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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 ‘양대 지침’ 초안 내용

    한국노총이 노사정위 불참을 선언한 배경에는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 등 양대 지침을 둘러싼 정부와 노동계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반해고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근로기준법 23조를 완화하는 지침을 말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저성과자나 근무 태도가 불량한 직원을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우리 재계에서도 인력의 고령화와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이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양대 지침 초안에서 일반해고가 가능한 대상을 ‘공정한 평가와 이를 토대로 한 재교육, 배치 전환 등 기회를 줬음에도 업무 능력 또는 성과 개선의 여지가 없거나 업무의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는 근로자’로 규정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부당 해고 사례를 획기적으로 줄여 노사 갈등을 예방하고 정년 60세가 지켜질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라고 밝혔다. 반면 한노총은 “일반해고가 도입되면 형식적인 재교육이나 전환 배치 등을 한 뒤 단지 성과가 낮다는 이유로 해고해 버리는 ‘쉬운 해고’가 곳곳에서 만연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은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간주되는 채용, 인사, 해고 등의 취업규칙을 바꿀 때 노조나 근로자 과반수 대표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을 말한다. 정부는 초안에서 판례 등에 근거해 근로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취업규칙 변경이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변경의 효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정년 60세 연장으로 임금피크제 등을 도입할 때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계는 취업규칙 변경 요건을 완화하면 임금피크제 등 사측이 원하는 취업규칙을 마음대로 도입할 수 있다며 반대한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시론] 성과중심 인사관리의 전제조건/이선우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

    [시론] 성과중심 인사관리의 전제조건/이선우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

    인사혁신처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인사혁신처는 많은 혁신 어젠다를 발굴해 정책화하고 기존의 제도를 개선해 공직의 전문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지난 1년여간 상당한 제도들에 변화를 주고 새로운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이를 통해 정부 인적 자원들의 역량을 과거와는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 노력했다는 면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공무원 인사 업무만을 전담하는 정부 조직이 탄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정부의 인사제도가 한 단계 도약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혁신에는 저항도 있을 수 있고, 의욕이 앞서 무리한 제도의 제안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을 극복하고 이해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혁신적인 제도들을 정착시켜 나가면 공직사회의 안정적 운영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인사혁신처가 그동안 발표한 혁신안들 중 일부는 다소의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 공무원노조, 관련 이해 당사자들과의 대화와 협의를 통해 쟁점들을 제거해 왔다. 그중 최근에 발표한 능력과 성과중심 인사관리 방안은 다른 어떤 제도보다도 공직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공무원들의 성과중심 인사관리가 과연 가능할지, 그 성과에 근거를 두고 보수체계를 연동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왜냐하면 제도의 핵심이 일 잘하는 공무원과 못하는 공무원의 연봉 차이를 크게 한 데다 퇴출의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혁신안에 따르면 고위공무원의 경우 개인별로 연봉이 최대 1800만원의 차이가 날 수 있다. 일을 못하는 공무원들을 직권면직이나 직위해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동안 철밥통에 비유됐던 공무원 신분 보장이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다. 물론 성과가 미흡한 사람들에게 만회 기회를 부여하고 지원도 해 준다.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적절한 절차를 거쳐 면직 처분을 내리게 된다. 반면 상위 2%에 해당하는 성과 우수자들에게는 특별성과급이 주어진다. 실무직에겐 특별승진과 승급의 인센티브도 제공해 동기 부여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혁신안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적용되는 기준이 엄격하고 절차가 공정해 결정 후 법적 다툼이 없어야 한다. 그동안 여러 국가들이 공무원 성과평가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만족할 수 있는 평가제도를 도입하지 못했다. 이유는 적용 대상자들인 공무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제도를 개발하지 못한 데다 민간기업과 달리 성과평가 기준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사혁신처도 이런 상황을 파악해 절차를 강화했고, 개인평가와 함께 부서평가 등 다차원적인 평가를 함께 하는 보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법적 다툼의 소지는 존재한다. 이 때문에 평가기준을 보다 세밀하게 마련해야 하는데, 공직은 정량적 측정이 어려운 게 문제다. 따라서 매우 세밀하게 구분되고 경우의 수가 다양하게 포함된 논변적 측정 기준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직무와 성과가 연동된 보수체계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직무명세서가 정치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각 직무명세서 내용은 일종의 성과평가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계급제 체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직무성과계약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계약 당사자들인 부서장과 구성원들이 연초 상담을 통해 성과 목표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과 측정 방법을 사전에 설정해야 한다. 이의 수행 여부를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과정 상담을 성실히 하면 인사혁신처가 추진하고자 하는 성과중심 인사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부서장들의 업무와 조직 관리의 책임성을 강화해 리더십에 대한 평가를 함께 진행한다면 계급제하에서의 성과평가제도가 갖는 한계를 다소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공무원들의 경쟁력은 지방공무원의 경쟁력으로 확산될 수 있다. 나아가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인사혁신처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다.
  • 돈 먹는 ‘좀비기업’… 구조조정 절박

    돈 먹는 ‘좀비기업’… 구조조정 절박

    지난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 성동조선 채권단인 시중은행장과 금융공기업 수장들이 줄줄이 불려갔다. 성동조선이 위치한 경남 통영이 지역구인 이군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의 긴급 호출 때문이었다. 당시 성동조선 추가 자금 지원을 거부하고 있던 채권단은 국회에서 ‘혼쭐’이 났다. 성동조선은 지역구 의원의 ‘입김’이 아니어도 채권단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데다 이를 조정할 컨트롤타워마저 실종되면서 구조조정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STX조선 채권단은 지난 9월부터 두 달간 실사를 한 뒤 지난달 말쯤 결과를 내놓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달 초 개각설과 박근혜 대통령 해외 순방 등이 맞물리면서 발표가 계속 지연됐다. 부실기업 지원 여부는 표면적으로는 채권단의 판단 몫이지만 사실상 청와대와 정부의 ‘사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7월 중순 대우조선해양 채권단에 “1조원 이상 유상증자를 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석 달 뒤 청와대 서별관 회의에서는 대우조선의 강도 높은 자구계획과 노조 확인서 없이는 자금 지원이 어렵다는 지침을 정했다. 대우조선에 딸린 식솔과 지역 경제 등을 의식해 ‘묻지 마 지원’을 하려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방침을 살짝 바꾼 것이다. 갈팡질팡한 구조조정의 결과는 암울하다. 한국은행이 22일 내놓은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만성적 한계기업이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10.6%인 2561개다. 기업 10곳 중 1곳이다. 2009년보다 2.4% 포인트 늘었다. 만성적 한계기업이란 3년 연속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 상태가 2005년 이후 10년간 2차례 이상 있었던 기업을 뜻한다. 대기업 한계기업 비중이 같은 기간 6.6%에서 10.8%로 올라 중소기업(8.5%→10.6%)보다 더 가파르다. ‘대마불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구조조정은 큰 고통을 수반하는 수술”이라며 “(일정 정도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청와대의 확고한 시그널, 정부의 과감한 추진력, 정치권의 무간섭이란 삼박자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구조조정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기 전에도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선거 등과 맞물리면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해 위기를 맞았다”면서 “구조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한국 신용등급을) 강등시키겠다는 무디스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환기했다. 박정우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디플레이션(물가하락) 환경에서는 어떤 구조개혁도 성공하기 어렵다”며 “좀더 과감한 정책 대응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최재숙 현대로템 고문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최재숙 현대로템 고문

    한국 철도산업의 기술력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우리나라에서 ‘철도 인생 50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주인공이 있다. 최재숙 현대로템 고문은 한국 철도 변천사의 산증인이다. 철도 관련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8살 나이에 철도청 공채 1기로 공직에 입문해 국내 최연소 기관사가 됐다. 이어 25년을 지하철공사와 함께하다 첫 민간 도시철도인 서울지하철 9호선에서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만년엔 국내 선두 전동차 제작 및 유지·보수 기업에서 고문을 맡고 있다. 10일 그의 50년 역정에 대한 회고담을 들어 봤다. →하실 말씀이 많겠지만 걸어 온 길을 하나씩 풀어 보자. -경북의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에 대전으로 가 철도고교를 다녔다. 2학년 재학 중에 철도청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아버지도 공직에 있었고 그땐 공무원의 인기가 높았다. 1967년 당시엔 경부고속도로도 없었고 철도가 전국을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게 철도인의 길을 걷게 한 것 같다. 칙칙폭폭 요란한 기적과 함께 희뿌연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어린 마음을 설레게 했다. →뜻한 바를 이뤄 기쁨이 컸을 텐데. -(입가에 미소) 기관사 보조로 대전에서 경북 김천을 오가는 통학열차에 올랐는데, 하는 일은 기차의 연료인 석탄을 끊임없이 화로에 넣는 일이었다. 온통 숯검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와서는 흰 장갑을 깨끗이 빨아 말려 아침에 다시 꼈다. 흰 장갑은 기관사의 멋이자 상징이었다. →디젤기관차가 등장했을 때도 직접 운행을 했나. -지금의 KTX처럼 제일 빠른 디젤기관차의 노선이 ‘특급열차’였는데 이를 직접 운전하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운전은 철도청의 직급인 7급 이상만 가능했고 나는 8급이었다. 다만 기능경진대회에서 입상하면 특급열차 운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밤낮으로 노력해 전국 1위로 입상했고 대전과 서울을 오가는 특급열차의 핸들을 잡았다. 신형 기관차를 운전해 서서히 플랫폼에 들어서면 26살 총각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로는 언제 옮겼나. -1979년 ‘서울시 지하철 운영사업소’의 기관사로 발령이 났다. 지하철이 등장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아 정부와 사회의 관심이 대단했다. 전기의 힘으로 달리는 지하철과 총 37년의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처음엔 청량리와 인천을 오가는 전동차를 운전했고 이후엔 열차 운행을 제어하는 관제사와 운행 계획을 짜는 업무, 기관사들을 지도하는 업무 등을 했다.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점을 꼽는다면. -서울 시민의 발로서 우리나라 지하철의 발전과 늘 함께한다는 자긍심이 컸다. 아울러 내 직업에 대한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단순히 전동차를 운전하는 데 만족하다가 지하철을 매일 이용하는 시민이 무엇을 불편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또 그 귀중한 시간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줄 것인지 등을 깊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시기다. 이제는 민간 기업일지라도 고객이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면 존속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성과는 무엇인가. -승객들이 특정한 위치의 승강장이나 전동차 안을 만날 약속 장소로 정하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10량의 전동차에 1호차, 2호차 등 식별 표지를 붙였다. 표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서로의 약속이 어긋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계단에도 A, B 등으로 표지를 붙였다. 2003년 대구지하철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후 1944개 전동차 전량을 불연성 내장재로 교체했다. 또 매월 방재훈련을 시행했고 신속 대응 매뉴얼도 만들었다. 그 매뉴얼은 국내는 물론 외국 지하철에서도 그대로 따라서 도입했다. →서울지하철에 대해 평가한다면. -외국에 나가 지하철을 타 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우리 지하철은 설비나 운영 측면에서 꽤 높은 수준에 있다. 가끔 전동차가 운행 중에 멈추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설비나 시스템이 노후화된 탓이지 운영, 관리에서 생기는 문제는 거의 없다. 이는 지하철 사고가 아니라 운행 장애라고 해야 한다.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문제다. →강성인 지하철노조가 파업으로 시민에게 불편을 준 적도 있는데. -물론 인정한다. 기술적 설비와 시스템만으로 시민의 안전, 정확한 운행 서비스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보다 사람이 핵심이다. 7200여명의 직원을 관리해야 하는 운영본부장으로 재직할 때 선택한 길은 상생이었다. 노조원들은 강경파이기 이전에 나와 함께 시민, 또 지하철의 안전을 지켜야 할 직원들이기 때문에 내가 먼저 격의 없이 대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출근해 숙직실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직원들을 만났다. 가벼운 격려와 함께 요구르트를 돌리곤 했는데, 나중엔 별명이 ‘요구르트 본부장’이 됐더라. →9호선 지하철의 대주주인 외국계 회사가 운영권을 맡겼는데. -특별한 인연은 없었고, 한국에서 운영·관리의 전문가를 찾다가 사장직을 제안한 것으로 안다. 다시 한번 ‘익숙한 것과의 이별’을 시작했다. 기꺼이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혁신을 준비했다. 교통수단이라는 공공성과 민영 회사의 생산성을 접목시켜 조화를 이루는 경영에 대해 고심했다. 생산성 향상도 결국 시민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영 혁신을 위해 도입한 제도를 소개한다면. -무(無)숙직 제도를 도입했다. 자정을 넘겨 일을 마친 기관사 등을 퇴근하도록 했다. 이로써 경영 비용도 줄였지만 가족의 품으로 귀가하는 직원들이 먼저 반겼다. 불편한 환경에서 숙직을 하면 이튿날 하루를 쉬어도 몸이 상한다. 밤늦게라도 퇴근한 뒤 이튿날 오후 늦게 나오면 견딜 만하다. 또 각 역의 역장을 없애고 5개 역을 묶어 ‘그룹장’을 배치했다. 3명의 그룹장이 시간대별로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관리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각 역의 사무소를 폐쇄한 뒤 그룹장들이 본사 종합통제소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인력 효율화 덕분에 여성 인력의 채용도 늘었다. →역무원이 적으면 안전 문제나 고객 불편이 발생하지 않나. -출입문이 닫힌 역무실이나 매표소가 없는 대신에 승객들이 실내를 훤히 볼 수 있는 곳에 ‘고객안전원’을 배치했다. 고객안전원은 자동 시스템을 통해 매표, 신호 조작, 유지 보수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전기·통신·기관안전 등 관련 자격증 소지자다. 고객 안내만 하는 게 아니라 스크린도어의 장애, 선로전환기의 이상, 무연변전소의 문제 등 승객 안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점검하고 이상 발생 초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역사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가 그의 신속한 업무 처리를 돕는다. →‘지하철 보안관 제도’도 9호선이 처음 도입한 것인가. -9호선의 장점은 한국이 스스로 터득한 운영 노하우와 프랑스 등 외국 지하철의 장점을 접목시켜 시너지 효과를 얻은 것이다. 승객의 안전과 전동차 내의 질서를 확인하며 순찰하는 보안관 제도는 외국 지하철로부터 도입된 것이다. 혁신은 단순한 창조가 아니라 변화를 향한 노력이라고 본다. 9호선에는 585명의 보안관이 활동하는 것으로 안다. 9호선 재임 중에 외국에서 모두 106회에 걸쳐 1244명이 방문했다. 연간 20여 차례였다. 선진국에서 온 방문객들도 한국의 지하철 설비는 물론 운영 체계의 우수성에 감탄하며 돌아갔다. →9호선 경영 효율화의 성과를 구체적으로 본다면. -운영 인력이 ㎞당 25명에 불과했다. 44명에서 68명인 다른 지하철에 비해 거의 절반 수준이다. 처음에 목표한 하루 승객은 24만 3196명이었지만 지금은 이보다 많은 25만 6420명에 이른다. 이런 목표치를 넘기는 사례는 거의 없다. 일부 경전철 등의 문제점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급행을 함께 운영한다고 했을 때 적은 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재임 6년 동안 큰 탈이 없었다. →한국 철도의 미래 모습은 어떤가. -우선 유라시아 철도의 완성이 필요하다. 세계 철도 운송의 관건은 부산에서 북한을 거쳐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연결되는 철로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항공이나 선박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와 정책 추진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또 한국 철도의 수출이 중요하다. 전동차와 유지·보수 산업은 이미 수출이 이뤄지고는 있지만 사실 이보다 경쟁력이 강한 쪽은 운영 기술력이다. 이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구미 등 철도 선발국을 상대로 해도 경쟁력이 있다.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성공적인 ‘철도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성공이라는 말은 쑥스럽고, 다만 요즘 청년 세대가 ‘스펙’을 쌓는 것에만 몰두한다는 말을 들으면 씁쓸하다. CEO가 인정하는 것은 스펙이 아니다. 밑바닥 현장에서 하나씩 경험을 축적하면서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향해 지치지 않고 매진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면 기회는 반드시 오고, 이게 성공의 길로 이어진다. 전문성이 결국 나만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편한 길은 없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최재숙 현대로템 고문 ▲경북 김천(66) ▲방송통신대 법학과·서울시립대 경영대학원 수료 ▲철도청 기관사 공채 1기·관제원 ▲전 서울지하철공사 기관사 ▲서울메트로 운영본부장 ▲서울지하철 9호선 운영㈜ 사장·회장 ▲현대로템 고문
  • 日금성 탐사선, 오는 7일 마지막 궤도 진입 재도전

    日금성 탐사선, 오는 7일 마지막 궤도 진입 재도전

    5년 전인 지난 2010년 12월 금성 궤도 진입을 위한 첫 시도를 실패한 일본의 금성 탐사선 ‘아카쓰키’가 오는 12월 7일 두번째이자 마지막 금성 궤도 진입에 재도전한다고 우주전문 매체 스페이스닷컴이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당시 첫 도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궤도 진입에 필수적인 주엔진이 점화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번에는 보조 엔진을 사용해 금성 궤도 진입을 시도한다고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밝혔다. 현재 아카쓰키에 남아 있는 연료는 한 번 시도에 사용될 양 뿐으로, 성공할 경우 일본 탐사기로는 처음으로 지구 이외의 행성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첫번째 궤도 진입에 실패했던 아카쓰키는 그간 태양 궤도를 돌면서 금성에 대한 재도전을 준비해왔으며 오랜 검토 끝에 재도전 시기는 오는 7일로 결정됐다. (이날은 1941년에 선전포고 없이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일본의 진주만 공습날이다) 아카쓰키의 주엔진은 현재 작동 불능 상태이며, 따라서 궤도 집입을 위해 탐사선은 자세 제어용인 보조 엔진을 사용해야 한다고 JAXA의 미션 관련자가 밝혔다. 만약 이 기동에 성공한다면 아카쓰키는 길쭉한 타원궤도로 금성을 8~9일 만에 한 바퀴씩 돌게 된다. 실패로 끝난 원래의 궤도는 30시간에 한 바퀴씩 도는 것이었다. ‘새벽(曉)’이라는 뜻의 아카쓰키는 2010년 5월 51일 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세계 최초의 일본 금성 기후 탐사위성으로, 수명은 4.5년이다. 아카쓰키가 이번 재시도에서 궤도 진입에 성공한다면 금성의 기상관측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 금성 주변을 돌면서 다양한 파장으로 조사할 수 있는 특수 카메라를 이용해 금성 대기권을 관측하게 된다. 황산이 주성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성 주변의 구름층 성분과 대기권의 폭풍 발생 과정 등 금성의 기상을 분석할 예정이다. ​ JAXA 미션 관계자는 “타원궤도의 긴 쪽 지름은 금성 지름의 10배 정도로, 아카쓰키가 지속적으로 금성의 두꺼운 대기와 표면을 관측할 수 있는 궤도” 라고 설명했다. 원래 미션 기간은 최소 2년으로 잡혀 있었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탐사선의 배터리가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3억 달러(한화 3300억원)가 투입된 아카쓰키 미션은 태양계 초기에 지구와 비슷한 조건에서 탄생한 금성이 어떤 경로를 거쳐 지구와는 달리 섭씨 수백 도의 황산 지옥으로 변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JAXA측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탐사선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7일 금성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금년 초 몇 차례의 기동을 완벽히 끝냈다. 궤도 진입 성공 여부는 며칠 후 뒤면 확인할 수 있다. 유럽우주국(ESA)의 비너스 익스프레스 호는 미션을 끝낸 후 지난해 금성의 두터운 대기 속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만약 아카쓰키가 궤도 진입에 성공한다면 유일한 금성 탐사선이 되는 셈이다. 한편, 아카쓰키는 첫 태양광 우주범선 ‘이카로스'(IKAROS)를 탑재했는데, 이카로스는 지름 1.6m, 높이 0.8m의 원통 모양 본체로 구성돼 있으며, 한 변이 14m가량인 정사각형 모양의 돛을 펼치게 된다. 빛을 반사하는 초박막 필름으로 제작된 돛은 태양광이 부딪힐 때 생기는 힘으로 움직인다. 별도의 연료 없이 태양광만으로 우주공간을 운항할 수 있는 우주범선 아이디어는 우주항해에 성공한 적은 없지만, 아카쓰키가 최초로 성공했다. 아카쓰키는 일본이 시도하는 두번째의 행성 탐사선이다. 일본은 지난 1998년 화성탐사 위성 ‘노조미’를 쏘아올렸지만, 발사 후 밸브의 오작동으로 연료의 대량 손실을 가져와 탐사에 실패한 바 있다. 원래 계획은 2003년 12월 화성 궤도에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이런 상생도 있습니다

    KEB하나은행 식구가 된 외환은행 직원들이 올해 임금 인상분(2.4%) 전액을 반납하기로 했다. KEB하나은행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외환은행지부(외환 노조)는 16일 이런 내용의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 상생’ 선언을 발표했다. KEB하나은행 경영진은 노사 상생의 조직문화 구축에 힘쓰겠다고 화답했다. 이는 올해 은행권 노사의 첫 상생 선언이다. 합병 직전까지 거세게 저항했던 ‘외환맨’들이기에 이번 임금 반납 결정은 더 눈에 띈다. 더욱이 하나은행 출신들은 임금 반납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나홀로 결단’이다. KEB하나은행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합병으로 탄생했지만 노조는 각각 존재하는 ‘1은행 2노조’ 형태다. 외환 노조 측은 “저성장, 저금리로 은행업계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면서 “안팎의 어려운 금융환경 변화에 한마음으로 대응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KEB하나은행 측은 “노사가 함께하는 조직문화 구축과 직원 삶의 질 향상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면서 “외환 노조가 취임 두 달을 맞은 함영주 초대 행장에게 큰 힘을 실어 줬다”고 반겼다. 함 행장의 ‘진솔한 소통’이 통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산은 “대우조선 정상화 방안 내일 확정”

    대우조선발 구조조정이 속도전에 들어갔다. 채권단은 29일 대우조선해양 지원 방안을 발표한다. 대신 고강도 자구 노력을 계속 옥죌 태세다. 정부는 은행들을 향해 “옥석을 가려 달라”고 채근하며 다른 부실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도 서두르고 있다. 대우조선의 대주주이자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29일 열리는 이사회에서 ‘대우조선 정상화 지원 방안’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1조~2조원의 유상증자와 2조~3조원의 신규 대출 후 출자전환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은 이날 자산 매각, 대규모 인력 감축 등 강력한 자구안과 함께 노조 측 동의서를 산은에 전달했다. 채권단과 정부가 지원책 전제 조건으로 이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이 이날 발표한 3분기 실적에 따르면 전 분기 3조원대 손실에 이어 이번에도 1조 2171억원의 적자를 냈다. 해외 자회사 손실 등을 반영한 결과다.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영업 손실 규모는 4조 3003억원이다. 당초 산은은 이날 곧바로 이사회를 열려 했으나 이사진 8명 가운데 5명이 사외이사라 소집이 늦춰졌다. 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이날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투자·수출 애로 해소 주요 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 간담회’ 뒤 기자들과 만나 “회생 가능성을 전제로 재무 구조 개선, 과잉 공급 문제를 염두에 두고 (조선업) 구조조정을 해 산업이 정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은 같은 날 시중은행장 10명과 함께한 조찬 간담회에서 “구조조정 추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정확한 옥석 가리기’”라며 “이를 통해 회생 가능성이 없는 한계기업을 신속하게 정리함으로써 자원이 생산적인 부문으로 선순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살 수 있는 기업은 적극 지원해 막연한 불안감으로 억울하게 희생되는 기업이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다음달부터 유암코의 기초재원 4조원을 토대로 본격적인 기업 구조조정에 나설 방침이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이슈&이슈] 대구지하철공사 3호선 개통 이후 자구책 마련 나서

    [이슈&이슈] 대구지하철공사 3호선 개통 이후 자구책 마련 나서

    대구도시철도 3호선 모노레일이 지난 23일로 개통 6개월을 맞았다. 대구는 3호선 개통으로 전 지역 1시간 생활권이 되는 등 대중교통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통 151일째인 지난 9월 20일 이용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대구시민 1인당 평균 4회를 이용한 셈이다. 개통 초기 하루 평균 8만명에서 7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영향으로 6만명으로 줄었다가 최근에는 7만명 이상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3호선 환승객은 하루 평균 4700여명이며 개통 초기보다 17%가량 늘었다. 개통 초기 일부 부품 고장에 따른 지연 운행으로 안전 우려가 제기되고 승객들이 불편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발 빠른 시설 개선 및 보완으로 지난 7월 8일 이후 단 한 건의 운행 장애도 발생하지 않았다. 도시철도 3호선은 경제효과도 다양하게 내고 있다. 구도심 낙후 지역인 칠곡, 범물은 3호선 개통 이후 개발에 속도가 붙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3호선 역과 가까운 서문시장과 대구백화점은 대구 전 지역의 신규 고객이 꾸준히 늘면서 매출이 10~20%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월 27일 광주시의원과 광주도시철도건설본부 직원들이 대구를 방문하는 등 타 지자체들의 도시철도 3호선 모노레일에 대한 벤치마킹도 잇따르고 있다. 대구도시철도공사 측은 “모노레일이 지상 14m 높이에서 운행해 환승 불편을 우려한 시민들이 이용을 기피할 것이란 전망이 있었다”며 “그러나 승객이 꾸준히 늘면서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3호선 개통이 긍정적인 효과만 주는 것은 아니다. 연간 150억원 적자라는 골칫덩어리가 상존하고 있다. 승객 수가 2011년 한국교통연구원이 예상한 하루 15만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다. 도시철도 1·2호선의 경우도 인구 감소, 노령인구 증가 등의 영향으로 적자가 가중돼 대구도시철도 전체 적자는 연간 1000억원대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대구도시철도공사는 적자를 줄이기 위해 고강도 자구책을 마련했다. 먼저 인력 운용을 효율화하기로 했다. 도시철도 1호선 서편 연장과 2017년까지 설치 완료되는 승강장 스크린도어 유지·관리에 193명의 인력이 추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대구도시철도공사는 더이상 충원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 인력에서 109명을 감축하기로 했다. 노조도 이 같은 계획에 동의했다. 신규 채용도 84명으로 최소화하기로 했다. 부족한 일손은 10년 이상 숙련된 인력을 재배치함으로써 해소한다는 계획이다. 두 번째 자구책은 부대수익 창출 및 경상경비 절감이다. 이는 신규 수요 창출을 통해 수익을 증대하고 부대사업 수익을 다각화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최근 마무리된 1역 1특성화 사업을 통해 시민은 물론이고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도시철도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또 내년에 신설되는 야구장(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동대구복합환승센터 역세권 개발과 연계한 광고 유치 및 임대 사업 확충을 통해 60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기로 했다. 열차 대여 사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1개 편성(3량)을 ‘통째로’ 빌려주거나 어린이 승객을 위해 만화 주인공으로 꾸민 차량을 운행한다. 남녀 미팅과 문화탐방, 프러포즈 등의 이벤트 열차 운영도 추진한다. 여기에 업무추진비, 사무관리비 등 경상경비를 10~20% 절감하고 연차휴가 사용 확대 추진, 불요불급한 행사 지양, 역사 조명설비 고효율 발광다이오드(LED) 교체 등으로 연간 6억원 정도를 절감하기로 했다. 무임승차분의 손실을 해소해 적자를 축소하는 방안을 또 하나의 자구책으로 강구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의 무료 이용이 적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구도시철도의 경우 무료 이용승객이 일일 8만 5000명, 연간 3100만명으로 이로 인한 손실액은 한 해 342억원에 이른다. 연간 수송수입 913억원의 37%에 해당하는 수치다. 따라서 대구도시철도공사는 무임승차 손실분 지원 법제화를 정부에 건의하고 국회 등에도 지원 방안 검토를 요청하기로 했다. 지원이 이뤄질 경우 연간 340억원 정도의 적자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요금 인상도 검토하고 있다. 대구도시철도는 2011년 이후 운임을 동결했다. 이로 인해 1인당 운송원가가 2153원이지만 수송 인원 대비 1인당 운임수입은 31.7%인 682원에 그치고 있다. 수도권은 지난 6월 1250원(거리비례제 적용), 부산은 2013년 1200원(이동구간제 적용), 대전은 7월 1250원(이동구간제 적용) 등으로 운임을 인상했다고 대구도시철도공사 측은 설명했다. 대구도시철도공사 측은 “운임을 100원 올리면 운수수입이 100억원 늘어 전체 운영 적자의 10%를 보전할 수 있다”며 대구시·시의회와 협의를 거쳐 운임 인상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했다. 또 균일제인 현재 운임제도를 이동구간제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대구도시철도공사는 전국 도시철도 운영기관 최초로 지난 9월 21일 임금단체협상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복수노조인데도 불구하고 임금피크제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세대 간 상생고용과 청년 일자리 창출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구도시철도공사는 또 역무 분야 근무 형태 개선과 인력 채용 문제 등 굵직한 현안들도 노사가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내 공기업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대구도시철도공사 홍승활 사장은 “승객이 안심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고강도 자구책으로 적자 축소에도 나서고 있다. 요금 인상은 타 시·도와의 형평성과 공공요금의 현실화를 위해 검토하는 만큼 시민들의 이해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지난 4월 23일 개통한 대구도시철도 3호선은 전국 최초로 지상 평균 11m 높이에 건설한 모노레일이다. 대구 북구 동호동∼대구 수성구 범물동 구간 23.95㎞를 49분에 주파한다. 2006년에 착공해 9년여 동안 1조 4913억원이 투입됐다. 정거장 30곳과 차량기지 2곳이 있으며 교각은 692개가 세워져 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예상보다 부실 심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안돼”

    “예상보다 부실 심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안돼”

    정부가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원 지원’ 방안을 전격 보류한 배경에는 ‘좀비기업’(한계기업) 논란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의 새 그림을 짜고 있는 과정에서 대우조선 ‘퍼주기’가 안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우조선의 대규모 부실 원인을 둘러싼 책임 공방 등 진통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대우조선은 연내 자본잠식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채권단 지원을 놓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가 대우조선 지원 방향을 선회한 가장 큰 이유도 대우조선의 부실이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초 정부와 채권단은 유상증자 1조원, 신규대출 3조원, 선수금환급보증(RG) 한도 50억 달러 확대 등을 핵심으로 하는 대우조선 경영 정상화 방안을 논의해 확정짓고 23일 산업은행 이사회를 거쳐 공식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금융대책회의’(서별관회의)에서 이런 기류가 확 바뀌었다. 채권단은 대우조선이 올해 2분기에만 3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재무제표에 반영하며 부실을 드러내자 자본 확충을 포함한 지원 방안을 금융 당국과 논의해 왔다. 또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지난 7월부터 대우조선 실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1조원대 추가 부실이 드러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이를 두고 ‘분식회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금융권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채권단이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도 대우조선 정상화가 불투명한 상황”이라며 “추후 부실지원 논란을 최대한 피해 가기 위해 대우조선 측에 고강도 구조조정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정부의 ‘방향 선회’를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노조의 협조 없이는 (자금을 지원해도) 정상화가 버거운데 당초 계획보다 더 고강도의 인력 구조조정 등 기업 체질개선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우조선은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지난 8월 이후 임원 수를 55명에서 42명으로 줄인 데 이어 최근에는 근속 20년 이상인 부장급 이상 고직급자 300~400명을 감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상황에서 고강도 자구안을 먼저 내놓으라는 요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대우조선은 이달 희망퇴직 신청 접수에 들어간 데 이어 자산도 내다 팔고 있다. 골프장(써니포인트컨트리클럽) 매각 작업은 마무리 단계이고 화인베스틸, 대우정보시스템 등의 보유 주식 정리를 추진 중이다. 서울 당산동 사옥은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며, 청계천 본사 건물은 매각하되 재임대해 쓸 예정이다. 노조 반발 등 진통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노조에 고통 분담을 요구하기에 앞서 대우조선 부실 방치 원인부터 먼저 규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 교수는 “대우조선에 저 정도 부실이 발생하게 된 데에는 감독 당국과 산업은행, 채권단 책임이 분명히 있다”며 “부실 원인과 책임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임직원에게만 고통 분담을 요구한다면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사설] 공무원 성과금 나눠 먹을 거라면 없애라

    공무원 성과금 나눠 먹기가 해도 너무한 수준이다. 전국 광역·기초자치단체 10곳 중 6곳이 공무원 성과 상여금을 업무평가 성적과 상관없이 똑같은 액수로 나눠 먹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 중앙일간지가 전국 243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조사해 어제 밝힌 결과다. 이 문제가 공직사회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폐단으로 지목된 건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제멋대로였다니 기가 막힌다.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일을 더 잘해 달라고 피 같은 세금으로 쥐여 주는 ‘보너스’다. 그 알토란 같은 돈을 국민 모르게 엉뚱하게 쓰고 있는 것과 다를 게 뭔가. 성과급 제도는 공무원들의 업무 경쟁력 강화를 취지로 중앙부처는 1998년, 지자체는 2003년부터 각각 시행됐다. 2001년에는 교원에게도 적용됐다. 도입 취지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교원 차등 성과급은 공무원노조가 앞장서 개인 성과급을 거둬 균등배분하는 바람에 15년째 파행이다. 지자체들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현행 평가등급은 4개인데, 균등배분액을 정한 뒤 상위 2개 등급자들이 더 받는 성과금을 회수해 골고루 나눠 갖는 짬짜미가 뿌리내린 모양이다. 한 푼도 못 받아야 하는 최하위 등급이 최고 등급과 똑같은 돈을 받는 것이다. 업무의 질적 하향평준화가 뒤따르더라도 경쟁 없이 좋은 게 좋도록 살자는 셈법이라고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최근엔 아예 지자체 실·국이 분배 작업을 도맡아 처리한다고 한다. 감사에 대비해 절차상 문제가 없도록 서류 작업을 한다니 할 말이 없어진다. 감독 부처인 행정자치부가 이런 실태를 파악조차 못 했다면 답답한 노릇이다. 정말 몰랐어도 문제이며, 뾰족한 수가 없어 모른 척했어도 큰 문제다. 공무원 가족이 주변에 한둘만 있어도 성과급 나눠 먹기 짬짜미는 들리는 얘기다. 행자부 감찰실은 뭐하라고 있는 곳인가. 이런데 인사혁신처는 성과금을 더 주기로 했다. 내년부터 등급을 하나 더 늘려 최상위 1~2%에게는 기존 최고등급보다 50%나 듬뿍 보너스를 얹어 주는 제도다. 최고 두뇌들이 너도나도 공무원만 되겠다고 몰려 사회문제인 판국이다. 공무원이 인센티브가 낮아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국민이 많다고 보는가. 일벌백계의 강력 제재가 시급하다. 나눠 먹기를 적발해 성과금을 회수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성과금을 줄이거나 없애는 논의를 해야 한다.
  • [정병석 경제산책] 노동개혁과 성과보상

    [정병석 경제산책] 노동개혁과 성과보상

    임금과 고용에서 성과에 따른 개인 간의 차이를 인정하느냐의 여부가 노동개혁 논의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성과가 계속 나쁜 근로자는 퇴출할 해고 기준을 마련하자는 문제다. 그러나 개인별 성과급 격차를 거부하는 노조에서는 기왕에 개인별로 지급된 성과급도 회수해 조합원들 간에 똑같이 나누는 것이 더 형평의 원리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평준화 의식이 만연해 다 같이 못살면 불만이 적지만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사는 것은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조선의 건국자들이 정부 시스템을 설계할 때 토대로 했던 ‘주례’라는 경전은 성과에 따른 보상,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주례는 주나라의 관직과 직무, 직급, 예법 등을 규정한 책인데 오랫동안 중국과 조선의 정부 조직과 운영의 바탕이 된 중요한 책이다. 국무총리 격인 ‘총재’는 한 해를 마치면 모든 관서에 지시해 수행한 사업에 대한 성과 결산서를 보고받고 그 서류들을 면밀히 검토해 잘한 자는 계속 그 직책을 맡게 하고 부족한 자는 내보내라고 규정하고 있다. 3년마다 모든 관리의 치적을 총결산해 견책할 것은 견책하고 포상할 것은 포상한다. 정부회계 결산에서는 비용 출납을 결산해 재물을 낭비하고 물품 사용에 대해 거짓 서류를 만든 자는 견책하거나 처벌한다. 반면에 재물을 풍족하게 늘린 자와 물품을 절약한 자는 포상한다. 신상필벌 원칙과 함께 관리의 보수도 성과에 따라 가감하고 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의 국립의료원 같은 관서에 근무하는 의사에 대한 성과 기준도 매우 세밀해 의사가 치료한 환자 10사람 중 10사람이 치료됐으면 최고의 보수, 10사람 중 1회 실수가 있으면 두 번째 등급의 보수, 10사람 중 4번 실수가 있으면 가장 낮은 보수를 지급하라는 식이다. 조선에서는 초기에 이런 원리가 통용되다가 당쟁이 심화되면서 이와 같은 합리적 보상과 신상필벌 원칙은 무너지고 정파와 정실이 성과를 압도하는 문화가 지배하게 된 것 같다. 그 결과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두고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공정한 인센티브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부의 증가는 존경이나 축하의 대상이 아니고 시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폐쇄적이고 인센티브가 없는 사회, 자신의 노력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는 정해진 파이의 분배에 집착하기 때문에 공평한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이를 둘러싸고 상호 반목하고 갈등을 빚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유머에 농부 이반이 이웃 농부 보리스를 시기하는데 그것은 보리스가 이반에게 없는 염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요정이 나타나 이반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이반은 요정에게 보리스의 염소를 죽게 해 달라고 한다. 하향 평준화된 사회주의 체제를 오래 겪으며 형성된 가난한 평등사회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라고 하겠다. 최근 친노조 성향의 프랑스 좌파 집권 여당인 사회당이 고용 유연성을 확대하는 노동법 전면 개정에 나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프랑스 총리는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기업주와 근로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어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기업에 더 많은 고용의 유연성을 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총리 발언의 핵심은 노동법을 간소화해 기업주와 근로자의 자율결정권을 확대하고, 근로계약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프랑스 노동법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높은 청년실업률과 늘어나는 비정규직 문제가 정규직을 위주로 한 경직된 노동법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사회를 더 역동적으로 활성화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개개인이 더 열심히 일하게 하고 잘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법 제도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평준화 선호와 남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를 바꾸도록 노사정 협의에서 이런 원칙이 합의되기를 기대한다.
  • 블레어 “英 노동당 최대 위기… 골수 좌파 버려라”

    블레어 “英 노동당 최대 위기… 골수 좌파 버려라”

    “절벽을 향해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걸어가지 말라. 당신이 좌파든 우파든 중도든, 그리고 나를 지지하든 미워하든 상관없이 노동당이 처한 위기를 알아 달라.” 토니 블레어(왼쪽·62) 전 영국 총리가 노동당이 1906년 창당 이래 100여년 만에 최대 위험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노동당 당수를 지낸 블레어 전 총리는 1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극좌 노선의) 제러미 코빈(오른쪽) 의원이 당 대표에 당선되면 노동당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이같이 우려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1997년 총선에서 ‘제3의 길’을 내걸고 집권해 13년간 정권을 이어 간 노동당의 간판 정치인이다. 당시 국유화, 소득 재분배 같은 좌파 공약을 과감히 버리고 시장과 경쟁을 중시하는 우파 가치관을 수용했다. 그는 코빈 의원을 겨냥해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란 생각은 터무니없다”면서 “당을 자멸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1983년과 올해 총선에서의 노동당 참패를 거론하며 “2020년 우리가 겪을 패배는 이보다 더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코빈이 당수가 되면 노동당이 그리스의 시리자와 같은 반(反)긴축정당이 될 것”이라는 정치권 안팎의 우려를 전했다. 블레어 전 총리의 이번 발언은 다음달 12일로 예정된 노동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당 내부의 극심한 갈등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5월 총선에서 참패한 노동당은 이날 61만명의 유권자 등록을 마무리했다. ‘골수 좌파’인 코빈 의원은 지난 11일 공표된 여론조사에서 53%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경쟁자인 앤디 버넘 후보를 배 이상 앞질러 이변이 없는 한 당선이 확실하다. 그는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공공 부문 노조 활동가로 일했다. 1983년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입문한 뒤 33년째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철의 여인’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일궈낸 철도·에너지기업 민영화를 되돌려 다시 국유화하자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큰 폭으로 삭감하려는 복지예산도 복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좌파 원리주의자로 아들을 귀족학교에 보내려던 두 번째 아내와 크게 다툰 뒤 이혼해 세 번째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는 중이다. 정치권에선 블레어 전 총리의 발언을 총선 패배 뒤 불거진 당내 노선 갈등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노동당에선 좀 더 우파적인 정책을 요구하거나 제대로 된 진보 공약을 펼쳐야 한다는 상반된 의견들이 충돌하고 있다. 블레어 노선을 추종하는 당원들은 “코빈 지지는 급진 좌파에 대한 반동적 현상일 뿐”이라며 “보수당은 쉬운 상대인 코빈의 당선을 바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코빈 의원은 “노동당이 선거에 패한 것은 너무 좌측에 있어서가 아니라 긴축에 찬성했기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블레어 내각에서 환경장관을 지낸 마이클 미처도 “블레어주의가 1990년대 당을 능멸했다”며 코빈 지지를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노동당에선 61만 유권자 가운데 16만 5000명이 막판 24시간 동안 등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적발된 1200여명의 ‘가짜 노동당 지지자’들은 코빈을 당선시키기 위한 외부 ‘침입자’들로 추정돼 당수 선출 연기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정치만 있고 드라마는 없다

    정치만 있고 드라마는 없다

    한국판 ‘웨스트윙’(1999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된 미국 NBC 정치드라마)은 탄생하기 힘든 것일까. 한 해 방송되는 드라마가 100편에 달하는 ‘드라마 왕국’ 우리나라에서 유독 동시대의 정치를 다룬 드라마는 시도조차 드문 데다 성적도 좋지 않다. 본격적인 정치드라마는 ‘프레지던트’(SBS·2010) 이후 지난달 방영을 시작한 ‘어셈블리’(KBS)가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다. ‘어셈블리’는 ‘정도전’(KBS·2014)으로 필력을 인정받은 정현민 작가의 날카로운 대본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받고 있지만 시청률은 5%대로 고전 중이다. 한국 드라마가 현실정치를 조명하기 시작한 지는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해고된 말단 공무원이 시장의 자리에 오른다는 ‘시티 홀’(SBS·2009), 대통령의 탄생 과정을 그린 ‘대물’(SBS·2010)과 ‘프레지던트’(KBS·2010), 정치적 신념이 다른 남녀 국회의원의 사랑을 그린 ‘내 연애의 모든 것’(SBS·2013)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나마 로맨틱 코미디인 ‘시티 홀’과 판타지적인 정치인의 이미지에 기댄 ‘대물’ 정도가 높은 시청률을 올렸다. 정치는 권력의지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냉철하게 파고든 ‘프레지던트’는 수작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에서 쓴맛을 봤다. “정치에 집중하기보다 멜로나 스릴러 등 다른 장르와 결합한 드라마들이 성공한 편”(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드라마의 잇단 부진은 흔히 주된 드라마 시청자층의 뿌리 깊은 정치 혐오와 무관심 탓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정치드라마가 대중성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김헌식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는 “권력을 향한 수(數) 싸움이 그려지는 정치드라마는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다”면서 “선악 구분이 뚜렷한 법정·재벌 드라마보다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이 덜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새 시대의 정치를 그린 ‘정도전’(KBS), 거대 권력에 맞선 정의구현을 그린 ‘펀치’(SBS) 등의 인기에서 보듯 시청자들은 오히려 정치에 관심이 많다”면서 “다만 정치를 직접적이 아닌 은유적, 비유적으로 보여 줄 때 반응이 더 뜨거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어셈블리’는 기존 정치드라마에 비해 높은 리얼리티가 강점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 10년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던 정현민 작가의 경력과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주인공 진상필(정재영)은 해직 노동자 출신의 초선 국회의원이며 전략공천과 계파 갈등, 추경예산안 심사 등 국회의 정치 과정이 ‘TV로 보는 정치학개론’처럼 펼쳐진다. 백도 흑도 아닌 ‘회색’의 인물들이 벌이는 결탁과 배신, 약자의 편에 서려는 힘없는 초선의원의 고군분투가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지며 법정극, 수사극 등 장르물에 익숙한 20~30대 마니아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성이 높다. 그러나 이 같은 리얼리티가 ‘양날의 검’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윤 교수는 “여의도 정치는 매일 뉴스에서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탓에 이를 드라마로 보여 줘도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국회의 정치역학과 어려운 정치 용어들이 일부 시청자들에게는 ‘진입장벽’으로 기능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높은 리얼리티와 완성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대중에 호소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까지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아직까지는 주인공 진상필이 국회에 입성한 목적과 이루려는 이상이 명확하지 않아 정서적 몰입이 어렵다”면서 “뚜렷한 신념과 목표를 가진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고 뜻을 이루는 스토리텔링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셈블리’의 책임프로듀서인 강병택 CP는 “10회를 기점으로 진상필과 의원실에 힘이 실릴 것”이라면서 “진상필이 여야 대립구도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자신만의 정치를 펴나가는 과정이 본격적으로 그려진다”고 말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사설]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감으로 개혁에 동참해야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기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집권 후반기 국정 개혁 청사진을 내놓았다.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담화를 통해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4대 구조개혁 의지를 밝히고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핵심 키워드는 단연 경제(37회)와 개혁(33회)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문제는 개혁 추진 동력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겠지만, 실제 개혁 과정에서는 집단이기주의와 정파 간 이해 상충이라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국 경제가 다시 일어서려면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상황 판단은 맞다고 본다. 특히 “향후 3∼4년이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라면서 노동 개혁을 필두로 한 개혁의 골든타임을 제시한 데 대해서도 누가 토를 달겠는가. 5분기 연속 0%대 성장률을 기록할 만큼 우리 경제가 침체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바야흐로 경제·문명사의 대전환기다. 세계는 정보통신기술(ICT) 혁신과 사무자동화로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접어들 참이다. 그런가 하면 성장 둔화가 ‘뉴노멀’이 되다시피 세계적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이 마당에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경기부양은 미봉책일 뿐이다. 십수년째 선진국 문턱에서 맴돌고 있는 한국 경제가 아예 주저앉지 않으려면 각 부문의 구조적 개혁은 선택 사양이 아닌 필수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일단 노동 개혁을 경제 체질 개선의 첫 과제로 삼은 것 같다. 온당한 선택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독일 사민당 정권이 선제적 노동 개혁에 성공해 그 과실을 이제 앙겔라 메르켈 총리 정부가 향유하고 있지 않나. 경제 침체를 겪다 뒤늦게 노동시장 개혁에 들어간 핀란드 등 다른 유럽국들은 안성맞춤의 반면교사다. 다만 가야 할 방향 못잖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로드맵이 중요하다. 박 대통령은 “개혁의 동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지만, 현실에서의 국민은 각자 이해에 따라 파편화돼 있다. 청년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노동 개혁의 당위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규직 노조나 기성세대의 고통 분담을 견인하기란 지난한 과제다. 노사정위에서 대타협을 촉구하기 전에 청와대의 적극적 이니셔티브와 소통 노력이 긴요하다. 일방적 담화보다 청와대 수석들과 국무위원이 배석한 국민대토론회가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측은 “4대 개혁은 일방통행식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다”고 했다. 원론적으론 적실한 지적이다. 물론 ‘타협의 정치’로 개혁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주문은 야당 스스로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한국노총의 이탈로 노사정위조차 언제 재가동될지 모르는 터에 새로운 사회적 타협 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있으니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야권도 대안을 내놓고 정부를 비판할 때다. 고령화 사회에서 청년 고용 확대와 정년 연장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임금피크제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다면 그것부터 내놓기 바란다.
  • [정병석의 경제산책] 신상필벌과 법치국가

    [정병석의 경제산책] 신상필벌과 법치국가

    신상필벌은 공로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자는 원칙이다. 공과에 따른 상벌을 시행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 법치국가에서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자는 주장을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기본적 질문에도 확신을 갖고 대답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엄정한 법 집행이나 신상필벌을 경시하는 오랜 역사가 있다. 조선 성종 때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조정에서 금주령을 내렸는데 어떤 재상이 이를 어기고 술을 마셨다. 임사홍이 경연에서 재상도 법을 어겼으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승지들이 “‘재상도 금령을 범한 자는 반드시 벌하여 용서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상앙(商?)의 정치와 같은 것이니, 어찌 유학자가 할 말입니까”라고 하면서 임사홍을 처벌하라고 반발했다. 훌륭한 정치가였던 성종 임금이 임사홍을 적극 보호함으로써 이 일은 무마됐다고 한다. 백성이 법을 어기면 엄벌에 처해야 되지만 재상이 어긴 것을 처벌하자고 하면 그 주장하는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논리인가.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조선 사대부 관료들의 법치 인식은 편협하게 치우쳐 있었다. 신상필벌의 법 제도를 엄정하게 시행해 변방 국가에서 급속하게 강대국이 되고 천하통일을 이루어 낸 대표적인 사례가 진나라다. 500년 넘게 지속돼 왔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며 통일을 이룩한 진나라는 법치행정과 신상필벌의 성공 사례다. 춘추전국시대는 공자, 맹자, 순자, 장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활동하던 시대로 그야말로 다양한 경세이론과 특출한 사상가들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상앙과 한비자가 대표하는 법가는 다른 사상가들, 특히 유학자들과는 달리 강력한 국가는 군주의 도덕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상필벌의 법 제도와 엄격한 시행으로 만들어진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성공 사례를 만들었으나 조선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이론이나 사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단으로 매도했다. 신상필벌과 법치행정을 토대로 한 부국강병론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인데, 조선에서는 유학의 원리에 어긋난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부국강병‘을 검색하면 38건이 나온다. 주로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개혁이나 상앙의 법가와 연계해 왕도정치의 이념과는 맞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기술돼 있다. 태조에서 성종 때까지 10회가 언급되고 중종 때 10회, 그리고 선조 이후에는 18회가 나온다. 대표적인 사림파 개혁론자인 조광조는 부국강병을 인의에서 벗어난 패술이라고 매도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법과 원칙이 잘 지켜진다고 보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는 법을 어기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묵인해 주자는 동정론이 생기는 한편 관행화된 정치적 특별사면으로 재벌, 정치인 등 힘센 집단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적당히 법을 회피한다. 그러니 법의 권위가 없고 법치행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법의 권위를 세우고 신상필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능력과 실적에 의거하지 않고 지역이나 집단 간 적당히 안배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려는 의욕을 저해하고 잘하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후진적인 문화다.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잘못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명확한 인센티브 제도인데 법치도 제대로 못하고, 신상필벌도 확립되지 않고 어찌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성과급이란 업무성과를 측정해 성과를 많이 낸 근로자에게는 많은 임금이나 상여금을 주고, 성과가 적은 근로자에게는 적게 주자는 것이다. 성과에 따라 임금을 주자는데 왜 우리나라 노조는 반대할까.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한 대책을 모색하기 이전에 기본으로 돌아가 반드시 해야 할 원칙부터 제대로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 [현장 행정] “최저임금으론 혼자 살기도 어려워…민간기업까지 ‘생활임금’ 적용 필요”

    [현장 행정] “최저임금으론 혼자 살기도 어려워…민간기업까지 ‘생활임금’ 적용 필요”

    “생활임금이 민간 부문으로 확산돼 임금 현실화를 이루는 게 최선의 목표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 ‘생활임금제 추진단’ 단장을 맡게 된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14일 집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 최저임금이 116만 6220원으로 1인 가구의 월 가계지출액인 166만 4787원에도 못 미친다”면서 “생활임금이 공공 부문을 넘어 민간 부문으로 확산돼야 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구는 92만원선이던 민간용역업체 근로자의 임금을 2012년 직접고용으로 바꾸면서 129만원대로 높였고, 2013년부터는 생활임금을 적용해 올해 149만 5148원이 됐다. 이는 최저임금보다 28.2%(32만 8928원) 높다. 김 구청장은 “근로자의 임금이 올라가자 질 높은 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생활임금을 적용한 구 도시관리공단은 지방공기업 고객서비스 만족도 평가에서 300개 이상의 공기업 중 지난해는 1위, 올해는 3위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 최초로 업무협약을 통해 민간대학이 생활임금을 적용한 것에도 큰 의미를 뒀다. 지난 1일 한성대와 성신여대가 청소, 경비 등의 용역을 제공하는 근로자에게 생활임금을 적용키로 한 바 있다. 김 구청장은 “올해 말까지 구 내 8개 대학으로 확산시키고 백화점과 같은 대형유통매장, 50인 이상 기업 순으로 생활임금의 단계적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 생활임금제 추진단장으로서 계획을 묻자 김 구청장은 “올해 말까지 당 소속 지자체장이 있는 9개 광역단체, 81개 기초단체에 생활임금을 확산시키는 게 목표”라면서 “올해 11월 정기국회부터 총선까지는 생활임금을 국가 어젠다로 끌어올리고, 이후 민간으로 확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이를 위해 생활임금 추진단과 지자체 부단체장 간에 협의체가 필요하며 민간과의 협업을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조, 노총, 기업 등이 참여하는 조직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김 구청장은 “생활임금제가 내년 총선의 공통공약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 “생활임금을 적용하는 사업장에 보조금 등 정책지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생활임금 적용의 근거를 마련할 법안 등의 조속한 처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중앙정부 및 여당과도 협의가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생활임금으로 소득이 늘면 소비도 늘기 때문에 현재 정부가 추가경정예산 등으로 추진하는 소비촉진책과 방향이 같다”면서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한화 최진행 도핑 양성 반응… 30경기 출장 정지 중징계

    한화 최진행 도핑 양성 반응… 30경기 출장 정지 중징계

    최진행(30·한화)이 도핑 테스트 양성 반응으로 30경기 출장 정지의 중징계를 받았다. KBO는 25일 반도핑위원회를 열고 반도핑 규정을 위반한 최진행에게 30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한화 구단에도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제재금 2000만원을 물렸다. 한화 구단도 자체 징계위원회를 열어 최진행에게 벌금 2000만원을 부과하고 벌금은 유소년 야구 발전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최진행의 양성 반응은 KBO가 2007년 도핑 테스트를 도입한 이후 여섯 번째다. KBO는 지난달 초 구단별로 5명씩 50명을 대상으로 도핑 테스트를 실시, 최진행의 소변 샘플에서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지정한 금지 약물인 스테로이드(근육강화제) 계열의 ‘스타노조롤’ 성분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 약물은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박탈당한 육상 스타 벤 존슨이 복용했던 약물로 알려졌다. 최진행은 “체력이 떨어져 4월 지인이 권유한 영양 보충제를 복용했는데 금지 약물 성분이 있었던 것은 몰랐다”면서 “팬들에게 죄송하고 관련 징계를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최진행은 올 시즌 69경기에 나서 타율 .301에 13홈런 42타점을 기록하며 타선의 중심 몫을 해온 터라 한화에 적지 않은 타격이 될 전망이다. 한편 이날 SK는 잠실에서 열린 KBO리그에서 밴와트의 역투와 김강민(3점), 이재원(2점)의 홈런 두 방을 앞세워 두산의 막판 추격을 뿌리치고 8-7로 승리, KIA와 공동 6위에 올랐다. 앞서 두산은 “투수 임태훈이 야구를 쉬겠다는 의사를 밝혀왔고 구단은 본인의 뜻을 존중해 KBO에 임의탈퇴 공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불펜의 핵으로 뛰던 임태훈은 최근 몇 년간 허리 부상과 개인 문제로 부진에 허덕여왔다. LG는 수원에서 우규민의 호투와 장단 16안타로 kt를 10-4로 꺾고 2연승했다. 우규민은 5이닝 동안 자신의 한 경기 최다인 삼진 10개를 솎아내며 6안타 1실점으로 4승째를 챙겼다. NC-KIA(마산), 롯데-삼성(사직), 한화-넥센(대전) 등 세 경기는 비 때문에 취소됐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국경 넘은 100만명 ‘노동의 자유’ 얻는다

    국경 넘은 100만명 ‘노동의 자유’ 얻는다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권 신장을 위한 소송 제기 10년 만에 대법원이 이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외국인 노동자도 노동 3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대법원은 불법 체류 외국인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근로자’로 인정했지만 사실상 이번 확정 판결은 정부 허가를 받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기준 국내 15세 이상 외국인은 125만 6000명이며, 이 가운데 취업자는 85만 2000명이다. 여기에 불법 체류자 20만 8000여명(2014년 12월 기준)을 더하면 외국인 노동자는 100만명을 넘는다. 하지만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변할 노조 설립이 허용되지 않아 상당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차별과 임금체불 등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법적 권리는 요구하지 못했다. 특히 불법 체류 노동자에 대해서는 이들의 신분을 악용한 사업주들의 횡포가 구타·감금 등 범죄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동안 이주노동자 노조의 소송을 대리한 권영국 변호사는 대법원 선고 직후 승소 소감을 밝히며 “산업재해와 차별로 고통받던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당장 고용노동부는 이주 노동자 노조 설립을 허용할 방침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주 노동자 노조가 낸 노조 설립신고서를 재검토해 신고증 교부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노조 설립이 허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주 노동자 노조가 정식 설립되면 우선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비전문 취업자 24만 7000여명의 노동 환경이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 이들은 정부 허가에 따라 기본적으로 3년간 국내 노동을 보장받고, 이후 추가로 최장 4년 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지만 사업장 이전에 제약이 따른다. 고용허가제 규정에 따르면 노동자가 사업장 이전을 원할 경우 사업주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 규정 때문에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해당 사업장에서 계속 일하는 노동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네팔 출신인 우다야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사업주 승인이 없는 한 사업장을 바꾸기 힘들다 보니 휴식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시키고 모멸감을 주거나 임금체불 등을 하는 사업주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주노조 합법화의 길이 열린 만큼 외국인 노동자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고 정당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주노조는 더욱 활발한 조직화의 길이 열리고 처우 개선의 가능성이 커졌다”며 “특히 불법 체류자도 노조를 결성할 권리가 있다는 판결은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뉴스 분석] “부실기업 세금붓기 중단” vs “기간산업 기업회생이 우선”

    [뉴스 분석] “부실기업 세금붓기 중단” vs “기간산업 기업회생이 우선”

    성동조선 지원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시작됐다. 무역보험공사(무보)가 결국 성동조선 채권단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무보가 2013년 12월 반대매수청구권 행사를 통지하며 채권단과 이견을 노출한 지 1년 반 만이다. 앞서 국민은행이 2011년 12월 채권단에서 빠졌지만 당시보다 파문이 훨씬 크다. 무보가 채권단 2대 주주(20.39%)이고 국책 금융기관이기 때문이다. 경남기업 사태로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 범위와 역할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간산업만큼은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성동조선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31일 “국책 금융기관인 무보가 경제에 미칠 파문은 고려하지 않고 손익 계산에 따라 발을 뺐다”고 책망했다. 이에 대해 무보 측은 “세금으로 자금이 운영되는 만큼 더이상 ‘밑 빠진 독’(성동조선)에 물 붓기를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다만 무보는 “보증기관인 공사가 은행과 동일하게 손실분담을 하는데 한계가 있어 채권단과 충분한 협의 끝에 (채권단) 이탈을 결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단 주 채권은행인 수출입은행(수은)은 단독으로 3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당장 만기가 돌아온 어음상환 및 7월까지 필요한 운영자금 용도이다. 무보가 채권단에서 빠지면서 손익정상금 5000억원을 내놓을 예정이라 당장은 수은이 채권단에 자금 지원 요청을 할 처지는 면했다. 하지만 여전히 채권단 내부에선 성동조선의 회생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 성동조선의 지난해 영업손실은 3395억원이다.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었던 2010년(1122억원 손실)보다 손실 규모가 3배로 불었다. 조선업 침체로 저가 수주가 이어져 ‘영업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처지인 SPP조선은 지난해 4분기부터 신규 수주를 중단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성동조선이) 신규 수주를 당장 중단하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자구책을 마련해도 모자랄 판에 노조가 ‘임금인상 및 고용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으니 기가 차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수은이 주도하는 정상화작업에 대한 불신도 깊다. 수은은 2011년 성동조선에 7300억원 유동성 지원과 대주주 지분 100대1 감자를 골자로 하는 정상화 방안을 마련하기에 앞서 삼정KPMG에 실사를 맡겼다. 당시 삼정은 “일부 시나리오의 경우 회사 존속가치가 의문시된다(청산가치가 더 크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수은이 부랴부랴 딜로이트안진에 재실사를 맡겼다. 안진은 ‘존속가치가 더 크다’고 보고하면서 2015년까지 채권단이 더 투입해야 할 자금을 9000억원가량으로 봤다. 똑같은 기업에 대해 두 회계법인이 정반대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에 국민은행이 반대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며 손을 뗐다. 2013년 12월 1조 6288억원의 출자전환을 앞두고 실시한 안진의 실사 결과에 대해 무보가 “기업가치를 제대로 산정하지 못했다”며 반대매수청구권 행사를 통보했다. 이에 수은은 이듬해 1월 삼일회계법인에 재실사를 맡겼다. 당시 채권단 사이에선 “수은이 자구계획도 위험노출액 관리계획도 없는 실사보고서를 토대로 무리하게 출자전환을 강행한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수은이 부실채권비율을 관리하기 위해 성동조선 지원을 강요한다는 얘기였다. 무보에 이어 성동조선 정상화 작업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채권단도 적지 않다. 채권단 관계자는 “정치권 눈치를 살피느라 채권단이 각자 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지만 부실기업을 언제까지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감이 강하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무보의 채권단 이탈’을 부처간 ‘엇박자’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무보와 수은이 각각 산업자원통상부와 기획재정부 산하 기관이라 한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 교수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치권의 로비 창구 역할을 하는 모피아(금융 당국)의 개입을 막기 위해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은 폐지해야 한다”고 전제하며 “파산법(통합도산법)에 예외 조항을 두고 기간산업과 연관된 기업은 산업은행과 법원이 구조조정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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