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논설위원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방산 투자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자신감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김효범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기능장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560
  • [씨줄날줄] 촉법소년/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촉법소년/박홍환 논설위원

    중국 북송 시대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사마광은 교육자로도 손색없었다. 그가 남긴 저서 ‘가범’(家範)은 가정교육 지침서로 평가된다. 그는 “아이가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어른을 공경하게 하고, 그러지 못하면 준엄하게 나무라야 한다”고 엄한 훈육을 강조했다. 가정과 사회의 이 같은 교육행동 준칙이 철저하게 적용됐다면 패륜아 같은 비뚤어진 아이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 역대 황제 중 유일하게 ‘천고일제’(千古一帝)란 호칭을 얻은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는 엄마 치마폭에 휩싸여 있을 때인 7살에 황위에 올라 14살 때부터 직접 정사를 챙기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신하들의 높은 견제 벽을 뚫고 황제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면서 나라를 반석에 올렸다. 만 14세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닌 것이다. 실제 옛 선조들은 아이가 6세가 되면 글자를 익히도록 하고, 7세가 되면 ‘효경’ ‘논어’ 등을 구해 읽도록 했다고 한다. 8세가 되면 어른 공경과 겸양의 도리를 가르쳤고, 9세가 되면 역사를 알게 했으며, 10세가 되면 스승을 구해 교육시켰으니 범죄의 심성이 싹틀 여지가 어디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큰 반향을 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돼 소년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고, 촉법소년 기준 연령 논란에 또 한번 불을 댕겼다. 특히 2015년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벽돌 투척 사망 사건도 드라마 후반부에 조명됐다. 당시 용의자로 붙잡힌 2명의 소년 가운데 한 명은 9살이라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형사처벌 연령인 만 14세가 안 된 11살이어서 촉법소년으로 분류돼 가정법원에 송치됐다. 법무부가 현행 만 10~14세인 촉법소년 기준 연령을 낮추겠다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했다고 한다. 일부 그릇된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오히려 “촉법소년이라 처벌 안 받아”라며 사회를 조롱하는 사건들이 잇따르니 촉법소년 적용 연령을 낮춰 형사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윤석열 당선인도 공약으로 내세운 사안이다. 가정과 사회가 막지 못한 촉법소년들의 일탈, 사마광과 강희제라면 과연 어떤 해법을 내놓을까.
  • [길섶에서] 엘리베이터 의자/전경하 논설위원

    [길섶에서] 엘리베이터 의자/전경하 논설위원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32층까지 올라가더니 중간중간 멈췄다가 지하 3층까지 갔으니 그럴 수밖에. 늘 하던 대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데 벽에 기대선 어르신이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를 꽉 쥐고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 일부 지역에서 어르신들이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 신호등에 간이의자가 설치됐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걷다가 멈춰 서면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며 무단횡단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간이의자를 만들어 무단횡단을 줄였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효도의자’라고도 불린단다. 어르신들이 제법 있는 고층 아파트라면 1층에 그런 의자를 설치하면 어떨까 싶다. 아파트는 갈수록 높아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늘어나니 1층 한쪽에 간이의자를 두는 것은 고령화 시대에 낯설지 않을 듯하다. 그러면 무거운 짐을 잠시 둘 수 있을 테니 다른 입주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씨줄날줄]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귀환/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귀환/임병선 논설위원

    우크라이나 침공이 두 달째로 접어드는데 우리와 피를 나눈 고려인 2만여명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청산리와 봉오동 승전을 이끈 홍범도 장군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극장 수위로 지내다 쓸쓸히 삶을 마감한 사실을 알고 부끄러웠던 기억도 있다. 홍범도도, 박헌영의 아내이기 전에 탁월한 여성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주세죽도 1937년 10월 서쪽으로 달리는 열차 화물칸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흩어져 살던 우리 민족 17만 2000명이 스탈린의 강제 이주 명령을 받아든 것이었다. 열차가 멈춘 곳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각각 9만 5000여명과 7만 6000여명이 하차했다. 황무지를 개간하다 혹독한 추위에 목숨을 잃은 이만 2만 5000명에 이르렀다. 그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들은 파미르고원 깊숙이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멀리 동유럽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볼가강 유역, 벨라루스까지 살 곳을 찾아 이동했다. 낯선 땅에서 얼마나 간난신고를 겪었을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그런데도 고려인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현재 카자흐스탄 인구의 0.6%에 불과한 8만여 고려인이 이 나라 경제력의 22%를 담당한다니 놀랍다. 비옥하기로 이름난 우크라이나 평원에까지 뻗어 나갔는데 지금 그 평원에 포연이 가득하다. 폴란드, 루마니아 국경 일대로는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은 고려인 피란민들이 밀려온다고 한다. 조부모로부터 대물림하듯 유민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심경을 헤아리기 어렵다.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고려인 3세와 4세 31명이 광주 지역사회의 도움을 얻어 오늘과 모레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13세 소년과 10세 소녀에 이어 개전 이후 첫 집단 이주다. 이들은 2000년대 초부터 5000명이 모여 살고 있는 광주 광산구 월곡동과 산정동 고려인 마을을 새로운 지붕으로 삼게 된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받아들일 때처럼 세기를 건너 할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오는 이들을 따듯하게 보듬었으면 한다. 정부도 ‘입국 간소화’ 생색만 내는 데 그쳐선 안 된다.
  • [길섶에서] 피날레/진경호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피날레/진경호 수석논설위원

    세기의 배우 알랭 들롱이 스위스에서 92년의 생을 스스로 거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4년 전엔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104년의 삶을 스스로 거뒀다. 다량의 신경안정제가 온몸의 혈관으로 퍼져 나가는 동안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평생을 산과 들로 내달리다 나이 90을 넘겨 운전면허 말소로 발이 묶이고 병을 얻어 쇠약해진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여를 ‘살아내야 했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였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삶을 일구고 가꾸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그럼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삶의 시작이 그러했듯 그 끝 또한 내 뜻 밖의 일인가. 삶을 거두는 건 오로지 신의 영역인가. 100세 시대. 안락사가 다시 입길에 오른다. 그러나 이 생이 소풍이었기는 시인 천상병만이 아닐 터. 이 세상 아름다웠노라 하늘에 전하려면 생의 마지막장은 그냥 ‘살아낼’ 일이 아니겠다. 마침표보다 피날레가 먼저다.
  • [서울광장] 대통령 당선증은 만능 통행권 아니다/박록삼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통령 당선증은 만능 통행권 아니다/박록삼 논설위원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산문시1’, 1968) 반세기 전 독재와 권위주의에 짓눌렸던 시절 시인 신동엽(1930~1969)은 유토피아적 낭만이 있는 대통령을 꿈꿨다. 현실은 달랐다. 대통령의 주거 공간이자 집무 공간인 청와대는 말 그대로 요새였다. 북악산을 뒤로 두른 채 미사일, 전투기, 드론 등의 공격을 막아 낼 방공망을 구축했다. 청와대 앞길은 아예 통행 불가였고, 경호실은 청와대 주변 도로 맨홀 안까지 보며 폭탄 설치 여부를 확인했다. 북한과 맞댄 분단국가, 그것도 독재정권 대통령의 숙명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2017년부터 청와대 앞길은 24시간 전면 개방됐고, 청와대 뒷산 등산로도 상당 부분 열렸다. 본관, 대통령 및 비서관 집무실 등 몇몇 건물을 제외한 내부를 둘러보는 관람 프로그램도 연중 가동된다. 청와대 앞 분수대광장은 늘 집회로 북적거리기 일쑤였다. 신동엽이 노래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대통령은 아닐지라도 제법 국민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셈이다. 윤석열 당선인 역시 취임 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의 권위를 내려놓고 국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의지가 있으리라 기대한다. 문제는 본말이 뒤바뀐 듯한 지나침이다. 국민과의 소통을 명분으로 계획한 집무실 이전 정책에 독단과 불통이 단단히 들어차 있다. 집무실 이전은 국민과의 거리를 더욱 좁히고 국가의 상징 공간을 바꿈으로써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간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새로운 백년지대계를 대하듯 꼼꼼히 준비해야 할 일이다. 속도전 하듯 추진한다면 필연적으로 예기치 못한 혼란들이 이어지고 땜질식 대응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에 있는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조차 이용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구축한 최첨단 정보 시스템 등 보안 설비를 사실상 폐기하는 것이 안보 측면이나 재정 측면에서 올바른 선택인지 의아하다. 물론 국민 속으로, 광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환영할 만할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를 버리고 옮기는 집무실이 용산 국방부 안이다. 또 다른 요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국민과의 담을 쌓는 것에 다름 아닐 테다. 대통령은 결코 개인이 아니기에 동의할 수 없는 말이지만, 윤 당선인 말대로 ‘자신의 결단’으로 여론을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정치적·법적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여하튼 윤 당선인이 설령 국민들의 목소리는 외면하더라도 최소한 전문가들의 다양하면서도 심도 있는 의견만은 경청해야 한다. 국가 안보는 정치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집무실 이전 외 많은 이들의 염려 대상은 또 있다. 법과 공정의 실종이다. 대장동 의혹의 진실은 특검법 발의를 놓고 공방을 거듭하다 시간만 끌지 모른다. 대검 수사정보담당관실의 총선 개입 의혹인 ‘고발사주’ 수사 역시 대선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윤 당선인 부인 김건희 여사의 소환 소식도 없다. 윤 당선인의 장모 최은순씨가 고발된 경기도 양평 공흥지구 개발 특혜 의혹 수사는 회의적이다. 이거야말로 “나를 신경쓰지 말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말하는 ‘윤 당선인의 결단’이 간절히 필요한 대목이다. 집무실을 옮기는 데 수천억원 예산을 들이는 것, 검·경·공수처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 법 정의가 실종되는 것 등은 불필요한 사회적·경제적 비용이다. 대통령 당선증은 만능 통행권이 아님을 명심하길 바란다.
  • [씨줄날줄] 화성과 북극성/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화성과 북극성/박홍환 논설위원

    지구 밖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된 것은 지난 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특히 물체를 우주로 쏘아 보낼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로켓이 개발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옛소련의 우주 경쟁으로 인류는 달에 발을 내디뎠고, 이제는 민간 재벌인 일론 머스크조차 ‘화성 이주’ 계획을 공언할 정도다. 예로부터 화성은 그 존재 자체가 인류의 관심사였다. 서양에서는 로마신화 속 전쟁신 마르스 이름을 부여받았고, 동양에서는 불의 별(화성) 또는 형혹성으로 불렸다. 동서양 공히 재해와 전쟁의 징조를 보여 주는 별로 여긴 셈이다. 2020년 7월 발사된 나사의 화성탐사 로버 ‘퍼서비어런스’는 장장 7개월간의 긴 항해 끝에 화성에 착륙, 갖가지 연구를 수행했다. 어찌 보면 인류가 현재 기술로 직접 갈 수 있는 여정의 최대 한계치가 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에서도 그런 화성에 대한 열망이 엿보인다. 북한은 얼마 전 ‘레드라인’을 넘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재개했다. 북한은 화성17형이라 주장하고, 한미 정보당국은 화성15형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름이 어찌됐건 이번에 발사한 ICBM은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갖췄다고 한다. 북한이 개발한 최장거리 미사일인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은 크게 화성 계열과 북극성 계열로 나뉜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액체연료 엔진을 사용하는 미사일에 화성 계열, 고체연료 엔진을 사용하는 미사일에 북극성 계열 명칭을 붙였을 것으로 분석해 왔다. 애초 북극성 계열을 일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분석했지만,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지상발사탄도미사일에도 북극성 명칭을 붙이면서 연료 성격에 따라 명칭을 부여하는 것에 힘이 실렸다. 북한 매체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중거리미사일 및 ICBM에는 화성, SLBM 및 일부 지상발사탄도탄에는 북극성 명칭을 붙인다는 것이다. 최대 사거리의 꿈을 화성이라는 이름에 담은 것은 아닐까. 광명성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상징하듯 북극성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의미한다는 분석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 [길섶에서] 비밀번호/김성수 논설위원

    [길섶에서] 비밀번호/김성수 논설위원

    일주일에 한 번 집앞 식료품 가게에서 장을 본다. 갈 때마다 여섯자리 회원번호가 툭하면 생각이 안 나서 곤욕을 치른다. 3×로 시작하는 앞의 두 자리는 금방 떠오르는데 나머지 네 자릿수 조합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아내에게 문자로 비밀번호(비번)를 물어보고 나서야 결제가 가능하다. 숫자와 기호, 영문을 섞어 써야 하는 비번은 더 난감하다. 인터넷쇼핑은 원래 관심도 없었지만, 그래서 아예 포기했다. 회사 시스템에 접속하려 해도 비번을 넣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리 자주 비번을 바꾸라고 하는지. 은행 비번은 처음부터 한 가지로 통일했다. 이마저도 최근엔 지문인식으로 바꿨다. 집에 들어갈 때는 아파트 현관 비번, 우리 집 전자도어록 비번까지 다 눌러야 한다. 얼큰하게 취한 날에도 거뜬히 이 험난한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서 집 안에 들어가는 걸 보면 다행히 아직 기억 능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도 가뜩이나 복잡한 세상, 외워야 할 게 너무 많다.
  • [씨줄날줄] 강경화 낙선 교훈/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강경화 낙선 교훈/박록삼 논설위원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의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직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열린 ILO 이사회에서 강 전 장관은 1차 투표를 통과했지만, 2차 투표에서 56표 중 단 2표를 얻는 데 그치며 낙선했다. 아프리카 토고 출신의 질베르 웅보 세계농업기구 사무총장이 당선됐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ILO 사무총장 꿈은 사라졌다. 강 전 장관 개인의 아쉬움을 떠나 한국의 안타까움이 크다. 한국은 지금까지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전 사무총장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국제형사재판소(ICC) 송상현 소장, 세계은행 김용 총재, 국제해사기구(IMO) 임기택 사무총장,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 이회성 의장,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김종양 총재 등 굵직한 국제기구 수장을 배출해 왔다. 그 배경에는 개인의 전문성 및 역량과 함께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외교력이 있었다. ILO 사무총장 도전은 사실상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의 측면이 컸다. 전략과 전술 측면에서 정교한 준비와 노력 또한 부족했다. ILO는 국제기구 중 유일한 노·사·정 3자 기구다. 그에 맞게 28개국 정부 대표와 노사 대표 각 14명 등 총 56명의 이사가 참여한다. 노동 특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을 뜻한다. 지난해 10월 강 전 장관이 공식 도전 의사를 밝히던 당시 민주노총에서는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지난해 4월 기본협약 3개를 뒤늦게 비준했을 정도로 ‘노동 후진국’으로 꼽혀 왔다. 여기에 아프리카와 유럽 중심의 공고한 결속을 깨기 위한 어떠한 노동의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외교부 등이 범정부 TF를 꾸리며 지원에 나섰지만 국내 노동계의 외면 속에 국제 노동계의 지지를 받기는 쉽지 않음이 명백했다. 게다가 강 전 장관 개인이 노동과 관련해 내세울 어떠한 업무 이력도 갖지 못한 것은 또 다른 큰 취약점이었다. 하다못해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내지도 않았으니 ILO 사무총장으로서 경쟁력을 갖춘 후보가 아니었다. 전략도 부족했고, 전술도 없었고, 욕심은 과했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국제기구 수장 도전에 강 전 장관의 낙선은 교훈이 돼야 한다.
  • [길섶에서] 긍정의 힘/오일만 논설위원

    [길섶에서] 긍정의 힘/오일만 논설위원

    우리 뇌는 당근보다 채찍에 훨씬 민감하다고 한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협했던 부정적 경험이 DNA에 강하게 각인된 탓이다. 7000만년 전 공룡이 판을 치는 쥐라기 시대, 우리 포유류 조상들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줄행랑치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다. 먹거리나 짝짓기 등 당근의 기회는 다음에도 있지만 포식자에게 먹히면 그것으로 끝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우리 조상들은 생존에 부정적인 경험을 유전자에 접착식 테이프로 붙여 놓은 셈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이유다. 설령 부정적 경험을 잊었다고 생각해도 뇌는 깊숙한 곳에 상처 자국을 남긴다. 실패와 성공이 비슷한 확률이면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보다 실패를 피하는 쪽을 택한다. 뇌는 상실과 실패의 아픈 과거를 부각하고 현재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스스로 긍정의 힘을 키우지 못하면 비관론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 진화의 교훈이다.
  • [인사]

    ■한국일보 [부장] △독자마케팅국 마케팅지원팀장 엄태석△경영지원실 재무관리팀장 유종수 [부장대우] △신문국 종합편집부 김도상△신문국 그래픽뉴스부 송정근△신문국 그래픽뉴스부 신동준 ■한경BP △한경BP 대표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서화동△논설위원 이건호△논설위원 유병연△편집국 부국장 겸 정책부문 에디터 박준동△부국장 겸 글로벌포럼사무국장(아그로플러스 대표 겸직) 장진모△부국장 겸 영상부문 에디터·디지털라이브부장 조성근△부국장 겸 B&M(비즈니스&마켓)부문 에디터 이심기△정치부장 류시훈△경제부장 주용석△금융부장 강동균△산업부장 서정환△중소기업부장 김동욱△유통산업부장 송종현△사회부장 이관우△건설부동산부장 김형호△증권부장 이상열△문화부장 오상헌△국제부장 서욱진△스타트업부장 고경봉△오피니언부장 이정선△광고국 부국장대우 신문마케팅1부장 유형노△제작국 윤전부장 신운섭△재경국장 이서준△재경국 재경부장 염흥수△업무지원국장 박해준△업무지원국 총무부장 홍재열 ■한국경제매거진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김용준 ■한경닷컴 △한경닷컴 뉴스국장 양준영 ■한경디지털랩 △한경디지털랩 디지털자산센터장 신경훈 ■한경글로벌뉴스네트워크 △한경글로벌뉴스네트워크 편집장 박해영 ■KBS △제작1본부 제작기획1부장 윤성도△제작1본부 시사교양1국 CP 유희원 ■MBC플러스 △광고사업본부 이사 정문주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씨줄날줄] ‘파친코’/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파친코’/임병선 논설위원

    오늘 애플TV+에서 세 편이 공개되는 드라마 ‘파친코’(pachinko)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파친코는 구슬을 기계로 퉁겨 구멍에 넣은 뒤 그림의 짝이 맞으면 당첨금을 받는 일본의 국민 오락이다. 패전 이후 한없이 막막해진 서민들이 구슬이 좌르륵 쏟아지는 소리에 불안을 떨쳐내고 값싼 위안을 얻었다.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 전역에 1만 7000여 업소가 연 매출 29조 500억엔(당시 환율로 232조원)에 종업원 44만명을 거느렸는데 2020년 14조 6000억엔(약 147조원)으로 확 줄었다. 연간 400곳이 문을 닫아 2019년 말에는 9639곳뿐이었다. 파친코 산업은 날로 쇠퇴하는데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뒤늦게 조명받고 있다. 일본에서 파친코를 운영하는 이들 중에는 유독 재일 한국인 ‘자이니치’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루한’의 운영자 한창우씨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이 한씨에게 직접 들은 인생 역정을 옮긴 책이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에 선정되는 등 인기를 끌자 애플이 판권을 사들여 8부작으로 제작했다. 어머니와 선자(윤여정), 아들, 손주 4대가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이겨 내며 분투하는 80년을 그려 낸다. 인종차별을 겪으며 미국에서 자란 작가가 재일교포의 신산한 삶을 그려 낸 작품에 미국 자본이 1000억원을 투입하고 우리 배우들을 기용해 제작한 점이 흥미롭다. 유튜브에 공개된 첫 회 맛보기 영상을 봤는데 프랑스 영화 ‘연인’에서의 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왜곡된 시선 같은 게 느껴져 불편했다.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이 영화 ‘피와 뼈’에 그려 낸 자이니치들의 울분을 못 살려낼까 싶어 불안하기도 한데 서구 평단의 프리뷰 반응은 뜨겁다. 다소 놀라운 일은 서울 태생의 코고나다와 캘리포니아 출신 저스틴 전, 두 한국계 감독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이며 57년 경력의 윤여정에게도 오디션을 보게 한 점이었다. 제작진이 “애플이니까”를 남발하자 “사과건 배건 난 관심 없다”고 맞받아쳤다는 윤여정이다. 코고나다 감독이 윤여정의 얼굴에 한국 역사를 그린 지도가 담겨 있다고 했다는데 정말 그런지 궁금하다.
  • [길섶에서] 단톡방 설전/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단톡방 설전/임창용 논설위원

    반 년째 모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고향 친구들의 단톡방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한 친구가 거리두기도 완화됐으니 모임을 갖자고 제안하면서다. 누군가 “인생 뭐 있나. 좀 모여서 재밌게 놀자”며 맞장구를 친다. ‘나라님’도 포기 수순인 것 같다며 비꼬는 친구도 있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코로나에 감염되면 직장서 눈치 보이는데”라면서. 그러자 한 친구가 “공식 모임은 미루고 당분간은 비공식 만남에 만족하자”고 절충안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니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은퇴한 친구들은 모이자는 쪽, 아직 직장에 나가는 친구들은 자제하자는 쪽이다. 평소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감이 크다는 의미일 게다. 코로나 시대라고 해도 직장인들이야 동료들과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니 모임이 덜 아쉬울 터. 이럴 때일수록 은퇴한 사람에겐 친구의 전화 한 통이 소중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 [인사]

    ■KBS아트비전 △사장 김영도△이사 배안철 ■KBS비즈니스 △이사 박유한 ■한국경제신문 △상무 광고국장 송광림△상무보 논설위원실장 조일훈△편집국장 정종태
  • [씨줄날줄] 초과 사망/문소영 논설위원

    [씨줄날줄] 초과 사망/문소영 논설위원

    초과 사망(excess death)은 독감의 대유행이나 스모그와 같은 대기오염 등으로 평균사망률을 훨씬 넘어서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일컫는 단어다. 초과사망의 대표적인 사례가 ‘런던 스모그 사건’이다. 1952년 12월 5일부터 9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극심한 대기오염이 발생했다. 당시 런던의 가정에서는 난방용 석탄을 대량으로 소비했는데 이때 발생한 굴뚝의 연기와 이산화황 가스 등이 안개와 뒤섞여 만성기관지염이나 심장병 환자, 노인, 유아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켜 4000명이 사망했다. 평균 사망률의 3배 이상의 초과 사망이 일어난 것이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22일 오존 농도 상승으로 초과 사망자가 2010년 1248명에서 2019년 2890명으로 2.3배 늘었다고 밝혔다. 대기 중 오존 농도가 높아져 코 점막, 피부, 각막 등을 자극하고 건강한 사람도 호흡곤란을 경험할 수 있다. 오존주의보 발령 횟수는 2006년 52회에서 2018년 489회로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코로나 누적 확진자가 같은 날 1000만명을 넘어섰다. 하루 신규 확진자가 40만~62만명으로 세계 1~2위를, 사망자 역시 300여명대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2년간 코로나 방역의 성공을 자랑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위중증 환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은 60대 이상의 확진자가 급증한 탓에 초과 사망이 예고된다. 코로나 환자가 밀려들어 병상이 모자라고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아 숨지는 다른 질병의 환자도 초과 사망군에 속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코로나 특위에 참여한 정기석 한림대 호흡기내과 교수는 30만~60만명의 일일 확진자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오미크론의 가공할 전파력”을 거론한다. 처음엔 확진자 1명이 2명을 감염시켰지만, 오미크론은 확진자 1명이 10명 가까이 감염시킨다는 것이다. 현재의 백신이 오미크론 감염 예방에 효과적이지 못하고 백신면역이 지속되는 기간이 3~6개월에 불과한 점도 문제다. 안철수 인수위원장은 그제 현 정부의 방역을 ‘정치방역’으로 규정하고,“항체조사로 지역·연령별 대책을 내는 과학방역”을 하겠다고 한다. 초과 사망을 막을 대책을 내놨으면 한다.
  • [길섶에서] 무거운 입/임병선 논설위원

    [길섶에서] 무거운 입/임병선 논설위원

    30년을 함께 살아 온 아내의 가장 큰 불만은 내 말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재미가 없냐고 늘 푸념한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상사가 “회사에 나와 세 마디만 하고 집에 돌아가지?” 물었던 일도 있다. 클래런스 토머스 미국 연방 대법관이 최근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2006년부터 10년 동안 대법원 변론 과정에서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다가 처음 질문을 던진 것이 기사화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인터뷰 답변 가운데 두 가지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2013년 “괜히 방 안에 들어앉아 언쟁할 시간은 평생에 걸쳐 남아 있다”와 2000년 “양(量)만 늘릴 이유가 없다.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으면 난 질문하지 않는다. 대체로 느긋하게 기다리면, 다른 이가 내 질문을 대신 하더라”는 것이다. 말 많던 선거가 끝났는데 3주가 다 돼도 소란이 잦아들지 않는다. 저마다 자중자애했으면 좋겠다.
  • [서울광장] 586의 버티기, 민주당엔 악몽이다/임창용 논설위원

    [서울광장] 586의 버티기, 민주당엔 악몽이다/임창용 논설위원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에서 제기됐던 ‘586 용퇴론’이 힘을 얻었다면 대선이 어떻게 됐을까? 지난 일을 가정하는 게 부질없긴 하지만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586세대 정치인들의 기득권 이미지에 거부감이 큰 중도층 표를 더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용퇴론은 송영길 대표의 ‘반짝쇼’에 그쳤다. 외려 우상호 의원이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는 등 586 정치인들이 선대위 요직을 맡아 선거를 지휘했다. 선거 막판 지지층 결집을 통해 역전을 노렸지만 중도층 표심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필자는 지난해 1월 칼럼에서 586 정치인들에게 부여했던 집권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거둬들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청와대와 민주당 핵심 포스트에 포진한 586 정치인들이 주도한 정책은 이미 실패했으며, 전문성과 실천적·절차적 민주주의 가치로 무장한 인재들로 교체해 어긋난 국정을 바로잡으라고 했다. 하지만 586 정치인들은 그 후로도 건재했고, 문 대통령은 국정 실패 만회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일반적인 정치 이력이나 행정 경험을 쌓아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다. 권투선수로 치면 맷집 좋은 초보 선수가 링에 올라 두들겨 맞다 보니 상대방이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승리한 모양새가 됐다. 586세대 중심의 문재인 정권 키맨들은 정책에 실패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채 조국 사태와 원전 경제성 조작 사건, 울산 선거 개입 의혹이란 링에서 윤석열에게 무수한 펀치를 날렸다. 검찰개혁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하지만 ‘내로남불’이란 덫에 걸려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상대 체급만 키워 지금의 결과를 초래했다. 대선에서 패하면서 586 정치인들이 대거 일선에서 물러날 거란 예상이 쏟아졌다. 선거 책임론에다 586 정치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이상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에서다. 실제로 송영길 당대표 등 지도부는 총사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민주당 내 586 세력은 호락호락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싶다. 대선 패배를 수습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면서 친문 핵심 586 정치인인 윤호중 원내대표에게 공동위원장직을 맡겼다. N번방 불꽃추적단 활동가인 26세 박지현 공동위원장과 투톱으로 세워 2030세대를 포용하는 ‘젊은 정당’ 모양새를 연출했지만 586 색깔 희석용 냄새가 난다. 민주당 내에서도 대선 패배 책임 당사자인 윤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아선 안 된다며 사퇴 목소리가 거세다. 하지만 윤 위원장은 사퇴 요구를 일축한 상태다. 윤 위원장은 지난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다급한 민생 현안을 챙기고 정치개혁 및 검찰개혁 법안 입법에 주력하겠다고 비대위 운영 방향을 밝혔다. 하지만 정작 대선 패배의 주요인인 부동산 폭등과 조국 사태에 대한 반성, 586식 낡은 정치 탈피를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87년 체제를 청산하고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586세대 정치인들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71.3%가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586 정치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는 의미다. 오죽하면 586 운동권의 상징격인 함운경씨가 “586세대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일갈했을까.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김영춘 전 의원이 그제 “거대담론 시대는 저물었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한 점이 그나마 당내 변화에 대한 작은 희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윤 위원장이 선거를 지휘하는 한 1월 ‘586 용퇴론’ 이후의 상황이 재연될 공산이 크다. 586 정치인들이 버틸수록 민주당에 대한 국민, 특히 중도층의 불신은 커질 것이다. 6월 지방선거는 물론 2년 뒤 총선에서 당에 악몽을 안겨 줄 수도 있다. 반독재 투쟁 시절의 ‘586식 정의’는 시효가 끝났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 [씨줄날줄] 청와대 사적 지정/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청와대 사적 지정/서동철 논설위원

    문화재청이 ‘문화재’라는 이름과 그 분류체계를 고치기 위한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양한 찬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는 오는 5월 10일이면 적어도 우리가 오랫동안 써 왔던 ‘문화재’라는 표현은 수명을 다하고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이날 달라지는 것은 또 있다. 청와대가 ‘역사’로 바뀌는 것이다.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계획에 제동이 걸렸음에도 취임 당일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방침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경복궁과 청와대는 맞붙어 있다. 일대는 태조가 1395년 경복궁을 지어 입궐한 이후 627년 동안 최고 통치자의 체취가 이어 담긴 역사적 복합공간이다. 대통령이 떠난 이후 청와대의 난개발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새로운 건물을 지어 자신들이 원하는 용도로 쓰겠다는 꿈을 꾸면서 ‘바람을 잡는’ 분위기가 벌써부터 없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남쪽 경복궁과 서쪽 칠궁이 각각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다. 사적은 보호구역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만큼 마구잡이 개발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자연경관지구나 역사문화미관지구 같은 서울시 조례로도 이중삼중 꽁꽁 묶여 있어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청와대 내부에는 적지 않은 문화유산이 있다. 대통령 관저 뒤편의 보물 제1977호 경주 방형대좌석조여래좌상이 대표적이다. 이참에 고향인 경주로 하루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 함께 세웠다는 오운정도 있다. 현판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것이라니 그 역사성도 남다르다. 누군가는 ‘경복궁의 후원’으로 청와대의 문화재적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궐 뒷마당’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 공간’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중요하다. 청와대를 가장 잘 보존하면서 활용도를 높이는 방법은 사적 지정이다. 경복궁이 문화재면 청와대도 문화재여야 마땅하다. 사적 지정은 청와대의 모든 것을 지금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이기도 하다. 더하여 대통령 집무실이 떠나도 ‘옛 청와대’가 아닌 청와대여야 한다. 조선 왕조가 막을 내렸다고 경복궁이 ‘옛 경복궁’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 [길섶에서] 독대 유감/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독대 유감/박현갑 논설위원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대통령이 일하고 있는 모습과 공간을 국민들이 공원에 산책 나와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정신적인 교감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 20일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는 계획을 밝히면서 한 말들이다. 의식을 지배하는 건 공간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의식을 지배한다. ‘문 대통령-윤 당선인 오늘 청(靑) 독대’, ‘오찬 회동 불발 ’. 최근 뉴스에서 심심찮게 나온 표현들이다. 독대는 제왕적 통치 시절 만나기 어려운 권력자를 만날 때 사용할 만한 권위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한자어다. 국어 가운데 한자어 비중이 높다고 하나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한자어를 써야 품위 있고 의미 전달이 잘 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대통령과 점심 만남 깨져’, ‘여야 대표 자주 보기로’ 등 시민 언어를 사용하면 품위가 없나?
  • [부고]

    ●이이춘(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씨 별세, 이동훈(삼성전자 프로)·지은(두산 부장)·지민씨 부친상, 이장원(애플 근무)씨 장인상 = 21일 은평성모병원, 발인 25일. (02)2030-4444 ●김성중씨 별세, 박병호(사업)·지영·난영(수원대 교수)·매영씨 모친상, 정재민(표준E&C 대표)·윤승용(남서울대 총장)씨 장모상, 박명규(서울목동마취통증의학과의원 원장)씨 조모상 = 2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4일. (02)3010-241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