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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빈집’ 대응팀

    [씨줄날줄] ‘빈집’ 대응팀

    부산 해운대는 관광객 등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엘시티라는 초고층 아파트의 상가는 절반 이상이 빈 상태다. 임대료 부담에다 방문객 감소 때문이라고 주변의 부동산 중개사무소장은 말한다. 임대료 부담 등에 따른 도시의 빈 상가도 문제지만 농어촌의 빈집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고령화와 저출산, 수도권 집중화로 농어촌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벽은 기울고 창문은 사라진 빈집들이 즐비하다. 귀농귀촌 수요도 적어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범죄 발생 가능성도 크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건정연)이 통계청 주택총조사를 분석한 결과 2023년 말 기준 전국의 빈집은 153만여 가구로 전체 주택의 7.9%다. 2015년(107만 가구)에 비해 43.6% 증가했다. 통계청 기준에는 매매, 임대, 미분양 등 일시적 빈집도 포함된다. 반면 국토교통부는 1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주택만을 빈집으로 본다. 국토부 기준에 따른 빈집은 지난해 기준 13만 4000가구다. 이 가운데 절반인 6만 6000여 가구가 농촌에 있다. 건정연에서 인구 1000명당 빈집 수를 17개 광역시도별로 살펴봤더니 전국 평균(29.9채)보다 8곳의 도 지역은 모두 높았다. 특히 전남(67.2채), 강원(54.0채), 충남(53.1채)이 높았다. 지자체마다 생활인구를 유입하고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빈집 정비에 팔을 걷고 있지만 사유재산이어서 한계가 있다. 정부 부처들이 그래서 특별법 제정에 적극 나서고 있다. 도시지역 빈집 정비를 맡은 국토부는 최근 빈 건축물 대책팀도 꾸렸다. 올 상반기 중으로 관련 특별법을 만든다. 농어촌지역은 농림축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가 함께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사람이 몰리는 지역은 빈집 해소 작업이 수월하다. 하지만 사람이 떠나는 농어촌은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없이는 난망한 일이다. 미래세대가 농어촌을 활기찬 전원 생활의 터전이 아니라 빈집들로 황량한 공간으로 기억할 것 같아 안타깝다.
  • [길섶에서] 비행기 좌석

    [길섶에서] 비행기 좌석

    패키지 여행을 다니면 비행기표를 예약할 일이 없다. 알아서 해주니까. 오랜만에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좌석을 미리 고를 수 있다길래 들어가 봤다. 비상구 옆이나 특정 구간의 첫 번째 좌석 등은 일반석 중에서도 넓다며 얼마를 또 내란다. 저가항공사라서 그런가 했다. 대한항공이 지난해 12월 국내선에 이런 요금 체계를 적용하려다 ‘꼼수 요금 인상’이라는 비판으로 철회했다는 기억이 났다. 국제선은 2021년부터 적용 중이다. 외국 항공사도 그렇단다. 비행기만큼 자본주의를 잘 보여 주는 공간은 없다. 1등석이면 비행기 탈 때도 내릴 때도 먼저다. 좌석 넓이는 물론 기내식 등 서비스는 일반석과 차원이 다르다. 가격은 일반석의 몇 배니 그저 그림의 떡. 돈을 더 내지 않고 좌석을 미리 예약할 수 있는 항공사도 있단다. 물론 선호 자리는 빼고. 항공사별 예약 시스템을 모르면 일행도 따로 앉아 갈 수 있겠다. 저가항공사를 선택하지 않는 것도 때론 고민이 필요한 일. 비행기 좌석 결정은 돈과 부지런함, 그리고 정보력의 집합체 같다.
  • [서울광장] 노년 세대는 어쩌다 정치권의 ‘찬밥’이 됐나

    [서울광장] 노년 세대는 어쩌다 정치권의 ‘찬밥’이 됐나

    ‘어르신의 거리’라는 서울 낙원동의 우거지국밥은 3000원이다. 유명한 집이라 한번쯤 들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어르신 손님이 자리를 메우고 있어 실천하지 못했다. 내가 그 집에 앉아 국밥을 먹고 있으면 다른 어르신의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이 식당이 TV에 비칠 때면 흐뭇하다기보다 처절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럼에도 최근 밥상물가가 치솟을 대로 치솟은 상황에서 3000원짜리 국밥은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동네를 둘러보고 있자면 ‘초염가 국밥’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분명 붐비는 거리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싸지 않으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어르신들만 가득하다. 쇠락한 거리에 구매력 없는 손님만 넘쳐나니 입주하겠다는 상인이 있을 리 없고 임대료는 바닥을 치며 슬럼화 길로 간다. ‘노년 문화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대권은 꿈도 꾸지 말라’는 내용의 칼럼을 쓴 것이 10년 남짓 전이다. 그동안 대통령선거를 비롯해 이런저런 선거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필자의 ‘경고’에 누구 하나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오히려 낙원동은 그사이 더욱 퇴락했고, 탑골공원의 노년 문화는 갈 길을 잃은 지 오래다. 어르신의 유일한 ‘문화’인 장기판만 여전하다. 이런 곳을 ‘어르신의 메카’라 할 수 있나. 이런 모습을 보며 노년 세대는 정치권의 관심을 받는 방법을 모르는 것 아닌가 안타까움을 갖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년 세대는 보수 지지가 강한 계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치세력으로부터 존중받으려면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깊이 심어 줘야 한다. 하지만 보수정당에 노년층은 ‘신경 안 써도 우리 편’이다. 반면 진보정당엔 ‘신경 쓸 이유가 조금도 없는 상대 편’이라는 인식만 심어 줬다. 어르신 홀대는 자초한 것과 다름없다. 탄핵심판의 인용 가능성을 점치며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보여 주고 있는 행보에서 노년층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없다. 봉급생활자들의 마음을 잡겠다며 근로소득세 개편 검토 가능성을 내비친 이 대표다. 강남 주민의 이해관계에 맞아떨어지도록 상속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엊그제는 “청년들이 왜 군대에 가서 막사에 앉아 세월을 보내야 하느냐. 국방을 인공지능(AI)화해야 한다”며 젊은 표심을 겨낭했다. 민주당은 40~50대 유권자를 대상으로 현안을 챙기고 정책을 발굴하겠다며 ‘4050특별위원회’ 발대식을 갖기도 했다. 국민의힘이 가까이는 지난 주말 광화문 탄핵 반대 집회처럼 변함없이 뜻을 같이하고 있음에도 노년층의 문화복지 향상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돌아보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당이 노년 문화 개선을 위해 무엇 하나라도 정책 대안을 내놓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당이 노년층에 아무것도 주는 것 없으면서 무슨 염치로 지지해 달라는 것인지 얼굴도 두껍다는 생각이다. 당장은 나라가 두쪽 난 상황에서 노년 문화에 대한 관심을 이유로 지지를 철회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정당과 정치인에게 어르신 문화와 복지에 관심을 촉구하고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힘을 모아 응징하는 정치운동은 반드시 시작돼야 한다. 탑골공원 주변 낙원동이라도 어르신들이 걱정 없이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문화생활도 즐기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지 정치권에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큰소리치지만 이 동네는 개발도상국 시대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라가 발전할수록 어르신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하는 낙원동은 상대적으로 더욱 초라한 몰골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기 대선이 현실화한다고 노년 문화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갑자기 생길 리 없다. 우리는 이미 65세 이상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노년 유권자가 1000만명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으로부터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노년 세대는 문화와 복지의 ‘제 밥그릇’을 찾는 데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누구나 노년이 될 후세를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서동철 논설위원
  • [씨줄날줄] 홈플러스의 씁쓸한 퇴장

    [씨줄날줄] 홈플러스의 씁쓸한 퇴장

    ‘비디오 킬 더 라디오스타.’ 영상 시대 라디오의 종말을 선언한 이 곡이 나오고 딱 3년 뒤인 1982년. 록밴드 퀸이 라디오는 그리운 대상이라며 ‘라디오 가가’를 선보였다. 실제 라디오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미디어의 저력이다. 유통업계도 공생의 법칙이 통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30여년간 온라인 쇼핑이 급성장해도 오프라인 매장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미국에서도 아마존이 급성장하면서 월마트 같은 거대 체인의 몰락이 예상됐다. 그러나 월마트는 7000개 매장을 온라인 주문 물류 거점으로 변모시켰고, 아마존은 2017년부터 오프라인 확장에 나섰다. 공존에 성공했다. 1997년 삼성물산 유통 부문을 모태로 출발해 전국 126개 매장을 둔 한국 대형마트 업계 2위 홈플러스. 월마트처럼 오프라인 점포를 온라인 물류기지로 재편하는 혁신에 실패했다. 2015년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를 6조 7000억원에 인수해 초대형 식품 전문 매장을 선보였고 인공지능(AI) 기반 가격 전략도 써 봤지만 역부족. 결국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 월마트와 홈플러스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규제 환경이다. 한국은 2012년부터 대형마트에 월 2회 의무휴업, 새벽배송 불허 등 족쇄를 채웠다. 대형마트를 ‘유통 공룡’으로 낙인찍고 서식지를 제한했다. 10년 넘는 영업규제, 코로나발 온라인 격변, 규제 없이 성장한 쿠팡의 맹공. 이 삼각 파고에 홈플러스는 무너졌다. 홈플러스의 고난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좀더 따져 볼 문제다. 분명한 사실은 당장 소비자들이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온라인 배송 격오지에서는 생필품 접근성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가족이 매장을 누비는 ‘아날로그 풍경’도 사라진다. 기업의 흥망은 시장의 냉혹한 저울을 피할 수 없겠지만 지역 인프라와 소비문화의 다양성까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공생의 가치를 돌아보게 된다. 홍희경 논설위원
  • [길섶에서] 까치 둥지

    [길섶에서] 까치 둥지

    지난 2월, 우연히 나뭇가지 사이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까치 한 쌍을 보았다. 부리 가득 마른 나뭇가지를 물어 오고 그것을 가지 사이에 끼워 넣으며 틀을 다지는 모습이다. 삭풍에 둥지가 흔들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둥지를 쌓아 갔다. 이들이 처음부터 짝이었을까. 까치는 일부일처제 성향이 강한 새다. 짝짓기에 앞서 짧지 않은 구애 과정이 있었을 터. 서로의 울음소리를 듣고, 깃털을 부풀려 건강을 과시하고, 먹이를 나누며 신뢰를 쌓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둥지 속에서 작은 생명이 신비를 간직한 채 온기를 머금고 있을지도 모른다. 까치는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헌신이 시작된다. 어쩐지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만나 신뢰를 쌓으며 평생을 함께할 인연을 찾지만 요즘은 결혼을 망설이고 출산을 두려워하는 시대다. 최근 길을 가면서 완성된 까치 둥지를 올려다보았다. 그 안에 있을 작은 알을 떠올리며 바람에도 끄떡없는 둥지처럼 인간 세상에도 생명이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오일만 논설위원
  • 본지 홍희경 논설위원·이은주·김성은 기자 법조언론인상 수상

    본지 홍희경 논설위원·이은주·김성은 기자 법조언론인상 수상

    법조언론인클럽은 ‘2024 법조언론인상 기획보도’ 부문 수상자로 ‘빌런 오피스: 나는 오늘도 출근이 괴롭다’를 보도한 서울신문 홍희경 논설위원(왼쪽), 이은주(가운데)·김성은(오른쪽) 기자를 선정했다고 5일 밝혔다. 이 기획은 지난해 시행 5주년을 맞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실효성과 한계를 심층 보도해 지방자치단체 조례 제정과 같은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의 법조인’으로는 서울서부지검 범죄수익환수팀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 상속세 23년 만의 개편 논의… 중산층·기업 만족하는 묘수 찾나[홍희경의 탐구]

    상속세 23년 만의 개편 논의… 중산층·기업 만족하는 묘수 찾나[홍희경의 탐구]

    중산층 상속세 문제점부동산 급등, 중산층까지 과세 확대같은 액수 상속, 인원수에 세액 격차뜻밖의 사망 땐 증여세보다 큰 부담세 부담 가중에 우는 기업최대주주 주식상속 때 과세액 할증비상장사 활용 등 절세 컨설팅 필요수사 우려해 가업 승계 포기하기도여야의 ‘상속세 정치학’정부 법안 野 반대에 막혀 작년 부결민주, 중산층 부동산 상속세에 집중세수 감소 불 보듯, 기업 부담은 여전 #1. 상속세는 사회적 세금 상속세가 부자의 세금이란 인식은 더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다. 국세청 통계에서 2005년 전체 사망자의 2% 미만이던 상속자 과세 대상은 2022년 5%를 넘어섰다. 2000년 이후 과세표준과 세율 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부동산 가격과 자산 가치 급등으로 중산층까지 과세 대상이 확대됐다. 정부는 지난해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자녀 공제를 대폭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부결됐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현행 세율 구조는 유지하되 배우자 상속공제와 일괄공제를 대폭 상향하는 대안을 내놓아 논의 중이다. 해방 후 80년 역사에서 50%가 높은 수치는 아니었다. 한국전쟁 직후엔 상속세의 최고 한계세율이 90%에 달했는데, 부자들이 주로 일본인 적산(敵産·적국 재산)을 기반으로 부를 일궜다고 보고, 이들의 특혜를 회수해 빈 재정을 채워야 한다는 인식이 작동한 여파다.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초입인 1960년대 민간의 경제 참여가 절실해지면서 최고 세율이 30%로 낮아졌다가 석유파동 시기에 다시 75%까지 치솟았다. 이후 세계화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민간 주도 성장이 필요해질 때 상속세율은 낮아졌다. 주로 가족 간 돈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세금. 가장 사적인 세금일 것 같지만 상속세엔 이처럼 한 사회의 성장 전략과 부의 재분배 철학, 국제화 지표가 때마다 녹아 들어 있었다. #2. 해외 상속세? 없는데 있습니다 23년 만의 개편 논의. 재계는 지난해 시작된 상속세 개편 논의를 반기는 분위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최고 상속세율(50%)이 일본(55%) 다음으로 높다는 주장을 이어 온 터다. 이 통계는 진실이지만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세율이 낮거나 없는 국가들도 다른 방식으로 소득세나 자본취득세 등을 통해 상속에 과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연방유산세의 기본공제액은 1290만 달러(약 170억원)에 달해 미국인 대부분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신 상속 자산을 매각할 때 발생하는 차익에 최대 20%의 자본이득세를 부과한다. 캐나다는 사망자가 사망 직전에 모든 자산을 시장가격으로 매각했다고 간주, 취득가액과의 차액에 소득세를 부과한다. 호주는 사망 시점에 바로 과세하지 않는 대신 상속인이 나중에 자산을 매각할 때 원래 소유자의 취득가액을 기준으로 자본이득세를 부과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해외와 비교되는 한국 상속세의 특이점은 높은 세율이 아니라 사망 시점에 과세를 집중시키는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산세 방식을 고수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유산세는 상속받을 인원이나 개인 상황과 무관하게 고인의 재산 총액에 세금을 매겨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와 다르게 유산취득세 방식이라고 상속자 입장에서 실제로 받는 금액에 개별적으로 과세하는 방식이 있다. 유산세 방식으로 세금을 부과하면 같은 액수를 상속받게 되더라도 사람마다 내는 세금에 격차가 발생하는 문제가 생긴다. 즉 100억원의 상속재산을 남겼을 때 현행 제도의 각종 공제를 제하고 정해진 세율대로 계산하면 약 38억원의 세금이 부과된다. 그런데 누군가 남긴 100억원을 100명이 균등하게 상속받는다면 1인당 3800만원씩을 세금으로 내고 6200만원을 세후 받게 된다. 반면 고인이 1억원을 남겼고 이것을 총 1명이 상속받는 경우라면 기본공제(5억원)보다 적은 1억원에 과세가 되지 않기 때문에 상속세 납부 의무는 사라진다. 이때 상속인은 1억원 전액을 받는다. #3. ‘갑작스러운 죽음’ 페널티가 되다 유산세는 부의 재분배 기능이 강하지만, 유산취득세는 상속인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 더 정교한 과세가 가능하다. 유산세 체계로는 같은 금액을 상속받아도 고인이 남긴 재산 규모와 상속 여건에 따라 큰 세금 격차가 발생한다. 이 밖에도 현실에선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서울에 15억원 하는 아파트를 남편 단독명의로 보유한 부부를 생각해 보자.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면 가족들은 배우자 공제 5억원과 일괄공제 5억원 등을 적용받는다. 그러나 15억원 아파트를 부부가 공동명의로 보유했다면 남편 사망 시 상속분은 7억 5000만원으로, 배우자 공제와 일괄공제로 모두 커버돼 상속세가 발생하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모은 돈으로 집을 샀더라도 명의에 따라 세금 격차가 생기는 불합리가 있다. 생전 소득세나 취득세를 납부한 재산에 다시 과세한다는 이중과세 논란도 지속된다. 부모가 수십 년간 소득세를 내고 모은 자산에 최대 50%의 상속세가 다시 부과되기 때문이다. 상속세 지지자들은 이를 상속인의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로 이중과세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상속세와 다르게 우리나라 증여세는 유산취득세 방식을 취한다. 부모가 생전에 자산을 증여하면 상속으로 잔여 재산을 물려받아도 증여세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를 계획하지 못했다면 더 큰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금융권에서는 이를 활용한 상속·증여 상담 마케팅을 펴고 있다. 애초에 ‘상속받은 만큼 세금 낸다’는 식으로 제도가 설계됐다면 불필요한 마케팅이다. 더욱이 고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경우 증여 등 준비가 덜 돼 있을 여지가 큰데, 가족이 갑자기 사망한 것도 한스러운데 여기에 더해 마치 ‘사망 범칙금’을 받은 듯한 억울함이 생기는 게 현행 체계다. #4. 상속세 대응=범행? 수사당국의 시선 기업 얘기로 하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중산층이 자산 대부분을 부동산으로 쥐었다면, 기업을 일궈 낸 큰 부자들은 주식 자산 비중이 높다. 그런데 현행 상속세는 최대주주가 기업 주식을 상속받을 때 경영권 프리미엄을 반영해 과세가액을 할증한다. 지분을 팔거나 주식담보 대출을 받지 않고선 세금 납부가 어려운 지경이 되다 보니 기업들은 상속세를 낮출 수 있는 지주회사 설립, 비상장사 주식 활용, 계열사 간 합병 등의 경영 컨설팅을 받아야 한다. 나아가 수사당국은 최대주주가 연루된 횡령, 배임 사건 등을 수사할 때 상속세를 줄이거나 세금 재원을 마련하는 데에서 범행 동기를 찾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기업 경영을 이어 가기 위한 상속세 부담이 워낙 크니 범행동기가 될 것 같다는 상식적 동의에 기댄 수사다. 항소심까지 무죄가 나온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소·중견 기업에선 창업주 사망 시 현금 유동성 부족으로 주식 매각이나 회사와의 금전거래에 의존하거나 아예 기업승계를 포기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사망자 재산을 결산하듯 거액을 단기간에 부과하는 유산세 방식 상속세가 기업 가치를 하락시키는 악순환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상속세 개편이 단순히 세수의 문제를 넘어 기업 지배구조와 경영 투명성, 나아가 국가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우려는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됐다. #5. 종부세 표심, 상속세 표심에선 바뀔까 최근 들어 한국의 상속세는 이처럼 두 가지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하나는 중산층의 부동산 상속, 다른 하나는 기업의 지분 상속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부담이다. 지난해 당정은 이 두 문제 모두를 해결하자며 상속세법 개정안을 추진했으나 국회에서 부결됐다. 민주당은 두 가지 해결법 중 기업 지분 상속에 대한 부담 완화를 ‘초부자 감세’로 규정하고 중산층의 부동산 상속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조기 대선 가능성 속에서 민주당이 표를 셈하는 정치공학적 계산에 기반해 이 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 표 차이가 24만여표였고, 종합부동산세 등의 영향력 안에 든 중산층에서 석패했다는 분석 때문이다. 상속세 공제 혜택이 예상되는 수도권 아파트 밀집 지역 표심을 잡는 것은 민주당이 표심을 잡아야 할 이른바 ‘산토끼’들이 모여 있는 뒷산 어딘가를 공략하는 전략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산층에만 주력하는 ‘상속세 정치학’은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전략만으로는 상속세에서 덜 걷힐 세금을 충당해서 걷을 세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히 공제액을 늘리는 방식은 세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기업 지분 상속에 대한 부담을 줄이거나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상속세제를 개편한다면 기업들이 ‘상속세와 승계에 발목이 잡힌 경영’에서 빠져나올 여지가 생긴다. 장기적으로 법인세, 소득세 등 다른 세원이 확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역의 정치인가, 국가의 정치인가. 중산층 세 부담이라는 나무부터 봐야 하나, 상속세 변화에 따른 경제효과라는 숲까지 봐야 하나. 적산 기업가를 표적 삼을 때는 90%였다가 경제개발을 위해선 30%로 낮아졌던 역사처럼 이번 상속세 개편의 결론 역시 한국 경제 방향을 보여 주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홍희경 논설위원
  • “트럼프 연설, 가장 길고 집요하게 당파적”

    해외 언론들은 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첫 의회 연설에 대해 자화자찬과 지지층 결집에만 집착한 ‘당파적 연설’이었다고 평가했다. AP통신은 “대통령의 의회 연설은 보통 국력을 기르기 위한 통합을 요청하는 시간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은 달랐다”며 “대선 승리에 대한 자축과 민주당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진 이날 그의 연설은 집요하게 당파적이었다”고 분석했다. CNN방송은 1시간 40분에 가까운 이날 연설은 1964년 이후 가장 길었다고 소개하면서 “또한 가장 당파적이고, 가장 통합과 거리가 먼 연설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더는 출마할 수 없음에도 양극화의 틈을 좁히려 시도하기보다는 ‘영구적인 선거 모드’를 강조했다”고 해설했다. 뉴욕타임스(NYT)의 논설위원 데이비드 파이어스톤은 칼럼에서 “왜곡과 가짜 정보, 노골적인 거짓말이 넘친 대통령의 연설은 근 수십년 사이 가장 냉담한 야당의 반응을 끌어냈다”며 “이런 연설에 저항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의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양당 의원 다수가 미국의 최대 위협이 중국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며 “펜타닐 유입 단속을 언급할 때조차 멕시코와 캐나다에 초점을 맞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재임기와 달리 2기 행정부에서는 관세 부과를 제외하면 초기 정책 우선순위에서 중국이 제외돼 있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5일 “무역은 더이상 글로벌 성장을 이끄는 엔진이 아니다”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로 많은 국가의 성장 전망이 약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 [씨줄날줄] 펜디와 매듭

    [씨줄날줄] 펜디와 매듭

    한반도에서 매듭은 당연히 선사시대부터 쓰였다. 구석기시대 돌도끼를 묶는 데 사용한 흔적이 있고 신석기시대 토기엔 노끈을 엮어 두드린 문양이 선명하다. 서양에서도 ‘헤라클레스의 매듭’이 BC 3세기 공예품으로 전한다. 이렇게 보면 매듭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엇비슷한 시기 발생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선 일찌감치 아름다운 매듭이 안악3호분에서 보인다. 안악3호분은 북한학자들이 1949년 발굴조사한 고구려 벽화 무덤이다. 2004년에는 다른 무덤과 함께 ‘고구려 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 무덤에는 서기 357년에 해당하는 중국 연호와 고구려에 망명한 중국 무장 동수(冬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북한학계는 이 이름이 무덤 주인이 아닌 지휘관인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 적혀 있는 만큼 동수는 묘지기에 불과하다고 일관되게 본다. 무덤의 주인은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안악3호분이 중국 매장 문화가 고구려에 영향을 미친 초기 양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 해도 벽화에 보이는 모습이 모두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무엇보다 백제금동대항로 뚜껑의 악사가 연주하는 비파의 일종인 완함에서 늘어진 장식은 분명 매듭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있는 반가사유상에서도 비단을 엮은 매듭인 광다회를 볼 수 있다. 매듭이 이미 삼국시대에 크게 발전한 상태였음을 보여 준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가 한국의 매듭 장인과 협업한 ‘바게트백’을 내놓자 중국 네티즌이 “문화 도용”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중국 언론은 “매듭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민속 예술로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인기를 얻은 장식용 수공예품”이라고도 설명했다. 그렇다면 당나라와 같은 시기 한반도에선 매듭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엔 무슨 딴소리를 할지 궁금하다.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문화의 이치를 저들이 이해하기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 [길섶에서] 알사탕

    [길섶에서] 알사탕

    문방구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알사탕. 동동이가 그것을 입에 넣자 숨겨진 마음의 소리들이 들린다. 이를테면 잔소리만 해대던 아빠였는데, 속마음엔 질책은 하나 없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세 글자만 가득했다. 놀란 동동이는 아빠를 뒤에서 왈칵 껴안는다. 제97회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알사탕’. 수상엔 실패했지만 따뜻한 이야기가 세계인들에게 알려졌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백희나 작가는 데뷔작 ‘구름빵’에 대한 후회가 이 작품에 담겼다고 고백한 적 있다. 저작권 논란이 컸던 ‘구름빵’이라 ‘알사탕’을 쓸 땐 법적 계약에 만전을 기했다는 말인가 했는데 작가의 회한은 다른 데 있었다. 아빠, 엄마, 누나, 남동생의 4인 가족으로 ‘구름빵’을 그려 소외된 이들에게 허탈감을 줬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알사탕’에는 엄마가 나오지 않는다. 엄마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혹은 바쁠 수도 있다. 아빠 한 명으로도 넘치는 마음.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감정들은 고체가 아니라 어떤 틀에도 잘 맞춰 적응하는 액체와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 [씨줄날줄] 젤렌스키와 드레스코드

    [씨줄날줄] 젤렌스키와 드레스코드

    서울 은평구에 있는 충암고등학교는 지난해 12월 6일 ‘등교 복장 임시 자율화’라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윤석열 대통령,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등 12·3 비상계엄 핵심 인물들이 충암고 졸업생으로 알려지면서 재학생들이 피해를 볼까 우려해서다. 학교는 ‘학생 본분에 어긋나는 형태와 문양을 한 복장 착용은 계속 금지한다’고 덧붙였다. 교복 대신 ‘학생 본분에 맞는 복장’이라는 드레스코드를 적용한 것이다. 드레스코드는 때와 장소, 상황에 맞게 입어야 하는 복장을 말한다. 학생은 학교에서 교복을, 의사는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는다. 특정 행사가 열리면 참석자들에게 드레스코드가 안내되기도 한다. 드레스코드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류호정 전 정의당 의원이 2020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입은 분홍 원피스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공적 인물에게 복장은 그 자체로 자신을 알리는 도구다. 지난달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도 드레스코드가 논란이 됐다. 한 기자가 젤렌스키에게 “왜 정장(suit)을 입지 않았느냐? 정장이 있기는 하냐”고 물었다. 젤렌스키는 2022년 러시아의 침공 이후 군인들과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공식석상에서 어두운 카키색 군복 스타일을 고수해 왔다.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측은 군복을 입지 말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악관 입구에서 젤렌스키를 맞이한 트럼프는 “오늘 완전히 차려입었네”라고 했다. 젤렌스키는 검정 긴팔 셔츠에 작업복 스타일의 검정 카고바지를 입었다. 다소 격식은 차렸지만 결국 정장은 아니었다. 젤렌스키가 정장을 입었더라면 정상회담의 결과가 달랐을까. 회담은 러시아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설전으로 끝났고 젤렌스키는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났다. 미국의 생각과 다르면 어떤 것도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이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 [길섶에서] 불면증

    [길섶에서] 불면증

    이 글의 제목을 보고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주변에 불면증을 호소하는 지인들이 많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놀란 가슴도 한몫하는 것 같다. 평소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데 계엄·탄핵 사태가 지속되면서 잠자기 전까지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본다. 휴대폰이나 TV의 ‘노예’가 돼 눈이 침침해지고 잠을 설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국내 불면증 환자는 1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성인 기준 하루 7~8시간을 자야 건강에 좋다는 게 의학계의 설명이다. 수년째 불면증에 시달려 온 친구는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이불·베개 등을 장만하고 수면에 좋다는 음식을 골라 먹는다. 멜라토닌 등 수면제도 챙겨 먹지만 수면 장애가 해소되지 않아 고민이 컸다. 그래서 ‘꿀잠’을 잘 수 있는 ‘꿀팁’을 알려 줬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잠자기 2시간쯤 전부터 휴대폰이나 TV 멀리하기, 낮에 햇볕을 쬐며 30분 이상 걷기, 수면 1시간쯤 전 반신욕하기 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스트레스를 줄여 마음이 편안해지면 잠도 더 잘 오지 않을까.
  • [서울광장] 90년대 학번계급론

    [서울광장] 90년대 학번계급론

    서태지가 열고 IMF가 닫은 1990년대.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며 파격 패션을 한 채 “기분이 조크든요”라고 인터뷰하던 신세대의 시대였다. 문화혁명의 서막, 자유와 개성의 시대로 기억되는 시기인데 정작 90년대 학번들의 감상은 조금 다르다. 철들기 시작했으나 어른이 되기 전의 눈높이로 본 90년대는 창조의 가짓수만큼 소멸이 잦은 시대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 1997년 IMF 외환위기까지. “난 알아요”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알던 것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586으로 통칭되는 60년대생, 80년대 학번들에게 ‘86’이란 숫자는 그 자체로 특권이었다. 대학 진학률이 낮고 남학생이 다수였기에 대졸자란 지위가 엘리트 배지가 됐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며 대학은 지위재 기능을 잃어 갔다. 대학 진학률은 1990년 33.2%에서 1999년 66.6%로 급증했다. ‘잘 살아보세’의 개발도상 시대를 지나 ‘다 바꿔보자’는 필요가 분출하며 진학률 외 다른 사회변화도 빨랐다. 그래서 90년대는 해마다 달랐고, 학번은 나이 지표를 넘어 시대적 좌표가 됐다. 한 해 수능을 두 번 본 94학번, IMF 때 졸업한 95학번, 비정규직 시대 초입에 섰던 99학번까지 스스로를 시대의 실험대상이자 희생양으로 여기는 정서가 90년대 대학생들의 특징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이전 세대보다 풍요롭게 성장했고 이후 세대보다 취업과 자산 증식은 수월했다. 위처럼 비비기엔 자존심이, 아래처럼 개기기엔 현실이 용납하지 않는 전형적인 낀 세대의 모습이 그래서 형성됐다. 출생 연도나 학번이 나뉘는 1년 사이에도 변화는 대단했다. 서태지, 박진영, 방시혁으로 대표되는 72년생은 X세대란 호칭에 가장 자부심을 보일 만한 이들이다. K팝의 기틀을 다지며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재해석해 한국 음악을 세계 보편 문화로 승화시켰다. 기존 가요의 정서를 지배하던 ‘뽕’의 종언이기도 했다. 비디오 대여점, 공중전화, 디스켓처럼 장르의 종식이 드물지 않았던 90년대. 한 시대의 끝물 현상과 맞물리는 학번들이 유독 많다. 이를테면 서장훈 나이인 74년생, 93학번은 IMF 직후 저렴해진 부동산으로 ‘건물주의 꿈’이 가능했던 자산버블의 마지막을 경험했다. ‘응답하라 1997’의 주인공인 78년생, 97학번은 평생직장이란 개념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다. 신입생 때 IMF를 겪은 그들은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적 성취를 중시하는 새 시대의 첫 주자가 됐다. 졸업하면서 IMF를 겪은 76년생, 연예계 용띠클럽을 구성하기도 한 이들에게선 성실함이 덕목인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가 보인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나이로 주목받는 73년생, 92학번은 어떨까. ‘투머치 토커’ 박찬호가 이 나이대 가장 유명인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로 이들이 훈계를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훈계가 가능한 건 92학번의 선험적 자질보다는 후천적 환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IMF 직격탄을 맞기 이전 후배들은 아직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의 경로를 모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IMF 이후 개인주의가 만연해지면서 선후배 간 위계질서는 흐릿해졌고, 요즘 시대 훈계는 꼰대질로 폄하되며 자제해야 할 일이 된 지 오래다. 그렇게 아주 많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90년대 학번은 정치권에선 이방인이었고, 이는 한국 정치 의제의 빈곤으로 이어졌다. 80년대를 그린 영화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시위 참여와 구류살이가 연인들의 이별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오랜 기간 정치 의제와 연결됐다. 하지만 영화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그려낸 취업 걱정과 연애의 어려움, 전통적 가족관으로 인한 고민과 같은 90년대 청춘들의 일상 속 고민들은 정치적으로 의제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92학번 한동훈이 정치에서도 성공하려면 수많은 변화에 응전해야 했던 90년대 젊은 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을 복기해야 할 것이다. ‘586은 거르고’식의 갈등 정치에만 머문다면, 결국 X세대도 그저 그렇게 늙었음을 확인시키는 데 그칠 것이다. 한 시대의 끝과 시작,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는 정치를 보고 싶다. 홍희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상속세 과표

    [씨줄날줄] 상속세 과표

    모녀와 형제의 대립으로 화제가 됐던 한미약품. 지난달 13일 모친(송영숙 회장)이 지주사 단독대표로 복귀하면서 1년 만에 끝난 분쟁의 씨앗은 상속세였다. 창업주인 임성기 회장이 2020년 사망한 뒤 유족들은 상속세 5400억원을 내야 한다. 유족들은 상속세를 5년간 6차례 나눠 내기로 했다. 재원 마련을 위해 모녀가 석유화학기업인 OCI그룹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상속세 부과 방식은 유산총액 기준인 유산세와 상속인이 각자 받는 금액 기준인 유산취득세가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영국 등이 유산세 방식이다. 일본, 프랑스, 독일 등 더 많은 국가들이 유산취득세를 적용한다. 여기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세율이 높아지는 계단식 누진세율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산총액 기준이며 연대납부 의무도 있다. 상속인이 자신 몫의 상속세를 내지 않으면 다른 상속인에게 징수한다. 상속인들끼리, 상속인과 국세청 사이에 종종 분쟁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상속인 입장에서는 받는 재산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니 억울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과세 대상 상속재산이 10억원이라면 세율이 30%다. 유족이 배우자와 자녀 1명이고 법정상속분에 따라 1.5(6억원)대1(4억원) 비율로 상속받았다면 자녀는 상속재산이 5억원이 안 돼 세율이 20%로 낮아진다. 과세표준(과표) 구간의 ‘마법’이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최저세율(10%)이 적용되는 과표구간은 1억원 이하에서 2억원 이하로 높이는 세법개정안을 내놨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반대로 무산됐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5~27일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에게 물었더니 상속 최고세율 40% 인하에 69%가 찬성했다. 부과 방식은 유산취득세 선호가 53%로 현행 유산세(27%)보다 높았다. 행정편의보다는 공정이 중요한 시대. 세정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전경하 논설위원
  • [길섶에서] 저속노화 식단

    [길섶에서] 저속노화 식단

    나이가 나이다 보니 또래 친구와 지인들 모임에서 노화를 주제로 한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흰머리가 많아졌다, 노안으로 휴대전화 보기가 불편해졌다는 푸념과 한탄이 어느새 고정 레퍼토리가 돼 버렸다. 콜레스테롤과 혈당 수치 증가를 걱정하는 이들도 하나둘 늘어 간다. 한국인 평균 기대수명이 상승하면서 남 일 같던 ‘100세 인생’이 나의 미래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 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한 자기 관리가 필수인 시대다. 흰머리와 노안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식단으로 조절할 수 있는 콜레스테롤과 혈당 관리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한 까닭이다. 백미, 밀가루 같은 정제 탄수화물을 줄이고 채소 등 식이섬유와 단백질, 건강한 지방을 늘리는 게 노화 속도를 늦추는 ‘저속노화’ 식단의 핵심. 익숙하지 않은 식습관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두 주 정도 지나니 저절로 샐러드에 먼저 손이 가게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소식. 평소보다 적게 먹는데도 포만감이 생기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라는 명언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이순녀 수석논설위원
  • [씨줄날줄] 나이롱환자

    [씨줄날줄] 나이롱환자

    얼마 전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유튜브 방송에서 한 교통사고 보험처리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됐다. 사고가 났을 때 내 잘못이 아니고 상대방 과실이면 한방병원에 가라는 얘기를 인터넷에서 봤다는 내용이었다. 운전면허를 딴 근황에 대해 대화하다가 나온 말이다. 그는 곧바로 “나쁜 사례이기 때문에 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지만 한의사들 사이에서 한방병원을 매도하는 것 아니냐며 불쾌감을 나타내는 등 온라인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가벼운 교통사고에도 입원하는 속칭 ‘나이롱환자’(가짜 환자)를 과잉 진료했다가 당국에 적발된 한방병원 사례가 드물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경미한 접촉사고라도 장기적으로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 눈에 보이는 상처나 통증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나이롱환자 취급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합의금을 더 받기 위해 ‘뒷목’부터 잡고 병원에 드러눕는 관행은 바로잡아야 한다. 과잉 진료나 보험 사기를 부추기고, 국민건강보험 재정 누수까지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내년 1월부터 교통사고 경상환자는 보험사로부터 합의금을 받기 어려워진다. 정부가 그동안 경상환자(상해등급 12~14급)에게도 지급하던 ‘향후치료비’를 중상환자(1~11급)에게만 주는 방안을 마련했다. 향후치료비는 장래에 예상되는 추가 치료 비용을 보험사가 미리 지급하는 것이다. 제도적 근거와 기준이 없다 보니 사안에 따라 고무줄 잣대가 적용돼 나이롱환자에게 과도하게 지급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자동차보험뿐 아니라 산업재해보험 부정수급에도 나이롱환자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15년 넘게 산재 보상금을 받은 사람이 혼자서 걸어 다니다 들통난 사례도 있다. 나이롱은 나일론의 일본식 발음이다. 한때 ‘기적의 섬유’로 불렸지만 한국에선 가짜, 사이비를 뜻하는 말이 돼 버린 나이롱. 부도덕한 환자도, 시대착오적인 단어도 이제는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순녀 수석논설위원
  • [길섶에서] ‘4세 고시’

    [길섶에서] ‘4세 고시’

    저녁 자리에서 나온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네 살 때부터 좋은 영어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선행학습을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7세 고시는 좋은 영어학원에 들어가려는 시험이다. 손가락 근육 등 신체 발육이 덜 된 아이가 필기구를 잡고 시험을 준비한다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자, 지인은 핸드폰을 꺼내 네 살짜리 조카가 적었다는 방 탈출 퀴즈 문제를 보여 준다. 어른 글씨체보다 더 반듯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카보다 한 살 많은 아이는 어른보다 영어를 잘해 자신도 놀랐다고 했다. 초중고생 열 명 중 여덟 명이 사교육을 받는다지만 유아기부터 입시 경쟁이라니 술맛이 쓰다. 정부에서 사교육 감소를 외쳤지만, 더 커졌다. 2018년 18조원이던 사교육비 규모가 2023년에는 27조원으로 불어났다. 현대자동차의 한 해 영업이익을 넘는 규모라니 사교육 종사자는 즐거운지 모르겠으나 가계 주름살은 그만큼 더 깊어졌다. 팍팍한 살림살이에 결혼해도 출산을 주저하는 부부들이 많다. 얼마나 더 많은 ‘고시’를 치러야 사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날까. 박현갑 논설위원
  • [서울광장] 계엄이 촉발한 외교안보부처 개혁론

    [서울광장] 계엄이 촉발한 외교안보부처 개혁론

    지난해 8월 윤석열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외교안보 라인 교체 인사를 했다. 김용현 대통령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으로,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국가안보실장으로,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없던 자리인 외교안보특별보좌관을 만들어 앉혔다. 이른바 ‘돌려막기 인사’처럼 보였지만 신 실장이 장관을 한 지 10개월 만에, 장 실장은 실장을 한 지 7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인사라 외교안보 부처 안팎에서 의아해했다. 일각에서는 ‘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으로 승진 기용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대통령실은 당시 “외교와 국방의 최강팀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특정인을 앉히기 위해 인사가 있었다는 보도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흐른 지난해 12월 3일에서야 당시 인사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윤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봄쯤부터 경호처장으로 2년간 지근거리에 있던 김 장관과 비상계엄을 모의했던 것이다. ‘내란 수괴’ 윤 대통령은 김 장관과의 계엄 합작품에 앞서 군을 장악해야 했기에 충암고 1년 선배인 김 장관을 국방부 수장으로 보내 충암고, 육사 출신 ‘김용현 라인’의 군부 요직들을 움직였다. 충암파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부하 성추행으로 옷을 벗은 ‘버거보살’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이 동원됐다. 그러나 정작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은 신 실장과 장 특보,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조태열 외교부 장관 등은 계엄에 대해 모르다가 계엄 전후 국무회의 등에서 뒤늦게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촌극이 벌어졌다. 신 실장은 최근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지난해 3월 말쯤 윤 대통령이 안가 만찬에서 계엄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으나 ‘비상한 조치’를 언급해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전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반헌법적 계엄을 선포해 국회와 사법기관 등의 무력화를 시도한 ‘내란 사태’에서 국방부와 군 정보기관은 ‘대통령의 사병’으로 전락했다. 국가안보실과 외교부는 역할을 상실했고 국정원은 우왕좌왕했다. 외교안보 부처와 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계엄 후 중국의 ‘부정선거 개입’ 주장 등 혐중 정서가 최고조에 이르는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악화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전쟁에 동맹 흔들기 등 대외적 악재까지 덮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와 외교부, 국정원 출신 더불어민주당 의원 3명이 이달 초 주최한 ‘계엄 이후 외교·국방·정보기관 개혁과제’ 토론회가 눈길을 끌었다. 전문가들은 계엄 이후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고 트럼프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 쇄신과 인사 개편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계엄 사태로 ‘건전한 민군 관계 확립’이라는 과제가 다시 부각됐다며, 군부 쿠데타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군의 무력이 결합할 경우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특히 계엄의 핵심 역할을 한 방첩사령부에 대해 ‘해체 수준’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사관학교 출신 군 상층부 독점을 막고 군의 정치화를 극복하기 위한 균형적인 인사 정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계엄 이후 수뇌부 간 갈등을 드러낸 국정원과 정보사령부 등 군 정보기관도 국민의 안위에 초점을 맞춘 정보활동 목표를 재정립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상호 견제와 감시를 통해 계엄과 같은 반헌법적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방부와 국가안보실, 외교부의 경우 정권 교체 시 잦은 인사로 인해 정책 연속성이 떨어지고 국내 정치에 종속되는 문제를 극복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초당파적 국익 중심의 실용주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계엄에 앞서 돌려막기식 인사를 한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의 입맛에 맞는 충성파를 전진배치함으로써 ‘국가 안보’가 아니라 ‘정권 안보’를 위한 권위주의 정권의 전형적 행태를 보여 줬다. 이런 후진적 사태가 다시는 벌어지면 안 된다. 차제에 국가안보실 기능을 강화해 초당적 정책을 운용하고 트럼프 시대에 맞춰 미 무역대표부(USTR) 같은 독립된 경제안보조직을 신설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벌써 소문으로 도는 조기 대선 후 ‘물갈이 코드 인사’는 지양해야 한다. 김미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72억원짜리 영주권

    [씨줄날줄] 72억원짜리 영주권

    “미국에 살고 싶으세요? 72억원만 내세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 영주권을 주는 ‘골드카드’ 장사에 나섰다. 가격은 무려 500만 달러(약 71억 6500만원). 그는 어제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최소 90만 달러(13억원)를 투자하면 영주권을 주는 기존 투자이민(EB-5) 제도를 없애고 2주쯤 뒤 골드카드를 골자로 한 새 비자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미 영주권을 받으려면 기존 비용의 5.5배 이상을 내라는 것이다. 부동산 재벌 출신답게 트럼프 대통령은 ‘장사꾼 본능’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취임 후 불법 이민자 추방 작전을 노골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더니 전 세계 부자들을 상대로 대놓고 영주권 판매에 나선 셈이다. 골드카드엔 미 영주권을 의미하는 ‘그린카드’에 시민권 취득까지 더해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EB-5 제도에 대해 “왜 우리가 공짜로 영주권을 나눠주느냐”며 ‘사기’라고 비판해 왔다. EB-5 연장이 아니라 아예 골드카드로 바꿔 막대한 돈벌이로 정부 부채를 갚겠다는 심산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대하는 골드카드 판매 규모는 약 100만장, 5조 달러(7166조원)쯤이다. 미 국토안보부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연평균 100만~110만명이 그린카드를 받는다. 한국은 세계 15위권이다. 이 가운데 EB-5 비자는 1년에 1만~1만 4000개가 발급돼 각국에 7%씩 할당된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EB-5 비자를 받은 한국인은 세계 7위 규모. 인터넷 카페 등에서는 동맹국 미국으로의 투자이민은 먼 꿈이 됐다는 푸념들이 쏟아진다. “골드카드는 러시아 부호들의 몫”이라는 씁쓸한 냉소도 들린다. 격세지감 그 자체다. 중국은 한국 대상 무비자 정책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중국을 방문한 여행객은 64만 7900명. 전년 같은 기간보다 61%나 늘었다. 동맹국인 미국은 비자 장사로 장벽을 높이고, 중국은 문을 더 활짝 연다.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 [길섶에서] 심야의 일본인 관광객

    [길섶에서] 심야의 일본인 관광객

    며칠 전 밤 11시가 넘은 시간. 서울 외곽의 한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3명이 버스 노선도를 보며 일본말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나를 보더니 다가와 더듬더듬 한국말로 말을 건넸다. 알아듣기 어려워 서로 짧은 영어를 동원했지만 소통이 여의치 않았다. 일행이 내민 스마트폰의 지도를 보고는 이들이 도심의 S사 본관에 내려 숙소를 가려다가 반대 방향의 버스를 잘못 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지난해 여름 일본 여행길에 한 일본인 청년에게 길을 물었을 때 끝까지 앞장서며 방향을 일러준 일이 떠올랐다. 반대편 버스 정류장까지 안내하며 노선버스 번호와 하차 위치를 설명해 준 이유다. 통역은 여성들이 소지한 스마트폰의 번역기가 담당했다. 여성들은 쌀쌀한 밤공기에도 웃음과 농담을 잊지 않았다. 밤길을 다녀도 크게 걱정할 것 없는 나라여서일까. 서울은 세계 최대 여행 플랫폼 ‘트립 어드바이저’가 뽑은 ‘나홀로 여행하기 좋은 도시’ 1위에 올랐다. 한국의 안전 이미지가 더 높아져 누구든 마음 편히 오가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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