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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자연이 할퀴고 인간이 파괴했던 신라의 사찰… 파편으로 남은 역사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자연이 할퀴고 인간이 파괴했던 신라의 사찰… 파편으로 남은 역사

    강원도 양양 미천골을 과거에는 흔히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부르곤 했다. 그만큼 백두대간 동쪽 골짜기 첩첩산중에 깊이 자리잡은 동네다. 미천(米川)이란 쌀뜨물이 흘러내려 가는 시내라는 뜻이다. 대개 공양 시간이 다가오면 시냇물이 온통 허예질 만큼 많은 쌀을 씻어야 하는 큰 절에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미천골이라는 이름을 낳은 절이 선림원(禪林院)이다. 절터는 미천골자연휴양림 매표소에서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1㎞ 남짓 올라가면 나타난다. 이렇듯 깊은 산골짜기에 통일신라 시대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사찰이, 그것도 바로 옆을 흐르는 시내에 미천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규모로 세워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이제 선림원 터를 찾기가 매우 편해졌다.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지난해 완전 개통됐기 때문이다. 서양양 나들목에서 선림원 터는 자동차로 10분 남짓 거리다. 미천골이 오지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은 육로(陸路) 중심의 사고 때문이기도 하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이전 양양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두 갈래였다. 한계령을 거쳐 인제로 가는 44번 국도와 구룡령을 넘어 홍천으로 가는 56번 국도다. 한계령은 익숙해도 구룡령은 낯선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해발 1058m의 구룡령은 1004m의 한계령보다 높다. 그럼에도 수운(水運)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절에는 구룡령이 큰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구룡령은 한계령보다 넘어가는 길이 조금 평탄했다는 것이다. 구룡령 너머의 홍천강은 북한강으로 이어진다. 조선 시대에도 양양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홍천에서 배를 타는 것이었다. 구룡령 산길에서 멀지 않은 선림원은 과거 중요한 교통로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선림원은 좁은 계곡에 축대를 쌓아 넓은 터를 확보하려 했던 모습이다. 1985년과 1986년 동국대 조사단의 발굴과 2015년 양양군이 한빛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한 발굴 조사 결과 전모를 알 수 있었다. 최근의 정비 사업으로 쌓은 돌계단을 오르면 균형 잡힌 모습의 삼층 석탑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기단에 팔부중상을 네 면에 돋을새김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석탑은 발견 당시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그 뒤편은 큰 법당 터다.삼층 석탑에서 절터 반대편을 보면 규모 있는 비석이 하나 보인다. 홍각선사비다. 홍각선사가 입적한 직후인 886년(신라 정강왕 원년) 세워진 것이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과 용틀임하는 모습의 지붕돌만 제 것이다. 몸돌은 2008년 복원했다. 그 앞에는 높이 2.92m의 석등이 보인다. 지붕돌의 귀꽃 조각이 몇 개 떨어져 나갔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동국대 조사단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선림원은 국립춘천박물관이 일부 잔해를 소장하고 있는 이 절 동종의 주조 연대인 804년(신라 애장왕 5년) 창건 이후 홍각선사 시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10세기 전반 대홍수에 따른 산사태로 매몰됐고, 사찰의 기능도 정지됐다는 것이다.작고한 미술사학자 정영호 선생은 1966년 ‘지난해 처음으로 답사했을 때 석등의 각 부재가 원위치에서 흩어져서 반쯤 흙에 묻혀 있는가 하면 화사석은 축대 밑으로 굴러떨어져 있었지만 점검해 보니 복원이 가능함을 알 수 있었다’고 ‘양양 선림원에 대하여’라는 글에 적었다. 이렇게 삼층 석탑과 석등은 지금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산비탈 초입에는 기단부만 남은 부도가 있다. 역시 팔각형의 전형적인 신라 부도다. 홍각선사탑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삼층 석탑과 석등은 물론 홍각선사탑과 탑비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이다.선림원이라면 아무래도 비운의 신라 범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선림원 터는 1948년 목기(木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집을 짓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다. 범종은 명문(銘文)이 있어 일찍부터 주목 받았다. 2011년 세상을 떠난 미술사학자 황수영 선생은 ‘해방 이후 최초로 접한 중요문화재의 출토’라는 글에서 선림원 터와 범종의 발견 당시를 회상했다. 이야기는 그가 1948년 국립박물관에 취직이 되어 고향 개성에서 짧은 교직을 중단한 뒤 상경했고, 그 직후 출장 명령을 받고 양양 현지로 떠나는 데서 시작한다. 황 선생을 비롯한 조사단은 이해 6월 교통 사정으로 현장 직행이 불가능하자 평창 월정사로 가서 산행으로 선림원 터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월정사에 이르러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선림원 터는 당시 분단의 경계였던 38도선에서 10리(4㎞)도 떨어지지 않았고, 그 남쪽 오대산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사단은 서울로 돌아와 ‘이 새로운 종을 군 장비를 이용해 보다 안전한 월정사로 후퇴시키는 좋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다. 황 선생이 당시 문교부로부터 ‘선림원 종을 군부대가 신설된 산중직로(山中直路)로 월정사에 옮겨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1950년 1월 4일이었다고 한다. 황 선생이 월정사 칠불보전에서 범종을 마주한 것은 1월 6일이다. 그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신라종으로서의 전형을 완비한 참으로 아담한 자태에 먼저 환희하였고, 또 안도하였다’고 적었다. 이어 ‘나는 즐거움이 솟아올라옴을 느꼈다. 성냥을 켜서 세부의 문양을 보았고 쌍비천 주악상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세 번 조심스럽게 종을 울려 보았다. 맑고 깨끗한 신라의 종소리가 적막을 뚫고 산곡(山谷)에 반향되었다’고 회상했다. 선림원 종을 ‘아담한 자태’라 한 것은 용뉴를 포함한 높이가 122㎝, 용뉴를 제외한 몸체 높이가 96㎝, 구경이 68㎝로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황 선생은 ‘명문을 땅에 누워서 들여다 보고 탄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는데, 이 종은 특이하게도 14행 143자에 이르는 명문이 몸체 내부에 양각되어 있다. 선림원 범종은 6·25 전쟁의 와중에 우리 스스로 파괴하고 말았다. 1951년 1·4 후퇴 당시 사찰 소각령에 따라 월정사의 모든 전각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칠불보전의 범종도 녹아버린 것이다. 황 선생은 ‘후퇴에 앞서 그 넓은 마당에 굴리기만 하였어도 남았을 것 아닌가’하며 안타까워했다. 절반 이상 녹아버린 범종의 잔해는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 국립춘천박물관에서는 범종 파편을 포함해 다양한 선림원 출토 유물을 만날 수 있다. 홍각선사비의 비신 파편과 삼층 석탑의 기단 아래서 나온 소탑(小塔)들, 발굴 조사에서 수습한 용면와 두 점과 화려한 연꽃무늬 수막새 두 점도 전시하고 있다. 그러니 선림원의 역사를 제대로 확인하려면 춘천박물관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다. 선림원 터에서 춘천박물관까지 이제 고속도로를 타면 1시간 남짓 만에 도착한다.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양양과 춘천을 묶는 하루 여행 코스로도 무리가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보은인사 논란’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오사카 총영사 공식 임명

    ‘보은인사 논란’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오사카 총영사 공식 임명

    오태규 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이 주오사카 총영사로 공식 임명됐다. 지난달 27일 내정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은 인사’ 논란이 불거진 지 열흘 만이다. 외교부는 6일 춘계 공관장 인사에서 오 전 위원장을 신임 주오사카 총영사에 임명했다고 밝혔다. 오사카 총영사는 아그레망(주재국 임명 동의) 등 별도의 절차가 필요 없어 조만간 현지에 부임한다.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등을 역임한 오 총영사는 지난해 대통령직속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사회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외교부 장관 직속 위안부 합의 검토 TF 위원장을 맡아 지난해 12월 ‘(당시 한국 정부가) 피해자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았다’는 등 지적을 담은 검토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를 토대로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가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밝혔고, 일본 측은 “1㎜도 합의를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반발했다. 한·일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오 총영사가 일본 공관장에 임명되면서 외교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주몬트리올 총영사 겸 주국제민간항공기구대표부 대사에는 이윤제 전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임명됐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법무부 산하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주센다이 총영사에는 박용민(외무고시 25회) 외교부 전 아프리카중동국장이 임명됐다. 박 총영사는 외교통상부 북핵협상과장, 주일본 참사관, 주르완다 대사 등을 역임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길섶에서] 봄꽃 반란/진경호 논설위원

    봄은,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다고, 시인 안도현은 말했다.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제비꽃이 보이고,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에 봄은 꼭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간다고 했다. 그런 줄 알았다. 안 시인 말대로, 봐야 보이는 줄 알았다. 벚꽃이, 개나리만큼 부지런한 줄, 성질 급한 줄 몰랐다. 개나리에 진달래는 따라붙어도 벚꽃까지 이어붙인 노래는 들어 보질 못했고, 벚꽃은 너무도 화사하고 도도해 늘 개나리를 화동 삼아 한 발 뒤따라오는 줄 알았다. 올봄, 집앞 벚꽃은 그러하지 않았다. 개나리 따위에 봄소식을 맡길쏘냐, 같이 피었다. 기억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봄이 조화를 잃은 걸까. 그도 아니면 바빠진 봄에 행여 여름꽃 될까 놀란 봄꽃들이 마음을 고쳐먹은 걸까. 목련마저 젖살처럼 뽀얀 꽃잎을 후드득 떨어내기 시작한 걸 보면 아무래도 봄꽃들이 뭔가 떼로 작심한 듯싶다. 봄은 이제 오지 않는다. 그냥 스친다. 뿌연 하늘에 숨이 막히고, 우악한 여름이 더워 살짝 눈길만 주고 떠난다. 식목일도 3월로 옮길까 한다는데, 제비꽃 피울 겨를이나 있을지 봄이 안쓰럽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씨줄날줄] 콩 전쟁/박건승 논설위원

    [씨줄날줄] 콩 전쟁/박건승 논설위원

    중국인에게 콩은 각별한 존재다. 중국은 지난해 미국산 콩(대두)을 15조원어치나 사들였다. 4억 마리의 돼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돼지고기는 중국인에게 주식과 같은 고기다. 그래서 사료를 대부분 미국산 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인에게 콩과 돼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미국산 콩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는 최후의 시나리오다. 미국산 콩 수입을 제한해 사료 값이 뛰면 식품 물가가 오른다. 중국에서 식품 물가는 몹시 민감한 사안이다. 1980년대 말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만은 톈안먼 사태의 한 배경이기도 했다.콩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특별한 존재다. 미국은 전 세계 콩 생산량의 35%를 차지한다. 생산지가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진영의 핵심 텃밭인 중서부 ‘팜벨트’다. 중국이 미국산 콩 수입을 제한하면 미국 농가는 직격탄을 맞는다. 2020년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악재거리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지는 게임’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먼저 건드린 것은 좀 조급했다. 그는 아직도 “미국은 중국에 털리는 돼지저금통”이란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당시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던 일본과 벌였던 통상분쟁의 향수가 그리웠을 수도 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슈퍼 301조’ 등 보호무역 수단에 무릎 꿇다시피 하며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과 중국의 차이점을 트럼프 대통령은 간과했다. 두 나라의 ‘팃포탯’(Tit for tatㆍ맞받아치기) 전략이 무역전쟁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은 맞다. 중국은 싸움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후발제인’(後發制人)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선공을 펼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유리한 기회를 잡아 반격해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먼저 패를 다 까놓고 이제 와서 흥정 모드로 돌아선 것을 보면 최소한 지금까지 중국의 ‘콩 전략’은 맞아떨어진 듯하다. 아예 중국에 관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꼬리를 내리는 낌새가 역력하다. 미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이후 우리 측에는 날마다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한국이 ‘레드라인’(금지선)으로 정한 미국산 사과·배·블루베리·체리를 사 가라고 고삐를 조인다. 우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다. 콩과 같은 ‘똘똘한 대항마’가 없는 탓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그런 한국이 우습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한탄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매우 정치한 대미 통상 협상 전략을 앞세워 미국의 ‘탐욕’을 제어할 수밖에.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물고문 사라졌지만 약자 배려 없는 공권력 자세는 똑같아”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물고문 사라졌지만 약자 배려 없는 공권력 자세는 똑같아”

    임창용 논설위원이 만났습니다 - 박준영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재심 변호사 법은 과연 얼마나 공평한 것일까. 얼마 전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진범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을 보면서 든 의구심이다. 15세 소년이 18년 전 택시 기사를 살해한 누명을 쓰고 10년간 복역했는데, 나중에 진범이 잡힌 사건이다. 소년이 누명을 쓰기까지 경찰의 불법감금과 극심한 폭행이 있었지만, 검사와 판사는 이를 외면했다. 경찰이 내민 소년의 허위자백만을 근거로 법정 최고형을 합작했을 뿐이다. 지난해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재심’은 법(엄밀히 말하면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약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극 중 변호사로 나오는 이준영은 실제 이 사건을 맡았던 박준영(44) 변호사와 이름이 같다. 박 변호사는 약촌오거리 사건 말고도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과 삼례 나라 슈퍼 살인사건 등 많은 재심을 이끌어 낸 재심 전문 변호사다.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 변호사는 “재심 사건들이 대부분 오래된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예전의 물고문이나 폭행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서를 함부로 쓰고, 자백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유무죄를 재단하던 것도 달라졌다고 봐요.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런 강압적 수사가 있게 했던 본질적 이유는 달라진 게 없어요. ” 그가 강조한 ‘본질’은 경찰이나 검사, 판사 등 법을 집행하고 심판하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대하는 자세다. “얼마 전 늦은 밤에 친척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10대인 아이가 밖에서 추위를 피하려 종이를 모아 불을 피우고 길거리에 세워진 차 문 손잡이를 잡아당긴 죄로 경찰서에 잡혀 있다는 거예요. 경찰이 아이를 새벽까지 잡아 두고 심야조사를 하고 있던 거죠. 중범죄도 아닌데 방화와 절도죄 의심만으로요. 심야조사는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죠. ” 반인권적 수사를 막기 위한 규정과 장치는 곳곳에 마련돼 있지만, 현장에선 제대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로선 알려주지 않으면 그런 장치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나 노숙인 같은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설령 알아도 그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사실 자기 변호가 어려운 약자들을 위한 장치인데 외려 돈 많고 힘센 사람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이용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진술거부권만 해도 만든 취지는 사회 약자들이 강압적 수사에 의해 진술하는 걸 막기 위한 것이거든요. 한데 실제론 강자들이 더 애용하죠. 증언거부권이나 조서열람권도 마찬가지고요.” 최근 조사거부 논란이 일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검찰 조사와 재판에 툭하면 불응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씨 등의 사례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박 변호사는 요즘 ‘낙동강변 2인조 부녀자 살인사건’ 재심 인용을 기다리면서 검찰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에 참여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조사에 매달리고 있다. 지난해 5월 재심을 청구한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도 무죄임을 확신한다”면서 변호사 인생에서 가장 한이 된다고 안타까워한 사건이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두 사람은 직접 증거는 하나도 없이 자백만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21년간 복역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까지 극심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진행됐던 수사와 재판기록을 검토한 박 변호사는 “당시 기록만으로도 지금 재판하면 판사들이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고 했다. 재판부가 오염된 자백과 조서에만 집착해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재심 인용 결과가 늦어도 올해 말까지는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그는 “사실상의 국가범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1987년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부산의 부랑자 보호시설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실은 부랑자라고 볼 수 없는 아이나 여성 등에 대한 폭행과 성폭행, 강제노역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만행이 자행됐어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거리 청소’를 하려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길거리서 구걸하던 사람들이 적잖이 잡혀갔는데, 복지원과 경찰의 결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뉴스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에선 10년간 513명이 죽어나갔고, 가혹행위 정황이 짙었다. 거쳐 간 사람이 수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에선 지금까지도 악명이 높다. 그럼에도 복지원 원장은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 데 그쳤다. 1심에서 10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대법원 파기 환송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당시 그러한 만행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는지 제대로 조사하겠다”고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만 해도 나중엔 진상이 밝혀지고 인권신장으로 이어졌어요.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이 남영동 분실을 찾거나 박종철 열사 부친을 찾아가 사과도 했고요. 형제복지원에선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 수백명이 죽었는데 그동안 누구도 관심이 없었어요.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사회 약자들도 ‘법이 평등하구나, 우리도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할 겁니다.” 박 변호사는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의 외부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검찰이나 경찰의 과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재심사건을 주로 다룬 만큼 검·경의 문제점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재심 사건을 지금의 법과 제도의 문제로 연결하기엔 무리가 있다”며 조심스러워했다. 특히 최근 논란이 큰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해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사권 조정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수사를 경찰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법적으로 인정해 줄 필요도 있어요. 다만 경찰이 현재 시점에서 검찰의 수사지휘와 특수수사 역량을 무리 없이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제가 접한 일선 경찰 중엔 상당수가 아직 검찰의 깨알 같은 수사지휘를 원하고 있었어요. 물론 경찰에도 능력이 뛰어난 간부들이 많지만 수사권을 완전히 넘겨주기엔 좀더 준비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박 변호사는 또 “일반사법경찰과 특수사법경찰을 한데 묶어 수사권 독립을 논의하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면서 “(수사권 조정은) 검찰과 경찰이 합리적으로 권한을 나누고 협력하면서 견제하는 관계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sdragon@seoul.co.kr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사건만 맡는 ‘흙수저’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는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이다. 전남 완도 옆 노화도란 섬에서 태어나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막일과 배달일, 주먹질을 하면서 방황했다. 지방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군 복무 후 장학금을 못 받게 되자 자퇴한 뒤 군대 선임을 따라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갔다. 일찍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책상 위에 붙여 놓고 악착같이 공부했고, 5년 만인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 초기 국선변호를 주로 맡았다. 인맥과 학벌에 밀린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기 방어권이 약한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에서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가출 소녀들의 눈물은 그를 울렸고, 이후 재심 사건에만 몰두했다. 박 변호사는 모든 재심 사건에서 무료변론을 하고 있다. 변호할 사람들이 가난한 사회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재심 진행에서 가장 큰 동력인 시민 지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시민 지지가 있어야 목격자나 관련자들의 증언 확보도 수월해진다. 영리 목적으로 재심을 맡았다가 자칫 시민들의 지지를 잃어 재심 진행이 어려워질까 우려한다. 재심 사건은 한 번 맡으면 평균 5년은 걸린다고 한다.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박 변호사는 기존에 맡았던 일반 사건 수임료에 사비까지 털어 재심에 매달렸지만 2년 전 파산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포털사이트를 통한 스토리펀딩에 시민들의 후원이 몰렸고, 그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5억원이 넘는 후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최유정·홍만표 등 법조 거물들의 비리사건이 터지면서 더 큰 지지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박 변호사의 주 수입원은 강연료다. 재심사건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인권 관련 강연이 많이 들어온다. 지난해의 경우 많을 땐 월 20회까지 했다. 올해도 월 10회는 강연에 나선다. 일선 경찰이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권보호를 주제로 강연한다. 과거사위원회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선 공식적인 국가 업무를 맡았기에 약간의 보수도 받는다. 재심 사건 외에 일반사건은 아예 맡지 않고 있다.
  • [길섶에서] 꽃의 시간/손성진 논설주간

    산기슭엔 진달래며 산수유꽃이 흐드러지다. 화단에서는 매화꽃비가 내리고 자목련이 봉오리를 벌린다. 사진으로 만난 ‘명자꽃’은 더 특별하다. 생소하고 촌스럽지만 그 아름다움은 장미를 능가한다. 홍장미보다 더 강렬한 붉음에 눈이 시리다. “꽃샘바람 스러진 날/ 달려가다가 넘어진 무릎/ 갈려진 살갗에 맺혀진 핏방울처럼/ 마른 가지 붉은 명자꽃/ 촘촘하게 맺힌 날”(목필균, ‘명자꽃 만나면’) 절정의 시간. 만개한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프다. 눈부시다 못해 차라리 슬프다. 엄동의 인고에 비해 꽃의 시간은 너무 짧다. 저 화려함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절정은 희열인 동시에 슬픔이다. “때로는 나의 삶도 바람이 일고/ 냉기가 서려 가슴이 얼고, 서러움도 얼지만/ 가끔은 한 송이 꽃처럼 환희이고 희열일 때가 있다. / 그래서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김도화,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꽃의 시간이 간다고 너무 슬퍼할 것은 없다. 곧 무성한 신록의 계절이 꽃을 대신해 우리를 위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화꽃도 명자꽃도 내년에 또 우리를 찾을 것이다.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트럼프의 ‘언론 길들이기’/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트럼프의 ‘언론 길들이기’/김균미 수석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자신에게 비판적인 주류 언론들에 대한 감정은 불신 차원을 넘어 적대적이라고 할 정도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CNN 등의 뉴스를 ‘가짜뉴스’로 몰아세우며, 아예 트위터로 직접 뉴스를 생산, 유통시키고 있다. 대선 후보 시절 당선되면 뉴욕타임스 등이 문 닫게 될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던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최고의 가짜뉴스’를 선정, 발표까지 했다.그러던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연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에 맹공을 퍼붓고 있다. 지난달 29일 트위터에 아마존의 터무니없이 낮은 배송료 때문에 연방우정국 손실이 늘어났다고 포문을 연 뒤 3일까지 모두 4차례 아마존을 비판하는 트윗을 날렸다. 아마존 때문에 국민 세금 부담이 늘었고 유통 소매업체들이 문을 닫고 있다고 몰아쳤다. 지난달 31일에는 “워싱턴포스트(WP)는 (아마존의) 로비스트이며, 로비스트 등록을 해야 한다”며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이조스가 소유한 워싱턴포스트에 화살을 돌렸다. 트럼프는 종종 워싱턴포스트를 ‘아마존 워싱턴포스트’, ‘페이크 워싱턴포스트’라고 지칭하며 반감을 드러냈다. 미 언론과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아마존 때리기가 베이조스에 대한 견제뿐 아니라 비판적인 워싱턴포스트를 겨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지난주 아마존 관련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 직전 트럼프와의 관계를 폭로한 전직 포르노 배우 기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뇌물을 줬다는 기사, 최측근들에 대한 사면을 검토 중이라는 뉴스를 연이어 보도하면서 트럼프의 분노 지수를 높였다는 것이다. 트위터 공세와 함께 아마존에 대한 반독점법 적용, 과세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보도는 주가 폭락과 베이조스를 긴장시키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3일 WP에 이어 CNN까지 겨냥했다. 앞서 트럼프의 CNN 공격은 WP처럼 모회사인 타임터너를 노렸다. 미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통신회사인 AT&T가 타임터너를 인수하려고 하자 반독점법을 들이대며 반대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언론을 소유한 기업들과 오너들을 공격하고 옥죄는 방식으로 비판적인 언론들을 길들이려 한다고 우려한다. 트럼프식 우회 공격이 효과를 거둘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트럼프에게 정치적 역풍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임기 내내 계속될 트럼프의 언론과의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주목된다.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돼지감자 깍두기/임창용 논설위원

    밥상에 오른 깍두기 맛이 독특하다. 아삭하고 달큰한 게 평소 먹던 무 깍두기와 다르다. 어디선가 먹어 본 듯한 기억이 혀끝을 맴돈다. “어, 돼지감자 맛이네?” 아내가 놀란 듯 내 얼굴을 본다. 이걸 어디서 먹어 봤을까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릴 적 이맘때 고향 집 울타리 아래엔 항상 마른 돼지감자 줄기가 엉켜 있었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다 출출하면 달려가 돼지감자를 캤다. 한겨울을 땅속에서 난 돼지감자는 약간 아린 듯 달곰하면서 시원했다. 개울물에 흙만 대충 씻어 낸 뒤 어적대며 씹다 보면 금세 속이 든든해졌다. 겨울이 막 지난 때 밖에서 놀다가 배고프면 언제든 먹을 만한 간식으로 그만한 게 없었다. 돼지감자를 뚱딴지라고 한다고 아내가 아는 척을 한다. 해바라기를 닮은 꽃은 예쁜데, 뿌리를 캐 보니 너무 못생겨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말이나 행동이 엉뚱한 사람을 놀릴 때 쓰는 그 뚱딴지다. 예로부터 돼지먹이로 많이 주었다고 해 생긴 돼지감자란 이름과 도긴개긴이다. 하나 이젠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니 이만한 출세가 없다. 알싸한 깍두기 맛이 귀하게 느껴진다.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박근혜 선고 TV 중계/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박근혜 선고 TV 중계/김균미 수석논설위원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추방하고 학살한 전직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세기의 재판’은 전 세계 37개국에 최초로 TV 생중계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제작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이히만 쇼’가 지난해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국내 개봉돼 화제가 됐었다.법원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을 TV로 생중계하기로 3일 결정했다. 1심 선고 재판이 생중계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오는 6일 오후 2시 10분에 열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선고 재판을 법원 내 자체 카메라로 촬영해 외부에 송출하는 방식으로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7월 개정된 대법원 내부 규칙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이 생중계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구속 기간이 연장된 뒤 재판을 보이콧하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은 선고 재판에도 출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순실씨에 대한 선고 공판은 공익 달성보다 피고인들이 입을 손해가 더 크다며 생중계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재판이 생중계된 첫 사례는 2013년 3월 21일 대법원 심리로 열린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성이 남편 동의 없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돌아간 사건이다. 이후 통진당 이석기 재판, 세월호 승무원 재판, 박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생중계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만들어진 ‘법원 방청 및 촬영 등에 관한 규칙’에 따라 재판장이 허락할 경우 재판 개시 전 사진 촬영 등이 허용돼 왔다. 해외에서도 재판을 생중계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추세다. 미국은 1976년 앨라배마주와 워싱턴주가 TV 중계를 허용한 이후 현재 워싱턴DC를 제외한 50개 주가 원칙적으로 생중계를 하고 있다. 백인 전처와 애인을 살해한 미국프로축구(NFL) 최고 스타 O J 심슨에 대한 재판은 1994년 6월부터 1년 넘게 TV로 생중계돼 어지간한 프로그램보다 시청률이 높았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영국 대법원은 재판 전 과정 생중계를 허용하지만 1심 중계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일본은 생중계는 허용하지 않고 첫 재판 시작 전 법정 모습을 촬영하는 정도만 허용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TV 생중계는 다시는 대통령들이 법정에 서는 일이 없도록 그 엄중함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돼야 의미가 빛을 더할 것이다. kmkim@seoul.co.kr
  • [서울광장] 미투 운동에 여성 정치인이 안 보인다/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미투 운동에 여성 정치인이 안 보인다/최광숙 논설위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영화 ‘쓰리 빌보드’는 강간살해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엄마가 세상과 홀로 맞서는 사투를 그렸다. 사건 발생 이후 1년이 다 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딸의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사그라지자 엄마는 마을 외곽의 대형 광고판 세 개를 임대해 “내 딸이 강간당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윌리버(경찰서장)?”라는 문구를 써 놓는다. 무능력한 공권력과 부조리한 현실에 기가 막혀 발버둥을 치는 엄마에게 마을 주민들은 “너만 참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분란을 일으키느냐”고 힐난하며 방관한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고 있는 성폭력 고발 미투(Me Tooㆍ나도 피해자다) 운동의 한 측면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오랫동안 상처받고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엄마는 범인을 잡기는커녕 동네 아이들이나 괴롭히는 무기력한 경찰을 정조준하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영화의 초점은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외면하는 주민들을 고발한다. 주인공인 엄마는 광고판을 내리라고 회유하는 신부님을 향해 “갱단 멤버인 친구가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을 때 비록 당신은 길모퉁이에 서 있기만 했어도, 그들과 같이 어울려 다닌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다”는 갱단 관련법을 외치며 경찰 편에 선 신부님을 질타한다. 실제로 미국 양대 갱단이라 할 수 있는 ‘크립스’와 ‘블러드’ 간의 폭력이 난무할 때 캘리포니아주는 ‘거리 테러리즘 강화와 예방법’을 제정해 처음으로 거리 갱단 범죄를 중범죄로 다스렸다. 다만 이 법에서는 갱단 멤버가 아니면 갱단 연루 중범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갱단 범죄가 극성을 부리자 2001년 이후 관련 법을 개정해 갱단 멤버가 아니더라도 갱단 연루 중범죄로 기소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이처럼 갱단의 폭력을 예방하고 관련자들의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롭게 법을 정비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이 한창 벌어지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우리가 갈 길은 멀기만 하다. 미투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지만 적극적인 법 제정과 관련해서는 변죽만 올리고 있다. 자신이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라도 주변의 성폭력 범죄를 알고도 이를 저지하지 않고 묵인하거나 방조했다면 이는 포괄적으로 ‘공범’, 나아가 ‘가해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들에 대한 처벌까지야 어렵다 해도 아동학대처벌법에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를 뒀듯이 누구든지 성범죄를 인지하게 되면 신고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역할이 막중하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특히 여성 의원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 의원들은 미투 운동에 앞장서기보다 용기 있는 여성들이 외치는 미투에 마지못해 편승하는 정치 행태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현재 정당 4곳 중 3곳의 대표가 여성이라는 점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선거 때마다 여성 권익 확대를 외쳤던 그들은 정작 자신들의 일터인 국회 내 성폭력 문제에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특히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대선 후보 시절 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설거지를 어떻게 하느냐.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며 여성 비하 발언을 하자 “대한민국의 딸들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또 1분 찬스 발언을 통해 소수자 인권을 대변하기도 했다.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고 성소수자의 차별에 분개했던 심 의원마저 이번 미투 운동에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투 운동이 일부 남성들의 성범죄를 까발리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일회성 행사로 끝나선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성 평등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도록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 땅의 딸들을 보호해야 할 여성 의원들이라면 영화 주인공처럼 분연히 일어서야 하는 것 아닌가.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서울숲’ 오후/박건승 논설위원

    ‘서울숲’ 아침은 싱그럽다. 알알이 이슬 맺힌 풀잎, 원앙이 짝을 지어 한가롭게 햇살을 즐기는 호수,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음악.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봄날 아침 코를 찌르는 푸르름의 향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낮엔 백화(百花)가 난만(爛漫)하고, 둥근 달이 뜨는 밤엔 달빛이 벚꽃이랑 목련이랑 어울려 어지럽게 춤을 춘다. 그런 서울숲에 불청객 하나가 똬리를 틀었다. 숲 잔디가 사라지면서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치솟아 오르는 흙바람이다. 땅에는 꽃바람, 하늘엔 미세먼지-황사 바람, 허공에는 흙바람이 어울려 산다고나 할까. 시도 때도 없이 휩쓸고 지나가는 거센 모랫바람 앞에선 수선화의 청초함도, 목련화의 수줍음도 찾아볼 수 없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집에 돌아온 조카네 아이들의 몸에선 시커먼 물이 흘러내린다. 이쯤 되면 잔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서울시가 눈총을 받는 건 당연한 일. 아이들을 씻기는 조카는 “미국 센트럴파크를 본떴다는 숲공원이 왜 이래요”라며 화난 표정이다. 어느 시인은 ‘새봄엔 어린 꽃잎이 처음 낳은 새벽이슬처럼 조금은 더 맑게 살 일’이라고 했는데….
  • [씨줄날줄] 화웨이와 통신 안보/최광숙 논설위원

    [씨줄날줄] 화웨이와 통신 안보/최광숙 논설위원

    미국 국가방첩본부(ONCIX)는 2011년 10월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고 지속적으로 산업 스파이 활동을 하는 나라”라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의회에 전달했다. 2000년 이후 중국은 사이버 기술을 활용해 외국 정부, 기업, 연구기관 등에서 민감한 산업 정보를 훔쳐서 자국의 산업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이를 뒷받침하는 생생한 증거를 프랑스 일간 르몽드가 1월 말 폭로했다. 중국이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55개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임인 아프리카연합(AU) 본부 건물을 수천억원을 들여 지어 주고, 5년에 걸쳐 갖가지 정보를 해킹해 온 사실이 확인됐다고 했다. 중국이 이 건물을 지으면서 해킹 설비를 몰래 설치한 뒤 지속적으로 건물 안 컴퓨터에 담긴 정보를 빼갔다는 것이다. 건물을 공짜로 지어 주고 뒤로 기밀을 캐는 중국의 수법에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중국 정부 자금으로 워싱턴 국립수목원에 중국식 정원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설치되는 21m 높이의 백색 탑이 백악관, 국회의사당 등을 감시·도청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미국 정보기관이 경고했다. 이 탑과 워싱턴 중심부의 거리가 8㎞에 불과하다. 이 프로젝트의 로비스트가 바로 트럼프 대통령 딸인 이방카 부부와 친분이 있는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의 전 부인인 중국계 웬디 덩이란다. 머독은 자서전에서 덩을 중국 스파이라고 지목한 바 있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중국이 산업 정보뿐만 아니라 국가 기밀까지 빼내려고 사이버 공격을 확대한다고 본다. 이에 5G(5세대 이동통신) 인프라를 민간 기업이 아닌 국가 예산으로 설치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중국 정부가 화웨이·ZTE 등 중국 통신기업과 손잡고 미국에서 통신기기를 판매해 통화 내역 등을 도·감청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이미 미국은 화웨이 스마트폰 판매를 규제했다. 우리 통신업체가 내년 상반기 5G 상용화를 목표로 하는 상황에서 세계 1위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의 장비 도입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화웨이는 저렴한 가격에 기술력이 높지만 보안에 구멍이 생길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화웨이가 마음만 먹으면 통화 내용과 위치정보 등을 다 볼 수 있다”며 “가격 경쟁력만을 볼 것이 아니라 통신 안보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화웨이·ZTE는 이미 중앙·동남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에 인터넷과 통신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전 세계 통신을 장악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중국의 ‘통신 굴기’. 정부의 대응이 궁금하다.
  • [바른 말글] 넉넉치 않다/손성진 논설주간

    ‘넉넉하지 않다’의 줄임말은 ‘넉넉치 않다’일까 아니면 ‘넉넉지 않다’ 일까. ‘넉넉지 않다’가 맞다. ‘넉넉치 않다’는 틀린 표현이다. 어간의 끝음절 ‘하’의 앞이 안울림소리(무성음:ㄱ, ㄷ, ㅂ, ㅅ, ㅈ)면 말을 줄일 때 ‘하’가 모두 탈락하고 앞이 울림소리(유성음:ㄴ, ㄹ, ㅁ, ㅇ, 모음)면 ‘ㅏ’만 탈락하고 ‘ㅎ’은 남아 뒤가 거센소리가 된다. ‘녹록하지’→ ‘녹록지 (않다)’, ‘깨끗하지’→ ‘깨끗지 (못하다)’, ‘익숙하지’→ ‘익숙지 (않다)’, ‘못하지’→ ‘못지 (않다)’, ‘섭섭하지’→ ‘섭섭지 (않게)’, ‘생각하건대’→ ‘생각건대’, ‘생각하다’→ ‘생각다 (못해)’, ‘달성하고자’→ ‘달성코자’, ‘심심하지’→ ‘심심치 (않게)’, ‘청하건대’→ ‘청컨대’, ‘간편하게’→ ‘간편케’, ‘흔하지’→ ‘흔치 (않다)’, ‘개의하지’→ ‘개의치 (말고)’로 줄여야 맞다. sonsj@seoul.co.kr
  • 장충기에게 문자 보낸 언론인 “과분하게 베풀어주신 은혜…”

    장충기에게 문자 보낸 언론인 “과분하게 베풀어주신 은혜…”

    장충기 전 삼성 사장이 언론사 간부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가 추가로 공개됐다.MBC 탐사기획 프로그램 ‘스트레이트’는 지난 1일, 삼성과 언론의 유착관계에 대한 후속 방송을 통해 장충기 전 사장과 언론사 간부들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추가로 공개했다. 방송에 따르면 언론인들은 장충기 전 사장에게 “저는 주필자리에서 논설고문으로 발령났습니다… 과분하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늘 생각하겠습니다. 김△△ 올림”, “넓고 깊은 배려에 감사합니다”, “이리 좋은 선물을 보내시다! 항상 감사”, “삼성은 대한민국 자체만큼이나 크고 소중”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이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낸 언론인들 일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결정을 비판하는 등의 칼럼, 논설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한 경제지 논설고문은 이재용 부회장 구속 수사에 대해 “법원이 이재용의 도주를 우려했다면 소가 웃을 일…구속재판은 위헌적”이라는 내용의 논설을 쓰기도 했다. 진행을 맡고 있는 주진우 시사인 기자는 이와 같은 삼성과 언론의 유착에 대해 ‘돈을 써야 할 곳, 안 써야 할 곳을 분간하라’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발언을 언급하며 “삼성은 지금 돈을 어떻게 쓰고 있나. 혹시 판단이 흐려진 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길섶에서] 유머/이순녀 논설위원

    최근 세상을 떠난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중에 하나가 뛰어난 유머 감각이다. “재밌지 않으면 인생은 비극”이라고 했던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가발을 써도 휠체어 때문에 나라는 게 들통난다”며 자신의 장애를 농담 소재로 삼기도 했다.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호킹 역을 맡았던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그의 부고에 “내가 만났던 가장 재미있는 사람을 잃었다”고 애도했다고 하니 그가 생전에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유쾌하게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느 자리든 유머가 있는 사람이 인기를 끈다. 아무리 진지한 주제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으로만 대화를 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누군가 시의적절한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면 금세 분위기가 반전된다. 문제는 유머의 수준과 타이밍이다. 지나치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 선을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 엉뚱한 ‘자학 개그’나 ‘아재 개그’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포스코 50년, 그리고 50년 뒤/박건승 논설위원

    [씨줄날줄] 포스코 50년, 그리고 50년 뒤/박건승 논설위원

    34명. 고 박태준 회장과 함께 1968년에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세운 창립 멤버다. 호가 청암인 박 전 회장은 그들을 ‘직원’이 아닌 ‘요원’으로 불렀다. 거사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뜻에서다. 그들은 ‘우향우’로 똘똘 뭉쳐진 동지였다. 청암은 그들에게 말했다. “목숨을 걸자. 실패하면 모두 사무실에서 똑바로 걸어 나와 우향우한 다음 영일만 앞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영일만 앞바다는 바로 동해다.‘제철보국’(製鐵報國). 말 그대로는 싸고 좋은 철을 충분히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진국들은 자본과 기술, 경험 없는 ‘3무(無)’ 상태인 한국 계획을 비웃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현 세계은행)은 “한국의 외채 상환 능력과 산업구조를 볼 때 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다”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보고서를 보내왔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도 ‘한국은 그간 제철을 해본 적도 없고,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다. 철강 수요도 부족해 제철소를 지어 봤자 무조건 실패한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대일청구권자금. 청암은 이 자금을 스스로 ‘조상이 흘린 피의 대가’라고 칭했다. 제철보국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포항제철을 반드시 성공시켜 나라에 보답하자’는 다짐이었다. 1968년 4월 1일 인구 7만 2000여명의 포항 시가지엔 ‘굽이치는 형산강(兄山江)에 기적을’, ‘뻗어가는 산업, 전진하는 조국’ 등의 격문이 물결쳤다. ‘무조건 실패할 것’이란 선진국의 편견을 뒤로한 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일대 모래밭에 제철공장이 들어선 것이다. 그로부터 50년. 처음 쇳물을 뽑아낸 1973년 416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창립 30주년이던 1998년에는 10조원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매출 60조원, 영업이익 4조 6000억원을 달성했다. 매출이 반세기 만에 1458배나 늘었다. 8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에 들었다. 말 그대로 ‘영일만의 기적’을 이뤄냈다. 창립 100돌이 되는 해에는 매출 500조원을 꿈꾼다. 그런 포스코가 쉰 살 생일상을 받고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경기 침체와 철강 과잉생산 등에 따른 성장 정체가 예삿일이 아니다. 중국은 가격·물량 공세로 철강의 과잉 공급을 유발했고, 미국의 보호무역 칼 끝은 언제 다시 춤을 출지 모른다. ‘우향우 정신’과 뚝심의 캔두이즘(Can-doism). ‘또 하나의 50년’을 준비하는 포스코가 다시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절대적 절망은 없다’는 청암의 말에 해답이 있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장맛비에 무너진 부흥주택/손성진 논설주간

    [그때의 사회면] 장맛비에 무너진 부흥주택/손성진 논설주간

    대한민국 사람치고 내 집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이른 지금 내 집 마련의 꿈은 수십년 전보다 더 멀어지고 있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주택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는 1955년부터 대한주택영단(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금융기관 등과 협력해 주택을 지어 공급했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공급한 주택에는 부흥주택(또는 국민주택), 후생주택(또는 재건주택), 희망주택 등의 이름이 붙었다. 최초의 공공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부흥주택이 들어선 곳은 서울의 성북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등 당시로서는 변두리 지역이었다. 많이 헐리고 본모습을 잃었지만 부흥주택은 청량리2동 홍릉 단지, 정릉동 ‘정든마을’, 이화동 낙산마을에 아직 남아 있다.부흥주택 건설에는 육군 공병대가 동원됐다.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에다 원자재도 원조에 의존했다. 1955년 12월 청량리 부흥주택 완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각부 장관, 서울시장이 총출동했다. 그러나 부흥주택은 분양가가 너무 높아 처음에는 신청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곧 상황이 바뀌었다. 1956년 4월 실시된 청량리와 신당동 부흥주택 입주자 모집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 30분 만에 분양이 완료됐다(경향신문 1956년 4월 12일자). 그러나 부흥주택을 둘러싼 말썽은 끊이지 않았다. 청량리의 부흥주택은 공병대가 맨바닥에 집만 지어 처음에는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살아야 했고 상·하수도도 없어 입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서울 신촌 100채의 부흥주택은 장맛비에 지은 지 1년도 못 돼 무너져 내렸다.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흙벽돌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1956년 7월 2일자). 1956년 7월까지 전국에 지어진 흙벽돌 부흥주택 또는 재건주택은 7000여 가구에 이르렀다. 흙벽돌이 문제가 되자 그제야 시멘트로 바꿨다. 1959년에는 입주민들의 집단 청원 사태가 벌어졌다. 융자금 이자가 너무 높고 원금 상환 기간은 짧다는 것이었고, 국회에 특별조사소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부흥주택의 구조는 흥미롭다. 마루가 깔린 공간과 아동이 머무는 온돌방에 접해 과할 정도로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부엌에서 계단을 두 단 올라야 온돌방과 높이가 같아지는 것은 부엌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변소에는 양변기가 있었고 욕실에는 둥근 설비가 눈길을 끌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목욕을 위해 사용했던 커다란 쇠가마다. 재래식 생활공간 위에 일본풍 생활기기가 담기고 위생설비와 외부 공간은 서구식인 복합 양식이었다. 설거지통과 찬장은 입주자가 마련해야 했다(‘거취와 기억’, 박철수). 사진은 부흥주택 입주 경쟁을 풍자한 만평.
  • [씨줄날줄] 쥔 자의 문제, 권한/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쥔 자의 문제, 권한/김성곤 논설위원

    요즘 들어 경찰이 큼직큼직한 수사를 많이 한다. 그동안 검찰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재벌 수사가 대표적이다. 자택 공사 과정에서 회삿돈을 사용한 혐의를 받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수사 주체도 경찰이다. 마치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우리도 수사 능력이 있다고 과시하는 것으로 읽힌다.경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가 점입가경이다. 청와대와 법무부, 행정안전부가 경찰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 조항 삭제, 검찰의 수사종결권 검·경 분산 등 큰 틀의 조정안을 만든 데 따른 것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엊그제 “검찰의 영장심사 제도는 인권보호 장치이므로 유지돼야 한다”고 밝힌 것도 이에 대한 반발인 셈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정치권력과 결탁해 각종 폐해를 낳은 검찰의 개혁은 대세다. 다만, 국민은 검찰을 믿지 못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경찰에 대한 우려도 현실이다. 문 총장이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려면 자치경찰제의 도입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국민의 이런 인식을 의식한 고단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 14만명 가운데 자치경찰(150여명)은 0.1%에 불과하다. 미국의 지방 경찰 비중이 90%쯤 되고, 영국은 97.8%, 일본이 97%쯤 되는 것에 비하면 과도한 것은 맞다. 권한을 넘기기에 앞서 자치경찰부터 도입하라는 논리의 시발점인 셈이다. 경찰도 2012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독자 수사가 가능해졌다. 검찰은 경찰의 인지 수사 후 검찰에서 무혐의 방면된 사람이 1년에 10만명이 넘는다며 사법통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국민의 인식이다. 또 하나 자치경찰이 대세이긴 하지만, 인사권과 예산권 등이 지자체장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국민은 못 미더운 경찰과 지자체장의 결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를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많은 잠금장치가 필요한 대목이다. 자치경찰제 도입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문 총장이 이런 우려까지 감안해서 발언을 했다면 ‘수사권 조정에 대한 지연술’로 비칠 수 있다. 수사권 조정에서 청와대나 검·경이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 결과로 국민이 더 편안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논의의 과정에 국민은 빠져 있고, 검찰과 경찰만 있는 것 같다. 권력이나 권한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가졌을 때 많은 문제가 생겼다. 수사권 등 검찰의 권한을 경찰에 대폭 넘기되 영장심사는 유지하는 것이 어떨까. sunggone@seoul.co.kr
  • [길섶에서] 저성장, 미세먼지/황성기 논설위원

    몇 년째 서울에 사는 육순 가까운 일본인이 미세먼지를 푸념하며 옛날 일을 들려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도쿄 동네의 마을 확성기에서 “광화학 스모그 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밖에서 노는 것을 삼가 주세요”라는 안내가 나오면, 어른들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속상했다는 추억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니, 대기의 질 개선에 노력을 해 온 지금의 도쿄에는 없어졌을 법도 한데 지난해에도 주의보가 발령된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선진국의 환경개선 노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광화학 스모그는 공장이나 자동차 배기 가스에 포함된 질소산화물,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태양광(자외선)을 받으면 생기는 광화학 옥시던트를 가리키고, 미세먼지는 배기가스 등의 미세한 입자 그 자체를 뜻하지만 대기 오염물질이란 점에선 도긴개긴이다. “고도 경제성장기의 유소년 때 공해투성이 환경에서 질 나쁜 음식을 먹으며 살아온 우리 몸이 좋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는 이 일본인. 일본처럼 저성장에 접어든 우리이지만 언제쯤이면 대기오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한숨만 나온다. 이놈의 미세먼지. marry04@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아무래도 그림을 사야겠습니다(손영옥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그림 구매는 왠지 나와는 거리가 먼 일 같다. 그러나 저렴하게 산 그림이 10년 후 돈이 된다면 어떨까. 책은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을 위한 미술품 구매 가이드 북이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미술품을 사려면 얼마가 있어야 하고, 어디에서 사들여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272쪽. 1만 6800원.출판하는 마음(은유 지음, 제철소 펴냄) 산문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글쓰기 에세이집 ‘쓰기의 말들’의 작가 은유가 문학편집자, 번역자, 북 디자이너, 출판제작자, 출판마케터, 온라인 서점 MD, 1인 출판사 등 10명의 젊은 출판인들을 직접 만나 ‘부단한 협동의 결과물’인 책을 짓고 펴내는 각각의 입장에 대해 묻고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344쪽. 1만 6000원.신해철(강헌 지음, 돌베개 펴냄) 가수 신해철이 20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년간 그와 음악적 교감을 이어 온 음악평론가 강헌이 올해 신해철 데뷔 30주년을 맞아 펴냈다. 낡고 부패한 기성세대를 거부하며 인문학적 사유로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했던 신해철의 역동적인 삶과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다. 360쪽. 1만 6000원.한국 경제 4대 마약을 끊어라(유종일·권태호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 경제 민주화로 유명한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와 권태호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대담집이다. 저자들은 한국 경제를 벼랑으로 몰고 간 4대 마약으로 ‘투자’, ‘환율’, ‘빨리빨리’, ‘찍기’를 꼽았다. 마약들을 하루빨리 끊고 혁신성장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새로운 성장 모델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12쪽. 1만 5800원.적색수배령(빌 브라우더 지음, 김윤경 옮김, 글항아리 펴냄) 러시아 투자 회사 허미티지 캐피털 창립자이자 CEO인 미국인 빌 브라우더의 논픽션 소설이다. 푸틴 집권 후 러시아는 저자가 소유한 회사의 자본 구조를 조작하고 세금을 탈루한 것처럼 꾸며내 그를 범죄자로 만든다. 저자가 이런 범죄를 언론에 알리지만, 오히려 푸틴의 눈엣가시가 돼 위기를 맞는다. 496쪽. 1만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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