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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박근혜식 정치개혁의 허구/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박근혜식 정치개혁의 허구/오일만 논설위원

    고황이라는 말이 있다. 심장과 횡격막 사이의 부분인 고(膏)는 가슴 밑의 작은 비계이고 황(?)은 가슴 위의 얇은 막(膜)이다. 이곳에 병이 침입하면 예부터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여겼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런 고황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지난 50년간 지탱해 온 관성이 현재의 발목을 잡고 다시 미래의 비전을 가로막는 악순환 구조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터를 잡은 이 악성 종양은 이제 도려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환부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과거와 현재의 모순이 뒤엉켜 미래를 향한 한 치 앞의 전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현대판 고황’이다. 현대판 고황이 온몸에 퍼져 메스조차 대기 어려운 곳이 바로 정치 권력이다. 우리 사회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온갖 권력의 악취를 풍기는 정치권이야말로 망국병으로 지탄받은 지 오래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이런 민낯을 살짝 드러낸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문화를 화두로 던졌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지연과 학연, 인맥 등으로 얽힌 우리의 정치문화를 바꾸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허하다. 자신의 측근들이 줄줄이 연루 의혹을 받는 마당에 갑작스런 개혁 드라이브라니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정확하게 43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내건 슬로건이 ‘새로운 정치문화 창달’이었고 뒤를 이은 전두환·노태우 정권도 정치개혁을 전가의 보도로 써 먹으며 정권 유지에 활용했다. 지난 대선 공약으로 내건 경제민주화 실현, 한국적 복지 구현 등이 취임 선서 몇 달 만에 줄줄이 폐기되고 4년 중임제 개헌 약속은 ‘블랙홀’이라는 말로 논의조차 막아 버렸다. 박 대통령의 정치개혁 역시 그동안 선보인 현란한 구호와 유체이탈 화법의 이중주에 불과하다. 단언컨대 통렬한 자기반성과 고통스런 성찰 없는 변신은 허구다. 진정성 없는 변화 역시 말의 성찬일 뿐이다. 정치개혁도 마찬가지다. 그 지난한 길에 나서기 앞서 진정성과 비장함이 선행돼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지난 9일 국회 연설은 통렬한 보수진영의 반성이라는 측면에서 진정한 정치개혁의 단초를 열었다는 평가다. 그는 보수의 정의를 가진 자와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닌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선 용감한 개혁이라고 규정했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흘려 노력하는 보수의 꿈을 이야기했다. 난치병으로 청력을 잃어 가면서 ‘딸의 뼈라도 껴안고 싶어’서 인양 촉구 시위를 벌이는 세월호 유족, 다윤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주는 정치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보수색 짙은 새누리당을 향한, 그의 외침에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 원내대표의 정치개혁은 분명 공존의 정치를 향하고 있다. 그가 친노 세력의 뿌리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를 공개 석상에서 인정하고 현 정권의 핵심 정책인 창조경제를 비판한 것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진영 문화의 창조적 파괴다. ‘아스팔트 진보’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부 진보세력 역시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뾰족한 대안 없이 길거리에서 ‘박근혜 타도’를 외치는 그들에게서 많은 국민들은 ‘골통보수’의 민낯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린 지 오래다. 야당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친노 세력들도 진보의 통렬한 반성 대열에 합류할 차례다. 3김 정치(김대중·김영삼·김종필) 이후 보수와 진보의 본격적인 이념 대결로 전환되면서 진영 논리는 더욱 강화됐고 대결은 더욱 격렬해졌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지난한 여정에서 양분된 보수와 진보 세력의 대치는 이제 우리 사회를 출구 없는 정쟁으로 몰아가며 망국적 상황으로 가게 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산층이 튼튼한 경제를 뒷받침하듯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포용하는 정치문화가 개혁의 출발점이다. 국민들은 서로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시대 흐름에 맞춰 한 발씩 다가서는 그런 공존의 정치를 기대한다. 내부적 혁신을 통한 정치개혁이 어렵다면 국민적 심판을 통해서라도 분열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oilman@seoul.co.kr
  • [커버스토리] 萬人之上 오른 총리, 一人之下에서 463일

    [커버스토리] 萬人之上 오른 총리, 一人之下에서 463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뒤 새로운 총리 후보자가 누가 될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총리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한 데서 보듯 혹독한 여론 검증과 인사청문회 절차가 버티고 있어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게 만만치 않아 보인다. ‘권한 없는 넘버2’의 한계를 벗어나 도덕적 권위와 통합의 리더십을 가진 책임총리의 위상과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1948년 정부수립 이래 명암과 영욕이 교차한 ‘대한민국 총리’를 되돌아본다. ●첫 후보자 이윤영, 네 번 지명받고도 한번 못해봐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첫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자리였다. 1948년 당시 이윤영 총리 지명자는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평북 영변군 출신 개신교 목사이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초를 당했던 이윤영은 해방 이후 고당 조만식과 함께 활동하다 월남한 뒤 제헌의회 의원이 됐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첫 총리 지명자로 이윤영을 지명했지만 다수당이던 한국민주당의 반대로 인준표결에서 부결됐다. 결국 이 대통령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던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국회인준을 받았다. 당초 대한민국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를 모델로 했고 이에 따르면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그쳤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면서 결국 의원내각제 기반 위에 대통령중심제를 덧붙이는 식으로 절충이 됐다. 한민당은 이에 협조하는 대신 한민당 지도자인 김성수를 총리로 지명하라고 요구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윤영은 1950년 4월 다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지만 국회표결에서 찬성 68표, 반대 83표로 부결됐다. 1952년 4월에도 장면 총리가 사퇴하자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지만 이번에도 역시 국회에서 부결됐다. 그해 10월 장택상 총리가 사임하자 이 대통령은 4번째로 이윤영을 총리에 지명하지만 또다시 국회의 벽에 막혔다. 결과적으로 이윤영은 총리에 4번 지명받고도 한번도 국무총리가 되지 못한 유례없는 기록을 갖게 됐다.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개헌을 하면서 국무총리는 사실상 국가원수가 됐지만 5·16쿠데타 이후 다시 임명직 국무총리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무총리는 법적으로는 권한이 막중하지만 실제로는 인사권 자체가 전적으로 대통령 소관이어서 실권을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책임총리제를 강조하며 이해찬 전 총리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려고 노력한 바 있지만,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총리는 ‘방탄총리’, ‘실권 없는 2인자’라는 논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대 이범석 나치 연구자… ‘친일 전력’ 총리 3명 이윤영 총리안의 부결로 대한민국 초대 총리는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이범석이 맡게 됐다. 15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청산리전투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그는 나치를 연구하고 히틀러 사망을 안타까워하는 등 나치를 추종했다는 논란에도 휩싸였다. 역대 총리 가운데 3명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에 포함돼 있다. 정일권·김정렬 두 총리는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속 장교로 복무했다. 김정렬 총리는 태평양 전쟁에 조종수로 참전했고, 장면 총리는 종교계 총동원을 논의하는 시국간담회에 천주교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43대 중 재임은 4명… 실제 총리 수 39명 이완구 총리는 43대 총리이지만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취임한 뒤 현재까지 국무총리로 일했던 사람은 모두 39명이다. 이 가운데 4명이 총리를 두 번 맡았다. 장면은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총리를 지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 끝에 사임했다. 4·19혁명 뒤에는 내각책임제 정부수반인 총리에 선출됐지만 이번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밖에 백두진은 이승만·박정희 정부, 김종필은 박정희·김대중 정부, 고건은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로 일했다. 이완구 총리는 63일 만의 사의표명을 기준으로 하면 총리로서 가장 단명한 총리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 총리를 포함해 역대 총리의 평균 재임기간은 463.5일로, 1년 3개월 남짓이다. 6대 허정 총리는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던 도중 4·19혁명이 일어나고 대통령이 사임하는 등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맡은 총리였다. 22대 노재봉 총리는 1991년 1월에 취임한 뒤 명지대 1학년이던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게 구타당해 숨지면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4개월 만에 경질됐다. 총리로서 재직일수가 가장 긴 총리는 9대 정일권 총리이며, 김종필 총리가 두 번째다. 정일권 총리는 재임기간이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으로 한국의 현실에서는 이례적으로 ‘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김종필 총리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총리를 지냈지만 정일권 총리가 세운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민주화 이후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사람은 김황식 총리다.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약 2년 5개월간 재직했다. ●역대 총리 평균 연령 61.5세… 최고령은 74세 역대 총리 39명의 취임 당시 평균 연령은 61.5세다. 연령별로 보면 70대에 총리가 된 사람이 7명이다. 취임 당시 가장 고령이었던 총리는 24대 현승종 총리와 32대 박태준 총리로, 두 사람 모두 74세에 총리가 됐다. 19대 김정렬 총리와 39대 한승수 총리는 73세였고 34대 김석수 총리는 71세였다. 8대 최두선 총리와 42대 정홍원 총리는 70세였다. 반면 4대 백두진 총리와 11대 김종필 총리는 취임 당시 46세, 9대 정일권 총리는 4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됐다. 고향으로 살펴보면 이북 출신이 꽤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황해도 4명, 평남 5명, 평북 2명, 함남 1명으로 모두 12명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강영훈(평북 창성), 정원식(황해 재령), 현승종(평남 개천) 등 총리 5명 중 3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단일 지역으로는 서울이 7명으로 가장 많다. 충남과 경남이 5명씩이고 경기와 전북이 4명을 배출했다. 정일권 총리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유일한 재외동포 출신 총리로 기록됐다. 이 밖에 37대 한명숙 총리부터 38대 한덕수 총리, 39대 한승수 총리까지 세 번 연속 청주 한(韓)씨에서 총리를 배출한 것도 특이한 기록이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성완종 리스트 파문] 검은돈 전달수단의 ‘변신’

    [성완종 리스트 파문] 검은돈 전달수단의 ‘변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이완구 국무총리에게 건강음료 박스에 돈을 담아 전달했다는 주장이 나오며 과거 검은돈 전달 방법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해당 건강음료를 생산하는 업체의 주가가 치솟고 온라인에서는 각종 패러디가 이어지는 등 웃지 못할 상황까지 빚어졌다. 과거에도 기상천외한 ‘검은돈 상자’가 등장하곤 했다. 17일 법조계와 정치권 등에 따르면 검은돈을 담은 ‘상자’의 ‘원조’ 격은 케이크 상자다. 1993년 적발된 해군 인사 비리가 대표적이다. 1989~1991년 남편의 승진 인사를 앞둔 해군 장교 부인들이 참모총장 부인을 찾아가 케이크 상자를 밀어 넣고 왔다. 상자 안에는 수표로 5000만원에서 1억원이 든 봉투가 담겨 있었다. 거액이 예치된 차명계좌 통장과 도장을 담기도 했다. 케이크 상자는 1970년대부터 존재하던 고전적인 수법이었지만 제3자의 눈에는 단순한 선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공직 사회에서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2000년대 들어서도 뇌물 사건에 종종 등장했다. 1993년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며 수표나 차명계좌의 노출 위험성이 커지자 이에 비례해 ‘검은돈 상자’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 1만원권이 가득 든 ‘돈 상자’의 대명사로 등장한 게 과일 상자, 특히 사과 상자다. 19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를 하던 검찰이 쌍용그룹을 압수수색했을 당시 회사 창고에서 모두 61억원이 담긴 사과 상자 25개를 발견한 데 이어 이듬해 수서 비리 사건에서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사과 상자 1개에 2억 4000만원, 라면 상자 1개에 1억 2000만원씩을 담아 뇌물로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정 회장은 상자를 건네며 “아주 특별한 사과니 잘 드십시오”라며 뇌물이 담겼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줬던 것으로 전해진다. 1만원권 현금 1억원이 들어간다는 007가방, 2억~3억원을 담을 수 있다는 쇼핑백, 골프채를 모두 빼고 꾹꾹 눌러 담으면 1억~2억원이 담긴다는 골프채 가방(캐디백) 등도 뇌물 사건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수서 비리 사건에서도 등장했던 골프채 가방은 2000년 ‘진승현 게이트’ 당시 진승현씨가 특급호텔 주차장 등에서 현금이 가득 든 골프채 가방을 승용차 트렁크에 실어 주는 방식으로 뇌물을 건넨 사실이 알려지며 더 유명해졌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는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대담한 수법이 등장해 국민들이 혀를 내둘렀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대기업들로부터 50억원을 나눠 담은 사과 상자 40개가 실린 승합차와 150억원을 나눠 담은 상자 63개가 실린 2.5t 탑차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통째로 넘겨받은 것이다. 당시 탑차가 한나라당 여의도 당사 지하 주차장 입구를 통과하지 못해 다시 한강 둔치에 세워 두고 승합차 2대에 돈을 옮겨 담아 당사로 돌아오는 해프닝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얻었고, 결국 당명까지 바꿔야 했다. 고액권인 5만원권과 기프트카드 등이 등장하면서 ‘검은돈 상자’도 환골탈태했다. 상자가 다시 작아지기 시작한 것. 지난해 말 모뉴엘 사건이 이러한 흐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뉴엘 측은 기프트카드 수십장을 담뱃갑에 넣거나 5만원권을 과자 상자, 와인 상자, 티슈 상자에 가득 담아 금융권 관계자들에게 건넨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씨줄날줄] 네임 콜링의 정치/문소영 논설위원

    미국 ‘선전분석연구소’는 1938년 정치선전에 흔히 사용되는 7가지의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는 상대에게 강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 ‘빨갱이’나 ‘독재자’, ‘매판자본’ 등으로 공격하는 ‘낙인찍기’ 또는 ‘매도하기’(name calling)이다. 둘째는 ‘양질의 청년 일자리 육성’처럼 듣기 좋은 미사여구를 쓰거나 보편적 가치와 결합해 상대의 주장과 가치를 저하시키는 ‘미사여구의 일반화’(glittering generalitities)이다. 셋째는 ‘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상징을 활용하거나 할리우드 스타들의 명성이나 평판을 끌어오는 ‘전이’(transfer), 넷째는 명망가나 평판이 좋은 단체의 발언을 활용하는 ‘증언’(testimonial)이다. 다섯째는 ‘보통사람 노태우’와 같이 일반인의 평범한 이미지를 빌린 ‘서민화’(plain folks)인데 선거 때 대통령 후보들이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이유다. 여섯째는 모든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대목을 선별해 결과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카드 속임수’(card-stacking)를 사용한다. 마지막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유도해 사람들이 부화뇌동하게 하는 ‘밴드 왜건’(band wagon) 전략 등이다. ‘정치선전’의 대가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의 괴벨스였다. 여론조작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붙은 선전(propaganda)은 사실이나 진실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흔히 ‘흑색선전’이라고 하지 않나. 따라서 어떤 사실을 진실에 가깝게 재구성해 알려줌으로써 시민이 합리적인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저널리즘이나, 특정한 정파나 정치인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해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PR과는 다르다. 현대정치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건을 왜곡·조작하는 정치 전문가로 스핀닥터들이 활약하고 있다. 스핀닥터는 우회적인 표현도 만든다. 고문을 가혹행위로, 지구온난화를 기후변화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최종 해결책’이나 ‘특별취급’으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한국 정치에서는 선전으로 반대세력을 향한 낙인찍기를 자주 활용한다. 유행에 뒤떨어진 지겨운 돌림노래 같다. ‘빨갱이’와 ‘종북세력’, ‘게으름뱅이’ 등이 한 묶음이고 ‘군부독재’와 ‘반민주세력’, ‘친일매국노’가 또 다른 한 묶음이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가 반대진영을 공격할 때 ‘종북세력·빨갱이’로 낙인찍는다. 당사자는 물론 지지자들까지 크게 위축될 정도로 파급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반면 ‘군부독재·친일매국노’ 같은 낙인찍기는 광복 70년에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약화됐다. 요즘 한국정치는 보수가 대세다. 반대세력이 약화됐다고 세월호특별조사위를 ‘세금도둑’으로 매도하고, 유상급식 반대자를 ‘종북’이라고 낙인찍어서야 미래지향적인 정치가 되겠나 싶다. 서로 악감정만 쌓일뿐 공동체의 공영과 소통에 도움이 안 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효성그룹] 전직 대통령 3명과 연결…정·관·재계 혼맥 화려한 ‘권문세가’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효성그룹] 전직 대통령 3명과 연결…정·관·재계 혼맥 화려한 ‘권문세가’

    효성가문의 혼맥은 재벌가에서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전직 대통령들을 비롯해 주요 정·관·재계 인사의 집안들과 연결돼 있다. 상류층 사람들을 일컫는 ‘권문세가’라는 말이 자연스레 연상될 정도다. 경남 함안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난 만우 조홍제 회장은 부친 조용돈과 모친 안부봉의 2남 4녀 중 장남이다. 15세에 진주의 대부호인 하세진 가문의 차녀 하정옥(작고)씨와 결혼했다. 만우 회장은 하 여사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뒀는데 효성가의 혼맥은 이들 2세부터 본격적으로 확장돼 3세 때 절정에 이르게 된다. 만우 회장의 장녀 명숙(작고)씨와 차녀 명률(88)씨는 각각 경남 진양 대지주 허정호(96) 전 서울신한병원 원장과 경남 산청 대지주 권동혁의 장남 권병규(작고) 전 효성건설 회장과 혼사를 맺었다. 장남인 조석래(80) 효성그룹 회장은 지난 22일 작고한 재정경제부 장관 출신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의 삼녀 송광자(71) 여사와 32세 때 결혼했다. 경기여고,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송 여사는 공예작가로 2년 전에도 전시회를 열었으며 경운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조 회장은 처가로 인해 이회창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사돈의 사돈으로 발전했다. 송 명예회장의 장녀 원자(76)씨는 단암산업 회장인 이봉서(79) 전 상공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으며 이 전 장관의 삼녀인 혜영(43)씨는 이 전 총재의 장남 정연(52)씨와 부부가 됐다. 송 명예회장의 차녀 길자(73)씨는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과 결혼했는데 그의 장녀 정화(46)씨는 노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50)씨와 결혼했다가 2013년 이혼했다. 조 회장과 송 여사는 아들 셋을 낳았다. 장남 조현준(47) 효성 사장은 2001년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의 삼녀 미경(40)씨와 화촉을 밝혔다. 미국 뉴잉글랜드 음대를 졸업한 미경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삼남 재만씨의 부인 이윤혜씨의 동생이다. 조 사장과 재만씨는 동서 간이 되는 셈이다. 이로써 효성가는 전 전 대통령과도 사돈의 사돈이 됐다. 차남 조현문(46) 법무법인 현 고문 변호사는 2003년 이부식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장녀 여진(42)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1997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았다가 조 회장 부부의 눈에 들어 현문씨와 인연이 맺어졌다. 현문씨는 지난해 형인 현준씨를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가족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 삼남 조현상(44) 효성 부사장은 2009년 김여송 광주일보 사장의 딸 유영(35)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사장은 특장차 제조업체 광림의 대표이사로, 김용주 행남자기 회장과 사촌 간이다. 비올리스트인 유영씨는 서울대 음대 수석 입학 이후 줄리아드 음대와 예일대 음대에서 학·석사를 받았다. 26세에 뉴욕대 조교수에 임용됐고 2004년부터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의 실크로드 앙상블 단원에 발탁돼 협연을 벌여 온 실력파다. 만우 회장의 차남 조양래(78) 한국타이어 회장은 지인의 소개로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장의 딸인 홍문자(74) 여사와 혼인했다. 둘은 2남 2녀를 뒀다. 장남 조현식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사장은 차동완 카이스트 교수의 딸 진영(38)씨와 결혼했다. 차 교수는 고 설경동 대한전선 창업주의 둘째 사위다. 차남 조현범(43) 한국타이어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삼녀 수연(40)씨를 배필로 맞았다. 이렇게 조 회장은 이 전 대통령과 사돈이 됐다. 수연씨의 큰아버지인 이상득 전 국회의원은 구자두 LG인베스트먼트 회장과 사돈이다. 조 회장의 장녀 조희경(49) 미국 뉴욕 FDU 수학과 교수는 노정호(53) 연세대 법대 교수와 결혼했으며, 차녀 조희원(48)씨는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으나 최근 별거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만우 회장의 막내아들 조욱래(66) DSDL(옛 동성개발) 회장은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의 딸 김은주(60) 여사와 결혼했다. 2남 1녀 중 맏이인 조현강(40) DSDL 사장은 교육자 집안의 딸 한유리씨와 혼사를 맺었고 1남 1녀를 두고 있다. 조 회장의 장녀 윤경(37) DSIV 이사는 홍준기 삼공개발 회장의 아들 홍석융 신라저축은행 전무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윤경씨의 시아버지는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과 사돈 관계다. 3명의 전직 대통령과 사돈을 맺은 효성가는 경영 면에서는 장자 중심의 보수적인 원칙을 중시한다. 하지만 집안 내에서는 만우 회장부터 며느리의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등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사망] 박정희와 회담 때 통역 맡아… 리셴룽과 2대째 정상 재회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생전 한국과 인연이 돈독했다. 특히 정치 지도자로서 통하는 바가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했다. 1979년 10월 시해 일주일 전 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 만났던 외국 정상이 리콴유였다. 싱가포르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리콴유는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을 둘러보면서 처음 방문한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확인했다. 이때 밥상머리 통역을 맡았던 이가 박근혜 대통령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과 리콴유의 아들이자 싱가포르 총리인 리셴룽(李顯龍)이 다시 양국 정상으로 만나 회담을 했으니 2대에 걸친 인연이다. 리콴유는 한국 정치사에 관심이 많았다. 2000년 출간된 회고록 ‘일류 국가의 길’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것에 “군부 지도자가 대중적 지지를 추구하는 민간 정치인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그릇된 메시지를 전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앞서 1996년 미국 외교 잡지 포린어페어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민주주의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리콴유가 ‘문화는 운명’이란 기고를 통해 서구를 따라잡고자 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적 자유를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하자, 야당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은 ‘문화가 운명인가-아시아 반민주적 가치의 신화들’이란 반박글을 올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리콴유는 국정 철학에 대한 영감을 준 국가 지도자다. 현대건설 사장으로 1981년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건설에 참여할 때 리콴유는 이 전 대통령을 불러 5분짜리 비디오를 보여 주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설파, 깊은 감명을 받은 이 전 대통령이 향후 국정 운영에 이를 반영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차명계좌로 680여억 비자금 관리” ‘6共 황태자’ 박철언 부부 고발당해

    “차명계좌로 680여억 비자금 관리” ‘6共 황태자’ 박철언 부부 고발당해

    ‘6공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73)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과 현경자(68) 전 의원 부부가 수십년간 차명계좌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 관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전 장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이다. 박 전 장관의 수행비서 출신 김모(51)씨는 23일 박 전 장관 부부를 조세범처벌법 및 금융실명거래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며 관련 자료들을 검찰에 제출했다. 김씨는 고발장에서 “박 전 장관 부부가 30여년간 동생을 비롯한 친·인척 등 명의의 계좌로 수백억원대의 자금을 관리했지만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박 전 장관 차명계좌에 358억여원, 현 전 의원 차명계좌에 323억여원 등 이 부부의 비자금 규모가 모두 680여억원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2008년 ‘박철언 비자금 의혹 사건’을 거론하며 당시 수사에서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 후로도 박 전 장관의 차명계좌 관리가 계속된 것은 물론 일부 재산은 자녀들에게 법적 절차 없이 증여 또는 상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건은 박 전 장관이 H대 무용과 강모 교수를 172억여원 횡령 혐의로 고소하며 비롯됐다. 박 전 장관의 일부 측근들은 강 교수가 횡령한 자금이 박 전 장관의 비자금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검찰은 의혹을 규명하지 못한 채 강 교수 등을 기소하는 차원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당시 박 전 장관은 자금의 성격에 대해 재단법인 설립 등을 위해 마련해 뒀던 돈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박 전 장관은 민사소송을 통해 강 교수 등으로부터 64억여원을 돌려받는 강제조정 결정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박 전 장관은 선거 낙선 후 사업 등 재산 증식과 관련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지막 공직자 재산 신고액(25억원)의 수십배가 넘는 재산을 갖고 있다”면서 “차명으로 관리한 비자금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박 전 장관은 이에 대해 “차명계좌 부분은 과거 자진 신고 당시 대부분 해명됐고, 일부 남아 있던 계좌에 대해서도 이미 정리가 끝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

    재무부 장관과 초대 수출입은행장을 지낸 송인상 한국능률협회(KMA) 명예회장이 22일 별세했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마지막 각료 12명 가운데 생존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101세.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고 자신의 삶을 요약한 고인은 1950년대 이승만 전 대통령 밑에서 한국의 경제정책과 행정제도의 초석을 마련한 ‘건국 1세대’로 꼽힌다. 선린상업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를 졸업한 그는 조선식산은행(산업은행)에 입사했고 1949년 재무부 이재국장을 맡아 경제관료로 변신했다. 1957년 부흥부(경제기획원의 전신) 장관, 1959년 재무부 장관을 맡아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70년대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4·19혁명으로 1960∼63년에는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74년 회갑의 나이에 유럽공동체(EC) 대사로 임명된 고인은 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늘려 ‘기적의 대사’로 불렸다. 당시 그는 부임 인사차 청와대를 찾았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을 10억 달러대로 올려놔 달라”고 해 식은땀이 흘렀다고 술회했다. 고인은 이 공을 인정받아 1976년 초대 수출입은행장에 임명됐다. 이후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 한국위원장 등 기업인, 경제단체 수장으로 재계를 이끌었다. 그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고 조홍제 효성그룹 선대회장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고 남덕우 전 국무총리, 고 유창순 전 총리, 고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 등 정관계 인사와도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발간된 고인의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걸음을’에 따르면 남 전 총리는 그를 ‘이 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이라고 묘사했다. 고인은 정재계 인사들과의 화려한 혼맥으로도 유명하다. 슬하에는 동진(사업가)씨 등 1남 4녀를 뒀다.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주관엽(사업가)씨가 사위다. 신 회장의 장녀 신정화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와 결혼했으나 2013년 이혼했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은 25일 오전 6시 30분이고 장지는 대전현충원이다. 02-2227-7550.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지역감정 조장 댓글 처벌] “멍청도” “감자국” “자살했어야” 노골적인 지역 발언

    ‘홍어’(전라도), ‘개쌍도(경상도)’, ‘멍청도’(충청도), ‘감자국(國)’(강원도). 각 지역을 비하하는 표현들이다. “서울에서 알바하는 지방충, 편의점 알바생들도 개쌍도 사투리” “홍어XX들 한 방에 청소하는 법 없냐” 등의 막말은 온라인상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난무하고 있지만 현행법과 제도로는 이를 거를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없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글들은 주로 정치 이슈에 대한 네티즌들의 평가 속에 많이 포함돼 있다. 지난 20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특별혁신위원장 인터뷰 기사에서 “노무현 정부는 실패했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 한 네티즌은 “그런 논리면 전두환, 노태우는 감옥에서 자살했어야겠네”라고 썼다. 정치 현상도 지역감정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노씨 성은 토종 쌍도가 아니다라는 *소리하는 놈들이 있는데 이승만 박사도 전주 이씨니까 전라도 사람이냐?”라는 식이다. 정치인들의 발언은 다른 어떤 글보다 강한 파급력을 지닌다.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2012년 11월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협상을 비판하며 “국민을 ‘홍어X’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같은 해 10월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전북에 오기로 했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경남에) 빼앗겼다”는 발언을 한 이후 ‘지역 갈등 유발자’라는 비난을 샀고, 최근에는 충청 출신의 이완구 국무총리가 후보자로 지명되자 “호남 민심을 끌어안으려면 호남 총리를 임명했어야 했다”고 말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 총리의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강희철 충청향우회 명예회장은 “충청도에서 후보가 나왔는데 호남분들만 계속 질문을 한다. 다 호남분 같다”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했었다.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은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에서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었던 권은희 새정치연합 의원에게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의 경찰이냐”고 따졌다가 비난을 받았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 관료·교수·군인 등 다양한 직군 사령탑 배출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KT] 관료·교수·군인 등 다양한 직군 사령탑 배출

    공기업 출신인 KT의 CEO들은 정권의 색깔을 띤 사람들이 많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한국전기통신공사(이하 한국통신, 현 KT)의 첫 CEO를 맡은 이우재 사장은 육군사관대학을 나온 군인 출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뒤 국회의원을 지내고 사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동안 관료, 교수, 군인 등 다양한 직군들이 KT의 사령탑으로 임명됐다. 2대 사장 이해욱은 체신부 차관을 지낸 관료 출신이다. 임기가 비교적 짧았던 3대 조백제 사장은 중앙대학교 사회과학대 원장, 4대 이준 사장은 1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사장이 됐다. 이어 1996년 말부터 4년간 5~6대 CEO로 재임한 이계철 사장은 정통부 차관을 지낸 바 있다. 민영화가 이뤄지기 직전인 2001년 1월 1일 임명된 7대 이상철 사장은 KT의 첫 IT(정보통신)맨 출신 CEO로 꼽힌다. KT는 2002년 5월 정부 지분을 매각해 완전 민영화됐다. 그러나 CEO 선출 때마다 정권교체에 따른 외풍은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민영화 이후 첫 CEO인 8대 이용경 사장은 임기(2002년 8월~2005년 8월) 이후 연임을 노렸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무산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9대 남중수 사장은 첫 임기가 끝날 무렵인 2007년 말 정권교체 이후로 예정돼 있던 주총을 인위적으로 앞당겨 연임을 관철시켜 10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결국 구속되면서 KT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명박 대통령 때 취임한 이석채 회장의 말로도 전임자를 꼭 빼닮았다. 공모 과정에서 부적격 논란이 있었는데도 11대 KT CEO로 입성해 연임(12대)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교체설이 끊이질 않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 1주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청와대 개편] 朴대통령 위기마다 ‘구원투수’로 등판

    이병기(69)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 때마다 꺼내 든 ‘구원투수’로 평가된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초대 주일본 대사를 맡았던 이 실장은 지난해 6월 국가정보원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전임 남재준 국정원장 재임 당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논란 등에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상처를 입었고, 박 대통령은 ‘신뢰의 위기’를 수습할 인물로 이 실장을 낙점했다. 이어 최근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으로 상징되는 청와대 인적 쇄신에 대한 요구가 쏟아졌고, 박 대통령은 ‘여론의 위기’를 극복할 카드로 또다시 이 실장을 선택했다. 그만큼 이 실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가 두텁다는 방증이다. 경복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이 실장은 외무고시를 거친 정통 외교관 출신이다. 1985년 민정당 총재보좌역으로 정치에 뛰어든 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의전수석비서관, 외교부 본부대사 등을 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제2차장을 역임하며 1997년 고(故) 황장엽씨 망명사건의 막후작전을 총괄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의 정치특보를 지낸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특히 이 실장은 2004년 박 대통령이 ‘차떼기당’ 오명을 쓴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17대 총선을 치를 당시 ‘천막 당사’ 아이디어를 냈으며, 2005년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고문으로 여의도 정치에 컴백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캠프의 선거대책부위원장을, 2013년 대선 때는 여연 고문을 각각 맡아 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한 친박(친박근혜)계 원로 그룹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언행이나 처신이 신중하고, 전략통으로 불릴 만큼 정무적 감각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이 실장은 “여러 번 사양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어려운 상황에서 자리를 맡아 책임이 막중하다”면서 “임명장 수여 등 절차가 남아있는 만큼 순서대로 업무를 시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쉽지 않아 더 탐나… 美 의회 합동 연설

    쉽지 않아 더 탐나… 美 의회 합동 연설

    미국의 가장 큰 우방인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일본 아베 신조(얼굴) 총리의 미국 방문이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이들이 이번 방미를 계기로 상·하원 의회 합동연설에 나서거나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모르게 초청된 이스라엘 총리 1996년과 2011년에 이어 세 번째 합동연설에 나서는 네타냐후 총리는 미국 등 서방의 이란 핵협상을 비난하기 위해 백악관과 협의 없이 존 베이너 미 하원의장의 초청을 받아들여 일방적으로 합동연설을 추진, 눈총을 받고 있다. 다음달 3일(현지시간) 연설에 앞서 백악관과 의회, 이스라엘 간 공방이 계속 오고 가는 상황이다. 4월 말쯤 방미할 것으로 보이는 아베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합동연설을 추진 중이지만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반대에 부딪친 상황이다. 도대체 합동연설이 무엇이길래 두 나라 정상의 합동연설이 연일 도마에 오르는 것일까. 하원 외교위원회 동아태 소위원장을 지낸 도널드 만줄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은 2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온 외국 정상들의 상·하원 합동연설에 대해 “미 의회 리더들은 미국의 외교정책과 국민 여론 형성을 위한 의회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외국 정상 등 중요한 인물을 초청해 연설하도록 해 왔다”며 “이는 외국 정상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미국 대표들에게 그들의 나라와 미국의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직접 전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만줄로 소장은 “몇몇의 합동연설은 외국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들이 일어난 직후에 열려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산으로 이어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해당국 정상들의 연설은 의원들은 물론 미국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하원의장, 아베 연설 성사에 긍정적 의회에 따르면 외국 정상의 의회 연설은 19세기 초 시작돼 하원 리셉션에서만 이뤄지다가 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부터 상·하원 합동연설로 확대됐다. 의회 관계자는 “합동연설은 이제 미국의 우방과 동맹인 외국 정상 국빈 방문의 한 부분이 됐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미 대통령이 국빈으로 초청한 모든 외국 정상들이 합동연설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초청했더라도 합동연설은 하원의장과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의 결정에 달려 있다. 네타냐후 총리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동연설을 하게 된 것은 베이너 의장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베이너 의장은 아베 총리의 첫 합동연설 추진에도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일본은 합동연설 가능성을 높게 보고 연설 내용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본 총리는 사상 처음으로 합동연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 대통령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1989년 노태우, 1995년 김영삼, 1998년 김대중, 2011년 이명박,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등 이미 6차례에 걸쳐 합동연설을 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국빈 방문이 아니라 공식 실무방문이었는데도 합동연설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미 의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1993년 빌 클린턴 정부 이후 현재까지 외국 정상이 36차례 합동연설을 했는데 이스라엘 총리가 다섯 차례로 가장 많았고 이어 한국 대통령 네 차례, 인도 총리 세 차례 순이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사설] 朴정부 3년차, 소통과 공감에 방점 둬야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2년차의 막을 연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 행복을 위한 일 외에는 다 번뇌”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해가 흐르고 내일 집권 3년차를 맞는 시점에서 나라를 돌아보면 ‘국민 행복’은 아직도 요원할뿐더러 외려 더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관적 진단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낮은 청년 취업률과 초(超)저출산율 등 도무지 무엇 하나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각종 경제사회지표와 이념·세대·계층·지역으로 갈린 채 서로를 향해 증오와 분노를 쏟아내는 사회 현실이 그 방증이다. 한마디로 ‘화난 대한민국, 행복하지 않은 한국인’이 국정 2년을 마치고 집권 3년차를 시작하는 박근혜 정부가 받아든 성적표인 것이다. 국민 10명 중 박 대통령의 국정을 지지하는 사람은 3명 남짓에 불과하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할 때 국민 중 30%(2월 2주차 여론조사)만이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지지하고 62%는 박 대통령이 국정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보고 있다. 노태우(집권 3년차 1분기 28%) 대통령 다음으로 낮은 지지도다.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2년도 되기 전에 22%와 21%로 떨어진 적도 물론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만 놓고 본다면 집권 1년차 때 60%를 넘는 지지도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해 1년여 만에 지지층의 절반을 잃은 셈이다. 설 연휴를 기점으로 다소 회복 기미를 보이고는 있다지만 전국적인 규모의 선거가 없는 올해를 경제 혁신의 골든타임으로 삼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밀고 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동력이 아닐 수 없다. 지지층의 이탈을 부른 요인은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갖가지 요인의 줄기를 캐고 들어가면 그 끝에는 결국 자기 자신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직시해야 한다. 자나깨나 국민들을 걱정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의 충심(忠心)을 국민들이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거나 헤아리지 않는 이유를 바로 살펴야 한다. 흔히 민심 이반의 핵심 요인으로 소통 부재가 지적되는 데 대해 박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일응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항변하는 참모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박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소통 노력 또한 제아무리 공을 들인들 공감이라는 결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수고일 뿐이다. 소통 노력은 자기 만족의 도구가 될 수는 있겠으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한 상대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국정 목표가 경제 혁신이든, 통일기반 조성이든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와 그런 정부에 공감하는 국민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짧은 임기에 쫓겨 서두르다 넘어지기보다는 반 박자 늦더라도 국민 다수와 함께 가는 국정을 펼칠 때 박 대통령 자신과 국민들이 함께 웃을 수 있다. 정파를 뛰어넘는 열린 인사, 반대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열린 정책이 그 전제일 것이다. 지난 2년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남은 3년의 성공은 기약할 수 없다. 소통과 공감을 위한 시스템을 정부는 새롭게 짜기 바란다.
  • 靑 민정비서관 또 ‘검사 편법 파견’

    靑 민정비서관 또 ‘검사 편법 파견’

    현직 부장검사가 사표를 내고 또다시 청와대로 직행했다. 검사의 청와대 ‘편법 파견’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22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지난 17일 정기 인사에서 오는 25일자로 의원면직 처리된 권정훈(46·사법연수원 24기) 부산지검 형사1부장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내정됐다. 대구 출신인 권 부장검사는 1995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용된 뒤 법무부 국제형사과장·형사기획과장·검찰과장,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지난해 초에는 국가정보원 증거 조작 사건 수사를 지휘한 바 있다. 권 부장검사 외에 평검사 2명도 사표를 내고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견검사제는 박정희 정부 시절 현직 검사가 청와대에 차출되면서 시작됐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대통령이 파견검사를 통해 사실상 법무부와 검찰을 지휘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1997년 검찰의 독립성 보장 차원에서 검사가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되거나 대통령 비서실 직위를 겸임할 수 없도록 검찰청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검사의 청와대 파견은 계속됐다. 사표를 낸 뒤 청와대 근무를 하고, 근무가 끝나면 재임용 형식으로 검찰에 복귀하는 편법을 통해 정권과 검찰의 유착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때는 8명, 이명박 정부 때는 22명의 검사가 사표를 내고 청와대에 근무한 뒤 검찰로 복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검사의 외부기관 파견을 제한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하지만 편법 파견은 중단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10명 이상의 검사가 사표를 내고 청와대에서 근무했거나 근무 중이며, 5명 이상이 검찰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민정수석실 산하 민원비서관에는 정통 관료 출신인 최태현 산업통상자원부 소재부품산업정책관이 내정됐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2015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관용 사라진 분노…사회 임금 격차 줄이고 저소득층 대입 혜택 줘야

    [2015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관용 사라진 분노…사회 임금 격차 줄이고 저소득층 대입 혜택 줘야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13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분노사회’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일 빌레펠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참여연대 정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빈부 격차가 심해지면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나. -개인적 수준에서는 사회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증가하게 된다. 조직적 수준에서는 가족 해체나 붕괴, 나아가 생계형 범죄를 포함한 범죄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 수준에서는 사회통합이 약화된다. 개인이 사회에 갖는 소속감, 연대감이 약화되면서 사회 갈등이 증가하게 된다. 최근 한국 사회의 흐름은 ‘분노 사회’라고 볼 수 있다. 20대부터 60~70대 고령 인구까지 뭔가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근본적 원인은 불안에 있다. 10대에는 입시 불안, 20대에는 청년 실업, 30대에는 구조조정, 40대에는 퇴출의 공포, 50대 이후부터는 노인 빈곤율이 50%대에 육박하듯 노후불안이 있다. 이런 불안은 타자에 대해 관용하거나 인내하지 못하게 한다. 곧바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잘살고, 복지도 좋아진 것 아닌가. -비교 시점을 1인당 국내총생산(GDP) 100달러도 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으로 둔다면 지금 분명 잘사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 시기를 외환위기 직전으로 잡는다면 달라진다. 한국 자본주의가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고도 성장했던 마지막 시기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때라고 생각한다. 그후 97년 외환위기에 이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계속 닥친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명목상의 1인당 GDP는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수준이 과연 나아졌을까’를 볼 때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민주화 세대는 오히려 외환위기 이후 삶이 갈수록 더 퍽퍽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또 내가 언제 이 조직에서 떨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도성장의 마지막 단계인 90년대 초중반과 비교해 본다면 삶의 질은 거의 정체돼 있는 것과 다름없다. 시간이 갈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정체되니 불안해지면서 옛날에는 화려했던 것 같은데 현재는 빈곤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성장률을 옛날처럼 높이는 게 힘들다면 빈부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정부가 개입해 소득 재분배와 노동시장 정책을 펴야 한다. 노동시장의 경우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받는 월평균 급여가 150만~160만원이다. 우리나라 비정규직은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포함하면 900만명에 가까울 것이다. 전체 경제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한다. 비정규직으로는 아이 한 명을 도저히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반값등록금보다 효율적인 대책은 노동시장 정책이다. 노동시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를 줄이고, 한편으로는 최저 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비정규직 축소를 정부가 기업에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가가 강제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타협은 가능하다. 정부가 중립적 위치에서 개입해 노사정 대화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비정규직을 줄이는 것을 모색할 수 있다. →소득 재분배를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한데.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조세부담률이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까지라도 올려야 한다. ‘증세 없이 복지 없다’는 원칙으로 접근해야 한다. →증세에는 중산층, 서민층도 포함돼야 하나. -보편적 증세가 타당하다. →하위 40% 이하는 현재 소득세를 안 내고 있는데 보편적 증세의 범위는 어디까지 돼야 하나. -하위 40%까지 세금을 걷자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증세의 대상은 세금을 내는 60%를 말하는 것이다. 부자에게만 세금을 내라는 게 아니라 세금을 낼 역량을 갖춘 이들은 전부 다 세금을 내라는 게 보편적 증세다. 다시 말해 ‘차등 과세’나 ‘형평 과세’라고 할 수 있다. 부자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 중산층은 세금을 올리되 그 폭을 작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증세에 대한 반발이 심한데 가능할까. -정치권과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증세 없이 어떻게 복지가 가능한가. →빈부 격차가 과장돼 있다는 지적도 있다. -복지정책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소득 분배 악화 상태가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서울신문 ‘빈부 리포트’에서 보도됐듯 하늘과 땅 차이의 삶이 있다. 오히려 현존하는 빈부격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상류층과 빈곤층의 삶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언론에서 보도를 잘 안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류층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숨어 생활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우울한 삶만 보도하느냐고 한다. 빈부격차가 과장됐다는 지적에는 빈부격차의 실상을 보고 싶지 않은 바람이 들어 있다. →법인세 인상 주장에 대한 의견은. -이명박 정부에서 법인세 인하가 이뤄졌는데 정말 잘못된 정책이었다. 우리나라는 법인세가 OECD 국가와 비교해 낮은 편이다. 이명박 정부 때 인하한 부분만이라도 원상복구시켜야 한다. 연말정산을 둘러싼 다수 봉급자들의 불만도 기업들이 사내 유보금을 저렇게 많이 쌓아 놨는데 우리가 왜 증세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또 소위 고액 소득자들에 대한 훨씬 더 강력한 누진적 증세가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슈퍼리치가 스스로 자신의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부도 많이 하는데. -의식의 문제다. 내가 번 부는 나 혼자만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고 사회의 여러 도움 속에서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부를 환원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 이런 의식이 취약하다. 천민자본주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가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부분을 전체로 환원시키는 오류이자 기계적 형식 논리다. 물론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다수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사례가 적어지고 있다. 부의 되물림은 필연적 추세인가. -자본주의가 구조화될수록 직업 이동, 즉 사회 이동은 제한받게 된다. 과거 우리에게는 교육이라는 기회가 열려 있었는데 그것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명문대의 강남 학생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중산층이 예전에는 교육을 통한 직업 이동의 원칙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핵가족이 되면서 아이가 하나 내지 둘밖에 없으니 아이에게 집중적 투자를 하게 되고 이런 투자의 격차가 성적의 격차로 나타나는 것이다. →해법은 공교육 강화인가. -사교육으로 빚어진 격차를 공교육 강화로 완화할 수는 있지만 그 차이를 크게 줄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대학입시 제도를 바꿔 실력이 있지만 교육 혜택을 적게 받은 빈곤층 학생들이 명문대에 많이 갈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 한다. 미국식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말한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 사회 갈등으로 폭발할까. -폭발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활력을 잃어가는 것은 맞다. 한국 사회의 일본화다. 일본의 장기불황 20년과 비슷해지고 있다.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을까’,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있을까’ 등등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못 갖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사회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체념과 분노가 반복되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형태로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해결책은 사회적 대타협밖에 없다. 핵심적 주체인 자본, 노동, 정부 간 역사적 타협 외에는 방법이 없다. 예컨대 아일랜드에서 이뤄진 협약의 경우 노조는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기업은 일자리 창출 약속을 했다. 사회적 타협에서 중요한 것은 권한과 책임을 많이 갖고 있는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길섶에서] 이니셜 정치/정기홍 논설위원

    정치인 이름이 영문 이니셜(약칭)로 통칭된 것은 ‘3김 시대’부터다. 김영삼은 YS, 김대중은 DJ, 김종필은 JP다. 계파 정치의 산물이고 ‘권력 수장’의 분위기도 풍기는 일종의 포장이다. 개중엔 발음이 입에 붙지 않아 널리 쓰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HC(이회창)와 MJ(정몽준), DY(정동영) 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무대’(무성대장) 말고 ‘MS’로 불러 달라고 했다지만 통용되지 않고 있다. 달리 박정희나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은 이니셜로 부르지 않았다. 어른의 이름에 영문 약자를 함부로 붙여선 안 된다는 의중이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니셜 정치인과 같은 급이 되기 싫어했다는 말도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이니셜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문 대표가 그제 당내 ‘계파 갈등’ 청산을 언급하며 ‘계’자의 첫머리를 따 “기역자(字)도 안 나오게 하겠다”고 밝혔다. ‘친노’와 ‘비노’ 간의 알력을 없애겠다는 다짐을 이니셜을 따 에둘러 한 말이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처럼 국민들로선 계파 갈등의 계자를 모르는 게 낫다. ‘개꼬리 삼 년 두어도 황모 못 된다’고는 하지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한화그룹] 장인은 서정화 - 매형은 이후락의 차남…SK·CJ家와 먼 사돈

    한화그룹(옛 한국화약) 창업주인 고 김종희 회장은 ‘다이너마이트 김’이라 불렸다. 일에 대한 열정과 화통한 성격을 빗댄 말이다. 물론 생전에 주력했던 일이 화약사업이었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김종희 회장은 1922년 충남 천안에서 김재민 옹과 오명철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경기공립산업학교(현 경기상고)에 진학했지만 일본 학생들과 싸움이 잦아 원산상업학교로 학교를 옮겨 졸업했다. 그는 1946년 비교적 평범한 집안 출신인 강태영(88) 여사와 결혼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강 여사의 자녀 교육과 결혼 등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고 이는 가풍으로 이어진다. 자녀들을 중심으로 정계와 경제계, 관가를 아우르는 혼맥이 생겨난 배경이기도 하다. 김종희 회장의 맏딸 영혜(67)씨의 남편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차남인 이동훈(67)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시아버지인 이후락 전 부장은 박정희 정권의 최고 실세이자 책사였다. 제갈량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 부장 등을 역임했고, 유신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군부독재 시절 한화그룹의 모기업인 한국화약이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한 화약류를 독점 생산하는 곳이다 보니 권력층과의 교분은 필수였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장녀의 결혼은 한화그룹을 SK그룹과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CJ그룹까지 연결시켰다. 이후락 전 부장의 5남 이동욱 씨가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의 막내딸인 최예정씨의 남편이다. 또 예정씨의 사촌오빠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다. 최 회장의 부인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다. 이 같은 혼맥은 2007년에는 손경식 현 CJ 회장으로 이어졌다. 이동훈 전 회장의 장남인 재환씨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녀인 손희영씨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김승연 회장은 부친 타계 1년 후인 1982년 서정화 당시 내무부 장관의 장녀 영민(54)씨와 결혼했다. 당시 서울대 약대 3학년이던 그녀를 소개해 준 이는 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씨 부인인 허숙자 여사다. 영민씨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약대를 수석 졸업했다. 한화가의 여성들은 회사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다른 재벌가 며느리들과는 달리 흔한 미술관 사업이나 공익재단 등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애쓰며 바깥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영민씨의 부친인 서 전 장관은 불과 29세에 경남 사천군수를 지냈다. 충남도지사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정치에 입문한 뒤엔 민정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 등을 거치며 5선 의원(12~16대)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 전 장관의 친동생이며 고 서정귀 호남석유 사장은 6촌형이다. 영민씨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서상환 장관이다. 김 회장의 방계도 화려하다. 백부인 고 김종철 의원은 전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냈다. 한화 계열사인 한국베어링(현 파그베어링)과 태평물산(현 한화무역) 회장을 맡았지만 경영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둘째숙부인 고 김종식 전 자민련 의원은 큰형이 작고하자 다시 천안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동생인 김호연(60) 전 국회의원(빙그레 전 회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58)씨를 아내로 맞았다. 김 여사의 큰어머니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 여사다. 김호연의 장인어른인 김신 백범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교통부 장관과 대만 대사, 공군참모총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서울&평양 경제 리포트] 한·일 고속철 연결 구상

    [서울&평양 경제 리포트] 한·일 고속철 연결 구상

    “시모노세키, 하카타 등을 출발한 ‘탄환열차’(고속철)로 일본과 조선을 묶는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일본 철도성은 괴뢰국가인 만주국과 식민지 조선, 일본 본토를 철도로 연결하는 ‘대동아종단철도’ 구상을 발표했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구상의 핵심은 대한해협에 터널을 뚫고 철도를 연결해 만주, 중국 동부 지역과 일본을 오가는 인력·물자를 실어 나르고, 일본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구상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사라졌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 19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한반도 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연계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실현을 강조하면서 남북한 철도협력뿐 아니라 한·일 간 해저터널 연결의 불씨도 되살아나고 있다.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2030~2040년대에는 일본 도쿄에서 한국, 러시아를 거쳐 영국 런던까지 아시아와 유럽 대륙 2만여㎞를 철도로 왕래할 수 있는 대역사가 이뤄진다. 남북 철도연결 사업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 정치적 신뢰 구축,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망과 마찬가지로 한·일 간에도 해저터널과 철도 연결은 경제적 상호 의존을 높이고 양국의 역사적 앙금을 털어낼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주러시아 대사를 지낸 정태익 한국외교협회장은 30일 “한·일 터널은 문명사적으로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의 경제산업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한·일 간 역사적 앙금을 털어내고 공동 번영의 길로 나아갈 기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日서 3개 노선 제시… 부산시도 1개 노선 제안 역대 지도자들은 한·일 터널 가능성에 대해 외교적 덕담 수준으로만 언급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0년 5월 방일 당시 일본 국회에서 한·일 협력 신시대를 열기 위한 터널 건설을 제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9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와 해저터널 건설 구상에 대해 언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3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해저터널이 한·일 우호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와 관련한 연구는 걸음마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일 간 철도연결과 해저터널의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1994년 5월 도버해협에 개통한 50.5㎞의 ‘유로터널’(영·불해저터널)이다. 유럽에서는 18세기부터 도버해협을 터널로 이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1802년 터널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양국이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에서 이 논쟁은 200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지만 1986년 1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사업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영·프랑스 양국은 1994년까지 150억 유로(약 21조 3900억원)의 공사비를 투입해 해저 100m 구간에 터널을 뚫었다. 20년이 지난 현재 한 해 이용객만 2000만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여객선을 이용해 해협을 건너는 데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됐지만 터널 개통을 통해 열차로 최대 20분대에 통과하게 돼 승객의 이동성, 안전성, 편의성이 획기적인 개선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한·일터널 건설은 유로터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관이 많다는 점이다. 우선 양국 간 200여㎞에 달하는 거리와 지형, 수심, 지질 요소뿐 아니라 복잡한 국민 감정, 검증되지 않은 경제성 등이 거론된다. 규슈 북부에서 이키·쓰시마섬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209~230㎞ 구간을 터널과 교량 등으로 잇는 방안이 유력하나 해저 구간만 영·불해저터널의 3배인 140여㎞에 달하고 가장 깊은 곳은 수심이 최대 220m에 이른다. 일본은 한국 통일교와 협력해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을 구성하고 탐사용 갱도를 굴착하는 등 한·일 터널 연결에 있어 한국보다 적극적이다. 1983년 설립된 일·한 터널연구회에서 제시한 해저터널 노선 대안은 세 가지다. A안은 규슈 가라쓰에서 이키섬과 쓰시마섬 하부를 거쳐 거제도로 향하는 총연장 209㎞(해저거리 145㎞) 노선이다. B안은 가라쓰에서 이키섬과 쓰시마섬 중·상부를 거쳐 거제도로 향하는 총연장 217㎞(해저거리 141㎞) 노선, C안은 가라쓰에서 이키섬과 쓰시마섬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231㎞(해저거리 128㎞) 노선이다. 이 터널들의 해저 수심은 155m에서 220m를 통과해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거제도와 연결되는 A안은 대한해협 해저에 분포된 단층과 연약지반을 피해 건설하는 노선으로 총연장이 가장 짧고 수심이 가장 얕다는 장점이 있지만 해저에서의 거리가 가장 긴 것이 약점이다. ●공사 구간·이익 日에 많아… 비용 90%이상 내야 부산과 일본을 연결하는 C안은 해저거리가 가장 짧다는 장점이 있지만 총연장이 가장 길고, 깊은 수심과 해저 단층, 연약지반 구간 등 실제 터널공사에 난제가 많을 것으로 분석됐다. B안은 일본 측에서 A안과 C안의 절충적 성격으로 제시한 것이다. 부산시와 부산발전연구원은 2008년 자체적으로 일본 후쿠오카에서 쓰시마섬을 경유해 가덕도에서 부산 신항 배후 철도와 직접 연결되는 총연장 210㎞의 노선과 부산역과 연결되는 총연장 215㎞ 노선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15~20년의 건설 기간 동안 사업 비용은 최소 85조~123조원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시 연구에 따르면 230㎞ 구간에 철도·도로 병행 단선터널을 뚫을 경우 102조 2000억원, 복선터널을 뚫으면 2배인 201조 1000억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교통연구원과 철도기술연구원은 2003년 한·일 해저터널에 대해 타당성이 없다고 결론 냈다. 터널 착공은 시기상조라는 평과 함께 장기적 검토 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100조원이 넘는 막대한 건설 비용에 비해 터널 운영 수입이 불확실하고 국민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제기됐다. 무엇보다 터널 자체가 한국보다 일본에 득이 되는 구조라는 지적이 가장 크다. 이는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게 됨으로써 부산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연결된 대륙 횡단철도의 기점과 종점으로서 얻게 될 이익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는 의미다. 부산이 대륙의 관문이 아닌 경유지이자 소규모 항만도시로 몰락할 뿐 아니라 한국의 물류산업, 해운업, 관광산업이 위축될 우려가 남는다. 2009년 부산시 의회에 한·일 해저터널 추진 현황에 대해 보고했던 황재윤 경남대 소방방재공학과 교수는 “터널 연결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일본 쪽에서 실시한 것이 많다”면서 “공사 구간도 일본 쪽이 많은 만큼 실제 건설이 이뤄진다면 공사비의 90% 이상은 일본이 부담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터널 실현 땐 지역 신사업 유치 등 균형 개발 도움 반면 한·일해저터널 건설이 국토의 균형개발이나 생활권·경제권의 국제화, 남북한과 동북아의 경제통합 가시화 등 긍적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특히 터널 건설이 동남권을 중심으로 비수도권 지역의 성장을 견인하고 새로운 산업유치, 관광 자원 개발을 촉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제기됐다. 부산발전연구원은 2010년 보고서를 통해 한·일해저터널 사업에 따른 생산 유발효과가 54조 5287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19조 8033억원, 고용 유발효과는 44만 99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정부 차원 연구 없어… “반대 논리라도 필요” 무엇보다 동북아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의 지정학을 고려할 때 해저터널이 단순히 한·일을 연결할 뿐 아니라 북한의 개방을 촉진하고 남북한의 통일을 앞당길 기재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현 시점에서 사업 시행 여부와는 관계없이 해저터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본격적 연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황 교수는 “장기적 관점에서 타당성과 손익 득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제대로 된 연구가 선행돼야 향후 일본에 대해 우리의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다”면서 “반대하더라도 감정적 접근이 아닌 연구를 통한 반대 논리 파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단독] [MB회고록 파장] 역대 대통령 솔직한 고백보다 자기 합리화

    대통령의 기록은 역사적 사료다. 대통령이 퇴임 후 남긴 기록, 회고록은 재임 기간 밝힐 수 없었던 비사(秘史)이며, 후세에게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된다. 특히 대통령 기록물의 보존·관리가 2007년까지 법제화되지 않았던 한국사회에서 대통령의 회고록은 국가적 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에서 판단 기준, 숱한 정상회담 등 외교 관계의 팽팽한 힘겨루기 등 일반인이 접할 수 없는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다음달 2일 출간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알에이치코리아)은 보안 문제를 의식한 탓인지 일반적인 출판 관행과는 조금 어긋났다. 회고록 원고는 출판사 몇 군데를 떠돌았고, 편집부가 최소 서너 차례 이상 교정을 보는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이영인 알에이치코리아 홍보팀장은 “출판사에서 초고를 교정한 뒤 (MB 측에)돌려보냈고, 이후 사실상 김두우 전 홍보수석이 편집장 역할을 도맡았고, 최종 원고본 역시 출판사가 아닌 MB 측에서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껏 10명의 역대 대통령 중 윤보선·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회고록을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공과 좌절-못다 쓴 회고록’(학고재·2009년)을 비롯해 ‘김대중 자서전 1,2’(삼인·2010년), ‘김영삼 회고록 1,2,3’(백산·2000년), ‘노태우 회고록 상,하’(조선뉴스프레스·2011년), 그리고 윤보선 전 대통령의 ‘외로운 선택의 나날’(1991년)이다. 회고록 판매부수가 가장 많았던 이는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성공과 좌절’은 2009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16만부 가까이 팔렸고, ‘김대중 자서전’ 역시 양장본 8만세트와 페이퍼백 형태 보급판까지 더하면 10만세트 가까이 판매됐다. 대통령 사후에 발간됐다는 점도 판매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에서도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 뒤 3~4년 만에 회고록을 낸 뒤 평균 2권 안팎을 남겨왔다. 조지 W 부시의 ‘결정의 순간’(YBM시사·2011년),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물푸레·2004년)는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는 지금까지 5만부 남짓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문제는 회고록의 ‘배신’이다. 역사적 평가자료로서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퇴임 대통령이 회고록을 자화자찬과 자기합리화, 또는 정치적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논란과 비판의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아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출판계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에 대한 성찰은 없이 자신의 치적과 전임 대통령과 정적 헐뜯기에 치중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내용을 외면했다”고 지적한다. 김영준 학고재 편집국장은 “대통령 회고록이 갖춰야 할 가장 큰 미덕은 거짓 없이 솔직하게 기술하는 것”이라면서 “독자인 국민이 회고록을 읽는 이유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정치적 호불호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입장에서 가졌던 고뇌와 판단 근거, 당시 안팎의 상황 등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사설] 개헌 논의 뺀 정치개혁 의미 없다

    여야 수뇌부가 다음달 임시국회 중에 정치개혁 특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하면서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섰다. ‘김영란법’ 처리와 인구수 편차 조정에 따른 선거구 획정 문제 등도 논의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여야의 시각차가 커서 어떤 작품이 나올지 미지수지만 4류 정치라는 혹평을 받는 우리의 정치문화가 일보 전진하는 계기가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관심을 모았던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특위 구성은 합의에 실패했다. 여야가 1시간 가까운 난상토론 끝에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무산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개헌 추진은 경제블랙홀’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집권 세력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경제 회생과 민생 우선이란 논리로 개헌 논의마저 봉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12년 대통령선거 전 기자회견을 통해 현행 헌법의 폐해를 지적하며 4년 중임제 개헌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그 진정성에 더 의문이 간다. ‘19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헌법은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다. 군부독재에 시달려 왔던 국민들의 최대 염원인 평화적 정권교체를 달성하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현행 헌법은 당시 핵심 역할을 했던 1노(노태우)·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의 산물이다. 창의를 생명으로 하는 21세기의 변화와 사고를 담기에는 너무도 낡은 그릇이 됐다. 그동안 우리의 경제 규모는 10배 이상 성장했고 국정 운영의 패러다임 자체도 변했다. 국정의 모든 정책이 대통령 5년 단임제에 따라 5년 단위로 바뀌면서 국가의 장기 전략을 마련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개헌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정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운영의 모든 틀을 결정하고 국민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 규범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임에도 논의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정치권의 직무유기로 볼 수도 있다. 그동안 여야가 경쟁적으로 정치개혁안을 마련해 왔지만 대통령에게 집중된 제왕적 권력을 분산하지 않고는 정치개혁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남북 대치 상황에서는 대통령과 총리로 권한이 나뉘는 이원집정부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어떤 체제가 적합한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또 현재의 대통령제와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채택 여부와는 별개로, 5년 단임제를 유지할지 4년 중임제나 6년 단임제를 할지에 대한 활발한 의견 개진도 필요하다. 큰 선거가 없는 올해가 개헌 논의의 적기일 수 있다. 정치개혁 특위에서 선거구 획정 등 선거제도 개편을 논의하기로 한 만큼 개헌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도 효율적일 수 있다. 개헌 중 권력구조는 차기가 아닌 차차기(2022년 대선)부터 적용하면서 일종의 연착륙을 강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모든 국정이 마비될 것이란 주장도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개헌과 관련한 논의는 할 필요도 있다. 여야가 추후 합리적인 선에서 개헌 특위를 구성하는 문제를 진정성을 갖고 논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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