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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술이 술술] 장자/글쓴이: 장자

    ‘철학’과 ‘사상’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는 직접 관련 없이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이다. 중국의 고전 사상이라면 더 그렇다. 뭔가 모르게 엄숙한 교훈들로 가득차 있거나,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들과 심오한 내용들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하지만 후대의 인물들이 덧붙여 놓은 온갖 해석과 주석들을 제외하고 순전히 원래의 내용만을 살펴보면 ‘논어’나 ‘맹자’,‘장자’와 같은 책들은 결코 읽기 어렵지 않다. 공자나 맹자, 장자와 같은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은 어떤 개념들의 논리적 전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 삶 속에서 나타난 예화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애당초 철학과 사상이 인간의 삶과 독립된 형이상학적인 사색의 취미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과 삶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 갈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고민들의 산물임을 알려 준다. 또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한 ‘설득의 사상’의 성격이 유독 강하다. 특히 ‘장자’는 더욱 그러하다. 이 책에서 장자는 ‘포정’과 같은 백정이나 매미 잡는 사람, 호랑이 사육사, 활 잘 쏘는 사람 등을 등장시키며 그들이 삶에서 얻은 지혜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때로는 곤(鯤)과 붕(鵬)이나 혼돈(混沌)과 같은 허황된 이야기들을 예로 들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장자는 당대의 인간들을 지배했던 상식적인 사고와 세속적인 가치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상식의 세계와 세속적인 가치에 맞서서 또 다른 세속적 가치와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비판은 세속적 가치와 권위를 근본적으로 초월하는 광대함과 통쾌함을 지니며, 그것들에 길들여지지 않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지향한다. 오늘날 사회의 규모가 날로 커져가고, 조직 체계가 고도화될수록 거꾸로 인간들은 더욱 무력해지고, 그들이 삶에서 지닐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의 폭은 더욱 작아지고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통일된 삶의 방식과 규범,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어느덧 인간들은 무의식과 욕구마저도 사회의 통제를 받는 자동 인형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자본과 과학기술의 융합과 부추킴에 의해 생기는 여러 가지 환상과 욕망들에 얽매여 그것을 따라가기에만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 인식의 유한함과 만물의 평등성,‘쓸모없음의 쓸모’를 강조한 장자의 사상은 특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입 논술고사의 제시문으로도 가장 많이 출제되고 있는 책이 ‘장자’이기도 하다. ‘장자’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지혜를 회복시킨다. 장자의 사상은 우리 자신의 상식과 가치를 근원적으로 뒤집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안동림씨의 말처럼 “상식의 척도에서 보면 그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터무니없기 때문에 위대한 사상가일지도 모른다.‘장자’ 가운데는 ‘논어’나 ‘맹자’에 보이는 경건 독실한 인생의 지혜도 착실한 이상주의의 설교도 찾아보기 어렵다.‘논어’나 ‘맹자’가 그대로 도덕 교과서라면 ‘장자’는 그렇지 않다는 데 그 특유의 가치가 있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독서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중3∼고3 -관련 교과:고등 사회, 도덕, 국사, 윤리와 사상, 전통윤리 -함께 읽어 볼 책:맹자(맹자), 논어(공자), 동양철학에세이(김교빈 외),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기출논제:서강대 2001학년도 정시 논술, 인하대 2002학년도 수시1학기 논술, 서울교대 2004학년도 정시 논술, 고려대 2005학년도 정시 논술, 경희대 2000학년도 모의논술, 서강대 2000학년도모의논술, 서강대 2003학년도모의논술. ■생각해보기-장자가 말한 ‘제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자가 말한 ‘지인’은 어떠한 존재인가. -‘사람들은 모두 쓸모있는 것의 쓸모(유용지용)는 알아도 쓸모 없는 것의 쓸모(무용지용)를 모른다.’는 장자의 말이 오늘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자신의 생각을 써보자. -장자가 말한 ‘다스리지 않음의 다스림’은 어떤 뜻인가. -장자가 말한 ‘자연의 순리에 따른 통치’와 ‘신자유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재혼뒤 제2 반상인생 ‘토종바둑’ 서봉수 9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재혼뒤 제2 반상인생 ‘토종바둑’ 서봉수 9단

    삼라만상의 우주와 희로애락의 인간세계를 한곳에 축소시킨다면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가로·세로 42×45㎝에 불과한 나무판이 있다. 그 위에는 가로·세로 19×19줄이 교차되면서 361개의 점이 그어진다. 가운데 점은 천원(天元)이다. 지구 공전 주기가 365.25일이고 보면 절묘한 맞춤형이 바로 바둑판이다. # 1972년 최저단·최연소 명인전 타이틀 바둑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취미였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 성인 남성 5명 중 2명이 바둑을 즐긴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동격서(聲東擊西)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소탐대실(小貪大失) 등 생존경쟁에서 보약처럼 응용되는 수많은 격언들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반상이다. 공자도 바둑을 좋아했던지라 ‘논어’에서 ‘바둑 두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했다. 서봉수(53) 9단. 요즘에는 이세돌 이창호 최철한 등 젊은피에 한발 밀려나 있지만 ‘서봉수류(類)’는 여전히 바둑팬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왜일까. 야전사령관, 야생마, 매운 고추장, 토종바둑, 오뚝이 등으로 불려온 그는 순수 ‘국산품’이기 때문이다. 서 9단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한국 바둑계의 정상은 일본 ‘유학파’들의 차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순수 국내파인 서봉수가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매운 고추장 맛을 보여줬다. 특히 ‘조훈현 서봉수 백년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둑계를 주거니 받거니 평정했다. 특히 반상 위를 마구 헤집는 전투 지향적인 기풍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팬들에겐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1972년 ‘명인’ 타이틀을 땄을 때 최저단(2단), 최연소(19세)라는 기록을 세웠다. 명인전을 주최한 신문사는 1면 머리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 29살 연하 베트남 여성과 지난해 재혼 서 9단은 올해로 입신의 경지(9단)에 이른 지 20년째. 아울러 70년에 프로입문했으니 바둑인생 35년이 된다. 휴전협정이 한창이던 53년에 태어난 그는 개인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해 12월 29세 연하의 베트남 여인과 재혼해 새 삶을 살고 있다. 결혼 당시 일부에서는 곱지 않은 오해의 시선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제2의 바둑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 자택 인근의 커피숍에서 서씨를 만났다. 먼저 근황을 물었더니 “프로기사가 달리 할 것이 뭐 있겠느냐.”면서 “6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3일은 서울 반포에 있는 ‘권갑용 바둑도장’엘 나간다.”고 했다. 권갑용씨는 프로 7단으로 이세돌과 최철한 등을 배출해 바둑 스타의 제조기로 알려져 있다. 서씨는 이 바둑도장에서 예비프로들과 대국을 하면서 장차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갈 후배들을 지도해주고 있다. 아울러 잡지와 컴퓨터 바둑코너 등에 기보해설을 해주고 가끔 지방 초청강연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시합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루종일 잠 자는 시간만 빼놓고 늘 바둑과 함께 지낸다. 바둑 외에 다른 취미는 없느냐고 하자 “학창시절 탁구 당구 등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즐겼다.”면서 지금은 관전하는 정도로 멀어졌다고 대답했다. 다만 3년 전 골프를 배워 지인들이 불러주면 같이 라운드한다고 말했다.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약간 주저하더니 “평범한 가정주부로 빨리 적응해 잘 살고 있다.”면서 “(부인은)사고방식이 건전하고 착하다. 명랑한 성격이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고 자랑했다. 어울러 “(베트남에서)고생을 하며 자라서 그런지 참을성이 많고 어려움도 잘 견딘다.”고 부연했다. # “먹고자는 시간 외엔 오로지 바둑만” 서로의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느냐고 하자 “집을 나설 때 아내에게 ‘굿바이’ 하면서 손을 흔들고 집에 돌아오면 웃으며 손을 잡는다. 또 시장하면 ‘배고프다.’는 눈짓을 한다.”면서 “같이 지내다 보니 굳이 많은 얘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웃었다. 가끔 주말에 함께 나들이도 한다. 인근 관악산 주변을 산책하고 기분 내키면 산 중간까지 오른다. 늦은 밤 집앞 24시간 할인매장에서 시장을 같이 보는 것도 재미란다. 최근에는 부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컴퓨터 한대를 사주었다고 귀띔했다. 서 9단의 각오가 사뭇 비장해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베트남 신부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겠다고 몇 차례 다짐했다. 아울러 재혼 이후 물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도 깨달았단다. 서 9단이 베트남 신부를 맞게 된 것은 지난해 여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고 몇 차례 베트남을 오고가면서였다. 결혼식 때에도 “신부는 비록 배운 건 없지만 순수하고 진실한 여자”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나는 그를 사랑하며,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서씨의 성적은 37전 23승 14패로 여전히 부진한 편이다. 그러나 자신 하나를 믿고 머나먼 이국 땅에 온 신부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돈도 벌고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 자신이 틀에 박힌 ‘기풍’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이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져야 합니다. 또 공부하고 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요즘에는 승부가 너무 치열합니다.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강해져요. 이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더욱 재미가 있지요. 엣날에는 고수들끼리 타협도 가끔 했는데…. 제 인생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바둑밖에 없어요, 밥먹고 자는 시간 외엔 오로지 바둑 공부만 하지요.” 세상살이가 아무리 치열하다고 해도 바둑처럼 극명한 인생살이는 없다고 했다. 프로기사들은 한미디로 피말리는 토너먼트라고 했다. 지면 인생에서 탈락이란다. 조치훈씨의 경우 울면서 밤길을 걷다가 몇번이고 자살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친구들도 한번 패할 때마다 견디기 힘들 만큼 큰 충격 속에서 방황하고 헤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같은 아픔을 이기는 방법은 그저 즐기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춘향이가 이도령 생각하듯이 늘 그리워하고 ‘올인’의 각오로 무장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대국에서 질 때마다 괴로워하다 보면 병이 생겨 인생끝장은 금방이란다. 또 바둑은 결국 체력싸움이라고 강조한다. 복서도 라운드가 계속될수록 펀치가 약해지듯이 바둑 고수도 초읽기에 몰리면 쉬운 수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반상의 행마가 곧 인생이듯 늘 상대의 괴롭힘을 견뎌내야 하는 전쟁이라고 역설한다. “욕심없이 살아가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타이틀 하나 정도 따면 좋겠지요.” 서 9단은 오뚝이라는 별명답게 여전히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다.8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93년 제2회 응창기(應昌期)배 우승,97년 진로배에서 바둑사상 9연승 싹쓸이 신화,2000년 시즌 국내 최대 타이틀 LG정유배 우승 등 3∼4년 주기로 일을 내고 있다. # “나이 먹어도 새로운 바둑수는 생겨” 바둑계에서 50대는 분명 노장이다. 하지만 준비된 자의 미소는 늘 아름다운 법. 일본의 구토 9단은 나이 60에 천원전 타이틀을 차지했고, 후지사와는 66세에 왕좌전을 제패했다. 사카다는 80세에 은퇴했다. 또 얼마 전에 별세한 김수영 7단은 췌장암 판정을 받고서도 ‘아직 인생의 대마는 살아 있다.’며 공식대국을 7판이나 두었다. 원로 조남철씨는 60세에 9단 승단을 했고,82세에 ‘세번의 눈물’이라는 회고록을 펴내 바둑팬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무덤덤한 성격의 서 9단은 “바둑에서 똑같은 판은 하나도 없다.”면서 “승부란 늘 새로 시작하는 것이고 또 나이를 먹어서도 새로운 바둑 수는 생겨나는 법”이라고 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3년 대전 출생 ▲71년 배문고 졸업 ▲70년 프로입단 ▲71년 명인전 우승 ▲74년 제1기 국기전 우승 ▲75년 제10기 왕위전 우승 ▲76년 명인전 우승 ▲80년 국기전, 왕위전, 최고위전 우승▲83년 바둑왕전, 제왕전, 명인전, 기왕전 우승 ▲86년 제30기 국수전 우승 ▲87년 명인전, 제왕전, 국수전 우승 ▲86년 9단 승단 ▲88년 국기전, 기왕전 우승 ▲91년 동양증권배 우승 ▲92년 국기전 우승 ▲93년 제2회 응창기배 우승 ▲95년 제1회 신사배 우승 ▲97년 제5기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 9연승 기록 ▲99년 LG정유배 프로기전 우승, 제1회 프로시니어기전 우승 ▲2003년 제3회 돌씨앗배 프로시니어기전 우승 ▲2005년 제6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4강. ■ 상훈 바둑문화상 수훈상 수상 4회(80,81,82,93년). 통산 1000승 달성(94년).
  • [어떻게 지내세요] 한자철학 연구하는 수필가 안병욱씨

    [어떻게 지내세요] 한자철학 연구하는 수필가 안병욱씨

    “한자엔 철학이 있지. 성인(聖人)의 성(聖)자를 보면 듣고(耳)고 나서 말(口)을 해야 으뜸(王)이란 뜻이지. 훌륭한 지도자는 영혼의 소리까지 듣고 자기 얘기는 삼가야 해.” 수필가이자 철학자인 안병욱(86) 전 숭실대 교수.‘산다는 것’‘안병욱 명상록’ 등 수많은 저서를 통해 현대인의 타락하고 혼탁한 정신생활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현대 지성의 방향과 모럴을 제시해왔다. 서울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은 안씨 자택을 찾았다. 아파트 현관문이 빼곡하게 열려 있었다.“선생님”하고 불렀더니 “그냥 들어와”라고 한다. 고서의 냄새가 잔뜩 풍기는 서재에서 마주 앉았다. 먼저 ‘도산아카데미포럼’에 가끔 참석한다고 인사말을 건네자 주저없이 “일제때 많은 사회적 박해를 받았지만 흥사단만큼 100년 가까이 시종일관 원칙과 사상을 견지해온 단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도산아카데미’의 설립대표이기도 한 안씨는 “도산 선생은 기러기 정신으로 흥사단을 설립했다.”면서 “기러기는 구만리 하늘길을 날아도 방향감각이 확고하며 질서정연하다.”고 강조했다. 협동정신이 강하고 신용과 신의, 죽는 날까지 일부일부(一夫一婦)를 지키는 것 또한 ‘기러기의 세계’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문명의 일곱가지 병, 즉 ▲도덕없는 상업 ▲인격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근로없는 재산 ▲양심없는 쾌락 ▲희생없는 신앙 ▲원칙없는 정치 등을 꼬집었다. 근황을 물었더니 “현대인에게 좋은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 4년째 월간지(한글+한자문화)에 무료로 글을 게재하고 있다.”면서 한자철학은 알수록 흥미롭다고 했다. 예를 들어 즐거울 낙(樂)은 상형적으로 원래 어린이가 책상에 앉아 양 손으로 뭔가 배우는 모습이며, 어미 모(母)는 쪼그려 앉아 기다리는 여(女)의 모습에 젖꼭지 두개(모성)를 콕 찍어 형상화했다는 것. 건강(健康) 또한 시멘트 옆에 사람이 서 있는 튼튼한 신체(健)와 집안에서 여자가 절구로 곡식찧으며 어떤 요리를 할까 즐겁게 생각하는 그런 편안한 모습(康)이 합쳐진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신체를 단련시켜도 마음의 편함이 없으면 진정한 건강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질투와 시기, 부조리가 있는 한 사회적 건강은 결국 절름발에 불과하다고 비유했다. 요즘 젊은이들의 철학과 정신세계가 얕아지는 이유도 이같은 한자의 오묘한 철학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얼마 전까지 천식과 기관지에 문제가 있었지만 한자연구에 빠지다보니 지금은 아주 깨끗해졌다면서 매일 아침 아차산에 오른다며 웃었다. 오후에는 강의를 했던 수백권의 대학노트를 다시 들여다보기도 하고 칸트와 셰익스피어, 논어와 맹자 등을 읽는다. “이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해 본격 연구할 생각이야. 흥망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거든. 요즘 우리 지도층은 한심해. 모럴이 없어요. 국가의 기강은 질서와 원칙에서 생기지” 생명과 사명이 만날 때 가장 위대하다는 그는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글’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글을 쓰자, 인간 상록수를 만들자, 국가의 인재를 위해 좋은 철학을 심어주자 등의 사명감으로 더욱 충만해진다는 것. 세종때 집현전의 성삼문과 신숙주는 음성학의 대가인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반도를 열세번이나 다녀오면서 최고의 발명품인 ‘한글’을 완성한 일화도 곁들였다. “1년전 부산에서 강연을 할 때 호텔에서 안마를 한번 받았지. 그때 안마사가 ‘직업이 대학교수였느냐.’고 하더군. 또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는데 재단사가 ‘오른팔이 3㎝ 더 길다.’고 했어. 하기사 20대 중반부터 하루 10시간씩 서서 강의를 했고 오른팔을 뻗어 칠판에 글을 쓰다보니 그런 얘기를 들을 만도 하지.” 문득 서재에 걸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불여학’(不如學-아무리 생각해도 배우는 것만 못하다.).‘청산원부동 백운자거래’(靑山元不動 白雲自去來-청산은 원래 움직임이 없는데 구름이 오고갈 뿐이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3~4세기 국내最古 목간 출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3∼4세기 한성도읍기(BC 18∼AD 475)의 목간이 인천시 계양구 계양산성에서 발굴됐다. 선문대 고고연구소(소장 이형구)가 이 산성 동문지 발굴작업을 벌여 한성백제 시대의 집수정(우물) 아래층에서 수습해 27일 공개한 이 목간은 나무를 오각기둥 형태로 깎아 각 면에 묵글씨를 쓴 오각목간(五角木簡)으로, 논어(論語)가 기록돼 있어 당시에 이미 지방에서 논어가 교육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목간 중 글자가 새겨진 것은 240여개이나 모두 서기 6∼8세기 백제와 신라시대에 집중돼 있다.선문대 고고연구소 제공
  • 儒林(37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7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지금까지의 줄거리) 소설 유림의 출발은 성종13년(1482년)에 태어나 중종14년(151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죽은 정치개혁자 조광조(趙光祖)의 추적에서부터 시작된다. 조광조의 나이 33세 때 중종은 직접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에 나아가 다음과 같은 알성문과 시험을 낸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 그러니 그대들은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조광조는 그 유명한 답안을 다음과 같이 쓰기 시작한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해서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임금과 백성 역시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광조는 공자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현실정치에 접목시키려다 실패하고 기묘사화로 비참하게 숨을 거둔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바로 2천5백년 전 춘추전국시대 때 중국에서 태어난 세계 3대 성인 중의 하나인 공자의 정치적 이상에서 비롯된 것. 공자는 55세 때에 자기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70여개의 나라를 주유열국하였던 성인. 그러나 공자는 13년 동안의 천하 주유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왕들과 제후들로부터 비웃음만 당하고 마치 상갓집의 개처럼 초라하게 68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공자의 정치적 역량과 위대한 학문은 결코 양립될 수 없었던 것일까. 조광조와 달리 공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하였던 이퇴계는 불과 12살의 나이 때 논어를 읽다가 ‘이(理)’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빈한 생활 끝에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기(出仕期)에 나섰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제2의 출가행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위대함은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림의 숲 속을 스승도 벗도 없이 혼자서 ‘길 없는 길’을 만들어 나가면서 아성(亞聖) 맹자(孟子)와 주자(朱子) 등을 만남에 있다. 스스로 자원하였던 단양과 풍기의 군수를 끝으로 은둔강학기(隱遁講學期)로 들어간 퇴계는 마침내 퇴계사상의 골수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확립함으로써 유림의 숲을 완성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에서 퇴계로 이어지는 유가의 위대한 계승자들이었던 맹자를 비롯하여 묵자, 순자, 주자, 왕양명 등 유림의 숲들은 어떻게 발전되어 왔으며, 어떤 시대적 변화를 거쳐 동양의 사상과 황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유림’은 제1부인 전반기 숲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다시 시작되는 유림의 숲은 제2부의 후반기 숲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를 비롯한 대사상가들은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하늘에 이르는 길’과 ‘사람에 이르는 길’, 그리고 ‘군자에 이르는 길’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말하였다. “내가 아직 삶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 공자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닌 하나의 무이당(無二堂)인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맹자와 순자, 주자, 그리고 조광조와 퇴계는 유림의 숲 속에 우리와 더불어 아직도 울울창창 살아있다.
  • 儒林(36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불사가(不俟駕). 이는 유가에서 말하는 오륜 중의 하나인 군신유의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 구절은 논어의 향당(鄕黨)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리키고 있음이었다. “병이 들었을 때 임금이 문병오시면 머리를 동쪽에 두시고 조복을 위에 덮고 큰 띠를 그 위에 걸쳐놓고 맞으셨다. 임금이 오라는 명이 내리면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셨다.(疾 君親之 東首加朝服 拖紳君命召 不俟駕行矣)” 지금까지 퇴계는 공자의 가르침을 본받아 임금이 오라는 명이 있으면 물러가기를 청하였다가도 어쩔 수 없이 수레를 타고 기다리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죽령을 넘어 풍기군수를 끝으로 퇴계는 더 이상 임금의 부르심이 있다 하더라도 유의(有義)에 매달려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퇴계는 죽령을 넘기 전과 죽령을 넘은 후를 ‘앞과 뒤’로 나누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앞과 뒤(前後)’가 다른 듯하다. 전에는 임금의 명령을 듣기만 하면 곧 달려갔으나 뒤에는 부르시면 반드시 사양하였으며, 가더라도 굳이 머무르지 않았다. 자리가 낮으면 움직임이 가벼우므로 한번 나가볼 수도 있지만 벼슬이 높으면 책임이 큰데 어찌 가벼이 나갈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벼슬을 받으면 곧 가서 ‘임금의 은혜가 하늘처럼 무거운데 어찌 물러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약 나아가고 물러가는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사랑만을 따를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을 예의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으로 하는 것이니 그 어찌 옳겠는가.”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퇴계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한다. 그전까지 퇴계는 공자의 ‘학문을 하면 녹이 그 가운데 있다.(學也祿在其中)’라는 말과 자하(子夏)의 ‘벼슬하고 여유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해서 여유 있으면 벼슬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에 충실하여 벼슬과 학문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마침내 단양군수를 떠나는 죽령 고갯마루에서 그것이 불가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차피 작록이란 벼슬과 학문 사이에 개재해 있으므로 전념할 수 없으면서도 임금의 사랑을 이유로 해서 벼슬을 하는 것은 곧 작록을 훔치는 도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때의 결심이 퇴계의 인생을 ‘앞과 뒤’로 나누며 퇴계의 학문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후반기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제자들은 다소 의아해하였다. 제자들은 스승이 사직원서를 내고서도 회보를 기다리지 않고 무단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사실이 국법을 어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고 있었고, 특히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인산(因山)도 마치기 전에 서울을 떠나 귀향에 나서 시론이 분분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산’이란 임금이 승하하였을 때 하는 국장으로, 신하는 마땅히 장례가 끝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조의를 표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였기 때문이었다.
  • [내 인생의 등대] 이춘식 서울시 정무부시장

    [내 인생의 등대] 이춘식 서울시 정무부시장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논어(論語) 안연편에 나오는 구절이죠.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습니다.” 서울시 이춘식 정무부시장은 시 공무원들 사이에서 온화하고 친화력 있는 간부로 정평이 높다. 이는 절반 이상이 경북대부속고 재학 시절 탐독했던 논어 덕분이다. 그가 논어에 손을 댄 것은 많은 이들이 공자를 말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논어는 이 부시장에게 일종의 ‘지적 충격’이었다.‘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등의 귀절은 한창 예민하던 청소년 시절의 이 부시장에게 오롯이 새겨졌다. “요즘도 매일 잠들기 전 ‘남을 위해 충실했나, 벗에게 믿음직스러웠나, 가르침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라고 세 번 반성(日三省)하곤 합니다.” 그에게 있어 논어는 종교를 떠나 사람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해 주는 교과서다. 논어를 통해 공자가 들려주는 삶의 지침은 오랜 정당과 공직 생활에서 올바른 방향을 비추는 ‘등대’가 됐다. 이 부시장은 원래 대학(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후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개인의 발전에 상응하게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고 민정당에서 당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바쁜 정당 생활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청년국에서 일하던 80년대 말에는 마르크스 원전이나 김일성 저작 등 사회주의 서적도 탐독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던 청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불교, 기독교는 물론 힌두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등 동서양의 종교 서적도 섭렵했다. 요즘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한창 빠져 있다. 그는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견뎌내는 것,…이것만이 인생이고, 기쁨이며, 왕국이고, 승리이다.’라는 셸리의 시구에 매혹됐다.”고 밝게 웃었다. 이 부시장이 요즘 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이순(耳順)이다.49년생인 그는 아직 예순을 몇 해 남겨뒀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자세를 익히려 하고 있다. 이 부시장은 “‘어떤 말이라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먼저 생각하는 게 공복의 자세”라면서 “어디에 있건 앞으로도 사회에 봉사하는 자세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중학생이 한자 ‘사범’ 합격

    “한자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서 각종 역사 서적 등의 난해한 고문(古文)을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최근 실시된 제26회 대한민국 한자급수 자격검정시험에서 중학생으로서 ‘사범’에 합격한 광주 영천중학교 김승영(14·2년)군은 “한자 공부가 재미있어서 시작했는데 ‘사범’ 자격까지 따내 기쁘다.”면서 “고전도 번역하고 법조계에 진출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대한검정회의 국가공인 사범 시험은 실용 및 전문 한자 5000자와 대학·논어·중용·고문진보 등 고전을 중심으로 한자, 한자어(단어), 한문 등 3영역과 번역, 한자 관련 업무 응용능력 등을 측정하는 최고의 관문으로 매회 합격률이 5∼15%에 불과하다. 김군은 이번 시험에서 최연소로 합격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16살 때 지은 퇴계의 오도송이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를 모방하고 있을 정도로 퇴계는 주자를 자신의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태도는 언행록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을 대충 헤아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문에 힘쓴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밝은 스승과 벗을 얻지 못하여 의혹된 것을 질문하여 풀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에 있어서 진전을 본 것이 없고, 또 학문이 성취되기도 전에 문득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또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고 조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이 길고 그윽한 것이야 어찌 감히 엿볼 수가 있겠느냐.” 퇴계가 말하였던 문장(門墻)이란 ‘대문과 울타리’를 말하는 것으로 일찍이 논어에 나오는 자공의 말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공을 빗대어 스승 공자보다 더 낫다고 빈정거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승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문과 울타리는 겨우 어깨에 미치는 정도라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가 있지만 부자(夫子:공자)의 문장은 높이가 두어 길이라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퇴계는 스승의 위대함을 칭송한 자공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의 ‘길고 그윽한 경지’를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이 ‘주자전서’를 자신의 교본(敎本)으로 삼았다. 일찍이 한여름에 ‘주자전서’를 구해 읽다가 누가 더위로 몸을 상할까 걱정하면 ‘이 글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라고 대답하였던 것은 이미 상기한 내용이고, 언행록에 보면 퇴계가 이 주자전서를 얼마나 정독하였는가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을 정도이다. “선생의 집에 ‘주자전서’수사본(手寫本: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책)이 한 질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것으로 글자의 획이 거의 희미하여졌으니 선생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주자전서’를 인출(印出)한 것이 많았는데, 선생은 새 책을 얻을 때는 반드시 교정하면서 다시 한 번 읽음으로 장(章)마다 환하고 구(句)마다 익숙해져 그것을 몸과 마음에 수용(受用)함이 마치 직접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디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침묵하며, 동(動)하고 정(靜)하며,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며, 나아가 벼슬하며(進), 들어와 집에 있고(退) 하는데 있어 ‘주자전서’의 글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쩌다 남이 질문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이 책에 의거해서 대답하여 사정(事情)과 도리(道理)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믿어 정신이 융합(融合)된 소치로써, 한갓 책에만 의지하고 귀와 입으로만 따르는 자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수사본으로 베껴서 책을 만들만큼 금과옥조로 삼았던 ‘주자대전’. 너무나 정독해서 글자의 획이 희미할 정도로 닳아졌던 ‘주자대전’. 이러한 스승에 대해서 제자 우성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대게 주자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공리(攻利)에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이단에도 현혹되지 않으셨다. 널리 알면서도 잡되지 않았고, 간략히 잡아도 고루하지 않았다. 학문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을 근본으로 하면서 자신이 얻은 바의 진실을 참고하였다.…”
  • 儒林(35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소크라테스의 후계자인 플라톤은 인식(理性)의 발생을 다음과 같이 힐난한 적이 있었다. “주체(사람)가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 있다면 인식은 생겨날 수가 없다. 절대 무지라는 조건에서는 인지(認知)의 문제는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주체가 어떤 대상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경우에도 인식의 문제는 대두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인식을 진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핵심철학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에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지와 유지의 두 가지 대립을 걸쳐, 인식을 선천적 지식의 기억으로 여기는 회고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맹자가 공자에 있어서 서양철학의 플라톤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맹자는 플라톤과는 달리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무지함이 아니라 지식추구의 출발점, 즉 인식의 출발점으로 봄으로써 공자의 유가사상에 인식, 즉 이성의 숨결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자연은 의지의 충동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항상 이성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맹자는 이성을 ‘나에게 있는 것(在我者)’과 ‘외부에 있는 것(在外者)’으로 구분하였다. 공자는 비교적 초기에 인식, 즉 이성을 발견했던 사상가였으나 근대적 의미의 의식론 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교육자로서 공자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학습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인식론의 문제를 제시해 놓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유가사상 속에 이성과 문제를 불어넣었던 아성(亞聖)이었다. 아성. 이는 유교에서 ‘공자에 버금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직 맹자에게만 사용되는 위대한 칭호이다. 이러한 맹자의 ‘이’사상은 후대의 유가들에 의해 보다 확대되고 보다 심화되었다. 맹자에 의해서 발전된 유가사상은 천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때로는 역사적으로 공격목표가 되어 비난을 받고 수면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때로는 칭송을 받는 등 부침을 거듭해 오다가 마침내 주자(朱子)를 비롯한 이정(二程:정호와 정이 형제)에 의해서 맹자의 사후 1300년 후인 송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양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특히 주자는 사상과 이론의 양면에서 맹자의 사상을 해설하고 숭상하였으며, 맹자사상의 지위를 높이는 데 힘써 ‘맹자’를 ‘논어’‘중용’‘대학’과 나란히 사서(四書)로 규정하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였다. 또한 ‘논맹정의(論孟精義)’‘사서혹문(四書或問)’을 펴내 맹자사상을 세계적으로 확대시켰는데, 퇴계는 바로 주자로부터 12살 때 이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평생 동안 주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퇴계는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뜻을 깨우쳐 줄 스승과 벗이 없어 헤매기를 수십년에 어디서부터 착수할지를 몰라 헛되게 마음만 허비하였다.’고 탄식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퇴계는 공자에서 맹자로 다시 주자로 내려오는 유가사상의 법통을 이어받았던 유일한 적자였다. 주자. 그는 퇴계에 있어서 단 하나의 스승이자 오직 한 사람의 벗, 즉 도반(道伴)이었다.
  • 儒林(35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거경궁리. 이처럼 퇴계는 12살 때부터 학문에 뜻을 세웠으며, 그 뜻을 거경하여 마음을 바로 지키면서 자신이 제자들에게 설법하였던 대로 말할 때도, 움직일 때도, 앉아 있을 때도 항상 지극한 마음과 정선된 마음으로 지경(持敬)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거경이 퇴계의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이었다면 궁리(窮理)는 퇴계 학문의 한결 같은 화두였다. 궁리는 문장 그대로 ‘이(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인데, 일찍이 12살 때 논어를 읽다가 주자의 집주를 통해 ‘이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마침내 송재공에게 ‘이란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이라고 하는 것입니까’하고 질문함으로써 ‘너의 학문은 이로서 문리를 얻은 것’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래 퇴계의 평생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퇴계는 제자들에게 ‘공부를 잘 하고 못함은 이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거나 잘하지 못함에 달려 있다.’라는 결론을 내릴 만큼 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것도 결국 ‘이’의 핵심을 꿰뚫어 본 퇴계 사상의 골수인 것이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인, 의, 예, 지와 같은 도덕률, 즉 ‘인간의 조건’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성(理性)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공자보다 1세기 후에 태어난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孟子)였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켜 끌어 올린 중시조로 유교가 ‘공맹사상’으로까지 불리는 것은 맹자로 인해 비로소 공자의 유가사상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자는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사상이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면서 일종의 이성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세계적종교가 신에게 의지하고 인간의 이성을 신적인 전지능력에 의지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공자의 유가는 오직 인간이 가진 이성을 지식의 근원으로 보고 있음을 맹자는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공자는 지식의 근원이 이성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공자는 다만 인간의 지식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生而知之), 즉 천부적으로 형성된 지식과 다른 하나는 배워서 알게 되는 것(學而知之), 곧 후천적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부터 천부적인 지식(理性)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을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공자가 남긴 중요한 어록 중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란 말은 그러한 공자의 인식론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不知)’을 ‘지식이 없는 것(無知)’으로 동일시한다. 그러나 ‘부지(不知)’와 ‘무지(無知)’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하였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유지(有知)이지 무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 실제로는 ‘아는 것을 추구해 가는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공자는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옛공부의 즐거움/이상국 지음

    옛 글이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다는 건 옛날 얘기다. 요즘 나오는 고전 책들을 보면, 아니 그중에서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들을 보면 고전이 ‘옛날이란 시대’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신영복의 ‘강의’(돌베개)가 그렇고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가 그렇다. 그런데 조만간 여기에 목록 하나를 추가해야할 것 같다.‘옛공부의 즐거움’(이상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부제를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로 붙였듯, 옛 사람과 글, 그림을 불러다 놓고 대화를 시도한다. 옛 글이 주는 묵직함과 모호한 느낌을 취향에 맞게 다듬고 색깔도 입혀 즐기면서 놀아보자는 게 이 책의 의도. ●노자와 장자 불러다 놓고 ‘도덕경’ 논해 대화와 놀이의 대상은 누구인가.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 나오는가 하면,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유가 나오고, 노자와 장자를 불러다놓고 박경리·김춘수가 ‘도덕경’과 ‘소요유’를 논한다. 지은이가 이들과 어떻게 교유하는가 잠깐 엿보자.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골라 살고 싶은 시대를 택하라면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가 한 하늘 하래 동거하는 18세기 조선에서 살고 싶다는 지은이. 그는 글과 실용의 일치를 주장하고 실천했던 연암의 글을 요즘 말로 각색해 공리공론을 일삼던 선학들을 꾸짖는다. ‘…선배들, 고상한 학문적 변론을 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가 마침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감정시비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욕질하는 폐단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이론에 이론을 덧대 자꾸만 아리송하고 복잡다단한 말장난의 영역으로 치닫는 걸 못 느끼겠는가. 이제 그런 짓거리를 그만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화담 서경덕은 지은이의 표현에 따르면 ‘나와 동일시하는 만용을 부리는’ 인물로 표현된다. 지은이가 중학교 때 수학시간에 얽힌 추억 때문.‘피타고라스 정리’의 원리를 증명해오라는 숙제를 자습서없이 밤새워 ‘독학’으로 풀었던 기억이다. 다음날 칠판 가득 써내려간 증명과정을 보고, 선생이 ‘내 수학선생 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너처럼 길게 희한한 방식으로 증명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가르쳐줘서 고맙다.’라고 했단다. 화담은 황진이와의 ‘스캔들’로 더 유명해졌지만, 당대에 가장 큰 성취를 이룬 독학파 학자였음을 지은이는 상기시킨다. 화담이 당시 조류와는 다른, 과학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학문을 갖게 된 것은, 철저한 ‘자학’(自學) 때문이라고 믿는다. ●고전과 옛 그림은 ‘사교의 장’ 지은이에게 고전과 옛 그림은 ‘사교의 장’인 듯하다. 노자의 ‘도덕경’ 하나를 놓고 ‘꽃’의 시인 김춘수,‘바위’의 유치환,‘토지’의 박경리가 만나 작품 이야기를 펼친다. 도덕경이 때로 불꽃 튀는 논쟁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이 땅의 작가, 시인들에겐 더 없는 보물창고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노자가 읊어놓은 5000자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비밀클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도 한다. 문인화의 맥을 이은 소치 허유가 나오는 대목에선 추사 김정희와 예술적 안목이 뛰어났던 임금 헌종에 얽힌 아름다운 삼각관계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민 출신인 허유가 출세해 임금과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를 소상하게 적어 남긴 ‘몽연록’ 이야기가 흥미롭다. ‘애효 딜레마와 맹자의 카운슬링’‘논어의 교언영색 콤플렉스’‘인사동에서 만난 최치원’‘꿈이로다 몽유도원’…. 책을 구성하는 각각의 이야기에 붙은 타이틀처럼 고전의 딱딱함과 엄숙함은 어디에도 없다. 지은이는 말한다. “인물의 위대성과 학문적 깊이는 당연히 존숭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무게를 두다 보면,‘인간’을 따뜻하게 바로보기 어렵다. 시간을 넘어서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여러겹’의 삶을 동시에 살기를 꿈꾼다.”고. ●산의 정상이건 중턱이건 즐기면 그만 산이 꼭 정상에 올라야 맛인가. 정상이든 중턱이든 원하는데서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범접하기 어려운 깊이만 따지지 말고, 아는 그 자리, 그 상태에서 아는 만큼 최대한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이 책은 ‘즐기는 고전, 함께 노는 고전’의 전형이 될 듯싶다.1만 1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35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결론부터 말하면 퇴계가 종명하던 날 아침, 제자들이 스승의 운명을 점쳐보았을 때 나온 ‘군자유종’이란 점괘는 신통하게 들어맞는다. 바로 그날 밤 퇴계는 수를 다해 죽었지만 주자와 정이천의 풀이처럼 그 후광은 세월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다. 우선 선조가 부음을 듣고 곧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이라 작호를 내렸으며, 우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다.5년 후에는 도산서원을 세워 사액까지 하고, 시호를 문순(文純)이라 내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유종의 후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의 제자와 문인들이 그 뒤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이어 나와 그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퇴계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저서들이 학술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그 빛이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까지 뻗쳐 퇴계학파의 결실을 맺은 것! 그리고 사후 500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퇴계의 사상이 바로 군자 퇴계가 남긴 진정한 광배(光背)인 것이다. 이처럼 주역에 몰두한 퇴계는 21세 때 용수사에서 내려와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며,24세 때 첫아들 준을 낳는다. 잠시 서울에 올라와 태학에 유학하였으나 도학을 기피하는 성균관의 경박한 풍조에 크게 실망한 후 두 달 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퇴계는 자신의 생활을 산거(山居)라는 제목으로 짧게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莫道山居無一事)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平生志願更難量)” 26살 때 지은 이 짧은 시는 퇴계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때까지 퇴계는 벼슬에 관심 없이 오직 ‘헤아리기 어려운 평생 하고픈 일’, 즉 이학(理學)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퇴계가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지방에서 실시하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그 다음해인 27세 때 일이었으니,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그야말로 초야에 묻혀 사는 산중거사(山中居士)였던 것이다. 12살 때 논어에 나오는 이(理) 자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문리(文理)를 터득한 퇴계는 오직 14년 동안 스승이나 벗도 없이 혼자서 거경궁리하였던 것이다. 거경(居敬)이란 말은 일찍이 송대의 대유였던 정이천과 주자가 주장하였던 ‘마음의 긴장상태를 정신통일의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일종의 심법(心法)이었다. 퇴계는 이를 지경(持敬)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같은 것이었다. 즉, 몸과 마음을 일심으로 몰두하여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이며, 잠을 잘 때는 오직 잠을 자는 일에만 열중하는 참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빠져들게 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힘을 써서 이러한 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 儒林(35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역경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팔괘는 옛날에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고 전해오며, 이를 64괘로 중괘한 사람은 주나라의 문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64괘의 각 효(爻), 즉 384효에 이르는 효사(爻辭)는 주공(周公)이 지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어쨌든 역경은 점책으로 주나라 초기에 완성되었으므로 흔히 ‘주역(周易)’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인 공자가 한갓 점술책인 주역에 그토록 심취하여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정독하였을까. 그것은 주역이 한갓 점책이긴 해도 공자가 이상적인 인물로 사숙하고 있었던 주공이 효사를 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어에는 공자가 만년에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히도 내가 노쇠하였구나. 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 주공은 주나라 건국의 공신이며, 문물제도의 창제자였다. 공자는 언제나 이 주공을 꿈꾸며 주공이 제정한 문물제도를 자신의 시대에 새로이 살려내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주공에게 걸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역은 점책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원리를 논하자면 자연히 우주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섭리, 만물의 기원, 인생론, 음양론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송대에 이르러 만물의 근원이나 자연의 원리로 공자의 학문을 연구하는 성리학이 발전하고부터는 역경은 자연 유가의 철학을 논하는 중요한 경전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퇴계는 그야말로 침식을 잊고 고찰에 틀어박혀 주역을 읽고 또 읽었다. 퇴계 역시 점을 치는 복신이나 미신에 관심이 있어 주역을 공부했던 것이 아니었다. 퇴계는 평소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미신행위에 대해서 단호할 정도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언행록 가훈(家訓)편에는 퇴계가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그 편지 중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또 들으니 무당들이 자주 집을 드나든다는데 이것은 우리 집의 가법을 매우 해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대부터 전혀 미신을 숭상하지 않았고, 또 나도 늘 그것을 금하여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다만 어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뿐이 아니라 감히 가법에 어긋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 그 뜻을 모르고 가벼이 고쳐서야 될 일이겠느냐.” 이처럼 미신을 혐오하였던 퇴계가 20살의 젊은 나이 때 산사에 들어가 지병을 얻을 정도로 주역에 몰두하였던 것은 이미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과 양의 태극으로 보는 소강절의 태극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자연적으로 우주론에서 시작하여 모든 자연의 섭리를 다루고 있는 주역에 깊은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퇴계는 제자들과 더불어 이따금 주역을 통해 점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퇴계가 종명하던 날 선조 3년(1570년) 12월8일 아침. 퇴계의 제자들은 모여서 주역을 통해 스승의 운명을 점쳐 보았다고 한다. 이때 나온 점사는 군자유종(君子有終), 이 점사야말로 퇴계의 인생행로와 그 후광을 잘 알아맞힌 기막힌 점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儒林(35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그러나 퇴계에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을 깨우쳐줄 스승도 벗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뜻을 깨우쳐줄 스승과 벗이 없어 헤매기를 수십 년이나 하였다. 어디서부터 착수할 줄을 몰라 헛되이 마음만 허비하여 사색하기를 마지않아 때로는 눕지도 않고 고요히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하여 이 때문에 심병을 크게 얻게 되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중지하였다. 만약 스승과 벗을 일찍 만나 이러한 길을 지시해 주었더라면 어찌 심력(心力)을 헛되어 써서 늙도록 얻은 바가 없기에 이르렀겠는가.” 스승의 이러한 말에 제자 김성일은 ‘이것은 겸손한 말이지만 스승의 학문은 스승과 벗의 힘을 입지 않고, 초연히 독학으로 얻은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촌평을 내리고 있다. 특히 퇴계가 항상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평생의 지병을 얻은 것은 20세 때 이르러 주역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기에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용두산 용주사에서 역학 공부에 몰두하였다고 하는데, 퇴계가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던 것은 마치 공자가 말년에 역(易)을 좋아하여 스스로 역경(易經)을 편찬했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역에 심취한 공자를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공자는 말년에 역을 좋아하여 역을 읽는 사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몇 년의 여유만 더 주어져 이렇게 공부를 해나가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옛날 중국에서는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대나무에 글을 써서 그것을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죽간(竹簡)이라 하는데, 공자는 그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진다.’라는 말은 사기의 공자세가에 나오는 고사를 성어로 만든 용어. 이는 곧 책이 닳도록 정독하였음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공자가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에 열중하였다면 퇴계도 평생의 지병을 얻을 정도로 주역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원래 역경은 팔괘(八卦)가 변화하여 이뤄지는 64괘의 변화를 따라 길흉을 점치는 점술책이었다. 역점은 본시 시초(蓍草)라 불리는 풀줄기로 만든 99개의 점가치인 서(筮)로 그때그때 괘를 이루어 역경에 있는 그 괘의 성격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책이었다. 이것과 함께 말린 거북 껍질을 불로 지지어 생기는 균열의 모습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을 복(卜)이라 하였는데, 이 거북점은 복서(卜筮)라고 불린다. 나라의 중요한 일은 물론 개인에 관한 중요한 일까지도 모두 이 복서를 통하여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옛 중국 사람들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말년에 공자는 역경에 심취하였다. 논어의 술이(述而) 편에도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나에게 몇 년을 보태 주어 50세에 이를 때까지 역을 공부할 수 있으면 큰 과오가 없게 될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 儒林(35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이 시는 일종의 선시(禪詩)이다. 퇴계가 노래한 대로 ‘다름없는 한 생각’이란 12살 때 발견한 ‘이’의 화두임을 알 수 있으며,‘이를 깨달아야만 마침내 성리학의 공부를 이룰 수 있다.’는 퇴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10년 동안 퇴계는 한결같이 ‘이’의 한 생각에 전념하며 비로소 근원과 마주쳤음을 노래하였는데, 노래 중에 나오는 태허(太虛)란 용어는 북송의 학자였던 장횡거(張橫渠·1020~1077)가 주장하였던 ‘기일원(氣一元)’사상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상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기의 본체는 태허로서 태허가 곧 ‘기’라고 설법하였던 송나라 유학의 기초를 세운 사상가였다. 장횡거의 ‘태허는 곧 기’라는 사상은 소강절(邵康節·1011~1077)의 태극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역(易)은 음과 양의 이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과 양의 태극(太極)으로 주장하였던 수리철학(數理哲學)의 대가였던 것이다. 퇴계가 유교의 도를 깨달아 태허를 알아보았다고 노래한 것은 이미 19살 때 이들의 철학에 깊이 빠져 음과 양, 그리고 강(剛)과 유(柔)의 사원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이에서 파생되는 기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퇴계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해 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때 심경을 퇴계는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19살 때 처음으로 ‘성리대전’의 첫 권과 끝 권 두 권을 얻어 시험 삼아 읽어 보았더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듯하여 숙독(熟讀)하기를 오래하여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비로소 학문의 길을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학문의 길. 퇴계는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논어에서 ‘아침에 도에 대해서 들어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자신이 득도(得道)하였음을 드러낸 말이었다. ‘성리대전’은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아 호광(胡廣) 등 42명의 학자가 편찬한 책으로 송나라와 원나라의 성리학자 120여명의 학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었다. 퇴계는 장횡거와 소강절과 같은 성리학자들을 바로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일종의 성리학 대백과사전이었는데, 퇴계는 이 책을 통해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심안(心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얼마만큼 공부에 열심이었던가는 이 무렵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이 학문에 뜻을 두고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는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드디어 고질을 얻어 지금까지 병폐(病廢)한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였다. 학자들은 나를 따라올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곳을 따라 자기 마음을 살피고 헤아리며, 이 마음으로 하여금 방일(放逸)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나처럼 병이 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 儒林(34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언행록에는 18살의 퇴계가 야당(野塘)이란 오도송을 노래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젊었을 때 우연히 연곡(燕谷)가에 가서 놀았다. 연곡에는 조그만 물이 있는데 물이 매우 맑았다. 선생은 시를 지으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운 풀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는데 고요한 못 맑디맑아 티끌도 없네. 나는 구름 지나가는 새는 원래 비추는 것이지만 나는 저 제비 물결 찰까 두렵네.(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 時時燕蹴波)’” 퇴계가 고향에서 가까운 연곡으로 놀러가 즉흥적으로 읊은 이 시는 퇴계의 시 중에서 공식적으로 처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훗날 퇴계는 이 시를 스스로 가소로운 것이라고 평가하였지만, 이 시 속에는 12살 때 초견성한 ‘이’의 사상이 진일보하여 마침내 천리(天理)를 깨달았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본성은 원래 ‘모래 같은 티끌이 한 점도 없는 맑은 못처럼 맑고 깨끗한 것이다. 물론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구름과 나는 새 같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못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만 다만 두려운 것은 그러한 새들이 못을 차고 지나감으로써 감정의 동요가 물결칠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뜻의 오도송이었던 것이다. 스승의 처녀 시에 대해서 제자 이덕홍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선생이 천리가 유행하는데 혹시 인욕(人欲)이 낄 것을 두려워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이 시는 솔직히 말해서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제자 김부륜(金富倫)과 김성일도 이 시를 ‘주자의 관서유감이란 시와 그 뜻이 같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퇴계가 이 처녀작을 가소롭다고 일축하였던 것은 누가 보아도 이 시가 주자의 영향이 너무 짙게 드러나는 일종의 모작시(模作詩)라는 약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는 어쨌든 ‘이’의 화두를 타파한 퇴계의 오도송이며, 훗날 퇴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학문을 닦는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공부에 모두 차이가 나는 까닭은 오직 이(理)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은 퇴계의 학문이 시종일관 ‘이’를 추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위대한 옛 성현이었던 공자의 ‘논어’에서부터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퇴계에게 문리를 가르쳐준 직계 스승은 주자였던 것이다. 퇴계는 평생토록 주자를 자신의 사표로 삼았다. 이는 퇴계가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하여 문을 닫고 고요히 보아 한여름에도 그치지 않았다는 언행록의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더위로 몸을 상할 것을 경계하면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 가슴속에 문득 시원한 기분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잊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길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퇴계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능히 이 책(주자서)을 읽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흥이 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四書)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 비로소 자기 몸에 수용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 儒林(34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열두 살의 소년 퇴계는 이처럼 공자가 남긴 논어를 통해 마침내 ‘사람의 자식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수확은 미래의 대사상가이자 대철학가로서의 씨앗을 바로 논어에서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뉴턴이 페스트의 만연으로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우연히 떨어지는 사과 한 알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하였던 것처럼 바로 이 무렵 12살의 소년 퇴계는 평생 지켜 나가야 할 화두를 논어 속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가 발견했던 사과 한 알, 즉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뜻밖에도 ‘이(理)’란 한 글자였다. 사실 마땅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친 공자의 말을 기록한 논어에 나오는 ‘이’란 단어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의미를 가진 글자이다. 퇴계는 우연히 눈에 띈 ‘이’의 한 글자에서 사물의 이치와 법칙을 추구하는 이학(理學)의 씨앗이 마음속에 파종되었음을 느꼈으며, 평생 동안 ‘이’의 씨앗을 가꾸고 ‘이’의 나무를 키우고, 마침내 ‘이’의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유림의 완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의 글자는 공자의 눈을 뜨게 한 공양미 삼백 석이자 심청이었다. 퇴계는 12살 때 이미 ‘이’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은 사람, 즉 선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이’의 글자를 발견한 것은 논어를 주석한 집주(集註)에서였다. 퇴계가 고백하였던 것처럼 퇴계는 송재공이 시키는 대로 논어의 집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게 외우게 하였던 철두철미한 방법’에 의해서 공부를 했다. 논어의 집주는 주자(朱子:1130-1200)가 여러 사람들의 해석을 모아서 주석한 것으로 일종의 해설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퇴계는 12살 때 논어를 통해 공자를 만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주석을 집대성하여 집주한 주자까지 동시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장(子張)은 공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으로 일찍이 공자에게 어떤 사람이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로부터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다.’라는 평가를 들었던 다소 성격이 급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 공자의 가르침을 자기의 허리띠에 적어 두고 이를 지켜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런 자장이 어느 날 공자에게 묻는다. “자장이 공자에게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서 다섯 가지를 실천할 수 있으면 어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다섯 가지라니요.’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공손과 관대, 신의와 민첩, 은혜이다.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신의가 있으면 남들이 믿게 되고, 민첩하면 공로를 이루게 되고, 은혜로우면 남들을 부릴 수가 있게 된다.’”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인간이 본시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 즉 인, 의, 예, 지, 신의 오상(五常)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러고 나서 주자는 다름 아닌 자기의 사상인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한 문장에서 열두 살의 소년 퇴계는 평생의 화두인 ‘이’를 발견한 것이다.
  • 儒林(34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송재공은 문의(文意)를 깨치게 한 참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퇴계에게 가학(家學)을 이어받게 함으로써 가문의 전통에 눈을 뜨게 해준 참어른이기도 하였다. 송재공에 대한 존경심은 퇴계가 직접 쓴 묘갈문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그는 신골(神骨)이 청수하고 운치(韻致)가 고원하며,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효(孝)와 의(義)에 돈독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기되 승순(承順)과 이유(怡愉)를 다하여 즐겁게 하고 많은 고아된 어린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길러 가르쳤으며, 사물을 접함에 화(和)로써 하여 비록 창졸지간이라도 언성을 높이거나 노한 기색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평소 거처하는 곳에는 좌우에 항상 도서(圖書) 사적(史籍)이 가득 차 있어 그것을 즐기기를 맛난 음식같이 하고, 비록 질병이 지루한 때라도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의 문장은 맑고 풍부하고 전아(典雅)하며 더욱 시에 능하여, 언제나 명승(名勝)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따르게 하고 시를 읊어서 유유히 자적하면서 형해(形骸)를 잊어버린다.” 묘갈문의 내용을 보면 퇴계의 문학적 취미와 시적 소양은 아마도 송재공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제자 이덕홍이 쓴 언행록에 의하면 퇴계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일찍이 12세 때에 숙부 송재 선생에게 논어를 배웠다. 선생은 과정을 엄격하게 세워서 조금도 어른어른하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그 가르침을 받아서 깨우치고 가다듬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못하였다. 새로 배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전에 읽은 것을 되풀이하여 한 권을 마치면 한 권을 내리 외우고, 두 권을 마치면 두 권을 내리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매 점점 처음 배울 때와 달라져서 3,4권을 읽게 될 때에는 저절로 알아지는 데가 있었다.” 송재공의 가르침은 엄격하여 다른 언행록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숙부 송재공은 나를 공부시키는 데 몹시 엄격하셔서 칭찬하는 말이나 기뻐하는 안색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집주(集註)까지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이 없었으나 역시 칭찬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힘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송재공은 퇴계에게 논어를 가르친 스승이 아니라 사람을 인도하는 스승이었으니 일찍이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鑒)에서 ‘경서를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쉽고, 사람을 인도하는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말을 남겼듯 송재공은 퇴계를 사람의 길로 인도한 위대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논어의 구절 중 퇴계의 심혼을 처음으로 울린 말은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 어른들을 공경하여 행동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여러 사람과 사귀되 어진 이와 가까이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비로소 글을 배운다.’” 이 문장을 읽은 후 퇴계의 마음은 홀연히 밝아지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 퇴계는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아아, 사람의 자식으로 반드시 해야 할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 儒林(34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할반지통(割半之痛). ‘몸의 절반을 베어 내는 아픔’이란 뜻으로 형제자매가 죽었을 때의 슬픔을 이르는 말이다. 이미 퇴계는 8살 때 형이 칼에 손을 베어서 붉은 피를 흘리며 아파하는 것을 보자 형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받아들여서 슬피 울던 우애 깊은 소년이었다.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6살 때 이미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매일 아침 자기 혼자서 머리를 빗질하고 몸을 단정히 갖추곤 하였다고 한다. 손윗사람에게는 태도가 공손하였고, 누구에게든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였다. 한밤중에 깊이 잠을 자다가도 윗사람이 부르면 즉각 응대할 만큼 조심성이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특히 형 해는 퇴계와 더불어 집안을 빛낼 아이로 일찍부터 촉망받고 있었다. 퇴계와 해는 아버지의 동생이었던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배웠다. 퇴계의 골상에 관해서는 이마가 넓어서 송재공은 퇴계를 ‘이마가 넓은 아이’라 하여 ‘광상(廣 )’이라 불렀는데, 성품이 엄격한 송재공은 어린 퇴계를 가리켜 ‘광상이야말로 반드시 우리 가문을 지키고 빛낼 아이이다.’라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퇴계의 넷째 형인 해도 영민하고 똑똑한 것을 꿰뚫어 보고는 항상 ‘형님께서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 두 아들을 두셨으므로 결코 세상을 떠나신 것은 아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이였으니 두 사람은 금과 같은 형제이자 옥 같은 벗이었으며, 학문으로는 동문수학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편이 죽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라 하여서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하였고, 아내가 죽었을 때는 ‘고분지통(鼓盆之痛)’이라 하였는데, 이는 아내가 죽었을 때 물동이를 두드리며 한탄하였던 장자(莊子)의 고사에서 나온 용어였다. 또한 아들이 죽었을 때는 ‘상명지통(喪明之痛)’,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는 ‘할반지통(割半之痛)’이라 하였다. 바로 이렇게 각별한 관계였던 형 해가 억울하게 죽자 퇴계는 자신의 몸을 절반이나 베어 내는 할반의 고통으로 받아들여 생각할 때마다 흐느껴 울며 통곡하였던 것이다. 퇴계가 진정한 스승이었던 송재공에게 글을 처음으로 배웠던 것은 12살. 그 전까지는 이웃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고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퇴계가 학문에 입문한 것은 6살 무렵. 그때는 송재공이 벼슬살이 중이었으므로 집안에서는 천자문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 부득이 이웃 서당에 글을 배우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송재공은 진주 목사로 있었는데, 셋째 형 의와 넷째 형 해는 각각 13살,11살로 송재공을 따라 진주 월아산(月牙山) 청곡사(靑谷寺)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퇴계는 6살이었으므로 형들을 따라가지 못하였고 이웃 노인으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훈장은 어린 퇴계를 무척 신망하였다고 한다. 숙부 송재공 이우(李隅)는 안동부사, 강원감사, 승지 등을 지내고 병이 들어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몸을 조리하고 있었는데, 이때 퇴계는 송재공의 아들인 사촌동생 수령(壽)과 해 셋이서 처음으로 논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로써 퇴계는 학문의 지혜를 열어 준 참 스승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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