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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당 간부, 朴대통령 악수 거부하더니 하는 얘기가…

    노동당 간부, 朴대통령 악수 거부하더니 하는 얘기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일인 4일 전·현직 대통령들도 참정권을 행사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쯤 청와대 인근 종로구 청운동 서울농학교 강당에 마련된 청운효자동 제1투표소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기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퇴장하면서 투표 참관인들과 한 명씩 차례로 악수하면서 인사했다. 그러나 참관인 중 한 명으로 자리한 김한울 노동당 종로·중구 당원협의회 사무국장은 박 대통령의 악수를 거부했다. 대통령은 입가에 웃음은 띠었지만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김한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 사무국장은 이 일이 있은 뒤 자신의 트위터에 “박근혜 대통령이 투표를 마친 후,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자가 어울리지 않게 대통령이랍시고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악수에 응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어 “생각보다 제가 화가 많이 나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아무리 대통령에 반대해도 악수를 하는 게 기본 예의”라며 비판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한 것일 뿐”이라며 옹호하는 등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오전 8시쯤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서울 강남구 논현1동 제3투표소에 나와 투표를 했다. 푸른색 셔츠에 회색 정장을 입은 이 전 대통령은 투표에 앞선 신분확인 절차에서 실수로 신분증 대신 신용카드를 제시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던 유권자와 투표소 관계자들에게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투표를 마친 이 전 대통령은 밝은 표정으로 투표소 직원과 시민 한 명 한 명에게 악수와 함께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 등 인사를 건넸다. 이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이날 유일하게 본 선거일 투표를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사전투표를 했고 병상에 있는 김영삼·노태우 전 대통령은 투표에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광장] 2014년 6월 지방선거와 노란 리본/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2014년 6월 지방선거와 노란 리본/문소영 논설위원

    1987년 6월, 서울 광화문 일대의 20, 30대 직장인은 퇴근하면 “최루탄이 싫어요”라고 쓴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서울 명동성당을 향했단다. 얼마 전 점심을 먹다가 50대 선배의 그 말에 순간 울컥했다. 연대생 이한열이 직격탄에 맞아 죽은 뒤 시민과 정부가 치열하게 공방해 6·29선언에 도달했던 그 시기가 떠올랐다. 미개한 탓인지 사회적 우울에 쉽게 오염된다. 요즘 공감능력이라 좋게 불러준다. 대학 입학 이듬해인 1987년은 참으로 지랄 같은 해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은 1980년 ‘서울의 봄’을 억눌렀고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도 무력으로 짓밟았는데, 이후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그가 국론분열 운운하며 1987년 ‘4·13 호헌’을 선언한 탓이다.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던 시민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대학생이 먼저 수업과 중간·기말시험 거부로 호헌철폐를 요구했다. 사립대 수험료가 아까웠지만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물고문 사건’과 6월 이한열의 죽음은 ‘호헌철폐, 직선 쟁취’로 폭발해 정치지형을 바꿨다. 젊은 ‘넥타이·하이힐 부대’가 합류한 덕분이다. 그 시절의 수많은 대학생처럼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최루탄과 지랄탄에 시달리면서 이한열처럼 직격탄에 죽지는 않아도 폐병으로 일찍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조했었다. 6공화국 헌법으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됐고, 낮은 수준이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는 생각에 세상은 더디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직장인이 된 뒤 부정한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양심적으로 보도하면 그 나름대로 사회에 이바지한다고 믿었다. 그 후로 사회적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다. 돌아보면 ‘죽 쑤어 개 준’ 것 같았던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도 ‘5공 청문회’가 진행됐고 중국·소련 등 수교한 북방외교가 이뤄졌다. 1993년 문민정부, 1998년 국민의 정부, 2003년 참여정부로 진행되는 20년 동안 사회는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전두환 재산환수의 밑거름이 된 전두환·노태우 구속 수사,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시행, 정부수립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 남북화해시대 개막, 권위주의 해체 등이다. 그런데 그 믿음에 균열이 시작됐다. ‘부패했지만 유능한 정권’이라던 이명박 정권 때다. 규제완화라며 ‘전봇대’를 뽑기 시작하더니 KBS·MBC 등 공영방송에 재갈을 물렸다. ‘용산 재개발 참사’와 ‘청와대 민간인 사찰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정부를 믿고 ‘어떻게 쌓아 온 민주주의인데 무너지겠나’ 하며 낙관했다. 특히 독재 시절처럼 정보기관이 개입된 정치조작은 불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이 드러나 충격이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의혹 증거조작 사건도 국정원 작품이었다. 법과 정의가 제때 구현되지 않는 중에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20여년 만에 공감능력이 되살아났다. 함께 울고 분노했다. 세월호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런 ‘앵그리 맘(분노한 엄마)’을 정부는 불순세력이라고 불렀고, 일부에서는 미개하다, 백정이라고 했다.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청와대 측의 발표를 묵인하던 여당 의원들이 박 대통령의 대형 사진을 들고 “도와주세요”라며 동정표를 구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한국의 대통령은 거대 여당에 국정원, 검찰, 군인, 경찰까지 공권력을 다 틀어쥐었다. 어떻게 더 도와준단 말인가. 또한 여당은 지방선거 압승으로 안정적 국정운영을 도모하겠다는 의도겠지만, 지역선거에 대통령을 개입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공정 선거 논란을 낳을 수도 있다. ‘최루탄이 싫어요’라던 1987년의 노란 리본은 6·29선언으로 완성됐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노란 리본이 완성되려면 그 첫 걸음은 국회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안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월호 같은 참사를 재발방지하기 위해서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symun@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충남지사] 정진석 vs 안희정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충남지사] 정진석 vs 안희정

    ■‘차세대 충남 주자’ 깃발 정진석 새누리당 충남지사 후보는 충남 공주·연기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합쳐 9선 국회의원을 지낸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고(故)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은 6선 의원과 관선 충남지사를 지낸 충청권의 정치 거목이었다. 아버지의 지역구에 40세에 출마한 이래 3선을 한 정 후보는 ‘차세대 충남 주자’, ‘충남의 아들’임을 내세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충남지사에 도전한다. 정 후보는 1960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경찰 간부로 전남, 경남, 부산 등에서 근무했고 이후 강원지사, 충남지사까지 역임한 덕에 정 후보는 전국을 ‘순회하며’ 자랐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중학교는 서울 홍익북중·춘천중·대전중·서울 보성중 등 무려 네 곳을 다녔다. 아버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로 10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뒤로는 더 이상 전학을 다니지 않아도 됐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 후보는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유신 체제하의 1977년 당시 성동고에서 학도호국단 대대장을 맡고 있던 정 후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알려지자 학우 300여명을 이끌고 길거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진학, 한국일보사 정치부 기자 등의 약력으로 이어졌다. 1987년 대선 당시 정치부 말단 기자였던 그는 낮에는 상도동(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 측), 밤에는 동교동(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 측)을 오가며 현장 정치를 체득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집권 민정당 사무총장으로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돕고 있었다. 정 후보는 이후 언론계를 떠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된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정 후보에게 “너나 나나 우리는 충청도에 빚진 거다. 육신의 생명도 정치의 생명도 여기서 다 받았으니 항상 부채 의식을 갖고 준비해서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정 후보는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시 심대평 충남지사와 함께 탈당해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이어 국민중심당을 창당하고 원내대표,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18대 국회의원(비례) 시절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낙점된 정 후보는 2010년 8월 당시 대선 경선 및 세종시 수정안 격돌 등으로 갈등 관계에 있던 이명박 대통령-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간 극비 회동을 성사시키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정 후보는 그날을 “정권 재창출의 서막을 연 날”이라고 자평한다. 국회 사무총장 시절에는 연공서열 위주의 관행을 깬 파격 인사, 자살 예방 및 생명 존중 풍조의 확산을 위한 생명사다리운동, 공부하는 국회를 위한 국회 최고위 과정 마련 등의 정책을 폈다. 정 후보는 “나의 정치는 연결”이라며 서로 단절된 곳을 잇는 ‘사다리 정치’를 ‘정진석표 정치’의 브랜드로 내세운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충남과 중앙정부 사이를 잇는 사다리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정권 재창출에 기여했다는 점, 박 대통령과는 아버지 세대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이번 선거에서 ‘박심’(박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한 후보로 분류됐다. 스스로도 ‘정진석의 꿈, 대통령의 힘’ 등을 선거 슬로건으로 내걸며 박심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우직한 성품에 폭넓은 친화력, 뛰어난 정무 감각과 업무 추진력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반면 공주·연기를 제외한 지역에선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점 등은 약점으로 거론된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차기 대권 도전 ‘대망론’ 안희정 새정치민주연합 충남지사 후보가 정치를 시작한 이후 그에게는 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만든 일등 공신으로 ‘노무현의 정치적 동업자’, ‘리틀 노무현’ 등으로 불렸지만 2002년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사법 처리된 원죄로 공직도 맡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고향인 충남에서 도지사에 당선되며 파란을 일으켰다.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그는 ‘차기 대권 대망론’을 무기로 재선에 도전하며 제2의 정치적 도약을 노리고 있다. 안 후보는 1964년 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국에 관심이 깊었던 그는 남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5개월 만에 반정부 지하신문 편집장과 편지를 주고받은 혐의로 계엄사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고, 그 일로 학교를 중퇴했다. 검정고시로 1983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1989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실장이던 김덕룡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들어갔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노무현 의원 등이 3당 합당을 거부한 가운데 그도 ‘꼬마 민주당’에 남아 야당의 길을 고수했다. ‘정치인 안희정’이 담금질된 것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하면서부터다.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1992년 총선 직후 정치권을 떠났지만 1993년 노 전 대통령이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 참여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이후 2001년 이광재 전 강원지사와 함께 ‘좌희정, 우광재’로 불리며 노무현 후보 경선캠프를 지휘해 2002년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리틀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쯤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5년은 그에게 고난의 시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관리했던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시작된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이후 그는 “대통령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어떤 공직도 맡지 않았다. 안 후보는 2007년 대선 패배 후 “친노라고 표현된 우리는 폐족(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자손)”이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주목받았다. 이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같은 해 7월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최고위원으로 재임하며 ‘세종시 이전’, ‘미디어법’ 정국을 거쳐 2년간 민주당의 ‘ 반(反) 이명박 정부 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되면서 내공을 인정받았고, 도지사로서 무난하게 도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야권의 잠재적 차기 주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충남 천안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정계 거물 등 3000여명이 몰려 중앙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안 후보 스스로도 대망론을 적극 표방하며 차기 대권 주자를 염원하는 충청 민심에 호응했다. 그는 지난해 “김대중·노무현을 잇는 장자로서 집안을 이어 가겠다”며 대권 도전 의지를 나타냈다. 안 후보는 6·4 지방선거 후보 등록 직후인 지난 17일 자신의 선거대책위 관계자 간담회에서 “지방정부 운영을 통해 나름의 확신이 들면 그 다음 날이라도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선언을 하겠다”는 말로 차기를 향한 야망을 더욱 구체화했다. 그는 특히 “내가 간이 작을까 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내가 준비가 안 돼 있는데 기대를 받는 게 가장 두렵다”며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 싫어서, 누구 반대하다가 대통령 되는 정치는 끝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부고] 지역구 9선 최다 박준규 前국회의장

    [부고] 지역구 9선 최다 박준규 前국회의장

    국회의장을 세 차례나 지내고 지역구로만 국회의원 9선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89세. 고인은 최근 혈관계 지병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 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1948년 유엔주재 한국대표부 창설 당시 외무부 사무관으로 조병옥 박사를 도운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3, 4대를 낙선하고 5대에 야당이던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출한 뒤 2000년 정계 은퇴까지 40년 가까이 굴곡의 정치에 몸담았다. 고인은 5~10대,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낸 9선 의원 출신으로 헌정 사상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과 함께 최다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대구 달성과 서울 성동을 등 지역구에서만 9선을 했다. 지역구 9선은 우리 헌정사상 유일한 기록으로 기네스북 한국판에도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1988년 민정당 대표위원과 1990년 민자당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13, 14, 15대 국회에서 내리 세 번이나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5·16 후 공화당으로 당적을 이적, 공화당 정책위의장과 당의장서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0·26 직후 정계에서 은퇴하기도 했다. 이후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때 경북고 후배인 노태우 후보의 요청을 받고 민정당에 참여, 정계에 복귀해 13대와 14대 총선 대구 동구에서 당선했다. 1989년 말에는 민정당 대표위원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5개월 만에 국회의장으로 복귀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15대 국회 후반기 의장으로 선출된 후 2000년 스스로 당적을 이탈하는 첫 사례를 남겼으며 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 은퇴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동원 여사와 1남 3녀가 있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박준규 전 국회의장 숙환으로 별세

    박준규 전 국회의장 숙환으로 별세

    박준규 전 국회의장 숙환으로 별세 박준규(朴浚圭) 전 국회의장이 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89세. 고인은 최근 혈관계 지병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1948년 유엔주재 한국대표부 창설 당시 외무부 사무관으로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를 도운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3,4대를 낙선하고 5대에 야당이던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출한 뒤 2000년 정계 은퇴까지 40년 가까이 굴곡의 정치에 몸담았다. 고인은 5~10대,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낸 9선 의원 출신으로 헌정 사상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과 함께 최다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88년 민정당 대표위원과 1990년 민자당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13대, 14대, 15대 국회에서 내리 3번이나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5·16 후 공화당으로 당적을 이적, 공화당 정책위의장과 당의장서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0·26 직후 정계에서 은퇴하기도 했다. 이후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때 경북고 후배인 노태우 후보의 요청을 받고 민정당에 참여, 정계에 복귀해 13대와 14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에서 당선했다. 1989년 말에는 정계개편 구도를 발설, 민정당 대표위원직을 물러나기도 했으나 5개월 만에 국회의장으로 복귀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15대 국회 후반기 의장으로 선출된 후 2000년 스스로 당적을 이탈하는 첫 사례를 남겼으며 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스스로 정계 은퇴를 선택했다. 고인은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에 정치적으로는 감각이 뛰어나고 합리주의와 ‘상생의 정치’를 강조해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구 달성 출신으로 ‘TK(대구·경북) 원로격’이지만 계보정치를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장례식장(VIP실)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오는 7일 오전 8시다. 장지는 대전국립현충원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사설] 정파와 이념 넘어선 통일구상 세워나가자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선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이번 독일 방문이 한반도 통일을 향한 대장정의 출발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귀국 후 박 대통령이 본격적인 통일정책 구상에 돌입할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회담 직후 “독일의 통일 경험과 지식 등을 참고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준비에 나서겠다”고 피력했다.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와 이질성, 그리고 북한의 안보위협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들어 작금의 통일 논의가 생뚱맞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100년도 더 갈 것이라던 베를린 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데서 보듯 한반도의 통일 또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맞게 될 운명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통일 준비는 지금도 늦었다고 보는 게 보다 현실적 인식일 것이다. 통일이 대박이 되느냐, 쪽박이 되느냐 또한 우리의 준비 여부에 달렸다고 할 것이다. 내년으로 70년을 맞는 분단사를 돌이켜보면 통일과 관련해 숱한 담론과 정책이 명멸했다. 이승만 초대정부의 흡수통일론과 장면 정부의 ‘선(先)건설-후(後)통일론’, 박정희 정부의 ‘한반도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김영삼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김대중 정부의 ‘3단계 통일론’,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 등이 대표적이다. 큰 틀에서 보면 전두환 정부까지의 통일정책은 남북 간 체제 경쟁에서의 우위를 목표로 한 현상유지론에 가까웠고, 노태우 정부가 만든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이후 정부에서 부분 수정을 거친, 공식적 통일 모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통일한국의 미래상과 과정상의 얼개만 제시했을 뿐 통일을 전후한 종합적· 체계적 구상은 결여돼 있다. 아울러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부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북정책 기조만 제시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따지고 보면 통일 정책의 하위개념인 대북정책 기조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이 설계하겠다고 나선 통일 구상은 분단 70년사에 한 획을 긋는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통일과정뿐 아니라 통일의 형태, 그리고 그 이후 통일한국의 비전까지 포괄하는 내용을 담는 만큼 시대정신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춰야 한다. 국가적 역량이 총결집돼야 할 과업인 것이다. 과거 우리는 정권에 따라 대북정책의 강·온 기조를 되풀이해 왔다. 힘을 앞세운 ‘아데나워 모델’과 대화를 앞세운 ‘브란트 모델’이 뒤엉키면서 안으로는 보수 대 진보, 우파 대 좌파의 소모적 논쟁을 되풀이했고 밖으로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요소의 하나가 됐다. 종북과 용공 논란에서 보듯 70년의 분단이 영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조차 이념과 정파로 갈라 놓은 것이다. 통일을 설계하는 과정 자체가 사회통합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통일구상이 된다. 박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인 2012년 11월 외교·안보·통일정책 기조를 발표하면서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민적 공감대”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첫째 조건이 정파와 이념의 초월이다. 통일 담론을 이끌 대통령 직속 통일위원회부터 범정파, 탈이념으로 구성하기 바란다. 야당도 이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으로 새 정치를 선보여야 할 것이다.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 아파트(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 아파트(중)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만든 ‘아파트 공화국’의 흑역사 풍수학자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가 “이제 모든 국토는 도시다”라고 선언하자 사회학자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사실인즉 우리나라 모든 도시는 아파트이고 따라서 모든 국토가 곧 아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화답했다. 산비탈과 논두렁, 밭두렁 일색이던 우리 땅이 ‘아파트 천지’로 변했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경관은 산이나 강이 아니라 아파트가 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에서 ‘상전금지’(桑田地)가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좋든 싫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 두 대통령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다. 작금의 아파트공화국은 박정희·전두환의 의지와 그를 맹신하는 추종자들이 내놓은 합작품이다. 박정희가 기획하고 전두환이 연출했다. 박정희가 ‘아파트지구 지정’을 통해 서울 강남을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했다면 전두환은 ‘택지개발촉진법’으로 대한민국을 아파트 밀림으로 만들었다. 아파트 발전사와 주거사회학, 아파트 문화사를 두루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주거혁명은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 오른 1961년 시작돼 5~9대 대통령을 지내고 1979년 10·26사건으로 시해된 18년 동안 진행됐다. 그의 경제이데올로기는 ‘건설입국’(建設入國)이었고 그에 편승해 아파트는 지배적 주거 형태로 등극했다. 보릿고개에서 막 벗어난 신생 대한민국의 목표가 ‘먹는 것’에서 ‘사는 곳’으로 전환된 시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독재자의 선택이었다. 관계 당국의 조건 없는 정책지원과 아파트 건설 업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수직 폭발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의 의식주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많았음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생활혁명이 절실히 요청되는 소이가 있으며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아파트의 준공은 이러한 생활혁명을 가져오는 데 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인구의 과도한 도시집중화는 주택난과 더불어 택지가격의 앙등을 가져오는 것이 오늘의 필연적인 추세인 만큼 이의 해결을 위해선 앞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이러한 고층아파트 주택의 건립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입니다.” 1962년 국내 최초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치사 중 일부다. 박정희의 ‘생활혁명론’은 앞으로 집권기간 동안 그침 없이 추진될 ‘아파트 입국’의 미래를 웅변한다. 육사 8기생으로 혁명주체세력의 한 명이었으며 대한주택공사(지금의 LH) 총재를 두 번 지낸 장동운이 아파트 전도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장동운은 미국 군사학교 유학시절 잡지에서 본 대단지 아파트 사진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김종필 등 혁명세력에 알렸다. 아파트에 대한 낮은 인지도와 ‘빈민굴’이라는 인식 탓에 그의 추진력과 혁명세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마포아파트 부지 확보와 건설자금 마련 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동운은 두 번째 주공 총재 임기 중이던 1968년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라는 우리나라 아파트건설사에 획을 긋는 대표 작품을 남겼다. 일본신문 광고의 80%를 주택광고가 차지하는 것을 보고 중산층 아파트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사상 첫 모델하우스의 등장과 아파트 분양제도의 도입이라는 신기원을 기록했다. 이후 현대건설 등 민간 건설사들이 뛰어들면서 아파트 건설시장은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1994년 폭파된 남산 외인아파트도 장동운의 작품이었다. 1970년 박정희에게 외국인 바이어 거주용 아파트의 필요성을 건의하자 박정희는 지도 위에 한남동 외인주택에서 남산공원까지 줄을 쫙 그으면서 “이 선 안쪽으로 아파트를 세우시오”라고 분부했다는 것이다. 남산 중턱에 16층, 17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2개 동 450가구가 들어섰다. 남산 하얏트호텔(지금의 그랜드하얏트서울)은 어부지리로 생겼다. 1972년 외인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 건물 옥상에 설치된 대피용 헬기 포트를 시찰하다 눈에 거슬리는 군사시설이 보이자 “철거하고 호텔을 지으라”고 지시한 것이 하얏트호텔의 탄생 비화이다. 개발연대 남산에는 ‘3대 흉물’이 있었다. 외인아파트와 남산맨션, 하얏트호텔이 그것이다. 외인아파트는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으로 사라졌지만, 남산을 병풍처럼 막아선 하얏트와 남산맨션은 건재하다. ●김현옥·양택식·구자춘 3인 ‘아파트 도시’ 밑그림 혁명세력을 등에 업은 주공이 마포아파트와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의 성공으로 서울에 아파트의 싹을 틔웠다면 꽃은 세 명의 서울시장이 피웠다. 주공은 주공아파트, 서울시는 시민·시범·시영아파트로 독재자의 입맛을 돋웠다. 박정희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서울에 건설바람을 일으킨 김현옥(1966~1970), 양택식(~1974), 구자춘(~1978) 등 세 명의 시장이 재임한 12년 동안 ‘아파트 도시’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김현옥의 시민아파트, 양택식의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잠실주공아파트, 구자춘의 반포아파트가 대표적이다. 김현옥은 판잣집을 철거하고 철거민을 근교로 집단이전시킨 뒤 철거 터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와 1971년 광주대단지 폭동사건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한강변을 아파트 택지로 조성했다. 한강상류에 소양강댐이 건설돼 물난리 걱정이 사라지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으로 강북지역에 대한 안보불안감이 높아진 게 일조했다. 양택식은 김현옥이 벌려 놓은 난제를 꼼꼼히 처리했다. 여의도개발과 시범아파트의 분양 성공은 서울시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타개했을 뿐 아니라 아파트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시켰다. 구자춘의 뚝심이 강남을 아파트로 뒤덮게 했다.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 순시에서 박정희는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을 지시했다. “영동이나 잠실을 막연하게 개발하는 것은 서울시의 인구증가 정책밖에 안 된다. 획기적인 방안을 내놔라”라는 것이었다. 구자춘은 시내에 흩어져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반포로 옮기고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것을 결심한다. 관료 출신으로 매사 신중했던 양택식과 달리 군 출신인 김현옥, 구자춘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외에 상전이 없는 듯 행동했다. 관계부처 장관과의 협의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등 관련 절차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허벌판’ 강남을 아파트지구로 지정하는 일도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권력자의 지시를 받은 지 1년여 후인 1976년 7월 5일 구자춘은 천호대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를 구획정리가 한창인 영동지구로 안내한 자리에서 아파트지구 지정계획을 보고했다. 개인의 건축허가 행위가 금지되고 아파트만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아파트지구 지정계획이 그려진 도면 위에 특유의 사인을 했다. 이른바 윤허였다. 이때 반포·압구정·청담·도곡·이수·잠실·이촌·서빙고·원효·여의도·화곡 등 11개 지구 236만평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개인의 재산권 침해에 대해 누구도 가타부타할 수 없었고 나머지는 통과의례였다. 10여년 후 11개 지구에는 680개동 5만 가구분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남은 아파트 쑥대밭이 됐다. ●탈아파트 시대 성큼…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박정희의 시대가 지고 전두환의 시대가 왔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의 아파트 입국 노력은 1980년대 전두환 시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서슬 퍼런 국보위를 통해 주택 500만호 건설이라는 경천동지할 공약을 내놓았다. 1981년부터 10년간 3조 6000억원을 투입해 아파트 151만호 등 주택 500만호를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존재하던 대한민국 주택의 총량이 500만호였으니 그 배포를 짐작할 만하다. 공약을 시행하는 수단인 택지개발촉진법이 1981년 시행됐다.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관통한 아파트를 위한, 아파트에 의한, 아파트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택지개발촉진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정 공포된 6000여개의 법률 중 가장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법률”이라고 평가했다. 택지개발예정지구라는 이름으로 어떤 땅이나 수용해 택지로 개발할 수 있고, 다른 법과 처분의 적용이 일체 배제되는 법이다. 이후 20년 동안 1억 1380만평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됐다. 이 시기 남아 있던 모든 녹지는 택지로 변했다. 개포·고덕·목동·상계·중계지구가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수도권 신도시가 건설된 것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전두환의 ‘주택 500만호 건설’과 노태우의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에서 ‘주택’이란 아파트의 다른 이름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예의 ‘아파트 해법’으로 주택수요를 충족시켰다. 나아가 부의 축적과 차별적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중산층의 욕망을 채워줬다. 아파트 건설 업체들도 재벌그룹으로 성장하도록 배를 불렸다.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 열 채 중 여섯 채가 아파트로 둔갑했다. 고밀도 초고층 아파트 덕분에 2008년 주택보급률 100%를 넘어섰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집 부족에서 벗어나는 대역사가 이룩된 셈이다. 아파트는 고질적인 주거문제를 해결했지만 저출산·고령화와 나홀로 가구의 증가 등 산적한 문제 앞에 노출돼 있다.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선임기자 joo@seoul.co.kr
  • 청남대 본관 첫 보수공사 3개월간 새기와 입히고 관람객 휴게광장도 조성

    청남대 본관 첫 보수공사 3개월간 새기와 입히고 관람객 휴게광장도 조성

    20년간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사용되다 민간에 개방된 청남대가 1983년 건립 이후 처음으로 보수공사에 들어간다. 충북도 청남대관리사업소는 21일 3억원을 투입해 다음 달부터 3개월간 본관 지붕 보수공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본관은 대통령과 가족들이 숙식하며 머물던 곳이다. 청남대는 이번에 기존의 기와를 모두 뜯어낸 뒤 색깔과 모양이 같은 새 기와로 바꾸고 지붕에 방수 처리를 할 예정이다. 낙뢰방지 시설도 교체된다. 본관은 개방 직전에 한 차례 보수계획이 있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방을 결정하면서 현재까지 옛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청남대관리사업소가 보수작업을 하게 된 것은 건물의 노후화로 지붕에서 물이 새고, 지난해 여름에는 낙뢰를 맞아 기와의 상당수가 파손됐기 때문이다. 낙뢰 피해를 입지 않은 기와들도 오래돼 약간의 충격만 가해지면 깨질 정도다. 청남대는 같은 기간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길 보수공사를 하고 관람객들이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휴게광장 조성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휴게광장은 대통령 전용 별장 시절 주둔했던 군부대의 연병장 위치에 만들어진다. 지용관 청남대 시설과장은 “본관은 배경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곳”이라면서 “공사로 인한 관람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역대 정부 규제 완화 ‘용두사미’

    역대 정부마다 규제 개혁을 외쳤지만 대부분 ‘실패한 역사’로 평가된다. 전두환 정부 이후 20여년 동안 정부 초기에는 규제 개혁을 설파하다가 정권 말이 되면 대부분 흐지부지됐다. 정권 후반부로 갈수록 관료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고, 결국 정권과 관료 간 타협하는 관행이 반복돼 왔다. 규제가 많을수록 공무원들의 권한이 커지는 현실에서 관료들의 보이지 않는 집단이기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 전 대통령은 성장 저해요인의 척결 과제로 규제 완화를 처음으로 언급했지만 구호 차원에 불과했다. 노태우 정부 때는 행정개혁위원회를 설치했지만, 행정절차 간소화에 그쳤다. 규제 개혁이 본격화된 것은 김영삼 정부 때다. 김영삼 정부는 ‘규제 개혁’을 정부 공식 용어로 내세우고, 행정규제 완화를 위해 규제실명제를 도입했다. 또한 행정쇄신위원회를 만들어 약 6000건의 규제를 개선했고, 1997년에는 규제개혁회의를 설치했다. 하지만 구비서류 감축 등 지엽적인 부분을 손보는 데 그쳤다는 평가다. 김대중 정부는 그나마 규제 완화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8년 정부 출범과 동시에 규제개혁위원회를 설치했고, 정부 첫해 1만 372개에 달했던 규제 건수가 2000년에는 6912개까지 감소했다. 당시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의 강력한 압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권 5년 동안 규제는 연평균 6.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총리 주재 규제개혁장관회의를 만들었고, 민관 합동 규제개혁기획단을 설치해 합리적인 규제개혁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규제총량제를 도입해 2003년 7827개였던 규제 건수가 이듬해 7707개로 줄어드는 ‘반짝’ 효과를 봤지만, 후반기에 규제가 다시 늘어나 결국 규제 건수는 연평균 1.8% 늘어났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 ‘규제 전봇대를 뽑겠다’며 법인세 인하,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등 대형 규제를 없애는 데 노력했다. 하지만 규제 개혁 정책은 결과적으로 크게 후퇴했다. 관련 정책이 기존 규제 개혁위와 경쟁력강화위로 나눠 진행돼 혼선을 빚었고, 임기 후반 동반성장위원회에서 고강도 규제를 늘린 결과 규제 건수는 연평균 8% 급증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일수 樂山樂水] 다시 엄벌주의로의 귀환인가

    [김일수 樂山樂水] 다시 엄벌주의로의 귀환인가

    최근 들어 엄벌주의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음이 여기저기서 들려 온다. 첫째, 조직폭력배들을 통제하기 위한 ‘범죄와의 전쟁’ 선포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0년 10월 13일 한국 형사법 사상 처음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이 전쟁선포에 즈음하여 “이제 흉악범과 누범자에 대해서는 온정주의적 형사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외근순찰 경찰을 무장시켰고, 이례적인 속결재판과 함께 확정 사형수에게 조기 사형집행을 지시했다. 법무부와 검찰은 이에 따라 흉악범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키로 하고 신체적 고통이 따르는 초중구금교도소를 신설할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은 5공 출범 초기 삼청교육대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에 따라 실현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무부장관은 범죄전쟁선포 직후 대법원장을 찾아가 해당 흉악범에 대한 신속한 재판과 중형선고를 요청했고, 대법원장은 즉시 하급법원에 그 요지를 하달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0년 12월 31일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법률 제4295호)이 제정되어 엄벌주의 기류가 제도의 틀 위에 형성되었다. 문제는 이 같은 엄벌주의가 한동안 야단법석을 피웠지만 범죄증가율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1979년 우리나라 범죄율은 인구 10만명당 1480명이었다. 1987년 우리나라 범죄율은 인구 10만명당 2274명이었다. 그러나 1992년 우리나라 범죄율은 인구 10만명당 2837명까지 증가했다. 중범죄 및 흉악범죄에 대한 전쟁선포와 함께 취했던 일련의 엄벌주의 조치들은 유감스럽게도 범죄예방의 관점에서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대량구속과 함께 강화된 의법처단이 범죄율의 지속적인 감소에 기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강벌적 조치가 범죄심리를 억지하고, 사회적 불안도 감소시킬 수 있다는 편견 때문에 형사정책입안자들은 강벌주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2010년도 범죄율은 인구 10만명당 3795명으로, 전년도 4356명보다 감소추세로 돌아섰지만, 그 해 형사정책당국과 입법자들은 형벌위하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종전 유기징역형 상환을 15년에서 30년으로, 또 형을 가중하는 경우에는 종전 25년에서 50년으로 대폭 상향하는 형법개정조치를 취했다. 둘째, 거듭되는 가석방기간의 연장 시도이다. 현행 형법은 자유형의 집행 중에 있는 수형자 가운데 개선 의지가 현저한 자를 무기형의 경우 20년, 유기형의 경우 형기의 3분의 1을 복역하면 보호관찰부 가석방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가석방은 수형자를 조기석방시키는 제도이다. 이것이 범죄피해자 및 국민의 법 감정과 상충하는 일면이 있어, 법집행의 공정성 제고와 정의이념 충족의 측면에서 정책당국은 가석방의 조건인 복역기간을 더 연장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유기형의 경우 형기의 2분의 1이나 3분의 2를 경과한 후, 무기형의 경우 25년을 경과한 후로 변경하여 조건을 더욱 까다롭고 무겁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일반인들은 징역형으로 구금된 범죄자가 조기 석방됨으로써 사회안전망이 위협받는다는 우려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일정 복역기간이 지나면 석방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 없이는 교도소내에서 재생의 길을 원만히 걸어갈 수 없다. 재사회화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시설내 구금만큼 문제점이 많은 행형제도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고위험 범죄문제를 풀기 위해 정책당국들은 너무 손쉽게 엄벌주의에 흐르는 경향이 있다. 엄벌주의는 고단위 항생제 같아서 최후수단으로 고려해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자주 쓰면 사회안전 생태계를 사막화시킬 수 있다. 형법정책과 형사정책은 결코 법적 인기영합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국가형벌권은 인권보장과 적법절차를 따른 절제된 범죄통제수단이지, 인권침해도 불사하는 과도한 범죄통제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대 명예교수
  • ‘안철수의 대권가도’ YS형 되나 이인제형 되나

    ‘안철수의 대권가도’ YS형 되나 이인제형 되나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거대 정당인 민주당과의 통합신당 창당에 나섬에 따라 그의 ‘대권 방정식’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지, 호랑이에 잡아먹혔던 이인제 의원의 운명이 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이달 말쯤 통합신당이 창당되면 안 의원과 민주당 문재인 의원을 포함한 친노무현계와의 줄다리기는 격렬해질 전망이다. 안 의원과 보완 내지 긴장관계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도 방정식은 복잡해진다. 여기에 안희정 충남지사나 송영길 인천시장, 최문순 강원지사 등도 재선에 성공하게 되면 통합신당의 대권 방정식은 고차연립 방정식으로 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손학규·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까지 가세하게 되면 방정식은 더욱 고난도가 된다. 안 의원은 지난 2일 민주당과 통합을 선언하면서 “2017년 정권교체”를 최종 목표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자신의 병력(현역의원)이라고는 송호창 의원 1명뿐인 상황에서 현역의원 126명의 ‘골리앗’인 민주당을 ‘접수’해 대권고지를 정복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내비친 셈이다. YS는 1990년 소수의 통일민주당을 이끌고 집권 민주정의당, JP(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한 뒤 비판적 여론을 넘고 당내투쟁을 통해 대권고지를 정복했다. 강력한 권력의지와 대선주자 그룹 중 월등한 지명도를 무기로 당내 다수파인 민정계를 포섭하는 한편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고난도 권력투쟁 끝에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사는 소수파 인물이 다수파에 들어가 성공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꼬마 민주당’의 이기택 전 의원은 1991년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합쳐 민주당을 출범시켰으나 DJ라는 큰 벽을 넘지 못하고 꿈을 펼치지 못했다. 1997년 ‘DJP 연대’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던 JP도 끝내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권가도에서 멀어졌다. 이인제 현 새누리당 의원도 1997년 대선 때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소수 국민신당을 이끌고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 대권을 노렸다. DJ 정권 내내 대세론을 구가하던 그는 그러나 당내 경선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노풍’(風·노무현 바람)에 일격을 맞고 녹다운됐다. 물론 안철수의 대권 방정식은 본인의 정치 역량이나 통합신당의 역학구도 변화, 그리고 정국 전체의 지형 변화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강력한 권력의지를 발휘해 통합신당 내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다. 특히 통합신당 내 경쟁자인 문재인 전 대선후보가 차기 재도전을 위한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면 안 의원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다. 반면 소수파의 성공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안 의원은 끝까지 처절하게 민주당과 경쟁했어야 했는데 민주당과의 통합으로 현실정치 벽 앞에서 무릎을 꿇어 실망을 줬고 측근집단도 없어 운신의 폭이 좁다”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동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김 교수는 “안 의원이 호흡을 길게 갖고 지역 통합을 위해 부산시장에 출마하는 등 가시밭길에 몸을 던지면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커버스토리] 南과 北 사이… 우리가 낄 자리는 없다 친목 도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커버스토리] 南과 北 사이… 우리가 낄 자리는 없다 친목 도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서울 강동구에서 온라인 유통사업체를 운영하는 박성완(45)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지만 “내 고향은 평안북도”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전쟁 중 평북 삭주에서 홀로 월남했고 어머니는 평북 박천에서 일가가 모두 월남했다. 지금도 집안에선 평북 사투리가 표준어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평북도민회 모임을 다닌 그는 이제 삭주군 명예군수도 맡고 있다. 그는 안전행정부 산하 이북5도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임명하는 명예 시장·군수(임기 3년) 가운데 최연소다. 명예 군수로서 박씨가 하는 일은 두 달에 한 차례씩 도지사가 주재하는 시장·군수 모임에 참석하고 매년 어린이날 열리는 도민체육대회와 10월에 열리는 이북5도민중앙연합회(이하 연합회) 체육대회 준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밖에 청년 프로그램이나 해외 연수, 기업체 견학 등이 있는 정도다. 명예 시장·군수의 평균 연령은 63세, 명예 읍·면·동장의 연령은 56.6세다. 월남민 1세대가 70~80대 이상이라는 걸 감안하면 활동의 중심은 월남민 1.5세대와 자녀 세대로 넘어갔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직접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예 시장·군수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절반은 공무원이고 통일이 되면 그대로 북한에 가서 행정업무를 보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통일 후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교육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내 “특별한 행정실무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면서 “실제로 업무를 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 없다”고 인정한다. 김성겸 위원회 사무국장 역시 “행정·교육 훈련은 없다”면서 “우리가 북한 사정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한 안행부 관계자도 “통일 이후 위원회가 북한 행정을 담당한다는 건 꿈같은 소리”라고 말했다. 현재 명예 시장·군수는 92명, 명예 읍·면·동장은 911명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민간단체 차원의 친목 도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통일 이후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이산가족 상봉 준비에서도 위원회나 연합회가 낄 자리는 전혀 없다. 그런데 이들이 명예직이라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일반 통·반장처럼 정부가 지급하는 수당을 받는 것은 모순이다. 명예 시장·군수는 월 27만원, 명예 읍·면·동장은 월 12만원을 받는다.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은 “월남민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20억원 가까운 예산을 쓰는 것은 헌법이 금지하는 ‘세습’에 해당한다”면서 “위원회 규정만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것도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스스로 밝히는 자기 존재 이유는 ▲이북5도 분야별 정보 수집·분석 ▲북한 지역 수복 때 실시할 제반 정책 연구 ▲이북5도민 및 관련 단체 지원·관리 ▲북한이탈주민 및 이북도민 후계 세대 육성·지원 ▲이북5도 향토문화 계승·발전 등이다. 하지만 실제 활동은 명분과 거리가 너무 멀다. 정보 수집이나 정책 연구는 통일부나 법무부 등이 하고 있으며 위원회는 관련 예산을 책정조차 하지 않았다. 위원회 예산사업설명서가 자체 사업으로 꼽은 것은 북한이탈주민 지원 사업(6억 8100만원), 청사시설 개·보수(1억 5300만원), 이북도민 체육대회와 연합회 지원 사업(11억 500만원)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인건비와 운영비다. 조직 운영을 위한 조직 운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후계 세대 육성·지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김 사무국장은 “북한이탈주민 관련 업무는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하고 우리는 월남민 1세대와 탈북자 자매결연 사업 위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60년 전에 고향을 떠난 월남민과 북한이탈주민은 나이 차이가 수십년이기 때문에 사실상 갈등만 깊어진다”면서 “탈북자를 월남민과 연결해 주는 건 오히려 한국 정착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남는 건 연합회 지원, 월남민과 자녀 세대 지원, 향토문화 계승·발전뿐이다. 위원회는 이북5도 도지사들로 이뤄지며 이를 위한 사무처가 이북5도청이다. 이북5도위원장은 윤번제로 도지사 가운데 1명이 맡는다. 현재 위원장은 박연용(73) 황해도지사이며 김정겸 황해도 사무국장이 위원회 사무국장을 겸임한다. 평남·평북·함북 위원장은 모두 지난해 9월 임명됐다. 선정위원회 같은 별도 절차 없이 청와대에서 낙점하기 때문에 논공행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 안행부 관계자가 귀띔했다. 사실 위원회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엘리트 월남민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거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이북5도청사 건립만 해도 1988년 대선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지한 데 대한 답례였다. 당시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던 황해도민회장 홍성철씨는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연합회 소속 도민회와 산하 단체 등은 청사 입주 뒤 임대료를 전혀 내지 않았다. 임대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다.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행정자치부(현 안행부)는 2005년 “이북5도위원회에서 관리하는 재산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해 면죄부를 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위원회 회유 차원에서 연합회에 정기적인 자금 지원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도지사들은 차관급 별정직 공무원이다. 1년 보수로 지난해 기준 1억 660만 5000원을 받는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업무추진비로 2072만 6800원, 황덕호 함남도지사는 2788만 4142원을 썼다. 5도 지사를 합하면 연간 6억원이 넘는 액수다. 거기다 각자 운전기사와 관용차, 비서도 둔다. 한 안행부 관계자는 “차관급 대접을 받지만 변변한 주간 일정조차 없을 정도로 할 일이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 “특혜라는 지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인정했다. 5도 지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살펴봤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에 따르면 사용 내역은 식사비가 대부분이며 기념품 구입과 화환 구입 등이 있다. 이북5도 지사들이 2013년에 카드 집행이 아닌 세금계산서나 계좌이체 방식으로 집행한 건은 총 20건, 2500여만원으로 주로 격려품 구입 명목이었다. 17차례 약 728만원은 업무추진비를 주말에 집행한 것이었다. 모두 정부 예산 집행 지침을 위반한 것이다. 위원회는 2012년에도 자체 감사에서 동일한 사항을 지적받았지만 전혀 시정이 되지 않은 셈이다. 글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유서 대필’ 강기훈 22년 만에 누명 벗었다

    1990년대 초 투신자살한 운동권 동료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감옥살이를 한 강기훈(50)씨가 13일 재심을 통해 22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또 1980년대 부산지역 최대 공안 사건인 ‘부림사건’으로 1~7년형을 선고받은 고호석(58)씨 등 5명도 재심을 통해 3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권기훈)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돼 1992년 7월 징역 3년이 확정됐던 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1991년 5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간부였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서 투신자살하자 검찰이 강씨를 배후로 지목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 등의 필적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으면서 강씨는 이듬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 재판부는 “1991년 당시 국과수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없고 검찰의 다른 증거만으로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부산지법 형사항소2부(부장 한영표)도 이날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고씨와 최준영(60), 설동일(57), 이진걸(55), 노재열(56)씨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자백했으나 경찰 수사 과정에서 상당 기간 불법 구금된 사실이 인정돼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할 사유가 있다”고 판시했다.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강기훈 “22년 고통… 검사들 유감표명도 없어”

    강기훈 “22년 고통… 검사들 유감표명도 없어”

    “무죄 선고가 나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유감 표시는 안 하는구나’였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서 대필 사건’으로 감옥에 간 지 22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는 강기훈(50)씨의 가슴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강씨는 13일 무죄가 선고된 서울고법 505호 법정에서 한마디의 사과조차 들을 수 없었다. 검찰은 오히려 재심 마지막 공판에서까지 과거의 수사가 옳았다며 강씨의 유죄를 주장했다. 무죄 선고 직후 변호인과 지인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법정엔 박수 소리가 가득했지만 강씨는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권기훈)는 이날 “강씨의 자살방조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며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1894년 프랑스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필적 때문에 간첩으로 몰렸다가 결국 누명을 벗은 것처럼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인 강씨도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오명을 벗은 것이다. 이 사건은 1991년 5월 8일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강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자살하자 검찰이 김씨의 동료였던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총무부장 강씨를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하면서 시작됐다. 재판 결과 징역 3년이 확정돼 만기 출소한 강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에 따라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10월 19일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았다. 이날 재판부는 유서의 필적이 강씨의 것과 동일하다고 본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국과수 감정인은 김씨가 정자체만 사용하는 것으로 속단하고 필적 감정의 일반원칙에 위배해 속필체인 유서와 정자체인 김씨의 필적을 단순 비교해 판단했다”면서 “감정 결과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당시 감정인은 거의 전적으로 혼자 감정을 주관했음에도 원심 법정에서 4명의 감정인이 공동으로 감정했다는 허위 증언을 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1991년 감정 당시 김씨의 유서와 필체가 같다고 감정된 김씨의 전민련 수첩이 조작된 것이었다는 검찰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30여쪽에 달하는 김씨 전민련 수첩의 전화번호 부분을 4~5시간 만에 여러 가지 필기구를 섞어 조작하기는 어렵다”면서 “수첩의 찢긴 부분과 전화번호 부분 절취선이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조작된 것이라면 굳이 일치하지 않게 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국과수는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새롭게 등장한 증거들에 대한 필적 감정을 실시했다. 당시 국과수가 감정한 김씨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노트·낙서장은 김씨의 친구인 한모씨가 1997년 뒤늦게 발견한 것으로 1991년 당시에는 감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였다. 이후 재심 과정에서도 검찰 측 신청으로 해당 증거에 대한 국과수 감정이 한번 더 실시됐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2007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친 국과수 감정 결과 김씨의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이 유서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감정을 받았다”면서 “관련 증인의 진술과 그 내용 등에 비추어 볼 때도 김씨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의 선고가 끝난 뒤 강씨와 그를 돕는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소회를 밝혔다.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의 김상근 목사는 “‘저놈이 유서 대필자’라는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22년은 고통의 나날이었다”면서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오늘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1991년 필적 감정을 한 감정인에게 한마디해 달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강씨는 “그는 자기가 한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상상하지 못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바로 그것”이라고 답했다. ‘악의 평범성’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씨는 이어 “당시 검사들은 나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면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유감을 표시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22년간의 싸움 끝에 간암까지 얻은 강씨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이석기·진보당 내란음모사건, 다음달 중순 결과 나온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이 기소된 ‘내란음모 사건’ 재판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80여 일간 공방을 거듭한 검찰과 변호인단은 선고를 앞둔 다음 달 3일 결심공판에서 벌어질 마지막 격돌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달 초까지 검찰 측 88명, 피고인 측 23명 등 모두 111명의 증인이 법정에 선 가운데 검찰과 변호인단은 이른바 ‘RO’의 실체와 이 사건 제보자가 국가정보원에 건넨 녹음파일의 증거능력 등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다. 이어진 증거조사 과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은 녹음파일 32개가 공개됐지만 파일에 담긴 피고인들 발언에 대한 양측의 해석이 엇갈려 증인신문 당시 불거진 쟁점은 그대로 남았다. 피고인 신문에서도 이 의원을 비롯한 피고인 7명은 변호인단 신문에만 응한 채 검찰 신문에서는 진술거부권을 행사해 재판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이 의원은 변호인단 신문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대비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물질기술적 준비’를 강조했다”며 “후방교란이나 기간시설 파괴 등 군사적 대응을 염두에 둔 말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 현 정권과 미국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이념에 따라 활동했나”, “국회를 혁명 완성의 교두보로 인식했나” 등 검찰이 준비한 200개 문항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머지 피고인들도 변호인단 신문을 통해 혐의를 적극 부인하면서도 검찰 질문에는 답변을 거부했다. 한 피고인은 “국가정보원이 피고인에게서 압수한 USB에 RO의 총화서로 의심되는 여러 문건이 암호화된 채 저장되어 있었는데 설명해보라”는 재판부 질문에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형법상 실행을 모의하는 단계인 ‘음모’부터 처벌하는 살인·방화·폭발물사용 등 범죄에 대한 판례를 참고하면 법원은 ‘2인 이상의 범죄실행에 대한 합의’로 음모를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 검찰이 공소장 대부분을 RO의 조직과 체계에 대한 기술로 할애한 이유와 법조계 일부의 시각을 더하면 ‘조직과 체계를 갖춘 일당의 내란에 대한 합의 여부’로 이 사건 판결 기준을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증인신문과 증거조사, 피고인신문에 이르기까지 검찰과 변호인단은 RO의 실체와 지난해 5월 1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교육수사회 모임에서 나온 피고인들 발언의 의미를 두고 공방을 계속했다. 피고인들에게 주어진 2시간을 제외하면 양측에 3시간씩 총 6시간의 최후의견 진술이 예정된 결심공판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되풀이될 전망이다. 검찰 관계자는 “꼭 조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RO는 범행 주체이면서 내란을 음모하게 된 경과를 설명해준다”며 “어떤 부분을 부각할지는 아직 못 정했지만 큰 틀에서는 RO에 속한 피고인들의 내란에 대한 합의를 주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변호인단 김칠준 단장도 “RO는 허구라는 점과 회합이 아닌 정세강연회가 열린 마리스타 모임에서는 내란 모의를 포함한 어떠한 결의도 없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최후의견 진술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징역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된 내란음모는 판례가 드문데다 재심을 거쳐 무죄 판결이 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조작된 ‘불법 재판’임이 인정돼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신군부 세력 등 17명은 내란죄로 기소됐지만 군인들이 군사 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과는 사실 관계가 크게 다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1980년 이후 내란죄를 법원이 재판을 통해 정면으로 다루는 사실상 최초의 사례, 이른바 ‘리딩 케이스(Leading Case)’가 될 전망이다. 재판부는 이러한 이유에서 외국 사례와 연구 및 학술 서적 등을 살펴보며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수원지법 관계자는 “신속한 선고를 위해 재판부는 판결과 상관없는 기본 사실 위주로 이미 판결문 작성에 착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꼭 들어맞지 않더라도 과거 비슷한 판례와 국민 법 상식도 고려한 판결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형사소송법은 결심공판으로부터 2주 이내 선고를 규정하고 있어 다음 달 17일 전까지는 1심 판결이 이뤄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수석박물관 개관 꿈꾸는 박병선씨

    [명인·명물을 찾아서] 수석박물관 개관 꿈꾸는 박병선씨

    세상의 모든 모습이 돌에 표현돼 있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단순한 돌이지만 우주의 삼라만상을 보는 것 같다. 전남 순천시 조례동에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수석박물관이 있다. 한 개인이 평생 수집한 돌들이다. 아직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았는데도 알음알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명품이 가득하다. “사람이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 작품을 한데 모아 세계 최고의 수석박물관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2002년 전남 순천시 사무관으로 명예퇴직한 뒤 순천시의원을 지낸 박병선(65)씨는 지난 35년 동안 3700여점의 명석을 모았다. 비싼 가격으로 사고 싶다는 유혹이 많았지만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지금껏 한 개도 팔지 않고 모았다. 명석들을 ‘신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박씨의 ‘운산(雲山)수석원’은 264㎡(80평) 전시실 천장에까지 돌이 쌓여 있어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서울 등지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찾아오곤 한다. ‘문전박대’할 수 없어 박물관을 개관할 때까지 공개하지 않겠다는 수십년간의 고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초에는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해 수석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방송이 나간 뒤 순천시청 홍보과 전화가 마비될 정도로 문의가 쇄도했다. 박씨가 소장한 수석은 기존의 관상용 수석도 있지만,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무늬를 가진 문양 수석이 많은 게 특징이다. 전문가들로부터 수석 문화를 업그레이드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전시실은 4군자 등 화려한 꽃과 ‘십이지신’(十二支神) 12동물, 아라비아숫자 1부터 10까지 새겨진 진기한 돌로 가득 찼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태극기와 지도, 무궁화도 50여점 있으며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윤보선·최규하·노태우·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빼닮은 대통령 수석을 보면 눈길을 뗄 수 없다. 순천만을 상징하는 순천만 갯벌과 철새, ‘S자’ 수로, 갈대밭과 칠면초도 돌에 있다. 토끼가 달에서 방아 찧는 모습,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 나는 모습,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 낙안읍성과 각종 과일 문양, 강태공이 낚시하는 모습 등 경이로운 수석들이 끊임없이 보인다.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한다. 화가가 돌 위에 그림을 그린 듯 새겨진 각양각색의 문양들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신비로움마저 주고 있다. 태아부터 무덤까지 성장 단계, 십자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 바다, 동물 등 각종 생태계가 돌 안에 총집합해 있다. 돌 위에 그린 것 같아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 봐도 벗겨지지 않는 수석의 그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주제별로 나뉜 돌들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린아이들도 쉽게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문양이 선명해 오히려 아이들이 더 재밌고, 신난다는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성인들만 볼 수 있다며 따로 보관해 놓은 발칙한 ‘19금(禁)’ 수석 50여점은 남녀 성기를 닮아 은근한 볼거리를 준다. 박씨는 “이런 돌들이 물속과 땅속에서 수억만년을 파도와 물, 모래에 씻겨 닳고 닳아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에게 선보이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며 “자연 그대로인 수석으로 순천을 알리고 나아가 세계인들이 한국을 찾도록 하고 싶다”고 포부를 보였다. 박씨는 순천만 등 천혜의 관광지가 많은 지역에 또 하나의 관광지로 만들어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이 주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전시실이 협소하다 보니 개당 수백만원씩하는 돌 수십개를 바닥에 쌓아 놓을 정도라 3300㎡(1000평) 규모의 수석박물관을 짓는 게 그의 꿈이다. 가칭 ‘명품 국제 수석박물관’이다. 막대한 비용 탓에 선뜻 실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좋은 돌을 수집하는 데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소식을 들으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까지 한걸음에 달려간다.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발견되는 충북 충주 남한강과 단양, 강원 영월 등 전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석 산지인 중국 쓰촨·류저우·베이징 등까지 가서 구매한다. 최근 3개월 동안 중국에만 3번 다녀왔다. “돌에도 나이가 있고 이름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박씨는 “이것들을 보고 있으면 엔도르핀이 팍팍 솟는다. 한 편의 그림이다. 재미가 있고 기운이 넘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수석에 대해 설명을 한다. 겨울철 순천만도 볼 겸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김모(68·서울 서대문구)씨 일행 5명은 1시간째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김씨는 “너무나 신비롭고 정말 자연 그대로의 수석인지 몇 번이나 확인을 해보면서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며 “경이로운 돌들이 많아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정모(59·인천 계양구)씨는 “전설의 동물이라고 하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수석도 있다. 올해가 청마의 해인데 꼬리까지 달려 있는 말이 선명하게 새겨진 돌들을 보고 식구들 건강을 기원했다”며 “지금이라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면 관광 명소가 될 텐데 개인이 소장하고만 있어서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이렇게 수석을 모으기 위해 박씨는 공무원 월급을 몽땅 털어넣었다. 박씨는 “폭포를 보면 물소리가 들리고, 새를 보면 새소리가 들리고, 동물을 보면 동물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만큼 35년을 수석과 함께 살아왔다”며 “공무원 생활 26년 동안 한 번도 봉급을 집에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고 묵묵히 내조해 온 집사람에게 항상 미안함을 갖고 산다”고 말했다. 박씨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십자가가 27m인데 돌로 쌓아 이보다 더 큰 30m 규모의 돌탑 십자가를 남산타워처럼 만들 생각”이라면서 “앞으로 5000개까지 모아 세계인들이 이 신비하고 놀라운 수석을 보러 오게 만들어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가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글 사진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수직적 리더십 집권 전보다 심해… 메르켈 민심 수용 새기길”

    “수직적 리더십 집권 전보다 심해… 메르켈 민심 수용 새기길”

    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추진위원회’ 윤여준 의장과 이상돈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중앙대 명예교수)은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 1년에 대해 “‘내 생각이 원칙’이라는 식의 대통령 리더십으로는 민주주의적 국가 운영을 하기 어렵다”고 박하게 평했다. 이날 서울신문사에서 이뤄진 특별대담에서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의 집권 1년과 여야 정치권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개헌 논의에 대해서는 “내각제 개헌이 바람직하다. 시기적으로도 늦지 않다”고 밝혔다. 다음은 주요 대담 내용.→박 대통령의 1년 국정운영을 점수로 매긴다면. 윤여준(이하 윤) 저는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리더십의 성격이 수직적, 폐쇄적, 권위적이라고 비판했다. 집권 이후를 보니 제 걱정보다 훨씬 심한 것 같다. 집권 1년도 되기 전에 사회 일각에서 퇴진운동이 일어났다면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이 시간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이상돈(이하 이) 본인 내재적인 측면도 있지만 전임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정국 등 의도치 못한 측면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절 ‘벽파계획’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대통령 지시사항이 ‘벽’이라면 공무원들이 벽을 깨부수듯 지시사항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이런 구시대적 국정운영이 엿보인다. 박 대통령이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그럴듯하게 꾸미거나 회피하는 언행을 못해 더 진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 대통령의 ‘불통’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윤 박 대통령 특유의 ‘원칙과 신뢰’의 태도는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이 원칙이다’는 규정자 의식은 곤란하다. ‘내가 아니면 아니다’는 고집으로는 안 된다. 이 박 대통령과 비교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한국에선 ‘대타협의 정치인’이라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2005년 총선 당시 메르켈은 슈뢰더 전 총리의 우파적 개혁정책 ‘어젠다 2010’이 사회적 반발을 얻은 덕분에 집권했는데 집권 뒤 자기 원칙은 폐기하고 슈뢰더 정책을 받았다. 메르켈이 선거에 나타났던 민심을 받아든 게 아닌가 생각해볼 부분이다. →대통령 단임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윤 민주국가는 반응성과 책임성이 중요하다. 지금은 반응성은 거의 없고 책임성도 물을 수 없는 상태다. 5년 단임제라는 정치제도의 탓이 크지만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의 탓이 크다. 이 대통령 단임제라고 국민심판을 안 받는 건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95년 지방선거에서 패했고 그 외 여권이 중간선거에서 매번 패하지 않았나. 윤 여당에 (중간선거로) 책임을 묻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2012년 총선 직전 한나라당이 당 이름과 로고를 다 바꿨다. 집권세력을 심판할 중요계기를 앞두고 심판의 대상을 바꿔버린 것은 정당정치의 본질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대통령이 ‘개헌은 블랙홀’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제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개헌한다면 의원내각제를 해야 한다. 분권형이나 이원집정부제는 의미가 없다. 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의원내각제로 가는 게 맞다. 개헌논의는 국회에서 하면 된다, 블랙홀이 아니다. 개헌논의를 국민에게 개방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학자들은 권력집중의 폐해 때문에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저는 동의 안 한다. 권력은 나뉘지 않는 속성이 있는데다 요즘 국가안보, 내정 등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 내정과 안보를 줄 긋듯 분리하기 어렵다. →분권형이나 대통령중임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 분권형 대통령제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예가 없다. 윤 결국 사람이 먼저냐 제도가 먼저냐의 문제다. 제도를 통해 사람이 바뀔 수도 있다. →6·4지방선거의 정치·역사적 의미와 야권연대나 전격 통합의 가능성은. 윤 이번 선거가 중간심판의 성격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집권 1년차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중간심판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 여론 관심이 온통 안 의원의 신당, 야권연대에만 쏠려 있는데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지방분권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지방선거 본질을 고민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야권연대’, ‘단일화’, ‘신당’ 같은 말초적인 데에만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 야권분열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주장은 원천적으로 성립이 안 된다. 지금 민주당의 전체 판세를 보면 여당을 이기지 못한다. 신당 창당 여부와 관계없이 지는 선거다. 우리는 이미 (민주당이) 잃어버린 표를 가져올 뿐이다. 이번 기회에 신당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당선시키느냐도 중요하지만 새 정치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크다. 이 구정치에 대한 총체적 심판이냐 혹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심판이냐를 놓고 볼 때 이번 선거는 불행히도 후자 쪽이 더 강하다. 민주당의 문제는 항상 호남이다. 민주당이 호남에서 개혁, 쇄신을 하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100년 만에 동북아 안보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한·일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일본에 대한 국민정서, 역사문제와 안보·경제 분야는 별도로 접근해야 한다. 과거엔 한·일 관계에 비공식 채널이 있었는데 이제는 끊어져 버린 게 아닌가 걱정도 든다. 한·일관계가 개선되어야 함은 말할 여지가 없다. 박 대통령이 국내정치의 긴장을 풀어야 남북관계도 풀린다. 윤 일본에는 아베 총리의 극우적 언행에 반대하는 지식인, 중산층 계층이 두껍다. 이들과의 시민적 교류를 병행해야 한다. 대통령은 통일 한반도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미·중 지도부 설득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현 외교안보라인을 보면 군 출신, 국방통은 많지만 외교안보통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교과서 논란은 어떻게 보나. 윤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해석학의 영역으로 과거 사건에 대해 해석상의 논쟁이 붙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념을 앞세운 나머지 사실 관계조차도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념 잣대에서 불리하면 팩트를 고치는 게 어떻게 교과서인가.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논쟁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미국 고등학생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 지휘관 이름은 몰라도 일본계 주민들을 집단수용소에 가뒀던 것은 다 안다고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보도연맹, 노근리 사건은 아는데 6·25 전쟁의 중요 전투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위 있는 우파 전통의 교수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관련 특별검사제 도입 논란이 장기간 지속됐다. 이 의혹이 터져 나왔던 지난해 여름에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했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윤 박 대통령이 업보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 →야당의 특검 정치공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는가. 이 야권에서 정치공세를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검찰이 기소해 재판하더라도 국민들이 이를 믿겠느냐는 것이다. 검찰 수뇌부에 대한 신뢰가 붕괴한 마당에 강도 높은 검찰개혁을 시도한다 해도 이에 실패한 정권·대통령에 대해선 국민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윤 대선 불복을 떠나 야권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이슈다. 대선개입의 규모보다 국가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객관적 사실이 드러났고, 박 대통령으로선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앞으로 이 정부에 두고두고 큰 짐이 될 것이다. →지도자 자질 논란이 많다. 국가지도자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를 알아야 한다. 영국은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마가릿 대처, 토니 블레어를 총리로 원했다. 성공하는 대통령·총리는 ‘소통과 위임의 달인’이 돼야 한다. 소통은 기본이고 좋은 사람을 써서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로 혼자서 껴안고 가면 100% 실패한다. 세세한 문제도 챙긴 미국 존슨, 카터 전 대통령이 실패한 대통령이 된 이유다. 윤 대통령은 두 가지 기초소양이 필요하다. 첫째, 국가의 핵심 가치가 공공성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공인 의식이 없으면 권력을 마치 물려받은 유산처럼 착각해 모든 병폐의 근원이 된다. 둘째,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밑바탕이 돼야 한다. →윤 의장이 안철수 의원에게 다시 합류한 이유는 무엇인가. 윤 지금 새 정치의 심벌은 안철수다. 새 정치 요구 현상은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 때문에 생겼고 안철수란 사람이 다른 정치인과 다르기 때문에 이름 석자 앞에 ‘새 정치’란 단어가 붙은 것 아니겠나. 새 정치를 만드는 데 헌신한다고 했으니 도울 뿐이다. 한국 정치를 바꾸고 싶은 제 소망이 있지만, 만약 안철수가 ‘대통령을 만들어달라’고 했다면 돕지 않았을 거다. 진행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정리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이상돈 前비대위원은 새누리당 쇄신과 19대 총선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2012년 초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다. 대선 때는 박근혜 캠프의 정치쇄신위원으로 활동하며 박근혜 후보의 중도보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박근혜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비판적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윤여준 새정추 의장은 최근 새정추에 합류해 창당 준비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윤 의장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고 각종 선거에서 이름을 날린 보수진영의 대표적 전략기획통으로 평가받는다. 문민정부 때에는 청와대 공보수석과 환경부 장관 등을 지냈고, 지난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선대위 국민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았다.
  • [서울신문 선정 국내외 10대 뉴스] 댓글 파문·장성택 처형에 놀라고… 美 도청·日우경화에 화나고

    [서울신문 선정 국내외 10대 뉴스] 댓글 파문·장성택 처형에 놀라고… 美 도청·日우경화에 화나고

    2013년 국내외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정치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과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의혹이 불거져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궜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이른바 ‘댓글 파문’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과 RO(혁명조직)가 연루된 내란 음모 사건이 정국을 흔들었다. 갑을 논란과 숭례문 부실 복원은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북한에서는 권력 2인자였던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사형 판결 나흘 만에 처형되는 등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그간 전 세계를 상대로 무차별적인 전화 도청과 이메일 해킹을 해 온 사실이 들통 나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중국은 동중국해 상공에 우리나라 및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구역을 포함한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해 아시아 국가들의 불만을 촉발시켰다. 건강보험개혁안을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 연방정부가 셧다운(일시정지)되기도 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타계했다. 편집국 종합 ■ 국내 뉴스 ①장성택 처형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핵심 후견인에서 ‘현대판 종파의 두목’으로 전락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장성택 전 국방위 부위원장의 비참한 말로는 북한 권력의 냉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장성택을 처단한 김 제1위원장은 김정일 사망 2주기를 계기로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②사초 실종 논란 ‘사초(史草) 실종’으로 불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의혹이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다. 논란은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지시로 참여정부 인사가 고의로 폐기하고 이관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노 전 대통령의 직접적인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③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사건 지난 8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 진보 인사들이 ‘혁명조직’(RO·Revolution Organization)을 결성해 전시에 남한 체제 전복을 모의했다는 ‘내란 음모’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국회가 지난 9월 본회의에서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요구서를 통과시키고 국정원이 이 의원 등 7명을 기소하면서 내란 음모 혐의로는 33년 만에 재판이 시작됐다. ④국정원 댓글 파문 지난해 대선에서 국정원이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로 인터넷과 트위터 등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다는 ‘국정원 댓글’ 파문이 정국을 강타했다. 여기에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이 사건 수사의 축소, 은폐를 지시했다는 의혹까지 끊이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공직선거법 적용을 둘러싼 법무부와 검찰총장의 내분, 수사팀에 대한 수사 외압 의혹과 항명 사태에 이르기까지 검찰 내부에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⑤전두환 추징금 환수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미납 추징금 전담팀을 구성해 16년간 끌어 온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도 미납됐던 추징금 230억원을 납부함으로써 추징금 2628억원 전액을 완납했다. ⑥경제민주화와 갑을 논란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대선 공약이었다. ‘재벌 빵집’으로 상징되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 ‘일감 몰아주기’ 등 부의 편법 승계, 대리점주에게 ‘물건 떠넘기기’ 등의 횡포를 부린 남양유업 사태 등으로 ‘갑의 횡포’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⑦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밀양 송전탑 건설 공사를 둘러싼 갈등이 올 5월부터 주요 사회문제로 재부각됐다. 경남 밀양시 일원에 건설되는 765킬로볼트(kV)의 고압 송전선 및 송전탑 설치를 두고 벌어진 주민과 한전 간의 갈등은 2008년 7월 이후 계속되고 있다. 국회 차원의 논의 등을 거쳐 가까스로 지난 10월부터 공사는 재개됐으나 희망버스 방문 등으로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다. ⑧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아들 의혹으로 낙마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혼외 아들’ 의혹으로 낙마하면서 검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가 부각됐다.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선거법 적용을 강행한 채 전 총장은 외형상으로는 혼외자 의혹 제기로 낙마했지만 사실상 정권의 ‘찍어내기’로 물러났다는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⑨숭례문 복원 및 부실 복구 국보 1호인 숭례문이 5년간의 복원 공사 끝에 지난 5월 완공됐으나 완공 5개월 만에 20여곳의 단청이 떨어져 나가면서 부실 복원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논란은 단청뿐만 아니라 목재, 기와, 성벽 등으로 확산돼 급기야 변영섭 문화재청장 경질로 이어졌다. 숭례문 복구 때 철저한 고증과 전통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국내 전통 기법 대부분이 명맥이 끊긴 데다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완공을 서두르다 졸속 복원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⑩박근혜 대통령 취임 지난해 12·19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대통령이 2월 25일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부녀(父女)가 모두 국가 정상에 오르는 진기록도 세웠다. 경제 부흥과 국민 행복, 문화 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 등 4대 국정 기조를 내세우고 있다. 취임 첫해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30개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외교 지평을 넓혔지만 소통 부재 등의 지적도 만만치 않다. ■ 국제 뉴스 ①적나라하게 드러난 미국의 치부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치부가 유난히 커 보인 한 해였다. 컴퓨터 기술자 에드워드 스노든은 6월 국가안보국(NSA)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화 도·감청과 해킹을 일삼았다고 폭로했다. 미 육군 브래들리 매닝도 8월 미군 헬리콥터가 민간인을 공격하는 동영상 등을 ‘위키리크스’에 제공한 혐의로 35년형을 선고받았다. ②세계에 불어닥친 ‘우경화’ 바람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우클릭’ 행보가 거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집단적 자위권 부활 등을 밀어붙여 주변국의 반발을 샀다. 호주와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주요 국가들에서도 잇따라 우파 정당이 정권 교체를 이뤄내고 독일도 우파 연합이 재집권하며 ‘보수 회귀’ 경향을 부채질했다. ③베네딕토 16세 퇴위와 새 교황 프란치스코 취임 교황 베네딕토 16세(85)가 건강상의 이유로 2월 퇴위한 뒤 그다음 달 열린 콘클라베(교황 선출 회의)에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76)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에 선출됐다. 1282년 만에 비(非)유럽권 출신 교황이 된 그는 청빈한 삶과 겸손하고 대중 친화적인 행보, 개혁적인 성향으로 주목받고 있다. ④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타계 세계 인권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12월 5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차별) 정책에 맞서 투쟁하다 27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그는 남아공 민주화의 증인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불렸다. 흑인운동 공로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하는 등 세계의 존경을 받았다. ⑤온난화의 저주? 필리핀 슈퍼 태풍, 베트남 폭설 올해도 지구 온난화의 전조로 여겨지는 재해가 많았다. 11월에는 역대 최고 수준의 위력을 갖춘 슈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 지역을 강타해 최소 6000여명이 숨지고 1779명이 실종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반면 연평균 기온이 24도인 베트남에는 이달 들어 최대 20㎝에 달하는 폭설이 내리기도 했다. ⑥‘아랍의 봄’ 뒤에 찾아온 아랍의 겨울 민주화 바람이 거셌던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올해 역풍을 맞았다. 이집트는 7월 이슬람주의자인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이 강제 축출되면서 무르시 지지 세력과의 충돌이 일어나 1000명 넘게 숨졌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튀니지, 리비아, 예멘에서도 유혈 사태가 계속되면서 ‘아랍의 봄’이 ‘아랍의 겨울’로 다시 바뀌었다. ⑦전 세계에 부는 여풍(女風) 올해는 여성 엘리트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9월 독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3선 연임에 성공했다. 칠레에서도 미첼 바첼레트가 당선되면서 남미 3대 강국(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의 수장이 모두 여성으로 채워졌다. ‘세계 경제 대통령’인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새 의장도 여성인 재닛 옐런 부의장이 맡게 됐다. ⑧동북아 방공식별구역 설정 갈등 중국이 11월 동중국해 상공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위기가 커졌다.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은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지역뿐 아니라 한국의 이어도 상공까지 포함해 주변국들의 반발을 샀다. 세계 2대 강국(G2)인 미·중 간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지는 모습이다. ⑨미국 연방정부 셧다운·디폴트 논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핵심 정책인 건강보험개혁안(오바마케어)을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으로 예산안이 제때 통과되지 못해 2014회계연도가 시작된 10월 1일부터 연방정부가 셧다운돼 16일간 업무와 기능이 부분적으로 정지됐다. 세계 경제를 볼모로 한 양측 간 대립으로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를 맞기도 했다. ⑩시리아 화학무기 참사와 폐기 시리아 내전이 3년째 이어지면서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정부군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사린가스) 공격이 발생해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 1000여명이 사망했다. 국제사회의 제재 논의 끝에 시리아는 화학무기 폐기에 합의했고 유엔과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의 주도 아래 관련 절차가 진행됐다.
  • 역대 대통령들이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공개

    역대 대통령들이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공개

    역대 대통령들이 받은 크리스마스가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 포털을 통해 공개됐다. 공개된 대통령 기록물은 어린이들이 대통령께 전달한 카드 14점, 사진기록물 6건 등 총 30건이다. 이번에 공개된 기록물은 대통령을 ‘할아버지’라고 쓴 어린이들의 동심이 담겨 있어 특별하다. 리틀엔젤스(대한 어린이 무용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카드에는 “박 대통령 각하님과 사모님 저는 요번 크리스마스에 이곳에서 제일 맛있는 햄버거와 뽀뽀를 선물해 드리고 싶답니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웅동중학교 학생들에게 받은 카드에는 “이번 해에 대통령에 당선되시고 우리와의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치하시느라 힘드시죠? 그래도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깐 힘들더라도 참아내시고 바르고 좋은 정치로 이끌어 주세요” 등의 글이 적혀 있다. 이 밖에도 최규하·노태우·김영삼 대통령의 크리스마스 메시지 등 역대 대통령의 크리스마스를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 소개된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기고] 주거복지의 명암, 그리고 도전/배문호 주거복지연대 전문위원·지역계획학 박사

    [기고] 주거복지의 명암, 그리고 도전/배문호 주거복지연대 전문위원·지역계획학 박사

    지난 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주택바우처 제도의 도입 근거가 되는 ‘주거급여법’ 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주거복지 정책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 대부분의 국가는 기본적인 국가 목표의 하나로 복지사회의 실현을 추구한다. 그중에서 시장에서 적절한 주거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주거생활의 보장을 위해 국가가 주택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력을 한다. 이것이 주거복지다. 주거복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해당 정부부처에 처음으로 주거복지과가 생겼고, 그 후 참여정부에서는 주거복지본부로 확대됐다. 현 정부는 임기 초 국정과제의 하나로 ‘보편적 주거복지’를 내세우고 있다. 임대주택을 확대하고 주거비 부담을 완화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부의 주거복지정책의 양대 축은 공공임대주택의 확대와 주거급여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먼저, 공공임대주택은 지금까지 공공이 중심이 돼 공급해 왔다. 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지방공기업들이 공급해 왔다. 노태우 정부의 영구임대, 김영삼 정부의 50년 임대,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의 국민임대, 이명박 정부의 보금자리주택, 현 정부의 행복주택 등 참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변천돼 왔다. 그러나 그 본질은 공공에 의해 국민주택기금이나 정부재정을 투입하여 공급된 주택으로 주로 도시 저소득계층에게 공급됐다. 공공임대주택의 사회적 기여는 1970년대 이후 도시화, 산업화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노동계층의 안정적인 주거생활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반면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고 도시주변의 녹지가 줄어들거나 기존의 생활공동체가 해체되는 아픔도 같이 겪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임대주택을 가장 많이 공급한 LH는 이로 인한 과도한 ‘착한 부채’ 30조원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LH의 임대주택 재고는 총 96만 9000가구(완성 62만 9000가구, 건설 34만 가구)에 이른다. 지방정부가 재고로 갖고 있는 임대주택까지 합하면 우리나라도 서구 유럽에 뒤지지 않는 공공임대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나름 주거복지정책이 잘 된 국가로 볼 수 있다. 주거복지정책의 또 다른 축은 주택바우처 제도이다. 이는 공공주택의 충분한 재고가 확보된 이후에 시행되는 제도로 1970년대 이후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미 시행 중에 있는 주택에 대한 임대료 보조 프로그램이다. 현 정부의 주택바우처는 주거급여 형태의 제도로 진행되고 있다. 내년 10월에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연간 약 1조원 이상을 투입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보편적 주거복지의 기저가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주거급여 대상의 공정한 선발, 적절한 임대차주택의 선정과 관리, 안정적인 주거급여 시스템의 구축 등 산적한 현안을 차질 없이 준비해야 진정한 국민들이 원하는 주거복지가 실현될 것이다. 공급자 위주의 지원방식에서 수요자 위주로의 주거복지정책의 변곡점이 될 주택바우처 제도의 시행에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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