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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6월항쟁 계엄반대 릴리 前미국대사 별세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시블리메모리얼병원에서 별세했다. 81세. 가족 측은 릴리 전 대사가 전립선 암 합병증을 앓아왔다고 밝혔다.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중앙정보국(CI A) 요원으로 활동했던 릴리 전 대사는 한국과 중국의 민주화 격동기인 1986~91년 한국과 중국주재 대사를 각각 역임한 아시아통이다. 릴리 전 대사가 주한미국 대사를 지내던 1986~89년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로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등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릴리 전 대사가 지난 2004년 발간한 자서전 ‘차이나 핸즈(China Ha nds)’에 따르면 1987년 6월 항쟁 당시 한국의 계엄령을 반대하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친서를 직접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전달해 계엄령 선포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가까스로 막았다고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미 정부 내 중국통인 그는 주중대사(1989~91)에 부임하자마자 발생한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당시 중국의 인권탄압을 강하게 비난하며 사태 해결을 위해 물밑 조율작업을 벌였다. 릴리 전 대사는 석유관련 사업을 하던 부친이 중국에서 머물던 1928년 칭다오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미 예일대를 졸업한 뒤 조지워싱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1951년 CIA에 투신했다. 이후 1978년까지 27년간 도쿄와 베이징, 타이완, 홍콩,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릴리 전 대사는 이후 국무부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으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뒤 주한·주중대사를 잇달아 역임했다. 릴리 전 대사는 지난해 여름 캐서린 스티븐스 현 주한미국대사의 미 상원 외교위 인준 청문회에 참석, 스티븐스 대사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고 한국 관련 싱크탱크 행사들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kmkim@seoul.co.kr
  • [10·26 30주년] 박상범 전 실장의 인터뷰 전문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인 26일을 사흘 앞둔 박상범 전 대통령 경호실장의 소회였다. 1979년의 ‘10·26’ 당시 경호계장이었던 그는 궁정동 저격 현장의 경호실 관계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말년에 유신헌법을 개정한 뒤 물러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비화를 들려줬다. 즉, “박 대통령이 집권 18년 정도 됐을 때인데 ‘1∼2년 뒤에는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는 얘기였다. 경호 실무자로서 피경호대상을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을 넘어 그의 표현대로 “경제적으로 세계사에서 드문,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 전대통령이 평화적 권력이양까지 일구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배어있는 듯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안 꺼낼려고 했다.”며 서울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하던 그였지만, 본지 취재진이 지난 23일 서울 방배동 민주평통장학재단 그의 사무실을 찾자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의 뒷얘기에서부터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경호 및 남북관계 전문가로서 견해를 담담하게 피력했다. 합기도 등 각종 무술이 도합 10단이 넘는 무골답지않게 담담한 어조였다.  ●‘10·26’ 3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텐데.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30년이 된 요즘에 와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는 학술대회도 열고, 유물·기록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라.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 60년만에 이 만큼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확히 이야기 하면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약 40년만에 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데 최소한 100~150년 걸렸다. 그런걸 보면 당시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강력하게 뒷받침 해줬던 국민의 저력이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해외 나가면 특히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한국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느낀다. 서거 30년이 흘렀지만 매년 개인적으로 현충원을 간다. 그분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최근 국제학술회의에서 진보쪽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다. 한 교수는 김일성 유일체제인 북한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반대 세력을 허용한 박정희의 남한이, 그리고 개방적·국제적 전략을 택한 남한이 폐쇄적 전략을 취한 북한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당시 그 분을 모시고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다녔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인 조선, 제철, 자동차 등이 짧은기간에 상당한 발전을 했다. 과학분야도…. 요즘 두각을 나타내는 군수산업. 그게 그 당시에 기초가 다져지고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가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국내를 다니다 보면 관광지 재정비 한 곳을 많이 보는데 대부분 그 때 시작한 것이다. 그 족적을 보면서 당시의 지도자로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신 때 데모하다가 호주에서 공부한 김형아 호주국립대교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재평가를 하게됐다는 말을 했다. 여러 면에서 박 대통령의 캔두이즘(Candoism)이 큰 기반이 됐다 하더라.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이 국민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그런 신념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라는 신념을 심어준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것들이 경제나 문화쪽에서 보인다. 최근 광화문 세종대왕 좌상이 생겼지만, 그 전에 이순신 장군 동상 세워지고…. 여주의 영릉이나 아산의 충무공 사당도 그 때 다 성역화됐다. 처음에 갔을때는 초라했는데 그분이 성역화시키고, 그게 우리 역사에서 계속 남는 거다. 사석에서 말씀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갖고 계셨다.  ●경호를 하시면서 사선(死線)을 수차례 넘나들으셨겠지만, 그 중에서도 ‘10·26’ 현장이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텐데. 1983년의 아웅산사태 때도 아슬아슬했겠지만.  -경호했던 사람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다만 그 이후에 후배들에게 나와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는 뜻에서 경호 기법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엄청난 연구를 통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소위 경호라는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최소화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10·26’도 봐야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경우라도 경호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사를 접근하고 매사 들어봐야한다.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한다는 건가.  -그렇다. 아웅산 사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경호관계자 중 ‘10·26’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것은 그 때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 후배가 평소에 후덕한 모습을 기억하고 일부러 비껴 쏴서 허벅지와 옆구리를 스치게 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확인사살 과정에서 버클에 맞췄다는 얘기도 있었고.  -제 3자를 통해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고, 중정 직원들도 다 사형당했으니.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중정 직원들도 참 고생 많이 했다. 대통령 경호원과 한 집안 식구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사람들 고생하는거 보고 서로 따듯하게 해서 깊은 우정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사실 정말 안타까웠다. 정말 제가 아끼는 후배들도 있었고 그 중에 저를 참 좋아하는 후배들도 꽤 많았다.  ●정황상으로는 어떤가.  -그 현장이 한 10평 그 정도 밖에 되지않는다. 가운데 직사각형의 막힌 조리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으니까 확인사살은 실수할 리가 없다.  ●군출신 아닌 첫 문민 경호실장을 지냈는데, 박종규, 차지절, 장세동, 안현태, 이현우씨등 군 출신의 여러 경호실장들의 노후는 불행했거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 욕심 탓인지, 아니면 권력의 비정한 생리나 속성 때문인지.  -둘다로 본다. 하나는 권력의 속성 탓이다. 당시 여러 사회적 여건이 그 자리에 그분들이 있을 때 여건이 그런쪽으로 갈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각 개인의 성격에도 (다소) 문제가 있지 않겠나 싶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으로서 그런 행로를 답습하지 않아야겠다는 철학을 정립했을 것 같은데.  -거기서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니 많은 상사들을 모시고 이런저런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확신은 안서지만 내가 만약에 과장자리. 처장자리에 갔을 때 ‘이러이러한 것은 내가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어느 직장이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우선 권위라는건 꼭 필요하지만 배타된 권위는 안된다. 예컨대 정부 각료들 회의 때 경호실장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 안에 근접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팀장도 있기 때문에 굳이 국가 정책 논의하는 그 자리에 경호실장이 꼭 들어가서 앉을 필요가 있느냐. 교육도 참 중요한것 같다. 2년 있는 동안 교육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어차피 경호도 국제화되기 때문에 많은 국빈들이 오고 우리 대통령도 1년에 몇 번씩 해외를 순방하고 그런 시대가 돼서 이제 어학 문제라든가 이런것을 체계적으로 해서 경호원들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1년 코스이지만 해외 유학도 보냈다. 지금은 우리 후배들 보면 아주 상당한 수준에 와있다는 생각이다. 통역 필요없이 업무를 직접 협의할 정도까지 상당한 직원들이 와 있다. 경호실이 예전처럼 권위적이지 않다. 한 때는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직이란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주 순수한 전문 조직으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호라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경호하는것이지 인간 누구를 경호하는것 아니다. 적어도 경호실은 그런 생각을 갖고 전문 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월권 등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알력이 생겨 박 대통령 서거라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는 쪽도 있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이 3선후 유신체제로 가면서 장기집권하는 통에 산업화 이끈 훌륭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불행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저는 계장급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치적이나 정책적인 면 잘 모르지만 다 일리가 있다. 다만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저격된 뒤 차지철 실장이 들어왔을때 사회적 환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차 실장이) 장관들을 배석시킨 채 국기하강식을 한다든가 하는 월권도 저질렀다는데.  -주말마다··· 그랬다. 굉장히 힘들 때가 있었다.  ●차 실장의 다른 독특한 면은.  -차 실장은 그런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금전, 돈 에 대해서 상당히 깨끗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아무것도 남겨놓은 게 없다. 돈에 있어선 깨끗했다.  ●최근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했는데 당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사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때가 (박 대통령 집권) 18년 정도 됐을때인데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좀 앞당겨 실현됐더라도 ‘10·26’ 같은 불행한 일은 없었을텐데.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자료를 폐기했다고 남 전총리가 구체적으로 증언했던데.  -2년 정도 뒤에 하야하려고 생각하셨던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그때 그런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 하실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1994년 있을뻔 했는데, 그 때 경호 관련 협상에서 어느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었나.  -어느 단계에 가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냐면 경호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가 다 끝나고 일주일 뒤에 우리 경호 선발팀들이 들어가게 돼 있었을 때였다. 물론 총기 휴대하고. 제일 문제된 게 위성 통신 문제였다. 그것까지도 다 원만하게 잘 협의가 돼서 일주일 뒤에는 최종적으로 선발팀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게 중지돼 버렸다.  ●그 때 김일성 사망을 예상하는 꿈을 꿨다는 비화가 있던데.  -당시 윤여준씨가 안전기획부 제 3특보였고, (별세한) 엄익준이 북한 국장이었다. 나중에 통일부 장관 지낸 정세현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있었다. 오찬하는데 저한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경호실에서 인원을 정리해줘야겠다는 연락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리를 다 했다. 경호 쪽에서 인원 줄이고…. 오찬이 끝나고 제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정상회담 안될거 같다.’라고 말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경호실장이 그런 이야기 하니 (무슨) 특별한 정보있는줄 알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길래 내가 농담처럼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서 관에 입관하는 꿈을 꿨다.’고 얘기했다. 당시에 정책비서관이 ‘맞으면 도사로 모시겠다.’고 농담으로 말하더라.  ●김영삼 대통령에겐 보고했나.  -안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끝났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일주일 전에 꿈을 꿨다. 새벽 3시쯤 깜짝 놀래서 깼다. 집사람을 깨워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하니 집사람이 ‘절대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라. 경호실장이 그런 말 하면 북한가기 싫어서 이야기 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당시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남북관계 큰 진전 있었을 텐데 김일성주석 답방도 있을 수 있고.  -그렇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의, 한반도의 운명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꿈으로 나타날 정도면 신경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 사상 최초로 북한에 가는 남쪽 정상을 경호 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상당했을 것 같다.  -처음 이뤄지는 일이고 민감한 일이었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실 잠이 안왔다. 현장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여건들이 많았는데,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옥쇄할 수 밖에 없다는 각오까지 했었다.  ●요즘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한다는 보도가 잇다르고 있다. 그런데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문제로 답방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호상 여러가지 가정도 있는데 그쪽도 똑같은 가정을 놓고 검토를 할 것 아니겠는가. 아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전부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니까 힘들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꼭 물리적인 위해가 아니더라도 김 위원장 쪽에선 남쪽 보수단체에서 계란이라도 던지지 않나 이런 것 신경쓰는 거 아닌가.  -그런것도 있고. 예를 들어 근접 경호하는 사람 중에 약간 정신적으로, 순간적으로 문제가 발생돼 총이라도 뽑고 한다면 그건 큰일이 생기는 거다.  ●영화 쉬리의 한 장면 떠오르는데.  -그럴 경우 전쟁터가 되는 거다. 사실 초청한 쪽에선 그런 의도 없더라도…. 그게 젤 위험하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그런 생각 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 몇분 모셨나.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등 다섯분을 모셨다. 김종필 총리 인준이 안되는 바람에 (인수인계가 늦어져) 김대중 대통령 취임 초반 (보훈처장으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다.  ●경호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성품을 가까이서 봤을텐데.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건강하다. 그게 아주 공통되는 거 같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이 있었던 분들 같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은 공과가 있겠지만, 30~40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김영삼 대통령도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보스형 리더십의 소유자인가.  -그렇죠.  ●노태우 대통령은 좀 다르지않나.  -좀 다르다. 최규하 대통령도 그렇고.  ●어느 정부든 할거 없이 대통령 아들 때문에 속썩인 일이 많은데.. (김영삼 대통령 아들인) 현철씨 관련해서 경호실장 하면서 김 대통령에게 직언하자 언짢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런거 보다도…. 김현철씨 같은 분 보면 예의도 바르고 총명하고 그렇다. 대인관계도 좋고.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아버님이 두 번씩 대선에 출마할 때 김영삼 대통령과는 부자간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대선 때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모역할을 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저도 한 2년 현철씨를 접촉했지만 예의바르고 대인관계 좋고 그랬는데, 대통령학에 대한 책도 좀 읽어보고 했지만 집권후 1년, 1년반 지나다 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자꾸 모이게 되지않나. 어떤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본의 아니게 본인 생각과는 전혀 관계 없이 그런 문제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다섯 분 대통령 모시면서 보고 느꼈던 일이고, 김현철씨도 그랬던 듯하다. 그래서 그 당시 대통령께 (박관용 비서실장 등을 포함해) 여러분들이 고언을 드렸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씨와 관련한 에피소드중 기억나는 것은.  -박지만씨가 몇년 전 결혼해서 축복해 주기도 했지만, 그때는 육사를 다녔다. 아주 어릴 때인 1974년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신 뒤로 정신적 어려움이 많았고, 그래서 저항적인 그런 쪽으로 한 때 잠깐 바뀌었던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까 약물도 시작하게 됐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오죽 외롭고 했으면 그랬겠나 하고 이해도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더군다나 비명에 가시지 않았나. 자연사로 가신것도 아니고…. 다행스러운건 지금 새 보금자리 만들어 잘 살고 있고….  ●육 여사 서거후 지만군을 돌보라고 박 대통령이 특별히 밀명 준건 없나.  -그런 건 없고, 그 당시에 지만군이 주말에 나오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외출나와서. 대통령이 찾으니까 차지철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지만이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명동에서 찾아서 데리고 갔던 그런 일도 있고…. 나중에 지만씨가 약물 때문에 보훈병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제가 1997년 초에 보훈처장 할 때였다. 지금은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이루고 애도 갖고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권부 근처에 있었으니 일부 측근들이 엉뚱한 권력을 행사하는것을 보는 등 온갖 인간 군상들을 목격했을 듯한데.  -그런 것들이 대통령의 자제분들이나 가까운 친척 분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역시 사람이 젤 중요하다. 사회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지난 대선에 나온 허경영 후보가 공중부양한다는 농담같은 얘기가 나도는 데 무술의 달인으로서 말하자면 원조 공중부양 전문가라는 소문은 사실인가.  -(손을 내저으며) 에이, 지금은 세월이 흐르니 아픈데도 생기고…. 요즘엔 무술 훈련은 안하고 하루에 한시간 반 정도 집에서 열심히 헬스는 하고 있다. 지금 나이에 무슨 헬스 하냐고, 또 얼마나 오래살라고 그러냐고도 하는데 적어도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야 통일되는 것도 보고, 요즘 G20 그러는데 (한국이) G10 되는 건 보고 죽어야 할것 아니냐는 농담도 한다. 열심히 운동한다. 한 시간 헬스가서 운동하면 기분 좋고 정신도 맑아지고 의욕도 생기고 그렇더라.  ●다친 무릎 때문에 고생한다는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 등산은 하지않는다. 가끔 골프할 때는 보호대 차고 한다.  ●공직 땐 골프 안했는데 입문 1년만에 싱글했다는데.  -1998년 3월 중순까지 보훈처장으로 일했다. 그 직후 집사람과 골프 시작해 6개월 만에 80타 쳤다.  ●경호 전문가지만 민주평통 사무총장, 보훈처장 등 남북관계나 안보전문가로서 식견을 사회에 환원할 복안은.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 많이 한다. 1996년 평통 총장 막바지에 장학재단을 하나 만들었다. 장학재단 일이 다 봉사다. 수익사업 하는것도 아니고.  ●강의 같은 것도 하나.  -강의를 그만둔게 한 3년 됐다.대전 배재대에서 경제학부 학생들이 인간관계론을 강의해달라 해서 2년, 경기대에 경호문제 및 대테러 문제로 석·박사 과정 학생들 한 2년 지도했는데 무척 힘들더라.  ●10·26 사태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  -신문이나 언론을 통해 수없이 많이 보도 됐다. 합동 수사팀들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런 사건을 당했던 사람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더 일들이니까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모르잖아요. 총맞고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공식)기록이 가장 중요하다. 작년에 어느 매체에서 1974년 문세광 사건 재조명한다고 했다. 한 11년동안 음성전문가 동원해서 준비했다는데, 어떤 결론을 내놓고 그쪽으로 몰아가니까.  ●경호원이 육 여사 돌아가시게 했다는 추측성 보도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런 뉘앙스로…. 하도 그래서 내가 한 말이 있다. 총알은 절대 거짓말을 안한다. 탄환이 다 있다. 건물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탄환이 없을리 없잖아요. 총알은 각도가 있다. 그렇게 이해시키려 했는데, 자칫잘못하면 왜곡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10.26 사건도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합동수사팀의 조사결과가 젤 정확하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합동 수사팀에 검찰도 다 들어가고 했기 때문에 숨길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고는 벌어질 수가 없다. 물론 원인도 다들 아시잖아요. 차 실장과 김재규씨하고 인간관계도 있고. (유신정권의)권력독점 문제 등도 있고.  ●호사가들은 미국 CIA가 배후조종했다는 설도 제기하는데요.  -(고개를 저으며)원래 그런 사건에 별별 추측이 다 일어나거든요.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나요.  -그분도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성장하셨던 분이지만,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었죠. 외모를 보면 아주 매섭고, 단구에다가 깡마르고, 눈매도 무섭고. 하지만 인정은 많았죠. 예전에 골프를 가끔 나가시면 추울 때나 더울때나 근무자를 꼭 챙기셨다. 아주 서민적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74년도에 영부인 서거한 뒤에 굉장히 외로워하셨죠. 박근혜씨가 영부인 대행하셨지만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죠. 그러다 보니까 국정에만 몰두해서 74년 이후 쭉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단이나 산업단지 조선소 등이 그 때 건설된 거죠. 창원 신도시에서 창원 공단, 풍산에는 풍산금속 등이 하나하나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70년 초만 해도 우리나라가 철모도 하나 못만들었지요. 철모가 간단한거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총알이 맞아도 튕겨나갈 정도가 돼야하는데 그걸 못만들었으니까. 안면도에는 제 2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로켓을 만들었고 타코마라는 회사가 당시 마산에 있었는데 거기서 잠수함 만들기 시작했지요. 허전함을 그런 일로 푸셨던 듯합니다.  ●말년에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유난히 많이 다녔는가요.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가끔 여행하다 보면 그분의 족적을 볼 수 있다. 지금 관광지인 설악동인가요, 그게 그 당시엔 정말 형편 없었거든요. 그런 걸 그 때 다 정비하는 등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양제철소는 본래 아산에 만들려고 결정됐다가 광양으로 바뀌었죠. 그때 모시고 현장에 갔을 때 중국 쪽에서 바람이 부니까 매연이 내륙으로 들어오고 그러니까 전문가들이 건의하고 그래서 현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럼 광양으로 하자고 결정했던 억들이 납니다  대담 구본영 편집국 수석부국장·정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10·26 30주년] 박상범 前경호실장은

    박상범(66) 전 청와대 경호실장은 대통령 경호의 산 증인이다. 1971년부터 20여년간 청와대 경호실에서 대통령을 근접 경호했다. 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을 경호했다. 1993년에는 최초의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맡았다. ●문세광 총격서 대통령 막아내 박씨는 1964년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해병대 장교를 거쳐 청와대 경호실 공채 1기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며 경호인의 길을 걷게 됐다. 1974년 8월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이 쏜 총성이 울리자마자 연단장막 뒤에서 가장 먼저 뛰어나와 박 전 대통령을 몸으로 막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용감하고 충직한 경호원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호실 근무 당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 불사신이란 별칭을 얻었다.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26 사건 현장에서 청와대 경호원 중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는 당시 경호실 수행 계장이었다.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에서 4발의 총격을 받고 10시간가량 방치됐지만 기적적으로 살았다. ●아웅산 참변도 아슬아슬 모면 그는 1983년 미얀마 아웅산폭파사건 당시 수행과장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차량에 동승했으나 참변을 피했다. 북측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폭탄테러를 계획했으나 차량이 예정보다 늦게 도착, 테러를 피할 수 있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총장, 보훈처장을 지냈다. 현재 민주평화통일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역대 정부 대북 밀사 정보기관장이 해결사

    남북정상회담을 위해서는 보안유지가 필수인데도 ‘비밀 접촉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만났다는 설도 있고,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접촉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북측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남측 고위 인사가 접촉했다는 얘기가 비교적 그럴듯하게 흘러나오는 등 제 3차 정상회담 추진설(說)이 고개를 들고 있다. 청와대는 23일 기존의 강한 부정에서 “확인해 줄 수 없다.”며 한발짝 물러나는 모양새다. 역대 정부의 남북 접촉이나 두 차례 정상회담과 비교하면 ‘군불도 지피기 전’에 접촉만 노출된 셈이다. 이와 관련, 남북정상회담을 원하지 않는 쪽에서 고의로 흘렸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동안 특사 혹은 밀사를 통한 남북 접촉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에서 남북관계의 돌파구로 활용됐다. 정치적 파장뿐 아니라 흥행성(?)도 고려되다 보니 보안 유지는 필수였다. 역대 정부마다 주로 정보기관장을 밀사로 가장 많이 활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는 각각 장세동·서동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북측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도 두 차례 극비리에 방북했지만 협상은 ‘박-송’을 통해 이뤄졌다. 당시 박 전 장관이 나선 이유는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뿐 아니라 비밀 접촉을 위장할 수 있는 장점도 작용했다. 문화부장관은 남북접촉 창구가 아니기 때문에 북측 인사를 만나는 게 노출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도 배경이 됐다. 노무현 정부 때의 패턴도 비슷하다. 2006년 10월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가 베이징에서 이호남 북한 참사를 접촉했다. 이듬해 발표된 2차 정상회담은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전권을 위임받아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면서 성사됐다. 당시 김 원장의 카운터 파트가 김양건 통전부장이었다. 이번 남북간 접촉은 북한이 먼저 신호를 보낸 것으로 감지되고 있다. 지난 20일 중국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돌아간 김양건 통전부장의 동선이 남측 언론에 감지된 것도 북측의 의도적 노출이라는 분석도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도마 위에 오른 외국어고] 어문계 진학률 30%도 안돼… 입시기관 전락

    [도마 위에 오른 외국어고] 어문계 진학률 30%도 안돼… 입시기관 전락

    1980년대 태어난 외국어고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정부의 부실한 관리감독이 한몫했다. 사교육 반감을 기치로 내건 여당에서 외고 개혁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외고의 실체와 교육당국, 교육계, 외고 입장을 각각 들어봤다. 외국어고는 고교 평준화 체제 속에서 수월성 교육을 보강하기 위해 도입됐다.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연합고사와 추첨배정을 근간으로 하는 입시제도가 도입됐는데 이 제도 적용을 받지 않는 고교가 특수목적고였다. 실업계, 과학 예술분야를 중심으로 적용되다 1980년대 후반 대원외고를 시작으로 외국어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영어를 제대로 학습할 여건이 안 된 상황에서 어학분야 영재육성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하지만 해외여행 자유화 등으로 외고 설립취지는 퇴색됐고 현재는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기관으로 전락한 상태다. 내년 개교예정인 3개교 등 전체 33개 외고 가운데 졸업생을 배출한 29개 외고의 동일계 진학률은 30% 미만이다. 입학 설명회에 사시, 외시, 행시 합격자 수를 공개하는 외고가 있을 정도로 당초 설립목적이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그러는 사이 외고에 따른 사교육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같은 부작용에 대해 여러차례 문제제기가 있었다. 과학고에 비해 설립목적과 다르게 운영되는 만큼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설립목적이 그렇다 하더라도 고교 3년 동안 학생의 선호도가 바뀔 수 있는 만큼 외고 졸업생들의 진학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제도개선도 부분적이나마 있었다. 지필고사형 면접 금지, 수학 과학 가중치 햐향 조정, 전국 단위 모집에서 학교소재지 광역단위 모집으로의 전환과 서울·경기권 동시전형 등이었다. 하지만 근본 대책은 아니었다. 올해 외국어고 폐지 논란은 정치권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동안 전교조 등 진보성향의 교육단체를 중심으로 외고 문제점이 지적됐으나 이번엔 여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교과부 국감을 통해 구체적 개혁안이 나오면서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여권의 문제제기는 일견 타당하다. 외고가 설립취지와 달리 운영되는 만큼 자율형 사립고 등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권의 이번 문제제기는 외고라는 학교제도 자체보다 외고로 인해 유발되는 사교육비 경감에 목적이 더 있다는 분석이다. ‘사교육비는 반으로, 공교육 만족도는 2배로’ 올리겠다고 공언한 정부로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권의 성공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는 셈이다. 이 같은 한나라당 일각의 문제제기는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자기모순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평준화정책을 추구하던 노무현 정부시절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수월성 교육확대를 위해 외고 확대 등을 촉구했었다. 당시 교육부총리로 야당의 외고 확대 요구에 시달렸던 민주당 김진표 의원은 이번 국감에서 여당의원들의 외고 문제에 대한 해법에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한 바 있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시론] 대통령들의 기록물 제대로 관리해야/설문원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시론] 대통령들의 기록물 제대로 관리해야/설문원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오래 간직해온 선물에는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더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받은 선물이라면 대통령 개인의 역사를 넘어 외교와 국정의 역사가 담기게 된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미국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기록관과 우리나라 대통령기록관은 현재 대통령이 받은 선물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미국 아칸소 주에 위치한 클린턴 전 대통령 기록관에서는 ‘보석에서 젤리빈(사탕의 일종)까지(Jewels to Jelly Bean s)’라는 주제로 레이건 대통령이 즐겨 먹던 젤리빈 병을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가 담긴 애장품과 선물 2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의 대통령기록관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받은 선물과 유품 약 200점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하는데(10월20~29일), 전시물 모두가 유족들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외국을 방문하거나 각국 정상 및 주요 인사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대개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선물은 각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품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 교재가 되기도 한다. 가령 이번에 전시되는 선물 중 존슨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받은 백마 조각상, 김일성 주석이 1972년 7·4공동선언 발표 때 증정한 금강산 선녀 자수, 장제스 전 타이완 총통이 선물한 쌍사자 조각상 등은 1960~70년대 굵직한 외교사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1981년에 제정된 공직자윤리법에 의해 대통령이 일정 가격 이상의 선물을 받으면 신고·제출해야 하며 이에 따라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시 받은 선물들은 이미 대통령기록관에 보존돼 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법률 시행 이전의 대통령이었으므로 신고하거나 제출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었지만, 기증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되고 앞으로 국가기록유산의 일부로 관리될 수 있게 된 것은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물과 달리 대통령기록물이 국가 소유임을 명시하고 국가가 보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된 공공기록물관리법은 1999년에야 제정되었다. 따라서 공공기록물관리법 시행 이전의 대통령 기록물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국가기록원의 역대 대통령기록 소장통계를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대통령 문서는 박정희 대통령 9044건, 전두환 대통령 4782건, 노태우 대통령 2494건, 김영삼 대통령 8214건으로, 연간 문서철 생산량으로 추산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약 50철, 전두환 대통령 100철, 노태우 대통령 50철, 김영삼 대통령 170철 정도가 될 것이다. 그나마도 알맹이 있는 정책문서가 아니라 행정문서가 다수를 차지한다. 많은 문서를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거나 당시 폐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의 찬란한 기록문화유산을 이야기할 때마다 머리 한쪽에서 떠오르는 풍경은 이렇게 초라한 현대사 기록의 현장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전시가 역대 대통령과 가족, 측근들이 기증한 기록 전시로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물론 특정 인물을 중심에 둔 전시가 어쩔 수 없이 ‘공적(功績)’ 위주로 흐를 위험은 있다. 이는 개별 대통령기록관 체제로 운영되는 미국의 대통령기록 전시가 비판받는 대목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록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 말을 하는’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 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이 제대로 얽힌 충실한 기록유산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선물 외에도 많은 문서와 기록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설문원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 [서울광장] 잠룡과 역린/이목희 수석논설위원

    [서울광장] 잠룡과 역린/이목희 수석논설위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년8개월이 지났다. 임기의 절반이 채 안 됐는데 차기 대권 소리가 자주 들린다. 잠룡(潛龍)들의 경쟁이 이전 정권보다 빨라진 중심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자리잡고 있다. 여야를 통틀어 박 전 대표가 지지율에서 독주하고, 현 정권이 ‘박근혜 초기관리’에 실패한 탓이다. 헌정사를 돌아 보면 여권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어김없이 ‘역린(逆鱗)의 원칙’이 작동했다. 현직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지 못하는 대권 주자는 국민지지도가 오르질 않았다. 때문에 애초부터 박 전 대표가 청와대가 하자는 대로 따라갈 리 없었다. 정권을 공유하는 등 굉장한 반대급부가 없으면 박 전 대표의 흔쾌한 협조를 얻어내기 힘들었다. 청와대 초기 정무팀이 그런 상황인식 면에서 부족했던 듯싶다. 박 전 대표를 순치시키기 어렵다면 이 대통령에게 차선은 견제와 균형이다. 근래들어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정운찬 국무총리,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을 당정의 전면에 등장시켜 잠룡의 백화제방을 유도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를 비롯한 광역단체장들이 뛰는 것 역시 청와대는 지켜 보고 있다. 잠룡관리 2라운드는 일단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이 40%대 고공에서 유지되고 있긴 하나 정 대표 지지율이 상승추세다. 정 총리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관심을 한몸에 받는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에게 더욱 힘든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이리저리 뛰는 잠룡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더 빨리 레임덕이 온다. 청와대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은 ‘역린의 원칙’이 박 전 대표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몽준이건, 정운찬이건 최고권력자에게 고분고분해서는 대권의 미래가 어둡다. 지난 6일 관훈토론회에서의 정 대표를 보면 ‘역린의 고민’이 드러난다. 정 대표는 여권의 유력한 대권후보군에서 정운찬·이재오를 뺐다. 정 대표가 박근혜 전 대표에 맞서려면 친이(親李)계 지지가 필요하다. 친이계 지지의 경쟁 대상이 바로 정운찬·이재오인 것이다. 한편으로 정 대표는 세종시, 대북 지원, 선거구제에 있어 청와대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당내 경선을 생각하면 친이계 지원이 절실하지만 국민 지지율 제고를 위해서는 청와대를 공격해야 하는 이율배반에 빠진다. 정 총리도 곧 정 대표와 비슷한 딜레마에 처할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를 견제하기 위한 노신영 총리 기용,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을 견제하기 위한 노재봉 총리 기용, 김영삼 정권에서 이회창을 견제하기 위한 이홍구·이수성 총리 기용. 집권자가 힘을 실어준 총리를 통해 2인자를 견제했던 효과는 한때 반짝했을 뿐이다. ‘불쏘시개 대권주자’는 국민들의 궁극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해찬·한명숙을 총리에 올려 키워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청와대가 잠룡들을 조기에 풀어줌으로써 차별화 경쟁이 나타날 공산이 크다. 여권 내 대권투쟁이 가열되면 국정이란 배가 산으로 간다. 청와대는 ‘박근혜 초기관리’ 실패를 교훈으로 삼기 바란다. 정몽준·정운찬이 끝까지 손 안에 있어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들 나름의 입지를 인정해 주면서도 대통령의 리더십이 훼손되지 않는 묘책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 대통령 스스로가 지지도를 낮추는 실책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대통령은 손쉽게 차별화의 대상이 된다. 이목희 수석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씨줄날줄]방탄 에쿠스/육철수 논설위원

    19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 뉴욕에서 유엔총회 연설을 마치고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이동 중이었는데, 노 대통령이 탄 의전용 벤츠 리무진의 뒷바퀴 하나가 펑크났다. 아찔한 순간에 수행 경호원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리무진은 요동도 없이 시속 80㎞ 속도로 계속 달려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사고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 리무진은 바퀴 4개가 모두 펑크나도 시속 80㎞로 한 시간 이상 주행할 수 있게 제작돼 우리 경호 관계자들을 감탄하게 했다.(박찬수 저 ‘청와대 vs 백악관’) 각국 대통령들이 이용하는 차량은 최고의 안전성을 자랑한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중기관총 공격을 막을 만한 방탄판 차체에다, 차량 밑에서 수류탄이나 지뢰가 터져도 끄떡없다. 불길을 뚫고 나갈 수 있게 방염처리가 돼 있고, 어른 엄지 길이쯤 되는 방탄유리 두께, 폭발물 탐지장치 등 최첨단 방호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요새’란 별명이 달리 붙은 게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타는 ‘캐딜락 원’은 GM이 4년마다 첨단 안전기능을 추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M 직원들은 자국 대통령의 전용차량을 제작한다는 것 자체를 큰 자랑거리로 여긴다고 한다. 며칠전 현대자동차가 방탄 에쿠스 리무진 3대를 대통령 전용차로 무기한 기증해 화제다. 사실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면서 그동안 우리 대통령의 전용차량 하나 만들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대통령들은 BMW나 벤츠를 주로 이용했는데, 이제야 국산 방탄 차량을 타게 됐으니 만시지탄이다. 방탄 에쿠스는 벤츠급 방탄차의 보안기능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워낙 극비리에 제작된지라, 자세한 첨단 안전·보안·방어 기능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제작된 방탄차량의 국산화율이 어느 정도인지, 가격은 얼마인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외제 방탄차량과 성능 및 수준이 비슷하다니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제작 과정에 일화도 꽤 있는 모양인데, 현대차 쪽에서 누구 하나 입도 뻥끗 안 하겠단다. 하기야 대통령 전용차에 비밀이 많아야 신비한 것이지, 죄다 까발리면 누구인들 대통령 하는 맛 제대로 나겠나.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노태우 前대통령 감기 입원

    서울대병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6일 감기로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병원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이 어제 오후 미열 등 가벼운 감기 증세로 검사를 받았다. 현재는 열이 많이 내려 안정된 상태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에도 열이 나고 혈압이 불안정한 증세를 보여 입원한 뒤 5일 만인 31일 퇴원했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강기훈 유서대필’ 18년만에 재심

    1990년대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에 무죄로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이강원)는 동료의 분신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3년을 확정받았던 강씨가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고 16일 밝혔다. 검찰이 항고하지 않으면 강씨의 재심 재판은 한 달 내에 열린다. 강씨가 검찰 조사를 받은 지 18년 만이다.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5월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당시 전국민족민주연합 (전민련)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자 김씨가 남긴 유서 두 장을 전민련 동료인 강씨가 대필했다고 검찰이 기소한 사건이다. 강씨는 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확정받고 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재판부는 “2007년 김씨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 새로운 증거 22쪽 분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재감정해 91년 감정을 번복하며 유서는 김씨 자신이 작성한 것이라고 결론 냈고 이는 형사소송법상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특히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의뢰한 국과수 감정이 절차, 방법상 모든 점에서 1991년 검찰이 의뢰한 국과수 감정보다 신뢰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로는 ▲91년에는 국과수 직원 한 명이 혼자 감정했지만 2007년에는 문서 감정인 5명 전원이 참여했고 ▲91년에는 김씨 필적의 양이 많지 않고 그나마 유서의 속필체와 다른 정자체였지만 2007년에는 전대협 노트 등 감정 대상이 훨씬 풍부해졌으며 ▲91년 감정인이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필적감정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인정했다는 점을 들었다. 검찰은 “결정문을 검토하고 수뇌부와 논의해 재항고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에 검찰이 이의가 있다고 3일 이내 밝히면 상급법원(대법원)이 다시 사건을 심리한다. 정은주 장형우기자 ejung@seoul.co.kr
  • [데스크 시각] ‘오자와 칠드런’과 ‘MB 칠드런’ /곽태헌 정치부장

    [데스크 시각] ‘오자와 칠드런’과 ‘MB 칠드런’ /곽태헌 정치부장

    국방부 장관이나 군 고위 장성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보통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장관을 지낸 경제관료 출신은 “용장도 좋고, 지장도 좋고, 덕장도 좋지만 이보다 더 좋은 건 운장(運將)”이라고 말한다. 운장은 운이 좋아 전투에 나갈 때마다 승리하는 장수를 말한다. 운 앞에는 장사가 없다. 요즘 정치판에는 ‘바람 앞에는 선거운동이 필요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는 조직과 돈이 중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직과 돈의 위력은 줄고 있다. 지금도 접전 지역에는 탄탄한 조직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하다. 하지만 접전 지역이 아닌 곳에는 선거운동이 당락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각종 바람에 따라 선거의 큰 줄기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공약도 별로 필요없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평화민주당의 ‘황색바람’이 불어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DJ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에 실패한 뒤 1987년 대선에 출마, 노태우 전 대통령 과 YS에 이은 3위에 그쳤다. 민주세력의 분열로 군부독재를 연장시켜 줬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총선에서 평민당(70석)은 YS의 통일민주당(59석)에 앞서 제1 야당이 됐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사실상 고 노무현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만든 열린우리당의 인기는 바닥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후보가 열린우리당에 많지 않았다. 그러나 총선 직전에 불어닥친 ‘탄핵바람’을 타고 열린우리당은 수도권에서의 우세를 바탕으로 제1당에 올랐다. 이때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108명의 초선의원이 나왔다. 정치권에서 이들은 ‘탄돌이’로 불렸다. 함량미달도 많았다. 그러나 탄돌이들은 탄돌이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들은 ‘능력’에 따라 당선된 것이지 탄핵이라는 ‘운’에 따라 당선된 게 아니라는 뜻에서였다. 과연 그럴까. 지난해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탄돌이들은 대부분 추풍낙엽 신세가 됐다.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전병헌·김진표·최재성·박영선 의원 등 32명에 불과하다. 실력이나 경쟁력을 갖춘 탄돌이 숫자가 그 정도였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지난달 30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는 여론조사의 예상대로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승리한 민주당 후보들이나 참패한 자민당 후보들이나 선거운동이 따로 필요없었다. 자민당 54년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으로 ‘바꿔’ 열풍이 거세게 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민주당 대승을 주도한 오자와 이치로 대표대행 덕분에 금배지를 단 신인들이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오자와 칠드런’으로 불린다. 4년 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인기를 바탕으로 금배지를 단 83명의 ‘고이즈미 칠드런’들은 이번 선거에서 ‘고이즈미 칠드런’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는 말도 있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런 말을 기자에게 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보니 한나라당 친이(이명박계) 초선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발을 떨면서 가더라. 마치 옛날 민주당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인사를 갈 때처럼. 초선의원이 정책개발에 주력해야지 차기 공천을 생각해서 벌써부터 눈도장이나 찍으려고 하니….” 맞는 말이다. 친이나 친박 가릴 것 없이 건방떨지 않으면서도 국민과 국가를 위한 정책개발에 주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명박(MB) 대통령의 당선에 따른 정권교체의 바람을 타고 당선된 ‘MB 칠드런’ 88명 중 몇 명이나 다음 총선에서 살아남을까. ‘탄돌이’와 ‘고이즈미 칠드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MB 칠드런’의 미래도 없다. 요행은 여러번 오지 않는다. 곽태헌 정치부장 tiger@seoul.co.kr
  • [특파원 칼럼] 중국 건국 60돌과 한·중 관계/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중국 건국 60돌과 한·중 관계/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중국의 건국기념일인 국경절(10월1일)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건국 60주년을 앞둔 중국은 그야말로 축제 무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중국의 상징인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과 이를 관통하는 창안제(長安街)는 이미 말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다. TV는 연일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건국 60주년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60대 인물’ ‘60대 사건’ ‘60대 음악’ ‘60대 ○○’…. 온갖 분야의 ‘60’을 찾아내는 데 여념이 없다. 행사의 윤곽도 드러났다. 하이라이트는 국경절 당일 오전 톈안먼을 중심으로 창안제를 관통하는 대규모 열병식과 시민 퍼레이드. 열병식에는 차세대 첨단전투기인 젠-11 등 비밀 병기도 적지 않게 선보여 중국이 보유한 군사력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계기로 삼을 것으로 알려졌다. 열병식에 이은 시민 퍼레이드에는 20여만명의 시민이 중국 60년의 성과물을 표현해 놓은 60대의 대형 무대차와 함께 창안제를 행진하게 된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는 60년 전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등 혁명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톈안먼에 올라 만면에 흐뭇한 표정을 가득 담고 중국의 발전상을 되새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중국 건국 60년, 엄밀하게 말해 개혁·개방 30년의 성과는 각종 경제통계 수치가 설명하듯이 놀랄 정도이다. 건국 초기 연간 10억달러에 불과했던 무역규모는 무려 2500배나 성장했다. 지금은 하루 무역액만 70억달러에 이른다. 전세계 500여종의 공산품 가운데 210여개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다. 홍콩, 마카오를 포함한 34개 성·시·자치구 가운데 허난(河南)성 한 곳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60년전에 비해 123배 늘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중국의 외교는 “재력이 커지면 목소리도 커진다.”는 자국 속담 ‘차이다치추(財大氣粗)’ 그대로이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호령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국가가 중국과의 관계를 제1순위에 올려놓고 있다. 20~30년 뒤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패권을 장악한다는 시나리오까지 나왔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최근 건국 60년 동안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친 외국인 60명을 선정하는 여론조사에 착수했다. 중국사회과학원과 함께 정치·경제·학술·문화계 등에서 후보 205명을 선정했다. 한반도 인물 가운데는 북한의 김일성 전 주석과 한국의 노태우·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보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 한·중수교를 성사시켜 첫번째로 중국을 방문했다는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중관계 발전에 공헌했다는 점에서 선정됐다는 설명을 붙였다. 여론조사 초반부지만 두 명 모두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첨부된 설명도 다른 외국인사들에 비해 부실해 보인다. 중국 언론이나 인터넷상에서는 여전히 한국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한·중 관계는 미묘하게 이어져 왔다.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중국을 ‘때국’이라고 깔보는 것도 사실이다. 외교적으로는 또 어떤가. 지난 24일은 한·중 수교 17주년 기념일이었다. 한국에서 민간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다. 단장은 자칭 ‘일본통’이자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이상득 의원이 맡았다. 많은 국가들이 ‘친중인사’를 발굴 또는 육성해 중국과의 대화 루트로 활용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G2’ 시대, 우리는 과연 중국에 어떤 국가로 기억될 것인가. 외교력을 탓하기에는 중국의 발전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박홍환 베이징특파원 stinger@seoul.co.kr
  • 남진, 김前대통령 추모곡 ‘님오신 목포항’ 발표

    남진, 김前대통령 추모곡 ‘님오신 목포항’ 발표

    가수 남진이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과 생애를 기리는 추모곡을 발표한다.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민주화선언 직후 제작된 ‘님오신 목포항’이 그것. 남진 소속사에 따르면 이 곡은 당시 외부 압력으로 음반활동을 접었다가 최근 DJ 서거를 계기로 20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님오신 목포항’은 1987년 LP판으로 처음 만들어졌지만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보이콧 당하며 좌절된 바 있다. 이 곡은 1987년 작곡가 이도화 씨의 요청에 따라 음반을 제작했던 가넷 엔터테인먼트의 김성일 대표가 새롭게 편곡작업을 한 것으로 9월 초 정식 공개될 예정이다. 남진은 DJ의 정치적 기반인 목포가 고향이다. 남진은 이번 추모곡이 기존의 ‘목포의 눈물’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못지 않은 대중적 가요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남진은 “이번에 새로 편집을 하긴 했지만 20년전 작업한 음악인지 의문이 들 만큼 앞서간 편곡과 멜로디”라며 “당시 재야인사를 상징하는 ‘인동초 노래’로 지목받아 어쩔수 없이 활동을 중단했지만 좋은 반응이 있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당시 음반을 제작했던 김 대표는 “대통령이 되기 직전이나 직후에도 음반을 낼까 생각해봤지만 핍박받던 시절에 만든 곡이라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은 자연스럽게 추모곡 형태로 불릴 수 있을 것 같아 음반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좋은 사람 서울신문NTN 박영웅 기자 her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국가발전에 가장 기여한 전직 대통령은 박정희

    국가발전에 가장 기여한 대통령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뽑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는 지난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조사한 결과, 박 전 대통령이 수위를 차지했다고 26일 밝혔다.  국가발전에 가장 기여한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53.4%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25.4%로 2위를 차지했다.그 뒤를 노무현 전 대통령(12.4%), 전두환 전 대통령(2.2%), 윤보선 전 대통령(1.8%), 이승만 전 대통령(1.6%) 노태우 전 대통령(1.3%), 김영삼 전 대통령 (1.3%), 최규하 전 대통령(0.5%)이었다.  지역별로는 전남·광주(47.5%)와 전북(47.6%) 지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위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모든 지역에서 박 전 대통령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박 전 대통령은 연령대가 높을수록 높은 지지를 받았다.50대 이상이 65.5%로 가장 높았고, 40대(59.4%), 30대(44.8%), 20대(36.7%) 순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연령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40대(9.8%)와 50대 이상(4.9%) 응답자보다 젊은층인 20대(25.1%), 30대(20.4%)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민주당(53.9%)과 민주노동당(35.8%) 지지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1위로 꼽았지만,친박연대(87.9%)와 한나라당(80.1%), 자유선진당(59.5%), 창조한국당(57.1%)을 지지한 사람들은 박 전 대통령이 국가발전에 가장 기여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을 했다.표본오차는 95%이고 신뢰수준에서 ±3.1%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中에 간도협약 무효통보 못한 건 역사적 책임 회피”

    오는 9월4일은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만주의 철도 및 탄광채굴권 등 이권을 조건으로 간도를 중국 영토로 인정하는 간도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간도는 19세기 말까지 조선이 영유권을 행사했고, 현재도 조선족 동포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우리의 고토로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땅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역대 위정자 누구도 간도협약의 무효를 중국 정부에 통보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국제법상 영유권 시효 100년설은 전혀 근거가 없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록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 무지 또는 책임회피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한국간도학회(회장 이일걸)가 2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간도협약 체결 100년의 재조명’ 학술대회는 역대 정부의 간도정책 분석을 통해 간도협약의 무효를 중국 정부에 통보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자리였다. 이승만·장면·박정희 정부의 간도정책을 분석한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중국과 대립관계에 있어 간도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였으나 이 시기에 이승만 정부가 간도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그 이후의 정권들도 연장선상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부는 통일한국을 대비해 국회차원에서 간도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자료집 발간팀을 구성하는 등 간도사업을 추진했으나 중국 정부에 간도영유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인식은 갖추지 못했다.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의 간도정책을 분석한 이일걸 회장에 따르면 전두환 정부는 간도문제에 관심조차 없어 뚜렷한 간도정책을 수립할 수 없었고, 중국과 직접 수교의 장을 연 노태우 정부는 수교가 지연될 것을 우려해 간도문제 해결을 회피했는데 오히려 수교 이후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회장은 “김영삼 정부 역시 역대 정부가 취한 대 간도정책의 기조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간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김우준 연세대 교수는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의 간도정책 분석’에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내부적으로 간도협약의 법률 효력은 무효라는 입장을 정리하는 등 간도문제에 대한 인식에 진전이 있었지만 국제 정세를 고려해 중국에 간도협약 무효를 통보하는 정책실행은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04년 김원웅 의원의 주도로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이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됐으나,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폐기됐다.김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간도정책에 대해선 “기업인 시절과 서울시장 시절 적극적으로 간도문제를 언론에 피력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 취임 이후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며, 남은 임기 동안에도 간도에 관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다만 최근 국회 차원에서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 주도하에 여야의원들이 서명한 ‘청·일 간도협약 무효안’이 9월4일 이전에 상임위원회에 제출될 것으로 보여 추이가 주목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특별기고-김대중 전대통령 영전에 부쳐] ‘대화의 힘’ 믿은 뼛속깊은 휴머니스트

    [특별기고-김대중 전대통령 영전에 부쳐] ‘대화의 힘’ 믿은 뼛속깊은 휴머니스트

    그는 ‘대화의 힘’을 신봉했다. 뼛속깊이 민주주의자였다. 정치의 정도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을 향해 대화와 설득으로 합의와 타협을 이루는 과정이라 했다. ‘공산국가를 향한 억압과 고립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로지 개방과 대화만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흔들림없이 믿었다. 역사발전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철의 장막, ‘중공’의 빗장을 열게 한 것은 닉슨이 먼저 찾아가 대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감옥으로 몰아 넣고 생명을 위협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7·7선언’을, 그 대화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납치와 투옥, 감시와 연금 등으로 자신을 모질게 탄압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독재정권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과의 ‘적대적 경쟁’이 아니라 ‘형제적 경쟁’을 원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경쟁이 아니라 경쟁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원했다. 늘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을 갈구했다. 감옥 안에서도 그랬다. 그는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었다. 그런데도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어 터지는 혹한의 감옥에서도 그는 결코 독재자를 증오하지 않았다. 대신 한달에 한 장만 주어지는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가족과 대화를 시도했다. 엽서 주소란까지 촘촘히 메운 사연은 그가 참으로 자잘하고 섬세한 여성적 심성을 가진 남성임을 보여 준다. 이 ‘양성적’인간은 놀랍게도 영하의 감옥에서 오히려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경지에 닿는다.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는 사랑의 기술을 터득한다. ‘대화지상주의자’인 그는 1980년대에 택할 수밖에 없었던 ‘장외투쟁’을 싫어했다. 그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사랑했다. 대의정치가 맺은 국민과 대표자 간의 계약과 신의를 존중하고자 했다. 그래서 재임기간에는 거부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너무도 부당했지만 국회의 결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 역시 그의 오랜 인내의 결실이다. 그는 북한이 거부하는 조선일보 기자의 방북취재와 김일성 주석이 잠들어 있는 금수산궁전 참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평양으로 향했다. 그는 오히려 평생 동안 자신을 음해하고 괴롭힌 보수신문의 취재허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누구 못지않은 빼어난 논리와 달변을 갖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에 머무는 내내 북한 지도부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그는 극도로 자신의 말을 아꼈다. 대화를 위한 선결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좌우명처럼 여겼다. 친지들에게 자주 붓글씨로 써주었다. ‘때로 잘못 판단하기도 하고 흑색선전에 현혹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이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었던’ 그는 오로지 국민의 힘에 철저히 의지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사면복권되었을 때 그는 국민에 대한 그의 무한신뢰를 확인했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는 ‘가난은 나라가 구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소외되고 뒤처지는 이들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기초생활보장제’는 간난신고를 거듭했다. 재원도 부족하고 일각에서는 이념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굽히지 않았다. 이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굶거나 헐벗는 이들은 없다. 휴머니스트인 지도자의 힘은 그래서 존귀하다. 그는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는 왕조의 수준을 ‘공화국’으로 변환시켰다.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군사정권이 조작하고 유포한 거짓들이 아직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더 기다려야 할까? 만인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소수를 오래 속일 수 있지만 만인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믿자. 한 시대 대중의 소망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이를 두고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김대중, 그는 진정 민주주의와 평화를 꿈꾸는 우리들의 캡틴이었다. 실로 너무 멀고도 험한 길을 외롭게 걸어온 당신. 이제 더는 음해와 핍박이 없는 하늘에서 부디 평안을 누리소서.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상임위원
  • [열린세상] ‘트랜스 DJ’의 시대를 열어야/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열린세상] ‘트랜스 DJ’의 시대를 열어야/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해 국민이 비통에 잠겼다. 운명적으로 비슷한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떠나보내게 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빨갱이’ ‘좌익 용공분자’ ‘후광’(後廣) ‘인동초’(忍冬草) ‘토머스 모어’ ‘동교동’ ‘행동하는 양심’ ‘아시아의 만델라’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햇볕정책’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등은 김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수사(修辭)들이다. ‘빨갱이’와 ‘좌익 용공분자’는 여운형 선생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일시 몸담았던 인연으로 평생의 꼬리표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 오히려 그는 우파 반동세력으로 몰려 복역한 바 있다. 1957년 가톨릭 교회의 영세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다. 15세기말 영국의 대법관과 하원의장으로 활약했고, ‘유토피아’(1516)의 저자이기도 한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데 불응, 반역죄로 처형된 인물이다. 토머스 모어는 1935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諡聖)됐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우리 역시 김 전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기를 희망한다. ‘빨갱이’에서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 1971년 선거 지원유세서 그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1973년 유신독재 치하 정보요원들에게 납치되어 두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군사정권이 사형선고를 내릴 때마다 그는 불굴의 투지로 일어섰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인동초’(忍冬草)였고, ‘행동하는 양심’과 ‘아시아의 만델라’가 덧붙여졌다. 그리고 5·18 내란 음모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또 한 번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7년 ‘서울의 봄’과 6월 민중항쟁으로 얻어낸 민주정권의 수립 기회를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지연시킨 책임은 작다고 할 수 없다. 5년 후 노태우 정권 후계자로 지명된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그를 영국으로 떠나보내면서 지지자들 역시 오열하고 세상을 등졌다. 우여곡절 끝,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후락과 전두환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뇌리에 사무친 정적(政敵)의 이름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 같은 용서와 화해의 노력은 서거 직전 병상에까지 계속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1998년의 외환 위기사태를 3년 만에 극복했으며, 우리나라를 인터넷 강국으로 육성하고 각종 인권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2000년 6월,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햇볕정책으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빛나게 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으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지 못했던 것은 실책에 속한다. 자신의 햇볕정책을 전방위로 수행했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을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도 실책이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이념적으로만 해석하여 민주당을 거리투쟁으로 내몰았던 것도 구시대의 이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독도문제를 지나치게 양보하고, 오는 9월3일로 100년이 만료되는 청·일 간도협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도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트랜스 DJ’, 그것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를 통하여 그의 유지를 존중하되 그의 실책과 한계를 지양하면서, 내일의 삶에 필수적인 새로운 지혜를 창조하는 ‘희망의 변증법’을 펼치는 일이다. 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 역대 정부중 경상 흑자 가장 많이 늘어난 때는?

    역대 정권 중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은 경제가 파탄 난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 경상흑자 906억弗…물가도 안정 19일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 따르면 고 김 전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8~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1천40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노무현 정부가 연평균 132억7천300만달러로 뒤를 이었고 노태우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각각 10억6천500만달러와 5억7천100만달러였다. 김영삼 정부는 5년간 432억7천600만달러 줄어들면서 연평균 감소액이 86억5천500만달러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상흑자에 따른 외화 유입 증가로 외환보유액도 많이 늘어났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말 204억600만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말에는 1천214억1천300만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천10억700만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202억100만달러로 노무현 정부의 281억6천2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물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부 때 7.4%로 가장 높았고 전두환 정부 6.1%, 김영삼 정부 5.0% 등이었다.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권들보다 크게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평균 4.5%로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높았지만, 전두환 정부(8.7%), 노태우 정부(8.4%), 김영삼 정부(7.1%) 등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998년 이후 성장률은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4년 평균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전두환 정부의 47.2%보다 높았을 뿐 김영삼 정부(60.3%), 노무현 정부(60.0%), 노태우 정부(58.4%)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국제거시금융실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대응해 대외적인 안정에 신경을 쓰면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고금리 여파로 물가도 비교적 안정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확대한 여파로 경기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고용이 감소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부도’에서 ‘IMF 모범생’으로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적 성과를 꼽으라면 단연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했다는 점이다.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술(IT)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게 IMF 조기졸업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며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서 큰 버팀목이 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각종 위기설이 불거질 때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은 루머를 일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황 연구원은 “당시에 외환보유액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지난해 금융위기 때 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최악의 국면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로 혹독한 감원과 구조조정으로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국민이 이를 감내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도록 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선임연구원은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고 순식간에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재앙’이 덮쳤는데도 사회적인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조기에 수습한 것은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밖에 기업 재무구조, 고용 유연성, 공공부문 개혁 등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한 점도 김 전 대통령이 거둔 큰 성과로 꼽혔다. 연합뉴스
  • [김 전대통령 서거] 내란음모 연루 정동년씨 술회

    “DJ는 올바른 역사관을 지닌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19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초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겪었던 정동년(66·당시 전남대 복학생 대표)씨는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더 오래 살아 주시길 바랐는데 안타깝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는 이 사건 이후 DJ와 광주 재야·시민단체의 가교역할을 했다. 정씨는 1980년 5월18일 자정무렵 집으로 들이닥친 5~6명의 남자에 의해 보안사 지하실로 끌려갔다. 시내에서는 시위 군중과 계엄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군인들의 발길질과 각목 세례를 받고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500만원을 받은 사실과 사용처를 추궁받았다. 합수부의 계속되는 고문에 상무대 영창 화장실로 들어가 군용 숟가락으로 자해까지 했다. 1주일째 이어진 고문으로 그해 5월 말쯤 DJ로부터 500만원을 받아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등에게 나눠 줬다고 ‘진술’하면서 고문은 끝났다. 서울의 봄 기간인 1980년 4월 전남대 복학생 대표 자격으로 정씨는 DJ의 강의 초청을 위해 동교동을 방문했다가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건으로 DJ와 함께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정씨는 재야활동을 하면서 DJ와 광주 지역사회의 가교역할을 했다. 정씨는 “1987년 대선에서 야당후보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평민당과 DJ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며 “이 때 광주지역 재야도 이탈 조짐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돌이켜 보면 우리가 그분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많은 쓴소리와 비판을 가했다.”며 “15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남북문제와 대미 외교 등을 지켜 보면서 그가 정말 위대한 지도자란 걸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李대통령 “큰 정치 지도자 잃었다”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청와대와 전직 대통령, 각 정당은 일제히 충격 속에 애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면서 “민주화와 민족 화해를 향한 고인의 열망과 업적은 국민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이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생전의 뜻이 남북 화해와 국민 통합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쉽고도 안타깝다.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며 유족들에게 조의를 전했다. 그는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보고를 받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지난 수십년간 파란 많은 정치역정을 걸어왔는데, 이제 천주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기관지 수술로 말하기가 어려운 노태우 전 대통령은 TV 방송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충격적이고 애통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면서 “생전에 이루고자 하셨던 숭고한 뜻이 국민 화합과 남북간 평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갖고 조문단 구성 등 대책을 논의했다.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은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황망하고 허전하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더불어 민주당의 뿌리와 정신인 두 전직 대통령을 잃었다. 국민의 참담한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고 논평했다. 정세균 대표를 비롯해 당 지도부는 당초 이날 경북 포항에서 예정됐던 장외투쟁 등 외부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어 장례 대책 등을 논의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논평에서 “순탄치 않았던 정치역정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셨던 김 전 대통령은 끝까지 왕성한 노익장을 보여주셨다.”면서 “고인이 남긴 많은 족적과 업적은 후대의 역사가 바르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시대의 큰 별이 졌다.”면서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유훈을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지훈 허백윤기자 k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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