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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농철 해충 우글우글… 방제 시급

    본격적인 영농기를 맞은 전북 지역 논밭에 월동 해충이 우글거려 방제가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2일 전북도농업기술원에 따르면 최근 도내에서 콩과 해충인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의 월동량을 조사한 결과 포획기 1개당 56.7마리가 채집됐다. 이 같은 채집량은 지난해 2.5마리보다 무려 22배가 늘어난 것으로 방제를 하지 않을 경우 콩작물에 큰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큰 것으로 분석됐다.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는 콩과 작물의 잎과 줄기의 수액을 빨아 먹어 생육을 방해하는 해충이다. 또 ‘벼 에이즈’로 불리는 줄무늬 잎마름병의 주범인 애멸구도 지난해보다 76% 늘었다. 오디 생산량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뽕나무 역시 1줄기당 2.4마리로 지난해보다 30%가량 늘었다. 온대성 외래 해충인 꽃매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산간부인 무주군과 장수군을 제외한 도내 12개 시·군에서 모두 관찰됐다. 2008년 봄 부안군에서 처음으로 관찰된 이후 4년 만에 도내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꽃매미는 과실수 줄기와 열매즙을 빨아 먹어 고사시키는 해충이다. 이같이 도내 전역에서 월동 해충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겨울 날씨가 봄처럼 따뜻한 날이 많았고 봄 기온은 초여름처럼 높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농업기술원 관계자는 “지난겨울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날이 전년보다 2주일 이상 적은 3일에 지나지 않았고 4월 평균 기온은 2도 높은 13.2도를 형성해 월동 해충이 번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라며 농가들의 예찰과 철저한 방제를 당부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경제 브리핑] 5년간 농지전용 ‘여의도 면적의 115배’

    세종시·혁신도시·기업도시 등 대규모 개발사업이 집중되면서 최근 5년간 여의도 100배 이상의 논밭이 사라졌다. 농림수산식품부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다른 용도로 전용된 농지가 9만 7622㏊라고 29일 밝혔다. 여의도 면적(848㏊)의 115배에 달한다. 그나마 지난해 전용된 농지 면적은 1만 3329㏊로 다른 해에 비해서 적다.
  • [심재억 전문기자의 건강노트] 다시 기침을 보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이런 정지용의 시 ‘향수’를 읽다 보면 오래전 고향을 지키며 살았던 선식이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평생을 땅만 일궈 먹고 사느라 움푹 꺼진 볼에는 주름이 밭고랑을 이뤘고 식솔들 생애까지 걸머진 등은 배롱나무처럼 굽었으며 농사에 이골이 난 손마디는 노새 무르팍처럼 불거져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습니다. 몸을 꿈적이지 않으면 끼니가 거덜나는 세상을 살면서 얻은 신병이 한둘이었겠습니까만 끝까지 그를 괴롭힌 병은 기침이었습니다. 밤마다 자지러지는 기침 소리가 나지막한 토담을 넘어 골목길에 울렸고 그때마다 목울대에 뻗친 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두 눈에 핏발이 서곤 했지요. 한바탕 기침에 시달리고 나면 기력이 죄다 빠져나간 듯 넋을 잃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한동안 숨길을 고르곤 했습니다. 이웃들도 “해소 기침이 사람 잡는다.”며 안타까워들 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기침 탓하며 농사일을 게을리한 건 아닙니다. 잘 키운 누룩소 앞세워 철마다 논밭 다 갈고 쌀농사, 보리농사 거뜬히 해낸 ‘장골’이었습니다. 그렇게 골병 기침을 쏟아댔지만 죽을병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던지 대처 병원에 간 적도 없었습니다. 가을이면 산도라지를 캐다 엿을 과 먹거나 은행알을 주워 볶아 먹는 게 전부였고, 그러는 동안 그는 기침 때문에 시들어 갔지요. 그러면서 폐병에 먹히고 천식에 주눅들었지만 먹고살기 바쁜 세상이라며 딱히 누가 보듬어 주지도 않았던 기억을 까맣게들 잊고 삽니다. 지금이야 그때와는 다르지만 아직도 기침을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침은 매우 중요한 증상입니다. 호흡기의 문제든, 식도의 문제든 기침을 가볍게 여기다가 엉뚱하게 병을 키우기 십상이지요. 감기, 독감은 물론 폐결핵, 폐암에다 천식 등이 모두 기침과 관련된 질병들입니다. 흔하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니 이상하면 한번쯤 꼭 짚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병도 잡고 고생도 덜 하는 유일한 방책이니까요. jeshim@seoul.co.kr
  • 정원문화 박람회 오세요

    정원문화 박람회 오세요

    경기도와 수원시가 10월 12~14일 팔달구 화서동 서호공원에서 ‘경기정원문화·도시농업박람회’(조감도)를 연다. 도시에 조성된 정원 조경의 최신 트렌드를 보여주고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을 확산하기 위해 경기농림진흥재단이 주관한다. 특히 박람회 폐막 뒤에도 전시 공간을 공원으로 사용해 예산낭비를 없앤다. 각종 체육시설과 산책로 등을 갖춘 서호 북동쪽 수변 6만㎡에서 열리는 박람회에는 6개 정원이 조성된다. 경기도농업기술원과 시민 공동으로 농사를 짓는 채소정원·논정원에선 논밭의 정원 기능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민정원의 경우 4m×4m 공간 12곳에 공모를 거친 시민이 공간을 꾸미고, 실험정원에서는 대학교 조경 관련 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6m×6m 공간 4곳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실험적인 공원 모델을 제안하게 된다. 모델정원에선 조경 전문가들이 수변, 평지, 숲 등 12곳에 1년 열두 달을 테마로 해 공간을 꾸미고, 기업정원에선 조경기업이 출시 제품을 이용해 정원을 만들며 신제품을 소개하게 된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사설] 평창 땅투기 불법 철저히 가려 엄벌하라

    재벌가와 대기업 경영진, 국회의원, 언론인 등이 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강원도 평창 인근의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사실이 밝혀져 투기 논란이 일고 있다. 롯데와 GS 등 대기업 총수와 일가족 등 22명은 동계올림픽 경기장 및 관련 시설 인근에 19만 7063㎡의 토지를 보유했다고 한다. 일부 재벌가가 매입할 당시 ㎡당 2500∼3000원대에 불과했던 땅값은 지난해 2만 3000원대로 올라 10배 가까이 급등했다. 일부는 구입한 토지를 자녀에게 증여한 사실도 밝혀졌다. 재벌가 등은 올림픽 유치전이 한창이던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평창군 대관령면 용산리와 횡계리 일대 산과 논밭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강원 도민은 물론 국민 전체가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힘을 모을 때 재벌가 등에서는 토지 매입에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롯데와 GS 측은 전원주택이나 수목원을 지으려고 땅을 샀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지난해 평창이 동계올림픽 유치에 또다시 실패했다면 이들의 토지 매입은 투기가 아니라 순수한 투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평창 일대에 대한 투자가 부진해 강원도가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재벌가에서 전원주택이나 수목원을 지으려고 땅을 샀다는 해명은 아무래도 옹색하다. 재벌가 등에서 구입한 대부분의 토지는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구입할 수 없는 농지라고 한다. 따라서 농지법 위반 혐의가 매우 짙다. 관계 당국에서는 평창 인근 토지 구입자들을 상대로 위법 여부를 철저히 가려내 처벌해야 할 것이다. 최근 재벌 기업들이 슈퍼마켓, 빵집, 커피숍 등 골목 상권까지 침해하는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재벌가들이 개발 호재에 편승해 쉽게 돈을 벌려 했던 행태가 드러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벌가에서는 연예인 강호동이 2009년과 2011년에 알펜시아리조트 인근 용산리의 임야와 전답 1만 8000여㎡를 부인과 공동 명의로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 땅투기 의혹을 받자 연예계를 은퇴한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논·밭 함께 쓰는 전천후 영농 이뤄야”

    “논·밭 함께 쓰는 전천후 영농 이뤄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농촌경제연구원 한 곳에 보리밭이 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동필(57) 원장이 잔디를 걷고 심은 보리다. 급격한 도시화에 길들여지면서 행여 식량의 소중함을 잊을까 보리를 심었다고 한다. 이 원장은 막걸리와 전통주 발전을 막던 유통·생산·포장 규제를 풀어 막걸리 열풍의 산파역을 한 ‘혁신 전도사’로 유명하다. 그는 19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식량자급률이 26.5%밖에 안 되는데, 식량이 무기화되는 시대가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식량 보급처, 농민의 삶터, 도시민의 쉼터라는 농촌의 원래 모습을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식인 쌀 생산량이 수요를 압도하고 있다. 낮은 식량자급률이 와닿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농촌의 생산기반을 새롭게 정비할 때가 왔다. 농산물 가격이 급등락하니 농사를 포기해 유휴지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 배수시설 때문에 논은 논대로, 밭은 밭대로만 쓰고 있다. 배수시설만 잘 갖춰도 논과 밭을 함께 써서 전천후 영농을 할 수 있고 농가는 수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일본은 이미 논밭 전환이 가능하도록 정리를 마쳤다. →농촌 체질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식량 보급처이자 삶의 터전으로서 농촌의 소중함을 잊고 있다. 요즘에는 일부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농지전용 금지, 식품위생과 안전성 강화, 품질인증 체계 강화 등 3가지가 특히 그렇다. 농촌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키면서, 농촌은 도시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는 체질로 진화해 나가야 한다. →소통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은. -귀농·귀촌, 식품산업의 발전과 유통 활성화, 지역 일자리 창출을 위한 규제 완화 등이 될 수 있다. 아직도 지역 농산물과 식품 유통을 저해하는 규제가 많다. 예를 들면 막걸리 병은 2ℓ 이상을 쓸 수 없다. 지역 전통을 살린 나무통에 담거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게 케그에 담글 수 없다(수입맥주는 5ℓ 이상 생맥주를 차가운 상태로 휴대할 수 있게 케그라는 특수통에 담아 유통시킨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오락가락’ 쌀 정책… 농민들만 골탕

    정부의 쌀 생산정책이 감산에서 증산으로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논밭전환사업’을 추진한 자치단체와 농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정부의 쌀 감산정책에 따라 논을 밭으로 갈아엎은 농가들은 보조금을 받기는커녕 올 농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16일 전북도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쌀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논을 밭으로 전환하는 농가에 보조금을 주는 감산정책을 추진했다. 자치단체를 통해 많은 농가들이 논밭전환사업에 적극 동참토록 독려해 왔다. 그러나 농림수산식품부는 쌀 감산정책을 추진한 지 1년 만에 올해는 증산정책으로 급전환했다. 쌀 재고량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추진했던 논밭전환 지원사업 물량을 대폭 줄이고 지원작목도 축소했다. 전북도의 경우 지난해 배정받은 논밭전환사업 물량은 5923㏊에 이르렀지만 올해는 800㏊로 87%나 줄었다. 논에 벼 대신 밭작물을 심을 경우, 지급하는 보조금 지원작목도 지난해까지는 모든 밭작물이었지만 올해는 콩과 조사료로 한정했다. 지난해 논에 밭작물을 재배한 농가들에는 18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했지만 올해는 사업물량이 줄어 지원대상 농가를 선정하기도 복잡하게 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논을 밭으로 전환한 많은 농가들이 당장 올 농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곤경에 빠졌다. 이 농가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않고 밭작물을 계속 재배하든지 지난해 밭으로 전환한 논을 다시 논으로 바꾸어 벼를 심어야 할 처지다. 지원작목 축소에 따라 이미 지원외 작물 종자를 구입한 농가는 필요없게 된 종자를 처분하고 다른 작물 종자를 확보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실정이다. 정부의 감산정책을 믿고 논밭전환사업을 적극 추진해 온 자치단체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전북도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올해 논밭전환사업 보조금 지원규모를 지난해보다 10% 늘려 잡고 지원대상 작목도 모두 허용할 것으로 예상해 농가지도를 해온 터라 수습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도는 지난 15일 정부의 논밭전환사업 변경 정책을 일선 시·군에 긴급 시달하고 뒤바뀐 쌀생산정책을 농가에 홍보토록 했다. 전북도 관계자는 “영농기를 앞두고 정부 정책이 급변했고 지원물량도 대폭 축소돼 보조금을 받으려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를 선정하는 작업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걱정했다. 이에 대해 농민회 전북도연맹 이효신 정책위원장은 “정부의 벼생산 정책이 1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농민들만 혼란에 빠지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며 “농민들이 정부를 믿고 영농을 할 수 있도록 중장기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6) 보은 풍림정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6) 보은 풍림정사 은행나무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언 땅을 녹이는 새 봄의 온기가 대지에 스민다. 봄이라 하기엔 이르지만 바람결에 담긴 봄기운은 또렷하다.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농촌 마을에도 스멀스멀 봄이 곧 들이닥칠 기세다. 기름진 논과 밭에 뼈를 묻고 살아가는 늙은 농부들은 자연의 흐름 앞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는 법도 없다. 늘 자연의 빠른 걸음걸이에서 한 걸음쯤 뒤로 물러난 거리만큼을 유지하며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순리를 따르는 삶이다. 자연에 앞서지도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자연에 기대 사는 농부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사는 농촌에서 누구라도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건 그 안에 자연의 순리가 살아있어서다. ●기와 돌담·솟을삼문과 절묘한 조화 충북 보은 회인면 눌곡리. 너른 들녘을 거느리고 순리를 따라 살아가는 농촌 마을에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봄기운이 담겼다. 봄의 소리를 가슴에 안고 분주히 오갈 농부들의 발걸음을 맞이할 들녘은 그러나 아직 고요하다. 언 땅이 풀려 축축해진 흙길이 정겹기만 하다. 평안한 마을길을 걷다 보면 길옆으로 이어진 낮은 비탈에 기대어 세워진 한 채의 고택과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발길을 붙잡는다. 보은 풍림정사와 그 집의 솟을삼문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봄을 앞두고 달콤한 정적이 감도는 마을 들녘에 사람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지나는 사람은 물론이고 번듯한 신작로를 지나는 자동차도 고작해야 한두 대 정도다. 모두가 다가오는 새 봄의 농사일 채비로 한창 웅크리고 있는 중이다. 마음으로만 봄을 재촉하는 참 평화로운 정적이다. 발길을 붙잡는 풍림정사 대문 앞의 은행나무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평범한 나무다. 큰 나무도 아니다. 키가 18m쯤 되고,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4m가 채 안 된다. 지금의 생육 상태로 보아서 나이는 대략 150살 정도로 짐작된다.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은 물론 아니고, 산림청 보호수 목록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저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다. 그러나 나무 앞으로 펼쳐진 들판을 거느리고 서 있는 풍림정사 은행나무의 자태는 여느 문화재급 은행나무 못지않게 아름답다. 낮은 기와 돌담과 고택의 기와지붕 위로 널찍이 드리운 나뭇가지가 이뤄낸 유장한 곡선은 옛 선비의 기품까지 느끼게 할 만큼 듬직하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 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이지 싶다. ●여성인권 강조한 선비 박문호가 심어 자연의 곡선을 닮은 우리 옛 건축물이 큰 나무와 잘 어울리는 건 당연한 일이건만, 풍림정사 은행나무는 이런 점에서 유난하다. 아예 처음부터 이 자리에 꼭 이만한 크기로 서 있었던 것처럼 나무와 풍림정사의 조화는 완벽하다. 기와 돌담이 바닥에 이룬 수평선을 디딤돌 삼아 수직으로 일어선 은행나무의 곧은 줄기는 사람의 눈을 가장 즐겁게 하는 황금분할의 비례를 이뤘다. 또 사방으로 고르게 펼치며 기와지붕 위로 살포시 올라선 나뭇가지가 드리우는 그늘의 풍성함은 고택의 빈 마당을 빈틈없이 채운다. 그야말로 나무와 사람살이가 이룬 아름다운 조화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들여 관리하는 나무임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나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나무의 위치나 주변 환경을 바탕으로 해서 그저 풍림정사와 관계 있는 나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풍림정사의 연륜이 그리 길지 않아 나무의 연륜도 쉽게 짚어볼 수 있다. 풍림정사는 이 마을 출신의 선비 박문호(1846~1918)가 개화파와 수구파의 정쟁으로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에 손수 지은 서당이다. 정통 성리학의 명맥을 잇고자 한 그는 당장에 자신이 벼슬을 얻는 것보다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72년의 일이다. 나무의 나이도 풍림정사를 세운 때와 일치한다. 결국 나무를 심은 것도 박문호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풍림정사를 짓고 대문 앞에 나무를 심었다. 정통 유학자답게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기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아마도 앞으로 오랫동안 잘 자랄 수 있는 건강한 묘목을 구해 심었을 것이다. 이 땅의 정신세계를 지켜온 유학의 가치, 혹은 공자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떠올리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자연의 순리 그르치는 억압 물리쳐” 선비 박문호는 특히 남녀 차별 극복을 매우 강조했으며 최초의 본격 근대 여성 교육서인 ‘여소학’(女小學)을 펴내기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하늘이 주어진 본성대로 혹은 순리대로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억압된 여성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남녀 모두 순리에 따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바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전히 박문호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눌곡리 마을에서는 풍림정사와 그의 은행나무를 정성껏 지키고 있다. 한때 마을 사람들은 풍림정사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을 거두어 판매한 이익금으로 풍림정사와 은행나무를 관리했다고도 한다. 고작 200년도 채 안 된 나무이지만 후손들에게는 천년을 더 살아온 여느 큰 나무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은행나무다. 그건 바로 우리 삶과 자연의 순리를 그르치는 온갖 억압과 장애를 물리치고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는 옛 사람에 대한 자랑이다. 눌곡리 들녘을 한 바퀴 돌아 풍림정사 은행나무로 스며드는 상큼한 바람에는 옛 선비와 그를 따르는 농촌 사람들이 지켜온 인간 사랑의 큰 뜻이 담겨 있었다. 글 사진 보은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충북 보은군 회인면 눌곡리 126-3. 청원~상주고속국도를 이용하면 보은군을 찾아가는 길이 무척 빠르고 편하다. 보은 풍림정사는 회인톨게이트에서 불과 2㎞ 거리밖에 안 된다. 톨게이트를 나가자마자 나오는 사거리에서 1.3㎞ 직진한다. 개울 건너 삼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해 논밭 사이로 800m쯤 가면 왼편 길가에 풍림정사가 있다. 나무는 풍림정사의 솟을대문 앞 조붓한 마당에 서 있다. 풍림정사 주변은 마을이 없어 한적한데 1㎞쯤 직진하면 회인면 소재지인 중앙리 마을이 나온다.
  • 올해부터 50㏄이하 보험가입 의무화…27만 스쿠터의 분노

    올해부터 50㏄이하 보험가입 의무화…27만 스쿠터의 분노

    올해부터 50㏄ 이하 소형 오토바이(스쿠터)에 대한 보험가입 등 사용신고제가 도입되면서 농어촌 노인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배달용으로 쓰는 치킨집, 피자집, 중국집 등 업소도 그렇지만 대다수 농어민이 신고를 꺼려 27만대로 추정되는 국내 스쿠터 중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신고한 소유자는 2000여명에 불과하다. 1일 충남 금산군에 따르면 10개 읍·면 주민이 보유한 스쿠터는 600~700대로 추정되나 지금까지 10명만 신고했다. 정부는 지난 1월 1일부터 오는 6월 말까지 관할 자치단체에 신고하고 보험가입과 번호판 부착을 끝내도록 했다. 사고가 많고, 도난 시 추적이 어려우며 값싼 중국산 등이 대량 유입되면서 대기오염이 심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신고 없이 50㏄ 이하 스쿠터를 타다 적발되면 오는 7월부터 최고 5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주원인은 보험료 때문이다. 연간 12만원까지 들어 농어촌 노인에게는 부담이 적잖다. 번호판 부착에 별도로 수천원에서 1만원이 든다. 금산군 제원면 김모(58)씨는 “먼 곳은 승용차로 가고 스쿠터는 고작 마을 안 논밭이나 마실 갈 때만 몇 번 타고 마는데 무슨 보험 가입이냐. 보험료가 스쿠터 휘발유값보다 더 들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생겼다.”면서 “신고하지 않고 그냥 타다가 고장나면 내다 버릴 생각”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충남 서산시 상황도 비슷하다. 운산면 소중1리 이장 심순호(58)씨는 “마을길이 도로냐며 주민 불만이 많다. 스쿠터 사고도 그동안 한 건 없었다.”며 “낡은 스쿠터를 가진 주민일수록 신고를 기피한다.”고 전했다. 운산면사무소 직원은 “이장들한테 스쿠터 보유 조사를 해 달라고 했는데 폐차하겠다, 팔겠다 등의 이유로 신고를 꺼려 지금까지 겨우 3건만 신고됐다.”면서 “등록 때 노인들이 연식이나 모델명을 몰라 아예 스쿠터를 가져오라고 한다.”고 업무 처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스쿠터 판매도 부진하다. 천안시 성환읍 대명오토바이 주인 이찬우(51)씨는 “매달 2~3대 팔리던 50㏄ 이하 스쿠터가 올 들어서는 한 대도 안 나갔다.”면서 “농어촌 노인에게는 50㏄ 이하 스쿠터가 적당한 만큼 보험료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국토해양부 자동차정책과 주진충 주무관은 “농어촌에서 50㏄ 이하 스쿠터를 많이 타며 그동안 신고제를 도입하지 않았던 만큼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안다.”면서 “하지만 농어촌 주민의 순수 교통수단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업소 영업용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어 농어촌 주민만 특혜를 주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생명의 窓] 촌로들의 행복/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생명의 窓] 촌로들의 행복/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겨울인데도 비가 온다.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이곳은 겨울이 파랗다. 겨울이 겨울 같지 않아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이 파란 겨울을 보는 것도 가끔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사면이 바다인 이 섬에서 나는 시간만 나면 바다를 향해 걷는다. 어떤 때는 새벽 예불이 막 끝난 새벽에 걷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침 공양을 마친 아침 시간이나 저녁 무렵에 걷기도 한다. 나의 걷기는 지속적이고 또한 규칙적이기도 하다. 걷다 보면 아침 바다를 만나기도 하고 저녁 별을 보기도 한다. 그 많은 풍경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이 만난 풍경은 논밭에서 일하는 촌로들의 모습이다. 나는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이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를 볼 수 있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왜 명작이 될 수 있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을 그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없다. 손으로 그들을 그리지 못하는 대신 나는 눈으로, 마음으로 그들을 그렸다. 그들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그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느낀다. 그 풍경 속에 있는 나를 보며 나는 내 삶의 미래가 어떨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백장 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고 했다. 스콧니어링은 노동력을 잃자 스스로 굶어 죽는 삶을 택했다. 이들에게 노동은 존재였고 삶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생명을 느끼는 가장 숭고한 의식이기도 했던 것만 같다. 가장 낮은 자세로 대지에 코를 갖다 대고 생명을 키우는 일은 우주의 생명을 가꾸는 일이기도 하다. 백장의 노동이 선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골의 촌로들은 선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일하며 즐겁다. 젊어서 농사는 고역이었으나 노년의 농사는 생존의 절박성을 떠나 있으므로 자유롭다. 시금치가 때아닌 고온과 비에 다 녹아내려도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다. 자연이 하는 일을 어쩔 수 있냐며 받아들인다. 원망이 수용으로 바뀌는 이 시간의 길이 사실은 수행이고 정진이다. 촌로들은 수행 아닌 수행을 통해 자유를 얻은 것이다. 거칠게 일해 오면서 그들은 마음속에 자연을 어머니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노동은 숨을 쉬는 것과도 같다. 새벽 껌껌할 때도 논에 물을 대는 그들을 만난다.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그들은 놀람도 당혹도 없다. 깊고 긴 숨을 쉬는 사람처럼 그들은 어둠 속의 물체를 향해서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누굽니까? 어디 가십니꺼?” 그들의 음성이 어둠을 느리고 따듯하게 건너온다. 어둠을 뚫고 여리게 찾아오는 빛처럼. 숨을 쉬듯 일하는 그들은 건강하다. 땅을 일구고 생명을 키우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힘을 내어 주고 어쩌면 우주의 힘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지도 않는다. 자식이 없는 자리의 외로움을 대지가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지는 이들에게 자식보다 더 큰 반려로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노년엔 농사를 짓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말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실이다. 나는 그 진실을 지금 목전에서 만나고 있다. 인생이 점점 길어진다. 노년을 도시에서 배회하는 일은 서글프다. 저무는 생명을 일으켜 저 땅 위에 푸른 생명들을 키워 내는 일을 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농촌에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길은 찾으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일을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일은 하면 몸에 배지 않겠는가.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욕심을 버릴 때 가난은 맑은 가난이 된다. 그것은 영혼을 키우는 가난이다. 오늘도 나는 바다로 난 길을 걷는다. 그 길은 넓은 마늘 밭을 끼고 있다. 파란 겨울이 눈에 푸르게 물이 든다. 일하는 노인이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스님, 바다 갑니꺼?” 그 음성이 바다보다 푸르게 다가온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다. 그도 멋쩍어 어설프게 따라서 합장을 한다. 촌로는 내가 합장한 이유를 알고 있을까. 내가 부처처럼 빛나는 그의 기쁨이 부러워 합장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 [김정일 사망 이후] 新압록대교 공사 잰걸음·세관 분주… “北·中경협 차질없다”

    [김정일 사망 이후] 新압록대교 공사 잰걸음·세관 분주… “北·中경협 차질없다”

    북한과 중국 경제협력의 상징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신압록강대교 건설 현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나흘째를 맞은 21일에도 분주한 모습이다. 칼바람 속에서도 기중기 등 건설 중장비들이 굉음을 내며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공사장 인부들도 잰걸음으로 신압록강대교 건설을 위해 마련된 부교 위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신압록강대교는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북한과 중국이 단둥 랑터우(頭)에서 신의주 신도시까지 연결하는 다리로, 지난해 말 착공했다. 공사구간은 교량 3㎞를 포함해 양국 진입로 등 모두 12.7㎞에 이른다. 공사장 인부 추모씨는 “신압록강대교는 원래 중국이 전액을 출자해서 만드는 다리인데다 이쪽 지역은 원래부터 중국인 인부들 중심으로 공사가 이뤄져 왔다.”면서 “(김정일 위원장 사망에도 불구하고)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이 임대해 개발하기로 한 단둥 인근 황금평 가공무역지구는 여전히 논밭으로 남아 휑뎅그렁했다. 이 때문에 단둥에서는 향후 북·중 경제협력 사업에 대한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김 위원장이 사망한 만큼 더 이상 나빠질 악재는 없다는 견해와 내부 체제 안정이 가시화될 때까지는 침체에 빠질 것이란 시각이 교차한다. 그러나 북·중 경협 전망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단둥 류경(柳京)호텔 21층에 있는 북한 선양영사관 단둥지부 김정일 분향소에서 만난 한 북한 주민은 향후 ‘북·중경협도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런 때에 (북·중 간)무슨 무역이 이뤄지겠느냐. (애도기간이) 끝나야 한다.”며 현재 중단 상태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날 영사관 내 김정일 분향소에는 귀국하지 않은 북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분향소에서는 영사관 직원 2명이 조문객들의 얼굴을 일일이 영상 카메라에 담았으며, 조문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반드시 방명록에 이름을 남길 것도 요청했다. 북한 정부가 운영하는 식당들이 영업을 중단한 가운데 이날 오전 9시쯤 평양고려식당 여성 종업원 20여명이 서로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뒤쫓아가 보니 식당 문에는 ‘영업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글이 여전히 적혀 있었다. 식당 문 너머로 검은 목티를 입은 여종업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29일 이후부터 정상 영업하니 그때 오라.”고 말했다. 단둥 세관은 전날보다 한결 분주해졌다. 트럭들이 줄을 이어 세관을 거쳐 속속 중조우의교를 통해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세관 측 관계자는 “일부에서 북한으로 물자가 운반되는 길이 봉쇄됐다는 말이 있다.”고 묻자 “지금 세관을 빠져 나가는 차들이 다 조선 쪽으로 가는 차들이다.”고 되받았다. 이날 새벽 5시 40분쯤에도 화물열차가 압록강을 건너 북한 신의주로 들어갔다. 일각에서는 이를 놓고 북측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신호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jhj@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7)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7)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왁자하던 대학 캠퍼스가 고요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학기말 고사 기간이어서 대개는 도서관을 찾아 든 탓이다. 늦은 밤까지 환한 도서관의 충혈된 불빛이 살갑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교정은 더 깊은 고요에 빠질 것이다. 교정의 나무들도 하나둘 낙엽을 떨구고 겨울방학을 준비하는 중이다. 모두가 휴식의 시간을 준비하는 계절이건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럴 겨를이 없다.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우선 코앞에 닥친 기말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 한다. 취업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취업의 부담에 시달리며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고, 겉으로 살려내지 못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창조력이 더 아쉬운 시절이다. ●공부를 잘하게 하는 신통한 나무 “회화나무 아래 서 있으면 공부를 잘하게 된다는 게 사실이에요? 진작에 알았으면 아침마다 학교 가기 전에 한 번씩 들를 걸 그랬네요.”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의 기말고사 준비로 겨를이 없는 최인경(22·인하대 4)씨를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앞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최씨는 어릴 때 이 나무 그늘에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나무보다는 나무 아래 깔린 자갈돌이 중요했기 때문이란다. “나무 아래에는 예쁜 돌멩이들이 자르르 깔려 있었어요. 공기놀이뿐 아니라 대개의 놀이에 돌멩이는 아주 중요하거든요. 여기에서 모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하지만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는 몰랐죠.” 콩과에 속하는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나 팽나무와 마찬가지로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잎이 무성한 나무여서 정자나무로 많이 심어 키운다. 이 나무에 학자수라는 별명이 붙은 건 사방으로 고르게 뻗는 나뭇가지가 자유분방하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는 기품이 있어서다. 서양에서도 이 나무를 ‘학자의 나무’ 즉 ‘스콜라 트리’(Scholar Tree)라고 부르는 걸 보면 회화나무에 대한 인상은 동서양이 공통적이다. 천연기념물 제315호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에는 별다른 유래가 없다. 다만 이 나무의 꽃이 위쪽부터 피어나면 풍년이 들고, 아래쪽에서 먼저 피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이다. 7월 지나 여름 햇볕이 따가울 즈음 가지 끝에서 우윳빛으로 아롱아롱 피어나는 작은 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지금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청라지구 개발로 숨가쁜 변화 기록으로 남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 이 동네가 필경 농사를 짓던 마을이었으며, 나무 곁으로 너른 논밭이 펼쳐졌던 게 분명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지역에 지금처럼 5~6층 규모의 연립 주택이 들어선 것은 20년도 채 안 된다. 그때까지 나무 주위는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무 바로 곁으로 주택단지가 형성된 10년 전까지만 해도 낮은 언덕만 돌아서면 멀리 서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풍요로운 들판이었다. 유난히 염소를 많이 기르는 농촌 마을이었다. 지난 20년 사이에 이 지역을 스쳐간 변화는 놀랄 만큼 컸다. 논과 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초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신주택단지, 이른바 ‘청라지구’가 형성됐다. 8차선의 넓은 도로가 뚫린 건 물론이고 도로 한가운데로 뱃길까지 뚫렸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였다.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신현동 회화나무는 이곳에서 500년을 살아 왔다. 키는 평균적인 아파트 7층을 넘는 22m나 되고, 둘레도 6m 가까이 된다. 하지만 주변에 늘어선 주택들에 갇혀 나무는 왜소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주택들이 둘러싼 탓에 나무를 찾아오는 바람도 길을 잃었고, 나무가 내뿜는 숨결은 매우 거칠어졌다. 도시의 금싸라기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무가 어쩔 수 없이 견뎌 내야 하는 운명이다. 그 사이 성장과 개발의 숨 가쁜 흐름에서 나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도 적지 않았다. 줄기 앞에 이 동네 사람들이 동제를 올릴 때 쓰는 제단을 놓은 것부터 그렇다. 일정한 날을 정해 제사를 올리는 건 아니지만 동네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동네의 자랑인 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리기 위한 채비다. 주변 환경도 한결 깨끗해졌다. 울타리를 깔끔하게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나무 옆으로 자리를 더 내어서 아담한 정자도 세우고, 어린이를 위한 놀이기구와 몇 가지 체육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작지만 잘 꾸민 근린공원이 됐다. ●고단한 사람살이의 큰 위안으로 “저도 이런 큰 나무가 있는 줄 몰랐죠. 그런데 초등학교 때 ‘회화나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낯선 어른들을 종종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알게 된 거죠. 우리 동네 사람들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나무 그늘에 쪼그려 앉아 공기놀이를 하던 최씨가 취업을 앞둔 어른으로 바뀌었지만, 나무는 여전히 한자리를 지키며 옛일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특히 신현동 회화나무는 상전벽해의 한가운데를 지키며 변함없는 사람 살이의 알갱이를 500년 동안 수굿이 지켜 왔다. 이제 학기말 고사를 마치면 최씨도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듯이 세상살이에 지칠 즈음 최씨도 어김없이 어린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그때 불현듯 떠오를 회화나무는 필경 지친 사람 살이의 큰 위안으로 다가설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그렇게 그때 그 자리에 치유의 존재로 남을 것이다. 글 사진 인천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인천 서구 신현동 131-7. 경인고속국도의 서인천나들목으로 나가면 가정오거리가 나온다. 비교적 복잡한 이 오거리에서 10시 방향으로 들어서서 700m쯤 간다. 언덕 너머의 가정삼거리에서 목재단지 쪽으로 좌회전해 700m쯤에서 나오는 사거리를 지나 오른쪽 두 번째 골목길인 롯데마트 옆길로 들어선다. 길 안쪽의 연립주택 건물 사이로 나무가 보인다. 나무 앞에는 주차장이 없고, 골목은 비좁고 복잡하다. 골목길 가장자리의 노견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나무까지 걸어서 찾아가야 한다.
  • [심재억 전문기자의 건강노트] 가을 별미 추어탕

    가을 별미 중 하나가 추어탕입니다. 끓여내는 방법은 남북과 동서가 제각각이지만 미꾸라지를 원료로 한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요새야 추어탕집에서 쓰는 미꾸라지 대부분이 양식이지만 옛맛을 살리려면 진흙논에서 벼꽃을 받아먹고 자란 놈이 으뜸입니다. 한로(寒露), 상강(霜降) 지나도록 살을 채워 뱃바닥이 노르스름한 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요. 여름이면 농수로나 도랑에서 잠깐 반두질을 해도 몇 사람 먹을 미꾸라지 어렵지 않게 잡았지만 요새는 그마저 추억입니다. 농약을 쏟아붓듯 뿌려대니 생명붙이가 살아남을 재주가 없는 것이지요. 그때는 벼베기 끝난 논에서 차진 흙 삽질하며 미꾸라지 잡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진득한 흙을 파뒤집으면 실한 미꾸라지가 꾸무럭꾸무럭 기어나오곤 했지요. 그 미꾸라지가 농가의 가을철 보신식이었습니다. 왕소금 척척 뿌려 미끈덕거리는 곱을 씻어내 가마솥에 넣고 푹곤 뒤 뼈째 갈아 냅니다. 여기에 고사리, 고구마순에 시래기와 갖은 양념을 듬뿍 넣고 끓여내면 담박하고도 감칠맛 나는 추어탕이 됩니다. 먹을 때 방앗잎이나 산초가루 좀 곁들이면 “이 맛 볼려고 가을 기다렸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경기도 등지에서는 통미꾸라지로 탕을 끓여내는데, 이것도 나름 풍미가 있더군요. 봄부터 몸뚱이 놀려 논밭 일궈야 했던 장정들, 가을걷이 후 추어탕 먹는 재미로 1년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 추어탕이 간단치 않습니다. 단백질과 비타민A가 많아 고기 귀했던 그 시절에 회를 동하게 하는 영양식이었던 것인데, 요새도 이 정도면 으뜸가는 웰빙음식이겠지요. 이게 탕은 탕인데, 누군 ‘추어탕(秋魚蕩)’이라고 하고 또 누군 ‘추어탕(鰍魚蕩)’이라고도 합니다. 미꾸라지를 ‘鰍魚’라 했으니 鰍魚蕩이 맞는 것 같지만 미꾸라지 제맛 보려면 가을이라야 되니 秋魚蕩도 크게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미꾸라지가 사라져 간다는 것인데, 그래도 맛난 추어탕 먹으려면 중국산이나 양식보다야 토종이 제격 아니겠습니까. 이미 씨가 말라버린 토종 타령이 좀 그렇지만 잘하면 그런 땅 만들기 어렵지 않을 듯도 한데 다들 남의 일이라고만 여기니…. jeshim@seoul.co.kr
  • 한병천 별정우체국중앙회장 “산간벽지에도 금융서비스를”

    한병천 별정우체국중앙회장 “산간벽지에도 금융서비스를”

    “국가에서 민간자본을 유치해 가장 성공한 사례가 ‘별정우체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벽지에만 있는 별정우체국이 도시에도 생겨 도시민들에게도 별정우체국의 봉사와 서비스 정신을 전해드렸으면 합니다.” 한병천(59) 별정우체국중앙회장은 ‘별정우체국 새로운 50년 비전’ 중 하나로 ‘도시형 별정우체국 탄생’을 염원했다. 별정우체국(이하 별정국)은 오는 20일 설립 50주년을 맞이한다. 한 회장은 1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때론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별정국의 어제와 오늘, 내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1961년 별정국 첫 설립 이후 20여년 간 별정국 직원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정부가 아니라 별정국장들이 우표 판매 등으로 생긴 수수료로 월급을 줬기 때문. 소득이 낮고 인구가 적은 벽지 직원들은 월 3000원(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을 받기도 힘들었다. 집배원들도 보통 월 3000원을 받았다. 한 회장은 “급여가 너무 적어 이직이 많았다. 2,3개월 일하다 그만두곤 했다. 적은 급여에도 일할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다. 우리 집도 형과 누나까지 우체국 일을 거들었다.”고 했다. 별정국 직원들의 근무 여건이 개선된 건 1982년이다. 그때부터 정부에서 일반직 공무원 보수의 50% 수준을 지급했고, 퇴직금 제도도 도입됐다. 별정국은 1979년 첫 위기에 봉착했다. 정부에서 별정국의 적자가 많다며 일반우체국으로 전환하려 했다. 별정국은 1면1국(1개면에 1개 우체국) 실현이라는 국가 시책에 따라 설립됐다. 지역 유지가 사재를 출연해 우체국을 지었다. 우체국 운영에도 사비를 들였고, 일할 사람이 없어 가족까지 동원했다. “당시 정부에서 국장 신분을 일반직 6급 공무원으로 바꿔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럴 경우 국장 정년(56세)에 걸려 초대 국장들은 대부분 물러나야 했습니다. 우체국 운영에 모든 걸 쏟아 부었는데, 일반우체국으로 전환되면 가정 생활이 파탄날 상황이었습니다.” 한 회장의 토로다. 국장들의 간곡한 만류에 정부는 계획을 백지화했다. 2009년엔 별정국 사상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만년 적자에서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한 회장은 “흑자 전환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인구도 적고 소득도 적은 산간오지 별정국들이 흑자를 냈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별정국은 지난해에는 133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별정국은 새로운 50년을 위해 ‘3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논밭을 팔아 우체국을 지은 게 1차 투자다. 1980년대 후반 초기 재래식건물을 현대식으로 재건축한 게 2차 투자다. 국당 1억~3억원이 소요됐다. 한 회장은 “청사를 새로 지은 지 20년이 넘으면서 건물이 노후화됐다.”며 “스마트 시대에 맞는 청사로 다시 지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1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상훈법’이 통과됐다. 한 회장은 “별정국 직원도 일반직 공무원과 똑같은 일을 하는 만큼 상훈법에 준한 훈·포장을 해줘야 한다. 별정국 직원들이 명예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상훈법이 본회의에서도 통과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 회장은 1971년 7월 전북 임실 청웅우체국에서 우정사업과 연을 맺었다.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고 거들다 1990년 아버지에게서 국장직을 승계했다. 이후 별정우체국중앙회 전라북도 도회장, 중앙회 이사 등을 거쳐 지난 4월 13대 별정우체국중앙회장으로 취임했다. “앞으로 벽지 주민들에게도 도시와 같은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특산품을 꾸준히 발굴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겠습니다.” 글 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별정우체국 반세기-또 다른 50년을 꿈꾼다] (상) 1호 충북 영동 매곡우체국 가보니

    [별정우체국 반세기-또 다른 50년을 꿈꾼다] (상) 1호 충북 영동 매곡우체국 가보니

    “돈 찾아줘.” “어머니, 비밀번호는요.” “몰라. 여기 수십 년 살았는데 나 몰라. 내가 오면 알아서 찾아줘야지.” 9일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매곡우체국. 한 할머니와 우체국 직원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통장을 내밀고 무작정 돈 달라는 할머니, 밝게 웃으며 아들처럼 살갑게 구는 직원. 매곡우체국의 일상이다. “고객의 80%가 어르신들이에요. 인적사항이나 집안 사정 등 사소한 것까지 다 파악하고 알아서 처리해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굉장히 서운해하시거든요.” 양영일(36) 매곡우체국 사무주임의 얘기다. 매곡우체국은 1961년 11월 2층짜리 목조건물로 세워진 대한민국 1호 별정우체국이다. 1973년 현재의 양옥으로 개축됐다. 영동역에서 20㎞나 떨어진 벽지에 위치해 있다. 매곡면에는 도시에 즐비한 중국집이나 삼겹살집이 하나도 없다. 산과 논밭뿐이다. 900가구(2000여명) 정도 살고 있다. 65세 이상이 850명이고, 대부분 54~65세의 노·장년층이다. 이종성(54) 국장은 이곳에서 아버지 이승세(83)옹의 뒤를 이어 2대째 우체국을 운영하고 있다. 이 국장의 아버지는 당시 논 20마지기(한 마지기 495㎡·150평, 현재는 ㎡당 20만원 정도)를 팔아 건물을 지었다. 이옹은 별정우체국 탄생 배경에 대해 “당시 시골에는 편지가 배달되는 데 2~3일 걸렸어요. 정부에서는 편지를 하루 만에 배달되도록 하고 싶었지만 재원이 있어야지. 그래서 나라에서 그 지역민이 자비를 들여 우체국을 지으면 국장으로 임명해주는 정책을 시행했어.”라고 말했다. 별정우체국 초대국장은 대부분 양조장, 정미소 등을 운영하던 지역 유지들이었다. 하지만 우체국을 짓고 운영하는 데 사재를 출연한 이후 먹고살기 위해 부업을 해야 했다. 이 국장은 “우체국장은 명예·봉사직이었다.”며 “정부에서 투자하거나 도와주는 게 없었다. 아버님은 늘 직원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했다.”고 전했다. 이옹은 당시 월 3000원을 국가에서 받았다. 일반 공무원 급여(월 7000원)보다도 적었다. 이옹은 부업으로 농사를 지었다. 집배원들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옹은 “집배원들 급여를 넉넉하게 챙겨주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며 “돈을 벌려고 했다면 별정우체국을 운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통신소외지역에 우체국을 지어 도시와 벽지의 소통 역할을 하고, 전화도 보급하는 등 지역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게 그나마 보람입니다.” 별정우체국은 부자승계가 원칙이었다. 이 국장은 1998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이 국장은 5녀 1남 중 막내다. 대전에서 일반 기업에 다니다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귀향했다. “누나들은 출가했고, 승계할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지역에 살면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물려주셨습니다.” 이 국장의 회고다. 이 국장은 1990년대 후반 시작된 우편주문판매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 우리 지역의 호도, 곶감을 브랜드로 만들어 전국에 판매했어요. 매일 밤 12시까지 주문 물량을 포장해서 이튿날 해당 지역으로 배달했습니다. 연간 6억원의 매출을 올렸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이 국장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향후 3년 안에 그만두고 이젠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하지만 물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 중 누가 이런 벽지에 들어오려고 하나요. 자녀 교육 때문에라도 안 살려고 하잖아요. 운영할 사람이 없어 1호 우체국의 문을 닫게 된다면 정말 가슴 아플 것 같아요.” 글 사진 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KOCHI-일본이 사랑한 세 남자의 고향 료마전의 고치

    KOCHI-일본이 사랑한 세 남자의 고향 료마전의 고치

    JAPAN KOCHI 일본이 사랑한 세 남자의 고향 료마전의 고치 인천공항, 나리타공항이 그러하듯 한국과 일본의 공항 이름도 대체로 지명을 내세운다. 그러나 뉴욕 JFK공항이나 파리의 샤를드골공항과 같이 간혹 위인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고치현은 료마공항을 가지고 있다. 료마는 고치가 그리고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인물이다. 마침, 국내 케이블TV 채널J에서도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를 그린 NHK대하드라마 <료마전>을 11월 중순까지 방영한다. 글·사진 이지혜 기자 취재협조 일본 고치현 1 평야지대에 위치한 고치성은 텐슈가쿠天守閣와 오테몬大手門을 함께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초기 번주 야마우치 가츠토요가 도사번으로 오기 전에 자신의 성이었던 가케가와성을 모방해 지었다. 원래의 건물이 잘 보존돼 있고, 다른 일본 성과 달리 텐슈가쿠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2 NHK대하드라마 <료마전>. 오른쪽이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분한 사카모토 료마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Man of Kochi I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 한국에선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인들에겐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선구자로 존경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2000년을 맞이하면서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일본 1,000년의 정치 지도자’ 앙케이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가, 2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3위 오다 노부나가를 제치고 1위에 꼽혔다. NHK는 지난해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하는 <료마전>을 연중 기획으로 방영했고, 현재 일본방송 전문 케이블TV 채널J에서 이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NHK는 매년 연중 기획으로 대하드라마를 방영해 왔다. 인기가 높기도 하지만 NHK대하드라마가 가지는 문화적 사회적 코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물을 선정하는 데 현재의 시대 상황이 우선 고려되며, 우리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듯이 드라마 속 인물들이 현실의 인물과 일부 겹쳐지곤 한다. NHK대하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예능 프로그램과 시사만화, 광고 등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패러디되는 것은 물론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매회 드라마가 끝날 무렵 역사적인 배경이 되는 장소와 여행정보를 소개하는 코너를 삽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카모토 료마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그린 회에서는 그의 고향과 생가터가 어디 있는지, 현재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때문에 NHK드라마는 인기 테마여행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여행상품으로 출시돼 있기도 하다. 우리가 달구벌, 한밭 등과 같은 옛 지명을 일부 사용하듯 일본에서도 옛 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시코쿠섬 남부에 위치한 고치현의 옛 이름은 도사다. 야마우치 가문을 번주로 하는 도사번을 이뤘던 곳이다. 료마는 바로 이 도사번의 가미마찌에서 1835년 11월15일(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날과 같다)에 카시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도사번주가 거주하는 도사성은 오늘날 고치성이라고 부르며, 고치현과 고치시청이 인접해 있는 등 고치 시내 중심에 위치한다. 고치성을 중심으로 봤을 때 동쪽에 JR고치역이, 서쪽에 가미마찌가 각각 위치한다. 과거 번의 취락은 성을 중심으로 상위 계급인 죠시가 가까이에 거주했고, 그 바깥으로 하위계급인 카시가, 그리고 더 바깥으로 일반 백성들이 살았다. 하위 계급은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상위계급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료마가 태어난 마을은 오늘날에도 가미마찌라고 부르며, 료마의 옛집은 보존돼 있지 않다. 료마의 탄생지임을 알리는 이정표에 서면 고치성이 손바닥만해 보인다. 성에 가까이 갈 일이 거의 없었던 만큼 아마도 평생 료마의 눈에 비친 성의 모습이었을 그러했을 터이다. 가미마찌에는 시립 료마박물관이 있다. 작은 규모이지만 료마의 일생을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고, 시내 중심에 위치해 방문하기 쉽다. 또 료마 생가 부지에는 료마우체국과 난스이호텔이 있다. 난스이호텔은 1층의 료마 기념숍을 비롯해 료마를 특화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끈다. 호텔에 묵지 않더라도 구경삼아 방문할 수 있다. 고치시에서 태평양 바다까지는 차량으로 30여 분 가량 거리다. 해변 가츠라하마는 현립 사카모토료마기념관과 가츠라하마 수족관 등이 있는 관광 포인트다. 고치의 바다는 태평양이다. 고치시내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일본내해와 다른 망망대해의 빛깔과 웅대한 규모가 인상적이다. 가츠라하마에는 지금도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료마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무려 13.5m다. 매년 료마의 생일인 11월15일을 전후로 약 한 달여간 단을 만들고 료마와 같은 눈높이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이벤트를 갖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은 시내에 있는 박물관과 달리 배를 형상화한 외관이 태평양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자랑한다. 기념관에는 료마가 암살당했을 당시 피가 튀었던 병풍을 비롯해 다양한 전시품과 료마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태평양을 향한 면은 전면 통유리로 돼 있어, 마치 크루즈 선미에 서서 바다를 조망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NHK대하드라마 <료마전> 지난해 일본 NHK가 연중기획으로 방영했던 대하드라마 <료마전>이 국내 케이블TV 채널J에서 오는 11월 중순까지 방영된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일 1회분이 방영되며, 토요일에는 5회를 연속 방영한다. 평일의 경우 아침 9시, 오후 5시, 밤 11시에 같은 회차가 여러 차례 방송되며, 토요일에는 오후 2시부터 5회분을 연속 방영한다. 올해 초에도 채널J에서 방영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료마전>의 주인공 료마역으로는 영화 <용의자 X의 헌신> 등으로도 친숙한 배우이자 가수인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료마가 사랑한 네 여인으로 히로스에 료코, 아오이 유우, 마키 요코, 칸지야 시호리가 출연하고 있다. <료마전>은 사카모토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사극이지만 일본 역사를 잘 모르더라도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지 않다. 일본 및 해외에서 <대장금> 등 국내 드라마가 인기를 끌듯이, 현대적인 해석과 개성 있는 인물 묘사 등을 통해 재미를 더했다. 1 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함선을 형상화 한 외관이 인상적 2 료마 탄생지 유적. 신분에 따라 거주지 가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이기에, 료마가 실제로 봤던 고치성의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3 오토메와 료마 남매, 여장부 오토메는 <료마전>의 인기 캐릭터로 드라마에 출연한 테라지마 시노부의 모습을 따라 제작했다 4 료마의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들려주는 해설사. 일본어 가이드북에도 출연해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Man of Kochi II 이와사키 료타로 드라마 <료마전>은 미츠비시 창업주인 이와사키 료타로의 내레이션을 통해 료마의 삶과 당시 일본을 조명하고 있다. 이와사키 료타로는 카시보다 더 하위 계급인 낭인 출신으로 집이 무척 가난했다. 의사가문 출신의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꾸준히 뒷바라지 한 덕에 훗날 큰 기업의 창업주가 될 만큼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와사키 료타로의 고향은 고치시 동부에 위치한 아키시다. 고치에서 약 1시간 거리이며, 이와사키 생가는 아키역에서 자전거로 약 10여 분 거리다. 방문객을 위해 자전거와 지도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 길이 단순한 편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시골전원을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이와사키 생가 앞에 카페가 운영되고 있는데 고치의 특산물인 유자차를 꼭 마셔 볼 것을 추천한다. 지나치게 달지 않으면서 깊은 풍미가 느껴진다. 또 이 가게는 유제품으로 유명한 이와테현의 치즈공방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제품을 판매한다. 주인이 직접 엄선한 아이템을 모아 셀렉트숍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사진, 미술, 공예품 등 갤러리에서 취급할 법한 소품이 눈길을 끈다. 이와사키 생가 가까이에는 노라시계탑이 있다. 과거에 논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설치한 것인데, 지금도 집주인 하루코 할머니의 아들이 정기적으로 손을 보고 있다. 아들은 고치시에서 치과의사를 하고 있는데, 전자방식이 아니라 수동 시계라 사람이 직접 만져줘야 작동한다. 노라시계탑 옆에는 치리멘동 전문점이 있는데, 고치 내에서도 유명한 맛집이다. 치리멘은 작은 바늘 크기의 잔멸치로, 인근 바다에서 잔뜩 잡힌다. 솥에 쪄낸 것을 유즈폰즈 등을 섞어 간이 밴 밥에 얹어 함께 먹는다. T crip. 메이지유신과 사무라이 신분제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1868년부터 1889년까지 진행된 일련의 정치·사회 개혁을 일컫는다. 메이지 일왕은 1867년에 즉위했으며, 사카모토 료마는 이 해 11월15일에 암살당한다. 이전까지의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에도 막부 체제를 유지해 왔다. 메이지유신 기간 동안 서양의 입헌군주제를 채택해 도쿠가와 쇼군에게서 권력을 박탈하는 한편 번 제도를 폐지하고 지금의 현 제도로 개편한다. 또 사농공상 등의 기존 신분제도도 이때 폐지됐다.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것은 사카모토 료마가 사츠마번(가고시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쵸슈번(야마구치현)의 기도 다카요시의 삿초동맹을 성사시키고, 고메이 일왕을 지지토록 만들어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무라이는 쇼군에게 충성하는 무사 계급이다. 이 사무라이 내에도 계급이 3가지가 있다. 죠시上士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번주를 보필하는 주요 직책을 맡는 최상위다. 카시下士는 평소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하위 계층이고, 낭인은 가난하거나 직책이 없이 사무라이 신분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도사번의 경우, 본래 시즈오카현 출신이었던 야마우치 번주가 데려온 사무라이들이 죠시를 대대로 세습했고, 도사 토착민 가운데 부와 능력이 있던 소수에게 카시의 신분이 주어졌다. <료마전>에 보면 죠시가 카시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죽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 등 지나친 차별의 모습이 보여진다. 유럽의 근대화에 있어 시민계급이 활약했다면, 일본의 근대화에는 카시의 활동이 눈부시다. 카시였던 료마는 메이지유신을 가능케 해 스스로 신분제 폐지를 이뤄냈다. 1 새로 지어진 마키노식물원의 온실 2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야광식물 3, 4 마키노 토미타로우 박사의 평생의 연구와 업적을 전시해 놓은 상설 전시관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Man of Kochi III 마키노 토미타로우 ‘와사비아 와사비 (시에브) 마키노Wasabia Wasabi (Sieb) MAKINO’.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 그 와사비의 정식 이름이다. 앞에 있는 와사비아가 학명이고, 그 다음 와사비가 통칭이며,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유사종이 등록돼 있는 경우에 표시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것이 발견 및 연구하고 등록한 사람의 이름이다. 와사비를 비롯해 많은 일본의 식물에는 마키노라는 이름이 끝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마키노 토미타로우 박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식물학자다. 현재까지 보고된 약 6,000여 종의 식물 가운데 절반 가량이 마키노 토미타로우 박사에 의해 등록됐다. 고치시 고다이산에는 마키노 식물원이 있다. 마키노 토미타로우 박사는 고치현 출신으로 많은 연구를 고치에서 진행했다. 또 이와 같이 자신의 연구에 근간이 된 고치에 식물원이 설립되길 바랬다. 식물을 연구하는 곳은 여럿 있지만, 마키노 식물원은 일반인들도 관람하고 접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식물원은 본관, 전시관, 정원, 온실 등 4개의 영역으로 이뤄져 있다. 전시관에는 상설·기획전시 외에 마키노 박사의 일생과 업적이 전시돼 있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가 남긴 식물 화보다. 요즘처럼 놀라운 접사 기능의 카메라가 없던 시절, 식물을 연구·보고하기 위해서는 4계절의 표본과 그에 대한 그림을 자료로 제출해야 했다. 바로크 시대 곤충화가 메리안의 일생을 그린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에서처럼 화가가 그리는 아름다운 꽃그림도 많지만 마키노의 식물 그림은 이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세밀하다. 목조 건축물의 특성을 잘 살린 설계와 디자인은 식물원의 성격과도 맞는데다 미술작품과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온실은 새로 건립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각 식물을 위, 아래, 또 옆 등 다양한 위치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온실에 들어서는 순간 입구에 가득 심어져 있는 바닐라가 행복한 기운을 선사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길가에 위치한 작은 비석이다. 마키노 박사의 필체로 “나를 지탱해 주고 가정을 잘 지켜 줘서 고마워요”라고 쓰여져 있고, 그 앞에는 작고 소박한 난초들이 심어져 있다. 이 난초의 이름은 ‘사사엘라 스에코아나 마키노Sasaella Suekoana MAKINO’다. 부인인 스에코 여사가 죽을 무렵에 발견한 난초에 부인의 이름을 붙였다. 마키노 토미타로우 박사는 일본의 대표적인 식물학자이지만 그의 업적은 사실 국가나 연구소 등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는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빚까지 져가며 몇 번이고 도망을 다니면서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스에코 부인은 집에 빚쟁이가 찾아온 날은 밖에 빨간 이불을 내걸어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을 정도였다고. 감동적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서글픈 이야기다. 마키노 식물원은 시내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의 고다이산 기슭에 위치한다. 사람에 따라 식물원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시큰둥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식물원과 다른 이색적인 매력이 있는 곳으로 다른 관광지에 비해 다소 접근성이 떨어져도 꼭 강추하고 싶다. 고다이산은 또한 전망대가 있어 고치시의 모습을 조망하기에 좋다. 연인들이 많이 찾는 인기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Travel to Kochi ▶고치현은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이기도 한 고치현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도사국土佐國으로 불렸다. 시코쿠四國라는 지명은 섬 내에 도사국, 사누키국, 아와국, 이요국 4개의 국이 존재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도사국과 관련해 친숙한 대명사로 도사견이 있다. 투견과 경호견으로 유명한 바로 그 품종으로 투견 경기는 고치현의 이색적인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남쪽으로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으며 난류가 흘러서 같은 위도의 지역보다 따뜻한 편이다. 한신타이거스의 2군 경기장 및 스프링캠프가 이곳에 있으며, SK와이번스 역시 지난 4년여간 이곳을 다녀갔다. ▶가는 방법 고치는 일본 시코쿠섬 남부에 위치한다. 아시아나항공이 인천에서 다카마츠(화·목·일요일)와 마츠야마(화·금·일요일)를 각각 주 3회씩 운항한다. 고치시까지는 차량으로 약 2시간 가량 소요된다. 시코쿠는 아니지만 인천에서 세토나이 대교가 연결돼 있는 혼슈의 오카야마를 대한항공이 매일 연결한다. 차량으로 약 2시간30여 분이 걸린다. 고치의 료마공항으로 ANA의 에코패스와 일본항공의 재팬세이버 등의 국내선 연계 요금도 이용할 수 있다. ▶Must Have @고치현 자유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좋아하는 곳을 꼽자면 시장이다. 여기에 부담없이 이것저것 사먹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과 선술집이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고치시에는 히로메시장과 일요시장이라는 두 개의 상설시장이 있는데, 고치시민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어서 그 흥과 왁자지껄함에 이방인도 동참할 수 있어 좋다. 히로메시장은 다양한 종류의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푸드코트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트에 있는 푸드코트와는 좀 다르다. 식사를 해도 좋고, 가볍게 술을 즐기기에도 좋다. 고치현의 대표적인 별미인 가츠오타타키는 물론이고, 야스베 교자 체인점, 소금이나 유자폰즈 등을 뿌려먹는 게 더 잘 어울리는 타코야키, 쇠고기초밥, 고등어초밥, 어묵, 라멘 등을 즐길 수 있다. 실내이고, 두 개의 큰 공간 한가운데 등받이 없는 통나무식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자리를 잡고 마음에 드는 음식을 사와서 같이 놓고 먹으면 된다. 그야말로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타이밍을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한 테이블에 둘셋이 앉아 있는 곳을 공략해 보자.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으면 오히려 옆에 앉아 있던 일본인들이 먼저 말을 걸어 온다. 고치시 사람들은 대체로 정이 많아 금세 어울릴 수 있다. 일요일에는 고치성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차도에 자판과 노점상 행렬이 이어진다. 일요일에 열리기에 일요시장이라고 불리우며 수백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술을 받으면 다 마시기 전엔 내려놓을 수 없는 일본 스타일의 술잔, 또 갖가지 아기자기한 공예품, 옛 물건 등 다양한 시장 풍물을 만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일요일 아침에 산책하며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간다. 시장 음식을 먹는 재미도 있다. 꼬치구이, 튀김, 과자, 오코노미야키 등 여러 가지를 먹다 보면 식사를 대신할 수 있다. 고치는 유자, 고구마, 가지 등이 유명한데, 특히 고구마 튀김이 독특하면서도 맛이 있다. 1 고다이산에서 바라본 고치시 전경 2 시코쿠의 별미 ‘가츠오타타키’. 가츠오를 짚불에 그을려 특유의 풍미를 더했다. 문득문득 먹고 싶어지는 인상적인 맛을 가졌다 3, 4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히로메시장 음식들 5 잔멸치 치리멘과 유즈폰즈를 버무려 먹는 치리멘동. 아키의 별미 6 가츠라하마 해변에서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사카모토 료마 동상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심재억 전문기자의 건강노트] 치매의 기억

    덕용이 할머니는 참 바지런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들로, 산으로 나가 하다못해 ‘동냥치버섯’이나 나무새라도 뜯어다 식솔들 먹거리로 장만해 내곤 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새경 모아 어렵사리 장만한 뙈기밭을 마치 갓난이 어르듯 살폈다. 그 덕에 고작 두세 마지기에 불과한 뙈기밭이었지만 구석구석 온갖 야채가 자리잡은 옹골찬 채전(菜田)이 됐다. 그랬는데, ‘이제 허리 좀 펴고 살라나.’ 싶던 차에 그만 ‘오금앓이’로 삭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됐다. 나이가 들수록 무릎은 오(O)다리가 되어갔고, 구부정한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논밭을 일구느라 손마디는 뿔난 생강처럼 우굴부굴해졌고, 그런 신산의 삶이 마침내 치매로 이어졌다. 멀쩡하게 점심 잘 챙겨먹고 돌아서면 며느리보고 타박을 해댔다. “저년이 늙은 씨애미 밥도 안 준다. 굶겨 쥑일 작정”이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얼굴에 밥이 붙어 꽤 복스러웠던 며느리는 그때마다 “밥 잘 드시고 왜 이러시냐.”며 눈물을 찍어댔고, 할머니는 돌아서서는 금세 표정을 바꿔 “누군데 내게 이러시냐?”며 일없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몽당 빗자루를 챙겨들곤 했다. 아침에 밥상머리에서 마주친 아들더러 “왜 아침부터 남의 집에 와 밥상을 받느냐.”고 군소리를 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런 덕용이 할머니가 하루는 밤이 깊도록 귀가하지 않았다. 늘상 들에 나가 논밭 살피는 게 일이었던 그가 어둑한 방죽길을 걷다가 그만 장맛비로 불어난 물길에 휩쓸린 것이다. 밤새 아들, 며느리가 나서 온 동네를 뒤졌지만 찾지 못하다가 다음 날 아침에야 개구리 왈왈대는 방죽 가운데 뜬 그의 주검을 찾았다. “일이 몸에 배 손끝 매섭고, 남의 소리라면 입에 담지도 않고 살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지만 “노망 들어 지 몸 상할 대로 상하고, 자식들 고생 시킬 만큼 시키고 갔으니 저승에서는 잘살겄지.”라는 동무 할머니의 말에 이내 말문들을 닫았다. 많은 기억을 남겼으되 정작 그가 가져간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치매 이후 자신의 것을 조금씩 무너뜨린 그의 삶이 남긴 것은 소지(燒紙)처럼 가벼워진 육신뿐이었다. 그렇게 생애 하나가 무너졌다. jeshim@seoul.co.kr
  • 기부도 ‘부창부수(夫唱婦隨)’

    기부도 ‘부창부수(夫唱婦隨)’

    “무엇이든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지 두 번째는 쉽습니다. 기부도 그렇고요.” 김병호(70) 서전농원 대표가 200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거액을 기부한 데 이어 아내 김삼열(61)씨도 19일 카이스트 서울캠퍼스에서 서남표 총장을 만나 5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학교 발전기금으로 쾌척했다. 김 대표가 당시 기부한 부동산은 300억원 상당으로 부부의 기부금 규모를 합하면 카이스트 거액 기부자 가족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다. ●“기부도 시작이 어렵지 두번짼 쉬워” 부인 김씨는 “남편의 기부로 지난 5월 카이스트에 ‘김병호·김삼열 IT융합센터’가 착공되는 것을 보고 나라 발전을 위해 정말 큰일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면서 “원래는 내년 12월 IT융합센터가 완공되는 날 추가 기부 의사를 밝힐 생각이었는데 카이스트가 한시라도 빨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번에 내놓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에 기부한 부동산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땅 2300여㎡로 별장을 지으려 했던 곳이다. 김씨는 “아들 부부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별장을 짓는 것보다 국가와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고 여러 사람과 나누는 기쁨이 훨씬 가치 있을 것 같아 기부를 결심했다.”면서 “남편도 내 뜻에 기꺼이 동조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돈 버는 건 기술이지만 쓰는 건 예술” 남편 김 대표는 2009년 당시 경기 용인에 있는 논밭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 총장은 “이번 기부는 점차 퍼지고 있는 ‘기부 바이러스’ 확산에 새 장을 열 것이다. 귀하게 쓰겠다.”고 밝혔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中도 이상 저온현상…60년만에 가장 이른 ‘첫눈’

    중국 산시성 허순현에 60년 만에 가장 이른 첫눈이 내려 시민들을 당혹케 했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중신망 등의 19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날 18일 오후 허순현 전 지역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상기후로 기온까지 뚝 떨어져 눈은 바닥에 쌓였고, 금세 주위는 한겨울을 연상케 할 만큼 눈에 뒤덮였다. 이날 눈으로 논밭의 수확물 피해가 잇달았으며, 시민들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시민들은 겨울용 점퍼와 목도리 등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기온이 뚝 떨어진 날씨를 미리 대비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시민도 속출했다. 현지 기상청에 따르면, 이번 눈은 중국에서 60년 만에 가장 이른 첫눈으로 기록됐다. 한편 중국 중부지방에 위치한 차가운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이상 저온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기상청은 우리나라 부근에 강한 기압경도력이 형성돼 다소 강한 동풍이 불고 있다며, 특히 노인과 어린이는 환절기 극심한 일교차에 따른 감기 및 폐렴에 유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장관 인사청문회] 임채민 보건복지 “영리병원 한정된 지역 도입”

    [장관 인사청문회] 임채민 보건복지 “영리병원 한정된 지역 도입”

    임채민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15일 영리병원 도입 문제와 관련, “경제자유구역이나 제주국제자유도시 같은 한정된 지역에 영리병원 도입을 허용해 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 후보자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이 영리병원 도입 문제를 지적하자 “그 방향으로만 가겠다고 결심한 바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임 후보자는 담뱃값 인상 문제에 대해 “금연을 위해 큰 폭으로 올리는 게 좋지만 물가 부담이 될 수 있는 만큼 관련 부처와 계속 논의하겠다.”며 경고 그림 등을 삽입할 뜻도 함께 밝혔다. 기초노령연금은 “구조 재편 논의가 먼저 이뤄진 뒤 인상 문제를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청문회에서는 위장전입, 농지개혁법 위반, 세금탈루, 부동산 투기 등 기존 4대 의혹들에 더해 부당 소득공제, 부친의 위장취업 의혹 등이 추가로 제기되면서 임 후보자에 대한 의원들의 추궁이 이어졌다.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후보자는 1985년 12월 강원 춘성군 남면 방하리 56번지로 주소를 이전하고는 한 달 뒤 원래 주소지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주소를 다시 옮겼다.”면서 “86년에는 남이섬 건너편에 1300평의 논밭을 매입했는데 실제 거주하거나 경작했느냐.”며 주민등록법 및 농지법 위반을 거론했다. 임 후보자는 “거주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묘 조성을 위해 제 명의로 땅을 샀다.”면서 “제 의지에 의한 일은 아니지만 유감스럽다.”고 사과했다. 이 의원은 “모친의 묘는 경기 용인에 있다.”고 반박했다. 같은 당 주승용·박은수 의원은 “임 후보자는 대형 로펌에서 전관예우로 50일 동안 5300만원을 받았고, 아버지는 해마다 몇 달씩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도 사위 회사에 위장취업해 월급을 받는데도 소득이 없는 것처럼 소득공제를 신청해 탈세를 했다.”고 몰아세웠다. 임 후보자는 “사위가 장인에게 소일거리와 생활보조비 차원에서 준 것”이라고 했다. 전현희 의원은 “2009년에는 부인을 경로우대로 포함해 소득공제를 받았는데 그렇게 연배가 높냐.”고 묻자 임 후보자는 “직접 소득공제 서류를 작성하지 못했고 밑에 맡겨 실수가 저질러진 듯하다.”고 답했다. 최영희 의원은 “임 후보자는 지식경제부 차관 시절 키코 피해 기업을 위한 대책도 발표했는데 퇴직 후 취업한 로펌 ‘광장’이 소송이 진행중인 은행 측 대리인인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임 후보자는 “몰랐다. 공직자로서 부끄러운 입장에 처할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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