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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월드컵 ‘비디오 심판’/황수정 논설위원

    [씨줄날줄] 월드컵 ‘비디오 심판’/황수정 논설위원

    2018 러시아월드컵의 주인공은 ‘비디오 심판’인가 싶다. 이번 월드컵에서 첫선을 보인 비디오 보조 심판, VAR(Video Assistant Referee) 시스템이 날마다 논란의 중심에 선다. VAR 판독으로 순식간에 승부가 엇갈려 희비가 교차하는 상황이 꼬리를 물고 있어서다.며칠 전 포르투갈과 모로코 경기는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포르투갈 수비수 페페의 팔에 공이 맞는 장면이 포착됐지만 VAR은 적용되지 않았다. VAR 판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주심의 몫. 선수들과 관중석이 술렁거렸으나 심판은 끝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모로코는 패배했고, 세계 축구 팬들의 흥분은 지금껏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저런 VAR은 없으니만 못하다.” “경기 흐름만 끊어 놓는 훼방꾼.” “유럽팀만 봐주는 ‘유럽 전용’ 장치.” 비디오 심판 무용론이 인터넷 공간을 달구고 있다. 비디오 판독 시스템은 다른 대부분의 경기에는 일찌감치 도입됐다. 육상, 테니스, 야구, 배구 등 거의 모든 종목에서 이미 ‘인간 심판’의 한계를 보완해 주고 있다. 특히 시속 200㎞를 넘나드는 공으로 인·아웃 판정이 난해한 테니스는 비디오 심판 ‘호크 아이’의 판단에 경기 흐름이 삽시간에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주심이 비디오 판독 결정권을 가진 월드컵과 달리 테니스에서는 세트당 3회까지 선수가 판독을 요청할 수 있다. 판정 시비의 소지가 많은 야구도 비디오 심판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보수적 성향의 경기 종목일수록 VAR 도입이 늦다는 것이 스포츠계의 해설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는 2014년에야 비디오 판독 장치를 도입했다. 운동 경기의 생명은 첫째도 둘째도 공정성이다.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경기 현장은 첨단기술의 혜택을 어느 분야보다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이다. 지난해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는 주심만 빼고 인·아웃을 판정하는 라인맨 9명을 모두 호크아이로 대체했다. 파격적인 조치에 테니스 팬들의 설왕설래가 뜨거웠다. 심판들이 기계에 속수무책으로 일자리를 뺏긴다는 우려가 높았다. “오심(誤審)도 경기의 일부다.” 인간 심판의 한계와 권위를 동시에 인정하는 스포츠계의 ‘잠언’이다. 눈 밝은 첨단기계 심판이 동원된 월드컵에서는 이 말이 사라질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VAR 판독 여부를 결정하는 주심의 머릿속을 또 다른 인공지능(AI) 장치로 감독해야 한다는 우스개가 벌써 나오고 있다. 사람의 심판과 기계의 심판. 어느 쪽에 우리 마음은 상처를 덜 받겠는가. sjh@seoul.co.kr
  • [서울광장] 전국동시지방선거, 상시 선거로 바꿔 보자/박현갑 논설위원

    [서울광장] 전국동시지방선거, 상시 선거로 바꿔 보자/박현갑 논설위원

    “7장의 투표용지에 사람인자 도장을 정당 기호 따라 기계적으로 찍었어요. 누가 누군지 몰라서요.”“시장이랑 구청장은 골라 찍었고 교육감은 그냥 익숙한 이름에 눌렀어요. 나머지 4장은 아예 안 찍었구요.” “선거공보물을 열어 보니 비례대표를 제외하고도 후보자가 무려 24명이더군요. 유권자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7장의 투표용지는 고문이었습니다.” 지난 13일 끝난 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자들의 얘기다. 중앙선관위는 ‘아름다운 선거, 행복한 우리 동네’라며 ‘1인 7표제’ 홍보에 열을 올렸으나 투표장을 찾은 유권자들은 곤혹스러웠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와 달리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 교육감, 광역 및 기초의회 의원, 광역 및 기초의회 비례대표 등 7명의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선거다. 한 선거구당 수십 명에 달하는 후보들이 나오면서 유권자들은 대선, 총선 때보다 더 많은 선거 정보를 소화해야 한다. 선관위가 후보자 선택을 돕기 위해 선거 공보물을 가정으로 배달해 주나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거 공보물에는 후보자의 재산·병역·전과·납세 등에 관한 정보와 후보자의 정책과 공약이 담겨 있다. 살펴보면 후보자의 됨됨이와 공약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두꺼운 책자나 다름없을 정도로 분량이 많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지역은 국회의원 후보들까지 챙겨야 한다. 생업에 바쁜 서민들로서는 외면할 수밖에 없는 선거 자료다. 선거가 끝났는데도 우편함에 선거 공보물이 고스란히 꽂혀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권순일 중앙선관위원장은 이번 선거에 투입되는 예산이 1조원을 넘는다며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투표율 60.2%로 제1회(1995년) 지방선거(68.4%)를 제외하곤 가장 높았다. 하지만 정당 이름만 보고 연달아 기표하는 이른바 ‘줄투표’가 허다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번엔 더 그랬다. 한반도 평화 모드에 지역 현안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4년 뒤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또 하게 된다. 유권자들이 내 고장 일꾼을 꼼꼼히 살펴보고 뽑을 수 있도록 공약에 대한 관심과 후보 자질에 대한 평가를 소홀하게 하는 현행 선거 방식을 바꿔 보자. 전국동시선거가 아닌 상시 선거 체제로 바꾸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재보궐 사유가 생길 때마다 해당 지역별로 선거를 하자는 것이다. 일본 광역 및 기초단체장 재보궐 선거처럼 재보궐선거 당선자에게 잔여 임기가 아닌 전체 임기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공직선거법을 바꾸면 된다. 현재 재보궐선거는 당선자에게 전임자의 잔여 임기만 보장한다. 같은 선거 비용을 들이면서 반쪽자리 공직자를 뽑는 것은 예산 낭비다. 낮은 투표율에서 드러나듯 유권자 참여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후보 감별이 쉬워진다.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선출직 재보궐 사유가 생길 경우는 흔치 않은 만큼 뽑아야 할 공직자는 한 명으로 줄 게다.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공직자를 골라야 한다면 후보 면면을 충분히 살펴보고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상시 선거 체제로 바뀌는 것으로, 동시선거에서처럼 특정 이슈에 따라 각 지역 현안이 파묻히는 게 아니라 지역 현안을 놓고 각 정당과 후보자가 표심 경쟁을 벌이는 효과가 생길 것이다. 다만 동시선거 때보다 선거 관리 비용이 더 소요되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재임 중 비리로 당선 취소가 돼 재보궐선거를 하게 될 경우 그 원인 제공자 및 소속 정당에게 선거 비용을 부담시키는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공천 과정에서부터 책임 정치를 정당에 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각 정당은 후보에 대한 검증 미흡으로 재보궐선거를 하게 된 경우 후보를 내지 않는 합의도 필요하다. 재임 중 불거진 문제로 재보궐선거를 하게 된 경우에 후보 공천을 금지한다면 정치 참여라는 민주성을 훼손할 수 있겠으나 공천할 때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문제로 보궐선거를 하게 된 경우라면 논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agleduo@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몽골 침략에 강화로 천도한 고려, 훼손 우려에 태조 왕릉도 옮기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몽골 침략에 강화로 천도한 고려, 훼손 우려에 태조 왕릉도 옮기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1232년(고종 19)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긴다. 하지만 천도를 주도한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몽골과 화의가 성립함에 따라 1270년(원종 11) 고려의 이른바 강화경(江華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강화를 피난 임시 수도로 삼은 38년은 제23대 왕 고종(1213∼1259)과 제24대 왕 원종(1260∼1274)의 재위 기간이다. 강화에는 궁궐과 성곽은 물론 고종을 비롯한 왕족의 무덤이 곳곳에 남아 있다.왕족급 무덤으로 보이는 석실분은 모두 7기다. 4기는 묻힌 사람(피장자)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다.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강종비 원덕태후의 곤릉, 원종비 순경태후의 가릉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사’에 보이는 고려 태조 왕건과 아버지 왕륭 무덤의 강화 이장(移葬) 기록이다. 강화 천도가 이루어진 고종 19년(1232) ‘이 해, 세조와 태조의 재궁(梓宮·관)을 신도(新都·새로운 도읍지)로 옮겼다’고 적었다.왕륭은 송악, 즉 송악산 주변 개성 지역의 호족으로 궁예의 휘하에 있었다. 훗날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들어서는 송악산 아래 발어참성을 쌓고,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궁예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훗날 왕건은 이런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에 추존한다. 세조와 태조의 무덤을 강화로 옮긴 것은 몽골 점령군에 의한 훼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신을 인질 삼은 협박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조의 창릉과 태조의 현릉은 1243년(고종 30) 다시 한번 강화섬 내부의 개골동(盖骨洞)으로 이장한다. 풍수지리적 이유로 짐작한다. 두 무덤은 환도한 해 개경으로 돌아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에 복장했다. 창릉 터와 현릉 터가 궁금하지만, 주인이 알려진 무덤부터 돌아보기로 한다. 먼저 무덤 주인들의 정보가 필요할 것 같다. 고려의 제21대 왕 희종(재위 1204∼1211)은 실권자 최충헌의 횡포가 심하자 제거하려다 자연도(영종도)에 유폐됐다. 제22대 왕 강종(재위 1211~1213)은 제19대 명왕(재위 1170~1197)의 아들이다. 명왕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1197년 아버지와 강화도로 쫓겨났다. 다시 개경으로 소환된 강종은 역시 최충헌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죽어 아들 고종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최충헌은 집권 기간 동안 4명의 왕을 갈아치웠다. 강종비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다. 원종의 제1비 순경태후(1222~1237)의 아버지는 장익공 김약선이고, 어머니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큰딸이다. 김약선은 고종 시대 문신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순경태후는 1236년 충렬왕을 낳고, 이듬해 딸을 잇따라 출산하고는 곧 세상을 떠났다. 10대 중반에 불과했다. 고려 왕릉을 둘러보기에 앞서 강화읍내의 고려궁터를 먼저 찾으면 좋을 것이다. 지금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은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다. 개경의 그것을 모범으로 삼았지만, 규모는 어쩔 수 없이 작았다. 강화 궁궐의 뒷산을 송악이라 부르고, 개경 만월대처럼 정문은 승평문, 동문은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고려궁터의 정문은 ‘승평문’이라 편액되어 있지만, 최근 복원한 조선시대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도 고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이곳에 강화행궁이 들어섰고, 강화유수부도 자리잡았다. 궁터 내부 한복판에는 외규장각이 외롭게 복원되어 있고, 강화유수부의 명위헌과 이방청이 보일 뿐이다. 두 왕조가 중첩되어 있는 유적의 역사성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지 고민스러워 보인다. 고려 왕릉은 강화읍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고종의 홍릉이 유일하다. 다른 무덤은 모두 남서쪽에 몰려 있다. 홍릉은 봄이면 진달래꽃이 장관을 이루는 고려산 남동쪽 기슭에 있다. 강화읍내에서 강화산성 서문을 나선 뒤 강화역사박물관 방향으로 가다 강화고인돌체육관 못미처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원래 홍릉은 다른 고려 왕릉처럼 3단의 축대를 쌓아 아래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사람 형상을 한 조각, 왕릉을 각각 배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정자각은 보이지 않고, 사람 형상의 돌조각 2구만 남아 있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홍릉이 강화섬의 중북부라면 다른 왕릉들은 중남부의 진강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읍내에서 찬우물고개를 거쳐 인천가톨릭대 쪽으로 가다 보면 원덕태후의 곤릉, 희종의 석릉, 순경태후의 가릉을 알리는 푯말이 차례로 나타난다. 조선 왕릉이 평지와 맞붙은 높지 않은 산지에 의지해 들인 것과는 달리 강화의 고려 왕릉은 상당히 가파른 산 중턱에 조성했으니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고려 왕릉이라는 사실이 오랫동안 잊혀졌기 때문인지 곤릉과 석릉은 길을 찾기도 쉽지 않다. 가릉 역시 좁은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찾기가 쉽다.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왕릉급 무덤 두 기가 나타난다. 먼저 보이는 것이 가릉으로 알려진 무덤이고, 뒤에 것이 능내리 석실분이다. 강화에서 세상을 떠난 왕비는 세 사람으로, 희종비 성평왕후(?~1247)의 소릉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능내리 석실분이 성평왕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발굴조사 결과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보다 먼저 축조됐고, 위계도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가릉으로 알려진 앞의 무덤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일 수 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인산리 석실분은 북쪽 고려산과 남쪽 진강산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퇴미산 남서쪽에 있다. 인산저수지 서쪽의 인산삼거리에서 산길을 1.3㎞쯤 올라가야 한다. 사륜구동차라면 석실분에서 500m 남짓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다.인산리 석실분은 강화의 다른 무덤들보다 더 가파른 곳에 자리잡았다. 다른 강화 왕릉처럼 삼단 석축으로 조성됐을 무덤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폐허를 방불케 한다. 다만 최상단의 석실이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강화섬의 동쪽 해협 염하(鹽河)와 가까운 연리에도 고려시대 석실분이 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인산리 석실분과 연리 석실분이 세조와 태조의 이장지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다. 물론 어느 것이 세조의 무덤이었고, 어느 것이 태조의 무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강화로 이장한 왕륭과 왕건의 무덤을 다시 옮겼다는 개골동은 찬우물고개 근처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개골동 왕릉터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하남시의 광주향교/서동철 논설위원

    하남역사박물관에서 보도자료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하남 광주향교’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향교는 조선왕조가 통치 이념인 유교 문화를 지역 곳곳에 퍼뜨리기 위한 국립교육기관이었다. 대개 읍치의 중심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곤 했다. 하남시에 광주향교가 있다는 것은 옛 경기도 광주의 읍치가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하남시는 서울 주변의 신흥 주거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서울 강남으로 접근하기가 편리한 데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도 뛰어나다. 더불어 하남시는 역사의 고장이다. 적지 않은 하남시 사람들은 한성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이곳이었다고 믿고 있다. 사실 한성백제는 몰라도 통일신라 시대 하남시는 한강 유역을 통치하는 중심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광주읍치는 인조가 하남시에서 1636년 남한산성 내부인 당시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로 옮겼다. 1917년에는 오늘날 광주시청이 있는 광주군 광주면 경안리로 갔다. 서울 강남도 과거에는 대부분 광주 땅이었다. 그런 광주의 중심이 지금의 하남시였으니, 주민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 [씨줄날줄] 114년 만의 귀환 ‘용산’/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114년 만의 귀환 ‘용산’/김성곤 논설위원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 시대를 마감하고, 오는 29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한다. 용산에 미군이 주둔한 지 73년, 미군사령부가 창설된 지 61년 만이다. 미군이 용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이다.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에 따라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24군단이 일본군 무장해제와 행정권 장악을 위해 서울에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용산이다. 이후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한국을 제외되면서 한때 482명의 미 고문단만 남기도 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미군이 다시 투입된다. 1957년엔 미군사령부가 용산에 자리를 잡는다. 미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은 ‘한국민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한국과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에 따라 미국은 2003년 주한미군 재배치에 나섰고, 당시 한국에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전 시기와 규모를 놓고 한ㆍ미 양국 간 줄다리기를 하고, 개발 주체 문제로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갈등을 빚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미군 사령부 이전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안타까운 오욕의 땅이 용산이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처음 진을 친 것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이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퇴한 고니시 군이 지금의 원효로 4가에,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갈월동에 각각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했다고 한다. 지금은 배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태원(梨泰院)으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항복한 일본인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타인(利他人)으로, 왜군의 만행으로 태어난 2세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청나라 군대가 청일전쟁 때까지 여기에 주둔한다. 1882년 흥선대원군의 청나라 압송도 이곳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때인 1904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은 용산 일대 땅 300만평을 강제 수용해 군기지화한다. 이렇게 보면 용산이 우리 품에 돌아온 것은 114년 만이다. 성공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전기가 마련된 시점에 114년 만에 온전하게 용산이 우리 품에 돌아온다. 그 자리에는 민족공원이 조성된단다. 새삼 용산을 다시 보게 된다.
  • [길섶에서] 조천항 책방/김성곤 논설위원

    어깨가 닿을 듯 좁은 돌담길을 지나서야 만난다. 작은 나무 대문, 그 앞에 놓인 빈 의자, 문에는 학창시절 명찰처럼 아주 조그만 간판이 달려 있다. 제주 조천항을 낀 마을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책방 ‘시와 그림책’ 얘기다. 마당에는 꽃과 잔디, 빈 화분들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어서 오세요.” 주인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서로 묻지도 물어보지도 않는다. 학교 앞 분식집만 한 책방에는 긴 책상 몇 개와 벽을 채운 책들뿐인데도 부족하지 않다. 시집과 그림이 곁들여진 동화에서부터 수필집까지…, 젊은 시인도 있고, 이상, 황동규, 고흐도 있다. 손님은 아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젊은 부부와 우리 부부뿐이다. 최근 제주에 다녀왔다. 횟집부터 애월과 함덕의 카페, 오름 오르기까지 나름대로 제주를 즐겼다. 아쉬운 것은 제주다운 게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파스타와 빵, 풍경 좋은 곳은 모두 카페다. 그러다 찾은 게 시와 그림책이다. 전화로 길을 물어야 할 만큼 꼭꼭 숨어 있다. 알고 보니 제주에는 이런 책방이 제법 많다. 편안한 분위기와 책장을 넘기는 손맛 때문인가. 모처럼 마주한 반가운 제주의 변화였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kr
  • [씨줄날줄] ‘깡통주택’ 7%/이두걸 논설위원

    좋은 아파트가 좋은 가격에 나와 매매계약을 했는데, 기존에 살던 전셋집 주인이 말썽이라며 지인이 조언을 구했다. 계약기간 종료를 앞두고 “4억원의 전세 보증금을 돌려 달라”고 해도 “집이 안 나간다”며 ‘배 째라’ 식이란다. 2년 전보다 전셋값은 떨어졌는데도 집주인이 기존 가격에 세를 놓았으니, 세입자 찾기가 난망이다. 집주인은 대출이 꽉 차서 추가 대출이 불가능하다. “집주인에게 전세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소송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절반의 해법’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들어 아파트 입주 물량이 크게 느는 데다 전세가격이 하락하면서 집주인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전세가격이 외환위기 당시처럼 20% 급락하면 전체 임대가구의 7.1%는 기존 금융자산이나 주택담보대출 등을 통해 보증금 감소분을 마련할 여력이 없다고 경고했다. 전세가격이 하락하면 집값도 내려가고, 결국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깡통주택’이 그만큼 증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체 임대주택 274만 가구 중 20만 가구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다주택자들은 자금 사정 악화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다주택 임대가구 중 금융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비율은 34.2%에 달한다. 이들은 최근 1~2년간 유행이던 높은 전셋값에 기대 제 돈은 얼마 들이지 않고 아파트 등을 사들인 ‘갭 투자자’일 가능성이 크다. 다주택자들은 과도한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돼 지난해부터 정부 규제의 집중 표적이 됐다. 보유세 개편과 양도소득세 중과 등 세금 규제와 은행 대출규제 등은 이들을 겨냥한 정책이다. 경제 행위에 대한 책임은 경제 주체의 몫이다. 시장 상황의 변화에 따른 투자 손실을 일일이 정부가 보전해 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주택공급 물량의 안정화를 꾀하는 건 정부의 의무다. 공급 물량이 매년 들쭉날쭉하면 전세가격 역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고, 그 피해는 결국 세입자가 입게 된다. 다만 정부는 혹시나 있을 수 있는 깡통주택 속출 사태 등에 대비해 세입자 보호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역이나 주택가격 등의 특성이 정교히 고려돼야 함은 물론이다. 세입자들도 당장 급한 자금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받을 수 있는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 등의 제도를 이용해봄 직하다. 3억원짜리 전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을 경우 연간 38만원 정도의 보험료만 부담하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부고]

    ●양용모(서울신문 제작국 윤전부 차장)씨 모친상 20일 용인장례식장, 발인 22일 (031)334-4444 ●이호웅(신한 ENI이사)씨 모친상 김석환(전 고합 재무본부장) 김병재(전 이데일리 논설실장)유인창(문화일보 편집부 부장)씨 장모상 20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22일 오전 10시(02)2072-2014 ●윤태진(전 인천 남동구청장)씨 별세 윤대중(MQ디벨롭먼트홀딩스 차장)씨 부친상 김종두(전 가천대 길병원 비서실장)씨 장인상 19일 가천대 길병원, 발인 22일 오전 7시 (032)460-9402
  • [길섶에서] 요코의 ‘사찰 순례’/황성기 논설위원

    ‘요코와 함께한 일본 사찰 순례’(종이와나무 펴냄)란 책이 사무실로 배달돼 왔다. 저자 나카노 요코가 보낸 것이다. 이 책은 일본판 ‘나의 문화 답사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 전문지에 1년간 한글로 연재했던 글을 묶어 냈다. 요코는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인 남편이 서울 특파원으로 발령 나면서 2011년부터 3년간 서울에 살았다. 한국 문화에 빠져 특히 사찰을 즐겨 찾으면서 한국인의 절 사랑을 체험한 그다. 요코가 2014년 오사카로 이주한 뒤 즐기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일본을 찾는 한국인 친구들과 간사이 지방의 절과 박물관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절을 함께 다니며 한국인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나의 마음도 따뜻해지고 행복해”져서 “이 행복함을 더 많은 한국분들과 나누고 싶어 책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교토, 나라, 시가에 있는 사찰을 다뤘다. 잘 알려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나라의 도다이지 외에도 29개의 절을 엄선해 주변 볼거리, 답사 코스, 지도까지 세심히 담았다. 700만명이 일본으로 가는 시대다. 이 책 들고 일본 절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marry04@seoul.co.kr
  • [씨줄날줄] ‘디지털 마약’ 게임중독/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디지털 마약’ 게임중독/박현갑 논설위원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자녀가 공부에만 매달리기를 바라는 부모로선 속이 탈 노릇이다. 청소년들도 불만이다. 게임하며 잠시 머리를 식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습머신’이기를 강요하는 게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게임이 형사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임 몰입을 나무라는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 사건은 중독의 부작용이다.게임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세계보건기구(WHO)가 18일(현지시간) 게임중독을 국제질병분류(ICD) 코드에 추가하는 11차 개정판(ICD-11)을 내놨다. 개정판은 내년 5월 총회에서 회원국 논의를 거쳐 확정되며 2022년부터 적용된다. WHO는 게임 중독을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하고,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을 지속하는 행위가 최소 1년간 지속되는 중독성 행동장애’라고 정의했다. ICD는 모든 질병 종류와 이에 따른 신체 손상 정도를 세분화한 지침이다. 대부분의 회원국에서 보건의료 정책의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 보험회사에서 보험금 지급, 면책, 삭감을 결정하는 주된 근거인 한국 표준질병 사인분류(KCD)도 이를 따르고 있다. 게임업계는 이번 개정으로 게임산업은 물론 인터넷 산업 전반이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WHO가 게임중독에 대해 명확한 기준조차 제시하지 못하면서 질병으로 규정해 청소년을 ‘정신질환자’로 낙인찍으려 한다는 비판이다. 이미 한국게임산업협회는 지난 3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게임 질병화 시도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해외 게임산업 단체들과 낸 상태다. 하지만 WHO는 “게임장애 진단을 받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면서 전체 게임 이용자들의 3%를 넘지 않을 것이라며 이 같은 업계의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도박중독이든 게임중독이든 지나치면 질병으로 인식하는 게 맞다. 1년 이상 자기통제력을 잃고 게임에 빠지면 중독이다. 치유해야 한다. 이용자층이 청소년임을 감안하면 미래 인적자원 보호 차원에서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게임 과몰입이 청소년 학업 스트레스와 상관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용자의 행복추구권 운운하며 게임중독 치유를 외면할 일은 아니다. 게임업계는 질병 분류에 반대할 게 아니라 게임 구성의 도박성 요소를 줄이고 사용시간 제한 등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게임 문화를 건전하게 하면서 게임산업을 지킬 방안을 내는 게 옳은 자세다. 식음을 전폐하는 과도 몰입자에게 게임은 ‘디지털 마약’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eagleduo@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추미애 “지역주의 해소한 민주 압승… 솔직히, 文대통령 효과 컸죠”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추미애 “지역주의 해소한 민주 압승… 솔직히, 文대통령 효과 컸죠”

    추미애 대표는 꽃을 좋아한다. 연꽃을 으뜸으로 손꼽는다. 추 대표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연꽃 두 송이를 따 품에 안는 태몽을 꾸고 그를 가졌다. 낳기도 전에 고이 기르고 싶어서 그림전람회에 걸린 화가 이름을 따 이름부터 지어 놓고 낳기를 기다리던 딸이었다. ‘아름답게(美) 사랑하며(愛)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추 대표는 이름 같은 인생을 살 수 없었다. 경쟁적인 약육강생의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독하게 살았다. 15대 초선 전후로 ‘추다르크’로 시작해 ‘추고집’, ‘독불장군’, ‘추설공주’라는 별명이 붙었다.그런 추 대표가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동산에서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니 생경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6·13 압승에 등골이 서늘하게 두렵다”고 했지만, 지방선거 등에서 압승한 당 대표로서 추 대표는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당 대표실에는 축하 난 화분 세 개가 놓여 있다. 두 개는 문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해 10월 23일 추 대표 60세 생일 때 보낸 축하 난이다. 나머지 한 개는 6·13 지방선거 승리 직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보낸 난이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짧게 씌어 있었지만, 지역주의 타파에 승부를 걸었던 노 전 대통령의 유지가 보이는 듯했다. 추 대표는 지난 15일 권 여사에게 감사의 전화 통화를 했다. 권 여사는 “이렇게 좋은 날도 있네요. 대통령이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추 대표도 수화기 너머 흐느꼈단다. 민주당 사람들에게 노무현은 아직 눈물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노무현을 표현한다.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린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저를 많이 아껴 주셨어요. 통일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제안하시기도 했어요”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추 대표는 지난 2004년 민주당 대표 시절 노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후 2박 3일 광주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를 삼보일배로 사죄했지만, 그해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추 대표를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후보 시절에 “차기에 추미애도 있고, 정동영도 있고”라고 발언했다가, 대선 투표 전날 정몽준 후보로부터 ‘팽’당하기도 했다. 추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완승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지역에서의 선전에 한껏 고무됐다. 민주당 출신으로는 처음인 정세용 구미시장의 당선뿐만 아니라 임대윤 대구시장 후보도 39.8%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는 등 분전한 덕분이다. ‘대구의 딸’ 추 대표로서는 뿌듯한 업적이다. “지역주의가 극심할 때는 계층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당보다는 지역주의에 함몰돼 투표하는 경향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지역주의가 이번 선거에서 해소됐다. 고향 분들이 드디어 마음을 여셨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1997년 대선부터 추 대표는 민주당 깃발을 들고 대구로 향했다. 당시 대구 인심은 민주당이 들어갈 틈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를 하면 돌을 맞는다’는 말이 떠돌 때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잔다르크가 프랑스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잉글랜드 100년 전쟁에 참여해 샤를 7세를 옹립한 것과 같이 대구에 나타나 선거유세를 벌였다. 그는 이때 지칠 줄 모르는 선거유세로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추 대표는 무려 20년을 넘어서야 결실을 본 셈이다. 민주당의 이번 압승을 지지율이 높은 문 대통령 효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문 대통령도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청와대 비서실 그리고 내각이 아주 잘해 준 덕분”이라며 선거를 치른 당사자인 여당은 쏙 뺐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후 “오늘 회의는 청와대와 정부 직원들을 상대로 한 회의여서 문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면서 긴급히 진화했다. 추 대표는 “대통령 효과가 컸던 게 사실”이라고 인정한 뒤 “특히 대통령이 현충일 행사에 국가 유공자 자녀의 키 높이에 맞춰서 아이를 격려해 주는 모습처럼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유권자 분들을 대해 이겼다”고 말했다.‘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정국’에서 여성계는 이재명 경기지사 당선자의 사생활 논란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한 추 대표를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에 추 대표는 “이 당선자는 당의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후보였다. 후보자격심사위원회 등을 통해 일단 후보로 결정됐으면 도와야 하는 게 당 대표의 책무다. 하지만 이 당선자의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 사견을 피력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민주평화당 등 야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협치는 개방돼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인위적인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개헌과 같은) 국민에게 (대선) 공통 공약으로 내건 것마저도 야당들이 협조할 자세가 안 돼 있어서 개별 정당이 국민에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추 대표는 당 대 당 통합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정도 힘든데) 통합은 더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연정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민주평화당에 대해 그간의 태도를 반성해야 연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취지로 비쳐졌다. 추 대표는 지난 2년 동안 역대 어느 민주당 대표가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뤄 냈다. 우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설득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냈고, 지난해 대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른 보궐선거에서도 12개 지역구 중 11개 지역을 휩쓸었다. 2년간의 대표 임기를 완주한 거의 유일한 당대표다. 지난 2008년 이후 정세균,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김한길·안철수, 문재인, 김종인 등이 당 대표를 지냈지만 추 대표처럼 2년을 꽉 채운 대표는 없었다. 그만큼 체급이 커진 추 대표이다 보니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국무총리 기용설, 차기 대선 직행설, 법무부 장관 입각설 등 설만 난무한다. 이런 성공적인 당대표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사실 추 대표의 지난 2년간 대표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한때 ‘추미애 패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청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때도 있었다. 추 대표는 “당·청을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을 상당히 부풀린 측면이 있었다”면서 “진실이 아닌 이상 묵묵히 기다렸다. 여러 현안에 대해 당·청 간의 소통이 잘 된 편”이라고 자평했다. 오는 8월 25일 전당대회 이후의 계획을 묻자 “지난 23년간 정치를 하면서 개인 진로를 언론에 대놓고 말한 적 없다”면서 “내 진로는 전당대회를 치른 이후에 천천히 생각하겠다”며 지극히 무미건조한 답변만 돌아왔다. “저는 일생 입당원서라고는 한 번밖에 안 써 봤다”는 게 추 대표의 자랑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으로 들어간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 당적을 한 번도 바꾼 적 없다. 민주당이 새천년민주당을 거쳐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다가 나중에 합쳐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으로 간판을 바꾸었지만, 추 대표는 언제나 민주당이었다. 그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라고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뚝심이 ‘임기를 채운 당 대표’의 원천이 되지 않았나 싶다. “숨가빴던 지난 2년을 반추하며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싶다”는 추 대표는 연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보수세력의 앞날에 대한 견해는 어떨까. 추 대표는 “대선 이후 1년간 야당은 전혀 반성을 안 했다. 건강한 보수로 전환했어야 했는데 민주주의를 왜 망쳤는지 아무런 반성 없이 1년을 소진했다. 이번 기회에 보수가 물갈이를 해야 한다. 중진들도 도망치듯 떠날 게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국민이 평화를 원하면 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위장 평화쇼’라며 퇴행적인 모습만 보였다”며 일갈했다. 추 대표는 이어 “김무성 한국당 의원이 202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기에 앞서 개헌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큰 만큼 책임지고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jrlee@seoul.co.kr
  • [길섶에서] 거절의 기술/이순녀 논설위원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할 때도 스스럼이 없다. 반대로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타인의 부탁이나 요청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거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거절에 쉽게 상처받거나 좌절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절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힘들어한다. 거절하는 순간에 상대방의 감정에 이입되기 때문이다. 취재나 인터뷰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하는 일이 잦지만, 여전히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소심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모양이다. 인터넷에 ‘거절’을 키워드로 입력하면 수십 종류의 책이 검색된다. ‘거절당하기 연습’의 저자인 지아 장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거절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이 ‘100일 거절 프로젝트’를 실천해서 얻은 깨달음이다. ‘낯선 사람에게 돈 빌려 달라고 하기’처럼 거절당할 게 뻔한 요청을 하면서 내성을 키우는 것이다. “거절은 내 존재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제안에 대한 거절일 뿐”이라는 당연한 상식으로 일단 부딪쳐 보는 것. 그것 말고 거절의 기술이 달리 있을까.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난민 포비아/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난민 포비아/이두걸 논설위원

    “그 사람들(예멘 난민) 중에서 이슬람국가(IS)나 극렬 이슬람주의자 테러리스트가 없다는 걸 누가 보증합니까.”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한 인권국가로 최선의 지원을 해 줘야 합니다.”(이상 청와대 국민청원 글)요즘 제주도는 지금까지 없었던 이슈로 뉴스의 중심에 섰다. 바로 난민 문제다. 5월 말 기준 제주도에서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은 519명이다. 42명이었던 지난해와 비교해 벌써 12배가 넘었다. 지난달 2일에는 말레이시아로부터 예멘인 76명이 한꺼번에 입국하기도 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로 탈출한 뒤 90일 체류 만료 시점에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싣는다. 제주도 역시 30일간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고, 이후에는 난민 신청을 한다. 국내 난민법은 난민자가 난민 신청을 하면 인정 여부가 확정될 때까지 국내 체류를 허용한다. 예멘 난민자가 느는 것은 불안정한 자국 정세 때문이다. 산유국이자 아덴이라는 세계적인 항구를 보유한 국가임에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단돼 있던 예멘은 1990년 무혈 통일을 이뤘지만 ‘화학적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4년 다시 내전에 돌입해 북예멘 중심으로 통일을 이룬 뒤에도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종파 간 분쟁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국의 대리전으로 2015년 내전이 재발하면서 지금까지 1만여명이 사망하고 수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는 예멘 난민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난민법·무사증 입국·난민신청허가 폐지 및 개헌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 글은 어제 참여자 20만명을 넘어섰다. 청원자는 “난민 신청을 받아 그들의 생계를 지원해 주는 것이 자국민의 안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도 ‘무사증을 이용해 난민 신청을 하려는 이들이 많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브로커까지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이 난민에 우호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94년 이후 공식적으로 한국에 온 난민은 3만 2000명이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는 800명에 그친다. 한때 우리는 난민 수출국이었다. 중국과 일본, 구소련에 머문 380만 우리 동포는 구한말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 등에 이주했다. 요즘으로 치면 ‘난민’이다. 때론 합법적이면서 강제적이었고, 때론 불법적이며 자발적이었다. ‘우리 모두 난민의 후예’라는 표현이 문학적 수사에만 그치지 않는 까닭이다.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다. douzirl@seoul.co.kr
  • [바른 말글] 국방의 의무/손성진 논설고문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가 ‘국방의 의무’다. 교과서에도 국방의 의무라고 나와 있지만, 관형격 조사 ‘의’를 굳이 넣어야 할까. 관형격 조사 ‘의’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다. 사전에 나와 있는 것만 21가지다. ‘어머니의 성경책’(소유), ‘우리의 각오’(행동 주체), ‘다윈의 진화론’(형성자) 등이다. 국방의 의무에서 ‘의’는 굳이 따지자면 동격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 ‘의’가 남용되고 있는 것은 일본어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일본어 ‘노’(の)의 쓰임새는 우리보다 훨씬 다양하다고 한다. ‘국방 의무’, ‘납세 의무’처럼 ‘의’를 생략해도 어색하지 않다. ‘국방장관’이라고 하지 ‘국방의 장관’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국의 지도’, ‘국가의 발전’, ‘겨울의 바다’를 ‘한국 지도’, ‘국가 발전’, ‘겨울 바다’로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멀어진 소리/황수정 논설위원

    나무 책상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글자를 적자면 따각따각 연필심 부딪는 소리가 좋다. 우르르 말발굽 소리를 날리고 마는 컴퓨터 자판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나무와 종이와 연필의 합주는 밤 깊어 주옥같아진다. 이십년 전쯤 살았던 길갓집이 자주 그립다. 산책로 초입이어서 발소리에 새벽잠을 깨고는 했다. 담벼락 아래 쉬어 가던 노부부가 있었다. 달팽이처럼 걷는 할아버지는 더 느린 할머니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두런두런 담을 넘던 말소리를 전부 불러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쉬지 않고 귀를 열어도 마음에 붙들리는 소리 한 가닥이 없다. 한밤중 무뚝뚝한 연필심 소리에나 고작 나는 내 마음을 듣다 만다. 오래전 노부부의 발소리를 떠올려야 진심을 다하는 마음을 겨우겨우 짐작만 한다. 잠귀를 열어 주던 청청한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속력으로 부서지는 소음 말고, 깊이 머물고 오래 감돌아 맺힌 데 없이 순한 말과 소리들. 무당벌레 두 마리가 형광등을 밤새 뱅뱅거릴 눈치다. 길 잃은 녀석들이 반갑다. 왱왱대는 저 소리, 깜깜한 봄밤을 감돌아 오늘은 귀 맑혀 주는 소리.
  • [씨줄날줄] 미추홀구(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미추홀구(區)/서동철 논설위원

    인천광역시 남구가 7월 1일부터 미추홀구(彌鄒忽區)로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미추홀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인천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남구는 1968년 인천시의 지방 행정 단위에 구가 처음으로 도입될 때 단순히 지역의 남쪽이라는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분히 행정편의주의적이었던 땅이름이 역사성을 되찾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신화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 주몽은 졸본부여 왕 둘째딸과의 사이에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남하해 비류는 바닷가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는 하북 위례성을 수도로 삼는다. 이후 비류 세력이 온조에 합류한 것을 계기로 백제는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홀(忽)이란 성(城)과 같은 뜻을 가진 고구려계 땅이름이라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재위 6년(396) 백제를 공격해 뺏은 58성 가운데 미추성(彌鄒城)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가 이른바 비류백제의 도읍을 고구려식으로 표기한 것은 장수왕이 475년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낸 이후 고구려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추홀은 남구에 있는 문학산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일찍부터 추정됐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속설에 문학산 위에 비류성 터가 있고, 성문 문짝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성안에 비류정(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삼국시대 미추홀은 매소홀(買召忽)이라고도 했는데, 두 표기는 같은 음가(音價)를 가졌던 것으로 학계는 본다. 한자는 다르게 썼어도 다르지 않게 읽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곳은 소성(邵城), 경원(慶源), 인주(仁州)라고도 불렸다. ‘세종실록’에는 “태조 원년(1292) 경원부에서 인주로 강등됐다가 태종 13년 인천군이 됐다’는 대목이 보인다. 처음 ‘인천’이 등장한 것이다. 옛 땅이름은 벌써부터 미추홀대로, 매소홀로, 소성로, 경원로, 인주로처럼 빠짐없이 길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미추홀이 곧 인천’이라는 등식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학계 일각에는 없지 않다. 전국에는 동·서·남·북·중구 같은 이름의 자치구가 25개에 이른다. 남구의 미추홀구 개명(改名)이 다른 지역에도 자극이 될 것이다. 앞서 강원도 영월군의 하동면과 수주면이 각각 김삿갓면과 무릉도원면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 [그때의 사회면] 풍기문란 단속

    [그때의 사회면] 풍기문란 단속

    풍기문란(風紀紊亂)이란 풍속과 기강이 실이 엉킨 것처럼 엉망인 모습을 뜻한다. 시대에 따라 풍기문란의 기준 또한 달랐다. 남녀칠세부동석 관습이 남아 있던 일제강점기에는 남녀가 한자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는 것도 풍기문란이라고 꺼렸다(동아일보 1926년 1월 5일자). 강가에서 여인들이 목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녀가 길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풍기문란이었다. 남녀 학생이 같은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모들은 풍기 문제를 걱정했다. 모두 광복 전의 일이다.지금은 60대 중반을 넘어 청소년들의 품행을 꾸짖는 입장이 된 1960년대 청소년들에게 일탈은 없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10대 청소년들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다. “쇼를 공연할 때마다 30~40명의 소년 소녀들이 짝을 이뤄 통로에서 트위스트를 추며 기성을 지르고…”(경향신문 1965년 2월 11일자) 서울 변두리 극장의 풍경이다. 스트레스를 풀 장소가 부족했던 그때 청소년들의 일탈 장소는 주로 극장, 다방, 음악감상실이었다. “10대 남녀 27명이 청소년의 출입이 금지된 다방에서 고고춤을 추다 풍기문란 혐의로 입건돼 가족이나 아동보호소에 넘겨졌다.”(동아일보 1971년 5월 31일자) 적용되는 혐의는 풍기문란이었다. 지금은 허락된 장소에서 밤새 춤을 춰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때는 즉심 처분을 받았다. 특히 수영장이나 한강변은 몸을 노출하기 때문에 풍기문란의 우려가 일었다. 이 때문에 한강에는 여학생 전용 수영장이 있었다. 젊은 남녀가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서 즐기는 것은 풍기문란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특별히 뚝섬에 만든 것이다(※사진※ㆍ동아일보 1958년 7월 29일자). 풍기문란 단속이 절정을 이룬 것은 크리스마스 때였다. 통금이 없는 절호의 기회라 청소년들이 밤새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곤 했기 때문이다. 1962년과 비교했을 때 1965년의 풍기문란 행위는 무려 600%나 증가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르면서 먹고살 만해지자 감춰져 있던 에너지가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풍기문란죄는 지금은 없어졌고 경범죄나 공연음란죄 등으로 대체됐다. 풍기문란의 단속 대상은 주로 10대 청소년들이었지만 성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21세 여성이 길거리에서 키스를 해 풍기를 문란시켰다는 이유로 즉심에서 현재 가치로 몇만원 이상인 벌금 200원을 선고받았다(경향신문 1964년 3월 28일자). 성인들의 풍기문란은 주로 카바레에서 벌어졌다. 남녀가 뒤엉켜 대낮부터 춤을 추는 행위는 경찰의 집중 단속 대상이 됐다. 어두침침한 실내 조명도 단골 단속 대상이었다. 조명은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밝기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인사]

    ■디지털타임스 △논설위원실장 이규화 △논설위원 서낙영 △편집국장 이승제 △정치국제부장 이근형 △금융정책부장 박선호 △산업부장 강주남 △ICT과학부장 최경섭 △디지털뉴스부장 김광태 ■이투데이 △대표이사 사장 김상철
  • [길섶에서] 실버영화관/이종락 논설위원

    며칠 전 서울 충무로에 들렀다. 명보극장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극장, 서울극장, 단성사, 중앙극장 등과 함께 10대 개봉관이었다. 지금은 명보아트홀로 상호가 바뀌었다. ‘점프’ 등 뮤지컬 세 편을 장기 공연 중이다. 공연장보다 눈길을 끈 곳은 6층 하람홀의 실버영화관. 55세 이상은 관람료 2000원. 참 착한 가격이다. 존 웨인의 ‘철인들’(1969년작), 커크 더글러스 ‘셰넌도어’(1965년), 험프리 보가트 ‘사하라 전차대’(194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더티 파이터’(1980년) 등이 상영 중이다. 200여개의 좌석이 거의 꽉 찼다. 젊은 세대에겐 영화 제목도, 배우들도 낯설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겐 추억을 일깨우는 마법의 주문이자 ‘영원한 오~빠’들이다. 스크린에는 영화를 몰래 보기 위해 수업을 빼먹은 기억, 극장 앞 기도의 단속을 피하려고 교복을 갈아입고 입장한 추억들이 오롯이 배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 초침은 움직인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추억은 떠나지 않고 코흘리개 시절, 까까머리 시절로 데려다준다. 실버영화관은 오늘도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jrlee@seoul.co.kr
  • [씨줄날줄] 왕회장 소떼 방북 20주년/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왕회장 소떼 방북 20주년/김성곤 논설위원

    1998년 6월 16일 오전 10시 소떼 1차분 500마리를 실은 트럭 50대가 판문점 인근 군사분계선에 집결한다. 당시 83세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직접 소고삐를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다. 휴전 이후 군사분계선을 통한 민간인의 방북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를 두고 프랑스 철학자 기 소르망(전 파리정치대 교수)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격찬한다. 이 길은 ‘소떼길’로 불린다. 지난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 길에 소나무를 심고 ‘평화와 번영’을 기원해 의미를 또 하나 추가했다.강원도 통천에서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훔쳐 도망친 뒤 현대그룹을 일군 이른바 왕회장에게 소는 아버지이자 고향이었다. 그래서 그는 충남 서산농장에서 소를 길렀다. 직원들이 북한에 보낼 소로 1000마리를 준비하자 왕회장은 시작의 의미가 있는 1001마리로 맞추라고 지시한다. 암소는 북한에서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인공수정을 시켰고, 고향 통천은 물론 자강도, 양강도 등 5개 도에 골고루 보냈다. 왕회장은 1989년 1월 24일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뒤 10년이 다 된 1998년에야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11월)이 성사된 것을 보면 대북 사업은 그야말로 ‘소걸음’이었다. 이 대북 사업을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이어받아 2000년 북한으로부터 개성공단 사업과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투자, 명승지(백두산, 묘향산, 칠보산) 관광 등 이른바 ‘7대 사업권’을 따낸다. 대신 북한에 5억 달러를 전달해 ‘대북송금 사건’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이후 남편 정 회장의 뒤를 이어받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방북해 2007년 12월 시작한 개성관광까지 성사시킨다. 그러나 금강산·개성 관광은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그 즉시, 개성공단은 2016년 2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각각 중단됐다. 현대그룹이 그간 12억 5000만 달러를 들여 북한에 구축한 시설과 사업권은 모두 동결됐다. 최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두 차례 정상회담과 지난 12일 북·미 정상회담으로 남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가 무르익고 있다. 기대대로 남북 관계가 잘 풀리면 현대가 추진하던 기존 사업들이 재개돼 ‘소떼 방북 20년’ 만에 제대로 된 결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남북 경협은 방대하다. 국가가 혼자 할 수도 없고, 한 기업이 주도할 수도 없다.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그야말로 소걸음으로 차분히 준비했으면 좋겠다. sunggon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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