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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260)-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0)-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공자의 유일한 농담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공자는 무성이라는 고을로 찾아갔다. 그곳은 공자의 어린 제자 자유가 읍재로 있는 곳이었다. 공자는 거리에서 현악(絃樂)에 맞춰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현악은 거문고와 비파의 음악으로, 자유가 그 고을을 예와 악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고을사람들이 모두 현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자는 자유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예악의 정치를 펴는 것을 보고 내심 흐뭇하였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이 말은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어찌 큰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가 필요한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공자가 농담으로 한 것이었다. 비록 다스리는 데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그 다스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악을 써서 교화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지론이었다. 당시 대부분이 예악의 방법을 사용치 않고 있는데, 오직 자유만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예악으로 민풍(民風)을 교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대견하고 기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는 스승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정중하게 변명을 한다. “저는 예전에 스승님께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지위가 낮고 높고 간에 모두 배워야 하므로 비록 작은 고을이기는 하지만 정도인 예악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자유는 이처럼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자기변명을 한 것이었다. 실제로 공자는 예와 악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사람에게 예가 겉이라면 악은 속과 같아 서로 표리(表裏)를 이루는 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예는 무엇 할 것이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은 무엇 하겠는가.” 공자의 경전 중에서 ‘예기(禮記)’에는 ‘위대한 음악은 천지와 같은 조화를 이루며, 위대한 예는 천지와 같은 절조를 이룬다.’라고 설법하고 있으며, 따라서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란 천지의 질서이다.(樂者 天地之和也 禮者 天地之序也)’라고까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서 비록 작은 고을이었지만 예악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은커녕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즉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하는 스승의 핀잔을 듣자 자유는 당황해서 변명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작은 목적을 위해 너무 거창한 준비나 과대한 노력을 들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었는데, 자신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당황해하자 공자는 곧 태도를 바꾸어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이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공자는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자유의 태도를 그대로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말을 덧붙이고 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느니라.” 이 장면은 논어에 나오는 유일한 공자의 농담이다. 비록 20대의 청년이었지만 대견한 애제자에게 흐뭇한 마음을 농담으로 표현하고 있는 공자의 인간미가 돋보이는 명장면인 것이다.
  • 儒林(259)-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9)-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자유(子游)는 무성(武城)에서 읍재(邑宰)를 지내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언언(言偃)이고 오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5세나 아래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올 때 24세의 청년이었고, 공자가 죽을 때에도 29세에 불과하였으니 젊은 나이에 그런 벼슬을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공자는 특히 이 젊은 자유를 사랑하였다. 자유는 특히 문학에 뛰어나고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도 방정하고 모든 면에서 올바른 인물이었다. 논어에는 공자가 자유를 사랑하였던 두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는데,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쓸 만한 사람을 구했는가.’ 자유가 대답하였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가 어째서 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자유가 대답하였다. ‘그는 좁은 지름길을 다니지 않고 공무가 아니면 제 방에 찾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벌써 이처럼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졌던 자유에 대해 공자는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 보인다. 그것은 공자가 자유에게 유머가 섞인 농담을 하였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공자의 모든 어록을 집대성한 논어나 공자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의 ‘공자세가’를 봐도 그 어디에도 공자가 농담을 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근엄한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펴야했던 공자는 제자들에게 함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거나 실없는 농지거리를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공자를 비롯한 세계 3대성인들이었던 예수와 석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실을 비유로써 설명하고 풍부한 휴머니티가 넘쳤던 예수도 농담을 하거나 재미를 위한 빈말을 삼가고 있다. 심지어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중세까지 수도원에서는 웃음을 터부시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성서에 보면 예수가 울었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자신을 따르던 마리아의 오빠 나자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비통한 마음으로 무덤에 가서 ‘나자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침으로써 부활시킨 예수는 눈물을 흘리며 운다. 이 장면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나자로를 무척 사랑하셨던가 봅니다.’하고 말하였다.” 이처럼 눈물을 흘렸던 예수가 웃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 그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성서는 신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절대시하였던 스콜라철학에서는 수도원에서 웃음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석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생전에 팔만사천의 설법을 하였던 부처의 경우에도 부처의 농담은 엿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예수와 부처를 교조로 하는 종교의 권위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자칫하면 두 사람의 성인을 인간과 달리 신격시하려는 의도적인 형식주의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못박은 예수가 웃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며, 누구보다 생로병사의 인간적 고통을 꿰뚫어보았던 석가가 따뜻한 웃음을 보이지 않았을 리는 없는 것이다. 공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준엄한 스승이었지만 인간미 넘쳤던 공자였으므로 그 역시 자주 웃고 자주 농담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자신의 입으로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前言戱也)’라고 말한 것은 공자가 어린 제자 자유에게 했던 농담이 유일한 것이었다.
  • 儒林(258)-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8)-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이미 계강자의 가신으로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염유를 필두로 자공은 노나라의 외교관으로 불과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의 형세를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마음 놓고 조종하였던 불세출의 정치가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임금을 죽인 진항이 노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자공을 파견하여 정벌의 대상을 노나라에서 오나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자로 역시 공자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다가 위나라로 가서 공회(孔 )의 읍재가 된다. 평소 공자는 자신에게 곧잘 정면으로 덤벼들고 따지는 자로에 대해서 깊은 신임을 갖고 있었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오직 중유뿐일 것이다.” 공자의 자로에 대한 이런 평가는 마치 예수를 잡으러온 로마군사의 귀를 칼로 베어버리는 베드로를 연상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자로는 성격이 무사답게 용감했을 뿐 아니라 군사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본시 그는 공자보다 아홉살 정도밖에 어리지 않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백리 넘는 길에 쌀을 날라다 부모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문하로 들어온 뒤로는 거친 성품을 누르고 꾸준히 공자를 좇아 수양을 쌓았다. 공자는 자로의 이러한 성급하고도 용감한 기질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평소에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써 송사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중유일 것이다. 그는 승낙한 일을 미뤄 두는 일이 없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미처 실천하지 못했으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다 떨어진 형편없는 옷을 입고서도 여우나 담비털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오직 중유뿐이다.”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 곧바로 이를 고치려고 반성하고 가난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용감하고 곧은 자로의 성격을 칭찬하면서도 또한 공자는 자로의 이런 성급한 성격을 몇 번씩 경책하고 있다. 그것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중유는 용맹하기로는 나보다 더하지만 사리를 재량할 줄을 모른다.” 심지어 공자는 자로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까지 하고 있다. “중유 같은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노나라 애공 15년(기원전 480년). 공자의 나이 72세 되던 해 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난다. 자로가 모시고 있는 공회가 내란에 휩쓸렸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걱정하여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자로는 죽을 것이다.” 자고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로가 데리고 위나라로 들어가 함께 벼슬에 올랐던 사람이었는데, 이로 인해 공자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바로 그 제자. 실제로 자로는 위기에 처한 공회를 구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적중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마침내 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공자는 ‘아아, 하늘이 나를 끊어버리는구나.’하고 애통해 한다. 수제자였던 안회가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하고 탄식을 하였던 것보다 더 절망하였던 것을 보면 공자가 얼마나 자로를 사랑하였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음인 것이다.
  • 儒林(257)-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7)-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공자가 보인 마지막 정치적 참여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좌전(左傳)’에도 실려 있다. 좌전은 이름이 가리키듯 공자가 존경하였던 좌구명이 공자의 춘추를 해설한 책으로 따라서 ‘좌씨춘추’라고도 불리는 고전이다. 독립된 역사적 이야기와 문장의 교묘함과 인물묘사의 정확함으로 특히 고전문학의 규범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명저인데, 이 책 속에는 공자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애공 14년 6월 갑오에 제나라의 진항이 그의 임금 임(壬)을 서주(舒州)에서 모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한 후 입궐한 다음 애공을 찾아가 제나라를 토벌할 것을 세 번이나 요청하였다. 이에 애공이 말하였다. ‘노나라는 제나라보다 약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당신이 그들을 정벌하라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오.’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걱정할 바가 못 됩니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죽였으니 백성들 중에 그를 지지하지 않는 자들이 반 이상 넘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나라 백성들에다가 제나라 백성의 반을 더 보태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애공은 시선을 피하며 말하였다. ‘계씨들에게 가서 얘기해보시오.’ 공자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부의 말석에 있는 몸이라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불의를 보고도 말하지 않음은 불충이었으므로 말석이긴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고하긴 한다. 그러나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주군과 실권자인 계씨들일 뿐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말로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태도인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오직 남은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위한 교육과 인류의 영원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의 편찬에 전념하였을 뿐 더 이상 정치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공자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든다. 그뿐 아니라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논어에는 제자들을 추천하는 공자의 행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중유(仲由:자로의 자)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공자는 대답하였다. ‘유는 과감성이 있으니 정치에 종사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계강자가 다시 물었다. ‘사(賜:자공의 이름)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사는 통달한 사람이니 정치에 종사케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구(求:염유의 이름)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그러자 공자는 대답하였다. ‘구는 재간이 많으니 정치에 종사케 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처럼 이들은 곧 정치일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게 된다.
  • 儒林(256)-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6)-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그러나 어쨌든 이처럼 명분 없는 전쟁에는 극구 반대하던 공자였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불법자에게는 가차 없이 전쟁을 통해 응징하려 하였다. 그 어떤 폭력도 반대하던 공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논어에 나오는 이 기록은 공자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국가의 원로로서 정치에 관여하였던 마지막 장면인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481년 노나라의 애공 14년, 공자의 나이 71세 때의 일이었으니 죽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이 무렵 이웃 제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진항(陳恒)이라는 권신이 임금이었던 간공(簡公)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진항은 진성자(陳成子), 또는 전상(田常)이라고도 불리던 제나라의 대부였는데, 그는 암암리에 사병을 훈련시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진항은 어느 날 간공을 시해하고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자연서(子淵棲)란 선비를 찾아간다. 자연서는 제나라의 백성과 관리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학식이 높던 군자였는데, 진항은 기골이 장대하고 무섭게 생긴 중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자연서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왕을 죽인 것은 썩은 사직을 바로잡고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일념이었소. 그러니 나를 지지하여 주시오.” 이에 자연서는 동요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나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가.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지지하지 않는다. 또 당신은 나를 어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그 임금을 배반하는 것을 어진 사람은 싫어한다. 당신은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무력으로 나를 위협하고 겁주어서 내가 두려워 당신에게 굴복한다면 나는 용감한 자가 아니다. 나에게 지인용(智仁勇)의 세 가지 덕목이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반면에 내가 이 세 가지의 덕목을 가졌다면 내가 어찌 당신을 따를 수가 있겠는가.” 이에 진항은 할 말을 잃고 물러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공자도 역시 몹시 분개하였다. 지인용의 덕이라면 하늘 아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공자가 아니겠는가. 논어의 헌문 편에는 이 소식을 듣고 보인 공자의 결연한 태도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어느 날 공자는 목욕하고 입조하여 애공에게 고하였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죽였으니 청컨대 그를 토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애공은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에게 고하지 말고 세 집안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애공이 이처럼 미루자 공자는 실망하여 말하였다. ‘나는 대부의 말석에 있던 몸이라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금은 세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라고만 하셨다.’ 임금의 어명이었으므로 공자는 어쩔 수 없이 삼환씨를 찾아가 똑같이 말하였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죽였으니 이는 무도한 짓입니다. 청컨대 진항을 토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공자의 말을 들은 세 집안 사람들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나라는 노나라보다 강국이었으므로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자는 다시 말하였다. ‘나는 대부의 말석에 있는 몸이니 감히 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以吾從大夫之後不敢不告也)’”
  • 儒林(254)-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4)-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어느 날 재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공자가 말씀하셨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으로 다듬을 수 없다(朽木不可雕也,糞土之牆不可 也). 그러니 내가 재여에게 뭐라고 꾸짖을 수 있겠느냐.” 이 대목은 논어 전편을 통해서 가장 신랄하고 준엄한 꾸짖음으로 낮잠 정도 잔 것으로 너무 심하게 제자를 몰아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평소에는 말을 잘하면서도 행동은 못 미치며, 자신의 말재주만 믿고 게으름에 빠져 있는 제자를 질타하는 스승의 간절한 충정도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나는 남을 대함에 있어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지만 이제 나는 남을 대함에 있어 그의 말을 듣고서도 그의 행실을 살피게 되었는데, 재여로 인해 이렇게 태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서로 같음을 비로소 재여로 인해 믿지 않게 되었다는 공자의 선언은 공자가 얼마나 말을 앞세우는 말재주꾼을 싫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증거인 것이다. 이는 훗날 맹자가 재여에 대해 ‘그들의 지혜가 성인을 알아보기에 충분하였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에만 아첨하기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재여가 스승 공자를 ‘내가 선생님에 대해서 살펴본 것은 요임금, 순임금보다도 더 현명하시다는 것이다.’라고 존경하였던 예를 들어 재여를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던 것과는 달리 공자는 유독 재여에 대해서만은 가장 엄격한 꾸중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논어의 양화편에는 이러한 재여와 공자간의 열띤 대화의 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이 장면을 보아도 제자들에게 항상 너그럽고 관대한 공자가 유독 재여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재여가 공자에게 여쭈었다. “스승님,3년의 상은 기한이 너무 오래됩니다. 군자가 3년의 예를 지키지 못하면 예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3년 동안이나 음악을 못하면 음악이 반드시 붕괴될 것입니다.” 공자에게 예에 대해서 따지는 재여의 태도는 거인 골리앗에게 감히 돌팔매질로 도전하는 양치기소년 다윗을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를 갖추는 장난을 하며 성장할 만큼 예를 숭상하는 유의 신분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기에도 ‘공자는 소싯적부터 놀이를 할 때는 언제나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장난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공자에 있어 예는 모든 인간의 규범과 행동의 기준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 계시면 예로써 섬겨 드리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내드려야 한다.” 공자의 이 말은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곳이 없게 된다(不學禮 無以立).’라고 자신의 아들 공리에게 가르쳐준 내용처럼 예를 인간행동의 절대가치로 본 공자에게 감히 재여가 정면도전하고 있음인 것이다. 재여의 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현란한 수사법의 제1인자답게 재여는 화려한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묵은 곡식이 없어지고 햇곡식이 나며, 불씨를 일으키기 위해서 수(燧)나무를 비벼 뚫는데도 나무종류가 완전히 바뀌는 기간이니 복상도 3년 상으로 계속할 것이 아니라 1년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儒林(253)-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3)-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공자는 중궁을 다음과 같이 감싸고 있다.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는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러고 나서 공자는 좌구명(左丘明)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고 공손을 지나치게 함을 옛날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러워하노라.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하였는데, 나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좌구명은 공자와 같은 무렵에 살던 노나라의 대부였다. 공자의 선배로서 공자는 평소에 그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말년엔 눈이 멀어 장님이 된 좌구명은 이로 인해 맹좌(盲左)라고도 불리었다. 좌구명이 말하였던 ‘공손을 지나치게 한다.’는 주공(足恭)에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그냥 추상적으로 지나치게 공손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는 ‘주공’이라 발음하고, 또 하나는 다리의 음직임을 지나치게 겸손하게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때는 ‘족공’으로 발음하는데, 이 두 가지의 해석 모두 겸손이란 미덕을 넘어선 허위인 것이다. 겸손의 본질은 내면적이며 공손한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면적으로 겸손을 위장하면 그것은 차라리 교만에 가까운 것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 ‘지나치게 공손하면 예에 어긋난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말. 공자는 지나치게 겸손함을 아첨으로 보았으며 상대방이 사귀기 싫은 저열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원망의 감정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은 위선이며 자기기만임을 분명하게 못박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변명과 번지르르한 말만 앞세우는 말재주꾼을 혐오하는 공자는 특히 재여(宰予)에게 보인 공자의 태도를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재여의 자는 자아(子我)로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말을 잘 하는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공자는 재여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음에도 재여를 게으르고 말이나 화려하게 꾸미는 궤변론자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논어에도 이러한 재여를 꾸짖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고 있는데,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애공이 재여에게 사(社)에 대해서 묻자 재여가 대답하였다. ‘하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심고, 은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심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栗)를 심었습니다.’ ‘어째서 밤나무를 심었을까.’ 애공이 묻자 재여가 대답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慄) 하려는 뜻이겠지요.’ 이 말을 듣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다된 일을 얘기하지 말고, 끝난 일을 간하지 말고, 지난 일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애공이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에 무슨 나무를 심는 게 좋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재여는 주나라에서 밤나무를 심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백성들이 무서움에 떨도록 위압정치를 펴야 한다는 논리를 교묘한 변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밤나무‘율(栗)’자와 ‘두려워 떤다’는 뜻의 ‘율(慄)’자의 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교묘한 궤변으로 애공의 독재를 은근히 부추기고 있음인 것이다. 결국 재치 있는 수사는 되지만 독재자에게 아첨하는 교언이었던 것이었다. 논어의 공야장편에는 이러한 말재주꾼 재여에 대한 비난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儒林(252)-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2)-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공자가 이처럼 강경하게 제자인 염유를 꾸짖고 있는 것은 염유가 그럴듯한 궤변으로 신하로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상관인 계강자의 탓으로 돌리는 변명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공자는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특히 변명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데, 논어에 보면 자로가 나이어린 자고(子羔)를 정치에 나아가게 하자 공자는 아직 배움에 익숙지 못한 자고를 정치에 나아가게 한다고 자로를 심하게 꾸짖은 적이 있었다. 이때 자로가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에 사직을 돌보는 것도 배움이 아닙니까.’하고 변명을 하자 공자는 자로를 책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때문에 말재주꾼을 싫어한다.” 이와 같이 변명을 싫어한 공자의 극언은 변명이 교묘한 회피에 불가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는 교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경책하는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도 변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타인이나 사실에 변명을 찾지 말고 모든 사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문제로 환원하여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슈바이처의 말처럼 변명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본질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인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전유를 공격하려는 계강자의 잘못을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겠느냐.’하고 일차로 꾸짖고 다시 염유가 ‘그것은 계씨가 치르는 것이지 저희 두 사람은 원치 않은 일입니다.’라고 연이어 변명하자 ‘너의 말은 분명히 잘못이다.’라는 말로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자의 극언에도 염유는 다시 변명한다.‘지금 공격하여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후세에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군자는 그가 바라는 것은 버려둔 채 말하지 아니하고 또 그것을 변명하려는 것을 미워한다.(君子疾夫舍曰欲之而必爲之辭)’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말을 앞세우고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말재주로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은 사리를 얻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며, 본심의 덕을 해치는 위선이기 때문이었다. 아첨꾼과 말만 잘하는 말재주꾼에 대해서 공자는 논어의 곳곳에서 다음과 같이 경책하고 있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은 어진 이가 적다.(巧言令色鮮矣仁)” 공자의 이 말에서 ‘발라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이라는 뜻의 ‘교언영색’이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 이는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첨하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표정을 말하는 것이다. 또 공자는 ‘말 잘하는 사람보다 어눌하나 말에 진실이 깃든 사람을 좋아하여 의지가 굳고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만이 인(仁)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공야장편에는 이러한 공자의 사상을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중궁(仲弓)이란 사람이 있었다. 노나라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나 아래였는데, 일찍이 공자 자신이 ‘염옹(雍:중궁의 이름)은 임금노릇을 하게 할만하다.’라고 칭찬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궁은 말주변이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염옹은 어질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이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도대체 말재주를 어디에 쓰겠는가.”
  • 儒林(251)-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1)-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이는 공자가 평소에 염유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공자도 염유가 뛰어난 정치적 재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느 날 계강자가 공자에게 묻는다. ‘염유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염유는 재간이 많으니 정치에 종사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이처럼 공자는 염유가 정치적 재능은 갖고 있지만 학문에 정진하는 수법제자로서는 부적합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염유도 마찬가지였었다. 염유 자신도 스승 공자를 ‘귀신을 동원해서 따진다 해도 결함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성인’이라고 존경하면서도 자신이 유가의도를 실천하는 제자로서는 능력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염유가 공자에게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모자랍니다.’라고 고백한 내용을 봐서도 알수 있는 것이다. 염유로부터 그런 고백을 듣자 공자는 염유를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힘이 모자라는 자는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있는데, 지금 자네는 스스로 움츠리고 있을 뿐이네.(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공자의 대답은 준엄한 진리인 것이다. 최선을 다해 도를 향해 가는 구도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마치 부처의 초기 경전에 나오는 ‘숫타니파타’속의 시경처럼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개 짖는 소리에도 멈추지 않는 나그네처럼 밤길을 혼자서 쉬지 않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질지언정 스스로 움츠려 되돌아보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염유가 ‘힘이 모자랍니다.(力不足也)’라고 말하였을 때 ‘힘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츠리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염유는 다시 변명하여 말하였다. “지금 전유는 성이 견고하고 또 계씨의 도성(都城)인 비읍(費邑)에 가까이 있습니다. 지금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후세에 자손들의 걱정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곡히 말해도 자신의 말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여전히 변명에 몰두하고 있는 염유의 태도를 지켜본 후 공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구야, 군자는 그가 바라는 것은 버려둔 채 말하지 아니하고, 또 그것을 변호하려드는 것을 미워한다. 내가 듣건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이 많고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함을 걱정한다고 하였다. 고르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화목하면 백성들의 숫자가 적지 않게 되고, 평안하면 기울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데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화적인 덕을 닦아서 그들이 따라오도록 할 것이며, 따라오면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 유(由:자로의 이름)와 구는 계씨를 돕고 있는데, 먼데 사람들이 복종하여 따라오도록 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민심이 이탈되어 서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는데도 이를 막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도 한 나라 안에서 전쟁을 일으킬 획책이나 하고 있으니 나는 계씨의 걱정이 전유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제 집안에 있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 [씨줄날줄] 女風

    기록을 보면 아내의 위세에 눌려 가정에서 평생 기를 못펴고 산 역사상 위인들이 많다.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며 공자·모차르트·링컨·톨스토이도 그런 부류다. 공자는 아내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논어에 이런 불평을 남겼겠는가.“가까이 하면 불손하고, 멀리 하면 원망하기 때문에, 세상에 다루기 어려운 것이 여자다(近之不遜 遠之則怨 女人難養).” 남존(男尊)시대였기에 망정이지 지금 같았으면 망언으로 몰려 큰 욕을 봤을 터이다. 어쨌거나 후대의 호사가들은 이들이 억센 아내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자기 일에 몰입한 결과 대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제법 그럴 듯한 해설까지 곁들인다. 인류역사가 일부 모계사회를 제외하고 대대로 남성중심 사회였음에도 여성은 그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능력이 출중해도 성차별로 인해 역사와 사회의 전면에 나설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 주말 제46회 사법시험 최종합격자가 발표됐는데, 여성이 수석을 차지해 올해 8개 주요 국가고시에서 여성이 수석을 싹쓸이했다.‘여풍(女風)’이란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각종 입사시험에서도 여성이 상위권을 휩쓰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요즘이다. 나라 밖도 만만치 않다. 영국 여왕이 건재하고 할로넨(핀란드)·아로요(필리핀) 등 여성대통령 6명이 활약 중인 가운데 칠레에서도 내년 대선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이 유력하다는 소식이다. 총리와 대법원장이 여성인 뉴질랜드에서는 최근 의회의장도 여성이 차지해 3부를 장악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는 96세 할머니가 조그만 도시의 시장으로 재선돼 세상을 놀라게 했고, 뉴욕 타임스사에는 여성CEO가 등장했다. 시대가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 마당에 ‘여풍’이란 말도 이젠 적절치 않은 표현이다. 장관자리 수십개를 남성이 차지하고 각계각층에 남성이 절대다수를 점해도 ‘남풍(男風)’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여풍’도 남성중심적 고정관념의 소산임에 다름 아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서 굳이 구별하려는 구시대적 사고야말로 박물관행 감이다. 자신만의 능력과 커리어로 국가·사회의 중심으로 당당히 나서는 여성들이 아름답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51)

    過猶不及(과유불급) 儒林 239에는 過猶不及(지나칠 과/같을 유/아니 불/미칠 급)이 나온다.論語(논어) 先進(선진)편에 나오는 말로,‘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고 풀이할 수 있으니 中庸(중용)의 중요성을 이른다. ‘過’의 본래 뜻은 ‘지나가다’였으나 점차 ‘지나치다’ ‘허물’의 뜻으로 확대되었다. 용례로는 過讚(과찬:칭찬이 지나침),過失(과실:부주의나 태만 따위에서 비롯된 잘못) 등이 있다. ‘猶’는 의미 요소인 ‘犬(개 견)’과 발음 요소인 ‘酋(두목 추)’가 합쳐진 形聲字(형성자)로서 원래는 원숭이의 일종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후에 ‘오히려’ ‘망설이다’ ‘같다’ 등의 뜻으로도 사용됐다.用例로 猶豫(유예:망설여 일을 결행하지 아니함),猶子(유자:조카) 등이 있다. ‘不’은 나무나 풀의 ‘뿌리’를 본뜬 象形字(상형자)이다. 그런데 본래의 의미보다 ‘아니다’라는 뜻이 널리 알려진 것은, 실제 글자는 없었으나 언어생활 속에 쓰이던 不定詞(부정사)와 發音(발음)이 같아 假借(가차)하여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례로는 不得已(부득이:마지못하여 하는 수 없이),不可思議(불가사의: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함) 등이 있다. ‘及’은 손으로 사람을 붙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붙잡다’ ‘체포하다’ ‘따라가다’의 뜻을 나타내는 會意字(회의자)임을 알 수 있다. 후에 ‘도달하다’ ‘미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으며 ‘및’ ‘그리고’ 등과 같은 접속사로 假借(가차)되기도 하였다.用例에는 ‘及第(급제:시험이나 검사 따위에 합격함)’‘言及(언급:어떤 문제에 대하여 말함)’‘波及(파급:어떤 일의 여파나 영향이 차차 다른 데로 미침)’ 등이 있다. ‘過猶不及’은 子貢(자공)이라는 제자가 同僚(동료)인 子張(자장)과 子夏(자하) 가운데 누가 더 현명한가를 묻는 말에 대한 孔子(공자)의 대답 가운데 나온 말이다.論語 全篇(전편)을 통해 볼 때, 자장은 활달한 氣象(기상)과 進步的(진보적) 思考(사고)를 지닌 인물이며, 자하는 매사에 愼重(신중)하고 現實的(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공자는 이 둘을 모두 中庸의 도가 부족하다고 評價(평가)한 것이다. 中庸이란 매사를 처리할 적에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이 중용을 希求(희구)하는 정신은 유가에서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을 수립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여 도덕적 수양의 최고수준을 상징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감정의 節制(절제)와 섣부른 행위에 대한 省察(성찰)이 요구된다.‘中’은 공간적으로 양끝 어느 쪽에도 偏向(편향)하지 않는 것이고,‘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一定不變(일정불변)을 뜻한다. 中庸의 도는 자칫 灰色論理(회색논리)나 兩非論(양비론)으로 曲解(곡해)될 소지가 있다. 이런 부분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이 ‘隨時處中(수시처중)’의 논리이다.隨時處中이란 ‘상황에 따라서 中道에 처한다’는 것이다. 변화가 무쌍한 현실 속에서 최선의 선택인 時中(시중)의 입장을 취하기란 녹록지 않다.時中의 입장이라고 하면서 若干(약간)이라도 도의 본질에서 逸脫(일탈)하면 그것은 이미 術數(술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儒林(250)-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50)-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공자는 이처럼 계강자를 도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와 노자와의 사상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일치되고 있는데, 일찍이 노자도 ‘세도 부리는 도둑’, 즉 나라도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들에 있는 논밭은 거칠어지고 여염집 광은 비어 있는데도 비단옷 차려입고, 날이 선 칼을 차고, 맛난 음식을 싫증내며, 재물이 가득하면 이를 일러 세도 부리는 도둑이라 한다.” 노자의 말처럼 공자도 계강자를 ‘세도 부리는 도둑’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도 부리는 나라도둑일수록 입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공치사를 자주하는 법. 계강자는 다시 공자에게 묻는다. “백성들로 하여금 공경스럽고 충성되며 부지런히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백성들을 장중하게 대하면 자연 공경스러워지고, 효도와 자애로써 대하면 자연 충성스러워지고 선인들을 등용하고 무능한 사람을 가르쳐주면 자연 부지런히 힘쓰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는 계강자의 질문에 원칙적인 대답만 할 뿐 직접 정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계강자가 공자에게 ‘당신은 국로로서 어찌 의견을 말하지 않습니까.’하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나라의 원로(元老) 노릇은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고 있었지만 노나라의 중요한 국사에는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논어의 계씨편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때는 기원전 482년 공자의 나이 70세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계강자가 군사를 일으켜 전유(臾)를 정벌하려 하였다. 전유는 오늘날 산둥성 페이현(費縣)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 대대로 노나라의 속령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계강자가 이를 정벌하려 하였던 것이다. 당황해진 염유와 자로가 공자를 찾아뵙고 아뢰었다. “계씨가 전유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가 말하였다. “구(求:염유의 이름)야,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겠느냐. 전유는 옛날 선왕께서 동몽산의 제주로 삼고 그곳에 봉한 나라이며, 또한 노나라의 영역 안에 있는 나라이다. 노나라를 떠받드는 신하의 나라인데 어찌하여 그를 친다는 것이냐.” 공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동몽산(東蒙山)’은 지금의 산둥성 멍인현(蒙陰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몽산이라고도 불린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한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선대로부터 노나라와 군신의 예를 갖춘 속령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질책에 염유가 변명하여 대답하였다. “계씨가 치려는 것이지 저희 두 사람은 모두 원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구야, 옛 사관이었던 주임(周任)은 이렇게 말하였다.‘자기 힘을 다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되 만약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벼슬은 그만둔다.’는 것이다. 위태로운데도 붙잡아두지 못하고 넘어지려 하는데도 부축해 주지 못한다면 그런 신하는 어디에다 쓰겠느냐. 또한 너의 말도 잘못이다. 범과 들소가 우리 밖으로 나가거나 궤 속에 넣어둔 신귀(神龜)와 구슬이 깨어졌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공자의 질책은 평소에도 언짢게 생각하고 있던 염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계강자를 도와 가렴주구에 나선 염유의 변명이 못마땅해서 신하된 도리로 계씨를 말리지 못한 불찰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음인 것이다.
  • 儒林(249)-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49)-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그러나 공자는 여전히 ‘나는 모른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계강자의 교활한 속셈을 꿰뚫어 본 이상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때문이었다. 계강자가 돌아간 후 공자는 자신의 제자이자 계강자의 가재인 염유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전혀 개인적인 사견이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의견임을 전제한 후 공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군자의 행동은 예법에 들어맞아야 하고, 베푸는 것은 되도록 후하게 하며, 일은 알맞은 방법으로 하며, 거두어들이는 것은 되도록 가벼이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구부로도 충분한 것이다. 만약 예법을 헤아리지 않고 끝없이 탐욕스럽다면 비록 전부를 모두 거두어들인다고 하더라도 또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계강자가 법도대로 행한다고 하자면 주공의 법전이 있으니 그대로 따르면 될 것인데, 만약 구차히 행하고자 한다면 나를 무엇 때문에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강자는 다음해인 기원전 480년 공자의 나이 69세 때부터 새로운 세법을 시행할 것을 결심한다. 이에 공자는 계강자에 대한 비난보다 그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제자 염유에게 분노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논어에는 그러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계씨는 주공보다 부유했는데, 염유는 그를 위해서 세금을 더 거두어들임으로써 그의 부를 더해 주었다. 이에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는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이제 전고(戰鼓)를 울리며 그를 공격해도 좋다.’” 공자가 계강자를 정치가가 아니라 더러운 도둑으로 보고 있음은 논어의 안회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음이다. “계강자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근심하고 공자에게 그 대책을 물었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진실로 당신 자신이 탐욕하지 않다면 비록 상을 준다고 해도 백성들은 도적질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원래 계강자는 계환자의 아들이었으나 정실의 소생이 아니었다. 첩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권력을 세습받기 위해서 전처의 아들을 죽이고 후계자가 된 부정한 인물이었다. 그보다도 공자를 분노케 하였던 것은 계강자가 국왕인 애공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한 도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큰 나라 도둑인 계강자가 도둑이 들끓어 그 대책을 묻자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공자는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논어에는 이러한 계강자와 공자와의 대화가 여러 군데 실려 있는데, 대부분 계강자의 부정부패를 꾸짖는 내용이다. 그 장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치(政治)의 정은 올바르다(正)의 뜻이니 당신께서 올바르게 솔선수범한다면 그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서 공자에게 물었다. ‘만약 무도한 자를 죽임으로써 도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를 죽여도 옳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당신이 정치를 하는데 있어 어찌 살인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선을 먼저 행하려 한다면 백성들도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의 덕이 바람과 같다면 소인의 덕은 풀과 같은 것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바람에 쏠리게 마련입니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 강의/신영복 지음

    강의/신영복 지음

    논어 ‘위정’(爲政)편에 보면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구절이 있다. 직역하면 군자는 그릇이어선 안된다는 뜻.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 인간상이다. 하지만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동양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 구절에서 이끌어냈다. 그는 기(器)는 한마디로 전문성이고 직업윤리인데 이에 대한 거부가 동양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데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이 전문성이야말로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일뿐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되며,‘군자불기’는 오히려 오늘날의 전문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즉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고전 독법이라는 것이다. ‘강의’(신영복 지음, 돌베개 펴냄)는 이처럼 동양고전을 통해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은 책이다. 그가 성공회대에서 ‘고전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해 왔던 강의를 정리한 것. 그는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독법 전체에 걸쳐 관철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강의를 진행했으며, 해석 하나하나에서 진보적 색채를 강하게 보여 준다. 책에서 지은이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 즉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아래 각축을 벌이던 무한경쟁시대에 터져 나왔던 거대 담론들을 ‘고전’이란 통로를 통해 오늘의 상황에 연결하고자 한다.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강의를 이끌어가는 동안 ‘관계론’이란 화두를 놓지 않는다. 즉 고전은 서양철학의 개별적 ‘존재론’과 달리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담고 있다는 인식하에 강의를 진행한다. 이를테면 동양고전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시경’(詩經)에선 사실성에 근거한 진정성이 있음을 주목한다.“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기다리는 임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방어 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는 듯 가혹하다….”(遵彼汝墳 伐其條枚 未見君子 如調飢…魚 尾 王室如….) 서주 말기, 한 여인이 멀리 떠난 낭군을 그리는 모습을 그린 듯한 이 시에서 지은이는 단순한 그리움을 너머 땔감으로 나무를 꺾는 여인의 가난을 보고, 몇년째 낭군이 전쟁이나 사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난세를 읽는다. 또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진다는 방어는 곧 백성의 피곤함이요, 왕실이 어지럽다는 것은 정변과 전쟁이 잦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전쟁은 가난을 불러오고, 정치가 어지러우면 국민이 피곤한 상황은 오늘의 세계, 아니 지금 우리사회가 겪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맹자’ 앞 부분에 나오는 ‘여민락장’에선 함께하는 즐거움, 즉 여민동락(與民同樂)을 핵심 키워드로 제시한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며, 이를 주나라 문왕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혼자만의 즐거움 즉, 독락(獨樂)을 추구한 하나라의 폭군 걸왕은 “저놈의 해 언제나 없어지려나. 차라리 저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이란 노래를 들었음을 지적한다. 백성들이 그와 함께 죽어 없어지기를 바랄 지경이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지천이라도 어찌 혼자 즐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지은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바로 ‘걸왕의 독락’을 행복의 조건으로 삼고 있음을 본다. 개인적인 정서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차별성만 강조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 무지함을 질타한다. ‘노자’와 ‘장자’에선 이같은 관계론이 최대한의 범주로 확장된다. 자연(自然)이라는 개념으로 사회와 인간을 포용하며, 지배층이 아닌 민초의 철학, 약한자의 철학으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 묵자의 겸애(兼愛)와 순자의 교육론은 물론, 비정한 군주철학으로 규정되고 있는 한비자의 법가이론도 결국 ‘사회와 인간 관계’란 화두를 걸고 오늘에 관철되고 있음을 시종일관 이야기하고 있다.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244)-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44)-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는 공자의 말은 이 무렵 공자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 최적의 비유였지만 이를 통해 공자가 가지고 있는 결벽증(潔癖症)까지 느끼게 한다. 공자는 오늘날로 보면 강박의 신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인다. 이는 논어의 ‘향당(鄕黨)’편에 나오는 공자의 생활습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옷을 입는 습성뿐 아니라 지나치게 건강과 위생에 신경 쓰는 까다로운 식성은 예를 숭상하는 공자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노이로제 증상과 닮아 있다. “재계를 하실 때는 식사를 다르게 하셨고, 거소도 반드시 옮기어 앉으셨다. 밥은 고운 쌀일수록 싫어하지 않으셨고, 회는 얇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밥은 쉬어서 맛이 변한 것과 생선이 상한 것이나 고기가 썩은 것은 잡숫지 않으셨다. 빛깔이 나빠도 잡숫지 않으셨고, 냄새가 나빠도 드시지 않으셨다. 알맞게 익지 않은 것도 잡숫지 않으셨고, 제철 음식이 아닌 것도 잡숫지 않으셨다. 반듯하게 썰지 않은 것도 잡숫지 않으셨고, 간이 맞지 않은 것도 드시지 않으셨다. 고기는 비록 많이 드셨으나 밥 기운을 누를 정도로 많이 들지는 않으셨다. 술만은 일정한 양 없이 드셨으나 난잡하게 취하는 일은 없으셨다. 받아온 술이나 육포는 드시지 않으셨다. 생강을 물리치시는 일은 없으셨으나 많이 드시지는 않으셨다. 나라의 제사에 참여하고 받아온 고기는 하루를 묵히지 않으셨다. 집안 제사에 쓰고 남은 음식은 사흘을 넘기지 않으셨고 사흘이 넘으면 잡숫지 않으셨다. 식사를 할 때에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비록 거친 밥이나 야채국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드시기 전에 조금 양을 떼어 ‘고수레’를 하셨는데,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태도로 하셨다.” 공자의 이런 까다로운 식성은 다른 성인들인 석가, 예수와 전혀 정반대의 모습이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 육식을 철저히 금하라는 계명을 내리는 한편 자신은 탁발(托鉢)하여 걸식하였다. 이는 식욕의 욕망을 성욕과 수면욕과 같은 인간이 지닌 3대욕망 중의 하나로 보고 철저히 이를 절제함으로써 올바른 구도의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제자들과 밀 이삭을 잘라서 손을 씻지도 않고 먹었을 뿐 아니라 직접 잡은 생선을 불에 구워서 제자들과 나누어 먹고 자신이 먹던 빵을 떼어서 나누어 주는 비위생적인(?) 식성을 보여주고 심지어 프란치스코 성인은 식탐(食貪)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먹는 음식에 모래를 집어넣음으로써 맛의 욕망을 초월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나 불교에 있어 단식은 영성을 풍요하게 하는 수행의 중요한 방법인데, 유독 공자만은 까다로운 편식의 습성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까다로운 생활태도는 아내 올관씨와 원만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던 근본 원인이었을 것이다. 역시 단궁편에 ‘백어(伯魚:공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1년이 넘도록 계속 곡을 하였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 너무 심하다고 나무라자 백어는 그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옛날부터 부모의 상은 3년이지만 이혼한 어머니는 1년만 복상하면 되었다. 공자는 아들 백어가 이혼한 어머니상을 1년이 넘도록 계속 지키려 했기 때문에 공자가 ‘너무 심하다.’고 만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이혼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자의 결벽증은 비단 옷이나 음식, 생활습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위나라에 머물러 있을 무렵에는 공자의 강박증이 더욱 예민하게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흥미로울 정도인 것이다.
  • 나의 생명 이야기/황우석·최재천 글

    나의 생명 이야기/황우석·최재천 글

    절묘한 만남이다.21세기의 핵심코드로 부족함이 없는 ‘생명’의 끈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잡고 있는 세 사람, 황우석과 최재천, 그리고 김병종. 비록 책이라는, 출판사가 깔아준 멍석 위의 만남이지만 쉰하나 동갑내기인 이들의 생명을 향한 ‘의기투합’은 몰가치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시선을 단숨에 낚아채고도 남음이 있다. ‘나의 생명 이야기’(황우석·최재천 글, 김병종 그림, 효형출판 펴냄)는 김병종의 머리말처럼 생명을 주제로 만난 두 과학자와 한 예술가의 삼인행(三人行)이다. 두 과학자의 자전적 에세이에 한 예술가는 색깔과 향기를 입혔다. 세 사람이 누구인가. 황우석은 21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줄기세포 연구로 생명복제의 신기원을 열어가고 있는 생명공학자요, 최재천은 동물과 곤충의 행동 연구를 통해 인간 삶, 나아가 생명의 과학적 진리를 찾아나선 동물학자다. 김병종은 대표적 한국화가로서 ‘바보예수’‘생명의 노래’ 연작을 통해 생명의 끈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 이들은 ‘서울대학교’란 한 직장에서 오랜 세월 지내온 인연으로 맞닿아 있으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생명’이라는 주제를 화두로 삼고 있지만, 그 무게와 울림은 사뭇 다르다. 황우석과 최재천, 두 과학자는 각자의 전문영역에서 연구에 매달리면서도 짬짬이 생명의 소중함을 담은 글을 써왔다. 배아 복제, 흔히 말하는 ‘생명복제’와 생태·환경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동물행동학은 어쩔 수 없이 평행선을 달릴 것 같지만 이 책에서 두 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결국 ‘인간의 아름다운 삶’이라는 귀일점에서 만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접점엔 사람·동물·식물이 화합하는 김병종의 그림이 가세하며 생명성을 완결시킨다. 세 사람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 ‘내게 생명이란 우리집에서 키우던 소의 순한 눈망울, 봄이면 샛노란 솜털이 개나리보다 탐스럽던 병아리, 암탉이 막 낳은 따뜻한 달걀, 그런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던 내 부모형제와 이웃들…. 생명은 그런 것이다.’ 황우석의 생명 인식은 이처럼 소박하면서 귀소본능적이다. 어렸을 적 농촌에서 소와 함께 들판을 쏘다니며 풀을 뜯겼던 그는 소와 평생을 함께하겠노라고 결심했다. 소가 친구처럼 가깝고 좋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새끼 많이 낳는 소, 튼튼하고 잘 자라는 소를 연구해서 우리 가족과 이웃들의 삶을 기름지게 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의 소망은 훗날 송아지 ‘영롱이’ 복제와 인간 줄기세포 복제로 귀중한 열매를 맺으면서 인간 삶의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천의 ‘생명’에 대한 출발점 역시 귀소본능적이다. 그는 어렸을 적 강릉 할아버지 댁에서 자라며 삼촌들과 논병아리를 잡으러 다녔던 강릉으로의 귀소본능 때문에 잠을 설친 밤이 셀 수 없다고 했다. 황 교수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주제로 한 눈부신 연구의 바탕엔 역시 귀소본능이 깔려 있던 것. 2지망으로 서울대 동물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뒷걸음치다 빠진 생물학 안에 내가 꿈꾸던 삶이 있다는 걸 발견한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고 했다. 수많은 동물을 연구하는 과정은 결국 동물속에서 인간을, 인간속에서 동물을 엿보는 것임을 그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다. 또한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환경 및 생태 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21세기의 새로운 인류상인 ‘공생인(共生人)’으로 귀결됨을 강조하고 있다. 김병종 교수는 1990년대까지 ‘바보예수’ 연작을 발표하며 ‘종교적 희생’을 바탕으로 한 생명사상을 붙들어 왔다. 그리고 80년대 말 작업실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생명에 새로 눈을 뜬다. 그는 이번 책에 생명의 메시지가 강한 그의 작품들을 녹여 넣으면서 때로는 어릴 적 일기 같은, 때로는 ‘생명에 대한 단상’같은 짧은 해설을 붙였다. ‘낙락장송의 숲에 엎드린 아이는 내 유년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 서늘한 소나무 숲에서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그 숲에 가고 싶다.’‘숲에서’(1992)란 이 작품속의 소나무 숲에 엎드린 아이는 모양도, 색깔도 소나무와 같다. 마치 숨은 그림찾기 속에 찾아야 할 대상처럼 나무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 아이는 김병종인 동시에, 어릴 적 황우석, 그리고 최재천이다.1만 1000원. ■ 황우석·최재천·김병종 세 사람의 특별한 인연 황우석과 최재천, 김병종은 한 직장에 적을 둔 동갑내기인 데다 모두 ‘생명’이란 테마를 연구와 작업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정도 인연이면 서로에 대한 생각도 각별할 터. 김병종은 ‘우레와 같은 명성에도 조금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 연구에 매진하는 황교수를 볼 때면 새삼 그가 아사(我師)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논어의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의 바로 그 ‘아사’다. 즉 셋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황교수가 바로 그다. 최재천에 대해선 ‘화가의 눈과 음악가의 귀를 가진 과학자’로 표현한다. 황우석 교수는 김병종에 대해 ‘칼을 잡고 피를 보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이 메말라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있는데, 이럴 때면 내 친구 김 화백의 ‘생명의 노래’를 듣고 그 온기로 조그마한 생명의 열매를 맺고 싶다.’고 했다. 최재천 교수는 ‘황우석 선생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 소라면 내 삶에는 대관령이 있다.’며 ‘스스로 감자바우 촌놈이란 걸 은근한 자랑으로 흔들며 살아왔는데, 진짜 촌놈 황우석 선생과 나란히 글을 쓰려니 나는 그저 촌놈이고 싶어 안달하는 얼치기 촌놈’이라고 존경심을 담은 동질감을 표시한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240)-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40)-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러한 자공의 약점을 파고들었던 대부 숙손무숙은 특히 집요해서 자공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자를 비방하여 자공의 마음을 떠보고 있는데, 이 장면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숙손무숙이 공자를 다시 비방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였다. ‘그러지 마시오. 선생님은 비방할 수가 없는 분입니다. 다른 현명한 사람은 언덕과 같아서 누구나 넘어갈 수가 있으나 선생님은 해와 달 같은 분이어서 아무나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남들이 자기 스스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끊으려 한다 하더라도 해나 달에게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그러는 사람들의 분수를 모름을 더욱 드러내게 될 따름입니다.’” 자공은 스승에 대한 비난을 ‘엿볼 수 없는 궁궐’,‘하늘에 이르는 사다리’,‘해나 달 같은 영원한 존재’라는 식으로 변호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자공은 외교술과 치재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던 인격자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공은 공자가 죽자 다른 제자들은 3년 동안 복상을 하고 헤어졌는데, 자공만은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6년간이나 무덤을 보살폈던 제자 중의 제자였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하였다. “지금 이 순간을 현재의 눈으로 보지 말고 먼 영원의 눈에서 현재를 보라.” 자공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스승 공자가 해와 달 같은 영원한 존재임을 꿰뚫어 본 제자였으니 공자가 2500년 후인 오늘에도 해처럼 한낮에 빛나고 달처럼 한밤중에도 빛나고 있음은 그러한 제자들을 두었으므로 그의 사상이 계승 발전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제자 자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무사였던 자로가 공자가 위나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분가하여 읍재로 나아가 포땅을 다스렸다. ‘공자가어’는 자로가 포땅을 다스리던 3년째 되던 해 공자가 그곳에 들렀던 인상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포땅의 경계로 들어오면서 말하였다. ‘훌륭하다. 유는 공경스러움으로써 신의가 있다.’ 다시 고을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하였다. ‘훌륭하다. 유는 충성되고 신의가 있으면서도 관대하다.’ 또 자로의 공소(公所)에 이르러 말하였다. ‘훌륭하다. 유는 밝게 살핌으로써 올바른 판단을 한다.’ 이때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자공이 수레의 말고삐를 잡고 있다가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자로의 치적을 보시지도 않으시고 세 번이나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셨으니 훌륭하다고 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그의 정치업적을 보았다. 이곳 경계 안으로 들어오니 밭갈이가 잘 되어있고 김이 잘 매어져 있으며 도랑이 깊게 잘 파져 있었다. 이것은 자로가 공경스러움으로써 신의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곳 고을 안으로 들어와 보니 집과 담장이 훌륭히 손질되어있고 나무가 무성히 자라있었다. 이것은 자로가 신의가 있으며 관대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구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자로의 공소에 이르고 보니 마당이 매우 맑고 한적하며 밑에 사람들이 맡은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로가 밝게 살피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자로의 다스림이 어지러워지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세 번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하나 어찌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
  • 儒林(239)-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9)-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공자의 제자 중 자공이 특히 다른 사람을 비교하기 좋아했다는 점이다. 논어에 보면 이러한 자공의 특징을 가리키는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생님 자장(子長:공자의 제자)과 자하(子夏) 두 사람 중 누가 더 낫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겠네요.”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 공자가 남긴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문장은 자장이 재주가 높고 뜻이 넓었으나 구차히 어려운 일을 하기 좋아했으므로 항상 중도에서 지나쳤고 자하는 독실히 믿고 도를 지켰으나 규모가 협소했으므로 항상 미치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공자는 이 둘을 비교하면서 누가 더 나을 것 없이 똑같이 단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 것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자공의 질문대로 뛰어난 사람의 지나침이 어리석은 자의 부족함보다 나을 것 같지만 두 쪽 다 중도를 잃음으로써 중용(中庸)을 벗어났던 것이다. 중용(中庸). 유가에 있어 도란 중용을 극치로 삼고 있었다. 실제로 공자는 늘 곁에 두고 보는 유좌지기(宥坐之器)란 그릇을 마음속에 항상 지니고 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공자가 일찍이 평소에 존경하던 주나라 환공의 사당에 갔을 때 사당 안에 있던 의기(儀器)를 발견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하는 그릇입니까.” 공자가 묻자 사당지기가 대답하였다. “늘 곁에 두고 보는 유좌지기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하였다. ‘나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좌지기는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가득 채우면 엎질러진다고 했지요. 오직 적당히 차야만 바로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공자의 마음속에는 평형을 유지하는 유좌지기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득 차면 엎질러지고 비면 기울어짐으로써 항상 중용을 유지해야만 바로 서는 마음의 그릇을 통해 공자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을 도의 극치로 삼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처럼 자공이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자공이 지닌 인간성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권신들이었던 숙손무숙과 진자금이 한결같이 ‘자공이 공자보다 현명하다’,‘당신이 겸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찌 당신보다 더 현명하겠습니까.’라는 교활한 수법으로 자공의 마음을 떠보았던 것은 자공이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약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지닌 마성(魔性)인 것이다. 비록 자공은 스승 공자를 자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군자라고 우러러 존경하고 있지만 그런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권신들은 공자와의 비교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파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비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로써,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호색으로써,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열등감을 자극하는 바로 이것이 아킬레스건을 찌르는 치명적인 급소가 되는 것이다.
  • 儒林(238)-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8)-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처럼 10년 사이에 뛰어난 외교활동으로 다섯 나라의 정국을 임의로 조종하였을 뿐 아니라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나올 만큼 거부가 된 자공은 따라서 당대에는 오히려 스승 공자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논어에는 권신들이 공자보다 자공이 더 현명하고 빼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어느 날 조정에서 한 대부에게 말하였다. ‘자공이 공자보다 더 현명하다.’ 이 말을 들은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자공에게 전하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궁궐의 담에 비유하자면 나의 담은 어깨정도의 높이여서 담 너머로 궁궐속의 훌륭함을 엿볼 수 있으나 선생님의 담은 여러 길의 높이라 정식으로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궁궐과 종묘의 아름다움이나 여러 관저의 화려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찾아가는 사람은 드뭅니다. 따라서 숙손무숙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논어의 자장(子張)편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진자금(陳子禽)이 자공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겸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찌 당신보다 더 현명하겠습니까.’ 이에 자공이 말하였다. ‘군자는 말 한 마디로 지혜롭다고도 하고, 또 말 한 마디로 무지하다고도 하는지라 말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지요. 선생님에게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하늘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갈 수 없음과 같소. 선생님께서 일단 나라를 맡아 다스리기만 한다면 이른바 백성들을 세워주어 곧 그들이 자립케 하고, 백성들을 인도하여 곧 그대로 행하게 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해주어 곧 모두가 따르게 하고, 백성들을 고무시켜 곧 모두가 평화롭게 될 것이오. 선생님께서는 살아계시면 영광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애도(哀悼)를 받으실 것이니, 어찌 그런 분에게 내가 감히 미칠 수가 있겠소.’” 그러나 권신들은 여전히 공자에 대한 비방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공자에 대한 비방을 제자인 자공이 훨씬 현명하다는 반어법으로 교묘하게 구사하곤 했는데, 이는 일종의 이간질이었다. 무릇 평화는 이간에서부터 깨어지는 법. 이는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성경에 보면 수많은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마음을 떠보고 있다.40일간의 단식 끝에 광야에서 받은 악마의 유혹도 결국은 하느님과 예수와의 이간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사람들의 칭찬은 대부분 이간질을 부추기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것. 이 유혹에 넘어간다면 허영심은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과 사랑은 깨어지는 것이다. 이간질의 최대효과는 비교법으로, 비교법은 인간의 우월감을 자극하는 최고의 미끼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라고 선언하였던 것은 위선을 통타하는 만고의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그 무렵의 권력자들은 공자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자공의 재능을 칭찬하였으며 자신들의 속물근성을 항상 질타하고 있는 불편한 존재인 공자를 죽이기 위해서 달콤한 칭찬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한 존재.’ 인류의 스승인 예수와 공자 그리고 석가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이며 ‘반대 받는 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지닌 권력욕과 명예욕과 육욕의 속성 반대편에 서서 영원의 진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 儒林(237)-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7)-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사물의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언어의 도리가 맞지 않는 법이다. 언어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하는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을 죄과에 알맞게 줄 수가 없게 된다. 형벌이 죄과에 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안심하고 놓을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군자란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하고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서 군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명분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공자가 자로에게 말하였던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는 정치철학에서 비롯된 ‘정명주의(正名主義)’는 공자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철학이다. 이는 자로의 불평처럼 얼핏 보면 우원(迂遠)한 공론(空論)같이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자기에게 주어진 명칭이나 명분에 꼭 맞는 올바른 상태에 있다는 것은 질서의 극치를 뜻하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이란 칭호에 딱 들어맞는 행동을 하고, 신하란 신하라는 이름에 딱 들어맞는 행동을 하며, 백성은 백성이란 이름답게, 관청이나 학교는 자신의 명분에 딱 들어맞는 상태에 딱 놓여 있다면 그 국가는 원칙에 충실하게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제나라의 경공에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대답과 일맥상통하는 철학이었던 것이다. 자로는 스승의 대답을 통해 임금답지 못한 출공이 다스리고 있는 위나라에서는 절대로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스승의 결단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각자 뿔뿔이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수년 전 노나라에 초빙되어 스승의 곁을 떠난 염구처럼 제자들은 분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우선 외교에 뛰어난 자공은 노나라의 초빙으로 사신으로 등용되며, 자로는 위나라의 작은 마을 읍재(邑宰)가 된다. 가장 먼저 벼슬길에 나선 사람은 자공으로 공자가 위나라에 입국한 다음해에 오나라의 임금 부차가 제나라를 정벌한 끝에 노나라와 회맹하면서 제물로 쓸 소 백 마리를 바칠 것을 요구한 데서 비롯되었다. 주나라의 예제에 의하면 상공이 아홉 마리, 후백이 일곱 마리만 바치면 그만이었는데 백 마리의 소를 바치라는 것은 억지였으므로 노나라는 이에 부당함을 따졌으나 패왕이었던 부차는 강제적으로 이를 요구하고 관철하였던 것이다. 그런 후 오나라의 권신인 태제비(太帝 )란 사람이 노나라의 권신 계강자를 불렀다. 이때에 계강자는 그 회합을 두려워하여 자기 대신 사신을 보냈는데, 뽑힌 사람이 바로 자공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자공은 눈부신 외교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그의 활동범위가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자공은 그 후 10여년 동안 다섯 나라를 주유하면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는 한편 모든 외교 분쟁을 해결한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사기에는 이처럼 뛰어난 자공의 외교활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자공은 노나라를 보존시키고(存魯), 제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亂齊), 오나라를 패망시키고(破吳),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고(彊晉), 월나라를 패자가 되게 하였다(覇越).” 그뿐인가. 사기에는 자공이 조나라와 노나라의 사이에서 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벌어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부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공은 외교뿐 아니라 치재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이러한 자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안회는 도에 가까워져 있지만 쌀통이 자주 비었다. 그러나 자공은 천명대로만 살지 않고 재산을 불렸고 그의 예측은 거의 적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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