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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한국판 전(專)과 홍(紅)의 전쟁/오일만 경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한국판 전(專)과 홍(紅)의 전쟁/오일만 경제부 차장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국민들의 배를 곯리면 망하게 돼 있다. 소련식 사회주의가 해체되고 중국식 사회주의가 번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탈출시키는 유일한 길은 경제성장밖에 없다. 후진국일수록 리더십의 요체는 어떻게 빨리 효율적으로 가난에서 탈출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런데 문제는 좀 살 만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늘어난 파이를 어떻게 자르고 어떻게 나눠주느냐 하는 문제, 즉 분배의 문제 때문이다. 이것은 용의 역린(逆鱗·임금의 노여움)을 건드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배 고픈 것보다 배 아픈 것을 못 참는 우리 민족의 특성상 정권의 향배를 좌우할 수 있는 뇌관이 되기도 한다. 분배와 성장을 놓고 숱한 토론과 논쟁이 있어 왔고 권력투쟁으로까지 비화되곤 했다. 이런 싸움을 흔히들 홍(紅)과 전(專)의 전쟁이라고 한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싸움터는 신중국이었다. 홍(紅)은 정신, 즉 이념(이데올로기)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평등과 분배를 강조한다. 반면 전(專)은 물질을 중시하는 성장 제일주의와 맥이 닿는다. 후에 홍(紅)은 좌파의 뿌리가 됐고, 전(專)은 우파의 철학이 됐다. 마오쩌둥은 홍(紅)의 사상으로 중국 혁명을 이끌어 신중국을 건설했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이란 재앙을 겪으면서 파국을 맞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덩샤오핑은 전(專)의 사상으로 경제대국을 일궜지만 무서운 후유증을 남겼다. 심한 부정부패와 세계 최고 수준의 양극화 국가가 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우리 역시 전과 홍의 치열한 갈등과 대결 속에서 성장한 나라다. 18년간의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노태우의 5, 6공 시대는 성장 제일주의가 압도한 시기였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김대중-노무현의 시대는 분배와 복지가 정책의 우선순위가 됐다. 특히 386 운동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노무현 정권의 이념 과잉성과 개혁 피로증은 경제 대통령을 표방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 일조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정치·경제는 이처럼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 속에서 갇혀 20세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였다. 특히 맹위를 떨친 ‘안철수 신드롬’은 기존의 정치·경제 구도 자체의 대대적 변신을 요구하는 압력이라고 볼 수 있다. 언론들은 이를 2040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기존 시스템의 단순한 수리 정도가 아니라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강렬한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600만명에 달하고 이들 가운데 대졸 이상의 학력자가 30%인 180만명을 넘어선 시점이다. 중산층 몰락과 양극화의 심화는 국민들 대다수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가져왔고 이들의 절망은 내년에 더 큰 태풍으로 몰아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그동안 그럭저럭 유지해 왔던 우리의 갈등 해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이미 무력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홍과 전으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논쟁은 20세기의 닫힌 정치프레임의 산물이다. 사회의 기능이 고도로 분화되는 상황에서 극심한 변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해 국가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할 대목이다. 지난해 특별한 해법도 도출하지 못한 채 우리 사회를 양분시켰던 복지 논쟁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새로운 정치 프레임은 열린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전과 홍의 융합, 즉 보수와 진보의 소통이라고 말한다. 대표적 벤치마킹 대상으로 ‘브라질의 룰라 모델’을 꼽는다. 그는 좌파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우파의 경제전략도 과감하게 수용했다. 대규모의 빈민 구제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양극화 확대를 막으면서 중산층을 두껍게 해서 장기적인 경제성장의 틀을 마련했다는 평이다.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 프레임을 원한다. 강력한 카리스마보다는 소통을 중시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보수와 진보의 조화를 이뤄내는 리더십을 갈망한다. 이것이 바로 시대정신일 것이다. oilman@seoul.co.kr
  • [씨줄날줄] 자수성가 부자/곽태헌 논설위원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현대그룹 주요 계열사의 CEO를 지냈지만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였다. 이 대통령이 고(故) 정주영 그룹 명예회장을 대신해 청와대에서 열린 재벌 회장 모임에 대타로 참석하자 모 그룹 회장이 “당신이 왜 여기에 왔느냐.”고 핀잔했던 것으로 재계에는 알려져 있다. 그 재벌 회장은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자, 보복을 당할까 좌불안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피해를 본 것은 아직까지는 없다. 모 그룹 회장이 이 대통령에게 이같이 말한 것은 재벌의 힘, 재벌의 폐쇄성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대기업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사실상 재벌 오너들의 모임이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통하는 S그룹 회장도 재벌 모임에서는 약간 소외돼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것도 재벌의 폐쇄성, 그들만의 리그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많고 계열사도 많으면 보통 재벌 회장으로 불리지만 처음에는 맨손으로 일굴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집단을 일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자수성가한 부자의 대명사로 통한다. 20년 전쯤 정 명예회장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자 노태우 정부는 현대그룹을 겨냥해 세무조사 등 온갖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계열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중공업의 한해 순이익은 삼성그룹 전체의 순이익과 비슷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등 잘나가는 계열사들이 현대그룹에는 즐비했다. 반면 삼성그룹에서는 삼성생명과 삼성물산 정도가 그나마 의미 있는 순이익을 내는 정도였다. 재벌닷컴이 1813개 상장사와 1만 4289개 비상장사의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주식·배당금·부동산 등 등기자산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흔히 억만장자(billionaire)의 기준으로 삼는 1조원 이상의 부자는 25명이었다. 이중 대(代)물림에 의존하지 않은 자수성가형 부자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비롯해 6명. 박 회장의 재산은 2조 4683억원으로 6위였다. 부모의 능력이나 부모의 대물림에 의존하지 않은 자수성가형의 부자가 많아야 열린 사회이고 희망이 있는 사회다. 보통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존 재벌들의 폐쇄성을 경고하는 의미에서도 앞으로 제2, 제3의 박현주가 많이 나와야 한다. 신흥부자들은 돈도 제대로, 멋있게 써서 기존 재벌과는 또 다른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청남대 대통령길’ 방문객에 인기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충북 청원군 문의면)가 걷기 명소로 뜨고 있다.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덤으로 전직 대통령들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둘레길이 있어서다. 4일 충북도에 따르면 올해 초 청남대 주변에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 5명의 이름이 붙여진 산책로가 만들어졌다. 전직 대통령들이 청남대에 묵으면서 즐겨 찾던 곳에 의미를 부여해 이정표를 설치하고 꽃을 심는 등 환경을 정비한 것으로 총 길이는 8㎞다. 5개 코스 가운데 가장 긴 2.5㎞의 ‘김대중 대통령길’은 청남대 관리동에서 전망대, 초가정으로 연결된다. 소요시간은 60분 정도. 이 초가정에 앉아 주변에 펼쳐진 대청호를 바라보면 마치 섬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리가 불편했던 김 전 대통령은 골프카를 타고 초가정에 와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전두환 대통령길’은 청남대 본관에서 오각정, 양어장으로 이어지는 2㎞ 구간으로 30분 정도 걸린다. 양어장은 청남대 설립 초기 겨울철에 스케이트장으로 활용됐던 곳으로 전 전 대통령이 스케이트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대통령길’은 조깅 팬이였던 그가 수행원들과 달렸던 1㎞ 구간이다. 방문객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청남대관리사업소 정진원 운영과장은 “현재 추세라면 올해 방문객이 지난해의 62만명보다 10만명 정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길이 관광객 유치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주말 하루 방문객 5000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산책로를 걷고 싶어 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대한지방행정공제회가 둘레길 걷기행사 장소 선정을 위해 회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이 길이 1위로 선정돼 지난달 24일 공무원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걷기행사를 갖기도 했다. 도는 청남대가 걷기 명소로 인기를 얻자 내년에 ‘이명박 대통령길’을 만드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또한 올해 안으로 전직 대통령들의 가족과 당시 정권 실세들을 초청해 청남대에서 걷기 행사를 개최한다는 계획이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내 비자금 수사하면 퇴임 후 망명 각오하라”

    “내 비자금 수사하면 퇴임 후 망명 각오하라”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신한국당이 ‘DJ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직후 김대중(DJ·왼쪽 얼굴)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김영삼(YS·오른쪽) 당시 대통령에게 “검찰이 수사를 하면, 김(YS) 대통령은 퇴임 후 망명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97년 대선직전 DJ, YS에 중립 요구 ‘DJ 정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는 2일 발행된 중앙선데이 기고를 통해 “DJ는 1997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김광일 당시 청와대 정치특보를 만나 이같이 말했다.”며 “한마디로 말해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중립을 지키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고 기술했다. DJ는 또 “(검찰이) 수사를 해도 선거가 끝난 다음에 해라. 나도 더 이상 당할 수는 없다.”며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도 김 대통령과 전면 투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김 특보에게 말했다고 장 대표는 덧붙였다. 그는 DJ가 김 특보를 만난 뒤 자신에게 이같이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DJ는 김 특보에게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이 중립을 표방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해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김 대통령의 퇴임 이후 안정적인 생활을 책임지고 보장하겠다.”며 강온 양면책을 썼다. DJ는 김 특보를 만난 다음날인 17일 YS에게 경제 침체와 관련한 영수회담을 제의했는데, 아무리 힘이 빠졌어도 현직 대통령인 이상 어떻게 해서든 YS를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게 DJ의 판단이었다고 장 대표는 회고했다. ●DJ “광주 비롯 전국서 민란 일어날 것” 그는 또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19일 오전 10시 30분 비밀리에 YS를 만나 ‘DJ 비자금 수사 불가’ 이유를 설명하고 YS로부터 ‘검찰 생각이 맞다.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뒤 21일 기자회견을 열어 ‘신한국당의 DJ 비자금 의혹 고발사건 수사를 15대 대선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선언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은 DJ가 김 특보를 만나기 전인 7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DJ가 동화은행에 근무하던 처조카 이형택을 통해 67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고,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1990년과 1991년 사이에 적어도 7억 3000만원을 추가로 받았다.”고 폭로했다. 강 총장은 이어 10일에도 재차 기자회견을 열어 DJ가 10여개 기업들로부터 134억 7000만원을 받았다고 폭로한 뒤 DJ를 검찰에 고발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장성민 “DJ, YS에 내 비자금 수사하려면 퇴임 후 망명 각오하라”

    장성민 “DJ, YS에 내 비자금 수사하려면 퇴임 후 망명 각오하라”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신한국당이 ‘DJ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직후 김대중(DJ)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에게 “검찰이 수사를 하면, 김(YS) 대통령은 퇴임 후 망명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DJ 정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는 2일 발행된 중앙선데이 기고를 통해 “DJ는 1997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김광일 당시 청와대 정치특보를 만나 이같이 말했다.”며 “한마디로 말해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중립을 지키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고 기술했다. DJ는 또 “(검찰이) 수사를 해도 선거가 끝난 다음에 해라. 나도 더이상 당할 수는 없다.”며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날 지도 모르고, 나도 김 대통령과 전면 투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김 특보에게 말했다고 장 대표는 덧붙였다. 그는 DJ가 김 특보를 만난 뒤 자신에게 이같이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DJ는 김 특보에게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이 중립을 표방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해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김 대통령의 퇴임 이후 안정적인 생활을 책임지고 보장하겠다.”며 강온 양면책을 썼다. DJ는 김 특보를 만난 다음날인 17일 YS에게 경제 침체와 관련한 영수회담을 제의했는데, 아무리 힘이 빠졌어도 현직 대통령인 이상 어떻게 해서든 YS를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게 DJ의 판단이었다고 장 대표는 회고했다.  그는 또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19일 오전 10시 30분 비밀리에 YS를 만나 ‘DJ 비자금 수사 불가’ 이유를 설명하고 YS로부터 ‘검찰 생각이 맞다.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뒤 21일 기자회견을 열어 ‘신한국당의 DJ 비자금 의혹 고발사건 수사를 15대 대선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선언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은 DJ가 김 특보를 만나기 전인 7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DJ가 동화은행에 근무하던 처조가 이형택을 통해 67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고,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90년과 91년 사이에 적어도 7억 3000만원을 추가로 받았다.”고 폭로했다. 강 총장은 이어 10일에도 재차 기자회견을 열어 DJ가 10여개 기업들로부터 134억 7000만원을 받았다고 폭로한 뒤 DJ를 검찰에 고발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김문수 ‘독설’ 논란

    김문수 ‘독설’ 논란

    김문수 경기지사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대권 행보와 관련해 논란이 예상된다. 김 지사는 2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한반도선진화재단 주최 ‘한선국가전략포럼’ 초청 특강에서 이 대통령의 측근 비리와 관련, “굉장히 징조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대한민국을 누가 만들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에서 김 지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결국 총 맞아 죽었고 그 부인도 총 맞아 죽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면서 “이 대통령도 굉장히 징조가 좋지 않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왜 이 지경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또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울산, 창원, 구미, 포항 등은 대학과 일자리가 있는, 잘 계획된 도시들인 반면 분당과 일산, 평촌 등 노태우 시대 신도시는 베드타운으로 불리고 이 대통령의 신도시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40년간 묶어 놓은 그린벨트를 풀어서 만든 보금자리주택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김 지사는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해서도 “한나라당은 국회의원 자리 하나 얻으려고 하거나 나경원 의원을 당선시키는 문제만 생각하지 말고 손해를 보더라도 대한민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촛불집회 등 시민들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있다.”면서 “지식인들은 비판만 하지 말고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주인이며 통일 강대국을 만드는 창조적 주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국내외 인사 175명 ‘노태우의 추억’

    국내외 인사 175명 ‘노태우의 추억’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던 국내외 인사 175명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각자의 ‘추억’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노태우 대통령을 말한다’(동화출판사 펴냄)이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정해창 전 대통령 비서실장, 최석립 전 대통령 경호실장 등을 비롯해 제6공화국 각료, 국회의원, 청와대 출입기자, 고향 지인 등의 육성이 담겼다.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등 외국 정상들도 가세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보낸 편지에서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한국 땅에서 철수시키는 데 동의한 노 전 대통령의 현명한 결정에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잊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이 현 위치에 오르기까지 가장 큰 기여를 한 국가원수는 박정희, 김대중, 그리고 노태우 세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학을 연구하는 함성득 고려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은 그의 소극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노태우 정권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전 장관은 “힘없고 가난한 신설 문화부에 추임새를 보낸” 노 전 대통령을 회고하며 “생채기 난 문화를 어루만져 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따뜻한 손길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그는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얼굴부터 창백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일에는 관용이 없었다. 한번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가던 비서를 내쫓았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비서들은 늘 긴장했다. 운전 비서는 더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프닝도 가끔 벌어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화장실에 가려고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다 보니 문이 닫혀 버렸다. 운전 비서는 ‘쌩’하고 출발했다. 골프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재연됐다. 도어맨이 차문을 열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탈 준비가 안 됐다. 도어맨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운전 비서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 버렸다. 주인공은 이춘구 전 의원. 고인이 됐다. 향년 78세. 육사 14기로 4선 의원을 지냈다.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12·12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군내 신망이 두터웠기에 국보위에 차출됐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척결했다. 5·6공 인사도 몰아냈다. 고인만은 예외였다. 신한국당 대표로 중용했다. 그는 전·노 구속 이후 정계를 떠났다. 인간 도리를 내세우며.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청렴, 강직, 직언, 원칙, 소신.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다. 서투른 글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전 대표는 인자하지도 않다.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이다. 마냥 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적이 없다. 사사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마무리도 깔끔하다. 판공비를 반납한 일화는 많다. 정계 은퇴 후 후원금 사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엔 애도의 글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미국 시애틀 교민이 올린 글이다. 사령관 시절 부하 장교라고 한다. 회상이 담겨 있다. 훈련 후 자축 회식 때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셨다. 배가 불러 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령관은 전투복 상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입이 아닌 몸으로 지휘하던 사령관이라는 회고도 곁들였다. ‘충성!’이란 말로 끝맺는다. 또 다른 뉴스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아예 고위층의 단골 메뉴다. 이젠 일반 국민들도 늘었다. 5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러한가. 고인이 새삼 크게 보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그는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얼굴부터 창백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일에는 관용이 없었다. 한번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가던 비서를 내쫓았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비서들은 늘 긴장했다. 운전 비서는 더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프닝도 가끔 벌어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화장실에 가려고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다 보니 문이 닫혀 버렸다. 운전 비서는 ‘쌩’하고 출발했다. 골프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재연됐다. 도어맨이 차문을 열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탈 준비가 안 됐다. 도어맨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운전 비서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 버렸다. 주인공은 이춘구 전 의원. 고인이 됐다. 향년 78세. 육사 14기로 4선 의원을 지냈다.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12·12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군내 신망이 두터웠기에 국보위에 차출됐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척결했다. 5·6공 인사도 몰아냈다. 고인만은 예외였다. 신한국당 대표로 중용했다. 그는 전·노 구속 이후 정계를 떠났다. 인간 도리를 내세우며.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청렴, 강직, 직언, 원칙, 소신.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다. 서투른 글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전 대표는 인자하지도 않다.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이다. 마냥 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적이 없다. 사사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마무리도 깔끔하다. 판공비를 반납한 일화는 많다. 정계 은퇴 후 후원금 사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엔 애도의 글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미국 시애틀 교민이 올린 글이다. 사령관 시절 부하 장교라고 한다. 회상이 담겨 있다. 훈련 후 자축 회식 때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셨다. 배가 불러 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령관은 전투복 상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입이 아닌 몸으로 지휘하던 사령관이라는 회고도 곁들였다. ‘충성!’이란 말로 끝맺는다. 또 다른 뉴스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아예 고위층의 단골 메뉴다. 이젠 일반 국민들도 늘었다. 5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러한가. 고인이 새삼 크게 보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고인이 된 저승사자 이춘구

    고인이 된 저승사자 이춘구

     그는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얼굴부터 창백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일에는 관용이 없었다. 한번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가던 비서를 내쫓았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비서들은 늘 긴장했다. 운전 비서는 더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프닝도 가끔 벌어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화장실에 가려고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다 보니 문이 닫혀 버렸다. 운전 비서는 ‘쌩’ 하고 출발했다. 골프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재연됐다. 도어맨이 차문을 열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탈 준비가 안 됐다. 도어맨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운전 비서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 버렸다.  주인공은 이춘구 전 의원. 고인이 됐다. 향년 78세. 육사 14기로 4선 의원을 지냈다.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12·12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군내 신망이 두터웠기에 국보위에 차출됐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척결했다. 5·6공 인사도 몰아냈다. 고인만은 예외였다. 신한국당 대표로 중용했다. 그는 전·노 구속 이후 정계를 떠났다. 인간 도리를 내세우며.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청렴, 강직, 직언, 원칙, 소신.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다. 서투른 글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전 대표는 인자하지도 않다.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이다. 마냥 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적이 없다. 사사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마무리도 깔끔하다. 판공비를 반납한 일화는 많다. 정계 은퇴 후 후원금 사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엔 애도의 글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미국 시애틀 교민이 올린 글이다. 사령관 시절 부하 장교라고 한다. 회상이 담겨 있다. 훈련 후 자축 회식 때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셨다. 배가 불러 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령관은 전투복 상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입이 아닌 몸으로 지휘하던 사령관이라는 회고도 곁들였다. ‘충성!’이란 말로 끝맺는다.  또 다른 뉴스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아예 고위층의 단골 메뉴다. 이젠 일반 국민들도 늘었다. 5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러한가. 고인이 새삼 크게 보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부고] 노태우 오른팔이자 5·6공 ‘특급소방수’ 이춘구 전 의원 별세

    [부고] 노태우 오른팔이자 5·6공 ‘특급소방수’ 이춘구 전 의원 별세

    제11∼14대 국회의원과 옛 민자당 대표를 지낸 지낸 이춘구 전 의원이 20일 별세했다. 78세. 대한민국 헌정회는 이 전 의원이 이날 새벽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직접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군사정권인 5공화국과 6공화국은 물론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다. 육사 14기 출신으로 준장으로 예편한 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직후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신군부 세력에 합류, 사회정화위원장을 지냈다. 11대 국회 때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 고향인 충북 제천에서 내리 당선돼 4선의 관록을 쌓았다. 고인은 특히 5공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차관으로 일하면서 빈틈없는 업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를 계기로 5공 말 노 전 대통령의 천거로 민정당 사무총장에 전격 기용되면서 여권 실세로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1987년 대선에서는 민정당의 선대본부장을 맡아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다. 이후 5공 청산과 ‘정호용 의원직 사퇴’ 등 정치적 고비 때마다 전면에 등장해 ‘특급소방수’로 불리기도 했다. 고인은 ‘6공 황태자’라고 불린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두고 노 전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한 유일한 여권 인사로, 박 전 장관 처리 문제에 불만을 품고 노 전 대통령 초청 모임에 불참하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1990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간 3당 합당에 대해서는 “성급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14대 대선에서 선대위 부위원장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았다. 이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1994년에 예상을 깨고 군 출신에다 5·6공 핵심 인사인 고인을 국회부의장에 중용했다. 1995년 민자당 대표, 1996년 신한국당 대표 등을 역임하며 YS 정권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춘자씨와 아들 재용(개인사업), 딸 서영, 사위 권기연(에스에스모터스 대표이사)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21호. 발인은 22일. (02)2258-5971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이춘구 전 민자당 대표 별세

    이춘구 전 민자당 대표 별세

    제 11∼14대 국회의원과 옛 민자당 대표를 지낸 지낸 이춘구 전 의원이 20일 별세했다. 78세. 대한민국 헌정회는 이 전 의원이 이날 새벽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직접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충북 청원 출신의 고인은 육사 14기로, 준장 예편한 뒤 5·17 직후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신군부 세력에 합류, 사회정화위원장을 거친 뒤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고인은 5공과 6공을 거치며 충북 제천에서 4선을 하며 민정계의 실세로 활동했다. 특히 5공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내무차관으로 보필하며 신임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86년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됐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평가됐던 그는 1987년 13대 대선 선거대책본부장에 이어 이듬해 노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을 맡는 등 6공의 정권인수 작업을 지휘했고 6공이 출범하면서 내무장관에 기용됐다. 고인은 1992년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4대 대선 당시에도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그 공로로 국회부의장과 민자당 대표를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춘자씨와 아들 재용(개인사업), 딸 서영, 사위 권기연(에스에스모터스 대표이사) 등이 있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21호. 발인은 22일이다. (02) 2258-5971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고위공무원단 ‘특목고 시대’ 온다

    고위공무원단 ‘특목고 시대’ 온다

    ‘특수목적고(특목고) 출신이 고위 공무원단을 접수한다?’ 우리나라 주요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고위 공무원단(고공단)의 출신 고교 권력 지도가 경기고, 경북고 등 기존 명문고에서 20년 뒤 외국어고, 과학고 등 특목고와 자율형 사립고(자율고)로 전환될 것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고공단의 출신 대학 중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이른바 SKY대 출신은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으나 올해 서울대 합격자 상위 20개 고교는 모두 특목고와 자율고가 차지한 반면, 기존 명문고는 한 곳도 없었다. 특히 전국 특목고, 자율고의 70%가 수도권과 영남 지역에 있어 미래 고위 공직자 분포에서도 수도권과 영남 출신이 많아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13일 민주당 이용섭 의원이 행정안전부, 교육과학기술부 등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09년 기준 상위 20개 고교 가운데 올해 고위 공무원 인원이 늘어난 고교는 청주고, 중앙고 등 두 곳에 불과했다. 2009년 대비 경기고는 21명, 경복고 13명, 서울고 10명, 광주제일고 9명, 경북고 7명, 전주고·부산고·경동고가 각각 6명이 줄었다. 경기고는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 정운찬 전 국무총리, 손학규 민주당 대표, 안상수 전 인천시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이 나온 ‘정치인 사관고교’라 불릴 정도로 유명 정치인을 많이 배출한 학교다. 군사정권 시절 명성을 떨친 대구 경북고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철언 전 정무 1장관, 서동권 전 안기부장 등이 나왔다. 서울고는 원세훈 국정원장,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모교다. 출신 대학별로는 SKY대 출신 고위 공무원이 전체의 46%를 차지해 여전히 공고한 입지를 지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서울대 합격자를 20명 이상 배출한 상위 20개 고교 자리는 특목고(15개), 자율고(5개)가 싹쓸이했다. 특목고에서는 서울예술고 89명, 대원외고 70명, 세종과학고 49명, 한성과학고 46명, 용인외고 44명, 과학영재학교 41명, 서울과학고 37명, 대일외고 36명, 명덕외고 34명, 경기과학고 30명 등이었으며 자율고는 민족사관고 34명, 안산동산고 33명, 상산고 31명, 포항제철고 30명 순이다. 이 의원은 “20년 뒤에는 고위 공무원 출신 고교 비중이 과거 명문고에서 서울·경기·영남 등 특정 지역에 편중된 특목고·자율고 출신으로 크게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수행 외길 성철 스님 현실 도피 은둔자?

    수행 외길 성철 스님 현실 도피 은둔자?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민주화의 운동이 가파르게 진행될 때 종교인의 입과 몸은 희망이자 돌파구로 작용하곤 했다. 그 희망과 돌파구의 중심엔 김수환 추기경이며 강원용·한경직·문익환 목사 등이 있었다.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사회에 뛰어들었던 대표적인 종교인들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 수행에 전념했던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은 불교계와 일반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면서도 사회현상엔 일절 관여하지 않아 구별된다. 성철 스님은 과연 현실도피의 은둔자였을까. ●“군사독재 시절 현실정치 방관” 비판 불교계에 성철 스님 재조명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방관자’로서의 성철 스님을 파헤친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끈다. 오는 2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서 있을 학술포럼에서다. 성철스님문도회가 주최하고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제3차 학술포럼이다. 이 자리에서 김성철 동국대 교수는 ‘현대 한국 사회와 퇴옹 성철의 위상과 역할’을 통해 그동안 접근이 흔치 않았던 성철 스님의 대사회적 인식을 낱낱이 분석해 발표한다. ●“불교 본질 회복이 급선무” 판단 김 교수는 미리 배포된 발제문을 통해 “많은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이나 문익환 목사, 지선·진관 스님 등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혹한기에 사회현실에 적극 관여했던 종교인들과 비교해 성철 스님의 은둔적 행동과 비현실적 법어를 비판한다.”며 실제로 성철 스님은 현실정치를 백안시했다고 못 박았다. 김 교수는 “1965년 김용사에서 첫 대중설법을 한 이후 1993년 입적할 때까지 성철 스님의 활동기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기와 겹친다.”면서 “대중법문은 물론 1981년 조계종 종정 취임 이후 그 어떤 법문에서도 정치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적시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성철 스님이 1964년 도선사에 머물면서 청담 스님과 다짐했던 서원문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즉 성철 스님은 당시 한국의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은 섣부른 사회 참여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 회복이었다고 판단했다는 주장이다. ‘항상 산간벽지의 가람과 난야에 지주하고 도시 촌락의 사원과 속가에 주석하지 않는다.’ ‘항상 고불고조의 유법과 청규를 시법 역행하고 일체의 공직과 일체의 집회와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항상 불조유훈의 앙양에 전력하여 기타 여하한 일에도 발언 또는 간여하지 않는다.’ ●“불교적 사회 참여는 어떤 정형 없어” 김 교수는 결국 성철 스님을 20대의 청년기에서 세수 50이 넘은 중년이 될 때까지 화두를 들고서 참선 정진한 산승이자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인간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철저한 수행자로 정의했다. 김 교수는 특히 “불교적 사회 참여에는 어떤 정형이 있는 게 아니라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몸을 나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포럼에서 발표될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소 문무왕 박사의 ‘현대 한국 사회에 투영된 퇴옹의 삶과 사상’, 성철선사상연구원 최원섭 연구원의 ‘불교의 현대화에 담긴 퇴옹 성철의 의도’도 불교계의 주목을 끌 만한 논문들이다.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6공 실세’ 엄삼탁씨 유족 600억원대 빌딩소송 승소

    노태우 정권의 실세였던 고 엄삼탁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조실장의 유가족이 엄씨의 측근 박모(70)씨를 상대로 낸 600억원대 부동산 소유권 소송에서 이겼다. 서울고법 민사31부(부장판사 윤성근)는 엄씨의 부인과 자녀 등 3명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 18층 건물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이행하라.”며 박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박씨는 이 건물 소유권 가운데 엄씨의 아내에게 지분 7분의3을, 두 자녀에게 각각 7분의2씩을 이전등기하라.”며 “원고 측의 주된 청구를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엄씨가 2008년 숨지자 그의 유족은 ‘역삼동 건물은 엄씨가 2000년 권모씨로부터 285억원에 매수해 편의상 박씨에게 명의신탁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노태우 전 대통령 기침증세 입원

    노태우 전 대통령 기침증세 입원

    노태우 전 대통령이 25일 심한 기침 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병원 12층 특실에 머무르고 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심한 기침과 가래 증세로 인한 검진 차원”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는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폐에서 침이 발견돼 서울대병원에서 제거 수술을 받았다. 같은 달 18일에는 심한 기침 증세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지난해 말에도 고열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미국에서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정기적인 치료와 검진을 받아 왔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법무·검찰 고위인사 프로필

    ●길태기 법무부 차관 지난 1997년 한보그룹 특혜 비리 수사에 참여해 검찰로부터 ‘이중 지퍼’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진술을 받아내 수사의 물꼬를 텄다. 길 신임 차관은 “업무에 대한 공부를 통해 빨리 적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채동욱 대검 차장검사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특별수사, 2003년 ‘굿모닝시티’ 분양 수사 등 대형사건 특수수사경험이 풍부하다. 분석력과 판단력이 탁월하다. 특히 2006년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된 이른바 론스타 사건을 수사 지휘했다.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형사사법제도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1차장, 법무부 검찰국장 등을 역임했다. 최 신임 지검장은 “중요한 시기에 지검장 자리로 가게 돼서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국민수 법무부 검찰국장 후덕하고 친화력이 높다. 서울중앙지검 부장 재직 시절 허위정보를 공시하는 수법으로 시세를 끌어올려 막대한 차익을 챙긴 이른바 ‘슈퍼개미’ 사건과 한화 분식회계 사건을 처리했다. 국 신임 검찰국장은 “열심히 하겠다.”고 짧게 소감을 밝혔다. ●최재경 대검 중수부장 17기 특수통의 대표주자다. 대검 수사기획관을 지내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을 구속 했다. 최 신임 중수부장은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관련, “쉽지 않은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임정혁 대검 공안부장 대검 연구관을 시작으로 대구 공안부장, 대검 공안과장, 서울고검 형사부장 등을 지냈다. 임 공안부장은 “공안 사건을 오랫동안 맡았던 경험을 살려 공안부장으로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열린세상] ‘문화도 산업’ 후유증/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열린세상] ‘문화도 산업’ 후유증/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최근 출판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 밝힌 3000억원 대선자금설로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김영삼 대통령 시기인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문화도 산업이다’라는 슬로건이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산업진흥 차원의 문화정책을 전개하겠다는 당시 청와대와 문화관광부의 의지가 그 같은 슬로건으로 나타났을 게다. 언론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문화산업 특집 기사로 맞장구를 치면서 “할리우드의 ‘쥐라기 공원’ 영화 수입이 현대차 100만대의 수출효과와 동일하다.”는 꽤 그럴싸한 ‘문화산업 스토리’를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모든 문화산업이 그러하듯이 영화산업은 특히, 그간의 수많은 실패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대박을 터뜨리는 한편의 성공작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과 단순비교하기가 곤란하다는 꽤 과학적인 반론이 있었지만, 문화산업론의 큰 물결과 바람은 잦아들 줄 몰랐다. ‘문화도 산업이다’ 슬로건은 2000년을 전후하여 국가경제의 성장속도가 둔화되고, 국내외의 경제 위기가 몰아닥치면서 이제는 ‘문화는 산업이다’라는 명제로 굳어가고 있다. 문화는 자꾸만 산업 논리 속으로, 돈의 지배하에 들어가 탈출할 줄을 모른다. 문화는 이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다. 한류가 지구촌 전역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대견한 일이다. 우리의 문화를 수출까지 할 수 있다니 스스로 놀랍고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가치, 어떤 문화가 지구촌 사람들에게 먹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류 물결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불안해하는 이유이다. ‘문화는 산업이다’라는 인식 전환과 진취적 자세가 오늘날 뜨거운 지구촌 한류 열풍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문화산업론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곳은 연예 오락의 대중문화 분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돈이 안 되는 고급문화와 전통문화 등은 오히려 사람들의 외면을 받아 답보 또는 후퇴하고 있다. 공영방송에서조차 연예인의 신변잡기와 말장난으로 가득 찬 오락프로그램과 선정, 흥미 위주의 드라마가 지배하면서 좀 진지하다 싶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일부러 찾아 보기도 어렵다. 문화산업론의 더 큰 문제는 문화를 문화로 보지 못하게 만들어 문화를 망가뜨리는 데 있다. 문화가 망가지면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도 병이 들게 마련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옛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합쳐져 정보기술(IT)과 산업정책도 관장하지만, 상당부분 국민의 가치와 문화에 직간접 영향을 주는 방송통신 문화 정책도 책임지고 있다. 이런 방통위가 방송산업계의 지속적인 요청 가운데 하나인 ‘지상파 중간광고’ 허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시청률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와 디지털 전환 추가 비용으로 인한 방송사의 경제적 어려움을 일부 해결해 주려는 ‘산업’정책적 발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적으로는 정신 나간 정책이다. 중간광고는 방송프로그램 중간에 살짝 끼워 넣는 광고가 아니다. 중간광고는 시민이 자유롭게 향유해야 할 방송문화의 파괴자이고 국민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전염병이다. 돈의 지배를 받는 미국의 상업방송에서는 중간광고를 한다. 문화적 우위의 유럽 공영방송은 아예 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가뜩이나 상업적인 포털 공간은 말랑말랑한 연예 오락, 스포츠 뉴스가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하고 있고, 멀쩡한 언론사 인터넷 사이트에 가 보면 낯 뜨거운 성인광고가 떠다닌다. 문화부 장관은 사행산업인 카지노 활성화 정책을 언급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산업의 광풍이 몰아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공간이 어느새 거대한 황무지로 변해가고 있다. 개발시대에 ‘잘살아 보세’, 경제 강박에 ‘매춘도 수출산업이다’라는 정신 나간 소리도 나왔다. 물론 산업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를 산업에 팔고 우리가 과연 잘살 수 있을까. 유행하는 경영서적들의 핵심은 돈을 벌기 위해 뛰는 기업은 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은 흥한다는 것이다. 문화도 산업이 아니라, 산업도 문화이다.
  • [씨줄날줄] 회고록(回顧錄)/최용규 논설위원

    회고록 집필로 훨씬 더 유명해진 이는 영국의 정치가 원스턴 처칠(1874~1965)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01년 프랑스 시인 르네 쉴리프뤼돔(1839~1907)부터 2010년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이르기까지 노벨문학상 100여년 역사에 시인·소설가가 아닌 정치인이 이 상을 받기는 처칠이 유일하다. 정치가·웅변가 외에 저술가란 ‘고급스러운 훈장’이 붙은 것도 회고록 덕이다. 총리 재임시절 받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혜경궁 홍씨(1735~1815)의 ‘한중록’(閑中錄)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국보급’ 자전적 회고록이다. 71세 때인 1805년(순조 5년)에 썼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중심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회고했다. 한문본에는 泣血錄(읍혈록)으로 되어 있다. 눈물을 쏟고 슬피 울면서 기록했다는 뜻이리라. 회고록은 더 이상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술·스포츠 스타에 이르기까지 외연이 크게 확대됐다. 회고록이라는 거창한 이름 대신 자전적 에세이로 명찰을 바꿔 달기도 한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표현의 절제미는 사라진 지 오래다. 폭로투성이다. 미국 백악관 인턴이던 모니카 르윈스키는 1995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폭로했다. ‘모니카 이야기’다. 클린턴은 탄핵, 이혼 위기로까지 몰렸다. 올봄 국내에서는 신정아의 자전적 에세이 ‘4001’이 화제를 몰고 왔다. 회고록은 과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인생 전반을 다루는 자서전과는 차이가 있다. 자기가 겪은 일을 기록하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자기 해명서나 변명서가 될 개연성이 높다. 1992년 대선 때 민자당 후보인 YS(김영삼)에게 선거자금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고백한 ‘노태우 회고록’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5·17 비상계엄 확대를 ‘서울의 인명·재산 보호를 위한 치안유지 차원’,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라고도 기록했다. 노 전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도 회고록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충복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 등의 형태로 자신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입장을 밝힐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군사반란의 주범으로 한국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긴 5·6공 최고통치자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고쳐 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DJ정부 빼곤 ‘작은 정부’는 없었다

    DJ정부 빼곤 ‘작은 정부’는 없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몸을 불렸고, 김대중 정부에서 살을 뺐다가 노무현 정부부터 다시 슬슬 몸집을 키웠다.’ 대한민국 공무원 100만명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지난 6월 말 현재 대한민국에서 공무원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모두 98만 2204명이다. 행정부 공무원, 지방공무원, 교육공무원, 기타 헌법기관 공무원 등을 모두 아우른 규모다. ●노태우 5년간 14만여명 늘려 최고 1988년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해 이명박 정부까지 역대 다섯 정부의 공무원 정원 증감 추이를 보면 시대에 따른 공무원 사회의 부침과 정부의 운영 기조 등을 엿볼 수 있다. 3저 경제 호황과 88올림픽 등을 기반으로 두 자릿수 경제성장을 자랑하던 1980~1990년대 초반까지는 공무원 정원도 따라서 함께 늘었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1988년 73만 7225명이던 공무원은 해마다 가파르게 늘다가 1992년 88만 6179명까지 늘었다. 5년 사이에 20%가 증가한 셈이다. 이러한 기조는 ‘작은 정부’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김영삼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외형 성장에 걸맞게 5% 늘어난 93만 5759명이 됐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으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민의 정부’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93만 5759명이던 공무원 정원을 1998년 88만 8334명까지 줄였다. 그리고 매년 공무원을 감축해 2001년 86만 8120명까지 줄였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 2만 1873명을 늘려 88만 9993명이 됐다. IMF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정보기술(IT)산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이었다. ●현 정부도 몸집 키워 총 98만2204명 노무현 정부는 ‘작은 정부’보다는 ‘일하는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향했다. 철도청을 공사화하며 자연스레 5628명을 감축한 2005년을 제외하면 매년 공무원 정원이 늘어났다. 이에 공무원 수는 2007년 말 97만 5012명이 됐다. 반면 김영삼 정부와 마찬가지로 ‘작은 정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97만 5012명에서 96만 8684명(2008년)→97만 690명(2009년)→97만 9583명(2010년)→98만 2204명(20011년 6월 현재)으로 완만하게 늘어나는 추세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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