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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그맨 김형곤-시사만화가 박재동 대담

    걸쭉한 입담의 개그맨 김형곤과 예리한 필봉의 시사만화가 박재동이 최근만나 시사풍자를 주제로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KBS-2TV의 ‘시사터치 코미디파일’프로에 애니메이션 ‘딱새구리 만평’과 시사풍자 개그 ‘굿 뉴스 배드 뉴스’로 함께 참여하고 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것.이 만남은 대학로 컬트홀 무대에 오른 폭소 인생강좌극 ‘여부가 있습니다?!’의 공연을 앞두고 김형곤이 박화백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자고 제의해 이뤄졌다. 두 사람은 서울 방배동의 한 일식음식점에서 만나 시사문제를 다루는 방법등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濫청聆냅愍? 자유 박재동 신문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99% 표현할 수 있었는데 TV에서는 70∼80% 정도에 그쳐 아쉽다.공중파가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시사 풍자에 ‘성역’을 두어서는 안된다.시사 풍자는 민주화의 척도다. 김형곤 나는 하고 싶은 말의 50% 밖에 못한다.정권이 바뀌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제약은 여전하다.아직도 하고 싶은 말을 100% 다할 수 없는게 우리 풍토인것 같다. ?朗냅? 원칙과 소재박 확인된 사실을 대상으로 하고 인신 공격은 피한다는 원칙 아래 서민들의고통을 주로 다루려고 한다.다만 어느 기관이나 정당이 잘못했을 때는 책임자도 풍자 대상으로 다룬다. 김 개인적인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풍자한다.내게 불리하다는 조언을들어도 양심에 따라 작업한다.사회정의에 기초를 두고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주력한다. ?卵餞塚? 겪은 경험 박 언젠가 한 방송에서 검찰을 풍자한 적이 있다.당시 직접적으로 항의를받지는 않았지만 보도국에 항의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고 들었다. 김 6공 때 코미디클럽에서 노태우대통령을 도마에 올렸다가 안기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21세기 전망 박 문화예술인의 역할이 커질 것이며 이들이 맘껏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빨리 마련돼야 한다. 김 시사풍자의 장이 넓어져 많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과 개그.비록 수단은 다르지만 ‘건강한 풍자’라는 공감대를 확인한 두 사람은 각자의 장으로 돌아갔다.톡톡 쏘는 통렬한 웃음을 꾸준히 만들자는 약속을 다지면서. 이종수기자 vielee@
  • 盧 전대통령 육성 회고

    “1990년 10월 서동권(徐東權) 당시 안기부장을 평양으로 보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노 전대통령은 월간조선 5월호에 ‘육성회고록’을 게재하면서 그동안 숨겨진 비화를 털어놓았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남북정상회담.노 전대통령은 “서 부장은 당시 북한에가서 김일성·김정일과 밀담을 나누었고 92년 봄 북한 노당당 중앙위원 윤기복(尹基福)이 김일성의 밀사로 서울에 와 남북정상회담 초청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하지만 “당시 김은 자신의 생일(4월15일)에 맞춰 정상회담일을잡아 나는 초청을 거절했다”며 “우리는 김일성이 남한 정세를 오판하지 말도록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김일성은 생일에 맞춰 나를 초청,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주장했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에 대한 ‘실망감’도 피력했다.노 전대통령은 “나는 결과적으로 김영삼씨의 국정 능력에 대해 오판을 한 셈이다”라고 전제,“국정 경험이 없는 사람이 정권을 잡아 취약점이 노출된 데다가 이를 보완해야 할 미국의 클린턴 정부도 취약점을 갖고 있어 북한이 이 허점을 이용했다”고 분석했다.이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6공때 확보한 대북 고삐(주도권)를 놓치는 바람에 북핵문제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상황을 맞았다”며 YS의 외교 미숙을 질타했다. 91년 주한 전술핵무기 철수와 관련,“당시 부시 대통령은 핵우산 제공에 대해 보장을 했다”며 “그 전까지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군산 미군기지 한군데서만 보관됐었다”고 회고했다.노 전대통령은 이외에 ▲김대중 구명 비화 ▲한·소 수교 ▲88올림픽 등 현대사의 주요사건을 증언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日 보수·우익 오자와 자유당黨首-백범묘소 참배 파격 행보

    일본정계의 ‘풍운아’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자유당당수가 16일 한국을방문한다.19일까지 머물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총리,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 등 우리 지도자들과 폭넓은 교류에 나선다. 18일에는 효창공원 독립운동가 묘역을 찾아 백범 김구(金九)선생의 묘소를참배하고 윤봉길·이봉창의사의 동상도 둘러볼 계획이다.일본내 대표적 보수·우익 정객이 일제(日帝)와 맞서 싸웠던 백범선생의 묘소를 찾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변화’로 보인다.오자와당수는 90년 당시 노태우(盧泰愚)대통령 방일 직전 “반성하기 때문에 협력하고 있는데 그 이상 엎드려 절할 필요가 있느냐”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인사다.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21세기 미래지향적인 관계설정을 위해 불미스러웠던 한 세기를 마감하자는 의지로 보인다”고 해석했다.서민생활의 일부인 남대문시장을 찾는 것이나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임진각을 찾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경계의 시각도 있다.오자와당수는 ‘일본열도 개조론’을 외치며 자민당탈당 및 사회당과의 연대 등 일련의 ‘정치실험’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그의 파격행보가 일본 정치인들의 의식변화를 대변하는 것인지는 좀더 두고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일만기자
  • 기고-’국민과의 대화’를 보고/이호철 소설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1년 만에,그리고 지난해 5월 이후 꼭 9개월 만에세번째로 진행된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너무짧았다.대강 그렇게 되리라고 짐작했지만,지난 1년간의 시정(施政) 전반을골고루 짚어내자니 망라적(網羅的)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일부 여론의 지적대로 ‘대화’인지 ‘홍보’인지 알쏭달쏭했다.하지만 대국적으로는 여전히 신선했다.국정의 책임자가 정확히 1시간 45분 동안 방송 3사를 통해 국민 앞에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저렇게 직접 나와 앉아서,지난 1년간의‘이 나라 살림살이’를 이 나라 가장(家長)으로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속속들이 밝힌다! 물론 속속들이라는 것은 어느 한도껏의 이야기지만,아아 좋고 말고다.세상은 과연 이만큼 좋아졌구나,이것이 솔직하고도 단적인 느낌이었다.대통령과마주 앉은 방청석을 꽉 메운 남녀노소뿐 아니라,지방 곳곳에서 질문하는 한사람 한 사람의 표정들도 필자는 유심히 화면 안으로 들여다 보았는데,거의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요,즐거운,그리고 그지없이 자연스러운 평상인들의 분위기였다.추호나마 겁 먹거나 억눌린 얼굴들이 아니었다. 필자는 1시간 45분 동안 눈길은 그대로 텔레비전 화면에다 꼬나박은 채,51년 임시 수도 부산의 충무동 로터리인가에서 李承晩 초대 대통령이 느릿느릿한 꺾쉰 목소리로 연설하던 것을 성능 안 좋은 라디오로 듣던 일과,그뒤 정부 당국의 홍보물 같은 데 실려 있던 그 현장의 흐릿한 흑백사진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뿐인가,강직한 군복에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로 공식 행사장에서 공식적으로 연설을 하거나,무슨무슨 선포를 일삼던 제3대박정희 대통령,그때마다 늘 무시무시했던 일도 연달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 다음,전두환,노태우,김영삼씨로 이어오면서,구중궁궐 속 같은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의 ‘키 높이’가 차츰차츰 세월 따라 알게 모르게 보통사람 ‘키 높이’로 작아져 오더니,아아,이제는 얼씨구나! 나라 살림을 통틀어서 맡은 대통령이라는 사람과,여염집 가장이거나 한창 배우는 학생 아이들까지도,그리고 농민 기업인 근로자 누구라도,저렇게 무릎을맞대듯이 마주앉아지난 1년간의 나라 살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기탄없이 의견을 털어놓을 만큼 되었구나.불과 두 시간이니 그 나누는 이야기 알맹이라는 것이야 뻔할 뻔자,겉 핥기가 되기가 십상이겠지만,이만만 해도 이게 어디인가.지나간 50년간을 거슬러 돌아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필자 자신도 이미 정부 홍보차원으로 어느 한 가닥 가세하고 있는 꼴은 아닌지,스스로 일말의 쑥스러움섞어 자신을 돌아보게 되거니와,일언이폐지하여 바로 이만큼 세월은 흘렀고세상은 달라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거듭 이야기거니와 두 시간은 너무 짧았다.모든 문제가 망라되어제기되었다는 데에 뜻이 있을까,어느 하나,진짜로 궁금한 문제들에 대해 아주아주 속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 한 것 같았다.대강 그런 정도 수준의‘국민과의 대화’였다. 다만,필자도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어서 더 그런 쪽이겠지만,거의 모든 문제가 망라되어 나온 데 비해서는 정작 새 정부 들어서서 지난 1년간에 가장활기 찼던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북한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미국,일본,중국 등 금년 상반기까지 원체 미묘하게 걸려있는 때인지라,그 ‘국민과의 대화’ 수준으로 함부로 다루기는 나름대로 자제했음직도 하였겠다고 짐작도 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았다.
  • 민족일보 조용수(金三雄 칼럼)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다이모니온을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 타락케 한 혐의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독배를 들기에 앞서 최후진술에서 “클리톤이여,아스크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다오”라는 유언을 남긴채 권력의 제물로 사라졌다. 2,000여년이 지난후 한 청년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이며 민족일보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데 썼는데,갚아주지 못하고 가게돼 미안하다”는,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의 유언이 그것이다. 1961년 12월2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조용수는 32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친구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건국 이래 수 많은 언론인이 정치적 수난을 겪었지만 순수한 언론활동을 이유로 극형을 당한 사람은 조용수 사장이 처음이다. ○박정권의 이념적 희생양 친일언론인 출신으로 해방후 평화일보·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정국은은 재일 조총련계의 국제공산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54년 2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월간 ‘청맥’과 관련한 김질락의 경우 간첩혐의로 박정희정권에 의해 72년 7월 처형되었다. 정국은과 김질락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첩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수 사장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친일과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에서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고 마침내 유망한 젊은 언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조사장은 61년 2월 4월혁명 공간에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부정부패를 고발하며,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한다는 사시 아래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하다가 5·16 쿠데타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확인절차로 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부는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언론인을 처형하는 잔인성을 보였다.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나왔다는 혐의와 북한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선동하여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조총련계 자금유입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평화통일론이 극형의 죄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가 유일한 ‘물증’으로 내세운 이영근씨는 민단계통의 인물이었으며,노태우정부는 1990년 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이유로 국민훈장을 추서하여 간첩이 아님이 입증됐다. 또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역대 정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더러는 정부가 훈장을 줌으로써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사장의 37주기에 즈음하여 지난 20일 낮 남한산성에 있는 묘소에서 추도식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 발족식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검찰이 자료공개를 거부해온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국회에서 특별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기념사업을 통해 평화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뜻이 모아졌다.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당시 검찰,재판관 등 생존자들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계도 건국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한 언론지도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신원(伸寃)하는데 뜻을 모았으면 한다.
  • 민주열사열전:17/88년 투신·분신3명의대학생(정직한역사되찾기)

    ◎‘허울뿐인 민주’ 항거… 생명의 불꽃 살라/조성만­민주화운동 통일논의 새장 열어/최덕수­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 요구/박래전­“양심수 석방… 죽음 더 없어야” 유서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함께 1988년 6공화국이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민주정부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직선제란 모양을 갖췄을 뿐 6공 盧泰愚 정권은 5공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다. 6공은 공식 출범 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민주화’ 정책을 차례로 발표했다.군사독재 정권인 5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인 셈이었다.그러나 6공 출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부터 20일간에 걸쳐 3명의 대학생들이 ‘노태우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젊은 목숨을 잇따라 내던졌다. 87년 12월 대선 때 문민정부의 도래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함께 6공 출범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나아가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80년 5·18 광주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민주화추진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그러나6공이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내놓은 민주화정책들은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정권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진정한 개혁이 절실한 때에 어설픈 개랑주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모습이었다.세 젊은 학생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대학생의 잇따른 투신·분신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운동권의 좌절감과 방향감각 상실을 웅변해준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정권도 이런 쪽으로 몰고갔다.그러나 수십,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세 학생은 직선제 정부의 출현에 만족해하려는 현실순응의 추세를 질타하면서 우리에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민주 현안이 산적해있음을 죽음으로 일깨웠다.이에 많은 국민들이 각성하고 공감을 표한 것이었다. ○시청앞 장례식 노제 30만 인파 운집 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 등 재야 민주단체 주최로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다른 한쪽에서는 100여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 주최 ‘광주항쟁계승 마구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출발신호를 기다리던 오후 3시38분.서울대생(화학과 2년)으로 명청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인 趙城晩이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사이렌을 울린 뒤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1분여 동안 외쳤다.이어 흰색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은 오른손에 든 칼로 복부를 찌르고 몸을 뒤로 날려 마당으로 떨어졌다.투신 직후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진 조성만은 이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5월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뤄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 3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1년전 시민항쟁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는 군중모임으로 4월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당시 야당의 金大中 평민당총재와 金泳三 민주당총재도 참가했다.조성만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주 도심을 지날 때와 망월동 묘역으로 떠나기 전 광주 도청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조성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신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그는 투신 오래전에 일기에서 ‘10년 세월에 휼륭한 사제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한순간에 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했다.조성만은 투신 당일 아침 작성한 유서에서 특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논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 전사’로 불리는 조성만은 유서 말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어머님 얼굴,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오월항쟁 계승 군부독재 타도” 외쳐 조성만의 장례식이 있기 하루전인 5월18일 오전 10시30분 단국대 천안 캠퍼스 시계탑 밑에서 이 학교 법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중인 崔德秀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했다.성명서를 통해 ‘광주학살 비리주범 노태우를처단하자’‘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을 발동하라’고 주장한 최덕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이어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9일만인 26일 운명했다. 빈한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쉬고 공장과 고향 농촌을 오르내려야 했던 최덕수가 분신할 당시 정가는 4월 총선후 국회개원을 앞두고 광주항쟁 진상조사 특위구성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그의 30일 서울역 노제에는 1만5,0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도청 분수대 노제에는 3만여명이 모였다.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 호소 그리고 6월4일 오후 4시30분 대학생들의 통일논의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가운데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朴來佺(국문3)이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했다.박래전은 이미 분신 이틀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학살원흉 노태우 처단’ ‘통일논의 자유보장’ ‘양심수 즉각석방’ 등을 주장했다.그는 특히 학생들과 사회인 모두에게 안일과 무감각 그리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의 투쟁 대오를 갖추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손실일 뿐입니다.”“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개량의 환상,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지금은 슬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날이 오면,두분 부모님,아니 그날이 오기까지 힘드시더라도 눈감지 마세요.” 분신 이틀 뒤인 6일 운명한 박래전의 장례식은 12일 수천명이 참가한 시청앞 노제와 함께 치뤄졌다. ◎박래전의 형 박내군씨/인권운동 사랑방 사무국장 활동/동생보다 먼저 민주화운동 투신/유가협 일맡아 희생자 50여명 처리 인권 ‘지킴이’로 이름높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朴來群 사무국장(37세·연세대 국문과졸)은 분신자살한 숭실대생 박래전의 바로 윗형이다.민주 열사 가족들 가운데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그러나 박래군 사무국장은 동생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의식화(?)한 것은 전연 아니다.그는 “대학 학회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뿐이며 동생은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수원에서 버스로 한시간 달려가야 하는 남양반도 끄트머리 시골 출신으로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어렵게 대학에 보낸 두 아들이 모두 민주운동을 한다면서 감옥에 가고 그러다 끝내 분신하는 아들까지 나오게 된 시골 부모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박래전이 유서에서 염려했던 부모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래전이 대학 1학년 때인 82년 가을부터 가두 시위에서 형제는 서로 마주치곤 했다.박 사무국장이 86년부터 2년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87년 6월 항쟁으로 석방돼 나온 뒤에 형제는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래전이는 특히 몇몇 운동한다는 사람들의 불성실 무책임에 가슴아파했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유가협 일을 맡아 5년동안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50구가 넘는 민주화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동생의 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같은 무렵 통일논의에 물꼬를 튼 조성만의 분신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보 ◆박래전 63년 경기 화성 출생 82년 숭실대 국문과 입학 83년 휴학,입대 86년 제대 87년 복학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선전국장 88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88년 6월4일 학생회관 분신 88년 6월6일 운명 ◆최덕수 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87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88년 휴학 88년 5월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 낭독 88년 5월18일 분신 88년 5월26일 운명 ◆조성만 64년 전북 김제 출생 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84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 85년 군입대 87년 제대,복학,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87년 12월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데모 관련 구류 10일 88년 5월15일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 투신,운명
  • 장준하 영전에 금관문화훈장을(金三雄 칼럼)

    우리나라처럼 훈·포장이 원칙과 기준 없이 수여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독재정권 시절 채찍과 더불어‘당근’의 대용이 되고,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대통령이 국무위원이나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요원들에게 나눠주는 선심용이었다. 원칙과 기준 없이 남발되다 보니 막상 받아야 할 사람이 제외되거나 수상하더라도 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적지않았다. 張俊河 선생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문제로 파문이 일고 있다.문화관광부는 고인이 생전에 사상계(思想界)를 발간하여 한국 잡지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해 11월1일 잡지의 날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한다. 문화관광부는 당초 잡지협회의 추천을 받아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줄 것을 추진했으나 청와대와 행정자치부의 협의 과정에서 은관문화훈장으로 훈격(勳格)이 한 단계 낮아졌다는 것이다. 어느 부처의 의견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훈장 격하는 크게 잘못된 결정이다.다른 상이면 몰라도‘잡지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라면 장준하와 사상계에 금관문화훈장을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상계는 우리 잡지 역사에서 단연 선구적 정론지였다.6·25전란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에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 가치관과 폭넓은 교양을 심어준 복음서 역할을 하였다. 사상계의 정론과 비판정신은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5·16 후에는 박정희 독재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위가 되었다.하나의 월간 잡지가 아닌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한 것이다.그렇다고 저항 일변도의 정치 잡지였던 것은 아니다. 동인문학상으로 상징되는 문학운동과 신인 발굴,지방순회 문화강연회 등 사상계 영역은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우리 잡지문화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론잡지의 선구자 사상계를 이끈 선구자는 장준하 선생이다.장준하가 누군가.식민지 시절에는 총을 들고 왜적과 싸우고,해방 후에는 金九 선생 비서로서 건국운동에 헌신하고,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시대에는 펜을 들고 자유민권 수호에 앞장서고,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온몸을 던져 민주회복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암살 당한 민족 지도자다. 그는 박정희 정부가 북한특사와 통일원장관을 제의할 때 친일 전력과 쿠데타 정권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군사정부의 훈장 제의도 같은 이유로 거절하였다.올곧게 산 지사적 지식인의 전형을 살피게 된다. ○왜곡 잡지계에 경종 계기를 고인에게는 노태우 정부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62년에는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 언론문학 부문상을 수여한 바 있다.때문에 새삼 문화훈장추서 문제로 논란이 생긴다면 고인에게 욕주는 일이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유족의 항의대로 고인이 생전에 추구하던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져 국민정부가 출범했는데,정부가 금관·은관·보관훈장 중 기껏 은관문화훈장이나 주겠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예우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상계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싶다. 정부는 엄격한 기준과 원칙에서 수상자와 훈격을 결정해야 한다.오늘 열리는 국무회의는 장준하 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여 업적이 평가되고 대접받는 질서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하여 이를통해 왜곡과 모해로 지탄받는 잡지계 일각에 경종이 되고 장준하의 정론정신이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총격전이 벌어졌다면?/한충목 열사 범추위 집행위원장(굄돌)

    지난 대통령선거 때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후보가 비선조직을 통해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했다는 안기부의 주장은 참으로 가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일어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선거를 하루이틀 앞둔 상황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면 국가 전체는 준전시 상태로 되고 국민은 공포에 질린 상태로 투표장에 가야만 했을 것이다. 기표소에서 붓뚜껑을 들고 우리 구민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열 중 아홉은 후보자의 공약이나 정견을 판단기준에서 제외시키고 유일하게 북을 상대로 한판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절대 반공주의자를 선택하리라는 상상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이룬 대통령 직선 때 양김은 분열했다. 거기에다 KAL기 격추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전국에 TV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바로 며칠후 투표가 있었다. 선거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만약에 양김이 분열하지 않고 단일후보로 선거에 나선 상황이라도 김현희가 등장했다면 단일후보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라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지난 50년동안의 분단상황은 분단에 기생하는 권력층을 형성해왔고,지금도 그러한 상태는 지속된다. 통일이 없는 민주화나,민주화가 없는 통일에서는 모두 절름발이 민주화나 절름발이 통일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 반공으로써 국민을 길들이고,선거 때만 되면 간첩이 등장하는,그래서 현재 대통령이 되어 있는 분조차 한때는 용공조작에 시달린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4,000만 국민과 7,000만 겨레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5년동안의 집권을 보장받으려 했다면 이는 천형에 처해도 부족할 민족적 반역행위다. 안기부의 고문설을 포함하여 이번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고,관련 책임자를 엄하게 다스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사죄’ 단어 공식문서에 명기/진일보된 과거사 사과

    ◎일 망언 예방효과 기대/교과서 개정돼야 완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담긴 과거사 사과 표현은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의 담화에서 ‘아시아 제국’을 ‘한국민’으로 바꾼 것이다.공동선언에 쓰인 ‘오와비’란 일본어도 무라야마와 하시모토 총리의 과거사 사과 때는 ‘사과’와 ‘사죄’로 병행 해석돼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사죄로만 명기한 것도 진일보한 점이다. 그러나 일본어 사용 강요와 창씨개명,군대위안부 문제를 적시했던 지난 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의 발언과 비교할 때는 다소 구체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특히 과거사 사과가 말이 아닌 공식문서에 담겼다는 점만은 큰 진전이란 평가다.그동안 여러차례 일황과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가 있었지만 보수우익 각료와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그 의미가 희석돼왔다.이제 공식문서화된 만큼 최소한 일본 정부차원의 망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양국이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선언적 행위보다도 일본의 성실한 자세가 관건이다.과거사 사과는 역사교과서의 개정으로 완수된 다는게 우리의 입장.이번 공동선언에도 젊은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언급됐지만 양국의 입장은 아직 다르다.우리는 역사교과서 개정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일본은 아직 교과서 개정에 큰 관심이 없다.얼마전 ‘한·일 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설치 때도 일본측이 강력히 주장해 ‘촉진’이란 용어를 넣어야만 했다.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예비작업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해야 하느냐”는 일본의 비아냥도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진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종료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과거사 사과 발언 ▲히로히토 일황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84.9.6 전두환 대통령 방일 만찬사 ▲아키히토 일황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痛惜의 念을 금할수 없다. ­90.5.24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만찬사 ▲미야자와 총리 ­과거 한시기 귀국국민들께서 일본의 행위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셨던 사실을 상기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잊지않도록 해야할 것이며 저는 총리로서 다시한번 귀국국민께 반성과 사과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92.1.16 방한 만찬답사 ▲호소카와 총리 ­과거 우리의 식민지 지배시절엔 한반도의 여러분들은, 예를 들어 모국어의 기회를 빼앗기고 타국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창씨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이 강제되고, 군대위안부,노동자의 강제연행 등 각종 문제가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한데 대해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을 깊이 반성하며 이번기회에 다시한번 陳謝드리는 바이다. ­93.11.16 경주 정상회담 ▲무라야마 총리 ­일본은 멀지않은 과거의 한시기에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에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역사의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한번 통렬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95.8.10 전후 50주년 특별담화 ▲오부치 총리 ­일본이 과거 한 시기에 한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의해 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인식,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 ­98.10.8 김대중 대통령 방일 공동선언
  • 역사의 계승/한충목 열사범추위 집행위원장(굄돌)

    정부는 오는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해 국가인권기구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그 기구는 인권에 관한 교육과 홍보,연구와 조사, 정부에의 조언과 자문,인권침해 고발접수와 조사처리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갖는다.또 과거 국가기관이 저지른 인권침해 사례를 고발받고 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하여 처리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민간단체들은 환영하면서도 왠일인지 상당한 정도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이를 정부는 열린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인권문제는 정부의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만들어가는 국민행동이 조직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신이래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숨져간 수많은 열사들의 명예회복과,공안기관에 의해 살해된 뒤 자살이나 사고사로 은폐된 죽음에 관한 진상규명이 그러하다.우리는 유신이래 민주회운동과 통일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내창 이철규 열사를 기억해야 한다.이러한 죽음을 당한 분이 조사된 사례만 해도 331명이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고자 대표적인 30여 시민·사회·종교단체 들이 모여 범국민대책기구를 구성하였다.법조인 교수 국회의원 등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5차례의 학술회의와 국민토톤회도 진행하였다.토론 결과 그런 범죄를 자행한 공안기관에 대한 수사권을 포함한 특별검사제 채택과 특별위원회 설치,이에 대한 법적 근거로서의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9월15일 국회의원 58명을 소개의원으로 해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한 상태다.진상 규명이 수사권조차 없는 기구에서 조사하는 것으로 청산되어서는 안된다.열사들의 조국사랑을 국민적으로 계승할 때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 국가발전이 가능한 것이다.역사는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것이다.
  • 野 등원거부 정당한가(대치정국 이대로는 안된다:1)

    ◎‘司正꼬투리’ 거리정치 명분없다/비리소환­처벌 회피의도 농후/과거 야당은 개헌저지 등 큰 뜻/장외투쟁보다 원내해결 힘써야 대치정국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일단 국회에 들어가 따질 것은 따지라’는 것이다. 시리즈를 통해 정국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살펴본다. ‘정기국회 파행’ 19일째인 29일,한나라당은 서울역에서 장외집회를 다시 강행했다. 대치정국의 끝은 어디인가. 재계는 정국불안이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IMF시련 기에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28일 시작된 여당 단독국회운영은 야당의 등원거부에서 비롯됐다. 한나라당은 ‘사정(司正)=야당파괴’라며 등원을 거부하고 있다. 이같은 논리는 명분도,정당성도 갖기 힘들다는 것이 원로정치인이나 학자들의 지적이다. 이른바 ‘세도(稅盜)사건’은 우리 정치사에 남을 치욕적인 일이라는게 일반인들의 공통인식이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담당할 당시 국세청을 동원,기업체마다 세금을 줄여주는 대신 정치자금을 얻어쓴 ‘엄청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비리사건 연루자의 검찰소환을 야당탄압으로 규정,당차원에서 장외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은 정기국회 전 임시국회를 여러번 소집했다. 대부분 李信行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다. 야당의 장외투쟁은 과거의 것과 비교해서도 명분이 약하다. 90년 정기국회가 70일동안 공전됐을 때다. 야당 등원거부 명분은 3당통합의 인위적인 정계개편,여당의 법안날치기·지자제의 연기등 굵직한 사안이었다. 야당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를 던진 뒤 의원회관에서 철수했으며 세비수령도 거부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상당수의 국민이 그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정국의 실마리를 푼 쪽도 야당이었다. 단식중이던 金大中 평민당총재는 ‘국회내에서의 투쟁’을 내세워 정국돌파구를 열었다. 국정운영을 책임진 여당의 책임도 크다. 여권이 야당의 장외투쟁에 일말의 명분을 주었다는 책임론도 나온다. “사정대상에 누가누가 거론된다”는 여권 수뇌부의 발언들은 야당에 ‘기획사정’ 비난 근거를 제공했다.‘타협과 설득 기술의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80년대 이후 정기국회 공전사례 ▲12대(85년 129회 정기국회) ­정기국회는 정상적으로 개회. 직선제 개헌 요구와 관련,야당측이 고대앞 시위 강경대응을 이유로 20일동안 등원거부 ­10월28일에는 국회부의장 후보경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지명한 조연하 국회부의장 후보가 낙선하고,김영록 의원이 당선된 이른바 김역록 부의장 파동으로 7일간 공전 ▲13대(90년 151회 정기국회) ­3당 통합에 반발하고,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며 야당 정기국회등원 거부,의원직사퇴 및 세비수령거부 등 강력반발,11월18일까지 70일동안 여당 단독국회. 9차까지 본회의 진행 ▲14대(93년 165회 정기국회) ­국정조사 기간 연장과 국정조사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증인 출석문제를 놓고 5일동안 공전 ▲14대(94년 170회 정기국회) ­성수대교 붕괴에 따른 야당인 민주당의 내각 총사퇴와 대국민사과 요구. 10월24일부터 3일간 공전 ­11월5일부터는 20일동안 검찰의 12·12사건 관련자 공소권 없음 결정에 야당 반발. 또 다시 표류 ▲15대(98년 198회 정기국회) ­검찰의 국세청을 동원한 한나라당 불법 대선선거자금 모금과 비리정치인 수사,야당의원의 여당행에 반발. 한나라당 등원거부,의원직사퇴,장외투쟁. 자민련 2여 단독국회, 2차 본회의 진행. 9월10일 개회식부터 20일동안 공전중
  • DJ 부부/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청와대에서 만두국을 먹었다.20일 金大中 대통령 내외가 여성 언론인 63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오찬 자리였다.마침 헤드 테이블에 앉게 돼 지척에서 바라 본 대통령 내외는 좀 의외의 느낌을 주었다. 우선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항간의 소문과 달리 대통령은 건강하고 활기에 넘쳤다.그리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부드러운 남자였다.원래 하오 1시15분까지 예정된 모임이 1시30분 넘어 끝날 만큼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대통령 부인 李姬鎬 여사는 대한YWCA 총무를 역임한 한국 여성운동 제1세대인 만큼 내주장이 강할 것으로 지레 짐작했으나 그 예상도 빗나갔다.전통적인 한국의 아내들이 그렇듯 남편의 이야기를 다소곳이 듣는 편이었다. 대화 주제는 여성지위 향상에서부터 수해,실직자,중소기업에 대한 지원,현대자동차 사태,구조조정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지난 69년 효창운동장에서 했던 삼선개헌 반대 연설 녹음테이프를 찾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물론 자리의 성격상 여성문제가 주요 화제였다.대통령은 여성쿼터 20∼30%가 지켜져 취업은 물론 물론 승진에서도 여성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여성특위에서 “남아선호와 남녀차별 의식 개혁방안”을 연구 검토하도록 즉석 지시도 했다.“가족법 개정에는 노태우 전대통령의 역할도 컸다”면서 지난 89년 가족법 개정 당시의 뒷이야기도 털어 놓았다.평민당의원이었던 국회 법사위 가족법소위 위원장이 개정을 반대해 교체했던 일,가족법 개정을 박수로 축하하자고 의원들에게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것 등. “여성을 위해 가장 열심히 일했음에도 선거에서 여성표가 나오지 않았다”면서 여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여성문제 해결이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힐러리 여사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는 우스개에 “우리도 비슷하다”고 밝혀 웃음이 터졌다.李여사가 돈만 있으면 남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데 “내가 돈을 쓰기 때문에 당신에게 돈이 들어 오는 것”이라고 오히려 생색을 낸다는 것. 李여사는 이날 “앞으로 나름대로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서 한달후 쯤 활동계획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최근 경제난속 실업과 가정해체 문제에 가슴아파하고 있다고 나중 한 측근인사가 귀띔했다.청와대에 들어 간후 “눈부시게 예뻐진 비결”을 묻는 질문에 “예전에는 직접 머리 손질을 했으나 요즘은 미용사에게 맡기고 새벽 4시쯤 일어나다가 1시간 정도 더 자는 것 이외에 다른 비결은 없다”고 대답했다.“다리를 다쳐 입원했던 것이 아니라 미용성형수술을 했다는 엉뚱한 소문이 떠도는 모양이지만 사실 마사지하는 경우도 드물다”고 털어 놓았다. 金대통령 부부는 여성계에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후원자로 꼽힌다.張明秀 한국일보 주필의 이날 건배 제의처럼 “두분이 이곳에 계시는 동안이 일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가 되기를”빌어 본다.여성은 물론 우리 국민의 진운(進運)을 위해.
  • 국난 극복을 위하여/金承均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서울광장)

    K형. 담시 오적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형의 근무처인 민주전선을 찾은 것이 어제 같소 그려. 그때 민주전선 편집국장도 함께 구속되었기에,아니 김세영 선생이 특별히 사상계와 민주전선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인사차 방문했었고,그때 K형은 감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불려가서 심하게 조사받고 오적시가 게재되어 있던 민주전선이 몽땅 압수되었다고 비분강개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오. 나는 그 후 천관우·함석헌·김재준·이병린 선생님을 모시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일을 했지 않았소. 독재를 물리치려면 선거나마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면서 선거참관단을 조직,전국에 파견하던 그 기개와 그 장엄함,살벌하던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호령하던 노지사들의 모습이 아련한데 그 분들은 모두 이 땅에 계시지 않는 구려. ○새로운 가치질서 확립 그 분들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인품,해박한 지식,불굴의 기백,절절한 국가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는 후학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의 어른들인데 소홀히 대접받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서울신문이 친일매국노를 단죄하고 민주열사들의 자서전을 연재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겠다 하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수백만에 이르는 실업자들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명망 높은 성직자들과 시민단체가 발 벗고 나섰다는 보도는 “우리는 아직도 희망이 있구나”라고 자위를 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성취해야 할 두 마리의 토끼,즉 개혁과 통합이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우려가 못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개혁을 전제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국가부도의 원인이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관치금융,기업의 버블과 불투명성,이로 인한 국제투기꾼들의 외화 인출에 의한 유동성 부족이었다고 볼때 개혁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명제입니다. 통합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통합을 지역적 안배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온국민의 지지 속에 처단했던 최규하·전두환·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통합의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낡은 권위주의,부정부패 등 전도된 가치관을 과감히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함은 물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권위주의시대 방식의 명망가 운동은 이제 약효가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살벌한 군사독재 시절 국민이 숭앙하던 지조 높은 어른이 나서야 국민이 용기를 내어 감히 독재에 항거할 수 있었던 시절의 한 모습니다. 이제는 지역단위 중심의 실업자 구호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실업자 구호운동 펴자 K형. 우리는 4·19혁명을 일궈낸 세대입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반공청년연맹이 불탔습니다. 만약 혁명정부가 반공청년연맹을 부활시키려 했다면 국민정서가 받아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새마을운동본부를 개조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국민운동이 필요하면 새 운동을 일으키고 새마을운동 하던 사람들도 실사를 거쳐 구제하여 참여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새마을운동 하면 우선 전 아무개의 이미지와 독선·억압·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민정서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면밀히 고려해야 합니다. 단체의 정체성을 무시하면 게도 구럭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의식의 구조조정이 절실할 때입니다.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아시아 인권헌장’ 선포

    ◎아시아 인권委,5·18 18주년 맞아 光州서 【광주=南基昌 기자】 지난 15일부터 광주에서 열린 아시아 인권헌장선언대회가 17일 ‘아시아 인권헌장’과 ‘광주 선언문’ 채택을 끝으로 폐막됐다. 아시아 인권위원회 바실 페르난도 위원장은 “5·18 18주년을 맞아 서방 선진국과는 다른 아시아의 인권상황을 토대로 인권헌장과 광주선언문을 채택했다”며 “앞으로 아시아 각국 인권단체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갖고 아시아 민중들의 인권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헌장을 아시아 지역 모든 언어로 번역해 배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인권위는 특히 평화·민주·인권을 3대 이념으로 하는 ‘광주 선언문’의 채택은 아시아 인권상황 개선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광주선언문/“광주학살 핵심적 역할 두 前 대통령 기소/“인권옹호 특별한 성과… 값진 교훈 남겨” 광주시민뿐만 이나라 한국인들이 광주 대학살사건에 대해 보인 반응은 아시아에서의 인권발전에 하나의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다.그 학살의 핵심적 역할을 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기소한 것은 생명의 신성함을 확인하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아시아적 맥락에서 가장 특별한 성과 중의 하나이다.나아가 그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 역시 정말 특히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시아 인권운동에 많은 값진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아시아 인권위원회의 이 선언은 최근까지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지역으로 보이는 아시아에 엄청난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통화위기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크나 큰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아시아 위기가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의 극빈층과 여성 및 아동들의 인권문제이다. 우리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뿐만 아니라 정치적· 시민적 권리영역에서 인권의 희생자들에대한 우리의 연대를 확인한다.아시아 전 지역에서 인권을 침해받은 사람들이 모여 한국인과 만나 함께 할 것이다. 대회기간의 토론들은 아시아지역의 인권 보호 및 증진을 위해 앞으로 중요한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각기 자기 나라에서의 억압권력과 싸우기 위해 연대가 필요함을 확인한다. 우리들 중의 상당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고통을 당하고 있다.그들 역시 더 큰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우리에게 연대는 단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불굴의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한 정신에서 상호의사소통의 시대에 우리가 서로 좀더 접촉하고 좀더 알고 좀더 가까이 서로록 노력하자.
  • 5·18을 어떻게 볼 것인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특별기고)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1980년 5·18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항쟁이 광주폭동이라는 누명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뒤 ‘5·18사태’라고 했다가 ‘5·18광주항쟁’을 거쳐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역사적 평가와 함께 용어가 정립되었고,관련인사가 범죄자에서 민주투사로 그 본연의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더우기 그들은 엄청난 ‘폭동’‘반란’‘변란’‘내란음모죄’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사면복권과 함께 그 처절함,고통,수모,학대,인고의 세례로부터 축복받는 광명 영광 환희의 광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경과하였다.이제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이의 실마리는 군사정권의 군사독재와 특정지역 때리기 및 낙후방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현역 소장 출신의 박정권이 18년만인 79년 10·26사태로 종말을 고하면서 또 현역 육군소장 전두환이 그 시해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신군부의 정치세력이 싹트게 됐다.권력의 냄새를 맡고 도취된 것이다.12·12 하극상 사건을 거쳐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동지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운동을 관망하며 혼란 소요를 키워오다가 이를 수습한다는 명분속에 느닷없이 5·17비상계엄을 선포,혼란을 수습한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때 서울의 봄을 만끽한 3김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로써 대통령을 꿈꾸었다.그러나 12·12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의 ‘은밀히 계획된 정치일정’은 자신들이 일선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그때문에 서울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결국 휴교령으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 일부와 빛고을 광주의 대학생들이 섞인 민주인사들이 그 다음날인 5월18일 무장 군인과 결전을 전개하면서 5·18은 터졌다.처절한 살육 전시회가 낭자한 피로 얼룩진 가운데 전개됐다.대치국면은 광주와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무고한 시민만 죽임을 당한 역사상 매우 잔혹한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게된 것이다. 이때 계엄군과 시민군의 결전은 곧 광주의 민주화투쟁 이었으며 이는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이었다.마치 동학혁명(1894­5)이 이곳에서 일어나 북상,반봉건 반제국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과 같다.또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도 농민,노동자의 투쟁(소작쟁의,노동쟁의)도 광주 나주 완도 하의도 등에서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제타도의 애국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5·18 역시 서울의 5·17 민주화 투쟁이 광주에서 성숙되어 전국으로 물결져 간 것이다.따라서 5·18은 광주 전남만의 민주화운동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횃불이 된 것이다.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곧 군사독재와 신군부의 민간 억압 책동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높였고 동참의식을 도출해낸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그러나 당시 광주는 폭동 소요 탈취 암흑의 광장으로 신군부와 권력지향적 철새 정객들에 의해 선동되었고 그에따라 그 지역에 대한 혐오감,증오심을 증폭케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떨어져도 매점매석하지 않았고 자체조직으로 질서를 잡았다.식량이 떨어진 이웃에 온정을 베풀었으며 부녀자들은 따뜻한 음료수와 끼니로 시위대의 사기를 돋구어 민주화 의지,신념을 달성케 하였다.의사,간호사가 구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학생들이 금융,정부기관을 지켰으며 헌혈에 온시민이 동참하였다.비록 신망의 정치인인 金大中이 ‘내란음모사건’이란 누명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어도 그것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더 불타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정인을 위하기보다 민주화는 필연적 과제였기 때문이다.이제 그 분은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되어 바웬사 사하로프 만델라와 함께 민주의 투사요 지구 인권의 파수꾼으로 손꼽히는 반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한다.불의,부정을 배격한 동학정신이 팽배한 이 지역의 5·18은 곧 우리 모두의 민주화운동이다.6·10항쟁,6·29선언(1987)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새삼 주목해야 한다. 영원히 저주받을 지역감정,지방색의 차별화 등은 망각의 저 여울속으로 보내야 한다.그래야 진정한 국민의 정부,신명나는 국민으로 거듭나서 화합의 대열로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또 복받은 대한민국이 달성되어 통일조국 대한민국 건국의 50주년을 환희와 벅찬 희망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국민의 정부 첫 5·18 의미­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아시아민주화운동 도화선” 재평가/亞 인권선언대회 주체 계기/기념식 국제행사로 발돋움 “5·18은 아직도 광주에 갇혀 있는가” 국민의 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5·18의 화두(話頭)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지난해부터 5월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여건은 4·19에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럼에도 광주·전남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기념행사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5·18 민중항쟁 제18주년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李基洪)’는 올해 행사의 목표를 ‘5·18정신의 전국화·세계화추진,그리고 광주와 5·18의 향후 방향성 제시’로 세웠다.5·18을 시공(時空)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전국적,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번 5·18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또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다.광주에서는 15일부터 17일까지 ‘아시아인권헌장’선언대회가 열리고 있다.아시아지역 2백여개의 비정부민간조직의 쟁쟁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해야할 기초적인 권리를 담은 헌장을 채택하는 행사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5·18은 아시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국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로 기록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관점에서 5·18의 근·현대사적 위상 재고찰이 필요하다.5·18 묘역에 설치된 체험공간 일곱마당 부조물은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광주학생운동­3·1운동­4·19의거­5·18광주민중항쟁­통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일곱마당에는 빠졌지만 4·3제주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게 5·18연구학자들의 주장이다. 공간적으로는 다른 나라 민중항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2·28사태 및 고웅사태 등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일부 학자들은 버마 8888항쟁,태국 5·18 항쟁과 최근 인도네시아의 반(反)수하르토봉기 등 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권의민중항쟁들을 ‘민주화 갈망’이라는측면에서 같이 묶어보려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결국 5·18이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려면 명확한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발포명령자,사망자 숫자 등이 확실히 규명되어야 한다.집단암매장 여부,행방불명자 추적,헬기기총소사 등의 참혹행위 여부도 밝혀져야할 대목이다. ◎광주 민중항쟁 일지 ▲80.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5.18=전남대생 600여명 학교정문 앞 계엄군과 첫 충돌.광주민주화운동 발발 ▲5.27=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17=김대중 내란음모죄 1심 사형선고 ▲10.25=계엄군법회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175명 선고공판사형5명,무기7명 등) ▲12.9=광주 미문화원 방화 ▲81.4.3=실형 관련자 특사,감형 실시 ▲82.3.18=부산 미문화원 방화 ▲84.11.18=민정당사 점거 시위 ▲85.5.23=서울 미문화원 점거 ▲6.7=국방부‘광주사태 전모’발표.사망자 191명(민간인 164,군인 23,경찰 4명) ▲86.11.1=광주 직할시 승격 ▲88.4.26=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완패.국회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88.11.18∼89.2.24=국회 광주 특위 및 청문회 가동 ▲89.3.10=노태우­김대중 회담,상무대 공원화등 일부 치유책 합의 ▲91.5.11=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지급 완료 ▲93.5.13=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 관련 담화 발표 ▲94.5.13=정동년 5·18 광주항쟁 연합 상임회장,두 전직 대통령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고발 ▲95.7.14=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검찰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7.19=5·18 유족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11.25=5·18 특별법 제정 ▲96.1.23=두 전직대통령 등 5·18 관련자 8명 내란혐의 기소 ▲97.4.17=대법원 전두환 무기,노태우 17년형 확정 ▲5.9=국무회의 5·18 국가기념일 제정 ▲12.22=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관련자 사면,복권
  • 북풍 수사 새국면­권씨 자해 각계 반응

    ◎“진실규명 외면… 떳떳치 못한 행동”/“안기부 위상 바로잡게 잘못 승복을”/PC통신에도 동정보다 비판 우세 권영해 전 안기부장 자해 사건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진실규명을 외면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입을 모았다.권씨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안기부와 군에서도 동정론보다는 비판론이 우세했다. 22일 안기부의 관계자는 “북풍공작 사건은 안기부가 권력에 종속돼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으므로 권 전 부장이 안기부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성실하게 수사에 임해야 했다”면서 “특히 군 출신으로서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간부는 “명예를 중시한 분이니…”라면서도 “북풍공작 사건 파문으로 가뜩이나 동요하고 있는 안기부 조직이 이번 사건으로 더욱 위축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중요한 직위에까지 올랐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범죄자로 전락한 사실에 치욕을 느껴 자해한 것 같다”면서 “하지만 명예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군 출신으로 당당하게 진상을 밝히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 고위 장성은 “여론의 따가운 시선에 부담을 느껴 극단적인 행동이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검찰의 조사를 받는 현실 자체를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실련의 유종성 사무총장은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있는 중대사건에 대해 진실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자해로 이를 은폐하려 한 것은 한때 국가 정보기관의 총책임자였던 사람으로서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PC통신에도 권씨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이 잇따랐다. ‘나우누리’ 이용자 박모씨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사법처리를 받아들였는데 권씨만 유독 ‘튀는 행동’을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수장 출신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승복하는 자세가 아쉽다”고 주장했다. 또 양모씨는 “자해하면서 변기뚜껑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검찰수사에 대한 항의성 쇼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유니텔’ 이용자 김모씨는 “자신의 배를 4㎝ 깊이로 20㎝나 벤 것을 보면 단순한 소동은 아닌 것 같다”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 전체가 연루돼있는 상황에서 ‘너 하나만 책임져라’는 식의 마녀사냥을 했으니 권씨가 할복을 택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는 의견도 내놨다.
  • DJ “앞으론 당에 정치자금 못준다”

    ◎“투명한 정치 실현 도움됐으면” 강력 희망/국민회의 운영경비 조달대책 마련 부실 국민회의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당에 정치자금을 줄 수 없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국민회의 한 고위관계자는 12일 “김대통령이 ‘투명한 정치 실현을 위해 과거처럼 청와대에서 여당에 정치자금을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을 최근 한 핵심측근을 통해 당에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김대통령은 그러나 이같은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조용히 실천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과거 정권에서 대통령은 총재 자격으로 여당에 당 운영비를 주기적으로 지급해 왔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매달 20억원의 거액을 민정당에 보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노태우 전 대통령도 주기적으로 상당액을 당에 지급했다.사실상 ‘통치’를 위한 관리자금인 셈이다.다만 취임직후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총재자격으로 매달 소액의 당비만 냈다는 후문이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뜻에 대해 국민회의측은 ‘당연하다’는 반응속에 자구책을 서두르고 있다.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대통령이 당에 돈을 보낸다면그 돈이 어떤 돈이겠느냐.(검은 돈 아니냐).김대통령의 뜻은 국민정부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당으로서도 일체 청와대 정치자금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김충조 사무총장도 “당연한 것”이라면서 “당에서 자체적으로 운영경비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총장은 “여당이 된 만큼 중앙당 후원회가 보다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고“당일각에서는 과거 여당처럼 재정위원을 둬 ‘돈줄’을 확보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지만 정경유착의 소지가 있어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130여명의 사무처당직자를 두고 있는 국민회의의 월 운영비는 선거때를 제외하고 8억원 정도.분기별로 15억원씩 나오는 국고보조금과 고위당직자 특별당비,후원금으로 충당할 수 있으리라는 설명이다.
  • 새 정부 차관급 38명 프로필:Ⅱ

    ◎이건춘 국세청장/재산세 분야 전통… 행시 10회 선두 업무추진력이 탁월하며 국세청내 행시 10회 출신 가운데 선두주자.온화하면서도 성품이 성실해 위 아래 신망이 두텁다.처음 만나는 사람도 쉽게 호감을 갖는 호남형이며 외부에도 지인이 많다.특히 직세와 재산세 분야에 밝다.부인 문영인씨(49)와 2남.▲충남 공주·55세 ▲공주고·연세대 행정학과 ▲국세청 재산세·직세국장 ▲경인·중부·서울지방국세청장. ◎이상호 병무청장/합리적 군수업무 정비한 ‘국제신사’ 차분하면서 강한 업무추진력을 갖춘 외유내강형.군수본부장 재직때 합리적인 군수업무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받았다. 외모처럼 일처리가 깔끔해 ‘국제신사’로 통하며 못하는 운동이 없을만큼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많은 책을 읽는 독서광.부인 신용선씨(60)와 1남1녀.▲경북 김천·60세 ▲육사17기 ▲국방부 군수본부장 ◎이보식 산림청장/연구직 출발… 내부승진 1호 청장 산림청 임목육종연구소에서 연구직으로 출발,산림청 개청이래 처음 청장으로 내부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육종연구소 소장 재직시 주목의 씨눈에서 항암제인 ‘택솔’을 개발,상업화하기도 했다.뚝심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워 직원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부인 임정자씨(59)와 2남 1녀.▲황해 수안·60세 ▲부여고·서울 농대 ▲산림청 조림·영림국장 ▲산림청 차장 ◎박종세 식품의약청장/미서 20년간 연구… 행정력도 호평 20년간 미국 존슨 홉킨스대학 등에서 연구생활을 한 전문기술관료 출신. 88서울 올림픽때는 도핑콘트롤센터 소장을 맡아 벤 존슨의 약물복용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 전개가 정연하며 합리적성품에 행정력도 겸비했다는 평.▲서울·54세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식품의약품안전본부 독성연구소장 ◎신건 안기부1차장/장영자 사건 수사 지휘 ‘칼날검사’ 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때 수사검사로 명성을 날렸다.그러나 93년 슬롯머신 사건때는 정덕진씨와 수차례 만난 인연으로 엉뚱한 곤욕을 치렀다. 소탈하고 온화한 성격이나 칼같은 기질도 돋보여 이종찬 안기부장을 도와안기부 개혁을 이끌 적임자라는 평. 부인 한수희씨(55)와 1남 3녀. ▲전북 전주·57세 ▲서울법대 ▲대검 중수부장 ▲법무부 차관 ◎김진선 비상기획위장/수방사령관 등 주요 보직거친 야전통 수경사·사단장·수방사령관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야전통. 93년 4월 2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가 노태우계인 ‘9·9인맥’으로 분류돼 한달여만에 옷을 벗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대선전에 자민련에 입당해 김종필 총리서리의 신망이 높다.부인 임매자씨(54)와 2남.▲충북 괴산·59세 ▲육사19기 ▲육군참모차장 ▲2군사령관 ◎엄낙용 관세청장/세제·국제업무 두루거친 재무관료 세제와 국제업무 분야를 두루 섭렵한 재무관료.신사 풍의 용모에 조용한성격이지만 업무 추진력은 뛰어나다.재정경제원 2차관보때 우리나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지만 대인관계는 원만하다.부인 홍영신씨(47)와 1남 1녀.▲서울·50세 ▲서울대 행정학과 ▲재무부 세제심의관 ▲재경원 국세심판소장·제2차관보. ◎김세옥 경찰청장/후배 신망 두터운 경비작전 전문가 경비작전 분야의 전문가.신중하고 과묵해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나 대인 관계가 원만하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다는 평. 간부 후보생 16기를 수석 졸업했으며 인정이 많아 부하들의 신망이 두텁다.부인 박옥주씨(50)와 2남.▲전남 장흥·57세 ▲조선대 법대 ▲전북경찰청장 ▲경찰청 경비국장 ▲전남경찰청장 ▲경찰대학장 ◎추준석 중기청장/국제감각 겸비한 상공분야 토박이 토박이 상공맨.부산출신으로 할아버지가 김영삼 대통령의 은사였던 관계로‘PK’로 분류돼 왔으나 정작 인사에서는 출신지 덕을 본 일이 없다.사안의 핵심을 정확히 판단해 대안을 제시하는 스타일.주불 상무관 경험 등으로 시야도 탁 트였다.부인 엄윤지씨(49)와 1남 1녀.▲부산 동래·51세 ▲서울상대 ▲상공부 국제협력관 ▲통산부 산업정책국장 통상정책국장·차관보 ◎정종환 철도청장/교통경제 분야 잔뼈굵은 ‘불도저’ 28년간 교통경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관료 출신.교통부직원들 사이에서는 업무 추진력이 강해 ‘불도저’로 불리우면서도 자상하다는 평.야생화 등 식물에 대해서는 거의 건문가 수준.부인 조정자씨 사이에 3남.▲충남청양·50세 ▲고려대 정외과 ▲교통부 국제항공과장·도시교통국장·항공국장·관광국장 ▲건교부 국토계획국장·기획관리실장·수송정책실장 ◎나종일 안기부2차장/새 정부 이론 가진 국제정치학자 김대중 대통령 집권과정에서 ‘지역등권론’이란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국제정치학자.경희대교수직을 가진 채 국민회의 지도위원,당무위원으로 김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왔다.나용균전의원(4.5.6대)이 부친이다.부인 홍재자씨(54)와 1남 3녀. ▲전남 나주·58세 ▲서울대 정치학과 ▲경희대 정경대학장 ▲국민회의총재 외교안보특보 ▲인수위 행정실장 ◎윤원배 금감원 부위원장/경제정의 실현 강조한 학자 출신 합리적이고 온건하다.69년 한국은행에 입행해 80년 조사역을 맡다가 미국노스웨스턴대로 연수를 떠난 뒤 학자로 변신했다.경제정의 실현에 관심이 많다.김태동 경제수석,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와 가까우며 지난 해 대선때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자문에참여했다.▲전남 강진·52세 ▲서울대 경제학과 ▲숙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정의연구소장 ▲경실련 집행위 부위원장. ◎강정훈 조달청장/업무 추진력 탁월… 조달분야 전문가 업무 추진력이 뛰어나고 치밀하다.줄곧 조달청에만 몸담아 온 조달분야 전문가.소탈하고 정이 두터워 따르는 부하직원들이 많다.정부조달시장 개방과 관련 제도개선,업무의 국제화,대민 친절봉사 등으로 조달청의 위상을 새롭게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부인 박안자씨(55)와 1남 2녀.▲경북 영주·56세 ▲연세대 행정학과 ▲행시7회 ▲조달청 부산지청장·차장. ◎김강권 농진청장/녹색혁명 주도… 농업발전 산중인 70년대 녹색혁명과 80년대 백색혁명을 주도한 농업발전의 산증인.감자육종을 비롯한 원예·생물산업의 토대를 확립하고 기술개발에 기여했다.소탈하고 격의없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하다.지금도 프라이드 승용차로 출·퇴근한다.두주불사형.부인 장명자씨(55)와 2녀.▲서울·59세 ▲서울고·서울 농대▲미 하와이대 박사 ▲농업진흥청 시험국장·농업기술연구소장 ◎김수동특허청장/변리사 자격증 취득… 특허업무 조예 업무처리가 치밀하고 추진력도 갖춘 상공관료 출신.옛 상공부에서 산업·무역·통상분야를 두루 거쳤다.특허청 항고심판소장을 역임하며 변리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특허분야에 조예가 깊다.집요하면서도 모나지 않는 성격으로 특허청을 서비스기관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평.부인 유정애씨(50)와 2남 ▲경북 문경·52세 ▲경기고·서울법대 ▲특허청 차장. ◎안번일 감사원사무총장/세법·금융 감사 인정 받는 회계통 일 처리의 선이 굵은데다 합리적이며 통솔력이 뛰어나 따르는 직원들이 많다.세법과 금융관계 감사에 밝아 감사원 내에서 손꼽히는 회계통.감사위원으로 승진했다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이례적 케이스.부인 이춘희씨(49)와 2남1녀. ▲서울·56세 ▲서울대 법대 ▲감사원 공보관 ▲〃 제4국장 ▲〃 기획관리실장 ▲〃 제1사무차장 ▲감사위원 ◎조건호 총리비서실장/경제부처 섭렵·인화 탁월 ‘마당발’ 상공부 재무부 총리실 청와대 등을 두루 거친 화려한 경력의 경제관료.대학시절 조정선수로 활약했으며 소탈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가는 곳마다 인기를 모은다.문화계 스포츠계와 언론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은 ‘마당발’이다.부인 박찬혜씨(49)와 2녀. ▲경기 김포·54세 ▲서울대 법대 ▲재무부 공보관·국제금융국장 ▲청와대 기획조정관 ▲총리비서실장 ◎박용환 공무원교육원장/업무처리 명쾌한 행정전문가 옛 총무처에서 조직·인사국장을 지내 중앙 행정을 두루 섭렵한 행정전문가.업무처리가 명쾌하고 성격이 호탕해 부처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보스형.판단력과 통솔력을 갖췄으며 업무처리도 명쾌하다는 평이다.부인 백아영씨(54)와 2남2녀. ▲대구·54세 ▲서울대 정치학과 ▲행정고시 11회 ▲총무처 조직·인사국장 ▲소청심사위원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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