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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成리스트’ 재판 이완구·홍준표 특급 변호인단 구성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기소된 이완구(65)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61) 경남도지사에 대한 재판이 22일 시작됐다. 두 사람은 호화 변호인단으로 검찰의 공격에 맞설 ‘방어벽’을 구축했다. 이 전 총리 측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엄상필) 심리로 열린 첫 재판에서 예상대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부가 “성 전 회장을 만난 사실도 부인하는 것이냐”고 묻자 이 전 총리의 변호인인 이상원(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는 “자세한 부분은 다음 기일에 답하겠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어 “검찰 측이 증거목록에 포함시킨 증거들이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자료 일체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며 “검찰이 향후 제출할 것들까지 열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검찰은 “시간의 경과 등으로 참고인들의 기억이 흐려지거나 오염될 수 있어 신속한 재판 진행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공판준비기일에는 피고인의 출석 의무가 없어 이 전 총리는 이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날 이 전 총리를 대리한 이 변호사는 노태우 정부 시절 실세로 알려진 박철언 전 국회의원의 첫째 사위다. 이 전 총리의 변호인단은 6명으로 구성됐다. 홍 지사에 대한 재판은 23일 처음 열린다. 홍 지사 측은 이광범(13기) 변호사 등 법무법인 엘케이비앤파트너스 변호사 6명을 추가 선임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출신인 이광범 변호사는 이상훈 대법관의 동생으로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 사건’ 특별검사를 맡기도 했다. 홍 지사의 변호인단은 모두 8명이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이완구 홍준표, 재판장 사법연수원 동기 변호사 선임…왜?

    이완구 홍준표, 재판장 사법연수원 동기 변호사 선임…왜?

    이완구 홍준표 이완구 홍준표, 재판장 사법연수원 동기 변호사 선임…왜? 서울지방변호사회(김한규 회장)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재판장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변호사를 선임했다며 재판부 재배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서울변회는 23일 성명을 내고 “재판 직전에 이르러 재판장과 동기인 전관 변호사를 추가 선임하는 것은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재판장과의 연고관계나 전관의 영향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며 이같이 요구했다. 서울변회는 서울중앙지법이 내달 1일부터 형사재판부와 학연·지연 등 연고가 있는 변호사가 선임된 사건은 재판부 스스로 재배당을 요청하겠다고 한 점은 언급하며 “재배당 제도가 시행되면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법원에 재배당을 요청할 것을 정중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22일 첫 공판준비기일을 한 이 전 총리는 변호인으로 서울고법 판사 출신인 이상원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 변호사는 노태우 정부 시절 실세 박철언 전 의원의 사위로 이 사건 재판장인 엄상필 부장판사와 같은 연수원 23기다. 홍 지사 역시 23일 공판준비기일을 앞두고 법무법인 엘케이비(LKB)앤파트너스 이철의 대표변호사 등을 선임했다. 이철의 변호사는 사건 재판장 현용선 부장판사와 연수원 24기 동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단독] [여론조사] 50·60대 “박정희” 20·30대 “노무현”… 세대 둘로 갈렸다

    [단독] [여론조사] 50·60대 “박정희” 20·30대 “노무현”… 세대 둘로 갈렸다

    국민 10명 가운데 3명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각각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을 꼽은 이들은 50~60대에서, 노 전 대통령은 20~40대에서 두드러지는 등 세대 괴리가 선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0명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보수’에 해당하는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41.2%)과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목한 응답(42.1%)이 팽팽하게 맞선 것으로 드러났다. 16일 서울신문의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박 전 대통령(33.6%)과 노 전 대통령(29.3%)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 직선제 개헌 이후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12.8%)만 두 자릿수를 넘겼을 뿐, 노태우·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은 채 1%에도 못 미쳤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응답은 세대별로 극명하게 엇갈렸다. 박 전 대통령을 꼽은 이들은 50대(49.9%)와 60대 이상(54.5%) 등 고연령층에서 두드러졌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긍정 평가한 응답자(66.6%)와 새누리당 지지자(58/0%)에서 높게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44.6%)과 대전·충청·세종(45.8%)에서 높았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은 20대(45.8%)와 30대(42.9%), 40대(39.0%)에서 두드러졌다. 박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부정 평가한 응답자(43.0%)와 새정치민주연합(44.6%) 지지자에서 높았다. 지역별로는 부산·울산·경남(33.5%)만큼이나 호남(33.9%)에서 높게 나타났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50~60대에게 박 전 대통령은 독재 등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산업입국 토대를 닦은 지도자란 이미지가 강력하다”면서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와 선명한 대조를 이뤄 평가받는 측면과 함께 소외계층의 대변자 이미지와 비극적 죽음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세대 양극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며 “산업화 혜택을 누린 50~60대가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하고, ‘삼포세대’인 20~30대 젊은 층은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기무사 반세기 만에 첫 고강도 쇄신

    조현천 국군기무사령관(중장)이 10일 군사기밀 유출을 포함한 직원들의 심각한 기강 해이에 대해 사죄하고 수십년간 맡아 온 군사 보안과 방첩 기능이 현 안보 상황에 적합한지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1970~80년대 군의 정치 개입이라는 오명을 쓰며 한국 정치사를 뒤흔들어 왔던 기무사가 존폐 위기에 몰리자 사상 초유의 쇄신책을 강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군 내부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기관’으로 통하던 기무사의 이례적인 자기반성이 지난 수십년간 쌓여 온 군의 적폐를 청산하고 군을 개혁할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조 사령관은 이날 기자들을 만나 최근 기무사 직원들이 중국인과 방위산업체 등에 군사기밀을 유출해 구속된 사건 등을 언급하며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기무사의 존재 가치를 의심케 하는 사건으로 인식해 강도 높은 혁신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밝혔다. 조 사령관은 “한시적으로 내외부 인원이 포함된 특별직무감찰팀을 편성해 연말까지 전 기무 부대를 대상으로 직무 감찰을 할 계획”이라면서 “윤리강령을 개정해 위반 시 ‘원아웃제’로 퇴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사령관은 또한 “감찰, 인사, 예산 등 일반 부대원과 순환 보직이 가능한 직위는 개방형 직위로 운용해 기무사 특유의 폐쇄형 인사 관리 폐해를 해소하겠다”면서 “50년 이상 시행해 온 기무사의 임무와 기능이 현 안보 상황과 업무 환경에 맞는지 혁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임무, 기능, 조직, 편성 등에 대해 대대적인 연구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사 자료를 생산하는 단계에서 이를 파기하기까지 전 과정의 이력이 저장되는 기밀 자료 관리 시스템도 정착시키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군에서 정보를 다루는 폐쇄적인 조직인 기무사가 개방형 직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이례적이다. 1948년 육군 정보국 특별조사과에서 비롯된 기무사는 1977년 보안사령부로 개편되면서 1979년 12·12쿠데타를 주도하는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해 왔다는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 따라 1991년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지만 여전히 군 내부에서 폐쇄적이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 기관으로 여겨진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기무사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것으로, 군 개혁의 기폭제가 될지 주목된다”면서 “국민에게 신뢰를 주려면 1980년대 국민을 강제로 동원한 삼청교육대 등 과거사에 대한 역사 바로잡기 등이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사설] 지방자치 부활 20년… 주민 위한 지방자치 돼야

    오늘은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제헌의회는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을 제정했지만, 6·25 전쟁 등으로 첫 지방의회 선거는 1952년으로 늦춰졌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지방자치는 중단됐다.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지방자치가 중단된 지 30년 만인 1991년 지방자치 의회가 부활했고, 단체장 선거는 1995년에 부활했다. 그래서 오늘은 명실상부한 지방자치 부활 20년이 되는 의미가 있는 날이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부활한 뒤 가장 큰 변화는 주민들을 위한 공무원의 서비스 개선이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은 동사무소·면사무소를 이용하면 바로 느낄 수 있다. 군림하던 지방정부의 공복들이 주민들을 위한 서비스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선거를 의식해 단체장들이 주민 서비스를 강화한 덕분이다. 주민이 직접 짜는 ‘주민참여예산제’나 ‘마을 살리기’와 같은 지역공동체 복원은 주민의 참여 속에 지속되고 있다. 지역 특성에 맞는 일자리 창출도 늘어나고 있다. 지자체장들이 지역을 돌며 현장에서 민원을 청취하고, 지방의회 의원들도 주민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을 발굴하고 있다. ‘우리들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우문현답’과 같은 신조어가 나올 정도가 됐다. 물론 문제점도 많다. 줄어들고는 있지만 연말 보도블록 교체는 여전하다. 수백억원, 수천억원이 투입된 호화 청사도 경쟁적으로 들어섰다. 주민을 위한 게 아닌, 단체장과 공무원을 위한 호화 청사다. 단체장의 과시욕에 따라 주민, 관광객도 거의 찾지 않는 문학관·역사관을 건설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단체장들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면 이렇게 돈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럴해저드도 없다. 지방재정 파탄의 중요한 요인인 국제경기 유치도 이젠 자제해야 한다. 인천은 2014년 하계아시안게임을 치르고서 재정이 파탄 날 지경이다. 강원도도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규모 있게 치르지 않으면 엄청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지방의회 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출장도 여전히 시정되지 않고 있다. 선거 때에는 표를 달라고 하면서도, 선거가 끝나면 주민을 우습게 보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방자치로 주민들의 삶의 질이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지자체장이 공약사업이라는 이유로 타당성이 떨어지는 선심성 사업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지역주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해 왔던 사업들이 결국은 주민의 행복보다는 부담만 초래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특별하지도 않은 행사에 과도한 예산이 투입되지 않도록 주민들의 감시도 강화돼야 한다. 주민들이 잘못한 단체장을 소환할 수 있는 제도도 좀더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지방자치가 민생을 제대로 챙기려면 무엇보다 재정 분권이 강화돼야 한다. 중앙정부는 지방재정 현실화를 위해 세목(稅目) 변경이나 지방교부세 확대 등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급속한 노령화 탓에 사회복지 분야에서 지방정부의 역할이 커지는 만큼 중앙정부가 재정 분권 강화를 도와 실질적 혜택이 주민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 [씨줄날줄] 대통령의 노래/최광숙 논설위원

    마오쩌둥 사망 이후 화궈펑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덩샤오핑 중국 전 주석은 1979년 9월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는 방미 기간 중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로데오 경기를 관람했다. 공식석상에서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열창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중국에 대해 거부감과 경계심을 갖고 있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우상 엘비스의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고 친근한 지도자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그로부터 27년 후인 2006년 6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역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엘비스의 생가가 있는 멤피스를 방문해 기타 치는 엘비스를 흉내 내며 서투른 영어 발음으로 ‘러브 미 텐더’ 등 엘비스의 노래를 불렀다. 엘비스의 열렬한 팬인 고이즈미는 이를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밀월관계를 보여 주는 데 적극 활용했다. 노래 솜씨가 꽤 좋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도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애창곡 ‘베사메무초’를 불러 멕시코 국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이렇듯 정치인들의 노래는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부르는 노래와 다르다. 노래를 부르는 장소와 선곡 등에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외교 무대에서는 외교 행위가 되고, 정치 무대에서는 고도의 정치행위가 되는 것이 정치인들의 노래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선택한 노래는 찬송가다. 그는 지난 26일 백인 청년의 총기 난사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영결식에 참석해 갑자기 반주도 없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러 잔잔한 감동을 줬다.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노래에 이내 6000여명의 참석자들은 모두 일어나 대통령과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연설에 나선 오바마는 희생자 9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은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다. 백인에 대한 성토보다는 신의 은총을 얘기하며 이번 사건으로 상처받은 미국민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신의 은총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인권 문제, 흑백 갈등을 하룻밤 사이에 개선할 수 없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래 기억될, 사회 통합에 대한 역대 대통령 최고 수준의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를 한다며 국민 심판까지 운운했다. 당에 ‘퇴출’을 명해 여권 내 친박·비박 간 갈등이 고조되는 분위기다. 공당의 원내대표를 온 나라가 떠들썩하도록 거칠게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이에 어린아이처럼 처절하게 반성문을 읊조리는 원내대표를 보면서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국민들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노래 한 구절로 상처받은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준, 오바마의 통합 리더십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朴대통령 관례 깨고 日보다 中 먼저 방문… 최악 갈등의 ‘서막’

    [새로운 50년을 열자] 朴대통령 관례 깨고 日보다 中 먼저 방문… 최악 갈등의 ‘서막’

    2013년 6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 다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자 일본 언론들은 “한국이 중국과 밀착해 일본을 소외시키는 것 아니냐”며 들끓었다. 일반적으로 우방인 미국 다음으로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의 한·일 관계는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에 비유된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 6월 이전까지 일본은 적대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 후 군사동맹을 맺지 않았지만 우호협력적 안보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 과정에서도 왜곡된 역사 인식 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제일주의와 경제 실리 외교를 표방했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겠다는 데 기대를 걸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1월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한·일 관계 정상화가 “자유 진영 상호 간의 결속을 강화해 극동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6·3 사태로 불리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 등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문제는 한국 내 부정적 대일 여론 못지않게 일본 내 한국에 대한 우월감도 심각했다.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던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상도 1963년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일본 주요 정치가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결여돼 있었다. 1970년대에는 일본 한복판에서 중앙정보부가 당시 야당 의원이던 김대중씨를 납치한 사건(1973년), 재일 교포 문세광이 영부인이던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사건(1974년) 등이 겹치며 한·일 관계는 단교 직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80년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일본에 대한 ‘안보 무임승차론’을 내세워 경제적 실익을 얻고자 했다. 1981년 당시 노신영 외무부 장관은 일본 정부에 “한국이 소련, 중국, 북한의 위협 속에서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해 일본의 안보를 지켜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일본은 한국에 안보 경제협력 자금으로 100억 달러를 지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본은 이 구상에 반발했지만 결국 1983년 1월 한국에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차관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 미국과 소련 간 신(新)냉전이 격화된 시기라 가능했던 일로 평가받는다. 한·일 양국은 1982년 일제의 침략을 ‘진출’로, 3·1 운동을 ‘폭동’으로 표현한 일본의 고교 역사교과서 문제로 외교적 마찰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해 사실상 처음으로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이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1990년대 탈냉전을 맞아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하자 한·일 간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 관계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때는 일본의 군사력 확대와 군국주의 회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는 시기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8월 일본 고노 요헤이 관방 장관이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하고 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등(무라야마 담화) 한·일 관계가 순풍을 타는 듯했다. 하지만 1996년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김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강력히 반발하며 양국 관계는 다시 극도로 악화됐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악화된 대일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1998년 8월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본토 상공을 지나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도 한국과의 안보 협력 필요성에 공감했다. 김 대통령은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미래지향적인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며 한·일 간 장관급, 실무 국장급 교류와 재해 구난을 위한 공동 훈련(SAREX)을 실시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집권하면서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이 다시 갈등의 핵으로 떠올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는 시마네현이 독도 영유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파동을 겪었다. 고이즈미 총리 본인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등 일본의 도발이 잇따랐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임기 초 노무현 정부에서 악화됐던 한·일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는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2009년 9월부터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총리가 역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2011년 12월 교토에서 열린 일본 노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정면 충돌했다. 2012년 6월 양국 정부가 체결하려던 군사 정보보호협정은 국내 여론의 압박에 무산됐다. 같은 해 8월 이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적으로 방문하면서 일본 내 반한 감정에 불이 붙었다. 이후 일본 자민당의 총선 승리로 재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부정하기 위해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밝혀 한·일 관계는 다시 얼어붙게 됐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28일 “지난 50년간 한·일 관계가 냉탕과 온탕을 오갔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는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부 차원에서 이를 쉽게 봉합할 수 있었다”면서 “21세기 들어서 여론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를 의식한 정치 지도자들이 악화된 한·일 관계를 봉합하기 어려워진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꼼수정치는 결코 원칙의 정치를 이길 수 없다

    [김형준 정치비평] 꼼수정치는 결코 원칙의 정치를 이길 수 없다

    국회의 정부 시행령 수정 권한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로 행정입법에 수정·변경을 ‘요구한다’는 문구를 ‘요청한다’로 바꿔 개정안을 정부로 송부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국회가 개정안의 강제성과 위헌성을 해소했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박 대통령이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에서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당내에서는 “대통령의 거부권에 맞서면 곤란하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반박의 대표 주자인 이재오 의원조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여당이 재의(再議)에 부치는 건 곤란하다”며 동조하고 있다. 13대 국회 이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모두 14번(노태우 대통령 7번, 노무현 대통령 6번, 이명박 대통령 1번) 있었다. 7번은 재의가 무산됐고, 7번은 재의돼 6번은 부결, 1번은 가결됐다. 집권당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2003년 11월에 처리된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사건 특검법안’만이 가결됐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여당이 국회에서 재의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폐기하는 게 옳은가. 이것은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헌법 제53조에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회는 재의에 붙이고,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은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고 규정돼 있다. 물론 언제까지 재의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정상적인 국회라면 당당하게 재의에 부쳐야 한다. 이것이 대통령제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법 재개정이 삼권분립을 훼손했기 때문에 모든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거부하려고 하는데 정작 집권당이 재의를 피한다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집권당이 스스로 청와대의 여의도 파출소로 전락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을 재의에 부치는 것은 결코 대통령과 여당이 맞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의결 절차를 거쳐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지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 수 있다. 법적 조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음에도 집권당이 대통령의 심기만을 살피면서 정치적인 목적과 당파적 이익만을 좇아 헌법을 무시하면 정도 정치가 아니다. 더 심하게 표현하면 정당 민주주의를 죽이는 것이다. 새누리당 일부에서는 재의결이 통과되면 대통령이 탈당할 수 있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가 미래 권력인 김무성 대표를 길들이고 유승민 원내 대표를 찍어 내려는 것이라는 말까지 들리고 있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아무리 정치적 해석과 판단에 대한 무한 자유가 있더라도 박 대통령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원칙주의자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사학법 개정 투쟁에서 보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엄동설한에 장외 투쟁까지 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사람이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 고비마다 특유의 승부수를 던져 모두 성공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보다는 원칙을 갖고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음모론적이고 공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행정부와 입법부, 당·청 간의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수용한 뒤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는 것이 최상이다.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면 실제 판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국회법 재개정의 효력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끝까지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여당 지도부에 반드시 재의결에 부쳐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정 국회의장도 “과거에는 재의에 안 부치고 깔아뭉개고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 않은가. 대통령의 신중하고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
  • [메르스 비상] 국내외 정상 외국 방문 취소 사례

    해외 순방을 앞둔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방문 일정을 축소, 연기, 취소한 사례는 많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지난해 5월 중동 순방을 앞두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면서 예정됐던 일정을 대폭 줄여 1박 3일로 아랍에미리트(UAE)의 한국형 원자로 설치 현장을 방문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0년 4월 미국 방문에 이어 멕시코와 아이티를 순방할 예정이었으나 천안함 폭침 사고 수습을 위해 급히 취소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월 헝가리와 폴란드, 터키, 이탈리아 등 유럽 4개국 순방을 연기했다. 당시 청와대는 국내 사정을 이유로 순방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국내 사정이란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 스캔들로 불렸던 ‘한보 사태’를 말한다. 한보철강의 부도와 이에 관련한 권력형 금융 부정 및 특혜 대출 비리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을 거듭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1990년 5월 일본과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4개국 방문 계획을 변경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일본만 방문하고 미국, 캐나다, 멕시코 순방은 미뤘다. 현대중공업의 극심한 노사 분규와 함께 KBS에도 경찰 병력이 투입되는 등의 정국 혼란이 원인이었다. 특히 당시 민주자유당 김영삼, 김종필 최고위원이 “국난의 시기에 대통령이 장기간 외국에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 것도 미국 방문 연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과는 좀 다르지만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미국 방문을 계획했으나 연기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등으로 인한 국내 문제도 있었지만 이라크 사태 악화로 인한 미국 내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 2013년 10월 연방정부 ‘셧다운’(업무 정지) 사태의 여파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불참은 미국으로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3월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안) 문제, 4개월 뒤 멕시코 걸프만 기름 유출 사고를 빌미로 순방을 취소했다. 10월에는 세 번째로 순방을 취소하면서 아시아 중시 전략은 빈말이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막걸리 한잔 박정희·자전거 탄 노무현… ‘미니 청와대’서 다시 보는 역대 대통령

    막걸리 한잔 박정희·자전거 탄 노무현… ‘미니 청와대’서 다시 보는 역대 대통령

    충북도 청남대관리사업소가 4일 청남대 대통령기념관에서 대통령 기록 사업 준공식을 한다. 109억원이 투입된 이 사업은 대통령기념관, 대통령 역사 기록화, 대통령 동상 등 세 가지로 진행됐다. 실제 청와대의 60% 크기인 대통령 기념관은 7100㎡ 부지에 연면적 2837㎡(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푸른색 기와 등 겉모습은 청와대와 같다. 지하 1층에는 정상회담 등 대통령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실제와 똑같이 꾸며 놓은 세종시 국무회의장 등이 마련됐다. 지상 1층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10명의 업적과 생애를 각각 담은 가로 3m, 세로 2m의 초대형 그림 20점이 진열됐다. 이 작업에는 2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대통령 전용 별장이던 청남대를 민간에 돌려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종시 건설과 남북 정상회담, 소박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 등이 그림에 담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농촌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 등이 그려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6·29선언과 국방외교, 올림픽 개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청산과 6·15 남북 공동선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민주산악회 활동 모습과 금융실명제 등이 그림으로 기록됐다. 20억원이 투입된 역대 대통령 10명의 동상은 청동으로 제작돼 대통령기념관 주변에 배치됐다. 230㎝ 높이로 만들어진 동상은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국민과 소통하려는 온화한 대통령의 모습을 표현했다. 광화문 세종대왕 조각상으로 유명한 김영원 작가가 맡았다. 이시종 지사는 “청남대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헌신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차별성 있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청댐 인근인 청주시 문의면에 위치한 청남대는 1984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사용됐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씨줄날줄] 국정홍보/문소영 논설위원

    한국 국정홍보의 역사는 기만과 술수의 ‘흑역사’에 가깝다. 독재 정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된 탓이다. 독재국가나 전제국가가 아닌 민주공화국에서 갈등과 분열은 당연하다. 갈등을 조정하기 못해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정책을 밀어붙이면 그 정책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단임제 대통령제에서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되기 십상이다. 노무현 정부가 고가 아파트에 종합부동산세를 부과했지만 여야 정권교체가 되고 나서 백지화됐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정권을 계승한 박근혜 정부의 부담이다. ‘공보’는 1945년 광복 후 미 군정에서 시작된 이래 주로 정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됐다. 이승만 정부는 정적 제거와 독재에 대한 저항을 무마하고자, 박정희 정부는 5·16 쿠데타의 당위성을 주지시키고 반대세력을 제압하는 데 활용했다. 특히 ‘삼권분립이 와해’된 유신체제에 돌입한 1972년부터 박정희 정부의 장기 집권을 정당화했다. 정권을 비판한 기자들을 해직시킨 1974년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가 대표적이다. 전두환 정부도 국정홍보라는 명분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왜곡 선전을 일삼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해 지금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은 사건·사고의 보도 여부를 ‘가·불가·절대불가’로 구분한 뒤 보도방향·논조·형식까지 구체화했는데, 이는 계엄령 아래서의 언론 사전 검열의 연장이었다. 1986년 월간 ‘말’이 폭로한 ‘보도지침 사건’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비서실의 정무수석이 개입했다. 노태우 정부 말인 1990년 문화부와 공보처가 분리됐다. 공보처는 신문·방송 등 언론 통제를 담당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악명 높은 공보처를 폐지했다가 1999년 국정홍보처로 부활했다. 노무현 정부는 국정홍보처를 계승했는데, 각 부처 기자실 폐쇄와 브리핑룸 신설 등으로 기자들과 크게 갈등했다. 이명박 정부는 ‘언론 프렌들리’를 내세워 이 부처를 해체해 문화체육관광부로 흡수했다. 이명박 정부 내내 국정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했지만, 부처를 신설하지는 않았다. 박근혜 정부 중반에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정홍보 담당 차관보 직제를 신설한 뒤 이의춘 미디어펜 대표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국정홍보 담당 차관보의 목적은 ‘국민 소통 강화’라고 했다. 그러나 이 차관보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나라를 마비시키고 있다”거나, “반미 반체제 좌파 인사들이 파리 떼처럼 달라붙어 반정부 투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좌파 시민단체는 악마의 집단 같다”고도 했고, ‘땅콩회항’을 두고 “조현아는 한국의 ‘앙투아네트’가 됐다”고도 했다. 국정홍보를 담당하는 자리에는 통상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발탁해 왔으니 어찌 보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면 “대국민 소통 강화”라는 명분은 떼어내야 하지 않겠나.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진실 왜곡한 檢·法 책임져야”

    “진실 왜곡한 檢·法 책임져야”

    “유서는 김기설 본인이 쓴 것이고 강기훈이 쓴 게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받는 데 무려 24년이 걸렸다. 당연한 판결을 받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4년 만에 누명을 벗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강기훈(51)씨가 검찰과 법원의 사과를 요구하며 법적 대응에 나설 방침을 시사했다. 강씨는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이메일을 보내 재심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지 나흘 만에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난 14일로 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며 “이제 역사적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당시 수사 검사들과 검찰 조직은 제가 유서를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왜곡했다”며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그는 “1991년, 1992년은 물론 재심 후에도 2009년 검찰 재항고 사건을 3년이나 방치하고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며 “한마디 사과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강씨는 “저를 끝으로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면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간암 투병 중인 강씨는 대법원 선고 때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건강이 악화돼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다”면서 “사건을 되새기며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몸이 감당하기 어려워 앞으로도 직접 제 말씀을 드리는 건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강대에서 분신했을 당시 유서를 대신 써 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1992년 징역 3년이 확정됐다. 그는 재심 끝에 24년 만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진실 왜곡 지금이라도 인정, 사과해야”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진실 왜곡 지금이라도 인정, 사과해야”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진실 왜곡 지금이라도 인정, 사과해야”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51)씨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검찰과 법원의 사과를 공식 요구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강기훈씨는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입장을 내고 “당시 수사 검사들과 검찰 조직은 제가 유서를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 진실을 왜곡했다”면서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씨는 “법원은 1991년, 1992년은 물론, 재심 후에도 2009년 검찰 재항고 사건을 3년이나 방치하고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며 “법원도 한 마디 사과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강씨는 그러면서 “’유서는 김기설 본인이 쓴 것이고 강기훈이 쓴 것이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것을 확인받는데 무려 24년이 걸렸다”며 “당연한 판결을 받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어 ”저를 끝으로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14일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돼 1992년 징역 3년형을 확정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재심 끝에 24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강씨는 암 투병 중이어서 이번 선고 당시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강씨는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건강이 악화해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다”며 “사건을 되새기며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몸이 감당하기 어려워 앞으로도 직접 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오늘 5·18 35주년] 5·18 민주화운동이란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에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가리킨다.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종신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서 생긴 권력 공백을 이용해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처음엔 총검과 곤봉을 사용했지만 이내 소총과 기관총까지 등장했고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기를 탈취해 시민군을 결성하고 저항에 나서자 계엄군은 5월 21일 시 외곽으로 후퇴한 뒤 5월 27일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시 전체를 점령했다. 그 기간 동안 광주에선 시민들이 정부행정기관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자체적으로 공동체 질서를 유지했다. 공식 기록으로는 광주와 주변 지역에서 시민 165명이 사망하고 76명이 실종됐으며 3383명이 부상당했다. 또 1476명이 체포됐다. 102명은 포위 당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5·18은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됐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광주사태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정부 용어가 바뀌고 피해 보상이 실시됐다. 1995년에는 국회가 가해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7년에는 5월 18일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됐고 2002년에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묻었던 망월동 묘지가 국립묘지가 됐다. 피해자들은 국가유공자로서 수혜 자격을 얻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진실 왜곡 지금이라도 잘못 인정해야”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진실 왜곡 지금이라도 잘못 인정해야”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진실 왜곡 지금이라도 잘못 인정해야” 강기훈 검찰 법원에 사과 요구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51)씨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검찰과 법원의 사과를 공식 요구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강기훈씨는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입장을 내고 “당시 수사 검사들과 검찰 조직은 제가 유서를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 진실을 왜곡했다”면서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씨는 “법원은 1991년, 1992년은 물론, 재심 후에도 2009년 검찰 재항고 사건을 3년이나 방치하고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며 “법원도 한 마디 사과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강씨는 그러면서 “’유서는 김기설 본인이 쓴 것이고 강기훈이 쓴 것이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것을 확인받는데 무려 24년이 걸렸다”며 “당연한 판결을 받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어 ”저를 끝으로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14일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돼 1992년 징역 3년형을 확정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재심 끝에 24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강씨는 암 투병 중이어서 이번 선고 당시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강씨는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건강이 악화해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다”며 “사건을 되새기며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몸이 감당하기 어려워 앞으로도 직접 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뒤집힌 국과수 감정 결정적… ‘눈물의 24년’ 사죄하는 이 없다

    뒤집힌 국과수 감정 결정적… ‘눈물의 24년’ 사죄하는 이 없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강기훈(51)씨가 마침내 24년에 걸친 기나긴 한을 풀었다. 정권의 폭력이 만들어낸 ‘유서 대필’ 사건에서 완전히 결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검찰이나 사법부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는 현재 간암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강씨에 대한 재심 사건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24년 전 유죄 선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筆跡)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본 원심이 정당하다고 확인했다. 이 사건은 1991년 ‘분신 정국’에서 비롯됐다. 그해 4월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집단구타를 당해 숨졌다. 공권력의 폭력에 분노한 대학생과 노동자가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일이 잇따랐다. 그 중 한 사람이 그해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강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당시 26세)씨였다. 당시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김씨의 죽음을 매도했다. 검찰은 전민련 동료였던 강씨를 자살 배후로 지목했다.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 내지 종용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당시 나이 27세. 공안당국의 수사 결과 발표에 민주화 진영은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고, 정국은 반전됐다. 강씨는 이듬해 징역 3년이 확정돼 만기까지 복역해야 했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른 뒤에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으로 억울함을 풀 기회를 잡았다. 개시 과정도 순탄치 않았던 재심 결과를 180도 바꾼 강력한 근거는 공교롭게도 국과수의 새로운 감정 결과였다. 국과수는 2007년(과거사위 의뢰)에 이어 2013년 재심 과정에서 두 번째 감정 결과를 내놨다. 뒤늦게 발견된 김씨의 노트·낙서장을 감정한 결과, 유서의 필적과 일치한다고 결론지은 것. 재심 재판부는 이를 토대로 “관련 증인의 진술과 내용 등에 비춰 볼 때 유서는 김씨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심 대상이 아니었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이 확정됐다. 이미 복역했기 때문에 재수감되지 않는다. 진실 규명 결정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도 8년이나 걸렸다. 그 사이 간암을 앓게 된 강씨는 이날 대법원 선고를 직접 지켜보지 못했다. 선고 3~4일 전부터 주위와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이 짧게 낭독되자 오랜 세월 강씨를 지지해 왔던 30~40명이 함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법당국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다. 김상근 목사는 “진실을 덮은 어둠을 빛이 이기기까지 24년이 걸렸다”며 “그동안 이 사건을 조작하고 왜곡한 검찰과 정부는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상교 변호사는 “검찰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재심 과정에서도 계속 새로운 증거를 만들어냈다”며 “이 사건은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배상 청구 등 국가의 책임을 묻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0년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독일에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반역자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었던 프랑스 장교 사건을 말한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열린세상]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아시나요/김명식 대구가톨릭대 경찰행정학과 부교수

    [열린세상]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아시나요/김명식 대구가톨릭대 경찰행정학과 부교수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공무원연금, 북핵 문제와 한·일 관계 등 산적한 현안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이때 국정에 도움을 줄 스승과 같은 원로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원로를 국어사전에서는 나이나 벼슬, 덕망이 높은 벼슬아치나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경륜을 국정에 반영할 통로가 잘 작동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국정에 원로들의 조언을 듣는 제도는 박정희 정부 때 처음 도입됐다. 1963년 12월 17일 제정된 ‘정치자문회의 설치법’과 1970년 4월 3일 제정된 ‘통일고문회의 규정’이 대표적이다. 전자의 경우 1980년 12월 17일 폐지될 때까지 전직 대통령 또는 부통령, 국무총리 또는 내각수반, 국회의장, 대법원장, 기타 정계의 중진으로 구성해 주요 국가 정책에 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했다. 정치자문회의는 국정자문회의로 이름이 바뀌어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9호) 제66조에 규정됐다. 1980년 12월 18일 제정된 ‘국정자문회의법’은 1988년 2월 25일 폐지될 때까지 3부 요인을 비롯한 각계 원로가 망라됐다. 국정자문회의는 다시 국가원로자문회의로 이름만 고쳐 내용은 거의 동일하게 제6공화국 헌법(10호) 제90조에 반영돼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출범과 함께 제정된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은 시행 후 회의 한번 열지 못하고 1년여 만에 폐지됐다. 그 이유는 정치자문회의나 국정자문회의 때와 달리 헌법 규정에 따라 의장이 전두환 직전 대통령이 되다 보니 사무처의 총장을 장관급으로, 차장을 1급으로, 비서실장을 차관급으로 하는 등 보좌 조직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간접선거로 선출됐으나 헌정 질서의 중단 없이 최초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라는 긍정 평가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상왕’ 역할을 시도한 것으로 인식돼 법률마저 폐지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여전히 현행 헌법상 유효한 공식 기구다. 법률이 폐지됨으로써 1989년 이후 역대 정부는 다른 방법으로 원로들을 활용해 왔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는 2009년 5월 28일 대통령령으로 ‘국민원로회의 규정’을 제정해 국민 원로를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국민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정의하고 회의를 수시로 소집해 국정 전반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당시 국민원로회의의 사무 기능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미래기획위원회 실무추진단이 담당했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5개 자문회의 중 국가안전보장회의(91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92조), 국민경제자문회의(93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127조)는 관련 법률에 따라 정상 운영되고 있다. 이들 자문기구를 ‘위원회’로 표현하지 않고 ‘회의’로 한 이유는 현직 대통령이 의장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면서 참석 위원들로부터 조언과 건의를 ‘직접’ 들어 의사 결정에 참고하라는 의미다. 이 점에서 논의된 내용과 결과를 ‘간접’ 보고받는 대부분의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와 다르다. 또 유의할 사실은 헌법 제90조부터 제93조까지의 자문회의 규정은 제2장(정부) 제2절(행정부) 제2관(국무회의)에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헌법상 국정의 최고 심의기구인 국무회의를 대통령이 주재하는 데 경륜과 전문성이 풍부한 사람들로부터 미리 도움을 받아 국무회의에서 심의·결정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는 국가원로자문회의도 헌법 취지에 맞게 구성·운영하는 것을 적극 검토할 때가 됐다. 물론 종전처럼 사무처를 크게 따로 둘 필요 없이 기존의 청와대 참모 조직이 맡으면 된다. 헌법상 직전 대통령이 맡는 의장 규정이 부담스러우면 의장이 지명한 수석부의장이 대행하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처럼 운영해도 된다. 인생이 점이 아닌 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국가 또한 과거 역사와 단절할 수는 없다. 우리 후손들에게 행복하고 안정된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역대 정부의 공과를 포용하며 국가 원로들의 진정성 있는 의견을 적극 경청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필적 감정 결과 신빙성 없다”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필적 감정 결과 신빙성 없다”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필적 감정 결과 신빙성 없다” 대법원 입장 보니?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51)씨가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24년 만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당시 검찰은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를 자살의 배후로 지목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의 필적(筆跡)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강씨는 그해 7월 자살방조죄로 재판에 넘겨져 1992년 징역 3년 확정 판결을 받아 만기출소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으로 보인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놨다. 강씨는 재심을 청구한 지 4년여만인 2012년 10월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결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재심을 개시하면서 1991년 국과수 감정인이 혼자서 유서를 감정해놓고도 4명의 감정인이 공동 심의했다고 위증한 점을 지적하며 이를 토대로 한 과거 판결은 재심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국과수는 2013년 12월 유서 필체에 대한 새로운 감정 결과를 내놨고, 2014년 2월 서울고법은 이를 토대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유죄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보’자를 ‘오’자처럼 보이도록 쓰는 김씨 필체의 특징이 유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지만 강씨의 필체는 이와 전혀 달랐고, 검찰이 제시한 다른 증거만으로는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썼다고 보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강씨는 다만 서울고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재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별도로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이날 이 부분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강씨가 이미 3년간 복역했기 때문에 재수감은 되지 않는다. 무죄 확정에 따라 징역 1년을 초과한 구금일수에 대해서는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간암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강씨는 이날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자살방조죄 누명 벗어” 억울한 옥살이 보상은?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자살방조죄 누명 벗어” 억울한 옥살이 보상은?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51)씨가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24년 만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당시 검찰은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를 자살의 배후로 지목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의 필적(筆跡)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강씨는 그해 7월 자살방조죄로 재판에 넘겨져 1992년 징역 3년 확정 판결을 받아 만기출소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으로 보인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놨다. 강씨는 재심을 청구한 지 4년여만인 2012년 10월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결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재심을 개시하면서 1991년 국과수 감정인이 혼자서 유서를 감정해놓고도 4명의 감정인이 공동 심의했다고 위증한 점을 지적하며 이를 토대로 한 과거 판결은 재심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국과수는 2013년 12월 유서 필체에 대한 새로운 감정 결과를 내놨고, 2014년 2월 서울고법은 이를 토대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유죄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보’자를 ‘오’자처럼 보이도록 쓰는 김씨 필체의 특징이 유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지만 강씨의 필체는 이와 전혀 달랐고, 검찰이 제시한 다른 증거만으로는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썼다고 보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강씨는 다만 서울고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재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별도로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이날 이 부분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강 씨가 이미 3년간 복역했기 때문에 재수감은 되지 않는다. 무죄 확정에 따라 징역 1년을 초과한 구금일수에 대해서는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간암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강씨는 이날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필적 감정 결과 신빙성 없다” 대법원 입장 보니?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필적 감정 결과 신빙성 없다” 대법원 입장 보니?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필적 감정 결과 신빙성 없다” 대법원 입장 보니?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51)씨가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24년 만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당시 검찰은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를 자살의 배후로 지목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의 필적(筆跡)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강씨는 그해 7월 자살방조죄로 재판에 넘겨져 1992년 징역 3년 확정 판결을 받아 만기출소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으로 보인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놨다. 강씨는 재심을 청구한 지 4년여만인 2012년 10월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결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재심을 개시하면서 1991년 국과수 감정인이 혼자서 유서를 감정해놓고도 4명의 감정인이 공동 심의했다고 위증한 점을 지적하며 이를 토대로 한 과거 판결은 재심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국과수는 2013년 12월 유서 필체에 대한 새로운 감정 결과를 내놨고, 2014년 2월 서울고법은 이를 토대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유죄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보’자를 ‘오’자처럼 보이도록 쓰는 김씨 필체의 특징이 유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지만 강씨의 필체는 이와 전혀 달랐고, 검찰이 제시한 다른 증거만으로는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썼다고 보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강씨는 다만 서울고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재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별도로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이날 이 부분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강씨가 이미 3년간 복역했기 때문에 재수감은 되지 않는다. 무죄 확정에 따라 징역 1년을 초과한 구금일수에 대해서는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간암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강씨는 이날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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