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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태원 동거인 비방한 악플러들, 1억 7000만원 배상하라”

    “최태원 동거인 비방한 악플러들, 1억 7000만원 배상하라”

    “사적영역에 대한 명예실추·비방 담겨”崔·동거인 측 “배상금 전액 기부할 것”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거인을 비방한 누리꾼들에게 1억 7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김병철 부장판사)는 최 회장의 동거인 A씨가 한 인터넷 카페 회원 9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총 1억 73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A씨는 이들이 카페를 개설해 운영하면서 자신을 비방하는 댓글을 지속적으로 달고, 카페 회원들에게 악성 댓글을 쓰도록 했다며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댓글 내용이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과 사회성을 갖춘 공적 관심사안이라 볼 수 없고 사적 영역에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판시했다. 이어 “A씨의 출신이나 인적 관계를 비하하고 경멸하는 내용은 A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비방할 목적으로 작성됐다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특히 최 회장을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공인’으로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A씨는 공인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댓글 내용도 공적 관심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재판부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운영하면서 회원들에게 악성 댓글을 쓰도록 한 김모(63)씨에게 1억원을, 비방 내용을 올린 카페 회원 조모씨 등 7명에게는 각각 1000만원을, 단독적으로 A씨를 비방한 추모씨에게는 3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김씨 등의 불법행위로 A씨가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이 명백한 만큼 정신적 손해를 금전으로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최 회장과 A씨 측은 피소된 이들 가운데 진정한 사과 의사를 밝힌 이들에 대해서는 소를 취하했다. 이들은 판결이 확정되면 배상금을 소외계층을 돕는 등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에 전액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 만남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최 회장과 A씨 사이에는 딸이 한 명 있다. 한편, 최 회장은 현재 부인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으로 시작해서 조국으로 끝난 한 달여 시간을 보냈다. 전 국민이 조국 사태에 매달렸다. 그 상황의 중심에 정부 여당과 자유한국당의 적대적 대결이 존재했고 그 가운데 조국 사태가 있었다. 특이하고 낯선 광경이지만 비슷한 상황을 2년 내내 겪었다. 그러나 그 전인들 달랐으랴. 정치권의 후진적인 광경을 언제까지 봐주어야 할지 의문이다.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싸움에 관한 것인데 한반도는 지난 200년 동안 원치 않는 싸움을 겪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반란과 동학혁명, 망국에 저항한 의병운동, 식민통치하에서의 독립운동과 전시동원 등 형극의 길을 걸었다. 동학혁명 후 자행된 대량 살육과 식민지 말기에 군국주의가 강요한 징병과 징용, 정신대와 위안부 등 전방위적인 수탈은 가혹한 고통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독립으로 보상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역사로부터 배신당하고 강대국에게서 배신당했다. 조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친일파에게 점거되면서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 해방된 조선에서 친일파의 부활은 모든 환란의 원인이었고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구약 말씀을 빌리면 ‘태초에 친일파가 있었다’. 해방으로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친일파로 인해 일본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1공화국에서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거듭 바뀌었지만 친일파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4월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이 군사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그 자리는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가 차지했다. 일본군 장교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음지의 친일 권력은 양지로 확장됐다. 이 상황은 1960~7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고 박정희가 사라진 1980년대로 연장됐다. 1990년대에도 무늬만 바뀌었다. 그러므로 친일파 문제는 1945년 이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며 반일종족주의로 드러난 식민지근대화론은 그 하나의 병증에 불과하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는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청산에 거듭 실패했다. 1940년대에는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해산됐고 애국자가 학살되고 배제된 자리를 친일파가 채웠다. 1960년대에는 4월혁명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을 청산하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박정희를 청산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는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했고 그 정점에 6월항쟁이 있다. 해방 후 정치는 6월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특히 정치변동의 경우 1987년 이전의 정변이 6월항쟁 후에는 대통령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정권은 4월혁명으로, 장면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 직후 암살로,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모두가 정변이었다. 그러다가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선거가 정치변동의 제도적 계기로 작동했다. 한 단계 질적 도약을 이룬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좌절을 7년 만에 성공으로 복원해 낸 희망의 횃불이었고 한국 현대사의 거듭된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첫 번째 결과는 노태우 집권이었고, 두 번째 결과는 3당 합당이었다. 기대에 반하는 두 번의 실패로 전두환 독재는 사실상 살아남았다. 전두환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굴절된 현대사가 살아남았고, 부패 기득권 세력은 반성도 처벌도 없이 민주사회에 정착해 민주화의 혜택을 누렸다. 오늘날의 모순적인 정당체제, 언론체제, 재벌체제, 신앙체제, 교육체제가 그 미완성의 산물이며 소모적인 정치적 대결도 여기서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역사청산의 실패, 이 두 가지 언어의 모순적인 조합이 6월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드는 상황,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은 간절하지만 친일파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압도하는 상황, 정의와 도덕을 향한 의지는 강하지만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세상,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이 소모적인 대결, 이것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한국 정치는 이렇게 구조화된 역사사회적 대결 구조를 여의도 방식으로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표출한다. 이것이 여의도 현실 정치의 민낯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시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청산하는 과제와 맞닥뜨려 있다. 이 과제는 지난 9년간의 국정 파탄을 정리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두 전직 대통령과 몇몇 측근이 구속됐지만, 중요한 것은 인신 구속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의 한계도 있지만, 역사청산에 반대하는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탄핵 이전의 헌정 질서 문란과 탄핵 이후의 정치적 갈등 역시 그 저항의 일환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의 국회는 소란한 동물국회와 무능한 식물국회를 합친 동식물 합동국회로 전락해 버렸다. 삼권의 한 축인 국회에서는 모든 안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고, 논란은 저급하기 짝이 없고, 어떤 형태의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못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다. 국회는 가장 나쁜 사람들의 집합소인 양 타락해 버렸다. 국회가 실종되고 삼권분립체제가 무너진 상황이다. 그 근저에 친일파가 있고 친일파에서 변신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 부패 기득권 세력이 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는 반공주의자로, 군사쿠데타 후에는 경제역군으로, 6월항쟁 후에는 자칭 산업화 주역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뿌리가 친일파이고 근본 속성이 부패 기득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전력과 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이들은 반공안보 논리에 기대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화가 부패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추상적 이념 대결이나 단순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 본질적인 과정이다. 결국 현대사의 누적된 이 갈등 구조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역사적 대결일지 역사적 타협일지를 결정해야 할 양자택일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묵인과 지연이 용납됐지만, 더이상은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소모적인 정파적 대결이 계속되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도 없고 장차 나라의 미래가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저급한 정파적 대결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국면에서 역사적 대결론은 확실한 역사청산을 통해서 현대사를 바로잡고 그것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역사적 타협론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우리 사회가 그 반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그 후의 대통령선거가 역사청산의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역사의 전환기 국면에서 촛불이 혁명으로 발전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를 태워 미래를 밝힌다. 촛불혁명은 30년 전 거세게 타올랐던 6월항쟁의 횃불을 계승해 6월항쟁의 미완성 의지를 복원하기 위한 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촛불혁명은 부패 권력의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1단계 현재시제를 표상하지만 아울러 6월항쟁이 이루지 못한 역사청산의 최종적인 종결을 지향하는 과거완료형인 동시에 조만간 다가올 통일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완료형으로서 과거와 미래까지 함축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 2단계와 3단계를 기대한다. 상지대 총장
  • [사설] 5·18 대리 사죄한 노태우, 발포 진상도 밝혀야

    [사설] 5·18 대리 사죄한 노태우, 발포 진상도 밝혀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가 지난 23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한 사실이 그제 뒤늦게 알려졌다. 재헌씨는 희생자 묘역에 무릎을 꿇고 헌화했으며,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들께 사죄드리며,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적었다. 그의 참배는 투병과 고령으로 칩거 중인 노 전 대통령의 평소 뜻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신군부 핵심 인사가 5·18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재헌씨는 “기회가 되면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 사죄하고 싶다”고도 했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과와 반성은커녕 자신은 5·18과 무관하다며 뻔뻔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심지어 회고록에선 자신이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며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 3월 광주 재판 출석 때 용서를 구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되레 호통치는 모습으로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오랜 세월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온 희생자 유족과 광주 시민들을 생각한다면 노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시민에게 발포를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진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등 당시 신군부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은폐한 진상을 밝혀내는 데 일조해야 한다. 그래야 사죄의 진정성이 한층 빛날 것이다. 지난해 2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38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가가 주체가 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것인데, 1년 반이 넘도록 위원회를 꾸리지 못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5·18 북한군 개입설을 다룬 극우 유튜브 채널 대표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야당 몫 비상임위원으로 추천하는 등 정쟁 수단으로 활용하는 탓이다. 참담한 일이다. 노 전 대통령 아들의 이번 사죄가 5·18 진상 규명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노태우 아들은 ‘사죄’…전두환 아들은 고깃집 창업

    노태우 아들은 ‘사죄’…전두환 아들은 고깃집 창업

    노태우 씨의 아들인 노재헌 씨가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했다. 국립 5·18민주묘지 관리소에 따르면 노재헌 씨는 23일 오전 11시 광주 북구 운정동 묘지를 찾아 1시간가량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의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전두환·노태우 씨의 직계가족 가운데 광주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한 이는 노재헌 씨가 처음이다. 노태우 씨는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씨는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1997년 대법원에서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고 16년 만인 2013년 추징금을 완납했다. 반면 전두환 씨 같은 경우는 선고된 추징금이 2200억 원이었지만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며 1020억 원 정도를 납부하지 않았다. 지난 2013년 전두환 씨의 장남 전재국 씨는 “온 가족이 돈을 모아 부친(전두환)의 추징금을 완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두환 측은 최근 추징금 미납으로 공매로 넘어간 연희동 자택에 대해, 공매 처분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26일 “전두환 일가가 내야 할 추징금은 1000억 원 이상이지만 2016년 초 차명으로 무한리필 프랜차이즈 고깃집을 창업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 씨의 장남인 전재국 씨 가족은 ‘나르는 돼지’라는 상호의 프랜차이즈 고깃집 운영사인 ‘실버밸리’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실버밸리는 ‘나르는 돼지’라는 상호의 고깃집을 서울 1곳, 경기 2곳, 전북 1곳 열었고 현재는 일산 탄현점과 전주점 2곳을 운영하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5·18 희생자·유족께 사죄”…노태우 대신 사과한 아들

    “5·18 희생자·유족께 사죄”…노태우 대신 사과한 아들

    유족 측 “의미 있지만 당사자가 나서야”“5·18 희생자와 유족께 사죄드립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54)씨가 최근 아버지를 대신해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26일 국립 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재헌씨는 지난 23일 오전 11시쯤 광주 북구 운정동 5·18민주묘지를 찾아 1시간가량 참배했다. 재헌씨는 당일 오전 9시쯤 전화로 방문 의사를 알렸으며 수행원으로 추정되는 일행 4명이 동행했다고 묘지 관리사무소 측은 설명했다. 재헌씨는 묘지 들머리인 민주의 문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참배단으로 이동해 헌화와 분향을 했다. 방명록에는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의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항쟁추모탑 뒤편 윤상원·박관현 열사 등이 잠든 묘역과 추모관, 유영보관소를 돌아봤다. 재헌씨는 1997년 국립 5·18민주묘지가 조성되기 전 항쟁 희생자가 안장됐던 망월동 옛 묘역도 들른 것으로 전해졌다.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직계가족 가운데 광주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한 이는 재헌씨가 처음이다. 노 전 대통령은 오랜 투병과 노화 등으로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주로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5·18 유족들은 참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당사자의 직접적인 사과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노 전 대통령의 아들이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하고 참배한 것은 의미가 있다”면서도 “12·12와 5·18 핵심 인물인 노 전 대통령이 당사자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고백하고 5·18진상을 직접 얘기해야만 사죄의 진정성이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통해 5·18 희생자에 사죄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통해 5·18 희생자에 사죄

    전두환·노태우 직계 중 5·18 사죄 처음노태우, 건강 특별히 이상 없어 자택 생활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54)씨가 26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며 희생자들에 사죄했다. 재헌씨의 참배는 노 전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26일 국립 5·18 민주묘지 관리소에 따르면 재헌씨는 23일 오전 11시쯤 광주 북구 운정동 묘지를 찾아 1시간가량 참배했다. 당일 전화로 방문 의사를 알린 재헌씨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일행 4명과 함께 묘지 들머리인 민주의 문에서 방명록을 작성했다. 방명록에는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의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추모탑 뒤편 윤상원, 박관현 열사 등이 잠든 묘역에서 무릎 꿇고 항쟁 희생자를 기렸다.참배를 마치고 나서는 추모관과 유영보관소 등 5·18 민주묘지 내 추모 시설을 돌아봤다. 재헌 씨는 1997년 국립 5·18 민주묘지가 조성되기 전 항쟁 희생자가 안장됐던 망월동 옛 묘역도 들른 것으로 전해졌다.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직계가족 가운데 광주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한 이는 재헌 씨가 처음이다. 재헌 씨의 5·18묘지 참배는 아버지 노 전 대통령 뜻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만 77세인 노 전 대통령은 현재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오랜 투병 생활을 했고 고령으로 인한 노화도 있지만,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포토] 5·18묘지 참배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포토] 5·18묘지 참배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이달 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윤상원 열사 묘소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직계가족 가운데 광주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한 이는 재헌 씨가 처음이다. 2019.8.26 국립 5·18민주묘지 사무소 제공
  •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5·18묘지 참배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54)씨가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했던 것으로 뒤늦게 일려졌다. 26일 국립 5·18민주묘지 관리소에 따르면 재헌씨는 지난 23일 오전 11시쯤 광주 북구 운정동 5·18민주묘지를 찾아 1시간가량 참배했다. 재헌씨는 당일 오전 9시쯤 전화로 방문 의사를 알렸으며 수행원으로 추정되는 일행 4명이 동행했다고 묘지 관리소 측은 설명했다. 재헌씨는 묘지 들머리인 민주의 문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참배단으로 이동해 헌화와 분향을 했다. 방명록에는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의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항쟁추모탑 뒤편 윤상원, 박관현 열사 등이 잠든 묘역과 추모관, 유영보관소를 돌아봤다. 재헌씨는 1997년 국립 5·18민주묘지가 조성되기 전 항쟁 희생자가 안장됐던 망월동 옛 묘역도 들른 것으로 전해졌다.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직계가족 가운데 광주를 찾아 오월 영령에게 사죄한 이는 재헌씨가 처음이다. 노 전 대통령은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오랜 투병 생활을 했고 고령으로 인한 노화도 있지만,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협정기간 90일 남았지만… 사실상 정보교환 끝나

    정부가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함에 따라 지소미아는 2년 9개월 만에 사실상 효력을 잃게 됐다. 2016년 11월 23일 체결된 지소미아는 1년 단위로 자동 연장되는데, 연장되기 90일 이전에 한일 중 일방이 연장 거부를 통보하면 지소미아는 11월 22일 밤 12시에 종료된다. 이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앞으로 남은 90일간 한일은 여전히 정보를 교환할 수 있지만, 지소미아는 ‘사안에 따라 정보 교류 여부를 정할 수 있다’고 양국에 자율권을 주고 있기에 사실상 이날부로 정보 교류는 더이상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소미아는 1989년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됐으나 한일 이견 차가 커 무산됐다. 이어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10월 일본 외무성이 지소미아 체결을 제안해 양국이 물밑에서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소미아 체결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 등이 제기되면서 반대 여론이 거셌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2012년 6월 국무회의에서 지소미아 체결안을 비밀리에 상정해 통과시켰으나, 밀실 추진 논란이 거세지면서 서명 직전에 체결을 연기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0월 27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본과 협정 체결 논의를 재개하기로 했으며, 27일 만인 11월 23일 양국 국방장관이 최종 서명하면서 체결됐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노태우 정부때 추진…2016년 체결 후 1년마다 자동 연장

    정부가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함에 따라 지소미아는 2년 9개월 만에 사실상 효력을 잃게 됐다. 2016년 11월 23일 체결된 지소미아는 1년 단위로 자동 연장되는데, 연장되기 90일 이전에 한일 중 일방이 연장 거부를 통보하면 지소미아는 11월 22일 밤 12시에 종료된다. 이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앞으로 남은 90일간 한일은 여전히 정보를 교환할 수 있지만, 지소미아는 ‘사안에 따라 정보 교류 여부를 정할 수 있다’고 양국에 자율권을 주고 있기에 사실상 이날부로 정보 교류는 더이상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소미아는 1989년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됐으나 한일 이견 차가 커 무산됐다. 이어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10월 일본 외무성이 지소미아 체결을 제안해 양국이 물밑에서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소미아 체결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 등이 제기되면서 반대 여론이 거셌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2012년 6월 국무회의에서 지소미아 체결안을 비밀리에 상정해 통과시켰으나, 밀실 추진 논란이 거세지면서 서명 직전에 체결을 연기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0월 27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본과 협정 체결 논의를 재개하기로 했으며, 27일 만인 11월 23일 양국 국방장관이 최종 서명하면서 체결됐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역대 대통령의 명절선물 보니...

    역대 대통령의 명절선물 보니...

    우리나라에는 명절이면 고마운 분에게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전달하는 아름다움 풍습이 있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명절 선물을 전직 대통령과 5부요인, 정계원로, 정부 고위공직자,종교문화계 인사는 물론 각종 재난에서 의로운 일을 한 분이나 국가에 헌신한 분들에게 보내고 있다. 역대 대통령이 명절에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정리해본다. 대부분 우리 농수산물을 애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예년보다 열흘정도 앞당겨진 올해 추석선물의 경우, 청와대에서 어떤 선물을 보낼 것인지 드러난 건 없지만 올해도 추석명절 선물을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 명절선물 인삼, 멸치, 김 등 다양해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인삼을 주로 선물했다. 인삼을 담은 나무 상자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을 새겨 넣어 선물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격려금을 주로 전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물은 멸치세트였다. 거제도에서 멸치잡이 사업을 하던 부친이 보내준 멸치였다.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로 김과 한과를 선물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통주 애용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통주를 사랑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만하다. 취임 첫해인 2003년 추석에 지리산 복분자 선물을 시작으로 2004년 충남 한산 소곡주, 2005년 추석에는 평안도 지방소주인 문배주, 임기 마지막해인 2007년 추석 선물로 전주산 이강주 등 전국의 전통주를 선물했다. 재임 기간 10번의 명절선물 중 9번이나 전통주를 선물할 정도였다. 2006년 추석 때는 전통주 대신, 전국 9개 지역을 대표하는 우리의 전통차와 다기세트를 보냈다.이명박 대통령은 전국 각 지역의 농특산물을 애용했다. 2008년 추석에는 강원도 인제의 황태, 충남 논사나 대추, 전북 부안 김, 경남 통영 멸치를 보냈다.임기 마지막해인 2013년 추석 선물로는 횡성 들기름에 경기 여주 햅쌀, 충남 부여 표고버섯, 경북예천의 참기름 전남 진도 흑미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 추석 명절 때 찹쌀, 잣, 육포세트를 선물했다.다음해인 2014년 추석 때는 대추, 잣, 육포를 돌렸다. 육포와 잣은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부터 애요한 선물품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올 설 선물주는 함양 솔송주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설 명절을 맞이해 함양 솔송주를 선물한 바 있다. 함양의 솔송주는 솔잎과 송순 찹쌀 지리산 암반수로 빚은 술로 진한 솔향을 지니며 목넘김이 깔끔한 함양의 토속주다. 지난해엔 설날 선물로 평창 감자술을, 추석 선물로는 제주 오매기술을 보냈다. 문배주는 남북화합의 상징한편 남북화합의 상징으로는 문배주를 들 수 있다. 2000년 6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과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때 건배주로 사용된 술이 문배주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으로 가져간 문배술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마시면서 “원래 문배술은 평양 대동강 일대 주암산물로 만들어야 진짜배기”라고 말하면서 남북화합을 상징하는 술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현재 100여종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그 종류가 10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았으나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수탈로 고사위기에 처했다가 2000년대 들어 조금씩 활성화된데 이어 2017년 7월 전통주에 한해 인터넷 판매가 허용되고 젊은이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전통주 산업의 활성화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전략사업부 seoulmarket5@seoul.co.kr
  • 문희상 “대화·타협 정치 실종… 빈자리 그리워”

    이해찬 “평생 바쳐 평화적 정권교체 이룩” 황교안 “정치 보복 안 해… 통합·화합 상징” 손학규 “반대세력과 주고받은 협치 달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10주기인 18일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추도식에 정치권 관계자들이 참석해 ‘DJ 정신’을 기렸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추도사에서 “당신께선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조화를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하셨지만 지금의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됐다”며 “오늘, 더더욱 대통령의 빈자리가 그립다”고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대외정책에서 한미 동맹을 중심에 놓고 이웃 나라들과의 우호와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조화와 비례가 대통령의 철학이었다”고 했다. 여야 5당 대표들도 정파에 관계없이 추모사를 통해 DJ의 업적을 기렸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은 ‘DJ 정신’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는 정당임을 강조한 반면 야당은 김 전 대통령이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고 야당과 협치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등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결국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며 “고인께서 걸었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통합, 혁신과 번영의 길이 저희의 길이며 이 나라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기억난다. 정치보복은 없었다”며 “그 장면은 우리 국민이 갈망하는 통합과 화합의 역사적 상징”이라고 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은 반대 세력의 요구에 따라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진정한 협치의 달인이었다”며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라는 기상천외한 연합정치를 통해 소수파 정권 획득을 이뤄냈다”고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극한 대결정치의 리더십이 득세하는 지금의 정치현실에서야말로 대통령께서 몸소 실천한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며 “대통령께서 제안했던 승자독식 선거제도 개혁을 온몸 던져 완수하겠다”고 했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산맥으로 김 전 대통령 없는 한국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없다”며 “우리는 오늘 김대중 산맥에서 내뿜는 민주주의 산소로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유족 측 대표로 나선 DJ의 차남 김홍업 전 의원은 “아버님의 정치 목적은 국민이 나라 주인으로서 행복하게 잘 살게 하는 것”이라며 “(이희호 여사 별세 때) 조화를 보내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께도 감사하다”고 했다. 추도식에는 진영 행정안전부·강경화 외교부·김현미 국토교통부·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남 건호씨 등이 참석했다. 민주당 정세균·이석현·원혜영·추미애·설훈·우원식 의원, 평화당 박주현 의원, 최근 평화당을 탈당한 박지원·유성엽·장정숙 의원 등도 함께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황교안 “DJ, 민주주의의 상징…정치보복은 없었다” 文 겨냥

    황교안 “DJ, 민주주의의 상징…정치보복은 없었다” 文 겨냥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 구축”“김대중·오부치 선언” 치켜 세워“사면초가 위기…DJ 지혜 와닿아”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인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재임 시절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기억난다”면서 “정치보복은 없었다”고 문재인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황 대표는 이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 추도사에서 “그 장면은 우리 국민들이 갈망하는 통합과 화합의 역사적 상징”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황 대표는 “대통령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면서 “화해·용서·화합·통합의 정치로 우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황 대표는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한·일 무역갈등을 빚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의 한·일 관계 업적을 언급하며 치켜 세웠다. 황 대표는 “대통령님은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해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을 구축했다”면서 “한·일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자는 선언, 즉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감하게 한·일 대중문화의 교류와 개방을 결정해 오늘날 한류의 기원을 열었다”면서 “대통령님은 국민의 마음을 모아 국난을 극복했고, 대한민국 미래를 내다보고 정보화의 길을 개척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황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외교 역량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도 새기고 있다”면서 “대통령님은 ‘한국처럼 4대 강국에 둘러싸인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국내 정치에서 실수해도 외교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인 지금 대통령님의 지혜와 용기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에 크게 와닿는다”면서 “대통령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대통령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 자유와 번영,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나라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법서라] 조국 발목 잡는 ‘사노맹 사건’...신문과 판결문의 재구성

    [법서라] 조국 발목 잡는 ‘사노맹 사건’...신문과 판결문의 재구성

    1989년 11월 ‘노태우 정권 타도’ 사노맹 결성조국 장관 후보자, 기관지 ‘사과원’ 제작 참여당시 조국 아내 “진보적 학자 붓 꺾을 속셈”대법원 “사노맹과 사과원은 구분해야” 판시[편집자주] 전국 최대 법원과 최대 검찰이 몰려 있는 서울 서초동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는 법조계는 이상한 일이 참 많습니다. 법조의 뒷이야기와 속이야기를 풀어드리는 ‘법조기자의 서리풀 라이프’, 약칭 ‘법서라’를 토요일에 선보입니다.“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여러 가지 논란에 발목이 붙잡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권 이념 논쟁, 색깔론으로까지 번져가는 논란이 있죠. 바로 ‘남한사회주의노동자 동맹’, 소위 ‘사노맹’ 논란입니다. 엄밀히 짚고 넘어가면 조 후보자는 사노맹의 기관지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사노맹이란 무엇이며, 조 후보자는 정확히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활동을 한 것일까요. 당시 신문기사와 기고글, 그리고 판결문을 통해 당시를 재구성해보겠습니다. ■사노맹은…“사회주의 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겠다”“우리는 전 자본가 계급을 향해 정면으로 계급 전쟁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고자 마침내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을 조직해 11월 12일 역사적인 출범의 큰 걸음을 내딛는다.”1989년 11월 12일, 서울 시내 곳곳에 사노맹의 결정을 알리는 정체불명의 유인물이 뿌려집니다. 경찰은 유포와 동시에 즉각 수사에 나서 명동역 인근에서 유인물 400여장을 가지고 있던 성균관대 사회학과 2학년생 최인규부터 연행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각종 신문 사회면 한구석엔 『“사회주의 노동자연맹 결성” 유인물 3종 수사』, 『전노협 집회장에 ‘사노맹’ 유인물…계파 혁명을 선동』등의 제목으로 기사들이 실립니다. 사노맹이 수면 위로 처음 떠오른 순간입니다. 사노맹은 노태우 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정권 수립, 사회주의 제도로의 변혁, 진보적 노동자 정당 건설 등을 목표로 내세우며 결성됐습니다. 당시 서울대 학도호국단장 출신인 백태웅과 노동자 시인 박노해 등이 중심이 됐죠. 경찰에서 시작된 수사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구심점이 옮겨집니다. 노태우 정권이 사노맹을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하면서 본격적인 공안 사건으로 번져갔기 때문이죠. 당시 언론에선 ‘제6공화국 최대 공안사건’이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김영수 당시 안기부 1차장은 수사결과 발표 브리핑에서 “전국의 사노맹 조직원은 1600명에 이르고 있는데다 이들이 이름이 일부는 실명, 일부는 가명 등으로 돼 있어 실체를 파악하는데 커다란 애를 먹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공안당국은 총 300여명을 재판에 넘겼고, 이들에 대한 검찰 구형량만 500년이 넘었습니다. 특히 핵심축인 박노해와 백태웅을 각각 1991년과 1992년 구속합니다. 이들은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조 후보자는 사노맹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사노맹 산하에 있던 기관지 ‘사회주의과학원’, 소위 ‘사과원’의 강령연구실장으로서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1993년 울산대 법대 전임강사로 교편을 잡고 있던 조 후보자는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개월 옥살이를 했다, 1995년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사면을 받게 됩니다. ■조국 아내의 항변 “진보적 연구자 붓 꺾을 속셈” 1993년 7월 18일, 조 후보자의 아내인 정경심(현 동양대 교수)씨는 남편이 구속된 직후 한겨레 신문 독자 코너에 한편의 글을 기고합니다. 정씨의 글을 통해 조 후보자 측이 사과원 활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겠습니다.“남편은 90년 7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직 가입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해 가입원서를 써준 바 없으며 (…) 그가 관여한 도움이라는 것도 학술적인 차원을 넘지 않았고, 총 횟수도 몇 회를 넘지 않았으며 법과 관련해 학문적으로 조언하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사과원은 사노맹과는 무관한 것으로 90년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의 공동연구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90년 하반기에 사노맹과 무관한 합법적 연구단체를 지향하였다는 연구자들이 학습모임을 사노맹과 연결하고, 더욱이 이 두 모임과는 관계를 맺지 않은 남편을 조직 사건으로 구속한 것은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그가 학문적 처지에서 합법성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소신을 밝힌 것이 어찌 이적성을 띤다고 하겠습니까. (…) 그와 무관한 조직 사건과 연루시키는 것은 한 진보적 학술 연구자의 붓을 꺾기 위한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케 합니다.”- 1993년 7월 18일자 한겨레 10면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노맹 조직은 가입원서를 쓴 적도 없으며, 단지 학문적인 도움을 몇 차례 줬을 뿐이라는 겁니다. 나아가 사과원은 사노맹과 무관한 합법적 연구단체이며, 사노맹과 연관지어 구시킨 것은 학술 연구자를 탄압하는 조치라는 겁니다. 최근 조 후보자는 논란이 가중되자 후보자 사무실 출근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과거 독재 정권에 맞서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했던 저의 1991년 활동이 2019년에 소환됐습니다. 저는 28년 전 그 활동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습니다.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20대 청년 조국이 부족하고 미흡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심장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아픔과 같이 하고자 했습니다.”조 후보자는 당시 사과원 활동을 ‘독재 정권에 맞서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했다’고 표현했습니다.■당시 법원 “사과원과 사노맹은 구분 기준을 명확히 해야” 조 후보자가 사과원 기관지 제작에 참여해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관계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95년 대법원 판결문은 사과원과 조 후보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피고인 조국은 사과원이 반동적 파쇼권력을 타도하고 민중권력에 의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된 것으로서 사노맹의 활동에 동조할 목적을 가진 단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반국가단체인 사노맹의 활동에 동조할 목적으로 사과원에 가입하고 (…) ‘우리사상’ 제2호를 제작, 판매하는 등 반국가단체인 사노맹의 활동에 동조할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 판매했다고 판단한다.”- 대법원 94도1813 판결문 (선고일자 1995년 5월 12일)당시 재판부는 사과원이 ‘단순한 사회주의 이론에 관한 학술·연구단체’가 아니라 ‘반제·반독점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통한 노동자계급 주도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주장하는 이적 단체’라고 규정했습니다. 일종의 사노맹의 ‘싱크탱크’ 역할이었던 것이죠. 다만 사노맹과 사과원의 ‘성격’에 대해선 확실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이적 단체’인 사과원과 ‘반국가단체’인 사노맹은 다르다는 것이죠. 실제로 재판부는 “현행 국가보안법은 반국가 단체와 이 단체에 활동에 동조할 목적으로 구성된 이적단체를 구별하고 있으며, 처벌규정도 다른 만큼 두 단체의 구분 기준은 명확히 해야 한다”면서 사과원의 직접적인 1차 목적이 국가변란은 아니기 때문에 ‘반국가단체’로 볼 순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살펴봐도 법원은 사노맹과 사과원의 활동을 확실히 구분 지었기 때문에 “조 후보자가 반국가단체인 사노맹에서 활동했다”는 야당의 비판은 다소 사실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조 후보자가 이미 사면을 받은 점을 언급하며 “부적절한 색깔론”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죠. 조 후보자 역시 청문회에서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넘어가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오 원내대표는 “사회부의 계급 전쟁을 행동강령으로 내걸었던 사노맹 활동을 두고 경제민주화 운동이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적절한 태도”라고 지적했습니다. 조 후보자는 위장전입 의혹, 사모펀드 투자약정 의혹 등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논란을 하나 하나 소상히 설명할 준비를 해야겠죠.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전통적 성역할 깨지자 불안감… ‘대림동 경찰 폭행’ 여혐 비하

    전통적 성역할 깨지자 불안감… ‘대림동 경찰 폭행’ 여혐 비하

    젠더 교육·채용 확대… 인식 바꿔 여성의 사회 참여 늘려야 2018년 12월 31일 기준 한국 여성 경찰은 1만 3582명이다. 전체 경찰 12만 448명 가운데 11%에 불과하다. 성별 분리 모집 과정에서 여성의 채용 인원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경찰대학 신입생과 경찰간부후보생을 통합 선발하기로 했지만 순경은 여전히 남녀를 분리해 뽑는다. 어렵게 경찰이 되더라도 여성 경찰은 조직 내에서 ‘섬’처럼 여겨진다. 여성 경찰은 핵심 업무에서 배제되거나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기 쉽다. 지난 5월 주취자를 진압하는 과정이 담긴 일명 ‘대림동 경찰관 폭행’ 영상이 공개된 이후 피의자들의 공권력 경시가 아닌 ‘여경 무용론’에 불이 붙은 건 여성 경찰에 대한 외부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줬다. 경찰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조직의 문제다. 서울신문 서울젠더연구소는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공동으로 지난 7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제1회 서울젠더포럼’을 열었다. 포럼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직 내 성차별적 인식을 되짚고 해소 방안을 논의했다. 금 의원을 비롯해 손원진 경찰인재개발원 생활치안교육센터 교수요원(경감),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 이은애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총경),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진행은 신 교수가 맡았다. 신경아 교수 지난 5월 주취자에 대한 여성 경찰의 대응 장면 영상이 대중에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여성 경찰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 발언에서 시작해 여성 경찰 무용론으로까지 확대됐다. 한국 사회에서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위치에 여성이 진입하려 할 때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사건의 쟁점과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은애 팀장 동영상이 공개된 이후 일부 뉴스에서 “여성 경찰이 잘 대처했다”, “여성 경찰에 대한 혐오를 멈춰 달라”는 남성 경찰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걸 보면서 ‘이런 문제조차 남성 경찰로부터 보호받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나’라는 고민이 들더라. 1997년 경찰이 된 이후 지금까지 경찰로서의 존재 이유를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여성 경찰이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도 계속 받는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따르면 경찰은 남성 고유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그 금기가 풀어지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본다. 금태섭 의원 한쪽에서는 여성 피해자의 진술을 듣는 등 여성 경찰의 고유 역할이 있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주장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온라인상에서 젠더 갈등 양상으로 확산된 건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의 문제가 표출된 것이라 생각한다. 정치권에서는 (젠더 이슈를) 피해 다니는 형국이고, 그래서 더 갈등이 증폭되는 게 아닌가 싶다. 추지현 교수 사회학자로서 이번 사안은 여성 경찰과 경찰 직무의 문제라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현재 청년 세대가 갖고 있는 불안이 여성 문제로 전이된 형태라고 본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고 타인과 경쟁해야 하는 피폐한 삶을 살면서 그 불안감이 여성 혐오로 표출된 것이다. 또 여성 경찰이 조직 안에서 한몫을 하는 경찰로 고려되지 못하고 여성이라는 기표로만 떠돌면서 여전히 동등한 동료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불거졌다고 본다. 이웅혁 교수 이번 논란은 남성 지향적인 경찰 조직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불거졌다. 대다수 국민들이 경찰의 역할을 힘을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경찰의 사명은 ‘물리력을 사용해서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패러다임이 고착화된 것이다. 112 신고를 분석해 보면 범죄 사건은 10~2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비범죄성 생활 민원이다. 경찰은 ‘범죄 전투사’의 역할뿐 아니라 가출 청소년을 도와주고 아동 학대 가정을 상담하는 등 ‘갈등 조정 해결자’로서의 역할도 있지만 경찰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은 범죄를 막는 것이라고 본다. 경찰 조직의 구조적 한계와 편협함이 이번 사건을 야기한 측면이 있다. 손원진 교수요원 현장의 남자 경찰들은 이번 사건이 남녀 갈등 문제로 비화되는 게 안타깝다는 반응이 많았다. 강의실에서 이론 중심으로 수업을 듣고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장에 투입되는 현실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여성 경찰은 사회적 약자 보호나 여성 범죄를 담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찰 조직 안에서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찰로 대우 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 경찰 비율을 늘리는 것이야말로 경찰의 구조적 한계를 깨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신 교수 현재 여성 경찰 비율이 11% 정도인데 경찰청이 2022년까지 15%까지 높인다는 계획을 내놨다. 여성 경찰이 실제로 현장에서 체감하는 조직 내 변화는 일어나고 있나. 이 팀장 사실 ‘여성 경찰 확대’라는 표현 자체가 시혜적인 발언이다. 여성 경찰이 전체 경찰의 1% 수준일 때 근무를 시작했는데 20년 만에 11%로 올랐다. 현재 여성 경찰을 남성 경찰과 분리해서 채용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경찰청 훈령이다. 헌법에 ‘차별하지 말라’고 명시돼 있고, 국가공무원법 어디에도 여자를 남자에 비해 적게 뽑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여성 경찰은 경찰의 정책적 도구로서 뽑혔다. 1988년 올림픽 당시 교통안전요원이 필요해서,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일명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지난 정부에서 ‘4대악 근절’을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여성 경찰을 많이 뽑았다. 한 해에 여성 경찰을 전국에서 30명 뽑을 때도 있고, 300명 뽑을 때도 있고, 1000명 뽑을 때도 있다. 국가와 경찰청이 얼마나 여성 경찰을 도구화해서 이용해 왔는지 보여 준다. 여성 경찰은 대부분 팀당 1명이다. 팀에서 둘 이상 받지 않으려 한다. 성희롱·성차별 문제나 여성 혐오 발언 등을 논의하고 연대할 동료가 없다. 추 교수 경찰 성별에 따라 직무를 분리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여성 경찰이 일이 편한 내근직을 선호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여성 경찰들이 근무하는 내근직은 편한 곳이 아니다. 승진을 하거나 수당을 많이 받거나 경찰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전혀 아니다. 남성 경찰들이 중요한 위치를 놓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역할에 여성 경찰들을 밀어내 왔다. 그 자리마저 한정돼 있어 여성 경찰 한 명이 빠지면 나머지 여성 경찰들끼리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여성 경찰들은 30년씩 경력을 쌓아도 내근 외에는 해본 일이 없다. 주요 보직 경험이 없어 관리직으로 갈 수도 없고, 승진도 안 된다. 여성 경찰 입장에서도 안타깝지만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신 교수 경찰을 선발할 때 체력뿐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의 소통 능력과 같은 지적이고 정서적 역량도 측정해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어떤가. 손 교수요원 경찰의 역할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선발한다면 굳이 체력 기준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선발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공정성 시비다. 점수화되지 않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본다. 지원자가 얼마나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지 점수로 구분할 수 있으면 시험에 포함됐겠지만 점수화할 수 없어 배제되는 거다. 영어, 국어, 형사소송법을 여전히 시험으로 치는 이유다. 이렇게 뽑은 경찰들을 중앙경찰학교에서 옛날 방식으로 가르친다. 1980년대 중고등학교만도 못한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여성과 남성을 나눠 수업하고 집합도 남녀 따로 시킨다. 여자 생활 지도관은 여학생들에게 ‘이거 하지 마라’, ‘튀지 마라’라는 잔소리를 한다. 자부심을 부여하는 척하면서 경찰 조직이 원하는 여성 경찰 모습으로 재사회화한다. 금 의원 경찰은 사회 치안을 유지하는 12만명의 대규모 조직이다. 기본적으로 인구의 50%가 여성인데 경찰 내 여성 비율도 그에 따라 맞추는 게 필요하다. 검찰에서 한 부에 여성 검사가 1명이었을 때 그 부서에 검사가 몇 명이냐고 물으면 부장검사가 대놓고 0.5명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물론 지금은 여성 검사가 많아져 그런 분위기는 없어졌다. 경찰 역할을 바꾸거나 채용기준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을 많이 뽑으면 조직의 성격 자체가 바뀐다. 물리력이 필요한 일부 경찰 직무에서는 체력검사를 하고 나머지는 성비를 반반으로 맞추는 식으로 조정하면 조직 성격 자체와 역할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 교수 이 사안은 경찰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간 여성들은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진 중요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헤쳐 왔다. 여성의 참여 비율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금 의원 우선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시험 과목 등 채용 절차와 더불어 교육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젠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바꿔 나가야 한다. 이 팀장 가장 중요한 건 각계의 여성들이 소리 내 이야기하는 플랫폼이 마련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원 남녀 비율부터 50%로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강해지고 발화 기회가 점점 많아져 연대해 발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교수 초중고 교육부터 직장 교육까지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교육이 문화 재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는 것과 더불어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공정한 채용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젠더 이슈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추 교수 사실 페미니즘이 다시 부상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모든 해법으로 교육이 거론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젠더 교육을 하는 것이 여성 경찰 비율을 20%로 올리는 것보다 더 큰 반향이 있을지 모른다. 청년경찰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들은 일과 생활을 양립하고자 하고, 권위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회피하려고 한다. 그들 내부에서 연대의 지점도 보인다. 페미니즘 물결은 돌이킬 수 없다. 선배나 관리자 이상의 직급 외에도 자유롭게 발화할 수 있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손 교수요원 모든 경찰의 성별 분리 채용을 폐지하는 전향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당장 교육을 통한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단 경찰 교육기관에 대한 진단과 기관을 재구조화하는 기회가 마련돼야 한다. 정리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가짜’를 ‘진짜’로 만든 1991년 그때 그 비극

    ‘가짜’를 ‘진짜’로 만든 1991년 그때 그 비극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 끝날 일입니다. 왜 그 말을 못해요….” 숱한 논란을 낳고 이역만리 병상에서 생을 마감한 화가의 딸이 거대 권력에 원했던 건 진정 어린 반성과 사과 한마디뿐이었다. 또 국가 권력에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던 한 남성은 대리인의 형식적인 사과에 “나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사회 전반에서 ‘적폐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2019년, 대한민국 연극 무대에는 논쟁의 두 인물이 돌아왔다. 천경자와 강기훈. 관련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모두 ‘1991년’이라는 시간 속 권력기관에 두 손이 묶였다. 연극 연출가 강훈구가 희곡을 쓰고 황재헌이 각색·연출한 연극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이 초연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극은 199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과 검찰의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등장인물은 특정인과 관련이 없습니다. 정말로…. 없습니다”라고 뒤틀린 현실을 살짝 꼬집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1991년 한국은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뤘음에도, 정치 공학으로 군부의 연장선인 ‘보통사람’ 노태우가 당선된 혼란의 시기였다. ‘나는 이전 정권과는 다르다’는 노태우의 ‘보통사람’은 곧 국정 철학이 됐고, 문화 정책에도 투입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은 ‘보통사람’들도 미술관을 찾는 미술관 대중화 사업을 시작하며 10여년간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그림 한 점을 대중에 처음 공개하며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미인도’를 본 천 화백은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긴 핏줄이나 다름없다. 내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라며 ‘미인도’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국립미술관’의 전문성과 명성이 흔들리고, 미술관장부터 학예실장과 직원까지 자리에서 뽑혀 나갈 일이었다. 이때부터 ‘제2학예실’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같은 시간, 과천 미술관 밖 세상은 정권 퇴진 시위로 뜨거웠다. 학생 운동을 이끌었던 청년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더욱 커지자 공안 당국은 이를 잠재울 카드가 필요했다. 검찰은 여론 전환을 위해 ‘청년 강기훈’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료의 자살을 권유·방조하고 유서까지 대신 썼다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만들어 냈다. 극은 두 사건을 통해 거대 국가 권력과 이에 편승한 개인이 ‘정의’가 아닌 ‘보신’을 위해 가짜를 진짜로, 또 진짜를 가짜로 조작해 가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그렸다. 이미 공연명에서 알 수 있듯, 연극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무겁고 깊고 또 뜨겁다. 서울 종로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이달 18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골라잡는 핀셋 규제, 분양가 상한제 해법 되나

    골라잡는 핀셋 규제, 분양가 상한제 해법 되나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도입에 대한 정책 실효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집값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주택 공급 부족을 비롯해 부작용도 만만찮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 강남을 비롯해 투기 과열 우려 지역에만 상한제를 도입하는 ‘핀셋 규제’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분양가 상한제는 아파트 분양가를 감정평가된 택지비와 정부가 연 2회 고시하는 표준건축비에 건설사 이윤을 합한 금액 이하로 책정하도록 하는 제도다. 과도한 분양가 상승을 막아 집값 안정을 이루겠다는 일종의 가격 규제책이다. 이를 통해 아파트 분양가가 20% 이상 낮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분양가 규제의 역사는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1977년 중동에서 벌어들인 ‘오일 달러’가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돼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자 ‘분양 상한가’라는 이름으로 주택 규모나 원가와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분양가를 통제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 가구 공급 정책과 건설업계의 요구가 맞물려 1989년부터 택지비와 건축비 등을 시장가격으로 반영하는 ‘원가 연동제’로 통제 방식을 바꿨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건설 경기가 침체되자 김대중 정부는 1999년 국민주택기금 지원 아파트 외에는 분양가를 전면 자율화했다. 2000년대 초반 주택경기 회복과 함께 분양가가 급등하기 시작하자 노무현 정부는 2005년 3월 공공택지 아파트에 분양가 상한제를 다시 도입했다. 2007년 9월부터는 분양가 상한제를 민간택지로도 확대했다.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분양가 상한제의 전면 폐지를 추진했지만 분양가 급등을 우려하는 여론에 밀려 제도가 유지됐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민간택지의 경우 특정 요건에 맞는 지역에만 적용하도록 요건을 완화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분양가 상한제가 당장의 집값 안정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분양가가 종전보다 낮아져 재건축·재개발 사업의 개발 이익이 줄고 이득을 얻으려는 투자 수요가 감소해 집값이 낮아질 것이라는 논리다. 또 상한제 시행으로 분양가가 하락하면 높은 분양가 때문에 주변의 기존 주택 가격이 덩달아 오르는 효과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가점이 높은 무주택자에겐 분양가 상한제가 시세보다 저렴하게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 ●서울 주택 매매가 年1.1%P 추가 하락 전망 국토연구원은 지난달 29일 서울 민간택지에 분양가 상한제를 확대 도입하면 상대적으로 규제의 영향을 덜 받는 재건축 일부 단지와 재개발 단지에 대한 쏠림 현상이 완화되고 서울 주택 매매 가격이 연 1.1% 포인트 추가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최근 부동산뱅크와 KB부동산 자료를 바탕으로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 주요 아파트의 가격 변화를 분석한 결과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가 시행된 2007년 시세는 3.3㎡(1평)당 3140만원에서 2009년 2869만원으로 떨어졌고 이후 3000만원대를 유지하다 2014년 2704만원으로 또 떨어졌다. 2008년 4억 8084만원이던 서울 아파트 중간값은 2009년 5억 1177만원으로 올랐고 2014년에는 4억 7900만원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분양가 상한제가 무력화되고 난 뒤 2016년 5억 9800만원, 지난해 8억 4500만원으로 상승했다는 점에서 경실련은 분양가 상한제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신규 공급이 줄면서 더 큰 집값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분양가 상한제는 재건축·재개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조합원 부담을 가중시키고 건설사 수익을 떨어뜨린다. 이에 따라 신규 주택 공급이 줄고 이미 입주를 마친 새 아파트가 가격 상승을 주도하면서 집값이 폭등할 것이란 분석이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4일 “분양가를 초기에 낮추는 효과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재고 주택 가격까지 안정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시장 시세에 맞춰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6년 3만 350여가구였던 서울 아파트 인허가 물량은 2007년 5만여가구로 급증했다. 상한제 실시 이후 2008년 2만 1900여가구, 2009년 2만 6600여가구로 줄어든 뒤 2010년 5만 1300여가구로 다시 늘었다. 이 때문에 분양가 상한제에 따른 공급 감소론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나온다. 2008~2009년 인허가 물량의 감소 폭이 커진 것은 2007년 유례없는 인허가 물량 급증에 따른 기저 효과이며 상한제보다는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인허가 물량이 증가한 것은 당시 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이 위축되면서 감소된 물량을 보금자리주택이나 도시형 생활주택 공급으로 상쇄했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변세일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주택 준공 실적이 62만 7000가구로 크게 늘었고 최근 3년간 주택건설 인허가 실적도 장기 평균치를 웃돌아 당분간 준공 물량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며 “3기 신도시 개발 등을 통해 수도권 내에서 주택 30만 가구 공급을 병행하는 만큼 공급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건설사의 수익성이 담보돼야 하고 공사비에서 차지하는 토지 가격이 많이 오른 상태에서 실제 상한제를 시행해도 분양가가 20% 이상 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국 현금 부자만 더 혜택 얻게 될 것” 분양가 상한제를 통해 상대적으로 낮은 분양가로 혜택을 보는 분양자는 극소수라는 점에서 ‘로또 청약’을 부추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청약시장이 무주택자 위주로 개편됐다고 해도 인기 지역 청약경쟁률은 여전히 높다. 서울 강남권의 경우 주변 시세의 70~80%로 공급한다고 해도 현금이 10억원 이상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금 부자만 더 혜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세 시장이 들썩일 우려도 있다. 수요자는 조금만 기다리면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분양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당장 집을 사기보다는 전세로 눈을 돌리고, 수요가 늘면서 전세 가격도 불안정해질 가능성이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전주 대비 0.03% 올라 5주 연속 상승세다. 분양가 상한제로 집값이 더 낮아진다는 기대 심리가 작용하면서 당장 매매 대신 전세로 대기하려는 심리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현시점에서 분양가 규제 없이는 부풀 대로 부푼 집값의 거품을 거둬 낼 수단이 마땅치 않다. 매년 공급되는 주택물량 중 공공택지에서 공급되는 공공주택이 30%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내 주택 공급을 늘릴 수 있는 확실한 카드가 재건축·재개발밖에 없는 상황에서 광범위한 상한제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현재 집값이 불안한 것은 주택물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에 선호도 높은 아파트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상한제로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위축되면 물량 축소로 시장 가격이 왜곡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번에 시행하는 상한제는 전국 단위의 광범위한 시행 대신 서울 강남 등 집값 과열 우려 지역에 한해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현행 주택법 시행령상 민간택지에 분양가 상한제를 적용하려면 최근 3개월간 주택가격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의 2배를 초과해야 하며 3개월 동안 주택 거래량이 전년 동기 대비 20% 이상 증가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이 0%대인 현 상황에서는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 이 때문에 이 기준을 물가상승률의 1~1.5배로 완화하고 주택거래량 기준을 낮추는 방안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분양가 상한제로 인한 청약 과열과 과도한 시세 차익 등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현재 3~4년간 적용되는 투기과열지구 내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주택 전매제한 기간을 5~7년으로 늘리는 방안도 거론된다. 분양가격을 낮추는 대신에 상당 기간 주택을 매매할 수 없도록 해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를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주택채권입찰제 도입 가능성도 이와 함께 주택채권입찰제가 도입될 가능성도 있다. 2006년 처음 도입된 채권입찰제는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된 주택을 분양받을 때 인근 단지와 과도한 시세 차익을 줄이기 위해 분양받는 사람에게 국민주택채권을 매입하게 하고 매입액을 많이 써낸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분양권을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자금 여력이 부족한 무주택자의 당첨이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있어 고민되는 대목이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채권입찰제를 시행할 경우 국고로 환수된 채권 매입액을 정부가 서민 임대 주택을 늘리는 데 사용하는 등 다양한 보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재규 사진 다시 걸린 軍,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재규 사진 다시 걸린 軍,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진이 약 40년 만에 그가 몸담았던 부대에 걸린 것으로 1일 확인됐다. 육군은 이날 “김 전 부장의 사진이 지난 5월 말부터 육군 3군단과 6사단 등 군부대 역사관 및 군 인트라넷 등에 게시됐다”고 밝혔다. 김 전 부장은 육군에 몸담으면서 18대 3군단장과 15대 6사단장 등을 지냈다. 1980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혐의로 내란죄가 확정돼 사형된 뒤 그의 사진과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약 40년 만에 지휘관으로 복권된 것이다. 지난 4월 국방부는 역대 지휘관 사진 게시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은 ‘국방장관 및 장성급 지휘관 사진 게시 규정 등 부대관리훈령’을 개정했다. 개정안에는 내란·외환·반란·이적의 죄 등으로 형이 확정된 경우 및 금품 및 향응수수, 공금의 횡령·유용으로 징계 해임되는 경우에는 홍보와 예우 목적으로 지휘관 사진을 게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다만 홍보가 아닌 ‘역사적 기록 보존’의 목적일 경우에는 게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내란죄가 확정된 김 전 부장이 이 예외 조항에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김 전 부장의 ‘복권’(復權)은 덩달아 다른 범죄 사실이 있는 지휘관들에게도 ‘면죄부’로 작용한다는 점이 딜레마다. 국방부는 역대 국방부 장관 중 12·12 군사반란과 5·18 당시 반란·내란으로 형을 선고받은 22대 주영복, 25대 정호용, 29대 최세창 전 장관의 사진을 국방부 장관실과 인터넷 홈페이지 ‘역대장관’란에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또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과거 군 지휘관을 지냈던 대통령들의 사진도 이들이 근무했던 사단 군 내부 홈페이지와 지휘관실, 역사관 등에 고스란히 남게 될 전망이다. 그 밖에 금품수수 등의 범죄를 저지른 지휘관들의 사진도 역사 보존이란 차원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육군 관계자는 “최종적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내부 논의를 거쳐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1987년 한국 대선 때 여당 부정선거 계획”

    1987년 한국 대통령 선거 전에 당시 여권이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권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낙선을 우려해 선거 전부터 개표 부정, 선거 무효 선언 등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20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정보보고서를 통해 당시 한국 대선 상황에 대해 “여당 간부들이 노 후보의 (당선) 전망에 대해 분열하고 있었고 선거 조작에 대한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다”며 “광범위한 조작 계획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보고서는 CIA에 정보공개 요구를 통해 입수했다고 SCMP는 전했다. 당시 대선은 6월 민주항쟁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로 개헌이 이뤄진 후 처음 시행된 선거였다. 민정당 후보인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선거 직전까지 여권에서는 그의 패배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대선 직전인 11월 23일 CIA 보고서에는 “민정당은 흑색선전과 투표 조작 등 ‘더러운 술책’을 검토하고 있다”며 “일부는 그 이상을 준비 중인 것 같다”고 썼다. 노 전 대통령이 패배할 경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통한 선거 무효 선언 움직임도 있었다고 CIA 보고서는 밝혔다. 한 소식통은 “여당 전략가들은 초기 개표 결과 노 후보가 낙선한다는 예상이 나오면 증거를 날조해 전 대통령이 선거 무효를 선언하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는 선거 이후 발생할지 모를 ‘소요 사태’에 대비해 계엄령 선포 등도 논의했다고 덧붙였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속보]“1987년 한국 여당, 대선 전 부정선거 모의” 외신 폭로

    [속보]“1987년 한국 여당, 대선 전 부정선거 모의” 외신 폭로

    1987년 한국 대선 전에 여당이 부정선거를 모의했으며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패배할 경우 선거 무효 선언을 하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20일 홍콩 언론이 보도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정보공개를 요청해 획득한 자료들에 따르면 CIA는 당시 정보 보고에서 이러한 정황을 자세히 다뤘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의 결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따라 이뤄진 12월 16일 대선에서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여권 후보로 나왔으며,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출마했다. 대선 수일 전 작성된 CIA 정보 보고에서는 “여당 간부들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 전망을 놓고 분열했으며, 선거를 조작하려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면서 “광범위한 조작 계획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11월 23일 작성된 정보 보고에는 “민정당은 군부와 노태우 후보의 관계 때문에 선거에서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갈수록 민감해졌다”면서 “그 결과 그들은 흑색선전과 투표 조작 등 더러운 술책을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보 보고가 인용한 한 소식통은 “여당 전략가들은 초기 개표 결과 노 후보가 패배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경우, 조작의 증거를 날조해 전두환 대통령이 선거 무효를 선언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검토했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는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각각 28%, 27% 득표율을 나타냈다. 하지만 대선 전 여당은 노태우 후보의 패배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으며, 그 결과 선거를 조작하고자 하는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다고 CIA 자료는 전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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