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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국회 「침략반성 결의」 서둘라(해외사설)

    자민당 귀하 자민당이 사회당위원장을 총리로 모시기로 결단한지도 1년이 됐습니다. 전후50년 국회결의가 연정3당의 정권합의 내용에 포함돼 있었음에도 불구,구체화가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추구하는 것처럼 과거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명기하는게 왜 「역사의 일방적인 단죄」입니까? 그같은 자민당의 주장은 아시아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며,아시아 해방전쟁이라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자민당내에서도 귀를 닫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같은 전쟁관이 자민당내에서 아직 뿌리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패전은 「미국의 기술과 물량에 진 것」이라고 규정해 아시아에 민중에 대한 가해의식이 희박한 상태에서 전후 보수정치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자민당에는 이시바시처럼 전쟁전부터 영토확장주의를 엄하게 꾸짖은 논객도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는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로서 그 뒤를 이은 사람은 만주국의 고관을 지냈고,도조내각의 각료로서 A급 전범용의자로 수감돼 있던 기시였습니다.냉전에 따른 미국의 방침전환이 「반공」주의자인 그의 석방을 가능케했지만,기시를 최고권좌에 취임시킨 것은 자민당이었습니다. 그러한 경위에서부터 생각할 때 「침략」과 「식민지」를 반성하지 않는 자민당의 체질을 잘 알 수 있습니다.그러나 냉전이 끝난 것처럼 시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최근에는 자민당총리도 「침략적 행위」와 「식민지」란 말을 종종 입에 담았습니다.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국민은 없습니다. 아시아의 평화·우호가 중시되는 시대이기 때문이겠지요. 자민당내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장일치 결의가 어렵다면 생각이 같은 의원들이 당파를 초월해 결의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무라야마총리는 끊임없이 「중대결의」를 말해왔습니다.책임지고 수습하겠다고….고노총재,이번은 당신이 「중대한 결단」을 할 차례입니다.
  • 차 KDI 원장/이 대우경제연 소장/경기전망 토론회서 설전

    ◎8.5% 성장 예측… “엉터리다”“아니다” 내로라하는 「경제논객」들인 차동세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과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소장이 지난 21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KDI경제전망 토론회에서 인신공격성 공방전을 벌여 경제계의 화제. 논쟁은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8.5%에 이를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이 주내용인 KDI측의 주제발표에 대해 첫번째 토론발언자인 이소장이 『KDI의 세계경기전망이 지난 1월 발표된 와튼경제전망연구소(WEFA)의 자료를 근거로 해 그 이후 발생한 국제금융시장불안과 경기변화 등의 변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엉터리 전망』이라고 포문을 열면서 촉발.그는 특히 『국내변수도 KDI가 농산물가격의 안정을 들어 물가안정을 전망했지만 농산물가격은 KDI가 아니라 하느님이 정하는 것』이라며 『물가상승압력이 적다는 전망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그는 또 정책대응과 관련,『최근 엔고를 계기로 부품산업 국산화방안이 나오고 있으나 정부의 시장 우선제공을 지적해야 한다』면서 국영기업들의 국산부품 구매강제제도의 도입을 제안. 차 원장은 이소장의 파상공격이 끝나자 『이 소장은 걱정이 많은 편인데도 머리카락도 안빠지고 하얗게 세지도 않아 아주 부럽기 그지 없다』고 대응을 시작.차원장은 『비록 이소장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경제를 전망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대우경제연구소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역공. 차 원장이 『국산부품을 만들면 강제로 사주도록 하라는데 만약 대우보고 강제로 사라고하면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날 것』이라고 한데 대해 이소장이 『국영기업체보고 사주라고 했지 내가 언제…오도하지 말라』고 맞받아치면서 논쟁은 절정. 차원장은 LG경제연구소장출신으로 이소장과는 한때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사이.특히 차원장은 PK이면서 예전부터 정부정책 옹호론을 자주 폈고 이 소장은 TK출신으로 정부정책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온 인물이어서 앞으로 두사람의 대결에 경제계의 관심이 증폭.
  • 투명사회(임춘웅 칼럼)

    영국에 「비밀의 불도 연기가 난다」는 속담이 있다.불은 언제나 연기를 뿜게 마련이어서 은밀하게 숨어 있어야할 비밀까지도 결국엔 연기를 내보이게 돼있다는 말일 것이다. 만해는 「비밀 입니까.비밀이라니요.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고 읊었다.물론 만해의 시「비밀」은 사랑의 비밀인 것이지만 비밀은 참으로 지켜지기 어려운 속성을 지녔다.어쩌면 비밀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안기부가 지난해 11월 전국지부장들에게 「자치단체장 선거연기 검토」라는 대외비 서한을 보낸 사실이 폭로돼 당시의 안기부장이었던 김덕부총리가 전격 해임되는 일이 있었다.또 그보다 앞서는 경기도에서 각종 지방선거에 나올 예상후보들을 은밀히 알아보다가 이 사실이 밝혀져 도지사가 해임되는 일도 있었다. 안기부사태는 안기부가 어떻게해서 해묵은 그런 일을 지금도 되풀이할 수 있느냐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됐었다.그런데 이때 어떤 논객은 도대체 비밀을생명으로 하는 안기부의 대외비 문서가 어떻게해서 대외 공개될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스파이 업무가 주업인 안기부 기밀문서가 밖으로 새어나간대서야 스파이부가 아니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같은 무렵 미국에선 CIA가 내부 컴퓨터망을 통해「모든 요원들은 의회내 친구나 안면이 있는 관계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공작활동을 강화하라」는 극비 지시문을 보냈다가 이 사실이 신문에 폭로돼 의회가 발칵 뒤집혔다.문제의 이 지시는 의원감시가 목적이 아니라 CIA가 실추된 자체 이미지개선을 위해 대의회 로비차원이었던 것으로 해명은 됐지만. 그뿐이랴.프랑스에서는 정부기관이 현직 내무부장관 측근들의 전화를 도청해온 사실이 밝혀져 대통령선거전의 쟁점이 되고있다.프랑스 정부기관들이 정보수집이나 수사목적으로 도청을 해온 것은 알려진 비밀인데 이번에는 도청에 사용되는 전화회선이 모두 몇회선이나 되는지,지난해의 경우 총 몇건의 도청을 했는지조차 폭로되고 있다. 비밀이 없는 세상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나라가 운영되려면 비밀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어찌돼서 모두가 낱낱이 까발려지고 마는 세상이 되어버렸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않다. 국가의 기밀이 하나하나 폭로되고 마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진짜 기밀의 누출을 막는 연구가 있어야 할것이다.그러나 세상은 날로 개방되고 있다.전화다,컴퓨터다,팩시밀리다,기술적으로 보안이 어렵게 돼가고 있는 것이다.구성원들의 의식구조도 점점 개방되어가고 있고 더욱 자유로워지고 있다. 최선의 방책은 밝혀져서 부끄러운 일은 하지않는 것이다.
  • 세대교체론에 대하여(임춘웅칼럼)

    한동안 시끄럽던 정계의 세대교체론이 상대가 꿈적도 하지않자 제풀에 시들해져 버렸다.세대교체론의 핵심은 민자당의 김종필전대표와 민주당의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의 정계은퇴다. 그중 김이사장은 이미 정계은퇴를 선언한바 있으나 이기택 민주당대표의 표현을 빌면 민주당의 「실질적인 오너」로서 완전한 정계은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김종필 전대표는 대표직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하길 기대하는 세대교체론이다.지금의 세대교체론은 실은 「3김퇴진론」과 같은 맥락인데 김영삼 대통령은 현직대통령으로 임기가 끝나면 물러설 것이므로 남은 두 사람만 물러나주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세대교체론에 일반국민들은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얼마전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도 응답자의 83%가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바라고 있다.학계에서도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정치권에 변화가 있지않으면 안되는 시대적 요청이 있다는 전제에서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그러나 그 방법론에는 찬성을 유보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현재의 세대교체론이 명분과는 달리 다분히 밥그릇 싸움의 양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계화 시대」에 정계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나서서 새 바람을 일으킨다면 얼마나 신선한 것일까.그러나 그것이 당위라고 해도 과연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여러 사람의 생각이 그러하니 『낚시나 하십시오』로는 효험이 없으리라는 것은 그동안 여러논객이 나서서 열심히 주창했지만 지금 낚시나 하고 지내는 분이 아무도 없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80년 세칭 신군부는 막강한 힘으로 「3김청산」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어떤가.왜 그분들은 건재하고 있는 것일까.그것은 그분들에게 정치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정치적 힘이란 바로 국민의 표다.「5공」때는 민주화세력이란 커다란 정치세력이 그분들을 뒷받침하고 있었고 지금은 불행히도 「지역정서」라는 것이 그분들에게 힘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힘이 있는 한 물러나긴 쉽지 않을 것이다.여러 사람들의 희망과는 달리 김종필 전대표가 당을 떠나 충청권을 중심으로 신당을 만들 것이란 예상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설령 본인들의 개인적인 희망이 조용히 사는 것이라고 해도 그분들의 이름을 빌려야 할 추종세력이 있고 그분들에게 표를 찍어 자기만족을 얻는 백성이 있는 한 그분들이 스스로 물러나길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세대교체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정당한 방법은 그분들에게 표를 찍지않게 하는 것이다.표를 찍지 않게 하는 길은 「지역정서」란 이 시대의 망령을 없에는 길밖에 다른방도가 당장엔 없어보인다. 그것은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길 기대하는 것보다도 더 더딘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 세계화추진위 김진현 위원장(인터뷰)

    ◎“우리사회 병폐 치료가 세계화 첫발”/남북문제·환경오염은 지구촌 핵심과제 『남북한문제 환경 공해 쓰레기 가족가치해체 산업화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인류공동체의 측면에서도 핵심적인 과제들입니다』 정부가 올해를 「세계화 추진 원년」으로 선언하면서 구성한 세계화 추진위원회의 민간위원장에 위촉된 김진현 한국경제신문회장은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주관이 있었다.우리 사회의 여러 병폐들을 고치는 것이 바로 세계화 추진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우리 나름대로의 발전과정에서 비정상적인 것을 마치 정상인양 생각했던 것이 많았다』면서 『이를 정상화 하자는게 세계화』라고 풀이했다.국가경쟁력의 강화도 중요하지만 세계화는 우리가 안고 있는 한국적인 문제의 해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게 김위원장의 진단이다. 김위원장은 일반이 혼란스러워하는 「세계화」와 「국제화」의 개념에 대해서도 논리정연하게 차이점을 설명했다. 『국제화는 아무리 국제관계가 깊어지고 심화되더라도 국가간의 단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국가상호주의가 밑바탕에 있다.그에 비해 세계화는 50억 인류공동체가 당면한 지구촌의 문제를 같이 생각하자는 개념이다.원자력 핵무기 환경 도시화 산업화 인구노령화 가정파괴 실업 테러 폭력 범죄 등의 문제는 국가마다 따로 떼어 생각하기 힘든 사안들이다.이같은 문제는 인류공동체 지구공동체라는 한지붕 한가족의 일이다.세계화는 지구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보다 확고히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세계화 추진위의 활동방향에 대해서는 『사회 각계의 훌륭한 분들을 많이 모셨으므로 그 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말했다.위원회가 의결·집행기구라기 보다는 심의·조정기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위원회에서 집약된 견해가 정부정책에 많이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올해 59세인 김위원장은 언론인 출신이면서도 경제·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해 「학자」 「논객」의 풍모를 풍긴다.경제학·미래학과 관련된 저서도 여러권이다. 김위원장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이공계 출신이 아닌인사로는 처음으로 지난 90년 과학기술처장관에 임명됐을 때 모두들 놀랐다.하지만 그는 줄곧 「과학기술계의 관찰자」였으므로 업무처리에 문제가 없다고 장담했었고 장관직을 누구못지 않게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업소에 「쓰레기세」까지 받다니/PC통신망에 비친 종량제

    ◎“서민부담 가중” “시믹의식 미흡” 비판/“오죽하면 이런 고육책을” 찬성론도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먹는데도 쓰레기 부담금조로 1백원씩이나 더 내야 하는가』 쓰레기종량제에 대한 아마추어논객들의 찬반양론과 대응책등 다양한 의견들이 하이텔과 천리안등 PC통신망에 빗발쳐 종량제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 의견의 내용은 쓰레기 종량제 초기단계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것이 대부분.『승용차 10부제에 범칙금인상에 이제는 업소에서 쓰레기세까지 받다니….이렇게 돈을 빨아가면 서민들은 어떻게 삽니까』,『재생 가능한지 아닌지를 일일이 검사한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잘못된 제도』,『국민의 의식수준이 개인의 양심을 전제로 하는 쓰레기종량제를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러나 『오죽하면 정부에서 이런 고육책을 냈겠느냐』는 등 찬성론도 만만치 않다. 『버린만큼 세금을 내게 되니 공평하고 쓰레기의 양이 줄어들뿐 아니라 처리경비가 절약돼 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시간까지 돈으로 환산해 보다 효율적인 조직원리를 도입해가는 추세인데 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해 효율적인 관리를 하는 것은 당연지사』,『종량제 실시이후 쓰레기를 철저히 분리하고 줄였더니 4일동안 규격봉투 하나도 차지 않았다. 석달에 6천8백원 내던 오물수거료보다 오히려 경제적』이라는 긍정적인 시각들도 상당부분 개진됐다. 그러나 『낙엽을 치워다 담아도 규격봉투에 넣으라고 할테니 가을에 낙엽도 제대로 쓸지 못하겠군』,『포장재가 많이 들어가는 제품을 사면 구입 즉시 판매사에 돌려주어야 하니 결국 물가인상은 불을 보듯 뻔한 일』과 같은 제도 시행상의 부작용을 염려한 글도 많았다. 『양심없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밤에 몰래 내다버려 아파트앞이 온통 쓰레기로 뒤덮였고 청소차는 규격봉투가 아니라며 치워가지 않아 사람사는 동네같지가 않다.아아…우리나라.쓰레기 화려강산…』『코팅종이는 일반쓰레기로 분류한다던 환경처가 바로 그 코팅종이로 종량제 안내문을 만들어 배포하다니』라며 개탄한 「우국논객」도 있었다.
  • 행시7회­옛 기획원 출신 “전성시대”/차관급에 포진한 「행정인맥」

    ◎모두5명… 1금 후속주자도 7명/행시7회/행조실·공정거래위·재경원 “장악”/옛기획원 정부 부처 차관급에 행정고시 7회와 옛 경제기획원 출신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26일 인사에서 초대 재정경제원 차관에 발탁된 이석채 전 농림수산부 차관과 주경식 보건복지부 차관,표세진 공정거래위원장,임창렬 조달청장 등 4명이 모두 행시 7회 동기생이다.또 유임된 원진식 총무처 차관도 행시 7회.임청장은 이철수 옛 재무부 기획관리실장(행시 6회)과 신명호 2차관보(6회)에 앞서 조달청장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낚았다. 행시 7회는 지난 69년 행정사무관으로 임용돼 지금까지 25년을 공직에서 지냈다.합격자 수는 55명으로 6회 45명,8회 38명,9회 27명보다는 많으나 10회의 1백88명에는 못 미친다. 연조가 안 돼 장관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논객과 소신파·실력파들이 많다.역시 7회 동기생인 한리헌 청와대 경제수석을 정점으로 관계(관계)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로 급부상하고 있다. 아직 1급이지만 이기호 총리실 2조정관,재경원의 장승▦ 1차관보·이영탁 예산실장·김영섭금융정책실장과 공정거래위의 이남기 부위원장 직대·김선옥 사무처장,조일호 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등도 차세대 차관 주자(주자)로 뛰고 있다.공직을 떠났지만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과 박경재 변호사,황두연 무역협회 전무도 7회 출신이다. 행시 7회의 급부상과 함께 옛 기획원 출신들의 요직 점령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앞으로 차관 회의를 주재하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에 임명된 강봉균 옛 기획원 차관과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등 권한이 강화된 공정거래위원장에 발탁된 표세진 전 조정관이 모두 기획원 출신이다.특히 강실장(행시 6회)은 김용진 옛 재무차관(4회)과 이환균 관세청장(6회),김시형 전 행정조정실장(1회)을 물리치고 총리실에 입성,앞으로 장관승진 후보 「0순위」를 바라보게 됐다. 예산실장을 역임한 기획원 출신 이석채 재경원 차관의 등장은 그가 한리헌 경제수석과 서울상대와 고시동기이면서 서로의 막강한 후견인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한 재경원의 역학관계에서 장관이 재무부 출신인 홍재형 부총리인만큼 차관은 기획원 몫이란 점이 강력히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인사에서 유임된 박운서 통상산업부·구본영 과학기술처 차관도 기획원 출신이다.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부처의 핵심 부처인 재경원과 통상산업부 차관을 기획원이 장악한 셈이다.기획원 출신인 한경제수석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앞으로 경제정책은 청와대와 재정·금융·세제 등 경제 3권을 한 손에 쥔 재경원의 「투톱 시스템」외에 옛기획원 마인드로 운영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재경원의 한 관계자는 『온화하고 무리없는 스타일인 홍부총리(재무부)와 뭔가 일을 벌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적극적인 성향의 이차관(기획원)의 대조적인 자세 및 조화 여부가 앞으로 옛 기획원과 재무부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의원·사법부 법리논쟁“명조율”/박희태법사위원장(국감 스포트라이트)

    ◎대법원장 선서·출석 등 싸고 티겨태격/양측주장 접점찾아 설득… 원만한 해결 『어려운 국민을 보고 눈물을 흘릴줄 아는 살아있는 법조인들을 만들어 달라』 국회 법사위의 박희태위원장은 7일 사법연수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연수원측에 이렇게 당부했다. 박위원장의 독특한 화법은 법리논쟁으로 늘상 시끄럽던 법사위의 국정감사를 크게 변모시키고 있다. 국정감사 첫날인 지난달 28일 대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여야는 대법원장의 증인선서및 출석·답변여부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는 바람에 회의시작이 1시간20여분이나 늦어졌다.대법원측마저 「사법부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난색을 표시,국회법 개정후 첫 국정감사가 시작부터 파행으로 흐를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이날 논란은 박희태위원장의 중재로 대법원장이 인사말에 이어 업무현황 보고시간에도 출석하는 것으로 원만히 매듭지어졌다.『관례에 없고 사법권의 독립을 해칠수 있다는 민자당·법원측과 규정상 행정처가 아닌 대법원감사인 만큼 그 수장이 성실한 수감을 약속하는 절차를 요구하는 야당측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는 논리로 3자를 설득한 것이다.물론 『앞으로 국정감사 규칙마련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하고 대법원은 사법부의 의견을 제출해 달라』는 스케줄도 제시했다. 서로의 명분을 살리면서도 해결해야 할 숙제를 분명히 한 것이다. 다음날인 29일 헌법재판소에 대한 감사에서는 민주당측이 일부 재판관의 「정치적 전력」을 문제삼아 그들 재판관을 소환,신상발언을 듣자는 결의안채택을 끈질기게 요구했다.박위원장은 민주당의원들과 「헌재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맞서는 민자당의원들을 설득,『의안은 성립시키되 표결 대신 합의로써 헌재의 공정한 업무수행을 바라는 국회의 목소리를 전달하자』고 제안했다.하마터면 국회와 헌재사이의 기관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30일 군사법원 감사에서는 긴급소집된 전군지휘관회의 때문에 감사시간이 부족해지자 『군기강확립을 위한 군사교정방향등 주요 정책은 분명히 보고하되 통계자료등은 서면으로 충실히 보고하라』고 지시,국회의 체면과 행정부의 업무를 함께 배려했다. 서울구치소,부산·대구의 법원·검찰에 대한 감사에서는 『어려운 국민을 보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법부가 되라』고 선배 법조인으로서의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 박위원장은 정당사상 최장수기간인 4년3개월동안 민자당대변인을 지내면서 야당과의 공개토론에서 「논리가 분명한 논객」으로 화려한 명성을 얻고 지난해 문민정부의 첫 법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지난 6월말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국민과 사법부의 거리 좁히기에 앞장설 것』을 약속한 그가 앞으로 여야간 공안시비등 치열한 논란이 예상되는 법무부·검찰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살아 있는」 국정감사를 이끌 수 있을지 주목거리다.
  • 과천정부청사 「경쟁력강화 토론회」

    ◎개성파 차관 4총사/“불꽃튀는 경제특강”/강골·단칼 등 별명 걸맞게 “말의 성찬”/복지부동·개방미흡 통렬한 자성도/정 부총리 “후배가 두렵다” 시종 즐거운 표정 과천 관가의 「말의 성찬」­. 4일 과천 정부청사에서 열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토론회」는 한리헌기획원,김용진재무,이석채농림수산,박운서상공자원부차관 등 이른바 경제부처의 「개성파 차관 4총사」가 나서 불꽃 튀는 특강을 통해 경제국제화의 방향을 제시한,훌륭한 토론마당이었다. 정재석부총리를 비롯해 홍재형재무·최인기농림수산·서상목보건사회·남재희노동부장관과 경제부처 3급 이상 간부 1백64명이 모두 참여,단합을 과시하며 여러 화제를 낳았다. ○…하이라이트는 「싸움닭」 또는 「다혈질」로 불리는 핵심 경제차관 4명의 릴레이 강연.상오 9시부터 30분씩 이어진 특강은 마치 후보들의 정견발표나 부처별 대표선수들의 실력 겨루기를 방불케 했다. 처음 나선 한리헌기획원차관은 「강골」이라는 별명답게 공직사회의 복지불동 현상과 관련,『과거에는 부정부패가 공무원 사회의 인센티브였으나 문민정부 들어 인센티브가 없어지자 「금단현상」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UR)등 급속한 국제사회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통렬하게 자성한 뒤 『국제화는 개방과 개혁의 조화이며 과천청사의 공직자부터 사고를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칼」로 불리는 김용진재무부차관은 『아직도 우리는 대원군 시대를 사는 느낌』이라며 개방의 미흡함을 비유한 뒤 『그동안 우리 경제는 40점짜리 아이를 80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스파르타식 교육을 했으나 앞으로 우등생이 되려면 마음보다 행동,또 제도와 관행이 확실히 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소 지루해질 무렵,속사포식 달변가인 이석채농림수산부차관(미보스턴대 경박)은 『차관에 취임한 뒤 열흘밖에 안 됐으므로,허락해 준다면 「경제학도 이석채」의 입장에서 평소 생각을 말씀드리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뒤 『개방시대에 본인은 삼국지의 제갈량이 되고자 하며,결론은 우리 농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해서 「타이거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운서상공자원부차관은 앞서 재무부 김차관이 금융을 인체의 혈액에 비유한 것을 빗대 『경제의 혈액인 금융이 실물에 피는 대주지 않고 물만 잔뜩 먹이고 있다』고 가시돋힌 공박을 해 폭소가 터졌다.곧 이어 『쌀 시장을 개방하는 마당에 돈은 왜 수입개방을 않느냐』고 따지는 등 상업차관 허용문제 등 재무부의 정책을 「마음껏」 비판. ○…특강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10개조로 나뉘어 40여분씩 분임 토의를 마친 뒤 정재석부총리 주재로 청사 구내 식당에서 오찬. 정부총리는 식사를 마치고 폐막 예정인 하오1시가 되자 『1시가 넘으면 차수가 변경되니 1분만 얘기하겠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낸 뒤 강평을 통해 『후생가외(후배가 두렵다)』라며 차관들의 강연내용에 후한 점수를 주고 다음에는 차관보와 국장에게도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 정부총리는 또 강연 도중 남재희 노동장관이 『차관들 오디션(심사)을 하느냐』고 묻자 『누가 차기(기획원)차관인가를 보고 있다』고 조크를 건네는 등 시종 즐거운 표정. ○…한편 토론을 마친 관리들 사이에서는 강연에 나선 차관들이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과 구체적인 실례 등으로 분위기를 여유있게 끌고 가는 등 당대의 「논객」으로서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자 「차관들의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돌기도. 일부에서는 『어느 차관이 가장 낫다』는 식의 점수매기기에 열을 올렸는데 한 참석자는 『한차관이 정치인의 비유법스타일 강연인 반면 이차관은 수준 높은 강의스타일,박차관은 활달한 자유토론 식이었다』고 평가. 그러나 박차관이 김차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상업차관 불허에 대한 불만을 내비친데 대해 재무부 관리들은 『산업정책 때문에 금융산업이 희생 돼 왔는데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며 즉각 매서운 반격.
  • 경제관료 「토론 한마당」 벌인다/새달4일 11개부처 2백여명 참가

    ◎개성파 신임차관들 특별강연 관심 경제관료들의 「토론 한마당」이 벌어진다.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11개 경제부처 국장급 이상 간부 2백여명이 다음달 4일 온종일 과천청사에서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대규모 정책토론회를 갖는다.이번 토론회는 특히 지난 23일 새로이 차관이 된 김용진재무·이석채농림수산·박운서상공자원차관 등 이른바 개성파 「소신 3총사」가 특별강연을 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또 「강골」인 한리헌기획원·오랜 외교관생활을 통해 세련된 매너를 지닌 박건우외무차관도 연사로 가세,「차관 콘테스트」의 양상을 띨 전망이다. 이들은 평소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논객.따라서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주요 정책과제를 특강제목으로 잡아 원고지와의 씨름에 들어갔다. 이번 토론회의 주제는 국가경쟁력 강화.말로만 경제력 강화를 외칠 것이 아니라,실제 토론을 통해서 컨센서스를 모으고 엘리트들이 갖기 쉬운 경제부처간의 할거주의를 지양하기 위해 경제팀장인 정재석부총리가 마련했다.상오중 이들 5개 부처차관의 특강이 끝나면 하오에는 국가경쟁력 강화와 관련된 주요 정책과제를 주제로 분임토의 및 발표가 이어지고,토론회가 끝나면 청사 분수대 앞에서 칵테일 파티가 벌어진다. 정부총리는 『토론에 참가하는 차관들의 실력이 대단해 평소 존경하는 후배들로 이들 중에서 수년 안에 경제부총리가 나올 것』이라며 『정책토론회가 벌써부터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 「5·23」차관급인사/소신파 대거 등장/경제차관회의「목소리」커진다

    ◎일 욕심·승부근성 강해 「토론 각축장」 기대/기획원·행시 7회 주축… 군웅할거 우려도 그동안 비교적 조용히 운영됐던 경제차관 회의의 「목소리」가 커질 전망이다.「5·23」차관급 인사로 돌격형 소신파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이 회의가 크게 활성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반면 오히려 군웅할거 또는 각개약진 식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경제차관 회의의 멤버는 한리헌기획원(의장),김용진재무,이석채농림수산,박운서상공자원,유상열건설,주경식보건사회,강봉균노동,구본영교통,경상현체신,한영성과기처,김형철환경처차관과 조경근정무1장관 보좌관 등 12명이다.이 중 재무·농림수산·상공자원부 차관과 정무1장관 보좌관 등 4명이 새 얼굴이다. 경제차관 회의의 의장인 한리헌기획원 차관은 조직장악력이 뛰어난 개성파이다.김영삼대통령의 후보시절 경제 가정교사를 지내 현 YS경제팀의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비칠 정도의 실세.연초 공공요금 인상으로 물가태풍이 불 때 경제차관 회의에서 『서비스요금이 올라가는 지역의 지방자치단체장을 문책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주재하는 경제차관 회의의 새 얼굴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이다.한차관이 행시 7회이나 김용진재무(4회),박운서상공자원(6회)이 행시 선배이고 이석채농림수산 차관(7회)은 동기이다. 이 가운데 한차관과 서울상대 동기로 사무관 시절부터 선의의 라이벌인 이농림수산 차관의 행보가 가장 관심사이다.뛰어난 머리회전과 속사포식 달변,「돌파형」의 업무추진력을 가진 그가 오는 6월말까지 확정할 농어촌 발전대책은 물론 농안법 개정,추곡수매가 결정 등의 난제를 종전처럼 저돌적으로 풀어갈 지,아니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일 지 주목된다. 세제와 금융 등 경제정책의 모든 수단을 쥐고 있는 김재무차관도 만만치 않다.걸걸하면서도 언변이 좋지만 안 되는 일은 그 자리에서 딱 잘라버리는 「단칼」의 면모가 있어 원만한 업무협조 여부가 관건이다. 통상전문가인 박상공자원 차관도 마찬가지이다.「타이거 박」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한번 물면 놔주지 않을정도로 끈질기다.일욕심이 누구보다 많고 승부근성도 강하다. 이들보다 먼저 승진한 강봉균노동부 차관도 과거 이승윤·최각규·이경식부총리 등 3대에 걸쳐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일하면서 완벽한 업무처리 능력을 과시한 내로라하는 논객이다.구본영 교통부 차관도 정통 관료 출신은 아니지만 역시 기획원에서 공직을 시작했다.예의 바르고 스마트한 신사이지만 그 역시 논리에는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때문에 앞으로 경제차관 회의는 정재석부총리의 가부장적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경제장관 회의보다 훨씬 뚝심있는 소신파들의 토론장이 될 전망이다.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다. 주목할 것은 행시 7회들의 약진이다.이석채농림수산 차관의 합류로 행시 7회는 이충길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한리헌기획원,주경식보사,김형철환경처차관 등 장·차관급만 5명이다.또 한기획원과 이농림수산,박상공자원,강노동차관 등이 모두 기획원 출신이어서 『경제차관 회의는 입지를 달리한 「EPB(기획원) 맨」들의 각축장』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소신파차관들의 등장으로 과천청사가 무력증에서 벗어나 활력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그러나 지나치게 엘리트 의식만을 앞세워 소영웅주의가 판치는 경제차관 회의가 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 하순봉 민자 새 대변인/방송앵커 출신의 재선의원(얼굴)

    문화방송(MBC) 정치부장 출신으로 뛰어난 화술에 대인관계가 원만하다는 평을 듣는다. 11대 때 민정당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한 뒤 12대 때는 행정부로 옮겨 국무총리비서실장을 역임했다.13대는 지역구(진주)에서 낙선했으나 4년동안 지역구활동에 전념한 끝에 14대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기어이 금배지를 단 집념이 돋보인다.이때 경조사에 빠짐없이 참석한 것은 물론 거의 모든 유권자들과 5차례이상씩 악수를 나눌 정도로 악착같았던 일은 유명한 얘기. 또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끝내 민자당에 공천을 신청하지 않은 것도 일화에 속한다.그러나 당선되자 바로 민자당에 입당,예결위 활동등을 통해 논객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부인 박옥자씨(50)와 1남 1녀.
  • “잠재지지 세력 조직화로 개혁도전 공격적 대처를”

    ◎성유보씨,「신문로포럼」서 주장/반개혁파는 군사정권 향수 느끼는 세력 이른바 개혁세력과 반개혁세력의 대립구조를 둘러싼 논쟁이 서서히 달궈지면서 정치권 주변의 관심을 끌고 있다.이같은 논쟁은 그동안의 개혁작업이 연말을 앞두고 1차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회일각의 인식속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29일 서울 소피텔 앰배서더호텔에서는 6·3세대를 주축으로 한 정치모임인 「신문로포럼」(대표 송철원·유광언)주최로 조찬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발제자인 성유보 전한겨레신문편집위원장은 『지금 개혁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앞으로의 개혁은 이에 맞서 보다 공격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씨는 「반개혁세력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전후로 「표적사정설」과 「10월 대란설」을 흘리던 이들 반개혁세력들이 지난달 정기국회가 열린 뒤부터는 노골적으로 개혁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씨는 그 징후로 월간조선10,11월호에 실린 글을 지적하며 이에 공격의 화살을 맞췄다.『「월간조선」은 「기득권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라며 김영삼정부에 들어간 재야인사 12명의 사상문제를 슬쩍 들고나서면서 이들의 바쁜 개혁행보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고 성씨는 비난했다. 이어 이 잡지 11월호에 실린 논객의 글과 관련,『군사문화와 개발독재를 예찬하며 「김대통령은 박정희 지지세력의 반발을 사고 있어 권력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과거와 화해한 바탕에서만 미래로 세계로 나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면서 『이는 김대통령에게 민주화와 개혁의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씨는 『반개혁세력이란 「6월항쟁」을 통해 국민들이 요구한 시민사회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군사정권의 기득권층 가운데서도 지난 시절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세력』이라고 정의하고 『김대통령이 개혁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에 잠재되어 있는 개혁세력들을 조직화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또 현재의 개혁추진상황을 김대통령 혼자 끌고가는 열차에 비유하면서 개혁작업을 기획하고 관리할 두뇌집단(Think­tank)의 필요성도 덧붙였다. 이날 모임을 기획한 김현식 신문로포럼 기획실장은 『월례모임인 만큼 발표내용에 특별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포럼의 성격이나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이날 발표내용은 김대통령의 개혁작업을 놓고 정치권 주변에서 일고 있는 사상논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 단체가 지난 대선때 김정남 청와대교문수석이 이끌던 「신한국창조를 위한 시민연합」의 후신이라는 점과 함께 몇몇 구성원들이 현 정부와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감안할 때 이날 모임은 김대통령의 개혁작업에 대한 외곽의 지원사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해석돼 주목된다.
  • 서울신문 48년(외언내언)

    『해방벽두의 건국대업이 바야흐로 바쁜 이때에 누십년간 압축된 세력을 내뿜어 자유로운 언론인으로서의 진실한 임무를 다할 날이 시작되었다.여기서 우리는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고 언론보도에 공정하고 적확할것은 물론이려니와 한걸음 나아가 민주총력의 집결 통일과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에 맞추어 단호히 매진하는 동시에…』 1945년 11월22일자 서울신문 창간사설의 한 구절이다. 그로부터 48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 읽어봐도 그대로 통하는 언론의 사명과 본분이다.언론의 중립성·공정성·정확성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통일과 독립의 완성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 안타깝고 한스럽다. 해방직후의 혼란기,좌우의 치열한 대립속에서 「해방조선의 대변지」로서 중립성을 표방하고 나선 서울신문은 나오자마자 10만부가 매진되면서 국내 최대일간지로 군림했다.당시 전국의 신문부수는 50만부가 안될 정도였다. 초대사장은 3·1운동때 33인의 한분인 위창 오세창.23세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의 기자를 지냈고 만세보·대한민보등 항일민족지를 창간·경영했던 언론계의 선구자다.창간의 주역을 맡았던 두 사람은 하버드대출신의 연전교수 하경덕박사와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도 관여했던 당대의 논객 이관구.제제다사의 진용을 갖추었으니 어찌 좋은 신문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서울신문」이란 제호도 워싱턴 포스트나 런던 타임스처럼 수도이름을 따서 국가를 대표하는 신문을 만들자는 의도에서 였다고 한다.창간이후 서울신문은 겨레와 더불어 현대사의 증인으로서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제는 거목으로 우뚝 자랐다.6·25전쟁중 51년4월 포성이 지척에서 울리는 서울에서 19일간 「진중신문」을 낸 기록은 서울신문의 자랑이자 한국언론의 신화로 남아있다.오늘 서울신문창간 48돌.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정사협」 출범과 시민주도의 개혁/김동성(정경문화포럼)

    ◎혁신주체 될수없는 정당·의회 보완/제도개선 앞서 국민정신운동 펴야 경실련과 한국노총을 비롯한 40여개 시민운동단체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범국민적 개혁운동에 앞장서기로 한 것은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갖는 일이다.지금까지 김영삼식개혁작업은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왔다.그럼에도 최근들어 개혁의 추진방식과 미래에 관해 시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국민들은 점차 「사정쇼를 관람하는」관객화되어가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이러한 시점에서 민간단체들이 시민주도적 개혁을 전개하려 한다고 하니 가히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대통령의 개혁추진에 대한 지지는 정의로운 정치·경제·사회 구현을 위해 구조적인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새 정부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문민정부라는 믿음 때문이다.따라서 김영삼정부의 개혁정책은 앞으로도 계속 민주주의 정치원리에 충실할 때만 힘을 발휘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우리의 정치현실은 어떠한가.대의제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핵심장치는 정당과 의회정치인데,우리의 경우 당과 의회가 민주주의의 보루로 기능하고 있다고 믿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위로부터의 개혁」작업과 과거 역사의 재 정의작업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정당과 의회는 국민들의 눈에는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었거나 권위주의체제 유지에 공헌해온 부정의 역사박물관 정도로 비쳐지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정당과 의회가 개혁의 주체가 되기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여기에 우리의 현행 제도적 차원의 민주주의 원리의 한계가 있다.특히 국민의식개혁운동과 관련해서 그렇고,이들에게 개혁입법 및 제도개혁을 맡긴다는 것에 대해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란 여론정치를 말한다」는 명제가 현상황에서는 중대한 의미를 제시한다.여론정치란 시민단체(이익단체)의 활성화와 민주적 정당제도를 통해 여론이 조직화되고 다양한 이익이 집약되어 정책결정에 반영되는 정치과정을 말한다.다만 우리의 경우 지난날의권위주의체제 하에서 여론은 오히려 조작되거나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왜곡됐던 경험을 갖고 있다.그 결과 여론정치는 아직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심지어 현 대통령의 여론중시 자세까지를 못마땅해 하는 논객들도 있다. 물론 여론정치가 정당과 의회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최소한 여론의 조직화와 통일화 및 정책화를 위해 시민적 단체의 역할,공정한 언론의 역할을 중시한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특히 현 정당과 의회는 자정의 노력과 구성원의 대폭적 물갈이를 필요로 하고있다.때문에 이들 스스로의 개혁이 완료되기를 기다리면서 제도와 절차에 얽매여 개혁을 늦출 필요가 없다.요컨대 정의로운 시민단체,공정한 언론,강력한 지도력이 삼위일체가 되어 범국민적 의식개혁운동을 추진해 나갈 수 밖에 없음이 당면 현실이다. 정사협은 관계·경제계·교육계·언론계·의료계등 5개 분야를 중심으로 자정운동에 대한 감시와 고발을 적극적으로 펴나갈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법과 제도개혁을 위한 입법작업 추진과 민간주도의 대대적인 부패추방 및 의식개혁을 벌여나갈 모양이다.최근에 드러난 바와같이 법조계 일부에서의 비개혁적 보신주의와 정부관료조직 내에서의 수동성이 지속되고 있는한 이러한 민간주도의 개혁운동은 필수적인 것이다. 시민주도 개혁운동의 성패는 결국 다양한 국민적 여론을 얼마나 바르게 대변하고,상호계몽하고,조직화해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그리고 다양한 이해와 가치관을 결합시키는데 있어서 여론정치의 주역으로서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해 이성과 상식을 얼마나 견지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개혁작업의 주도력은 서서히 시민사회 자신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시민주도적 개혁운동은 시민사회의 정치화 과정을 의미한다.그리고 이러한 정치화과정에서 쉬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 현상으로는 단체운동 리더들이 시간이 흐름에 비례하여 세속적 정치인이 되어갈수 있다는 점이다.범국민적 의식개혁이 완숙되기도 전에 만일 시민단체들간에 그리고 단체리더들간의 파워폴리틱스(세력정치)현상이 발생된다면 새로운 국가건설의 꿈은 그만큼 멀어질 수 밖에 없다.따라서 정사협은 개혁을 추진함과 동시에 스스로 시민사회내의 여론주도 중추세력으로 지녀야할 규범과 원칙에 충실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 시민 주체적 개혁과 정치권 물갈이/김동성(정경문화포럼)

    ◎부패척결에의 대응… 주인의식 긴요/민주절차인 선거 통해 부도덕 척결 김영삼식 개혁 추진은 현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켜 주면서 신한국건설의 구호가 환상이 아닌 실현가능한 목표라고 국민들은 믿기 시작하는 것같다.그러나 우리 주변의 그늘진 곳에서는 개혁의 방법과 진행과정에 대해 시비하는 목소리가 있다.그리고 많은 논객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무심하게 이러한 불평들에 동조하고 있다. 개혁에 대한 비판논리의 핵심은 현 개혁정책이 총체적 프로그램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개혁대상세력의 설정에 있었서의 불분명성,그리고 법적·제도적장치를 만들지 않은 채 개혁을 진행시킨다는 등이다.그리고 이러한 비판의 소리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수동적으로만 사고해 온 보통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그러나 개혁정첵과 방식은 역사적인 특정시점과 정치체제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소수의 권력 엘리트들이 국가의 목표와 민족의 이상을 정해놓고 특정 정치·경제및 사회 구조와 양식의 변화를 프로그램화하면서 개혁을 진행시켜 갈 수가있다.그러나 이러한 개혁방식은 히틀러나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모형으로 귀착되기가 쉽다. 다음으로 정치,경제,군 엘리트들이 경제성장과 정치적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정권이 설정한 발전 목표로 국민을 동원하면서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제3세계 군부통치체제에서의 발전모델이 있다.이 경우 이미 설정된 발전방향에 저해된다고 생각되는 민간·사회부문과 반대세력을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탄압하게 마련이다.그리고 그 결과 성장과 질서라는 미명하에 개혁주도 세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스스로가 사회·경제적 비리와 부패를 구조화시켜 나가게 된다. 현 시점에서의 우리나라 개혁은 반드시 소수에 의해 설계되는 개혁일 필요가 없다.우리의 개혁목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경제사회 발전을 꾀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직자와 기업가들이 공동체적 이상을 망각하고 탐욕에 빠졌던데에서 일차적으로 기인한 구조적 부패를 척결하자는 것이다. 국민 전체가 썩은 것이 아니다.구조적 부패상황하에 평범한 시민들은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믿도록 강요받아 왔던 것이다.따라서 일차적 개혁과정은 국민들로 하여금 무엇이 정상이고 상식인가를 일깨워 주는 정신 개혁으로 충분하다.그리고 현 단계에서의 개혁은 기존의 법률과 제도의 틀속에서도 가능하다.물론 새로운 법적·제도적 장치를 준비해야하나 개혁논의의 초점이 법적·제도적차원에만 집중된다면 이는 현재의 개혁과제를 왜곡시킬 뿐이다. 만일 우리가 개혁의 다음 단계를 생각한다면 이는 정치권의 물갈이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한다.지금까지의 구조적인 부정부패의 일차적 책임은 공직자에게 있어왔기 때문이다.정치권의 물갈이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민주적절차에 따라야 한다.민주적 절차란 선거와 시민적 감시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선거에 대비하여,그리고 새로운 공직자의 임명과정에 대비하여 국민들은 공직자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평가하고 있어야 한다.비리에 연류되어온 개인과 그룹,그리고 최근에 드러나고 있는 부도덕한 양심들에 대해 국민들은 망각하지 않고 있어야만 한다.그리고 상식과 정의를설파하는 시민단체들의 활성화와 양심적언론,그리고 정의로온 정치지도자의 유기적 협력관계의 지속만이 성공적 개혁의 관건이 된다. 선출된 공인이든 임명된 공직자든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받는다.그리고 명예를 유지한다.따라서 국민앞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은 괴로움도 아니요,치욕도 아니다.오히려 의무이다.공직을 배경으로 축재한 부는 설령 법망을 피했다하더라도 이를 사회에 환원하여 국민의 재심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현 단계에서의 개혁은 김대통령과 부패세력 간의 대결도 아니오,여야간 대결도 아니요,여권내 계파 간의 싸움도 아니다.국민과 일부 부패세력간의 문제이다.앞으로의 개혁향방은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주인의식에 달려 있다.그리고 개혁의 목표와 미래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뜻과 의도에 따라 정해져야만이 정도인 것이다.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가 대신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며 살아왔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7·끝)

    ◎지령회복의 정당성/서울신문기원은 1904년 7월18일/「항일선봉」·「친일곡필」 모두 인정해야 정직/최고의 역사… 오늘로 28764호인셈/45년 혁신속간땐 지령 계승… 59년 41년간의 족적 삭제 서울신문은 조국광복과 함께 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하여 속간되었다.또한 일제시대 통감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는 한말의 구국지이자 민족대변지이던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해 발행된 신문이다.따라서 서울신문은 그 뿌리를 한말 최대의 구국민족지이던 대한매일신보에 두고있는 셈이다. 서울신문의 뿌리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런던의 크로니클 통신기자였던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과 한말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겸 우국지사 양기탁등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합세해 창간했다. 창간 날짜는 1904년 7월18일이다. ○일 국권위협에 맞서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어 고문정치를 통한 외교 및 내정을 간섭하는등국운이 풍전등화 상태에 놓이던 시기였다.신보는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창간되어 통감부의 기관지로 매수되기까지 일제의 온갖 회유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국권수호운동에 앞장서온 것이다. 신보의 국권수호를 위한 언론구국운동은 동시대 다른 신문과는 현저히 다를만큼 특징적이었다. 창간호부터 항일논조로 일관,갖가지 폭로 고발기사로 사라져 가는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횃불을 당겨온 것이다.일제의 황무지개관권 요구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반도 침략음모를 널리 알린 일이며 황성신문의 정간 및 장지연의 구속사건 대서특필,일제의 날조와 허위를 폭로한 고종의 밀서사진 전재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뿐만이 아니다.민족지들의 방향을 주도하는 일방 친일지와 친일파,매국노와 친일매국단체에 대해서도 준엄하고 통렬한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신보의 언론구국운동은 이러한 비판 및 고발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애국투쟁정신을 고취하는데에도 매우 적극적 이었다.고종량위반대·정미7조약반대의 시위운동고취를 비롯해 장인환,전명운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통감부 고문)처단과 안중근의 이등박문처단을 애국의사의 애국투쟁으로 보도,민족의 분발과 투쟁운동의 치성을 고취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주도 또 백년대계의 교육구국운동이며 의병운동,그리고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까지 나서 선각민족언론으로서의 소임을 적극 전개한 점도 빼놓을수 없다.특히 애국계몽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은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한 거족적 국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보의 언론구국정신을 한눈에 가늠케 하는 것이다. 신보가 이처럼 과감한 구국운동을 전개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의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은때문이다.그러나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등 애국민족투사들의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와 운동을 주도했다는데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국권수호운동을 펼치던 신보는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풀이 꺾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영국총영사 헨리보나르와 통감부의 회유 및 압력을 받아 끝내 통감부에 매각되기에 이른다.국권회복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그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틋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 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대한」의 두자를 잘렸다.결국 「대한」을 빼앗겨버린 「매일신보」는 일제의 의도대로 통감부의 기관지로 변신된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 이 날짜의 사설제목 「동화의 주의」가 상징하듯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이하 매신)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첨병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당초 매신은 총독부 일문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운영되었으며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를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가 위주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고 식민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한편 일제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 것이다. 민족말살을 호도,한국과 일본을 순치의 관계로 묶어서 주장한 민족동화의 논리는 물론 식민통치의 기반구축을 위해 사회환경의 일본식 개량 또한 부추겼다.또 식민경제수탈을 위해 산업의 개량과 일본경제체제로의 예속화,그리고 한국의 자주성 및 전통문화를 단절시키기위한 문화말살에도 앞장섰다.이밖에도 학교와 사회,가정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독립운동 탄압에 가세하는등 식민논리로 일관했다. ○해방조선 대변자임 매신은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를 선전하는등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대변역활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같은 일제옹호논조는 매신이 기구를 확대해 경성일보에서 분리,1938년 4월16일 독립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개제해 출발한(지령은 매신을 계승)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그리고 매신은 지난날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 「서울신문」으로 거듭 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서울신문으로의 개편작업이 본격화하기는 1945년 11월10일 미군정청이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리면서였다. 이날이 바로 치욕의 매신이 종간된 날로서 지령은 제13737호로 돼있다.그뒤 새로운 간부진용이 구성돼 매신의 시설과 사옥은 물론 6백여 사원을 그대로 흡수,「서울신문」제호의 혁신호를 이땅에 선보였다.초대 사장은 지조 높은 선각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인 위창 오세창이었다. 이날이 1945년 11월22일(발행날짜는 11월23일)이었으며 지령은 매신을 그대로 계승해 제13738호로 기록되어 있다.이 발행호수는 서울신문이 매일신(신)보의 발행기록 12276호와 그 이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기록 1461호를 합친 숫자를 기준삼아 지령을 계산한데 따른 것이다.이는 매일신(신)보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계승한데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이에따라 서울신문은 이 두신문의 종합지령을 승계한 제13738호로 기록하게 된것이다.서울신문이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의 계보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속간된 것이다. 이 지령은 1959년 3월22일까지 그대로 계승,제18214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서울신문은 지금 이 지령을 쓰지않고 있다.59년 3월23일 당시 사장이던 고 손도심이 근대 신문사에 대한 자체적인 사적평가를 진행하고 회사전체의 의견을 종합,그동안 사용해오던 구지령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이에따라 1945년 11월23일자로 된 속간호를 제1호로 기산,이날짜(1959년 3월23일)의 지령을 제4477호로 쓰게됐다 ○속간호 1호로 기산 서울신문은 이로써 저 멀리 대한매일신보로부터 이어온 지령 13737호와 41년의 역사를 스스로 잘라버렸다.그러나 이는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을 그르치는 사실왜곡에 다름 아니었다.근대사에 각기 공과 과의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긴 두 신문과 서울신문의 맥락은 앞에서 보듯 연면히 이어져온 때문이다.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서울신문이 스스로 도려낸 구지령을 되찾아 바로 잡는 것은 역사에 정직하기 위한 길이다.이는 서울신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언론사의 재정립이라는 면에서도 그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따라서 서울신문 역사의 기원은 1904년 7월18일 제1호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이날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서울신문의 역사는 현존하는 한국의 신문중 가장 오래인 89년이 된다.그리고 잘라버린 지령 13737호를 다시 이으면 오늘 1993년 5월5일자로 제28764호가 되는 것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5)

    ◎광복과 함께 새출발/오욕의 역사 청산… 공공지로 재탄생/「서울신문」으로 제호바꿔 11월22일 창간/지령 13738호… 대한매일신보정통성 계승/사장 오세창·주필 이관영 등 새 진용 포진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은 한국언론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제도적 탄압장치였던 출판법등 언론계 악법이 미군정에 의해 폐기된데 이어 허가제였던 신문 출판물이 등록제로 바뀌어 갖가지 출판물과 신문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간부진 사표 수리 일제치하 36년동안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이하 매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개편작업은 1945년9월8일 한반도 진주후 이남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던 미군정청이 해방전 영업국장이던 이상철 임시관리인으로 임명(10월2일),매신의 간부중 일부를 개편토록하는 조치로부터 시작됐다.매신처리 실무를 위임받은 그는 10월9일 매신중역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한바 있는 사장 이성근과 상무 정인익의 사표를 정식 수리하는 한편 10월25일 신문사의 명칭변경이며 새중역진 선임문제등 주요사항을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신의 자치위원회는 신문사의 처리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자치위원회란 9월23일부터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매신의 운영을 장악,신문을 만들어온 편집국과 공무국등 사원 6백명이 결성한 단체였다.위원장은 문화부기자 윤희순으로 적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했다.자치위는 10월23일자 지면에 「매신은 어디로」라는 성명을 통해 이 신문은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의 소유가 절대로 될수는 없고 공정한 민중의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견해를 피력했다.이는 자치위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보도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할것』을 앞서 선언했던것과 일관된 논리였다. 자치위의 이러한 반응속에 주총은 예정대로 10월25일 개최됐다.주총에서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됐고 부사장은 이상협,전무취체역 김형원,상무 이상철,주필겸 편집국장 이선근등 간부진용이 결정됐다.그러나 자치위의 강력한 반대의사에 부딪혔다. 주총의 결정이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것이 표면적 주장이었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양측의 막후교섭이 시도됐으나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이에따라 개편실무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사퇴하게 됐고 매신은 표류할수밖에 없었다. 매신이 자치위와 개편실무자 사이에 이처럼 표류하고 있을 무렵 매신의 처리문제는 국내 각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언론계 전체의 집중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단순한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차제에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이 신문사를 접수하려는 직·간접의 암중모색이 여러차례 시도된것이다.천도교세력을 뒤에 업은 공진항이 10월초 매신접수를 시도한데 이어 동아와 조선 양지가 매신인수를 한차례씩 꾀한바 있다. ○개편안 싸고 대립 이러한 상황속에 놓이게된 매신에 대해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청은 새로운 갈래의 매신개편작업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인 중재를 결심하게 된다.11월10일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이관구에게 「공정한 언론을 펴는 참다운 신문」을 만들도록 부탁하기에 이른다. 매신에 대한 정간명령은 자치위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그래서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의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채 일단 한발 물러서게 됐다.증폭된 갈등속에 난항을 거듭하던 매신의 개편작업은 이로써 순조롭게 진행하게 됐다. 매신개편의 대권을 위임받은 이관구는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있는 인사들로 경영 편집진용을 구성하는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우선 사장에 위창 오세창을 추대했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3·1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서 그의사회적 덕망과 이미지는 새롭게 선보일 서울신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 홍명희를 상징적인 고문의 위치에 영입함으로써 그 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이관구와 함께 매신개편작업에 참여한 하경덕이 부사장에 내정됐다.그는 저명한 교육자요 사회학자로서의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탄력있는 자유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중후하고 사려깊은 논조를 감당해 나갈 주필에는 이관구가 선임됐다.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받고있는 민족주의자와 좌파계열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참여한바있어 좌우 어느 편에서도 무난히 받아들여질수 있는 인물이었다.특히 해방전 동아와 조선에서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논객으로서의 경력은 금상첨화였다.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각부 데스크에 앉히고 이를 지휘할 편집국장에는 어문학계의 권위자인 홍기문이 내정됐다. 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실업가 김동준이 전무에 내정,안정된 신문운영을 기할수 있는 진용이 구성됐다.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끝에 받아들여 「서울신문」으로 확정했다.제호의 글씨는 서예가이자 취체역인 김무삼이 썼다. 그리고 매신으로부터의 인수재산 확인도 마무리지어졌다. 우선 자치위산하에 있던 사원 6백명의 인원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로 했다.인수받은 재산과 시설은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연건평 1천8백30여평 규모의 4층 콘크리트 건물인 구사옥과 그 부속건물을 비롯,부산등 지방에 산재해 있던 당시 35만3천원 상당의 부동산과 독일제 알버트윤전기 4대등 최우수 인쇄설비 일체,지사 지국의 배급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이 규모는 신문사로서 해방전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개편,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모든 준비작업은 11월21일 하오2시 5층 옥상에서 오세창초대사장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매듭을 지었다.그리고 이튿날인 22일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지면을 이땅에 드러냈다.발행일자는 1945년11월23일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의 열도를 반영하듯 미군정장관 아놀드를 비롯,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국민당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수석총무 송진우등의 인사들이 언론정세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경의와 기대를 보내오는 가운데 혁신된 속간호를 내놓게 된것이다. 『「서울신문」으로 「매신」이 경생』이라는 5단 크기의 컷(1면 중앙)과 함께 속간 첫호의 모습을 선뵌 서울신문의 이날짜 지령은 제13738호로 기록돼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서 서울신문의 계보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 조세형(민주 최고위원 8인의 면모)

    ◎합리적 성품… 민주당 대표하는 논객 민주당을 대표하는 논객.한국일보 편집국장출신으로 옛 신민당에서 영입,10대 국회에 전국최다득표로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88년 국회언론청문회에서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펴 주목받기도 했다.온화하고 합리적인 성격이나 자기주장이 강해 지난 전당대회에 이어 계보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선거운동을 통해 최고위원에 당선됐다.부인 박경자씨(57)와 2남1녀. ▲전북 김제·62세 ▲서울대 독문과 ▲한국일보 편집국장 ▲10·13·14대 의원 ▲신민당 정책위의장 ▲국회 교청위원장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3)

    ◎매신의 인걸들/선각자들 결집… 「국권회복」 구심체로/영국인… 일제탄압에 울타리역할/배설/총무 맡아 항일논조 사실상 주도/양기탁/박은식·신채호는 주필로 민족자부심·독립정신 고취 대한매일신보가 민족의 대변지로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신문에 관련 또는 종사했던 사람들의 면면인데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매우 다채로운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신문을 이끈 주역은 영국인 사장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논객이자 사학자이며 항일투사였던 국내 인사들로 돼있다.배설(Ernest T Bethell)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시 북부 애쉴리에서 태어났다.극동상대의 무역상이던 토머스 헨콕과 전도사의 딸인 마서 제인 홀름의 다섯 남매중 장남으로 브리스톨의 머천트 벤처러스스쿨을 나왔다. 이 학교를 졸업한뒤 열다섯살 때인 1888년 일본에 건너와 1904년초까지 16년동안 고베(신호)에 살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1899년에는 동생들과 함께 「베델 브러더스」라는 무역상을설립했다.이 회사는 지금도 런던에 있다.어떻든 배설은 한때 돈을 많이 벌어 러그(rug·깔개)공장을 차리기까지 한것을 보면 사업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인들의 방해로 실패,재산을 모두 날렸다.졸지에 삶의 기반을 잃게 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대로 늘 활달한 쾌남아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수영 크리켓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 음악에는 타고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체계적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청중들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부를만큼 빼어난 가창력도 지녔다. ○늘 활달한 쾌남아 서양장기를 잘 두었으며 술과 담배 또한 즐기는 편이었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문장력도 여간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학력은 비록 고졸에 그쳤으나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재능과 기질은 언론인으로서 훌륭한 잠재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이윤추구가 최대의 목표인 무역업보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창의성을 발휘,정치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업인 신문발행이그에게는 적격이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그가 언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러그사업에 실패한 직후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됐다.그리고 그는 불과 4개월 1주일만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수 있었다.배설의 언론입문은 그의 자질이나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당시 한국의 실정 역시 배설과 같은 언론인을 절실히 필요로 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양기탁을 만나 대한매일신보의 견본판 「양자신문」을 만들기는 1904년 6월29일이었으며 실제로 신문을 창간하기는 20일 뒤인 7월18일이었다.그로부터 1909년 이 땅에 뼈를 묻히기까지 줄곧 한국인의 편에서 일제에 맞선 항일언론의 선봉장으로 또 신보를 이끌고 지킨 울타리 역할을 다 해냈다. 배설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친 기둥이요 대들보로 비유해도 좋다.그는 신보사의 전무와 주필 그리고 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인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일논조를 사실상 주도한 신보의 분신이었다. 양기탁은 호가우강으로 1871년 4월2일 평양태생이다.배설보다는 1년7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다.부친은 한학자로 그 지방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양시영이었다.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사람됨이 매우 총명하여 보기드문 소년 문장가로 꼽힐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오기는 배설이 일본에 갔던 같은 나이인 15살 때였다.상경직후 동학및 유림의 명망가이자 우국지사인 나현태를 알게 됐다.이후부터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게 되었고 동학당과도 관계하면서 견문과 사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던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반년동안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따라서 그의 지식과 사상은 어려서 배운 한학의 토대위에 양학문과 기독교 정신이 접목된 것이 아닌가 한다.또 동학과도 관계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일제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는 듯 했던 신보의 반일논설 필봉은 그의 이런 사상과 학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는 한때 부친과 함께 캐나다의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이 한영사전은 1897년 6월에 출판됐는데 인쇄소는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합자회사였고 발행소는 서울야소교서회로 되어 있다. 그는 신보를 이끈 항일지사형 언론인의 전형적 인물이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그 총감독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나라를 빼앗긴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일제에 대항케한 열혈투사이기도 했다.여러차례의 옥고끝에 만주로 도피한 그는 상해에서 광복운동에 종사하던중 1933년 김구에 의해 법무담당 국무위원에 임명,1년4개월간 재임했다.강소성 담양현에서 그 파란의 삶을 마쳤는데 그 해가 1938년이다. 백암 박은식은 황해도 황주태생의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본래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이 신문이 정간된 뒤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겨 정력적인 항일언론 활동에 나섰다. ○신민회에도 참여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 원로회원으로서 교육 및 출판부문을 담당하기도 한 그는 신보를 통해 주로 애국계몽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신교육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 애국계몽사상을 설파,국권회복운동을 적극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한일합방뒤에는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많은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박은식의 뒤를 이어 신보의 주필로 활동한 단재 신채호는 충남 대덕출생으로 명성 높은 사가였다.역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가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민중계몽 및 정부편달 중심의 시론과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3대충노」「이십세기 신국민」「서호문답」「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등의 논설과 「독사신론」「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등 역사관계 논문및 시론등을 연재,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신민회조직에 참여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했다.한마디로 그는 신보의 국권회복운동을 이끈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구축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이밖에 대한매일신보를 이끌어온 사람들로는 임기정 이교담 옥관빈 강문수등이 있다.이들은 주로 업무분야 종사자들로 신보의 조직을 통해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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