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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미래세대 부담 줄이기/이동구 논설위원

    [서울광장] 미래세대 부담 줄이기/이동구 논설위원

    경찰서 민원실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다. 남녀 경찰관 20여명이 사무실을 채우고 있었는데 민원인은 1~2명에 불과했다. 필요한 서류 등 민원 처리를 마칠 때까지도 민원실은 조용하다 못해 한적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경찰서 민원실이 조용하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안정된 것이라 생각하면 반가운 일이나, 별 일거리도 없는데 커다란 사무실에 경찰관들만 가득한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최일선 행정기관인 지방자치단체의 현실은 어떨까. 전체 직원 1200여명 정도 되는 서울의 한 구청은 현재 250여명의 직원이 장기 휴직이나 휴가 중이라고 한다. 육아휴직 등 법으로 인정되는 휴직, 휴가라고는 하나 개인회사 등은 엄두도 못 낼 휴가자 비율이라 놀랍다. 자치단체 대부분에서 이런 사정이 엇비슷하다고 한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가용 인력이 여유로운 데다 별다른 불이익도 없으니 ‘신의 직장’이라 좋아할까. 주변 동료들의 휴직과 휴가는 열심히 일할 의욕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방역 업무 등 특정 업무를 제외하면 일을 열심히 하려는 동료를 찾기가 어렵다. 40대의 지방 공무원은 “국회의원, 지방의원, 구청장 등 정치권에 잘 보이려는 공무원들만 득실거릴 뿐 기계적이고 의례적으로 일을 하는 영혼이 없는 조직이 됐다”고 토로했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먼저 입장하는 그리스는 타산지석이다. 2015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총 2600억 유로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는 등 국가재정이 파탄 난 그리스 국민들은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공무원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과다한 수의 공무원과 그들을 위한 ‘황제복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동인구 4명 중 한 명이 공무원인 데다 이들에게 주는 월급이 국내총생산(GDP)의 50%를 넘기도 했다니 국가 부도는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공약으로 임기 내 공무원 수를 17만 4000명 증원하겠다고 했다. 실제 지난 4년 2개월 동안 늘어난 공무원 수는 11만 172명으로 전임 박근혜 정부 때보다 10.67%나 늘어났다. 이 수치는 문재인 정부 이전 4개 정부에서 약 20년간 늘어난 공무원 수 9만 6571명보다 많다. 전체 공무원 수는 지난해 6월 말 기준 114만 2503명으로 집계됐다. 저출산 등으로 전체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우리도 ‘공무원 공화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무원이 늘어난 만큼 국가재정과 국민 세금 부담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중앙정부 공무원 인건비는 총 40조 2000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40조원을 넘겼다. 올해는 41조 3000억원으로 문재인 정부 첫해 33조 4000억원과 비교하면 7조 9000억원(23.7%)이나 증가한다.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공약대로 공무원이 증원되면 30년간 국민의 세금 부담은 327조원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할 돈이니 현재뿐 아니라 미래세대에도 등골이 휘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차기 정부 조직 개편이 관심사로 떠오르지만 ‘큰 정부’, ‘작은 정부’라는 말 대신 청와대나 기획재정부를 쪼개느니, ○○청을 신설하느니 하는 포괄적 수준의 언급에 머물고 있다. 득표에 유리할 게 없으니 공무원 숫자를 얼마만큼 줄이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는 것으로 비친다. 공무원을 단계적으로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게 학계의 진단이다. 박광국 가톨릭대 행정학 교수는 “인구와 행정 수요 등을 고려할 때 현재의 공무원 수는 많다”면서 “50만~80만명 규모로 줄여 나가야 한다”고 했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새 정부는 정부의 조직을 개편하고 공직자 규모를 적정 수준으로 조정해 나가길 바란다.
  • [씨줄날줄] SK하이닉스와 세수/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SK하이닉스와 세수/안미현 수석논설위원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 후보는 당선 직후 기업 구조조정과 정계 개편만큼은 반드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외환위기를 넘겨받은 대통령에게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삼성은 자동차를, LG는 반도체를, 현대는 석유화학을 내놓는 빅딜이 1999년 그렇게 성사됐다. 성사라기보다는 정부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정부 주도의 인위적 구조조정은 1년도 채 안 돼 삐걱거렸다. LG 반도체를 인수하느라 1조원 넘게 돈을 쓴 현대전자는 LG 반도체의 막대한 부채까지 떠안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주력 제품인 D램 가격마저 급락하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내몰렸다. 자체 힘으로는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현대그룹은 급기야 현대전자를 매물로 내놓았고, 2001년 하이닉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때부터 해외 매각이냐 독자 생존이냐의 길고 지루한 싸움이 시작됐다. 채권단이 회사채를 사주는 방식으로 근근이 버티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부을 수 없다는 매각파는 어차피 국내에는 인수 여력이 없으니 해외에라도 팔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도체는 국가 기간산업인데 이렇게 국부(國富)를 유출할 수 없다는 생존파는 조금만 더 세금을 투입해 살려야 한다고 맞섰다. 양쪽 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10년 도돌이표 공방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2011년 말이다. SK그룹이 3조여원을 들여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SK텔레콤 주가가 급락하는 등 그룹 안팎의 우려가 컸지만 최태원 회장은 밀어붙였고 이듬해 2월 14일 하이닉스는 SK 계열사로 공식 편입됐다. 어제로 하이닉스가 주인을 찾은 지 꼭 10년을 맞았다. 오랜 세월 쌓인 부실을 털어 내고 2015년 다시 법인세(8000억원)를 내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한 해에만 세금 5조 6000억원을 납부했다. 이후 지난해 말까지 나라에 낸 세금이 11조원이다. 잘나가는 하이닉스에 빗대 다른 SK 계열사가 스스로를 ‘로(low)닉스’로 지칭하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빅딜 이후 한동안 채권단 지원에 의존해 ‘세금 먹는 하마’ 눈총에 시달렸던 과거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 [길섶에서] 재택 혼밥/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재택 혼밥/임창용 논설위원

    오미크론 변이 폭증세로 지난주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이다. 원격으로 회의를 하고 기사를 쓴다. 한데 적응이 안 돼서인지 기분이 묘하다. 일은 똑같이 하면서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다. 빈 시간이 늘어 여유가 많은 듯하지만 휴가 때 집에서 쉬는 것과는 다르다. 출퇴근에 인이 박여서일까. 하긴 30년 습관이 멈춰 섰으니 외려 이런 기분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어색하다는 것은 한편으론 새롭다는 의미도 갖지 않을까. 물론 긍정적 측면에서다. 특히 점심을 먹을 때가 그렇다. 아내도 출근하고 없어 오롯이 혼자 먹어야 한다. 단골 메뉴는 김치볶음밥이다. 재택 혼밥 시간은 고요하다.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 깍두기 씹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고요함은 기억을 부른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고마웠던 이들을 하나둘 재택 혼밥에 불러들인다. 밥을 혼자 먹기는 하지만 이미 혼자가 아니다.
  • [씨줄날줄] 지게꾼의 1억원 기부 이유/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지게꾼의 1억원 기부 이유/박록삼 논설위원

    “조금만 기다려 봐.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기부도 하고, 좋은 데 쓸 거야.” 사람들이 흔히 하거나 듣는 말 중의 하나다. 실제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는 생각일 테지만 실천의 순간은 영 다가오지 않는다. 수입은 늘 부족하고, 그래서 생활은 늘 여유가 없다. 1년에 한 번 길거리에 등장하는 자선냄비나 사랑의열매 소액 기부 앞에서도 몇 번을 망설이다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남한산성 앞에서 평생 김밥 팔아 모은 전 재산 6억 5000만원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했다는 김밥 할머니 박춘자(92)씨 같은 분의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그제서야 그 이타적인 삶을 조금이나마 흉내내 보려고 할 뿐이다.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으로 불리는 임기종(65)씨는 TV에 여러 차례 나온 유명 인사다. 임씨는 비룡폭포까지 1시간 반 걸려서 40~60㎏ 무게의 지겟짐을 날라 주고 6000원을 받는다. 비선대까지는 8000원, 흔들바위까지는 2만원이다. 설악산 정상 대청봉까지는 왕복 10시간 걸려 25만원을 받는다. 58㎏, 158㎝ 자그마한 체구지만 130㎏에 달하는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지게에 싣고 오른 적도 있다고 했다. 50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진짜 화제가 된 것은 수십 년째 이어진 기부 덕이다. 25년째 장애인요양시설, 독거노인, 장애학교 등에 기부했다. ‘첫 기부’의 의도는 ‘불순’했다. 혼자서는 아무 생활도 할 수 없는, 정신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이 있다. 2급 정신지체장애 아내도 돌볼 수 없어 20여년 전 어쩔 수 없이 보호시설에 맡겼다. 그리고 내 자식을 잘 챙겨 주길 바라는 ‘아부하는 마음’으로 과자와 빵을 사다 주곤 했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바뀌었다. 많지 않은 돈이라도 생길 때마다 간식거리를 사 갔고 기부처는 점점 늘어났다. 이제 그 금액이 1억원에 달한다. 김밥 할머니나 설악산 지게꾼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공통점이 있다. 지독히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성실함 그 자체다. 자신한테 쓰는 것에는 인색해지고, 남에게 주는 것에는 기뻐한다. 남을 돕고 함께 생활하는 힘은 경제적 여유가 아닌, 정신적 여유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교훈이 확인된다. 거듭 부끄러워지는 이유다.
  • [길섶에서] 경쟁이 빚는 맛/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경쟁이 빚는 맛/서동철 논설위원

    휴일에도 교통혼잡에 시달리는 건 좋지 않다. 한 달쯤 전 토요일 내가 사는 파주에서 가장 막히지 않는 길을 택해 드라이브에 나섰다. 연천의 전곡선사유적지를 잠깐 산책하고 돌아오는데 양주의 지방도변에 ‘해물짬뽕 전문’이라고 써붙여 놓은 중국집이 보였다. 식당 이름은 조금 촌스러웠다는 기억이지만 음식맛은 놀랄 만했다.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에 더욱 맛있었을 것이다. 지난주 양주 중국집에 다시 갔다. 점심시간을 한참 넘겼던 지난번에는 손님이라곤 나밖에 없었으니 달랑 수타 짬뽕 한 그릇을 시키기가 송구스러웠다. 그런데 이날은 한적한 동네 중국집답지 않게 손님이 가득해 한 번 더 놀랐다. 음식맛은 여전했다. 집에 가는 길에 주변을 차근차근 둘러봤다. ‘해물짬뽕 전문’이라고 써붙인 중국집이 두 군데나 더 있었다. 시골 마을의 시골스럽지 않은 짬뽕맛은 치열한 경쟁의 산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즐거움도 늘었다. 차근차근 경쟁 상대들의 짬뽕맛도 보러 가야겠다.
  • [부고]

    ●박병전씨 별세, 박규열(울산대 산학협력부총장)씨 모친상 = 13일 울산국화원장례식장, 발인 15일. (052)269-4444 ●이규직씨 별세, 이헌주(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헌정(고려대 의과대학 교수)·현경씨 부친상, 정치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씨 장인상, 이지연·이선영(건국대 의과대학 교수)씨 시부상 =13일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 15일. 070-7816-0253. ※코로나19로 조문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채태병씨 별세, 채금주(용인 상현고 교사)·희창(세계일보 수석논설위원)·승희씨 부친상, 임긍철(전 삼성전자 부장)·김준식(약사)씨 장인상 = 12일 수원 연화장 장례식장, 발인 15일. (031)218-6560
  • [서울광장] 여성들이여, 반드시 투표하자/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여성들이여, 반드시 투표하자/문소영 논설위원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고 투표권도 절반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한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치권이 여성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행동하는 탓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렇게 대놓고 공개적·공식적으로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여성차별은 암묵적이거나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런데 요즘 정치권은 왜 이러는가. 국민의힘의 ‘여성가족부 폐지’는 특정 정부 부처를 없애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 배제라는 상징이 담겨 있다.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는 ‘이대남’, 즉 20대 남성을 차별받는 계층으로 쏘아 올렸다. 마치 20대의 고통은 남성만의 것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국민의힘이 볼 때 이대남은 지난해 4·7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을 당선시킨 주역이자 이준석 대표가 주창하는 ‘세대 포위론’의 주력군이니 편애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분노를 활용한 정치수법과 비슷하다. 정치권이 각별해할 만큼 한국의 2030세대 남성이 4050세대보다 많은 게 사실이다. 행정안전부 2021년 통계에 따르면 20대 665만여명 중 남성(349만여명)은 여성(316만여명)보다 약 33만명 더 많다. 30대 672만여명 중 남성(347만여명)은 여성(325만여명)보다 22만여명이 더 많다. 즉 2030세대에선 남성이 여성보다 55만여명 더 많다. 4050세대에서 여성 대비 남성 초과는 23만여명이다. 남아선호와 여성차별이 팽창하던 1980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태아성감별 후 여아를 낙태하던 반인륜적 시대를 거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2030세대 남성이 55만명 더 많다고 같은 세대 여성 유권자 641만여명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해도 되는가. 전체 유권자로 따지면 여성은 2589만 2125명으로 남성 2574만 6687명보다 14만 5438명 더 많지 않은가. 더 나아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7일 언론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은 여성을 약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면서 “차별은 개인적 문제 … 여성은 불평등한 취급을 받고 남성은 우월적 대우를 받는다는 건 옛날 얘기”라고 말했다. 팩트체크해 보면 현실은 과연 그런가. 문재인 정부에서 여성 국무위원 30%를 약속했지만 한때 실현됐을 뿐이다. 국회의원 중 여성은 19%에 불과하다. 100대 기업 임원 중 여성 비율은 4.8%이다. 성폭력 등 강력범죄 피해자의 약 90%가 여성이다. 안희정·오거돈 사례도 있다. 아이를 낳으면 맞벌이라도 엄마가 ‘육아독박’을 쓴다. 가사노동은 맞벌이 아내가 남편보다 6~8배 더 많이 한다. 가족 내 돌봄 서비스는 며느리나 딸 등 여성의 몫이다. 동일 직종·직급에서 여성 임금은 남성보다 30% 이상 낮다. 2018년 기준 대학진학률은 여성(74%)이 남성(65%)보다 10% 포인트 가까이 높지만, 취업률은 남성이 여성을 10% 포인트 이상 앞선다. 시중은행에서 남성 직원을 더 뽑고자 성적을 조작했던 범죄가 밝혀진 지 겨우 3년 됐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실직의 고통은 여성이 더 많이 겪었다. 이런데도 ‘구조적으로 성차별이 없다’고 단언하는가. 이 또한 ‘1일 1실언’이라 넘기고 말아야 하나. 대통령 선거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지만, 승부를 가리는 과정에서는 한국 사회가 나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더 크고 넓은 연대와 협력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새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새 정부도 탄탄한 내치의 기반이 생긴다. 지지자 결집용으로 옹졸하고 편협한 세계관을 확산한다면 미래의 리더로서 실격이다. 한때는 필리핀 이주여성을 비례대표로 내세우던 정당이 외국인 노동자 혐오를 부추기며 퇴행해선 곤란하다. 여성 유권자들이 3월 9일 반드시 투표해 ‘이대남’의 효능을 압도하고, 알파걸의 복귀를 선언하길 기대한다.
  • [씨줄날줄] 대선 로고송/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대선 로고송/박현갑 논설위원

    마케팅 차원에서 보면 대통령 후보는 판촉 대상인 상품이다. 각 선거캠프는 소비자인 유권자에게 이 상품을 손쉽게 각인시키려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동원한다. 대표적인 게 선거 로고송이다. 국내 정치에서 로고송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15대 대선이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가수 DJ DOC의 히트곡 ‘DOC와 춤을’을 개사한 ‘DJ와 춤을’이라는 로고송으로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김대중과 함께라면 든든해요. 경제통일 책임질 수 있어요. 준비되어 있는 우리 대통령 DJ로 만들어 봐요’로 고친 노래는 유세차량의 확성기뿐만 아니라 TV,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전파됐다. 확성기를 활용한 로고송 유세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대중매체를 통해 전국으로 전파된 정치광고의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20대가 좋아한 이 노래가 주는 경쾌함과 친근함은 70대 대선후보와 젊은 유권자의 간격을 좁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로고송은 대선은 물론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 등 모든 공직후보자 선거에 활용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로고송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오미크론 대유행 속에 치러지는 선거여서 운동원들이나 시민들이 유세 현장에서 힘찬 목소리로 로고송을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에 방점을 둔 로고송을 준비했다. 아모르파티(김연자), 뿜뿜(모모랜드), 진또배기(이찬원), 질풍가도(이정섭), 상상더하기(라붐) 등이다. 민주당은 코로나 방역 맞춤형 선거전략으로 국내 최초로 야외 유세 현장에서 자동차를 타고 모인 지지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 ‘드라이브 인’ 유세를 포함해 다양한 비대면, 거리두기 유세를 편다는 계획이다. 국민의힘은 로고송 공모전을 개최해 ‘될꺼니까’(남봉근), ‘Everybody Fighting’(이정용), ‘KOREA’(노희섭)’를 공식 로고송으로 채택했다. 코로나로 지친 유권자를 위로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김광석),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임영웅) 등 잔잔한 곡들과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부각하는 ‘아파트’(윤수일)도 선정했다. 어떤 로고송에 국민들이 마음을 열지 결과가 주목된다.
  • [길섶에서] 입맛의 고향/박록삼 논설위원

    [길섶에서] 입맛의 고향/박록삼 논설위원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 건강했던 어머니는 좋은 고춧가루, 잘 띄운 메주, 깊은 맛 잘 우러나는 다시마 등속을 찾기 위해 먼 걸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 음식은 김치나 된장, 간장 등 기초 재료에서 성패가 갈린다는 믿음 덕이다. 어머니 덕분에 대단히 맛있던 김치찌개, 된장국, 청국장, 각종 나물 등을 맛있는 줄도 모른 채 먹으며 자랐다. 바깥 음식을 본격적으로 접한 이후 33년 동안 입맛은 계속 변해 갔다. 바깥 맛이 뭔가 다르다고 느꼈을 때는 그저 지역별 음식 차이라고만 생각했다. 점점 그 맛에 길들여졌고, 오히려 기꺼이 즐겼다. 삼겹살, 불고기, 회 등을 먹어야 먹은 것 같았다. 집에서 먹는 밥은 뭔가 밋밋했다. 그러다 결국 다시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의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음식 만드는 게 불편하게 된 어머니 대신 그 맛을 재현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입맛 변천사는 결국 입맛의 고향, 어머니의 맛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회귀한다. 맛의 원형이 점점 희미해져 감이 한스럽다.
  • 병역으로 청춘단절, 출산으로 경력단절… 양성평등 제도화 절실

    병역으로 청춘단절, 출산으로 경력단절… 양성평등 제도화 절실

    2000년대 후반부터 갈등 본격화정치권은 이대남·이대녀 부추겨 ‘군대·출산’ 굴레, 남녀 모두 피해 병역 남성에겐 적절한 보상하고 여성 불리한 임금차별 철폐해야 일자리·촘촘한 사회안전망 시급세상이 절반으로 갈라진 듯 대결과 갈등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남성과 여성, 청년과 기성세대,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촌, 자본과 노동, 부동산의 부와 빈, 취업과 실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당과 야당, 디지털 격차, 친원전과 탈원전 등등.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 이뤄진 양극화는 해답의 실마리조차 찾기 힘든 화두가 됐다.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젠더(gender·사회문화적 성) 갈등이다. 젠더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는 2022년 3월 9일 이후 어디로 가야 하는가. 2000년대 후반 한 20대 여성이 방송에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말했다가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제는 온갖 곳에서 예사로 쓰이고 있는 ‘○○녀’, ‘××남’ 등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된장녀’, ‘김치녀’ 등 여성 혐오의 표현이 조롱거리로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다. 여기에 맞서는 ‘한남충’이라는 혐오 표현이 여성 측에서 나왔다. 이어 ‘퐁퐁남’, ‘설겆이남’ 같은 남성 스스로를 자조하면서도 여성 혐오가 담긴 언어 또한 남성 쪽에서 생산되며 일상화됐다. 나아가 양궁선수 안산(21)의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에 대해 사상 검증하듯 “너, 페미지?”라고 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언제부터인지 그 시작조차 아득한 남녀 대립, 그로 인한 젠더 갈등은 교육, 일자리, 소득, 주거, 자산 등 한국 사회 온갖 분야의 문제를 버무려 놓은 ‘모순의 결정체’가 됐다. 하지만 정치권은 갈등의 조정과 통합의 해법은커녕 ‘이대남’(20대 남성), ‘이대녀’(20대 여성) 등으로 부르며 정치공학적 갈라치기에 급급했다. 남녀 갈등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을 뿐 구조적 해법을 찾는 길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지난달 초 페이스북에 덩그러니 올린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는 큰 파장을 낳았다. 여가부 폐지로 끝인지, 대안의 정부조직을 만든다는 것인지 등 어떤 구체적 설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파괴력과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일견 무책임해 보이고 남성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는 공약도 아니었지만 ‘이대남’은 열광했다. 발표 직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가부 폐지에 대해 남성의 64.0%가 찬성했고, 연령별로는 20대 남녀(60.8%)의 호응이 가장 높았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남성 차별을 조장하는 정부 부처’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이들에게 절실하면서도 당연한 조치처럼 받아들여진 탓이다. 젠더 갈등이 남녀 이해관계를 가르는 몇몇 제도와 정책 때문만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구조와 문화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증이다. 젠더 갈등 해결의 첫 번째 실마리는 정치권의 역할이다. 정치권부터 편가르기에서 벗어나 통합의 가치를 위한 법적, 제도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젠더 갈등의 해소는 요원하다. ●남성은 병역의무로 상대적 박탈감 남녀의 처지와 입장이 근본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각각 상대방에게는 부여되지 않은 의무인 ‘군대와 출산’이다. 이를 바탕으로 상대적 우월의식 또는 상대적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 20대 초반 의무적으로 군대에서 2년 가까이 있어야 하는 남성들은 무의미한 그 시간의 유의미성을 찾아야 하는 고민과 함께, 병역의무를 다해 봤자 사회적 보상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 데 대한 분노를 함께 품고 있다. 이미 졸업하고 취업까지 마친, 그래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래 여성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역차별 정서는 거기에서 기인한다. 군 복무는 남성들에게 피해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시간과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담마진(가려움증), 부동시(양눈 시력차), 과체중 등 석연찮은 사유로 병역을 기피한 인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 후보 모두 한목소리로 ‘군인 월급 200만원’ 공약을 내놓았다. 이 후보는 군경력 호봉 인정 의무화, 예비군 훈련기간 단축 등을 더하며 표심잡기에 안간힘이지만 윤 후보의 ‘여가부 폐지’ 파괴력을 돌파하기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 최근 한 여고에서 군인들을 놀리는 내용을 써보낸 ‘군 위문편지 사건’은 여성들이 남성 고유 영역을 희화화하고 조롱했다는 인식을 갖게 한 해프닝 아닌 해프닝이었다. 해당 여고생들이 위문편지 이후 SNS 등에서 남성들의 무차별 인신 공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두 번째 실마리는 군 문제다. 단기적으로는 병역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며, 근본적으로는 실질적인 남북의 군사적 긴장 해소, 평화 정착 등을 통한 모병제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여성은 출산 부담에 성폭력 공포까지 여성의 출산과 육아, 이에 따른 경력 단절 또한 남성으로서는 체감하기 어렵고도 커다란 간극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32.5%로, 26년째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남성이 100만원 벌 때 여성은 67만 5000원을 번다는 의미다. 출산 및 양육의 책임을 거의 도맡아야 하는 여성 입장에서는 뿌리 깊은 성차별의 어려움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성별 임금 격차 해소와 고용 평등에 방점을 찍은 정책을 내놓는 데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이 후보가 비교적 앞서 있다. 심 후보는 성별임금격차 해소법, 생애주기별 노동시간 선택제를, 이 후보는 임금평등 공시제 단계적 확대, 육아휴직 부모쿼터제 등을 공약했다. 윤 후보는 구체적인 공약 제시보다는 “근본적으로 청년들에게 더 많은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되면 이 문제는 저절로 줄어들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처럼 남성 중심 가부장제 전통과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구조적인 불평등과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데이트 폭력, 몰카 등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여성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면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절대 약자임을 체감하며 또 다른 젠더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세 번째 실마리는 오랜 세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태적으로 약자의 위치에서 지내 온 여성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일이다.●차별과 혐오 넘어야 지속가능한 발전 청년 세대는 학력, 취업, 주거 등에서 이전 세대에 비해 더욱 극심한 경쟁에 내몰려 있다. 흑인, 이주노동자, 외국인 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가 그렇듯 청년들이 상대방을 희생양 삼아 올라서려는 경향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날 개연성이 높은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청년 세대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사회적 모순과 고통에 함께 맞서고 성취의 기회를 확장할 수 있도록 연대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새 정부는 청년일자리를 확대하고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 등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등을 촘촘히 짜야 한다. 차별과 혐오가 아닌 양성평등의 제도와 문화, 그리고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가 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발전의 토대가 구축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새 정부의 젠더 정책이 설계돼야 할 것이다.
  • [부고]

    ●신희호씨 별세, 김건주(前 서울신문 제작국장)씨 모친상=10일 양평병원 장례식장, 발인 12일. (031)775-4444 ●김순애씨 별세, 홍은숙·은희(前 중앙일보 논설위원, 前 명지대 교수)씨 모친상, 박행군·박영민(前 MBC 논설위원)씨 장모상=10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2일. (02)2258-5940
  • [씨줄날줄] 지방소멸대응기금/이동구 논설위원

    [씨줄날줄] 지방소멸대응기금/이동구 논설위원

    ‘러스트 벨트’(Rust Belt)는 미국의 전통적인 공업지대였으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시민들이 떠나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침체된 지역을 말한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를 비롯해 철강산업의 메카 피츠버그와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등이 이에 속한다. 한마디로 미국 제조업의 몰락을 상징하는 곳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대선에서 이들 지역 주민들의 불만과 바람을 모아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동력의 하나로 삼았다. 석탄산업의 사양화로 강원도와 경북도 등의 몇몇 탄광촌이 활력을 잃어 가자 1995년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 차원의 지원 사업이 펼쳐졌다. 환경, 교통 등의 영향평가를 비롯해 각종 인허가 기준을 완화해 주는 특례를 통해 도시에 다시금 활기를 되찾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대표적으로 내국인을 대상으로 카지노업을 할 수 있게 한 강원 정선군과 골프장 건설을 지원한 경북 문경군 등이 꼽힌다. 특별법 시행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전국 농어촌 지역 대부분이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감사원의 인구구조 변화 대응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47년쯤에는 전국 229개 시군구 중 158개(69%)가 인구 감소로 소멸 위험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수도권 인구는 지난해 전체의 50%를 넘겼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과 수도권 집중 현상은 지방 도시의 소멸을 가속화할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어제 고시한 ‘지방소멸대응기금 배분 등에 관한 기준 제정안’은 지방자치단체의 분발을 독려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매년 1조원씩, 10년간 창의적인 인구 감소 해법을 낸 지자체에 자금을 지원해 인구 감소 속도를 최대한 늦춰 보자는 취지다. 여기엔 주민복지의 개념도 내포돼 있다. 전남 지역 지자체가 총 2조 4000억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금을 확보했다. 지방 소멸을 막는 게 예산 지원만으로 가능하지 않겠지만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대선후보들도 지방 소멸을 저지할 정책 발굴에 관심을 보인다면 선거 결과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 [길섶에서] 밥상 속 대기업/문소영 논설위원

    [길섶에서] 밥상 속 대기업/문소영 논설위원

    집안일이 서툴러 ‘대기업의 힘’을 자주 빌린다. 설날 떡국을 끓일 때 양지머리를 사다가 국물을 내기보다는 C사의 사골 국물이나 도가니탕을 사다가 쓰는 식이다. 떡국용 떡도 방앗간에서 직접 쪄내기보다는 사다가 쓴다. 어린 시절에는 고춧가루나 참기름을 방앗간에서 빻거나 짜 오라는 엄마 심부름을 했었는데 요즘은 다 대기업 마트에서 구한다. 순두부 소스나 조미김도 중소기업이냐, 대기업 상품이냐의 문제이지 집에서 직접 만들진 않는다. 청소기, 식기세척기, 공기청정기 등등도 대기업 제품이다. 집에서 밥과 반찬을 해 먹는 것보다 시판용 쌀밥에 반찬가게를 활용하는 게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 비용도 줄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끼니를 해결하다 보면 전자레인지나 돌리는 게 밥상을 차리는 전부가 돼 버려 품위를 잃어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그런데 먼 미래에는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신하는 시절이 온다지 않는가. 아직은 품위 있는 삶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 [안미현 칼럼] 대선후보 주위엔 왜 이리 ‘우연’이 많은가/수석논설위원

    [안미현 칼럼] 대선후보 주위엔 왜 이리 ‘우연’이 많은가/수석논설위원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다. 아직도 주위엔 “다 싫다”는 유권자가 많다. 이런 염증을 키우는 요인 중 하나는 ‘우연’이다. 경기도청 5급 공무원인 배모씨는 아래 직원을 시켜 호르몬 약을 대리 처방받게 한 뒤 이 약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 집 현관문에 걸어 두게 했다. ‘공직 사유화’ 논란이 일자 배씨는 자신이 먹을 약이었다고 주장했다. 며칠 뒤 이 후보 부인이 똑같은 호르몬 약 6개월치를 직접 처방받은 서류가 공개됐다. 김씨와 배씨가 같은 약을 복용했다는 건데 기가 막힌 우연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아버지는 2019년 집을 팔았다. 급매로 내놓은 이 집을 산 사람이 ‘대장동’ 개발업체인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누나다. 김씨 누나가 반려견을 키우기 위해 단독주택을 물색하던 중 아주 우연히 윤 후보 아버지 집을 사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김씨 누나도, 개도 새로 산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곧바로 월세를 내줬다. 윤 후보는 김씨와 “차 한잔도 마신 적 없다”는데 김씨는 “(쌍욕하며) 싸우는 사이”라고 한다. 2020년 대법원은 당시 경기지사였던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해 최종 무죄판결을 했다. 이 후보가 이번 대선에 나설 수 있게 결정적으로 길을 열어 준 판결이었다. 무죄를 이끈 대법관이 또 하필 우연히 권순일씨다. 그는 법복을 벗은 뒤 화천대유 고문에 이름을 올렸다. 윤 후보는 2011년 대검 중수부 검사 시절 부산저축은행 대출 의혹을 수사했다. 당시 불법대출 알선수재 혐의를 받던 조모씨가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때 조씨를 변호한 이가 우연하게도 ‘50억 클럽’에 등장하는 박영수 전 특검이다. 윤 후보를 특검 수사팀장으로 발탁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누가 더하고 덜한지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우연에 우연이 꼬리를 문다. 분명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속된 말로 ‘빼박’(빼도 박도 못할) 물증이 없으니 염증만 키울 뿐이다. 그렇다고 투표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솟구치는 부아를 꾸욱 누르고 후보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차이가 보이긴 한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만 하더라도 이 후보는 단호하게 반대, 윤 후보는 단호하게 찬성이다. 그런데 정작 윤 후보가 사드 후보지로 강원, 충청을 거론하자 해당 지역 민심이 사드 추가 배치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들끓고 있다. 격투기 자세까지 직접 취해 가며 열변을 토한 윤 후보의 선제타격론에는 이후에 따라 나올 수 있는 북한의 ‘핵보복’ 얘기가 없다. 이 후보는 툭하면 뭘 주겠다고 한다. 아동수당, 청년수당, 장년수당, 노인수당, 예술가수당, 비정규직수당 등 큼지막한 것만 나열해도 숨이 찰 정도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니 기본소득 공약을 일단 집어넣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내건 수당을 이어 붙이면 생애 기본소득이나 다름없다. 어디서 어떻게 돈을 마련하겠다는 얘기는 이제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가상자산 차익 과세는 기어코 1년 유예시키더니 세금을 물리기로 한 차익 기준을 250만원에서 주식처럼 50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한다. 주식과 달리 가상자산은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나 자본시장 발전에 기여하는 게 아직은 없다. 그런데 왜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윤 후보는 아예 주식 양도소득세를 없애겠다고 한다. 대신 원래 폐지하겠다던 증권거래세를 되살렸다. 2~5%의 ‘슈퍼개미’만 해당되는 양도세는 없애고 모든 개미들이 물어야 하는 거래세는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큰손 작은손을 떠나 소득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 자산시장 양극화 해소 노력과도 거리가 멀다. 후보들의 설명이 좀더 필요하다. 그러자면 더 자주 맞붙어야 한다.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넘쳐나는 우연 속에서 판단의 잣대가 뭐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씨줄날줄] 사이버불링/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사이버불링/박현갑 논설위원

    예전에 ‘호기심 천국’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명 인사들이 방송에 나와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과학 실험으로 풀어 보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형설지공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반딧불이를 잡아 책을 읽는 실험을 하는가 하면 마술의 비밀을 밝히는 내용도 있었다. 호기심은 잘 활용하면 인류 발전을 앞당기는 위대한 발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모르는 게 약”, “판도라의 상자”란 말에서 드러나듯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인터넷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사이버공간은 판도라의 상자로 변했다. 익명성에 기댄 악성 댓글이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다. 정부는 ‘악플과의 전쟁’에 나섰다. 사람을 괴롭히는 게시글을 겨냥한 ‘악성 댓글’ 단속은 물론 인터넷상의 괴롭힘을 포괄하는 ‘사이버불링’(Cyber Bulling)이나 신상털기, 사이버 스토킹 등을 ‘사이버 폭력’으로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공간에서의 폭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4일 프로배구 선수 김인혁(27)씨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데 이어 5일에는 유튜버 잼미(27)가 극단적 선택 끝에 숨졌다. 모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의 악성 댓글과 루머로 고통받았다. 잼미의 모친도 딸에게 쏟아진 악성 댓글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독일은 이용자 200만명이 넘는 SNS에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 콘텐츠가 올라오면 플랫폼 사업자가 24시간 안에 차단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제도 도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적 기관이 아닌 민간 기업에 콘텐츠 관리권을 맡기는 게 자의적 법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시민의식 개선도 중요하다.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이른바 ‘사이버레커’들이 사이버불링을 하는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에 대한 잘못된 욕망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돈이 불어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 플랫폼 기업들이 혐오나 차별을 조장하는 콘텐츠 관리에 나설 때다. 학교 운동장 같은 현실에서의 폭력이 일시적이라면 가상공간에서는 영구적이다. 제도 정비와 더불어 나와 내 가족도 당할 수 있다는 역지사지 자세를 가져야 해소될 일이다.
  • [씨줄날줄] 푸른 호수/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푸른 호수/임병선 논설위원

    세 살 때 입양돼 미국으로 건너간 저스틴 전이 연출하고 주연한 영화 ‘푸른 호수’를 보려면 손수건을 준비해야 한다. 지난해 10월 국내 개봉한 영화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낯선 땅에 건너간 한인 입양인들이 파양되거나 양부모 문제 등으로 두 번째 버려져 시민권을 얻지 못해 겪는 고통을 처절하게 다뤘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찾으려던 안토니오는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서 이민국으로 넘겨진다. 양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달아나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란 그에겐 시민권이 없다. 당국은 그를 추방하려 들고 안토니오와 아내 캐시, 의붓딸 제시는 맞선다. 안토니오는 30년을 미국에서 살았는데 왜 추방당해야 하느냐고 울부짖는다. 영화 시작과 끝에 우리 자장가가 흘러나와 먹먹함을 더한다. 공항에서 부녀가 눈물로 작별하는 장면은 차마 지켜볼 수가 없다. ‘고아 수출국’이란 악명은 여전하다. 2019년 254명이던 한국의 해외 입양은 코로나19가 덮친 이듬해 266명으로 늘어 30%가량 줄어든 다른 나라들과 대비됐다. 미국의 미등록 입양인이 4만 9000명인데 절반가량이 한인으로 추정된다. 2000년 어린이시민권법이 미국 의회에서 통과돼 양부모의 한쪽이라도 미국 시민이면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만 18세 미만에 국한됐다. 성인이 된 입양인을 구제하려는 법안이 네 차례나 하원 문턱을 넘지 못했고, 그 바람에 많은 이들이 생면부지의 조국으로 쫓겨났다. 적응하지 못해 극단을 택한 사례도 심심찮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미등록 입양인 1만 9000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얼마 전 하원을 통과해 상원 심의에 들어간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법안을 주도한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양부모가 기르던 개와 싸움을 시켜 가출한 이도 있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도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대표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지난 일이지만 한국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국력이 커진 만큼 입양에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뼈아프지만 우리 모두 새겨들었으면 한다.
  • [길섶에서] 소들하고 허룩한/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소들하고 허룩한/안미현 수석논설위원

    비슷한 뜻을 지닌 우리말을 비슷한 시기에 알게 됐다. 허룩하다와 소들하다. 여태 그 말을 몰랐느냐며 혀를 차는 이도 있겠다. ‘허룩’을 접한 것은 고(故) 박완서 작가의 책에서다. 복닥거리던 슬하의 5남매가 하나둘 짝을 찾아 떠나면서 ‘식구가 허룩해졌다’고 작가는 썼다. 문맥으로 짐작은 갔으나 눈에 설어 사전을 찾아보니 ‘양이 줄어 적은 것’이라고 풀어 준다. 친절하게 ‘허룩한 가방’이라고 예시까지 알려 준다. 그런데 허룩한 지갑이 먼저 떠오른다. 바로 다음날 점심을 함께 하던 직장 동료가 “소들하다”고 했다. 소들? 곧바로 검색 들어가니 ‘생각보다 양이 적어 마음에 덜 차다’라는 뜻이란다. 신기했다. 어감은 분명 다르지만 하루 간격으로 적다는 뜻의 낱말을 연달아 알게 되다니…. 대단한 지식이라도 얻은 양 오졌다. 그런데 왜 하필 적다일까. 많다는 우리말이 뭐였더라. 생각을 더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거네, 소들과 허룩이 난데없이 찾아든 이유가. 이제 좀 덜어 내며 살라는 뜻이었네.
  • [씨줄날줄] 연말정산과 과세표준/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연말정산과 과세표준/전경하 논설위원

    ‘13월의 월급’이라는 연말정산 기간이 돌아왔다. 연말정산은 지난해 낸 세금이 적정한지를 따지는 과정이다. 잘 준비하면 낸 세금을 돌려받지만 반대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13월의 폭탄’이 된다. 이걸 결정하는 기준이 과세표준이다. 과세표준은 총급여에서 근로소득공제액, 신용카드 사용액과 주택자금, 연금저축 등 특별소득공제 항목을 뺀 액수를 말한다. 내 과세표준이 1200만원, 4600만원, 8800만원 등으로 나눠진 구간의 어디에 속하는지가 중요하다. 1200만원 이하면 세율이 6%지만 1200만 초과~4600만원이면 세율은 15%로 껑충 뛴다. 예컨대 내 과세표준이 4000만원이라 하자. 산출세액은 1200만원의 6%에 해당하는 72만원에 1200만원을 초과하는 2800만원의 15%인 420만원을 합쳐 492만원이 된다. 여기에 다시 의료비, 보험료 등 세액공제를 받으면 최종 결정세액이 나온다. 세율은 8800만원(24%) 구간, 1억 5000만원(35%) 구간에서 훌쩍 뛴다. 과세표준은 2008년 전까지는 1000만원, 4000만원, 8000만원 등으로 구분됐다. 지금 기준이 정해지고 2010년까지 소득세율이 2% 포인트(최고세율 제외)씩 내렸다. 현 과세표준과 세율은 고소득자를 제외하고는 10여년 전 기준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임금은 2016년보다 17.6% 올랐지만 근로소득세는 70.6%나 늘었다. 물가상승 등으로 소득이 늘어 상위 과표구간에 적용돼 세금이 늘어난 효과가 크다. 2010년대에 과세표준을 물가에 따라 조정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복지재원 염출 등의 필요성으로 무산됐다. 사실상 증세였다. 물가가 오르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9개국은 과세표준, 세율 등을 물가에 연동시켜 조정한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는 2010년 이후 매년 올랐다. 매년 과세표준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최소한 몇 년 단위로, 물가가 어느 수준 이상 올랐다면 과세표준을 조정해야 한다. ‘고소득자 감세’ 논란이 우려된다면 하위 과표구간만 조정하는 방안도 있다. ‘유리지갑’인 근로소득자들로부터 세금을 편하게 가져가려면 그 정도 노력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길섶에서] 커피 대체재/김성수 논설위원

    [길섶에서] 커피 대체재/김성수 논설위원

    커피값이 줄줄이 올랐다. 스타벅스가 제일 먼저 올렸다. 4100원이던 아메리카노(톨사이즈) 한 잔이 이제 4500원이다. 다른 유명 커피 체인점들도 8일부터 값을 올린다. 담뱃값 올랐다고 하루아침에 담배를 못 끊듯 커피값이 올랐다고 당장 커피를 끊지는 못한다. 안 그래도 다른 물가도 줄줄이 올라 힘든데 주머니 사정만 더 나빠지게 됐다. 커피를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 뜨거운 걸 싫어해서 아이스라테를 가끔 먹는 정도다. 전통차를 더 좋아한다. 회사 지하의 노포(老鋪)에 자주 간다. 메뉴가 다양하지만 늘 십전대보탕을 먹는다. 차갑게도 만들어 준다. 차를 시키면 생밤과 건포도, 해바라기씨, 구운 은행을 함께 내온다. 입가심으론 복분자 주스까지 나온다. 가격은 5000원. 체인점 카페라테와 같다. 가성비만 놓고 보면 커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통찻집이 옛날처럼 ‘아재’들만 모이는 곳도 아니다. 젊은 손님도 꽤 많다. 값이나 분위기로 봐도 이제 커피만 고집할 일은 아닌 것 같다.
  • “길은 못 빌려준다”… 붉은 조복 입고 동래성과 함께 스러진 송상현

    “길은 못 빌려준다”… 붉은 조복 입고 동래성과 함께 스러진 송상현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동래성 에워싼 왜군의 목판 도발“싸워 죽긴 쉬워도 길은 못 터준다”목패에 써 던지고 치열한 수성전 친분 있던 왜장의 도움 마다하고백성과 함께 저항하다 끝내 순절‘군신의 의리는 무거우니’ 글 남겨훗날 가족 요청으로 청주로 이장 동인 이발에게 찍혀 동래부 좌천서인의 영수 정철과는 평생 교감너른 묘지터엔 기생·측실 무덤도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광화문광장이 서울을 상징한다면 부산의 열린공간은 이제 송상현광장을 첫손가락에 꼽아야 한다. 과장을 보태지 않아도 부산지하철 1호선 부전역에서 양정역에 이르는 거리의 대부분이 송상현광장이다. 중앙대로와 거제대로가 합류하는 송공삼거리에는 ‘충렬공 송상현 선생상’이 높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방어전을 지휘한 부사 송상현(1551~1592)은 전세가 기울자 당상관의 붉은색 관복인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입고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왜군에 희생된 동래부 관민은 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학살의 흔적은 부산지하철 4호선 수안역에 있는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래성 성벽에서 50m 남짓 떨어진 수안역은 왜란 당시 해자 자리라고 한다. 2005~2007년 역사 예정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동래성 전투의 희생자 인골과 각종 무기류가 무더기로 나왔다. 수안역에서 7번 출구로 나선 다음 충렬대로를 따라 낙민역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송상현이 왜군과 맞섰던 동래성 남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점령한 왜군 선봉대는 주력 부대를 당시 부산 지역의 중심인 동래성으로 투입한다. 왜적의 침입 소식에 경상좌병사 이각,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함의 부대는 동래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방어전의 총책임자 역할을 해야 했을 이각이 부산성 함락 소식에 다시 주력 부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북쪽 소산역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남은 군사의 사기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왜군 병력이 동래성에 다다른 것은 4월 15일 오전 10시쯤이었다. 먼저 100명 남짓한 왜군이 송상현이 내려다보고 있는 남문 앞으로 다가가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적은 목판을 세워 놓았다. 그러자 송상현은 고민하지도 않고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써서 적진에 던졌다. 16일 아침, 조선군은 포위한 왜군과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을 벌였다. 왜군이 동래성의 동북쪽 경사진 성벽을 무너뜨리고 몰려들어 오자 군사는 물론 백성들까지 농기구를 들고 맞섰고, 부녀자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왜군에 던지며 저항했다. 동래성이 왜적에 점령당하는 순간을 훗날 동래부사를 지낸 민정중(1628~1692)은 ‘왜군의 총성이 이어지고 칼날은 쉴 사이 없이 번뜩였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고 ‘임진동래유사’에 적었다.동래성은 폐허가 됐다. 오늘날 동래성은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크게 넓혀서 다시 쌓은 것이다. 이때 최소 12명의 왜란 희생자 유골과 포환·화살촉 등이 나왔다. 정언섭은 유골을 6개의 무덤에 나누어 안치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비(壬辰戰亡遺骸之塚碑)를 세웠다. 1788년(정조 12)에는 동래부사 이경일이 우물을 파다가 다시 임란 희생자의 유골을 발견했고 무덤은 7개로 늘어났다. 정언섭은 비석에 ‘바라건대 충신 의사의 장지인 것을 알고 밟지도 말고 훼손하지도 말라’고 새겼다. 하지만 무덤군(群)은 일제강점기 복천동에 초라하게 합분(合墳)됐고, 1974년 다시 금강공원으로 옮겨졌다. 동래성에 침입한 왜장 가운데 한 사람인 다이라 시게마스는 왜란 이전 부산을 오가며 송상현으로부터 후하게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이라는 피할 곳을 눈짓으로 알려 주고 옷소매를 잡아끌기도 했지만 송상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서 송상현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아버지에게 보낼 글을 썼다. ‘외로운 성에 달무리지고 / 다른 군진은 단잠에 빠져 있네 / 군신의 의리가 무거우니 /부모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송공단은 송상현이 순절했다는 정원루 자리에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운 제단이다. 정원(靖遠)이란 ‘멀리 있는 왜인들을 바로잡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니 이곳에서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송공단은 동래부사 이안눌이 1608년(선조 41) 동래성 남문 밖 농주산에 마련했던 전망제단(戰亡祭壇)을 넓혀서 옮긴 것이다. 동래부 관아는 남문 터 표석이 있는 골목 입구에서 동래시장 쪽으로 가면 오른쪽 골목에 나타난다. 송공단은 시장 언덕길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 골목에 보인다. 동래성 전투가 끝나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종군승 겐소는 송상현과 첩 금섬(金蟾)의 시신을 동문 밖에 장사지내고 나무로 표식을 해 두었다. 1595년 송상현 집안이 장지를 옮기고 싶다고 상소하자 선조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 적이 있는 경상도절도사 김응서에게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주선하도록 명했다. 상촌 신흠(1566~1628)의 ‘송동래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산 일대는 여전히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금섬은 함흥기생 출신이었다. 송상현의 시신 곁에서 사흘 동안 왜군을 꾸짖다 살해됐다. 통천군수 한언성의 서녀라고 한다. 그러니 ‘김섬’이 아닌 ‘금두꺼비’라는 뜻의 ‘금섬’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기생 시절의 애칭이었을 것이다. 동래성에 머물던 또 한 사람의 측실 이양녀(李良女)는 송상현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 서울로 보냈으나 부산성 함락 소식에 ‘가군(家君) 곁에서 죽겠다’며 돌아갔다. 이양녀는 포로가 돼 일본에 끌려갔다가 훗날 송환됐다.송상현의 무덤은 충북 청주에 있다. 묫자리는 이여송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지관 두사총(杜師聰)이 고른 것이라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청주나들목으로 빠져나가 청주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왼쪽에 송상현을 기리는 사당 충렬사가 나타난다. 무덤은 다시 동쪽으로 1㎞쯤 가야 한다. 부인 성주 이씨의 무덤은 남쪽으로 1㎞쯤 떨어진 황구산 기슭에 있다. 그러니 선조가 내린 땅은 송상현의 사당과 무덤, 그리고 부인의 무덤을 모두 아우르는 넓이였을 것이다. 송상현의 후손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 송상현의 무덤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1619년(효종 10) 세운 신도비가 있다. 송시열이 지은 행장에 ‘동래는 왜적이 침입할 첫머리가 되는 까닭에 공이 문무의 재략을 겸비했다는 핑계로 수령에 제수됐던 것이니 실로 이 처사는 선의가 아니었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행장은 ‘공은 이발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 조정에서 편안히 지낼 수 없어 내외직을 들락날락했다. 이발이 죽자 그 무리들로부터 더욱 심한 미움을 샀다’고도 했다. 송상현은 서인의 영수 정철과 돈독했던 듯하다. 정철의 ‘송덕구에게 주다’라는 시에는 ‘호산의 송씨가 없어지면 깊은 속 어디다 열어 보일꼬’라는 대목이 보인다. 나이 차는 있지만 두 사람이 깊은 교감을 나누는 사이였음을 짐작게 한다. 송상현의 본관은 여산이다. 호산은 오늘날 전북 익산에 속하는 여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덕구는 송상현의 자(字)다. 이발은 정철의 처벌을 주도한 동인의 영수였다. 때문에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송상현이지만 오지의 무관직으로 밀려나곤 했고, 왜침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1591년에는 위기의 동래부로 좌천됐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눈에 명당으로 느껴지는 송상현의 묘소에는 금섬과 이양녀의 무덤인 작은 봉분 두 개도 보인다. 정작 남편의 무덤을 옮겨 온 이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성주 이씨의 묘소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안쓰러운 일이다. 성주 이씨 무덤은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부인의 무덤은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을 뿐인 관광객 한 사람에게 먼 길을 직접 안내한 송상현충렬사관리소장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충렬사 문화유산해설사의 친절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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