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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23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염유의 말을 듣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글쎄요. 제가 스승에게 여쭈어 보겠습니다.” 자공은 그러나 직접적으로 공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어서 간접적인 은유로서 의사를 타진해 보려한다.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와는 달리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이었으므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의 뜻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자공은 들어가서 공자에게 여쭈어 보았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현인들이시다.” “허지만” 자공은 말을 이었다. “현인들이심이 분명하였지만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백이와 숙제는 세상을 원망했을까요.” “원망하다니.” 공자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인(仁)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어찌 원망하였느냐.(求仁得仁又何怨)”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나와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공은 공자에게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다만 주나라의 무왕이 천하를 통일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고 살다 죽은 백이와 숙제의 예를 들어 공자의 속마음을 타진해 본 것이었다. 이에 공자는 ‘인으로서 인을 구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아버지 괴외를 무력으로 제지한 출공밑에서 벼슬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인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특히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는 스승의 이런 태도를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에게 물었던 자공과는 달리 정공법으로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위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부탁하신다면 선생님은 무엇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나 같으면 반드시 명분 먼저 바로 잡겠다.” 이 말을 들은 자로가 대답한다. “아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느닷없는 자로의 탄식에 의아해진 공자가 다시 물었다. “그것 때문이라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이 세상일에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계시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만 생각하신다는 뜻이겠지요. 도대체 이름 같은 것을 바로 잡아서 어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자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고리타분하게 만사의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는 스승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단순한 자로는 순간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여 말한다. “자로 너까지 이러할 수 있단 말이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케인즈’ 조순 前경제부총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케인즈’ 조순 前경제부총리

    조순 전 부총리는 한국의 ‘케인스(J.M.Keynes)’다. 아니다, 관악산 ‘산신령’이다. 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행을 거른 적이 없다. 또 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진짜 산신령’과 고난도의 선문답을 질펀하게 주고받는다. 북망산에 누워 있는 이태백과 두보가 놀라 깨어날 정도다. 그가 직접 지은 산시(山詩) 하나를 감상해 보자. ‘산위의 어긋어긋 늙은 소나무/꾸불꾸불 구름으로 용처럼 들어가네/평생의 친구라곤 새와 참새뿐/밤낮으로 의지하며 여름 겨울 보내누나’(山上參差列老松/入雲屈曲似蒼龍/巢枝鳥雀平生友/日夜相依過夏冬. 제목 두타산노송(頭陀山老松).2002년 8월23일 작.‘參差’는 ‘참치’로 읽는다.) 조 전 부총리는 제자들과 산행을 자주한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산신령’이라는 표현을 아무 거리낌없이 한다. 그는 오히려 즉흥시를 지어 화답까지 한다. 이래저래 지어놓은 산시(山詩)만 해도 수백편에 이른다. ‘산신령’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 그는 6공화국 시절 경제부총리를 맡았다. 그때 자택인 서울 봉천동에서 관악산을 넘어 출근하곤 했다. 하루는 출입기자들과 함께 관악산을 올랐다. 그런데 산을 타는 모습이 마치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걷는 듯했다.30대의 젊은 기자들이 60대의 부총리를 뒤따르지 못했다. 그저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앞서갈 뿐이었다. 이를 본 누군가 ‘야, 산신령이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한시(漢詩) 실력은 중국에서도 알아줄 만큼 해박하다. 중국 방문 때 즉석에서 한시를 읊으며 일필휘지로 써내려가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선친한테 한문을 배웠다. 논어·맹자 등도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는 요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회장직을 맡아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발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일성록’은 조선시대 정조임금부터 고종까지 임금이 직접 쓴 일기다.‘승정원일기’는 60년 사업이고 ‘일성록’은 30년 사업이다. 학계에서는 ‘일성록’이 발간되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본다. ●스테디셀러 ‘경제학원론’ 조 전 부총리는 딱딱한 경제얘기를 하지 말자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요즘의 화두가 ‘경제’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는가. 그는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거두로 꼽힌다. 그가 지은 ‘경제학원론’은 전공에 관계없이 대학생이면 누구나 일독할 정도로 대학가의 ‘스테디셀러’이다. 얼마 전에는 제자인 이정우 대통령정책기획위원장에게 ‘분배론’을 더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쓴소리를 던져 관심을 모았다. 서울 구기동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하얀 머리와 흰눈썹만 빼면 여전히 동안의 얼굴. 먼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과의 관계를 물었다. “내가 교수 시절 그는 무척 똑똑한 대학생이었지. 그래서 ‘경제학원론’을 만들 때 다른 제자 5명과 함께 참여시켰어. 그는 인플레이션 부분을 맡았지. 숙제를 줬더니 아주 똑떨어지게 정리했더군.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3,4차례 만날 정도로 여전히 아끼는 후배지. 얼마전 언론에서 쓴소리 했다고 보도했는데 사실은 치켜세우려고 한 게 그렇게 됐어.” 현 정권의 경제운영에 대한 ‘고언’을 부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 있어야 해.”라고 했다. 이어 “386들은 (머리가)우수하나 경험이 적어. 그러다보니 자기들만 아는 이론이 바탕이 되고 있지. 결국 현실과 맞지 않게 되고 말아.”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도 실사구시야말로 (경제정책의)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여겼다.”면서 “실사를 파악한 뒤 국가비전을 제시하는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곧 국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경제의)어려움의 씨는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며 경제난의 뿌리 깊은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386세대 머리 우수하나 경험 적어 걱정” “70년대 관치경제에 의해 공업화를 이루다보니 대기업 중심으로 성공을 거두었어. 그러나 이면에는 불균형성이란 이중구조가 생겨났지.80년대에 이를 치유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어. 중소기업은 잘 안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크게 일어난 시기였지. 결국 문민정부가 등장했으나 경제운영은 그 전과 다름이 없었어.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고 국제 경쟁력은 떨어지고.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았지.” 김대중 정권 때의 관치개혁도 들춰냈다. 즉 금융·노동 등 4대 공공부문을 개혁하면서 2년 만에 IMF를 극복했으나, 카드남발과 소비진작, 건설경기를 부추기는 등의 내수를 통한 성장정책의 실정을 꼬집었다. 결국 참여정부가 이를 고스란히 넘겨 받았지만 비슷한 관치개혁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정한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닌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식 같은 경제운영, 예를 들어 동북아 중심 성장, 금융허브, 경제특구 등 과거의 방법을 답습 하다보니 실사구시는 여전히 뒷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경제는 오랜 지병처럼 일조일석에 낫지 않는다. 방법은 딱히 없으며 시일을 두고 치유해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국민과 기업의 사기를 올리고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우선적으로 회복시켜야 원동력이 생겨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국민과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가 책임감을 통감하고 ‘좀더 잘해 보자.’는 사회적 운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부연했다. ●6·25때 통역장교로 임관 화제를 돌려 수능부정 사태 등 최근의 교육문제를 꺼냈다. 그러자 “기러기 아빠가 있는 나라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수능처럼)전국적으로 똑같은 기준을 정해도 (교육제도의)효과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경쟁이 없는 교육은 국가를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며 대학마다 자율권을 많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익과 좌익 등 최근의 분열양상과 관련, 그는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을 예로 들었다. 남북분단과 좌·우익 투쟁의 역사성이 물밑에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늘 분열의 소지가 많다는 것. “가급적 봉합하는 정책이 많이 나와야 해. 정책 입안자들은 말 한마디라도 조용하게 하고 분배 얘기는 될수록 꺼내지 말아야 돼.” 그는 1928년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에 유학자 조정재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49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그는 1년여 동안 강릉농고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그 경력으로 그는 6·25때 통역장교로 임관했다.51년에는 육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발탁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육사11기생들이 그의 첫 제자였다. 1957년 대위로 제대한 그는 경제학 연구를 위해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11년 뒤 귀국, 서울상대 교수로 몸담았다. 이때 정운찬 현 서울대 총장, 좌승희·김승진 박사 등이 그의 제자로 몰리면서 ‘조순학파’라는 한국경제학계의 한 맥을 이루게 됐다. “산이란 춘하추동 언제나 고향이지. 좌우명? ‘도(道)를 밝혀 공(功)을 계산하지 말고, 바름(正)과 의리를 밝혀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이지.” 바둑 아마5단인 그는 최근 조훈현씨와 4점 접바둑을 두어 이겼다. 또 논어와 노자에 빠진 것도 즐거움 중 하나이다.24년째 봉천동에 살고 있는 그는 매일 아침 새벽 서울대까지 부인과 함께 산책을 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49년 서울대졸업 ▲67년 캘리포니아대 경제학박사 ▲68년 서울대상대 부교수 ▲70∼88년 서울대 경제학과교수 ▲81년 학술원회원 ▲92∼93년 한국은행총재 ▲93년 도산서원 원장 ▲95년 서울시장(초대민선) ▲97∼98년 한나라당 총재 ▲98∼2002년 15대국회의원 ▲2002년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바른경제동인회 회장 등으로 활약 ■ 주요저서 경제학원론, 한국경제의 현실과 진로, 중장기 경제개발 전략에 관한 연구,J.M. 케인즈, 화폐금융론, 한국경제의 이해, 조순 경제논평 등
  • [儒林 속 한자이야기] (47)

    日暮途遠(일모도원) 儒林 225에 ‘日暮途遠(날 일/저물 모/길 도/멀 원)’이 나온다.直譯(직역)하면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늙고 쇠약한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많음’을 말한다. ‘해’의 상형인 日의 用例로는 ‘日常茶飯事(일상다반사:항상 있어서 이상하거나 신통할 것이 없는 일)’,‘日就月將(일취월장:나날이 다달이 자라거나 발전함)’,‘愛日(애일:시간을 아낀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을 이르는 말)’ 등이 있다. 暮의 본래 글자는 ‘莫’(말 막)으로 ‘日’의 아래 위로 두 개의 艸(풀 초)를 합한 ‘ ’(잡풀 우거질 망)자가 있는 형상이다. 망망한 대초원의 지평선으로 하루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광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글자가 부정사로 쓰이는 예가 많아지자 원래의 뜻을 보존하기 위해 ‘暮’자를 새로 만들었다.暮의 용례로는 ‘歲暮(세모:한 해가 끝날 무렵. 설을 앞둔 섣달 그믐께를 이른다)’,‘暮雲春樹(모운춘수:먼 곳에 있는 친구를 생각하는 정이 간절함을 이름)’ 등이 있다. 途자의 甲骨文(갑골문)을 보면 발음 요소인 ‘余(나 여)’와 의미 요소인 ‘止(그칠 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止’와 ‘ (쉬엄쉬엄 갈 착)’은 모두 移動(이동)의 뜻을 나타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途의 용례에는 ‘途中(도중:길을 가는 중. 일의 가운데)’,‘途轍(도철:어떤 일을 해 나갈 방도.道理와 뜻이 통한다)’,‘窮途(궁도:가난하고 어려운 경우나 처지)’ 등이 있다. 遠의 用例에는 ‘遠隔(원격:멀리 떨어짐)’,‘敬遠(경원: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않음)’,‘任重道遠(맡길 임/무거울 중/길 도/멀 원)’이 있다. 앞에서 暮의 用例로 들었던 ‘朝令暮改(조령모개)’는 史記(사기) 平準書(평준서)에 나온다. 漢(한)나라 초기는 匈奴(흉노)의 변방 침략이 잦아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耕作(경작)과 守備(수비)를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변방에서 수확하는 곡식만으로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백성들이 獻納(헌납)한 곡식을 변방까지 수송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벼슬을 주는 非常對策(비상대책)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御史大夫(어사대부) 晁錯(조조)는,‘지금 농가에서는 부역이 過重(과중)할 뿐만 아니라 租稅(조세)와 賦役(부역)에 일정한 기준이 없어 아침에 명령이 내려오면 저녁에는 그 명령이 바뀌어 하달된다(朝令暮改)’는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任重道遠’은 論語(논어) 泰伯(태백)편에 나오는데, 선비의 용감한 氣像(기상)을 簡潔明快(간결명쾌)하게 표현한 것이다. 선비, 즉 知性人(지성인)은 度量(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어야 하며,意志(의지)는 굳고 정신은 강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인간다움의 실현을 使命(사명)으로 삼기 때문에 그 책임은 막중하며, 그 책임은 죽음의 순간까지 계속되므로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따라서 이러한 길은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과 鐵石(철석)과 같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선비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또는 많은 일을 했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을 때,歎息(탄식)의 염으로 적곤 했던 ‘日暮途遠(일모도원)’과 뜻이 통한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儒林(235)-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5)-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 공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초나라의 현인으로 알려진 미생묘란 사람이 이 무렵 공자에 대해서 혹평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공구는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서성거리며 살고 있는가(丘何爲是栖栖者與). 말재주를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미생묘가 말하였던 서서(栖栖)의 뜻은 몹시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말로, 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황황망조(遑遑罔措)’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공자를 비웃는 표현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감히 말재주나 피우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고루함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공자는 더 이상 초나라에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다시 위나라로 출발하는데, 이미 세 번이나 찾아갔었던 위나라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 무렵 공자의 생활이 얼마나 여의치 않았는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공자가 또다시 위나라를 찾아갔을 때에는 노나라의 애공 6년(기원전 489년) 공자의 나이 63세 때였다. 56세에 시작된 주유천하가 이미 8년째에 접어든 종반기 무렵이었는데 공자는 물론 제자들도 모두 지쳐 있었다. 스승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제자들은 극도의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으나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입국했을 무렵부터는 각자 자생하여 자구책을 모색할 때였다. 제자들은 더 이상 스승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활로를 개척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입국했을 때는 그나마 공자를 우대하였던 영공은 이미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원래는 태자 괴외가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이 법도였으나 아버지의 음탕한 부인인 남자를 죽이는 것에 실패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오려는 것을 무력으로 막은 사람이 바로 출공이었던 것이다. 행여 왕위를 빼앗길까 하여 외국으로 망명해 있다가 돌아오는 아버지 괴외의 귀국을 무력으로 막았던 출공의 무례를 열국의 제후들은 자주 꾸짖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나라로 돌아가는 스승에게 제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지금까지 예를 보면 위나라에서만큼은 공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았고 출공 역시 제후들의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공자를 등용하여 이를 모면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출공은) 공자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잘해 보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야말로 공자가 등용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대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였다. 평소에 불의를 좇지 아니하는 스승의 성품을 봐서 출공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대 반 불안 반의 아슬아슬한 제자들의 심경이 논어에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등장하고 있다. 스승 공자가 위나라에서 출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벼슬에 나설까 말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 제자들 중 먼저 염유(有)가 말을 꺼내었다.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을 하실까요.”
  • 儒林(234)-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4)-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중국사상 최고의 해학과 비유의 천재였던 장자가 미치광이 접여로부터 질타당한 공자의 모습을 그대로 방관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장자는 접여의 노래를 인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산에 나는 나무는 유용한 까닭에 베어지니 이는 자기가 자기를 베는 것이요, 등잔불은 불붙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제가 저를 태운다. 계수(桂樹)나무는 그 뿌리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은 칠하는 데 쓰이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 어찌된 셈인지 세상 사람들은 다 유용한 곳의 용도는 알면서도 무용한 곳의 용도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가.”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시밭길을 가는 공자. 세상을 달관하고 정신적 자유를 즐기며 사는 미친 척하는 광인 접여. 공자의 눈으로 보면 접여는 미친 사람이지만 접여의 눈으로 보면 공자야말로 진짜 미친 사람인 것이다. 사기에 보면 공자는 이 노래를 듣고 수레에서 내려 접여와 얘기를 나누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접여는 피해 달아나버림으로써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쨌든 접여의 노래를 통해 그 무렵 공자가 가시밭길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이 가시밭 속에서도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점이었다. 소왕으로부터도 소외받은 절대 고독 속에서도 공자는 좌절하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림은 인간만이 가진 최고의 미덕.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야말로 바로 기다림인 것이다. 인내와 기다림은 같은 뜻인 것 같지만 실은 다르다. 인내는 참는다는 자의식을 동반함으로써 고통이 따르지만 기다림은 참는다는 자의식 없이 견딤으로써 인격을 완성시킨다. 헐벗은 나무는 겨울을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림으로써 마침내 꽃을 피운다. 꽃은 인내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접여는 가시나무를 돌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는 공자를 어리석다고 비웃었지만 공자가 지닌 위대함, 즉 기다림의 덕은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공자. 바로 이 무렵 논어에는 공자와 제자 자공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공이 말하였다.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궤 속에 넣어 감추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我待賈者也)’” 이 말은 공자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감동적인 말이다. 자공은 얼마 전 스승에게 ‘어째서 도를 약간 낮추어 절충하지 않습니까.’ 하고 절충안을 내놓았던 바로 그 제자. 따라서 자공이 공자에게 아름다운 옥을 궤 속에 넣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파시겠습니까 하고 양자택일의 질문을 던진 것은 ‘좋은 상인’의 비유를 통해 현실적 타협을 재차 확인하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두 번이나 ‘팔아야지(沽之哉)’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자신은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공자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기다림을 잃지 않았던 인격의 완성자였다.
  • 儒林(233)-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3)-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유일한 희망이었던 소왕이 죽자 공자는 완전히 줄 끊긴 연(鳶)이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아갈 수밖에 없었고 제자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해 폭발직전이었다. 그래도 공자는 초나라를 버릴 수가 없었다. 초나라에 머물면서 차일피일 허송세월을 하고 있자 미치광이 행세로 떠돌아다니던 접여(接與)가 공자의 곁을 지나면서 노래를 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덕은 그토록 쇠하였는가. 지난 일은 탓해도 소용없지만 앞일은 바로잡을 수 있는 것 아서라 아서라 지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니라.” 접여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레에 접근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광인(狂人). 이 미친 사람 역시 공자가 만났던 도가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은둔자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은둔자들이 때로는 밭을 가는 농부로, 혹은 대바구니를 메고 가던 노인으로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미치광이로 나타나는 것은 공자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 위한 죽비(竹)소리처럼 통렬하다. 접여가 노래한 봉황(鳳凰)은 고대중국에서 귀하게 여기던 상상의 새로 머리는 뱀, 턱은 제비, 등은 거북, 꼬리는 물고기 모양이며, 깃에는 오색의 무늬가 있던 상서로운 새였던 것이다. 여기서 봉황이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봉황과 같은 귀한 존재인 그대 공자여, 어찌하여 위태로운 세상에 말려들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가.‘아서라 아서라(已而已而)’두 번이나 강조하여 이를 경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치광이 접여의 등장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부러 미친 것으로 행동하는 햄릿처럼 접여는 어지러운 난세에 숨지 아니하고 위태로운 정치에 뛰어들어 위험을 자초하고 있는 공자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공자를 꾸짖는 장면의 클라이맥스인 것이다. 이 클라이맥스의 장면을 장자가 놓칠 리가 있겠는가. 장자의 인간세(人間世)편에 보면 공자를 꾸짖는 접여를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초에 갔을 때 미친 체 행세하는 은자 접여가 그 대문 앞에 나타나 이런 노래를 불렀다. ‘봉황새야 봉황새야/너의 덕도 쇠했구나./오는 세상 나 못 보고/가는 세상 나 못 좇네./도 있을 땐 성인나와/천한 정사 도우시나/도 없을 땐 몸을 숨겨/명철보신(明哲保身) 하시는 것/지금이야 형벌이나/면하는 게 고작이니/새 깃보다 가벼운 복(福)/잡는 사람 아무도 없고/땅보다 무거운 복/피하는 이 전혀 없네./그만둬라. 도덕으로/남에게 대하는 일/위태롭게 예의 가져/남을 꽁꽁 묶는 사람 /가시 가시 가시나무/나의 발은 그 못 밟네./돌아 돌아가는 내 발/찔리지를 그 못하네.’” 접여의 노래 중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미양(迷陽)을 가리키는 말로 미양이란 초나라에서 나는 풀로 촘촘하고 줄기가 길며, 그 거죽에는 가시가 많은 나무인데, 이 가시나무와 같은 세상에서 돌아 돌아가지 어찌하여 가시밭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가 하고 비웃는 노래인 것이다.
  • 儒林(231)-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1)-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말은 바로 가섭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 이 미소를 보고 가섭을 자신의 정법제자임을 인증하며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오묘한 불법에 들어가는 길)과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문자나 경전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이 있다. 이것을 가섭에게 전해주마.” 석가가 가섭을 이심전심의 수제자로 삼았듯이 공자는 안회야말로 자신의 후계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는 공자가 미소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대의 말 그대로이다. 안회여, 네가 만일 부자라면 나는 너의 가재(家宰) 노릇이라도 할 터인데.” 공자는 이처럼 안회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논어에 보면 제자들 중에서 유독 안회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안회와 종일토록 말을 해봐도 전혀 어기는 일이 없어 어리석은 사람만 같다. 그러나 물러나면 그는 사생활을 성찰하며 내 말을 더욱 밝혀내고 있다. 안회는 절대 어리석지 않다.” 안회가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가섭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신기하게 일치한다. 이는 동쪽으로 온 달마(達磨)가 ‘지식을 버리면 버릴수록 자성(自性)이 밝아진다.’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안회가 지식을 버리고 ‘아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얻음으로써 큰 어리석음(大愚)의 경지를 터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안회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안회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못 된다. 그는 내 말이면 무엇이나 기뻐한다.” 스승에게 도움을 주려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자로나 자공과는 달리 어리석은 바보처럼 공자의 모든 말에 기뻐하였던 안회. 안회야말로 참스승 공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았던 단 한 사람의 참제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회가 공자에 앞서 30대 초반의 나이로 단명하자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喪予 天喪予).’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안회가 죽은 후에도 공자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여러 번 안회에 대한 추억을 술회하는데, 훗날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애공이 ‘제자 중에서 누가 학문을 가장 좋아합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 공자의 말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안회라는 사람이 학문을 제일 좋아해서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도 않고 과실을 거듭 범하지도 않았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죽고 이제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상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있던 안회.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안회의 가장 훌륭한 점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던 학문적 태도였다. 안회는 머물러 있음을 경계하였다. 마치 고인 물은 썩듯이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면 성장이 멈추어 버릴 것을 안 안회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끊임없이 진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안회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애석하도다. 나는 그가 진보하는 것만 보았지 멈춰있는 것은 보지를 못하였다(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 儒林(227)-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7)-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그러나 공자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은 제자는 자로뿐이 아니었다. 논어와는 달리 사기는 ‘공자세가’에서 자로뿐 아니라 자공까지 이 비난에 합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군자도 곤경에 빠지게 마련인데 다만 소인과 다른 것은 곤경에 빠져도 함부로 굴지 않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대답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자공도 공자를 힐난하는데, 그 내용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자공이 분개하여 투덜거렸다. 이를 본 공자가 말하였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너는 내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그렇지 않지. 나는 하나의 성(誠)을 가지고 꾸준하게 가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 기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공자의 면전에서 자로가 화를 내고, 자공이 분개하여 투덜거릴 만큼 이 무렵 공자는 가장 믿었던 제자들로부터 집중적인 성토를 받는 것이다. 제자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마침내 공자는 세 사람의 제자를 불러들인다. 자로와 자공, 그리고 안회였는데 이들은 모두 공자의 제자 중에서 으뜸인 수제자들이었다. 공자는 이 세 명의 제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마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행하였던 철학적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답하는 제자들의 답변을 통해 공자는 13년의 주유생활 중 가장 핵심적인 유가사상의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공자의 생애 중 가장 곤경에 빠졌던 극한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던진 이 질문은 부활한 예수가 마지막으로 발현하여 수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준엄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이는 선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중의 하나인 ‘이것이 무엇인가.(是甚)’라는 질문과 같은 의미이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존재론적 질문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자로를 불러놓고 묻는다. “시경(詩經)에 보면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하고 읊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도가 그릇된 것일까. 우리가 어찌하여 그런 지경에 빠졌을까.” 공자의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시경’은 황하유역의 여러 나라에서 부르던 시가 305수를 집대성한 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중국문학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유가의 경전으로도 중요한 책 중의 하나였다. 특히 공자는 말년에 제자들에게 시경을 첫머리에 두고 가르쳤는데,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성의 발로로서 정서를 순화시키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전범(典範)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평소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할 수가 없다.(不學詩無以言)’고 가르쳤던 공자는 시경의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대들은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감흥을 일으켜주고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며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히 불평을 할 수 있게 한다. 가깝게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줄 알게 하며,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알게 한다.”
  • 儒林(22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 모습을 본 애공은 감동하여서 친히 신포서의 머리를 받들어 급히 물을 먹이고 약을 써서 정신이 돌아오도록 한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내가 모극(矛戟)을 구비함은 그대와 함께 한 원수를 치기 위함이고 내가 갑병(甲兵)을 훈련함은 그대와 함께 거사하기 위함이네.” 함께 무기를 들고 공동의 적인 오나라와 싸우겠다는 애공의 뜻이 담긴 이 시를 들은 후 신포서는 아홉 번 절하여 최대의 사의를 표한다. 그 후 진나라에서는 4만 명의 병력인 전차 500승을 파견하여 단번에 오나라의 군사를 격파한다. 이로써 오나라에 빼앗길 뻔한 초나라는 부흥하고 다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의 궁중 뜨락에서 7일 낮밤을 통곡하면서 나라의 위기를 구한 신포서의 충심에서 ‘곡진정(哭秦庭)’, 즉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진나라의 궁궐 뜰에서 울면서 도움을 청하다.’라는 성어가 나온 것. 이처럼 소왕은 신하를 아끼고 하늘의 도를 알았던 그 무렵 최고의 군주였던 것이다. 공자가 채나라에 머물고 있을 무렵 오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니, 오나라와 철천지원수인 초나라는 진나라를 도우려고 군사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소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에 나서 오늘날 안휘성의 호현(毫縣)인 성보(城父)라는 진나라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진나라의 성보와 채나라는 지척지간의 거리. 그러지 않아도 파다한 소문으로 공자를 한번 친견하고 싶었던 소왕은 이 기회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빙한다. 공자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에 소왕을 ‘하늘의 도를 알았던 위대한 군주’라고 칭찬하였던 공자였으므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즉시 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이 소문을 전해들은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아연 긴장하였다. 왜냐하면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의 약점과 대부들의 비행을 낱낱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자를 초강대국인 초나라의 소공이 초빙하여 등용한다면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이들은 서로 연락하여 군사들을 풀어 공자의 일행을 들판에서 포위한다. 이로써 공자일행은 또다시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의 곤경을 논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에 있을 때 양식까지 떨어진데다가 (공자가어에는 ‘공자가 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자들 간에는 병이 나서 드러눕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때도 공자는 강송(講誦)도 하고 악기를 타며 노래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자로는 성이 나서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군자도 곤경에 빠지게 마련이다. 다만 소인이 곤경에 빠지면 함부로 굴게 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지금까지 자로는 스승 공자에게 대놓고 ‘성을 낸()’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침묵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도가를 따르는 은둔자들의 얘기를 전하는 간접표현으로 공자에게 불만을 표출하였으나 마침내 자로는 스승의 면전에서 대놓고 직설적으로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君子亦有窮乎).’라고 노골적인 비난을 단행하는 것이다.
  • 儒林(222)-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2)-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자로의 대답을 들은 장저가 다시 물었다. ‘노나라의 공구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게 뭘 알려 하시오.’ ‘공구라는 분께서 나루터가 있는 곳을 물어보도록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저가 대답하였다. ‘노나라의 공구라면 천하를 주유하면서 모르는 것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나루터쯤을 내게 묻고 있는 것이오.’ ‘도(道)를 안다는 것과 갈 길(道)을 안다는 것은 서로 다르겠지요.’ ‘똑같은데 뭘 그래.’ 그러고 나서 장저는 대답하였다. ‘나는 모르오. 저 사람이 나루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오.’ 장저는 함께 밭일을 하고 있던 걸닉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래서 자로가 걸닉에게 물으니 걸닉이 말하였다. ‘당신은 뉘시오.’ ‘중유라는 사람입니다.’ ‘그럼 당신은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 ‘그렇습니다.’ 자로가 대답하자 걸닉이 말하였다. ‘지금 세상은 온통 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과 같아 천하는 어지러워서 도무지 손 쓸 여지가 없소. 이런 판국에 그 누가 강물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으며 누구와 손을 잡고 변혁을 시도해 보겠다는 거요. 또한 당신도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공자)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면서도 밭갈이는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고하자 공자께서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 함께 어울려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천하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 유명한 일화는 노자의 고향이었던 초의 속국 채나라에서 공자가 당한 한편의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장면에서도 공자와 자로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엿보인다. 물론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르는 장저와 걸닉에게는 나루터도 모르고 사람을 피해 도망쳐 다니는 공자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혹 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돌아와서 공자에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섭공이 ‘스승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자로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 공자의 심기를 건드린 것처럼 장저와 걸닉의 빈정거리는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전함으로써 자신의 불만까지 간접적으로 전하려 하였던 불손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언짢게 생각하였던 대상은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웃은 장저와 걸닉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낱낱이 고함으로써 불만을 드러내 보인 자로였을 것이다. 공자의 가장 용감하고 충실한 애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이러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불만을 나타내 보인 것은 이 무렵 공자와 제자들 간에 불화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제자들과의 불화가 그 어떤 정치적 박해보다, 소외감보다, 궁핍보다, 이교도들의 비웃음보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는데 역시 논어의 미자(微子)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 儒林(221)-제2부 周遊列國 제5장 喪家之狗

    儒林(221)-제2부 周遊列國 제5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논어에 보면 섭공과 공자가 두 번을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눈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섭공은 공자에게 ‘좋은 정치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정치란 간단한 것입니다. 정치란 먼 곳의 사람들은 흠모하여 찾아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며, 가까운 곳의 사람은 기뻐하며 따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자의 대답은 다목적용이었다. 섭공에게 정치란 ‘먼 곳의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해야 합니다.(遠者來)’라고 대답했던 것은 먼 곳에서 찾아온 자신의 입장을 빗대어서 암시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섭공은 애당초 공자를 포용할 만한 그릇이 못되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섭공은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직궁(直躬)이란 행실이 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기의 아버지가 양을 훔쳤을 때 자식으로서 그 사실을 증언하여 체포되도록 하였는데 이를 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우리 마을의 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는데 진실로 강직함이란 그런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는 달리 ‘여씨춘추’에는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의 직궁은 자기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하여 관리들이 아버지를 잡아다 죽이려하자 이번에는 아버지대신 처형을 받겠다고 요구한다. 관리가 그를 처형하려하자 직궁은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하였으니 신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 아버지를 대신하여 처형을 받으려 하니 효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신의가 있고 효성이 있는 사람을 처형한다면 나라 안에 그 누가 또 처형당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아뢴다. 초나라의 임금은 그 말을 듣고 옳다고 생각하여 직궁을 용서해 주는데,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이상하구나. 직궁의 신의라는 것은. 한 아버지를 두고 두 번이나 명성을 취하려 하다니.’라고 탄식하였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천륜의 예를 중시하였으며 직궁과 같은 신의는 없는 것보다 못하며 직궁과 같은 효성도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본 것이었다. 어쨌든 공자는 두 번이나 섭공을 면담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직궁에 관한 얘기가 암시하듯 섭공의 가치관과 공자의 가치관에는 일치할 수 없는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다시 소외된 공자는 어쩔 수 없이 섭나라를 떠나 채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돌아오는 도중 공자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채나라와 섭나라는 중국 장강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지배를 받던 속국. 초나라는 바로 공자의 유가사상과 정반대의 도가사상을 낳은 노자의 고향이 아닐 것인가. 자연 노자의 도가사상을 좇아 자연을 벗삼아 신선을 꿈꾸며 은둔생활을 하는 도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 무렵의 공자는 위로는 정치가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안으로는 제자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밖으로는 전혀 사상이 다른 이교도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고 있어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이러한 사면초가의 처지를 암시하는 내용이 섭나라를 떠나 채나라로 돌아오는 공자에게 연거푸 일어나는데 첫 번째 장면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장저와 걸닉이란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는 그들의 곁을 지나다가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있는 곳을 물어 보도록 하였다. 자로가 가까이 가니 장저가 먼저 물었다. ‘저 수레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는 대답하였다. ‘공구라는 분입니다.’”
  • 儒林(21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1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논어에 보면 계강자가 “염구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고 묻자 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으로 나와 있다. “염구는 재간이 많으니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공자로부터 일찍이 정치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염구는 계강자의 초청을 받자 곧 노나라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 공자는 염구를 불러 당부하며 말하였다. “노나라 사람들이 너를 불러 갈 적에는 너를 작게 쓰려는 것이 아니라 크게 쓰려는 것이니 최선을 다할 것을 명심하여라.” 공자의 예언은 적중된다. 염구는 실제로 노나라에서 기대 이상으로 정치적 성공을 거두어 크게 쓰이게 되는 것이다. 염구는 계강자의 가재(家宰)가 되었는데, 특히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제나라는 원래 노나라보다 월등한 군사적 강국으로 노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동원하자 노나라의 집정자인 계강자는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염구는 과감히 제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때 노나라의 군대는 좌로와 우로의 2군으로 나눠서 군진을 펼쳤다. 좌로는 염구가 이끄는 계손씨의 군대였고, 우로는 맹손씨가 이끄는 군대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우로의 군대는 곧 패하여 후퇴하였으나 염구가 이끄는 좌로의 군사는 제나라를 크게 쳐부수어 마침내 제나라의 군사를 모두 도망가게 했던 것이다. 이때 염구는 창을 이용한 공격으로 크게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처럼 염구는 전술과 무기의 사용에도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승리는 염구 개인의 영광이었을 뿐 아니라 공문(孔門) 전체에 끼치는 영광이 되었으니 결국 이것이 여러 해를 두고 떠돌아 다니고 있는 공자를 고향으로 맞아들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염구가 이처럼 전공을 세워 공자가 고향으로 환국케 할 수 있었던 것은 염구와 자공간의 묵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숨어 있다. 염구가 계강자의 초청을 받고 노나라를 들어가게 되자 공자는 다시 탄식한다. “아아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우리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이 크면서도 일에 거칠고 멋지게 겉치레할 줄 알았지 일을 제대로 요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그러나 사기에는 공자가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나라로 돌아갈거나. 돌아갈거나. 노나라 향당(鄕堂)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 위대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다 문채(文彩) 또한 창연하고 진취적이지 않았던가. 내가 이토록 멀리 떨어져 그들을 다스려 중정(中正)의 도를 깨닫게 해주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미 수년전 진나라에서도 노나라로 돌아갈 것을 꿈꾸면서 특히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중정의도’를 가르쳐 주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공자의 탄식인지라 이런 모습을 본 눈치 빠른 자공은 스승이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귀국하는 염구를 전송하면서 이렇게 귀띔하였던 것이다. “자네가 노나라에서 등용되어 큰 공을 세우면 선생님을 잊지 말고 반드시 불러 모시도록 하게나.” 자공과 염구의 묵계는 이루어진다. 결과적이지만 염구의 뛰어난 정치적 성공은 스승을 노나라로 돌아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 儒林(214)-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14)-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이로써 공자는 황하를 건너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처량한 모습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냥 돌아오는 길에 추향(鄕)에서 휴식하면서 ‘추향의 노래’란 거문고 곡을 작곡하며 슬퍼하였다.” 이때 공자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거백옥이 보낸 사자였다. 거백옥은 위나라의 대부로 유일한 공자의 후원자였다. 공자도 거백옥에 대해서 ‘참 군자’란 평가를 내린 일이 있을 만큼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공자의 딱한 신세를 전해들은 거백옥은 전에도 자신의 집에서 묵었던 공자를 다시 초청하기 위해서 사자를 보낸 것이다. 거백옥의 사자에게 공자가 물었다. “대부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시나요.” 그러자 사자가 대답하였다. “어른께서는 허물을 적게 하려고 애를 쓰십니다만 아직 허물을 적게 하는 일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 사자가 돌아가자 공자는 그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거백옥의 근황을 가감 없이 정확하게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도 공자가 감탄한 것은 허물을 고치려고 부단하게 애를 쓰는 거백옥의 태도였다. 이는 공자가 평소에 말하였던 다음과 같은 내용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자는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다. 우러나는 마음과 믿음있는 말을 주로 하며, 나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며,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는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공자의 이 가르침에서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란 고사성어와 ‘잘못을 고친다.’는 ‘개과(改過)’가 나온 것. 공자는 논어의 위령공편에서 잘못을 고치는 행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한다.(過而不改 是謂過矣)” 과실에 대한 자신의 반성은 선으로 옮겨가는 천선(遷善)과 덕으로 나아가는 진덕(進德)의 가장 중요한 수양의 수단인 것이다. 자기의 잘못을 잘 알고 이를 인정하는 일도 어렵지만 그것을 깨닫고 고쳐나가는 과단성과 솔직성이야말로 공자가 강조한 덕목이었다. 자기반성의 중요성을 공자는 ‘공야장(公冶長)’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내심으로 자책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구나.” 거백옥의 초청을 받은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서 거백옥의 집에서 묵는다. 공자로부터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이를 고치는 데 부지런한 참 군자’란 평가를 받은 거백옥.‘장자(莊子)’에는 거백옥의 ‘세상을 사는 지혜’, 즉 처세술(處世術)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안합(顔闔)이 거백옥을 찾아간다. 안합은 원래 태자 괴외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괴외는 음탕한 왕비였던 남자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진나라로 망명하여서 그의 아들인 첩(輒)이 대신 태자를 이어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합은 태자의 스승으로서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안합은 거백옥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물어 말하였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덕은 천성적으로 경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무도한 짓을 하면 곧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그의 지혜는 남의 잘못을 알기에 알맞을 정도이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저는 어떻게 행동했으면 좋겠습니까.’” 안합이 말하였던 ‘경박하고 무도한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지 않다. 위나라의 주군이었던 우유부단한 영공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영공을 둘러싼 간신배들을 가리키는지는 모르지만 이에 대답한 거백옥의 충고는 난세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儒林(209)-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9)-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그러나 영공은 공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영공의 우유부단함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공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영공이 노쇠한 데다가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자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영공은 이미 늙어 노쇠하였고, 공자를 무용지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공자는 한숨을 쉬며 탄식한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기고 위나라를 다시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그때 공자가 남긴 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이면 그 나라를 바로잡을 수가 있고,3년이면 완전한 정치의 성과를 올릴 수가 있으련만(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 논어의 ‘자로’편에 실린 이 유명한 말은 수많은 정치가들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공자의 유가사상이 한대이후 200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정치와 사회의 윤리바탕을 이루어 온 것은 바로 ‘1년이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고,3년이면 완성된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공자의 정치이념을 현실정치에 접목시켜 보려는 후세인들의 소망 때문이었다. 이는 이웃나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2000년의 세월이 흐른 1515년 8월. 중종이 직접 성균관에 거둥하여 다음과 같은 알성시의 문과시험을 출제하였던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 시험 문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께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셨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1년이면 나라를 바로잡을 수가 있고, 적어도 3년이면 완전한 정치적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요. 그 뜻의 규모와 정치를 베푸는 방안에 대해여 공자께서는 시행하기 전에 먼저 작정한 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궁정쿠데타에 의해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옹립된 중종은 통치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나라의 기강과 법도는 땅에 떨어지고 자신은 다만 허수아비 왕으로 재위하고 있음을 한탄하여 직접 그런 문제를 출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종의 심정은 계속되는 알성시험문제를 통해 명백하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주나라 말기(공자가 생존해 있을 당시의 전국시대)는 나라의 기강과 법도가 이미 땅에 떨어져 있는 난세임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3년 이내에 바른 정치를 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께서 등용되셨다면 그로부터 3년 후의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중종의 안타까움은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세 번이나 위나라를 찾았던 공자. 만일 영공이 공자를 등용해서 3년 동안 나라의 정사를 맡겼더라면 그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마찬가지로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아니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들과 타협하여 살아남았더라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가 꿈꾸던 하늘나라는 이 지상에서 이루어졌을까. 인류의 구원은 실현되었을까. 공자가 3년 동안 위나라에서 정사를 맡았더라면 위나라는 주나라처럼 이상국가가 되었을까. 어지러운 전국시대는 종식되고 태평성대가 오게 되었을까. 역사에 있어 가정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러한 공자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3년 동안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더라면 위대한 통치술은 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인류의 대사상가로 거듭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그토록 염원하였던 대로 3년 동안 정치를 맡은 후의 위나라를 보고 싶은 것이 중종의 간절한 바람. 아마도 중종은 자신을 우유부단한 영공에 비유하여 공자와 같은 성인의 대두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그런 출제를 했을지도 모른다.
  • 공자묘에 한국식 제례

    1601년(선조 34년) 9월20일 허균은 그의 일기에서 중국 유람 중 공자의 고향 산둥(山東)성 취푸(曲阜)로 가 부자묘(夫子廟)에 절하고 태산을 보고 왔다고 전한다. 그 후 400여년이 지난 25일 유림단체인 박약회 회원 550여명이 취푸의 공자 사당 공묘(孔廟)에서 치전(致奠)을 치렀다. 박약회는 ‘논어’에 보이는 ‘박문약례’(博文約禮)에서 따온 것으로 글을 널리 배우고 익혀 예로써 실천한다는 뜻.1991년 한·중 수교 이후 성균관을 중심으로 공묘에 제사를 올린 일은 있었지만 이번과 같이 많은 인원이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박약회는 우리나라 성균관에서 매년 3월과 9월에 치르는 석전대제(釋奠大祭)의식 절차를 그대로 따랐다. 제기도 한국에서 제작한 것을 썼으며,12두 12변에 배치했다. 축문이 낭독되면서 의례가 시작되자 참석자 모두가 4번 엎드려 절하는 장관이 연출됐다. 취푸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에서 치른 이 의례를 중국 취재진과 각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공개했다. 초헌관을 맡은 이용태(70·TG삼보컴퓨터 명예회장) 회장은 “중국은 근대화 이후 공자를 봉건적 노예제를 뒷받침한 인물로 치부해 치전 의례 또한 망실하고 말았다.”면서 “본고장에서 우리가 간직해온 소중한 전통을 보여줄 수 있어서 더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공자 76대손 쿵링런(孔令仁·80·여) 산둥대 교수는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처음엔 500명이 온다는 약속이 믿어지지 않았다.”고 감격해했다. 콩링런 교수와 행사를 준비한 이동승(73)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는 “유교적 사유를 현대화하는 것만이 사람다운 가치를 살릴 수 있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이 회장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동아시아권을 공자 문화권으로 복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1987년 유교의 현대화를 기치로 결성된 박약회는 현재 22개 지회에 4000여명의 회원이 있다. 취푸(중국) 임광욱기자 limi@seoul.co.kr
  • 儒林(202)-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2)-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회견을 끝내고 돌아온 공자는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날 생각은 없었으나 그것이 예의이니 어쩌겠나. 그리고 서로 만날 때에는 서로가 예로써 응대했었다.” 공자가 비록 ‘예로써 서로 응대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는 오늘날의 성적희롱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안 자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가장 특별한 존재에 속한다. 나이는 공자보다 9세 아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과감하였다. 성격이 군인다웠을 뿐 아니라 군사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자로는 어렸을 때부터 백리가 넘는 곳에서 쌀을 사와 부모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집 출신이었으나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 후 거친 성품을 억누르고 꾸준히 공자를 좇아 수양을 닦았다. 공자의 생애를 보면 유일하게 스승의 부당함을 따지고 직언을 하는 제자로는 자로뿐이다. 이는 마치 예수를 따르던 제자 중 성격이 급한 베드로를 연상케 한다. 예수를 체포하러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베드로는 칼을 들어 군사의 귀를 잘랐듯이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로만은 군사다운 용맹으로 공자를 호위하던 용감한 보디가드였으며, 때로는 스승의 잘잘못을 따지는 유일한 비판자였다. 이러한 자로의 태도를 공자는 신임하고 있어 논어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나를 따를 사람은 중유(仲由:자로의 이름)뿐이다.” 공자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솔직하고 곧은 성품을 지녔던 자로였으므로 스승이 음탕한 여인 남자와 단둘이 만난 사실을 알게 되자 성을 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선생님이 남자를 만날 수 있으시다니요.”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맹세하듯 소리쳤다. “내행동이 옳지 못하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공자의 이런 태도는 공자의 인간미를 엿보게 한다. 인류가 낳은 세 명의 성인 중에서 예수와 석가모니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 이 두 사람에게서는 단 한번의 인간적인 실수나 약점이 보이지 않으나 유독 공자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 예수와 부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처럼 느껴지나 공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가 우리들 인간처럼 끊임없이 실수를 하고 또 자신을 반성하여 수양을 통해 고쳐나가는 태도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선인(先人)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자신이 만약 잘못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두 번이나 탄식하는 공자의 변명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에 대한 환멸은 음탕한 부인 남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나라의 임금인 영공에 이르러 한층 극대화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위나라에 다시 온지 달포 만에 영공으로부터 다시 초청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영공과 함께 시가를 통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영공은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탔을 뿐 아니라 환관 옹거(雍渠)를 같은 수레에 배승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좌석은 뒷수레에 배당되어 있었으며, 이때의 공자모습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수레를 타고 시가를 통과해 나가면서 씁쓰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儒林(200)-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0)-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진나라를 가려면 송나라를 통과하여야 했는데, 그 과정에 있는 광 땅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하북성 대명도의 장환현(長桓縣)인 광 땅을 지날 때였다. 이때 제자 안각(顔刻)이 공자가 탄 수레를 몰고 있었는데, 안각이 말채찍으로 성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전날 제가 이곳에 왔을 때에는 저쪽 무너진 성벽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광읍의 주민들은 얼핏 이 말을 듣고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다시 침략해온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양호는 노나라의 반역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제나라로 도망쳤던 역적이었다. 제나라는 뒤에 노나라의 요구로 양호를 체포하여 가뒀는데, 그는 다시 송나라로 달아났었다. 송나라로 도망쳐온 양호는 부하들을 몰고 와서 광 땅을 점령하고 횡폭한 짓을 일삼다가 인심을 잃고 다시 진나라로 쫓겨난 뒤부터 광 땅의 주민들은 양호에 대해 치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건장한 공자의 생김새가 양호의 모습과 비슷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던 주민들은 안각의 말을 듣자 이들을 또다시 침략해 온 양호의 무리들로 착각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공자 일행들을 구금하여 닷새 동안이나 가둬 두었다. 공자는 별다른 걱정없이 금을 타며 노래만을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태연스럽게 노래만 부르던 공자의 마음도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닷새 후, 뒤따라온 제자 안회가 도착하자 공자가 외치며 말하였다. “무사했구나. 난 네가 벌써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던 수제자로 30세나 어렸으나 유독 안회에 대해서만은 여러가지로 칭찬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안회를 수제자로 삼으려는 공자의 각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쪽박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처에 살고 있다면 남들은 괴로움도 감당치 못할 것이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참으로 어질도다, 안회여.” 이처럼 안회는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던 탓일까. 이미 29세의 나이 때 온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며, 스승 공자에 앞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이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하며 통곡을 금치 않았다. 그러한 안회가 닷새 동안이나 보이지 않자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탄식한 공자의 태도로만 보더라도 공자가 얼마나 광 땅의 주민들에게 구금되어 시달림을 받았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안회는 대답하였다.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 그러나 주민들의 위협은 더욱더 거세졌다. 간자(簡子)가 군사를 이끌고 공자 일행을 더욱 사납게 포위하자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여전히 금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자로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들이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가서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선생님은 태연히 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하였다. “주의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가 제정한 문화는 바로 나에게 전해 내려오지 아니하는가. 하늘이 만약 그 문화를 없애 버리고자 하셨다면 후세에 태어난 나에게 그러한 문화를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몸에 이렇게 문왕의 문화가 전해져 있는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은 주의 문화를 없애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까짓 광읍 사람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 儒林(199)-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199)-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부뚜막에 아첨하기보다는 아랫목에 의탁하는 하늘의 도를 선택한 공자에게 마침내 위나라의 영공이 만나기를 청해왔다.공자가 입궐하자 공자를 환대하며 영공이 물었다. “노나라에 있을 때에는 봉록(俸祿)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6만 두(斗)를 받았습니다.” 영공은 공자에게 위나라에서도 6만 두의 봉록을 주기로 한다.그러나 영공은 이처럼 융성한 대접은 하였으나 공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벼슬은 주지 않았다.왜냐하면 여기저기서 공자에 대해서 참언하는 신하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성격이 우유부단한 영공은 신하들이 공자의 입국을 두고 적정(敵情)을 살피는 첩자 행위일 것이라고 무고하자 영공은 이를 받아들여 공손여가(公孫余假)라는 무장에게 무기를 휴대케 하여 공자를 감시하도록 하였다.이른바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시작된 것이다.위리안치란 외부와의 접촉을 못하게 배소 안에 죄인을 가둬 두는 행위로 오늘날로 말하면 가택연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공자는 크게 실망하고 위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는데,이로써 위나라에 머물렀던 것은 10개월에 불과하였다.그러나 이 첫 번째 위기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였다.이로부터 공자는 쉴 새 없이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과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이러한 공자의 운명을 암시하는 장면이 논어에 자세히 실려 있다. 진나라를 목표로 위나라를 출발한 공자가 의(儀) 땅에 이르렀을 때 국경을 지키던 관리인 하나가 공자를 만날 것을 요청해 왔다.의 땅은 지금의 허난성 란이현(蘭儀縣)인데,위나라에서 진나라로 갈 때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되는 접경마을이었다. 이때의 기록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공자가 의땅에 이르자 국경관리인이 공자를 뵙기를 요청하여 말하였다. “군자가 이곳에 오시면 제가 만나 뵙지 못한 분이 없습니다.하오니 공자를 만나 뵙도록 하게 하여 주소서.” 종자가 그를 안내하여 공자를 만나게 해주자 그가 나와서 상심하고 있는 공자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뜻을 잃었다고 무얼 그리 걱정하십니까?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라 하늘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목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 국경관리인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따라서 국경관리인은 공자가 가시밭의 주유천하에서 만났던 수많은 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현인은 공자가 처한 역경을 꿰뚫어보고 공자의 운명을 점지해준 것이었다. 목탁은 그 시절 나라의 교령(敎令)을 알리기 위해서 관원들이 들고 다니던 작은 종이었는데,관원들은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 조그만 종을 흔들고 다녔던 것이다. 따라서 국경관리인의 말은 공자야말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목탁이니 과연 지금처럼 천하의 도가 없는 암흑시대에는 마땅히 수난을 당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숨어 사는 현자 국경관리인의 말은 그대로 적중된다. 위나라를 떠난 공자가 광(匡)이란 고장에 이르렀을 때 생명을 위협받을 만큼 큰 수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 儒林(19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19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많은 백성을 부유케 하고,그 다음에는 가르치겠다.’는 공자의 말은 노나라에서 뛰어난 정치활동으로 황금 시절을 누렸던 공자가 새로운 미지의 나라에서도 그 나라의 백성들을 부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가졌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공자는 위나라에 도착한 후 자로의 손위 처남인 안탁추(顔濁鄒)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안탁추의 처와 자로의 처는 형제였는데,안탁추가 자로에게 말하였다. “공자가 우리 집에 와서 머물기만 하더라도 위나라에서 경(卿)벼슬은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자로가 공자에게 전하자 단숨에 거절하며 말하였다. “천명(天命)이란 것이 있어.” 그렇다면 공자는 어째서 주유천하의 첫 번째 대상국으로 위나라를 선택했던 것일까. 물론 위나라는 노나라와 국경을 맞댄 가까운 인접국이긴 하지만 그런 지리적 여건보다도 위나라는 공자가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던 주나라 무왕의 이복동생인 강숙(康叔)을 제후로 봉하였던 은나라의 옛 땅으로 전대의 문화 중심지였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임금 영공은 그 자신이 뛰어난 임금이 아니면서도 수많은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고 있다는 이유가 공자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논어에서 영공을 무능하지만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영공의 신하로서 외교에 능숙한 중숙어(仲叔)가 있고,종묘의 일에 밝은 축타(祝駝)가 있으며,군사가 뛰어난 왕손가(王孫賈)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논어의 위령공(衛靈公)에서 위나라의 대부 사어(史魚)와 거백옥(伯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다. “사어는 진정 정직한 사람이다.국정이 청명할 때는 화살 같은 정직함으로 충심을 다했고,국정이 혼란할 때에는 바른말을 함에 있어 마치 화살처럼 곧았다.또한 거백옥은 참 군자이다.국정이 청명할 때는 나와 벼슬을 지내고,국정이 혼란할 때에는 자기 재능을 걸머지고 은퇴하였다.” 위나라는 이처럼 현명한 신하들이 많이 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공이 무도하지만 위나라는 번성할 것이라고 본 공자는 그러한 인재를 발탁하는 능력을 가진 영공이 설마 자신을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왔다는 말을 들은 왕손가가 공자를 찾아온다.왕손가는 공자가 칭찬한 군사의 뛰어난 무장.한마디로 위나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왕손가가 공자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은 2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자주 인용되는,정치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명문답 중의 하나이다. 이때 왕손가는 넌지시 공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아랫목에 아첨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부뚜막에 아첨하라고 하였습니다.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단번에 왕손가의 속뜻을 알아차린 공자가 대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왕손가가 말한 ‘방 아랫목에 아첨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부뚜막에 아첨하라.’라는 속담은 다음과 같은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방 아랫목은 집안의 주인이 앉는 높은 곳이다.그러나 생활에 있어서는 천한 장소인 부엌의 부뚜막이 더 따뜻한 불과 밀접한 장소로 이 속담을 통해 왕손가는 ‘방 아랫목과 같은 임금에게 잘 보일 생각 말고 실권을 가진 나를 더 가까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여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게 된다.’는 공자의 말은 하늘의 정도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하의 도리라고 말함으로써 권신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신념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 儒林(197)-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197)-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기원전 496년 노나라의 정공14년.56세의 나이 때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찾아간다. 이미 35세 때 제나라로 첫 번째 출국하였던 공자는 21년 만에 또다시 두 번째 출국을 단행하는 것이다.그때는 1년 동안의 짧은 기간만 제나라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열국을 주유하는 장기간의 외유였다. 이에 대해 사기는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에서 공자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를 유세하였다.”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이 편찬한 백과사전 ‘회남자(淮南子)’에서도 공자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를 실현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여명의 임금을 유세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가 13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닌 것은 사실이었으나 70여 나라를 주유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과장이었던 것 같다.실제로 사기를 쓴 사마천도 위와 같이 공자가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공자세가’에서는 공자가 유세한 나라를 예닐곱 나라로 압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히 과장인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의 유가사상을 연구하여 ‘공자’란 책을 펴낸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의 계몽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양계초(梁啓超)는 책 속에서 사기의 과장을 지적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은 공자가 찾아갔던 나라는 주(周),제(齊),위(衛,진(陳)이었을 따름이며,또한 초나라의 속령(屬領)인 섭(葉)에도 갔었던 것 같다.그리고 송(宋),조(曹),정(鄭)의 세 나라는 머무르는 일이 없이 그냥 지나기만 하였다.전부를 합쳐보면 지금의 산동(山東),하남(河南) 두 성의 경계 밖을 나가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불확실하지만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주나라를 찾아간 것과 제나라를 찾아간 것은 그 전의 일이며,그의 역정(歷程)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어떻든 사마천의 사기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분석하면 공자가 확실하게 찾아간 나라는 위,진,섭 세 나라뿐인 것이다.그러므로 공자의 발길은 평생 양계초의 지적대로 산둥과 허난 두 성과 하북(河北)의 남쪽 일부 정도의 범위를 벗어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다만 공자는 위나라를 네번이나 거듭하여 왕래하였다는 사기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70여 개국의 나라를 유세하였던 것이 아니라 서너 개의 나라를 반복해서 순회하였으며,공자 자신은 더 많은 전국시대의 임금들을 만나고자 했지만 다른 나라의 임금들은 회견할 길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그 때문에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을 펼칠 수 있는 임금은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상갓집의 개(喪家之狗)’처럼 초라하게 제국을 전전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의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56세의 공자는 주유열국의 첫 대상 국가를 위나라로 선택한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위나라를 첫 번째 방문하면서 제자 염유와 나눴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실려 있다.위나라의 번화한 도성을 수레를 타고 갔던 공자가 말하였다. “백성이 번성하구나.” 공자가 탄 수레를 몰던 염유가 물었다. “이렇듯 백성이 많은데 여기에 더 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부유하게 해주는 거지.” “백성이 부유해진 다음에는 또 무엇을 더하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그들을 가르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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