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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광고 엿보기] 영일 연합군 칭다오 함락 축하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영일 연합군 칭다오 함락 축하 광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칭다오 맥주로 유명한 중국 칭다오를 영국과 일본 연합군이 함락한 것을 축하하는 광고가 매일신보에 실렸다.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일신보는 축하 광고를 이따금 실었다. 특히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는 광고주들을 끌어들여 축하광고를 실었다. 1914년 8월 31일자는 4면에서 6면으로 늘려 발행하면서 천장절 광고로 1면부터 6면까지 광고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1924년 6월 10일자에는 매일신보 사옥 신축 광고도 1개 면을 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영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했던 일본은 동맹 관계를 이유로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과 일본이 연합 작전으로 독일의 조차지인 키아우초우를 습격해 함락하고 칭다오를 점령했다. 일본과 영국의 첫 연합작전인 이 전투를 칭다오전역(戰役)이라고 부른다. 당시 칭다오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5000명에 불과해 10배나 되는 일본 침략군과 영국군에 중과부적이었다. 전투에서 이긴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칭다오를 지배했다. 일본의 칭다오 지배와 산둥반도 문제는 중국 5·4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칭다오는 중국에 반환됐다. 칭다오는 원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지만 청일전쟁 후인 1897년 독일은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자오저우만에 침입한 뒤 이듬해 자오저우만의 조차권을 얻어 칭다오 조계지를 설치했다. 독일은 17년 동안 칭다오를 조차하면서 붉은 지붕의 건물과 맥주를 남겼다. 칭다오 맥주는 1903년 칭다오의 맑은 물과 독일의 맥주 제조기술이 결합돼 탄생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과 일본은 두 차례 동맹을 맺었다. 1902년의 1차 영일동맹은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적으로 삼아 러시아의 동진(東進)을 막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나눠 가지려 맺은 조약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만주에서 축출했고 한국에 대한 독자적인 침투 권한을 보장받았다. 1905년의 2차 영일동맹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두 제국주의 국가의 약소국 침략권을 서로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즉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보장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의식해 영국은 3·1운동도 일본의 발표 내용을 아주 작게, 그것도 늦게 보도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 ‘더 타임스’는 1919년 3월 19일에야 3·1운동을 ‘소요’나 ‘폭동’으로 묘사하면서 짤막하게 보도했다. 4월 10일자에는 ‘한국의 볼셰비즘’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의 폭도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관공서를 불태웠다고 보도했다. 3·1운동을 공산주의자의 소요 사태로 왜곡·축소 보도한 것이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홀로 지내기/이동구 수석논설위원

    거실 창문 넘어 과수원의 농막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꽃을 떨구고 열매를 키우는 계절의 과수원은 적막했지만 너무 편안한 느낌이었다. 과수원을 감싸고 있는 뒷동산의 신록은 여왕의 손길인 양 포근하면서도 경이롭게 일렁였다. 홀로 있는 시간이 잦아진다. 여럿이 함께 지내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만남의 횟수도 확연히 줄었다. 낯선 만남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뜸하다. 업무로 이어지는 것 이외의 새로운 만남은 피하고 싶다. 낯설고 공식적인 자리는 더욱 불편하다는 느낌이다.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시간이 늘어난다. 생각은 많아지나 머릿속은 늘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에 혼자 있는 것을 싫어했던 적도 있었다. 소소한 것에도 관심을 주고,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약속이 없다면 먼저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 며칠간 술 약속이 없을 때면 외톨이가 된 허전함에 몸부림을 치기도 했었다. 바람이 지나간 뒤의 고요함이랄까. 이제는 차분하고 고즈넉한 삶에 익숙해지고 싶어진다. 나이 탓인지 모를 일이다. 이왕이면 후퇴가 아닌 깊이를 더하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2막을 준비하는 연기자의 마음처럼 한층 성숙한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즐기고 싶다. yidonggu@seoul.co.kr
  • 日 극우논객 “일본이 남긴 재산으로 한국 발전” 황당 주장

    日 극우논객 “일본이 남긴 재산으로 한국 발전” 황당 주장

    “과거 보상 문제는 한국에서 처리하면 돼”‘일본이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 日정부 주장일본 우익 언론이 일본 자산으로 한국이 발전했으니 배상 문제는 한국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다. 일제강점기 징용 배상 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강제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일본엔 배상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반도에서 수탈한 막대한 재산과 자원,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비판 여론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주재 객원논설위원은 7일 ‘발전의 근원은 일본 자산’이라는 제목의 기명 칼럼에서 “패전 후 일본인이 한반도를 떠날 때 남긴 거액의 재산이 미국을 거쳐 한국 측에 양도됐고 경제발전의 기초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이 남긴 자산총액이 당시 통화로 52억 달러였고 현재 가치로 수천억달러(수백조원)는 될 것이라며 “방대한 일본 자산을 생각한다면 최근 징용공 보상 문제 등처럼 이제 와서 한국 내 일본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른바 과거 보상 문제는 모두 한국에서 처리하면 될 이야기”라고 썼다. 그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끝내고 한국을 떠날 때 두고 간 재산(적산)에 관해 다룬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저서 ‘귀속재산연구’(2015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런 주장을 폈다. 이 명예교수는 이영훈·김낙년·이우연·주익종 등 ‘반일종족주의’의 주요 저자가 몸담은 낙성대연구소 창립자다. 구로다 객원논설위원은 SK그룹의 모체인 선경직물이 식민지 시절 일본인의 회사였다면서 “1945년 패전으로 일본인이 철수한 후 종업원이었던 한국인에게 불하돼 한국 기업이 됐다”고 쓰기도 했다. 앞서 일본 정부도 한일 간 과거사 대립이 격해진 시기에 ‘일본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메시지를 뿌렸다. 일본 외무성은 2015년 각국 언어로 제작한 ‘전후 국제사회의 국가건설: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일본’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에서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국제사회에 복귀한 일본은 1954년 미얀마를 시작으로 일찍부터 아시아 각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개시했다”며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등을 사례로 들었다.구로나 객원논설위원의 칼럼이나 외무성의 동영상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수탈, 착취, 인권 침해 등의 실상은 소개하지 않고 일본이 남기거나 제공한 것만 부각했다. 징용 과정에서 다수의 불법 행위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배상 책임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단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앞서 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징용 피해자를 부린 것이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해 원고(징용피해자)들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일본 기업이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확정판결했다. 대법원은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과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은 별개라는 의미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서울광장]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세력/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세력/오일만 논설위원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파문 이후 숨죽이던 한일 양국의 극우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다. 군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심지어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뉴라이트의 핵심이자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 전 교수 등을 비롯한 다양한 친일 단체들이 주축이다. 이들은 “위안부업은 기존 공창제에서 비롯됐고 여인들의 의지와 선택에 따른 소영업”이라는 주장을 폈다. 한 술 더 떠 ‘일본군에 의해서 통제된 위안소라는 점은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일본 극우의 주장까지 답습한다. 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교학사 교과서, 국정 교과서 등을 주도했지만 지나친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처분됐다. 학문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음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뉴라이트 세력이 고개를 드는 근본적 이유는 식민사관에 있다. 해방 후 식민사관을 청산하지 못한 업보인 셈이다.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등용은 경찰·관료·군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역사학계도 식민사관의 제조기였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대거 기용됐다. 이들은 교육부 장관·학술원장 등의 권력을 통해 소위 ‘이병도·신석호 사단’을 만들어 냈고 현재까지 역사학계 주류세력의 뿌리가 됐다. 식민사관은 주지하다시피 일본 군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영구 지배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역사의 날조다. 쓰다 소기치 등 어용학자들이 한민족의 공간과 시간을 축소해 타율성과 정체성의 굴레를 씌웠다. 한마디로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한 민족’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런 식민사관은 현재까지도 고대사를 중심으로 횡행한다. 존 카터 코벨(1910∼1996) 박사의 좌절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 태생으로 서양인 최초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 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꼽혔던 그녀는 연구 도중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 대부분이 한국에 뿌리를 뒀다는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됐다. 1978년부터 10여년간 한국에서 직접 현지답사를 하며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토대로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을 뒤집는 학설을 발표했다. 바로 “가야 부여족이 서기 369년 일본으로 건너가 왜를 정벌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내용이다. 일본 학계가 발칵 뒤집힌 건 당연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코벨 박사의 주장이 허구라는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그들이 정설이라고 주장하는 ‘임나=가야’의 기본 전제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까닭이다.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새롭게 발전하는 학문임에도 다른 학설을 가차없이 사이비와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역사의 해석을 독점하겠다는, 위험한 시각이다. 코벨 박사는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일본이 한국에 가한 최악의 잘못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 스스로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 것”이라고 기록했다. 한 가지 더 “한국 학자들은 진실을 밝히는 데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는 아쉬움도 남겼다. 코벨 박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재도 식민사관 2.0 버전이 버젓이 활개를 친다. 식민사관이 실증주의 사학이란 명패만 바꿔 단 것이다. 식민사관을 매개로 한일 극우세력들의 연대가 강화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 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아베 정부의 한국 수출 규제 조치 직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일제의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발표를 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그가 일본 역사 수정주의자 후지키 ?이치의 금전적 지원(항공비와 체류비)을 받고 회의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의 증언은 섬뜩하다. 그는 ‘신친일파’란 저서를 통해 “일본 극우세력은 신친일파를 양성하고 있고, 그들의 입을 빌려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증언은 더 구체적이다. “극우단체인 사사카와재단 등은 한국의 학자들에게 고액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어떤 한국 학자는 일본 정부나 공안, 보수단체의 초청으로 1년에 30번 정도 일본을 가는데 사례비로 한 회당 500만~1000만원을 받는다”고 밝혔다. 역사는 민족의 뿌리이자 혼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의 역사 분식이 자행되는 이 시점에도 식민사관의 잔재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친일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선 문재인 정부의 임무는 막중하다.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굴욕의 역사를 가르쳐선 안 될 일이다. oilman@seoul.co.kr
  • [씨줄날줄] 기본소득제와 전국민 고용보험제/문소영 논설실장

    [씨줄날줄] 기본소득제와 전국민 고용보험제/문소영 논설실장

    ‘약자와의 동행’을 내건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기본소득제를 공론장에 다시 띄웠다. “배고픈 사람이 빵집을 지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보고 먹고 싶어 한다. 그런데 돈이 없어 먹을 수 없다. 그 사람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나”라며 통합당의 경제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기본소득제를 도입하되 수혜의 범위는 재원의 규모에 따라 절충할 것으로 보인다. 6공화국 헌법으로 불리는 현행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 119조 2항의 설계자다운 담대한 발상이다. 기본소득제는 4년 전인 2016년 김 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에서 비대위 대표를 할 때 처음 내놓은 정책이다. 그해 총선에서 승리한 김 위원장은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언급했다.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도 ‘기본소득제 시행은 시기상조’라며 연설문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지만, 당시 연설문에서 ‘기본소득’은 살아남아서 의제가 됐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통합당 제안에 “시기상조”라는 반응을 보였다. 4년 만에 여야가 복지정책에서 공수가 바뀐 것이다. 이런 전환은 ‘위기의 정당 해결사’가 존재하는 특이한 한국적인 정치 상황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적 위기에 빠진 국민을 돕기 위해 일회성으로 ‘긴급재난기금’을 모든 가구에 주자는 논의를 두고 소득하위 70%에 한정해야 한다거나, 현금 살포식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은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쉽지 않은 정책이다. 기본소득은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빈곤선 이상으로 살기에 충분한 월간 생계비를 지급하는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이다. 선별적 복지를 주장해 온 통합당이 이 정책을 어떻게 전개해 갈지 궁금하다. 기본소득제 도입은 1982년 미국 알래스카가 처음 시도했다. 석유수출 수입으로 기금을 만들어 6개월 이상 거주한 시민에게 지급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기본소득제와 관련한 뉴스는 2016년 스위스가 기본소득제 도입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된 것이다. 김 위원장이 기본소득제 도입을 처음으로 거론하던 그 시기이다. 흔히 기본소득제를 좌파의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 제도의 도입 논의는 해외에서 보수정당들이 시작했다. 통합당의 기본소득제 도입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없애고자 전 국민 고용보험제 도입을 약속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역시 재원 마련이 과제다. 정치란 국민을 위해 자원을 배분하는 행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야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복지 문제로 경쟁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다.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긍정의 힘/손성진 논설고문

    만물은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노변에 핀 유월의 장미가 유난히 붉습니다. 오늘 밤 저 별들은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사람들은 장미 따위가 뭐냐며 무심하게 지나칩니다. 별 따위가 무슨 대수냐며 외면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가슴에 심고 작은 별 하나를 눈 속에 담았습니다. 식어 버린 심장에는 엄마의 손길 같은 온기가 퍼지고 침침한 눈은 여명의 어둠이 걷히듯 환해집니다. 장미와 별을 무기처럼 장착한 내 몸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것이 느닷없이 날아와서는 나를 할퀴려 들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선 장미를 떠올리고 별을 불러냈습니다. 살짝 생채기가 났습니다만 그들이 잘 막아 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속삭여 주었습니다. 쉿, 넌 괜찮아.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난 아무렇지도 않아.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세상이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G7과 G11/오일만 논설위원

    [씨줄날줄] G7과 G11/오일만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 워싱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을 초대하면서 G11 혹은 G12 탄생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으로 구성된 G7에 한국, 러시아, 호주, 인도가 참여하면 G11, 브라질까지 더하면 G12가 된다. 청와대가 중국 눈치를 볼 줄 알았더니 트럼프 입에 묻은 침이 마를세라 얼른 참가를 표명했다. G7은 의장국 권한으로 비회원 국가를 초대할 수 있다. 중국 국가주석, 인도 총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이 의장국 초대로 참가한 적이 있다. 2010년에는 확대회의가 개최돼 아프리카 대륙에서 알제리ㆍ에티오피아ㆍ나이지리아ㆍ세네갈 등 6개국, 중남미에선 콜롬비아 등 3개국이 참여했다. 따라서 워싱턴 G7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망할지는 리더 격인 미국의 의중을 살필 수밖에 없다. 게다가 2014년부터 참가 자격이 정지된 상태인 러시아도 G11으로 가는 큰 변수다. 러시아는 동서냉전이 끝나면서 98년부터 정식으로 참가해 G8 회원이 됐지만, 크림반도 강제 합병으로 여타 7개국이 참가 자격을 뺏은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도 지명했지만 영국과 캐나다, 유럽연합(EU)이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러시아의 G7 참가는 불투명해졌다. 일본은 북방 4개섬 반환을 현안으로 둔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갈 수 있다. 1973년 오일 쇼크로 침체된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5개국이 만든 G5에 이탈리아(1975년), 캐나다(1976년)가 가입함으로써 G7이 됐다. 7개국의 인구는 세계의 10%밖에 되지 않는데도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세계 200여개 국가의 50%를 차지하는 지구촌 경제의 리더그룹이자 최고의 선진국 클럽이다. 러시아를 뺀 G10이든 G11이든 정치·경제를 주도할 새 체제에 한국이 참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크 덩어리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중공’으로, 국가주석을 총서기로 표현하는 등 중국 포위망을 노골화하는 가운데 나온 돌발적 구상이라 찜찜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지 못하면 G11 구상은 물건너가고, 한국 등의 초청은 의장국의 단순한 일회성 권한 행사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한국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했던 일본이 한때 이들 표현을 삭제했던 만큼 한국의 확대 G7 체제 편입에 선뜻 찬성표를 던져줄지는 미지수다. 국격 상승 운운하며 들뜨지 말고 차분히 지켜보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권하고 싶다.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만화 ‘짱뚱이’/박록삼 논설위원

    부지런한 초여름 해보다 더 일찍 일어난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새벽녘부터 마루에 나와 낄낄거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 보니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배꼽을 부여잡고 정신을 못 차린다. 그리고 만화책을 덮은 뒤 퍼붓는 질문 공세. “곤로가 뭐야?”, “라면에 왜 국수를 넣어 먹어?”, “옛날엔 바나나가 그렇게 비쌌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1960년대, 그것도 꽤 벽촌인 마을 일상을 담은 책이니 ‘산업화 세대 아빠’에게도 어렵다. 해질 무렵엔 얘들 엄마가 또 같은 만화책을 보면서 함참 웃어대다가도 잠시 뒤엔 눈물 찍어내느라 바쁘다. 그러다 모녀 간 궁금증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 피우기 바쁘다. 집안이 만화 ‘짱뚱이’에 푹 빠졌다. 짱뚱이 시리즈는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법한 옛날 얘기이건만 흡입력이 높다. 마을 잔치마다 나타나는 일꾼이자 거지인 살강쇠 얘기, 몸이 아픈 동생을 귀찮아 하다가도 속깊은 정 드러내는 얘기, 키우던 개가 홀연히 사라져 안타까워하는 얘기, 아이 눈에 비친 시골장날 풍경은 정겨움 그 자체다. 세대 간 듬직한 다리가 놓인 듯하니 반갑고 기쁘다. 아이가 자꾸 물어오는 전라북도 사투리에 답하는 게 은근히 어렵다. youngtan@seoul.co.kr
  •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가 다음달 4일 돛을 올립니다.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예년보다 3개월가량 늦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답사 횟수를 20회로 줄였고 참가자 수도 20명 이내로 제한합니다. 이에 앞서 서울신문 지면 투어로 갈증을 풀어 드립니다. 1회 인사동(4일), 2회 대학로(10일), 3회 여의도(17일), 4회 동대문(24일), 5회 성수동(7월 1일) 등 5개 지역을 찾아갑니다. 이들 지역의 유·무형 서울미래유산을 집중 탐구하고 ‘장소인문학’의 비밀을 풀어 줄 것입니다. 장태동, 최석호, 권기봉씨 등 서울역사 여행가들이 해설자와 집필자로 새롭게 나섭니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이소영 동화작가, 함혜리 문화칼럼니스트, 서동철 문화재위원,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등 역대급 필진을 초빙해 투어의 격을 높였습니다. 답사투어는 다음달 4일부터 11월 4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진행하고 예약은 투어 전주에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 홈페이지에 하면 됩니다. 관련 기사는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 지면에 게재됩니다.●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서울광장] 먹거리로 꿈꾸는 새로운 세상/장세훈 논설위원

    [서울광장] 먹거리로 꿈꾸는 새로운 세상/장세훈 논설위원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농민과 자영업자가 위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농민은 농산물 판로가 막히고, 음식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는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그러나 역으로 ‘농민과 자영업자의 위기가 아닌 때도 있었냐’는 질문에 답을 내놓기도 궁색하다. 그만큼 고질적인 문제이자 외부 충격에 취약한 영역이란 것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코로나19 방역으로 한국 사회가 전 세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품격’을 보여 줬지만, 농민과 자영업자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약속한 농업·자영업 대책이 제대로 이행되면 농민과 자영업자가 잘사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 간단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해가 얽히고설켜 있다는 사실은 당사자들이 먼저 알고 있다. 농민들은 수입 농산물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외식업체는 비용 상승과 매출 감소로 맥을 못 추는 실정이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통계청 등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기준 농업·임업·어업 등 1차 산업의 인구는 269만여명, 관련 취업자 수는 134만여명이다. 조직화·규모화가 이뤄진 농어업법인 종사자는 16만 8000여명에 불과해 대다수가 ‘1인 경작’, ‘가족 영농’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체 취업자 수에서 차지하는 농림어업인의 비중(5.0%)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1.9%)보다 훨씬 높은 것도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외식업체도 영세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외식산업 통계연감 등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전체 외식업체 65만 7000여개 중 대형 외식업체(2만 3000여개)와 프랜차이즈업체(9만 9000여개)를 제외한 소규모 외식업체가 전체의 81.4%를 차지한다. 외식업체 매출 규모가 연간 108조원에 이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연매출이 채 1억원도 되지 않는 곳이 전체의 61.0%이다. 흔히 인건비(매출 대비 평균 비중 18.6%)와 임대료(8.0%)가 이들을 옥죄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식재료비(37.8%) 부담이 이 둘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것이 현실이다. 흔히 ‘200만 농민’, ‘200만 외식인’이라 칭한다. 이들 중 대다수는 판매할 농산물과 구매할 식자재가 상대적으로 적어 각각 수익을 올리거나 비용을 줄이는 게 쉽지 않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공급·구매 능력이 떨어지는 이른바 ‘큰 돈 안 되는 고객’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를 ‘시장의 실패’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시장에서 소외된 영역이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특히 농민과 자영업자 간에 더 많은 이익을 챙기거나 뺏기는 ‘시소게임’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현 정부가 농업 정책의 일환으로 쌀값 인상을 추진해 지난 2016년 80㎏당 12만원 수준이던 산지 쌀값은 현재 19만원 안팎으로 올랐다. 문제는 쌀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업종에서는 비용이 급등한 탓에 국산쌀을 수입쌀로 대체하고, 국산쌀을 고집하려면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 결국 국산쌀의 소비가 감소하거나 재료값의 소비자 부담 전가가 발생한다. 농업과 외식업은 먹거리를 기반으로 한 공생 산업이자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한 기반 산업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제값에 팔고 싶은 농민, 싼값에 사고 싶은 자영업자 간 ‘이익의 균형점’을 찾아줄 혁신이 필요하다. 농산물 유통의 다양성 확대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농산물 유통비용률은 기회요인이다. 실제 지난 2017년 기준 주요 농산물 34개 품목의 평균 유통비용률은 49.2%이다. 유통과정에서 생긴 비용과 이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가격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얘기다. 최근 ‘못난이 감자’와 ‘못난이 왕고구마’ 판매 사례에서 보듯 등급 판정을 받지 못한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긍정 요인이다. 겉모습만 다를 뿐 질적 차이는 거의 없는 농산물 거래를 활성화해 농민에게는 판매이익을, 자영업자에겐 식자재 구입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양파, 마늘, 배추 등 주요 농산물이 풍작이면 산지가격이 폭락하고 출하하기보다 산지에서 폐기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이를 방지하려면 수요·공급에 대한 예측 시스템을 정교하게 구축해야 한다. 현재의 농업 및 자영업 통계는 ‘추정’의 수단일 뿐 ‘실측’의 자료로는 한계가 많다. 농산물 통계의 혁신이야말로 농업과 자영업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으로, 빅데이터를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shjang@seoul.co.kr
  • [씨줄날줄] 커닝(cunning)/이동구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커닝(cunning)/이동구 수석논설위원

    학창 시절 선생님 몰래 시험 답안을 베껴 보려는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을까. 감독자 몰래 미리 준비한 답을 보고 쓰거나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을 우리는 커닝(cunning)이라고 한다. 교활하다는 의미이다.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속인다(cheating)는 의미보다 좀더 혐오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시험에서의 부정행위, 즉 커닝은 나쁜 행위임에 틀림없다. 다른 사람의 중요한 기회를 빼앗는 커닝이라면 범죄로 다뤄져야 마땅하다. 사회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임관을 앞둔 사관생도가 커닝이 적발돼 퇴학 처분을 받자 소송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관생도는 장차 지휘관으로 장병들의 생명과 국가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므로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부정행위로 사관생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사관생도의 무게감과 커닝의 부당성을 일깨워 준 판결이다. 조국 전 장관 아들의 미국 조지워싱턴대 온라인 대리시험이 논란이 됐던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시험의 부정과 관련된 기록이 92건이나 된다. 개중에는 부정행위로 과거가 다시 치러지고, 개선을 주문하는 상소문도 있으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년ㆍ광해군 6년)에는 과거장에서 남의 것을 베껴서 답안을 제출하는 게 너무 흔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중기에도 대리시험이 성행했다고 한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1525년ㆍ중종 20년)에 소개된 사례가 압권이다. 세종 병진년(1436년)에 급제한 윤사윤은 답안지에 한마디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과거장에 바람이 불어 자신 앞으로 답안지 초고 한 장이 날아왔고, 이를 보고 그대로 옮겨 적어 장원이 됐다고 소개했다. 코로나19가 각종 시험장의 풍경도 바꿔 놓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종전보다 수험생 간의 간격을 두 배 이상 늘리고 마스크를 낀 채 시험을 본다. 이마저도 불안해 삼성 등 상당수 기업들은 신입사원 공개채용 시험을 온라인으로 본다. 온라인을 통한 시험은 대개 감독관이 없다 보니 커닝에 대한 우려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실제로 최근 수도권의 한 의과대학 학생 91명이 온라인으로 진행된 단원평가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해당 시험만 0점 처리되고 상담과 사회봉사명령 등의 처벌로 수습됐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커닝 같은 부정행위로 얼룩진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커닝에도 경중이 있게 마련이다.
  • [길섶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문소영 논설실장

    한국 언론은 미국 워싱턴DC와 일본 도쿄, 중국 베이징 등에 특파원을 보낸다. 이 중 미국 워싱턴DC가 가장 뜨겁다. 한국의 유력 정치인 등이 자주 방문하기에 끈끈한 인간관계를 쌓고, 기업 해외 주재원과도 다채로운 경험을 나눌 수 있다. 안전하고 다채로운 경력 관리가 가능한 미국 워싱턴DC. 그러나 이는 코로나19 이전 시절의 상식이다. 코로나19로 3월부터 워싱턴DC도 봉쇄됐다. 워싱턴 특파원들도 대사관에 전화해 취재하거나 방구석 1열을 차지한 채 CNN 등을 시청하면서 국제부 기사를 송고하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5월 25일 이후 워싱턴DC는 분쟁국만큼이나 험지가 됐다.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8분45초 목을 눌려 사망한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시위가 미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를 취재하러 나가려면 코로나와 시위대, 경찰의 진압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5월 31일 밤에는 급기야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백악관 지하벙커로 몸을 숨길 만큼 상황이 위급했다. 코로나가 남녀노소와 빈부를 가리지 않듯이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미국의 시위대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뛰어든 것 같다. 억울하게 죽으며 플로이드가 남긴 한마디가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숨을 쉴 수가 없다.”(I can´t breathe)
  • 日 언론 “윤미향 뻔뻔하고 능글맞아…한국인스럽다”

    日 언론 “윤미향 뻔뻔하고 능글맞아…한국인스럽다”

    “박근혜 끌어내린 한국인, 윤미향 사태에선 어떨지” 우익 성향인 일본 산케이신문이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의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의혹에 대한 기자회견을 언급하며 한국인을 비하해 논란이 예상된다. 산케이신문은 2일 이날 ‘한국답게 추궁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윤 의원의 지난달 29일 기자회견 내용을 전했다. “윤 씨에게선 입장이 곤란해졌을 때 한국인에게 흔한 언행과 태도가 보였다”면서 예시로 ‘변명’, ‘자기 정당화’, ‘정색하기’, ‘강한 억지’, ‘뻔뻔함’ 등을 거론했다. 그는 “윤씨의 경우 여기에 능글맞음까지 더해져 많은 시민들로부터 ‘어디까지 뻔뻔할 수 있는가’란 비판이 들린다”고 적었다. 나무라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윤씨는 위안부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금과 기부를 해온 초중고생 등 시민들의 선의를 이용하고 속였던 것”이라며 “촛불집회를 일으켜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한국 시민. 그런 한국다움으로 한국다운 윤씨에 대한 추궁을 계속할 것인지 눈을 뗄 수 없다”고 썼다. 지국장의 이 같은 칼럼 내용은 일단 윤 의원이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그간 제기된 의혹들은 규명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논지를 세우기 위해 변명·뻔뻔함 등을 ‘한국인의 흔한 모습’으로 거론한 사실은 한국인 전체에 대한 조롱으로도 읽힐 수 있어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윤 의원에 대한 ‘색깔론’ 제기 가와무라 나오야 산케이 편집·논설위원은 ‘한일 분단의 이면…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와 북한의 관계’란 제목의 온라인판 칼럼에서 윤 의원에 대한 ‘색깔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 의원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연의 전신) 상임대표 시절이던 2014년 일본 언론들과의 간담회에서 “인도주의적 ‘친북’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북한은 공산주의국가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을 분단해 이반시키는 걸 투쟁원리로 갖고 있다”며 “윤씨와 정대협·정의연의 오랜 활동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증오’가 확대됐고, 자유민주진영인 일본과 한국이 분단됐다”고 주장했다. 산케이는 지난달 20일 자 사설에선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윤 의원과 정의연을 공개 비판한 사실을 들어 주한일본대사관 인근 등지에 설치돼있는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인사] 중부일보, IBK투자증권, 한국원자력연구원

    ■ 중부일보 △ 편집국장 엄득호 △ 논설실장 김영재 △ 정치부 부장대우 정재수 ■ IBK투자증권 ◇ 신규선임 △ 리스크관리본부장 허영범 ◇ 부문장 보임 △ IB1사업부문장(IB2사업부문장·DCM본부장 겸임) 이동구 ◇ 본부장 보임 △ 준법감시본부장(준법감시인) 신호철 △ 전략인프라본부장 문찬걸 △ 금융소비자보호본부장 김재교 △ 자산관리본부장 손관 ◇ 부·팀장 보임 △ 금융소비자보호부장 강근영 △ 글로벌AI팀장 소은석 △ DCM2팀장 박성훈 ■ 한국원자력연구원 △ 양성자과학연구단장 김유종 △ 첨단3D프린팅기술개발부장 김현길 △ 혁신전략연구실장 이동형
  • [씨줄날줄] 1호 법안 유감/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1호 법안 유감/황성기 논설위원

    “1호 법안 제출을 놓고 여야 의원들이 벌인 경쟁은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포퓰리즘’의 발로인 것만은 분명하다. 1호 법안을 접수시키기 위해 국회 의안과 의원 접수센터에서 그제 오전부터 여야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 정도는 애교로 치부할 수 있지만 야당이 추진할 법안들을 보면 인기영합적인 요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20대 국회 임기 개시에 맞춰 쓴 서울신문 2016년 6월 1일자 사설의 한 구절이다. 4년의 시간이 흘러 21대 국회 임기가 5월 30일 시작됐다. 국회의원의 얼굴만 바뀌었을 뿐 ‘1호 법안’ 제출에 집착하는 모습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21대 국회 1호 법안은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이 제출했다. 박 의원은 5월 28일부터 4박5일간 보좌관을 의안과 앞에 번갈아 대기시키면서 의안번호 ‘2100001’이라는 1호 법안 제출의 기록을 세웠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다. 공공기관이 비용절감이나 효율성보다는 인권 보호, 안전한 노동 등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문재인 대통령이 19대 국회의원 시절 냈던 법안이지만 자동 폐기됐다가 20대 때에도 박광온ㆍ김경수 의원 등이 재발의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공기관의 인권보호와 안전한 노동을 내용으로 한 1호 법안을 위해 박 의원이 함께 줄을 선 것도 아니고 보좌관만 4박5일 뻗치기 근무를 시켰다니, 내용과 형식이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닌가 싶다. 21대 국회가 뗀 첫 발자국을 보면 기대는커녕 1호 법안 해프닝의 기시감이 말해 주듯 동물국회와 식물국회, 대한민국 효율 최저의 공공기관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앞선다. 1호 법안이 원안대로 가결된 것은 16대의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 같은 의원 자신들의 돈 문제에 관한 법안뿐이었다. 17대부터 그렇게 고생 끝에 따낸 1호 법안은 모두 폐기됐다. 21대 국회가 원 구성과 관련해 또 삐걱거린다. 민주당은 177석을 무기로 상임위원장 자리 전부를 차지하겠다며, 법제사법위원장과 예산결산특별위원장만은 가져가겠다는 미래통합당과 맞서고 있다. 5일까지 국회의장단, 8일까지 상임위원장 선출을 마치고 국회 문을 여는 광경을 보기 힘들 것 같다. 여야가 1호 법안을 공동으로 제출했다면 어땠을까. 지난 국회를 반성하고 ‘고비용 저효율’의 나쁜 이미지를 불식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한다는 뜻에서 ‘일하는 국회법’을 민주당이 당론 1호 법안으로 할 게 아니라 통합당과 협의해서 냈다면 말이다. 하다못해 ‘1호 법안 보좌관 줄세우기 갑질 금지 법안’을 냈다면 감동스러울 뻔했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밥 인심/박홍환 논설위원

    심술꾼 놀부 부부의 포악한 성질 묘사는 흥부전 곳곳에 장치돼 있다. 흥부가 놀부 부부에게 매 맞는 장면도 그중 하나다. 흥부가 싸라기라도 얻으려고 형네 집을 찾았을 때 놀부는 짐짓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니 급기야 몽둥이 찜질에 나선다. 형수에게 도움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아나 밥, 아나 쌀, 아나 돈!”이라는 비아냥과 밥 푸던 주걱 타작이었다. 판소리 흥부가는 놀부 부인을 “놀부보다 심술보 하나가 더 붙었다”고 설명한 뒤 그녀의 험악한 밥 인심, 곳간 인심을 고발하고 있다.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에서는 밥알 붙은 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은 흥부가 몇 개의 밥알이라도 더 챙기려고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으로 희화화했지만 형수에게 밥주걱 세례를 받은 흥부로서는 하늘이 빙빙 돌고 땅이 꺼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굶는 꼴을 못 보고 최소한 밥만큼은 챙겨 줘야 한다는 밥 인심은 그 숱한 보릿고개를 겪으며 체득한 우리 민족만의 인지상정이라고 할 만하다. 거렁뱅이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밥 인심 고발은 씁쓸하기까지 하다. 모금하느라 쫄쫄 굶은 할머니의 밥 소원조차도 들어주지 못하는 위안부 운동이라면 안 하느니 못하지 않은가. stinger@seoul.co.kr
  • 文대통령이 태종?… 태종은 정치 술수·살상도 주저하지 않았다

    文대통령이 태종?… 태종은 정치 술수·살상도 주저하지 않았다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한 후 문재인 대통령은 공연한 구설에 휘말렸다. 5월 초 이광재 당선자의 영 개운치 않은 비유 탓이었다. “노무현·문재인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 같다. 이제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 피선거권 박탈로 10여년 만에 재기해 흥분한 탓일까? 총기는 사라지고 욕심만 넘쳤다. 3년 전 문 대통령 당선 후 20년 집권 운운했던 이해찬 대표의 언급과 다르지 않았다. 좌충우돌 독설가 진중권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이 나라가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 “서로 징그럽게 얽혀 백 년은 해 드실 듯”. 욕먹어도 쌌다. 어떻게 쿠데타로 아버지(태조)와 형(정종)을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태종에 비유했을까. 더 고약한 것은 ‘세종의 시대’를 언급한 부분이었다. 문 대통령은 장차 도래할 ‘성군의 치세’로 건너가는 교량이라는 것일까? 칭찬인지 가르침인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세종이란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일까. 이광재 본인? 태종이라면 대역죄로 처단했다. 그는 ‘차기’와 관련한 확인되지도 않은 발언을 빌미 삼아 처가의 씨를 말렸다. 물론 전제왕조에서 최대 과제는 왕권의 안정과 안정적 승계였다. 이 점에서 조선의 국왕 28명 가운데 태종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세종의 치세는 태종의 칼끝에서 나왔다. 그는 왕권의 안정을 위해 정치 술수와 공작, 무고한 살상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으로선 꿈도 꾸지 못할 짓이었다. 태종은 1404년(태종4) 반정공신 이거이, 이저 부자를 숙청했고 1407년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했으며 이무, 윤목, 유기 등의 목을 베었다. 1416년엔 나머지 처남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죽였으며 같은 해 야심가 이숙번을 축출했으니 1418년 선위할 때 조정엔 왕권을 위협할 척신도 공신도 없었다. 단 하나, 세종의 장인 심온 집안이 문제였다. 심온은 신중했다. 권세를 부리거나 권력을 탐할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은 조선 최대의 권벌. 부친 심덕부는 태조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한 조선 창업 공신이었다. 그의 형 심인봉은 군사령관인 의흥삼군부 도총제를 지냈고 동생 심정은 의흥삼군부 동지총제로 군부의 실세였다. 동생 심종은 태조의 사위였으며 심온은 세종(이도)의 장인인 데다 태종의 처남 민무휼과 사돈 관계였다. 비록 권력욕은 없다 해도 그 주변엔 권력의 부나비들이 꼬였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이제, 양녕대군)를 폐하고 이도(충녕)를 새로이 책봉했다. 6월 9일 명나라에 주문사를 보냈다. 8월 8일 명의 인가가 떨어지기도 전에 느닷없이 왕위를 선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승계를 청하는 주문사를 명에 파견하기로 하고 9월 3일 심온을 영의정에 앉혀 사은주문사로 임명했다. 심온은 졸지에 왕의 국구(장인)에 영의정 그리고 조선을 대표하는 사절이 됐다. 그러나 그것이 낚싯밥일 줄이야…. 9월 8일 심온 일행이 한양을 출발했다. ‘세종실록’은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 되어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이런 기록도 있었다. “심온 환송식에 나온 사람들의 말과 마차가 일으킨 먼지가 한양을 뒤덮었다.” 태종은 예의 주시했다. 얼마 전 병조참판 강상인 사건까지 있었다. 선위할 때 태종은 상왕으로서 군사 문제는 직접 주관하겠다고 밝혔다. 군령권을 상징하는 직인도 직접 보관했다. 그런데 참판 강상인이 병조의 일을 세종에게 직보한 것이다. 대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태종은 일단 강상인이 원정공신이라는 이유로 낙향 조처로 일단락했다. 11월 병조좌랑 안헌오가 참소했다. 심온의 경쟁자인 박은이 태종의 심기를 헤아려 꾸민 일이었다. “강상인과 동지총제 심정(심온의 동생), 병조판서 박습이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요사이 호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데 한 곳에서 나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역린을 건드렸다. 26일 태종은 즉각 추국을 지시했고 강상인은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했다. “병조판서 박습, 이조참판 이관, 의흥삼군부 동지총제 심정과 그런 말을 했으며 심온에게도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명이 나와야 한다’고 하자 ‘옳다’고 대답했다.” 태종은 곧바로 강상인, 박습, 이관, 심정을 모반대역죄로 처형했다. 심온은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체포해 12월 22일 한양으로 압송했다. 심온은 고문으로 무릎이 부서졌지만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대질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수사 책임자인 유정현이 귀띔했다. ‘태종의 뜻이외다’, ‘자백해야 당신 선에서 끝날 것이오’. 심온은 불러 주는 대로 자백하고 사약을 받았다. 14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태종은 이미 자신의 처가를 숙청했다. 장인 민제는 태종의 스승이었고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른바 ‘혁명의 동지’였다. 게다가 세 왕자는 골육상쟁의 피바람 시절 외가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랐으니 외삼촌들과 더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1404년 태종은 이제(양녕대군)를 세자에 책봉하면서부터 처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했다. 당시 무구, 무질 두 처남은 병권을 쥐고 있었다. 마침 일부 공신이 장인 민제를 앞세워 세자와 명나라 공주의 혼사를 추진하려 했다. “나와는 상의도 없이 세자의 혼사를 논의해?” 태종은 별렀다. 이화가 나섰다. ‘(두 처남이) 어린 조카를 끼고 권세를 잡으려 한다’는 것인데, “민씨 형제가 왕자의 난을 거론하며 ‘임금에겐 아들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했다”더라고 탄핵했다. 태종은 두 처남을 제주도로 유배했다. 이런 상소도 올라왔다. 태종이 신하들을 떠보기 위해 선위 파동을 일으켰는데, 그때 백관 가운데 두 처남이 히죽거렸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참소였지만 처형하라는 주청이 잇따랐다. 두 처남은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셋째, 넷째인 무휼과 무회도 형들의 결백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자살’ 형식으로 죽였다. 처가를 정리하기 직전 태종은 이거이와 이저 부자를 숙청했다. 이저는 태조의 사위고 그의 동생 이백강은 태종의 사위였다. 태종의 사병 혁파 명령에 반발할 정도로 말발이 셌던 이들이었다. 이때 나선 것도 이화였다. “두 사람이 말하기를 ‘아들들을 모두 제거하고 녹록한 상왕(정종)을 모시는 게 어떤가’라고 했습니다.” 태종은 두 사람을 고향으로 내쫓았다. 총애했던 이숙번도 그렇게 숙청했다. 나이도 젊고 비상한 두뇌에 결단력과 배짱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위험한 인물이었다. 1416년 서너 달 동안 궁궐에 나타나지 않자 대관들이 불충을 이유로 처벌을 주장했다. 태종은 못 이기는 척 함양으로 유배 보냈다. 이에 비해 연로한 하륜은 수많은 비위 사실과 탄핵에도 철저하게 보호했다. 그는 태종보다 20살이나 많았으니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했다면 태종은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6조 제도를 정착하고, 전국 8도 체제를 세웠으며, 사대교린 외교로 국가 안보를 다졌고, 대간 제도 확충으로 관리들의 부패와 신권의 확장을 견제했으며, 정책 결정 과정을 모두 문서로 남기도록 했다. 게다가 왕권의 승계도 안정적으로 이뤘다. 그는 성공한 군주였다. 한 정권의 성공은 후계의 완성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은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노무현을 세워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못다 한 계획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반면 노무현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서 김·노 10년간 이룬 성과도 물거품이 됐다. 이명박·박근혜는 견원지간이었다. 둘은 지금도 감옥에 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입술이 허옇게 부르터 있었다. 대통령의 건강은 최고급 비밀인데, 본인은 그런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정치적이지 않다. ‘정치적’이란 말에 담긴 술수, 모의, 기획과는 담을 쌓았다. 조선 정치 최고단수 태종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노무현이 그랬듯이 문 대통령도 아끼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정치하지 말라’고 할 사람이다. 솔직히 그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걸 이용해 먹을 자도 있겠지만…. 논설고문 kbc@seoul.co.kr
  • [인사]

    ■병무청 △기획조정관 김종호△서울지방병무청장 임재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기획조정실장 함영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장 김유종△첨단3D프린팅기술개발부장 김현길△혁신전략연구실장 이동형 ■한국교육개발원 △민주시민교육연구실장 김현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혁신도전프로젝트추진단 사업지원팀장 김민기 ■서울대병원 △암진료부원장 양한광△의생명연구원장 김효수△보라매병원장 김병관 ■중부일보 △편집국장 엄득호△논설실장 김영재△정치부 부장대우 정재수 ■충남일보 △경영부문 CEO 박전규 ■에너지경제신문 △온라인본부 본부장(전무) 성철환△시스템개발부장 이승배△취재편집부 팀장 박성준 ■월요신문 △편집국장 조규상△산업팀장 윤중현 ■SR타임스 △편집국장 김두탁 ■IBK투자증권 ◇신규선임△리스크관리본부장 허영범◇부문장 보임△IB1사업부문장(IB2사업부문장·DCM본부장 겸임) 이동구◇본부장 보임△준법감시본부장(준법감시인) 신호철△전략인프라본부장 문찬걸△금융소비자보호본부장 김재교△자산관리본부장 손관◇부·팀장 보임△금융소비자보호부장 강근영△글로벌AI팀장 소은석△DCM2팀장 박성훈 ■DB금융투자 △종합금융본부장 서형민△종합금융2팀장 성하종 ■KTB투자증권 △영업추진팀장 이사 박성진△영업부장 이사 오진승△여의도금융센터장 부장 임익환 ■GC녹십자헬스케어 △사장 전도규
  • [씨줄날줄] n잡 노동/장세훈 논설위원

    [씨줄날줄] n잡 노동/장세훈 논설위원

    부천의 쿠팡 물류센터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확진자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쉬쉬해 온 노동의 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내고 있다. ‘n차’ 감염 사례가 증가하면서 노동자들이 생계비를 벌기 위해 여러 일터를 전전하는 이른바 ‘n잡’ 노동자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04년 주5일 근무제가 적용됐다. 법정근로시간이 주 44시간에서 주 40시간으로 줄었다. 근로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주5일 근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투잡’ 열풍을 불러왔다. 당시 투잡을 독려하는 신간 서적들이 잇따라 출시되기도 했다. 남는 시간에 추가 소득을 올릴 수단을 찾는 게 ‘부지런한 자’의 훈장처럼 간주됐다. 2018년 7월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다. 일주일에 일하는 시간이 총 52시간을 넘을 수 없게 됐다. 야근·특근 등을 밥 먹듯이 하며 과로사의 위험에 노출된 장기노동으로 세계 1~2위를 다투는 한국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주52시간 근무는 야근수당 등의 감소로 추가벌이를 필요로 했고, n잡 문화를 형성했다. 때마침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 산업이 성장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고 돈버는 시대가 됐으니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n잡의 현실은 냉혹했다. 장시간 노동이나 야간 노동을 전제로 한 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직장보다는 부업 개념이 강하다 보니 노동 안전망의 ‘사각지대’여서 근로자로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마저 보장받을 수 없는 환경에 노출됐다. 그 위험성을 알고도 생계를 위해 이곳저곳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게 n잡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인 셈이다. 이번 쿠팡 물류센터 관련 확진자 사례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감염에 취약한 열악한 밀집근무 환경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지난 3월 구로 콜센터 집단감염 사례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무급휴직이나 실직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용직과 비정규직인 n잡 노동자로 전환됐다는 것이다. 코로나19의 경제적 후폭풍, 비대면(언택트) 소비의 폭발적 성장이 불러온 노동시장의 역설도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19의 n차 감염 우려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단기적인 문제라면, n잡 노동은 우리 사회를 억누르는 중장기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무슨 일이건 확산된 뒤에는 그만큼 수습도 어려워진다. 노동 양극화의 문제는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접근법만으론 결코 풀 수 없다. 방역의 빈틈을 없애는 것 못지않게 n잡 노동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shjang@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공창제 여파로 만연한 성병 치료약/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공창제 여파로 만연한 성병 치료약/손성진 논설고문

    조선시대에 성매매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기생 제도가 있어서 사실상 매춘을 하고 있었고 은근자, 탑앙모리, 색주가 등도 매춘과 연관이 있었다. 한말에 와서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로 등급이 나뉘었는데 이패를 은근자, 삼패를 탑앙모리라고도 했다. 은근자는 기생 출신으로서 남몰래 매춘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탑앙모리는 매춘을 업으로 삼는 여성이었고 기생이 하는 노래와 춤을 할 수 없었으며 한다고 해도 잡가 정도였다. 색주가는 술과 함께 젊은 여성의 몸을 파는 집을 말하고 색줏집이라고도 했다. 이곳 여성들은 기예 없이 하층민을 상대로 술과 몸을 팔았고 갈보, 작부라고도 불렸다. 청일·러일전쟁 이후 일본 군인과 군속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서울과 지방에 매음녀들이 늘어났다. 일본인을 따라 일본 창기들도 흘러들어 왔다. 1909년 서울에만 2500여명의 매음녀가 있었다고 한다. 덩달아 성병이 번져 사회 문제가 됐는데 1906년에 처음으로 매음녀들을 상대로 성병 검사를 시작했다. 성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매춘업을 그만두어야 했기에 기생들의 반발이 심했다. 성병이 없는 매음녀들에게는 건강증을 나누어 주었다. 성병 검사는 곧 공창제도 도입을 의미했다. 일본 창기와 함께 조선인 매음녀를 고용한 유곽이 나타난 것은 서울에서는 1904년, 부산과 원산에서는 1902년 무렵이라고 한다. 서울 최초의 유곽은 현재의 중구 묵정동에 생긴 ‘신정유곽’이며 1906년에는 용산 도원동에 ‘도산유곽’이 만들어졌다. 1918년 무렵에는 신정유곽 옆 현재의 쌍림동에 ‘병목정 유곽’이 들어섰다. 일제는 1904년 ‘예기취체규칙’에 이어 1916년엔 ‘대좌부 창기취체규칙’을 만들어 공창제를 제도적으로 도입했다. 유곽에서 세금도 거뒀다. 일본의 창기 진출과 공창제 허용의 영향으로 이른바 ‘화류병’이라 불리는 성병, 즉 매독과 임질 등이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만연하게 됐다. 처음에는 일본 군인이나 민간인들이 주로 유곽을 찾았지만 조선인들의 출입도 잦아졌다.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대한 반발을 합법적 성욕 해소라는 퇴폐적 수단으로 잠재우려는 일제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한다고 해도 최소한 몇 %의 매춘녀들은 성병보균자여서 유곽을 찾는 남성들에게 전염됐다. 성병약 광고가 1910년대 초반부터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매독은 치유가 어려워 인육이나 수은이 매독에 좋다는 헛소문을 믿고 따라하거나 매독을 비관해 자살하는 사건도 허다하게 발생했다.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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