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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정치를 말한다] (3)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내 정치를 말한다] (3)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나의 정치 역정은 ‘내면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됐다. 긴급조치 시대에 학생운동을 시작한 나는 ‘독재 타도’를 꿈꿨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감옥에서 맞이했다. 광주의 처참한 희생 위에 등장한 전두환 정권이었기에 ‘절대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해냈다. 투사의 힘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세상의 곡절을 안고 살아가던 시민의 힘으로 6·29 선언을 이끌어낸 것이다. ‘넥타이 부대’ 이야기나 시위대에 김밥을 건넨 노점상 이야기 등 창살 밖 세상의 변화는 나에게 낯설었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6월 민주항쟁은 나라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경직된 나의 내면을 민주화시키는 계기가 된 셈이다. 재야의 한 흐름이었던 민중당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이후 나는 허기진 마음으로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새롭게 찾자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정치 개혁 시민운동에 몸담기도 했다. 그리고 1997년 대선 직전 내가 속했던 ‘꼬마 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을 통해 탄생한 한나라당의 옷을 입게 됐다. 참 어색한 옷이었다. 그러나 야당이 된 한나라당이 나에겐 정치적 둥지이자 개혁 대상이었다. 한나라당에서 줄곧 쇄신파의 길을 걸어 온 것은 숙명과도 같았다. 내 지역구는 야당의 텃밭이자 진보적인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 관악구갑이다. 보수가 건강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이지 않으면 수구일 뿐이며, 민생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존재의 이유를 부정당한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두 번 낙선 끝에 2008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나는 홈페이지 대문에 ‘바르게 소신껏’이라는 슬로건을 걸어 놓았다. 권력에는 정의를, 시장에는 공정을, 국민에게는 기회의 사다리와 안전망을 줄 수 있는 21세기 정책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등원 이후 경제정책과 입법 중심의 의정 활동에 진력했는데, 해마다 ‘최우수 의원’으로 평가받는 보람을 얻기도 했다. 여당 의원이지만 무리한 감세에 반대했고, 경쟁력과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조화롭게 추진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진정 국민 통합을 생각한다면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부르게 하라고 대정부 질문에서 총리와 보훈처장을 질타하기도 했다. 뜻을 같이하는 초선의원들과 ‘민본21’을 만들어 정의롭고 절제된 권력의 사용과 진정한 친서민 정책을 주장했다. 감히 말해, 내가 정치를 하는 것은 정치의 질을 높여 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치 개혁은 일거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스스로 현실 정치의 모순을 안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거듭 체감하게 된다. 그래도 다짐한다. 늘 성찰하되 주저앉지는 않으리라. 언젠가는 대한민국 정치에 희망의 신주류를 만들어 보리라. 건강한 보수를 추구하며 진보와도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정치 말이다. ■ 김성식 의원은 ▲1958년 부산 출생 ▲부산고·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민주화 시위로 1978년, 1986년 두 차례 투옥 ▲한국노총 전국화학노련 정책기획부장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나라정책연구원 정책기획실장 ▲CBS 시사자키 시사평론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경제·예산 담당) ▲경기도 정무부지사 ▲18대 국회의원 ▲초선모임 ‘민본21’ 대표 간사 ▲한나라당 정책위부의장(경제 담당)
  •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더라…5월, 그리고 31년 그래서, 또 광주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더라…5월, 그리고 31년 그래서, 또 광주다

     31년이 흘렀는데 ‘5월 광주’를 말하고 있다. ‘또(혹은 아직도) 광주냐.’란 반응이 나올 법도 한데 개의치 않는 눈치다. 2년 동안 아내(주로미, 조연출·내레이션·구성작가)와 아들(김상구, 촬영보조)까지 동원해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다큐멘터리 ‘오월愛’(오월애)를 완성했다. 40여명 무명씨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기억하는 1980년 5월과 이후 30년의 사적(私的) 기억을 복원했다.  뿐만 아니다. 광주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돌면서 ‘민중의 세계사’란 주제로 10부작 시리즈를 만들겠단다. 20년 가까이 다큐멘터리 한우물을 파고 있는 김태일(48) 감독 얘기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전국 18개관 개봉(12일)을 앞둔 그를 지난 4일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초등학교 졸업 뒤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나선 ‘10대 스태프’ 상구(14) 군도 함께했다. “우리가 잊고 있던 31년을 살아온 분들이 궁금했다.” →경북 예천 출신인데 언제부터 광주항쟁에 관심을 두게 됐나. -대학(고려대 국문과 84학번)을 다닐 무렵이 아닐까. 엄청나게 피가 뜨거웠던 시절 아닌가.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살아남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화려한 휴가’(2007) 같은 상업영화부터 각종 다큐멘터리까지 광주항쟁을 다룬 영상물은 넘쳐난다. 왜 지금, 광주를 다뤄야 했나. -기존 작품들을 대개 5월 항쟁 열흘의 기록이다. 당시 이름 없이 참가했던 분들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을 통해 30년이 지난 이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아예 광주에 내려가서 살았던데. -2009년 3, 4월 두 차례 답사했다. 광주 대인시장의 방 한 칸을 ‘대인 예술인프로젝트’(시장의 문 닫은 공간에 작가를 상주시켜 예술작업을 지원하고 시장도 활성화하는 사업)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해 작업·생활공간을 얻었다. 실제 광주에 머문 건 6개월쯤이다. →40명에 이르는 무명씨(항쟁 참가자)들의 인터뷰가 뭉클했다. 이들의 마음을 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쉬울 줄 알았다(웃음). 2009년 5월1일 내려가서 처음 만난 인터뷰 대상에게 딱지를 맞았다. 그다음 뵌 게 양동시장 노점상 이영애(항쟁 당시 주먹밥 부대) 어머니다. 거리에서 30분을 혼났다. 매년 5월이면 언론에서 취재를 와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막상 보도는 시덥지 않으니까 화가 나 있던 게다. 일단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조연출(아내)이 나서 아줌마들끼리의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서너 달이 흐르고서 비로소 인터뷰를 담을 수 있었다. →다큐에 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이 있나. -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이 진압될 때 방송실에 3~5명 정도가 있었다. 그 중 중 3 여학생이 있었다는 복수의 증언을 확보했다. 그런데 구속자나 사망자 명단,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훈방되면서 기록이 안 남은 걸로 추정할 뿐이다. 당시 넝마주이들이 맹열하게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분들이 모여 살았다는 월산동 일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끝내 못 찾았다. “광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니 가슴이 아팠다” →‘언제부턴가 광주 안에서도 5·18이 우리 안의 타자가 된 것 같다’는 나레이션이 인상적이다.. -관련 단체끼리, 또는 단체와 시민 사이에 골이 깊어진 건 사실이다. 2년을 작업하면서 외부인으로 광주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봤다. 갈등은 90년대 중반 이후 보상과 함께 시작됐다. 이분들이 10년 정도를 폭도 취급을 받다 보니 생활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보상으로 목돈이 생기니까 빚을 갚거나 주식·사업을 한다고 90% 정도는 돈을 날려버렸다. 배운 것도 없고, 고문과 부상으로 막노동할 형편도 안 됐다. 5월의 트라우마는 고스란히 남았고, 후유증으로 최근까지 50여명이 자살했다.  현재는 도청 별관 철거 논란으로 갈등이 표면화돼 있다. 5월 정신을 계승하려면 도청별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측과 하루빨리 (도청별관을 철거하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남도청 일원의 17만㎡에 2014년까지 민주평화교류원·아시아문화원 등 완공 예정)을 건설해야 한다는 측이 맞서 있다. 후자 측은 5·18 관련 단체(5·18구속부상자회·부상자회·유족회)를 통합해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공법단체를 만들면 아시아문화전당의 자판기 수익금 등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오랜 갈등을 지켜본 광주시민은 진절머리를 낸다. 결국 ‘5월’은 광주 안의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생계 유지가 쉽지 않았을 텐데. -생활비와 제작비의 경계가 모호해서 제작비를 따지기가 쉽지 않다(웃음). 영화진흥위원회와 부산영화제에서 4000만원을 지원받았다. 돈이 떨어지면 ‘알바’를 했다. 늘 외환위기 때처럼 살았다(옆에 있던 상구가 “내 통장도 털렸어요.”라고 폭로했다. 김 감독이 “빌린거지, 털었다고 하면 도둑 같잖아”라며 멋쩍게 웃었다). →부인과 아들까지 (영화 작업에) 끌어들였는데. -아내는 빈민촌 어린이집 교사였는데 문을 닫았다. 40대 중반이면 원장을 할 나이라 재취업이 안 됐다(웃음). 2008년 단편 ‘효순씨 윤경씨 노동자로 만나다’부터 함께 했다. 이전에도 모든 작품을 가편집 단계부터 보고 상의했기 때문에 스태프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후원자, 동반자다. 10여년 동안 작품이 주목받지 못 해 갈등도 많았지만, 항상 아내가 ‘구애받지 말고 해라. 당신 만의 힘이 있다’고 토닥여줬다. 상구는 촬영보조로 딱히 한 일은 없다(이들 부자의 대화는 친구들끼리 말장난하듯 친근하다). →스태프로 뽑은 이유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나(상구가 “돈이 없으니까.”라며 끼어든다). 중학교를 안 다니는데 집에서 놀기만 하더라. 우리 부부는 거의 광주에 내려가 있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와서 경험해 보라고 했다. 안 내려온다고 버티기에 ‘알바비’를 준다고 미끼를 던졌다. 작업일지를 잘 쓰고, 현장에 꼬박꼬박 출퇴근하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했다(상구가 “아빠 말이 맞긴 한데 아직 못 받았어요. 다 합치면 360만~370만원은 받아야 해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영화를 전공한 적이 없다. 1993년 ‘원진별곡’부터 다큐에 뛰어들었는데.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내 길은 아닌 것 같더라.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많았고, 영상으로 옮기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독립영화협회에서 하는 3개월짜리 기초교육만 받고 바로 연출을 시작했다. 그때 조연출을 한, 두 편이라도 했다면 지금 고생을 덜 했을 것 같다. 그때는 다 배웠다고 생각했다(웃음). →‘민중의 세계사’ 시리즈 10부작을 기획했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현장답사를 다녀온 인도차이나를 먼저 다룰 거다. 중동과 팔레스타인,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콩고 등 중앙아프리카,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동유럽, 호주와 남태평양 지역, 그리고 남미와 북미 등 얼개를 잡았다. →얼마나 걸릴까. -20년쯤은 걸리지 않을까. (기자가 상구에게 ‘나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업해도 되겠다’고 했더니 “전 관심없어요. 너무 무리 아닌가 싶어요. 10편에 집착하면 작품 완성도가 떨어질 수도 있고”라고 어른스러운 답을 내놓았다) →31년이 지난 지금, 광주정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뉴스를 보니 중고생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돈을 첫 순위로 꼽는다더라.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가치만을 좇고 있다. 31년전 광주에서는 국가폭력에 맞선 극한의 상황에서도 얼굴도 모르는 옆 사람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렇게 많은 시민이 죽어가면서 지키고자 했던 연대와 나눔 등의 가치를 우리가 어떤 의미로 승화시킬지는 각자의 몫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상구는 “5월의 공동체정신을 되새기자라고 하면 되는데 아빠가 너무 장황하게 얘기한다.”고 면박을 줬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시론] 오글 교수와의 추억/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매체경영 교수

    [시론] 오글 교수와의 추억/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매체경영 교수

    내연구실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한 외국인 노부부와 우리 가족이 함께한 모습이다. 주인공은 나의 학위 공부를 도와준 교수 중 한 분이다. 십여 년 전 방한 당시 우리 가족과 함께 한 저녁 자리에서 찍었다. 노 교수는 당시 미국 조지아주 에모리 대학 오글 교수였다. 이쯤 되면 ‘아’ 하고 고개를 끄떡이는 사람들이 꽤 있겠다. 많은 한국인에게 오글 교수는 낯익은 인물이다. 특히 이 땅의 민주화 과정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 본 기성 세대에게 그는 잊혀지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실 오글 교수보다는 오글 목사로 더 알려진 그는 이 땅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최근 무죄로 판결 난 74년 인혁당 사건 고문 조작설을 처음 제기했다가 강제 추방당한 바 있다. 비록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나는 그가 이 땅의 빈한한 자들에게 바친 희생에 감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서울에서 가장 근사한 레스토랑에 내외분을 모셔 저녁을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오글 교수는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단둘이서 인천시 변두리에 자리를 잡고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이른바 도시산업 선교회의 출발이 된다. 권위주의 시대, 도시산업 선교회는 기업의 ‘도산’을 가져 오는 교회로 기업인들에게는 각인됐지만, 민주화 주역들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서울대 강단에도 잠시 섰다. 나는 그와 곧잘 논쟁을 벌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재벌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에 맞서 한국적인 상황 논리를 주장하며 이해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나는 그런 그의 시각을 고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늘 나의 입만 아플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십년 전 우리 가족과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 처음으로 삼성·현대 등 한국의 재벌에 대해 상당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몸 바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 국가로 위치를 굳힌 이면에는 재벌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천 변두리 ‘푸세’식 화장실의 추억 등등을 회고하며 당신의 가족들이 한국에 쏟아부은 애정이 마침내 민주화와 경제성장으로 결실을 본 데 대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격했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은 이제 이웃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노동자들의 권리 또한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로 강화됐다. 오글 교수가 본다면 상전벽해를 느낄 만큼 모든 것은 변했다. 그래서 재벌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도 지금쯤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토록 오글 교수에 맞서 재벌을 변호하던 내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과이익 공유제에 대한 재벌의 거친 반격은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몽땅 몰아주고 천문학적인 고배당을 챙기는 재벌의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부품 업체를 쥐어짜고, 광고마저도 계열 광고사에 맡기고, 한마디로 땅 짚고 재산 불리기일 뿐이다. 현 정부가 총액출자제한제도, 중소기업 고유업종 등 재벌들을 묶어 놓았던 여러 규제를 ‘친(親)기업’을 앞세워 대폭 풀어 준 다음에 벌어진 현상이다. 심지어 삼성·LG·SK 등은 문방구류 같은 소모성 자재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 중이다. 중소 문방구 제조업체들이 단번에 몰락했다. 고언하건대 한국의 재벌에게 초과이익 공유를 요구하는 것은 반시장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재벌의 성공 뒤에는 열악했던 노동조건 속에서도 구로공단과 중동 열사에서 흘린 한국인의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방한한 억만장자 워런 버핏이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과 파는 노점상쯤 돼 있을 것”이라고. 미국과 미국인이 자신의 부를 이루게 해 줬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부의 대부분을 미국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버핏의 말씀, 한국의 재벌이 반만이라도 들어주면 좋겠다.
  • 옛 춘천 명소 소양 호 일대 새단장

    1970~80년대 강원 춘천시의 대표 관광지였던 소양강댐과 소양호 일대가 호수관광지로 단장돼 옛 명성을 다시 찾을 전망이다. 춘천시는 6일 소양강댐 정상에 있던 노점상이 지난해 12월 모두 철거됨에 따라 관광명소화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우선 소양강댐관리단은 올해 6억원을 들여 댐 정상부 경관 개선과 편의시설 확충 사업을 한다. 관리단은 댐 정상의 광장에서 물 문화관까지 250m 구간의 산 사면에 물을 상징하는 경관 벽으로 단장하고 조형시설물을 설치한다. 또 노점상이 있던 경사면 쪽에는 나무가 깔린 인도가 설치된다. 호수 쪽으로는 기존의 보도 구간을 확장해 꽃과 나무로 된 가로 화단을 조성하고 호수를 바라보며 쉴 수 있는 의자가 놓인다. 물 문화관 옥상에는 전망대가 설치돼 소양호의 정취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개방된다. 사업은 6월 말까지 끝낼 예정이다. 춘천시도 올해 봄내길 개발사업의 하나로 소양호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소양로 나루길(20㎞) 개설에 나선다. 이와 함께 올해 국비 등 1억원을 들여 청평사 고려선원의 보존 활용 용역을 실시한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차 한잔 하실까요] 진익철 서초구청장

    [차 한잔 하실까요] 진익철 서초구청장

    진익철(60) 서초구청장은 “우리 구내식당은 주민들에게도 자랑거리”라고 말을 건넸다. 손님을 모실 때도 고급 음식점보다 구내식당을 선호한단다. 그를 30일 서초구청 구내식당에서 만났다. 편한 장소여서 인터뷰는 무겁지 않았다. 구수한 사투리가 섞인 진 구청장과의 대화를 ‘키워드’로 엮어 본다. ●구내식당 자연히 구내식당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직원들이랑도 식당에서 자주 식사를 하시나 보죠?”라고 묻자 “그럼요. 직원들과 돌아가며 식사하면서 표정을 살피는 거죠. 물론 구를 대표하는 자리지만 내부 고객의 마음부터 느끼는 게 구정의 첫 단추라고 생각해요.”라고 진지한 답변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진 구청장에게 이런 식사 자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얼마 전에는 강남대로 노점상을 단속하는 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애로사항을 들었어요. 구내식당은 저와 직원들 간의 소통의 장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내 호기심이 생긴다. 과연 직원들이 애로사항을 순순히 털어놓을까. 구청장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닐까. 우문현답이 되돌아왔다. “맞아요. 처음에는 얘기 잘 안 해요. 그래서 예전엔 폭탄주를 이용하기도 했죠. 하하…. 그런데 그건 취중 발언이니까 지양해야죠. 그래서 계속 들으려고 추궁해요. 그러면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들이 쏟아지죠.” ●로맨스 진 구청장의 과거사(?)를 캐물었다. 스스로 ‘울산 촌놈’이라고 말하는 진 구청장은 27세 때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과수원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학 3학년 시절인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줄곧 서울시에서 공직의 길을 걸었다. “대학 때 학생들이 ‘영감이 학교에 들어왔다’고 장난도 많이 쳤죠. 마음고생도 했고요. 하지만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고생을 해 보니 남 힘든 거 알겠더라고요.” 맞선을 본 지 한달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고 웃는 진 구청장. 30차례 이상 선을 봤지만 아내(김경희씨)를 보는 순간 ‘아,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버지께 며느릿감을 빨리 소개시켜 드리려는 마음에 부산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를 데리고 울산까지 택시를 타고 갔죠. 당시 수습공무원 월급이 16만원이었는데, 택시비가 5만원이나 나왔어요. 아직도 아내랑 그 얘기를 하면 배꼽을 잡아요.” ●귀양살이 그가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 구청장의 이력서는 본인 말대로 ‘정신이 없다’. 30여년 공무원 인생, 맡았던 보직도 수십여개에 이른다. 여기에 2차례 해외 파견, 대통령 비서실 등 근무 반경도 넓다. “베이징에 4년, 뉴욕에 1년 6개월 파견됐죠. 사실 인사에서 밀려나 일종의 ‘귀양살이’를 한 것인데, 그때 배운 게 너무 많았어요. 다문화 사업을 기획할 때, 당시 익힌 감각이 약이 됐죠. 역시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진 구청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보직으로 2001년 맡았던 서울시 ‘공보관’을 꼽는다. 대(對)언론 홍보 업무를 맡으며 시정의 큰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민감한 현안이 생기면 공보관은 시의 모든 부처와 긴밀히 협동을 해야 합니다. 해결책을 논의하고 언론, 더 나아가 시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자리가 공보관이거든요. 이미 모든 현장에 다 다녀온 셈이 되니 이만한 보직이 없었죠.” ●소통 최근 ‘소통’은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돌고 있는 말. 조직의 수장 가운데 소통을 말하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하지만 진 구청장의 소통 어젠다는 더 구체적이다. 일단 결재 시간을 대폭 줄였다. “관료제이다 보니 어떤 사안을 보고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려요. 주무관은 팀장한테, 팀장은 과장한테, 과장은 국장한테, 국장은 부구청장한테, 부구청장은 청장한테…. 어떨 땐 결재가 15일 뒤에 올라와요. 이러면 주민들이랑 소통이 가능하겠어요? 그래서 중요 현안이 있으면 이들이 모두 모여 의사 결정을 해요. 그렇게 처리한 현안이 지금까지 200건이 넘습니다.” 구청장을 하면서 가장 감동을 받았을 때도 주민과 소통을 할 때라고 했다. 진 구청장은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구청 홈페이지의 ‘구청장에게 바란다’를 확인하는 것이다. 매일 20~30개의 지적사항이 올라오는데 곧바로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이따금 해당 주민에게 불만사항이 잘 해소됐는지 전화를 건다. “구민들은 이런 세세한 모습에 고마워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감동을 받고요.” 다시 구내식당 이야기로 인터뷰를 매듭지었다. “아, 구내식당에서는 남은 반찬을 포장해서 값싸게 팔아요.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부담도 덜고, 친환경 식재료로 만들어 건강도 챙기고, 잔반도 처리하고, 구 예산에 기여도 하는 일석사조(一石四鳥)입니다. 이 기자도 반찬 좀 사서 구 예산에 기여하시죠. 하하….”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서대문 영천시장 50년 무등록 설움 털다

    서대문 영천시장 50년 무등록 설움 털다

    “무면허로 살다가 운전면허를 딴 기분이에요. 마치 불법체류를 하다가 영주권을 얻은 것처럼 세상을 다 얻었다고나 할까요.” 30일 이평주(56) 서대문구 영천시장 상인회장이 최근 구청으로부터 전통시장 인증서를 전달받은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그의 얼굴엔 50년간 온갖 혜택에서 제외되는 무등록시장의 설움을 훌훌 털낸 기쁨이 넘쳐 흘렀다. 그는 “5년간 구청을 들락거리며 전통시장으로 인정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며 “시장이 개천과 인접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늘 ‘퇴짜’를 놓곤 했는데 문석진 구청장이 취임 후 결단을 내려줘 너무 고맙다.”고 덧붙였다. 도심 한복판인 독립문 옆에 위치한 영천시장은 1960년 초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서대문구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이다. 야채, 생선, 식료품, 생활용품 등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이지만 특히 떡 만드는 공장만 20여곳에 이를 만큼 떡도매로 이름난 시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통시장의 인정조건인 ▲점포수 50개 이상 ▲건축물과 편의시설이 점유하는 토지면적 1000㎡이상 ▲영업 상인, 토지 소유자, 건물소유자의 50% 동의 ▲소방도로 확보 등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무허가 신세로 반세기를 버텼다. 더욱이 시장 입구에 노점상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 소방차 진입이 곤란해 화재위험까지 떠안았다는 약점 때문에 전통시장으로 등록받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따라 문 구청장은 취임하자마자 전통시장 및 상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의 깐깐한 조건을 채우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시장 입구에 난립한 노점상을 정비하고 국내·외에 거주하는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50%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구청장 후보들이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문 구청장이 10년만에 실현한 셈이다. 문 구청장은 “무엇보다 영세상인들이 금융 융자를 받으려 해도 무등록 시장이라 모든 혜택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는데 해결하게 돼 기쁘다.”면서 “지역의 대표시장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노점상/조정권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노점상/조정권

    노점상/조정권 열 클립의 햇빛을 M16 탄창에 장전하고 유채꽃밭에 난사합니다. 5월의 이런 날씨 중랑천 변에 앉아 팝니다.
  •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상) 백조를 예언하고 죽은 거위…종교개혁의 서막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상) 백조를 예언하고 죽은 거위…종교개혁의 서막

    한국 교회가 위기다. 금권 선거 논란에 휩싸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두쪽으로 갈라져 연일 싸움이다. 전·현직 회장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법정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교단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정부가 추진 중인 ‘수쿠크(이슬람채권)법’ 도입 결사 저지에 나서면서 종교의 심각한 정치 간섭이라는 비판에도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2011년 한국 교회에서 500년 전 부패하고 타락했던 종교의 모습을 본다는 우려를 내놓을 정도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왔던 길을 되돌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15~16세기 종교 개혁을 위해 숱한 피를 감수해야 했던, 지금의 개신교를 출발시켰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봤다. 그 현장에서, 한국 교회가 나아길 길을 세 차례에 걸쳐 짚어 본다. 1415년 7월 16일은 토요일이었다. 초여름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헝가리)의 동은 일찍 텄다. 오전 6시 미사를 시작으로 콘스탄스 회의는 얀 후스(1372~1415)를 ‘참으로 실제적이고, 공개적인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악마가 그려진 모자를 씌우고 목까지 쌓아올린 장작더미 속에서 화형시켰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의 사기성을 비판하면서 로마 교황의 눈엣가시가 된, 체코 출신의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후스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 뒤 체코 백성들은 사제들과 대주교의 집을 공격하며 민중의 이름으로 콘스탄스 회의를 정죄했다. 200년에 걸친 종교 개혁의 신새벽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후스는 목숨이 다하는 순간, 으스스한 예언을 던진다. “비록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태워 죽이려 하지만 100년이 되지 않아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인 ‘거위’(goose)를 빗대 한 말이었다. 예언처럼 100여년 뒤인 1517년 10월 31일, 인류 역사의 물꼬를 바꾼 마틴 루터의 ‘95개조 명제’(95개 항목에 걸쳐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항의문)가 독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나붙었다. 그로부터 다시 500년이 흐른 2011년 3월, 체코 프라하 구(舊) 시가지 광장. 구 시청사의 500년 된 시계탑과 틴 성당 등 중세의 흔적을 간직한 건물들이 광장 주변에 즐비한 핫도그 노점상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북적거리는 관광객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그 한가운데 후스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신성로마제국이 세운 최고(最古)의 대학인 카를대학의 학장이자 틴 성당의 사제를 지냈던 그가 늘 내려다보았거나 천천히 사색하며 걸었을 광장의 한복판에 있지만 세월의 푸르스름한 더께만큼이나 쓸쓸함이 묻어난다. 동상 아래에는 ‘백조 예언’과 함께 너무도 유명한 ‘진실의 7명제’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만을 수호하라.”는 후스의 마지막 외침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박제된 듯 남아 있다. 중세 암흑기가 져야 할 책임의 상당 부분은 로마 교황청에 있다. 종교의 힘을 바탕으로 세속 권력까지 함께 틀어쥔 교황청은 1074년부터 1291년까지 200년에 걸쳐 4차례나 십자군을 보내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뤄지기 전까지 500년에 걸쳐 종교와 세속 부패의 배경이 된 ‘면죄부’는 이때 발행됐다. 십자군 전쟁에서 자행한 온갖 타락과 학살, 강간, 폭력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초기에는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갖췄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죽은 이들에게까지 적용되는 ‘사후 면죄부’가 기승을 부리면서 부패를 부추겼다. 백성들의 소외감도 컸다. 설교는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만 이뤄졌고, 포도주도 사제들만 마셨다. ‘무지한 평신도들이 예수님의 피인 포도주를 흘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후스는 1410년 교황에게 파문당한 뒤에도 프라하 베들레헴 교회에서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설교를 계속했다. 만찬 때는 평신도들에게도 포도주를 나눠줬다. 체코 민중들의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비록 그의 노력이 당대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후스의 후예들은 유럽 곳곳에서 부패한 종교에 대한 저항의 싹을 키우기 시작한다. 체코는 1000만명 남짓한 전체 인구 중 종교가 없는 국민이 63%를 차지한다. 개신교의 뿌리임에도 후스는 어느 교단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관광산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후스의 흔적을 돈 들여 추억하지도, 종교적으로 애써 후스를 기억하지도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스는 그렇게 역사에서 잊혀 갔다. 프라하에서 만난 한 개신교 한국인 목사는 “후스를 빼고서는 종교 개혁을 논할 수 없다.”면서 “지금이야말로 종교의 부패와 타락에 저항하는 후스의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 사진 프라하(체코)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열린세상] 3·1운동과 SNS/이창원 한성대 행정학 교수

    [열린세상] 3·1운동과 SNS/이창원 한성대 행정학 교수

    때는 92년 전 3월 1일, 조선의 민족대표 29인은 늦게 온 4명을 제외하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인사동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선언 후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고, 60여명의 일본 경찰들이 태화관으로 몰려와서 우리 대표들을 남산 경무총감부와 현재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거사 당일 당연히 통신수단의 미비로 민족 대표들끼리의 연락도 쉽지 않았지만, 대표들과 학생 시위대와의 소통도 전혀 원활하지 않았다. 더욱이 시위학생들과의 원래 약속장소는 태화관과 300m 떨어진 탑골공원이어서, 민족대표 33인이 나타나지 않자 당황한 학생대표는 단독으로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 낭독까지 했다.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독립에 대한 결의와 의지를 전파하는 큰 성과가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시계를 반대로 돌려 92년 전 3·1운동 당시 요즘과 같은 정보통신(IT) 기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존재했다면 3·1운동의 시위 양상과 그 결과 역시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최근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도미노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역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92년 전 한반도에는 조직화된 반정부 세력이나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요즘의 튀니지·이집트·리비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3개 국가에서 시위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합하여 시위를 주도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시위장면을 생중계하면서 부패 청산, 장기 독재정권 퇴진, 기본권 보장 같은 실질적인 주장을 전파하니 그 효과가 아주 절대적이다. 대학까지 나왔지만 취직이 안 돼 튀니지 인구 4만의 소도시 시드 부지드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의 단속으로 청과물을 압류당했고, 이를 항의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자 분신을 선택했다. 이러한 불행한 소식이 금방 SNS를 타고 가공할 실업률, 부정부패와 장기독재로 얼룩진 튀니지에서는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발전되고, 곧 23년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에 대한 전국적 정권퇴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인터넷을 차단하고, 비판적 인사들의 이메일과 SNS 계정을 해킹하면서까지 이러한 반정부 시위를 막고자 했지만, 도리어 우회 경로를 통해 페이스북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결국 시위 2개월 만인 지난 1월 15일 외국으로 야반도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튀니지의 인구가 1000만명 정도인데, 이중 페이스북 가입자가 무려 180만명 정도로, 18%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 역시 페이스북 등을 통해 제안된 반정부 집회에 엄청난 시민들이 호응을 했고, 휴대전화·스마트폰·노트북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들은 집회 장소와 시위 상황 등을 SNS를 통해 생중계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 역시 인터넷 차단과 주요 시위 주도자에 대한 감금으로 대응했지만, 결국 2월 11일 헬기를 타고 휴양지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 고 말았다. 지식정보사회에서 무서운 것은 일반 대중이 총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디지털 카메라·노트북 등으로 무장한 대중이 이러한 정보를 다시 SNS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SNS가 민주화와 개방화에 기여만 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곡된 정보도 정말 효과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전 세계에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나 권력집단에 의한 정보 왜곡은 정말 두려운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정치인들이 요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매달리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미지수다. 물론 정부나 정치인들의 정보 왜곡은 일반 시민들과 미디어의 개방적 네트워크에 의한 지속적 검증으로 막는 방법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SNS의 진정한 위력도 민주화와 개방화를 위한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의식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 ‘숨은 봉사’ 서민도 훈·포장 받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8일 “일반 국민과 서민도 훈·포장에 추천될 수 있게 신경을 써 달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행정안전부의 포상 개선안을 보고받고 “노점상을 하면서도 기부금을 많이 내거나 한 분들은 어디에도 소속이 안 돼 있어서 포상받기가 상대적으로 힘들지 않으냐.”면서 이같이 밝혔다고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그런 분이 많이 발굴되고 추천되도록 제도 개선에서 신경 써 달라.”면서 “이런 분들이 포상을 받으면 주변에서 보는 서민들에게도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정부 포상 국민추천제도와 관련, “아무래도 요즘 통·반장이 지역 사정을 훤히 알지 않느냐. 이런 분들이 지역에서 숨어서 봉사하는 분들을 적극 추천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공항 평가에서 6년째 1위를 했다는 보고를 받고 “실무적으로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이렇게 세계적으로 우수한 공항이 되도록 애쓴 사람에게 훈·포장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또 직급 수준에 따라 훈격이 좌우되는 정부 포상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김 대변인은 전했다. 행정안전부는 이날 회의에서 ‘국민추천포상제’를 시행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행안부는 사회에 봉사하고 의로운 행동을 한 국민과 각 분야에서 성실하고 창의적으로 일한 유공자 등을 추천받을 예정이다. 행안부는 또 정부 훈·포장이 12종, 각 5등급으로 세분화돼 있고 복잡하다는 지적에 따라 정부포상체계를 선진화하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기고] 한파에 고통 받는 서민/전병성 기상청장

    [기고] 한파에 고통 받는 서민/전병성 기상청장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하지(夏至)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은 비가 오기를 하늘에 비는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 효과가 있든 없든 흉년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해서라도 왕은 기우제를 지내며 백성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농경사회의 핵심은 농업이었고, 농업은 날씨, 특히 일조량과 비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니 가뭄은 오늘날로 치면 경제파탄이나 다름없었다. 산업이 복잡해지고 다양화한 오늘날도 날씨의 영향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욱 막강해졌다. 비뿐만 아니라 눈, 기온, 바람, 황사, 지진 등 대부분의 날씨 현상이 거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올 겨울 한반도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다. 서울에서는 최저기온이 영하 17.8도까지 떨어져 10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고, 부산은 영하 12.8도로 96년 만에 가장 추운 날씨였다. 수도관·계량기 동파사고가 속출했고, 한파에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들도 부지기수였다. 폭설까지 겹쳐 서해안과 제주도 등에서는 도로 곳곳이 통제됐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민과 사회적 약자가 폭우나 폭설, 한파나 폭염과 같은 재해기상에 가장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손님의 발길이 뚝 끊어진 재래시장 상인이나 노점상들,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아 얼어붙은 채소를 보며 망연자실하는 농민들, 잦은 강풍과 눈보라로 배를 띄우지 못해 애태우는 어민들, 손님이 없어 사납금도 맞추기 힘든 택시기사들…. 이러한 연유로 기상청의 예보정확도가 높아졌다는 일각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재해기상을 예보하는 예보관의 마음은 불편한 것 같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서민들의 얼굴들이 쉬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루 빨리 평온한 날씨로 돌아와 서민 활에 불편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하지만, 폭설과 한파는 겨울의 일부분이다. 겨울에 춥고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느 한곳에 혹한이 몰아치면 다른 한편에서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지구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혹한, 폭염, 집중호우, 대설과 같은 극단적인 기상현상이 앞으로도 더욱 잦고, 그 원인이 지구 온난화를 초래한 인간에게 있다는 점이다. 기상이변과 기후변화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고, 그 피해도 고스란히 인간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은 명백하다. 당연히 해결책도 인간이 찾아야 한다. 기우제를 지내는 지극한 정성은 물려받되, 방법은 미신이나 주술이 아닌 ‘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장기 기후변화 추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현재의 대기상태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미래의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과학적으로 생산하여 대비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방안을 찾는 것, 바로 ‘기후변화과학’이 기상청이 추구하는 가치이다. 지구가 따뜻해지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는 한파와 폭설로 시달리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자연의 조정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재해기상이나 기후변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다. 비닐하우스 붕괴, 수도관 동파 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시설 기준을 강화하고 기상재해에 대한 보험제도의 도입 등 다양한 대응책이 필요할 때다.
  • 반한류 바람 타이완에 직접 가보니

    지난 25일 ‘반한류 1번지’ 타이완을 출장차 찾았다. 타이완의 명동이라 불리는 시먼팅(西門町)의 노점상들에서 일본 가수들의 사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반면 한국 가수들의 사진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K-POP 열풍이 거센 지역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물론 한국 스타들의 모습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연예인들에 비해 그 수가 적었다. 한국 코스메틱 브랜드인 에뛰드와 스킨푸드 매장 앞에 크게 전시된 소속 모델 배우 박신혜와 성유리의 모습만 눈에 띄었다. 이번엔 마트를 찾았다. 반가운 상표가 눈에 띄었다. 신라면과 에이스 크래커, 초코파이 등이 보였다. 그런데 대부분 소비자의 눈높이에 딱 들어오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마트에서 신라면의 배치는 지난해 11월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직후 타이완 내 반한 정서가 일면서 조정됐다고 했다. 타이완 내 반한 감정이 극심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의 소비심리에 영향을 미쳐 한국 제품의 매출이 다소 주춤했고, 자연스럽게 ‘로열 배치’됐던 제품들이 밑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타이완 현지에서 느낀 반한 감정은 언론에 보도되는 것처럼 극심해 보이진 않았다. 25일 난강(南港)전시장 인근에서 만난 여대생 마오진이안(21)은 “일부 애국주의자들과 정치인들이 아시안게임에서 양수쥔 태권도 선수 실격패 사건을 놓고 반한 감정을 부추겼지만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만큼 타이완 사람 전체가 한국을 싫어하진 않는다.”면서도 “양수쥔 선수 문제 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 반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 여성과 25년 전 결혼했다는 현지 관광 가이드 리우자먼(52)의 경우 중학생 딸이 지난해 말 한국 혼혈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리우자먼은 “타이완 내 반한 감정이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여지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라면서 “중학생인 딸 아이가 양수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엄마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일부 짓궂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타이완 내 불고 있는 반한 감정 해소와 관련해 양국 합작의 콘텐츠 제작 등을 통한 보편적인 정서를 공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28일 “타이완 내 반한감정은 다소 정치적인 부분이 있다. 한국도 문화 콘텐츠 강화뿐만 아니라 현지와 합작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반한 감정도 누그러뜨리고 타이완 내 한류 시장을 강화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3월 새앨범 내는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김문이 만난사람] 3월 새앨범 내는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산 너머 저쪽이다. 어머니는 배추를 팔러 나갔다. 돌아오는 언덕 길이 꼬불꼬불 멀었다. 오늘도 늦으시려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그렇게 기다렸다. 어느 날엔가 막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거나, 어머니가 걱정된다. 그래서 읊었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숙제를 천천히 해도 엄마 안 오시네/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옛날~’ 1989년 요절한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 나오는 대목이다. ‘엄마 걱정’은 지난 해 10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해 연말 제주 무대에 이르기까지 노래로 불려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장사익 소리판 역(驛)’이란 제목으로 전국 투어에서 선보였던 것. 공연 도중 기형도씨의 어머니를 초청해 아들의 ‘엄마 걱정’을 눈물 나도록 불러 관객들과 함께 감루(感淚)의 바다로 빠지게 했다. 장씨 자신도 참외장사를 했던 어머니의 추억을 토해냈다. 그런 ‘엄마 생각’에서 장사익(62)씨는 오는 3월 새 앨범을 낸다. 원래 노래풍도 그렇고 소재를 선정하는 스타일도 ‘한 많은 우리 것’을 찾고 있지만 이번 새 앨범에는 특유의 ‘토장’(土醬)을 더욱 진득하게 담아낸다. ‘산너머 저쪽’ ‘엄마 걱정’ 등의 신곡에다 ‘삼식이’ ‘아버지’ ‘여행’ ‘섬’ 등 11곡을 맛깔스럽게 버무린다. 2008년 ‘꽃구경’ 이후 3년 만으로 7번째 앨범이다. 타이틀곡은 ‘역’이다. 장씨는 다른 가수와 달리 신곡이 나오면 먼저 무대공연을 통해 선보인 다음 녹음 과정을 거친다. 장씨의 노래는 요즘 들어 더욱 중장년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국내 양대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유료 관객 점유율을 집계한 결과 장씨의 ‘역’ 공연이 전체 좌석 중 유료 관객 점유율 97%로 1위에 올라 인기도를 입증했다. 그는 ‘찔레꽃’으로 많은 팬들의 애간장을 충분히 녹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 제목처럼 여전히 ‘이게 아닌데’라고 하면서 차원을 높인다. 그럴 것이 북악산을 바라보는 집 창가에 찾아오는 새들과 그 산 기슭에 드러누운 부처와도 대화를 나눈다. 또한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묵향’과 함께 튼튼 60대 세월로 ‘독공’(獨功)의 길을 걷고 있다. ●풍경이 모여드는 마당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장씨의 집. 10여개의 풍경이 앞마당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각자 불어오는 찬바람에 의지해 겨울소리를 내고 있었다. 녹차를 마시면서 한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장씨의 오랜 친구들이 계속 찾아온다. 비둘기와 까마귀, 참새들이 나뭇가지에 와서 교대로 떠들고 재잘거리고 뭐라고 지껄인다. 뒷산 언덕 높이에서는 이를 시샘하듯 매 한 마리가 크게 날갯짓을 한다. 뿐만 아니다. 연못에서 동면하는 개구리 10여 마리도 아직 기척은 없지만 목청을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장씨 집에는 계절별로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르는, 그런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겨울에는 새들이 저마다 고운 목소리로 멋을 내고 4, 5월이 되면 개구리가 뒤질세라 울어댄다. 개구리들은 영특하게도 여름에 매미 소리가 나와야 비로소 입을 다문다. 또 그 매미들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풀벌레한테 인계를 한다. 다시 겨울이 오면 참새들이 울면서 자연의 크리마스 카드를 연출한다. 하여 장씨는 이들에게 노래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클래식과 국악이 함께 나오는 FM 라디오 음악을 잔잔하게 하루 종일 틀어준다. 새들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고 잘 듣는지 장씨 스스로 깨닫는다. 때문에 굳이 창문 열고 사람소리를 내지 않는다. 혹 사람의 소리가 나면 그들은 얼른 도망가버린다. 장씨는 새들에게 곰팡이 생긴 쌀을 먹이로 준다. 이런 평화로움에 지나가던 고양이도 잠시 낮잠을 즐기고 간다. 전원 교향악이 따로 없다. 올봄에는 닭 몇 마리를 새 식구로 불러들일 생각이다. “(그들이) 울다가 지치면 딴 놈이 와서 울어줍니다. 아주 자연스러워요. 일년 사계절이 그럴진데 요즘 세상에서는 한꺼번에 뛰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가용 타는 것이 왠지 슬퍼져서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러다가 지하철에서 여러 사람이 휴대전화에 의존하는 모습을 볼 때 소름이 끼친다는 생각도 듭니다. 올해에는 주변을 살피면서 느리게 가 보면 어떨까요. 휠체어를 탄 장애우들은 이것저것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잖아요.” 문득 그의 노래가 대부분 느리면서 호소력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곡 중 하나인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가~안다.’ ●개발한 글씨체로 일필휘지 요즘 그는 서예에 푹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지없이 먹을 갈고 한 시간여 동안 붓을 잡아 화선지에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글씨체를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다. ‘동백아가씨’ ‘찔레꽃’ 등의 노래가사는 기본이고 마음에 드는 시구절 등 주로 한글로 쓴다. ‘느림의 미학’과 ‘위안과 희망’이 장사익류의 소리라면 또 다른 ‘장사익류의 서체’를 개발해낸 셈이다. 지인들에게 안부편지를 쓸 때도 꼭 붓글씨를 고집한다. 주위에서는 전시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작품수준의 경지라고 평가한다. 그는 조선후기 3대 명필 중 한 사람이었던 창암 이삼만(李三晩)의 글씨체를 무척 좋아한다. 장씨는 “창암의 서예전이 다음 달 2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다.”면서 글씨의 근본을 오로지 자연에서 구했기에 물처럼 흐르는 멋이 물씬 풍긴다고 말했다. 또한 평론가들도 “먹이 농담하듯 곡선과 직선, 음양의 요소를 조화로움의 극치로 풀어낸다. 자연의 소리가 글씨에 스며들어 붓이 춤추듯 노래하는 것 같다.”고 평한다. “한글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정도입니다. 한자인 경우에는 추사 김정희 서체니 중국의 아무개 서체니 하고 있지만, 한글은 쓰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계속 쓰다 보면 아름다운 글씨가 나오고 그게 곧 자신의 글씨체가 되겠지요. 노래가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서예는 노래를 집중하게 하는 정신력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2004년 작고한 음악인 김대환씨를 예로 든다. 평생 아리랑과 반야심경구절만 쓰다 보니(앞으로 썼다가 뒤로 썼다가 반복하면서) 왕희지 서법보다 더 자유분방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1990년에 쌀 한톨에 283자의 반야심경을 모두 써 넣어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사익 소리판 역’ 완결무대 이어져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부인 고완선씨가 떡과 과일을 가져왔다. 고씨는 남편에게 “사진촬영도 하는데 기왕이면 옷을 갈아입고 하시지.”라고 했다. 그러자 장씨는 “어때 뭐, 원래 노숙자차림이 내 모양인데 뭐.”라고 웃어넘긴다. 알콩과 달콩으로 미소를 주고받는다. 마루바닥 한쪽에 오래전에 부부가 함께 만든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은 ‘백년가약서’이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約書)를 씁니다. 단, 100년 후에는 영원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 올 한해는 얼마나 많은 공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높아가는 인기도만큼 여기저기에서 오라는 데가 더욱 많다. 이달 대구와 부산, 일본 후쿠오카 등에서 협연을 끝낸 데 이어 2월에는 경북 안동(11일), 서울 노원(17일), 경기 군포(19일) 등에서 협연이 예정돼 있다. 3월 1일에는 김대환 추모공연에 참가한다. 또 이달에는 단독공연이 있는데 울산(15일)과 창원(19일)에서 이어지며 4월에는 전주, 과천, 춘천 등에서 단독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해 10월에 시작된 ‘장사익 소리판 역’의 완결편을 마무리짓는 무대가 5월까지 10여 차례 이어진다. 전직 카센터 직원,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직원, 보험회사 직원…. 장씨는 마치 죽장에 삿갓 쓰고 그러하듯, 일찍부터 방랑과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인생살이의 산전수전을 겪은 다음 40대 중반에 소리꾼으로 데뷔했다. 다른 사람보다 늦었지만 삶의 내공이 쌓여서인지 무대 위에서 넘어지고 깨진 것을 얘기할 수 있어 오히려 음원이 시원했다. 일찍 ‘국민 소리꾼’이 된 것도 여기에 있겠다. “노래는 진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노래는 맑아야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희망도 있고 위안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들과 같아지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노래를 참 잘 택했구나 하고 있습니다.” 장씨는 가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냥 소리꾼일 뿐이라고 한다. 애정을 얻어도 고통이요, 또 애정을 버려도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소리를 얻었을 때도 많은 고통이 있었을 테고, 또 언제가 버려야 하니 더 많은 고통을 생각하고 있을 터. 그래서 요즘도 ‘이게 아닌데’로 스스로 채찍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장사익은… 1949년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소문난 장구잡이였다. 소리의 기질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장씨는 초등학교 때 웅변을 잘했다. 어릴 때는 장차 정치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시급해 1965년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전 프로야구 선수 김우열씨와 동기동창. 고 3 때 종로에 있는 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이때 인근 낙원동 음악학원에 다니며 노래연습을 틈틈이 했다. 직장생활 3년 후 공병으로 군입대를 했지만 소리솜씨가 좋아 31사단 문선대에서 근무했다. 1972년 제대 후에는 무역회사, 전자회사 영업사원, 노점상, 카센터 등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정악피리와 태평소 등을 스스로 익혔다. 1993년에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때마침 그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뽑혔다. 또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장원에 올랐다. 그러던 1994년 11월 주위의 권유로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했다.100석 규모의 극장에 300여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내친김에 1집앨범 ‘하늘가는 길’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지금까지 ‘기침’(1999) ‘허허바다’(200) ‘사람이 그리워서’(2006)‘ ‘꽃구경’(2008) 등 6집 앨범을 냈다.
  • 독재국 자살시위 확산… 혁명 도미노 되나

    독재국 자살시위 확산… 혁명 도미노 되나

    지옥 같은 실업과 살인적인 물가에 짓눌린 독재국가 국민들의 자살 시위가 북아프리카에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26세 청년 노점상의 분신 자살이 튀니지의 23년 독재정치의 막을 내리는 도화선이 된 이후 세계적으로 1960년대 정치 시위의 형태인 분신 자살이 확산되고 있다고 AFP가 지난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이집트, 모리타니에서 각각 1명씩 자살을 시도함에 따라 지난 한달간 북부 아프리카인 6명이 분신 자살했다고 전했다. 오전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네 아이의 아버지인 압두 압델 모네임이 음식점 주인들에게 빵 배급 쿠폰을 금지한 정부 정책에 항의하려고 의회를 찾아갔다가 거절당하자 자신의 머리에 석유 1갤런을 끼얹었다. AP통신은 18일에도 두 명이 의회 주변에서 분신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아프리카 북서부 모리타니 수도 누악쇼트에서도 지난 17일 시민 야콥 오울드 다우드(40)가 대통령궁 앞에 세워둔 자신의 차량 안에서 분신했다. 지난 15일 무직자 모셍 부테르피프(37)가 일자리와 주택을 얻는 데 실패하자 시청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데 이어 16일에는 34세 남성 세누치 토앗이 자택에서 분신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씨줄날줄] 재스민 혁명/박대출 논설위원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은 무혈(無血) 혁명이다. 영국 청교도혁명(1640~1660)의 주체는 청교도들이다. 3월 혁명은 1917년 3월 8일(구력 2월 23일) 발발한 러시아 혁명이다. 그해 11월 혁명(구력 10월)은 볼셰비키 혁명으로도 불린다. 전통적으로 혁명은 특성, 주체, 시기 등으로 이름지어졌다. 요즘엔 ‘상징’으로 명명하는 게 대세다.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 등으로 이어진다.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74) 대통령. 23년간 튀니지를 철권 통치했다. 지난 14일 ‘피플 파워’로 축출됐다. 서구 언론들은 ‘재스민 혁명’으로 이름지었다. 재스민은 튀니지의 국화(國花)다. 아직은 미완성 혁명이다. 약탈, 방화 등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 혁명의 불을 댕긴 건 노점상 분신 사건. 모하메드 부아지지란 26세 청년이다. 소셜 네트워크와 위키리크스가 혁명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분신 소식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번졌다. 위키리크스는 대통령 일가의 부패상을 폭로했다. 민심은 폭발했고, 혁명을 일궈냈다.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오렌지, 장미, 튤립혁명 때와 다르다. 튀니지와 북한엔 닮은 꼴이 있다. 바닥을 헤매는 경제와 장기 독재의 폐해다. 국민은 굶주려도, 독재자는 호사스럽다. 벤 알리는 금괴 1.5t을 갖고 야반도주했다. 김정일 호화 별장은 33개라고 한다. 국민들이 모르면 그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를 수가 없는 세상이다. 벤 알리 정권은 인터넷 사이트를 차단했다. 개인 정보도 해킹했다. 하지만 봇물처럼 터진 사이버 투쟁을 막을 수 없었다. 북한도 이젠 닫힌 나라가 아니다. 북한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한국 네티즌들에게 뚫렸다. 홍보 홈페이지엔 김정일-김정은 풍자가 등장한다. 한류(韓流)도 퍼질 대로 퍼졌다. 위키리크스엔 북한 관련 건이 1000여건 있다고 한다. 일각에선 급변 가능성을 경고한다.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서구 언론들은 뭐라고 이름지을까. 모란혁명이라고 명명할까. 모란봉공원, 모란봉대학, 모란봉 기예단, 모란봉 나무화석처럼. 아니면 국화(國花) 이름을 따서 목란혁명으로 부를까. 2009년 기준으로 남북한 경제력 차이는 37배. 통일 전 서독·동독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들은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2.75배에 불과했다. 통일 21년이 됐지만 후유증은 진행형이다. 우리는 오죽하겠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한반도 긴장 상태에선 더 절실하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튀니지 ‘재스민 혁명’ SNS의 힘

    튀니지 ‘재스민 혁명’ SNS의 힘

    지난해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에 있는 인구 4만명의 소도시 ‘시디 부 지드’가 지구촌에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노점상을 하던 26세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소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달이 채 안 된 지난 14일(현지시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튀니지의 23년 독재 체제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인구의 18%가 페이스북 가입자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부아지지는 독재정부가 망쳐 놓은 경제난 탓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과일 노점상으로 겨우 생계를 꾸렸다. 노점 단속에 나선 경찰이 그의 뺨을 때리고 과일 수레를 부순 뒤 외상으로 구입한 과일 200달러어치를 압수했다. 시청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만 바라보는 가족과 아직 갚지 못한 빚, 암울한 내일…. 부아지지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정부 청사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그의 희생은 그러나 헛되지 않았다. 살인적 실업률에 신음하던 튀니지 국민들은 부아지지의 분신 소식에 들고 일어났다.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은 14%. 하지만 이 숫자를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튀니지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특히 15~29세 청년 실업률은 30%에 이른다. ●위키리크스도 혁명 성공 한몫 혁명 성공의 또 다른 열쇠는 내부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제공했다. 대통령 일가의 과도한 재산 축적과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담은 외교 문서들이 튀니지 민주화 운동가들이 만든 ‘튀니리크스’(Tunileaks)를 통해 확산되면서 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더욱 북돋았다. 시위가 열흘 넘게 계속되자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은 뒤늦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던 부아지지는 지난 4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성난 민심은 더욱 달아올랐고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자 항의 시위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매개로 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87년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로 인권 탄압과 부정부패 등 독재의 전형을 보여 온 벤 알리는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달아났고, 철옹정권은 무너졌다. 전 세계 언론은 튀니지의 민중 봉기를 ‘SNS가 꽃피운 재스민 혁명’이라 불렀다.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스민처럼 평범한 민초들이 SNS를 통해 하나로 뭉쳐 거둔 승리라고 평가했다. 튀니지는 인구의 60%가 25세가 채 안 되는 ‘젊은 국가’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 가입자가 18%에 이를 만큼 SNS 이용률이 높다. 튀니지 독재를 무너뜨린 SNS는 이제 이웃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의 독재국들을 겨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년층 비율이 높고 경제 사정이 열악한 예멘(70%), 알제리(75%)가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희망을 싣고 달리는 탈북 버스기사 유금단 씨

    [김문이 만난사람] 희망을 싣고 달리는 탈북 버스기사 유금단 씨

    황순원의 ‘소나기’가 잠시 북으로 간다. 두메산골이다. 잔잔히 흐르는 강줄기가 있다. 오며 가며 정든 징검다리도 있다. 한 소녀가 그 다리를 건널 때 소년을 만났다. 둘이 오가피나무 열매를 따먹곤 했다. 겨울에는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영화 ‘러브스토리’처럼 뒹굴었다. 눈싸움도 했다. 강에서 산천어도 잡았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했다. 가재랑 놀았다. 그러다가 산에 올랐다. 두 손을 턱에 괴고 아래를 바라본다. 소년은 어디 갔을까. 중얼중얼 노래를 불러 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에~’ 소녀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나이 먹을수록 찾아오는 것은 불행과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친척 집에 맡기고 두만강을 홀로 건넜다. 파란곡절을 겪으며 남한으로 왔다. 두고 온 아들 때문에 가슴이 아파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며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아들과 다시 남한에서 눈물겨운 상봉을 했다. 하여 ‘이제는 살아야 한다.’며 다부지게 일어섰다. 포장마차 보조, 공사장 막일, 식당 홀서빙, 노점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버스 운전사가 됐다. 필기시험에서만 12번 떨어지고 13번째 합격하는 불굴의 의지로 이루어 냈다. ‘절망은 없다. 꿈 있는 자가 진정 아름답다.’라는 좌우명으로 이겨 냈다. 지금은 ‘뛰뛰 빵빵’ 신나게 서울 시내를 달린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라는 인사말에 승객들의 표정이 환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과 사는 맛을 느낀다. 그 소녀의 이름은 유금단(40). 함경북도 출신으로 2001년 탈북했다. 북에서 온 여성으로는 드물게 남한에서 6년째 버스 핸들을 잡고 있다. 그는 2008년 광복 63주년 때 보신각 타종 행사에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신정동에 있는 6623번 시내버스 차고지. 이날따라 눈이 많이 내렸다. 하얀 눈과 환한 웃음이 잘도 어울린다. 약속 시간이 약간 늦었기 때문에, 그렇게 달려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였다. 그의 애마나 다름없는 버스 안에서 마주 앉았다. 먼저 지금 고향에도 눈이 많이 오겠다고 했다. “겨울이면 눈이 항상 많이 쌓여 있어요. 저는 눈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남한에 왔을 때 눈이 별로 없어서 속상했어요. 작년하고 올해가 눈이 좀 와서 기분이 좋아요. 오늘 비번인데 눈과 함께 놀라고 하느님이 축복해 주는 것 같아요.” 고향이 어떤 곳이냐고 했더니 “함경북도 산골이며 금강산 못지않은 좋은 경치를 자랑한다.”며 싱글벙글 웃는다. 역시 고향 얘기는 즐거운 일. 봄에는 산나물을 캐고 가재를 잡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강냉이를 절구에 찧어 먹었고 어머니가 삶아 준 줄당콩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렇다면 부모 생각도 간절하겠다고 했더니 유씨는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본다. 함박눈이 더욱 굵어진다. 유씨의 눈가는 차츰 젖어 갔다. “아버지는 40대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50대 초반에 돌아가셨지요. 두 분 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는 원래 남한 출신입네다. 6·25 때 17살이었는데 북한군에게 잡혀 갔지요.” 유씨는 남한에 처음 왔을 때 고모와 삼촌을 만났다. 그리고 조치원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도 갔다. 이때 가슴속 깊이 다짐한 것이 있다. 이산가족으로 한 많은 삶을 살아 가는 이 땅의 노인들을 위해 통일의 문이 열리는 날 버스에 수십대, 아니 수백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달고 북으로 달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간절하게 당부했다. “제발, 그날까지 다들 건강하게 살아 계십시오.” 탈북해 남한에 온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을까. 적응하느라 고생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 같은 조선 땅입니다. 남한으로 내려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제 인생은 여기(남한)에서 시작됐으니까요. 남한에서 귀신병을 앓다시피 온갖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걸 겪으면서 비로소 꿈과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남한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의 이질감이었다. 막노동판에서 쫓겨났을 때도 그렇고 포장마차 보조일, 식당 홀서빙 일을 할 때도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그만두어야 했다. 함북 지방 사투리가 불친절한 반말로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은 암흑이었습니다. 술을 안 마시면 견딜 수가 없었지요. 우울증과 귀신병을 반복적으로 앓았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울었던 날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어떡합니까. 북에 두고 온 아들 생각에 참고 또 참았지요.” 북한에서 8살 된 아들과 이별할 때는 “열흘만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게.”라고 했다. 당시 남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서 8년 징역형으로 수감된 상태였고 아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리다시피 했다. 이런 아들이 떠올라 울음을 그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노점상으로 나섰다.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아들과 남편을 데려오는 데 썼다. 하늘도 감동했던지 2005년 남편과 아들을 남한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됐다. 그가 버스 운전사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버스 기사가 멋있게 보이더군요. 또 시민들의 발이 된 내 모습을 상상했지요. 기분이 아주 좋아지더라고요.(웃음)” 함북 산골에는 시내버스가 없지만 북한에서 버스 기사는 중산층에 속한다. 그는 어느 정도 운동신경이 있어 운전을 자신했지만 필기시험에서 계속 떨어졌다. 한자식 단어가 낯설고 이해가 잘 안 됐다. 주변에서 해석을 도와 주워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결국 13번째 도전에 합격해 마을버스 핸들을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달려오는 5t 트럭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히 돌리다가 그만 장 파열을 일으키는 큰 사고를 당했다.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복부에 붕대를 감은 채 경기 지역 시내버스에 다시 올랐다. “그때 죽을 뻔했지요. 병원에서 호흡기에 의지해 지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 많이 격려를 해 주더군요.” 4년 전부터는 지금의 6623번 시내버스로 옮겨 신정동과 여의도를 오가고 있다.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도 많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아들 생각에 즐겁기만 하다. 버스의 단골 승객들한테는 ‘친절한 금단씨’로 소문이 나 있다. 키가 150㎝ 단신이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함경도 또순이’로도 통한다. 그는 특히 키가 작고 다리가 짧아 클러치를 밟을 때마다 정강이가 갈라지는 느낌을 받지만 정신력으로 참고 이겨 낸다. 아주머니들이 오르내릴 때 엄지를 치켜세우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런 격려와 관심에 힘입어 지난해 6월에는 모범운전자 자격증까지 땄다. “꿈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목표의 절반은 이루어낸 것이지요. 또 꿈이 있어야 하늘이 도와줍니다. 저는 원래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시골에 작은 요양원을 설립해 노인들을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나는 부자다. 남한테 빚이 없으니 부자가 아니냐.’라는 생각을 늘 한다. 또한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 가면서 개인적 감정으로 부딪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웃는 얼굴로 살아 가자.’고 다짐한다. 이런 내용으로 강연을 하면 매번 기립 박수를 받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눈물 젖은 두만강’을 지금도 부르냐고 했더니 “이젠 너무 슬퍼서 잘 안부른다. 대신 윤태규의 ‘마이웨이’를 즐겨 부른다.”고 했다. 노랫말이 새삼 다가온다.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볼 것 없네/~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내가 가야 하는 일들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일어나 한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 마이웨이.’ 편집위원 km@seoul.co.kr ●유금단씨는 1970년 5월 함북에서 태어났다. 2001년 탈북해 중국 땅을 전전하다 2002년 6월 남한에 왔다. 막노동과 포장마차 보조, 식당 홀 서빙일 등을 하다 2003년 말 12번의 낙방 끝에 13번째 필기시험에 합격하면서 버스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이후 경기 지역 마을버스와 시내버스의 핸들을 2년 동안 잡은 뒤 4년 전부터 서울 신정동과 여의도를 오가는 6623번 시내버스 핸들을 잡고 있다. 2008년 6월에는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8월 15일 광복 63주년 보신각 타종 행사에 우주인 이소연씨 등과 함께 참여해 화제가 됐다. 2010년 6월에는 모범운전자 자격증을 받았다. 현재 18살 된 아들과 함께 경기도에서 산다.
  • [부고] 위안부 피해자 정윤홍 할머니

    [부고] 위안부 피해자 정윤홍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정윤홍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오후 9시쯤 경기 일산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0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192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정 할머니는 33년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으나 22살이던 1942년 연행돼 중국 둥안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1945년 광복 직전 임신한 채 돌아왔다. 1982년 경기 평택으로 옮겨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1995년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서울신문 신년특집] 지방행정 NEW 스타트 - 인사원칙 정립·지방재정 확충

    [서울신문 신년특집] 지방행정 NEW 스타트 - 인사원칙 정립·지방재정 확충

    민선 5기 지자체가 출범한 지도 6개월이 지났다. 주민과의 소통, 복지 확충 등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정실인사, 재정낭비, 무모한 지역개발 등 구태도 여전하다. 지방의회 역시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새해 주민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지방행정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6·2 지방선거를 마친 지방자치단체는 ‘코드인사’ 태풍에 휘청거렸다. 이는 지방자치단체 권력이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코드인사’ 판쳐 갈등·대립 악순환 특히 한나당 소속 단체장이 장기간 집권하다 민주당이나 야당 소속의 단체장으로 바뀐 지역은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진행됐다. 민선 5기에 이르기까지 여야가 역할을 바꿔가며 수행한 지방자치는 화합보다는 갈등이, 상생보다는 대립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중앙집권체제가 뿌리 깊은 탓도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단체장에 의해 이처럼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물갈이 인사가 근본 원인이다. 올해도 역시 보은, 지연·학연 등 코드인사가 판쳤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종민씨를 정무부지사로 앉혔다. 김 부지사는 안 지사와 학생운동을 같이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이다. 또 조승래(전 청와대 비서관) 비서실장과 오인환(전 청와대 행정관) 비서관의 인사도 말이 많았다. 공교롭게도 안 지사와 이들 모두 고향이 논산이다. 그래서 ‘논산 권력시대’란 우스갯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우근민 제주지사는 자신의 선거캠프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김부일씨를 환경부지사에, 김병립씨를 제주시장에, 대변인을 맡았던 고창후 변호사를 서귀포시장에 임명해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송영길 인천시장도 신동근 지방선거 후보시절 비서실장을 정무부시장에 임명했다. 공보관(4급)직을 개방형 대변인제도로 바꾸고 인수위 시절 대변인을 지낸 윤석관씨를 발탁하기도 했다. 이시종 충북지사는 최측근인 백상진씨를 대외협력보좌관으로, 선거캠프에서 공약개발을 담당했던 김문종씨를 정책보좌관으로 앉혔다. ●서울 선거후 과장 40여명 자리 이동 서울 25개 자치구에도 인사태풍이 불었다. 구청 보직의 꽃인 과장(5급·사무관) 자리는 보통 50여개. 선거 이후 대부분 자치구에서 40명 이상 과장들의 자리가 바뀌었다. 지난해 8월 이재동 안양시 부시장은 최대호 신임 시장의 코드인사를 비판하다 남양주시로 자리를 옮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권영주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는 “일부 단체장의 인사권 남용은 공직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직원들의 사기 저하로 이어져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한 뒤 “소속 정당이나 자신의 철학을 떠나 합리적 잣대로 기존의 사업이나 직원들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 잣대로 사업·직원 평가해야” 권 교수는 그 예로 단체장의 인사권을 줄이고 독립기구인 인사위원회 설치를 들었다. 또 “고위직은 단체장이, 하위직은 인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권력분산적 인사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제왕적 인사권에 공무원들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곳간 넘치는 지자체 수익성 꼼꼼히 따져 공격적 경영 해마다 수십억원 매출·세수 증대 자린고비 재정 운영이나 공격적 경영사업으로 재정 확충에 성공한 자치단체도 적지 않다. 많은 지자체가 재정난으로 신음하고 있지만 이들은 행정운영의 묘미를 살려 위기를 이겨내고 있다. 충남 보령시는 ‘머드 화장품’ 장사로 돈을 버는 자치단체로 명성이 자자하다. 2009년 매출액 28억원에 순수익으로 5억여원을 벌어들였다. 대천해수욕장 인근 갯벌에 널려 있는 바다진흙을 채취해 아모레퍼시픽과 한국콜마 등 4개사에 제조를 의뢰, 비누와 샴푸 등 50종의 머드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판매망이 150곳에 이른다. 1996년부터 생산하고 있지만 국내 유일의 머드 화장품으로 여전히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일본, 베트남, 미국 등 6개국에 수출까지 한다. 울산 중구는 ‘노점상 실명제’로 재정을 확충하고 있다. 재래시장 시설 현대화를 통한 지역상권 활성화, 노점 임대·매매 금지를 통한 저소득층 보호, 도로점용료 부과 등 다양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 2003년 이 제도를 도입해 현재까지 모두 21억 8000만원의 세수증대 성과를 거뒀다. 알짜 경영의 대표는 강원 삼척시다. 강원 18개 시·군 평균 채무액은 418억원에 이르지만 삼척시는 6.9% 수준인 29억원에 불과하다. 1인당 채무도 강원지역 평균 49만 7000원의 8% 수준인 4만원에 그치고 있다. 시는 2002년 루사, 2003년 매미 등 연달아 사상 최악의 태풍 피해를 겪었지만 다른 자치단체와 달리 지방채를 거의 발행하지 않았다. 수해복구 공사비 20억원, 상수도 사업비 16억원을 발행한 것이 전부다. 대신 민자유치에 적극 나섰다. 예산 한푼 안 들어가는 LNG생산기지(가스공사), 종합발전단지(남부발전), 환선굴모노레일사업을 유치했다. 해양레일바이크는 수익성을 꼼꼼히 따져 직접 투자했다. 시비 340억원을 투입했지만 개장 한달도 안 된 현재 3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2009년에는 정부의 긴축재정으로 지방교부세가 150억원이 줄어 충격이 컸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며 극복했다. 홍금화 홍보계장은 “지방채 발행 등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다른 자치단체와 달리 우리는 빚을 내지 않아 살림살이 걱정이 덜하다.”고 말했다. 원구환 한남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역별로 세원이 다르고, 특히 농어촌 자치단체는 고령화, 인구감소로 지방재정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면서 “민간 경제를 침해하지 않고 공공성과 수익성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경영사업이라면 자치단체가 적극 나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국종합·이천열기자 sky@seoul.co.kr ●곳간 거덜난 지자체 열악한 재정에 대형사업 등 남발 대전 동구선 직원 월급도 못 줄판 ‘모라토리엄 선언, 공무원 월급도 못 줄 판….’ 민선5기 지자체 출범 이후 전례 없는 표현들이 난무하며 지방재정난이 유난히 문제가 됐다. 재정자립도가 30%도 안 되는 곳이 전국 246곳 중 152곳에 이를 정도로 자치단체 재정난이 심각하자 자자체의 태도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방재정 파탄을 막을 예방책 수립보다 교부금에 목숨을 거는가 하면 해당 자치단체 공무원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까지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단체장의 자질을 되새기게 하는 계기도 됐다. 판교신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빌려 쓴 돈 5200억원을 단기간에 LH와 국토해양부 등에 갚을 수 없어 지급을 유예하겠다는 것이다. 성남시는 전임 집행부가 대표적 ‘호화 논란’을 불러온 신청사 건립과 공원로 확장공사 등 불요불급한 사업에 거액을 무리하게 전출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 모라토리엄 선언은 올해 무상급식비 100억원을 감축하는 등 복지시책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경기 31개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재정자립도가 상위권인 성남과 달리 대전 동구는 실제 재정상태가 열악하지만 단체장이나 공무원들의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동구는 무리하게 신청사를 건립하다 돈이 달려 지난해 6월 공사를 중단했고, 열악한 재정에도 대전시나 시교육청이 해야 할 동구국제화센터, 대전문학관 등 대형 사업을 남발하다 재정파탄 위기에 몰렸다. 동구는 지난해 7월 한현택 신임 구청장이 취임한 뒤 소식지 발행 중단, 청내 정수기·커피자판기 가동 제한 등 ‘마른 행주짜기 행정’을 펼치고 있다고 했지만 연말 한달치 직원 월급도 못줄 지경에 처했었다. 또 대전시가 반환금을 유예해 월급 문제가 해결됐지만 동구 직원들이 출장비를 허위로 타냈다가 무더기로 적발돼 허탈케 했다. 지방재정난은 구조적인 것뿐 아니라 운영하는 직원에게도 문제가 많고 재정난을 하소연하는 것도 일정 부분 거짓이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최진혁 충남대 자치행정학과 교수는 “자치단체는 구조적으로 재원이 취약하고 재정운영 면에서도 문제가 있다. 교부금 등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자체 재원을 발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면서 “정부도 건전재정 지표와 독립된 지역회계심의원을 만들어 자치단체의 재정운용을 돕고 경고와 페널티로 적절히 관리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종합·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박해진 경기신보 이사장 4연임

    박해진 경기신보 이사장 4연임

    박해진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이 4번째 연임됐다. 김문수 지사는 30일 경기신보 제9대 이사장에 박해진 현 이사장을 재임명하고, 임명장을 주었다. 박 이사장은 새해 1월 1일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2년간 이사장직을 수행하게 됐다. 도 산하 기관장의 4회 연임은 처음이다. 농협대 총장 등을 역임하며 농협중앙회에서 30여년간 근무한 박 이사장은 손학규 전 지사 시절인 2005년 1월 1일 경기신보 이사장에 처음으로 임명됐다. 박 이사장은 경제위기 중에 노점상과 포장마차, 개인택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등에 대한 적극적인 자금 지원으로 지역 내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지난해 21개 산하기관 및 기관장 경영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S등급을 받기도 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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