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논설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 분단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 날씨
    2026-07-2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2,954
  • [길섶에서] 배신감/김성곤 논설위원

    모든 것이 습관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승용차로 출퇴근을 하다가 1년째 지하철로 출퇴근 중이다. 한때는 출퇴근 때 운전하며 차안에서 보내는 내 시간이 그리 소중하더니, 지금은 출근 때 지하철에서 보내는 45분여가 더없이 중요한 시간이 됐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오늘은 뭘 쓸 것인지 구상도 한다. 게다가 손이 자유로워 지인들과 소셜미디어 소통도 하니 훨씬 긴요하다. 지하철을 타면 아예 빈자리는 생각지 않고, 노약자석 옆 벽에 기대어서 온다. 이것저것 신경 안 쓰고 속 편한 자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노약자석에 앉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에 꽁꽁 싸맨 어르신부터 분홍표식을 무릎에 놓고 얌전히 앉아 있는 임신부…. 때론 젊은 여성이 앉아서 열심히 화장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30대 남성이 아주 불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머리에 손을 짚기도 한다. 그래, 몸이 아픈가보다. 행여 발이 부딪힐세라 떨어져 선다. 그런데 열심히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보는 것 같다. “아닌가?” 공교롭게도 광화문에서 같이 내린다. 그런데 내리자마자 혼잡을 피해서 먼저 광화문역 계단을 쏜살같이 달려 올라간다. 나는 지금껏 광화문역 교보문고 쪽 28계단을 그렇게 빨리 올라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sunggone@seoul.co.kr
  • [씨줄날줄] 합숙 담판/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합숙 담판/황성기 논설위원

    “우리는 무기를 갖추었기 때문에 서로 불신하는 게 아니라, 서로 불신하기 때문에 무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1985년 11월 19일 스위스 제네바의 호숫가 성(城)인 ‘플뢰르도’에서 이뤄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첫 만남은 레이건의 이런 말로 시작됐다. 두 정상은 첫날 미국이 마련한 플뢰르도 회담에 이어 이틀째 주제네바 소련 대사관에서 회담을 이어 갔다. 2박3일 회담에서 군축에 대한 입장차가 커 두 정상은 만남 그 자체에 의의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 이어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오가면서 정상회담을 가진 끝에 냉전 종식이란 역사적 합의를 하게 된다. 미 대통령의 휴양지에 머물면서 네 차례 전쟁을 치른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무기한으로 정상회담을 가진 사례가 1978년 9월의 캠프데이비드 회담이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불러들여 세기의 ‘끝장 합숙 담판’을 시킨 이가 지미 카터 대통령이다. 워싱턴 북쪽으로 120㎞ 떨어진 메릴랜드 캐톡틴산맥에 위치한 대통령 전용 별장은 80만㎡가 넘는 군사시설이다.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돼 회담을 나누는 데 절호의 장소다. 카터가 사다트와 베긴 사이를 오가며 벌인 13일간의 협상에서 양국은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50㎞ 떨어진 휴양시설 ‘하크홀름순트 콘퍼런스’가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2월 말로 예정된 북한과 미국의 2차 정상회담 의제를 다룰 실무협의가 2박3일 일정으로 열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캠프데이비드처럼 군사시설은 아니지만, 호수로 둘러싸인 산속 리조트라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회담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스웨덴은 북한과 1973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양측 수도에 공관을 둘 만큼 서방 국가 중에서 북한에 가장 가깝다. 주평양 스웨덴대사관이 미국, 캐나다 등의 이익대표부를 겸하고 있어 무슨 일만 생기면 대북 창구 역할도 한다. 지난해 3월 리용호 북한 외무상 일행이 스웨덴을 방문했는데, 마르고트 발스트룀 외무장관이 북·미 정상회담의 중재역이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스웨덴은 북한 일에 적극적이다. 북·미 협상 장소 제공도 그 일환이다. 북·미가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동선을 의도적으로 공개했다. 서로에 대한 압박 효과도 있지만 그만큼 자신감도 있다는 뜻이다. 이번 끝장 합숙 담판으로 불신을 걷어 내고 장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70년 적대관계 청산을 발표하는 날이 그리 멀지 않다는 기대도 들게 한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골프와 정직/이종락 논설위원

    몇 년 전 50대 골퍼가 골프장 파3홀에서 친 공이 훅이나 왼쪽 장애물을 맞고 사라졌다. 이 골퍼는 그린 러프 주변을 서성이다 공을 찾지 못하자 또 다른 공을 슬쩍 꺼내 내려놓았다. 속칭 ‘알까기’를 한 것이다. 골퍼는 시야에서 사라진 공을 찾은 마냥 어프로치 샷으로 또 다른 공을 그린의 홀 가까이에 붙였다. 그런데 처음에 쳤던 공이 홀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장애물을 맞고 홀 안에 들어온 것이다. 홀인원인 셈이다. 하지만 속임수를 쓴 그 골퍼는 자신이 홀인원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골프 애호가들은 골프를 통해 정직의 미덕을 배운다고 한다. 골프에는 심판이 없기 때문이다. 스코어카드도 원래 스스로 적게 돼 있다. 골프장처럼 정직을 배우고 양심을 키우는 데 안성맞춤인 훈련장도 없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알츠하이머를 앓는다며 재판 출석을 거부할 무렵에 골프를 쳤다고 한다. 캐디가 헷갈리는 골프 스코어도 스스로 암산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이게 사실이면 그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도 재판에 못 나올 정도로 위중한 상태는 아닌 듯싶다. 골프를 통해 배웠을 정직을 되새겨 처신하는 게 전직 대통령의 품위다. jrlee@seoul.co.kr
  •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1903년 활동사진 첫 상영? 조선, 16년 뒤 첫 영화 찍다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1903년 활동사진 첫 상영? 조선, 16년 뒤 첫 영화 찍다

    한국영화 100년에 관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두 회에 걸쳐 그 이전의 역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활동사진’이라고 불린 서구영화 필름들이 처음 한국에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그리고 다음 회는 영화상설관의 설립을 중심으로 조선영화가 등장하는 기반이 되었을 초기 영화산업의 형성 과정을 알아볼 것이다. 1919년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의 상연을 한국영화사의 기원으로 삼는 것은, 조선인의 첫 번째 영화 제작 경험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즉 단성사라는 극장에서,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 필름을 조선인 관객들에게 상영한 사건이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가 아닌, 서구에서 들어온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점은 언제일까. 이는 서구영화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영화사의 기점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이다.●세계영화사 100년의 기점 영화 매체는 서구 근대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발명된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만든 짧은 영화들을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유료 상영한 사건을 기점으로 삼는다. 이때 사용된 장치가 그들이 개발한 촬영기 겸 영사기인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였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입장료를 지불한 다수의 대중 앞에서 상영된 것에 영화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점이다. 사실 1889년 미국의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영화 필름 재생 장치를 먼저 창안했는데, 이는 스크린 영사가 아닌 한 명씩 들여다보는 방식이었다. 즉 영화 매체의 중요한 성립 조건은 다중의 관람 경험인 것이다. 두 번째는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의 개발을 완료해 영화를 만들고, 이 필름들을 대중 앞에서 상영한 것 모두 1895년 같은 해에 이루어진 점이다. 다시 말해 영화를 발명한 서구의 경우, 제작과 공개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어떨까. 일본의 경우 1896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고베에서, 이어 1897년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교토에서, 또 에디슨이 스크린용 영사가 가능하도록 만든 바이타스코프(Vitascope)가 오사카에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본인들의 영화 촬영은 1898년 ‘귀신 지장’ 등 단편 트릭영화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중국의 경우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6년 상하이에서였고,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05년 베이징의 한 사진관에서 경극배우의 연기를 촬영한 ‘정군산’을 기점으로 삼는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의 경우 1896년을 시작으로 영화 매체가 수용되었고, 이어 자국인의 영화 촬영 역시 큰 시기적 간격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1919년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에 포함된 영화필름이 공개되기에 앞서, 한국에 유입된 서구영화가 대중에게 상영된 것은 언제였을까.●진기한 ‘활동사진’과 만나다 한국에서 언제 처음 영화가 상영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영화사가들의 오랜 논쟁거리 중의 하나다. 공식적인 기록을 근거로 들자면 1903년 6월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의 활동사진 광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일반인들에게 돈을 받고 영화를 상영했음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생한(生命) 도시, 각종 극적인 장면(劇場)의 절승한 광경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 요금 동화 10전.” ‘활동사진’의 어원은 영어의 ‘모션 픽처’(motion picture)에서 온 것이다. 서구인들은 영화가 소리도 없는 단편영화의 형태로 처음 등장했을 때,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으로 불렀고 이를 일본이 활동사진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었다. 당시 한성전기회사를 운영하던 미국인 콜브란은 한·미 간의 갈등으로 ‘전차 안 타기 운동’이 확산되자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고 전차 이용객을 늘리기 위해 활동사진 상영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1903년 7월 10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보면, “전차를 타고 온 관객들로 상영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덕분에 매일 밤 입장 수익이 백여원에 달했으며 덩달아 전차표 수익도 올랐다”고 한다. 한성전기회사는 동대문 기계창에서의 영화 상영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 상영공간을 ‘동대문활동사진소’라는 이름을 붙여 운영한다. 활동사진 상영회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는 서대문 근처의 협률사(전통연희극장으로 이후 원각사가 됨)도 빌려서 상영했는데, 이곳은 영사기에서 발생한 불꽃으로 화재가 나 금방 중단되었다. 대한제국 시기(1897~1910년) 한국 사람들에게 활동사진 즉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1901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의 논설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에서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북청사변(北靑事變)에 관한 활동사진을 보고 난 후 쓴 글로, ‘활동사진’이라는 용어가 발견되는 최초의 문헌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活畵)이라 할 만하다.” 당시 한국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받았을 충격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일 것이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고 불을 때는 화면이면 자기 자리에 불이 옮겨붙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무엇보다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무대 앞으로 나가 볼 수밖에 없었다. 또 하얀 드레스 입은 여자 무용단원이나 합창단원들이 인사를 하는 장면이 비치면 갓 쓰고 도포 입은 관객들이 절을 받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하니, 활동사진의 진기함에 대한 사람들의 놀람과 충격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한다.●버턴 홈스의 한국 방문 구체적인 상영 정보가 기록된 문헌으로는 1903년의 활동사진 상영이 가장 앞서지만, 1896년경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중국과 일본처럼 그 이전에 상영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정도 짚어 볼 수 있다. 먼저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소설가 심훈(1901~1936)이, 1897년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혼마치좌라고 하는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극장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고 기록한 것이다(‘조선일보’ 1929년 1월 1일). 이는 전해 들은 말을 기록한 것으로 정확한 사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일본의 영화흥행사가 한국으로 건너와 일본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상영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다음으로 1901년경 한국을 여행했던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의 여행기를 통해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기록을 접할 수 있다. 영화와 사진 전문가 등 3~4명으로 구성된 홈스 일행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으며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성 안팎을 다니며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한 왕족인 이재순의 주선으로 고종에게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움직이는 사진이 보여 주는 진기함에 왕실의 반응은 대단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홈스 일행을 불러 비단과 족자, 은 같은 하사품을 주고 연희를 베풀어 환대함으로써 최고의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이는 분명 1903년보다 앞선 상영 기록이지만, 왕실에 한정되었을 뿐 일반 대중을 위한 상영은 아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홈스는 여행기 ‘서울, 한국의 수도’(Seoul: the Capital of Korea·1901)를 내고, 컬러 슬라이드 및 기록영화와 함께 강연으로 공개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은 버턴 홈스 유산 보존회로부터 기증받은 그의 기행 기록영화 ‘한국’(Korea)을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상이 1901년 첫 방문 때의 기록인지 1913년 두 번째 방문 때의 것인지, 혹은 영상이 혼합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한국영화 100년의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경우 대중 상영이 이루어진 시점을 공식적인 기록인 1903년으로만 계산해도 조선인들의 첫 영화 제작과는 16년의 간극이 있다. 극장 상영을 포함해 영화문화 전반을 의미하는 ‘시네마’(cinema)로서의 영화라기보다 ‘필름’(film)으로서의 영화, 즉 영화 제작의 경험을 영화사 100년의 출발점으로 놓았던 결정적인 배경인 셈이다. 확실히 세계영화사 100년을 자국의 영화사와 겹쳐서 보는 일본, 중국과 한국의 영화사 100년에 대한 감각은 다르다. 일제강점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한국영화 100년의 기점을 설정하는 것에 있어, 우리의 제작 경험을 중심에 놓는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대목일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씨줄날줄] 용산 참사 10주년/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용산 참사 10주년/박록삼 논설위원

    불과 15년 남짓 전까지 용산역 앞은 전형적인 옛 철도역사 풍경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온 젊은 처자가 애써 새촘한 표정으로 용산역 광장을 두리번거렸고, 칼주름 잡고 막 휴가 나오거나 복귀를 앞둔 군인들 두엇은 대낮부터 술집 등을 계면쩍게 서성거렸다. 성공을 다짐하며 대처에 나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가 기차 기다리며 포장마차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랬는가 하면, 해거름에 고단한 노동을 마친 주머니 가벼운 이들은 허름한 순댓국집에서 탁배기를 들이키며 취기로 하루를 지워 가곤 했다. 평범한 일상이 오가던 이 공간은 2009년 1월 20일 새벽을 기점으로 ‘죽음과 슬픔의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2004년 민자 역사로 대변신한 용산역은 그 전조였다. 자본의 이익 앞에 누군가의 남루한 터전은 보존 가치가 없었다. 용산역 주변 개발 철거에 내몰린 세입자 상인들은 남일당 망루로 올라가 농성을 벌였다. 농성 시작 하루 만에 벌어진 경찰 진압에 의한 충돌은 화재로 이어졌고,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잃었다. 비극적인 참사였다. 과잉 진압 문제, 용역업체와 경찰의 결탁 등 논란이 컸다. 하지만 검찰은 경찰에게 어떤 형사책임도 묻지 않았다. 검찰은 재판에 필요한 수사기록 열람, 등사를 거부했다. 재판 또한 불공정했다. 재판부는 철거민 측이 신청한 항고와 재판부 기피 신청을 모두 기각했다. 당시 ‘이명박 청와대’는 경찰에 경기 연쇄살인사건(강호순 사건)을 활용하라는 이메일 지시를 보냈고, 실제 경찰사이버수사대 900명을 동원해 여론전을 펴기도 했다. 사건의 은폐, 조작에 경찰, 검찰, 사법부, 청와대 등이 동원되고 공조한 전형적 국가폭력이었다. 꼬박 10년이 흘렀고 촛불 정부가 들어섰지만, 용산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는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로 현장을 지휘한 김석기(현 자유한국당 의원) 서울경찰청장 등 지휘부의 과잉 진압 때문이라 발표하며 경찰 사과를 ‘권고’했다. 그러나 공항공사 사장,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하는 김 전 청장은 이 같은 권고에도 최근 한 방송에서 “똑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초고층 빌딩 숲으로 상전벽해된 용산역 앞에서 10년 전 참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도시재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예정돼 있다. 곳곳에서 중장비 소리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책이 없다면, 또 자본과 개발의 탐욕이 여전하다면 비극적 제2의 용산 참사는 언제든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우리는 관련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youngtan@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대만에도 기생이 있나”

    [그때의 사회면] “대만에도 기생이 있나”

    국회의사당 내의 난투극이나 멱살잡이만 추태가 아니다. 의원들이 외유 등 의사당 밖에서 보여 준 추태는 달라지지 않은 나라 망신감이다. 외환위기 1년 전인 1996년 3당 부총무단은 선진 의회를 시찰한다며 독일과 러시아 등을 다녀왔다. 이들은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 넘는 ‘루이 13세’ 등 최고급 양주를 몇 병이나 구입했는가 하면 모스크바 공항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싸움을 벌였다(동아일보 1996년 9월 15일자). 의원들은 반성하는 척했지만, 지금 현실을 보면 조금도 개선된 것이 없다. 그 전해 9월에는 선진국 철도 시설을 견학하고 오겠다며 출국한 의원들이 실크 넥타이 500개, 허리가방 1200개, 립스틱 1000개 등을 들여오다 들통이 났다. 그해 초에는 남미로 출국한 의원들이 여성 미용에 좋다는 백장미 기름을 600통이나 들여왔다. 관세는 한 푼도 물지 않았다(경향신문 1995년 9월 13일자). 이런 일들이 있기 몇 해 전인 1991년에 ‘뇌물 외유’ 사건이 터져 의원들이 구속되고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의원들은 금세 잊어버렸다. 1989년 3월에는 한 의원이 바짓단을 걷고 맨발로 비행기 안에서 돌아다니고 대사관 여직원에게 ‘당신들은 코스(코키스)를 어떻게 해’라고 물었다는 등의 추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8대 국회 때 호주를 방문한 의원이 영어를 몰라 “한국 국회의원은 몇 명이냐”는 호주 의원 질문에 “노(No)”라고 대답해 웃음거리가 됐다. 1988년에는 도지사와 시장이 일식집에서 술을 마시며 의원에게 도정 보고를 하고 도중에 시비가 붙어 술잔을 집어 던지며 싸움을 벌였다(경향신문 1988년 7월 27일자). 공식 외교 문서만 넣게 돼 있는 외교 행낭에 자신의 구두나 값비싼 물개 가죽을 몰래 보낸 ‘파우치 사건’과 한 의원이 관광객이 몰리는 프랑스의 한 시계탑에 자신의 이름을 버젓이 낙서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1978년 대만을 방문한 의원이 당시 장징궈 총통에게 “대만에도 기생이 있느냐”고 물었던 일은 국가 이미지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유명하다(동아일보 1978년 4월 8일자). 일반 국민은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시절인 1970년대에 일본에 건너간 한국 여성들이 운영하던 유흥업소는 의원들의 아지트였다. 지방의원이라고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다르지 않다. 1992년 서울 강남구 의원들은 외유 나갈 의원을 제비뽑기로 뽑은 것도 모자라 떨어진 의원들이 항의해 싸움을 벌이는 추태를 보여 줬다. 휴가비를 내놓으라고 구청장을 협박하거나 부군수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발길질을 한 추태는 지방의회 부활 원년에 일어난 일들이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화장실 전망/임창용 논설위원

    기사를 쓰다가 흐름이 막히거나 생각이 꼬이면 화장실에 간다. 배설을 해야 생각이 풀려서가 아니다. 사무실이 있는 10층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 화장실이다. 널찍한 화장실 통창 앞에 서면 길 건너 정면에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인 성공회 성당이 아늑함을 선사한다. 그 왼쪽으로는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명품 전망’이 따로 없다. 고궁의 나무들 덕분에 계절을 가장 빠르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덕수궁 뒤로는 높은 건물도 많지 않아 해질녘 노을이 황홀할 정도다.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느라 피곤해진 눈과 머릿속이 호강하는 순간이다. 화장실은 예전에 집 뒤나 마당 귀퉁이가 제자리였다. ‘뒷간’이나 ‘측간’으로 불린 것도 그 때문이다. 통풍을 고려했겠지만, 건물을 지을 때 소외받은 것도 사실이다.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방으로까지 들어오는 대접을 받지만, 위치는 여전히 창이 없는 구석자리다. 오피스 빌딩에서도 전망 좋은 방은 고위 간부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수년 전 이곳에 화장실이 생겼을 때는 공간이 아깝다고 여겼다. 지금은 ‘참 넉넉한 배치’란 생각이 든다. 10층의 모든 근무자들이 명품 전망을 공유할 수 있어서다. 사무실을 배치하다 우연히 이렇게 됐겠지만, 누군가의 배려심도 깃들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sdragon@seoul.co.kr
  • [시시콜콜]국방백서 ‘주적’(主敵) 논란

    [시시콜콜]국방백서 ‘주적’(主敵) 논란

    197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군 부대에 인접한 동네에 살았던 난 항상 군인들의 구호 소리에 잠을 깼다. 군인들은 새벽마다 점호 뒤 동네의 비포장 길에서 열을 맞춰 구보를 하면서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쳤다. 구호는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무찌르자 북괴군’‘이룩하자 유신과업’ 네 가지였는데, 돌이켜보면 참 살벌한 내용이었다. 수 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 들어서인지 구호 내용과 외치는 순서까지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그때만 해도 한국전쟁이 끝난지 20년밖에 안되는데다 휴전선에선 심심치 않게 작은 충돌이 있었으니 남측으로선 북한 지도부와 북한군은 오직 무찌르고 쳐부수어야 할 대상이 분명했다. 당시 어렸던 난 김일성이나 북한군은 사람이 아닌 도깨비나 괴물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반공교육도 철저했다. 접경지역에 살다 보니 산이나 들판에 가면 북한에서 날려 보낸 선전 전단(당시엔 일본말인 ‘삐라’라고 불렀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전단은 대부분 북 체제를 홍보하는 사탕발림이나 남측 체제나 대통령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단을 주워 모아서 학교나 동네 지서(파출소)에 제출하곤 했다. 그동안 한반도 정세가 적잖이 변했음에도 분단의 상처가 워낙 깊어선지 남한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은 것 같다. 국방백서가 발간될 때마다 ‘주적(主敵)’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국방부는 얼마 전 발간한 국방백서에서 ‘북한 정권과 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대신 적의 개념을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이라고 정의했다. 2년마다 발간되는 국방백서의 주적 표기 문제는 해묵은 논쟁을 불렀다. 국방부는 1967년 국방백서를 처음 발간했는데 당시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인지 주적이나 북한은 적이란 표현을 넣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남북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처음으로 ‘북한군은 주적’이라고 적시했다. 이후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해빙기를 맞아 2002년 발간된 국방정책보고서(1998~2002)에서 주적 개념을 미언급한데 이어 2004년엔 아예 주적 표현을 삭제했다. 그러다가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을 넣었다. 백서에 주적이나 적이란 표현을 꼭 적시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금보다 훨씬 남북관계가 냉랭했던 1970·80년대에도 백서엔 이런 표현이 없었지만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대한민국 영토나 국민을 위협하거나 침탈하는 세력은 당연히 우리의 적일수 밖에 없고, 그 세력이 누구든 우리 군인은 영토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고 있다. 남북 정상이 지난해 사실상 불가침 약속을 맺은데다가, 지금도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 정착을 위한 북·미간, 남북간 대화가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북한을 콕 찍어 ‘적’이라고 못박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53년 만의 퇴장, 미관지구/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53년 만의 퇴장, 미관지구/박현갑 논설위원

    아름다운 도시, 살기 좋은 도시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적절한 토지이용 계획과 관리 방안이 있어야 한다. 용도지구, 미관지구, 경관지구 등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도시관리 방식들은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용도지구는 용도지역 내 건축물 용도, 건폐율, 용적률, 높이 등의 규제로 미관, 경관, 안전 등을 도모하려고 정하는 도시관리 수단이다. 미관지구는 주요 간선도로변 양측(폭 12m) 가로환경의 미관 유지를 위해 건물 층수나 용도를 제한하는 도시관리 방식이다. 경관지구는 무질서한 도시 확장으로부터 산지나 구릉지 등 자연경관과 역사경관 등을 보호하려는 도시관리 방안이다. 어제 서울시가 미관지구라는 도시관리 방식을 53년 만에 없애고 경관지구로 통합한다고 밝혔다. 복잡한 용도지구 체계를 통폐합하는 내용의 국토 계획 및 이용법 개정에 따른 후속 조치다. 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오는 4월 최종 고시한다. 우리나라의 미관지구는 1962년 도시계획법을 토대로 1965년에 처음 지정됐다. 남대문, 세종로, 서소문로, 종로가 1종 미관지구로, 한강로 및 신촌로가 2종 미관지구로 각각 지정됐다. 현재는 서울 시가지 면적의 5.75%인 336곳, 21.35㎢가 지구 특성에 따라 4개 유형(중심지, 역사문화, 일반, 조망가로)으로 세분화돼 있다. 그러나 50년 넘는 시간이 흐르며 재개발·재건축 정비구역 등 별도 도시관리 수단으로 지역별 용도 제한을 하면서 미관지구 제도의 실효성이 많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있었다. 미관지구 전체 면적의 82.3%인 313곳이 미관지구에서 해제된다. 중심지 미관지구 등 해제되는 곳은 그동안 불가능했던 컴퓨터 관련 제품 조립 업체, 인쇄업체, 창고 등의 입지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임대수익 증가 등 지역경제 활력 요인이 될 수 있다. 나머지 23개 미관지구는 경관이나 높이 관리가 필요해 ‘경관지구’로 바꿔 계속 규제한다. 23곳 중 ‘조망가로특화 경관지구’가 되는 강북구 삼양로 등 16곳은 6층 이하의 층수 제한, 건축물 용도 입지가 제한된다. 역사문화 미관지구에서 ‘시가지 경관지구’로 바뀌는 압구정로는 층수 제한이 기존의 4층 이하에서 6층 이하로 완화돼 개발 여지가 생길 전망이다. 나머지 6곳은 한강변과 경복궁 주변, 남산공원길 일대로 ‘역사문화특화 경관지구’로 지정해 추후 관리 방안을 마련한다. 시·공간 변화에 따라 도시관리 방식도 바뀌기 마련이다. 미관지구 폐지와 경관지구 통합 관리로 서울이 시민들에게는 살기 좋은 도시, 관광객에게는 아름다운 도시로 남을 수 있도록 지혜로운 관리 방안 마련을 기대해 본다. eagleduo@seoul.co.kr
  • [서울광장] ‘캐슬’의 독서, 개천의 책/황수정 논설위원

    [서울광장] ‘캐슬’의 독서, 개천의 책/황수정 논설위원

    “(극중에서) 강남의 반포 아파트 한 채 값이라니 입시 코디 비용이 대체 얼마라는 거죠?” “20억~30억원쯤 아닐까요?” “그러면 제 힘으로 설대(서울대) 의대 갔으면 30억 벌었네요.” 엄마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대화 내용이다. 인기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텔레비전 앞의 학부모들을 대쪽 가르듯 쪼갰다. 아들딸에게 입시 코디네이터를 붙여 줄 수 있는 부모와 못 해주는 부모. 학생들도 둘로 쪼개 놨다. 다만 몇십만원짜리라도 입시 코디를 받고 있거나, 코디라면 ‘패션 코디’인 줄로만 알고 있었거나. 드라마는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입시 환경의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작두 타듯 넘어 다닌다. 열심히 시청률을 올려 주는 속내들은 까뒤집어 보자면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불편’해서다. 장담컨대 이런 거다. 있는 대로 빈정 상해서 빈속에다 소주, 불닭발 안주까지 털어 넣고는 식은땀을 흘리는 상황.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드라마 속 불편한 진실은 캐슬의 독서 모임이다. 기득권 집단인 캐슬 입주자 가족들의 폐쇄된 책 읽기 모임은 교육 불평등의 공고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암시했다. 초등생부터 고교생까지 실력과 재력을 갖춘 부모를 대동한 독서 모임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놓고 토론한다. 극중의 말마따나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 6년을 연구하고도 난해하다는 책”이다. 로스쿨 교수인 입주민 아빠는 학교생활기록부 독서록 기재용의 도서 목록을 직접 짜서 주도한다. 생각 없이 읽었든 말았든 캐슬 아이들의 학생부에는 책 제목이 반짝거릴 것이고, 수시 전형의 입학사정관 앞에서는 독서 내공을 유감없이 뽐낼 것이다. 블랙 코미디 같은 이야기는 결코 웃기는 소리가 아니다. 입시의 열쇠인 ‘기획 독서’가 역량 있는 부모들의 전폭적 지지로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는 어마무시한 이야기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은 캐슬 바깥 세상에도 소소하지만 다양한 층위로 펼쳐져 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서 독서를 책 읽는 일로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은 더는 없기 때문이다. 진로를 최대한 일찍 설정해 놓고 그에 걸맞은 독서 지도를 누가 더 치밀하게 꾸몄느냐가 핵심. 입시의 독서는 기술과 요령과 전략의 영역인지 오래다. 그러니 부모든 사설학원이든 ‘독서 코디’가 되어 따라붙어 줘야 입시 경쟁력은 확보된다. 의도가 순수할 수 없는 책 읽기 부모 모임이 주위에 적지 않다. 난해하고 방대한 책을 골라 내용을 요약하고 독후감까지 대신 쓰는 작업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서로 묻지 않는다. 그렇게 제조된 독서 목록을 학교에서 묻거나 따지는 낭패스러운 일은 더더욱 없다. 얼마 전 서울 시내 유명 대학 안의 대형 서점을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원로 작가 윤흥길이 생애 마지막일 대하장편 소설을 냈다고 온통 떠들썩할 때였다. 그 큰 서가 어디에도 체면치레할 책 한 권이 없었다. “찾지 않으니 갖다 놓지 않는다”는 지당한 말을 차라리 듣지나 말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책 읽기의 기술만이 앙상하게 득세하는 교육환경에서는 독서 토양은 편협하고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시피 진로와 엮어 자기소개서에 한 줄 써 먹지도 못하는 문학은 백해무익한 독서 영역으로 나가떨어져 있다. 성찰과 사유를 요구하는 인문·사회 과학서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서점 한복판은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기획한 새털 같은 베스트셀러들이 온통 점령했다. 고교 내신 2등급은 받아야 들어가는 명문대의 서점 풍경이 지금 그렇다. 순수소설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데, 국어 시험에 ‘화작’(화법과 작문)을 달달 외워 풀어야 하는 사정은 아무래도 코미디다. 기획 독서의 초라한 말로를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할지 암담한 일이다. 학종 전형이 대세인 현재의 입시제도에서는 어쩌면 더 참담해질 일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능력과 내신 성적이 뒷받침되는 아이들에게는 요령껏 권수만 채우는 ‘속임수 독서’가 변함없이 정답일 것이다. 이도 저도 안 되는 아이들은 애당초 힘들게 독서를 할 명분이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캐슬 안에서도 캐슬 밖에서도 따지고 보면 승자는 없다. 지성이 추락하는 반지성주의의 전조를 보고 있는 것인지, 퇴행을 빤히 보면서도 뭐가 뭔지 모르는 집단 무지의 상황은 아닌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문제다. 미래가 없는 것을 대가로 삼아야 하는 일은 끔찍하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sjh@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의료안전 법안 일회성 논의는 안 돼… 임 교수의 꿈, 결실 맺어야”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의료안전 법안 일회성 논의는 안 돼… 임 교수의 꿈, 결실 맺어야”

    지난해 마지막 날 자신이 돌보던 환자에게 목숨을 잃은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의사(성균관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남긴 파장이 예사롭지 않다. 이른바 ‘임세원법’으로 불리는 의료 안전 관련 법안이 21개나 발의됐고, 의료계와 정부의 논의와 별도로 국회가 별도의 특별논의기구까지 만들어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고가 나면 그때만 의료 안전의 목소리가 반짝 높아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유야무야하던 이전과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권준수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임 교수와 유족이 주는 메시지가 워낙 강렬해서인 듯싶다”며 “이번엔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임 교수 사건 이후 정부·국회와 접촉하면서 임세원법 만들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는 권 이사장을 서울대병원 사무실에서 만났다.→임 교수 사건 후 이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원인이 뭔가. -임 교수가 평소 의사로서 워낙 훌륭했다. 환자 사랑이 남달랐다고 여러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사고 당시에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을 챙기다가 목숨을 잃었다. 평소 자살예방에 큰 관심을 가졌고, 자살예방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보급해 큰 성과도 거뒀다. 사고 후 임 교수 유족의 태도는 놀라움 그 자체다. 대부분의 사람은 유족들이 가해자에 대한 원망이나 반감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은 안전한 진료 환경 마련과 함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유족들은 마치 임 교수의 분신인 양 환자를 우선하는 품격을 보여줬다. 만약 유족들이 다른 사건에서처럼 분노만 표시했다면 파장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것이다. 진료 안전 문제도 허술하게 처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여야가 각기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법안이 쏟아지는 등 국회에서 임세원법 논의가 활발하다. -법안은 여러 개 올라와 있지만, 내용이 대부분 단편적이다. 진료 시 안전실태 조사나 안전장치 설치, 보안요원 배치, 가해자 형사처벌 강화, 치료 강제방안 등을 각기 담고 있다. 이런 내용을 종합적으로 논의해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 보건복지위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이 활발한 논의를 위해 복지위 산하에 소위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좋은 생각이다. →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가 진료 안전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나. -일반 진료현장에선 예방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에선 그렇지 않다. 정신과 진료현장에선 대부분 폭력이 병과 연관돼 있다. 처벌을 강화한다고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임 교수 사건도 환자가 머리에 폭탄이 심어져 있으니 꺼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예전에 의료진이 자신의 머리에 폭탄을 심었다는 피해망상을 가졌을 수도 있다. 따라서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 조항을 넣더라도 일반 진료와 정신과 진료를 구분하는 게 옳다. →진료실 안전장치 설치 문제는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비용이 가장 큰 문제다. 안전문 설치나 대피공간 마련 등은 모두 공간을 필요로 한다. 도심병원은 공간 비용이 워낙 비싸다. 보안요원 확충도 마찬가지다. 정신과 병동은 간호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우리 정신보건법에선 간호사 1명당 13명의 환자를 보도록 하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6명, 일본은 4명이다. 급성 중증환자들이 모여 있는데 간호사 1명이 13명을 감당하기 어렵다. 보호병동 간호사 중 맞아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나도 2년 전 진료 중 환자의 샤프연필에 목과 이마를 다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감수한다. 다른 의사들도 큰 사고만 아니면 환자를 빨리 치료해야 한다는 욕심에 폭력엔 무감각한 경우도 많다. 보안요원이든 간호사든 인력을 확충하려면 관련 수가를 올리든가 국가 지원을 늘려야 한다. →정신질환자들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더 낮다는 의견이 있다. -2011년 대검찰청 범죄 분석 자료에 따르면 범죄율이 일반인은 1.2%, 정신질환자 0.08%다. 중범죄도 일반인은 10만명당 68명인데 정신질환자는 36명에 불과하다. 다만 정신질환자의 범죄는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피상적으로 정신질환자들은 폭력적이고 위험하다는 판단은 완전히 잘못된 편견이다. 대부분 정신질환자는 약물로 치료가 잘되고 정상적으로 생활한다. 한데 범죄 발생 시 정신병력만 있으면 너무 쉽게 정신질환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폭력성만 따진다면 주취 범죄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 술은 자의적으로 먹는 만큼 주취범죄는 외려 가중처벌해야 한다. 언론에서도 자살사건을 다룰 때 보도준칙이 있듯 정신질환자 범죄에 대해서도 보도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한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입원제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나. -현행법상 급성환자의 경우 진료 의사와 보호자 2인 이상의 동의로 보호입원이 가능하다. 입원하면 2주 내 다른 병원 의사로부터 입원 적정성 심사를 받아야 하고, 4주째는 관련 위원회를 열어 심사해 계속 입원할지를 결정한다. 문제는 보호입원 전 과정이 가족과 의사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환자가 퇴원했다가 재발하면 가족이나 의사를 향한 적대감이 생겨 폭력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선 전문의와 변호사, 일반인 등으로 구성된 팀이 보호입원 결정을 한다. 공공의료 비율이 90%에 달하는 독일에선 법원이 결정한다. 우리처럼 의사와 보호자에게 맡기는 것은 문제가 크다. 특히 가족은 보호자이면서도 때론 이해 당사자가 될 수 있어 더 그렇다(가족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강제입원을 악용하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는 해외 사례를 참조해 우리 실정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 사용하면 된다. →임 교수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퇴원 후 치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퇴원 뒤 환자관리 문제가 많은 것 같다. -퇴원한 환자가 외래치료 받기를 거부하면 마땅한 방법이 없다. 급성환자는 3주 정도 입원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좋아져 퇴원하는데 재발을 막기 위해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한데 안 받아도 파악이 어렵다. 보건복지부가 지역정신건강센터에 등록시켜 관리하지만, 등록 안 하면 그만이다. 등록한 환자들도 센터에서 증상이 만성화된 환자들과 섞여 관리를 받다 보니 불만이 생겨 잘 가지 않게 된다. 결국 퇴원 환자가 지속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병원이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든지, 아니면 센터 기능을 더 강화해 사회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현행 외래치료명령도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면 내릴 수 있지만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해도 본인이 오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결국 법적 강제성이 연결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폭력적인 환자 등에 대해 진료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개인적으론 진료거부권 도입에 부정적이다. 비록 폭력적인 사람 일부에 해당되겠지만, 어쨌든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찾아온 환자 아닌가. 국민도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폭력적이어서 정 진료가 어려우면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하는 등의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임세원 교수 사건과 관련해 정부나 정치권에 바람이 있다면. -전 세계적으로 볼 때 통상적으로 국민소득이 4만 달러에 달하면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한 투자가 확 늘어난다. 우린 아직 거기 못 미치지만, 좀 선제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경제 규모는 커졌는데 국민의 삶의 질은 50~60위 아닌가. 어릴 때는 집단 따돌림 문제, 10대엔 입시와 게임중독, 취업 후엔 직업적 우울증 등 우리 국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신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의 정신건강을 관리한다는 마음으로 대통령이 어젠다를 설정했으면 한다. sdragon@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정부·정치권 적극 나서… ‘임세원법’ 발의 총 21개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정부·정치권 적극 나서… ‘임세원법’ 발의 총 21개

    지난달 31일 임세원 교수 사망사건 이후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과 정신질환자 적시 치료를 위한 법안(가칭 ‘임세원법’) 마련 움직임이 분주하다. 예전과 달리 의료계뿐만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기대를 갖게 한다. 사건 발생 뒤 국회가 발족한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을 위한 태스크포스(TF)’가 두 차례 논의를 가졌고, 의료계와 정부 간 실무협의체인 ‘안전진료TF’도 세 차례나 회의를 갖고 정책을 조율하고 있다. 각 당의 의원들이 앞다퉈 법안을 발의하면서 지난 16일 기준 13명의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임세원 교수 사망 이전에 발의된 10개를 포함 총 21개에 달한다. 의료인 폭행 시 처벌 강화, 반의사불벌 조항 삭제, 비상문·비상벨 설치 등 안전장치 설치, 의료기관안전기금 확충, 정신질환자 외래치료명령 강화, 진료 안전을 위한 예산지원 등을 담고 있다. 대부분 기존 의료법과 국민건강보험법, 국가재정법, 정신건강증진법을 개정하는 안이다.이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의료법에 명시된 ‘반의사불벌’ 조항 삭제와 음주범죄 시 감면 제외다. 반의사불벌 조항은 진료현장에서 의료인 폭행이 발생했을 때 피해 의료인과 가해자가 합의하면 처벌을 면해주도록 하고 있다. 피해 의료인 입장에선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병원 이미지 훼손 등을 고려해 합의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폭력을 휘둘러도 합의만 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자는 게 개정 취지다. 음주감면은 진료현장 폭력사건 상당수가 주취자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음주를 이유로 처벌을 감면하지 못하도록 아예 법에 못박자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안전한 진료환경 TF’는 지난 15일 의료계 단체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2월 임시국회에서 임세원법을 처리한다는 방침을 전했다. 하지만 가해자 처벌 강화 방안이나 진료현장 안전시설 설치에 대한 예산지원 문제, 외래치료 강화 부작용 등에 대해 여야 간, 의료계와 환자단체 간 일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다. sdragon@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44)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롯데그룹 계열사 CEO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44)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롯데그룹 계열사 CEO

    강희태 사장, 냉철한 분석력이 장점하석주 사장, 기획전문가로 최대실적 김정환 사장 호텔경력 37년의 베테랑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어려운 시기를 마주할 때 마다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위기를 타파하고 새로운 성장기회를 맞이해왔다. 지난해에는 올해부터 5년간 국내외 전 사업부문에 걸쳐 50조원을 투자하고 7만명을 고용하겠다는 투자 고용계획도 발표했다. 롯데는 그룹의 양대 성장축인 유통과 화학부문을 중심으로 국내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회사들로 우뚝 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달성여부는 CEO들의 손에 달려 있다.  민명기(58) 롯데제과 부사장은 대원고와 고려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8년 롯데제과 인도 법인장과 2012년 해외전략부문장을 역임하며, 글로벌 경영 능력을 인정 받았다. 2013년 건과영업본부장을 거쳐 지난해 롯데제과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조경수(59) 롯데푸드 부사장은 부산남고, 동아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롯데제과에서 마케팅 실무 책임자로 자일리톨 껌 성공신화를 썼다.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에서 마케팅 임원, 식품영업 임원, 유가공 사업을 하는 파스퇴르 사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2017년부터는 HMR과 육가공 등을 담당하는 홈푸드사업본부장을 맡아왔다.  음료 마케팅과 영업을 총괄해왔던 이영구(57) 롯데칠성음료 음료BG 부사장은 풍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이론과 실무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중대부고와 숭실대 산업공학과를 나왔다.  강희태(60) 롯데백화점 사장은 쇼핑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롯데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백화점과 대형마트, 슈퍼 등 자체 사업뿐만 아니라 롯데하이마트 등을 자회사로 보유하고 있다. 강 사장은 중앙고,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백화점에서만 30년 이상 근무하다 2017년 사장으로 승진하며 롯데쇼핑 대표로도 선임됐다. 냉철한 분석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강 사장은 패션사업을 전담하는 통합법인을 만들고 게임 등 콘텐츠와 관련한 전문관을 열어 정체를 겪고 있는 백화점의 활로를 찾고 있다.  올해 초 선임된 문영표(57) 롯데마트 부사장은 최근 몇 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던 마트 사업의 활력을 불어 넣을 구원투수로 발탁됐다. 대구 심인고와 영남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인도네시아법인장, 2011년 동남아본부장을 거쳐 2014년 국내로 복귀해 전략, 상품, 영업 등 주요 본부장직을 역임했다. 지난해에는 물류회사인 롯데글로벌로지스 대표이사로 재직했다. 신동빈 회장이 문 대표에게 롯데마트의 지휘봉을 맡긴 데는 동남아 시장에서의 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후문이다.  이완신(59) 롯데홈쇼핑 부사장은 롯데백화점 본점장, 마케팅부문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친 유통 전문가다. 2017년 롯데홈쇼핑 대표를 맡아 영업이익을 전년도와 비교해 40% 이상 늘렸다. 문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후 연세대 경영학 석사, 건국대 경영학 박사과정을 마쳐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추진력에 화통한 성격으로 ‘형님 리더십’을 발휘한다.  올해 롯데케미칼의 새로운 수장이 된 임병연(55) 부사장은 풍생고와 서울대와 대학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호남석유화학과 KP케미칼에서 연구, 신규사업, 기획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2012년 롯데미래전략센터(현 롯데미래전략연구소)장을 맡았다가 2014년 정책본부 비전전략실장으로 그룹에 복귀했다. 롯데의 해외사업과 인수·합병(M&A) 등을 총괄해왔으며, 2017년에는 가치경영실장을 맡았다. 용장과 덕장의 면모를 갖췄다는 평가를 듣는다. 2009년 정책본부 국제실 근무 당시 국제실장이었던 황각규 부회장을 보좌하는 등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하석주(61) 롯데건설 사장은 용문고와 단국대 회계학과를 나온 뒤 고려대 회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롯데그룹 기획조정실을 거쳐 롯데건설 경영지원본부장, 주택사업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사업과 관리를 두루 경험한 기획전문가이다. 현장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2017년 롯데건설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후 2년연속 사상최대 실적을 달성하고 있다.  김정환(62) 롯데호텔 사장은 37년 호텔 경력을 지닌 베테랑 전문경영인이다. 2017년 롯데호텔 대표로 부임한 뒤 불요불급한 업무 축소, 스마트 업무처리를 강조하고 있다. 부산 동래고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이갑(57) 롯데면세점 부사장은 롯데백화점에서 영업·상품·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정책본부 운영2팀장으로 근무하며 유통사 전반에 대한 안목을 쌓았다. 2016년부터 대홍기획 대표에 재직했다. 여의도고와 고려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선우영(53) 롭스(LoHB‘s) 상무는 업계 안팎의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는 롯데그룹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다. 이화여고와 연세대 식생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전자 공채로 입사, 1998년 하이마트로 옮긴 선우 상무는 롯데하이마트에서 생활가전, 상품관리 및 온라인부문을 거쳐 지난해 롭스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선우 대표는 롯데그룹 유통계열사의 인프라를 적극 활용, 부임 2년 차인 올해 본격적으로 시너지를 낸다는 각오다. 롯데슈퍼뿐만 아니라 롯데하이마트와도 연계, 새로운 형태의 매장을 고객들에게 선보인다는 포부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43) ‘신동빈 체제’ 구축한 롯데그룹 경영진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43) ‘신동빈 체제’ 구축한 롯데그룹 경영진

    황각규 부회장, 신동빈 회장 보좌해온 2인자이원준 부회장, 전문경영인 부회장시대 열어송용덕 부회장, 호텔업계 입지적인 인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2015년부터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경영권을 놓고 벌인 ‘형제의 난’과 국정농단과 관련한 검찰수사와 재판, 사드(THAAD) 사태 등으로 세대교체 임원인사를 단행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60대 이상의 경영진이 많기로 유명한 롯데그룹의 경영진은 더욱 노년화됐다. 신 회장은 지난해말 형과의 경영권 분쟁을 사실상 제압하는 등 여려 현안들이 정리되면서 올해 임원인사를 통해 임원의 세대교체를 마무리했다.  신 회장은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을 2인자로 내세우고, 송용덕 롯데그룹 호텔&서비스 BU(Business Unit)장 겸 부회장과 이원준 롯데그룹 유통BU장 부회장, 김교현 롯데그룹 화학BU장 사장, 이영호 롯데그룹 식품BU장 사장 등이 경영의 주축이 되는 구조를 갖췄다. 롯데는 과거 롯데정책본부가 그룹 차원의 주요 정책을 추진하고 계열사간 사업 조율, 해외사업 총괄 등을 수행하며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2015년 신 회장이 그룹의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한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면서 지난 2017년 10월 롯데지주를 설립했다.  롯데제과, 롯데쇼핑, 롯데칠성음료, 롯데푸드 4개사의 투자부문을 합병해 설립된 롯데지주는 지난해 10월 롯데케미칼을 자회사로 편입해 화학부문으로까지 지주사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지주사 행위요건 충족을 위해 연내에 금융 계열사를 매각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황각규(64)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은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에서 부장으로 재직하다 한국롯데 경영을 호남석유화학에서 처음 시작한 신 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황 부회장은 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신 회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해오고 있다. 롯데그룹 국제팀장과 정책본부 국제실장을 거쳐 2014년 정책본부 운영실장을 맡아 그룹의 경영현안을 챙기고 계열사간 업무 조율에 힘썼다. 2017년 경영혁신실장을 맡아 그룹 전반을 총괄했으며 같은 해 10월 롯데지주가 설립되면서 대표이사를 맡았다.  마산고와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인 황 부회장은 영어와 일어 구사 능력도 뛰어나 실시간 해외정보를 입수해 임직원들과 공유한다. 신 회장 부재시에 비상경영위원회를 이끌었으며 일본 롯데와의 커뮤니케이션도 맡아 왔다.  가치경영실에서 명칭이 변경된 경영전략실은 HR혁신실장을 맡아오던 윤종민(59) 사장이 이끈다. 윤 사장은 롯데제과와 호남석유화학 경영지원본부에서 근무했다. 2007년 정책본부 인사실장을 맡아 최근까지 롯데그룹의 인사정책을 총괄해왔다. 격식있고 신사다워 적이 없다는 평이다. 청구고와 서울대 철학과,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재무혁신실장을 맡고 있는 이봉철(61) 사장은 롯데그룹의 ‘재무통’이다. 2004년 롯데정책본부에서 재무 담당 임원으로 근무했으며, 2012년부터 2년간 롯데손해보험을 이끌었다. 2014년 그룹의 법무 및 재무 업무를 총괄하는 정책본부 지원실장을 거쳐 2017년부터 롯데지주 재무혁실실장을 맡아오고 있다. 브니엘고와 부산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커뮤니케이션실을 이끌고 있는 오성엽(59) 사장은 호남석유화학에서 기획, 전략, 경영지원 업무를 맡았다. 2016년 롯데정밀화학의 대표이사를 거쳐 2017년 커뮤니케이션실장으로 부임한 뒤 그룹의 홍보 및 CSV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가운데 신속한 업무 추진력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경동고와 중앙대 경영학과 출신이다.  올해 롯데지주에 새롭게 부임한 정부옥(55) HR혁신실장은 롯데경영관리본부에서 인사 업무 등을 담당하다가 2005년 롯데대산유화로 이동했다. 2008년 롯데케미칼 HR 부문장을 맡아 롯데케미칼의 인사 업무를 총괄해왔으며, 2015년에는 폴리머사업본부장을 맡았다. 대신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롯데의 법무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태섭(56) 준법경영실장은 2017년 롯데그룹에 합류했다. 사법고시 26회 출신인 이 부사장은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 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 판사 등을 지냈다. 서울고와 서울대 사법학과 출신이다.  경영개선실은 롯데물산 대표이사였던 박현철(59) 부사장이 새롭게 맡게 되었다. 영남고와 경북대 통계학과 출신인 박 부사장은 2004년 롯데정책본부 조정실장, 2007년 운영3팀장을 역임하며 롯데 계열사의 경영 현안 관리 및 업무 조율 등을 담당해왔다. 2015년 롯데물산 사업총괄본부장을 거쳐 2017년 대표이사에 올라 롯데월드타워의 그랜드 오프닝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롯데는 2017년 정기임원인사에서 4개 분야의 BU를 신설했다. BU는 식품, 유통, 화학, 호텔 및 서비스 등 4개 분야 계열사들의 협의체로 구성된다. 이영호(61) 롯데그룹 식품BU장은 롯데푸드㈜ 대표이사를 거쳐 식품BU장을 맡고 있는 전문경영인이다. 경북사대부고와 고려대 농화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12년 ㈜롯데삼강과 ㈜롯데햄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2013년 롯데푸드로 사명을 변경해 몇년에 걸쳐 합병작업을 마쳤다.  이원준(63) 롯데 유통사업부문(BU) 부회장은 청주상고, 청주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40년 가까이 롯데그룹에 몸담는 동안 롯데백화점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상품본부장과 영업본부장을 거치며 유통 전문가로 경력을 쌓은 이후 2012년 롯데면세점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2014년 롯데백화점 사장에 취임한 뒤 2017년 롯데그룹 부회장 승진과 동시에 유통사업부문장을 맡으면서 전문경영인 부회장단 시대를 열었다.  올해 신임 화학 BU장으로 부임한 김교현(62) 사장은 롯데케미칼의 성장을 견인한 인물이다. 경신고와 중앙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김 사장은 2014년 롯데케미칼 타이탄 대표이사로 취임해 동남아 시장 개척과 실적 개선을 이루어 냈다. 2017년 롯데케미칼 대표이사로 취임 후 타이탄의 말레이시아 현지 증시 상장과 창사 이래 최대 영업이익을 달성하는 성과를 이끌었다.  롯데그룹 호텔&서비스BU장인 송용덕(64) 부회장은 롯데호텔이 개점한 1979년 입사해 40여 년간 호텔업계에 종사한 국내 최고 전문가다. 영업, 마케팅, 제주 총지배인 등 여러 업무를 두루 거쳤으며 2011년 호텔롯데 모스크바 법인인 RUS 대표이사를 맡아 호텔롯데 모스크바를 러시아 최고 호텔로 이끌었다. 2012년 호텔롯데 대표이사를 맡은 뒤 2017년 호텔&서비스BU장으로 선임됐다. 자사 출신 1호 대표이사를 거쳐 전문경영인으로 부회장까지 오른 호텔업계 입지전적 인물이다. 양정고, 한국외대 영어과, 경희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거쳐 경기대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텔리’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황성기 칼럼] 한·일은 파탄을 두려워 말라

    [황성기 칼럼] 한·일은 파탄을 두려워 말라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얘기다. 위기의 불똥이 독감 백신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하던 국내 업체에까지 튀었다. 2007년 100엔에 700원대이던 엔·원 환율이 그해 연말 사상 최고치인 1600원대까지 치솟은 것이다. 일본에 지불해야 할 대금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업체 대표는 발만 동동 굴렸다. 수입을 줄이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독감 백신 대란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했다. 결국 대표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사정을 털어놓자 백신 원료를 공급해 주던 일본 업체는 흔쾌히 가격을 깎아 줬다. 당시 일본에는 독감 백신을 제조하는 업체가 6곳 있었다. 5곳이 일본 국내 공급을 전담하고 1곳만이 한국 등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업체는 거래처인 한국 업체와의 수십년 신의를 고려해 값을 내려 주고, 원료 공급에도 차질이 없도록 해 줬다. 백신 원료를 전량 수입하던 시절이다. 대표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제약업계에서는 한·일 간의 정치적 위기에도 상관없이 상생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한국 대법원 징용 판결은 국제법 위반” 발언(1월 1일)에 외교부가 유감을 표명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정부는 좀더 겸허해져야” 언급(1월 10일)에 외무성 부대신이 “심히 유감”이라고 되쳤다. 양국 정상의 발언에 대해 외교 당국자가 신경질적으로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이다. 서로 대포만 안 쐈지 ‘할 테면 해봐라’ 식의 전쟁 일보 직전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판결이 지금 한·일 위기를 불렀지만, 뿌리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있다.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의 국교정상화 협상은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정치 타결로 끝났다. 일제 식민지배가 합법(일본)이냐 불법(한국)이냐를 협정에 분명히 하지 못했다. 한국이 첫 회담부터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제기하자 일본이 맹반발하고 미국이 얼른 개입해 봉인해 버렸다. 외과 수술로 치면 몸 안에 메스를 놔두고 봉합한 것이다. 한·일의 지난 54년은 청구권협정이란 부실한 불쏘시개로 일제 강점이란 역사 문제를 강제 소각시키려 한 과정이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대법원 판결이 보여 주듯 결코 태울 수 없는 불완전 연소였는데도 말이다. 한·일이 식민지배의 불법·합법성, 개인청구권의 소멸 여부를 명명백백 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 타지 못한 역사 문제로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다. 한·일이 65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파국을 맞을 수도 있지만,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은 링에 올라와 있다. 법원이 배상판결의 강제집행 신청을 받아들이자 분쟁 상태라 보고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끌고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우리 측에 외교 협의를 요청했다. 우리는 총리실 주도로 관계 부처 대책을 짜고 있다고 하나 두 달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한국 정부 책임하의 징용 피해자 보상, ICJ 회부 등의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으나 이참에 협정의 근본을 따져 화근을 남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양국의 포털 사이트를 보면 반일에 비해 반한·혐한 보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데 놀란다. 2000년대까지 한국의 반일 보도가 양적에서 우세했으나 지금은 한국은 무관심에 가깝고 일본 혼자서 지글지글 들끓는다.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평양 정상회담 이후 일본에 불어닥친 ‘북한 때리기’가 십수년 지나 ‘남한 때리기’로 바뀐 느낌이다. 한국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증식되는 게 남의 나라 일이라고 방치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1000만명이 왕래하고 물건, 돈이 자유롭게 오가는 21세기에 외교 대립이 뭔 대수냐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의 정치 갈등이 앞서 든 제약회사 사례와 같은 풀뿌리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옳지 않다. 파탄과 관계 회복의 갈림길에 왔다. 단기처방, 백약이 무효한 시대다. 파탄을 두려워 말고 한·일이 끝까지 싸워 보기를 권한다. 파탄 뒤의 후유증이 두렵거나 역사에 오명을 남길 것 같다면 두 지도자가 무릎을 맞대는 길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북·일 정상회담에 관심이 팔려 있다. 현해탄을 끼고 번지는 가까운 불부터 끄는 게 순서다. 정상의 셔틀외교가 7년간 중단된 지금의 한·일은 정상이 아니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씨줄날줄] 노딜 브렉시트/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노딜 브렉시트/이두걸 논설위원

    40년 넘게 한 이불을 썼던 부부에게 ‘아름다운 이별’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혼도장(브렉시트)도 찍고 재산분할 협의(브렉시트 합의안)까지 끝냈으면서도 결별은 지지부진하다. 영국과 유럽연합(EU) 이야기다. 영국 하원이 15일(현지시간) 브렉시트 합의안을 부결시키면서 전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자칫 영국이 아무 협정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No deal Brexit)가 벌어질 가능성도 높아졌다. 영국은행(BOE)은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영국 국내총생산(GDP)이 8% 감소하는 등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상의 충격이 가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영국 하원의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 결과는 반대 432표로 찬성 202표를 압도했다. 노동당 등 야당은 물론 집권 보수당에서도 100명 이상이 반란표를 던진 탓이다. 이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백스톱’(안전장치)이다.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섬(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과 아일랜드섬 북쪽의 북아일랜드로 이뤄져 있다. 아일랜드섬은 신교 위주의 북아일랜드와 구교 위주의 아일랜드로 분단돼 있다. 양측에서는 254곳의 이동 통로를 통해 하루 4만명과 막대한 물류가 통관 절차 없이 오간다. 영국과 아일랜드 모두 EU 회원국인 까닭이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에는 국경이 되살아난다. 아일랜드는 EU에 남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과 함께 EU를 떠난다. 백스톱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 통제를 하지 않고 북아일랜드는 EU의 관세동맹 안에 남기기로 한 조항이다. 아일랜드가 다시 나뉘어지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을 사실상 없애기로 한 1998년 ‘벨파트스협정’이 무력화될 수 있어서다. 이 협정을 계기로 20세기 후반 영국은 물론 전 유럽을 공포로 떨게 했던 구·신교도 간의 유혈 분쟁과 테러가 종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당 안 브렉시트 강성 지지자들은 백스톱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북아일랜드의 경제 주권을 EU에 넘기는 건 물론 영국이 EU의 정책에 뒤따라가는 등 새로운 주권 침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게 이유다. ‘노딜 브렉시트가 차라리 낫다’는 의견까지 표출되는 까닭이다.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더라도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전체 수출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 그친다. 16일 주가와 환율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건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선진국 경기 침체 가능성과 미·중 무역분쟁 여파에 더해 노딜 브렉시트가 세계 경기 침체의 ‘방아쇠’가 될 것이라는 우려는 더 높아진다. 수출 국가인 한국이 ‘8900㎞ 밖의 대혼란’을 ‘강 건너 불구경’할 처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douziri@seoul.co.kr
  • [길섶에서] 제2의 천성/박현갑 논설위원

    못 고치는 습관이 있다.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 보는 습관이다. 뉴스 보고 음악도 듣는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내려오면서 휴대전화를 이마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 있다. 폭음이다.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이 술을 마시는 순간이 온다. 고마운 습관도 있다. 구직 면접에서 절약정신을 강조한 면접생이 회사 전기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합격했다는 얘기가 있다. 면접관이 입사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한 채 면접장을 나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사무실 전원 스위치를 내려 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잦은 술자리에 따른 건강관리를 위해 하루 2만보를 꾸준히 걸었더니 고혈압 등 성인병을 잊고 지낸다는 지인도 있다. 습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이는 경험이나 학습이 반복된 행동양식이다. ‘제2의 천성’으로 불린다. 처음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는 말도 있다. 사회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반복하는 습관은 관습이다. 미풍양속이 좋은 관습이라면, 갑질은 악습이다. 정치인의 상습적인 거짓말도 악습이다. 악습은 없애고 미풍양속은 키울 ‘좋은 습관 배양술’은 없을까. eagleduo@seoul.co.kr
  • [씨줄날줄] 세계 민중사 바꾼 3·1운동/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세계 민중사 바꾼 3·1운동/박록삼 논설위원

    명월관은 고급 요릿집이었다. 궁중 음식을 책임지던 안순환이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 만들었다. 1909년이었으니 일제의 강제 병합인 경술국치 바로 그해였다.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일제로 넘어가던 때 임금의 요리사가 저잣거리로 나온 셈이니 그 씁쓸한 상징성 또한 컸다. 가야금과 창가에 능한 미색의 기생들이 있어 당대 고관대작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다. 우리가 역사책 속에서 봐왔던 3·1운동의 시발이 된 역사적 장소 태화관은 바로 이 명월관의 별관이다. 민족 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남짓 태화관에 모여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문을 낭독 없이 채택한 뒤 총독부에 그 사실을 알렸다. 민족 대표들은 체포를 위해 인력거를 가져온 헌병들에게 자동차를 가져오라고 돌려보냈고 택시 일곱 대에 나눠 타고서야 경무 총감부로 붙잡혀 갔다거나, 학생 대표들이 찾아와 거세게 항의했지만 탑골공원 앞에서 낭독하기 어렵다는 민족 대표들의 뜻을 바꾸지 못했다는 등 ‘몇몇 소소한 사실관계’는 많은 이들에게 3·1운동의 무기력함, 자조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3·1운동은 폄훼될 대상이거나 교과서 속에 박제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이날 비슷한 시간, 오지 않는 민족 대표를 기다리던 수십만의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 등 각계각층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외친 ‘조선독립만세’를 시작으로 3~4월 사이 일제 헌병과 기마부대의 폭력적 진압 속에서도 수천 회의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혈사’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200여만명이며, 7509명이 숨졌고 1만 5850명이 다쳤다. 체포된 이 또한 4만 5306명에 이른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몇몇 지도자 혹은 조직된 단체 주도가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난 전민항쟁에 가까운 성과였다. 나아가 군주제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정치적 토대를 쌓는 계기가 됐다. 3·1운동이 아닌 ‘3·1혁명’이라는 위상이 더욱 걸맞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3·1 운동은 당시 뉴욕타임스, AP통신, 민국일보 등 주요 외신을 통해 세계에 타전됐고,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해외 민중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됐다. 인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모체가 됐고,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민중들이 5·4운동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됐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14일 3·1운동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만시지탄이지만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다.
  • [서울광장] 노영민 실장이 성과를 내려면/이종락 논설위원

    [서울광장] 노영민 실장이 성과를 내려면/이종락 논설위원

    노영민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임명 하루 만인 지난 9일 자신이 지휘할 청와대 비서실의 3대 원칙으로 ‘성과·경청·규율’을 제시했다. 노 실장은 청와대 전 직원에게 발송한 서신에서 “성과를 내는 청와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초부터 경제·민생 정책에서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제시한 상황에서 비서진도 이를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킨 셈이다.그러나 비서실장이 취임 일성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는 포부를 밝히자 기대감에 앞서 우려 섞인 반응도 적지 않다. 임종석 비서실장과 장하성 정책실장 재임 시 청와대가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고, 국회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는 평가 때문이다. 이번 2기 청와대 비서실은 부처에 최대한 자율권을 보장하고, 국회와의 소통에 적극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 많았다. 그런데 노 실장이 취임하자마자 “성과를 내야 한다”고 말하니 곱게 들릴 수가 없었을 테다. 특히 노 실장은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비서실장을 맡았을 정도로 최측근이어서 친정체제를 구축한 셈이다. 친정체제는 대통령이 편하게 지시하고 기댈 수 있다는 점에서 청와대 그립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상존한다. 다행히 노 실장이 취임 직후 국회를 찾아 소통 강화 의지를 전한 것은 기대할 만하다. 문제는 부처와의 관계 설정이다. 청와대는 노 실장 취임 전부터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원톱’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 시장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천거한 홍 부총리가 문 대통령의 공약 수립뿐 아니라 현 정부 정책을 설계하고 추진해 온 김수현 정책실장에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불식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노 실장의 절박한 메시지는 정책실장뿐만 아니라 비서실장까지 부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로 들릴 수도 있다. 서둘러 청와대와 부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해 줘야 한다. 문 대통령은 노 실장에게 임명장을 준 뒤 “비서실장도 경제계 인사를 만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의 주문에 노 실장이 성과를 낼 수 있는 답이 있다. 기업이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늘리도록 경제활력을 내는 데 노 실장이 온몸을 던지는 길이다. 우리 경제는 연초부터 적신호가 켜졌다. 관세청 집계에 따르면 이달 10일까지 수출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7.6% 급감했다. 장기간 실업 상태에 있거나 일감 찾기를 아예 포기한 인구가 지난해 250만명을 넘어섰다. 부정적인 기업관을 가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다니면서 우리 기업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1년 9개월 만인 2004년 11월 남미 순방 중에 브라질 교민 간담회에서 “한국이 발전한 진짜 이유를 브라질에서 새삼 깨달았다”면서 “한국 기업에 대해 다시 한번 평가하고 싶다”고 말한 뒤 적대적 기업 정책을 수정했다. 실제로 기업 관계자들은 “역대 정권 중 노무현 정권 때가 기업 하기가 제일 편했다”고 회고한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임기초 지지율이 20%대로 급전직하했다. 하지만 MB 정부는 ‘공생발전’ 등 친서민 정책을 추진하며 지지율을 단숨에 50%대까지 끌어올렸다. 정책 기조 변화를 통한 국정 운영에 성공한 사례다. 경제의 대기업 과잉 의존 체질을 바꿔 나가는 정책은 필요하다. 대기업의 갑질 행태와 재벌 3, 4세들의 철부지 일탈도 일벌백계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을 제쳐 놓고선 경제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선진국 정부가 대기업을 협력 파트너로 삼아 법인세 인하 등의 당근책을 던져 주며 내수 진작과 수출을 독려하고 있다. 이런 외국기업들과 피말리는 ‘외로운 경쟁’을 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에 기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 바로 그 역할을 노 실장이 맡아야 한다. 노 실장은 3선의 의정 활동 기간에 산업통상자원위원만 6년을 했다. 19대 국회에서는 산업통상자원위원장도 맡았다. 국회 내 대표적인 ‘산업통’, ‘기업통’으로 통한다. 어제 가졌던 ‘기업인과의 대화’를 보여 주기식 이벤트로 끝내선 안 된다. 기업 애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노 실장이 진솔한 마음으로 기업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해 대기업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화답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기업의 얼어붙은 마음을 열어젖혀야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노 실장은 명심했으면 한다. jrlee@seoul.co.kr
  • [길섶에서] 조약돌의 사연/손성진 논설고문

    겨울 바다에서 본 것은 바다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작은 조약돌이었다. 누구라도 귀찮다는 듯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미물(微物).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돌들은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밀려 들어갔다가 다시 파도에 떠밀려 나온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김새가 참 신기하게 제각각이다. 둥근 꼴, 세모꼴, 산(山) 모양, 하트 모양…. 바다에 이르기까지 조약돌에게는 무척이나 험난했을 여정을 고스란히 품은 형형색색이다. 어쩌다 산들에 있을 돌이 바다로 밀려왔을까. 조약돌의 근원을 알고 싶으면 시간을 거슬러 수천만 년, 수억 년의 지난 세월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큰 암석이 천둥 번개에 쪼개지고 비바람에 부딪히며 닳고 달았을 것이다. 폭풍우는 작은 돌들을 산에서 들로 마침내 바닷가로 데려왔을 것이다. 도심의 잡초엔 어떤 녹초방화(綠草芳花)에도 없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씨앗은 바람만 불면 척박한 땅을 향해 무거운 몸을 띄웠을 것이다. 작고 하찮은 것들에도 저마다의 사연과 가치가 있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곤 마지막 정착지 해변에 도착한 조약돌엔 알지 못할 기품이 서려 있다. 그래서 가벼이 볼 수 없다. 사람을 볼 때도 그렇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