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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평화와 번영의 동반자(사설)

    김영삼대통령의 이번 미국방문은 종전및 광복50주년 기념의 뜻이 강하다.지난 50년간의 밀접했던 혈맹관계를 과시하고 보다 돈독한 21세기 우호협력관계를 다지자는 여정이다.26일 김대통령의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지난 반세기의 성공적인 동맹관계 전반을 높이 평가하고 아시아·태평양시대를 맞아 한·미 두 나라가 자유·평화·번영을 향한 동반자로서 더욱 굳게 결속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등 미래지향적인 21세기 한·미관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미 상하양원의원들의 큰호응을 받았다. 한국대통령의 미의회연설은 6·25직후인 54년의 이승만 대통령과 올림픽 다음해의 민주화열기속이었던 89년의 노태우대통령에 이어 민주주의가 만개한 광복50주년의 김영삼대통령이 세번째다.미의회는 자유민주주의 발상지의 한 곳이다.그리고 김대통령은 한국민주화투쟁의 화신이다.김대통령의 미의회연설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와감회를 느끼게 했다.김대통령은 우리국민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운 것임을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안보,그리고 경제번영의 달성이라는 한국의 성공은 한·미 양국국민의 공동승리라고 지적한 김대통령은 이제부터 한국이 지향해가야 할 지상과제가 남북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에 있으며 통일한국이 분단한국보다 인류와 세계에 더 기여할 것임을 강조했다.남북통일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것임을 미국조야는 잊어서 안된다는 당부다. 김대통령의 연설은 나아가 미국과 자유세계의 지원으로 오늘을 건설한 한국도 국제사회에서의 책임과 역할을 확대해나갈 것임을 천명했다.한국민은 통일한국을 이루어 미국민과 함께 세계와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더욱 크게 기여하자는 의지로 충만해 있으며 이것이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한국민의 메시지』라고도 강조했다.21세기 한·미동반자관계가 지향해야 할 방향제시라 생각한다.
  • 「남북 공동발전 계획」 추진/김대통령 미 의회 연설

    ◎화해·협력통해 「1민족 1국가」로/“한·미결속 강화… 아태시대 열자”/내일 클린턴과 정상회담… 한국전 기념비 제막 【워싱턴=이목희 특파원】 미국을 국빈 방문중인 김영삼 대통령은 26일 상오(현지시간)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공동보조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분명히 풀릴 때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미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는 그 실질적인 당사자인 남북간 대화와 협력에 의해서만 정착될 수 있다』고 전제,『클린턴대통령과 미국의회가 그동안 남북대화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강조해온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우리는 광복 50주년이자 분단 50주년인 올해를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만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히고 『남과 북이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1민족 1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한국의 통일정책』이라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여기에는 북한의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고 『우리는 남과 북이 함께 번영하는 「민족공동발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미 두나라는 일방적인 도움을 주고 받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자유와 번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성숙한 동반자가 되었다』면서 『더욱 강력한 결속으로 본격적인 아·태시대를 열어나가자』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특히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아·태지역 전체의 안정을 위해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며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하기는 이승만·노태우전대통령에 이어 김대통령이 세번째다. 김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 이어 워싱턴의 캐피털 힐튼호텔에서 최종현 전경련회장등 수행경제인 38명과 오찬을 나누며 우리 기업의 미국진출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은 27일 낮(한국시간 28일 새벽) 백악관에서 클린턴 미국대통령과단독·확대정상회담을 갖고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 공조체제를 재확인하고 남북대화와 미·북한 관계개선의 속도조절,한반도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김대통령은 이어 이날 하오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에 클린턴대통령과 함께 참석,연설한 뒤 백악관에서 열리는 국빈만찬에 참석한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25일 하오(한국시간 26일 새벽) 워싱턴에 도착,캐피털 힐튼호텔로 지역 교민들을 초청,리셉션을 베풀고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북 쌀지원과 관련,『북한사정이 참으로 어려우며 우리는 순전히 동포애의 입장에서 쌀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힘 닿는 데까지 동포애의 입장에서 도울 것』이라고 밝혀 쌀의 추가지원 의사를 분명히 했다.
  • “한미협력” 강조에 박수 20여차례/김대통령­방미 여로

    ◎“한국전 영령 추모… 참전의원 28명에 경의”/교민들엔 30여분간 원고없이 격려연설 김영삼 대통령은 국빈자격의 미국 수도 워싱턴 방문 이틀째인 26일 상오(한국시간 26일 자정·이하 현지시간)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한 뒤 한국경제인들과 오찬을 나누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알링턴국립묘지를 찾아 무명용사묘에 헌화했다. 김대통령은 전날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과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차례로 접견한 뒤 현지교민들을 위해 리셉션을 베풀었다. ○의원들 기립박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김대통령이 우리나라에 TV로 생중계된 가운데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는 동안 상·하원 의원들은 18여차례에 걸쳐 박수로 호응했다. 특히 의원들은 『한국의 전선에서 고귀한 젊음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대목 등에서는 기립박수로 호응했다.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한 우리나라 대통령은 이승만·노태우전대통령에 이어 김대통령이 세번째. 상오10시45분쯤 공식수행원들과 함께 의사당에 도착한 김대통령 내외는 레이저 국무부의전장 등의 영접을 받으며 의사당 남쪽입구를 통해 2층 접견실로 갔다. 김대통령은 접견실에서 상·하원 영접의원단 20여명과 악수를 나누고 10여분동안 환담한 뒤 하원경호대장의 안내로 하원본회의장으로 향했다. 김대통령이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관례에 따라 육성으로 입장이 고지되자 회의장 참석자 전원은 기립박수로 김대통령을 맞았다. 연단에 오른 김대통령은 스트롬 서몬드 상원임시의장,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고 깅그리치 하원의장의 소개로 의원들에게 목례를 한 뒤 박진공보비서관의 순차통역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연설 서두에 『우리 국민은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의 한국을 이루기까지 언제나 든든한 벗이 되어온 미국국민에게 뜨거운 우정을 느낀다』고 인사를 했다. 김대통령이 이어 『한국의 전선에서 고귀한 젊음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약관 19세의 나이로 참전한 찰스 랑겔 의원을 비롯한 28명의 의원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자 의원들은 박수로 답례했다. 김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 아래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전진시켜나가자』고 강조한 뒤 『모든 것이 유한하나 평화와 번영을 향한 인류의 열망은 영원하다』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김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의원들은 전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고 김대통령은 회의장을 가로질러 퇴장하면서 통로 좌우편의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김대통령은 이어 다시 접견실로 가 기념촬영을 한 뒤 깅그리치 하원의장과 상호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이 연설하는 동안 부인 손명순여사는 3층의 특별방청석에서,공식수행원 12명과 황명수의원 등 18명의 방미의원단및 대사관 간부 등은 본회의장 오른쪽 특별석에서 연설을 경청했다. ▷알링턴 국립묘지 참배◁ ○…김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상오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를 방문했다. 예포 21발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국립묘지 무명용사탑 동편 입구에 도착한 김대통령은 레이저 묘지의전장,고든 워싱턴 관구 사령관및 럭 주한미군 사령관의 영접을 받았다. ○무명용사탑 헌화 김대통령은 고든 소장으로부터 행사절차에 대해 설명을 듣고 무명용사탑 앞에 도열한 의장병이 받쳐든 태극기에 경례를 했다. 미 군악대의 애국가및 미국국가 연주가 끝나자 김대통령은 무명용사탑 최상단 지정위치로 이동,무명용사탑에 헌화를 한 뒤 잠시 묵념. 김대통령은 이어 무명용사탑 오른쪽으로 이동,고든 소장으로부터 비문과 무명용사탑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무명용사탑 헌화에는 우리측에서 공로명 외무부 장관과 김동진 합참의장을 비롯한 공식수행원 전원이 참석했다. ○한 미 최상의 관계 ▷교민 리셉션◁ ○…김대통령은 25일 하오 워싱턴의 숙소인 영빈관에서 멀지 않은 캐피털 힐튼호텔로 교민 8백여명을 부부동반으로 초청,다과를 베풀고 격려했다. 리셉션장 입구에서 최병근 워싱턴지역 한인회장 등의 영접을 받은 김대통령은 6인조 실내악단이 「선구자」와 「메기의 추억」을 연주하는 가운데 리셉션장에 입장,교민들과 악수를 나눴다. 김대통령은 헤드테이블에서 태권도사범 이준구씨등 교민 7명을 지명해 교민의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 30여분동안 원고 없이 격려연설을 했다. 김대통령은 『이번 워싱턴 국빈방문에서는 클린턴대통령과 함께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해 6·25전쟁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양국의 우의를 거듭 확인할 것』이라고 방문의미를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지금의 한·미관계는 최상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서 『양국은 작년 교역량이 4백25억달러를 넘어섰으며 올해는 5백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다음달 남북한 3차 쌀회담에서는 순수한 입장에서 많은 얘기가 오갈 것』이라고 소개하고 『통일문제를 환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독일의 통일처럼 언제 갑자기 닥칠지 아무도 예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6·27지방선거와 관련,『34년동안 중단된 지방자치제를 전면부활시킨 자부심과 함께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선거에 보람을 느끼며 지방자치정착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교민들은 김대통령이 특히 부정부패척결 등 개혁의지를 강조할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이날 리셉션에는 민자당의 권익현고문과 오세응·김종호·황명수·김동근의원,민주당의 조순승의원,자민련의 구자춘의원 등 국회 국방위와 통일외무위 소속 여야의원도 참석했다. ▷크리스토퍼 장관 면담◁ ○…김대통령은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의 예방을 받고 한·미정상회담,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워싱턴의 더운 날씨 등을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김대통령은 이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방문을 받았다. 김대통령이 야당총재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인 케네디 상원의원은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의 미국방문이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전하고 어머니 로즈여사의 자서전을 증정했다.
  • 「5·18 불기소」 헌법소원/피해자 가족 등 3백명

    정동년씨를 비롯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 가족 등 3백22명은 24일 『검찰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5·18관련자 35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이들은 청구서에서 『5·18 정변은 성공한 쿠데타가 아니고 87년 6월 항쟁에 의해 이미 실패한 것으로 역사상 평가되고 있다』면서 『문민정부 아래 새로운 국민적 시각을 반영,올바른 평가를 내려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재판권 없음이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재판절차에서의 진술권을 침범하면서까지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리는 것은 검찰권의 남용』이라고 지적하고 『공소권의 존재 여부는 마땅히 법원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밖에 검찰이 이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을 최규하 전 대통령이 하야한 80년 8월 16일로 잡은 것과 관련,『81년 4월 제25차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끝난 시점이 내란죄의 범죄행위 종료시점이므로 공소시효는 내년 4월까지』라고 주장했다.
  • 검찰,“「5·18 위증고발」 수사”/기소촉구 결의대회·시위 잇따라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22일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주영복 전 국방장관 등 5·18사건 관련자 7명을 위증혐의로 고발한 것과 관련,5·18 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정밀검토작업에 들어가는 등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위증여부를 가리기 위해 당시 국회 청문회자료와 수사결과를 면밀히 비교,검토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피고발인에 대한 조사일정과 방법은 5·18사건 고발인들의 항고와 재항고등 법적 불복절차가 남아 있어 이를 먼저 마무리한 뒤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민변이 위증혐의로 고발한 5·18사건 관련자는 전 전대통령과 이 전계엄사령관,주 전 국방장관등 3명을 포함,최웅 11공수여단장,안부웅 11공수여단 61대대장,권승만 7공수여단 33대대장,임수원 3공수여단 11대대장 등이다. 국회에서의 증언 및 감정 등에 관한 법률상 위증혐의가 드러나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고 공소시효는 7년으로 89년말 증언한 전 전대통령은 96년 12월30일,나머지 피고발인들은 올 12월에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1백36개 단체 참가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전남지역의 1백36개 재야단체로 구성된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공동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조비오 신부)는 22일 하오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시민과 학생 등 3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5·18 책임자 기소관철을 위한 광주시민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에 앞서 전남대·조선대 등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남총련) 소속 대학생 5백여명은 이 날 상오 6시 40분쯤 광주지검 앞에 몰려가 「5·18 책임자 재수사」 등을 요구하며 최루탄으로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5일째 격렬한 시위를 했다. ◎연희동 진출 시도 한국대학 총학생회 연합 소속 대학생 1천8백여명은 22일 하오 6시30분쯤 서울 연세대에 모여 5·18 광주사태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뒤 전두환·노태우 두 전대통령의 집이 있는 연희동 쪽으로 가려다 경찰이 막자 학교앞 도로를 점거하고 3시간여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전경과 학생 20여명이 다쳤으며 경찰이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며 신촌세브란스 병원 앞마당에 최루탄을 마구 쏘아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 「5·18」불기소 반발 확산/재야·시민단체

    ◎항의 농성·규탄집회 잇따라/“양민학살 진상 밝혀라” 송광주 시장 「5·18 광주민주화운동」 고소·고발사건에 대해 검찰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이 사건 피고소·고발인 모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데 대해 재야 및 시민단체 등은 19일 이들 전직 대통령 등 관련자를 사법처리할 것을 촉구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상임의장 이창복)는 이날 하오 기자회견을 갖고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한 검찰이 그 연장선상에 있는 5·18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통치행위임을 내세워 불기소처분을 내린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국연합」은 오는 22일 하오 2시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서 검찰의 불기소결정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하는 등 사회단체들과 연대,항의농성과 규탄집회를 잇따라 열 계획이다. ◎유족회등 상경시위 【광주=최치봉 기자】 송언종 광주시장은 5·18과 관련된 피고소·고발인에 대해 공소권이 없다는 검찰의 발표와 관련,정부를 비판했다. 송시장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조해온 김영삼 대통령 정부가 진상규명을 외면하고 덮어두려는 것은 국민을 실망시키고 역사에 반하는 처사』라며 『시민의 한 사람으로 승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된만큼 당시 군부세력이 자행한 양민학살의 진상이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며 『책임자 처벌이나 용서 여부는 그 다음 문제』라고 말했다. 또 5·18유족회와 부상자회 등 50여명은 검찰의 수사결과에 항의하기 위해 이 날 상오 전세버스를 타고 상경,서울지검과 청와대를 방문해 항의시위를 한 뒤 명동성당 등에서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 전전대통령 정권창출위한 기초행위/「5·18」수사 사태의 성격

    ◎계엄확대는 강력한 정국주도의 표현/국보위를 5공 탄생의 산실로 삼아 위헌·위법 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행위는 외형적으로 최규하 전대통령의 재가를 받거나 대통령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즉,최전대통령은 중앙정보부 기능의 효율성을 위해 전두환 전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고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재가했으며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을 국가보안목표에 투입하고 정치 목적의 옥외집회·시위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또 소요조종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법에 따라 신중하게 조사토록 당부했으며 합수부는 주요 정치인과 학생 대표들을 체포했다. 이와함께 대통령을 보좌하고 내각과 군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국보위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하고 전전보안사령관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최전대통령의 국군통수권 행사이거나 국가 긴급권과 법령에 근거한 집행행위들로서 외형적으로는 최전대통령의 국가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비상계엄의 확대,정치활동의 금지,국보위의 설치등은 전전사령관이대통령의 지시없이 추진한 조치들로서 정권 창출의 기초행위로서의 실질도 갖고 있다. 먼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정보를 장악하고 각료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집권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계엄 확대는 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하게 되고 비상기구의 설치나 국회의 해산,정치활동의 규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야 하는데도 전전사령관이 참모들에게 입안하게 한뒤 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국장악 의사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데도 전격 추진,집권한 사실에 비춰 전전사령관은 계엄 확대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다. 특히 정치활동 금지는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았고 정치권을 배제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사가 강력히 시사된 것이다. 더욱이 가택연금은 법적 근거도 없고 불법구속·가혹행위 시비가 야기되고 재산헌납·공직사퇴도 정국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인사들을 제거한 것으로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전국 비상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행정을 관장하게돼 있음에도 국보위상임위가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내각을 통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했다. 또 전전사령관은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자 헌법개정안을 작성,개헌작업에 반영하는 등 국보위를 5공화국 탄생의 산실로 삼았다. 결국 국보위는 자문기구로서보다는 비상기구와 같이 행정부를 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돼 전전위원장이 실질적 주도자임을 과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최전대통령의 국사행위의 외관을 갖고 있어도 실지로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 공백기에 12·12 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전사령관이 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과 국군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한 정치적 성격의 행위다. 다만 광주민주화시위의 발단이 된 전남대와 도청앞에서의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은 학생들이 계엄군의 기습적 대학점령 등에 분격하고 계엄확대를 통한 군의 전면 등장과 김대중씨 등 정치지도자와 학생지도부의 체포에 반발,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식의 강경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태가 악화된 원인은 부대원들이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하자,남녀노소나 시위가담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가격하거나 체포하는 강력한 공격적 진압으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연행자들을 반라로 만들어 기합을 주기까지 하여 극도의 분노감과 적개심을 야기시켰다. 또 보도통제로 악성 유언비어가 발생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고립감과 격렬한 저항감을 야기,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게 됐다. 이에 공수부대에 차량돌진을 감행했고 공수부대가 발포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시민들도 무장저항을 하게 되는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5·18사건 수사 일지 ▲94·5·13=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이 사건 피해자 3백22명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7·13=서울지검,피고소인중 현역군인 14명 국방부에 조사의뢰. ▲10·19=한완상씨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22명,전·노 전 대통령등 10명 고소. ▲10·28=장기욱·이부영의원 등 민주당 「민주개혁 정치모임」소속 의원 29명,전·노 전대통령등 신군부 인사 23명 고발(이에 따라 피고소·고발인은 모두 58명으로 늘어남). ▲10·31=5·18관련 고소고발 사건 조사 착수. ▲11·23=정동년씨 소환조사. ▲11·30=장기욱의원 조사. ▲12·1=5·18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의장 이신범씨 조사.국방부 검찰부,5·18 관련 현역군인 90여명 수사착수. ▲12·2=KNCC 인권위원장 김상근목사 조사. ▲12·5=5·18 당시 31사단장겸 전남지역 계엄분소장 정웅씨 소환조사. ▲12·1∼16=당시 전교사 사령관 소준렬·윤흥정씨 소환. ▲12·17=피고발인중 차달숙씨등 3명 무혐의 처분. ▲12·19=신현확전총리 조사. ▲94·12·21∼95·1·20=당시 공수부대등 진압부대의 대대장급 군간부 소환조사. ▲95·1·25=이희성씨 소환. ▲2·1=국방부 검찰부,김동진합참의장 등 현역군인 12명 조사착수. ▲2·9=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씨 소환조사. ▲2·15=당시 내무장관 김종환씨 소환조사. ▲2·17=남덕우 전국무총리,신병현 전부총리등 국보위위원 17명 서면조사. ▲2·21=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소환조사. ▲3·21∼4·7=당시 20사단장 박준병의원에 대한 소환조사를 시작으로당시 보안사 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국장 이학봉전의원,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의원,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의원,특전사령관 정호용의원 소환조사. ▲4·11=당시 3공수여단소속 상사 첫 소환. ▲4·14=민주당 김옥두·한화갑의원,전두환 전대통령 등 10명을 내란혐의로 고소. ▲4·14=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씨 재소환. ▲4·22=당시 보안사언론팀장 이상재의원 소환. ▲4·26=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재소환. ▲4·29=전·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서 발송. ▲5·11=「헬기 총기난사」주장 미 피터슨 목사 조사. ▲5·19=노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2=전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7=최전대통령,검찰 방문조사 불응 통보. ▲7·18=최종 수사결과 발표.
  • “아픈상처 묻어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자”/「5·18」수사 각계의반응

    3만여명이 넘는 고소·고발인에다가 10만쪽이 넘는 수사기록,1년2개월여를 끌어온 수사기간 등으로 초미의 관심을 모은 「5·18」 고소·고발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공소권 없음」으로 끝나버리자 고소·고발인과 시민·재야단체·야당정치권 등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발했다.반면 피고소·고발인 당사자와 여당 정치권등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그러나 이번 사건 수사는 일단 매듭지어진 것으로 비춰짐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대정부 강경투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어 앞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시민/불법 쿠데타에 면죄부 준것… 모든 문제 법테두리서 △안상수(변호사)씨=군주정치시대의 산물인 통치행위의 개념으로 불법적인 쿠데타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헌법에 명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치행위를 인정해서는 안되며 이같은 법의 적용에는 어떤 예외도 있어서는 안된다.법은 행위의 결과뿐 아니라 동기부터 따져야 하며 민주정치의 확립과 법해석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피고소·고발인들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 △나은경(29·회사원)씨=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광주시민으로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보고 겪은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으면 했으나 다소 실망스러웠다.그러나 역사란 당장 평가될 수 없는 만큼 5·18의 진정한 평가는 후세에 맡겨두는 것이 옳다고 보며 이제는 아픈 상처는 묻어버리고 국론을 모을 때라고 본다. △허경(연세대 법학과교수)씨=법치국가에서는 모든 문제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상식인데도 이번 수사가 통치권 차원이라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마무리돼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본다.정치적인 결단을 위해 전제군주에게 주어지던 통치권을 민주국가에서 법적인 심사에 앞서 운운한 것 자체가 법치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것이다. △이남숙(38·주부)씨=이른바 신군부들이 처벌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 밝혀져 다행스럽다.특히 일부 군인이 민간인을 사살한 게 밝혀진 것은 당시의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이제평가는 역사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과거를 파헤치는 것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졌으면 싶다.이 기회에 아직도 비탄에 잠겨 있는 광주시민을 위한 대화합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유종성(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연구실장)씨=검찰의 결정은 쿠데타와 시민학살의 주범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으로 검찰이 스스로 역사적인 책무를 포기한 처사다.특히 지난번 12·12 주동자들에 대한 기소유예처분보다도 후퇴한 이번 결정이 지방자치선거 패배 등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여권세력 끌어안기라는 현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천우(사업)씨=5·18 당시 광주에 있어서 상황을 잘 안다.군의 무리한 투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국가에 대항한 것은 「반란」죄에 해당하므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본다.이번에 5·18 수사발표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끝내고 더 이상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 ◎정치권/여,“검찰의 고유권한” 야,“진실외면” 비난 ▲민자당박범진 대변인=5·18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검찰의 고유권한으로 검찰의 결정을 존중하며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이번 검찰의 결정을 계기로 이제 과거 문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국민적 힘을 모아가는 건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지난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논란을 계속하는 것은 국력만을 소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권위주의 정권이나 독재정권을 청산하는 방식에는 두가지의 길이 있다.남아공처럼 과거를 묻지않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 화합속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방식이 하나다.6·25전쟁을 겪은 우리가 통일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남북간 용서와 화해의 정신없이는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먼저 국내적으로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신당창당모임 박지원 대변인=검찰의 「공소권 없음」결정은 사법적·정치적 혼란은 물론 사회교육적·도덕적·역사적 혼란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다.검찰이 국민의 편이 아니라 범죄자의 편에 선 것을 우리는 규탄하며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음을 정부에 경고한다. ▲민주당 이규택 대변인=진실규명을 바라는 국민 여망을 무시한 반역사적 폭거다.신군부일당을 사법처리하지 않은 것은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고 군사쿠데타를 합법화·정당화하는 처사로 또다른 역사의 오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자민련 안성렬 대변인=우리는 처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광주의 불행한 사건이 민족 화합을 위한 역사적 교훈이 되기를 바라며,진실을 밝힌뒤 대화합과 포용의 조치도 뒤따라야 한다. ◎피고소인/“당연한 귀결” 분위기속 직접 언급 자제 ○…전두환·노태우씨 등 전직대통령측은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내심 『큰 줄거리는 우리의 주장대로 된 것 같다』는 분위기이면서도 조사과정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전 전대통령측의 한 측근은 이날 『전 전대통령과 광주문제는 관계가 없다고 진작부터 말해오지 않았느냐』면서 『이번 조사결과로 광주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나돈 많은 얘기가 유언비어였음이 입증됐다』고 주장.이 측근은 또 검찰이 5공집권과정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관련,『그런 어정쩡한 결정을 하려고 전직대통령을 조사했느냐』면서 『이런 식의 조사가 헌정사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조사자체가 불쾌했다는 반응. 측근은 『일부에서 이번 검찰의 결정뒤 현 정부와 5·6공세력과의 화해가 이뤄질거라는 전망이 나오는데 성급한 추측』이라고 말했다. 노 전대통령은 이날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이 인사는 『법률이론에서 볼때 80년의 일련의 정부조치가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우리 주장이 큰 줄거리에 있어서는 수용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원 줄거리에 대해 공소권이 없다고 검찰이 결정을 내린 만큼 세세한 발표 내용을 놓고는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고소·고발 상대측이 항고등을 하는 경우에도 대비하고 있으며 우리의 주장은 변함이 없다』고 설명.한편 이번 조사와 관련,검찰조사에 끝내 응하지 않았던 최규하 전대통령측은 검찰 수사발표에 대해서도 노코멘트로 일관. ○…민자당의 정호용·박준병·허삼수·허화평의원 등 핵심관련자들은 직접언급은 자제하면서도 『처음부터 사법적 심판대상이 아니었다』고 반기는 표정. 허화평의원은 지역구인 포항에서 검찰발표를 전해 듣고는 『15년이나 지난 역사적 일을 국가기관이 실정법의 잣대로 시비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이라면서 『이렇게 종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홀가분한 소감을 피력. 정 의원측의 이상범 보좌관은 『특히 관심이 대상이었던 발포경위와 광주파견부대의 지휘권 이원화여부등에 대해 합리적으로 조사된 것 같다』고 코멘트. 박준병·허삼수의원은 지역구인 옥천과 부산에 머무르며 비서진을 통해 검찰발표를 보고받았으며 비서진들은 『미묘한 사안이라 의원님께서 직접 발표문을 읽어보기 전에는 논평하기 곤란하다』고 조심스런 답변. ◎고소인/“상식 무시한 법집행은 역사왜곡 행위” △이해찬(서울시 정무부시장)씨=검찰의 발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공소권 없음」이란 결론을 내려 놓고 목적없이 조사만 한게 아니냐하는 생각이 든다.검찰 스스로 반성해야 하며 부끄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이러한 결과를 내리려면 무엇하려고 수사를 했는가.수사를 말았어야 한다.이번 사건은 12·12사건보다 더 큰 사안이다.검찰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문영(경기대 대학원장)씨=문민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당시 피해자들은 내란음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는 등 법률적인 심판을 받은 반면 가해자들의 행위는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법률적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송기원(문인)씨=검찰의 결정이 정치적 판단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최근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검찰의 운신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나 「공소권 없음」 결정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조비오 신부(광주봉선동성당 주임신부)=사법부의 존재의미를 포기한 것이다.명백한 쿠데타를 통치권 행위로 규정한 것은 현정부가 5·18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동년(5·18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씨=김영삼대통령이 「현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연장선상에 있다」고 선언한 「5·13 특별담화」는 거짓으로 드러났다.5·18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인 만큼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의 방법으로 다시 5·18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윤광장(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씨=검찰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법권의 독단이다.5·18 책임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바랐던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것이다.법의 운용은 상식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상식과 정의를 무시한 형식적인 법집행은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광주권/검찰경정 납득못해… 「기소서명」 나설터 본다.정치적인 결단을 위해 전제군주에게 주어졌던 통치권을 민주국가에서 법적인 심사에 앞서 운운한 것 자체가 법치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것이다. ▲명노근씨(61·전남대 영문과교수)=국민의 일반 감정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결정이다.한마디로 검찰의 직무유기행위다.5·18 당시 진압군의 살인행위가 인정됐음에도 검찰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것은 검찰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을 저버린 처사다.특별검사제도 도입 등을 통해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려야 한다. ▲김원희씨(34·은행원·광주시 광산구 월곡동)=현 정부가 「5·18문제」를 역사에 맡기자고 선언했듯이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그러나 검찰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압을 정치적 행위에만 국한시킨 것은 형평성을 잃은 법적용이라고 생각한다.앞으로 가해자 기소를 위한 서명운동 등에 적극 참여해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관철토록 돕겠다. ▲박병모씨(37·전남일보 기자)=광주시민의 정서와 너무나 동떨어진 결정이다.학생과 재야·시민 등이 이미 「피고소·고발인에 대한 기소촉구」집회 등을 계획하고 있어 자칫 공권력과의 충돌 등 혼란이 예상된다.정부는 검찰의 이번 결정이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 부여라는 일반 시민의 격앙된 감정에 귀기울여야 한다. ▲정웅태씨(37·변호사)=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검찰의 입장을 이해 못하진 않는다.그러나 국민의 법감정과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결정이다.특별검사제 도입등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애초부터 5·18문제를 푸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김대원씨(23·전남대 국문과 3년)=명백한 살인행위를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라고 규정한 검찰의 결정은 납득할 수 없다.민주화를 외치다 쓰러져 간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 역사의 심판에 맡길수 밖에(사설)

    검찰이 5·18 광주민주화 운동 고소고발사건의 피고소·피고발인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사실상 종료되고 역사의 판단만 남게 됐다.이로써 1년2개월에 걸친 수사가 마무리됐으나 검찰 결정에 대한 반발과 고소인들의 항고,재항고,헌법소원등 불복절차가 예상돼 논란의 소지는 남아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등 신군부 세력이 무력을 동원해서 최규하 전대통령을 하야시킴으로써 내란죄를 범했는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었다.그리고 검찰의 결정은 「5·18사건은 극심한 소요발생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내란죄 여부의 사법심사 대상이 되지 않아 공소권이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국민적 감정을 고려하여 「고뇌에 찬 결론」을 내린 흔적이 역력하다.공소권이 없다는 검찰의 결론은 국민감정 내지 정서에 앞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법형식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하겠다.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지나간 사건에 대해 검찰이 법적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검찰이 이번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다」는 법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미 「군사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돼 기소유예 처분된 12·12사태와 5·17사건을 포함,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들이 모두 마무리되었다.이번 사건의 공소시효도 오는 8월15일까지로 한달도 안남았다.훗날의 역사적인 심판에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검찰의 법적판단이 내려짐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부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있다.그러나 이 문제는 훗날 역사의 평가에 넘기고 미래지향적인 민주발전과 국력집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국민적 지혜를 보여주어야 하겠다.
  • 전·노씨 대상 「공소권 없음」 결정­검찰/「5·18」수사 발표

    ◎“정권창출 과정 사법심사 대상 안돼”/관련자 58명 전원 불기소 처분 「5·18광주 민주화운동」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해온 검찰은 18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이 사건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에게 「공소권없음」 결정을 내리고 이들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이날 최종 수사결과 발표문을 통해 『지난 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시작으로 본격 전개된 일련의 사건과정은 당시 구 헌정질서의 붕괴로 인한 극심한 소요발생 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수습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이기 때문에 사법기관이 그 적법성 여부를 따질 심사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리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5·18사건은 수사개시 1년 2개월만에 마무리됐으나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는 고소·고발인 등 피해 당사자 및 재야단체 등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 향후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적지않은 파장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이날 『5·18당시일련의 사건전개는 혼란상황에 놓인 국가전체를 지도하고 총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의 일환으로 판단되며 계엄법 등 당시의 법률적 논거를 기초로 행해진 조치라는 점에서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해온 내란혐의와 관련한 위법성여부를 판단할 증거자료 및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에 대해 사법적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는 법률적 근거로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의 창출을 위한 행위들에 대해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국내외 헌법학자들의 법이론인 「통치행위론」를 제시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조작여부에 대해 사건조작 주장은 물론 위법성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또 내란죄성립여부와 관련,핵심쟁점이 돼온 보안사의 집권시나리오 및 신군부의 최전대통령에 대한 강압여부에 대해서는 최전대통령의 방문조사 거부로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치 못한 상태에서 관련자들의 진술과 관련자료를 종합해 「사실무근」으로 판단내렸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와 함께 5·18사건의 공소시효를 최전대통령이 하야한 80년 8월16일을 기점으로 본다고 밝혀 이번 사건의 공소시효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된다.이에 따라 고소·고발인들은 앞으로 27일안에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의 검찰결정 불복절차를 밟아야 한다. 검찰은 지난해 5월 13일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정동년씨등 광주 지역피해당사자 3백22명이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한이후 그동안 고소인 10명과 피고소인 58명을 비롯,참고인등 모두 2백69명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조사를 벌여 왔다.
  • “정치적 결론”… 평가는 역사에/「5·18」수사­포괄적 의미

    ◎5·6공 신군부 세력에 사실상 「면죄부」/기소땐 법적 논쟁 계속… 국론분열 감안 검찰이 18일 「5·18」 사건 관련자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고 불기소 처분함으로써 이 사건은 사건발생 15년 2개월 만에 일단락됐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 가장 가슴아픈 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마무리된 셈이다. 앞으로 고소·고발인측의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의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 지검의 이번 결정이 번복되기는 힘들 것이라는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검찰이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법률적 판단과 함께 정치적 고려도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번복되기 어려울듯 이보다 앞서 김영삼 대통령은 93년 5월 특별담회를 통해 「광주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주으를 위한 것이었고 오늘의 정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평가하면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은 훗날의 역사에 맡겨야 하며 보복적 한풀이가 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김대통령이 이 사건의 정치적·역사적 성격을 규정한 것으로 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엇보다 한 시대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점에서 「역사성」과 「기록성」이 무시될 수 없다. 어느 정권도 광주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없고 역사의 정통성 또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이전에는 이 사건 관련자들이 통치권을 쥐고 있어 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제기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수면하에서 잠복했던 셈이다. 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지난해 5월에서야 비로소 수며누이로 부상했다.정동년 광주민주 운동연합 상임의장등 이 사건 피해자 3백22명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에 의한 살인혐의로 정식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를 불과 1년여 남겨두고 법률적 판단을 호소했던 것이다. 검찰은 그러나 「정치적 변혁의 주도세력들이 새로운 정권창출에 성공,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아 새로운 헌정질서를 수립해 나간 경우에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법 논리를 내세워 고소인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노 전 대통령등의 행위나 조치가 구체적으로 내란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으로써 5·18 사건을 역사적 판단에 맡긴 셈이다. 다만 사건의 발단이 됐던 ▲비상계엄 전국확대전 시국상황 ▲광주시위의 진압 ▲최귀하 대통령의 하야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등 전모가 밝혀져 사건의 전말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는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노 전대통령 등 「5·6공 세력」은 이번 결정으로 완전히 법률적 「면죄부」를 받게 됐으며 당시 정권도 「합법성」을 인정 받은 셈이다. 「12·12사건」과 함께 이들 신군부 세력의 「아킬레스건」이었던 「5·18사건」의 사법적 판단이 마무리된 결과다. 이에 앞서 검찰은 지난해 10월 「12·12사건」으로 피소됐던 전·노 전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측 인사 34명에게 모두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을 「군사쿠데타」의 주범으로 보고 군사반란 혐의를 적용하되 기소만 하지 않았다. ○신군부측 족쇄 풀려 이번 결정에 따라 그동안 정치를 하지 않았던 신군부측 군출신 인사들도 새로운 당을 창당하거나 기존정당을 선택하는 등 보다 더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각에서는 「5·6공」세력의 결집을 막기 위해 이들을 기소할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나돌았었다. 검찰이 이 두 사건 관련자에게 「공소권 없음」이나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것은 이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파생되는 손익계산서를 충분히 고려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만약 이들을 기소해 법정에 세우면 과거사가 반복 거론되고 법적논쟁이 계속돼 국론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불필요하게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도 감안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5·18을 사법적으로 일단 마무리한 것은 사실이나 광주 등 호남권이 주축이 된 김대중씨의 신당 창당 등 새로운 정치적 변수등에 비추어 정치권에서의 논란까지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 공수부대 주민학살 확인/「5·18」수사결과 오늘 발표

    5·18 고소 고발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이 사건 최종 수사결과를 18일 하오 발표한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지난 80년 5월23일 11공수여단 62대대가 광주 외곽의 주남마을 근처에서 소형버스에 마구 총을 쏴 승객 10여명을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와함께 공수부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대대 작전보좌관의 지시에 따라 총격으로 부상한 주민들을 사살한 뒤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들의 행위가 명백한 살인죄에 해당하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고소 또는 고발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게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 5·18고소 수사/내일 결과발표

    「5·18」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16일 이 사건에 대한 최종수사결과를 18일 하오 2시에 발표하기로 했다.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두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피고소인과 피고발인 58명에 대해 내란혐의를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혐의없음」등 불기소처분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 전·노씨 기소 요구/검찰청사 앞 시위/한총련 학생 80명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의장 정태흥) 소속 대학생 80여명은 8일 하오 4시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앞에서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 등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요구하며 1시간 남짓 시위를 벌였다.
  • 「5·18 내란」 무혐의/검찰,불기소 결정/권력찬탈 의도 없어

    ◎공소시효 기산점 8월16일로 「5·18」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6일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을 비롯한 이 사건 관련자들의 내란혐의에 대해 「혐의없음」등 불기소처분 결정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같은 내용의 수사결과를 빠르면 다음주 안에 발표할 예정이다. 검찰관계자는 이날 『내란죄의 범죄구성 요건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의 폭동이 있고 무엇보다 권력찬탈 의도가 입증돼야 한다』면서 『고소·고발된 사안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때 내란죄를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와 관련,『보안사의 「집권계획서」라는 문건 자체의 존재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화평·허삼수·권정달씨 등 당시 보안사 핵심간부들에 대한 조사결과 「5·18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군투입은 시국수습을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계엄법 등 실정법에 근거한 조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당시 신군부측의 권력찬탈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또 이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은 80년 5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결국 최전대통령이 하야한 같은 해 8월16일로 잡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이 사건은 오는 8월15일 내란죄의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된다. 고소·고발인들은 검찰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불복할 경우 항고·재항고를 거쳐 헌법소원을 낼 수 있으나 남은 기간은 1달에 불과한 실정이다. 검찰은 지난해 12월부터 피고소·고발인 58명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조사를 모두 끝냈지만 핵심 참고인인 최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최전대통령의 조사거부로 조사하지 못했다.
  • 조순 후보 전력 시비/“사퇴 마땅”·“흑색선전” 여·야 격렬공방

    ◎조 후보·경호실 관계 교수들이 밝힌 것­민자/“전대통령 스승까지 용공이라니” 반박­민주/인공부역→DJ수하… 무차별 권력지향­무소속 여야는 25일에도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후보의 전력시비를 놓고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민자당은 이날 『조후보가 6·25때 부역하면서 세가지 직책을 맡았다』고 주장하며 직책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고 민주당은 『흑색선전』이라고 맞받으며 민자당의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여기에다 무소속의 박찬종 서울시장후보진영도 민자당과 같은 주장을 펼치며 조후보의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는 등 민주당이 제기한 박후보의 「유신지지」 전력에 대한 역공을 펼쳤다. ▷민자당◁ ○…조후보측이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을 검찰에 고발조치하자 『법정에서 흑백을 가릴 일』이라면서 시비가 확대될수록 손해볼 것 없다는 분위기. 박대변인은 『공인은 자신의 경력과 관련해 이의를 제기할때 해명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조후보를 겨냥한뒤 『유신때 청와대경호실장과 함께 국기하강식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자문교수단에 참여했던 많은 교수들의 얘기를 종합해서 밝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대변인은 민주당에 의해 고발당한 것과 관련,『재판을 하면 많은 동료교수들의 명예를 훼손시킬뿐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낱낱이 모두 밝혀질 것이므로 선거가 끝나면 취소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신범 부대변인은 이날 『조후보는 6·25때 강릉농업학교 교사시절 교직원 동맹위원장,민청위원장,문화동맹위원장 등 세가지 직책을 맡아 공산주의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이부대변인은 이같은 전력시비 공방에 대해 『민주당이 먼저 다른 후보의 전력을 문제삼고 나섰기 때문에 우리당도 조후보의 의문스런 전력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조후보의 중학시절 남로당가입설과 3공의 차지철 청와대경호실장 비밀자문교수단 참여주장을 명백한 흑색선전으로 규정,민자당의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을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형사고발하는등 강경 대응방침을 정했다.조후보측의 정대철 선거대책위원장과 이해찬 본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남로당은 지난 46년12월23일 생겼고 조후보가 경기중학을 그만둔 44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면서 『전두환·노태우 두전직대통령과 이춘구 민자당대표를 가르친 스승이자 국가 일급비밀을 다루는 부총리와 국고의 열쇠를 책임지는 한은총재를 지낸 조후보를 용공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흑색선전』이라고 주장했다.또 『비밀자문교수단 참여주장도 전혀 사실과 달라 진실을 가리기 위해 고발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지원 대변인도 논평에서 『당선이 확실한 조후보에 대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인신공격을 하고 있는 반면 박찬종 후보 싸안기와 정원식 후보 버리기라는 국민들의 선택을 왜곡하는 반국민적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고 공격했다.박대변인은 『이로써 민자당이 과잉반응을 보였던 박찬종 민자당입당설,즉 이충범 시나리오는 현실화됐고 민자당의 진짜후보는 박후보임이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박찬종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이상용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인민공화국시절 교육동맹위원장으로 시작하여 3공·유신·5공과 6공을 지나 김대중선생 수하에 들기까지의 무차별적 권력지향은 그를 초야의 선비로 한때 존경한 많은 사람의 가슴을 황량하게 하고 있다』고 조후보를 맹비난했다.이대변인은 『조후보는 더이상 출세주의 기회주의로 지자제의 신성함을 더럽히지 말라』면서 조후보의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 남·북·일 새 3각관계(한·일수교 30년)

    ◎일의 「남·북 줄타기 외교」 대비해야/대북 수교협상 자세따라 한·일갈등 소지/끊이지않는 「망언」… 선린의 앞날 불투명 국교가 정상화된지 30년,한일양국관계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지난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에 서명한 이후 양국 관계는 발전과 퇴보를 되풀이하고 있다.지난 30년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 측면에서 양국 관계는 양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65년 2억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간 무역액은 그동안 2백배 가까이 늘어 지난해에는 3백89억 달러를 기록했다.양국간 인적 교류도 65년 1만명에서 지난해 2백70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양국이 이웃국가로서 결속력있는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한국쪽에선 「동반자」보다는 「반일감정」이나 「망언」이,일본쪽에선 「혐한」「추한 한국인」이란 단어가 언론에 더 많이 등장한다. 지난 연말 한국 외무부와 일본 외무성 당국자들이 여느해 보다 강하게 새해를 맞는 흥분을 느낀다고 털어 놓는 것을 본 일이 있다.광복 50년(일본에는 종전 50년이다),국교정상화 30년이라는 1995년의 역사성이 양국관계를 다루는 당국자들에게는 팔을 걷어붙일만한 의욕을 촉발하는 계기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몇차례 천명했듯 95년을 과거를 극복,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원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당국자들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의욕은 국민감정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일본과의 수교 30년을 기념하는 것 같은 공식행사를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엄연한 우리 국민의 평균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는 기념행사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이를 반민간 단체로 볼 수 있는 한일의원연맹(회장 김윤환/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으로 넘겼다.그러나 연맹측이 계획했던 행사조차 제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경북 예천 출신으로 「일본의 이미자」로 불리는 재일동포 가수 미야코 하루미의 서울,부산 공연은 문화체육부의 불허로 무산됐으며,한일청소년회관의 건립계획도 변경됐다.이달 일본에서,오는 12월 우리나라에서 기념우표가 발행되는 것 정도가 확실히결정됐을 뿐이다. 의원연맹측이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사내정의)가 한반도에서 수집해간 문화재를 반환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 정도가 계속 기대를 걸만한 사업이다. 양국 관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차원에서 시각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분석한다. 우선 한일 관계를 양자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다자간 관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사회 내에서라면 한일 양국의 이익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양국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고 그 안에서 국가발전 전략을 꾀하고 있으며,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의 기본 이념도 같다. 일본 관계를 다루는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사무총장 선출과정에서 김철수후보를 적극 지원하거나,우리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양국의 이해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처럼 국익이 일치하는 구조 속에서도 양국 국민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 지적이다.일본인들 스스로의 지적처럼 『괴롭지만 과거를 바로 보지 않으면,미래는 없다』는 것이 한일관계의 현실이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사죄,군대 위안부문제,사할린동포 문제등은 양국이 해결해야 할 오랜 현안이지만,일본측은 어느것 하나 진심으로 반성하며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일의원연맹의 지철민 사무총장은 올해 사회당,자민당,신당 사키가케등 여당연합과 신진당이 추진하던 일본 국회의 과거사죄와 부전결의가 결국 신진당이 불참한 채 반성과 평화추구라는 용두사미로 끝나고,때를 맞춰 터져나온 와타나베(도변미지웅) 전외무장관의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이 아직 한일관계의 미래를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일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의 대북 쌀 제공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 정부의 미묘한 자세는 우리 국민과 정부 당국자들이 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원초적 우려감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전략은 무엇인가.일본은 과연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가.한국민은 일본이 북한과의 수교를 이끌어낸뒤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저울질하는 줄타기 외교를 전개하며 이문을 챙기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게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올해가 광복 50년,국교정상화 30년이라서가 아니라,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에,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일본 태도에 따라 한일 관계는 또 한차례 갈등하며 후퇴의 시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국측 외교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지난 1월 고베 대지진 때 한국 국민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구호물자를 보낸 바 있다.전문가들은 광복후 50년이 지나고 양국을 움직이는 세력이 전전세대에서 전후세대로 교체되면서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양국관계가 전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세대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청산한다는 인식을 전세대보다는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또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낮에는 반일,밤에는 친일」이라는 식의 일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논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일본은 있다」의 저자 서현섭씨(외무부 외교정보관리관)는 『한일관계의 지난 50년은 두나라 국민이 무시(DISREGARD)→불신(DISTRUST)→혐오(DISLIKE)라는 3D를 만들어온 세월』이라고 말했다.그는 『앞으로의 50년은 세 단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DIS」 세글자를 떼어버리고 상호인정(REGARD)→신뢰(TRUST)→선린(LIKE)의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일관계 30년 일지 ▲1965년 6·22=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서명 ▲8·28=한일협정 반대 학생 데모 및 위수령 발동 ▲12·18=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발효 및 주한·주일대사관 상호개설 ▲1966년 1·17=한일간의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발효 ▲5·27=일본 문화재 2천3백28점 반환 ▲19 67년 6·30=사토 에이사쿠 일본총리 방한,박정희대통령 취임식 참석 ▲1970년 6·16=한일 정기여객선(부관페리호) 취항 ▲1971년 2·5=일·북 재일교포 북송합의서 조인 ▲1973년 8·8=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1974년 8·15=조총련계 문세광,육영수 여사 저격 ▲1975년 9·15=조총련계 동포 성묘단 모국 방문 ▲1982년 7·26=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외교 문제 비화 ▲1983년 1·11=나카소네 일총리 첫 공식 방한 ▲1984년 9·6=전두환 대통령 첫 공식 방일 ▲1986년 5·18=일,대한 2백해리 어업수역 선포 ▲7·24=후지오 문부상 교과서 왜곡관련 망언 ▲1990년 5·24=노태우대통령 방일 ▲9·24=가네마루 자민당부총재 등 3당 대표 방북,일북수교 원칙 합의 ▲1991년 1·9=가이후 총리 방한,한일 우호협력 3원칙 발표 ▲1992년 7·6=일본정부 종군위안부 조사결과 발표,정부관여 인정 ▲11·8=노태우 대통령 실무 방일 ▲1993년 10·4=사할린 동포 관련,한일 실무협의회 ▲11·6=호소카와총리 실무 방한 ▲1994년 3·24=김영삼대통령 방일 ▲7·23=무라야마 총리 방한 ▲1995년 1·19=한국정부,고베지진에 구호품 전달 ▲6·5=와타나베 전외상 한일합방 관련 망언 ▲6·14=일본의회 과거 반성,평화 추구 결의 ◎지표로 본 양국관계/교역규모 급속 증가… 1백85배 늘어/경기둔화·국민감정 악화… 90년초 주춤/대일 누적적자 1천억불 시정 과제로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다. 80년대 말까지 교역과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다가 90년대 초 국내 경기둔화와 노사분규 여파로 잠시 주춤했다.그러다 엔고에 힘입어 지난 해부터 기계류와 부품을 중심으로 산업협력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그러나 30년간 누적돼 온 대일 무역적자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65년 국교정상화 당시 대일 수출은 4천4백만달러였다.이것이 지난 해에는 1백35억2천만달러로 늘었고,대일 수입도 1억6천만달러에서 2백53억9천만달러로 커졌다.교역규모만 1백85배 신장한 셈이다. 반면 교역확대속에 65년 1억2천만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가 86년 50억달러를 넘은 데 이어 지난 해에는 1백억달러 돌파(1백18억6천만달러)라는 반갑지 않은 기록까지 남겼다.그간의 누적적자만 이미 1천억달러를 넘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국교정상화 이후 계속 늘던 대일 수출은 89년 1백35억달러를 고비로 줄기 시작,92년 1백16억달러로 떨어졌다.수입도 91년 2백11억달러에서 92년 1백95억달러로 감소했다. 일본의 대한투자가 전체 외국인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92년 건수기준 30.5%,금액기준 17.3%로 82∼86년 평균(건수 47.7%,금액 49.6%)에 못미쳤다.고임금으로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과거사 문제로 국민감정이 악화돼 소원한 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93년 초 양국 모두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양국 경제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됐다.국민감정과 정치논리보다 경제논리로 문제를 풀기로 양국 정상이 합의한 뒤 우리 정부가 먼저 수입선다변화 품목을 해제하는 등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교역액이 92년 3백11억달러에서 지난 해 3백89억달러로,일본의 한국투자는 92년 72건,1억5천달러에서 지난 해 1백32건,4억2천만달러로 각각 늘었다. 교역형태도 기계류와 부품·소재를 일본에서 들여다 경공업제품을 생산,제3국에 파는 「산업간 교역형태」에서 반도체와 철강 등 중화학제품을 서로 주고받는 「산업내 교역」으로 바뀌었다.일본으로서도 가격과 품질경쟁력이 있는 한국산 부품과 소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일본기업들의 투자도 저임금을 겨냥한 해외 생산기지화 전략에서 전략적 제휴형태로,기술협력도 한국의 일방적 기술이전 요구가 아닌 경제논리에 기초한 교류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엔고 지속과 세계경제의 지역주의화,미국과의 협상실패에 따른 무역마찰로 일본은 우리와 산업협력의 끈을 단단히 할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일본기업을 적극 유치,대일역조를 개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그렇게 되면 기술이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양국관계가 호혜와 동반의 관계로 성숙돼 갈 것이다.
  • 가깝고도 먼 이웃(한·일수교 30년)

    ◎수교 19년뒤에야 한국정상 “공식 방일”/66년 무역협정 서명… 경제협력 “물꼬”/빈번한 교류속 일 지도층 잇단 망언 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한일 양국간에는 모두 17차례의 정상간 왕래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첫 공식 방일이 추진된 것은 72년이다.박정희 대통령이 11월23일 공식 방일하기로 예정됐었으나,국내의 반일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취소됐다.박대통령은 18년에 이르는 재임기간동안 한번도 일본을 공식방문하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성사된 것은 12년 뒤인 84년에 이르러서였다.이 해 9월6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히로히토 국왕을 만났다.이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도 90년과 94년 각각 일본을 방문했다. 수교전에도 대통령의 방일은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은 48년과 50·53년 등 세차례 일본을 비공식 방문,요시다 총리 등과 면담하기도 했다.또 61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경로에 일본을 비공식 방문,이케다 총리와 면담을 가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본 총리는 사토 총리로 67년 6월30일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공식방한한 첫 일본 총리는 나카소네 총리로 83년 1월11일 서울에 와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이후 88년 다케시타,91년 가이후,92년 미야자와,93년 호소카와 총리의 방한이 이어졌다. 비공식과 실무 방문을 포함하면,한국의 대통령은 모두 7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일본의 총리는 10차례 방한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66년 3월 한일간의 무역협정이 서명,발표됨으로써 본격적인 경제 관계도 시작됐다. 이 해 9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장기영 전부총리와 후지야마 일 경제기획청장관이 참석하는 한일경제각료 간담회가 열렸다.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80년대 말까지 크게 확대되어 왔으나,90년대초에 들어 무역·투자·기술협력 등의 분야에서 감소세를 보이다 최근 회복세를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역불균형 심화가 지속적으로 양국간 현안이 됐는데,65년 1억 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는 80년대 후반에 50억 달러를 초과하기 시작했으며,92년에는 79억 달러를 기록했다. 경제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67년 정기 각료회의가 시작된 뒤,양국 외무장관 회담,고위외교정책협의회,한·일 어업공동위원회,문화교류실무자회의 등의 한·일 정부간의 정기회담으로 자리잡았다. 또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친선협회,한일협력위원회,한일경제협회,한일협회,한일여성친선협회,한일문화교류기금 등의 민간 친선단체가 발족되기도 했다. 65년 1만명에 불과하던 양국간 인적교류는 지난해 2백70만명으로 늘어났다.일본이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은 68만8천명이다.최근에는 재일교포와 일본인과의 결혼이 늘어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90년 통계에 따르면,재일교포의 총혼인건수 1만3천9백34건 가운데 동포간 혼인은 15.8%에 불과하며,일본여자와 결혼한 교포남성이 19.5%,일본남자와 결혼한 교포여성이 64.2%였다.일본에 귀한한 재일교포는 50년이래 17만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러한 관계 발전의 한편에서는 일본측의 망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일본의 고위각료급에서만도 해마다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망언을 쏟아냈다.대표적인 것이 82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과 그에 대한 86년 후지오 문부상의 망언으로 양국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다.정부는 이해 9월 예정된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연기하며 후지오의 망언에 엄중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서도 어김없이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전 외상이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쿄의 평가와 과제/“국교정상화 한국발전에 크게 기여”/위안부 등 개인배상문제 불씨 잠복/재일동포3세 법적지위개선도 현안 한국과 일본은 22일로 한·일기본조약 서명 30주년을 맞는다. 국교가 정상화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감이,한국은 일본에 대해 피해의식이 남아 있다.또 「김대중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망언파동 등으로 한일관계는 곡절도 많이 겪었다. 한일관계는 양국 정치에 있어 「늘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략적 카드」로 악용당한 사례도 많이 있다. 하지만한일국교정상화가 냉전체제하에서 동아시아지역의 안정과 한국의 경제발전,일본의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안정적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양국에 크게 공헌한 점이 있다는 데 대해 의견이 대체적으로 모아진다.특히 일본에서는 국교정상화가 한국에 보다 많은 플러스가 됐다고 말하는 학자,평론가들이 많다.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김동조전외무장관은 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냉전구조하에서 정치적으로 아시아,넓게는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으로서도 피폐해진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조약체결로 얻은 자금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도쿄신문 20일자).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이 한국경제 발전에 대해 도움이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도 높이 평가한다.하지만 강교수는 강조하는 점이 조금 다르다.그는 우선 일본으로부터 무상공여 3억달러 등 모두 8억달러의 자금은 식민지 피해에 따라 당연히 받을 몫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강교수는 또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배상을 받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특권층을살찌운 반면 한국은 깨끗하게 경제건설에 활용됐다』고 말해 자금이 들어온 일본보다는 활용한 한국의 노력에 비중을 두었다. 그는 반면 「식민지지배 책임문제」 등이 분명하게 밝혀진 위에 국교정상화가 됐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돈이 급하고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부분이 애매하게 처리된채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여러가지 문제들이 남게 됐다고 말한다.남은 문제들 가운데는 일본의 진정한 과거반성,한일기본조약의 해석,재일동포 3세이하의 법적 지위 문제,식민지배 피해자에 대한 개인적 배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 서명 이동원 전외무/“국력 길러 일 우월의식 극복을/과거에 매달려 역사흐름 놓치지 말길/패전 극복 일의 창조적 노력 본받을만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이동원 전외무장관(현 국제학술원이사장)은 21일 국교정상화 30주년에 즈음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말고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당사자로서 30주년을 맞는 감회와 기본조약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은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었던 외교협상이었습니다.그만큼 양국간의 적대감과 갈등이 깊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한 것은 역사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기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냉전이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식민지지배에 대한 청산을 분명히 하지않고 경제협력을 우선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역사는 변화하는 것입니다.변화없이는 발전도 없습니다.한·일기본조약은 그 시대의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활용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당시 미국의 지원하에 새로운 일본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한국도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과거의 역사는 물론 잊어서는 안되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전후청산은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봅니다.그러나 중의원의 「전후50년국회결의」 채택과정에서 나타났듯이 과거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독일과 같은 자세가 부족합니다.일본은 국수주의적 환상에서 깨어나 이웃국가들과 함께 공존·번영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아시아의 후진성을 이용,우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강합니다.공존의 시대에 배타주의적 우월의식을 고집한다면 일본의 미래는 어둡다고 봅니다.일본도 중국·한국·아세안등 아시아 이웃국가들의 역동적인 변화를 잘 인식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국교정상화후에도 일본지도층의 망언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변국가를 멸시하는 일본의 배타주의적 우월의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의 의식속에는 아시아를 깔보는 경향이 강하게 배어있습니다.그러나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창조적 노력과 국력배양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2차대전후 일본은 전쟁폐허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일본은 그러나 미국에 머리숙이며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경제부흥을 위해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특히 선진기술을 그대로 모방하지않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일본적인 알파」를 추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그러한 「창조적」 노력이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일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데 그친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점점 깊어져왔습니다.작은 것이라도 「한국적 알파」를 추가하려는 창조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한국을 보는 일본의 시각이 변했다고 봅니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한국을 얕보는 본질적인 인식은 크게 변하지않은 것 같습니다. ­식민지지배를 배경으로 한 한·일간의 특수관계에서 이제는 보통의 이웃국가관계로 바뀌어야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과거가 미래를 구속하는 상황이 더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됩니다.광복 50주년이 됐습니다.일본에도 한국에도 식민지이후 세대가 중심이 되고 있기때문에 한국도 이제는 냉정한국제정치논리에 대비하여야합니다.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양국은 경제뿐만아니라 정치·문화등 각분야에서 더욱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로 발전할 것입니다.그러나 한국은 반일감정을 극복하고 기술·정보등 경제분야의 발전을 통해 일본과의 격차를 줄여야합니다.물론 일본과는 경제규모에서 대등할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질적인 대등함을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합니다.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국력이 뒷받침되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노태우 전대통령 「재임시 방북정책」 강연

    ◎“한 중·한 소 수교로 한반도안정구도 공고히” 노태우 전대통령은 14일 상오한朱프레訓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榻에碻 열린 고려대 언론대학원(원장 원우현) 최고위과정 조찬강의에 연사로 초청돼 대통령재임시 추진했던 북방정책에 관해 강연했다.노 전대통령은 강연에서 남북관계는 핵묻제딸으로 인한 일시??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미 북방정책의 당면목표인 통일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강조했다.다음은 노 전대통령의 강연요지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북·미간 경수로문제가 풀려가는 것같다.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선 대통령재임시의 성과를 묻는다면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사회적인 균형발전,그리고 북방정책으로 대변되는 외교적인 성과등 3가지를 꼽고 싶다.그러나 정치·경제·사회적인 공과는 당사자가 거론할 사안이 아니라 생각한다.다만 북방정책에 대해서는 벌써 몇편의 논문이 나오는등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나 그 기본개념과 철학,수행과정등에서 중요한 내용들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이를 바로잡아 북방정책의성과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이 국가나 현정부를 돕는 길이라 믿는다. 북방정책은 남북통일이라는 당면목표와 함께 통일후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과거와 같이 연변·연해주등지로 넓히면서 동북아시아의 위대한 중심국가로 자리잡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는 원대한 구상이었다.그리고 우리민족의 장점,무서운 저력등을 고려할 때 2천년대 이전 최종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전망한다. 한소 수교는 당시 공산권국가들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을 점령,우리의 외교가 전방위외교로 전환하는 출발이었던 동시에 북한의 최대 외부지원세력을 제거,북한의 기본노선에 일대 타격을 가하는 사건이었다.이로써 우리 외교는 자주외교라는 확신과 자존을 확립하게 됐다.또 소련과의 수교는 중국과의 수교를 앞당기는 청신호였다. 한편 소련과의 수교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30억달러를 지원하는등 돈낭비가 많았다는 지적이 있으나 소련에 실제 제공한 돈은 15억달러이며 소련과의 수교로 인한 북한군사력의 억제라는 측면만 고려하더라도 이미 투자비용이상의 효과을 거두고 있다.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소련은 다가 오는 21세기에는 큰 나라가 될 것이다.장기적으로 볼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판단한다. 중국과의 수교는 북한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과의 우호관계를 확립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구도를 공고히 했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경제적 측면으로 볼 때도 오랜 역사적 선린관계에 있던 중국과의 관계회복으로 최대의 경제시장을 확보한 셈이 됐다.우리와 중국은 상호발전을 위한 보완성이 무한대다. 이밖에 주택 2백만호건설의 급작스런 추진등으로 부실공사,물가상승등의 부작용이 빚어졌다는 지적과 관련,졸속시행의 착오를 시인한다.그러나 서방세계가 1백∼2백년에 걸쳐 달성한 국가발전을 30년도 안걸려 이룩했다.부작용이 없진 않았지만 짧은 기간내에 고속 성장·발전했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 현대그룹 잘 나간다/계열사분리 등 정부정책 동참

    ◎침체분위기 삼성과 대조… 재계 “갸우뚱”/시설자금 대출·기업공개 재개 요즘 현대그룹은 기분이 좋다.정부와의 껄끄럽던 관계가 끝난데 힘입어 라이벌인 삼성그룹의 힘을 빼는 연타를 터뜨리고 있다.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북경발언 이후 다소 침체되고,조용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에는 현대그룹답지 않은 기동성도 보이고 있다.그동안 삼성그룹의 전유물로 보이던 정부 입맛맞추기 발표를 앞장서서 하기도 한다.재계가 이상스러워할 정도다. 증권감독원이 지난 9일 현대상선을 오는 8월 공개하기로 한 것은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제재가 완전히 풀렸다는 보증서다.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노태우 전대통령시절인 지난 92년초 국민당을 창당한 때를 전후로 현대그룹은 각종 금융제재를 받아왔다.금융제재는 ▲현대자동차의 해외증권발행불허 ▲산업은행의 설비자금대출중단 ▲계열사의 공개불허등 세 가지였다. 현대자동차가 지난 3월4일 증권업협회로부터 9천만달러의 해외증권발행을 허용받은 게 금융제재 1차해금.그동안 현대자동차가지난 92년부터 세 차례나 해외증권발행을 시도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당한 뒤의 사건이었다.2차해금은 3월28일.산업은행이 현대자동차에 4백90억원의 시설자금대출을 승인한 날이다. 제재가 풀린 것은 정부가 세계화시대를 맞아 필요성을 느낀데다 현대그룹도 그동안 새 정부에 용서를 구하는 몸짓을 열심히 보인 덕이다.정세영 그룹회장이 지난 1월25일 발표한 현대그룹의 구조조정개편이 대표적인 사례다.계열사의 분리 및 정리와 대주주의 지분축소가 주내용으로,작년 10월 삼성그룹이 발표한 내용과 비슷하다. 새 정부가 추진중인 소유와 경영분리,업종전문화에 호응하겠다는 뜻이다.정 명예회장은 구조조정에 반대했으나 정세영 회장이 설득해 이뤄졌다는 설이다.정세영 회장과 그의 측근인 김판곤 현대자동차전무가 정부의 실력자들을 만나며 정부와 현대의 관계호전에 노력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이외에도 새 정부 출범이후 공산품가격 1년간 동결,협력업체지원 등을 발표해 정부에 힘을 주기도 했다.정 명예회장의 측근인 이병규씨를 문화일보 부사장에서 현대중앙병원 부원장으로 전보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올 하반기부터 신입사원 공개채용 때 필기시험을 없애기로 한 것도 정부의 입맛에 맞는 발표다.삼성그룹의 한 관계자가 『한방 먹었다』고 말할 정도로 의외였다.지난 4월27일에는 삼성그룹이 중소기업지원대책을 내놓자 몇 시간 뒤에 기동성 있게 비슷한 내용을 발표해 남의 잔치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현대가 삼성을 물먹인 일은 또 있다.현대전자는 지난해 11월 미국 최대의 정보통신회사인 AT&T사의 비메모리사업부문을 3억4천만달러에 인수,경쟁을 벌이던 삼성전자를 따돌렸다.지난달에는 미국에 세계최대의 반도체공장을 건설하기로 발표,또 한방 먹였다.이건희 회장은 이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현재 현대의 현안은 제철사업진출이다.굴레를 벗어던진 현대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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