)이라 하여 고대 순임금 때 주조되어 이를 가진 나라는 정통적으로 천자가 계승하고 있다는 상징물로 신성시되어 왔던 것이다.따라서 하(夏),은(殷), 전국시대의 종주국인 주(周)왕조 대대로 이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는데,노나라에 있는 솥은 천자를 상징하는 구정이 아니라 정고보(正考父)란 재상의 명문을 새긴 솥이었던 것이다.정고보는 송나라의 제10대 대공(戴公)에서 시작하여,11대 무공(武公),12대 선공(宣公) 등 3대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현인이었는데,이 청동 솥에는 정고보의 명문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임명을 받고는 윗몸을 굽히고,두 번째 임명을 받고는 허리를 굽히고,세 번째 임명을 받고는 엎드리다시피 하여,담을 의지하여 길을 다니지만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아니한다.여기에 범벅이라도 좋고 죽을 쑤어도 좋다.내 입에는 풀칠만 하면 그만이다.”
  • 儒林(148)-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현인을 사랑하였던 안영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일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평소 생색내지 않는 성미의 안영인지라 월석보에게 아무런 말도 않고 그냥 안채로 들어가고 말았다. 얼마 후 하인에 의해 한 장의 문서가 안영에게 올려졌는데,펼쳐보니 월석보가 보낸 서신이었다.그 내용을 읽어보니 절교장이었다.깜짝 놀란 안영이 의관을 바로 잡은 뒤 황급히 객실로 나아가 월석보에게 물어 말하였다. ‘어디 화라도 나셨습니까?’ 월석보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평소 월석보를 존경하고 있던 안영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비록 신이 어질지는 못하지만 선생을 재앙에서 구해 드렸습니다.그런데도 선생께선 이토록 급하게 절교를 선언하시다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군자란 대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굴복하지만 자기를 이해해주는 자에게는 믿고 자기의 뜻을 나타낸다고 들었습니다.’ 월석보의 비난에 안영이 공손하게 물었다. ‘신이 선생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자 월석보는 대답하였다. ‘들어보십시오.내가 죄수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그들 옥리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굴복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당신은 나를 이해하는 바가 있어 타고 있던 말 한 필을 풀어 속죄금으로 내고 나를 풀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틀렸습니다.’ 월석보는 안영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른 척 예를 무시하면서 곧바로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결국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 것이 돼버렸습니다.나를 알아주면서도 예의를 무시하신다면 나는 차라리 죄수들 속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안영은 크게 뉘우치면서 말하였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신이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습니다.앞으로 선생을 상객(上客)으로 모시겠습니다.’” 사기의 ‘안자열전’에 나와 있는 이 일화를 보면 안영이 선행을 베풀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는 소탈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그러나 현인 월석보는 바로 이러한 형식적인 예의에 초탈한 안영의 태도를 오히려 비례(非禮)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결례가 된다.’는 말은 이러한 안영의 태도를 표현한 말로 공자 역시 이를 경계한 일이 있었다.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의 말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중정(中正),즉 중용(中庸)의 도를 추구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자장(子長)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 공자는 두 제자를 비교한 다음 이렇게 말을 하였다. ‘자장은 아무래도 매사에 지나친 면이 있고,자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낫겠군요.’ 자공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 과유불급(過猶不及)은 결국 이렇듯 ‘과공비례’와 같은 뜻인 것이다.
  • 儒林(148)-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48)-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현인을 사랑하였던 안영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일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평소 생색내지 않는 성미의 안영인지라 월석보에게 아무런 말도 않고 그냥 안채로 들어가고 말았다. 얼마 후 하인에 의해 한 장의 문서가 안영에게 올려졌는데,펼쳐보니 월석보가 보낸 서신이었다.그 내용을 읽어보니 절교장이었다.깜짝 놀란 안영이 의관을 바로 잡은 뒤 황급히 객실로 나아가 월석보에게 물어 말하였다. ‘어디 화라도 나셨습니까?’ 월석보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평소 월석보를 존경하고 있던 안영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비록 신이 어질지는 못하지만 선생을 재앙에서 구해 드렸습니다.그런데도 선생께선 이토록 급하게 절교를 선언하시다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군자란 대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굴복하지만 자기를 이해해주는 자에게는 믿고 자기의 뜻을 나타낸다고 들었습니다.’ 월석보의 비난에 안영이 공손하게 물었다. ‘신이 선생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자 월석보는 대답하였다. ‘들어보십시오.내가 죄수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그들 옥리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굴복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당신은 나를 이해하는 바가 있어 타고 있던 말 한 필을 풀어 속죄금으로 내고 나를 풀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틀렸습니다.’ 월석보는 안영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른 척 예를 무시하면서 곧바로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결국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 것이 돼버렸습니다.나를 알아주면서도 예의를 무시하신다면 나는 차라리 죄수들 속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안영은 크게 뉘우치면서 말하였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신이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습니다.앞으로 선생을 상객(上客)으로 모시겠습니다.’” 사기의 ‘안자열전’에 나와 있는 이 일화를 보면 안영이 선행을 베풀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는 소탈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그러나 현인 월석보는 바로 이러한 형식적인 예의에 초탈한 안영의 태도를 오히려 비례(非禮)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결례가 된다.’는 말은 이러한 안영의 태도를 표현한 말로 공자 역시 이를 경계한 일이 있었다.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의 말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중정(中正),즉 중용(中庸)의 도를 추구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자장(子長)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 공자는 두 제자를 비교한 다음 이렇게 말을 하였다. ‘자장은 아무래도 매사에 지나친 면이 있고,자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낫겠군요.’ 자공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 과유불급(過猶不及)은 결국 이렇듯 ‘과공비례’와 같은 뜻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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